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1991년 5월. 장인환(張仁歡)
펜션으로 돌아와 기절초풍을 하는 동료들을 무마시키고, 부랴부랴 행장을 꾸려 귀로에 오를 준비를 했다. 간발의 시간차를 두고 펜션에 도착한 기하 선배와 경자를 따로 불러 부탁의 말을 꺼내려다가, 근심이 들어앉은 선량한 시선들을 접하는 순간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대화는 단 한 마디도 필요 없었다. 오열을 그칠 동안, 기하 선배는 묵묵히 등을 두드려주었고. 경자는 중얼중얼 나지막한 욕을 해댔다. 그녀의 마초니, 게이니, 깜빡 속았다느니 하는 ‘어쩌고저쩌고’들에서도 등을 두드려주는 기하 선배의 손길처럼 따스한 이해심이 전해지고 있었다.
부상이 꽤 심각한 한세혁은 석주에 의해 포천 시내의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떠나기 직전 걸려온 전화로는 죽을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석주의 그럭저럭 밝은 목소리를 전해 들으며 다행인 걸까 불행인 걸까 한참을 고민했었다.
한편 불쌍했고, 한편으론 아직도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유들유들 비웃음을 흘리며 지난 24시간 동안 자신의 피를 말린 생각을 하면, 놈을 갈아 마셔도 시원치가 않다고 생각되었다. 결국 우려했던 최악의 사태까지 만들어버렸으니, 솔직히 연인이 놈을 죽여주었으면 하고 내심 전혀 바라지 않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나쁜 자식. 비열한 자식. 좋아했다고? 이반인 줄 처음부터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망설이지 않았을 거라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았었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섹스하고 싶었던 게 아니고?
입은 험하고 성격도 거칠지만, 그래도 정도(正道)는 아는 선배라고 생각했었다. 소양호에서 느닷없는 키스를 했을 때에도 그럴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이반인 줄 몰랐다가 사실을 알았으니, 그저 조금 집적거려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고. 그런데 협박을 해? 아웃팅이라는, 이반에게 있어 최악의 시나리오를 빌미로 협박을 해? 지도 이반이면서 어떻게 그런 저질스럽고 비열한 말을 내뱉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절교라고 생각했다. 아니, 절교였다. 앞으로 두 번 다신 놈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무릎을 꿇고 앞에서 싹싹 빈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해주지 말아야지. 아니, 아니. 연인이 자신을 용서해주면 또 생각은 해볼 거다. 자신도 용서를 받기엔 거의 절망적인 수준이니까, 나도 그 고통을 모르진 않거든. 좋아, 한발 양보해서 단서를 달지. 연인이 날 용서해주면 나도 네놈을 용서해주마. 그래, 너도 제물이란 얘기야. 또 하나의 희생 제물. 연인의 마음을 얻기 위한 보잘것없는 제물이지. 하, 별로 효용이 있을 것 같은 제물은 아니군.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늘 독하게 말수를 아끼고 늘 자신에게 서늘한 거리를 두는 연인이지만, 적어도 이제까지의 연인은 그나마 인간적인 어떤 것은 느껴졌었다. 독하게 심술을 부리다가도, 그럭저럭 남창의 의무를 떠올리며 상냥해지려고 노력을 보여주는 때도 꽤 많았었다. 그러나 포천에서 고척동으로 오는 이 두 시간 반의 여정은 지금까지 중 가장 최악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아니, 어쩜 앞으로도 거의 깨기 힘들 최악 중의 최악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형편없이 구겨진 얼굴이라거나, 연인의 여기저기 찢기고 멍든 상처들에 대한 자신의 근심이나 아픔 따윈 발붙일 여지조차 없는, 소름 끼치는 한기가 사방을 떠돌고 있었다. 두 시간 반 동안, 연인의 입술을 통해 토해진 음절은 단 하나도, 거짓말 안 보태고 정말 단 한 음절도 없었다. 숨조차 쉬지 않는 건가 의심이 생길 정도로 목을 죄는 침묵에, 그야말로 질식할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다. 찢기고 멍이 들어 조폭의 형상이 돼버린 아름답고 강인한 이목구비는 표정이라곤 일절 없어 마치 마네킹처럼, 혹은 가면처럼 차고 섬뜩해 보였다. 자세를 바꾼다거나 고개를 돌린다거나 하는 몸의 미동조차 없었다. 당연한 것처럼 자신에겐 단 한 번도 시선을 보내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석화였다. 시체였다. 그저 눈동자만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똑바로 정면만을 주시하고 있는, 수도 없이 명멸해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만 투명하게 반사하고 있는, 유리알처럼 명징한 눈이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형형한 동공이 멀고 먼 우주 어딘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비상하고 있었다.
짜증이 났다거나, 혹은 화난 정도가 아니었다. 그런 단순한 기분 문제로 현재의 연인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만 같았다. 아니, 그저 달라진 것뿐만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어딘가 멀리, 자신은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멀고 먼 얼음별로 연인 혼자 훌쩍 떠나버린 것만 같았다. 살을 에는 것만 같은 시린 고독감이 뼛속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함께 있으면서도 ‘함께’가 아니라니. 이럴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는데 그 이상으로 괴로울 절망이라니. 그 이상으로 무서운 절망이 있을 수도 있다니. 기가 막혔다. 이럴 수는 없는 거다. 당신이 진짜 신이라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내게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이상 얼마나 더 아파해야 하는가. 절망해야 하는가. 바닥에 떨어져야 하는가. 어떻게 이리 잔혹하고도 당신이 자비로운 신이라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랬다. 무섭고 무서워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두 시간 반이었다. 요량이 가지 않을 난생처음의 시커먼 절망감에 까무룩, 까무룩 의식이 나가버릴 것만 같은 두 시간 반이었다. ……틀렸어…… 다 틀렸어…… 틀리고 말았어……. 끔찍한 체념의 소리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넋을 유혹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맥이 쭉 빠진 육체를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기는 최악의 치명타였다. ……아무리 해도 넌 틀렸어…… 그는 돌아오지 않아…… 돌아오지 않을 거야…… 네가 그 어떤 희생 제물을 바쳐도 그는 절대 돌아오지 않아…… 다신 뒤돌아보지 않아…… 아니, 아니. 네가 아는 그는 이제 그 어디에도 없어…… 사라져버렸어…… 너도 잘 알잖니…….
눈에 익은 오류중학교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곗바늘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라 무사히 운전을 해 올 수 있었다는 건 거의 기적처럼만 느껴졌다. 포악하고 잔인무도하기 짝이 없는 신이지만 그나마 자비를 베푼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짓는다. 아니지. 어쩜 더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살려두는 것일 게다. 사고라도 나서 연인과 함께 영원으로 승천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익숙한 골목들을 굽이굽이 돌아, 연인의 집 앞 골목에 차를 세웠다. 꽤 오랜만에 와보는 연인의 집인데도 바로 어제 본 것처럼 눈에 선하고 애틋했다. 담 너머 창문을 슬쩍 살피니 불은 꺼져 있었다. 하긴, 밤 11시면 동생들은 이미 잠이 들었겠지. 연인을 닮아 하나같이 성실하고 반듯한 동생들. 연인만큼 애틋한 연인의 동생들. 사랑하는 동생들.
“……다…… 다…… 다 왔어, 위야…….”
차를 정차시키고서도 좀처럼 내릴 생각을 않는 연인에게 간신히 주의를 주었다. 포천을 뜬 이래 처음 시도해보는 대화였다. 막상 만용은 부려보지만, 먼 별나라를 떠돌고 있을 연인을 끌어내릴 능력이 자신에게 있을 턱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목소리는 떨리고, 말투도 잔뜩 주눅이 든 채 버벅거리고 말았다.
“……저…… 정말 병원 안 가봐도 되겠니? 정말 아픈 데 없어?”
“…….”
“……그…… 그래도 일단 자보고 어디 아파지면 전화해, 위야. 새벽이라도 괜찮으니까 꼭 해. 오 박사님 있는 병원 데려다줄게. 응?”
“…….”
“……저기…… 저…… 저…… 저…… 무슨 할 말 있는 거니……?”
“…….”
“……그…… 그…… 세혁 선배 일은…… 소…… 소문은 절대 걱정하지 않아도…….”
“…….”
뚫어져라 전방만을 응시하는 시선은 여전히 우주의 미아였다. 가 닿지도 않을 공허한 메아리를 벌벌 떨며 거듭 주워섬기는 기분은 참담했다. 점점 기어들어가던 자신의 목소리는 결국 연인의 완강한 블랙홀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다시금 지옥 같은 침묵 속에서 몇 분을 더 견딘 것 같다. 쳐다보기는커녕 여전히 숨조차 쉬기 버거운 연옥의 고통에 넋을 떨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이윽고, 팔꿈치까지 늘어져 있던 크로스백 끈을 어깨에 반듯하게 올려 메는 연인의 기척이 느껴졌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내리깔린 시선을 통해서 유려한 걸음걸이로 바닥에 내려서는 연인의 몸짓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럼 다음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미리 전화 드리지요.
헤어질 때마다 늘 전해지곤 하던 형식적인 작별 인사는커녕, 눈길 한번 보내지지 않았다.
보닛을 돌아 집 대문 쪽으로 걸어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조심조심 따라갔다. 얼굴은 상처투성이고, 포천의 재래 시장에서 되는대로 산 옷가지도 진흙과 피와 딸깃물들에 오염되어 더러웠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가슴 설레는 내 연인이었다. 영웅이었다. 하느님. 이렇게 아쉬울 거였으면 무섭더라도 자주자주 바라보면서 올라오는 건데.
10미터도 채 안 될 공간을 가로질러 연인은 순식간에 대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한 번만이라도 돌아다봐줬으면. 그럼 좀 덜 무서울 텐데. 덜 절망적일 텐데. 가망 없을 소원을 간절하게 비는 자신이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째쯤 같은 소원을 말하고 있을 때, 가방을 뒤져 열쇠를 꺼내 드는가 싶던 연인은 어느새 대문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당연히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결코 이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틀렸어…… 다 틀렸어…… 틀리고 말았어……. 끔찍한 체념의 소리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넋을 유혹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다시 대문 밖으로 나와주는 건 아닐까, 그래서 언제나처럼 형식적인 작별 인사라도 던져주는 건 아닐까,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가망 없을 기대를 되뇌는 자신이 있었다. 가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한 자신이 좀처럼 차를 출발시키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두 손으로 꼭 움켜쥔 핸들에 이마를 붙인 채 한참을 견뎠다. 바라보지 않으면, 절대 열리지 않을 대문을 잠시라도 보지 않으면, 그럼 기대를 접을 수 있겠지. 많이 힘들겠지만…… 조만간 차를 출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벨소리가 요란했다.
가위처럼 검붉은 수마 속을 떠돌던 터라, 시끄러운 전자음이 귀에 쟁쟁할 정도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며 몸서리를 치는 것으로 집요하고 악의적인 몽마(夢魔)를 겨우 몰아냈다. 다시 귓전을 때린 벨소리에 소스라쳐서 일어났다.
폭력적인 벨소리와는 영판 다른 잔잔한 빗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은근하게 귓전을 두드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침실 안은 여전히 새까만 어둠이었다.
연인을 집에 데려다주고 바로 아틀리에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샤워를 할 기력조차 없어, 엉금엉금 기다시피 파자마로 갈아입고 침대로 직행했었다. 기절하듯 잠에 빠졌지만 그리 숙면을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연이은 악몽들로 온몸의 근육들이 빳빳하게 긴장이 돼 있는데다, 걸치고 있는 파자마도 식은땀 범벅이었다. 도무지 울릴 리가 없는 현관 벨조차 악몽의 연속인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전등부터 켜고 마지못해 침실을 나갔다. 벽시계는 새벽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도 황망 지경이라 불청객에 화를 낸다거나 짜증을 일으킬 의지조차 모이지 않았다. 이젠 아예 벨에다 손을 대고라도 있는 듯, 파상적인 전자음의 공격이 끝도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기…… 기다려요! ……누구세요?!”
인터폰으로 걸어갈 틈도 주지 않는 불청객의 조금함에 혀를 차며 비명처럼 대꾸를 날렸다. 끈질기게 울려대던 벨소리가 숨이라도 멈춘 것처럼 뚝 하니 끊어졌다. 인터폰 쪽으로 향하던 자신의 발걸음은, 그러나 현관 자물쇠의 비밀 번호를 빠른 속도로 눌러대는 미세한 소음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찰칵.
비스듬히 열리는 현관문이 슬로 비디오처럼 느리게 시야를 파고들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한 전조로 심장이 요란스레 뛰기 시작했다. 강도나 도둑이라면 그렇게 요란스레 벨을 울릴 리가 없겠지. 질겁해 경기를 일으키고 있는 심장을 위로하듯, 막연한 상념이 설핏 뇌리를 스쳐갔다.
반쯤 열린 문틈을 비집고 성큼 현관 안쪽으로 들어선 얼굴을 보았을 때, 자신은 그리 놀란 것 같진 않다.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 불길한 전조는, 불안과, 공포와, 또는 애절한 연심이 공존하는 심장의 두근거림은, 연인이 아니고선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무치게 그리우면서도 또한 몸서리쳐지게 고통스러운 존재. 바로 ‘내 영웅’이 아니라면 자신은 이토록 떨지 않는다. 이토록 기뻐 날뛰지도 않는다.
놀란 나머지 눈을 휘둥그렇게 뜬 것은, 아마 연인을 자세히 살필 수 있게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그 몇 초쯤 후였던 것 같다. 유리알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새까만 동공은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포천에서 서울로의 두 시간 반을 겁에 질린 채 벌벌 떨며 훔쳐보았던 ‘우주의 미아’ 그것이었으므로. 자신을 새삼 전율시킨 것은, 불면의 흔적을 여실히 드러내는 저 시뻘건 눈자위였다. 빨갛게 핏발이 선 흰자위는 부리부리한 심연의 동공과 어우러져 숨이 턱하고 막힐 만큼 자신을 두렵게 했다. 한 술 더 떠, 물에 빠진 생쥐마냥 비에 흠뻑 젖은 부랑자의 몰골은 공포를 넘어 거의 패닉에 가까울 충격이었다. 가닥가닥 뭉친 채 이마에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타고서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룩덜룩한 피멍과 부기로 사나운 조폭의 형상을 하고 있는 강렬한 이목구비는 거의 잿빛이었다. 파랗게 질린 채 핏기를 잃고 있는 입술도 짓이겨진 상처 때문인지 불길하기가 호러 영화를 방불케 했다. 시퍼런 한기가 빗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무시무시한 얼굴이었다. 연고를 바른다든가 하는 상처 치료의 흔적은커녕 필경 샤워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얼굴도, 목덜미도, 팔뚝도, 드러난 피부마다 온통 번들거리는 빗물투성이였다. 여전히 진흙과 피와 딸기물 범벅이던 더러운 옷가지들도 비에 젖으니 마치 몇 년 묵은 시체의 수의를 연상시킬 만큼 불길하고 음침한 기운을 풍겼다. 흰색의 면 티와 카멜색 면바지가 도대체 본래 어느 게 흰색이고 어느 게 카멜색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두리뭉실 거무튀튀한 넝마 조각과 다름없었다. 빗속에서 도대체 몇 시간을 헤맨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옷은 물론, 완전히 물에 푹 빠진 것만 같은 낡은 운동화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며 옷이며 운동화에 이르기까지, 연인의 전신에서 후둑후둑 듣고 있는 눈물 같은 빗방울들로, 현관 바닥은 폭풍이라도 맞은 것마냥 순식간에 흠씬 젖어들고 있었다.
처음으로 연인을 거부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연인을 만난 이래, 이렇게까지 연인이 두려운 적은 없었으리라. 느닷없는 기적 같은 방문에 대한 기쁨과 환희는 그야말로 잠시였다. 늘 미움받을까, 혹은 무슨 실수라도 보태 연인의 냉혹한 거절에 직면할까, 재회한 이래 연인을 두려워하지 않은 순간은 아마 단 한순간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연인과 함께’라는 기쁨과는 별개로 공존하는 또 다른 서글픈 자의식이었지만, 그러나 그 어느 때라도 연인을 거부하고플 만큼 자의식이 기쁨을 누른 적은 없었다. 없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 이 순간, 인환은 연인을 몰아내고 문을 걸어 잠그고픈 발작적인 충동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무나 끔찍한 공포와 불안감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저 차디찬 유리알 같은 시선으로 형형하게 자신을 굽어보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연인일 리가 없다. 연인이라면 이렇게까지 끔찍할 까닭이 없다. 밀어내고플 리가 없다. 연인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연인이 아닌 듯한 기묘한 위화감은 포천을 출발한 이래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텐데……. 무슨 말이든 해서 연인을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그러나 공포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몸은 말은커녕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 연인을 밀어낸다든가, 아니면 수건이라도 건네며 부드럽게 달랜다든가 하는 자연스러운 몸짓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도 연인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게 아닐까, 극심한 착란이 일었다.
미동도 않고 있던 연인의 몸이 천천히 움직임을 시작하는 게 보였다. 푹 젖어 잘 벗겨지지 않는 운동화를 벗기기 위해 상체를 약간 앞으로 굽히고 있었다. 형형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여전히 옴짝달싹못하게 자신의 시선을 틀어쥐고 있었다. 아름다운 피아노 신동의 손이 운동화 뒤축을 쭉 밀어낸다. 손가락 마디들은 몇 시간 전의 폭력 사건을 증거 하듯 얼굴과 마찬가지로 붉고 푸르딩딩한 상처 자국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른쪽과 왼쪽의 신발이 번갈아 바닥에 떨어졌다. 단단한 흡착력 탓에 운동화가 벗겨지며 흠뻑 젖은 잿빛 면양말도 발꿈치 중간까지 허물처럼 벗겨지고 있었다. 한 발을 앞으로 딛었다가 좀 불편한 감각을 느낀 모양이었다. 다시 멈춰 선 연인은 양말마저 완전히 벗어 던지고 있었다. 물에 불어 허옇게 변한 피부 탓인지, 자신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저 군함처럼 커다란 발에도 설핏 혐오감이 느껴졌다. 마치 익사자의 그것이 연상된 때문이었다.
바닥을 딛는 발걸음은 느렸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그것처럼 느리고, 단호하고, 비정했다.
어쩌면 그대로 서 있어야 했을지 모른다. 설령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대담하게 연인과 마주 섰어야만. 그랬다면 연인 안의 야수도 그렇게까지 사납게 날뛰진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본능을 이길 의지란 겁에 질린 사냥감 따위에게 남아 있을 턱이 없다. 의지를 세워보기도 전에, 아니, 마음속에 의지를 떠올려보기도 전에, 질겁한 본능은 이미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유리알 같은 동공이 번쩍 하고 빛을 발하는 게 보였다. 표정이 없던 그것에 순간적으로 깃든 것은 공격성이었다. 지배하고 통제하고 정복하는 데만 혈안이 돼 있는 수컷 특유의 포악한 야수성. 겁에 질린 사냥감이 내비치는 도주의 기색을 맹수가 못 알아챌 리 없었다. 똬리처럼 엉켜든 시선 속에서 서로의 생각은 속속들이 서로에게 읽히고 있었다.
느릿한 접근이 순간적인 도약으로 변한 것과 자신이 뒤돌아서서 뛰기 시작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침실이거나 손님용 침실, 그리고 욕실 이외에 도망칠 곳이라곤 달리 없었다. 일단 어디든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면…… 잠그면……. 소파를 타 넘고, 어지럽게 늘어진 잡동사니들에 발을 채인 끝에 잡힌 것은 욕실 손잡이였다. 자신이 서 있던 지점에선 그곳이 가장 가까웠으니 역시 본능의 승리라 해야 옳았다. 온몸의 핏줄이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게 요동을 치는 심장을 아득하게 자각하며 안으로 힘껏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당연히 따라 들어와야 할 상반신은 뒤로 크게 휘청거리더니 오히려 역방향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머리채가 휘어잡힌 채 뒤로 끌려가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머리카락이 잡아 뜯기는 극심한 통증에 눈물이 찔끔 쏟았다. 경악에 빠진 심장의 통증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아아 하고 어디선가 비참한 절규가 흘러나왔다. 사로잡힌 짐승의 절망에 찬 포효였다.
허리를 휘감는 강력한 팔뚝 힘이 느껴졌다. 머리채와 허리를 단단히 붙잡힌 것만으로 전신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좁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패닉에 빠진 몸은 그저 망연자실 부들부들 떨며 나무토막처럼 굳어들었다.
비릿한 물비린내와 함께 축축하고 선뜩한 감촉이 전신에 달라붙었다. 화덕처럼 뜨거운 야수의 입김이 뒷목덜미 근처에서 격렬하게 불을 뿜었다. 등을 짓누르고 있는 딱딱한 근육 덩어리가 감촉되었다. 연인의 가슴팍이었다. 머리채를 틀어쥐고 있던 손가락이 가슴 쪽으로 내려가며 힘을 가하자, 자신의 상반신은 빈틈없이 연인의 그것과 달라붙게 되었다. 그대로 질질 침실로 끌려갔다.
달라붙은 그대로 침대에 쓰러진 몸뚱이는 잠시 엎치락뒤치락 의미 없을 몸부림을 해댄 것 같다. 연인의 난폭한 몸짓에 본능적으로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고, 그에 따른 잔인한 응징이 이어진 때문이었다. 엎드린 몸 위로 연인의 커다란 손과 발이 가차 없이 찍어 눌러왔다. 일주일 전에 탈골된 어깨뼈에 압박이 가해지는 것으로 미미한 저항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고통에 찬 신음은 침대 시트에 얼굴이 짓눌린 탓에 웅웅거리는 괴성으로 들렸다.
벌벌 떠는 외엔 미동도 않고 있는 몸 위로 축축한 손바닥이 확인하듯 천천히 쓸고 지나갔다. 도살 직전에 혀로 핥아가며 맛을 음미하는 야수의 그것 같았다. 등줄기를 쓸고, 허리를 어루만지고,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부드러운 실크 파자마는, 그 몸서리쳐지는 감촉에 전혀 방패가 되지 못했다. 허벅지 안쪽 예민한 곳을 훑는 음란함에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바짝 자지가 곤두섰다. 무릎과 종아리와 발뒤꿈치도 빠짐없이 손바닥으로 핥아졌다. 다른 한 손은 머리카락 틈으로 파고 들어와 살피는 듯 두피를 쓸고 있었다. 마치 처음 먹어보는 사냥감을 대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맛이 있을지 없을지, 육질은 어떻고, 뼈는 또 씹어 먹을 수 있을 만큼 연한지, 피 맛은 달콤할지, 혹은 앞으로 계속 잡아먹어도 될 만큼 영양가가 풍부한 것일지 아닐지, 야수는 가릉가릉 목을 울려가며 신중하게 품평을 거듭하고 있었다.
절망감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인이 아니었다. 연인일 리가 없었다. 자신의 몸을 원한다면 연인은 언제라도 자유롭게 가질 수 있었다. 이미 헤프게 허락된 몸뚱이였다. 싸구려였다. 새삼 이렇게 낯선 물건 대하듯 강간을 하지 않아도 자신은 언제 어느 때든 연인의 것이었다. 그런데 왜. 왜. 어째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목덜미에 이빨을 들이댄 채 입맛을 다시는 끔찍한 악몽의 순간이 지나고, 야수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수의 몸에서 빗물이 옮아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든 파자마가 난폭한 발톱 아래 찢어발겨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사냥감은 다시금 손바닥으로 핥아지는 또 한 번의 품평을 받았다. 재심사는 처음보다 그리 길지 않았다.
바지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선뜩했다. 자신의 양쪽 허벅지를 틀어쥔 손이 활짝 몸을 열고 있었다. 윤활제도, 세심한 배려도 없었다. 누더기처럼 더럽혀진 채, 사방에 축축한 물기를 전염시키고 있는 옷을 벗을 여유도 못 챙길 만큼 야수는 몹시 허둥거렸다. 욕구가 절박했으니 배려심 따위가 발붙일 여지는 없었으리라. 맙소사, 배려심이라니. 그저 잡아먹기에 급급한 야수에 언감생심 배려심 따위를 바라다니. 아프지 않게 잡아먹어주세요. 엽기 잔혹 동화다. 헨젤과 그레텔이다.
단단하게 치솟은 거대한 흉기가 누더기 틈을 헤치고 나와 공격할 곳을 쏘아보고 있었다. 무릎걸음으로 벌어진 다리 사이에 중심을 잡는 야수의 움직임에 따라, 흉기는 전후좌우로 불끈거리며 자신의 회음부를 사납게 쳐댔다. 양쪽 골반 뼈가 들리는가 싶더니 뜨겁고 단단한 감촉이 입구에 느껴졌다. 마음의 준비를 할 틈은 물론 주어지지 않았다. 공격은 그렇게 느닷없고 단호했다.
“……흐…… 흐앗!!!!!!”
하루 전에도 이미 걸레처럼 너덜너덜 범해진 몸뚱이였지만, 갑작스러운 난폭한 진입엔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내벽이 찢기는 고통이 척추를 따라 전신 마디마디까지 퍼져갔다. 손톱이 부러져라 침대 시트를 움켜쥔 채 고통을 견뎠다. 단숨에 뿌리까지 박혀든 야수의 물건은 뻑뻑한 조임에 고통을 느끼는 듯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불도저처럼 밀어붙여왔다. 인간다운 동정심이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이 새까매졌다. 머릿속에 먹먹한 안개가 끼더니 커튼이 쳐지듯 이내 생각이 단절됐다. 그저 본능적인 감각만이 살아남아 야수의 움직임과 필사적으로 리듬을 맞추고 있었다.
깨물린 입술 끝에서 조금씩 피가 스미는 게 느껴졌다. 결합 부위로 뜨뜻하게 흘러내리는 액체와 별반 다르지 않을 선명한 붉은색이리라. 움직이지 못하게끔 골반 뼈가 꽉 틀어잡힌 터라, 고통을 줄이기 위한 어떤 시도도 전혀 불가능했다. 그저 야수가 조금이라도 이성을 회복해, 자신의 성감대를 건드려주기만을 비는 수밖에 없었다. 쾌락은 어느 정도 통증을 줄여줄 것이다. 물건처럼 강간을 당하고 있다는 이 비참한 절망을 희석시켜줄 것이다.
몸이 두 쪽으로 갈리는 듯한 영원의 고통 끝에, 마침내 내벽 어느 한 지점이 팟 하고 튕기며 찌르르한 전율이 흘렀다. 짐승의 쾌락을 깨우는 구원의 낙뢰였다. 결합의 순간, 힘을 잃고 축 늘어진 채 볼썽사납게 흔들리던 자지가, 순간 불끈 하고 각도를 세웠다. ……아, 다행이다…….
안도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폭주하는 야수의 리듬을 따라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엉덩이를 흔들던 헤픈 짐승은, 겨우겨우 도망칠 구실을 붙잡게 되었다. 퍽, 퍽, 퍽, 연달아 전립선이 찔러졌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사지가 쭉 펴졌다. 침대 시트를 부여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더니 지지대를 잃은 상반신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대답처럼 야수의 손아귀 하나가 뻗어와 가슴팍을 받쳐 든다. 상반신은 다시금 야수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가게 되었다. 꽉 맞물린 요철처럼. 야수가 뿜어내는 열기에 의해 차갑고 축축한 이질감만을 주던 야수의 옷가지는 어느새 자궁 속 양수처럼 뜨뜻미지근한 감촉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물비린내와 땀내와 야수의 체취가 어우러지니, 그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야릇한 열락을 주었다. 자신도 모르게 야수의 몸과 결합된 등을 비비며 황홀한 쾌락을 탐했다. 창녀처럼 끙끙대며 버르적거리니 야수도 몹시 자극이 되는 모양이었다. 짐승 같은 교성을 고래고래 질러대며 무서운 속도로 내벽을 찔러왔다. 여전히 내벽이 갈리는 무시무시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너절하게 찢어진 입구에선 여전히 줄줄이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 이상의 몸서리쳐지는 쾌락에 넋이 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활처럼 허리를 휘며 용두질을 쳐댔다. 거대한 육봉이 무서운 속도로 들락거리고 있는 내벽을 움찔움찔 조이고 풀었다. 들어오면 꽉 붙들고, 나가면 아쉬운 듯 살짝 깨물어 야수를 광기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발정기의 암캐처럼 게걸스레 수컷의 자지를 빨아들였다. 깊이깊이, 더 이상 뚫고 들어올 수 없는 지점까지 빨아들이고 또 빨아들였다. 나무뿌리처럼 자신을 휘감고 있는 야수의 강인한 팔뚝을 황홀하게 어루만지고, 화덕처럼 열기를 뿜어내며 뒷덜미와 어깨를 물어뜯는 야수의 이빨에 자지러졌다. 뒤로 활짝 고개를 휘어 허겁지겁 내려오는 입술과 조우했다. 피 맛이 느껴지는 야수의 도톰하고 섹시한 아랫입술을 깨물고, 잇몸을 훑고, 마침내 한 치의 틈도 없이 달라붙어 맹렬하게 서로의 숨길을 빨았다. ……아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홍수가 난 모양으로 흘러내리고 또 흘러내렸다. 입안을 헤집는 야수의 혀가 좋아서 견딜 수가 없다. 내장 깊숙이 들어와 박히는 야수의 몸이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다. 아아, 그래. 비로소 도망칠 수 있었다. 비로소 구원이 왔다.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절망스럽지 않았다. 강간이 아니었다. 더 이상 강간이 아니었다. 아아, 아무렴. 자신은 이렇게나 헤픈 호모 새끼다. 어차피 성욕 배출구 아니었나. 언제든 이용하라고, 꼴리면 부디 이용해달라고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지 않았나. 새삼 강간이라니 지나가던 개도 웃을 얘기였다. 아무렴.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은, 다만 앙금처럼 남아 있는 의심의 잔재일 뿐이었다. 지옥에 길이 들어버린 어느 배신자의 익숙한 체념일 뿐이었다. 물건처럼, 휴지처럼 함부로 취급되고 있다고. 어차피 헤픈 몸이니까, 강간을 하든, 혹은 화간을 하든 무슨 상관이냐. 너 따위 아무것도 아니지. 그저 언제든 헤프게 다리를 벌리는 성욕 배출구가 아니더냐. 마치 야수가 그리 비웃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불길한 의심. 지옥의 절망. 배신자에게 떨어지는 단호한 처벌. 베드로야,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오르가슴이 왔다.
야수의 공격처럼 그렇게 느닷없고 단호하게.
비참하게 절규하며, 울부짖으며, 극치의 쾌락을 향해 굴러떨어졌다.
강간은 절대 아니었다.
아니,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