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2003년 6월. 문위(文偉) (39/129)

15. 2003년 6월. 문위(文偉)

팔을 허우적거리며 미친 듯이 끌어들이려 하는데도 잡혀오는 건 그저 공기뿐이었다. 

서늘하고 버석버석 메마른 공허에, 익숙한 불안감이 불쑥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아프도록 뛰고,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팠다. 아무리 기를 쓰고 들이마시려 해도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것처럼 짧고 빠른 호흡이 영원히 되풀이됐다. 안 될 것 같았다. 위는 이를 악물고 수렁 같은 잠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기를 썼다.

눈이 번쩍 뜨였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커먼 밤의 장막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능처럼 옆을 더듬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트에 진저리가 쳐졌다. 악몽 속에서부터 이미 빠르게 뛰기 시작하던 심장은 여전히 격렬한 세동을 거듭하며 묵직한 통증을 주고 있었다. 전신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침착해야만 했다. 신경증은 이제 버리기로 굳은 결심을 하지 않았나. 그는 도망치지 않는다. 절대로, 절대로 다신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떠날 리가 없다. 자신이 용서를 하지 않는 한 그는 영원히 자신의 것이다…….

하나하나 숫자를 세가며 필사적으로 자기암시를 했다. 조금씩 조금씩 앞이 밝아지며 빛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실제로는 침실 문틈으로 흘러드는 거실의 불빛일 테지만 마치 화사하게 웃는 그의 얼굴인 양 착각이 일었다. 길고 긴 안도의 한숨이 눈물처럼 나왔다. 소중한 이가 연민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빨아들이던 아득한 천국의 의식도 비로소 떠올라왔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저 동정심에 근거한 소극적인 섹스 행위에 불과했지만, 그나 자신에게 있어선 그 이상의 어마어마한 의미가 담긴 소중한 의식이었다.

……그렇지…… 구원을 받았다. 자신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 징벌은 이제 됐다고…… 용서해줄 테니 편안해지라고…… 자신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비로운 예스의 사인이 떨어졌다!

차츰차츰 호흡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심장도 제 리듬을 찾으며 담금질을 멈추고 있었다. 스스로의 의지를 채찍질하려면 좀 더 오래 홀로 어둠 속에 머물러 인내해야 하지만 아직은 무리였다. 뿌리 깊이 박힌 공포감이다. 쉽사리 몰아내질 리가 없었다. 몰아낼 수 없다면 껴안아야 하리라. 공포를 인정하고 함께 줄타기를 해야만 하리라. 그것이야말로 공포에 먹히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침대 머리맡의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걸어 나왔다.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오니 눈이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아픔이 느껴졌다.

시곗바늘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얼마를 범했는지 모른다. 확실히 약해진 몸엔 좀 과하다 싶은 섹스였다. 탈진하듯 세상모르고 잠이 들어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가 갈 곳이라곤 2층 아틀리에밖에 없었기에 무심코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현관문이 30도 각도쯤 열려 있었던 것이다.

몸 안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마냥 온갖 뼈들이 삐거덕거리며 진동을 했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눈을 질끈 감고 세차게 저항했다.

신경증이다!!! 이건 그저 신경증일 뿐이다!!! 절대 무너져서는 안 돼!!! 안 된다!!!!!!

통증은 잠에서 깬 직후보다 좀 더 크고 오래 지속되었다. 물론 언젠간 이겨낼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 믿음만큼 점차로 제정신을 찾아가는 스스로에 안도하며 위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과도한 힘을 주먹에 싣고 있었던 모양으로 심한 탈력감이 느껴지며 양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물론 그래봤자 이 싸움의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아무리 공포가 극에 달해 자신을 먹어치우려 한들 사랑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릴없이 무너져버리기엔 그에 대한 자신의 애정이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희생을 지불해왔다. 그 피눈물에 값할 공포 따윈 자신 안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고통에 값할 고통이란 그저 거짓이요, 협잡이요, 허풍에 불과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닌 것이다. 이따위 어설픈 히스테리아쯤이란……!

그가 보였다.

현관과 대문에만 불을 켜두고 있어서 정원은 보일 듯 말 듯 흐릿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그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허세를 부려도 역시 안도감으로 목이 메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어차피 이것도 함께 안고 가야 할 자신의 작은 생채기였으므로.

“……주무시지 않고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말을 붙이자, 놀랐는지 움찔하고 몸을 움츠린다.

각오를 한 것과 달리, 돌아보는 얼굴에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부담감은 나타나 있지 않았다. 놀랍게도 희미한 미소마저 품고 있지 않은가! 딱딱한 보석 알갱이 같은 기쁨의 응어리가 심장을 쿡쿡 쑤시는 것만 같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보물이어서 속으로 만세라도 부르고픈 심정이었다.

“……그냥…… 잠이 안 와서……. 별이 보고 싶었는데 잘 안 보이네…….”

다 늙은 중년 아저씨가 별 타령을 한다.

갸름하고 섬세한 얼굴 곳곳에 가시처럼 잔주름을 그리고서 별이 안 보인다고 서운해한다.

물밀 듯이 복받치는 사랑스러움에 손가락 끝까지 떨려왔다. 맨발에 신은 슬리퍼도, 바스 가운 위에 트레이닝 점퍼를 아무렇게나 뒤집어쓴 우스꽝스러운 차림도 사랑스러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서울에서 별을 보려는 것부터가 바보짓이지요. 지리산 정도 들어가야 그나마 좀 보이겠지만 거기도 예전만은 못하다고 하더군요.”

그저 감정을 삭이기에 급급한 나머지 나오는 건 유달리 퉁명스러운 비아냥이다.

“……그러네…….”

“……언젠가 휴가 때 다녀온 코사멧 해변의 별이 인상적이었죠. 가본 적 있으십니까?”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는 몸을 슬쩍 끌어당겨 안았다. 나온 지 꽤 된 모양으로, 품 안의 몸은 싸늘할 정도로 식어 있었다.

“……당신이라면 좋아하시겠지요. 반 고흐의 별밤(별이 빛나는 밤)처럼 정말 별이 이글거리며 하늘을 도는 것 같더군요.”

“우아…….”

“……언젠가 데려다드리지요. 보시고 싶다면…….”

“…….”

조심조심 자신을 살피는 눈동자에 불안감이 깃드는 것이 보인다.

“물론 휴가 갈 여유가 있을 때의 얘기지. 간다면 함께 가는 게 편하고 좋아. 따로 섹스 파트너를 구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니까…….”

쌀쌀맞게 덧붙이자, 그제야 납득한 듯 막연히 고개를 끄덕인다. 배 속에서 부는 서늘한 바람에 설핏 몸서리를 치며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말끔히 씻겨 향긋한 샴푸 내음을 풍기는 머리카락 속에 코를 박고 실컷 들이마셨다.

“……들어가자…… 하고 싶어졌어…….”

실은 외로워서였다. 안고 또 안아도 떨어지고 나면 그저 외로울 뿐이어서, 깊이 안아 든 채 영영 잠들고만 싶었다. 쇠사슬에라도 묶어 자신에게 연결한 후 더 이상 이별을 근심하지 않고만 싶었다. 도무지 언제 이 고통이 끝이 날지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가망이 없어 보였다.

기쁜 척, 사랑하는 척, 열정적인 연인마냥 착 감겨오는 몸을 대롱대롱 매달고 길을 떠났다.

몸서리가 쳐질 지경으로 사랑스러운 것이 한껏 몸을 열어 자신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몇 번 움직여 안에다 깊숙하게 묻은 뒤 사정을 참았다. 꽉 맞물린 요철처럼 달라붙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기쁨이 파도처럼 엄습했다. 그저 좀 더 오래 한 몸일 수 있을 뿐이겠지만, 당장은 영원만 같았다. 아니, 영원이었다. 다시 떨어질 수 있다는 협박 같은 건 조금도 믿어지지 않았다. 길 위엔 별이 가득했다. 반 고흐의 별이 이글거리는 바퀴처럼 윙윙 돌며 영원히 하늘 위에 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