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2003년 7월. 김강원(金鋼圓)
“왜 이래, 자네?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
“……지쳤어? 요새 너무 부려먹어서 삐졌나?”
“…….”
“……고생해준 거 알아. 나중에 한턱 단단히 쏘겠다고 했잖나. 오늘 행사만 해치우고 나면 고비는 넘기는 셈이니까 조금만 더 참고 버텨봐.”
“…….”
“분도 군.”
“…….”
“노분도.”
“…….”
살살 구슬려보지만, 풀 죽은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볼 뿐 분도 놈은 여전히 대꾸가 없다.
이거야 정말 울화통이 터질 노릇이다. 가뜩이나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국에, 잘 돌아가던 톱니바퀴처럼 매끄럽게 서포트를 해주던 후배 놈까지 갑작스레 삐딱선을 타지 않는가. 입이 댓 발이나 나와서는 오후 내내 이런저런 사소한 실수를 거듭하더니, 마침내 명령 불복이라는 강수를 들고 나왔다.
이번 전시의 성패를 가늠하게 될 최고의 대부 격인 안 회장과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하고, 리셉션 홀에도 들러 마지막 점검을 해야만 한다. 쿤스트할레의 친구들이나 오늘 아침 간신히 도착한 베니스 친구들(비엔날레의 커미셔너)까지 단속할 여유는 도무지 없어, 대신 호텔로 보내려던 참에 놈이 못 가겠다고 손을 들어버린 것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근 한 달을 서너 시간밖에 못 잤으니 지칠 법도 하다 싶지만, 최후의 고비랄 수 있는 오늘 느닷없이 밑천을 드러낼 정도로 참을성이 모자란 놈은 아니었다. 분명 뭔가가 저 단순한 심사를 거스른 게 분명한데, 도무지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부아가 치미는 걸로 치자면 당장 그 사춘기 계집애마냥 삐죽 튀어나온 입에 싸대기라도 올려붙이고 싶지만, 그랬다간 누에고치처럼 더욱 안으로 움츠러들 놈이었다. 나중에 단단히 기합을 넣더라도 지금은 무엇보다도 놈을 움직이게끔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리셉션까지는 채 두세 시간도 안 남았고, 그 안에 네 탕을 뛸 만큼 강원은 녹록한 형편이 아니었다.
“……이리 와봐.”
손목시계로 자꾸만 시선이 떨어지려는 걸 가까스로 억누르며, 강원은 놈의 팔을 끌고 로비 뒤쪽에 면한 화장실로 들어갔다. 새로 지은 건물 특유의 시멘트며 건자재 냄새가 아련히 풍기는 화장실엔 다행히 사람이 없었다. 준공이 떨어져 정식으로 개원을 하게 되면 좀 달라지겠지만, 얼마 안 되는 관람객 숫자 덕에 아직은 그럭저럭 먼지 한 톨 없는 청결함이 유지가 되고 있었다.
“……장 작가 때문이야? 소개 안 시켜줬다고 삐졌나?”
터지려는 울화통을 담배를 피워 무는 것으로 지그시 누른 채, 짐짓 농담조로 말문을 텄다.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까닭을 넘겨짚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놈의 건장한 어깨가 움찔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전시 준비가 계속되던 지난 한 달 내내 그를 소개시켜달라고 틈날 때마다 조르던 놈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자신의 일정도 일정이었으려니와, 무엇보다, 자신의 소중한 이 역시 사교 활동에 뛰어들 경황은 아니었던지라, 매번 놈의 부탁을 거절했었다. 게다가 몇 시간 전의 우연찮은 만남에서조차도 소개를 생략했다. 충분히 심사가 꼬일 만했다. 자신이 아직도 놈을 풋내기 취급한다고 오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 자신으로부터 어떻게든 스스로의 재주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놈이라, 별것 아닌 일에도 유달리 예민해지곤 한다.
“워낙 피곤해해서 바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잖아. 이따 저녁에 다시 만날 텐데 뭘 그래?”
“…….”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을 못 본 채, 부드러운 말투를 놓지 않았다. 뭐, 원인이 그거라면 적당히 구슬릴 자신이 있다. 될성부른 작가를 알아보고 나아가 집착할 줄도 아는, 놈의 한편 순진하고 한편 순수한 큐레이터 근성이 대견한 것도 사실이었다. 폐부 가득 빨아들인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강원은 천천히 말을 골랐다.
“……일단 전시회부터 끝내놓고 보자구. 따로 시간 잡아서 만나게 해줄게.”
“…….”
“……가능한 한 독점을 해서라도 키우고 싶은 작가지만 자네니까 봐주는 거야. 뭐, 그렇다는 얘기지. 그간 닦아놓은 실력 발휘를 한대도 말리지는 않아. 재주껏 작가의 마음을 붙들어보라구.”
“…….”
“하지만 각오는 해둬야 할걸? 전에도 말했지? 그림에만 미친 진짜배기라고. 고통이 많은 타입이라 여간해선 자넬 상대조차 안 하려 들 거야.”
사실이었다. 강원이 그의 호감을 사는 데 성공한 것만 해도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놓치고 싶지 않아…….
―당신뿐이야…… 그림…… 뿐이야…… 당신…… 당신이 너무 좋아…… 좋아…… 그러니까…….
“왜 그렇게 웃는 건데요? 선생님은 다른가 보죠?”
심통이 잔뜩 들어간 일갈이 잠깐 백일몽에 빠졌던 강원의 주의를 일깨웠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띠고 있었던 모양으로, 비스듬히 올라갔던 입꼬리가 상처 입은 듯한 후배의 시선을 받아 천천히 굳었다.
“사교적이지 않은 진짜배기 화가가 선생님과는 아주 친근해 보이더군요. 배꼽친구라고 해도 믿겠던데요.”
“……흐응, 작가와 교감할 수 있는 것도 실력이야, 분도 군. 질투 나면 실력을 키워.”
“……교감…… 뿐입니까……?”
“……?”
“키스해도 돼요?”
“!”
느닷없는 애절한 호소에 하마터면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릴 뻔했다. 진지해서 더더욱 선명하게 아픔이 드러나 있는 놈의 순한 눈동자가 단도직입적으로 강원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호텔에 가서 손님들 모셔올 테니까 격려 좀 넣어줘요. 정말로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요.”
“안 돼.”
“닳는 것도 아닌데 좀 해줘요. 안 그럼 집에 가서 잠이나 실컷 자버릴 테다!”
어린애 같은 으름장은 분명 농담조의 가벼운 도발이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낌새가 느껴졌다. 황당한 기분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새삼 후배 놈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기를 쓰고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눈시울 하며 씩씩대는 숨길 하며, 놈의 어린애 같은 눈물을 한두 번 봐온 강원이 아니다. 단순히 삐진 정도가 아니라 무언가 단단히 상처를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마음에 둔 작가를 소개시켜주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고 하기엔 감정의 격랑이 너무나 커서 강원은 새삼 낭패감에 빠지고 있었다. 아이고, 젠장. 또다시 스무고개를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세면대 위에 비벼 끄며 강원은 착잡해진 심사로 뇌까렸다.
“……바빠 죽겠는데 속 뒤집으려고 작정했어, 자네?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하고 가서 시킨 일이나 해.”
“누가 안 한대요? 그러니까 키스 한 번만 해달라는 거잖아요.”
“안 된다고 했지? 지금 어리광부릴 군번이야?”
“간닷!”
“노분……! 움…….”
얼씨구! 정체 모를 기합 소리와 함께 달려든 놈이 강원의 얼굴을 틀어쥐곤 입술을 겹쳐왔다.
뒤로 떠밀린 몸이 균형을 잃고 세면대 모서리에 부딪쳤다. 허우적거리던 팔을 뻗어 본능적으로 놈의 허리를 틀어쥐자, 맞닿은 입술 틈으로 놈의 신음 같은 교성이 토해졌다.
젠장, 사기다.
다 죽어가는 울상을 하고서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치는지, 막무가내로 밀어붙여오는 기세가 발정 난 멧돼지와 한가지였다.
말할 수 없이 측은해진 심사는 둘째치고라도, 냉정하게 뿌리치면 그야말로 울음이라도 터트릴 기세여서 강원은 마지못해 멧돼지를 마주 안아주었다. 1분 1초가 초조한 판국에, 언제라도 관람객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전시장 화장실 바닥에서 이 무슨 난장이란 말인가. 미운 놈이라면 엉덩이나 한 방 까주고 돌아서면 그뿐일 것을,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들엔 마냥 취약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기벽이 그저 한심하고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제정신이 아닌 놈을 끌고 좌변기가 있는 칸막이 안쪽으로 기어 들어갔다. 뭐라 해도 뭇 공중(公衆)의 시선만은 피해야 할 터였다.
뒷걸음질 끝에 걸린 좌변기에 주저앉다시피 떠밀리면서도 놈은 강원을 물고 빠느라 여념이 없었다. 뒷짐으로 문고리를 걸어 잠그며 주춤대는 사이, 놈의 벌벌 떠는 손길이 사타구니 틈으로 파고들었다. 옷감 위로 강원의 분신을 통째로 움켜쥔 채 요분질을 쳐대는 통에 강원은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 부딪쳐오는 좁은 화장실 벽도 답답하기 그지없었고, 흥분을 참지 못해 자신의 성기를 떡 주무르듯 하는 놈의 거친 손길도 고통스럽긴 한가지였다.
부드럽게 달래는 듯한 키스로 놈의 흥분을 진정시켜보려 하지만,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는 수컷의 에너지는 좀체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뿐인 투박한 입맞춤을 되풀이하며, 놈은 정신없이 강원의 바지 벨트를 풀곤 셔츠 단추까지 풀어헤치고 있었다. 위로 갔다, 아래로 갔다, 정신없이 더듬어대는 치한의 손길 또한 당연지사. 어디서부터가 키스고 어디서부터가 포옹인지 가늠할 길이 없는 서툴고 격렬한 접촉이 7월의 땡볕을 무색케 할 만큼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복도에서 밀려드는 서늘한 에어컨 기운에도 불구하고 땀으로 목욕을 할 판이었다.
불편한 육체의 감각은 둘째치고, 무엇보다도 점점 분별을 잃어가는 놈에게 차츰 근심이 들었다. 정말 섹스라도 할 요량인지, 놈은 양변기 한쪽 귀퉁이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맹렬하게 자신의 페니스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가엾지만 여기서 중단시키지 않으면 놈이나 자신이나 상처를 입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사타구니 사이에 틀어박혀 있던 놈의 머리로 손을 뻗어 귓바퀴를 힘껏 잡아당겼다.
“우가가아바아!!!”
꽤 고통스러울 법한 비명이 놈의 입술을 타고 길게 터져 나왔다. 반쯤 발기한 자신의 음경을 입안 가득 삼킨 채여서, 처절하게 구겨진 얼굴에도 불구하고 소리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비틀어보지만, 단단히 각오를 한 모양으로 좀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목구멍을 찔러대는 거대한 분신에 구역질을 일으키면서도 결사적으로 빨아들이기를 계속했다. 자신의 양쪽 엉덩이를 움켜쥐고 있는 놈의 솥뚜껑 같은 손아귀도 결사적이긴 마찬가지.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강원은 비실비실 터지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만 뱉어. 날 고자로 만들 셈인가, 자네?”
“우휘, 히윱이아!(우씨, 싫습니다!)”
“많이 컸군. 지금 상사를 성추행하고 있다는 건 알지?”
“꼬이어 게이아아요! 하 어마 애여!(꼴리고 계시잖아요! 한 번만 해요!)”
“좋은 말로 할 때 항복하시지?”
“아여에 하바 애여. 왜으이에오.(가볍게 한판 해요. 빼드릴게요)”
“죽을래?”
“으우…… 우아악!!!”
목 뒤의 급소를 누르자 자지러지는 비명이 터졌다. 반사적으로 떨어져 나가는 놈의 멱살을 틀어쥐고 단숨에 일으켜 세웠다.
“……아…… 아야! 우왓! 아…… 아파!!! 아파팟!!!”
통점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은, 물론 한동안 거두지 않았다. 여전히 버둥거리는 거구의 몸도 제압해야 했고, 확실하게 놈의 욕정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팽팽하게 부풀었던 놈의 사타구니가 순식간에 움츠러드는 걸 확인하고 비로소 손마디의 힘을 풀었다. 만만치 않은 통증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흥분했던 후유증 탓인지, 놈의 몸은 해파리처럼 축 늘어진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자물쇠를 열고서 화장실 문밖으로 놈을 끌고 나왔다.
비틀거리는 놈의 몸을 벽에 기대게 하고, 흐트러진 자신의 차림새도 가다듬었다. 기세 좋게 발기해버린 수컷이 곤혹스러웠지만 놈을 보내고 나서 처리를 해도 될 일이었다.
“……다리에 힘주고 서봐…… 옳지…….”
“……으…… 흑…… 너…… 너무해…… 우이씨…….”
“엄살떨지 말고.”
“……더럽게 아프네…… 으씨……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다구요…….”
“그러게 왜 폭주해? 가긴 어딜 갈 건데?”
찔끔 솟은 눈물을 소맷부리로 쓱 닦는 놈의 어린애 같은 몸짓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다. 엄격한 잔소리가 유쾌한 농담조로 방향 선회를 하는 것도 할 수 없는 노릇.
“……선생님 거시기로 가지 어디로 갑니까…… 가서 따땃하게 품어드릴 자신 있었다구요…….”
표정은 여전히 어둡지만 놈 역시 가볍게 맞장구를 쳐주고 있다.
“내 거시기 품어줄 임자는 내가 청해. 삼고초려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끝까지 가보지 않음 누가 진짜 유비인지 모르는 겁니다. 꼴리는 대로 딱 일주일만 할 짓 못 할 짓 원 없이 해줘봐요. 그럼 믿을게요.”
“끈질긴 유비는 취향이 아니라니까.”
“질긴 건 애정의 깊이일 뿐이라니까요.”
“집착의 정도겠지.”
“선생님!”
“땀이나 닦아.”
“…….”
“말장난하는 거 보니까 손님 데리러 갈 기운 챙겼어. 세수하고 빨리 움직여.”
“…….”
“안 해?!”
“우 씨, 해요! 한다구요, 제기럴……!”
여전히 심상치 않은 아픔을 삭이고 있는 듯한 놈의 등을 세면대 쪽으로 가차 없이 떠밀었다. 술자리에서 잡아 족치기 전엔 저 잔뜩 낀 먹구름의 정체를 밝히기란 요원한 일. 가엾지만, 그저 발등에 떨어진 일부터 마무리되길 빌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움직일 마음을 먹었는지, 놈이 수영이라도 하는 것마냥 요란스레 세수를 시작했다. 수도꼭지 아래 고개를 들이밀곤 사방에 물을 튀기며 머리를 감고는 어린애처럼 꼼꼼하고 고지식한 몸짓으로 손수건을 펴서 물기를 닦아내는 놈이 유달리 측은하게 느껴졌다.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포기할 수 있게끔 만들 요량이었다. 농담 따먹기 식으로 매번 놈의 열렬한 구애를 에둘러 피하고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통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재킷 호주머니를 뒤져 다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막 라이터의 불을 붙이려는데, 어느새 다가든 놈이 입술 끝에 걸린 담배를 빼앗았다.
“……요즘 너무 많이 태우세요. 하루 한 갑 이상은 곤란합니다.”
호주머니로 들어온 놈의 손이 담배 케이스를 꺼내더니 원래 있던 자리로 강탈품을 집어넣었다.
“……이번 전시만 마무리되면 반드시 끊으세요. 약속해주실 수 있죠?”
진지하고 단호한 눈길이 강원의 시선을 잡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점점 기어오른다거나, 자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등등의 송곳 같은 비아냥은 차마 던질 수가 없었다.
“……어디 그게 마음대로…….”
“……약속해주세요.”
“…….”
“…….”
“……뭐, 어차피 끊기로 작정한 거니까 한 번 더 시도를 하긴 해봐야지.”
“…….”
강원의 대꾸가 마음에 들었는지 씨익 하니 사내다운 웃음이 놈의 얼굴을 환하게 물들였다. 소년 같은 꾸밈없는 미소며, 설핏 드러나는 뻐드렁니 하나가 귀엽게 생각되었다.
“……갈게요.”
“주눅 들지 말고 잘해. 그저 자네보다 앞서 경험을 쌓은 인간들일 뿐이니까.”
“당근이죠.”
막 화장실을 빠져나가는 놈의 등에다 노파심을 던지자, 시원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속내야 어떻든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을 만큼은 기운을 회복한 것 같았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를 흘리며 무심코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피식 쓴웃음을 짓곤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놈의 살뜰한 배려를 생각하면 한두 시간쯤 못 참아줄 것도 없었다.
정작 난처한 것은 여전히 뻐근한 열기를 품고 있는 하반신.
그에게 매혹된 이래, 죽 금욕을 해오고 있는 자신이었다. 이렌느 때도 그랬던 것처럼, 사랑에 빠지면 연인 이외엔 도무지 안을 욕구가 생기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간간이 만나던 섹스 파트너들은 자연스럽게 정리를 했고, 그에 대한 애타는 갈증만 나날이 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한계까지 밀어붙인 살인적인 스케줄 덕분에 위험 수위에 다다른 성적 긴장 상태를 대충 무시해올 수 있었지만, 직접적인 자극에까지 면역이 돼 있진 않았다. 물론, 성자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금의 상황에선 지극히 달갑지 않은 본능임엔 분명했다. 시간 여유마저 되찾게 된다면 심각하게 해소 방안을 궁리해야만 할 터였다.
화장실 맨 안쪽 칸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지퍼만 내리고 재빨리 훑어 올렸다.
몇 시간 전에 본 그의 모습을 뇌리에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심해처럼 어둡고 고요한 눈동자가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미세하게 떨고 있는 입술은 당장 씹어 삼키고 싶을 만큼 관능적이고, 울어서 퉁퉁 부은 눈꺼풀은 애처로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땀에 젖어 가닥가닥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광기 어린 충동이 일었다.
페니스를 움켜쥔 손아귀에 좀 더 힘을 가하자, 쾌락에 겨운 신음이 성대를 울리며 흘러나왔다. 할 수 없었다. 욕망과 이성 사이에서 한동안 흔들리던 강원은, 체념하고 음란한 상상 속에 몸을 실었다.
빗질하듯 상냥하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이 보인다. 감색 폴로티와 반바지를 재빨리 벗겨내 단숨에 품 안에 가두는 자신의 근육투성이 팔도 선명하다. 낡은 먼지투성이 운동화도 벗겨 내던진 지 오래다. 피곤에 지친 발가락을 하나하나 이로 물고, 그 틈새 깊은 골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종아리와 허벅지 안쪽을 거쳐 위로, 위로 주린 듯 혀를 이동시켰다. 부드러운 살가죽에 덮인 마른 몸뚱이는 너무나 달콤해서, 입술이 스치는 곳마다 마냥 녹아내릴 것만 같아 두렵다. 자장가를 연주하듯 느리게, 몹시 느리게 쓰다듬고 키스했다. 다리도, 팔도, 가슴도, 아랫배도, 성기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멜로디를 흘리며 자신에 동조했다. 언제까지고 질릴 것 같지 않은 숨 막히는 입맞춤을 떨고 있는 사랑스러운 입술에 연신 되풀이했다. 흐릿한 교성을 흘리며 몸을 여는 그가 보였다.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허리를 끌어당겨 단숨에 밀어 넣었다. 파도처럼 꿈틀거리는 허리는 창부처럼 색기가 넘치고, 옅은 분홍빛의 상기된 얼굴은 수줍은 소녀처럼 순수했다. 수컷다운 잔혹한 지배욕과 파괴 본능이 통제 불능으로 치솟았다. 야비한 계산에 능한 음란은 쉬이 속도를 높이게끔 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더더욱 깊숙이 파묻을 수가 있었다. 그래야만, 저 안쪽 가장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그의 전 존재를 찢어발기듯 먹어치울 수 있었다. 관자놀이 근처를 치닫고 있는 혈액의 흐름이 폭포수 소리처럼 요란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품 안의 그가 사랑스러운 나머지 심장이 터져버릴 기세로 요동을 쳤다. 정복의 쾌락은 불길처럼 뜨겁고, 얼음처럼 소름이 끼쳤다. 축축하고 좁은 그의 내부가 엄청난 힘으로 자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신경이 갈가리 끊어지는 듯한 쾌감에 강원은 전류에 감전된 것마냥 거세게 몸서리를 쳐댔다.
“……이…… 인…… 환……!”
짧고 강렬한 오르가슴과 함께 분수처럼 체액이 터졌다.
감아쥔 오른손을 흥건하게 적시고도 남은 정액이 양변기 속으로 눈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한껏 긴장했던 몸은 몇 번 꿈틀거리다가 이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변기 뚜껑을 닫고 앉아 한동안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식어드는 몸과 함께 씁쓸한 수치감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천천히 방법을 강구하면 될 일이었다. 한창때의 풋내기도 아니고(물론 까마득히 잊혔던 풋내기식 자위로 종종 몸서리를 치고 있는 요즘이긴 하지만) 몸의 욕구 하나 다스리지 못해 낭패를 볼 까닭이 없다.
벽에 걸린 휴지로 손을 닦고 뒤처리를 한 후 가뿐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손목시계를 살피니 안 회장과의 미팅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지만 서둘러 달려가면 시간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장 근처로 약속 장소를 잡은 것도 다행이었다. 차로 움직여야 하는 거리라면 러시아워에 묶일 시각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채 서서히 식어가는 몸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견딜 만하다고 여겼다. 몇 시간 전, 연인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훔쳤다. 촉촉한 습기를 머금고 있는 천의 감촉과 더불어 마치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은밀하면서도 감미로운 기쁨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이 순간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었다. 화장실을 빠져나온 강원은 현관 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런던 소더비의 시슬레와 우에하라를 놓친 것은 여전히 후회가 돼. 직접 보니 더 탐이 나더구만. 자네가 그렇게 말리지만 않았어도 덥석 끌어안았을 거야.”
“유명 컬렉터들이 싸안고 있었다는 점만 빼면 그 가격은 상당한 거품입니다, 회장님. 명성에 비해 상품(上品)은 아니라는 얘기죠. 몇 년 곁에 두고 보시면 반드시 질리실 거예요. 잘하신 겁니다.”
“격은 좀 떨어져도 시슬레와 우에하라인걸. 자넨 인상파의 시대는 이제 갔다고 하지만 글쎄, 나는 여전히 구식이 좋아. 코수스나 백남준과(科)도 영 마땅찮고, 드 쿠닝은커녕 워홀의 마릴린 먼로도 마냥 웃기지. 시대가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위대한 것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는 거 같아.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받아들일 마음은 안 생겨.”
“폴록과 폰타나는 아끼시잖아요?”
“그래도 모네에 비할 바는 못 돼. 인상파엔 아직 온기와 여유가 있어. 그건 우리네 옛 시골스러운 부뚜막에서나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지. 자네처럼 현장에서 뛰는 친구들한텐 작품이 곧 혁명을 의미하겠지만 우리네 감상족들에겐 근본에 대한 애틋한 향수가 된다네.”
“외람되지만, 회장님께 오늘날의 ‘추억’을 알아보는 시각이 결여돼 있으시기 때문은 아닐까요? 전위에도 혁명성만 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피카소 이전의 것에 노스탤지어만 존재하는 게 아니듯이요. 제 생각입니다만.”
시건방지게 들릴 수 있는 반론에도 불구하고 통이 큰 사내는 그저 빙그레 웃음을 지었을 뿐 불쾌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사내의 넉넉한 도량을 알기에 가능한 솔직함이기도 했다.
“부정은 안 해. 솔직히 누구나가 다 ‘볼’ 줄 아는 안목을 갖추고 있다면 자네 같은 친구들은 영 쪽박 신세를 면치 못하겠지.”
담배 연기로 자욱한 변두리 커피숍 한구석에 앉아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 사내가 한국의 재계 서열 1, 2위를 다투는 아선그룹의 후계자 중 하나인 안태희 회장이라고는 차마 누구도 믿기 힘들 것이다. 몸에 걸치고 있는 소박한 잿빛 슈트와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낡은 검정색 소가죽 구두는 길거리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40∼50대 가장들의 서민적인 차림새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소탈한 언변도, 지극히 검소한 인상을 주는 행동거지도,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재벌 총수의 그것이라고는 좀처럼 믿기 힘들다. 물론, 자수성가의 화신이었던 부친 고(故) 안재용 회장의 5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엄격한 후계자 교육을 받으며 자란 사내의 이력은 절대로 범용한 것이 아닐 터이다. 호남형의 얼굴에, 50이 가까운 장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0대의 날씬하고 늠름한 몸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또한 사내의 범상치 않을 성격을 은연중 드러내주고 있었다. (부친의 유지를 이은 것이긴 해도) 통일 문제에 각별한 사명감을 갖고 정치권과 연계하고 있는 대국적 면모로나, 아름다움에 대한 목마른 갈증을 어쩌지 못해 스스로 예술계의 마당쇠를 자처하는 고상한 품격으로 보나, 천만 명 가운데 한둘 나올까 말까 한 호걸임엔 틀림이 없었다.
열렬한 미술 애호가이자 유명한 컬렉터이기도 한 안 회장을 강원이 처음 알게 된 것은 6년 전 가을, 뉴욕에서였다. 소호와 그리니치빌리지 일대의 화랑가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한 중견 작가의 조촐한 사교 모임에 참석했다가 의외의 우정을 나누게 된 것이다.
같은 컬렉터라도 안 회장의 그것은 스노브적인 허영심을 위해서라거나 투자 가치로 작품을 사 모으는 저간의 속된 부류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야, 무언가를 끌어 모으는 행위 자체가 가지는 적자생존의 이전투구가 안 회장이라 해서 비껴갈 리는 없다. 그럼에도 미술 애호가나 컬렉터로서의 소양과 품격을 생각할 때, 확실히 사내가 풍기는 분위기는 분명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림을 믿는 자’라는 것이 안 회장의 미술 애호가로서의 면모를 설명하는 단적인 표현이 될 것이다.
그림을 믿는다는 것은 그림의 가치를 믿는다는 말과 한가지였다. 가치를 믿는다는 것은 또한 그 영향력을 믿는다는 뜻이고, 결론적으로 말해 안 회장 같은 부류의 컬렉터들이야말로 그림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신념에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강원 또한 ‘그림을 믿는 자’였고, 공범자 특유의 예리한 직감으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같은 신념을 공유한다는 은밀한 연대감으로 출발한 상대방에 대한 호의는, 만남이 거듭되는 동안 세대와 신분의 벽을 초월해 서로를 묶는 끈끈한 신뢰와 우정의 바탕이 되었다. 심심찮게 들어오는 여러 정보를 통해 막 미술 딜러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무렵이라(돈은 없고 탐나는 작품은 많은 강원에게 있어 거간꾼 노릇이야말로 재능을 살린 적절한 아르바이트가 아닐 수 없었다), 시기 또한 안 회장과의 연을 다지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터였다. 강원의 탁월한 안목과 재능은 컬렉터로서의 안 회장에게 신뢰할 만한 등대가 돼주었고, 역으로 강원이 딜러로서 쟁쟁한 컬렉터들과 연결이 가능하게끔 해준 이가 안 회장이었다. 물론 큐레이터라는 크리에이티브한 직업이 주는 흥분과 만족감에 비하면 미술상은 역시 하천한 돈벌이에 불과했다. 얼마 안 가 전문 거간꾼에선 손을 턴 강원이었지만 안 회장이나 안 회장을 통해 알게 된 몇몇 컬렉터들에겐 여전히 가끔씩 거래를 알선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요전에 수화(김환기) 것 8호는 마음에 드시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싶어, 강원은 태우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머리를 틀었다.
“그럼, 마음에 들다마다. 달과 항아리도 들어가 있고…… 딱 내 입맛이야, 김 선생. 경매를 거쳤으면 더 쳐줘야 했겠지. 고마워하고 있어.”
“운이 좋았습니다. 이전 소장자가 제 대학 후배의 선친 되시는 분이었죠. 후배도 매매가에 만족했습니다.”
아름다움(작품)을 응시할 때처럼 가늘게 뜬 안 회장의 눈길이 강원을 굽어보고 있었다. 부드럽고 사려 깊은 미소로 용맹무쌍한 에너지를 슬쩍 감추고 있지만 기대와 흥분으로 날카롭게 반짝이고 있는 눈빛까지는 채 숨기지 못했다. 만족한 거래에 대한 강원의 언급은 뒤를 이을 거래에 대한 사전 포석이었기 때문이다.
확고한 자신감과 긍지로 최상의 매물을 소개하는 강원을 안 회장은 늘 지금처럼 매혹된 시선으로 조용히 주시하곤 했다. 안 회장의 그런 눈길을 받을 때마다, 강원은 작품에 대한 매혹인지 아니면 강원 자신에 대한 그것인지 아리송해질 때가 있었다. 물론 그 둘 다일 것이다.
자신을 무슨 작품 취급하듯 하는 안 회장의 태도가 어처구니없다고도 생각되지만, 그 저변에 깔린 것은 속된 우월감이나 외설스러운 정욕 따윈 결코 아니었다(안 회장의 성정체성은 강원과 마찬가지로 바이였다). 그건 동급의 상대에 대한 안 회장 나름대로의 경탄과 인정의 표현이었다.
“오늘 보신 것은 그 이상입니다. 10년 이내로 박수근이나 이중섭의 것을 능가할 진짜 보석이지요.”
“허, 난 보수적이라니까…….”
능청스럽게 떠보고 있지만 강원을 속일 수는 없다. 말 그대로 보수적인 컬렉터(사실 컬렉터치고 보수적이지 않은 이가 있으랴만)임엔 틀림없지만 안목 또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는 애호가였다. 아선그룹 산하 아선완당미술관의 소유주이기도 한데다, 한국 미술계에선 알아주는 후원자이자 마당발인 안 회장이 물심양면의 지원을 통해 키워낸 거물급 작가만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사내가 그의 눈부신 재능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깎을 생각일랑 마세요. 그 이하로는 아무리 회장님이시라도 절대 못 내놓습니다.”
능구렁이 같은 웃음을 못 본 체 짐짓 심각한 얼굴로 탁자 위의 도록을 펼쳐 들었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던 걸로 찍어보시지요.”
“허허, 성질 급하네, 이 친구. 정말 마음에 쏙 들었나 보지?”
“회장님이시니까 특혜를 드리는 겁니다. 정식 판매는 리셉션 자리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니까요.”
“생색내지 말게. 내가 먼저 샀다고 하면 너도나도 뛰어들리라는 걸 알고서 내미는 카드잖나.”
“뭐, 누이 좋고 매부 좋고인 셈이죠.”
“……분명 흡인력은 어마어마하더군.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지. 간만에 멋진 체험을 했어. 자네의 노고가 느껴지더군.”
“작품의 힘이지요.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아니지. 작품과 똑 맞아떨어지게 판을 꾸미는 것도 예사 재주는 아니니까. 새삼 놀라 자빠졌다고.”
“흡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작가를 인정해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무명작가 아니야? 호당 가격이 이렇게 높은 신인이란 내 보다 처음일세, 김 선생.”
“이미 싸버린 똥을 깔고 앉아 뭉개는 회장님 수하의 얼치기 중견들보다도 훨씬 박한 가격입니다.”
“아야야, 송곳으로 푹푹 찌르는구만!”
“저 오늘 시간 많지 않습니다, 회장님. 어서 찍으세요.”
“하하하…….”
놀리는 어조로 뜸을 들이는 사내에게 쐐기를 박듯 도록을 들이대자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자네가 골라줘봐. 내 눈높이도 얼마나 자랐는지 좀 보게.”
“그건 안 되겠습니다. 실은 제가 다 차지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속이 쓰립니다. 아끼는 정부를 조각조각 토막 내 강탈당하는 기분인데 눈이고, 입술이고, 손가락이고, 뭐가 더 넘치고 모자란지 어떻게 분별합니까? 회장님께서 고르세요.”
진심을 읽은 안 회장의 얼굴에서 비로소 웃음기가 걷혔다.
“……많이 아끼는 모양일세. 이렇게 펄펄 끓는 자네는 처음 봐.”
“…….”
“……화가가 누군지 궁금하군. 그렇게 대단한 친구인가?”
“……박수근과 이중섭의 레벨 이상이란 건 과장이 아닙니다.”
“……그런 것 말고…….”
“……?”
“……어쩐지 로맨스의 냄새가 난단 말이지…… 아, 더 이상 캐는 건 실례가 될까?”
“…….”
속내를 읽힌 것도 안 회장의 타고난 예리함이라기보단 그간 다져온 우정 때문일 것이다. 속된 호기심이 아닌 진지한 관심이 사내의 부드러운 눈길에 떠올라 있었다. 별로 숨길 것도 없었지만 시시콜콜 떠버릴 여유 또한 없었다. 가장 적당할 대꾸를 골랐다.
“……작가에게 마음을 뺏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품에까지 사감을 개입시키진 않습니다. 고르십시오.”
“……그랬군. 실례했네.”
몇 초쯤 더 시선을 맞췄을 뿐으로 안 회장은 이내 강원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강원이 내민 도록을 펼쳐 들고 눈을 빛내길 4∼5분 남짓, 사내의 선택은 강원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완벽히 들어맞지도 않은 그런 것이었다. 개중 빼어난 수작 네 점을 서슴없이 지목했고, 그 외에 중간 크기 두 점을 추가해 강원을 더욱 기쁘게 했다. 무명작가의 작품을 한 번에 세 점 이상 구입한 것은 안 회장으로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작품의 파워를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생각됐지만, 안 회장의 보수적인 기질로 미루어 볼 때 승리의 축배를 들어 마땅한 쾌거였다.
“……그만 웃게나. 그놈에 살인미소엔 나라도 흔들린다네.”
“잘 고르신 겁니다. 중간 크기 두 점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 작가의 후기 성향을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내주고 있지요.”
“그만 웃으라니까.”
“리셉션엔 물론 참석해주시겠지요? 바쁘신 줄은 알지만 잠시라도 들러주시면 작가에겐 큰 힘이 될 겁니다.”
“팔불출이 따로 없군. 허, 참. 저 방약무인하고 도도한 큐레이터는 어디로 갔을까?”
부드럽게 혀를 차며 기막히다는 듯 웃는 안 회장에게도 아랑곳 않고 강원은 마음껏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한 달간의 피눈물 나는 강행군이 비로소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속물적인 승리감에 살짝 도취된대도 누가 뭐랄 것인가.
“……그만 일어날까? 오랜만에 고운 친구를 보니 눈이 즐겁기 한량없네만 내 욕심만 채운대서야 경우가 아니지.”
30분쯤 계속된 수다의 끝 무렵, 힐끔 시계를 확인한 강원을 못 본 체, 눈치 빠른 안 회장이 먼저 자리를 털었다. 강원 이상으로 살인적인 스케줄에 시달릴 사내건만 이상한 데서 겸손을 부리곤 한다.
“……제가 댁으로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송구스럽습니다, 회장님.”
“허허, 입에 발린 소리까지! 사랑이 사람 하나 버려놓는구만!”
“…….”
“그만 벙글거리라니까. 가슴이 떨려서 어디 일 하겠나. 다른 컬렉터들한테도 그렇게 웃음을 뿌릴 요량인가?”
“흠, 속 보이는 짓도 회장님이시니까 하는 겁니다.”
“그래야지. 리셉션은 파장 무렵에 잠깐 들러봄세.”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진 없고…… 자네의 연인이 얼마나 아리따운 사람인지 궁금해졌을 뿐이야.”
“……별로…… 연인이 아닙니다만…….”
“오, 이런. 그렇다면 아직 외사랑? 갈수록 기절초풍일세그려.”
“……회장님…….”
“하하하하하……!”
어쩐지 몇 년은 놀려먹을 빌미를 제공한 것은 아닌가 언짢아져서, 줄곧 얼굴을 떠나지 않던 미소를 부러 걷어냈다. 커피숍을 나와 승용차에 오르는 뒷모습을 배웅하면서도 그저 꾸벅 허리만 굽혔을 뿐, 잘 가라는 인사는 하지 않았다. 연상의 친구란 아무래도 좀 피곤한 노릇이라고, 강원은 잠깐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갤러리 현대의 지상 10층에 자리하고 있는 리셉션 홀은 500여 평 크기의 규모로, 최적 수용 인원이 400명을 넘지 않는 전형적인 중소형 연회장이었다. 원래는 갤러리 현대가 주관하는 전시의 부대 행사를 위해 조성된 공간이지만 각종 행사가 많은 가을이나 연말엔 미술계 이외의 단체에도 송년회나 기타 연회 장소로 대여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언론 홍보를 최대한 자제하고 실속 있는 관람객들만을 상대하자고 방향을 잡은 것은 지금도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되었다.
컬렉터나 딜러들은 물론, 알아줄 만한 미술계 인사들 대부분이 포함된 초대객 명단을 작성하고 초청장과 도록을 보냈었지만, 역시 무명작가라는 점이 걸렸었다. 10년 전의 얄팍한 지명도도 그랬고, 설령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손 쳐도 그에 관련된 스캔들과 감옥에까지 간 이력은 되레 마이너스로 작용하기 십상이었다. 강원 자신이 기획하고 주관했다는 점 이외엔 저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메리트라곤 없던 터라 초대객의 절반이라도 건지면 성공이라 여기고 있었다. 어차피 작품을 일단 본 치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극을 받을 터였다. 양보다 질을 생각하면 소문난 잔칫집처럼 떠들썩할 필요는 없다.
결과적으로, 500여 평의 공간이 너무 썰렁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각오했던 것은 강원의 기우에 그치고 말았다. 약속된 시각인 저녁 7시가 채 되기도 전에 꾸역꾸역 밀려든 초대객들과 기자들로 리셉션홀은 이미 장터처럼 붐비기 시작했다.
안 회장과 담판을 지은 것이 불과 20∼30분 전인데도 어느새 소문이 퍼진 건지, 컬렉터와 갤러리어들 중 일부 성질 급한 치들은 벌써부터 강원이나 다른 현대 직원들을 붙들고 작품을 흥정하려 들었다. 물론 대부분의 초대객들은 홀 가운데 차려진 음식 테이블 앞에서 끼리끼리 담소를 나누거나 도록을 펼쳐보며 다른 경쟁자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분명 작품의 힘을 파악하고 있긴 하되 정말로 뜰 작가인지 확신을 못 하고 있거나, 책정된 가격을 조금이라도 떨어트려보려는 미술상으로서의 장사꾼 근성 때문일 것이다.
“성황이로군. 그렇게 고집을 부리더니 결국 끝장을 보네, 김 선생?”
홀 안을 종횡무진 오가며 초대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챙기고 있던 르네가 어느새 다가와 놀리듯 말문을 텄다. 화사한 살굿빛 시폰 드레스로 성장을 해서 유달리 젊고 아름다워 보이는 여장부였다.
“이렇게 되면 현대 이사진들도 좀 억울해하겠는걸? 한몫 볼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으니 말야.”
“검증된 작가들에게만 관심을 갖는 치들이니 자업자득이죠. 일은 우리가 했지만 마인 아트의 문 이사가 자금을 댔으니까 결국은 마인 아트 쪽에 장 작가를 뺏긴 셈입니다. 앞으론 그쪽에서 독점을 하려 들 테죠.”
“하지만 장 작가를 알아본 건 김 선생이잖아? 이렇게까지 성공시킨 것도 따지고 보면 김 선생 덕분이고. 억울하지 않아?”
“뭐가요? 제가 장 작가를 뺏기는 것도 아닌걸요. 잇속을 나눠먹는 재단 쪽 일엔 관심 없습니다. 장 작가를 잡은 게 마인 아트라고 해도 전시회를 꾸미는 일엔 앞으로도 제가 나설 작정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구, 그럼 지난 한 달간의 수라장을 또다시 겪겠다는 얘기야? 김 선생 몸이 무쇠도 아니구…….”
“뭐, 이번엔 좀 무식하게 처리를 한 쪽이고…… 앞으로야 스케줄을 봐가면서 진행해야겠죠.”
“흠, 재단에서 봐주긴 할까? 지들 장삿속에 하등 도움이 안 될 일에 자기네 직원이 열의를 쏟는 거…… 이번 전시야 어영부영 허락이 떨어진 케이스지만 앞으론 좀 다를걸?”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르네의 얼굴에 드러난 것은 친구로서의 진지한 우려였다. 강원 역시 그 부분에 생각이 못 미친 것은 아니라서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조심스럽게 대답을 골랐다.
“번외 일을 한다고 해도 현대 직원으로서 저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자신은 있습니다만…… 정 딴지를 걸 것 같으면 현대를 떠날 용의도 있어요.”
안경 너머 르네의 아름다운 푸른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그건 안 돼, 김 선생! 나 있을 때까진 행여나 그런 생각 하지 마! 나 혼자 무슨 재미로……!”
“하하, 그저 그렇다는 얘기죠. 갤러리 현대는 그나마 자유롭게 구상을 펼칠 수 있는 한국에서 몇 안 되는 미술관 중 하나이기도 하고…… 뭐, 안 잘릴 자신 있으니까 너무 섭섭해 마세요, 르네.”
강원과 마찬가지로 부초처럼 자유로운 여장부라 강원의 이적 발언이 단순한 호기가 아니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가볍게 받아쳤지만 르네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래도 현대와 장 작가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역시 장 작가겠지?”
“후후, 글쎄요…….”
“……부러운 일이야. 큐레이터로서…… 그만큼 마음을 사로잡는 자신만의 화가를 발견한다는 건 정말 가슴 떨리는 행운이지.”
“…….”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시작해야 할 텐데 정작 주인공이 안 보이네? 온다고 확실히 얘기하긴 했어?”
제법 발 들이밀 틈도 없이 북적이는 실내를 휘 둘러보며 르네가 말머리를 돌렸다.
“……다짐을 두긴 했지만…….”
“20분쯤에 시작하기로 하지, 뭐. 형식적인 거니까 신경 쓸 필요 없잖아?”
초조한 기색을 감지했는지 르네가 소탈하게 받아넘긴다.
시각은 이미 7시에서 10분 정도나 넘어가고 있었다. 서너 명 미술계 인사들의 축사와 더불어 케이크 커팅식과 간단한 인터뷰들로 이루어질, 생략해도 별 상관이 없을 조촐한 식순이긴 하지만, 주인공을 빼고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강원도 내심 초조해하고 있었다. 온다고 약속을 하긴 했어도 언제든 보이콧을 할 만한 사람인지라 정작 얼굴을 보기까진 안심을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물론 막판의 변덕으로 참석을 하지 않는다 해도 작품 판매나 전시회 성공 여부완 하등 관계가 없는 일이긴 했다.
작품의 완성과 더불어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 홀로 날갯짓을 시작하기 마련이었다. 은둔형 작가든, 세상에 밀착돼 있는 작가든, 작가의 해프닝에 따라 좌지우지될 작품이라면 그건 그저 거품일 뿐이라는 얘기.
치기 어린 거품에 생래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는 강원으로서, 작가의 비사교성엔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그에 대해서만 유독 초조해하는 것은 역시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데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세상에다 그를 붙들어 매두고 싶은 안타까움인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과의 거리를 좁히고 싶은 절박한 그리움인 것이다…….
쿤스트할레와 베니스의 손님들을 이끌고 막 입구로 들어선 분도를 향해 르네가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화랑가의 큰손들 못지않게 중요한 친구들이라 강원 역시 다가가 인사치레를 해야 했지만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7시 20분이 넘어가면서 기대감은 서서히 체념으로 바뀌고 있었다.
사회를 맡은 후배 직원 하나가 자꾸만 강원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식을 시작할지 말지 강원의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30분에 시작하라고 눈짓을 준 뒤 다시금 입구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비상식적이랄 수 있는 허한 실망감이 전신을 사로잡는 것에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누군가 소맷부리를 잡아당긴다.
“……이거 괜찮더군요. 가격을 여쭤봐도 될까요?”
군소 화랑들 중 하나인 수가 아트 갤러리의 손 사장이 도록을 들이밀며 강원의 눈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화랑 규모는 작아도 예리한 감각으로 다수의 단골 고객들을 확보하고 있는 40대 초반의 여사장이었다. 여자가 집어낸 것은 안 회장이 이미 지목한 것으로, 그의 후기작 중에서도 보기 드문 50호 크기 「레드」였다. 사정을 얘기하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여자를 스쳐 본능처럼 입구로 시선을 가져갔다.
일순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착각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리셉션 홀을 가득 채우고 있던 웅성거리는 소음 또한 일시에 멈춘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갑자기 빨라지는 심장 박동에 강원은 크게 심호흡을 거듭해야 했다. 강원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바로 그 위치에만 휘황한 무지갯빛 조명이 뿌려지고 있기라도 한 듯, 눈이 부신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역시 착각일 것이다. 사랑에 빠진 얼간이만이 품을 수 있는, 마약과도 같은 노곤한 도취…….
‘그’가 들어서고 있었다!
인파에 주눅이 든 모양인지 실내를 굽어보는 눈이 잠깐 휘둥그레지는 것이 보인다. 그새 이발까지 한 모양으로, 단정하게 정리가 된 머리카락이 낯설었지만 갸름한 얼굴의 사랑스러움은 여전했다. 뺨은 약간 상기돼 있고, 섬세한 모양새의 입매는 살짝 벌어져 있었다. 새하얀 셔츠 위에 입은 하늘빛 여름 양복은 가무잡잡한 피부색과 대조를 이루며 한결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을 주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달리 안내인을 찾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서는 듯, 곤혹스러운 빛이 저 섬세한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가 뒤돌아 도망칠 것만 같은 불안감과 함께 부지불식간에 달려든 욕구로 아래가 뻐근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맙소사, 지금 발정해서 도대체 어쩌자는 얘긴가!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것으로, 강원은 가까스로 짐승의 흥분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외면한다면 좀 더 수월했겠지만, 그에게서 잠시라도 시선을 뗄 만큼의 인내심을 갖기엔 자신은 지나치게 굶주려 있었다. 누군가 보고 혹 눈치를 챌지 모른다는 경계심도 당장은 까맣게 잊혔다. 허기진 눈동자는 불길을 일으키며 그를 안으로, 안으로만 집어삼키고 있었다.
후배 큐레이터 하나가 홀 입구에서 계속 머뭇거리고만 있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친절한 후배의 태도에 비로소 안도한 듯 소맷부리로 이마의 땀을 훔친다. 사랑스러움에, 달려가 얼싸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발작적인 욕망으로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그가 어눌한 태도로 무언가 질문을 하자 후배의 시선이 홀 안쪽을 휘휘 둘러본다. 마침내 강원을 포착해낸 후배가 손짓을 했고, 그의 사랑스러운 시선이 직격탄으로 강원에게 날아들었다. 아주 간발의 차이로, 강원은 자신의 눈 속에 아로새겨져 있던 격렬한 갈증을 감추었다.
“……장 선생님!”
상냥하고 친절한 큐레이터의 가면을 재빨리 뒤집어쓴 자신의 목소리가 쾌활하게 인사를 건넨다. 기쁨과 경탄과 고마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환한 미소가 연인의 얼굴 가득 퍼지고 있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은 달콤한 전율이 등줄기를 스쳐갔다.
“……느…… 늦었지요……?”
제법 떨어져 있어 입술의 움직임으로만 그의 어눌한 대꾸를 읽을 수 있었다. 절뚝거리는 애처로운 걸음으로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서 단 한순간도 눈길을 떼지 않은 채, 강원 또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슴은 뛰고 숨은 가쁘게 느껴졌다. 찰랑찰랑, 머리 꼭대기까지 가득 차오른 사랑에 온 넋이 전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