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2003년 6월. 장인환(張仁歡)
그럭저럭 부기가 빠지긴 했지만 얼굴 곳곳의 검붉은 멍 자국은 여전했다.
깁스한 오른손도 그렇고, 부러진 늑골 두 대도 여전히 뻐근한 통증을 주고 있어서, 아무리 전시 개막일이라고 해도 역시 외출에는 무리가 있었다.
불편한 몸도 몸이지만 무엇보다도 문제는 스캔들이었다. 어제 오후, 마지막 확인 차 잠깐 들른 김강원의 모습도 인환 못지않게 화려한 얼룩투성이였다. 천사 같은 남자는 예의 살인적인 미소를 뿌려가며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일축했지만, 맙소사, 자신이 얼마나 스캔들을 겁내는지 그 사람은 모른다. 화가와 큐레이터가 나란히 폭력배의 몰골을 하고 전시장에 나타나다니, 그야말로 어떤 말들이 나게 될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만 해도, 잠깐이나마 들러볼까 생각했지만,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보곤 그나마 모였던 용기마저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안목 높은 귀빈들 대부분이 개막 일주일 후에 있을 축하 리셉션에 맞춰 전시장을 찾을 거라고 하니, 역시 그날에나 들러보기로 고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셉션 일정이 뒤로 잡힌 것만도 그나마 다행이지 싶었다. 아마도 그때쯤엔 멍 자국 정도는 거의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개막 전에 전시장을 둘러보려던 계획 또한 무위로 끝나고 말았으니, 결국 자의든 타의든 인환의 작품은 온전히 김강원이라는 큐레이터의 프리즘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뭐, 전부 방만한 자신의 책임이긴 하지만, 애초부터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준비 일정을 맞춘 것도 좀 무리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이쪽 바닥에선 알아주는 실력자라고 하는 김강원이 어째서 그토록 서둘러 일을 진행시켰는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여름은 미술계로 친다면 마의 비수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가뜩이나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외면받는 갤러리로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이 그 몇이나 되겠는가? 때문에 성공에 대한 야심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 여간해선 여름에 행사를 치르려 하지 않는 법이다.
하긴 누가 알겠는가. 10년 가까이 떠나 있었던 미술계이니 그사이 진행 방식에 어떤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을지. 시간은 늘 자신보다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인환의 시계는 9년 전 그날, 그의 몸에 칼을 댄 바로 그 시점에서 그대로 멈춰버렸다. 자신을 남겨두고 홀로 멀리 달려가버린 생은, 붙잡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물론 상관은 없었다.
고맙고도 고마운 김강원이나 돈을 투자해준 그를 생각하면 전시회가 성공하길 바라야 하지만, 아니라고 해도 별 미련은 없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것’은 어차피 자신의 생이 아니었다. 그저 공허하게 텅 빈 생이 저 앞에서 홀로 춤을 추며 자신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이었다.
“……네, 이사님. 방금 점심을 드시고 다시 화실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외출은 역시 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네. 약도 드시고 물리 치료도 받으셨습니다. ……예에, 그렇지요…….”
욕실을 나와 계단을 오르려니 거실 소파에 앉아 전화를 받고 있는 경호원(……이라기보다 인환을 감시하고 있는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물리 치료사는 돌아갔습니다. 아뇨, 아주머니는 아직 계시고요. 김치를 담그신다고 좀 늦게 퇴근하실 모양입니다. 네, 이사님.”
보이스카우트처럼 거듭 시원스러운 대꾸를 던지고 있는 청년의 살피는 듯한 시선을 요령껏 피하면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나흘 전, 그가 출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청년은, 그가 집을 비우는 시간 동안 집 안에 머물며 인환을 향해 물샐틈없는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수시로 걸려오는 그의 전화에 실시간 보고를 올리는 것은 물론이었다.
어려 보이는 얼굴에 슬쩍 물어보니 올해 대학을 갓 졸업하고 경호 업체에 입사한 햇병아리라고 했다. 경호원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건장한 육체와 함께 어딘가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 또래의 젊은이답게 붙임성 있고 쾌활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붙임성이 지나쳐, 파출부 아줌마가 가버리는 오후 2시 이후엔 곤혹스러울 만큼 인환을 붙들고 수다를 떨기 좋아했는데, 그의 언질을 받은 모양으로, 그나마 아틀리에 가까이엔 접근하지 않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악의 없는 좋은 청년이라고는 생각됐지만 느닷없는 낯선 감시자는 역시 괴로울 노릇이었다. 대문 밖 외출은 꿈도 못 꾸고, 고작해야 정원을 왔다 갔다 할 뿐인데도 일거수일투족 달라붙는 감시의 눈길엔 예외가 없었다. 청년이 드나들고 고작 나흘이 지났을 뿐이건만 마치 40일을 갇힌 듯한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긴 낯선 청년만이 인환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기실 저 소리 없는 압박의 실체는 청년이라기보다 그에게 원인이 있었다. 청년이 돌아가고, 바통을 이어받듯 그가 퇴근하고 나면 더더욱 무겁고 차고 축축한 쇠사슬이 자신을 죄어오기 마련이었다.
가출 사건 이래, 그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아침과 저녁, 식탁에 마주 앉는 한두 시간을 제외하면 그는 인환의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섹스는커녕 키스조차 하려고 들지 않았다. 침실을 따로 쓰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그가 거실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다 그대로 새우잠을 자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건지, 아니면 그 역시 그의 의도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제 새벽엔 물을 마시러 나갔다가 자신이 낸 문소리에 화들짝 깨어 일어난 그를 발견하고 기절초풍한 일도 있었다. 해골 같은 창백한 안색으로 시퍼런 안광을 내뿜는 무시무시한 표정에 꼼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기가 질렸었다. 더듬거리며 말을 붙였다가 안으로 꺼지라는 벽력같은 고함 소리만 들었다). 만지거나 포옹을 하는 일도 없었다. 집에 함께 있는 동안 단 한순간도 자신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던 지난 두 달간의 일이 꿈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자신이 압박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기묘한 노릇이었지만 기실 그렇지가 않았다. 이가 빠진 채 나사가 돌아가고 있는 듯한 부자연스러움, 억눌리고 억눌리다 못해 아주 미약한 자극을 계기로 한순간에 확 폭발을 일으킬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위기감이 거기 있었다.
그의 상태는 극도로 나빠져만 갔다. 김강원과의 난투극으로 인한 상처는 하루가 다르게 빠른 회복을 보이고 있었지만, 안색은 점점 더 핏기를 잃어갔고 눈 밑의 다크 서클도 나날이 짙어졌다. 잠을 거의 못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밖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었다. 워낙에 말수가 적은 그였지만 요 며칠에 비하면 그동안은 수다쟁이로 치부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그저 눈동자만이 살아 있었다. 시퍼런 안광을 내뿜는 무시무시한 검은 눈동자는,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얼마 안 되는 시간 내내 뚫어지게 자신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시선에 깃든 엄청난 무게감에 음식을 제대로 삼키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뭔가가 어긋나고 있었다.
잘못돼가고 있었다.
자신이라도 한시바삐 움직여야 했지만 도무지 어디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는 조금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모든 것이 해독 불가능한 수수께끼만 같았다.
익숙하지 않은 소음들이 자꾸만 집중력을 방해했다.
오른손을 쓸 수 없는 탓에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 감각들은 방해를 받을 때마다 거듭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제발 좀 내버려두라고, 좀 더 여기 머물게 해달라고 그 누군가에게 무심코 기원했다.
“……선…… 생…… 장 선생님, 어서요…….”
파출부 아줌마였다. 몹시도 당황한 어조라고 어렴풋이 생각이 미쳤지만 인환은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아직 마저 세워야 할 대들보가 더 급했다. 몇 분만 더 손을 보면 될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방을 나가기란 죽기보다도 더 싫었다.
“……선생님, 급해요! 사장님이…… 사장님께서…….”
차갑고 축축하게 젖은 손이 느닷없이 인환의 팔을 낚아챘다. 순식간에 낙원으로부터 떠밀린 나머지 안타까움보다도 충격이 더 컸다. 심장이 북소리처럼 요란스레 울렸다. 숨도 가빠졌다.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허겁지겁 현실을 살폈다.
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파출부 아줌마의 박복한 얼굴이 바로 코앞에서 인환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아주머니……?”
자신이 작업 중일 땐 그 어떤 경우라도 문밖에서 부를 뿐, 아틀리에 안으론 절대로 걸음하지 않는 아줌마였다. 머리가 주뼛 서며 야릇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창백하게 변한 아줌마의 안색도 더더욱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보세요, 장 선생님! 빨리요! 사장님께서 쓰러지셨대요! 방금 구급차에 실려 오셨는데 선생님만 찾으세요……!”
두근…….
“……무…… 그게 무슨…….”
“……병원에서 응급처치는 했다는데…… 글쎄 입원하셔야 한다는데도 자꾸만 괜찮다고 고집을 부리시고……!”
두근…… 두근…… 두근…….
“……선생님께서 말씀 좀 해주시라고…… 친구분이신 김 박사님도 함께 오셨거든요! 아무튼 빨리 내려가보세요, 선생님! 일단 침실로 모셨답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뭔가가 어긋나고 있었다.
잘못돼가고 있었다.
자신이라도 한시바삐 움직여야 했지만 도무지 어디로 어떻게 움직여야만 하는지는 조금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자그마한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날까 싶게끔 우악스러운 아줌마의 손아귀에 팔목을 휘어 잡힌 채,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다, 다, 다, 다, 수레바퀴처럼 빙빙 도는 듯한 무수한 계단이 구역질이 날 만큼 어지러웠다.
“망할 자식,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얼마나 엉망이 돼야 정신을 차릴래?!!!”
“……오버하지 마, 김성준. 나도 의사 자격증 있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아…….”
“새끼, 자격증 좋아하시네!”
“……병원 이렇게 오래 비워도 되냐? 그만하고 돌아가.”
“너 제정신이면 이딴 개수작도 안 부려, 씨팔!! 뭐가 잘났다고 허세야, 허세가?!! 너 지금 돌았어, 이 새꺄!!!”
“……시끄러워…… 머리가 울린다…….”
반쯤 열린 침실 문틈으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낮은 톤도, 감정을 읽기 힘든 서늘함도 그대로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어조로 줄곧 아이처럼 욕설을 퍼붓고 있는 김성준이 오히려 환자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가 정신을 놓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마음을 진정시켜주었지만, 쇼크를 받은 심장은 여전히 아플 정도로 격한 세동을 거듭하고 있었다.
쓰러지다니. 쓰러져버리다니.
하늘이 두 조각이 나더라도 절대로 스스로를 쓰러트릴 남자가 아니었다. 설령 그 직전까지 가는 한이 있더라도 궁극엔 용수철처럼 박차고 일어설, 자기관리의 화신과도 같은 남자였다. 그런 그가 쓰러지다니…… 쓰러져버리다니!
무서웠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온몸의 맥이 탁 풀릴 지경으로 인환은 겁을 집어먹었다. 재촉하는 파출부 아줌마의 안타까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방 안으로 들어설 엄두조차 나질 않았다. 그저 문 옆에 기대선 채 숨을 죽이고 방 안의 기척만을 살폈다.
“……뭐야…… 신경 안정제는 됐다고 했잖아…… 아까도 맞았는데…… 치워…….”
“씨팔, 가만 못 있어?!!! 병원이 싫으면 의사 말이라도 들어야 할 거 아냐, 새꺄!!! 이 등신 새꺄!!!”
“……아, 제발 그만 좀 땍땍거려라, 김성준…… 피곤해 죽겠네…….”
“죽을 테면 죽어!!!”
“……왜 이렇게 양이 많아? 몇 mg이나 놓는 거냐? 잠자다 죽게 만들 셈인가……?”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미친 새끼…….”
“……정신과 의사 주제에 심하군…….”
“닥쳐, 이 새꺄!!!”
“……그만해…… 별거 아니다…… 그저 조금 히스테리를 일으킨 것뿐이니까…….”
“닥치랬지?!!!”
“……냄새가 역해…… 셔츠 좀…… 토했는데…….”
“벗겨줄 테니까 가만있어!”
“……미안해…….”
“……미친 새끼. 오 간호사, 여기 부축 좀 해줘요.”
“네, 박사님.”
“……미안하다, 성준아…….”
“…….”
“……어지러워…… 어째서…… 약을 얼마나 쑤셔 넣은 거야…… 왜 벌써…….”
“용쓰지 말고 눈이나 감아. 잠 좀 자야 제정신 들어, 너.”
“……안 돼…… 그 사람…… 그 사람이나 불러…… 혼자 자면 안 돼…… 그 사람 지켜봐야만…… 안……!”
“미친 새끼, 진짜 돌았어…… 아, 씨발, 젠장……!”
“……왜 안 오지……? 봐야 돼…… 봐야만…… 확인해야 하는데…… 아주머니……! 아주머니?!!!”
“……예……?!!! 예에, 사장님!!! 아이구…… 장 선생님, 어서요!!!!!”
두근…….
펄쩍 뛰듯 방 안을 향해 대답을 던진 아줌마의 손이 다시금 인환의 팔을 틀어쥐었다. 바닥에 접착제라도 달라붙은 듯 무겁게 늘어지는 다리를 절름거리며 인환은 마지못해 침실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방 안의 공기는 밖에서 훔쳐들을 때 이상으로 훨씬 험악하게 느껴졌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마냥 침대 가의 인영들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아니, 요동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이는 흰 가운 차림의 김성준이었다(그의 일이라면 열 일 제치고 달라붙는 끔찍한 우정답게 환자들 진료마저 내팽개치고 그를 쫓아왔으리라). 정신과 의사는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죽마고우의 상반신을 억지로 찍어 누르고 있었다. 당혹한 얼굴로 침대 위의 혈전을 지켜보고 있는 여자 간호사도 보였다. 인환의 감시인인 햇병아리 보디가드도 방 한구석에 서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침대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지진이 난 것 같은 인상을 받은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의 움직임 때문인 것 같았다. 약의 효과 때문인지 별로 힘을 못 쓰고는 있었지만, 친구의 팔을 뿌리치려는 그의 몸짓은 과격할 정도로 필사적인 데가 있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바로, 1∼2분 전, 평온한 목소리로 되레 친구의 신경질적인 염려를 다독이던 그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의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셔츠를 벗어 던진 반라 차림에, 링거 바늘이 꽂힌 몸으로 김성준과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은 흡사 분열병 환자의 발광을 연상시켰다. 등을 보이고 있는 김성준의 몸에 가려 얼굴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엉켜 붙은 두 사람의 과격한 몸싸움만으로도 섬뜩한 위화감을 주었다.
“야!!! 가만 못 있어?!!! 문위!!!”
“……놔……! 잠깐만…… 아주머니!!!”
“……사…… 사장님……?!”
“이 새끼가 정말 누구 미치는 꼴 보려고 그래?!!! 너, 지금 절대 안정해야 한다 말이다!!! 죽을 뻔했단 거 몰라?!!!!!!!”
“……바…… 박사님?!!!”
“……이사님…….”
“……박 군, 이 녀석 다리 좀 잡아줘요!!! 오 간호사도 그쪽 빨리!!!”
“아, 그…….”
“놔……! 왜 이래, 김성준?! 그 사람이나 얼른…….”
“오 간호사, 뭐해요?!!!”
“예! 예에, 박사님!!!”
“아…… 안 돼…… 안 자…… 그 사람…… 잠깐 보고…… 아, 제발 좀…….”
“일단 잠이나 자라구, 이 자식아!!!”
“안 자!!! 이…… 이거 놓지 못해?!!! 그 사람이나 불러!!! 짜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네 환자인 줄 알아?!!! 진정제 얼마나 놨어, 너?!!! 내 몸이 왜 이래?!!!”
“문위!!!”
“안 돼……! 안 된다구…… 아, 젠장할, 어째서…… 자면 안 돼…… 아직…… 아직…… 성준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위야…….”
확인하는(무얼 확인한다는 건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지만) 일도 무서웠지만 그대로 호흡을 삼키고 숨어 있는 것도 무섭긴 한가지였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여 그를 불렀지만 침대 위의 수라장은 여전했다. 너무나 작아서 소란 틈에 묻힌 것 같았다. 입안이 점점 더 바짝 말라들고 있었다. 반대로 식은땀에 축축하니 젖어드는 등줄기의 감촉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물감이 잔뜩 묻은 채 찐득하니 말라가는 손바닥의 감촉도 몹시 불쾌했다.
“……위야, 왜…… 왜 그래…… 괜찮니……?”
힘겹게 톤을 높여 재차 그를 불렀다.
문득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던 필름이 단숨에 끊겨버린 극장 스크린 같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서린 숨 막히는 침묵이 묵직하게 방 안을 사로잡고 있었다. 소금 맞은 지렁이처럼 요동치던 그가 움직임을 멈춘 것이 그 모든 침묵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좀처럼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사납게 폭주하기 시작한 그를 멈추게 한 것이야말로 바로 자신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됐어…… 알았으니까 그만 놔라, 성준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숨 막히는 침묵을 깨고 그의 탁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가쁜 호흡의 잔재가 여실히 드러나 있긴 했지만 좀 전의 광란이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한 어조였다.
“……놔줘. ……얌전히 잘 테니까…….”
“…….”
“……성준아, 저 사람과 얘기 좀 하게 나가줘…… 졸려서 더 이상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다…….”
한동안 그의 어깨를 짓누른 자세 그대로 가쁜 숨을 토해내고 있던 김성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녀석을 놔주세요, 박 군. 오 간호사도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고.”
지친 기색의 목소리가 명령하자 침대 발치에서 그의 다리를 누르고 있던 청년과 간호사가 그의 몸으로부터 떨어졌다. 세 사람의 몸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던 그의 모습이 비로소 완전히 드러났다.
뻥 뚫린 해골 같은 눈이 보였다.
그가 분통을 터트린 것처럼 수면제를 통째로 들이부은 모양인지, 무자비한 잠의 폭격에 침몰당한 새까만 동공은 초점 없이 나른했다. 기를 쓰고 눈을 부릅뜬 채 인환의 얼굴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눈까풀은 자꾸만 내려앉기만 했다. 핏기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메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고 있다. 불그죽죽한 멍 자국이 가득한 선 굵은 이목구비는 오늘 아침 식사 때 본 그대로였지만 안색은 그야말로 소름이 끼칠 지경으로 형편없이 변해 있었다. 죽을 뻔했다는 김성준의 말은 별로 과장이 아닌 듯싶었다. 사기(死氣)가 할퀴고 간 얼굴은 흙빛에 가까우리만큼 창백했다. 시트에 덮인 채 반쯤 드러나 있는 그의 근육투성이 상반신만이 과거의 건강체를 마지못해 증거해줄 뿐이었다.
내장을 헤집는 것만 같은 아찔한 통증과 함께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가 떨려와서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이 들었다. 자신은 아마도 그의 수면 부족이나 과로를 꽤 만만히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저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며 그의 상태를 걱정했지, 차마 이 정도이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내장으로부터 시작된 쓰리고 아픈 통증이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아픈 것은 마음일 테지만 그저 몸이 아픈 것뿐이라고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자신이 있었다. 아팠다. 전신이 바늘로 쿡쿡 쑤시는 것처럼 너무나 아파서 한동안은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무력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선을 내려 바닥을 보았다. 아픔의 결정체인 그의 모습을 망막에서 몰아내자, 고통의 기세 또한 조금씩 꺾이는 것이 느껴졌다.
알고 있었다. 두려움의 정체는 이것이었다.
그가 아픈 것만큼은 좀처럼 견디지 못하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김강원에게 얻어맞고 점점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그를 지켜보고 있을 때도 자신은 이렇게 참기 힘든 고통에 몸부림쳤었다. 그 순간 느낀 고통이란, 바로 전날, 실제로 그에게 폭행을 당했을 때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깊었다. 그리고 오늘,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아 인환은 그때의 고통을 다시금 고스란히 복습을 해야만 했다.
……아아, 그래…… 그래…… 이제 알겠다. 자신은 이것을 두려워했다…… 이 견디기 힘든 이상야릇한 고통을…… 고통과 대면하게 되는 것을…… 자신은 죽기보다도 더 두려워한 거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도 여전히 가시처럼 박혀 자신을 아프게 하는 이것의 정체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죄의식이요, 회한이요, 공포인 남자였다. 자신을 단죄하는 무시무시한 심판관에 불과한 남자……. 사랑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 절대적인 숭배를 보내지 않곤 못 배기게끔 하던 숨 막히는 매혹도, 물론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렸다. 마치 신기루처럼.
다만 고통만이 남았다. 10년 전 그대로…… 자신은 그의 고통에 여전히 그 이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간호사와 파출부 아줌마, 그리고 답지 않게 어두운 얼굴이 된 풋내기 경호원이 차례로 방을 나갔다.
난동의 영향으로 새빨갛게 피가 배어 나와 있는 링거줄을 살피던 김성준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금세 어둑어둑해진 방 안을 가로질러 한쪽 구석에 놓인 에어컨의 온도 조절까지 마친 의사는 다시금 침대 앞으로 다가와 친구의 안색을 살폈다.
“……나가라니까…….”
괴로운 얼굴로 한동안 그의 얼굴을 굽어보던 남자를 향해 쌀쌀맞은 일갈이 날아들었다.
“……나가……!”
재차 단호한 요구가 던져지자, 헌신적인 친구는 잔뜩 얼굴을 구기며 마지못해 문가로 걸어갔다.
두 달 전의 만남에선 그나마 의사로서의 연민을 드러내며 자신의 우울증을 진찰했던 남자였다. 두 번인가 더 약을 처방받기 위해 남자의 병원을 찾았을 때도 스스로의 감정은 삭힌 채(이 남자 역시 자신을 용서치 않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나름대로 인환의 상태를 염려해주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방 안에 들어선 이래 단 한순간도 인환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김성준의 태도는 그저 얼음장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여전히 인환을 못 본 체 방을 나가는 남자에게 인환은 깊은 죄의식을 느껴야만 했다.
시선이 달라붙는다.
걷잡을 수 없이 잠에 침몰해 들어가는 흐릿한 시선이었다. 요 며칠, 시퍼런 안광을 내뿜으며 자신을 불편하게 했던 그 이상으로 전신을 죄는 듯한 숨 막히는 압박감이 다가들었다.
“……마…… 많이 힘드니……?”
압박감도 괴로웠지만 여전히 기를 쓰고 졸음을 참는 그를 보기가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마지못해 말을 꺼냈다.
“……깜짝 놀랐다. 네가 다 쓰러지다니…… 그러잖아도 너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같아서 많이 걱정했어…….”
“…….”
“……회사 일이 그렇게 바쁘니? 잠도 못 잘 정도로……?”
“…….”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몸 챙겨가며 일해야지…….”
“…….”
“……어서 잠이나 자……. 무슨…… 얘기를 해, 이렇게 아픈데…… 그냥 자고 이따가 얘기하자.”
“……약속해.”
흠칫.
불쑥 내뱉어지는 퉁명스러운 말투에 몸이 바짝 긴장을 한다. 시선에서 주는 압박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금방이라도 잠에 떨어질 것만 같은 시체의 얼굴을 하고서도 어떻게 저런 의지를 세울 수 있는지, 새삼 독하기 짝이 없는 남자라고 생각한다.
“……자는 동안 이 방에서 나가지 않는다고 약속해.”
“……?”
“……명령이야. 그림 그리러 자리 비우지도 말고, 배고프면 아줌마더러 밥 가져다달라고 해서 먹어.”
“…….”
“……만약 일어나서 내 눈에 안 띄면 그땐 죽을 줄 알아. 한 번 얻어맞아봤으니 또다시 맞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이겠지? ……알아들어?”
“……위야…….”
“알아듣냐구?!!!”
두근…….
갑자기 터진 벽력같은 고함 소리에, 인환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얼거리듯 점점 까라지는 힘겨운 어조에 적응해가던 참이라 느닷없는 고함 소리는 더더욱 기가 질리게 했다.
걱정이 된 나머지 그림도 손에 잡히지 않을 터였다.
가출 사건 이래, 어쩐지 자신에게 염증을 내고 있는 듯한 그가 뭐라고만 않는다면, 밤낮으로 그의 옆에 붙어 간호를 할 인환이었다. 일주일 넘게 자신 근처엔 얼씬도 않았던 주제에 무슨 변덕이랴 싶기도 하지만, 감히 따지고픈 마음은 들지 않는다. 어차피 그의 속내를 읽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저 감지덕지 그의 곁에 머물면 될 일이었다.
“……이리 와.”
다시금 웅얼거리는 듯한 부름이 그의 핏기 없는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거의 감긴 눈까풀이 못마땅한 듯 파르르하니 떨리고 있었다.
“……침대 위로 올라와. 안고 자게.”
“……소…… 손이…… 옷도 물감투성이라서…… 시트가 더러워질 텐데…….”
“당장 올라오지 못해?!!!”
두근…….
또 한 번 기절초풍해서 부랴부랴 침대 위로 올라갔다. 링거 바늘이 꽂힌 왼팔을 밑으로 하고 그가 모로 몸을 틀더니 마주 누운 인환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붕대가 단단히 감긴 늑골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을 하면서 오른손으로는 등을, 양다리로는 하반신을 택해 막무가내로 감아 들여 빈틈없이 포옹을 굳힌다. 등과 허리를 오가며 정신없이 상반신을 쓸던 오른손이 올라와 인환의 뒤통수마저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벌거벗은 가슴팍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얼굴을 눌러왔다. 몹시 뜨겁게 느껴지는 그의 체온과 더불어 코롱 냄새에 뒤섞인 알싸한 살 냄새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전신이 짜부라지는 것만 같은 압박감은 단지 기분상의 착각만이 아니었다. 그의 전 체중이 실린 팔과 다리가 찍어 누르듯 자신을 감고 있었다. 포옹인지 고문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코앞으로 닥친 잠과 일대 전쟁을 치르기라도 하려는 듯, 몹시 절박하고도 결사적인 기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왜 이렇게까지 잠들기를 꺼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의 수면 부족은 단지 과로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가 그를 강박처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안…… 아…….”
“…….”
“……더 꽉…… 안아…….”
“…….”
“……더…… 그래, 더…… 더…… 그…… 래…….”
“…….”
최대한 힘을 주어 양팔로 그의 상반신을 끌어안자 위압적인 기세로 거듭 뱉어지던 그의 요구가 겨우 잠잠해졌다.
그가 차츰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한 건 인환이 침대로 올라간 지 채 2∼3분도 흐르지 않은 때였다.
강철처럼 허리를 조여대던 그의 팔에서 문득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던 숨 막히는 포옹이 거짓말처럼 풀어지고 있었다. 살며시 고개를 빼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며, 두껍게 내려 감긴 눈꺼풀을 보니 완전히 잠에 떨어진 것 같았다. 여전히 흙빛을 띠고 있는 시체의 얼굴이 가슴 아파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더 이상 포옹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어쩐지 팔을 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반신에 엉켜든 다리도 무거웠고, 맞붙은 피부를 통해 전달되는 그의 체온도 몹시 뜨거웠지만 견딜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무엇보다, 규칙적으로 뛰는 건강한 심장 소리가 듣기 좋았다. 생명의 소리였다. 안전하다는…… 적어도 그는 여전히 강하고 굳세며 활력에 넘친다는 생명의 울림으로 인환에게 위로를 주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여전히 정체 모를 통증을 온몸에 느꼈지만 두려움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신의 존재를 믿지도 않으면서 신에게 감사를 했다. 목이 메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저 그를 안은 팔에 좀 더 힘을 주었을 뿐이었다.
설핏 문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먹물처럼 흘러드는 졸음에 본능적으로 따스한 것 속으로 파고들며 소음을 무시했다.
“……상태가 괜찮은 것 같아서 전 일단 돌아가겠습니다, 장 선생님.”
싸늘한 선언이 바로 가까이에서 들렸다.
접시가 와장창 깨지는 것 같은 각성과 더불어 인환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 머리맡에 서서 링거 팩을 갈고 있는 김성준이 보였다.
“……아, 그래…….”
어눌하게 대꾸하며 바닥에 내려앉는 인환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을 뿐으로, 남자는 링거 팩을 간 데 이어 그의 체온과 혈압을 재고 주사를 놓았다. 민첩하게 움직이는 남자의 손가락은 청결하면서도 아름답게 보였다.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그에 대한 극진한 애정이 묻어나왔다.
드문 장신에, 약간 마른 듯 단단하고 듬직한 근육질의 몸이 세련되고 핸섬한 이목구비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청보랏빛 실크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위에 눈이 부실 만큼 새하얀 가운을 걸친 때문인지, 남자의 유달리 금욕적인 얼굴에선 수도자의 분위기마저 풍겼다. 청결하고 순수했지만 그 이상으로 부드러워서 의사로선, 특히 정신과 의사로선 더 이상 바랄 나위 없는 개성 같았다. 인환이 그랬듯이 환자라면 누구라도 남자를 깊이 신뢰하게 될 터였다. 가혹하달 정도로 배타적이고 완벽주의적이었던 성격은 10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몹시도 좋은 방향으로 변화를 거듭한 것 같았다. 완벽주의는 절제로, 가혹함은 관용으로.
“……푹 자게 두세요. 오 간호사가 시간 맞춰 링거를 갈고 주사를 놓아줄 겁니다. 밤까지는 계속 잘 것 같지만 일어나면 일단 죽을 먹이세요.”
“……입원……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위험한 건 아닌지…….”
“아무래도 입원하는 게 좋긴 하지요. 일단 고비는 넘겼지만 2∼3일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녀석이 워낙에 막무가내라……. 장 선생님께서 얘길 하면 혹시 들을지도 모르니 깨어나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글쎄, 얘긴 해보겠지만 내 말을 들을지 모르겠군.”
“저도 별 기대는 않습니다. 워낙에 고집 센 놈이니까요. 그래도 말씀은 넣어보세요. 아깐 쇼크가 와서 정말 큰일 날 뻔했지요. 제대로 먹지 않아 탈진한 것도 그렇지만 도대체 얼마나 잠을 안 자고 버틴 건지…… 신경증을 일으킨 상태라 증상이 반복될 염려도 있고……. 옆에서 지켜보며 안정을 시키고 싶지만 저렇게 고집을 부리니 저도 답답하군요.”
“……신경증이라니…… 무슨……?”
남자는 한참 동안 대꾸가 없었다. 차갑게 굳어진 남자의 얼굴 표정에 인환은 다시금 주눅이 드는 자신을 느꼈다.
“별로 장 선생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의미와 달리 남자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건 배려가 아닌 비난이었다. 인환이 무언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듯한 무언의 비난. 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새삼 더해질 잘못이 무얼까 싶기도 하다. (그의 곁에 붙어 있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미 잘못이었다. 재부팅 해 마땅할 오류였다.
“아무튼 제가 틈틈이 들러 상태를 보겠습니다. 오 간호사도 두고 갈 테니까 이상이 있으면 얘기하세요. 별일이야 없겠지만 되도록 그의 곁을 떠나지 말고 지켜보시길 바랍니다.”
“…….”
“그럼 이만……. 아니, 나오지 마세요. 그의 곁에 계시라고 부탁드렸지요? 나오지 마세요.”
싫은 기색이 역력한 남자의 고압적인 어조에 슬며시 얼굴을 붉힌 채, 인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하의 남자에게서 아무리 애 취급을 당할지언정 모멸감을 느낄 자격 따윈 없는 자신이었다. 남자가 그나마 인간 취급을 하며 자신과 말을 섞어주는 것만도 대단한 아량이 아닌가.
“……아참, 우울증은 좀 어떠신가요? 녀석 얘기론 많이 좋아지고 계시다던데요?”
막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남자가 적선하듯 물음을 던졌다.
“……아,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 일단 약도 끊었고…….”
“잠은 잘 주무십니까?”
“……그럭저럭…….”
“다행이군요. 그래도 예후가 중요하니까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이 느껴지시면 바로 병원을 찾으시구요.”
자신의 병원으로 오라는 얘긴 역시 하지 않는다. 그렇겠지. 설령 박애주의의 화신인 슈바이처라도 가족의 원수를 치료하고 싶진 않겠지.
“……그래. 고마워, 김 박사.”
“그럼…… 퇴근하고 잠깐 들르겠습니다.”
남자가 돌아서고 문이 닫혔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던 모양으로 긴 한숨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지 가슴 주위로 저릿한 통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만이 아니었다.
용서를 빌어야 할 이는, 그 한 사람만은 결코, 결코 아니었다.
“……뭐야…… 어디…….”
음식을 씹느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
“……어딨어, 장인환?!!! 장인환!!!!!!”
아니, 그의 명령대로 침실에서 먹지 않은 것부터가 실수였다.
“이리 와!!! 이리 오지 못해?!!!!!!!”
기절초풍을 해서 수저를 내던지고 냅다 침실로 뛰었다. 아픈 사람이 어떻게 저런 고함을 질러댈 수 있는지 그저 아찔하기만 하다. 너무나 서두른 나머지 문고리가 제대로 잡히지가 않았다. 심장만 터질 것처럼 벌렁벌렁 뛰는데 안에서 문이 열렸다.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그가 휘둥그레진 시야 가득 달려들었다.
여전히 안색은 나빴지만 어제 오후, 구급차에 실려 왔을 때보다는 한결 핏기가 돌아와 있었다. 잠에 취해 흐릿하기만 했던 눈시울에서 다시금 시퍼런 안광이 불을 뿜는 걸 보면, 몇 시간 전 김성준이 놓아주고 간 신경 안정제의 효과가 거의 떨어진 모양이었다. 고비는 넘겼다고, 그래서 수면제 처방을 줄였다고 하더니, 맙소사, 환자는 어느새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심판관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벌거벗은 몸은 압도적인 바윗돌처럼 단단하고, 격분하고 있는 얼굴은 불을 뿜는 괴수 같았다. 움켜쥔 채 파르르 떨고 있는 주먹은 금방이라도 인환을 내리칠 기세였다. 링거 바늘까지 빼버린 모양으로, 바늘이 꽂혀 있던 팔목에선 설핏 핏방울까지 듣고 있었다.
“왜 말을 안 들어?!!! 곁에 있으랬지?!!!”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며 으르렁거린다.
“……그…… 자…… 잠깐 밥 좀 먹느라고…….”
“안에서 먹으라고 했다!!!”
“……어…… 그게…… 그냥 너 깊이 잠든 것 같기에…….”
“자니까 나가지 말라고 한 것 아냐?!!!”
“…….”
할 말이 없었다. 그랬다. 깨어 있을 때 얼굴을 보이는 게 아니라 잠이 들었을 때 지키고 있을 것. 그것이 애초의 명령이었었다.
구급차에 실려 온 이래, 두 번 정도 잠깐 눈을 뜬 것을 제외하곤 내내 잠에 빠져 있던 그였다. 내일까진 줄곧 같은 패턴일 거라고 방심해버린 것이 실수, 겨우 그의 상태에 안심을 한 나머지 줄곧 굶고 있다가 간신히 수저를 들었다는 것도 그저 변명거리밖에 안 될 터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비이성적인 요구와 그에 따른 난폭한 취급에 겁이 난다기보다, 그저 꾀를 부린 자신의 얄팍함에 속이 상했다. 분명 가출 사건 이래 인환은 그에게서 신용을 잃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감시인을 붙인 것도, 이렇게 히스테리에 가까운 벌칙을 내리며 자신을 압박하는 까닭도 모두 불신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절대적인 복종이 필요했다. 아무리 납득하기 곤란한 그의 명령이라 해도, 그저 적당히 눈속임으로 상대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적당함’만으로는 자신의 비겁했던 도피를 조금도 희석시킬 수 없었다. 그의 믿음을(무슨 믿음인가를 생각하면 그것도 한심한 노릇이긴 하지만) 되찾기 위해서는 그가 요구하는 어떤 벌칙이라도 곧이곧대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터였다.
“……미안하구나……. 다신 그러지 않으마…… 이제부턴 정말 꼭 붙어 있을게. 약속한다, 위야…….”
“…….”
“……들어가. 간신히 얼굴빛이 괜찮아졌는데 도로아미타불 되면 어떡하니? 들어가 침대에 눕자.”
여전히 분노를 삭일 줄 모르는 괴수의 손을 살며시 움켜쥐자 움찔 굳어지는 몸이 느껴진다. 침실 쪽을 슬쩍 보며 재촉하듯 그의 손을 잡아당겨 보지만 완강하게 버티고 선 그는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불빛이라곤 침대 위의 희미한 스탠드가 다인 침실은 환한 조명으로 빛나는 거실에서 보면 살인마가 진을 치고 있는 음산한 지하실처럼 보였다. 물론 기분 탓이다.
“……밥은?”
“……?”
“밥은 다 먹었어?”
여전히 히스테릭한 안광을 빛내며 그가 성급하게 물어왔다.
“……응, 다 먹었어. 괜찮아.”
“…….”
한동안 뚫어지게 인환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간 못 미더운지 식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살짝 쥐고 있던 손에 힘찬 악력이 느껴지나 싶더니, 짐짝처럼 질질 주방으로 끌려갔다. 반쯤 남은 밥과 찌개, 그리고 몇 가지 밑반찬들이 놓여 있는 빈약한 식탁을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단숨에 훑어 내렸다.
“왜 거짓말 해? 앉아서 식사마저 끝내.”
사납게 으르렁거리더니 우악스러운 팔로 인환을 식탁 앞에 앉혔다. 식욕이 사라져버린 지 오래지만 절대로 토를 달 수는 없다. 잠자코 수저를 들었다.
“……너는……? 아직도 생각이 없니? 아주머니가 전복죽 끓여놓고 가셨는데…….”
팔짱을 낀 채 서서 자신만을 뚫어져라 주시하는 그를 향해 조심스레 운을 떼어본다. 잠깐씩 눈을 떴을 때도 내내 식사를 거절하던 그였다. 링거를 통해 그나마 영양분이 주입되고 있으니 그다지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김성준이 말했지만, 제대로 된 식사를 대신할 순 없을 터였다. 여전히 식욕을 잃고 있는 것이 행여 더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도 들고 있었다.
“……입맛이 없더라도 한술 뜨는 게 낫지 않겠어?”
“…….”
“……그래…… 하긴 아플 땐 조금 굶어주는 것도 좋다고 하더구나…….”
말을 계속하기는커녕 여전히 음식을 삼키기도 곤란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의미가 실린 시선이 버거운 나머지 스스로 백기를 든다. 김성준이 갈아 입혀준 파자마는 언제 벗어 던졌는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의 몸도 버겁긴 한가지였다. 12시가 가까운 한밤중이라 더 이상 김성준이나 경호원, 혹은 파출부 아줌마가 들이닥칠 염려는 없었지만 그답지 않은 방만함이 아닐 수 없었다. 벌거벗은 그 자체보다 몹시 방기돼 있는 그의 거리낌 없는 태도가 더 불안했다. 칼끝처럼 날이 서 있는 그의 정신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리 와.”
간신히 식사를 마치자마자 그의 팔이 인환을 잡아끌었다. 끌려 들어간 곳은 물론 ‘연쇄 살인범의 아지트’였다.
“이리 가까이 와.”
침대 위로 늠름한 몸을 무너뜨린 그가 일갈했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속 거북해. 옆에 와서 앉기나 해.”
그를 따라 침대 위로 올라가려던 인환을 향해 다시 일갈.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어조였지만 나름대로의 속 깊은 배려였다.
침대 중간쯤에 엉덩이를 걸치고 자리를 잡았다. 그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탓에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다행이지 싶었다.
소리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열어 놓은 상태라 조금 더위가 느껴졌지만 공기는 훨씬 상쾌했다. 가끔씩 부드럽게 흘러드는 미풍이 살랑살랑 커튼을 흔들고 있었다. 뿌연 스탠드 불빛을 받아 괴괴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그것은, 방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유일한 생물처럼 느껴졌다.
등에 느껴지는 사슬 같은 시선이며, 풀을 먹인 침대 시트가 계속 바스락거리는 걸 보니 그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는 듯, 침대 스프링이 자주 삐걱거렸다. 그간의 시체 같았던 잠이란 전적으로 약 기운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나도 그의 뒤척임이 여전해서 조금씩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다시 잠을 못 자면 먹이라며 김성준이 주고 간 수면제가 있긴 했지만 빈속에 먹이고 싶지는 않았다. 정 안 된다면 먹이는 수밖에 없겠지만, 전날 김성준과 벌인 실랑이를 생각하면 그가 순순히 먹으려 들지도 의심스러웠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한참을 망설인 끝에 고개를 돌리고 그를 살폈다.
놀랍게도 그는 쿠션 몇 개와 베개를 등에 받치고서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뒤척이다 못해 일어난 모양이지만 그게 더 걱정이 되었다. 몸은 인환을 향해 있었지만 눈은 감긴 채였다. 두통이 이는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이마를 누르고 있는 손가락이 보였다.
전신의 맥이 탁 풀리며 쑤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머리 아프니?”
흠칫.
일순 스톱모션을 취한 그대로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 보였다.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눈시울이 정면으로 인환의 것과 부딪쳤다.
“……많이 아파?”
“…….”
“……잠은 왜 또 안 자? 수면제라도 먹을래?”
“…….”
전신을 사슬처럼 옥죄는 시선으로 뚫어지게 굽어볼 뿐 그는 대꾸가 없었다.
“……머리 좀 만져줄까? 마사지 하면 두통이 좀 가실 거다.”
“…….”
사납게 밀쳐질까 겁이 나긴 했지만 용기를 내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무릎 위로 올라가 마주 앉은 자세로 손을 뻗었다. 뚫어지게 시선을 보내올 뿐, 인환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는 걸로 보아 일단은 허락을 한 모양이었다. 좀 더 용기가 생겼다. 그의 허벅지를 깔고 앉아 본격적인 마사지를 시작했다.
빗질하듯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고 관자놀이 부근부터 지압을 해나갔다. 깁스가 돼 있는 오른손이 새삼 답답했지만 할 수 없었다. 오른손은 그저 지지하는 정도로 그의 머리를 받치고 왼쪽 손가락에 정성껏 힘을 기울였다. 귀 뒤를 주무르고 정수리 쪽도 충분히 눌러주었다. 빳빳하게 굳어 있는 뒷목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풀어주었다.
딱딱한 표정이 자연스럽게 풀어지며 살며시 눈을 감는 그가 보였다.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이대로 잠을 재울 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비는 자신이 있었다.
“……됐어…… 그만해, 장인환.”
조금씩 호흡이 가빠질 무렵 나지막한 명령이 떨어졌다. 양쪽 관자놀이 근처를 지압하고 있던 인환의 두 손 위로 그의 크고 날렵한 손가락이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깁스가 돼 있지 않은 자신의 왼쪽 손을 입가로 가져가는 그가 보였다. 손바닥에 따스한 입김이 와 닿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손바닥 가운데를 거쳐 손가락 사이사이 좁은 틈을 파고들며 천천히 핥았다. 제법 오랜 세월의 막노동으로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이고, 물감과 기름들에 절어 샌드페이퍼마냥 거칠 대로 거칠어진 손이었다. 여간한 자극엔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 둔하다고 여겼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꿈틀거리는 축축한 생물이 지나다니는 곳마다 설핏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간지러움을 느꼈다. 그나마 못 참을 정도는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모든 동작을 멈춘 채 멍하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20센티도 채 되지 않을 거리를 두고서 마주하고 있어 어둑어둑한 조명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세한 수염 한 올조차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군데군데 흐릿한 얼룩처럼 남아 있는 멍 자국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새삼 인환의 넋을 잃게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의 그에게선 어쩐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인환 자신이 그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몹시도 작고 연약하게만 느껴졌다. 그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그토록 자신을 두렵게 만드는 그의 시선이 차단돼서일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진짜 원인은 다른 데에 있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 틈을 하나하나 꼼꼼히 핥던 혀가 이번엔 손가락을 차례로 빨기 시작했다. 앞니로 살살 물기도 하다가는 혀로 핥아 올리고, 마침내는 입안 깊숙이 빨아들이기도 했다. 내리 감은 속눈썹이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기다란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주린 듯이 손가락을 빠는 핏기 잃은 입술도 엄마 젖을 문 어린아이만 같았다. 오랜 시간을 들여 다섯 개의 손가락을 다 먹어치운 주린 아이가 마침내 마지못해 눈을 떴다.
먹물처럼 새카만 동공이 인환의 눈을 빨아들일 듯 응시하고 있었다. 최면을 거는 것만 같았다. 평소라면 두려움에 감히 들여다볼 엄두도 못 냈을 눈이건만 역시 공포감이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린아이인걸…… 그저 주린 어린아이인걸…… 멍하니 시선을 마주 보내며 비이성적인 생각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희미한 고통의 빛이 스쳐 가는가 싶더니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던 그의 시선이 문득 사라졌다. 그가 조심스럽게 인환의 상반신을 끌어안은 때문이었다.
포옹은 부드러우면서도 절실한 데가 있었다. 부러진 늑골을 피해 어깨와 허리 쪽에 둘러진 양팔이 조여들며 그의 단단한 품에 상반신이 밀어붙여졌다. 오른쪽 목덜미 위로 그의 얼굴이 떨어졌다.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는 코며 입술이 몇 번 부드럽게 비벼지는가 싶더니 그가 모든 동작을 멈췄다. 순간 시간마저 멈춰버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 멈춘 시간 속에서, 감각되는 것이라곤 그저 그의 몸뿐이었다. 늠름하고 단단한 수컷의 몸은 부드러우면서도 절실하게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한참 동안 꼼짝 않고 그의 심장 소리만을 들었다. 축축하고 뜨겁게 열이 올라 있는 친숙한 피부만을 꼼짝 않고 음미했다. 조금 지루해져서 맞닿아 있는 어깨 근육에 살짝 입술을 눌러보았다. 움찔 몸이 전율하며 그의 입술 사이로 흐릿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혀를 내밀고 살짝 핥아보았다. 부르르 몸을 전율시키는 것도, 아득한 신음 소리를 흘리는 것도 반복됐다.
재미가 있었다. 입술을 좀 더 아래로 내리니 딱딱하게 일어선 유두가 만져졌다. 망설이지 않고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신음소리가 좀 더 커지고 좀 더 절박해졌다. 인환을 품고 있던 두 팔에도 거센 힘이 가해졌다.
“……하지 마…….”
불만스럽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엔 정반대의 소원이 담겨 있었다(아니,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소원대로 멈추지 않았다. 멈추기는커녕 좀 더 정성껏, 헌신적으로 여기저기 상냥한 애무를 계속했다.
10년 전, 그를 기쁘게 했던 성감대를 기억해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리라. 줄곧 자신을 밀어내기만 하던 그였기에, 그런 그에게나 자신에게나 섹스는 그저 고통스러운 의식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을 상처 주기에 급급했고, 자신은 그저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애무해도 그를 기쁘게 만들 수가 없었다. 기쁘게 만들기는커녕 점점 더 자신에게 염증을 내고 싸늘해져만 가는 그를 자신은 그저 잔뜩 겁에 질린 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초조해하고, 안타까워하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는 결국 서서히 지쳐갔었다.
그랬다. 연인으로, 5년의 시간 동안 그와 섹스를 했지만 그가 기뻐하는 곳을 모르기는 지금이나 그때나 한가지였다. 애초부터 백지였던 것이 새삼 기억이 날 리 없었다. 그저 누구나 좋아할 만한 데를 장님이 길을 더듬듯 하나하나 더듬어갈밖에…….
“……안…… 하지 말라니까…….”
“…….”
“……읏……! 안 돼…… 아직…… 벌을 받아야…….”
“…….”
“……하지…… 마…… 아…… 으…….”
“…….”
“……안…… 아직…… 벌을 받아야만…… 용…… 서…….”
“…….”
“……그만하지 못…… 흐읏……! 으…… 좋아…… 아……!”
“…….”
“……아아……! 읍……! 거기…… 안…….”
“…….”
분명 기뻐하면서도 고집스레 도리질을 거듭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벌이니 용서니, 이미 귀에 인이 박일 지경으로 들어온 저주의 소리도 평상시처럼 그리 가슴을 후비지는 않았다.
언제든 벌을 받을 용의는 있지만, 어쩐지 이번 징벌은 자신보다 그를 더 괴롭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예전처럼 자신의 몸을 섹스 인형으로 이용하는 것이 자신에겐 더한 징벌이 된다는 것을 그는 모르는 걸까?
그저 허우적거리듯 입에 발린 부정의 소리만 낼 뿐 애무를 피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인환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
가슴팍과 목덜미를 오가며 그저 부드럽게 혀를 굴렸을 뿐인데도 엉덩이 아래 닿아 있는 그의 것은 이미 있는 대로 성을 내며 꼿꼿이 일어서 있었다. 부드럽고 절실했던 포옹이 풀린 지는 이미 오래였다. 이리저리 자신의 피부 위를 옮겨 다니는 인환의 머리카락 틈에 양손을 밀어 넣은 채로 그는 자지러지고 있었다. 꼭 감긴 눈까풀은 파르르하니 떨렸고, 반쯤 벌어진 창백한 입술 틈으론 황홀한 열락의 신음 소리가 거듭 터져 나왔다. 상반신이 점점 더 뒤로 넘어가며 활처럼 휘고 있었다.
신기했다.
이렇게 무방비할 정도로 의지를 허물어뜨리는 그를 보게 되리라곤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재회한 이래, 자신 쪽에서 먼저 그를 만진 일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지만,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효과에 스스로도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그의 건강 상태가 섹스를 해도 괜찮은지는 조금 걱정이 됐지만 적어도 칼끝처럼 날이 서 있는 정신을 안정시키기엔 꽤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오랜 여행 끝에 마침내 도달한 그의 입술에 정성껏 키스를 하며 인환은 끝까지 가보기로 결심을 굳혔다.
마음 한구석에서 여전히 징벌에 대한 욕구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인환의 키스와 애무를 견디고 있었다. 인환의 입안을 미친 듯이 유린하고픈 몸의 욕구와, 인환의 손길을 냉혹하게 밀어내고픈 심판자의 의지 사이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럴수록 인환은 점점 더 적극적으로 그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점점 더 적극적으로 그를 쓰다듬었다. 뱀처럼 그를 징징 감고 더더욱 품 안으로 파고드는 것은 물론이었다.
불감증인 몸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다.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이렇게 그저 흐릿한 옛 기억에 의존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필사적으로 움직이지 않아도 자연스레 몸의 감각이 가르쳐줄 테니 그 얼마나 수월한 작업이 될 것인가.
다행히 무시무시한 심판자는 의외로 자신의 몸짓 하나하나에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키스가 거듭될수록, 산산이 부서진 의지력의 파편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그로선 감히 상상도 못 해본 절대적인 흥분과 쾌락의 광풍에 느닷없이 내던져진 듯, 헐떡이며 흔들리며 갈팡질팡 인환의 공격을 견디고만 있었다.
시시각각 제정신을 잃어가는 늠름한 남자의 도톰하고 섹시한 입술을 빨고 또 빨았다. 빈틈없이 틀어막은 다음 뜨겁게 요동치는 혀뿌리를 쓸고 또 쓸었다. 깨물고 핥고 찔러댔다.
인환의 양쪽 관자놀이를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더니 알코올 중독자처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입가를 타고 내린 흥건한 타액이 턱을 지나 불룩 솟은 목울대 아래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타액의 자취를 좇아 망설임 없이 맹공격을 펼치자 흐느껴 우는 듯한 애절한 교성이 흘렀다.
광란의 도가니에 빠진 몸은 능동적으로 움직일 엄두조차 못 내는 것 같았다. 아랫배를 찌를 듯이 발기한 페니스 끝에선 희멀건 액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는 삽입을 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성난 파도에 휩쓸리기 직전의 익사자마냥 무의미하게 허우적거리거나, 손끝에 닿는 대로 인환의 머리와 등과 어깨를 미친 듯이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온몸은 경련하듯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가는 확 열기를 품은 채 새빨개지기도 했다. 지독하달 정도로 욕망을 칼같이 절제하는 평소의 그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목덜미에서부터 아랫배까지, 더 이상 자신의 혀가 닿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구석구석 빈틈없이 애무를 했다. 헤로인에 취한 중독자마냥 무기력하게 자지러지는 몸이 안쓰러운 나머지, 손이 미치는 한껏 팔을 뻗어 구석구석 어루만지기를 반복했다. 날 생선처럼 펄떡거리는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근육, 부드럽고 축축한 피부, 움푹 도드라진 혈관들을 따라, 깨물고 빨고 핥아주었다. 다시없을 헌신적인 키스를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절박한 팽창의 욕구에 전율하고 있는 늠름한 수컷의 자리에 도달했다. 자신을 품어줄 따스한 입구를 찾아 욕망은 한계까지 꿈틀거리고 있었다. 위협적인 기세로 사방에 으름장을 일삼고 있지만, 기실은 의지할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우윳빛 눈물을 흘리고 있는 가련한 생명체에 불과했다. 망설이지 않았다. 소중하게 입안에 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주기 시작했다.
“……아…… 으…… 흐윽……! 윽……! 아, 아, 아……!”
뻣뻣해진 고환을 굴리고 음경 끝을 핥았다. 귀두를 품고 목구멍 안쪽까지 힘껏 빨아들이자, 그는 온 힘을 쥐어짜듯 팔다리를 쫙 펼쳤다.
“……흐…… 흐악!! 큭!! 우…… 우앗!!!”
빳빳한 치모를 움켜쥐고 빼문 이에 살짝 힘을 가했다. 새하얗게 질린 입이 커다랗게 벌어지며 자지러지는 신음이 터졌다.
“……으…… 으…… 으아……! 아앗!!!”
어깨 아래로부터 허벅지까지 그의 몸이 활처럼 휘며 위로 튕겨 올라갔다. 반동 탓에 입술로 물었던 그의 분신이 불끈 요동을 치며 빠져나갔다. 재차 달라붙어 한껏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왼손가락으로 기둥을 쥐고, 요도 끝을 벌려 혀끝으로 쑤시고, 전후좌우 가리지 않고 물어뜯었다.
“……흐…… 그…… 으…… 인…….”
진저리를 치며 포효하던 그는 더 이상 교성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목구멍 깊숙이 몇 번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던 거대한 흉기에 욕지기가 느껴졌지만 기를 쓰고 참아냈다. 거의 도달해가고 있었다. 뜨겁고 비릿하면서도 씁쓸한 액체가 질금질금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한계 같았다.
갑작스레 뻗어온 그의 두 손이 사타구니 사이에 틀어박힌 인환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레 틀어쥐었다. 머리카락이 뽑히는 것만 같은 통증에 찔끔 눈물이 솟구쳤다. 극도로 부푼 페니스가 목구멍 안쪽을 깊숙이 찔러들었을 때, 그는 전격을 맞은 것처럼 파직파직 몸을 떨었다. 뻣뻣하게 굳은 그의 허벅지가 틈바구니에 낀 인환의 머리를 사정없이 조여댔다.
“……으…… 흐…… 인…… 환…… 인환…… 인환아…….”
용트림을 하듯 두서너 번 크게 휘었다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몸에서 봇물처럼 체액이 뿜어 나왔다. 입안이 타버릴 것만 같은 뜨거움이요, 격정이었다.
길게 여운을 끌며 분출은 몇 번에 걸쳐 계속되었다. 입안을 가득 채우고도 넘친 그것은 입가와 턱 언저리를 적시더니 목덜미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입안에 가득 채워진 비릿하고 씁쓸한 체액은 망설임 없이 목구멍 안쪽으로 삼켜졌다.
허벅지로 인환의 머리를 휘감은 채 그는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두 손으로는 인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어 모로 누운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였다. 분출이 잦아들면서 허벅지에 가해졌던 힘이 느슨해졌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기세로 틀어쥐고 있던 손가락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가까스로 머리를 들고 엉금엉금 기어 그의 몸 위로 올라갔다.
태아처럼 휘감긴 채 벌벌 떨고 있는 몸을 자신의 몸으로 덮었다. 폭풍처럼 거세게 헐떡이고 있는 입술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푹 젖은 채, 이마 위에 가닥가닥 달라붙어 있는 숱 많은 머리카락을 빗질하듯 쓰다듬었다. 온통 땀으로 미끈거리는 그의 몸은 달궈진 프라이팬처럼 뜨거웠다. 달래고 어르듯 그의 몸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늘 압도적인 느낌만을 주던 강하고 늠름한 몸이었지만, 어쩐지 보호해주어야 할 강아지의 그것처럼 정겨웠다. 알을 품는 새처럼 한껏 팔을 둘러 그의 몸을 끌어안고 그가 흥분을 진정시킬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자신도 좀 쉬어줄 필요가 있었다. 한계까지 밀어붙여진 가쁜 호흡에 폐가 아팠다. 속옷은 물론, 걸쳐 입은 티셔츠와 면바지는 땀으로 푹 젖어 불쾌했고, 그의 정액을 삼킨 목구멍도 간질간질한 이물감이 남아 불편했다. 턱과 입도 얼얼하고, 부러진 늑골도 뻐근한 통증을 주고 있었다.
그렇게 몸 구석구석은 삐걱거렸지만, 물론 기분만은 무척 상쾌했다. 순간일지언정 그를 지배하고 그에게 기쁨을 준 자신이, 용기를 내 끝까지 밀어붙인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더 이상 그가 두렵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문득 그가 웅크린 상반신을 펼치더니 인환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어왔다. 그를 덮치듯 안고 있던 인환의 상반신을 천천히 돌려 모로 누운 자세를 만들고는 이어 팔에 힘을 주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머리카락과 등줄기와 엉덩이 사이를 오르내리며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한 손가락은 여전히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증기기관차처럼 헐떡이던 그의 호흡이 차츰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마 근처에서 열기를 뿜어내며 발작과도 같은 키스를 거듭하던 입술이 좀 더 아래로 내려와 인환의 것에 포개졌다.
뜨겁게 물결치는 혀가 깊이 들어왔지만 그리 강렬한 키스는 아니었다. 부드럽게 포개거나 조금씩 인환의 것을 쓰다듬으며 그저 따스한 접촉만을 즐기는 듯했다. 대답처럼 마주 쓸어주자 기쁨에 겨운 신음이 아득하게 목울대를 울렸다. 흐느낌 소리처럼 들렸다. 정말로 눈을 뜨고 확인을 한다면, 울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볼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깨와 엉덩이 근처를 배회하던 손이 허리춤으로 되돌아와 티셔츠를 벗기기 시작했다. 정말로 삽입 섹스를 하려나 보다 하고 순간 난감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냄새…… 심하게 날 거야…… 일주일 넘게 샤워를 못 했는데…….”
사실이다. 깁스한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세수를 하는 것만도 커다란 일거리였다. 다른 타박상들은 샤워가 가능할 만큼은 거의 아물었지만, 부러진 손목과 늑골을 가지고 혼자 샤워를 하는 데는 여전히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땀이 별로 많지 않은 체질이라 다행이었지만 계절 또한 여름이었다. 어떡해도 몸에서 나는 쉰내는 지울 수 없었다.
“……정말 더러울 텐데…….”
곤혹스럽게 덧붙여봐도 그의 손길은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었다. 단념하고 몸을 조금씩 들어 그가 옷 벗기는 걸 도왔다. 티셔츠와 러닝에 이어 물감 얼룩 범벅인 면바지와 팬티가 벗겨나갔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다음을 기다렸지만 그는 알몸이 된 인환을 그대로 포옹했을 뿐이었다. 벌거벗으니 옷을 입고 있을 때보다 불쾌한 느낌은 덜해서, 인환도 기꺼이 그를 마주 안고 촉촉하고 부드러운 피부 감촉을 즐겼다.
한동안 부드럽게 안고만 있던 그가 천천히 인환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이마와 턱과 목덜미를 거쳐 땀이 맺혀 있는 코언저리를 오랫동안 꼼꼼하게 핥았다. 입술 주변으로 돌아와서는 느리고 느린 한숨 같은 키스를 했다. 침대 위에 똑바로 눕혀 덮치듯 안아오기도 하고, 그의 몸 위로 올려 애처럼 어르듯 쓰다듬기도 하고, 꼭 끌어안은 채 침대 위를 뒹굴기도 했다. 그저 그의 타액 이외엔 다른 이물질이라곤 잡히지 않을 지경으로 끊임없이 얼굴과 목을 핥아대더니, 뒤에서 꼭 끌어안은 채 가슴과 아랫배와 성기를 주물럭거렸다.
한동안은 이 몹시 상냥하고도 플라토닉한 애무들이 광적인 섹스로 이어질까 조마조마했지만 역시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뒷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팔다리를 한껏 뻗어 인환을 감싸 안은 자세 그대로 그는 점차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인환의 머리를 감싼 오른팔에서도, 마치 장난감인 양 끊임없이 생식기를 만지작거리던 그의 왼손에서도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업어 가도 모를 숙면이 그의 주위로 포근히 내려앉고 있었다.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막연히 짐작했던 것처럼, 섹스가 그의 곤두선 신경을 어느 정도는 누그러트린 모양이었다.
활짝 열린 창문 틈으로 초여름 밤의 상쾌한 바람이 냉수처럼 흘러들었다.
벌거벗은 몸에 설핏 추위가 느껴졌기에 발치에 내팽개쳐져 있던 이불을 끌어다 그와 자신의 몸 위에 덮었다. 시계는 새벽 2시 정각이었다. 평온한 진동으로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흡족한 잠이 밀물처럼 흘러들고 있었다.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매달리는 자각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흐려졌다. 평온한 어둠이었다.
“아유, 정말 다행이세요, 사장님! 정말 많이 걱정했는데…….”
“……예, 아주머니. 여러모로 귀찮게 해드리는군요.”
“에구, 귀찮기는요! 그저 그만하신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뭐, 자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지금이라도 장 봐다가 만들어드릴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이것도 맛이 아주 좋은걸요.”
“에이그, 그래도 속이 많이 허하실 텐데……
“내일까지는 그냥 죽을 먹이는 게 좋습니다, 아주머니. 정상 식사로 돌아가더라도 2∼3일 정도는 맵거나 자극성이 있는 건 주지 마세요. 녀석, 위 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아아……. 예, 그렇군요…… 신경 쓰겠습니다, 박사님.”
“부탁합니다.”
“아니요, 제 일인걸요…… 차 더 드릴까요, 박사님?”
“아니, 됐습니다. 이제 출근해야죠.”
“…….”
“……갑자기 너무 많이 먹지 마라. 아무리 죽이라도 2주간이나 단식을 한 놈이…….”
“……내가 언제 단식을 했다고 그래…….”
“그게 단식이 아니면 뭐냐, 새꺄.”
“…….”
“……일 바로 시작하지 마. 하루 이틀은 집에서 푹 쉬어둬.”
“…….”
“어머, 장 선생님 기침하셨네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선생님?!”
침실 문 앞에서 미적거리던 인환을 먼저 발견한 이는 파출부 아줌마였다. 아줌마가 기운찬 인사를 던지자 주방 식탁에 앉아 있던 건장한 남자 둘의 시선이 일제히 인환을 향해 다가들었다.
“……오셨어요, 아주머니……? 김 박사 일찍 왔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장 선생님?”
“아아……. 위야, 밥 먹는 거니? 좀 괜찮아진 건가?”
“…….”
블랙홀처럼 깊은 시선이 한순간 인환의 전신을 빨아들였지만 그뿐이었다. 인사를 그대로 씹은 것과 동시에 그의 시선은 다시금 식탁 위로 조용히 떨어졌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더 이상 링거도 필요 없고, 이틀 정도 약만 복용하면 그럭저럭 괜찮아질 겁니다.”
핸섬한 의사가 대신 던진 담담한 대꾸에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모처럼 만의 햇빛이 눈이 부실 지경으로 집 안 가득 들어와 있었다.
시원한 블루 그레이의 여름용 슈트를 걸치고 있는 핸섬한 의사는 풍성한 빛의 세례를 받아 유달리 아름답고 생기에 넘쳐 보였다. 맞은편에 앉아 말없이 죽을 떠먹고 있는 그의 무겁고 음침한 인상에 비하면 블랙&화이트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물론 그가 한결 생기를 되찾은 낯빛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여타의 눈부신 양기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였지만. 겨자색 폴로티에 크림색의 리넨 팬츠를 산뜻하게 걸친 탓인지, 아직도 좀 흐릿한 얼룩으로 남아 있는 멍 자국과 눈 밑의 다크 서클에도 불구하고 그는 몹시 화사해 보였다. 바로 이틀 전에 사색이 된 얼굴로 구급차에 실려 온 남자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식사하셔야죠, 선생님? 밥 지금 차릴까요?”
거실 바닥을 대걸레로 닦고 있던 아줌마가 숨찬 목소리로 물어왔다.
“우선 좀 씻고 나오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후후…… 예, 그러셔요.”
2시가 넘어서 잠이 들었으니 늦잠을 잔 것은 이해하지만 아침 9시를 넘긴 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때려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을 잤었다. 그가 먼저 일어나 침실을 나가는 것도, 아줌마나 김성준이 온 기척도 전혀 못 느꼈다.
가출 소동을 벌이다 집에 돌아온 지 오늘로써 9일째……. 그가 안정을 찾고 제대로 잠을 자기 시작함으로써, 자신 또한 저 온몸을 짓눌러오던 괴로운 압박감으로부터 홀연 벗어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풋내기 보디가드가 안 보이는 것도 이상했다. 아침부터 들이닥쳐서는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자신의 꽁무니만을 뒤쫓고 있을 텐데 말이다.
막 자리에서 일어서는 김성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곤 바로 욕실로 직행했다.
정말로 오늘만은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역시 혼자서는 무리였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한 뒤, 머리라도 감아볼까 하고 세면대 위에 몸을 기울였지만, 아니나 다를까, 부러진 늑골에 무리가 왔다. 머리도 포기해야만 했다. 그나마 멍 자국이 거의 사라져가는 것에 위안을 삼고 욕실을 나왔다.
“……와서 식사하세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거실 창가에서 미적거리고 있던 인환을 재촉했다.
김성준은 돌아갔고 아줌마는 2층을 청소 중이라 주방엔 그 혼자뿐이었다. 식사는 마친 모양으로 묵묵히 녹차 티백이 담긴 머그잔을 기울이고 있다. 평온한 어조 하며, 다시 돌아온 반(半)존댓말 하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그의 상태를 드러내는 증거들이 샘물처럼 퐁퐁 솟구치고 있으니 그저 안도의 숨을 내쉴밖에.
여전히 좀 무섭지만, 그래도 한결 편해진 심정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자신이 있었다.
“……아직도 안색이 좀 나빠. 방에 들어가서 쉬지 그러니?”
차를 다 마시고도 자리에서 일어설 줄 모르는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어본다. 그를 걱정해서기도 하지만 숨은 저의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식사하는 내내 뚫어져라 주시를 해오니,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영 모르겠다. 그나마 어제까지처럼 온몸을 옥죄는 쇠사슬이 아닌 것에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지만.
“……내 시선에 익숙해지세요. 이젠 그럴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두근…….
귀신이다.
“……지…… 진짜 걱정이 돼서도 그러는 건데…….”
“…….”
계속 말해봤자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아서 그저 밥 먹는 데만 열중했다.
“……그렇게 하는 거야.”
흠칫.
속삭이는 듯 나지막하게 뱉어지는 반말에 수저를 떨어트릴 뻔했다.
“……그렇게 날 즐겁게 해주면 돼. 아주 좋았어, 어젯밤.”
“…….”
“……기분이 좋아졌으니 가출 건은 이제 용서해주지.”
“…….”
고개를 들고 그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쩐지 묘한 수치감까지 느껴져서 인환의 얼굴은 희미하게 붉어지기까지 했다. 역시 잘한 짓이었나 보다.
“……경호원은…… 그럼 이제 안 오는 거니……?”
“……그래.”
“……잘됐네……. 고…… 고맙구나…… 그동안 좀 답답했거든…… 무…… 물론 내 잘못이긴 하지만…….”
“…….”
“……앞으론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 약속한다, 위야.”
“…….”
“……진짜야…… 정말 다신 그런 비겁한 짓은…… 무…… 물론 잘 믿기 힘들 테지만…… 그래도…….”
“닥치고 먹기나 해.”
변명이 듣기 싫은지 쌀쌀맞게 말을 자른다. 가슴이 철렁해선 한동안 부지런히 수저만 놀렸다.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도 않은 모양으로, 그의 서늘한 침묵은 인환이 밥을 거의 다 먹을 무렵까지도 계속되었다.
마침내 수저를 놓고 용기를 내 그에게 시선을 가져갔다가, 인환은 문득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식탁 위로 깊숙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가 보였다.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 올라간 그것이 미소라는 걸 자각하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굽어보리라 여겼던 터라, 그의 부드러운 미소는 놀라움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더구나, 사내다운 단단한 목덜미며 양쪽 뺨 언저리엔 불그스름한 홍조까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문득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휘둥그레진 눈시울이 인환의 멍한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극심한 동요가 그 새까만 동공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홍조가 더더욱 짙어진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이어 야수처럼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통에 인환의 심장은 또 한 번 철렁 내려앉지 않을 수 없었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지 뭘 보고 있는 거야?!!!”
벽력같은 고함 소리에 자동인형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뒤를 돌아본다거나, 어물어물 사과의 말을 흘린다거나 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저 포식자에 쫓기는 토끼처럼 부랴부랴 2층 아틀리에로 뛰었다.
“……어머, 벌써 작업 시작하시게요?”
청소기를 밀고 있던 아줌마가 환한 미소로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어…… 아, 예……. 처…… 청소 마저 하세요, 아주머니. 청소 마치시면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선생님.”
작업대 의자에 앉아 윙윙거리는 청소기의 소음을 멍하니 들었다. 세동을 거듭하는 심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너무나 부드럽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도무지 그의 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것…….
무언가 기분 좋은 추억을 반추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의도하진 않았지만) 자신은 그 소중한 추억을 흙발로 짓밟았던 것일 테고.
……어떤 것일까……. 그로 하여금 그토록 부드러운 얼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추억이란 것은…… 사람이란 것은……. 그녀일까……? 그녀와의 사랑의 기억일까……?
찌릿 하고 심장 근처가 울며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아, 그래. 더 이상은 곤란하다. 더 이상 생각하면 안 돼……. 안 돼……. 생각하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달려드는 우울하고 불안한 상념들을 털어내기 위해 인환은 마치 자해라도 하듯 한참 동안 숨을 참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기억’은, 단 몇 걸음이라도 그 언저리로 접근해 들어가는 즉시 단숨에 자신의 전신을 녹초로 만들어버리는 어마어마한 뇌관이었다. 얄팍하고 여린 보호막에 가린 그것은, 늘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언제라도 자신을 쓰러트릴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언제가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 최후의 카운터는 필경 ‘그것’이 될 터였다.
그랬다.
추측도, 분석도 필요 없었다.
그 일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게 무어가 됐든 그저 꽁꽁 묶어 아래로 내던져야만 한다. 적어도 삶을 택하는 동안엔, 아니, 살아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동안엔 자신은 ‘그것’을 어떻게든 깊숙이 봉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아래로, 아래로…… 더 이상 아무것도 빠져나오지 못할 새까만 블랙홀에다 완전히 봉인해버리면 그만인 거다. ……그리고 그에 대한 죄과는 평생이 걸리더라도, 아니, 그 이상이 걸리더라도 최선을 다해 갚아나가면 그만인 거다…….
“……그만하세요…… 물리 치료 받을 시간입니다…….”
물감 범벅이 돼서 화폭 위에 뭉개지고 있던 손바닥이 느닷없이 빼앗겼다. 손바닥 도둑은 헐떡이듯 숨을 고르고 있는 인환의 코앞에서 약간 곤란한 기색으로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갑자기 침입하는 방해꾼들에겐 언제까지나 익숙해지지 않는 안타까움이 있다. 슬픔도 있다.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자, 고통과의 직면이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며 기다란 심호흡을 되풀이해서 몸에 남아 있는 비현실적인 느낌을 털어냈다.
거의 마지막 작업에 돌입해 있던 Light Over Grey’의 캔버스와 그의 얼굴을, 한동안 저울질하듯 번갈아 응시하다가 곧 체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출 벌칙을 그만둔 시점에서 그는 다시금 인환의 작업 장면도 훔쳐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언제 아틀리에로 숨어든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가라앉은 얼굴 표정에선 자신의 그림 냄새가 났다. (그림엔 문외한인) 세속적인 구경꾼에게도 그림의 분위기가 촉촉하게 스며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예술의 위대함이 아니면 설명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기적과 다름없을 것이다.
아침에 주방에서 헤어질 때 모습 그대로, 그는 겨자색 폴로티에 크림색의 리넨 팬츠를 걸치고 있다. 낯빛은 아침보다도 한결 좋아 보였다. 역시 강철의 회복력을 지닌 놀라운 남자가 아닐 수 없다.
“……손 좀 닦고 내려갈게…….”
“……기다릴 테니 닦고 오세요.”
아틀리에 한구석에 연결된 미니 욕실 겸 화장실 문을 슬쩍 곁눈질하며 대꾸한다. 먼저 내려 보내고픈 인환의 속내를 속속들이 읽고 있는 모양이다. 또한 질 나쁜 남자가 아닐 수 없다.
씻고 오라면서도 여전히 틀어잡고 있는 왼손이 신경 쓰인다. 그의 손가락에까지 물감 얼룩이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 놔줘야지…….”
어눌하게 부탁하자 마지못해 떨어져 나간다.
삼켜버릴 듯 활활 타는 호색한의 시선을 등에 느끼며 작업 앞치마를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뒤통수가 바늘로 쿡쿡 쑤시는 것만 같았다.
대충 헹구고 나오니 그의 살피는 듯한 시선이 물방울이 뚝뚝 듣는 왼손에 머물렀다. 살짝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채 덜 씻겨나가 여기저기 거뭇한 다크 그레이의 얼룩이며, 손톱 틈새에 때처럼 박혀 있는 물감의 잔재가 못마땅했나 보았다.
“오른손을 못 쓰니 여러 가지로 불편하겠군요.”
“……그냥 뭐…… 그래도 많이 불편한 건 아니니까…… 어차피 그림은 양손으로 그려 버릇해서 괜찮아.”
“……악취가 심해요. 머리카락에서도 그렇고 몸에서도……. 물리 치료 끝나고 좀 씻겨드리겠습니다.”
두근…….
“……그…… 그래주면 나도 고맙지…….”
절대로 고맙지 않지만, 입에 발린 소리를 아끼지는 않는다. 아래층까지 가는 얼마 안 되는 거리. 거의 달라붙을 듯 옆에서 보조를 맞춰오는 그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지기 위해 기를 쓴다.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그에게 찔리고 보니 역시 좀 부끄러웠다.
차라리 두들겨 맞는 게 물리 치료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거라고 매번 생각하곤 한다.
힘 좋은 남자 치료사는 가혹하달 정도로 여지없이 밀어붙였다. 늙은 뼈라서 붙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빨리 낫고 싶으면 잘 따라오라는 뼈(!)아픈 직언도 서슴지 않으며 인환의 눈물을 쏙 뽑아내곤 했다. 게다가 오늘은 그가 치료의 전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바람에 유달리 힘들게만 느껴졌다.
치료를 받는 내내 그는 우울한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낸 상처이니 여러 가지 상념들이 스쳐갈 것은 분명했지만, 당연히 속내를 읽긴 불가능했다. 심판자로서 자신의 고통을 즐기는 것인지, 아니면 그나마 약간의 동정심과 회한을 품고서 빠른 회복을 비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어느 쪽이든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어서, 줄곧 터지는 신음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했다.
한 시간에 가까운 치료를 겨우 마치고 시계를 보니 정오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줌마는 장을 보러 나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물리 치료사를 돌려보내고 그에게 식사 의향을 묻자 배가 고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를 위해 죽을 데우고, 아줌마가 그사이 새로 장만한 맛깔스러운 반찬들을 식탁에 차렸다.
“싫더라도 당분간은 부지런히 드세요. 사골국은 뼈가 붙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여전히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인환을 건너다보던 그가 식사 중 뱉은 유일한 말이었다. 아줌마가 솜씨 좋게 우려준 사골이지만, 본래부터 좋아하지 않던 음식이라 자꾸만 꾀를 부리고 있었다. 괴로웠지만 누구 명령인데 무시하겠는가. 반쯤 남은 밥공기에 남은 국을 붓고 꾸역꾸역 삼켰다.
“……씻겨드린다고 했죠?”
조용한 가운데 식사가 끝나자, 그가 버릇처럼 막 아틀리에로 올라가려던 인환의 팔을 붙들었다.
대꾸할 틈도 없이 욕실로 끌려 들어갔다.
욕실 문을 닫느라 인환의 팔을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이 잠시 떨어졌다. 무심코 돌아서서 셔츠 단추를 풀려는데, 뻗어온 우악스러운 팔이 갑자기 허리를 끌어안는 바람에 기겁을 했다.
등 뒤로, 그의 딱딱한 가슴팍이 찍어 누를 것처럼 달라붙고 있었다. 엉덩이 근처에 비벼지기 시작한 그의 하반신은 이미 한계까지 부풀어 있었다. 제대로 놀랄 겨를도 없이 고개가 뒤로 꺾이더니 입술이 틀어막혔다. 숨을 고를 틈도 없었다. 다급하고 허기지고 막다른 욕망이었다.
“……흐…… 움…… 위…… 흡……!”
키스라고도 하기 힘든 혀뿌리의 무자비한 공격에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졌다. 뒤에서 안겨 고개가 꺾인 채 키스를 받고 있는 자세도 괴롭기 짝이 없었다. 허우적거리듯 지지대를 찾아, 친친 감아오는 그의 포옹에서 벗어나보려고 했지만 철통같은 그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투둑!
셔츠 단추가 단숨에 뜯겨나갔다. 정조대 마냥 셔츠 아래 꼼꼼히 챙겨 입은 러닝 속옷이 그의 짜증을 유발했다. 이리저리 미친 듯이 움켜쥐었다가는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벗기기를 포기했다. 고무줄 반바지는 좀 더 사정이 수월했는지 팬티와 함께 너무나 손쉽게 무릎 아래로 떠밀려 내려갔다.
한 손은 인환의 턱을 움켜쥔 채 아사자의 배 속 같은 키스를 하고, 나머지 한 손은 스스로의 바지 벨트를 푸느라 회오리를 일으켰다. 바로 삽입을 할 모양이었다. 난처하고 황망한 건 둘째고 일단 겁부터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만 보니 또 항문을 찢어발길 가세였기 때문이다.
잔뜩 몸을 굳히고 기다렸지만 불기둥처럼 용트림을 하는 물건은 그저 엉덩이 근처를 찍어 누를 뿐 별다른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양손으로 둔덕을 밀고 페니스를 쑤셔 넣긴 했어도 내부까지는 뚫고 들어오지 않았다.
안도의 숨을 삼키는 사이, 거대하게 부푼 페니스와 고환이 까칠한 치모와 더불어 아플 정도로 엉덩이를 비벼대고 있었다. 허기진 손길은 인환의 몸을 이리저리 배회하며 스스로의 갈증을 충족시키고 있었다. 아랫배와 가슴과 생식기들이 힘 조절이 불가능해진 그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의해 무방비하게 주물러졌다. 피스톤질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지만 이미 극단으로 몰려 있었던 상태를 반영하듯(아마도 식사하는 내내 발기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숨 쉴 틈 없이 입안을 유린하던 키스가 마침내 떨어져나갔다. 붕어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부족했던 공기를 잔뜩 들이마셨다.
“……흐…… 으…… 우앗……! 크…… 으으…… 아…… 아아…… 아악!!!!!”
비명에 가까운 포효를 내지르며 그가 토정하고 있었다. 빈틈없이 밀착한 탓에 그가 흘리는 단말마의 전율은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전달이 되었다. 엉덩이 사이를 비처럼 주룩주룩 적시며 떨어지는 체액을 따라 그의 눈물겨운 쾌락이 자신의 몸속 구석구석까지 일제히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한동안 거센 오르가슴에 몸부림치던 그가 인환의 몸을 끌어안은 그대로 욕실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타일 위를 덮고 있는 짙은 군청색의 러그는 감촉이 부드러워 다행이었다. 얼얼하게 열이 나는 엉덩이가 진정되는 느낌에 피식 쓴웃음이 흘렀다. 아래가 찢어지면 며칠은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늘 이런 패턴이면 그야말로 언제라도 기쁘게 몸을 대줄 텐데…….
등에 밀착돼 있는 그의 몸이 뜨겁다.
상쾌한 코롱과 샴푸 냄새에 섞인 은은한 살 냄새가 새삼 자신의 더러움을 자각시켜서 마음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뒷목덜미부터 앞의 쇄골까지 짓누르듯 비벼대며 핥고 있는 그의 키스도 찝찝하기만 하다. 씻어주기는커녕 냄새 나는 몸을 언제까지 빨고 어루만지기만 할 건지 답답하기도 하다.
“……그만 씻고…….”
“…….”
“……위야, 정말 나 찝찝해서…….”
“…….”
조심스레 재촉해보지만 굶주린 호색한은 자신의 몸에서 입술을 뗄 생각도 않는다. 빨아먹다 못해 와구와구 뼈째 다 씹어 먹고 나서야 씻어줄 모양이다.
뱀처럼 자신을 휘감아 똬리를 틀고 있는 그의 정강이를 멍하니 굽어본다. 그것이 싸고 있는 자신의 비쩍 마른 병신다리는 명함도 못 내밀 압도적인 강함이요, 크기다. 물결을 이루며 피부를 덮고 있는 까칠한 체모도 수컷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그 아래 이어진 군함처럼 거대한 발이라니. 이것도 자신을 압박하기는 억센 정강이 못지않다.
“……냄새…… 지독할 텐데…….”
“…….”
“……그만 씻으면 좋을…….”
“……장인환.”
흠칫.
욕망으로 허스키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용히 귓전을 두드렸다.
“……연인을 잃고 가장 못 견디게 하는 것이 뭔지 아나?”
“……?”
유난히 달콤하고 부드러운 어조가 위화감을 준다. 여전히 뒤에서 뱀처럼 인환을 휘감은 자세로 애무를 계속하고 있어 표정을 살필 수도 없다.
“……얼굴도, 몸의 형태도, 목소리도…… 따스하고 촉촉한 피부 감촉들도 모두 다 잊혀도 끝까지 살아남아 가슴을 후벼대는 게 뭔지…….”
“…….”
“……알아, 너……?”
“…….”
“……그건 냄새지. 콧구멍과 입술과 섹스와 땀구멍들에서 배어 나오는 냄새…… 깊숙이 박아 넣을 때…… 아찔하게 콧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생명의 냄새…… 시큼한 몸의 냄새…….”
“…….”
“……미치도록 달콤하고 아프도록 섹스를 죄는 음란한 냄새…….”
“…….”
“……다 잊혀도…… 기를 쓰고 잊으려고 몸부림쳐도 그것만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 왜냐하면 그건 저 안쪽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오거든…… 냄새는…… 연인의 살 냄새는…… 긴 시간 동안 자신도 모르게 차곡차곡 부풀어서 시커멓게 동공을 만들어버리지.”
“…….”
“……동공은 여기 배 속 깊은 곳에 있어…… 냄새는 거기서 나와…… 안에서…… 자기의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오기 때문에 잊고 싶어도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되지. 잊을 만하면 불쑥불쑥 튀어나와서는 톱날처럼 온몸을 긁어대며 지독한 아픔을 주는 거야…….”
고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물겹도록 상냥한 어조였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쓰라린 회한을 절절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 자신의 죄도 그의 회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에 그의 고통은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아프게 흘러들고 있었다.
“……저기…… 그렇게 그리우면 다시 시작해보지그러니……?”
용기를 내서 대꾸를 던지자 움찔 긴장하는 그의 몸이 느껴졌다.
“……그녀…… 신애 씨…… 아직 재혼한 건 아니지?”
“…….”
“……그야…… 헤어지기까지 여러 사정이 있었겠지만…… 너 정말 좋아했잖니…… 그녀도 그렇게 널 사랑했는데 쉽게 잊을 것 같진 않구나.”
“…….”
“……그녀, 재혼한 거니?”
“…….”
“……조금도 회복할 방법이 없어……?”
하.
뒷목덜미에 눌려 있던 그의 입술에서 문득 실소가 터졌다. 부드럽게 터진 웃음은 이상할 정도로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하, 하, 하 하는 중저음의 울림이 토해질 때마다 맞닿아 있는 인환의 몸에도 거듭 부드러운 진동이 전달되었다. 괴로운 듯하면서도 스스로는 멈출 수 없는 듯, 그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헐떡이며 흐느낌 같은 실소를 거듭했다. 인환의 상반신을 감고 있던 그의 팔에 좀 더 힘이 가해지고 나서야 그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글쎄, 아직 안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언젠간 하게 되겠죠.”
어딘가 서늘해진 어조였다. 당연한 것처럼 던져진 존댓말이 갑작스럽게 멀어진 거리를 느끼게 했다.
“……그래. 그럼 더 늦기 전에 잡아, 위야. 정말 놓치기 싫은 거면…… 가서 무조건 필사적으로 빌고 매달려보라구.”
진심으로 기원해주었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위야…… 정말로 네가 행복해지길 바라…….”
그랬다. 진심으로 바랐다. 온몸이 죄어들 만큼…… 바라고 또 바랐다.
“……정말 미안해…… 미안하구나……. 사과하는 것도 염치가 없지만…… 그래도…… 결국 그렇게 되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 위야…… 미안해…….”
“…….”
아랫배와 어깨를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애무를 거듭하는 그의 크고 날씬한 손에 자신의 것을 포갰다. 목이 멜 만큼 절실한 염원을 담아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씻겨줄게, 인환아…… 돌아서봐…….”
묵묵히 인환의 애무를 방관하던 그가 속삭이듯 명령했다. 양쪽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 들어온 그의 손이 앉은 채로 인환의 몸을 돌려세웠다. 느리고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단추가 뜯겨 너덜너덜해진 반팔 코튼 셔츠 아래, 러닝만을 걸친 우스꽝스러운 몰골은 그가 완전히 나신을 만들자 차라리 보기에 괴롭지 않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윗옷만 걸친 민망한 모습임에도 아름다운 품위를 잃지 않는 그와는 어찌나 대조적인지!
“……이런 건 왜 입나? 벗기기도 힘들고 보기도 흉한데…….”
새하얀 러닝을 목 위로 벗겨내며 그가 불평한다. 속삭이는 듯한 어조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안 입으면 배가 아파서…….”
“……배가?”
“……나 신경성 위염 있잖니…… 아니, 하긴 넌 잘 기억 못 하겠구나…….”
“…….”
“……그게…… 속옷으로 배를 싸주지 않으면 꽤 고생스럽지.”
“……10년 전엔 저 따윈 입지도 않았었잖나.”
“……하하, 그땐 철이 없었으니까…… 멋 내기에만 혈안이 돼서……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정신이 없었거든. 절대로 속옷 따윈 안 입었었지. 너 가고 난 다음 날은 늘 설사를 해야 했어……. 하하, 정말 어렸지…….”
“…….”
물리 치료사가 단단히 감아준 붕대를 조심스레 풀어헤치고 있던 그의 손길이 잠시 멈칫하더니 조용히 시선을 맞춰온다.
“……그래도 정 보기 거북하면 안 입을게, 위야. 가뜩이나 추해진 몸에 옷 꼴도 말이 아니면 안을 맛이 안 나겠지……?”
“필요 없어.”
“……?”
“……그건 몰랐을 때 얘기지. 입고 지내.”
“……괜찮은데…….”
“그만해. 앞으로 안 입고 있으면 맞을 줄 알아.”
“…….”
위압적으로 변한 어조뿐 아니라 표정까지 구겨져 있어서 인환은 순간 서리 맞은 배추처럼 풀이 죽었다. 자신도 모르게 너무 허물없이 수다를 떤 것은 아닌가 새삼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붕대를 다 푼 그가 담담히 스스로의 옷마저 벗기 시작해서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가 일시적으로 친절을 보인다 해도 그건 그의 변덕일 뿐, 자신을 용납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혐오요 증오 자체인 존재가 애교랍시고 자신에게 꼬리를 살랑거린다면 그 얼마나 꼴사납고 역겹게 보일 것인가. 주제넘게 다가섰다가는 그 몇 배의 보복이 되어 돌아올 터였다. 그랬다. 잊으면 안 된다. 지금 이 몸의 상처 또한 고스란히 그의 작품이었다. 몸 안에 새겨진 그의 무자비한 주먹질과 발길질의 감촉은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할 선명한 현실이었다.
머리를 감고, 몸에 물 칠을 하는 정도의 가벼운 샤워일 뿐인데도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 그의 손길이 유난히 느리고 꼼꼼했기 때문이다.
깁스한 팔이나 아직 덜 아문 상처 주위는 세심히 피해 가면서 비누 거품이 칠해졌다. 반대로, 발톱 사이부터 귓속까지 멀쩡한 곳이라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꼼꼼하게 닦여나갔다. 욕조에 비스듬히 기댄 채 머리를 안으로 기울이자, 눈물겨울 정도로 다정한 손길이 다가와 애무하듯 샴푸를 했다. 지그시 눌리고 문질러지는 두피에 나른하게 졸음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의 손길이 사타구니 사이와 엉덩이 계곡 숨은 주름까지 파고들었을 땐 역시 수치를 느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마침내 모든 세척이 끝났을 때는 그 역시 거품투성이가 되었다. 스스로를 씻는 데는 물론 채 1분도 걸리지 않은 그였다. 온몸의 물기를 닦아주고 헤어드라이어까지 동원해 꼼꼼히 머리까지 말려준 그였지만, 스스로를 위해선 마른 타월 한 장 걸치지 않았다. 물리 치료사보다 더 완벽한 솜씨로 가슴에 붕대를 감고, 커다란 바스 타월로는 누에고치처럼 온몸을 둘둘 말아주었다. 물음이 담긴 시선을 못 본 체하며 그가 그대로 인환을 안아 들었을 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 옷 입고……! 아줌마 볼 텐데!!”
벌거벗은 몸을 하고 거침없이 욕실을 나섰을 때는 당황을 넘어 기겁을 할밖에!
“……아까 돌려보냈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두근…….
담담한 대꾸가 떨어진 것은 이미 거실 한가운데로 걸어 나온 직후의 일이었다.
“……내일도 오지 말라고 했다. 종일 섹스만 할 거니까 아무래도 불편하겠지…….”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보름 동안 쉰 몫까지 몽땅 다 받아낼 테니 각오해, 장인환.”
다시금 딱딱하고 위압적으로 돌변한 목소리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인환의 거부감이라거나, 그럼에도 준엄하게 판결을 내릴 냉혹한 심판자로서의 의무를 새삼 자각한 모습이었다.
“……안아봐…… 어젯밤처럼 적극적으로…….”
침실 문을 발로 차 열며 그가 명령했다.
“……기뻐하는 척해…….”
침대 위에 몸을 겹치며 그가 애원하는 척했다.
“……사랑하는 척하면 더욱 좋겠지…….”
다리를 벌리고 깊숙이 파고 들어오며 그가 사랑하는 척했다.
사랑하는 척…… 흐느끼듯 전율을 흘리며 결합을 기뻐했다.
연인인 척…… 나무뿌리처럼 다리를 얽고 결합을 흔들기 시작했다.
은은한 물결처럼 흐릿하고 감미롭게…… 종소리 같기도, 음악소리 같기도 한 쾌락을 흘리기 시작했다.
섹스를 하기엔 지나치게 밝은 햇빛이었다.
창문 너머, 정원의 나무와 꽃들은 절정을 이루며 제 생명을 뽐내기에 바빴다. 온통 기쁨과 사랑만이 있는 척했다.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