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2003년 7월. 장인환(張仁歡) (40/129)

16. 2003년 7월. 장인환(張仁歡)

넘버를 확인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휴대전화를 건 이는 당연히 그였다. 아무한테도 번호를 알려주지 말라는 엄격한 명령과 함께 최신형의 단말기를 인환에게 던진 이가 바로 그였으니, 그 말고 달리 누가 자신에게 연락을 취하겠는가.

“……어, 그래, 위야…….”

[……아직 집이지요?]

당근 집이지. 이제 겨우 10시인걸. 출근한 지 얼마나 됐다고 확인이냐, 확인이…….

그가 회사에 있는 여덟 시간 남짓 동안 거짓말 안 보태고 서너 번은 벨이 울리곤 하지만, 지금처럼 그가 말을 건네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통화의 목적이래야 고작 자신이 받나 안 받나를 확인하는 것뿐이니까.

가출 사건을 용서했다고는 하지만, 역시 불신의 골은 지독하게 깊어서 이렇게라도 확인을 하지 않으면 울화통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한번은 귀찮아서 안 받았다가 그야말로 불호령이 떨어진 일도 있다. 감시인을 치우면 뭘 하나 싶다. 더 지독한 감시를 하고 있는 주제에.

“……응. 조금 있다가 슬슬 움직여봐야지.”

[홍 기사 집으로 보낼 테니까 오늘 마음대로 부리세요. 전시장에 들렀다가 리셉션 장소로 이동하려면 정신없을 겁니다.]

“……그래주면 고맙지.”

또 하나의 감시인인 운전기사보다는 차라리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쪽이 훨씬 마음 편하지만 당연히 진심을 얘기하진 않는다.

휴대전화로도 안심이 안 됐는지, 외출할 때 쓰라고 승용차 한 대까지 척하니 뽑아준 그다. 물론 혼자 쓰는 것은 절대 허락 안 하고, 새로 고용한 운전기사로 하여금 대리운전을 하게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그도 기사를 쓸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천만에, 느닷없는 운전기사 역시 또 하나의 감시인에 불과하다.

흥, 마음대로 부리라고? 뭐, 못 부릴 것도 없지. 솔직히 정장에, 구두에, 불편한 차림으로 전시장엘 가고 싶지는 않다. 오전 중엔 편하게 그간 별러둔 갤러리들을 둘러보고(물론 자신의 전시회는 맨 꼴찌로 집어넣었다. 어쩐지 미리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좀 비겁한 편법을 쓴 셈이다. 다른 훌륭한 대가들의 작품들로 눈을 호사시켜주면 그럭저럭 평상심도 되찾아질 터였다), 다시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은 뒤 리셉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준비는 하고 계십니까?]

“……별로 준비랄 게 있나, 뭐. 그냥 양복만 걸치면 그만인데…….”

[이발도 하고 제대로 멋을 내고 참석하세요. 요전에 사다드린 하늘색 여름 양복 꼭 입으세요. 당신이 웃음거리가 되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날이 날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잔소리가 유난하다. 생각해주는 척 얘기하지만 실제 그가 마음을 쓰고 있는 문제는 스캔들일 것이다. 뻥튀기처럼 부풀어 그와 얽힌 사연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을.

“……응, 그래야겠지. ……걱정하지 마라. 실수 안 할게…….”

벌써 몇 번이고 한 다짐을 재차 주워섬기지만 그는 어째 대꾸가 없다. 역시 새삼 또 심통이 났나?

“……저기, 그냥 나가지 말까? 뭐, 개막일에도 안 나갔는데…….”

[…….]

“……리셉션이야 어차피 컬렉터들과 딜러들을 위한 자리니까 굳이 내가 아니라도…… 얘기가 있게 되면 ‘현대’ 쪽에서 알아서 해줄 거고…….”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어차피 그쪽도 인맥 아닙니까? 정말 그림을 팔고 싶다면 발을 넓히려고 노력하세요. 움츠러들지 말고. 나도 투자한 돈은 온전히 회수하고 싶습니다.]

제 발이 저린 나머지 운을 떼어봤지만 의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어…… 그래…… 역시 그래야겠지? 알았어. 네 말대로 하마.”

[…….]

“…….”

[…….]

이번 침묵은 좀 더 길다. 한동안 잠자코 자신을 조마조마하게 긴장시키더니 마침내 내뱉은 건 지친 듯한 한숨.

[……제발 좀 그러지 마! 그림에 관한 한 결정하는 사람은 너야, 장인환. 일일이 내 말에 휘둘리지 말라구, 짜증 나니까.]

“……어…… 그…… 그래. 당연하지. 그래…… 그러마…….”

[…….]

“…….”

[…….]

“……위…… 야……?”

[홍 기사 들여보내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전화는 끊겨도 그의 심통이 무선을 타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온다. 어떻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니, 난 네 노예인데. 말 안 듣는다고 엄포, 주눅 들지 말라고 짜증, 도무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긴 그의 변덕에 휘둘리는 사이 자신도 많이 크긴 컸다. 이렇게 속으로 이기죽거리며 그를 성토할 수 있을 만큼은 그에 대한 두려움을 다스리게 됐으니까.

전화를 끄고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거실로 내려갔다.

어제까지 연 사흘째 비가 주룩주룩이더니, 창 밖은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다. 7월의 초입. 여름의 절정이었다.

그리 무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역시 여름은 여름이라, 만만치 않게 땀을 흘리게 될 터였다. 오랜만의 외출인데다가 그것도 전시장들을 누빌 테니 병신 다리도 꽤 고생을 하겠지. 전시회가 시작된 이래로 과욕은 부리지 말자고 매일 스스로를 타이르긴 하지만, 솔직히 은근한 기대로 설레는 자신이 있었다. 성공과 실패에 대한 기대라기보다는 김강원이 과연 어떻게 자신의 작품을 요리했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자신이 사내와 느끼는 교감(……을 넘어 무지막지한 호의!)이 과연 착각이 아닌지, 실은 제 좋을 형편대로 사내를 우상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판가름 나게 된다.

기대를 넘어 한편으론 두렵기까지 했다. 꽤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왔지만 그간 그 어느 누구도 이렇게까지 자신의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해주지는 않았었다. 그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를 아는 만큼 별로 기대조차도 하지 않은 자신이었다. 젊었을 때야 그저 객기와 명예욕에 사로잡혀 타인의 마음을 구걸하기에 바빴으니 애초에 찾아질 상황도 아니었다.

타인�, 정확히는 타인의 인정을 포기해버린 작금에 와서는 일단 자신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질 단서가 마련되었다고는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온전한 길을 가고 있는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어차피 수십 수억의 인간 수만큼 각자의 길이 있었다. 때론 평탄한 아우토반을, 때론 험한 가시밭길을 각자 선택해서 생을 살게 마련이지만, 가끔씩 스스로를 태워 ‘타인’의 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는 ‘드문 길’도 있게 마련이었다. 그 등대란 바로 예술의 다른 이름이었다. 자신이 더듬어 가는 길이 과연 그 등대가 될 수 있을 것인지는, 솔직히 인환으로서는 자신이 없었다.

김강원은 이미 등대라고 얘기해주었다. 인면수심의 가증스러운 죄인 주제에 이미 성스럽게 타인을 밝히는 등대라고. 무수한 불특정 다수의 ‘타인’을 비추게 될 등대라고.

물론 여전히 확신은 할 수 없었다. 다만 김강원의 말을 신용한다면, 적어도 김강원 한 사람에 관해서만큼은 등대인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오늘, 인환은 김강원이 기획한 자신의 개인전을 통해 그 등대의 실체를 비로소 확인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김강원의 ‘등대’라기보다 오히려 김강원의 존재야말로 자신에게 ‘등대’인 셈이었다. 하긴 그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누가 등대가 됐든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인 것을. 축복인 것을. 사랑인 것을…….

더위에 지치지 않도록 작은 크로스백에 생수를 우선 챙겼다.

돈을 쓰게 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았지만 지갑도 넣어두었다. 배탈이 안 나게 러닝도 챙겨 입고 그 위에 감색 폴로티와 반바지를 걸쳤다. 오래 신어 낡을 대로 낡았지만 그만큼 편하기 이를 데 없는 운동화를 신었다. 너무 캐주얼 한 게 아닌가 좀 걱정도 됐지만 무엇보다도 최대한 지치지 않고 그림을 봐주는 것이 오히려 작가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안다.

준비를 다 끝내고 나니 때마침 운전기사인 홍 씨가 도착했다.

홍 씨는 50대 초반의 사내로,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이 길로 뛰어들었다는, 이 땅의 책임 무거운 가장 중 한 사람이었다. 한참이나 위의 연배인 사내였지만, 서로가 인생의 쓴맛을 알고 있는 실패자로서, 인환은 사내에게 묘한 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깍듯하지만 말수가 적은 것도, 과도할 정도로 열성적이지만 담배를 피우며 가끔씩 시름에 잠기는 얼굴을 하는 것도 친근했다. 사내와 마주칠 때마다, 사내가 새 일자리로부터 퇴출되는 일만은 되도록 일어나지 않기를 비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감시자로 들어온 셈이니, 그러자면 부담스럽더라도 사내를 열심히 부려줘야만 할 터였다.

깊숙하게 허리를 굽힌 인사로 인환을 맞은 홍 씨가 정원 주차장 안에서 얌전히 잠자고 있던 황금색의 볼보 S60(아직 시승식도 안 거친 풋내기였다!)을 끌어와 차 문을 열어주었다.

“다녀오세요, 선생님.”

정원에서 빨래를 널고 있던 파출부 아줌마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네, 아주머니. 점심은 먹고 들어올 테니 시간 되면 그냥 퇴근하세요.”

부드럽게 전진하는 차체의 승차감을 즐기며 기운차게 대꾸해주었다.

새파란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 있는 정원 한가운데, 당당하게 펼쳐진 빨래 건조대가 상쾌했다. 가득 널린 깨끗한 빨래는 눈처럼 새하얗고, 모처럼 난 햇빛은 눈이 시릴 정도로 찬란했다. 나무도 꽃들도 하늘도, 폭포처럼 사방으로 내리 쏟아지며 호사스러운 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완공을 앞둔 어느 자그마한 7층 개인 병원 건물이라고 했다.

한남동이었다.

조금 후미진 주택가에 인접한 곳이라 주소만 가지고는 쉽게 찾기 힘든 점이 있었다. 홍 기사가 좀 헤매는 바람에, 인환은 이미 전시장 두 곳을 둘러보느라 지친 몸을 차 시트에 기댄 채 깜빡 잠이 들었었다. 홍 기사가 깨웠을 때는, 앞서 마리코 모리와 매튜 바니의 작품들을 관람한 후유증으로 섬망에 가까운 총천연색 꿈까지 꾼 상태였다.

얼떨떨한 얼굴로 ‘어나더 스페이스 -장인환전-’이라는 커다란 현수막의 안내를 따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진행 중인 공사 흔적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지만 제대로 주변을 둘러볼 여유는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막 공사를 끝내고 입주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썰렁한 건물에만 시선을 맞추고 걸었다.

오로지 실용성만을 강조하기 위해 지어진 듯한, 전형적인 바우하우스풍 건물은 빌딩이라기엔 초라하고 건물이라기엔 좀 박한, 주택가 병원으로 쓰기에 딱일 고만고만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개인전 안내 현수막은 건물 정중앙의 현판 위에 가로로 길게 걸려 있었다. 그 흔한 축하 화환도 없이 달랑 현수막 하나뿐인 것이 좀 썰렁하긴 했지만, 막 공사를 마친 건물이 주는 광막한 분위기와는 또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명작가 개인전에 무슨 입장료가 8000원씩이나 해? 좀 터무니없는 거 아니야?”

커다란 수동 카메라 케이스를 짊어진 사내 둘이 막 인환의 곁을 스쳐가며 한 말이었다. 행색을 보니 기자들 같았다.

“그렇긴 해. 하지만 저 김강원이 기획한 거라잖아. 그 양반 좀 튕기기로 유명하지. 실력도 알아주고……. 싸구려는 취급 안 한다지, 아마?”

“그래봤자…….”

“……봐, 언론에 보도 자료도 앵기지 않았어. 얼마나 도도해? 그런데도 벌써부터 입소문이 장난 아니야.”

“……흠, 일단 보고…… 그래봤자 거품이겠지만…….”

더 이상 사내들의 대화를 엿들을 순 없었다. 훌쩍 인환을 앞서가더니 20미터쯤 전방, 출입구로 보이는 뻥 뚫린 구멍 안으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사내들 외에 두세 명이 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현재로선 그들이 눈에 띄는 관람객의 전부 같았다. 역시 개인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한산한(실은 썰렁한) 편이었다.

사내들이 사라진 입구로 들어가니 탁 트인 로비가 나왔다. 내부는 밖에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화려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조명과 실내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적어도 30∼40명은 족히 될 듯한) 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웅성거리는 소음을 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외부의 썰렁함과는 무척 대조가 되었다. 사람들의 정체는 역시 전시회 관람객들이었다. 몇몇은 이미 전시를 관람했고, 또 몇몇은 아직 대기 중인 것 같았다.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저들의 얼굴을 제대로 살필 여유는 없었다. 그들이 소곤거리는 대화에 귀 기울일 마음도, 물론 전혀 없었다.

화살표의 안내를 따라 로비 구석,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있는 곳으로 쭉 걸어갔다.

전시실의 입구는 놀랍게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시커먼 장막처럼 천장으로부터 길게 늘어진 두꺼운 커튼으로 입구가 가려져 있었고, 바로 옆엔 등신대 크기의 투명 유리 상자가 관람객을 유도하는 등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자신의 청년기 작품 한 점이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누운 채 시선을 끌고 있었다. 현란한 포스트모던의 색채가 강렬한, 지금 보면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것이 액자도 없는 벌거벗은 캔버스 상태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표 주십시오, 손님.”

무심코 커튼을 밀고 들어가려다 미처 못 본 카운터 직원의 제지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유리 상자로부터 4미터쯤 떨어진 곳에 접수 데스크가 있었다.

“표는 로비에서 사셔야 합니다. 사 가지고 오세요.”

예쁘고 상냥한 20대 아가씨가 시골 아저씨 모양새로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인환을 친절하게 채근했다. 다시 절름거리며 로비 쪽으로 되돌아가니 처음엔 안 보이던 매표소가 보였다. 팸플릿과 도록들이 죽 쌓여 있는 자그마한 가판대도 보였다. 허둥지둥 표를 사고 전시실 입구로 되돌아왔다.

“……두 번째 전시실은 많이 어둡습니다. 벽에 표시되어 있는 빛을 따라 가시면 됩니다. 좋은 관람 되십시오.”

표를 받는 아가씨 옆에 앉아 있던 젊은 청년이 차분한 주의를 주었다. 아무리 진정을 하려 해도 역시 가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뭐, 처음 ‘타인’의 시선 앞에 놓인 무명화가이니 당연한 노릇 아니겠는가. 희미한 자조를 흘리며 인환은 커튼을 밀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방만이 아니라 제 1 전시실을 향해 내려가는 계단도 어둡기는 한가지였다.

10와트도 안 될 촛불처럼 흐릿한 조명이 간신히 형체를 구별할 수 있게끔 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의도적일 테지만,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았는지 들어서자마자 후끈하게 달려드는 열기가 무엇보다도 답답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처음엔 부서진 찬장과 나무, 스티로폼 덩어리와 공사장 쓰레기로 보이는 온갖 폐자재가 진로를 방해할 정도로 통로를 꽉 메우고 있어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설치에 익숙지 않은 인환으로서 그것이 큐레이터가 노린 교묘한 장치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다.

예상치 않은 어둠은 촉각을 비롯해 청각과 후각에 이르기까지 전신의 감각을 몹시 예민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곳곳에 산재한 채 지뢰처럼 불편한 방해물이 되고 있는 무의미한 쓰레기더미도 경솔한 전진을 용납지 않았다. 그리고 그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으로 내려가는 이정표 사이사이에 자신의 청년기가 투영돼 있었다.

흐릿했던 조명은 계단 벽, 눈높이가 될 만한 공간에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자신의 치기를 드러내느라 순간적으로 눈이 부실 지경으로 밝아졌다. 실제로는 보통의 밝기였겠지만 워낙 어두운 통로를 밟아 온 터라 자극은 극대화되어 있었다. 극도로 오버된 조명 밑에서 자신의 치기는 현란하고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고함을 질러대며 적나라하게 벌거벗겨지고 있었다. 그 뻔뻔스러운 떠들썩함에 낯이 다 뜨거울 지경이었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3층 정도 이어진 계단이겠지만 김강원의 마술에 의해서 수백 미터나 되는 용의 꼬리처럼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액자에 걸 가치도 없이 벽에 걸린 자신의 치기도 화려한 조명발의 칭송을 받으며 끝없이 이어졌다. 바닥을 가득 채운 쓰레기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압도적인 크기로 쌓여갔다.

오른쪽 끝으로 쓰레기의 출구가 보였다.

출구는 제 1 전시실로 이어져 있었다. 다행히 본격적인 전시실로 들어서니 서늘한 냉기가 달려들었다. 여기서부터 에어컨을 켠 것 같았다. 적당히 낮춰진 온도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흘린 땀을 식혀주었다.

미묘하고 밝은, 상아핑크 색채의 광택 나는 시퀸을 연상시키는 관능의 방이었다.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어둠에 익숙했던 눈은 애욕의 향연과 다름없는 첫사랑의 기억을 일깨우고 있었다. 그것은 인환의 첫사랑일 수도 있고, 아니면 김강원의 것일 수도, 혹은 여타 ‘타인’의 것일 수도 있었다.

사랑을 흉내 낸 자신의 색욕이 도처에 있었다.

집요하고 더럽고 끈끈하고 냄새 나는 그것은, 추하면서도 아름답고, 혐오스러우면서도 성스러웠다. 그나 다른 주변 친구들을 모델로 그린 초기의 관능적인 인물화와 풍경, 그리고 드로잉 몇 점이 벌거벗은 관능의 방을 채우고 있었다.

웃었던 것 같다. 그랬다. 실은 지독한 고통과 회한으로 점철된 시기이건만 지나고 보니 그 또한 아름답고 성스러울 수 있다고 김강원은 속삭여주고 있었다. 역시 천사 같은 남자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한참을 웃었다. 관람객 서너 명이 그의 육감적인 나체와 섹스로 도배가 되어 있는 그림 앞에서 자신처럼 기막힌 웃음을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맞다. 저 50호 크기 캔버스 제목은 지금도 기억난다. ‘자지, 자지, 자지!’였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이 작가 게이라던데…….”

“……하하, 그거 말이 되네…….”

들릴 듯 말 듯한 소곤거림이었지만 예민한 청각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킬킬대며 그 방을 나왔다.

관능의 방에서 직각으로 연결된 통로를 따라가니 조명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5미터를 걸었을까, 갑자기 칠흑처럼 새까만 어둠이 시야를 덮는 통에 인환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멈칫했다.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 손을 내밀었다.

오른쪽으로 벽이 잡혔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 사내 대단하다고…… 솜씨가 장난이 아니라고 무심코 감탄을 하며 발끝을 더듬어나갔다.

손끝에 와 닿는 벽면의 촉감을 놓친 순간 아득한 심연으로 굴러 떨어질 것처럼 두려움이 앞선다. 수 톤짜리 무게의 쇠공을 발목에 걸어놓은 양 무거운 발걸음을 조심스레 옮겼다. 길고 어두운 지옥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동안 의지할 만한 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리도, 빛도, 심지어 자신의 존재함을 자각할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나 절망적인 나머지 공포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저 슬픔뿐이었다. 한없는 슬픔만이 사방에 가득했다. 눈물조차 말라버렸다.

아아, 왜 모르겠는가. 지난 10년간의 자신이 여기 있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라서 울고 싶었지만 말라버린 감정엔 눈물조차도 사치였다. 그저 멍하니 미로처럼 앞으로 더듬어갔다. 어떻게 돼도 상관이 없었다. 설령 발을 헛디뎌 심연에 떨어진다 해도 더 이상 두려울 일은 없었다. 여기가 바로 심연이었다. 여기가 바로 지옥이었다.

지옥은 죽어서 가는 데가 아니었다. 저 우주 끝 어디, 혹은 저 땅속 가장 깊은 어디에 있지 않았다. 여기였다. 바로 여기,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바로 지옥이었다. 지옥의 생을 살아온 자가 하는 얘기이니 이것 하나만은 장인환을 믿어도 좋다. 그래, 좋다. 더 이상 교회 가지 마라. 지옥에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해서 하느님을 찾지도 마라. 그것이야말로 불경이다. 그 기도야말로 독신이다. 하느님은 지옥 같은 건 마련하지 않았다. 인간 따위나 지옥을 만든다. 만들다 뿐인가, 좋아라 거기서 살기까지 한다. 교회 가지 마라, 하느님, 아버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앞으로 전진하기로 했다.

저 멀리 하늘 위로 옅은 빛 한 줌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까마득히 절망해 발견한 빛이라 눈을 의심하면서도 허겁지겁 달려 올라갔다(다시 계단이었다. 바닥에 설치된 흐릿한 조명이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을 유도하고 있었다).

마침내 도착했다.

세상이 열리던 첫 순간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어 침묵 속에 호흡을 가다듬고 기다리니, 멀리 어른거리는 것이 점점 커진다. 커진다기보다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일 테지만, 김강원의 마술은 그만큼 치밀하고도 노련했다.

점점 커지던 그것은 크기도, 모양도 알 수 없는 커다란 방.

입구 맞은편 중심에는 아무 영상도 없는 커다란 스크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눈에 착란을 일으키듯 푸르스름한 박명 속에서 별의별 영상이 혼잡스레 뒤엉킨다. 자세히 보니 인환의 요즘 작품이 비디오 이미지화해 투사되는 LCD 스크린이었다. 멍하니 스크린 앞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공중에서 허우적거릴 뿐, 스크린이라 믿었던 자리엔 그 크기만큼의 공간이 뻥 뚫려 있었다. 현실과 벽 너머의 경계 앞에서 심연으로 뚝 떨어지는 듯한 아득한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초월을 향한 문(門)이었다.

문 너머, 멀고 먼 공(空)의 통로가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낙원이었다. 자신의 낙원이었다. 아니, 김강원의 낙원이었다. 아니, 아니, 아니,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어느 낯선 ‘타인’의 낙원이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긴 것 같기도 하고 짧은 것 같기도 한 공(空)의 통로를 걸어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제 3 전시실에 도착했다. 100평 남짓한 텅 빈 공간에 30여 점에 가까운 자신의 후기 작품이 아무런 기교 없이 진솔하게 걸려 있었다. 고즈넉한 공간이었지만, 유한한 목숨과 무한한 우주가 맞닿은 영원의 마당에 달리 무슨 장식이 필요하겠느냐고 김강원이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김강원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개개의 작품들은 각자 서로를 향한 역동적인 상승 작용을 불러일으키면서 방 안에 거대한 공명을 던지고 있었다.

눈물은 좀처럼 멎지가 않았다. 멎기는커녕 갈수록 그 주책의 강도가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전시실 한가운데, 관람객의 명상을 위해 마련된 벤치 몇 개가 보였다. 서너 명의 관람객이 앉아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인환 역시 앉아 쉬고 싶었지만, 저들의 ‘방’을 짓밟을 순 없었다. 소중한 초월의 순간을 방해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 기쁨의 눈물일 것이다.

하지만 슬픔과도 닮아 있었다. 어차피 기쁨은 슬픔과 등이 붙은 쌍둥이이니 당연한 노릇인지도 몰랐다. 김강원이 보고 싶었다. 참을 수 없으리만큼 그 남자가 보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이 기쁨의 순간. 아니, 슬픔의 순간에.

자신과 남자는 등이 붙은 쌍둥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쌍둥이임에 틀림없었다. 기쁨과 슬픔처럼, 미소와 눈물처럼.

제 3 전시실의 출구는 로비로 연결되어 있었다.

닦아도, 닦아도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통에 꽤 북적거리는 로비는(들어갈 때보다 좀 더 사람이 많아졌다) 부담스러운 노릇이었다. 어서 빨리 도망치자고…… 고마운 관객들에게 작가의 추한 몰골을 들키지 않도록 재빨리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이 정도의 경이적인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었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인데요, 구상은 언제부터 하신 겁니까?”

“……음, 솔직히 시인하자면 작가의 작품을 보게 된 직후부터겠지요.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닙니다.”

두근…….

“마인 아트 스페이스 공모전을 통해서 처음 아시게 된 건가요?”

“그렇지요. 물론 초기 작품 몇 점을 본 일은 있습니다만…… 아, 그런데 지금 인터뷰는 곤란합니다, 최 기자님. 정식 인터뷰는 이따 리셉션장에서 하려고 합니다만…….”

분명 재빨리 나가야만 했다.

기자까지 들이닥친 상황이니 더더욱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옷차림도 엉망이었고, 무엇보다도 여전히 고장 난 수도꼭지 꼴로 펑펑 울어대는 형편이 이만저만한 추태가 아닐 수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저 김강원의 낯익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발바닥에 접착제라도 붙여놓은 것마냥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장신의 화려한 큐레이터는 일단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남자는 막 자리를 뜰 엉거주춤한 자세로 마지못해 기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옅은 블루의 캐주얼한 시어서커 슈트에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푼 노타이 차림이 아름답고 세련된 용모와 너무나 잘 어울려서 인환은 몰래 가슴이 뛰었다. 곤란한 듯, 관자놀이 부근에 흘러내린 새까만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긁어 올리는 자태도 섹시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눈물이 자꾸만 시야를 흐릿하게 가로막는 것이 몹시 짜증이 났다. 계속, 언제까지고 계속 바라볼 수만 있다면!!!

“예, 죄송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일단 홍보 면에서 여타의 노력을 하지 않고 계신데요…… 그것은 일종의 깜짝쇼 효과를 겨냥한…….”

“……장 선생님……?!”

무심코 주변을 살피던 아름다운 눈이 문득 인환의 것과 마주쳤다.

두근…….

뒤돌아서서 냅다 뛰었다. 맙소사, 겨우 접착제가 떨어졌다!

“장 선생님!!!”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김강원 씨……?!”

“장…… 아, 죄송합니다! 정말 급해서요! 이따 리셉션장에서 뵙겠습니다!! 장 선생님!!!”

“……아, 그럼…….”

“……선생님……?!”

“……장 선생님, 잠깐만…….”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

현관문을 밀치고 나오니 쨍쨍한 햇빛과 열기가 숨통을 조일 기세로 다가들었다. 서너 명쯤의 관람객들이 더 눈에 띄었지만 일단 공포의 군중들로부터는 벗어난 셈이었다. 계속 불러대는 김강원이 안타깝고 초조했다. 만나고 싶었기에, 만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 되었기에, 순간 기적처럼 나타나준 남자는 역시 천사였다. 저것 봐.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을 잘 알고 달려와주지 않나!

자꾸만 시야가 흐려진다. 속이 상해 죽을 노릇이다. 좀 제대로 보고 싶은데…… 이 남자를…… 이 놀랍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청년을 좀 제대로 보고 싶은데 좀처럼 눈이 협조를 안 해준다…….

“……왜…… 어째서 그냥 가세요…….”

코앞까지 달려온 남자가 가쁜 숨을 토하며 원망스럽게 얘기한다. 양손이 뻗어와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의 거센 힘으로 어깨를 틀어쥔다. 아아, 그렇게 아프게 쥐지 않아도 절대 도망가지 않는다고, 이 양반아. 정말로 다 늙어서 주책일 만큼 그쪽이 좋다고……. 홀릴 듯이 퍼져 있던 살인미소가 문득 굳어지며 심각한 표정이 된다. 아쉽기 짝이 없다. 정말로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으로 멋진 미소인 것을…….

“…….”

“…….”

“…….”

부드럽고 따스한 시선으로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굽어볼 뿐 남자는 말이 없다. 무신경한 위로의 말로 산통을 깨지도 않는다. 아아, 역시 죽이는 센스의 남자다. 누가 애인인지 모르지만 정말로 대단한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마 근처, 살며시 내뿜어지는 남자의 숨결에서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난다. 애프터셰이브 냄새도, 땀 냄새도 모두 다 정겹기만 하다.

아프게 쥐어오던 손아귀가 떨어져 나가더니 남자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손수건이었다. 한쪽 손가락으로 턱 끝을 쥐곤 조심조심 닦아주기 시작한다. 아무리 닦아도 멈출 줄을 모르는 수도꼭지에 남자가 안타까운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겠어요…….”

마침내 포기하듯 중얼거리고는 인환의 팔을 쥐고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껴안을 듯이 어깨를 감아 부축을 하곤 절름거리는 자신의 보폭에 맞추고 있다. 남자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설레고 기쁘다. 말을 하지 않아도 마냥 다 통하는 것 같아서 정말로 모든 것이 그저 기적만 같다…….

남자가 인환을 데려간 곳은 현장 인부들의 합숙소로 쓰였음직한 가건물 안이었다. 아마도 남자의 부하 직원들 역시 지난 한 달 내내 이곳에 머물며 전시를 준비했을 터였다.

안에서 문을 닫은 남자는 다짜고짜로 인환을 끌어안았다. 우는 사람을 달래려는 신사의 포옹이었으므로 저항하지 않았다. 아니, 저항은커녕 팔에 힘을 주어 남자를 마주 끌어안았다. 남자의 늠름하고 단단한 품에 안기고 보니, 전시장을 돌면서 내내 이렇게 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자각한 자신이었다. 등줄기를 부드럽게 쓸어주고 있는 남자의 품에 어린애처럼 달라붙은 채로 인환은 소리 없이 한참을 울었다. 남자의 멋들어진 슈트가 젖어드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겨우겨우 진정이 된 설움에 설핏 수치감을 자각하고 마지못해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남자는 어딘가 서운한 기색이었지만 얼굴엔 안도한 듯 부드러운 미소가 퍼져 있었다.

“……마음에 들었죠……?”

좀 전의 손수건으로 다시금 얼굴을 닦아주며 남자가 상냥하게 물어왔다.

“…….”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긴 할 테지만.

“……거봐요, 당신에 대한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다소 거만하고 잘난 체하는 듯한 스노브 근성조차도 좋아서 죽을 거 같다.

“……멍 자국이 사라졌네요……. ……여전히 깁스한 채인 손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다행이야…… 이 보고 싶었습니다…….”

“……?”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중간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최면을 거는 듯한 뜨거운 눈시울이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활처럼 휘어진 눈이며 움푹 파인 보조개며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물론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착각 따윈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너무나 소중해진 남자를, 불순한 눈으로 의심하는 배은망덕한 짓 따윈 앞으론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김 선생님도요…… 완전히 회복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동안 정말 많이 죄송했답니다…….”

“…….”

이마 주변의 땀을 천천히 닦아주던 손길이 살며시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손가락에 감긴 머리카락 몇 올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다. 한순간 긴장했지만 남자의 얼굴은 마냥 담백하기만 했다.

“……진정되셨으면 어디 나가지 않으실래요? 점심 식사는 하셨습니까?”

“……예. 먹었습니다.”

사실은 빈속이지만 남자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했다. 기자도 따돌리고 어딘가 급하게 가려던 참인 남자를 훔쳐버린 자신이었다.

“……그럼 찻집에라도 가시면…… 전해드릴 물건도 있고요…….”

어쩐지 서운한 듯한 남자의 대꾸에 또 한 번 가슴이 설레며 기쁨이 파도처럼 엄습했다. 자신만큼 남자도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확실했다.

“……저기, 리셉션에 참석하려면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하하, 보시다시피 꼴이 말이 아닙니다. 실은 여기 오기 전에 다른 갤러리도 들러 구경을 했거든요.”

얼굴을 다 닦아주고도 자신의 뺨에 양쪽 손바닥을 댄 채 눈을 마주쳐오는 남자에게, 새삼 열기가 오를 만큼 부끄러웠다. 땀에, 눈물에, 울어서 퉁퉁 부은 눈까지 정말로 가관일 것이다.

“음, 하긴 리셉션에 가는 차림으론 좀 그렇군요. 후후, 제 눈엔 그저 소탈하고 멋있게만 보입니다만……. 그런데 다른 갤러리요? 누굴 보셨어요?”

“……마리코 모리와 매튜 바니입니다. 음, 인상적이었어요. 강렬했고…… 과격하달만큼 강렬했죠. 좋은 전시였습니다.”

“……장 선생님이 더 강렬해요.”

속삭이는 듯한 대꾸가 밀어처럼 달콤하다.

“그야 아주 전투적이긴 하지. 하지만 그런 건 많아요. 다들 기를 쓰고 그로테스크하고 정치적인 것들만 그리려고 하죠. 좀 웃기지 않습니까? 왜 아름다움을 두려워해야 하지요? 악을 쓰고 외치지 않아도 진실의 힘은 강렬한 겁니다. 장 선생님처럼요…….”

더 거세진 열기가 얼굴을 온통 새빨갛게 물들였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고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서운하긴 하지만 할 수 없죠. 일단 리셉션에서 또 뵐 수 있으니까 참겠습니다. 뭐, 그것도 업무의 연장이라 좀 괴롭긴 하지만……. 그러니 나중에 따로 시간 내주셔야 합니다. 한 달 동안 정말 죽어라 뛰었거든요. 상 받을 자격 있지요?”

흥겨운 어조로 대꾸하는 남자는 여전히 환하게 웃으면서 인환의 빨개진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예…… 당연히…… 오히려 제 쪽에서 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예스를 날렸다.

보고 싶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은 되도록 삼가고 싶었다. 게이의 정체성이 남자와의 우정에 걸림돌이 된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야, 신난다…….”

어린애 같은 탄성을 터트리며 남자의 눈이 활처럼 휘어진다. 아아, 심장이 정상을 찾으려면 저 살인미소를 되도록 보지 않아야 할 듯싶다.

“그럼 정식으로 그때 데이트 해요. 말씀드릴 게 참 많아요, 선생님…….”

똑똑.

여전히 홀릴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문득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선생님, 저 분도예요…….”

좀 더 커다랗게 변한 노크 소리와 함께 굵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면을 거는 듯한 남자의 깊은 시선이 비로소 인환의 얼굴을 스쳐 문 쪽으로 옮겨갔다.

“그래, 분도 군! 곧 나갈 테니까 기다려!”

“……아, 바쁘신 것 같은데 제가 또 폐를 끼쳤습니다. 어서 가세요. 저도 지금 가봐야 하니까…….”

“음, 저 친구 괜히 그러는 겁니다. 한 시간 정도는 괜찮습니다.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아니, 감사하지만 차 있습니다, 김 선생님. 병원 주차장에서 기사가 기다리고 있어요.”

앞서 나가던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역시 섭섭함. 감미로운 동요가 또 한 번 심장 근처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서운하네, 젠장…….”

가벼운 욕설은, 그러나 눈물이 날 만큼 멋들어진 미소로 묻혀버렸다.

“……그냥 사라지시면 어떡해요……! 아이스크림 다 녹았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는 드물게 산만 한 덩치를 하고 있는 젊은 청년이었다. 산뜻한 감색 슈트를 걸치고 있지만 아직은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대학생으로밖에 안 보였다.

스포츠머리에 가까울 만큼 짧게 깎은 머리 하며, 190에 가까울 큰 키에 떡 벌어진 체격 하며, 유난히 남성적인 체취를 물씬 풍기는 청년이었다. 그리 미남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순수하고 꾸밈없는 눈빛이나 가무잡잡한 피부는 단정한 인상을 주었다.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고, 손엔 빙과류 봉지가 들려 있었는데, 그 소탈한 모양새가 청년의 인상을 좀 더 어려 보이게끔 했다. ‘옥동자’며 ‘부라보콘’이며 ‘쮸쮸바’ 같은, 익숙한 상표가 붙은 빙과류들이 7월의 땡볕 아래 줄줄 녹고 있었다.

“그러게 누가 먹는댔나? 먹고 싶으면 자네나 먹지 왜 맨날 난 끌어들이는 건데?”

“……혼자 먹으면 쓸쓸한 거잖아요…… 왜 따땃한 난로를 옆에 두고 추운 고독을 견디나요……? 우씨…… 정말 남의 속도 모르고…….”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그만 찌그러져 있어. 손님 배웅해야 돼.”

“……어…… 아, 예…….”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애교 섞인 투정이 좀 의외여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청년의 얼굴을 보았다. 청년 역시 숫기가 없는 얼굴에 희미한 호기심을 품고서 인환을 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의 표정이 있다면 바로 저럴 것이라고 할 만한, 그야말로 거울처럼 생각이 드러나는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이따 저녁에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

“장 선생님…….”

어눌한 작별 인사를 흘리고 돌아서려는데 남자가 팔을 잡는다.

“……이거 가지고 가세요…….”

매고 있던 크로스백 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인환에게 내밀었다.

“……선물입니다. 리셉션 때 드리려고 했었는데, 그땐 아무래도 정신이 없을 거 같아서요…….”

남자가 내민 7∼8센티 크기의 자그마한 상자에 인환은 어리둥절해졌다. 느닷없는 남자의 선물도 황당했고, 막 택배로 받은 듯 택배 회사의 영수증이 너덜너덜 붙어 있는 상자의 모양새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하하, 선물이라기엔 역시 꼴이 좀 우습지요? ‘클로렐라’입니다. 몸에 좋다고 해서 주문해서 먹는데 문득 장 선생님이 생각나지 뭡니까. 음, 서른 줄에 접어들면 슬슬 건강을 챙겨야 할 나이죠. 그래 주문하는 김에 선생님 것도 샀습니다. 그냥 속는 셈 치고 드셔보세요.”

“……어…… 아…… 예에……. 고맙습니다, 김 선생님. 잘 먹을게요…….”

여전히 황당한 느낌을 떨치지 못한 채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남자의 손에서 선물을 받아들며 무심코 옆에 서 있던 청년의 얼굴을 살폈다가 인환은 또 한 번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청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경악한 눈은 인환의 얼굴, 손에 쥔 상자, 그리고 아름다운 큐레이터의 얼굴을 마치 삼각형을 그리는 것처럼 고개를 홱홱 돌려가며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손에 들려 있던 빙과 봉지가 바닥에 떨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그럼 저녁에 또…… 살펴 가십시오, 선생님…….”

아름다운 남자가 악수(라기보다 지그시 손을 움켜쥐는 행위)를 하듯 왼손을 잡아왔다. 멍하니 남자의 얼굴로 시선을 가져갔다.

남자의 얼굴이 또다시 살인미소를 만드는 바람에 청년에게 쏠렸던 관심은 순식간에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살랑살랑 봄바람처럼 일렁이는 가슴이 부끄러워 서둘러 답례를 하고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10미터쯤 걸어간 뒤 슬쩍 돌아보니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로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낯선 표정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가 다시금 활짝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흔들었다. 무지개의 포물선을 그릴 수 있을 만큼 커다랗게 팔이 뻗어 있었다. 봄바람이 거세졌다. 빨개진 얼굴이 잘 안 보일 만한 거리란 것에 안도하고 살짝 목례를 했다. 언제까지고 손을 흔들 기세여서 부랴부랴 고개를 돌렸다.

홍 기사가 차를 출발시킬 때까지 더 이상은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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