9. 2003년 5월. 장인환(張仁歡)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마지막으로 느꼈던 게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아가 송두리째 흔들리며 순간 땅속 깊이 꺼지고 싶은 기분이 되었던 적이.
현관문을 열고 어딘가 낯이 익은 장신의 사내가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리고 사내의 아름다운 눈이 단숨에 인환의 시선을 잡아챘을 때, 인환은 순간 아득히 잊혔던 섬세한 감정의 흔들림에 전율했다.
크림베이지의 슈트에 살구색 드레스셔츠, 주홍과 검정이 섞인 리버티 프린트(잔잔한 꽃무늬를 사용한 디자인 패턴)의 넥타이가 사내의 아름답고 늠름한 몸을 세련되게 감싸고 있었다. 움직임은 담담하지만 절도가 있고, 빈틈이 없어 보였다.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지만) 꽤 오랫동안 무도로 육체를 단련한 자만이 내보일 수 있는 단아하고 절제된 움직임이었다.
목을 약간 덮을 정도의 새까만 머리카락은 아우터로 살짝 웨이브가 진 채 사내의 도회적인 매력을 돋보이게끔 했다. 희고 맑은 피부며, 굵은 쌍꺼풀이 진 시원시원한 눈매며, 적당히 도톰하고 이지적인 입술 선까지, 얼굴도 드물게 눈을 끄는 미남이어서 인환은 새삼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에 대해(정확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사내가 품고 있는 호의와 교감만으로 사내의 외양에까지 매혹을 느끼는 자신의 속물근성이 한편 기가 막혔지만, 자연스레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단 두 번의 만남일 뿐이었고, 막상 사내가 나타나고서야 비로소 사내의 존재를 기억에 떠올린 자신이었지만, 막혔던 둑이 터지듯 사내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 기묘한 열기를 뭐라 설명해야 할지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알리고 싶지 않아…….
무심코 뇌까리는 자신이 있었다.
―이 사람에게만은 죽어도 알리고 싶지 않아…….
무얼 알리고 싶지 않은 건지도 잘 모르겠다. 기억의 갈피 속에 깊숙이 파묻혀 있던 사내와의 몇 시간을 되새김질하듯 반추하며 당장 어딘가로 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늘로 치솟든지, 아니면 땅속으로 꺼지든지 그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파도에 출렁이듯 심장이 뛰었다. 그 사람이었다. 낭떠러지 끝에 매달려 신음하던 자신에게 문득 구원처럼 손을 내밀어준 사람……. 살아도 좋다고, 그림을 그리면 된다고 예스(yes)를 말해준 고마운 사람……. 젊고 야심 찬 큐레이터, 김강원이었다!
“……밤늦게 실례합니다.”
엑스레이 사진마냥 예리한 시선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인환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쾌활한 웃음기가 묻어나는 인사였지만 사내의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한참 동안 빨아들일 것처럼 인환을 응시하던 사내의 시선이 비로소 인환의 옆에 서 있던 그에게로 이동했다.
“……장 선생님과 단둘이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의향을 묻는다기보다 선전 포고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해서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저 조용히 불청객을 주시할 뿐 그의 얼굴에 특별히 불쾌한 기색은 떠오르지 않았다.
“……왜 그래야 하지? 내게도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한꺼번에 하면 좋지 않은가. 시간도 늦었고.”
“당장 당신에게서 들을 얘긴 없어. 장 선생님의 대답 여하에 따라 당신에게서 들을지 말지를 결정하겠소.”
그가 하대를 하자 사내 역시 단숨에 말을 낮췄다.
“……무례하군. 여긴 내 집이다.”
“그렇다면 장 선생님을 모시고 나가도 상관없나?”
“……그건 곤란하지. 자넬 몰아내고 한시라도 빨리 안을 생각이니까.”
“…….”
수치심 따위 남아 있을 까닭이 없다. 수치심은 자신에 대한 존엄성의 표현이다. 이미 오래전에 존엄성을 상실한 인간이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그러므로 몹시 뻔뻔스럽고도 주제넘은 일이 될 것이다.
팽팽하게 날을 세우고 서로를 탐색 중인 두 남자들의 가운데에 낀 채 인환은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어딘가 놀리는 듯한 어조의 그는 여전히 생각을 읽을 수가 없고, 잔뜩 감정을 죽이고 있는 듯한 김강원도 속내를 알 수 없긴 한가지였다.
“……잠깐…… 아…… 아틀리에에서 얘기하면 안 될까? 김 선생도 바쁘실 테고…….”
별로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여봐란 듯이 허리에 팔을 감아오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부탁을 해보는 것만도 인환에게 있어선 좀처럼 내기 힘든 용기였으니까.
서로를 향해 있던 두 남자의 시선이 일제히 인환에게 떨어졌다. 김강원은 무언가 아득한 표정이었고, 그는 여전히 고요했다.
“……30분 드리겠습니다. 30분 안에 끝내주세요.”
한동안 빤히 인환을 굽어보고 있던 그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허리에 감겼던 팔이 풀어지며 그가 거실 가운데로 걸어갔다. 자신의 주제넘은 개입이 받아들여지리라고는 감히 생각 못 했기에 인환은 한동안 넋을 잃은 채 그의 뒷모습만을 좇았다.
스피커에서 요란스러운 소음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금 DVD를 튼 때문이었다. 별로 영화에 몰입하는 것 같지 않다고 느꼈던 것은 자신만의 착각인가 보았다. 소파에 몸을 묻은 채 화면으로 보내지는 그의 시선엔 더 이상의 움직임이 없었다.
“……장 선생님?”
부드러운 바리톤이 조용히 인환을 일깨웠다.
팔꿈치에 사내의 단단한 손가락 감촉을 느끼고 인환은 문득 몸을 긴장시켰다.
낯설기는커녕 너무나 친밀한 감각이었기에 그런 자신의 감정에 소스라친 때문이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사내의 핸섬한 얼굴을 올려다보니 사내가 빙그레 웃음을 터트린다.
두근…….
아아, 또 놀랐다…….
굵은 쌍꺼풀이 진 눈이 활처럼 휘며 놀라울 정도로 매혹적인 얼굴이 되었다. 왼쪽 입꼬리 너머 움푹 패는 보조개까지, 굉장한 미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여자들과 남자들을 홀렸을 법한.
“……아틀리에는 어디로 가면 됩니까? 진심으로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음악 같은 울림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덧붙이자 인환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사내로부터 몇 발짝 물러섰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넋을 잃고 젊은 남자를 주시하다니 아저씨 주제에 주책이지 않은가. 게다가 게이인 자신이니 아무리 사심이 없다곤 해도 충분히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다. 목덜미 아래쪽으로부터 뜨뜻한 기운이 스멀스멀 퍼져 올라왔다.
“……2층…… 입니다. 이…… 이쪽으로…….”
어눌하게 말끝을 흐리며 계단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재빨리 곁으로 따라붙은 사내는 상대적으로 느린 인환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내의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느껴지는 젠틀한 배려에 또 한 번 투닥투닥 가슴이 뛰었다.
이건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사내가 고맙고 또 고맙지만 사내에 대해 과도한 호의는 금물이었다. 평론가와 유착된 작가처럼 꼴불견은 없다. 그건 큐레이터라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딱히 큐레이터와 평론가를 구분 지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설령 유달리 서로의 감성이 맞아떨어지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럴수록 거리를 두고 서로를 견제해야만 하는 것이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다. 보이지 않는 긴장으로 점철된 드라마틱한 도전과 응수야말로 서로의 예술 세계를 살아 숨 쉬게끔 하는 밑거름이었다.
뭐, 별로 작가적 야심이라곤 없는 자신이기에 ‘진보’라거나 ‘도전’ 같은 구심점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지만, 아마도 사내는 다를 것이다. 젊은 만큼, 집요하고 투철한 탐구 정신으로 스스로의 완전성과 독창성을 한계까지 추구해갈 터이다. 거기에 작가로서의 에너지를 보태주진 못할망정 구질구질하게 자신의 불완전함을 떠넘겨서야 될 말인가.
“……저건……! 아…… 새로 완성하신 작품이군요……!”
아틀리에의 불을 켜자 무심코 인환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사내의 입에서 신음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사내의 시선은 어느새 이젤 위에 걸린 ‘크림옐로’와 바로 옆 선반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푸른 방’의 캔버스를 향해 있었다.
인환을 지나쳐 서둘러 캔버스 앞으로 다가간 사내는 다소 상기된 안색으로 한동안 뚫어져라 두 개의 캔버스만을 굽어보고 있었다.
분명한 호감이 틀림없을 사내의 반응에 손가락 끝까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진지하고 깊은 눈이 화면의 구석구석을 훑을 때마다, 마치 사내 앞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지독하게 수치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한편 가슴 떨리는 만족감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사내는 분명 감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동을 이끌어낸 것이 바로 자신의 그림이라는 사실이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인환을 기쁘게 했다. 이미 오래전에 잊힌 화가로서의 자존심이라거나 치기를 건드리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순수한 교감이 가져다주는 기쁨이었다.
“……200호짜리는 처음이로군요. 역시 예상한 대로입니다. 크기가 좀 더 상승 효과를 주고 있어요. 설치와 결합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신다면 틀림없이 굉장할 겁니다…….”
거의 혼잣말을 하듯 200호의 ‘크림옐로’를 굽어보며 사내가 신음했다.
“……설치…… 라면……?”
“……크기는 500호 정도가 주류를 이루게 하고…… 아, 물론 더 크면 좋겠지만 그럴 경우 마땅한 장소가 없다는 게 문제죠. 그만한 크기의 전시 공간을 확보하자면 물주들과 만만치 않은 신경전을 벌여야 할 테니까요. 아무튼, 평면적인 전시가 아니라 3차원의 전시 공간 자체를 하나의 확대된 캔버스로 만드는 것이지요.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구성한다면 틀림없이 굉장할 거라고……. 가령 캔버스를 하나의 소우주적인 텍스트라고 한다면 엔터테인먼트적인 ‘소리’와, 작가의 작업 과정이거나…… 음, 이렇게 하자면 영상 작업도 필요하겠군요…… 아무튼 작업 과정에 소용이 되는 물건들의 모음인 ‘이미지’들을 결합시켜 더 큰 텍스트인 ‘공간’으로서의 캔버스, 즉 전시 공간 자체가 하나의 대우주이자, 거대 텍스트인 ‘캔버스’로 다시금 환원되는 구조죠…… 이해가 가십니까?”
사내의 시선은 어느덧 캔버스를 벗어나 인환을 향해 있었다. 얼굴은 상기되어 있고, 시원시원하고 큼직한 눈매는 불가사의한 열기로 가득했다. 빠르고 단호한 어조로 연거푸 내뱉어지는 말에선 얼핏 독선적이라고까지 생각이 들 정도로 인환을 끌어들이려는 엄청난 자장이 느껴졌다.
“……글쎄…… 설치 개념 자체가 3차원의 캔버스 아닙니까? 새삼 그것에 제 그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아무튼 설치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요…….”
“무슨 말씀을! 선생님의 작품은 3차원의 시공을 초월하는걸요!”
사내가 또다시 환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두근…….
아아, 정말 위험한 남자다……. 예의 살인적인 미소에 곤란해진 나머지 인환은 사내로부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선생님은 방(공간)을 만들어내지만 거기에 진짜 방(공간)은 존재하지 않지요. 그 방은 개념도, 의미도, 하다못해 자아조차도 지워버립니다. 안쪽 깊숙이 빨아들이려는 굉장한 흡인력을 갖고 있지만 실은 아주 공(空)하지요. 선생님은 참선의 경험을 갖고 계십니까?”
바로 코앞으로 다가든 사내한테서 애프터셰이브의 스킨 냄새에 뒤섞인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났다. 아름다운 눈매가 뚫어질 듯 내려다보고 있어 묘한 초조감을 느끼게 했다. 마치 밀어를 속삭이듯 낮고 달콤하게 내뱉어지는 사내의 목소리도 곤란한 기분을 주긴 한가지였다.
“……아뇨…… 불교 신자도 아닌데다…… 저는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 무엇보다,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는 관심이 없지요. 작업을 하면서, 제가 본 공간과 실제 대상으로서의 캔버스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만 집중하는 편입니다…….”
“……예…….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자아 중심적인 사고가 개입하고, 자아가 드러나는 즉시 ‘방’은 사라집니다. 선생님의 ‘방’은 자기를 지운 자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방이죠. 선(禪)이 추구하는 경지와 유사하지만 디테일한 양상도, 따라서 결과물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전 선생님 쪽이 더 마음에 듭니다. 선생님의 그건 ‘기대 없는 낙원’입니다…….”
사내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정열을 담고 있는 쏘는 듯한 눈동자가 주술을 걸듯 인환의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말로 곤란해져서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불안한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손을 뻗어 조금 비틀거리는 인환의 양팔을 감싸 쥐기까지 했다. 팔 안쪽 예민한 부분에 사내의 단단한 악력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곳으로…… 나도 들어가보고 싶었습니다…… 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은 했었지만…… 당신이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결코 실감하지 못했겠죠…… 그저 허황한 망상이라 여기고……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나도…… 들어가고 싶어요…… 그곳…… 당신의…… 당신의 거기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 짐작조차도 할 수가 없었지만 사내가 연출하고 있는 긴장감으로 호흡조차도 버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만 좀 쳐다보았으면 하고 막연히 비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정말로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키스 당할지도 모른다는 숨 막히는 예감에 인환은 온통 새빨갛게 돼서 전율했다! 맙소사, 정말로 자신은 미쳤나 보았다!
저도 모르게 사내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무언가 발에 걸렸다. 불운의 신이 따르는 건지 인환의 섣부른 시도는 도리어 역효과만 부른 것 같았다.
“……조심……!”
“……아…….”
크게 허우적거리는 몸을 향해 사내의 두 팔이 재빨리 뻗어왔고, 인환은 단숨에 사내의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었다. 휘청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느라 한동안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결사적으로 사내의 재킷을 움켜쥐고 미끄러지려는 몸을 추슬렀다.
처음 든 자각은, 인환의 허리와 등을 단단히 휘어감은 사내의 팔이었다. 담배 냄새와 스킨 냄새가 뒤섞인 사내의 강렬한 체취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가득 파고들었다. 옷감 아래, 탄탄하게 물결치는 사내의 가슴 근육과 허벅지 근육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내가 내뿜는 빠른 숨결이 목덜미 근처에서 화끈거렸다.
단숨에 전신으로 붉은 홍조가 퍼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오해일 게 뻔한 상황에 말도 못 하게 당황하는 자신도 기가 막혔고, 팔을 풀고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포옹을 깊게 하는 사내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그…… 저…… 이…… 이것…….”
“……찾아내는 데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웅얼거림이 귓가를 배회하고 있었다.
“……?”
“……담배도…… 거의 끊기 직전이었는데 참지 못하고 다시 손대고 말았어요. 그 후론 내내 줄담배입니다…….”
“……아…… 저기, 그게 무슨…….”
무서워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봐도 사내의 철통같은 포옹은 환각이 아니었다. 자신만의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사내에게서 어떤 의도가 읽히자마자 온몸의 피가 사늘하게 식었다. 심장은 이번엔 다른 이유로 쿵쿵대며 고동을 빨리했다. 손끝에서 시작된 미세한 떨림이 차츰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꽤 정신을 수습하신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긴 합니다만…… 몹시 울화통이 터지기도 합니다…… 저 남자는…….”
“…….”
“……아니, 아무튼 강제로 끌려오신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물론 제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
후들거리는 떨림이 사내에게도 전달된 모양이었다. 문득 긴장으로 굳어지는 사내의 몸이 느껴졌다.
포옹이 풀렸다.
살피는 듯한 눈이 백짓장처럼 하얘진 인환의 얼굴을 굽어보고 있었다. 사내의 두 팔은 여전히 인환의 허리춤을 틀어쥔 채였다. 찰나의 순간, 얽혀든 시선 속에서 자신의 긴장이나 당혹감을 사내가 읽었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었다. 무섭도록 진지한 표정이 사라지며 다시금 화사한 살인미소가 사내의 얼굴에 퍼졌다.
―어라……?
활처럼 휘는 눈매며, 깊게 패는 한쪽 보조개에 멍하니 시선을 주고 있는 사이, 품고 있던 의심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너무나 급변한 사내의 분위기에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긴장하고 경계했던 자신이 무색할 지경으로, 담백하고 젠틀한 아우라가 사내의 표정이며 몸짓에서 여실히 느껴졌다. 여우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역시 착각이었나……?
“……개인전 부탁을 드리려고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도 좀처럼 옮기신 거처를 알 수가 없더군요. 서 실장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만 하고…….”
허리에 감겼던 사내의 두 팔도 슬며시 떨어져 나갔다. 담담하게 덧붙이는 어조에서 큐레이터로서의 관심과 안타까움 이상을 읽기는 힘들었다.
하긴 사내는 게이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했었다. 설령 게이라고 할지라도 나이가 들고 추해진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낄 리는 없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사내의 나이는 고작해야 2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더구나, 추문을 뿌리고 화랑가를 떠난 저간의 사정은 물론, 고작 두 번째 만남에서 볼 꼴 안 볼 꼴 다 드러내 보인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을 사내가 유혹하려 드는 것 같다니, 정말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땅을 치고 웃을 일이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새삼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벽에 머리라도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찾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내의 눈을 마주할 용기라곤 도무지 나지 않아, 바닥으로 시선을 둔 채 간신히 대꾸했다. 시뻘겋게 붉어진 얼굴을 보고 사내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만을 필사적으로 빌었다.
“……아직도 개인전에는 관심이 없으신 겁니까?”
“…….”
“……장 선생님…….”
“…….”
“……저는 정말 선생님의 작품이 좋습니다.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
“……별로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건 이해합니다만…… 제 부탁이 곤란하십니까……?”
아아, 곤란하지, 물론……. 부탁 자체가 아니라 사내의 달콤한 어조가 곤란하기 짝이 없다. 기왕의 착각만으로 이미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데, 마치 애정을 구걸하는 듯한 노곤하고 섹시한 음색의 바리톤 때문에 민망하고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째서 자꾸만 그런 쪽으로 연상이 되는 건지, 정말 자신의 머리를 해부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니…… 저로서도 무척 고맙고…… 기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별로 크게 벌일 재주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져주시고 부탁을 하시는데 그저 송구할 노릇이지요. 다만…….”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다만……?”
“……그가 허락을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
“……그…… 저…… 아래층의…….”
관계를 지칭할 마땅한 단어가 없어 저절로 말끝이 흐려졌다. 친구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고, 당연히 연인도 아니다. 죄 갚음을 위한 ‘성노예’라는 게 가장 적절하겠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사내는 틀림없이 기가 막혀 웃을 것이다.
“……왜 이사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요? 작품에 대해서까지 그 사람이 간섭을 하는 겁니까?”
사내의 어조가 어딘가 싸늘해졌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얼마 전에 그 사람이 장 선생님의 작품들을 보여주더군요. 훔친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이라면 작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은 선생님이십니다.”
“…….”
“……과거의 악연을 빌미로 선생님을 협박하는 것은 아닌가요?”
두근…….
“……그것이야말로 치졸하고 비열한 짓입니다. 정말 협박받고 계신가요?”
두근…… 두근…… 두근…….
“여긴 자의로 들어오신 겁니까?”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거나 혹은 무례한 참견이 아니냐며 사내를 닦아세울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저 사내가 ‘알고 있다’는 현실만이 온 넋을 까마득하게 했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 그래, 사내도 알고 있다. 하긴, 미술계에 어느 정도 적을 두고 있는 자라면 누군들 모르겠는가. 사랑에 미쳐서 바닥까지 스스로를 떠민 자신을. 떨어지고 떨어진 나머지 왕창 부서져버린 어느 풋내기 화가의 우스꽝스러운 스캔들을…….
“……그때 일…… 저 사람이라는 거 아시는군요…….”
……별로 새삼 수치심을 느낄 필요는 없다…….
“……떨지 마세요…… 선생님을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래. 수치심은 자신에 대한 존엄성의 표현이다. 이미 오래전에 존엄성을 상실한 인간이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그러므로 몹시 뻔뻔스럽고도 주제넘은 일이 될 것이다.
“……울지 마세요…… 장 선생님…… 선생님……?”
사내가 아무리 자신의 작품 세계를 좋아해준다고 해도…… 아무리 사내와 공명한다고 해도 사내와 자신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어디…… 까지…… 알아요……? 전부 알아요……?”
……사내는 젊고…… 실패도 모르며…… 추하디추한 나락을 모른다…… 더러운 죄악으로 스스로의 영혼에 낙인을 찍는 일의 끔찍스러움을…… 타인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의 전율스러운 공포를…… 혼돈을…… 지옥을…… 심연을 모른다…… 그러니 좋다고 하는 거겠지…… 나 따위…… 내가 만들어내는 ‘방’ 따위…… 근사하다고 말해줄 수 있는 거겠지…… 아마도 그래서…… 그래서…….
“……장 선생님…….”
“……나는 끔찍한 인간입니다…….”
“…….”
“……당신이 보고 있는 ‘공간’은 그저 죄인이 꾸는 백일몽에 불과한지도 몰라요…….”
“…….”
“……위선자가 들이미는 추악한 수음 행위요…….”
“…….”
“……그래서 개인전은 하지 않습니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안 해요…….”
사내의 팔이 뻗어왔다. 짜부라트릴 것처럼 상반신을 안아왔지만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순간일지언정 사내에게 좋게 보이고픈 욕구를 품었다는 게 기가 막혔다. 주제도 모르는 뻔뻔스러운 허영심에 이가 갈렸다. 시궁창이었다.
“……상관없어…….”
신음처럼 중얼거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거칠다.
사내의 커다란 손바닥이 인환의 머리를 품에 처박기라도 할 기세로 정신없이 쓸고 있었다. 정수리 위로 문질러지는 사내의 얼굴이 느껴진다. 턱 끝이며 뺨에 돋은 수염이 아팠다. 부러트릴 것처럼 허리를 조여대는 팔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근육의 움직임들도…… 모두 날카로운 촉수처럼 인환의 전신을 아프게 찔렀다.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 눈물 탓에, 얼굴 아래 눌린 사내의 고급스러운 슈트 재킷은 그림자처럼 얼룩이 들고 있었다.
“……죄인이 꾸는 백일몽이면 어떤가? 아름다운걸…… 내가 본 중 최고로 아름다운 백일몽인걸…….”
“…….”
“……그러니까 상관없어…… 상관 안 해…… 나는 내 눈만 믿습니다…… 아름다움엔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아…… 그저 아름다운 것으로 정당한 거요…… 그러니까…….”
“…….”
“……울지 마요…… 계속 그려요…… 그냥 그리기만 해요…… 판단은 내가 받겠소…… 당신 대신 내가…… 내가 다 뒤집어쓸 거야…… 그러니까…….”
“…….”
“……울지 마요…… 제발 울지 마요…….”
“…….”
천사인가 보다…….
아아, 이 사내는 정말 천사인가 봐…….
사내의 품에 어린애처럼 안긴 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판단을 받겠다니, 대신 다 뒤집어쓰겠다니, 실패를 모르는 자 특유의 치기 어린 발언에 그저 코웃음을 치면서도 소녀 팬들의 아우성에 자지러지는 아이돌 가수처럼 감격하여 울었다. 안다. 사내는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는 사람이 괜찮다고 말을 해준다. 더럽혀지지 않았다. 사내는 순결했다. 눈처럼 하얀 사람이 정당하다고 말해준다. 죄인도 정당하다고, 죄인이 꾸는 꿈이 정당하다고 얘기한다. 그리라고, 계속 그리라고, 살아달라고 손을 내밀어준다.
사내는 새싹이었다. 모든 죄악을 무화시킬지도 모를 작고 여린 새싹의 위력. 마냥 위로요, 마냥 구원이고, 마냥 에너지인, 엄청난 생명을 속에 품고 있을지 모를 미미한 희망의 싹.
잡고 싶었다. 사내의 달콤한 바리톤이 예언하는 그대로, 그저 그리기만 하면 모든 속죄가 이루어지는 눈부신 기적을.
“……나와 갈래요……?”
포옹이 풀렸다.
사내의 두 손이 인환의 뺨을 움켜쥐며 시선을 맞춰왔다. 굵은 쌍꺼풀이 진 큼직하고 시원스러운 눈매가 홀리듯 인환의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여기가 싫으시면 말씀하세요. 그 사람은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
“……납치인가요?”
“…….”
“……그렇지요? 이건 장 선생님의 의사가 아닌 거지요?”
“…….”
“……가요…… 함께 갑시다…….”
“…….”
뺨을 어루만지고 있던 두 손이 천천히 떨어지더니 인환의 손을 쥐었다. 차갑게 식은 채로 조금씩 떨고 있던 그것은 사내의 따스한 온기에 소스라쳤다간 이내 몽롱해졌다.
사내의 두 눈은 여전히 홀리듯 인환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당연한 것만 같았다. 이대로 따스한 손에 이끌려 사내를 따라가는 것은. 너무나 기분 좋은 이 남자를 따라가서…… 마냥 그림만 그리면…… 아름다운 이 남자와…… 그림과…… 물감만 있으면…… 먼, 먼 초월의 세계가 홀연 펼쳐질 것만 같았다. 고통 대신에.
“……갈 수 없어요…….”
자신의 것 같지 않은 밉살스러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기가 막혔다. 너무나 황홀했던 사내의 최면이 단숨에 박살이 났다. 서걱서걱 파편 떨어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선뜩거렸다.
“……제 의사로 있는 겁니다. 그는 제 애인이에요…….”
절망처럼 덧붙였다. 눈물도 더 이상 흘릴 수가 없었다. 사내의 아름다운 눈매가 희미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문소리가 들렸다.
“30분이 지난 지 오래요. 그만 돌아가주시오, 김 선생.”
고요한 명령의 소리에 소스라쳐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사각의 방문 틀을 꽉 메울 듯 등지고 선 그가 보였다. 입고 있는 옅은 하늘색의 블루진은 오래 입은 듯 낡았고, 짙은 감색의 라코스테 티셔츠는 주름 한 점 없이 선명했다. 표정 없는 얼굴은, 인환의 손을 움켜쥔 채 마주 서 있던 장신의 사내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양쪽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편안한 자세가 오히려 몹시 위압적으로 보였다.
한동안 시선이 마주친 채로 긴장된 공기를 만들어내던 남자 둘이 비로소 휴전 협정에 사인하고 있었다. 그는 예의 바른 목례를 했고, 사내는 끈질기게 쥐고 있던 인환의 양손을 비로소 놓아주었다.
“……다음 주 중으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장 선생님 일로 여쭤볼 일이 있습니다만.”
“비서실에 얘기해두지요.”
“그럼, 밤늦게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사님.”
“…….”
“……일간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다시 인환에게로 떨어진 사내의 눈매가 활처럼 휘었다. 왼쪽 뺨 깊숙하게 패는 보조개까지 합쳐져 예의 감미롭고 유혹적인 파문을 인환의 가슴에 던졌다. 자신이 부숴버린 사내의 최면이 생각나 목이 메었다. 어깨를 굽힌 깍듯한 인사를 남기고 사내는 그를 스쳐 문밖으로 사라졌다.
계단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이어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얼마가 지나자 대문 소리도 아련히 들려왔다. 사내와 더불어 꿈처럼 몽롱했던 희망의 싹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뒷목을 핥는 선뜩한 감각에 문득 소스라쳤다.
“……그 남자와 무슨 얘길 했습니까?”
다가온 그가 뒤에서 키스하고 있었다.
“……별로…… 개인전 할 생각 없냐고…….”
셔츠를 비집고 들어온 손이 견갑골 근처를 어루만졌다.
“……그래서요? 뭐라고 대답했죠?”
뒷목덜미를 핥던 입술이 점점 앞으로 다가와 뺨을 깨물었다. 등줄기를 쓸던 손은 허리를 감고 곧바로 끌어당겼다. 등이 그의 상반신과 빈틈없이 밀착했다. 울퉁불퉁한 가슴 근육의 움직임과 따뜻한 체온이 생생했다. 잠들 때까지 또 한참을 시달리겠지. 터무니없게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냥…… 하면 하는 거고…… 별로 네가 그러고 싶지 않으면…… 나 드러나는 거 싫잖니, 너…….”
“……그렇군…… 보다시피 이런 관계니까…… 알려지면 또 수라장이 일겠지, 예전처럼.”
“……안 해…… 절대 그런 일 없게 하마…… 나 때문에 네게 피해가 가는 짓은 다신…….”
몸이 돌려세워지더니 더한 힘으로 끌어안겼다. 뺨과 턱 끝을 더듬던 입술이 어눌하게 눈치를 살피는 노예의 대꾸를 가로막았다.
“……냄새가 나.”
겨우 떨어진 입술 틈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서늘했다.
“……?”
“……그 남자의 냄새…… 스킨과 담배 냄새로군.”
두근…….
아랫배 위로 비벼지는 그의 남성이 점점 빳빳하게 굳어들고 있었다.
“……그자가 네게 손을 댔나?”
추궁한다기보다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여서 한순간 긴장했던 인환은 좀 머쓱해졌다. 얼굴 곳곳을 배회하며 쪼는 듯 입을 맞추고 있는 몸짓도 그저 다정하기만 했다.
“……그자가 키스했어?”
“……그…… 그건…….”
“이 몸엔 털끝만큼도 손대게 하지 마라.”
“……그…… 그런 사람 아니야……. 그 사람은 그저 내 작품에만…….”
“가벼운 키스도, 포옹도 안 돼. 손을 내주지도 마라, 오늘처럼.”
“…….”
“안 그러면 그자를 죽여버릴 테니까.”
두근…… 두근…… 두근…….
겹쳐든 입술 틈으로 밀려든 혀가 목젖 깊숙이 파고들었다. 상반신을 품고 있던 두 팔이 거대한 용수철처럼 아프게 죄어들고 있었다. 비로소 그의 절제된 분노가 읽혔다. 키스는 격렬했고 조용히 타고 있는 그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찢어발길 듯이 벗겨져 나가는 셔츠도, 아틀리에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지는 바지도, 낯선 남자의 체취를 품은 데 대한 그의 격분을 보여주었다. 바지 지퍼만을 내린 그가 흉기로 변한 페니스를 꺼내 들었다.
“……목을 감아.”
다리가 벌어진 채 전신이 들렸다. 엉덩이를 받쳐 든 그가 단숨에 밀고 들어왔다.
“……흐…… 아앗!!!”
숨을 틀어막는 격통이 전신으로 치달았다. 침실로 데려가달라는 부탁의 말은 그대로 목 안에서 삼켜졌다.
한 번, 두 번, 억제된 삽입으로 사정을 살피던 흉기가 이윽고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찔러대기 시작했다. 자신의 체중이 통째로 실린 터라 찌르고 들 때마다 맞물린 음경은 한계까지 삼켜졌다. 콱, 콱, 콱, 전신이 구둣발로 짓밟히는 악몽이었다. 딱 벌어진 입에선 신음조차 제대로 흘릴 수 없었다. 그저 팔로 목을 감고, 다리로 상반신을 휘어감아 그에게 매달리는 게 고작이었다. 바닷가 절벽 위의 게딱지처럼 필사적이었다.
“……그림이든 낙서든 마음대로 들쑤시라고 해…….”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예술이고 나발이고…… 계집애들처럼 맞대고 마음껏 시시덕거리시지, 둘이서…….”
“……흑……!”
“……하지만 거기까지야…….”
“……우…… 흐극……!”
“……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간…… 대게 했다간 가만 안 둔다…….”
“……아아……! 그만…….”
“……부서트릴 거다, 그 자식…….”
“……아아악!!!”
먹통 같은 어둠이 사방에 가득했다.
사내를 따라 나서지 못한 스스로를, 인환은 두고두고 저주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