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2003년 7월. 문위(文偉) (43/129)

19. 2003년 7월. 문위(文偉)

막 한길로 쫓아 내려갔을 땐 류지은은 이미 택시 안으로 몸을 밀어 넣고 있는 중이었다. 

미련을 못 버린 기자들 서넛이 택시 문을 가로막을 듯 잡고 있었지만 출발하는 차를 막을 수는 없었다. 몇 번인가 카메라 플래시가 더 터졌고, 명멸하는 빛 속에서 차는 위를 스쳐 대로변으로 내달렸다. 찰나의 순간, 류지은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차를 세우지 않았다.

채 식지 않은 한여름 밤의 열기를 고스란히 뿜어내고 있는 아스팔트 한복판에서, 위는 한동안 멍하니 선 채 연인의 뒷모습을 좇는 연기를 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한두 번 전화로 만남을 애걸하고, 우수에 찬 커밍아웃을 하는 일뿐이었다. 참회하고 용서를 빈 후 각자 길을 가면 그만이었다.

오만한 공주님이었다.

충격도 꽤 컸을 테고, 자신의 변명이라거나 부정을 다짐받고 싶었을 텐데도 류지은은 자존심부터 회복하는 쪽을 택했다. 그런 상황에서 눈물을 보인다거나, 혹은 충격을 다스리지 못해 히스테리를 부리기란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다.

자존심이야말로 7개월에 걸친 교제 기간 동안 위가 느낀 류지은의 가장 뚜렷한 개성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만큼 허영심도 강한 에고이스트라서, 근본적으로 사랑이 부족한 여자였지만 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성격이 아닐 수 없었다. 뼛속 깊이까지 자신을 사랑해주는 여자였다면 아무리 목적이 있는 사귐이었다 해도 만남을 지속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순정의 굴레라는 것이 사람의 넋을 얼마나 지독하게 상처 입히며 또 파멸시키는가를 자신은 그 얼마나 뼈저리게 새기고 있는가.

타고난 자존심이 상처의 회복을 도울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게이라는 것까지 알게 됐으니 경멸과 더불어 동정심까지 품어줄지도 모르지.

애초부터 류지은에게 이별을 고할 핑계거리로 게이의 정체성을 염두에 두고 있던 자신이었었다. 그와 재회를 하고, 또 동거를 하게 되면서는 당연히 그와의 관계를 흘리는 것으로 류지은과의 사이를 매듭지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인이 게이라는 사실은 그녀로서도 숨기고 싶은 치부일 테니, 설령 배반감에 치를 떤다 하더라도 언론에까지 사실을 흘리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사방에 까발린대도 그리 신경을 쓸 자신도 아니었다. 그를 지키기 위해 되도록 그와의 관계를 숨길 생각이긴 하지만, 만에 하나 달리 길이 없다고 한다면 위는 세상과 전력으로 싸울 작정까지도 하고 있었다. 무슨 짓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괴로운 대가도 기꺼이 지불을 할 터이다,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은 더 이상 어리고 약한 남창이 아니었다. 세상에 굴복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어리석은 짓 따윈 결코 다신 반복하지 않으리라. 그것은, 지난 9년의 세월 동안 지옥 같은 고통과 그리움을 견디며 셀 수 없이 거듭 되풀이해온 자신과의 피눈물 나는 약속이자 맹세였었다.

오주희는 그런 면에서 의외의 조력자가 된 셈이었다.

이별 선언의 전초전으로 그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류지은을 데리고 리셉션장을 찾긴 했지만, 이렇게 자연스레 마무리 작업까지 마치게 될 줄은 위로서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윤열이 형에게 사정을 털어놓기도 전이라 너무 이른 감은 있었지만, 기대 이상의 수확이자 행운임에는 틀림없었다.

어린애를 야단치는 짐짓 엄격한 태도로 자신을 몰아대던 오주희를, 위는 당장 껴안고 뽀뽀라도 해주고픈 심정이었다. 처음엔 누군지 몰라 당황하기도 했었다. 모습이 많이 변하기도 했지만 남창 시절의 고객 따위 일일이 기억하고 있을 자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터지고 나서야, 위는 눈앞에 서 있는 만삭의 중년 여자야말로 자신의 옛 고객이었음을 비로소 기억해낼 수가 있었다. 고객이다 뿐인가, 그를 만나게 해준 소중한 계기가 됐던 여자이기도 했다. 과거에 좀처럼 갚기 힘든 소중한 부채를 안겨준 여자는 이번엔 다른 형태로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문 사장님! 문 사장님이시죠? 류지은 씨의 연인이신……?!”

펑!

“잠깐 말씀 좀 나누실 수 있을까요? 류지은 씨와의 약혼설에 대해서 한 말씀만…….”

펑! 펑! 펑!

류지은을 뒤쫓던 기자들이 이번엔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거듭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잔뜩 인상을 구기며 갤러리로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얼굴로 묵묵부답을 고수하자, 집요하게 다가들던 치들도 곧 머쓱해진 얼굴을 만들더니 차례로 떨어져나갔다. 거절의 말일지라도 일단 대꾸를 흘리는 쪽이 오히려 더 저들을 달라붙게 만든다는 걸 위는 류지은과의 7개월 동안 확실히 깨닫게 되었었다. 배타적인 표정으로 사람 취급을 않는 것. 기득권층에 대한 서민 특유의 위화감을 자극하는 오만 방자한 행동임엔 분명해서, 제아무리 찰거머리 기질을 지닌 치들이라 해도 대개는 백기를 들기 마련이었다. 자신 역시 서민 출신, 아니, 실은 극빈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련만, 인생 역전에 성공한 승자에겐 역시 기왕의 잣대가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모멸감에도 불구하고 승자에의 외경이 서린 머쓱한 표정으로 물러나는 저들에게 자신의 옛 모습을 투영시키며 위는 씁쓸한 자조를 흘렸다.

기자들을 따돌리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로비는 처음보다 꽤 붐비고 있었다.

행사장에서 빠져나온 사람들로 보이는 남녀 열댓 명이 안 회장을 겹겹이 둘러싼 채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나 오주희, 김강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초조감이 엄습하며 발걸음도 조급해졌다. 너무 여유를 부린 것은 아닌가, 어차피 부자연스러운 파국임엔 다르지 않을 텐데 류지은을 붙잡는 연기까지 펼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잠깐 후회가 되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와 계단, 그리고 1층 사무국과 연결된 로비 안쪽의 구석구석을 재빨리 훑은 다음, 엘리베이터로 방향을 정하고 뛰었다. 갤러리로 되돌아올 때 지하 주차장으로부터 빠져나온 승용차와 마주친 일은 없으니, 그는 다시금 행사장으로 올라갔거나 달리 건물 내 어딘가에서 심신을 추스르고 있을 터였다.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이 환영처럼 떠오르며 속을 아리게 했다. 오주희의 폭로마저 제 탓으로 여기고 죄책감에 빠져 있을 그가 눈에 선했다. 한시라도 빨리 안심을 시켜줘야만 할 터였다. 행사도 파장 무렵이니 집으로 데려가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쪽이 아니야, 문 이사! 화가 씨는 저기 화장실로 들어갔다네……!”

막 열린 엘리베이터 문으로 들어서려는데, 안 회장의 커다란 외침이 위를 막아 세웠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간신히 인간 장벽을 뚫고 나온 듯한 안 회장이 반대편 복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예리하면서도 장난꾸러기 같은 사내의 눈길에선 오주희의 폭탄선언이 가져다주었을 법한 당혹감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거의 전폭적인 신뢰를 보이며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있던 호걸에게 실망을 대답으로 돌려주게 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당장은 판단이 불가능했다. 물론 그 어느 쪽이라 해도 별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사내가 윤열이 형과 뜻을 같이하는 큰 인물이라는 점도, 또 위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풀어주고 있다는 것도, 위에겐 별다른 의미가 되지 못했다. 자신이 윤열이 형을 돕는 것은 안 회장처럼 거창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때문이 아니었다. 윤열이 형에 대한 가족으로서의 보호 본능이 움직일 수 있게끔 하는 동기 부여가 돼주고 있다면, 가족을 풍비박산시킨 기득권 세력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는 그 강력한 에너지원이 돼주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우정을 나누기엔, 태어날 때부터의 귀족인 이 사내와 자신은 그렇게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 그 차이를 좁힐 의욕 따윈 손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이었다. 거창한 사명감과 박애주의라면 윤열이 형 하나만으로도 이미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또 하나의 윤열이 형이라니, 절대 달가울 리가 없었다.

“……속이 무지 불편하신 것 같았어. 김 선생이 따라갔으니까 별일은 없을 테지.”

특유의 익살스러우면서도 허물없는 태도로 덧붙이는 사내에게 가볍게 목례를 던진 후, 위는 사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빨리했다.

속이 안 좋다니 역시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당장 집으로 데려가야만 했다. 모퉁이 두 개를 돌자 파란 화장실 마크가 붙은 여닫이문 하나가 보였다. 홍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건물 앞에 차를 대기시키라고 이른 뒤, 위는 서둘러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의 뒷모습이 정면으로 보였다.

입구를 반쯤 가리고 있던 대리석 벽을 돌자마자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적나라한 모양새를 취하며 위의 눈동자 속으로 달려들었다. 세면대 측면 벽과 사내의 몸통 사이에 낀 채여서 그의 몸 대부분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옆으로 30도쯤 각도를 틀고 있는 사내의 머리에 가린 그의 얼굴도 키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 외엔 아무것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옆으로 축 늘어져 벌벌 떨리고 있는 그의 메마른 손마디가 가까스로 보였다. 사내의 허벅지가 그의 가랑이 틈으로 파고 들어가 피스톤질을 해대는 통에 까치발을 뛰듯 위로 약간 들린 채 힘없이 흔들리고 있는 그의 마비된 한쪽 다리만이 그나마 제대로 볼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었다.

언젠가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각오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내는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고, 또 위에게 정면으로 도전장까지 던진 상태였다. 사내를 받아들이고, 그의 곁에 두기로 결정한 후부터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빼앗길 위험조차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지 않았는가.

그러나 역시 상상과 현실은 지독히도 다른 것이었나 보았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당장은 숨도 토해지지가 않았다. 심장이 쪼개지는 기분이란 게 이런 건가 싶을 만큼의 끔찍한 고통과 분노가 전신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를 빼앗길 위험까지도 감수할 수가 있다니. 맙소사, 그렇게 한심한 작정을 한 얼간이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런 바보 천치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만 놔주시지, 김강원. 내 것이다.”

너무나 흐릿해서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신음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자신의 소리라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심장의 울림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전신을 휘돌고 있는 뜨거운 혈액의 흐름만이 어렴풋이 자각될 뿐이었다.

“놔라, 김강원.”

갈가리 찢어발기고 싶다. 사내의 피스톤질이 멎었다. 찢어발겨야겠다. 먹어치우듯 빨아대던 키스도 멈추었다. 작정을 하고 말 것도 없이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눈앞이 새하얀 분노로 소용돌이쳤다. 사내가 떨어져 나가자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지는 마른 몸이 보였다. 옅은 하늘색의 슈트 재킷이 무방비한 자세를 반영하듯 단추가 모두 풀린 채 활짝 열려 있었다. 허리춤에서 비어져 나와 있는 셔츠자락도, 반쯤 풀린 채 어지러이 뒤엉켜 있는 은회색 타이도 격렬한 소용돌이에 힘을 보태주었다. 찢어발길 테다……. 사내가 또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더 이상 손대지 마!!!!!!”

짐승의 포효 같은 괴성이 거슬렸다. 역시 자신의 목소리라고는 생각되지가 않았다. 사내가 몸을 비키자 자신의 것이 비로소 온전히 모습을 보여주었다. 피에 굶주린 아귀처럼 날뛰던 파괴욕이 일순 숨을 고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발을 했는지 짧게 친 머리카락이 땀에 젖은 채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사내의 타액으로 뒤범벅이 돼 있는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격렬한 접촉을 증거하듯 잔뜩 부풀어 오른 붉은 입술에 다시 한 번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질투를 느꼈다. 결사적으로 시선을 틀어주고 놓아주지 않자, 점점 흐릿하게 초점을 잃어가는 동공이 느껴졌다. 실신하려는 모양이었다. 분노를 대신한 근심이 잠깐 동안 위의 의식을 점령했다. 심장은, 이번엔 다른 이유로 파열할 것처럼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그의 상반신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흐릿해진 동공은 곧 내려앉은 눈꺼풀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사내가 다시 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손대지 맛!!!!!!”

사내의 멱살을 어떻게 틀어쥐었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어딜 어떻게 갈기고 집어 던졌는지도 희미했다. 어렴풋이 분별이 돌아왔을 땐, 사내의 몸은 화장실 맨 안쪽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가느다란 신음성과 함께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는 몸에 몇 번 더 미친 듯이 발길질을 해댔다. 마지막 발길질은 사내가 양손으로 틀어쥐는 바람에 크게 기울며 허공을 내질렀을 뿐이었다. 균형을 잃은 몸이 타일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어깨와 무릎과 손바닥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신을 막으려는 사내의 몸과 뒤엉킨 채 한동안 주먹다짐을 벌였다. 방어가 만만치 않아 대개의 타격은 무위로 끝나버리기 일쑤였다.

“사과는 안 해!!!!!!”

“…….”

“빼앗는다고 했지?!!!!!! 왜, 이제 실감이 나나, 문위?!!!!!!”

“…….”

사내의 고통스러운 포효가 돌아버린 의식의 틈을 비집고 가까스로 들어앉았다. 이성을 찾아야만 했다. 사내의 멱살을 틀어쥔 채로 발광하는 파괴의 에너지를 삭히기 위해 기를 썼다. 온몸이 경기를 일으키기라도 한 것마냥 부들부들 떨었다.

필요한 존재였다. 뭐라 해도 필요한 양분이었다. 숙주였다. 그가 온전히 되살아날 때까진 심장이 찢어발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질투심을 견뎌야 했다. 그를 완전히 잃을지도 모른다는 끔찍스러운 불안과 공포를 견뎌내야만 했다.

쾅!!!

쾅!!! 쾅!!! 쾅!!! 콰앙!!!!!!

사내를 밀어내고, 사내를 대신한 화장실 칸막이 문을 하나 택해 미친 듯이 내리쳐댔다.

쾅!!! 쾅!!! 콰앙!!!

쾅!!! 쾅!!! 콰앙!!! 쾅!!! 콰앙!!!!!!

가느다란 베니어합판을 덧댄 문은 몇 번 내리치자 빠직하는 비명을 지르며 움푹 파인 상처를 드러냈다. 관절이 허옇게 드러난 주먹 역시 부서진 문짝만큼의 상처로 문드러진 채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다. 쓰라린 통증과 함께 전신을 발광시키던 회오리 같은 분노가 차츰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격렬하게 펌프질을 해대던 폐부의 움직임이 잦아들면서 흐릿했던 초점이 겨우 제자리를 찾아갔다.

갑자기 환해진 시야로 사내의 얼굴이 들어왔다. 밀쳐낸 자세 그대로 타일 바닥에 주저앉은 채, 사내 역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내의 입술로부터 아래턱 끝까지, 기다랗게 늘어진 핏줄기가 보였다. 최초의 일격이 거둔 성과이리라.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불처럼 이글거리고 있는 사내의 눈에 들어앉아 있는 것은 만족감이 아닌 고통이었다. 사디스틱한 기쁨이 전류처럼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갈가리 쥐어뜯고 싶던 아귀의 욕구가 그나마 보상을 받는 순간이었다.

“……필요하니까 붙여두는 거야…….”

헐떡이는 숨을 가까스로 가누며 증오를 토해냈다.

“……너는 그저 내 것의 비타민 같은 존재일 뿐이야, 김강원…… 열심히 해봐…… 그럴수록 내 것은 네 생기를 먹고 씩씩해질 테니까.”

“……그래? 독을 주입하지 않는 편이 비타민을 주입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효과적일 텐데? 너는 독이야, 문위.”

눈에 비친 고통이 짙어졌지만 사내의 공격도 만만치 않았다. 비수처럼 찔러들어온 언어의 가시가 내장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만 같았다.

“……여기저기 칭찬이 자자하더군. 처음부터 메가톤급 비타민을 던져주었어. 합격이다, 김강원.”

“……사랑하지 않아…….”

“오늘 키스는 수고비인 셈 치지. 모쪼록 앞으로도 고생해줘. 세상에 그를 선보일 수 있는 자격을 기꺼이 건네주지.”

“……이제 알겠어. 저 사람은 널 사랑하지 않아.”

“…….”

“죄책감뿐이야. 그렇지?”

면역되지 않은 고통이 내장을 들쑤시고 녹이고 발기발기 찢어발겼다. 두두두둑. 발을 딛고 선 땅이 꺼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야비하게 터지는 웃음은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독사의 필사적인 으름장일 뿐이었다.

“……그래서 뭘?”

“…….”

“……그래서 달라지는 게 있나?”

태연한 대꾸에 사내의 잘생긴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래. 그래서 뭘? 뭐가 달라지는데? 사랑하지 않으면 그가 내 것이라는 진실이 변하기라도 하나? 내가 아니라 네 치마폭에 떨어지기라도 하는가? 너를 대신 사랑해주기라도 할 줄 아는가? 그가? 발기도 제대로 못 하는 시체인 그가 말인가……?

“……이기적인 자식.”

으르렁거리는 사내의 저항을 못 들은 체 일축하고, 웅크리듯 널브러져 있는 내 것 가까이 다가갔다. 뺨을 어루만져보고 숨길도 확인했다. 맥박이 떨어지지 않은 것을 보면 그리 걱정할 만한 사태는 아니었다.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는 소중한 몸을 양팔로 얼싸안았다. 기절한 탓인지 유달리 무겁게 느껴지는 몸은 신열이라도 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땀으로 푹 젖은 피부가 옷감 위로도 선연하게 느껴졌다.

“달라지는 게 있지, 문위. 더 이상 망설이지는 않을 거다.”

막 문을 나서려는데 고요하게 가라앉은 사내의 선언이 울렸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여자 쟁탈전 같은 게 아니었다. 그는 싸워서 얻어내는 전리품 따위가 아니었다. 갑자기 모든 게 시시해졌다. 사내에 대한 질투도, 분노도, 증오도, 신경전도…… 모든 게 너무나 우스꽝스럽고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화장실을 나오자, 로비를 채우고 있던 사람들의 휘둥그레진 시선이 비처럼 퍼부어졌다.

기절한 그에게도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피투성이로 물든 자신의 오른손이 구경꾼들을 경악시킨 모양이었다. 놀라움과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퍼런 서슬 때문인지 감히 가까이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여전히 인파의 장벽에 둘러싸여 있던 안 회장의 눈길에도 설핏 놀라움이 스쳐가는 게 보였지만 위는 싸늘하게 무시했다. 간단히 눈인사만 던진 후 현관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채 식지 않은 한여름 밤의 열기가 성큼 다가들었다. 열대야가 무색할 만큼 습하고 더운 공기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한 장대비를 예고하고 있었다.

“……사장님? 장 선생님께선…… 어이쿠, 다치신 겁니까?!”

현관 앞에서 대기 중이던 홍 기사가 당혹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좀처럼 침착을 잃지 않을 것 같던 사내도 피투성이 손가락엔 표정이 굳었다.

“잠깐 기절한 것뿐입니다. 괜찮아요.”

“……그…… 사장님, 손도…… 병원으로 모실까요?”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집으로 바로 가주세요.”

잠깐 미심쩍은 표정이 스쳤지만 눈치 빠른 홍 기사는 잠자코 명령에 복종했다. 홍 기사의 부축으로 그를 뒷좌석에 밀어 넣고, 위도 그 옆에 몸을 실었다. 차 문을 닫은 뒤,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앉은 홍 기사가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차의 진동에 흔들리지 않도록, 아래로만 까라지려는 그의 몸을 품 안 깊숙이 끌어당겨 안았다. 입술에 닿는 머리카락에 버릇 같은 키스를 되풀이했다. 폐부 가득 들어차는 너무나 그리운 체취가 뻥 뚫린 허기를 그나마 진정시켜주었다. 손에 닿는 대로 허리와 엉덩이와 목덜미와 어깨들을 정신없이 어루만졌다. 축축한 몸은 여전히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몸을 감싸고 있는 하늘빛 슈트는 자신의 손으로부터 스며든 핏방울로 낭자해져 있었다. 드물게 잘 어울리는 색과 디자인이어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시 사 입힐 것이다. 얼마든지, 수십, 수백 벌이라도 사서 입혀줄 것이다. 입히고 먹이고 재워줄 것이다. 살게 해줄 것이다. 내가 해줄 것이다. 내 것이었다. 내 모든 것이었다.

강렬한 섬광이 눈꺼풀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이를 두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뇌성이 울리지 않았다면 그조차도 먹물 같은 잠결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공기가 쪼개지는 듯 요란한 소음이었다. 흐릿하게 떠오르는 의식의 표층 위로 뇌성의 여운은 꽤 오래 지속되었던 듯하다. 철판 위에 쌀이 떨어지는 것처럼 쏴아 하는 빗소리가 뇌성의 뒤를 이었다. 또 비로군…… 하고 불만스러운 생각을 흘렸다. 문득 품 안이 허전하다고 느낀 것도 그렇게 요란스러운 빗소리를 자각한 시점이었다. 팔을 뻗어 따스한 체온을 더듬었지만 어쩐지 원하는 몸은 만져지지 않았다. 푸르스름한 섬광이 다시 한 번 눈꺼풀을 때렸다. 이어 도끼로 장작을 쪼개는 것 같은 천둥소리가 지축을 흔들어댔다. 불안한 기분은 순식간에 위의 의식을 깨어나게 했다. 눈을 번쩍 뜨고 만져지지 않는 몸을 찾아 정신없이 두리번거렸다. 잠들기 직전까지 품에 꼭 껴안았던 몸은 침대 어디에도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작열하는 섬광과 함께 공기를 찢어발기는 뇌성이 길게 메아리쳤다. 섬광과 뇌성이 들리는 시차가 별로 없는 걸 보니 벼락은 아주 가까이에서 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푸릇푸릇한 섬광의 여운이 침실을 훑고 지나는 찰나의 순간, 위는 고맙게도 원하는 몸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연인은 방 안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채 양팔로 감싸듯 귀를 막고 있었다. 좀 더 밝아진 새하얀 섬광과 함께 강도를 더한 뇌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흑……!”

들릴 듯 말 듯한 신음성과 함께 연인의 몸은 공처럼 말린 채로 크게 몸서리를 쳤다. 겁을 먹고 있었다. 드물게 요동을 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천둥소리 따위에 겁을 집어먹을 그는 아니었다. 아마 악몽이라도 꾼 것일 게다.

재빨리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를 켜고 연인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켜진 불빛 때문인지 웅크리고 있던 상반신이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는 게 보였다. 휘둥그레진 눈이 위를 보고 있었다. 눈동자에 새겨진 그것은 역시 예상대로 공포였지만 단순히 뇌성 때문도, 혹은 악몽 때문도 아니었다. 마주친 시선 속에서, 위는 위 자신에 대한 연인의 선명한 공포를 읽을 수 있었다.

부릅뜬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벌거벗은 나신이 보였다. 거대하고 음침하고 불길한 그것은 자신에게도 영 꺼림칙해 보였다. 저 꺼림칙한 아우라를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하고 순간 고통스럽게 생각한다. 익숙하기도 하고, 또 늘 각오하고 있기도 한 고통이건만 어째서 닥칠 때마다 매번 이렇게도 아픈지 이상스럽다고 생각한다. 그가 원하는 대로 물러나줄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손을 뻗을까 아주 잠깐 고민도 해본다. 물론 손을 뻗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공포가 무엇 때문인지는 알고 있으니까. 벌어진 가슴에서 콸콸 쏟아지고 있는 아픈 핏줄기는 짐짓 무시한 채, 떨고 있는 연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수리 근처에 손이 닿기 직전 화등잔만 해져 있던 눈이 질끈 감겼다. 파르륵 전율할 뿐, 손을 뿌리치거나 다시 몸을 움츠리지는 않았다. 그렇지. 공포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렇게 자신을 수용해버리는 연인이기에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죽기보다 싫을 텐데도 기꺼이 몸을 열고 자신을 받아주기에.

시간을 들여 천천히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마음 또한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공을 들였다. 차츰 몸의 떨림이 가라앉아가는 게 보였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질끈 감겨 있던 눈에서도 조금씩 힘이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섬광과 함께 다시금 천지가 요동쳤다. 히끅 하는 딸꾹질 비슷한 신음성을 흘리며 연인의 몸도 다시금 둥글게 말려들었다. 더 이상 주저 않고 끌어당겨 안았다. 잦아들었던 떨림이 한동안 더 계속됐지만 차츰 몸의 긴장을 풀더니 착 감기듯 안겨왔다. 잠들기 전 입혀주었던 러닝과 트렁크팬티가 땀으로 축축했다. 체온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다리를 교차시켜 거미처럼 친친 감듯이 연인의 허리를 죄었다. 자신의 두 팔도 마른 상반신을 품기에 충분히 길었다. 얼굴을 끌어당겨 품에 꼭 묻었다. 가능한 한 모든 부분과 달라붙은 포옹이 만족스러웠다. 너무나 기분 좋은 연인의 살 냄새가 사방에 충만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뇌성을 동반한 폭우는 20분쯤 더 계속된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동이 트기엔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하늘이 찢길 때마다 연인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지만 자신의 등에 두른 두 팔에도 힘을 주며 포옹을 깊게 하곤 했다. 맞대어진 가슴으로부터 새가슴처럼 두근거리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빗소리에 어우러진 규칙적인 울림은 연인을 차분하게 안정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상처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오주희에겐 고마워하고 있어.”

한결 기세를 줄인 빗소리에 멍하니 귀를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움찔 긴장하는 것 같았지만 품 안의 연인은 그리 동요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포옹과 애무로 어느 정도 마음이 열린 때문이리라.

“……일도 매듭지어진 참이라 류지은과는 헤어질 요량이었지. 잘됐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네 핑계를 댈 생각이었으니까.”

“?!!!”

얼굴을 들진 않았지만 연인의 놀라움은 맞닿은 몸으로부터 생생히 전달되었다. 잠깐 숨을 멈춘 듯하더니 이내 기다란 한숨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자신의 등줄기를 멍하니 쓸고 있던 왼손도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형을 죽인 놈을 안다고 한 말 기억해?”

숨을 죽인 채 움직임을 굳히고 있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어깨를 쓸고 있던 손을 머리로 가져가 정수리와 관자놀이 부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짧게 깎인 머리카락 틈으로 손가락을 넣고 빗질하듯 쓸어내리기도 했다. 매끈한 감촉이 몹시 사랑스럽다고 부지불식간의 생각을 좇기도 했다.

“요즘 그럭저럭 잘나가는 국회의원으로 있지. 류지은은 그놈 변호사의 딸이다. 정태근이라고 하는 놈인데 변호사라기보다 거의 오른팔에 가까운 보좌관이지. 류지은이 예명을 쓰고 있어서 세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정가에서는 꽤 유명하더군.”

“…….”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달리 약점을 찾을 생각이었다. 이 나라의 국회의원이란 게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놈은 없으니까. 일단 내부로 파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류지은은 그렇게 접근하기 쉬운 구실이었다.”

“…….”

“놈이 손댄 인간이 형만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날 기억조차 못 하더군. 하긴 버러지라고만 여겼던 극빈층 고등학생이 번듯한 기업체의 오너가 돼서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겠지.”

“…….”

“……이건 복수인 걸까? 글쎄…… 그래봤자 놈을 완전히 파멸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령 놈을 의원직에서 쫓아낸다고 해도 놈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까지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그물망처럼 얽힌 연줄로 여전히 후대까지 잘 먹고 잘 살아갈 놈이지. 그래. 그런 거다, 이 나라의 기득권이란 게.”

“…….”

“그러니 이건 윤열이 형 때문이겠지. 형은 여전히 그쪽 일당과 싸우고 있고, 형이 싸우는 한 나도 최선을 다해서 형을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되니까.”

“…….”

“……윤열이 형이 국회의원이 됐다는 건 얘기했던가?”

여전히 바짝 몸을 굳힌 채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는 연인을 좀 더 힘주어 껴안았다. 어떻게 하면 긴장을 풀어줄 수 있을까 안타까운 나머지 등줄기와 허리를 쓰다듬고 있는 손길에도 저절로 힘이 가해졌다.

“……그래. 덕분에 옛날보다 더 피곤해졌지. 언제 붙잡힐까, 언제 맞아 죽을까 전전긍긍해하던 때보다 더. 물론 이제 더 이상 맞아 죽을 일은 걱정 않고 있지만…….”

“…….”

“……그래서…… 그래, 오늘 일로는 마음 쓸 필요가 없단 얘기야, 장인환. 아주 자연스럽게 풀려서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고 있지.”

“…….”

“……놀랐나?”

“…….”

“……또 내 발목을 잡은 줄 알고 지레 겁먹었지?”

“…….”

“그렇군. 좀 더 오래 괴롭히는 것도 재미가 있겠지만 오늘은 날 도와준 셈이니까…….”

“…….”

“……알아듣나? 그러니까 이건 상이야. 그래서…… 큐레이터와 키스한 것도 이번만은 용서해주지.”

“…….”

“하지만 이번 한 번뿐이야. 또 한 번 그자에게 입술을 허락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나?”

굳었던 몸이 마침내 해파리처럼 흐늘흐늘 늘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헐떡이듯 뿜어내는 한숨도 의외의 사실로 인한 연인의 놀라움과 안도감을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다…… 다행이네…… 정말로…… 다행…….”

동요로 가득한 목소리가 떨리는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걱정…… 했는데…… 또…… 네게 해…… 해를 입힌 줄 알고…… 무서웠어…… 너…… 너무 무서워, 그런 건…… 다치고 싶지 않아…… 또…… 널 다치게 하…… 한다면……만약 그렇게 된다면…… 읏……!”

띄엄띄엄 가쁘게 내뱉어지던 목소리는 결국 불분명한 흐느낌 소리에 묻혀버렸다.

등에 둘러져 있던 연인의 팔에 힘이 가해지며 결사적으로 매달려왔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듯 달라붙는 통에, 위의 몸은 금방이라도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품 안에 파묻혀 있던 얼굴을 정신없이 비벼대더니 우격다짐에 불과할 맹목적인 키스를 가슴 곳곳에 닥치는 대로 퍼부어댔다. 맨살에 닿는 연인의 뺨은 어느새 따뜻하고 축축한 물기로 흥건해져 있었다. 소리 없는 오열은, 겁에 질린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은 흥분과 동요가 가라앉을 때까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최대한 부드럽게 연인의 몸을 쓰다듬어주며 연인의 히스테리에 가까울 감정 발작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연인의 내부에 박혀 있는 죄책감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새삼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장을 저미는 고통이 선명하게 살 속을 새기며 지나갔다.

저 뿌리 깊은 연인의 어둠을 몰아낼 수만 있다면 자신은 그 어떤 값비싼 대가라도 기꺼이 지불할 터였다. 지금처럼 몇 마디 말로 해결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 혼이라도 내다 팔 자신이었다.

물론 그러한 대가라는 게 세상에 달리 존재할 까닭이 없었다. 도대체 그 어떤 값비싼 것이 혜윤이를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가련하고 가련한 내 동생, 금쪽보다도 더 귀하게 여겼던 내 소중한 혈육을. 그야, 대신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일 수는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살다 보면 그런 악운도 따르는 법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인을 사랑하니 용서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감히 선언할 수도. 그러나 가해자까지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혜윤이로 인한 상처와 어둠이 평생 싸안고 가야 할 위 자신의 짐이라면, 그 짐의 무게만큼 연인은 스스로를 죄의식의 감옥 속에 가두고 있었다. 스스로 지옥문을 열고 들어앉아버린 영혼에 감히 누가 있어 그를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혜윤이라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혜윤이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라야만 기적을 가져올 수 있었다. 자신의 손아귀에 그만한 것이 달리 존재할 까닭이 없었다. 자신은 불가능이라는 말이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랬다. 무력감은 고통으로, 고통은 독 같은 회한으로 변해 전신을 새까맣게 중독시키고 있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한 줄기 바람과 함께 비릿한 비 냄새가 확 끼쳐들었다.

한결 기세를 줄이긴 했지만 빗줄기는 여전히 요란스레 지붕과 벽을 때리고 있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시간이 더 남아 있었고, 다시 잠을 청하기에도 애매한 시각이었다. 보통 때라면 섹스를 했겠지만 아무리 욕망이 치솟는다고 해도 오늘만큼은 그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눈물투성이 얼굴을 혀로 꼼꼼히 핥고, 몇 번 깊은 입맞춤을 했다. 입안 가득 빨아들인 귓바퀴를 자근자근 씹기도 했다. 흥분과 긴장의 후유증인지 맥없이 까라지는 몸을 거푸 꼭 끌어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딱딱해져버린 성기는 아랑곳 않고 연인의 몸을 침대로 안아 옮겼다. 조금씩 식어드는 소중한 몸에 시트를 덮어주고,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자위를 했다.

“……상 주는 날이니까 봐주는 거야. 하루 휴가인 셈이지.”

희미하게 뺨을 붉힌 채 묻듯이 시선을 맞춰오는 연인에게 무뚝뚝하게 대꾸를 주었다. 연인의 얼굴은 점점 더 빨개져 아예 홍당무가 되었지만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눈만을 휘어감은 채로 첫 번째 오르가슴에 도달하고, 아무래도 부족한 나머지 다시 한 번 손을 뻗어 두 번째 배출을 했다. 그저 성욕을 다스리기 위한 기계적인 행위라 시간은 그리 오래 끌지 않았다. 미진했던 욕망은 채 5분이 못 돼 손가락 틈을 비집고 분수처럼 뿜어 나왔다. 소처럼 검고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내내 어쩔 줄 몰라 하던 연인의 위로 쓰러져 서글픈 몰두의 끝을 마감했다.

호흡이 편안해질 때를 기다려 입술에 깊은 입맞춤을 하자, 연인의 두 손이 뻗어와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었다. 그저 타고난 상냥한 성품 때문이거나 의무감에 기인한 행동일 뿐이건만, 울컥 응어리가 삼켜질 정도로 애정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차라리 더 잔인하다는 생각을 멍하니 했다.

시트에 둘둘 말린 연인의 몸을 덮치듯이 꼭 껴안고 조용히 시간을 흘렸다. 푸르스름한 박명이 창 밖으로 퍼지고 있었다. 검푸른 빗줄기 소리도 여전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애무와 잦은 입맞춤에도 불구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연인에, 배 속이 휑하니 비는 듯한 익숙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체념하고 머리맡의 스탠드를 껐다. 불을 끄자마자 박정한 연인은 기다렸다는 듯 밀물 같은 잠에 침몰해 들어갔다.

그저 이 따스한 체온만 끌어안으면 된다고,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이 사랑스러운 체취만 마음껏 들이켜면 될 일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들 그게 무슨 대수랴. 설령 이대로 영원히 함께 지옥 속에 있다 한들 그리 못 견딜 게 무어냐. 내 것이었다. 과거에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이 몸뚱이가 내 것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얼굴을 핥고 입술을 빨고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졌다. 그게 지치면 그저 가만히 껴안고 바라보기만 했다. 점점 환하게 밝아오는 빛 속에서 가감 없이 드러나는 섬세한 얼굴 윤곽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더듬기도 했다. 오랫동안 연인만 들여다본 탓에 새삼 낯설어진 침실 풍경을 얼떨떨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축축하게 젖어드는 빗줄기 소리 너머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파출부였다. 아침이 턱밑으로 다가와 있었다.

눅눅하고 우중충한 습기로 가득한 아침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도 내키지 않고, 품에 안은 몸을 놓아주기는 더더욱 싫었다. 연인에 대해 아침마다 솟구치는 병적인 집착이 또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여느 날보다 더 서둘러야만 하는 일정이 발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류지은과의 파국이 온 만큼, 형을 만나는 일도 한시가 급했다. 어쩌면 나름대로 충격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형의 죽음은 되레 자신보다도 더 윤열이 형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을 터였다. 그 상처를 건드린다는 것은 달갑지 않았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속 좋은 윤열이 형을 움직이기란 몹시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전기밥솥에서 밥이 익어가는 냄새가 그의 달콤한 체취에 섞여들고 나서야, 위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게으른데다 지치기까지 한 연인은 식사 때나 돼야 간신히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모닝 키스를 구실로 벌써 몇 십 번째일지도 모를 깊은 입맞춤을 마지막으로 남긴 후 위는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상처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오른손에 비닐봉지를 감아 묶은 다음 샤워를 했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는 둔통이 느껴졌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샤워를 마치고 셔츠와 바지를 대충 걸친 다음,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갈았다. 간밤에 감아두었던 붕대엔 피가 번져 나와 거무죽죽한 얼룩이 만들어져 있었다. 뼈가 바스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화장실 문짝을 때려 부순 전쟁은 나름대로의 후유증을 남긴 모양이었다. 큐레이터의 얼굴과 함께 생각하기조차 싫은 키스 장면이 떠오르며 치료하는 내내 위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또다시 무언가를 치고 싶은 사나운 기분이 들기 전에 치료가 끝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사장님?”

거실로 나가니 부지런한 여자의 인사말이 반긴다.

“……에구머니, 손은 또 왜 그러세요?! 많이 다치셨어요?!”

여자의 수더분한 얼굴에 놀람과 불안이 스쳐가는 게 보였다. 붕대가 감긴 자신의 손을 걱정해서라기보다는 그에게 또 폭력을 행사한 것이 아닐까 근심하는 것이리라. 면전에서 그를 미친 듯이 패는 장면을 연출했으니 여자에게 있어 자신의 신용은 아마도 바닥일 터였다. 때때로, 모질고 독한 폭력 남편을 바라보는 듯한 여자의 미심쩍은 시선이 자신의 얼굴로 떨어지는 것을 위는 짐짓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좀 부딪쳤습니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평온한 대꾸에 안심한 표정을 만들긴 했지만 여자의 눈길은 자꾸만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여자는 월급을 주는 자신보다 그에게 더 마음을 쓰고 정을 주는 눈치였다. 단지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자신보다 더 많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사람의 영혼 안에 담긴 사랑의 양이 각자 다 다르다고 한다면, 박한 쪽보다는 푸짐한 쪽에 더 끌리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에게 마음을 여는 이는 비단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채용한 지 고작 열흘도 안 되건만 홍 기사조차 잽싸게 그의 편으로 달라붙었으니 말이다. 어쩐지 당연하다고 납득을 하긴 했지만, 이래서야 정작 그를 감시할 필요가 생겼을 땐 하등 소용이 안 될 사람들이었다. 식탁이 채 차려지지 않았음에도 미적미적 침실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리는 여자에게, 위는 피식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계를 살피고 단전호흡을 마쳤을 시간임을 확인한 후 윤열이 형에게 전화를 넣었다.

[……먼데?! 무신 일로 아칙보텀 뜽금읎이 전화질이여?!]

거의 두 달만의 통화였다.

울고, 때리고, 욕을 하고…… 그와의 동거 사실을 전해 듣곤 다짜고짜 사무실로 찾아온 형은 그렇게 온몸으로 그와 헤어질 것을 애원했었다. 어떻게 해도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고집에 마침내 나가떨어지긴 했지만, 그를 인정해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토록 정 많은 인간이 삐져서 두 달이나 전화 한 통 없었다. 자신 쪽에서 버리면 버렸지 하늘이 두 조각 나는 한이 있어도 먼저 자신을 외면할 인간은 아니라, 위 역시 차분히 냉각기를 갖기로 마음을 굳혔었다.

[요런 좆겉은 새끼야. 귀에 말뚝 박었어?!!! 말을 물었으먼 대답을 혀야 헐 것 아니여?!!!]

귀를 찢을 듯이 악을 써대지만 목소리엔 물기가 그득했다. 내심 참느라고 참았겠지만, 이미 수십 번도 더 수화기를 집었다 놓았을 형이란 걸 알고 있었다.

“……오늘 시간 있으세요? 급히 좀 봬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어제 헤어진 사람들마냥 담담하게 용건을 꺼냈다. 서운함과 괘씸한 마음, 혹은 좀 더 고집을 부릴까 말까로 단순한 머릿속을 제법 복잡하게 굴리고 있을 형을 배려해서였다. 예상대로 햄릿의 고뇌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몇 번 입에 담기 힘든 원색적인 욕설을 형식적으로 퍼부었을 뿐, 형의 물기 어린 어조엔 숨길 수 없는 그리움이 묻어나 있었다. 뻣뻣한 고집은 금세 사라지고, 당장 달려오라는 명령을 애원하듯 되풀이해 쏟아내고 있었다. 의정 일로 제주도에 내려와 있다는 소릴 들었을 땐 좀 난감한 기분이 들었지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강의 시간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당선 이래 2년 남짓한 의정 생활 동안 윤열이 형을 만나는 것은 확실히 예전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로의 빡빡한 일정 때문이라기보다는 남들의 이목 때문이었다. 서로를 가족이라 여긴다곤 해도 엄밀히 피의 연결은 아니니 충분히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다. 무엇보다, 모르는 사이로 해두는 편이 음지에서 윤열이 형을 지키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결국 싸구려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할 만큼의 신중한 처신 덕분인지, 언론 쪽에서 자신과 형을 연결 짓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생각하면 한심한 노릇이었다.

시민운동가라면 모를까, 타협을 모르는 대쪽 같은 성미에 정치가가 어울릴 턱이 없었다. 약관의 개혁적 초선 의원이라는 꼬리표는 입문 당시엔 어땠을지 몰라도 온갖 탁류가 하나로 모여드는 여의도의 구정물 속에선 먹히기 좋은 사냥감에 불과했다. 타고난 낙천성과 불굴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애저녁에 만신창이가 됐을 형이었다. 다행히 몇몇 뜻이 맞는 동료들을 사귀게 되고 안 회장 같은 든든한 실세를 한편으로 끌어들이기도 했지만, 아직 형이 넘어야 할 산은 까마득히 높았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번 한 번으로 지쳐 떨어지길 바라고 있는 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왕의 아귀다툼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형의 의지는 여전히 굳건해 보였다. 그랬다. 15년 전과 한 걸음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니, 달라지기는커녕 더 힘겹고 더 혼탁한 미래가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형은 여전히 물불을 안 가리고 뛰고 있었고, 자신 또한 그 뒷감당을 하느라 전전긍긍하는 것은 여전했다. 형이 멈추지 않는 한, 자신 역시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피할 길은 없었다. 할 수 없지 않은가. 버리고 싶다고 버려지는 게 가족이라면 자신의 인생은 그 얼마나 수월하고 단순해졌을 것인가.

노트북을 켜고 제주행 비행기 표를 예약한 후 정 실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형의 스케줄에 맞춰야만 하고 간단히 끝낼 얘기도 아니라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결근이 불가피할 터였다. 정 실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중요한 결재 서류는 메일로 전송하라고 이른 뒤 전화를 끊었다.

막 차려지기 시작한 식탁으로 다가가려니 그가 침실을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파출부가 깨우기 시작한 지 30여 분만의 개가(!)였다. 반바지와 티셔츠로 옷은 제대로 갖춰 입었지만, 얼굴엔 몽롱한 졸음기가 역력했고 움직임에도 기운이 없었다. ‘아침과 저녁 식사는 반드시 함께’의 원칙(이라기보다는 명령)을 충실히 지키는 것도 아침잠이 많은데다 게으른 연인에겐 조금 버거운 노릇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명령을 취소할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자신이었다. 가능한 한 무엇이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자신의 욕망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에게도 최소한의 규칙성이 절실했다.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밤을 새워서 그림을 그리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심한 우울증에 침윤된 나머지 하루 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못할 터였다.

“세수부터 하고 오세요.”

여전히 수면 욕구를 떨치지 못하는 몸에 음식이 받을 턱이 없었다. 비칠비칠 식탁에 앉는 연인의 귀여운 얼굴을 향해 쌀쌀맞은 명령을 던졌다. 흠칫 어깨를 떨곤, 게으른 연인은 슬금슬금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욕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잠이 확 달아난 표정을 보아하니 세수할 필요성은 이미 사라진 건지도 몰랐다.

부지런히 신문을 훑으며 그가 욕실을 나오길 기다렸다. 평소보다 늦은 십여 분 동안 미적거린 끝에 나타난 그의 머리카락은 흠뻑 젖어 있었다. 두건처럼 뒤집어쓰고 있는 타월 틈으로 이마에 가닥가닥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머리카락 끝에선 조금씩 물방울이 들고 있었다. 왼손 하나만으로 머리를 감았으니 옷인들 온전할 리가 없었다. 라운드 칼라의 풍성한 검정 면 티는 목 언저리부터 가슴 부위까지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머리를 감을 요량이셨으면 제게 부탁을 하시죠.”

안타까운 속내는 숨긴 채 퉁명스럽게 말을 던지자 쑥스러운 미소가 살며시 퍼진다.

“……뭘…… 가슴도 이제 거의 안 아픈걸. 혼자 감아도 돼…….”

금이 간 늑골도 거의 달라붙어 물리 치료도 그만둔 상태였다. 며칠 후면 오른손의 깁스도 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연인이 받은 상처에 대한 자각이 있을 때마다 가슴이 욱신거리는 회한과 통증은 여전했다.

“……소…… 손이…….”

그가 자리에 앉는 것을 기다려 신문을 치우고 수저를 드는데, 그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손이…… 왜 그래……? 다…… 다쳤니……?”

고개를 들고 연인을 굽어보았다. 자신의 오른손을 향해 있는 그의 시선 속에 깃든 것은 근심과 약간의 불안감이었다. 당장은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은 화제였지만 지레짐작을 하고 불안해할 그의 심사가 손끝까지 전해졌다.

“어제의 키스는 용서해드린다고 했죠? 큐레이터를 박살 낸 건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조금 긁힌 것뿐입니다.”

“……그…… 그게 아니라…… 심한 건 아니야……?”

“긁힌 것뿐이라니까요.”

“…….”

큐레이터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얘기는 믿은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어제 일은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류지은 일로 해서 받은 충격이 압도적으로 컸던 탓에 사내의 키스가 던진 임팩트는 그리 큰 것 같지 않았다. 하긴 진짜 깊은 속내야 누가 알겠는가. 지독한 마음의 상처로 로맨틱한 감정 따위 얼어붙어버린 지 오래일 연인이지만, 언제 그 얼음이 녹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이 큐레이터가 될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또다시 배 속으로 휑한 찬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괴로운 상념을 떨치기 위해 한동안 묵묵히 수저를 놀리며 연인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침묵이 어색했는지 그도 열심히 수저를 놀리고 있었다. 식탁 위는 그가 좋아하는 반찬 일색이었다(역시 자신보다는 그를 더 편애하는 파출부였다). 파출부의 손맛에 완전히 길이 든 모양으로, 요즘엔 밥을 남기는 일도 거의 없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수건 내려놓고 식사하세요. 음식에 닿지 않습니까.”

머리 위에서 건들거리는 수건을 피하느라 요리조리 곡예를 거듭하고 있는 숟가락질을 보다 못해 무뚝뚝한 잔소리를 던진다. 숨겨진 열정 탓인지 자신의 목소리는 꽤 탁하게 들렸다. 불편할 게 뻔한데도, 수건을 내려놓는 데까지는 생각을 기울이지 못하는 연인의 무심한 언동이 한심하기보단 사랑스러워 못 견딜 지경이었다. 수건 틈으로 보이는 한편 아저씨스럽고 한편 천진난만한 아이의 표정도, 한입 가득 들어찬 음식을 씹느라 우물거리는 입술 언저리도 집어삼키고 싶을 만큼 귀엽고 섹시했다. 움찔해서는 의자 등받이로 수건을 치우자 이번엔 폭탄을 맞은 것처럼 사방으로 삐친 연인의 머리카락이 오싹오싹 성욕을 들쑤셨다.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섹스를 할 수 있는 시간도, 상황도 적당치 않았기 때문이다. 청소를 하러 2층으로 올라간 파출부도 신경이 쓰였고, 비행기 출발 시간도 타이트하게 조여왔다. 무엇보다도 오늘 하루는 그에게 휴가를 주기로 한 자신이었다. 한동안 갈등을 하다 결국 체념하고 식사에만 열중했다. 사랑스러운 몸뚱이로부터 시선을 돌려버린 것은 물론이었다.

“……차 끓일까? 차 마실래?”

수저를 내려놓는 자신을 향해 연인의 상냥한 물음이 건네졌다. 아직 채 반공기도 비우지 못한 연인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싶지도 않고 느긋하게 차를 마실 여유도 없을 것 같아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침실로 가서 슈트를 챙겨 입고, 노트북과 크로스백 하나뿐인 단출한 여장을 꾸려 다시 거실로 나왔다. 잠시 그친 것 같던 비는 미세한 가랑비로 변해 여전히 축축하게 대기를 적시고 있었다. 8시 30분을 조금 넘긴 시곗바늘을 확인하고, 아직 식탁에서 미적거리고 있는 연인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려는데 거실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말씀하십시오.”

“…….”

싸늘한 채근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몇 초쯤 더 뜸을 들였다. 장난 전화인가 싶어 수화기를 놓으려는 순간 귀에 익은 바리톤이 다가와 내장을 들쑤셨다.

“……김강원입니다. 지금 장 선생님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

“……이른 시간에 죄송합니다, 이사님. 실례지만 통화하고 싶군요.”

“…….”

고요했던 마음의 평화가 단숨에 박살이 나며 얼굴로 열기가 치솟았다. 목을 죄는 듯한 질투심과 초조한 불안감이 방금 먹어치운 음식들을 고스란히 역류시킬 것만 같았다.

“……무슨 볼일이십니까?”

사내와 다름없이 감정을 죽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느닷없이 침입해 들어온 흙발에 이가 갈릴 지경이었지만, 악착같이 참아내자고 거듭 스스로를 타일렀다.

“……여러 가지 의논드릴 일이 있어 금일 만나 뵈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일이란 어떤 여러 가지인가요?”

“……전시회 일도 그렇고…… 그림 판매와 초대전 건 때문입니다.”

“오늘 당장 만날 만큼 급해 보이진 않습니다만.”

“……어제 무리하시고 괜찮으신지 궁금하기도 해서요. 실례지만 장 선생님과 직접 통화하고 싶습니다만.”

개자식.

“그는 괜찮습니다. 잘 자고 새벽에 저와 사랑을 나누기까지 했으니까요.”

“…….”

숨 막히는 사내의 침묵에 통쾌한 기분이 든 것도 잠깐뿐이었다. 무엇이든 때려 부수고 싶은 저급하고 원시적인 욕구가 수화기를 든 오른손을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다.

“급한 사정은 아닌 것 같으니 이만 끊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오늘 어딜 가봐야 하거든요. 그럼 들어가십시오.”

“잠깐……! 이봐!!!”

뭐라고 외치는 소리를 묵살하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여전히 벌벌 떨리는 손을 뻗어 전화 코드를 뽑아버린 것은 물론이었다. 어리석은 짓이란 건 알고 있었다. 막는다고 막아질 인간도 아니고, 자신 역시 언제까지고 막을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은 아니었다. 오늘 당장, 자신이 안 보는 곳에서 사내가 그토록 음란하고 노골적인 욕망의 키스를 그에게 또다시 퍼부을 걸 상상만 해도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불쾌감과 분노로 치가 떨렸다. 알고 있었다. 아니, 기억하고 있었다. 질투의 독은 생각보다 강력하고 치명적인 것이었었다. 12년 전에도 자신은 이렇게 질투로 몸서리를 쳐가며 그에 대한 사랑을 자각하지 않았던가!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이니?”

커피 물을 내리고 있던 그가 불안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사납게 내팽개친 수화기 소리에다 다짜고짜 쥐어뜯긴 전화 코드로 좀 놀란 듯했다. 다행히 상대가 누구란 것까지는 눈치를 못 챈 것 같았다.

“이리 와.”

“……?”

“당장 이리 오지 못해?!!!”

사나운 고함 소리에 질겁한 연인이 부랴부랴 거실로 달려왔다. 창백해진 안색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격렬한 포옹으로 아픔을 느끼는지 희미한 신음을 흘리는 입술에 허겁지겁 자신의 것을 포갰다. 키스라기보다는 차라리 먹어치우는 듯한 흡입이었다. 얼마나 물고 빨아댔는지 알 수 없었다. 때려 부수고픈 원시의 욕구가 사라질 때까지 정신없이 연인을 삼켜대기만 했다. 연인의 허리가 활처럼 뒤로 휘었다. 자신의 상반신도 그에 따라 앞으로 크게 기울었다.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다리를 교차시켜 연인의 가랑이 사이로 밀어 넣었다. 나무뿌리처럼 얽힌 다리 탓에 결합은 더욱 깊어졌다. 충족된 욕망에 전신으로 찌릿찌릿한 기쁨의 전율이 흘렀다. 흐느끼는 듯한 연인의 헐떡거림에 마지못해 입술을 떼어냈다. 턱 끝으로 흥건하게 흘러내리는 연인의 타액을 주린 듯이 핥아 삼켰다. 여전히 미련이 남아, 파르르 떨고 있는 사랑스러운 입술을 거듭 거듭 깨물고 빨아들였다. ……좋아해…… 좋아해, 인환아, 좋아해…… 너무 좋아해…… 네가 좋아…… 좋아서 환장할 거 같아……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흐늘흐늘 늘어지는 몸을 껴안고 한참 동안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나운 격정이 차츰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포옹을 풀고 연인의 얼굴을 살폈다. 눈시울은 촉촉하게 젖어 있고, 뺨은 따뜻하게 상기돼 핑크빛을 띠고 있었다. 입술도 핏물을 삼킨 것마냥 새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어리바리한 눈동자엔 아직 약간의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겨드랑이 틈에 들어가 있던 자신의 양손을 떼어내자 연인의 몸은 조금 비틀거렸다.

“……가서 옷 갈아입으세요.”

“……?”

난폭한 키스의 흔적을 재빨리 지우고 차분하게 명령을 내렸다. 콩 볶는 듯한 자신의 변덕에 채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연인의 표정은 얼떨떨함 그 자체였다. 그게 또 몹시 귀여워서 다시 한 번 키스를 하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물론 두 번째의 키스는 키스만으로 끝낼 자신이 없었기에, 위는 지그시 입술을 깨문 채 솟구치는 욕구를 참아야만 했다.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5분 내로 출발해야 합니다. 옷만 갈아입으세요. 달리 준비할 건 없습니다.”

“……갑자기 비행기는 왜……. 어…… 어딜 가는데……?”

“윤열이 형을 만나러 갑니다. 가는 길에 잠깐 바람을 쏘이는 것도 좋겠죠.”

“……유…… 윤열 씨를……? 그……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단호한 표정을 만들자 미약한 저항은 금세 꼬리를 감추었다. 허둥거리며 침실로 걸어 들어가는 연인을 확인하고 바로 노트북을 펼쳐들었다. 연인 몫의 비행기 표를 한 장 더 예약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0시 비행기이니 바로 출발하면 그리 늦지는 않을 터였다.

분명 어리석은 짓이란 건 알고 있었다. 막는다고 막아질 인간도 아니고, 자신 역시 언제까지고 막을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연인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다. 어딘가 멀리 가면…… 다른 어느 누구도, 그 어떤 아픈 기억도 존재하지 않는…… 연인과 영원히 결합할 수 있는 낙원이 홀연 나타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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