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2003년 6월. 장인환(張仁歡) (35/129)

11. 2003년 6월. 장인환(張仁歡)

“……전시가 개방되기 전에 아무래도 한번은 가봐야 할 것 같아서…… 김 선생도 그러길 바라고…….” 

“…….”

“……도와주는 사람들한테 인사도 해야 하고…….”

“…….”

“……전시장을 둘러보고 저녁만 함께 먹곤 들어올 거니까 어떻게 안 될까?”

“…….”

개인전에 대해서 별로 좋은 감정이 없는 것 같은 그에게 그 문제로 외출 허락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개인전을 허락하긴 했지만 그는 인환이 세간에 노출되는 것을 지독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과거의 수라장을 생각하면 그로선 당연한 거부 반응이었기 때문에 인환으로서도 최대한 언론에 노출을 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고 김강원의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과 완전히 유리된 채 그림만 그려서는 전시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아무리 김강원이 자신의 생각을 속속들이 읽고 있다고 해도 개인전은 김강원이 아닌 자신의 것이었다. 큐레이터가 어떤 접근 방법으로 자신의 작품들을 요리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뿐더러, 만약 그것이 자신의 색채에서 많이 벗어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딴지를 거는 것 또한 작가의 의무였다. 어차피 큰 기대를 하고 있지도 않지만, 작가로서 최소한의 의무는 지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해서, 모처럼 벼르던 외출을 위해 조심스레 말을 꺼내보았지만 그는 묵묵히 식사에 열중할 뿐 대꾸를 미루고 있었다. 뭐, 개인전 건이 아니라도 내일은 반드시 외출해야만 할 일이 따로 있기도 했다. 설령 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더라도, 인환은 내일에 한에서만큼은 몰래라도 나갈 요량이었다.

“……꼭 작가가 확인을 해야 하는 겁니까? 큐레이터가 제대로 진행만 하는 것이라면요. 어차피 완성된 작품만 전시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기다리고 있자니 그가 마지못한 듯 되물어왔다.

“……그…… 렇기는 하지……. 하지만 아무래도…….”

“말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녀오고 싶으면 다녀오세요. 당신을 집에만 가둬둘 생각은 없으니까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릴 하시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비아냥거리고 있다. 고작해야 그림 재료를 사러 나가거나, 딱 한 번 원미동 카센터로 인사차 나갔다 들어온 외엔 외출다운 외출은 통 못 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외출하고 들어온 날이면 잔뜩 얼굴이 구겨져서 더욱 살벌해지는 그가 아닌가. 혹시라도 사람들 눈에 띄어 그의 얼굴에 먹칠이라도 하게 될까 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리라. 이해도 가고, 자신 역시 그런 결과는 극구 두려워하고 있기에, 대부분의 나날들을 죽은 듯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래. 고맙다…….”

집에만 가둬둘 생각이 없다는 말속에 숨은 정반대의 뜻을 모르는 체하며 인환은 애매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전시회 후원금을 내준 것도 고마워. 김 선생이 전해주더구나…….”

이건 진짜로 고맙다. 갑작스러운 진행에 재정적으로 많은 무리가 따르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김강원을 통해 경비 얘기를 들었을 때는 많이 놀랐다. 당연한 것처럼 그가 모든 비용을 지불했다는 얘기는 더한 충격이었지만.

“……그림이 팔리면 도로 회수될 돈입니다.”

쌀쌀맞은 일침.

줄곧 피하고 있던 시선을 들어 그를 본다. 표정은 언제나처럼 서늘하고 밥을 먹는 모습 또한 언제나처럼 우울하다.

암청색 팬츠에 새파란 바닷빛 드레스셔츠를 받쳐 입은 전형적인 비즈니스맨의 옷차림. 여름으로 접어들었지만 더위를 꽤 타는 그답지 않게 여전히 긴팔 셔츠를 고집하고 있다.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어붙여져 있어 젓가락질을 할 때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팔 근육이 고스란히 보인다. 셔츠 깃을 감싸고 있는 것은 은색 도트 무늬가 들어간 감색 실크 넥타이로, 느슨하게 풀려 있다. 9시가 넘은 늦은 퇴근에 늦은 저녁 식사라 미처 옷을 갈아입을 틈이 없었던 탓이다. 저녁을 굶고 기다리는 인환을 생각해 그는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항상 샤워보다 식사를 먼저 하곤 했다(반드시 함께 식사하기를 고집하는 그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 번은 먼저 먹었다가 그의 살벌한 경고를 들어야만 했다).

일이 바빠진 탓인지 그는 요즘 거의 9시가 넘어서 퇴근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저녁 식사 전의 과격한 섹스 플레이에 시달릴 일이 줄어들어 그럭저럭 한숨 돌리고는 있었지만, 물론 기쁜 내색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잘 안 팔릴 수도 있는걸……. 아니, 실은 거의 대개는 안 팔리지. 손해 보는 장사네…….”

“……나는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습니다.”

완곡한 칭찬의 말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믿고 있는 걸까? 설마. 발톱의 때만큼도 관심이 없을 남자가…….

“……샤워하겠습니다.”

수북하게 퍼 담은 밥 한 공기를 말끔히 비운 그가 먼저 식탁에서 일어났다. 수저를 놓고 설거지를 마치는 동안, 샤워를 끝낸 그가 실내복 차림으로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짙은 초록색의 반팔 면 티와 옅은 카키색의 리넨 팬츠가 촉촉하게 젖은 근육질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실내복이든 슈트든 스포츠웨어든, 항상 빈틈이 없어 보이는 옷차림 때문에라도 인환은 그에게서 늘 서먹서먹한 위화감을 느끼곤 한다.

연인으로서 사모하던 때의 그에겐 경제성과 실용성만이 옷을 선택하는 유일한 기준이었다. 선택의 폭 또한 매우 좁아서, 단일 브랜드의 한두 가지 단품을 골라서는 낡아서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될 때까지 줄기차게 입고 다녔었다. 하긴, 지난 10년 동안 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니 더 이상 자린고비 노릇은 필요치 않을 터였다. 그를 위해선 정말 축하해야 마땅할 일이지만 한편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하얗게 물이 빠지고 올이 풀린 낡은 블루진에 초라할 정도로 빛바랜 면 티를 걸치고서 자신을 만나러 오던 어린 남창은…… 그리운 나의 옛 영웅은…….

“……영화 봅시다.”

거실장 앞으로 다가간 그가 또 DVD를 꺼내 들고 인환을 부른다.

아아, 역시 이상한 남자다. 처음엔 그저 무슨 변덕이려니 하고 장단을 맞춰주었지만, 거의 이틀이 멀다 하고 홈시어터 앞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고역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그야 서로 영화를 즐기기만 한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로맨틱한 가공의 이야기들에 쉽게 몰입을 했던 젊은 날의 순수는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인 인환이었다. 그 역시 영화를 즐기기는커녕 그저 자신의 몸을 탐하는 데에만 여념이 없었다. 결국 여섯 개의 스피커에서 내뿜어지는 웅장한 사운드 트랙을 안주 삼아 그의 섹스 인형이 되는 데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차라리 처음부터 침실로 가서 빨리 해치우고 자면 좋으련만…….

물론 불만의 소리는 절대로 할 수 없다. 그저 희한한 섹스 취향이려니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그의 장단에 맞춰줄 뿐이다.

“……그래. 커피 뽑아 갖고 갈 테니까…….”

마침 커피를 내리고 있던 중이어서 최대한 미적미적하며 뜸을 들여본다.

“자기 전에 커피를 마시는 습관은 좋지 않습니다. 그냥 오세요.”

“…….”

“이리 와, 장인환.”

잠시 망설이고 있자, 아니나 다를까, 또 저 무시무시한 반말 명령이다.

후우…….

그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으로 괴로운 한숨만 거푸 삼켰다.

“……아……! 간지러…… 그만…… 거긴…….”

“…….”

“……그만……! 흑……! 위야…….”

“…….”

발가락 사이사이를 집요하게 핥아대는 바람에 허리를 활처럼 휘며 몸을 뒤틀었다. 침대 시트를 손톱이 부러질 정도로 힘껏 움켜쥐지만 몸서리쳐지는 간지럼을 참기가 힘들다. 붕붕대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백뮤직 삼아 한 번 거칠게 박아대고 나더니 침실로 옮겨 온 뒤엔 30여 분 내내 이런 패턴이다. 강아지처럼 인환의 온몸을 핥고 빠는 부드러운 애무만을 계속한다. 전신으로 수많은 개미떼들이 밟고 지나가는 것만 같다.

그의 집요하고 느리고 헌신적인 애무를 받을 때마다 치를 떨며 소원한다. 차라리 거친 것이 낫다고. 어차피 괴롭고 지루한 시간이지만 그나마 차라리 아픈 게 훨씬 견디기 편하다고 매번 생각한다.

무슨 경배를 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무언가 작정을 하고 덤비는 것도 같다. 무슨 짓을 해도 요지부동인 인환의 몸을 어떻게 하면 일깨울까, 누군가와 필사적으로 내기라도 벌이는 모양새 같았다.

처음 한 달은 그저 굶주린 야수처럼 자신의 욕망만을 발산하기에 급급하던 그가 인환을 관찰하기 시작한 것은 요 근래 일주일 전후의 일이었다.

한번 방향 선회를 하더니 그다음엔 물 만난 고기마냥 능란한 고문들이 가차 없이 들이밀어졌다. 한두 번 격렬한 삽입으로 자신의 오르가슴을 취한 후엔, 미묘하게 달라진 화려한 섹스 테크닉들을 차례로 선보였다. 방법도, 테크닉도 다양한 신종 고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에겐 매일 밤마다 다채롭게 펼쳐지는 음탕하고 난잡한 섹스의 향연이겠지만 인환에게 있어선 그저 끔찍한 연옥일 뿐이었다.

번들거리는 땀투성이인 그의 온몸이 위에서 찍어 누르고 있었다. 양손에 깍지를 끼고 대자로 팔을 벌린 채 누르고 있어 자신이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가 된 기분이다. 시퍼런 욕망으로 번뜩이는 눈이 찌를 듯이 굽어보며 인환의 전부를 살피고 있었다.

한동안 몸서리가 쳐지게끔 집요하게 전신을 훑던 혓바닥이 떨어져 나가는가 싶더니 이번엔 흉기와 한가지인 페니스가 달라붙었다. 허옇게 배를 드러내고 꿈틀대는 구렁이처럼 발기한 치부를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에 겹치고는 끈적하게 비벼댔다. 흥건한 땀이 피처럼 뚝뚝 듣는, 어딘가 광기에 사로잡힌 듯한 그의 진지한 얼굴에 소름이 끼친다. 새파란 불꽃이 넘실대는 그의 표정 없는 눈동자가 너무나 두렵다.

“……어딜 보는 거냐. ……이리 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비끼자 잔뜩 가라앉은 짐승의 목소리가 명령한다. 물결치는 그의 어깨 너머, 먼 곳을 향하던 시선이 홀린 듯 그에게로 되돌아간다. 너울대는 새파란 불꽃 속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 걸까? 이렇게까지 집요하고 강하고 끈덕지게 그는 자신에게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한참 동안 인환의 시선을 물고 있던 그가 입술을 내리고 키스한다. 부드럽게 쪼는 듯 시작해서 통째로 물어뜯어버리는 폭풍으로 돌변하는 것도 그저 시간문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폐가 복어 배처럼 잔뜩 부풀어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다. 미끈거리는 그의 달콤한 타액이 쉴 새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머리가 멍해지며 기절이라도 할 것 같다고 여긴 순간 가까스로 그의 입술이 떨어진다. 여전히 미련이 남는지, 그의 입술은 미세하게 떨며 미적미적 인환의 것을 깨물고 있다.

겹쳐진 채 느리게 비벼지는 서로의 치부에서 불이 나는 것만 같다. 꿈틀대는 허벅지 근육 아래, 볼품없이 쪼그라든 짝짝이 다리가 꼬챙이에 꿰인 송충이처럼 버둥거리고 있다. 서로 엉켜든 치모가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뽑혀 나갈 것처럼 아프다. 부딪쳐오는 그의 거대한 흉기는 너무나 뜨겁고 격렬하다…….

연옥처럼 계속될 것 같던 느린 흔들림이 비로소 속도를 더하며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한계에 이른 몸이 부들부들 떨며 경련하는 것이 보였다. 깍지가 껴진 손가락에 부서뜨릴 것처럼 힘이 가해졌다. 늠름한 근육질의 몸이 단두대의 시체처럼 버둥거리고 있었다. 허리가 활처럼 뒤로 꺾이며 짐승 같은 교성이 울려 퍼졌다. 맞붙은 치부 위로 그의 뜨거운 정액이 뭉클뭉클 뿜어 내렸다. 그의 몸에서 시작된 전류가 인환의 몸 구석구석까지 찌릿찌릿 흘러 퍼졌다. 한두 번 격하게 움찔거리며 토정하던 몸이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인환의 두 손을 결박하던 깍지가 풀어졌다. 대신 허리가 끌려 들어갔다. 인환의 전신을 가둘 듯이 격한 포옹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얼굴과 입술엔 키스의 홍수가 났다.

자정이 넘은 것 같았다. 침대 머리맡에 켜진 어슴푸레한 스탠드 불빛 아래 드러난 것이라곤 그저 광기 어린 욕정과 폭풍처럼 거칠게 내뱉어지는 숨소리뿐이었다.

내리누르고 있는 그의 압도적인 몸이 답답했지만 그저 맥없이 할딱이며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잠들 수 있을 것이다. 등줄기며 엉덩이며, 그의 온몸은 물속에 빠졌다가 건져진 시체처럼 창백한 땀으로 가득했다. 자신 역시 다르지 않을 터였다. 눈을 뜨기 힘들만큼 파김치처럼 지쳐버렸다.

제발, 제발……. 오늘 밤은 여기까지만 하고 자자고 간절히 빌며 그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언제까지고 어루만져줄 수 있었다. 제발 여기서 멈춰준다면.

띠리리리리∼∼∼.

다행인지 불행인지 침대 머릿장 위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가 울었다.

빈틈없이 겹쳐진 채 억세게 포옹을 거듭하고 있던 그의 몸이 꿈틀, 동요한다.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은 듯, 인환의 몸을 쓰다듬는 손길도 부드럽기만 하고 호흡 소리도 정상을 되찾고 있었다.

띠리리리∼∼∼띠리리리리리∼∼∼∼.

고집 싸움을 하듯, 거듭되는 벨소리에도 그의 몸은 꼼짝할 생각을 않는다. 이렇게 전화 받기를 꺼리는 그를 볼 때마다, 정말 그 여배우가 그와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인지 의심스럽다. 하긴 진심인 상대라면 자신과 이런 섹스를 하진 않으리라.

재회한 이래 단 한 번도 과거의 그녀에 대해 물은 적은 없다. 너무나 아픈 상처라 건드리는 것만도 겁이 나서였다. 다만 김성준을 통해 그가 그녀와 이혼을 했단 사실만을 확인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이혼의 배후에 자신이 저지른 죄악도 한몫하고 있다는 걸 막연히 짐작할 뿐.

그녀가 그의 인생으로부터 사라지고, 이제 새로 등장한 것이 저 여배우였다. 류지은이라는 여자. 방년 27세로, 요즘 최고로 잘나가는 트로이카 중 하나라고 한다.

가면처럼 심중을 숨기고서, 꿀처럼 달콤하고 상냥한 태도로 전화를 받아주고, 또 그녀와 데이트가 있는 날이면 반드시 외박을 하는 그의 행동들을 지켜보며, 인환은 그녀가 몹시 궁금해졌었다. 외출하는 길에 산 연예 잡지엔 그녀의 화려한 행보와 아름다움, 그리고 남자친구로 소개되어 있는 그에 관한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

띠리리리∼∼∼띠리리리리리∼∼∼∼.

끊어졌던 벨소리가 다시 되풀이되었다.

체념한 듯, 그의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용수철처럼 죄던 포옹이 풀어지며 그가 휴대전화 쪽으로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지은 씨?”

[…….]

“……아, 좀 잤어요. 미안…… 피곤해서 깜빡했네…….”

[…….]

“……미안, 미안! 대신 내일 만나요. 촬영 끝날 때까지 지켜줄게요. 집에 가서 마사지도 해주고…….”

[…….]

“……그렇지…… 질릴 때까지 키스하고…… 안고…… 아, 흥분되는걸…… 오늘 밤 다 잤다! 지은 씨, 그만! 아하…….”

[…….]

“음, 그래…… 잘게요. 지은 씨도 빨리 자요. 그런 강행군을 견디려면 잠이라도 푹 자둬야 하니까.”

[…….]

“응, 그래요, 나도…….”

[…….]

“굿나이트.”

[…….]

통화를 마친 그가 전원마저 끄고 있다. 서늘해질 대로 서늘해진 얼굴로 어떻게 저런 입에 발린 소리를 잘도 하는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첨의 말을 하느니 차라리 침묵을 고수하던 10년 전의 영웅이라면 어림도 없을 행동이다. 하긴, 순수성만 고집했다면 아무리 그로서도 이 정도까지 성공을 거머쥐지는 못했을 것이다.

휴대전화가 제 위치로 가고 스탠드 불도 꺼졌다. 묵직한 커튼이 쳐진 창문에선 손톱만큼의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먹통 같은 어둠 속에 그와 자신의 숨소리뿐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몸이 다시 인환의 허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모로 튼 상반신으로 그저 부드럽게 포옹만 하는 걸로 봐서 또 섹스를 할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후우…….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그가 의미를 알아차리지는 못하리라.

“……저…… 나도 좀 궁금해서 그러는데…….”

깃털처럼 부드러운 손짓으로 인환의 어깨와 갈비뼈와 등줄기를 쓸어주고 있던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그에 대한 두려움을 그나마 상쇄시켜준 때문이리라.

“……저…… 그녀와 진짜 결혼할 생각이니? 소문이 들리던데…… 약혼까지 한 사이라고…….”

“…….”

“……아, 물론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

“……아아, 그냥 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라. 대답 안 해도 돼…… 기분 나빠할 필요도 없어…… 설마 옛날 일 떠올리는 거 아니지……? 그게…… 설마 내가 아직도 네 일에…….”

“…….”

역시 괜히 말을 꺼낸 모양이다. 질투심에 몸부림치며 그를 괴롭히던 과거를 그가 떠올리지 말란 보장이 없다. 아니, 당연히 떠올릴 것이다. 기분도 나쁘겠지, 당연히…… 당연히……. 더 이상 그런 뜻이 아니라고 부정을 했다간 더더욱 꼴이 우스워질 것만 같아 인환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마주 안은 그의 등을 부지런히 쓰다듬어주었다. 아, 빨리 잠이나 들어줬으면…….

“……겨우 물어봐주는군.”

흠칫.

“……정말 결혼할 생각이라면 당신과 이 짓을 하겠나?”

“…….”

“……이제 다른 몸뚱이와 섹스는 할 수 없어. 누군가 그러더군. 호모에 맛을 들이면 더 이상 여자를 안을 수 없다고.”

“…….”

날카로운 가시에도 불구하고 바로 귓가에서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는 마치 밀어처럼 다정하기만 했다.

“……그 말이 맞는가 보지. 이렇게 네 몸뚱이에만 환장을 하고 있으니까.”

“…….”

“……그녀는 일 문제일 뿐이다. 신경 쓸 필요 없어.”

“…….”

의외의 대답에 그저 눈만 굴릴 뿐인 인환을 그가 깊이 포옹했다. 팔을 등에서 교차시켜 상체를 끌어안고, 문어처럼 하반신을 휘감은 다리로는 까칠한 털이 아플 지경으로 조여댔다. 포옹이 답답한 만큼 그의 집착이 무서워졌다. 호모 이외엔 안을 수 없다니. 자신의 몸에만 환장을 하고 있다니……. 설마…….

아니,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설마 평생 자신을 틀어쥘 리는 없다. 아무리 그의 증오심이 깊다고 해도, 설령 아무리 비틀린 쾌락이 즐겁다 해도, 이토록 서로의 정신을 황폐화시키는 관계를 평생 끌고 갈 리는 없다. 약속하지 않았나. 1년이 지나면 풀어주겠노라고. 열심히 봉사를 해주면 용서해주겠노라고.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

혹시 아니라면 어쩌지?

그저 편한 대로 거짓말을 한 것뿐이라면?

실은 절대로 용서할 마음도 없고, 평생 옆에 낀 채 괴롭힐 요량이라면?

두근…….

어느새 규칙적인 호흡을 흘리며 잠이 든 그에게 안긴 채 인환은 손끝까지 떨고 있었다. 잠이 들어서도 그의 완강한 두 팔은 여전히 철사처럼 자신을 죄고 있었다. 슬쩍 밀어내자, 움찔 전율을 흘리더니 더한 악력으로 팔을 조여왔다. 무의식적으로 쓰다듬어지고 있던 뒤통수에 힘이 가해지며 그의 가슴팍으로 얼굴이 파묻혔다. 빈틈없이 달라붙어 있는 뜨겁고 질척한 몸에 문득 몸서리가 쳐졌다. 땀 냄새와 보디 젤 향기가 적당히 뒤섞인 그의 알싸한 살 냄새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초침이 돌고, 분침이 돌고, 또 시침이 돌았다.

한번 자각해버린 공포감은 전신의 피를 말리며 잠을 쫓고 있었다. ……어떡하지……. ……말도 안 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다시금 끔찍한 불면증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인환은 망연자실해서 더듬고 있었다.

딱히 도망 갈 의사가 있어서 통장과 도장까지 챙겨 든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전날 사다둔 정종 한 병과 깨끗이 씻은 과일들을 배낭에 주워 담으며, 무의식적으로 그것들도 함께 챙겨 넣은 것뿐이었다.

자그마한 벌초용 낫까지 포함된 기묘한 짐 꾸리기에, 빨래를 널던 파출부 아줌마가 고개를 갸웃하며 인환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돌아가신 엄마의 기일이라고 자백했다. 어머, 그러시군요. 미리 말씀해주셨으면 음식을 준비하는 건데요, 선생님. 아줌마는 수줍게 웃으며 애도의 말을 흘렸다. 안색이 안 좋으세요. 수면 부족으로 창백한 얼굴이 걱정스러운 듯 아줌마는 덤으로 안부까지 챙겼다. 간밤을 뜬눈으로 새워버린 탓이었다. 아침 식사 중에 그가 눈치라도 챌까 봐 얼마나 심장을 떨었는지 모른다.

―잠 꼬박꼬박 잘 것.

그가 출근하자마자 서둘러 짐을 챙긴 것도 딱히 저의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저녁엔 김강원과 약속이 되어 있으니 좀 더 오래 엄마와 함께 있으려면 서두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몸 구석구석 깨끗이 샤워를 해서 그가 낙인처럼 묻혀둔 땀이며 체액들을 말끔히 씻어냈다. 시상식 때 산 감색 양복으로 번듯하게 치장도 했다. 오랜만에 슈트 입은 모습을 보면 엄마도 좋아하겠지.

“……오늘 안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문단속 잘하시고 돌아가세요, 아주머니.”

하고 당부를 준 것도 그저 오늘 외박할 게 뻔한 그를 생각해서 한 말일 뿐이었다. 설령 자신 또한 외박을 한다고 해도, 어차피 그는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계획을 세운 건 아니고, 단지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속으로 열심히 변명을 했다. 다른 여자를 안기 위해 그도 외박을 하는 거니까, 자신 역시 하룻밤쯤은 성노예 노릇으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아아, 물론 절대로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다. 그는 외박은커녕 외출조차도 싫어하니까, 볼일만 마치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것이 성노예의 바람직한 의무였다. 자신은 당연히 일찍 돌아올 것이다. 엄마를 만나고, 함께 술도 좀 마시고, 다시 시내로 들어와 전시장에 들러 김강원을 보고는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정말이다. 정말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다녀올게요, 아주머니. 내일 아침 뵙겠습니다.”

“예에, 선생님. 조심해 다녀오세요. 문단속 잘해두겠습니다.”

파출부 아줌마의 상냥한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완연한 여름 날씨로 접어든 하늘은 그지없이 화창하기만 했다. 춘추용 양복을 입기엔 더위가 느껴졌지만 산은 아직도 좀 선선할 테니까.

동서울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달려 엄마가 잠들어 있는 원주로 왔다. 터미널에서 내리니 마침 보덕산까지 가는 시내버스가 와서 재빨리 잡아타고 부지런히 산을 향해 달려갔다.

등산로 근처마다 만개한 아카시아 향기가 코를 찔렀다.

엄마를 만나러 올 때면 늘 마주치게 되는 향기라, 요즘은 시내에서 이 향기를 맡을 때도 마냥 가슴이 미어지곤 하는 인환이었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불한 등산로를 20여 분쯤 올라가니, 야트막한 구릉 지대 한편에 가만히 누워 있는 엄마가 보였다. 초여름의 햇살은 눈이 시리도록 쏟아지고 있고, 무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적막감은 포근하고 감미로웠다.

인환은 땀범벅이 된 얼굴을 훔치며 벗어 들고 있던 재킷과 배낭을 두부처럼 납작하게 잘린 화강암 제사대 위에 올려놓았다. 여름의 초입이라 둥그런 봉분이며 무덤 주위에 아담하게 조성된 잔디밭엔 막 자라기 시작한 억새며 키 큰 식물들이 무성했다.

“……엄마, 나 왔다. 미친 호모 새끼 왔다. 그동안 잘 지냈지……?”

장난 같은 인사말로 말문을 트고 벌초부터 해나갔다.

한 시간가량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 덕분에 봉분 주위는 말끔하고 부드러운 제 모양새를 되찾았다. 잘린 잡초들을 손으로 대강 긁어 한쪽 구석에 치우고 배낭에서 준비한 음식이며 술을 꺼내 제사를 지냈다. 큰절을 하고,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가 엄마가 먹고 남은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었다. 아침을 제대로 못 먹은데다 이미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 꽤 배가 고팠다. 무덤 주위에 뿌리고 남은 정종도 홀짝홀짝 마셔 치웠다.

취기에 식곤증까지 겹치니 온몸이 나른했다. 오랜만의 여행에 다리도 무리를 했겠다, 어젯밤은 뜬눈으로 새운 자신이었다. 엄마 옆에 있어서 그런지 그토록 구해도 다가오지 않던 졸음이 물밀 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김강원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슬슬 움직여야만 할 시간이었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약속 시간에 좀 늦더라도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는 수밖에. 봉분 옆에 재킷을 깔고 배낭을 베개 삼아 누운 지 1분도 못 돼 인환은 달콤한 오수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왜 울음이 터졌는지 모르겠다.

지난 몇 년간, 인환은 꽤 잘 자제를 해오고 있는 편이었다. 엄마는 자신이 우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 너무나 괴로워했다. 그런 엄마에게 죽어서까지 고통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살아생전에 그토록 불효를 저지르고, 가슴에 대못을 치고, 종내는 잡아먹기까지 했다. 그래, 잡아먹었다. 엄마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슬픔으로 죽었다. 고통으로 죽었다. 아들이 짓밟아버린 꿈에 절망해서 죽었다. 그랬다. 자신은 엄마를 잡아먹은 앙굴리마라였다. 그런 주제에 울다니, 울다니, 응석을 부리다니, 양심 좀 있어라, 장인환!

꺽꺽거리며 토해지는 설움을 잡기 위해 기를 써봐도 한번 터지니 영 막무가내였다. 그저 망연해서 바라보기만 하는 엄마의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인환은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때론 어린애가 돼서 배를 까고 뒹굴었고, 때론 고집쟁이 중학생이 돼서 아버지를 안 만나겠다고 표독을 떨었다. 그가 없으면 죽는다고, 그를 잃곤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고, 미친 호모 새끼가 돼서 행패를 부렸다. 손목을 긋고, 목을 매달고, 수도 없이 배창자를 찔러대며 엄마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고요하고 따스했던 엄마의 안식처는 불효자가 구둣발로 짓밟는 바람에 졸지에 아비규환이 되고 말았다.

얼마를 잔 건지 모르겠다.

얼마를 울부짖은 건지도 잘 모르겠다.

피부로 설핏 다가든 냉기가 아니었다면 인환은 언제까지고 엄마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데려가…… 나도 데려가, 엄마…… 데려가줘, 제발 데려가주라, 응……? 엄마…… 엄마…… 엄마…… 엄마야…… 하고 어리광을 부리며 여전히 엄마의 가슴에 대못을 치고 있었겠지.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저도 모르게 웅크렸다. 듣기 불쾌한 흐느낌 소리에 울컥 짜증이 났다. 한참 중얼중얼 불만의 신음을 흘리던 인환은 그 시끄럽고 불쾌한 울음소리가 자신의 것이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눈이 번쩍 뜨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여명과 그리 다를 바 없을 핏빛 노을이 서쪽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늘어져 있었다. 소스라쳐서 시계를 보았지만 기적이 일어날 리 만무했다. 부지런히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 시침을 아무리 원망해봐도, 김강원과의 약속 시간인 저녁 7시는 이미 지난 뒤였다. 네 시간을 넘게 자버리다니, 정말이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산에서 잘 터질지 의문이긴 했지만, 그나마 연락이라도 할 수 있는 휴대전화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이었다. 할 수 없었다. 나중에라도 단단히 사과를 하는 수밖에…….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막상 포기하고 보니 김강원과의 약속 따윈 그저 하찮게만 생각이 되었다. 지 엄마도 잡아먹은 개새끼 주제에 무슨…… 무슨…….

완벽하게 구겨져버린 재킷을 주워 입고 제대 위의 쓰레기들을 배낭에 주워 담았다. 막상 산을 내려가려고 하니 다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설움이 복받쳤다. 엄마가 그리운 나머지 가슴이 터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분이 풀릴 때까지 산이 떠나가라 대성통곡을 했다. 생각해보면 부모형제도, 혹은 배우자도 없는 인간이 어디 한둘이랴 싶지만, 고독한 인간이 나 하나뿐이랴 싶지만, 자신만큼 철저하게 버려진 인간 말종도 없을 터였다.

……혼자다…… 혼자였다…… 이 세상에서도…… 혹은 틀림없이 저세상에서도 자신은 완벽히 혼자였다…….

원주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간신히 김강원과 통화를 했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다가 다시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중이라 했다. 급한 일이 생겨 미처 연락을 못 했다고, 정말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사죄하고 또 사죄했다. 천사 같은 남자는, 웃음을 머금은 환한 목소리로 신경 쓰지 말라고 얘기했다. 무슨 사고가 난 게 아닌가 걱정을 했다고, 무사한 것을 알았으니 됐다고 얘기했다. 목소리가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들렸다. 감지덕지해서 다시 연락을 하겠노라 대꾸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둠이 내린 소도시의 고속버스터미널은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데가 있었다. 건물은 초라하게 낡았고, 대합실에 앉아 있는 여행객들은 대부분 삶에 지쳐 보였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서울행 막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정말로 어딘가 즐거운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든 것은. 낡고, 초라하고, 지치고, 우울한 무덤이 아니라, 밝고 생명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곳으로 가고 싶다고.

그곳이 어딘지는 몰랐다. 다만 서울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물론 자신은 돌아가야만 했다. 바람직한 성노예로서 죄 갚음을 하기 위해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그런데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울행 막차는 막 발차를 기다리며 남은 손님들을 꾸역꾸역 안으로 삼키고 있었지만, 인환은 발에 못이라도 박힌 듯 그저 멍하니 선 채 육중한 고속버스의 차체만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마침내 막차가 떠났다.

끊어둔 표는 휴지조각이 돼버렸지만 어쩐지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천천히 터미널을 빠져나온 인환은 근처 식당에 들어가 늦은 저녁을 먹었다. 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역전 특유의 삼류 식당이었지만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7년을 전국을 떠돌았었다. 이보다 더 형편없는 곳에서도 지내본 자신이었다. 지옥을 살아낸 자신이었다. 어딘들 살아내지 못하랴 싶었다.

전세금을 뺀 돈과 상금으로 받은 2천만 원도 있었다. 마냥 놀고먹는다 해도 절약만 한다면 3∼4년을 버틸 수 있는 큰돈이었다.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터미널로 다시 가서 상주행 아침 차편을 한 장 끊었다. 딱히 상주를 택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우등 차편이었고, 가장 빠른 차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상주로 가서 그곳이 마음에 들면 머물고, 내키지 않으면 다시 차를 잡아타고 어디론가 떠나면 그만이었다.

표를 끊고는 근처의 관광호텔로 가서 1박을 했다.

관광호텔이건만 퀸사이즈의 침대가 있는 기묘한 방이 인환을 맞아들였다. 침대 머리맡의 벽에는 잠자리가 교미하고 있는 장면을 찍은 사진 액자가 하나 붙어 있었다. 적나라하면서도 순진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눈물을 자아내는 서글픈 키치가 아닐 수 없어서 인환은 한참을 웃어댔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지만 낮잠을 잔 때문인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TV를 틀고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다가, 문득 이상야릇한 위화감에 인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위화감의 정체는 곧 풀렸다.

낯선 침대 위에서 모처럼 혼자 잠드는 밤이었다.

알몸으로 그에게 시달린 끝에 기진맥진해서 잠에 떨어지는 게 아니라, 비로소 인간다운 면모로 느긋하게 잠을 청하는 밤. 그렇지……. 이게 사람 사는 모습이지……. 짐승처럼 교미만 하라는 게 사람은 아니지…….

물론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돌아갈 터였다. 언제인가는. 죄 갚음이 없다면 안식 또한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게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현재의 인환으로서는 도무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당장 서울로 올라가야 했지만,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인환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의 무시무시한 덫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어젯밤 도망가버린 용기를 도로 되찾기 위해서라도 시간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정작 얼마나 필요할지는…… 물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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