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2003년 7월. 장인환(張仁歡)
옷을 갈아입긴 했지만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은 역시 좀 신경이 쓰였었다.
여유가 있으리라 예상하고 이발소에 들러 모양을 낸 것까진 좋았는데, 그만 러시아워에 걸리고 말았다. 늦은 때문인지 건물 지하 주차장은 이미 승용차들로 만원이었다. 홍 기사가 인환을 갤러리 현대 앞에 내려주고, 달리 주차장을 찾아 차를 몰고 사라졌을 때는 이미 7시 2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막 해가 진 무렵이라 사방은 검붉은 노을빛으로 가득했다.
막상 약속된 시간에 늦고 보니, 과연 참석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아침부터의 갈등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인환의 참석 여부가 전시회의 성공과 별 관련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그럼에도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시달릴 생각하면 역시 아득한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 주인공 주제에 지각을 해버린 현실이 영 염치가 없었다. 저 천사 같은 남자에게 약속을 하찮게 여기는 무책임한 인간으로 낙인이 찍혔을 걸 생각하면 괴로웠다. 아마도 식은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
소심증에 빠진 얼굴을 들고 인환은 전방의 회백색 석조 건물로 시선을 가져갔다.
갤러리 현대는 인환이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10년 전 무렵에 비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외관을 하고 있었다. 유명 건축가 강동욱의 선이 굵고 모던한 설계로 지어진 건물로, 성원그룹 산하 성원미술재단이 직접 운영을 맡고 있는 ‘성원현대미술관’의 관훈동 본관이었다.
성원현대미술관은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우후죽순 격으로 세워졌던 군소 사립 미술관들 중 하나였으나, 당시로서는 꽤 혁명적인 여러 기획전들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확고하게 입지를 굳힌 후, 현재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는 곳이었다. 10년 전과 다름없이 아름다우면서도 위압적인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는 건물의 외관과 마찬가지로, 갖가지 파벌 싸움과 부정부패로 썩어가는 기성 화단에 기대지 않는, 한국 미술계의 독보적인 전위 부대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도 10년 전 그대로였다.
90년대 초반, 신예 작가 그룹전의 일원으로 몇 점의 작품을 전시한 외에 인환과는 별 인연이 없던 터라, 젊었을 때는 꽤나 동경하던 곳이었다. 그렇게 기를 쓰고 잡으려던 신기루가 막상 잡으려는 욕구를 놓아버린 순간 거짓말처럼 손에 쥐어지려 하고 있었다. 신기루의 허망함을 깨달아버린 자에게 그것은 더 이상의 동경도, 또한 성취도 되지 못했으니, 생각하면 인생의 쓰디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40대쯤으로 보이는 중년 남녀 한 쌍이, 갤러리 앞뜰에 조성된 자그마한 정원에 서서 한동안 감회에 젖어 있던 인환을 스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지각한 인간이 자신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리셉션 초대객임이 분명한 그들의 성장 차림에 겨우 용기가 모였다. 인환은 마지못해 현관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복도 군데군데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안내 표기처럼 복도 가장자리를 따라 죽 이어진 축하 화환과 화분들의 행렬을 좇을 필요조차 없었다. 엘리베이터로부터 10여 미터쯤 전방에 활짝 문이 열린 리셉션 홀이 사람들을 삼켰다간 토해내고, 다시 삼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환한 불빛과 함께 들릴 듯 말 듯 부드러운 세미클래식이 홀 안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웅성거리는 소음에 묻혀 곡조는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입구의 안내 데스크에 초대장을 내밀 때만 해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지만, 막상 홀 안으로 들어섰을 때 인환은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무명작가의 그림 판매에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릴 수 있단 말인가. 놀라움은 곧 곤혹스러움으로 바뀌어 인환의 발목을 얼어붙게 했다.
500평 남짓한 공간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인파는 족히 300명은 넘어 보였다. 홀의 한가운데엔 축하 케이크와 함께 갖가지 음식과 칵테일 음료들이 즐비한 테이블이 놓여 있고, 사람들은 대부분 그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음식 접시나 음료수 잔을 든 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음식 테이블 주변은 물론 홀 바깥쪽 벽을 따라 의자들이 일렬로 놓여 있었지만 남자는 물론 여자들도 얌전히 앉아 있는 이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출입구 맞은편 벽엔 ‘어나더 스페이스 장인환전 개막 축하 및 청담동 별관 착공 기념 리셉션’이라 적힌 현수막이 붙어 있고, 그 바로 아래, 바닥으로부터 세 계단쯤 올라간 곳엔 7∼8미터 폭의 연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연단 위, 열댓 개쯤 죽 늘어선 의자엔 역시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식이 이미 끝난 건지 아닌지를 빈 의자로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안으로 들어가 김강원을 찾아야 할지(아는 사람도, 또 의지해야 할 사람도 김강원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아니면 달리 안내를 기다려야 할지 인환은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 두어 번인가 개인전을 치른 적이 있지만 이렇게까지 떠들썩하고 요란스러운 잔치를 동반하지 않았었다. 전시 첫날, 친지와 주변 친구들을 모아놓고 고사를 지내며 맥주나 나눠 마시는, 그야말로 생일잔치와 다름없는 그것에만 익숙해 있던 인환으로선 눈을 굴릴 수밖에 없는 잔치마당이었다.
인파에도 불구하고 빵빵하게 틀어대는 에어컨 탓인지 실내는 꽤 시원한 편이었다. 이마며 콧등이 금세 땀으로 축축해진 건 틀림없이 긴장을 한 때문이리라.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출입구 한쪽 구석에서 호흡을 고르고 있는 동안, 다시금 도망치고 싶은 욕구로 뒷덜미가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막 곁으로 다가든 젊은 청년이 아니었다면 얼마 안 가 비겁한 욕구에 굴복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와드릴까요, 손님? 누구 찾으시는 분이 계십니까?”
호스트를 맡고 있는 현대 직원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김강원 선생님은 어디 계신지……? 안 보이시는데…… 식은 벌써 끝난 건가요?”
이마에 솟은 땀을 소맷부리로 훔쳐내며 묻자 청년이 친절한 영업용 미소를 보내온다.
“아뇨, 곧 시작할 예정입니다. 실장님께선…… 잠시만요…….”
청년의 대꾸에 안도감을 느낀 것도 잠시, 어쩐지 자신의 책임인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홀 안쪽을 향한 청년의 시선이 휘휘 실내를 훑더니 단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아, 저기 계시네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사람들 몇이 한쪽으로 비켜서자 비로소 그리운 구세주의 모습이 보였다. 일순 긴장이 풀어지며 손끝까지 떨리는 기쁨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보기 드문 장신에 보기 드문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큐레이터는 인환 말고도 뭇 공중의 시선을 한 몸에 사로잡고 있었다.
남성보다 여성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미술계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듯, 인파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여성들 대부분은 나이를 불문하고 한두 번쯤은 남자를 훔쳐보며 가슴을 두근거렸을 터이다. 몸짓과 태도는 자신감에 넘치고 얼굴은 모델을 연상시킬 정도로 화려하게 빛을 뿜어내는 남자에게 그 어떤 여성인들 무심할 수 있을 것인가. 김강원을 처음 만났던 마인 아트의 시상식 땐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었던 자신의 둔감함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남자는 점심 무렵에 본 그대로 옅은 블루의 캐주얼한 시어서커 슈트를 입고 있었다. 아우터로 웨이브가 진 새까만 머리카락도, 분방한 노타이 차림도 여전했다. 헤어진 지 고작 다섯 시간이 채 될까 말까 할 뿐이건만, 마치 며칠을 못 본 것처럼 반갑고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장 선생님!”
기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제법 큰 부름이 귓전에 메아리쳤다. 홀릴 것 같은 미소가 남자의 핸섬한 얼굴을 활짝 물들여가는 것이 보였다.
집으로 내뺄까 말까,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갈팡질팡 마음을 어지럽히던 소심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저 어려운 숙제처럼 부담으로만 다가오던 300여 명에 가까운 인파도 홀연 잊혔다. 북적거리는 홀 안의 소음도, 희미하게 깔리는 클래식 선율도 한순간 들리지 않았다. 그랬다. 도대체 무얼 신경 쓴단 말인가. 무얼 겁낸단 말인가. 저 남자 하나면 충분했다. 저 남자가 내 그림을 좋아해주고 인정해주면 그뿐이었다. 나머지는 그저 덤에 불과했다.
“……느…… 늦었지요……?”
바보처럼 벙실거리는 웃음을 얼굴 가득 매달고 인사를 던졌지만, 목구멍을 꽉 틀어막고 있는 감동 때문인지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참석하길 천만 번 잘했다고, 인환은 처음으로 자신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큰 걸음으로 정신없이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보폭을 크게 할 때마다 더욱 심하게 절뚝거리는 병신 다리도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자신만큼, 아니, 그 이상의 빠른 걸음으로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자신의 것처럼 익숙하고 그리워져버린 남자의 상큼한 체취가 코끝으로 확 끼쳐드는 걸 자각한 순간, 깁스가 돼 있지 않은 왼손이 남자의 힘찬 손아귀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오지 않으시는 줄 알고 잠깐 걱정했었습니다. 길이 많이 막히지요?”
살짝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악력이 손가락에 가해졌다. 오른손으로 틀어쥔 걸로도 모자란다는 듯, 부채처럼 활짝 펴진 남자의 왼손이 인환의 것을 포개고 있었다. 크고, 따스하고, 단단한, 더 이상의 요구가 필요 없을 완벽한 구원의 손길이었다.
“……예. 지각은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괜찮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식순일 뿐인걸요. 이발하셨네요? 단정해서 보기 좋습니다. 슈트도 핸섬한 얼굴과 너무 잘 어울리세요.”
호의를 고스란히 드러낸 남자의 눈길이 얼굴과 몸을 오가며 깊은 응시를 해와서 인환의 얼굴은 조금 빨개졌다. 주름투성이 절름발이 중년 남자에게 외모 칭찬이라니 당치도 않다고 생각됐지만 남자의 눈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곧 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내빈 여러분께서는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곧 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그저 가슴을 두근거리는 외엔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사이, 연단에 설치된 마이크를 통해 기념식의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음성이 들렸다.
“……이리 오세요…….”
포개져 있던 왼손만을 거두어들였을 뿐, 힘찬 악력으로 틀어쥔 인환의 오른손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며 남자가 속삭였다. 남자가 발걸음을 옮기는 방향은 연단이었다. 연단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신과 남자를 향한 뭇 시선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인환의 얼굴을 알아봐서라기보단 워낙에 시선을 끄는 화려한 남자 때문이리라. 불쑥 고개를 쳐드는 게이의 자격지심에 손을 빼려 해도 남자는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의 악력으로 인환을 묶고 있었다. 연단 위의 주빈석에 인환을 앉힌 다음, 남자 역시 그 옆자리에 몸을 묻은 후에야 비로소 쇠사슬처럼 죄던 남자의 손길이 떨어져나갔다.
식은 연단 위의 의자에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잡은 직후 시작되었다. 교수직을 사양하고 드문 전업 작가로서 존경을 받고 있는 노(老) 화백 하나와 선배 교수들의 친일 행각을 문제 삼았다가 재임용에서 탈락한 전 미대 교수 하나, 그리고 성원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이어진 미술계 인사들의 축하 메시지와 김강원의 경과 보고로 시작된 기념식은, 청담동 별관 건립을 위한 후원금 모금과 기자들과의 인터뷰들이 이어지면서 절정을 이뤘다.
단상 앞으로 나가 짤막한 답사를 하거나 기자들의 몇 가지 질문에 답변을 할 땐 어쩔 수 없이 이마에 식은땀이 솟아났지만, 그때마다 격려하듯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오는 김강원 덕에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을 수가 있었다. 미리 얘기가 돼 있었던 모양으로 기자들의 질문엔 인환의 과거사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포함돼 있지 않았다. 주로 작품의 성향이 바뀐 이유라든가 주제 의식이나 앞으로의 계획 같은, 전적으로 작품에 관련된 질문들뿐이어서 인환은 긴장한 와중에도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인터뷰가 무사히 끝나고 나자 마지막의 케이크 커팅식 땐 느긋한 여유마저 찾아져서, 내내 굳어 있던 인환의 얼굴에도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감돌았다. 축사를 했던 세 사람의 미술계 원로와 김강원, 그리고 인환 자신이 함께 모여 케이크를 자르자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샴페인이 터졌다.
“……잘 견디셨어요, 선생님…….”
인환의 바로 옆에 바싹 붙어선 채 커팅 나이프를 든 인환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 있던 김강원이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인환만이 알아들을 수 있게끔 바로 귓가에서 토해진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거의 울림처럼 느껴졌다. 부드러운 정감이 심장은 물론 뼛속 깊은 곳까지 전해져서 전신이 감미로운 기쁨으로 전율했다. 어쩔 수 없이 얼굴이 홍당무가 됐기에 감히 남자를 쳐다볼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케이크가 각자 접시에 나누어지고 함께 축배를 드는 것으로 식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형식적이긴 해도 40분 넘게 시간이 걸린 셈으로, 시계를 보니 어느새 8시가 넘어가 있었다. 물론, 식 자체보다 더 중요한 (작품의 판매를 겸한) 사교마당이 남아 있었으니, 끝까지 마음을 놓을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최대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이후의 일이란 자신의 것이라기보다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갤러리 현대가 치러내야 할 몫이었다. 인환은 그저 현대 쪽에서 이끄는 대로 초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얼굴도장만 찍으면 그만이었다.
8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식이 끝난 직후부터 김강원은 갤러리 현대의 디렉터인 르네라는 아름다운 여성에게 인환을 소개시켜주곤 줄곧 화랑 주인이나 컬렉터들에게 붙잡혀 작품 거래에 임하고 있었다. 판매 책임을 맡고 있는 직원이 달리 있긴 했지만, 수석 큐레이터가 갖고 있는 신뢰감이나 카리스마만큼 판매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도 없을 터였다.
김강원 못지않게 인환 또한 홀 안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눴다. 마인 아트의 시상식에서 한 번 본 일이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럴 것이, 마인 아트 때와는 달리 초대객들의 태반이 컬렉터나 미술상들이었기 때문이다. 대개는 그저 형식적인 인사치레나 입에 침이 마를 정도의 칭찬을 일방적으로 쏟아내기 일쑤였지만, 개중에는 도록을 들이밀며 작품 설명을 부탁하는 곤란한 치들도 있었다(이들은 대개가 미술 잡지의 기자들이었다). 그럴듯한 말주변이라곤 도무지 없는 인환으로서 달리 솔로몬의 명답이 나올 턱은 없었다. 그림을 그릴 때의 기분이라든가, 주제와 그에 따른 재료 선택의 문제라든가 하는, 지극히 물리적인 해명을 횡설수설 주워섬기기가 고작이었으니, 흥미진진한 얼굴로 경청하던 치들도 금세 실망한 얼굴로 떠나가기 일쑤였다.
한동안 곁에서 에스코트를 해주던 아름다운 디렉터마저 다른 손님들에게 불려가고, 인환은 잠시나마 혼자가 되었다. 마침 술과 음료수 쟁반을 들고 홀을 누비던 현대 직원이 눈에 띄었기에, 와인 한 잔을 받아 홀 한쪽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숨을 돌린 것도 잠시, 잔을 채 비우기도 전에 인환은 다시금 곁으로 다가온 일단의 사람들에게 빙 둘러싸이고 말았다.
국공립 미술관의 중견 큐레이터들은 물론, 몇몇 미술 평론가들이었다. 속으로 한숨이 터졌지만 절대로 귀찮은 내색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얼굴 근육이 그대로 굳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사람 좋은 미소를 다시 끌어오며 인환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챙겼다. 어느 정도 예상한 그대로, 과장되고 수선스러운 극찬이 끊임없이 리플레이되고 있었다. 어떤 견해는 귀에 들어오고, 어떤 주장은 입력도 되기 전에 그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릿속도, 귓속도 마냥 얼얼하기만 했다.
“……반응이 아주 좋아요, 선생님. 알고 계시죠?”
큐레이터와 평론가 집단이 겨우 떨어져나가고 몇 분이 지났을까, 어느새 김강원이 다가와 말을 붙였다. 녹아내릴 것만 같은 달콤한 기분을 주는 살인 미소도, 밀어처럼 속삭이는 듯한 상냥한 말투도 변함이 없었다.
낯선 이들로부터 속이 거북할 정도의 열광적인 찬사를 듣고 난 직후라, 인환은 다시금 곁에 다가와준 남자가 너무나 반가웠다. 허영기 가득한 젊은 화가라면 다를지 모르지만, 칭찬이든 비판이든 면전에서 평가를 듣는 것처럼 거북살스러운 노릇도 없었다. 김강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펄쩍 뛰듯 박동을 빨리하는 심장을 모른 체하며,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바보웃음을 달고 김강원과 시선을 마주쳤다. 같은 칭찬이더라도 김강원의 그것엔 그저 기쁘고 가슴 떨리는 흥분만을 느끼는 걸 보면, 자신은 확실히 이 남자를 너무나 특별하게 여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가요……? 제법 팔리고 있어요?”
“후기작은 벌써 반타작입니다. 마티엘이나 색감이 매혹적인 전기 작품 몇 점도 새 주인을 찾았고요.”
놀라운 일이었다. 남자의 재주를 알고는 있었지만 인환으로선 그야말로 예상 밖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괴…… 굉장하네…….”
동요를 반영하듯, 대꾸하는 인환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 좀 남아 있지만 이미 대세는 판가름이 난 셈이죠. 전시회가 끝날 무렵이면 아마도 후기작 대부분이 팔릴 겁니다.”
인환의 빨개진 얼굴에서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은 남자가 달콤하게 덧붙였다. 홀릴 것 같은 살인 미소 또한 남자의 핸섬한 얼굴을 떠날 줄 몰라서, 버거운 나머지 수시로 시선을 내리까는 쪽은 인환이었다. 여전히 그림의 판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고 아직 인사를 챙기지 못한 초대객들에게도 신경을 쓰는 것 같았지만, 말 그대로 이미 대세가 판가름 난 탓인지 남자의 태도에선 편안한 여유마저 느껴졌다.
“……가격도…… 아주 비싸게 매기셨던데요…….”
“음, 전 그것도 좀 박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더 오르기 전에 재빨리 채간 쪽이 행운인 셈이죠.”
“……도…… 도로 무르자고 하지는 않을까 몰라…….”
어린애 같은 우려였지만 인환은 정말로 걱정이 되었다. 순간적인 거품에 자신은 물론 김강원까지 바보 취급을 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아니면 금세 내다 팔거나…… 그러면 오히려 더 나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덤핑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어느 싸구려 화랑 같은 데서 산더미처럼 쌓아둔 채 골라∼∼골라아∼∼∼ 하는 건 아닐까 걱정입니다…….”
더듬거리는 인환의 대꾸에 아름다운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순 몸을 굳힌 채로 몇 초쯤 인환의 겁먹은 시선을 붙들고 있던 남자의 입술이 삐죽하니 올라가더니 숨죽인 웃음이 터졌다.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고서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남자는 한참 동안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치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발작적으로 몰아치는 웃음의 폭풍에 고통마저 느끼는 모양이었다. 늠름하게 벌어진 어깨 근육은 파들파들 떨렸고, 불그스름한 핏기를 띤 눈시울엔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무의식적으로 뻗어 나온 남자의 손이 인환의 왼팔을 움켜쥔 채 으스러져라 힘을 가해오고 있었다. 무언가를 참기 위해(아마도 웃음이겠지만)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 김 선생님……?”
분명 자신의 바보스러운 대꾸가 고통의 원인이었기에 조금씩 홍조를 더해가던 인환의 얼굴은 결국 새빨간 토마토가 되고 말았다. 대범한 화가는커녕 제대로 큰 어른답지도 못한 대꾸가 아닐 수 없었다. 자지러질 것처럼 거듭되는 남자의 폭소에 인환은 비로소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 당신은…… 아아, 이거 참……!”
“…….”
“……참을 수가 없어…… 아아, 젠장…… 너무 힘들어…….”
“……?”
겨우겨우 웃음의 발작을 진정시킨 남자의 젖은 눈이 뚫어지게 인환을 굽어보고 있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멍이 드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프게 쥐어진 팔은 여전히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당신은 자신을 너무 몰라요…… 아니,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생각되지만…… 그렇지만 나는…….”
“……김 선생님……?”
“……곤란합니다…… 너무 위험해…… 안 그래도 참기 힘드니까…….”
“……?”
수수께끼 같은 열기와 긴장감이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에 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언젠가 한번 본 일이 있는, 숨을 틀어막을 것처럼 격렬한 전류가 남자의 눈동자를 거쳐 인환의 전신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분명 이 또한 착각이리라고 애써 스스로를 채찍질했지만 남자가 연출하는 긴장감에 속수무책인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몸을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꼭 틀어쥐는 것으로 애써 진정시켰다. 정말이지, 수시로 머릿속을 점령하곤 하는 자신의 더티한 착각엔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소중하고 소중한 남자가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어떻게 매번 그 저의를 의심할 수가 있단 말이냐. 뼛속까지 썩은 게이 근성이 아니고선 생각조차 못 할, 소중한 친구에 대한 모욕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남자가 읽게 되는 걸 상상하기만 해도 부끄러움에 목이라도 매달 픈 심정이었다.
“……아무것도 안 들고 계시죠?”
상냥한 물음과 함께 팔을 움켜쥐고 있던 남자의 손이 마침내 떨어져 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바닥을 향했던 얼굴을 들어 남자를 응시했다. 되돌아온 남자 특유의 부드럽고 편안한 표정에, 인환은 참았던 한숨을 몰래 토해냈다. ……거봐…… 제발 좀 착각하지 말란 말이다, 장인환……!
“……케이크를 먹었으니까…….”
“케이크 한 조각 갖고 요기는 되지 않습니다. 긴장하신 건 알지만 그래도 빈속에 술은 별로 안심이 안 됩니다. 먼저 식사로 배를 채우신 후 술을 드시도록 하세요.”
인환이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빼앗아간 남자가 다시금 인환의 손을 잡고 끌고 간 곳은 음식 테이블 앞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음식도 모르고 있었네요. 고기랑 생선 중 어느 쪽이 더 좋으세요?”
“……생선을 더…….”
접시를 집어 들곤 웨이터 노릇이 당연한 것처럼 물어와서 무심코 대꾸를 흘렸다.
“초밥은?”
먹음직한 연어 찜을 한 덩이 퍼 담곤 인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름다운 웨이터는 초밥 대여섯 개를 마저 접시에 담았다. 구색을 맞추듯 먹음직스러운 샐러드와 새우 요리로 접시를 마저 채우더니 인환에게 내밀었다.
“……오른손을 쓰실 수 없을 테니 여기 앉으세요.”
접시를 받아 들자, 남자는 홀 바깥쪽 벽을 따라 죽 늘어서 있던 빈 의자 하나를 음식 테이블 앞에 끌어다 인환을 앉혀주었다. 테이블 주변 자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로 만원이었기 때문이다.
“……배고프셨을 텐데 어서 드세요, 선생님.”
부드러운 채근을 하는 남자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미소가 퍼지자 매혹적인 보조개가 움푹하니 모습을 드러낸다.
배려에 취한 건지, 미소에 취한 건지 구름 위에 둥둥 뜬 것처럼 의식이 혼미해졌다. 별로 음식 생각이 없었음에도 부지런히 먹기 시작했다. 남자가 듬뿍 뿌려대고 있는 호의와 친절에 내장까지 홀린 것이 틀림없었다.
거의 달라붙듯 인환의 곁에 선 채 김강원 역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있었다. 접시에 줄곧 시선을 떨군 채로 조용히 식사에만 열중해서, 체취가 맡아질 정도로 가까이 있는 남자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사 내내 정수리를 거쳐 한쪽 프로필로 쏟아지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형식적인 사교에 지쳐 대꾸 한 마디를 하는 것에도 힘겨워하는 인환의 상태를 자각한 듯, 온화한 침묵으로 일관하는 신사의 배려도 느껴졌다.
초밥에 목이 메는 느낌이 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건네진 물 컵이며, 새우튀김이 유난히 맛있다고 느끼는 순간 음식 접시에서 다시 새우튀김 몇 개를 집어다준 것 하며, 남자는 마치 인환의 속마음을 거울에 비춰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읽고 있었다. 매순간 손끝까지 찌릿찌릿 전해지는 남자의 호의에 마치 구름 위의 왕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언제라도 바닥에 추락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신기루였지만 그저 신기루일 뿐이라고 치부해 무시하기엔 너무나 황홀한 열락이었다.
남자가 온몸으로 전해주고 있는 달콤한 선언을 진심으로 믿고 싶었다. 자신이 정말로 아낌을 받는 소중한 존재인 것만 같았다. 정말로 이제껏 들은 무수한 칭찬의 홍수 그대로, 자신의 이름이 저 찬란한 예술의 금자탑에 새겨질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을 사랑했고, 아울러 자신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었다. 경탄해 마지않을 천재적인 큐레이터는 자신의 헌신적인 하인을 자처하고 있었다. 물론 상상만 해도 민망해서 전신이 새빨개질 노릇이지만, 자신은 위대한 화가이자 위대한 영혼이었다, 맙소사!
“……좀 더 갖다드릴까요? 달팽이 요리가 맛있던데…….”
음식 접시를 거의 비우자 묵묵히 따스한 시선만을 보내오던 큐레이터가 비로소 말을 붙였다.
“……아…… 아닙니다. 배가 부르네요. 정말이지 많이 먹었습니다.”
올려다본 시선의 끝에 걸린 살인 미소에 또 한 번 심장이 철렁. 채신머리없이 떨리고 삐걱거리는 목소리로 진심을 전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테이블 끝머리로 가서 와인 병과 빈 잔 두 개를 가져왔다.
“……선생님, 베니스에서 오신 손님들께서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오래 못 버티실 것 같은데…….”
건네준 와인 잔을 받아 드는데 커다란 덩치의 청년 하나가 다가와 김강원에게 말을 건넸다.
“아, 그래, 수고했네, 분도 군. 내가 가보지.”
“하지만 식사 중이신데…….”
“아니, 마침 끝내던 참이야. 아아, 장 선생님 뵙고 싶어했지, 자네? 이리 가까이 와. 소개시켜줄게.”
190에 가까운 장신은 물론 떡 벌어진 체격도, 순수하고 꾸밈이 없어 보이는 얼굴 표정과 마찬가지로 많이 낯이 익었다. 망설이듯 시선을 보내오는 청년의 숫기 없는 태도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인환은 청년이 오늘 낮, 전시장에서 본 바로 그 청년이라는 것을 곧 기억해냈다.
“……인사드려, 장인환 선생님이시네. 이쪽은 제 후배인 노분도라는 친구입니다, 장 선생님. 아까 낮에 본 기억이 있으시지요?”
“……어…… 아, 예…….”
“……처음…… 뵙겠습니다, 장 선생님. 학예연구사 노분도입니다.”
“……반갑습니다. 장인환이라고 합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힌 인사 후에 청년은 안주머니에서 꺼낸 명함을 인환에게 건넸다.
명함을 받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인환은 다시 한 번 명함을 만들어둘 걸 하고 늦은 후회를 했다. 지금까지 받은 명함만 해도 50통이 넘었다. 리셉션이 끝날 때쯤엔 그 배에 가까운 명함을 챙기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집에 가면 바로 쓰레기통행일 것들이긴 하지만 그저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것이 마치 빚이라도 진 것마냥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 갔다 오겠습니다, 장 선생님. 분도 군과 말씀 나누고 계세요. ……잘 모셔, 노분도.”
방탕한 주인을 근심하는 충직한 하인처럼 안타까운 시선으로 굽어보며 김강원이 청년에게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못 미더워서라기보다 그만큼 남자가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리라. 황홀한 신기루가 다시 한 번 온몸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작품이 아주 감동적이에요, 장 선생님…….”
멀어지는 김강원의 뒷모습에 시선을 준 채로 청년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다른 많은 분들께도 격찬을 들으셨겠지만…… 저도 똑같은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네요. 일하는 내내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오늘 하루, 평생 들어야 할 찬사를 몽땅 다 들었다고 여겨질 만큼 무수히 많은 칭찬을 들었지만, 절대 면역이 될 리가 없는 황송한 아편이었다. 햇병아리 큐레이터가 하는 의례적인 멘트일 게 분명하건만 인환의 얼굴은 여전히 홍시처럼 빨개졌다.
들고 있던 와인을 왈칵 비우는 것으로 쑥스러움을 감추고서 젊은 청년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았다. 배 속으로 따스하게 번지는 알코올 기운이 모르는 이에 대한 천성적인 낯가림을 무디게 했다. 게다가 경계심을 품기엔 청년의 얼굴이란 그 얼마나 순수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는지!
“……고맙습니다. 과찬을 많이 주시네요.”
“……어, 저기…… 말씀 낮추세요, 장 선생님. 저 많이 어립니다.”
“하하, 초면에 실례지요.”
“……아니, 그래도……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다시 뵙게 되면 그때 놓겠습니다, 분도 씨.”
“…….”
어딘가 긴장한 듯하면서도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청년의 기색이 전해져서 인환은 상냥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저 나이 때의 시각으로 보는 선배 작가란 때론 괴물처럼 희한하고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그 거리는 좁힐 수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청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리고 싶었다. 작가의 인정을 받는 것이 큐레이터의 능력을 인정받는 일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고 있을 청년이니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심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것인가. 까다롭고 괴팍스러운 성정의 작가들이 유달리 많은 미술계였다. 인환 역시 대충 그런 부류로 점찍고 있을 터였다. 게이인데다 살인 미수죄로 감옥에까지 간 사내이니 오죽 괴물로 보일까. 실은 그저 평범한 인생 실패자에 조용히 나이를 먹어가는 아저씨일 뿐인 것을…….
“……아,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여전히 뻣뻣한 긴장을 풀지 않고 있는 청년에 말주변 없는 화가가 만났으니 대화가 온전히 이어질 리가 없었다. 한동안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흐르고 있는 사이, 마침 요의가 느껴져서 인환은 청년에게 양해를 구하고 출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웬걸,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니 거구의 청년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저도 소변이 급해서요…….”
로봇처럼 뻣뻣한 자세의 청년이 변명처럼 덧붙이더니 희미하게 얼굴을 붉혔다. 갑자기 닥친 생리 현상에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인환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자신이야 그저 어색함을 느끼고 말 일이지만 청년에겐 장래가 걸렸다고 생각이 들 만큼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영업일 터였다. 젊은 시절, 청년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부여하는 상대 앞에선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고 생리 현상 하나에도 몹시 부끄러워하던 자신의 옛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청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과 호감이 느껴졌다. 청년이 더더욱 난처해할까 봐 짐짓 웃음을 삼킨 채 인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이좋게 화장실을 찾아들어 갔다.
“……자…… 작다! 끝도 쪼끔 휘었네!”
가운데 소변기를 방탄벽 삼아 맨 가장자리의 소변기에 자리를 잡고 볼일을 보던 청년이 불쑥 내뱉었다. 막 일을 치른 다음, 바지 지퍼를 올리려다가 인환은 무심코 청년의 얼굴로 시선을 가져갔다. 놀랍게도, 휘둥그레진 청년의 시선은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에 고정돼 있었다. 내뱉어진 어조는 물론 표정에서도 무언가 안심한 듯한 골목대장의 의기양양함이 느껴졌다. 이번엔 인환의 눈이 휘둥그레질 판. 자신을 훔쳐볼 수야 있는 노릇이지만(소변을 보며 무심코 옆자리의 상대를 살피는 건 사내들의 본능과도 같은 일이었기에) 노골적인 품평까지 입에 담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황당한 사건임엔 틀림없었다. 당장은 비웃는 의미인지, 농담인지 청년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멍하니 청년을 응시하고 있는데, 이윽고 사타구니 사이에 고정돼 있던 청년의 시선이 인환의 얼굴로 이동했다. 시선이 마주쳤다.
“으악!!!”
순간 경악의 빛이 청년의 얼굴을 스쳐가는가 싶더니 이어 괴성에 가까운 비명이 청년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비명 같은 사죄의 말과 함께 청년은 삶은 고구마처럼 시뻘게진 얼굴로 상체를 90도 각도로 굽힌 인사를 거듭 되풀이했다. 너무나 당황해서 스스로의 바지 지퍼조차 올릴 경황이 없는 모양이었다. 옷자락 틈으로 드러난 청년의 물건은 당연한 것처럼 최상품! 크기도, 빛깔도, 형태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그 자체였으니, 자신의 비참한 모양새를 보고 놀랄 만은 하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물론 청년의 선언은 비웃는 의미도, 농담도 아니었다. 남의 물건을 훔쳐본 것도, 그만 본심을 토해내고 만 것도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실수임에 틀림없었다.
“……아니, 괜찮으니까…… 지퍼 채우세요, 분도 씨…….”
청년의 극심한 당황이 걱정이 돼서 무심코 주의를 주자, 미친 듯이 허리를 굽히던 청년이 다시금 휘둥그레진 눈으로 인환을 보았다. 시뻘게졌던 낯빛이 이번엔 차츰 하얗게 질려가는 게 보였다. 다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긴 했지만 청년의 양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으악!!! 우씨, 우우윽!!!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신음 소리에 가까운 절규와 함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청년은 마침내 도망치듯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몇 초쯤 망연자실해 있던 인환은 이윽고 배를 쥐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햇병아리 큐레이터에게 치부를 보이고, 결국엔 볼품없는 물건의 주인으로 낙인이 찍힌 데 대한 황당함과 수치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심결에 드러난 청년의 순박함과 솔직성은 좀처럼 믿기 힘들 지경이었다. 사랑스러운 청년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나 웃어대서 고통마저 느껴지는 아랫배를 움켜쥐며 인환은 진심으로 청년을 용서해주었다.
홀로 돌아오니 햇병아리 큐레이터는 어디로 숨어버리고 없었다. 어딘가 구석에 박혀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청년을 상상하니 다시금 비실비실 터지는 웃음을 참고 있는데, 김강원이 일단의 사람들을 몰고 가까이 다가왔다. 일행은 전부 네 사람의 백인으로 세 명이 남자, 한 명이 여자였다. 언뜻 봐서는 국적이나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외국인 특유의 개방적인 미소를 활짝 매달고 다가오는 저들에 인환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던 모양이었다. 옆에서 에스코트를 하고 있던 김강원의 시선에 근심이 어리는 게 보였다.
“……피곤하신 건 알지만 그래도 꼭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해서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 선생님. 간단히 인사만 드리고 바로 호텔로 돌아갈 거예요.”
안심을 시키듯 상냥하게 언질을 주는 충실한 큐레이터에 반사적으로 미소를 끌어왔다. 영어와 프랑스어가 섞인 인사말이 오가며 악수를 청하는 이들에게 마주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눴다. 김강원의 통역으로 저들이 브레멘의 쿤스트할레와 베니스 비엔날레의 커미셔너를 맡고 있는 큐레이터들이라는 걸 알았지만 놀라거나 새삼 긴장감을 일으킬 정도로 현실감이 들지는 않았다. 전시회에서 받았다는 감동과 저들이 계획하고 있다는 초대전에 대한 짤막한 언급을 들었어도 그것이 인환 자신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너무나 멀리 있는 사람들이었다. 언어 장벽이 저들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것처럼, 아마도 상당히 정치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유행의 첨단을 가는 저들의 성향과 자신의 작품 사이에 그 어떤 접점이 있을까 미심쩍었다. 막상 쿤스트할레의 큐레이터들로부터 노골적인 기획전 청탁을 전해 들었을 때에도 인환은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선뜻 대답을 하기는커녕, 통역을 하는 김강원과 나이조차도 제대로 짐작하기 힘든 외국인들의 얼굴을 번갈아 멍하니 쳐다보았을 뿐이다.
분명 좋은 일일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혀를 내두를 쟁쟁한 현장의 큐레이터들이 자신의 작품에 흥미를 갖게 됐다. 그저 지나가는 칭찬이 아니라, 내년이라는 구체적인 기간까지 제시하며 전시회 요청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왕에 들은 칭찬만으로도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한 어색함과 불편을 느끼고 있는 인환이었다. 기쁨은커녕 제트코스터에 올라탄 것마냥 정신이 혼미하고, 자욱한 안개 속에 빠진 듯 혼란스러운 불안감에만 압도된 상태였다.
당장 거절을 해야 마땅했지만 문제는 김강원이었다. 행운의 별을 달고 있는 남자의 따스한 눈길이 자신을 격려하고 있었다. 분명 이 쟁쟁한 이들을 끌어들인 이는 김강원이었다. 자신이야 어찌 돼도 상관없지만 이 남자까지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다.
“……지금 당장 대답하실 필요는 없어요, 장 선생님. 일단 신작을 작업하셔야만 하는 일이니까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시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세세한 문제는 제가 나중에 이 친구들과 의논해보고 나서 다시 말씀드릴게요.”
좀처럼 대꾸를 못 하고 곤란한 얼굴을 하는 인환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김강원이 언제나처럼 구원을 주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한 조언에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당장에 기회를 잡을 필요도 없고, 또 행운을 놓치는 것도 아닌가 보았다. 남자의 조언대로, 생각해보겠다는 대꾸를 흘리자 큐레이터들 역시 당연하다는 듯 동의를 표해주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막 도착을 한 터라, 채 여독을 풀지 못한 큐레이터들은 상당히 피곤해하고 있었다. 정말 인사만 하고 표표히 아듀를 고해서 인환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분도 군은 어디 갔습니까? 장 선생님 모시라고 했더니만…….”
홀 안을 휘휘 둘러보며 푸념을 하는 김강원을 모르는 체, 인환은 슬며시 미소를 삼켰다.
“……이 친구들 호텔로 데려다줘야 하는데……. 그럼 배웅하고 곧 오겠습니다, 선생님.”
네 명의 큐레이터를 이끌고 입구 쪽으로 멀어지는 늠름한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처음보다는 한결 느슨해진 홀 안을 굽어보았다. 시곗바늘은 9시가 훨씬 넘어가 있었다. 늦게나마 눈도장을 찍기 위해 새로 들어서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빠져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간단한 인사나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인환은 눈에 잘 안 띄는 구석자리로 찾아가 의자에 몸을 실었다. 긴장감 덕분에 다리의 피로는 줄곧 잊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서 있기가 힘들 정도로 뻣뻣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전 중의 갤러리 순시까지 생각하면 오늘 하루치 써야 할 에너지는 이미 바닥이 나고도 남았을 터였다.
의자에 앉고 보니 그나마 견딜 만해서, 인환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이마를 소맷부리로 닦아냈다. 음료를 서빙하는 직원에게서 연거푸 와인 두 잔까지 받아 마시고 나니 뻐근했던 통증조차도 차츰 잊혔다. 뜨끈한 열기가 전신에 퍼지고 있었지만 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두어 잔쯤 더 마시고도 싶지만 그랬다간 취기와 피로감으로 홀 안에서 잠이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확실히 나이는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부터 주량도 준데다, 가끔씩 마시는 것뿐이건만 취하기도 전에 잠이 들어버린다. 하긴 이 시원찮은 주벽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애저녁에 알코올 중독자가 돼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출소 후 몇 해 동안은 우울증의 고통이 심해질 때마다 버릇처럼 술에 의지하기도 했던 자신이었다.
“……늙었네……. 많이 늙었다, 장인환…….”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렸다. 분명 잘 알고 있는 이의 목소리였지만 순간적으로 누구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틀고 목소리의 임자를 살폈다.
“……9년 만인가……? 아니, 10년쯤 됐나……? 정말 늙었네? 길바닥에서 보면 절대로 못 알아보겠다…… 완전 아저씨야…….”
기승스럽고 도도한 여운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정열적이고, 고집 세고, 웬만한 남자는 명함도 못 내밀 에너지와 끼로 넘치는 여자였다.
“……주…….”
잊혔던 청춘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추억은 순식간에 인환의 온 넋을 할퀴고, 어루만지고, 다시 할퀴고 어루만지길 반복했다. 고통을 동반한 기쁨이, 슬픔을 동반한 그리움이 격랑이 돼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목을 조를 기세로 치받치는 응어리에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눈시울이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뜨거운 액체가 억제할 엄두도 못 낼 기세로 줄줄 흘러나왔다. 심장 근처를 쿡쿡 쑤셔대는 통증이 아픔인지 기쁨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울지 마…… 흉해서 못 봐주겠다, 야…… 어릴 땐 귀엽기나 하지…… 아저씨 주제에 그렇게 울면 꼴불견이라구…….”
우는 게 추하다고 타박하면서도 여자 또한 울고 있었다.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닭똥 같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서 인환을 향한 악담만을 퍼붓고 있었다. 아저씨 주제라고 하지만, 늙었다고 하지만, 여자 역시 연륜이 선연한 아줌마였다. 산달이 가까웠는지 배는 만삭이고, 10년 전의 말라깽이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통통한 몸집에다, 시원스러운 꽃무늬 프린트가 찍힌 민소매 원피스는 40줄에 접어들었을 아줌마가 소화하기엔 지나치게 과감한 디자인이었다. 오목조목 귀여운 이목구비와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만이 여자의 옛 모습을 그나마 연상시켜주고 있었다. 하긴 이런 얘기를 하면 여자는 또 성질대로 길길이 날뛸 것이다.
“……드런 호모 새끼가…… 박정하기도 하지,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냐…… 죽은 줄 알았다…… 나…… 우리는…… 너 죽은 줄 알았어, 이 미친놈아…….”
몸을 일으키면 그대로 쓰러져버릴 것처럼 다리에 힘이 없어서 그저 부들거리는 손만 여자를 향해 뻗었다. 대답처럼 여자의 아름다운 두 손이 덥석 인환의 것을 쥐어왔다. 여자의 손 역시 인환의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여자의 따스한 체온을 손에 느끼자 여자를 껴안고 싶은 욕구가 더 간절해졌지만 다리엔 여전히 힘이 돌아오지 않았다.
“……주…… 주…… 주희…… 선…… 배…… 주희…… 선배…… 선배…….”
가까스로 응어리가 풀리며 목소리가 토해졌다. 부름이라기보다 차라리 통곡 같았다.
“……귀신같은 새끼…… 그렇게 미친 지랄을 떨더니…… 결국 귀신이 됐더구만…… 전시회 보고 오는 길이다…… 때깔도 완전히 벗고…… 일취월장이야…… 그래…… 그러니 살았겠지…… 그렇게 그림이라도 그리니 살 수 있었겠지…… 불쌍한 호모 새끼가…….”
“……선…… 배…….”
“……기뻐…… 고맙다, 장인환…… 살아줘서…… 살아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선배…… 으…… 윽…… 웃…….”
“……새끼가…… 눈물 많은 건 여전하네…… 씨씨보이…… 누가 등신 호모 새끼 아니랄까 봐…….”
“…….”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여자도, 인환도 숨을 죽인 채 울고 있었지만 격한 감정의 파고까지 숨기긴 힘들었다. 노골적으로 시선을 보내진 않아도 주변의 대부분이 드라마틱한 상봉 장면을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 자제할 때라고 이성은 명령하지만 좀처럼 그칠 수 있는 설움이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손만 부둥켜 잡은 채로 감정이 진정되기만 빌어야 할 판이었다. 여자를 보지 않으면 그나마 감정을 수습하기가 쉬울 것 같아 땅바닥에 고개를 내린 채 눈을 감았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후드득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심장이 죄는 아픔도, 목이 메는 그리운 회한도 여전했다.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는 것도 도무지 막을 수 없었다.
“……움직이실 수 있겠어요, 장 선생님? 홀 옆에 빈 사무실이 있으니까 그리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몇 분이 지났을까, 김강원의 고요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눈을 뜨고 보니 흐릿해진 시야로 남자의 연푸른색 바짓가랑이와 베이지색 랜드로버가 보였다.
“……오 선생님도 좀 진정되셨는지요? 일단 자리를 옮기셔서 말씀 나누시겠습니까?”
“……예, 그래야죠…… 미안합니다. 제가 인환이를 많이 놀라게 한 것 같네요.”
먼저 감정을 다스린 여자가 인환의 손을 움켜쥐고 있던 자신의 양손을 거두어갔다. 메고 있던 숄더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친 것도, 씩씩한 걸음걸이로 휘적휘적 입구 쪽으로 걸어간 것도 여자가 먼저였다. 김강원의 부축을 받아 인환도 간신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여자의 뒤를 따라갔다.
“……오 선생님과 말씀 나누시곤 바로 댁으로 돌아가세요, 선생님. 이렇게까지 지치신 줄 몰랐습니다. 알았더라면 금방 보내드렸을 텐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점심때처럼 손수건을 꺼내 젖은 얼굴을 닦아주는 남자의 목소리엔 근심이 가득했다. 허리를 감듯이 부축을 해줘도 제대로 못 걷고 휘청거리는 자신이 피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피로라기보다 오주희와 재회한 충격에 가까운 기쁨 때문이라는 것을 남자는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정정해줄 기력은 없었다. 그저 남자가 이끄는 대로, 될 수 있는 한 바닥으로 고개를 떨군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홀 안을 빠져나왔다.
홀 입구로 이어진 복도 맞은편 모퉁이를 돌자, 출입문이 잠긴 몇 개의 사무실들이 나타났다. 남자는 그중 한곳의 문을 열쇠로 따고 오주희와 인환을 들여보내준 후 문을 닫고 나갔다.
사무실 안은 칸막이가 쳐진 열댓 개의 책상과 컴퓨터를 비롯해 온갖 사무기기들로 가득했다. 입구 쪽에만 켜진 흐릿한 형광등 불빛 탓에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느낌조차 들었지만 고요해서 좋다고 생각이 되었다. 두 시간 가까이 왁자한 파티장의 소음에 익숙해 있던 터라 문 너머로부터 흘러드는 소음은 그저 흐릿한 이명처럼 들렸다.
“……아기는 언제가 예정일이야……?”
김강원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다시 한 번 얼굴을 문지르고 나자 겨우 말을 꺼낼 정신이 모였다. 울지 않고서 여자를 바라볼 용기도 모였다. 목소리는 몹시 허스키했고 눈물도 여전히 조금씩 흘러내리긴 했지만 차츰 흥분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한 달쯤. 그 몸을 하고 무슨 비행기냐고 신랑이 날뛰더라. 챙피 좀 알래. 허이구, 기가 막혀서. 꼭 맞을 짓을 한다니깐, 빙충이가.”
여자 특유의 기승스러운 말투에서도 감정의 절제가 느껴졌다. 빨갛게 충혈된 눈시울은 마스카라가 약간 지워지긴 했지만 활짝 웃고 있었다.
“……노산(老産)이니 걱정돼서 그러는 거겠지. 결혼은 언제 했어? 신랑은 좋은 사람이야?”
“4년 됐어. 귀여워. 엔지니어인데 돈도 잘 벌어다주지. 무식해서 나한테 자주 두들겨 맞는 게 흠이지만. 이름이 앙드레야, 앙드레. 웃기지? 오스칼 애인 앙드레. 「베르사유의 장미」 동아리실에서 보던 거 기억나니?”
“……하하, 프랑스 사람이야?”
“응. 파리서 알게 됐어. 유학 갔다가 눌러앉았지. 작품 하기도 편하고 해서…….”
“……선배가 결혼을 하다니 놀라워. 평생 연애나 하며 그림을 그릴 줄 알았는데…….”
“앙드레잖아, 앙드레. 그 빙충이 같은 자상함엔 근사한 오스칼도 넘어갔다구.”
“……하하…… 서울엔 언제 도착한 건데?”
“오늘 아침. 리셉션이라고 하길래 때맞춰 오느라고 애 좀 먹었네. 휴가철이라 그런지 비행기표 구하기가 장난 아니더라.”
“……어떻게 알았어?”
“김강원.”
“…….”
“너 나타났다는 소식도 그쪽을 통해 두 달 전쯤에 들었고. 아주 열정적인 친구던데? 네 작품에 완전 푹 빠졌더라? 하긴 빠질 자격 있어. 전시회 보니 알겠더군. 파리서도 꽤 쳐주던 치라서 이름 정도는 새기고 있었는데 네 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파리엔 언제 돌아가?”
“기왕 들어왔으니 친정에서 애나 낳고 가야지.”
“……잘됐다…… 가기 전에 느긋하게 얼굴 볼 수 있겠네.”
“새끼, 보고 싶긴 했나 부네?”
“……아니, 별로…….”
“뭐야?!”
“……별로 선배 생각 안 해봤는데…… 거의 떠올리지도 못했었는데…… 하하, 막상 보니까 되게 그립네…….”
“미친 호모 새끼가…… 니가 그렇지 뭘…….”
“…….”
다시 한 번 손을 꼭 잡고, 한 번 따스한 포옹도 하고, 그리고 또다시 한참을 울었다. 할 말이 꽤 많은 것도 같고, 아주 없는 것도 같았다. 여자도 궁금해하는 한편 묻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쉽사리 헤집어도 될 상처가 아니란 것을 여자라고 모를 리 없었다. 결국 인환의 현재와 사라진 10년사는 뒤로 쏙 빠지고, 잊혔던 친구들의 안부나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다. 묵계처럼 다음을 기약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고통과 회한 없이 옛일을 반추하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지는 둘 중 누구도 기대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일주일 후쯤 날을 잡아 다시 만나자는 막연한 약속을 잡은 뒤 빈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 끝에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던 김강원이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다가왔다. 대충 진정이 돼서 비교적 온전하게 걸음을 떼고 있는 인환을 보고 적이 안도하는 눈치였다. 홀을 나올 때처럼 허리를 안듯이 부축을 해오진 않았지만, 인환의 팔꿈치 위쪽을 단단히 잡은 채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막 담배를 피웠는지 남자에게선 짙은 담배 향이 배어 나왔다.
“……그만 홀 안으로 들어가보세요, 김 선생님. 손님들 계신데…….”
“……차 있는 데까지만이라도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오 선생님은 어떠세요? 모처럼 귀국하셨는데, 피곤하지 않으시면 좀 더 어울리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뵙고 싶어하는 분들도 많으시고…….”
“아뇨,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리고 싶어요. 두서너 달 더 한국에 머물 예정이니까 따로 날 잡아서 찾아뵐게요.”
“그거 반가운 소식이네요. 그럼 일간 연락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런데 차는 갖고 오셨나요?”
“네, 걱정 마세요. 후후, 이래 봬도 무사고 드라이버랍니다.”
만삭의 임신부치곤 기운이 넘치는 여자에게 김강원이 환한 미소로 답을 하자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난히 미색을 밝히던 여자이니 화려한 수컷의 페로몬을 물씬 풍기는 김강원의 매력에 둔감할 리가 없었다. 함께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가며 인환과 잠깐 눈이 마주쳤을 때, 여자는 목덜미에 칼을 쓱 긋는 듯한 손짓으로 김강원을 평가했다. 최고라는 표현을 쓸 때 여자는 그렇게 목에 칼질을 하며 인환을 향해 윙크를 날리곤 했었다.
‘좆같이 근사한걸!’
김강원의 눈을 피해 조용한 탄성을 지르는 여자의 입술을 읽고, 인환은 땀을 삐질 흘리며 웃음을 참았다. 10년이 지나든, 20년이 지나든, 혹은 결혼을 해서 주렁주렁 자식을 낳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든, 여자는 언제나 ‘여자’였다. 거침없고, 정열적이고, 욕망에 정직하고, 거칠고 상스러운 말버릇에 성미마저 고약스럽지만 누구보다도 정 많은 여자 오주희였다.
“……여어, 김 선생! 벌써 2차 가는 겐가?”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막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맞은편에서 활기찬 인사말이 건너왔다. 앞서가던 김강원이 걸음을 멈췄고, 좀 더 뒤처지던 인환과 오주희도 나란히 걸음을 멈춘 채 전방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회장님……!”
“내가 너무 늦지는 않았나 몰라? 기자들 다 돌아간 건 아니지? 사진 한 방이라도 박아야 쓸모가 있을 텐데…….”
“별말씀을! 이렇게 와주신 것만도 영광입니다, 회장님.”
“그래도 나만 지각한 건 아닌 모양이지. 들어오다가 마침 문 이사를 만났네. 아름다운 지은 양도!”
“……아……?!”
“자금을 후원한 이가 문 이사라며? 내가 몹시 러브하는 두 젊은이가 서로 아는 사이였다니 또 한 번 놀라 자빠졌다고. 하하하…….”
아마도 인환은 오늘 하루 종일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신기루에 푹 빠져 그만 현실을 잊고 있던 것이거나.
쉰 전후로 보이는 훤칠한 키의 노신사 하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계속되는 소탈한 너스레로 일행의 발목을 잡은 이가 바로 노신사였으므로 그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그’는 노신사보다도 몇 걸음이나 뒤처져서 걸어오고 있었다.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인형처럼 웃고 있는 눈부신 미녀 때문에라도 더더욱 그가 ‘그’일 것이라고는 쉬이 자각할 수 없었다.
노신사가 몸을 약간 비키자 노신사 옆으로 다가와 있던 화려한 커플 한 쌍의 모습이 비로소 드러났다.
로비를 가득 밝히고 있는 형광등 불빛을 무색케 할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먼저 인환의 시선을 끌었다. 그와 찍은 스포츠신문의 사진과 연예 잡지의 스틸 컷들을 통해 여자가 누구라는 것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류지은. 27세로, 요즘 한국에서 최고로 잘나간다는 트로이카 중 하나. 170센티쯤 되는 커다란 키에 하이힐까지 신은 여자는 등이 확 파인 오렌지색 실크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야말로 도자기처럼 작고 가냘픈 얼굴에 바비 인형 같은 몸매를 하고 있어서 어딘가 신비롭고도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주었다. 유명 여배우를 실제로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는 인환으로서는 여자가 뿜어내고 있는 배우 특유의 호화찬란한 광채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타라는 대명사는 달리 붙는 게 아닌 모양이라고 부지불식간에 경탄했을 정도였다. 부신 듯한 느낌이 들어서 몇 번 눈을 깜빡인 후, 인환은 여자가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을 이동시켰다.
처음엔 자신의 눈을 의심했었다.
자신과 관련된 공식적인 자리에 함께 서는 것을 지독히도 경계하는 그였다. 절대로 오지 않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던 터라, 인환은 순간 환영을 본 듯한 착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여배우를 알아보긴 했어도 여배우의 눈부신 외모에 뻥하니 사고 회로가 끊긴 상태라, 기왕에 알고 있는 그와의 염문설 따윈 떠올릴 틈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인환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틀림없이 그였다.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낯익은 남자였다.
오늘 아침 식탁에서 본 그대로 남자는 연그린색의 리넨 슈트를 입고 있었다. 오늘 새벽 섹스를 하고 난 직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속내를 알 길 없는 고요한 눈빛을 한 채 물끄러미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답답해 보일 만치 단정하게 맨 강렬한 청색의 도트무늬 타이도 아침에 남자를 배웅할 때 모습 그대로였다. 분명히 똑같은 남자인데, 매일 밤 자신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한 몸으로 뒤엉키곤 하는 남자인데, 지금 이 순간, 채 2∼3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남자와의 거리는 천길보다도 더 멀게만 느껴졌다.
현실이었다.
넘치듯 쏟아지던 도취의 술잔이 산산조각으로 깨지고 있었다. 신기루는 역시 신기루였을 뿐, 인환은 다시금 비참하고 추악한 노예의 현실로 가차 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또다시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참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어지럼증과 함께 메스꺼움조차 느껴졌지만 결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명처럼 아득한 김강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이사님과 아시는 사이인 줄은 몰랐습니다, 회장님. 일단 안에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곧 들어가 뵙겠습니다.”
눈치 빠른 김강원은 서로 인사를 나눌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좀 더 수다를 떨고 싶어하는 호쾌한 노신사는 짐짓 모르는 채, 다소 싸늘해진 얼굴로 그와 여배우에게 힐끗 시선을 주더니 확실한 교통정리를 내렸다. 어딘가 장난꾸러기 같은 흥미롭다는 표정이 노신사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인환의 팔을 슬며시 잡아당기는 김강원을 수수께끼 같은 눈빛으로 주시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일행을 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손님들 배웅하는 중인가? 그래, 그럼 안에서 기다림세. 갤러리 하나 꿰어 차고 있으면 뭐하나. 이 바닥 알짜 무식인 문 이사를 어떻게 꼬셔냈는지 내 자세히 듣고 싶다구, 김 선생.”
인환 일행이 방금 지나온 엘리베이터 쪽으로 방향을 틀며 노신사가 손을 흔들었다. 장난꾸러기 같은 눈빛과 인상 좋은 웃음은 여전했다.
김강원의 단단한 악력이 팔꿈치 안쪽을 세게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빨리 밖으로 나가자는 의미였지만 인환은 본능처럼 몸을 움츠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노신사를 따라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의 순간, 음습한 한기가 그의 고요한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사납게 구겨지는 미간도, 새파란 불꽃처럼 일렁이는 격렬한 눈빛도 놓치지 않았다.
―……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간…… 대게 했다간 가만 안 둔다…….
―……부서트릴 거다, 그 자식…….
부르르 몸서리를 치며 김강원의 팔을 밀어냈다. 의아해하는 김강원의 시선을 느꼈지만 모르는 체했다. 가슴이 죄어드는 것만 같았다. 무서웠다. 모든 게 너무나 무서웠다. 지금 이 상황도, 김강원도, 오주희도, 여배우도, 노신사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가 지독하게 무서웠다. 왜 무서운 건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바로 그 점이야말로 더더욱 지독하게, 끔찍스럽도록 무서운 일이었다!
“……거기 서봐, 문위.”
두근…….
기승스러운 여자의 목소리였다.
꽉 틀어 잡혀 있던 심장이 눌리다 눌리다 못해 팍 하고 터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신의 피가 순식간에 증발한 것만 같았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주…… 희 선배…… 제…… 발…….”
무조건 이 다혈질의 여자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얼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필사적으로 중얼거려보지만 꺼질 듯한 목소리에 제대로 말이 나온 건지조차도 의심스러웠다.
“……이게 뭐하자는 수작이야? 그 여잔 뭐야? 너 인환이랑 동거한다며?”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시원스레 토해지는 여자의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로비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던 노신사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호사스러운 여배우를 장식처럼 매단 그도 걸음을 멈췄다. 노신사의 눈은 믿기 힘든 장면을 포착한 것마냥 휘둥그레진 채 나이 든 임신부를 멍하니 주시하고 있었다. 여배우의 얼굴은 경악 그 자체였다. 앵두처럼 빚어진 입술은 무방비하게 벌어지고, 호수처럼 맑고 커다란 눈동자는 그야말로 화등잔만 해졌다.
어마어마한 충격파 속에서 ‘그’만이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그만이 고요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나이 든 아줌마가 된 예전 고객을 건너다볼 뿐, 몇 걸음 앞 생면부지의 노신사만큼도 동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인환은 그것이 더 끔찍했다.
비틀거리는 몸을 지지해줄 만한 것을 찾아 본능적으로 팔을 허우적거리자 대답처럼 김강원의 손이 뻗어왔다.
“장 선생님……!”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김강원의 속삭임이 아득하게 귓전을 두드렸다. 뻗어온 손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지만 어차피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충직한 하인 노릇을 아무리 자처한들, 이 순간, 남자가 인환 자신을 구원해줄 수는 없었다!
“……그새 잊어먹었나 보네? 하긴 지가 붙어먹은 여자가 얼만데 아직까지 날 기억할려구.”
“……서…… 선배, 그러지 마요…….”
10년 전에도 그랬듯이 여자는 거침이 없었다. 임신부 특유의 굼뜬 걸음걸이로 스스럼없이 아름다운 커플에게로 다가간 여자는 며칠 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 담담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 난 기색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반가운 기색은 물론 아니었다. 또렷하고 총명해 보이는 눈동자에 깃든 그것은 연륜이 새겨진 자만이 품을 수 있는 진지하고도 단단한 의지였다.
“나야 기억하든 말든 뭐 상관은 없지만…… 문위, 너 인환이한테 이럼 안 되는 거 아니냐? 동거한다며? 인환이한테 목매고 있다며? 그런데 이 바비 인형은 도대체 뭐냐구?”
“…….”
“설마 아직도 남창질이냐?”
“선배!”
“……오…… 오빠……?”
“…….”
“아가씨, 나랑 얘기 좀 할까?”
“……무…… 무슨…… 아줌마는……?”
“아가씨, 정말 딱하네. 어디 사귈 남자가 없어 게이야? 하긴 몰랐겠지. 골이 비지 않고서야 게이랑 사귈 미친년이 어딨겠어. 이 자식이 또 감쪽같이 속였을 거야. 그렇죠? 아직 모르죠? 위가 남자랑 동거하는 거 모르고 있죠?”
“……오…… 오…… 오…… 오빠…… 이…… 이 사람!!!”
“……오 선생님, 여기서 나눌 만한 얘기는 아니니…….”
“아, 죄송합니다, 김 선생님. 저 열받으면 꼭지가 도는 타입이라서요…… 친구도 친구지만 아가씨가 더 걱정이네. 이제라도 알았으니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봐요. 속았다고 나중에 땅을 치지나 말구.”
“……지…… 지…… 지금 무슨 얘길…… 오빠…….”
“지금은 내가 밉겠지만 조만간 감사하게 될 거야. 나중에 카드라도 보내요. 내가 아가씨 인생을 구제해준 셈이니까.”
“오빠, 이 사람 무슨 얘기 하는 거예요……?!”
“…….”
“저기 봐. 저기 늙다리 아저씨 하나 보이지? 가엾어라, 완전 사색이 됐구만. 지 잘되라고 도와주는 건데 꼭 무슨 외도하다 들킨 세컨드 같은 꼴이지? 본처 주제에 지 밥도 못 찾아먹는 등신 호모 새끼가…… 그래요, 아가씨. 저 바보 천치 같은 호모 아저씨가 이 친구 짝지야. 이미 15년 가까이 계속된 관계니까 아가씬 감히 낄 군번도 못 되지. 알아먹었으면 이 친구들 앞에서 썩 사라져요.”
“……오…… 오…… 빠……?”
“…….”
“……오빠!!!”
펑!
갑자기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와 함께 섬광처럼 밝은 빛이 내리꽂혔다.
“류지은 씨?! 류지은 씨시죠?!!!”
“류지은 씨, 잠시 인터뷰 좀 하실 수 있을까요?!!! 전 SBS의 노규석 기자입니다!!! 정 기자, 사진 찍어, 빨리!!! 빨리!!!”
펑! 펑!! 펑!!!
아마도 직업적 본능이었을 것이다.
연달아 터지는 플래시에 가장 먼저 정신을 수습한 이는 여배우였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만삭의 여자와 연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여배우는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기자들의 피습을 받기 직전, 번개처럼 몸을 날려 현관 쪽으로 달아났다. 서너 명의 기자들이 그 뒤를 따른 것은 물론이었다.
가면처럼 표정을 굳힌 채로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그의 얼굴에 희미한 권태감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비 날개처럼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달아나는 약혼녀를 잠깐 바라보더니 고개를 틀고 곧장 인환을 향해 시선을 보내왔다. 기왕의 일들만으로도 이미 패닉 상태인 자신이었다. 그의 타는 듯한 증오거나 혐오까지 보태진다면 온전히 정신을 수습할 수 없을 터였다. 결국 시선을 맞을 엄두도 못 내고서 눈을 질끈 감아버려 그의 표정을 읽을 기회는 없었다. 가까스로 숨을 고르고 눈을 떴을 땐 그는 이미 여배우를 뒤쫓아 현관 밖으로 뛰고 있었다.
로비엔 자신과 김강원과 오주희, 그리고 여전히 믿기 힘든 장면을 포착한 것마냥 휘둥그레진 눈으로 스캔들(!)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노신사뿐이었다.
“……아이고, 저건 또 웬 난리람! 설마 저치들이 들은 건 아니겠지? 미술관 취재를 왔으면 미술관이나 취재를 해야지, 하여간 기자라는 것들이…….”
기자들의 출현은 오주희에게도 의외의 사태였던 모양이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서 현관 쪽을 멍하니 굽어보던 여자가 마침내 신음처럼 넋두리를 토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마다 짧은 단발머리가 소녀처럼 찰랑대는 게 보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것은 오주희의 독설이 끝난 후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노신사 한 사람만 해도 무시무시한 폭탄이 될 수 있었다. 아니, 이미 폭탄은 터진 것인지도 몰랐다. 여배우가 알아버린 것이다.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일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고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여배우야말로 그가 진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유일한 상대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괜찮냐, 장인환? 아주 다 죽을상이구만. 등신같이…….”
가까이 다가온 여자의 손이 인환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부드럽게 쓰다듬기도 하고,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이마를 닦아주기도 했다. 연민이 가득 담긴 여자의 눈엔 여전히 일말의 주저도 보이지 않았다.
“……왜 아직까지 이러고 살아…… 너 그렇게 바보니? 응……?”
“…….”
“……도대체 언제가 돼야 저 괴물한테서 벗어날래, 응? 이 등신아. 그렇게까지 당했으면 이제 정신 차릴 때도 된 거 아니니……?”
“……왜…… 왜…… 선배, 왜…….”
“……사정은 생각 않고 멋대로 참견했다고? 웃기지 마, 새꺄. 사정은 무슨 좆같은 사정. 니들 동거하는 거 맞잖아. 등신같이 구는데 참견 안 하게 생겼어? 넋 놓고 있다가 너 또 망가지는 꼴 보라고? 하긴 더 이상 망가질 것도 없는 말종인 셈인가?”
“…….”
“……제발 좀 잘 살아…… 이젠 너도 행복해져야지, 응? 그림이 제아무리 좋으면 뭘 해…… 사는 게 지옥인데…… 그런 그림을 토해내자면…… 맙소사, 그동안 얼마나 피눈물을 쏟았을까…… 난 상상도 안 돼, 이 등신아…….”
“…….”
여자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금세 흥건하게 눈물이 차올랐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여자는 한심하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기만 했다.
“……먼저 간다, 전화할게. ……김 선생님, 이 녀석 좀 부탁해요. 아마 오금이 저려서 당분간 걷지도 못할 거예요.”
양손으로 인환의 겨드랑이 사이를 움켜쥔 채 부축을 하고 있던 김강원을 향해 여자가 덧붙였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김강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여자는 씩씩한 임신부 걸음으로 천천히 현관을 빠져나갔다.
“……저기…… 죄송합니다…… 김 선…… 토할 것 같은데…….”
오주희를 보낸 것을 계기로 알량한 의지력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바닥이 빙빙 돌며 치미는 토기를 참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걸음을 옮길 기력도 없어, 인환은 온갖 수라장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자신을 부축해주고 있던 남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남자의 몸이 움찔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리……! 이쪽으로 오세요, 선생님……!”
남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거의 안기다시피 화장실로 질질 끌려갔다. 머리가 쪼개지는 것처럼 아팠다. 열기란 열기는 온통 머리로 올라온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폭발을 일으킬 것 같은 음식물에만 의식이 가 있어 눈앞에 뭐가 있는지조차도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만 참으세요, 장 선생님. 다 왔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절망이 들 즈음, 칸막이 문이 보이는가 싶더니 반가운 변기가 떡하니 눈앞에 나타났다. 정신없이 뚜껑을 열고 마음껏 토해냈다. 김강원의 배려로 제법 배불리 먹은 저녁이었었다. 와인도 꽤 마셨었다.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위액과 섞여 음식물은 어마어마하게 부풀린 양으로 변기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몇 번이나 토하고 물을 내리고, 다시 토하고 물을 내리기를 반복했다. 위장이 뒤집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 것에 걱정이 됐는지, 김강원이 다가와 등을 쓸어주고 있었다.
“……참으실 수 없을 거 같으면 차라리 다 토해버리세요…….”
민망함과 고마움이 함께 느껴졌지만 감정 상태에 신경을 쓸 여력 따윈 없었다. 생리적인 고통으로 눈물이 고여들었다. 고작 위가 뒤집히는 괴로움일 뿐인데 쏟아져 나오는 음식물에 비례해서 눈물도 펑펑 솟구쳤다. 한심할 노릇이었다.
결국 맨 처음 먹은 케이크 한 조각과 샴페인까지 몽땅 다 쏟아내고 나서야 토기는 가까스로 가라앉았다. 속은 편해졌어도 머리는 여전히 어질어질하고 온몸이 떨려와서 인환은 변기 뚜껑을 닫고 그 위에 몸을 실었다.
마지막 한 방울을 게워낼 때까지 비좁은 칸막이 안에서 인환의 등이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있던 맘씨 좋은 ‘기사’가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물소리가 났다. 기사가 다시 칸막이 안으로 몸을 디밀었다.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기사는 인환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고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상쾌했다. 기사의 부드러운 손놀림이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났다. 더러워진 손수건을 들고 기사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기사가 돌아오는 데 이번엔 처음보다 더 오래 걸렸다. 기사의 손엔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양치하세요.”
상냥한 명령에 주룩주룩 눈물을 쏟으며 복종했다. 양치를 마치자 새로 빤 손수건이 다시 얼굴로 다가왔다. 기사는 처음보다 더 느리고 부드럽게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손수건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다시금 나란히 눈물줄기가 생기곤 했다. 기사의 부드러움이 오히려 더 얼굴을 더럽게 만든다는 걸 기사는 모르고 있었다.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주차장까지만 걸으시면 돼요. 기사 휴대전화 넘버를 알려주시면 먼저 돌아가라고 연락하겠습니다.”
“…….”
고요한 눈으로 인환을 굽어보며 남자가 휴대전화를 꺼내 든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자 남자도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대꾸를 돌려주었다.
“어차피 중요한 손님들은 접대를 마쳤습니다. 르네도 있으니까 괜찮아요.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자, 일어나보세요…….”
멍하니 고개를 흔들기만 하는 자신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밀어 넣더니 남자가 인환의 몸을 번쩍 일으켜 세웠다. 상냥한 몸짓이었지만 도살장으로 끌려들어가는 것만 같은 심정으로는 그 어떤 친절도 폭력으로만 느껴졌다. 겨우 잦아들었던 설움이 다시금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싫어…… 제발…….”
세면대 앞까지 끌려나온 인환의 입술에선 참다못한 애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음에 가까운 흐느낌 소리에 막무가내로 잡아끌던 남자가 비로소 모든 동작을 멈췄다.
“……장 선생님……?”
“……싫어…… 가고 싶지 않아…… 못 가…… 못 가요……!”
“……?!!!”
“……하…… 하느님, 그가 무서워…… 죽일 거야…… 죽일 거야, 날……!”
“장 선생님!!!”
“……죽어도 싸…… 싸지, 하느님……! 또 그에게 상처를 줬어…… 느…… 늘 이래…… 나는…… 나는…….”
“장 선생님!”
“……왜…… 이…… 이렇게 돼버리는 걸까…… 우…… 운이 없어, 나는…… 싫어…… 정말…… 싫어…… 가고 싶지 않아…… 그가 무서워…… 무서워…… 너무…… 너…… 너무너무 무서워…….”
“제기랄!!!”
“……좀…… 나…… 좀 기다려봐요…… 나 좀…… 기…… 김 선생님…… 잠깐…… 기운 좀 차리면…… 아직은…….”
막무가내로 매달리고 애원했다. 마치 남자가 그의 집으로 자신을 끌고 가는 저승사자이기라도 한 양, 울며불며 소원했다. 그야말로 비이성적인 히스테리였지만 어쩐지 이 남자라면 소원을 들어줄 것도 같았다. 정말로 친절한 기사니까, 헌신적인 하인도 마다하지 않는 천사 같은 남자니까, 자신과 등이 붙은 쌍둥이일지도 모르니까, 저 무시무시한 지옥 구덩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걸 막아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기적이 일어나줄 리는 없었다. 운이 없는 인간이었다. 재수도 지지리 없는 호모 새끼였다, 자신은. 제 분수도 모르고 구름 위를 둥실둥실 떠돌다가, 의기양양 기뻐 날뛰다가 벼락을 맞은 거다. ……그렇지, 그렇지. 맞아도 싸지. 벼락을 맞아도 싼 인간이지, 재수 없는 호모 새끼 주제에…….
“……죄송…… 합니다…… 좀…… 제…… 제가 경황이 없어서…… 미…… 미안합니다…… 김 선생님…… 제가…….”
“그만둬……!”
“……가…… 가겠습니다…… 거…… 걸을 수 있으니까…… 홍 기사가 기다릴 거예요…….”
시시각각 강도를 더해 터져 나오는 히스테리를 억누르기 위해 인환은 결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찝찔한 피 맛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시나무 떨듯 하는 온몸의 경련은 여전했지만 설움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아야 했다. 어딜 도망갈 수 있을까 보냐, 죄인 주제에. 그가 원한다면 가야만 한다. 그가 목을 따길 원한다면 얌전히 목을 빼 던져줘야만 한다…….
“……그만두세요, 제발!! 젠장할, 견딜 수가 없어!! 더 이상 ……더 이상은…….”
양쪽 어깨를 부서트릴 기세로 움켜쥐고 있는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가 위해 몸을 비틀었다. 남자가 거칠게 욕설을 퍼붓는 소리를 들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용기가 사라지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그에게로 가야만 했다. 재빨리 벌을 받고 편해져야만 했다.
“……호……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아, 정말 죄송했어요…… 여러 가지…… 정말 바보 같죠…… 너무 부끄러워…… 추태만 잔뜩…… 부끄러워…… 무서워…….”
“……인환!!!!!!”
버둥거리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남자의 팔이 엄청난 힘으로 인환의 상반신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가슴에 닿아오는 남자의 늠름하고 단단한 가슴팍을 채 자각할 틈도 없이 허리가 뒤로 활처럼 휘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남자의 격렬한 키스가 입술을 틀어막고 있었다.
처음 자각한 것은 입술의 통증이었다. 몇 분 전, 피가 날 정도로 깨물기까지 한데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달라붙은 채 숨 막히는 흡입을 되풀이하는 남자의 입술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느낀 것은 남자의 뜨겁고 축축한 혀의 감촉이었다. 유연하고 힘차게 입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그것은 굶주린 짐승처럼 사납고 난폭하기 짝이 없었다. 목구멍 안 쪽을 쑤시고, 입천장을 문지르고, 혀끝을 감아 빨아들였다. ‘그’의 키스 이외엔 키스 경험이 없는 인환으로서 그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이상야릇하며 낯선 감각이었지만, 동시에 감당하기 힘들 지경으로 온 넋을 빨아들이는 엄청난 기운을 느끼게 했다. 가파른 천 길 낭떠러지에서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눈을 뜰 수도 없이 사방이 빙글빙글 돌았다. 숨이 틀어막힌 것만 같았다. 뭐가 뭔지 통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어루만져지고 빨리고 깨물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핥아졌다가는, 사나운 들개처럼 집어삼켜졌다. 쭙쭙거리는 음탕한 결합 소리가 목구멍 안쪽까지 깊이 파고든 혀끝처럼 귓속을 음란하게 쑤셔댔다. 커다랗고 단단한 남자의 손은 광기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마냥 벌벌 떨며 인환의 등줄기와 엉덩이 사이를 오갔다. 때론 위로 뛰어 올라 머리카락을 쥐어뜯기도 했다. 낯설고도 격렬하고도 또한 압도적인 에너지였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온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마냥 뻣뻣하게 굳어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남자의 탄탄한 허벅지가 가랑이 사이로 파고든 것이 언제부터인지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허벅지 안쪽에 달라붙어 있는 남자의 치부는 이미 돌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폭풍 같은 입맞춤으로 입술을 유린하고 있는 와중에도 남자의 딱딱해진 생식기는 미친 듯이 인환의 몸에 비벼지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힘에 몸이 뒤로 밀리자 남자는 화장실 한쪽 벽과 남자의 몸 사이에 인환을 끼워 넣었다. 결합은 더더욱 깊어졌고, 남자의 키스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음란하고 격렬한 것으로 변해갔다. 공기를 찾아 필사적으로 헐떡였지만 파고드는 것은 지독한 흡입으로 자신을 빨아들이는 남자의 입술뿐이었다. 지진이 일어난 도시처럼 쾅쾅 진동하는 남자의 심장 소리뿐이었다. 사막 같은 열기뿐이었다. 폐부 가득 진동하는 강렬한 체취뿐이었다. 어느 순간, 남자로부터 떨어져야만 한다는 자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감히 무얼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제동이 불가능한 거대한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가버렸다는 아득한 절망감만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만 놔주시지, 김강원. 내 것이다.”
너무나 흐릿해서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으르렁거림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목구멍 안쪽을 쑤셔대던 남자의 혀가 파르르륵 전율을 일으켰다.
“놔라, 김강원.”
맞붙어 있던 사타구니 사이, 남자의 거대해진 흉기가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인환의 허리를 틀어쥐고 있던 남자의 양손에 어마어마한 악력이 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가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천천히 떨어져 나가는 남자의 몸이 느껴졌다. 전신의 체중을 남자에게 의지하고 있던 터라 인환의 몸은 물먹은 솜처럼 휘청거렸다. 양손을 거두어갔던 남자가 다급하게 되뻗어왔지만 채 닿기도 전에 인환은 화장실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더 이상 손대지 마!!!!!!”
무시무시한 저승사자의 노도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온몸을 바늘로 찔리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시야를 가렸던 남자의 몸이 옆으로 비켜서자 비로소 저승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의심할 나위 없는, 자신의 주인이자 신이자 영혼인 사내였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음습한 시선이 섬광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실신할 것 같은 예감에 기를 쓰고 이를 악물었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묵직하게 젖어든 몸은 마냥 무기력했다. 역시 제정신으로 견디기엔 너무나 두려운 섬광이라고 어렴풋이 체념했다. 인환은 먹물처럼 새까만 심연 속으로 깊숙이 빨려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