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2003년 6월. 김강원(金鋼圓)
“……도…… 돌아오셨다구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서 실장님?!!!”
드르륵거리는 전기톱 소리에 지나치게 정중한 서 실장의 목소리는 제대로 알아듣기조차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려왔던 기쁜 소식을 완전히 차단하는 데는 현장의 소음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 언제 돌아오셨답니까?! 연락은 온 겁니까?! 어디 다치신 건 아니구요?!!!”
서 실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해 막바지 공사 중인 전시실을 뛰다시피 빠져나오며 강원은 휴대전화에다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안도의 기분과 함께 전신으로 저릴 듯한 기쁨의 전율이 퍼져갔다. 돌아왔다! 어쨌건, 하여튼, 돌아왔다면 그걸로 된 거다! 무사히 돌아와준 거면 그걸로 족하다!!! 충분하다!!!
[……예, 좀 전에 장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전화가 왔습니다. 걱정을 끼쳐서 무척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요. 아마 김 선생님께도 곧 연락이 갈 듯싶습니다.]
“어…… 어디 계시답니까? 지금 댁에 계신가요? 어디 몸이라도 안 좋으신 것은……?!”
[하하, 일단 목소리는 건강하신 것 같았고요. 연희동 댁에 계시답니다. 어제 돌아오셨다고 해요. 일간 장 선생님 모시고 전시실에 찾아뵙고…….]
계속 이어지려는 서 실장의 말허리를 단숨에 자르고, 주차장으로 뛰었다.
실종된 지 닷새 만이었다.
막바지에 이른 전시 준비 때문에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쁜 와중에도 강원은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인간처럼 일도 작파하고 이리저리 찾으러 다닐 수도 없는 현실이 그저 미칠 것만 같았었다.
그의 기질이나 절망을 알기에 만약의 불길한 일까지 각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강원은 믿고 있었다. 그것은 막연한 신앙과도 같은 믿음이었다. 설마 이대로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아주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것. 그렇게까지 미약한 인연의 끈은 절대 아니리라는 것.
물론 믿음은 그대로 증명이 되었다. 그럼 그렇지……. 당신과 내가 이대로 끝일 리가 없지……. 우린 절대로 그런 하찮은 연결이 아니지, 장인환……!!!
무턱대고 그 인간의 집을 찾는 것은 좀 껄끄러웠지만 앞뒤 가릴 기분은 아니었다. 다행히 그 인간도 지금쯤(오전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은 회사에 있을 시간이었고, 설령 집에 버티고 있더라도 문전박대를 할 만큼 졸렬한 위인은 아니었다.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탓에, 평소에도 ‘어디 만날 테면 만나봐라’의 아우라를 팍팍 풍기고 있지 않은가. 하긴 지난 며칠은 그 인간도 사색이 돼서 죽어가긴 했었지만…….
가능한 한 최고 속도로 액셀을 밟아 연희동에 도착했다. 백미러를 앞으로 해서 땀과 먼지투성이인 옷매무새를 가다듬고(그에겐 최대한 잘 보이고 싶으니까) 육중한 철제 대문으로 다가가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나이가 꽤 있음직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인터폰을 받는다.
“……김강원이라고 합니다. 장 선생님을 좀 뵀으면 하는데 안에 계시는지요?”
“……글쎄요……. 선생님께 여쭤보긴 하겠습니다만…… 잠깐 기다려주세요…….”
여자의 목소리에 곤란한 기색이 비쳤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이 무덤 속 같은 집구석에 불청객 취급을 당하지 않고 들어가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가슴이 몹시 뛰었다. 흥분한 김에 쫓아오긴 했지만 딱히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도 잘 감이 안 온다. 여타의 연애 매뉴얼이라곤 하나도 통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그림이라는, 예술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같은 바닥에서 구르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천만다행이라고 할까. 처음에는 그의 작품에 대한 매혹으로부터 사랑이 왔지만, 어느새 그런 작품 세계조차 점점 뒷전으로 밀리는 느낌이다. 하긴 정말로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가 사랑스럽듯이 그의 작품이 좋았다. 그의 작품에 매혹되는 것과 한가지로 그에게 푹 빠지는 자신이 있었다.
“……들어오시랍니다, 손님…….”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아기자기한 꽃들이 만개한 소박한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느 중산층 가정의 거실 풍경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소박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거실이 보인다. 물론 절대로 보통의 중산층 가정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아무리 숨겨도, 아무리 모르는 척해도, 이 집을 지배하는 공기가 무엇이라는 것쯤은 치가 떨릴 지경으로 잘 알고 있는 강원이었다.
문을 열어준 여자로 짐작되는 40대 후반의 여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여자의 표정에 깃든 긴장감에 강원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며 여자에게 한 번 더 시선을 주었지만, 박복한 인상이라는 외에 달리 사연을 읽을 수는 없었다. 아마도 가정부나 파출부일 터였다.
“……선생님은 몸이 좀 안 좋으셔서 침실에 계십니다. 침실은 이쪽입니다, 손님.”
……몸이 안 좋아……?
여자의 전언에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손님을 맞을 정도면 그리 심각하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근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여자를 따라 무심코 걸음을 옮기던 강원은 거실 저 안쪽, 거의 웅크리다시피 소파에 앉아 있는 한 인영을 포착해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말 것도 없었다. 그 덩치며 위압감이며 그 인간이 틀림없었다.
그 인간이 이 시간까지 집에 있는 꼴도 이상스러웠지만, 강원을 본 체도 않고 이마를 감싸 쥐고 있는 시커먼 아우라도 이상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하기야 이미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인간이었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을 얼굴을 이미 봐버렸으니, 더 이상 저 인간에 대해 놀랄 일은 없을 것도 같다.
……흠, 그쪽이 생 깐다면 이쪽도 생 깐다……. 속으로 어린애 같은 비아냥을 던지며 안내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장 선생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사장님께서 만나 뵙게 하라고 말씀하셔서요. 안으로 모셨는데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침대가 보였다.
꾸무럭거리며 몇 번 몸을 뒤척이는가 싶더니 풍성한 회색 면 티 차림의 마른 상반신이 비척비척 일어난다. 반팔 소매라 뼈가 앙상한 팔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두근…….
팔 곳곳을 물들이고 있는 검푸른 얼룩에 강원은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쪽에서 잘 안 보이던 오른팔이 마침내 드러났고 사정은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팔꿈치를 거쳐 손등에 이르기까지 하얗게 감긴 석고 붕대가 보였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불그스름한 얼룩은 목에도 여전했다. 마침내 시선이 마주친 얼굴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는 형상이었다. 뒷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아득한 충격이 왔다.
“……김 선생님……?”
찢기고 부어터진 입술 틈으로 곤혹스러운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콰지모도처럼 부풀어 올라 형태조차 제대로 알아 볼 수 없는 얼굴 틈으로 휘둥그렇게 뜬 눈동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여길……?”
곤혹스러운 목소리가 재차 토해졌다. 일어나려고 앞으로 약간 꺾이던 몸이 통증을 느끼는지 그대로 굳었다. 콰지모도 같은 얼굴이 잔뜩 구겨지며 희미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숨이 턱 틀어막혔다. 시퍼런 불길이 목젖을 치며 확 솟구쳐 올랐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믿을 수가 없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펌프질을 하듯 거칠게 뛰고, 손가락 끝까지 부들부들 떨리며 견디기 힘든 분노가 넋을 사로잡았다. 모른다. 모르겠다. 아아,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이런 지랄 같은…… 개 쌍놈의 경우가……. 머릿속이 뒤죽박죽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너무나 가빠진 호흡에 폐가 교통사고라도 일으킨 것만 같았다.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격렬한 열기가 전신에 휘몰아친 나머지, 그저 넋을 잃고 흉측한 콰지모도만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처럼 뛰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누…… 누…… 누가…… 누가…….”
저 멀리서 아득하게 울리는 나지막한 으르렁거림은 영 자신의 목소리 같지 않았다.
“……어…… 어떤 개새끼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고통을 견디고 있던 콰지모도가 혼란스러운 듯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벼락처럼 어떤 자각이 왔다.
강원은 미친 사람처럼 격분했다.
“……기…… 김 선생님……?!”
상처투성이 화가의 당혹한 외침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큰 걸음으로 열댓 걸음이면 족할 거실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멀게 느껴진 것은 아마도 판단력을 담당하던 이성의 끈이 절단돼버린 탓이리라.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은 핏줄기가 화끈한 불길을 일으키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제어를 해야 한다고, 무도를 배운 인간으로서 저급한 폭력의 에너지에 휘말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이성이 타이르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이미 한계 이상 폭주하고 있는 감정에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자신이 있었다. 그랬다. 이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었다. 먼저 짐승이 된 쪽은 자신이 아니었다. 짐승을 짐승 취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짐승을 상대하기 위해 함께 짐승으로 떨어져야 한다면, 그래, 좋다, 얼마든지 떨어져주지!
휘둥그레진 얼굴로 강원의 모습을 좇는 파출부를 스쳐 소파에 웅크리듯 짜부라져 있던 ‘개새끼’ 앞에 마침내 도착했다.
“……아…… 앗……! 소…… 손님……?!”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던 개새끼의 멱살을 움켜쥐고 일으켜 세우자 지켜보던 여자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틀어 잡힌 셔츠 자락 아래 근육질의 몸이 회초리를 맞은 듯 긴장하며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눈길이 마주쳤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시체 같은 눈이 강원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나와…….”
“…….”
“……개자식, 나와…….”
“……소…… 손님, 무…… 무슨 짓을!! 사장님……? 사…… 사장님!!!”
멱살을 잡힌 채 현관 밖으로 질질 끌려나오고 있었지만 짐승의 얼굴에서도 몸에서도 동요의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이미 예상을 하기라도 한 듯 태연한 몸짓에 강원은 더더욱 격분했다.
“……끼어들지 마라…….”
거대한 짐짝처럼 무기력하게 끌려오던 짐승이 문득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릴 듯 말 듯 몹시 나지막한데다, 머리 꼭대기까지 치민 공격 욕구를 제어하는 데만 온 신경을 쓰고 있던 탓에 무슨 뜻인지조차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정원 한가운데, 덩치 둘이 치고받아도 별다른 장애물은 없을 만한 지점에 짐승을 내던졌다.
“……너도 내게 필요한 놈이지…… 손 대고 싶지 않다.”
재킷을 벗어 던지고 공격 자세를 취하고 나서야 비로소 짐승이 전하고 있는 으르렁거림이 귀를 파고들었다.
“……더 이상 끼어들지 마. 경고다, 김강원.”
강원이 내던진 위치에서 잠시 비틀거리며 몸의 중심을 잡는 짐승의 모습이 보였다.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인 채 느릿하지만 정확한 몸짓으로 경계 태세를 취하는 짐승에게서 광기 어린 폭력성이 선명하게 감지되었다. 서로 만만치 않은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예감이 본능처럼 다가들었다. 썩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약한 놈을 상대로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른다는 것은 무도인으로서 꽤 양심에 걸리는 일이었으니까.
상대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상대가 가진 기량을 읽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태권도나 쿵푸 같은 격투기의 기본을 익힌 자세요, 분위기였지만 이미 오래전에 수련을 그만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기술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대학 다닐 무렵까지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자신에 비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자신의 온몸을 전율처럼 타고 흐르는 긴장감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력을 다한 승부에 테크닉이란 무의미했다. 의지력만이 궁극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은 강원은 물론, 같은 싸움닭 출신인 눈앞의 상대 또한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상대가 지닌 폭력적인 에네르기야말로 보통의 선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강원 자신에게라기보다는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짐승은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강원이 내면의 야수성을 풀어놓고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앞의 상대 또한 억눌린 한을 폭발시킬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몹시 반기고 있는 듯했다. 그랬다. 놈은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퍼억!!!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흐름을 탄 발차기가 짐승의 복부를 강타했다. 힘을 가득 실은 일격이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몸을 뒤로 빼는 바람에 카운터가 되지는 못했다. 잔뜩 구겨진 얼굴로 허리를 꺾는가 싶던 짐승이 막 균형을 잡으려던 강원의 발을 걸었다. 재빨리 빠져나오려 몸을 가다듬는 사이, 허를 찌른 주먹이 강원의 턱을 강타했다.
빠악!!!
눈앞에서 번쩍 하고 불꽃이 일었다. 재차 다가드는 짐승의 오른팔에서 재빨리 빠져나와 뒤로 돈 다음 등을 찍어 눌렀다. 손바닥에 강렬하게 전해지는 충격으로 보아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터였다. 물론 제대로 만족감을 느낄 틈은 없었다. 충격을 그대로 흡수한 짐승이 찰나의 순간, 그대로 강원의 안면을 강타했다.
“에구머니!!! 저를 어째?!!! 아이구, 사장님!!! 사장님!!! 그만두세요, 사장님!!! 이봐요, 손님!!! 아이구, 세상에!!! 어떡해……?!!! 사장님!!! 장 선생님!!! 장 선생님, 나와보세요!!! 장 선생님!!! 아이구, 말려야 하는데!! 어째……?!!! 저를 어째?!!! 으앗!! 아이구…… 어떡하믄 좋아……?!!! 어이구, 나무 관세음보살!! 장 선생님!! 장 선생니임!!!”
서로 달라붙어 몇 번 난타를 주고받았던 듯하다. 고통과 충격을 삭히기 위해 서로 물러나 경계를 가다듬은 것도 같다. 시간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나마 카운터는 자제해야 한다는 이성조차 멀리 사라지고 그저 상대를 부서뜨리고픈 야수의 본능만이 살아 움직였다.
형형하게 빛나는 상대의 눈빛으로 보건대 그 또한 강원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대개의 공격이 귀신처럼 재빠른 몸놀림 탓에 무위로 끝났지만 서너 번의 성공적인 가격만으로도 상대에겐 충분한 타격을 주고 있었다. 입술인지 코인지에서 터진 피로 상대의 얼굴은 시시각각 시뻘건 얼룩투성이로 변해갔다. 입고 있던 새하얀 드레스셔츠 또한 피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이 보였다.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가 초여름의 땡볕 가득한 정원에 음산하게 퍼졌다.
물론 강원 역시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전신이 불타는 것처럼 화끈거리고, 순간순간 자각되는 통증은 방심을 하는 즉시 정신을 놓아버릴 수도 있을 만큼 격렬했다. 충격을 삭히기만도 급급해 몸놀림은 점차로 둔해지고, 상대를 가격하는 주먹에도 상당히 기가 빠진 채 무의미한 허우적거림을 되풀이하기 일쑤였다. 가빠진 호흡은 숨을 틀어막는 열기와 더불어 머릿속을 점점 더 몽롱하게 만들었다. 두 다리는 무거운 추라도 매달린 듯 질질 끌려 다녔고, 후들후들 경련하는 근육은 물에라도 빠진 것처럼 땀과 피로 흠뻑 젖어들었다.
물론 상관은 없었다.
놈에게 치명타를 날릴 수만 있다면, 이대로 갈가리 부서지든, 열기로 터져버리든 절대로 개의치 않을 터였다. 죽이고 싶었다. 찢어발기고 싶었다. 그에게 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갈기갈기 박살을 내줄 수만 있다면……. 놈에 대한 지옥 같은 미움이, 아귀 같은 혐오가 온 넋을 태워버릴 것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그만…… 위야……!”
비명에 가까운 절박한 부름 소리가 환청처럼 아득하게 귓전을 파고들었다.
“……김 선생님……! 김 선생……! 위야!!!”
언제나 웅얼거리는 듯한 어눌한 말투에 익숙해 있기에, 저 듣기 거북한 비명 소리를 그의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교활한 속셈이 읽혔다. 물론 외침이 들리자마자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어지는 짐승의 몸을 통해 위선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졌지만, 강원은 개의치 않고 주먹질을 계속했다. 서로 기력이 바닥난 터라 거미줄처럼 얽혀드는 몸을 가까스로 밀어내며 상대의 하복부와 옆구리와 얼굴에 연타를 퍼붓기 위해 기를 썼다.
“……김 선생! 김 선생님!! 그만하세요!! 김 선생님!!!”
“……아이구, 이 사람이……?!!! 그만두세요……! 에구구, 사장님 죽이네!! 죽여, 이 사람이!!! 아이구, 어째?!!! 그만!! 당장 그만두지 못해욧?!!!”
“김 선…… 아아…… 그만!!! 그만해!! 그만둬, 제발!! 그마안!!!!!”
자신도 모르게 동작을 멈춘 것은,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는 그의 애원 때문도, 필사적으로 자신의 팔을 붙들고 늘어지는 파출부의 겁에 질린 몸짓 때문도 아니었다. 기묘한 위화감이었다. 칼끝처럼 전신을 긴장시키던 상대의 적의와 폭력성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휘어잡힌 멱살에 체중을 의지한 채 질질 끌려오는 몸에선 저항의 의지라곤 조금도 읽히지가 않았다. 여봐란 듯이 강원을 도발하던 야수의 공격성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려니와, 막무가내로 엉켜들어 소나기처럼 가해지는 강원의 타격을 줄여보려는 노력조차도 짐승은 하지 않고 있었다.
분명 백기를 든 것은 아니었다. 세상을 갈아 마시기라도 할 기세로 파괴적인 욕망에 몸부림치던 야수가 그리 호락호락할 까닭은 없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야수는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움직이는 방법을 영영 잃어버린 버그 난 로봇 같았다. 아니, 움직임을 일으킬 내부의 엔진이 아주 꺼져버린 로봇이라는 것이 좀 더 적절한 표현이리라. 그랬다. 마치 배터리가 다 떨어진 허수아비마냥 무기력하게 매달린 채, 야수는 묵묵히 강원의 공격을 견디고 있었다.
연인의 애원이 들리자마자 자동인형처럼 전의를 상실해버리는 남자의 맹목성이 손가락 끝까지 선명하게 전해졌다. 극단적으로 증폭됐던 야수성만큼이나 순식간에 양처럼 온순해진 남자의 모습에 강원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기를 쓰고 한곳에만 시선을 모으고 있는 피투성이의 남자가 보였다. 남자의 시선을 무심코 따라가자, 현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화단 옆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온몸을 떨고 있어 얼굴 표정은 볼 수 없었다. 다시 반대 방향으로 시선을 틀고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고통이 보였다.
사지가 뜯겨나가기라도 하는 듯 끔찍스러운 고통.
단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강원이 그토록 염원하던 것이, 남자의 깊고 새까만 눈동자 속에서 피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짐승의 소유욕일 뿐이라고 누가 말했나? 누가 감히 저것을 그저 비틀린 집착일 뿐이라고 이를 갈아붙이며 폄하했었나?
사랑이었다. 또한 사랑이 틀림없었다. 사랑이…… 남자가 품고 있는 압도적인 애정의 깊이가…… 몸서리쳐질 지경으로 강원의 코앞에 들이밀어지고 있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원의 온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고 있던 분노의 열기가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필름이 끊기듯 까맣게 단절됐던 분별력이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멱살을 틀어쥔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힘을 빼자마자 파출부가 끌어당기는 반동에 끌려 강원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듯 주저앉았다. 자신의 손에 무기력하게 매달려 있던 거구의 몸 또한 그대로 고꾸라지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뜨거운 햇빛이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미세한 접촉만으로도 확 하니 불길을 일으킬 것만 같은 후끈한 열기였다.
속이 메슥거리며 어지럼증이 일었다. 극도로 떠밀려진 호흡 탓에 폐가 터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땀과 피로 흠뻑 젖은 몸이 물에 빠진 솜처럼 축 늘어졌다. 움직일 때마다 몸 이곳저곳이 지독한 통증을 호소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어딘가 한두 군데쯤은 금이 가거나 부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절대로 후회는 않는다고, 여전히 조금쯤은 흥분해 있는 내면의 야수가 기다렸다는 듯 속살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에구구…… 이를 어째…… 아이구, 세상에…… 사장님……! 괘…… 괜찮으세요……?!”
미세한 경련으로 꿈틀거리는 거구에 가까이 다가간 여자가 팔을 뻗어 부축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아주머니. 괜찮습니다.”
탁한 쇳소리가 강원과 다름없이 피투성이인 입술 틈으로 흘러나왔다. 나지막하고 태연자약한 어조 하며, 느릿하기는 했지만 확고한 의지로 여자의 손길을 뿌리치는 몸짓 하며, 생각만큼 치명타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약간 비틀거리긴 했지만 남자는 앞으로 상체를 기울인 자세로 확실한 중심을 잡아가며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현관 쪽의 그에게서 조금치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들어가셔서 볼일 보세요.”
상처투성이가 된 고용주와 강원을 번갈아 응시하며 쩔쩔매고 있는 여자를 향해 남자가 싸늘한 어조로 되풀이했다.
고용주의 위압적인 기세에 겁을 집어먹은 건지, 아니면 더 이상의 우격다짐은 없으리라 안심을 한 건지, 여자가 마침내 도망치듯 집 안으로 사라졌다.
고통스러운 호흡과 몸의 통증이 그럭저럭 견딜 만해지자, 강원도 널브러져 있던 몸을 추스르며 천천히 일어섰다.
좋아하던 여선생의 회초리를 맞고 있는 초등학생마냥 괴롭고 수치스러운 심정이 돼서 마지못해 그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광기에 가까운 연정과 집착을 보이는 남자와 한 방향을 향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코미디 같은 현실도 아프기는 한가지였다. 여선생은 풍금을 치고, 사랑에 눈먼 짐승 두 마리는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린 채 「학교종이 땡땡땡」을 노래하는 꼬락서니라니!
남자의 타는 듯한 시선과 마주하고 있어 가련한 콰지모도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점이 다를 뿐, 그는 여전히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워낙에 상처투성이 얼굴이라, 표정을 읽는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창백한 안색과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몸을 통해, 그저 그가 몹시도 겁에 질려 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새삼 울컥 하고 격정의 파도가 밀어닥쳤다. SF 영화의 한 장면마냥 저 사람을 품에 안고 순식간에 텔레포트를 할 수만 있다면……. 장소는 어디라도 좋았다. 그저 여기만 아니라면…… 이 징글징글한 무덤 속만 아니라면 그 어디든 낙원이 될 터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리는 몸에 이를 갈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가요…….”
간절한 의지를 담아 그에게 호소했다.
“……도저히 당신을 여기 둘 수 없어요. 함께 갑시다. 거처는 제가 따로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재차 의지를 세워보지만,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남자의 시선에 결박당한 그의 눈동자 속에 쉽사리 강원의 모습이 비칠 리는 없었다. 그와 남자의 사이에 몸을 들이밀어 시선을 차단했다. 최대한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틀어쥐고 몸을 일으켜 세우자 그가 비로소 강원의 얼굴로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반쯤은 넋이 나간 듯한 멍한 눈이 기계적으로 시선을 맞춰온다. 그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내심 안도할 만큼 강원은 긴장하고 있었다. 마주 쥔 그의 몸이 떨리고 있는 건지, 자신이 떨고 있는 건지 제대로 분간조차 되질 않았다.
“……함께 갑시다…… 예라고 말해줘요, 제발…… 제발, 장 선생님…….”
유혈이 낭자한데다 찢어지고 부어 터져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을 테지만, 화려한 외모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끌 자신은 있었다. 온 마음으로 원하면 상대는 최면에라도 걸린 듯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진심으로 상대를 존중하고 호감을 보낼 경우, 자신에 대한 전적인 신뢰감을 이끌어내는 일은 강원에게 늘 식은 죽 먹기보다도 더 쉬운 일이었다. 먼저 벽을 허물어버린 상대에게 거듭 벽을 쌓으려는 인간은 드문 법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달랐다. 섣불리 벽을 허물 수도 없고, 허물어봤자 자신의 벌거벗은 격정을 감당할 여유 따윈 지니지 못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안타깝고 울화통이 치밀어도 아직은 그에게 손가락 하나조차 댈 수 없는 자신의 입장을 강원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새 삶을 향해 걸음마도 시작하지 못한 연약한 정신에 어떻게 자신을 향하라고, 어떻게 자신을 향해 뛰어오라고 윽박지를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현재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해야 조금씩 조금씩 걸음마를 시작할 수 있도록 그를 격려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쇠사슬처럼 자신을 묶고 있는 그 ‘한계’가 얼마만큼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가를, 강원은 비로소 뼈저리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인에게 폭력을 쓰는 형편없는 남자에게 당신을 방치할 수 없어…… 아끼고 있습니다…… 정말…… 당신을 아끼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개소리다. 다 개소리다.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단 한마디 말은…….
“……아시죠……? 당신과 나…… 나는…….”
“장인환!!!!!!”
짐승의 사나운 으르렁거림이 뒤에서 터져 나왔다.
홀린 듯 강원의 눈길에 동조를 보내던 검은 눈동자가 소스라치더니 전기를 맞은 것처럼 부르르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강원의 손에 틀어 잡힌 상반신을 비틀어대며 기를 쓰고 짐승과 눈을 맞추려는 그의 몸짓은 애처로움을 넘어 배신감마저 들게 했다.
그가 다시금 남자의 거미줄에 걸려들었다는 사실보다 강원을 더 절망스럽게 만든 것은 그의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그저 단 한 번의 부름만으로 단숨에 그를 장악해버리는 남자를, 아니, 그와 남자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질투를 해야 할까? 아니면 저주를?
“장인환, 이리 와!!!”
“…….”
“이리 와!!!”
본능적으로 손아귀에 힘을 주는 강원을 필사적으로 뿌리친 그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남자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의지나 자존심을 들먹일 가치조차도 못 느낄, 충성스러운 노예의 몸짓이었다. 아니, 개였다. 개는 절대적인 주인을 향해 꼬리를 높이 쳐든 채 사정없이 뒤흔들고 있었다!
“……또 내 피를 마시고 싶어……?”
남자가 으르렁거리며 가까이 다가간 개의 허리를 끌어안는 게 보였다.
“……또 날 박살 내고 싶은 게 아니야?”
신경을 긁어대는 낮고 허스키한 비아냥이 재차 토해지자 개가 정신 나간 사람 모양 머리를 흔들었다. 흔들고 또 흔들었다. 바람개비 같았다.
“……그래. 그러면 ‘친구’에게 제대로 입장을 알려줘. 30분 주지. 다신 이런 일 없게 해.”
한층 열렬해진 바람개비의 움직임이 멎었다. 남자가 집어삼키기라도 할 기세로 입을 맞춘 때문이었다. 남자의 팔에 틀어 잡힌 그의 허리가 활처럼 뒤로 휘며 상반신이 뒤로 넘어갔다. 콰지모도의 얼굴에 그 못지않은 험악한 얼굴이 달라붙어 피를 빨고 있었다. 생명력을 빨아대고 있었다.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야 했지만 강원은 소중한 이에게서 한 치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견뎌야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격렬한 기세로 입술을 빨아들였던 것과 한가지로 남자가 난폭하게 그의 몸을 밀어냈다.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그의 몸에 명치끝이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통증이 왔다. 개자식! 개자식, 개자식, 개자식!!!
그를 짐짝처럼 팽개친 개자식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강원을 막 스쳐 현관 안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줄곧 바닥을 향해 있던 놈의 얼굴이 문득 시선을 맞춰왔다.
히죽…… 하고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며 야수의 미소가 걸린다.
“……학대하고 상처 입힐수록 그는 살아나지…….”
귓가에 더운 열기가 확 끼쳐들더니 웃음기를 머금은 쇳소리가 속삭여왔다.
“……공짜는 없어…… 없고말고…… 그게 내 역할이야, 김강원…… 내게 허락된 유일한 방식이지.”
두근…….
“……그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살릴 수는 없어…… 알아듣나……? 충분히 벌을 받았다고 어떻게든 납득을 시켜야만 하지…….”
두근…… 두근…… 두근…….
“……그래…… 그러니까 너는 네 역할을 해. 물도 주고, 비료도 주고, 햇빛도 쬐어주라고, 듬뿍…….”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단죄는 내가 할 테니 너는 용서하면 돼…… 윽박질러주고, 얼러주고…… 채찍도 좀 휘둘러줬다가…… 피 흘리면 네가 핥아주고…… 그래, 그렇게…… 번갈아 손뼉을 쳐주다 보면 언젠가 스스로 일어설 날이 올지도 모르지…….”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넌 그를 못 가져. 마지막으로 내가 용서하지 않는 한 그는 영원히 내 거니까.”
……뭐야…… 무슨 말이야, 이 자식……. 설마…… 설마…… 그를 위해서 때렸다는 개소리를 하고 앉았어?!!!!!!
문득 놈과 그를 이어주는 사슬의 실체를 설핏 엿본 기분이 들었다. 찰나의 순간이긴 했지만,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고 내리친 번갯불처럼 모든 의미가 분명해졌다. 놈의 사랑, 집착, 고통들이…… 그 반대편에 마주 선 채 스스로를 단죄하며 생명력을 소진시키고 있는 그의 절망들이…… 그 지독한 관계의 그물망이!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는 상념들에 압도된 나머지 놈의 표정을 살필 기회란 주어지지 않았다. 겨우 잡아챌 결심을 했을 땐 놈은 이미 강원을 스쳐 현관문 안으로 모습을 감춘 후였다.
“……김 선생님…….”
흠칫.
차분하게 가라앉은 부름이 회오리바람처럼 붕붕거리고 있던 생각의 흐름을 단절시켰다.
놈이 내팽개친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그가 보였다. 그의 뒤편 2미터쯤 떨어진 곳에 심어진 잣나무 그림자가 그의 몸 군데군데에 얼룩처럼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눈부신 햇빛까지 주위에 가득해서 르누아르의 인물화마냥 뿌옇게 형태가 퍼져 보였다. 고요하게 움직임이 없는 몸은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뭉개진 콰지모도 얼굴마저 꿈처럼 몽롱한 느낌을 주었다.
“……앞으론 김 선생님을 만나지 않을 겁니다.”
“…….”
아무런 억양도 들어가 있지 않은, 기운 없고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마치 연기력 없는 멜로드라마 배우가 기계적으로 대사를 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까지 들어왔던 수많은 드라마 대사 중에서도 가장 실감나고 무시무시한 대사임엔 틀림이 없었다. 까마득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듯한 아득한 현기증이 일었다.
“……약속해주시지 않으면 선생님을 다신 만나지 않겠습니다.”
“…….”
“……그를 상처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앞으로…… 설령 그가 날 죽이는 일이 있더라도 당신은 그 사람에게 손을 대선 안 됩니다.”
“…….”
“……이해하실 수 없겠지만…… 나 때문에 그가 또다시 해를 입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안 됩니다. 이미 그에게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인간입니다. 그나마 죄 갚음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이렇게 모진 목숨을 이어갈 까닭이 없습니다.”
“…….”
“……그의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보고 계신 이 육체도, 정신도…… 영혼까지 온전히 그가 가져갔지요. 내게 남은 것은 그저 빈껍데기일 뿐이오. 환쟁이라는 빈껍데기지…….”
“…….”
“……그러니 약속해주십시오. 약속 못 하시겠다면 김 선생님과의 인연은 여기서 접도록 하겠습니다.”
“…….”
“……놓치고 싶지 않아…….”
“…….”
“……당신…… 나는…… 당신이…….”
“…….”
미동도 않고 있던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기계적으로 내뱉어지고 있던 목소리에 고뇌로 가득한 감정이 실리기 시작한 것과 거의 동시였다.
“……당신뿐이야…… 그림…… 뿐이야…… 내겐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 놓치고 싶지 않아…… 당신…… 당신이 너무 좋아…… 좋아…… 그러니까…….”
몽롱하게 비현실적인 르누아르의 풍경이 비로소 뚜렷하게 형태를 잡아가는 것이 보였다.
시커멓게 입을 벌린 심연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것만 같던 절망감이 사라지며, 대신 폭발적인 환희가 강원의 전신을 사로잡고 있었다. 좋다는 의미가 연애 감정이 아니라는 것쯤은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금으로선…… 그래, 그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진보였다!
“……아, 이게 뭐야…… 정말 추해…… 추한 욕심…… 당신이…… 당신은 너무 아름답고…… 그림처럼…… 내가 사랑하는 그림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워서…… 아름다운데…… 정말 잃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제발…… 약속…….”
어눌하지만 절박함이 가득한 어조로 거듭 내뱉어지는 고백에 강원의 전신은 타는 듯한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들었다. 차마 냉큼 받아먹기엔 뒤가 켕기는 숭배와 경탄이 자신의 타고난 허영심을 있는 대로 부추기며 천국에라도 오른 듯한 기쁨을 주고 있었다. 하느님, 사랑이라니! 사랑이라니! 이 사랑만 있으면 더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진리도, 정의도, 신도, 하물며 예술조차 그 찬란한 빛을 잃는다!!!
10미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그와의 거리가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걸을 때마다 부서지는 듯한 온몸의 통증도 이가 갈렸고, 땀인지 피인지 줄곧 축축하게 온몸을 간질이며 흘러내리고 있는 체액들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품고 있는 격렬한 기쁨과 충족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단 말인가!
영원처럼 가로막혀 있던 10미터를 가까스로 건너 끔찍스럽도록 소중해진 존재를 겨우 손에 취했다. 깁스를 하지 않은 왼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연인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가는 몸이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그대로 부서질 것만 같아 가슴이 떨렸다. 초인적인 의지로 감정을 자제하며 살며시 품에 안았다. 얇고 풍성한 회색 면 티 너머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이 몸서리가 쳐질 만큼 기분 좋았다. 비누 냄새와 물감 냄새와 땀 냄새가 적당히 뒤섞인 체취에 하반신이 요동을 치며 기쁨을 호소했다. 긴장하며 뒤로 몸을 빼려는 본능적인 몸짓엔 안타까운 나머지 목이 메었다.
“……약속…… 합니다…….”
달래듯, 애무하듯, 상냥하게 대답을 끌어냈다.
“……할게요…… 무슨 뜻인지 알아먹었습니다…… 알아요…….”
어린애처럼 흥분하고 있는 어조를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이해합니다…… 이해하고말고요…… 당신에 관한 일이라면 전부 다 이해합니다…… 알아요……? 우린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 몸처럼…… 영혼처럼…… 당신을 느껴…… 당신의 숨결…… 심장 소리…… 당신이 원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겁니다…… 당신이 하라는 대로 뭐든 할 거요…… 약속해요…….”
버둥거리던 몸짓이 잠잠해지더니 숨죽인 울음이 터졌다. 자신을 밀어내야 할지, 아니면 끌어안아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는 듯, 강원의 피투성이 셔츠 깃을 움켜진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소리 없는 울음에 가슴이 쓰렸다. 깁스가 돼 있는 오른팔에도, 막노동의 잔재로 가시가 일어나 있는 손가락의 모양새들에도 먹먹한 통증이 일었다.
“……약속해…… 오늘 같은 바보짓은 하지 않아…… 절대로 다신 그 사람을 건드리지 않아요…… 않겠습니다…….”
닿을 듯 말 듯 결 고운 머리카락으로 부드럽게 뒤덮여 있는 그의 정수리가 입가를 스쳤다. 키스를 하고 싶은 욕구로 가슴이 터져 나가는 것 같았지만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끌어안은 팔에 으스러져라 힘을 기울이고 싶어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지만 참을 수 있다고 이를 악물었다. 기나긴 인내와 의지의 싸움이 될 터였다.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점점 짙어가는 녹음으로 가득 들어차 있는 정원은 고요했고, 하늘 높이 치솟은 뜨거운 햇빛 아래, 품에 안은 그와 자신 단둘뿐이었다.
좋아한다고 했다, 자신을.
당장은 그저 이 순간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한 호흡 한 호흡, 영원을 기도하듯 강원은 떨리는 한숨을 토해냈다.
몹시 더운 여름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