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2003년 6월. 문위(文偉)
“……며칠 동안 번거로운 걸음을 시켰소, 신 전무. 내일부턴 출근할 수 있으니 회사에서 보도록 합시다.”
“……번거롭긴요, 이사님. 단 며칠도 저희들 선에서 일처리를 하지 못하고 이리 댁에까지 찾아와 괴롭혀드려야만 하는 게 그저 송구스러울 뿐인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사님? 아직 상처도 회복되지 않으셨는데 벌써 출근을 하시는 건……. 안색이 몹시 안 좋으세요. 며칠 더 댁에서 안정을 취하시는 게…….”
“정 실장 말이 옳습니다, 이사님. 며칠 더 쉬세요. 급히 처리해야만 할 일도 이젠 없는걸요. 뭣하면 제가 다시 와도 되구요.”
“아니, 괜찮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겹쳤다고 해도 요 근래 내 결근 일수가 지나치게 많았습니다. 주먹다짐 좀 한 것까지 일일이 변명을 세우면 사원들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사님 안색이…….”
위의 최종 결정을 필요로 하는 안건의 보고를 위해 며칠째 집으로 결재 서류를 들고 와 군말 없이 벌을 서주던 충직한 동료들이었다.
위로선 업무에 국한된 능력만을 요구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 함께 난관을 극복해왔던 동료들인 탓에 사적인 우정이 생기는 것까진 막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위보다 네 살이 연상인 신 전무도, 동년배인 정 실장도, 겉으로 별 내색은 않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와 재회한 이래, 심심찮게 드러나곤 하는 자신의 돌출 행동들이 저들의 걱정을 더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신 전무 댁까지 모시도록 해요, 정 실장.”
은테 안경 너머 근심스러운 표정을 만들고 있는 정 실장의 말을 자르며 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 전무도 내일 오후 브리핑 때 봅시다.”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는 부하 직원 둘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되풀이하자, 자신의 스타일을 아는 사내들은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했다.
상처 자국은 그렇다 쳐도 형편없는 안색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사라졌던 지난주 이래 제대로 잠을 자본 기억이 없다. 찾지 못하던 닷새는 미친놈처럼 찾아다니느라, 다시 찾고 난 다음 사흘은 얼토당토않은 신경증에 시달리느라 잠시도 숙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저들이 걱정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못 견딜 만큼 최악의 컨디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자신의 수중에 떨어졌으니 그걸로 된 거다. 그것도 얌전히 제 발로 걸어 돌아와줬으니 더 이상 전전긍긍해하며 그의 가출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충분했다. 다시 정상적인 숨을 쉴 수 있고, 살아가는 일도 가능해졌다.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걱정이 서린 복잡한 표정으로 쫓기듯 걸음을 옮기는 부하 직원들을 현관문 앞에서 배웅하고 버릇처럼 시계를 살폈다.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를 볼 수 있는 저녁 식사 시간까진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실망감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애써 마음을 추스른 뒤, 멀어지는 정 실장의 승용차 소리를 흘려들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셔츠와 바지를 벗고 상처를 살폈다. 감정의 응어리를 발산하기 위한 철없는 주먹다짐치곤 꽤 타격이 큰 편이었다. 치료를 시작한 지 만 이틀, 심한 통증과 열기는 가라앉았지만 가끔씩 찌르는 듯한 둔통은 여전히 움직임에 불편을 주고 있었다. 가슴과 어깨, 옆구리며 대퇴부 할 것 없이 시커먼 울혈과 멍 자국으로 가득했다. 그나마 뼈가 부러진 곳이 없는 게 신기할 정도. 고상한 예술놀음에만 빠져 있을 큐레이터치곤 꽤 단련된 무술 실력을 갖고 있었다. 서로 작정을 하고 덤볐다면 자신이나 상대나 이 정도 선에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치료 시간이 길어지니 초조한 나머지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마사지를 하는 와중에도, 파스를 붙이는 와중에도 온 신경은 2층의 아틀리에로 향해 있다. ……혹시라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까…… 계단을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라도 나면 어떡하나…… 이러고 있는 틈에 또 몰래 집에서 빠져나가기라도 한다면…….
두근…….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며 얼굴 가득 열기가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신경증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숨을 콱콱 틀어막는 불안감은 쉽사리 사라지지가 않았다. 몇 번이나 속으로 숫자를 세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썼다. 가까스로 손의 떨림이 가라앉았기에 서둘러 치료를 마치고 욕실을 벗어났다.
계단이 보이는 거실로 나오니 그토록 자신의 숨통을 죄던 신경증이 언제 그랬냐 싶게 자취를 감추었다. 갱년기 주부도 아니고, 히스테리아에 벌벌 떨며 그의 방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자신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더 이상 달아나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용서가 떨어지지 않는 한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자신의 곁에서 고통을 견딜 그라는 걸.
단지 겁을 집어먹었을 뿐이었다. 호모밖엔(그밖엔) 안지 못한다고 진심을 흘린 것이 실수였다. 아마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을 자신의 집착에 기가 질렸겠지. 순간적으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든 것도 당연했다. 물론 그 고지식한 주변머리답게 비겁한 도피는 고작 닷새 만에 막을 내리긴 했지만, 자신의 안에 공포감을 심어주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시금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자신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꼭꼭 숨어, 혼자 숨져갈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공포를.
침실이든 아틀리에든 그가 들어앉은 방문 주변을 내내 떠나지 못한다.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다. 잠이 든 새에 그가 도망을 칠 리도 없건만, 피곤에 지쳐 혼절하듯 잠에 빠졌다가도 채 30분을 넘기지 못하고 소스라쳐 깨어나곤 했다. 쇠사슬에라도 묶어서 자신의 몸에 연결하면 안심이 되랴 싶지만, 그래봤자 뼛속 깊이 자리한 공포감을 진정시킬 순 없으리라는 걸 안다. 그저 히스테리아일 뿐이다. 조용히 견디다 보면 정상적인 균형 감각을 찾게 될 터였다. 자신이 누군가. 고통을 견디는 참을성 하나만큼은 어디다 내놔도 꿀리지 않을 독종이 아닌가.
계단참에 우두커니 서서, 여전히 쥐 죽은 듯 고요한 침묵만을 대답처럼 돌려주고 있는 아틀리에를 하염없이 굽어본다.
자신이 부서뜨린 오른손을 가지고도 그는 여전히 그림을 그린다. 괴물처럼 흉한 몰골로 두들겨 패놔도 여전히 꿈처럼 아름다운 몸짓으로 화폭을 가르고 있다. 환장할 지경으로 보고 싶지만 당분간은 보지 않기로 한다. 안고 싶지만 안지 않기로 한다. 자신은 징벌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의 안에 자리한 불안감을 뿌리 뽑기 위해서라도 의도적으로 짓밟았다고 하지만, 자신의 공포감 또한 무자비한 폭행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안다. 잔뜩 겁에 질린 괴로운 얼굴을 하고 미적미적 집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닷새간의 공포와 절망감이 순식간에 야수로 돌변하며 그를 부서뜨렸다. 얼핏 진심을 흘려버린 실수를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적당히 증오를 가장할 필요는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부서뜨려선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소중한 손목뼈가 부서지고 늑골 두 대가 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실은 안아주고 싶었었다. 겁내지 말라고, 잘 돌아왔다고, 너를 사랑한다고, 헤매다 지친 저 병신 다리 아래에 무릎을 꿇고 필사적인 진심을 고백하고 싶었었다. 욕망을 품었었다, 넋이 나갈 정도로.
물론 그건 자신에게 허락된 역할이 아니었다. 마음 착하고 상냥한 연인 역이라니, 언감생심 죽을 때까지 주어지지 않을 허황한 꿈일 뿐이었다. 그랬다. 그래서 더 미쳤다. 눈알이 홱 뒤집힐 만큼 억울하고 또 억울해서 돌아버렸다. ……그래, 이게 내 사랑이지. ……널 증오하고, 널 상처 입히고, 널 부서뜨리는 것만이 내게 남겨진 유일한 사랑이지. 그래, 그런 거지…… 이렇게 만신창이로 부수는 것 외엔 널 내게 붙들어둘 수 있는 방법이라곤 없지…… 절대로 없는 거지, 장인환…….
입술이 터지고,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웅크린 마른 몸이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고스란히 자신의 발길질을 견디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가슴을 할퀴는 기억의 파편들이지만 절대로 외면하지 않는다. 외면하기는커녕 꺼내 보고 또 꺼내 볼 것이다. 자신은 징벌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한동안 계단참에 서 있다가 비로소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인지에 불을 켜고 찻물을 끓였다. 정관계 인사들과의 사교 모임도 아니건만, 다포 위에 다관과 숙우, 찻잔들을 정식으로 죽 진열한 뒤 천천히 차를 마셨다. 다관 안에 가득 들어찬 말간 녹차가 다 비면 시곗바늘은 좀 더 멀리 달려가 있겠지.
밍밍하면서도 씁쓰름한 차 맛을 음미하며 멍하니 거실을 둘러본다. 해가 떨어지기엔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날이 흐린 통에 집 안은 꽤 어둑어둑했다. 2∼3일 해가 비추는가 싶더니 다시금 잔뜩 음울한 먹장구름에 가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무거웠다. 엘니뇨인지 라니냐인지, 세상이 뒤집히고 있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유례없이 비가 많은 한 해라고 생각한다.
마침내 차를 다 비웠지만, 시곗바늘은 마시기 전에 확인한 시점으로부터 채 20분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또 한 번 맥이 빠진다. 비이성적인 실망감은 의지력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다구들을 치우고 다시 거실로 걸어 나왔다.
노트북을 켜고 당면한 몇 가지 일거리들을 마주해보지만, 당장 머리를 쓸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회사 일도 급할 것은 없고, 정태근 놈의 일도 거의 매듭이 지어지고 있는 상태다. 그저 길고도 지루한 시간의 흐름을 잊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그럭저럭 효과는 있어서, 집중하는 사이 거실 가득 거무스름한 땅거미가 밀려들어와 있었다.
7시가 넘었다. 서둘러 노트북을 끄고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징벌이 면제된 식사 전후의 한두 시간은 그나마 자신의 고통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1분 1초가 금쪽처럼 귀한 진통제였다.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뛰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느껴진다. 금단 증상을 일으킨 마약 중독자처럼 허기진 얼굴로 아틀리에의 문을 열어젖혔다. 방 안 한가운데, 춤을 추듯 움직이는 아름다운 것이 보였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식사합시다.”
밉살스러운 자신의 어투에 천상의 아름다움은 회초리를 맞은 듯 아프게 움츠러들었다. 익숙한 고통이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후비고 지나갔다. 저것을 눈에 담는 기쁨에 비한다면, 물론 아무것도 아니라고 멍하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