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 1991년 5월. 문위(文偉) (45/129)

26. 1991년 5월. 문위(文偉)

날은 완전히 밝아 있었다. 

창문 밖으로부터 전해지는 차분한 빗소리는 여전했다.

더 이상 토해질 정액이라곤 없는 모양인지 그의 아랫배에 비벼지고 있는 페니스 끝에선 그저 이슬처럼 말간 액체만이 질금질금 비어져 나왔다. 구원인지 저주인지, 온몸이 꽈배기처럼 배배 뒤틀리는 극치의 오르가슴은 여전했다. 움찔움찔 허리를 경련시키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말끔히 털어낸 후 기진맥진 무너져 내렸다.

자신의 아래,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는 그리운 몸은 여전히 따뜻하고 달콤했다. 온통 자신의 체액으로 미끈거리는 몸을 꼭 끌어안은 채 멍하니 쓰다듬으며 여파를 견뎠다. 호흡이 정상을 찾아갈수록 다시금 안고 싶은 욕구가 일었지만 한계일 것이다. 아마도 이제쯤 정신을 수습하고 제대로 된 사고를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짐승 같은 광란을 해대고도 여전히 버벅대며 과거에 미련을 둔다면, 이제까지의 자신처럼 비겁하다 못해 철면피한 겁쟁이에 머물게 된다. 해답은 벌건 대낮처럼 선명하고 밝았다.

해답? 방기된 의식이 잠깐 버그를 일으키며 반문한다. 무슨 해답이라는 걸까? 그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아니면 그를 욕망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실존적 해답 말인가? 아니면 이 사랑의 상태를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저주하며 몸부림쳐야 할지에 대한 전략적 해답? 아마 그 어느 쪽도 정확한 대답은 아닌 것 같지만 그 이상 버그 난 의식을 쫓아가진 않는다. 어찌 됐건 자신은 여전히 아프고, 저항하고 있고, 또한 광란을 한다. 지금은 이 ‘지옥’을 견디는 것만도 충분히 버겁다.

흥분이 가라앉고 보니 고통에 대한 자각은 배로 증폭하는 느낌이다. 천국 같은 위로가 품 안에 있다는 걸 알지만 한계일 것이다. 한순간이나마 고통을 잊어보기 위해 섹스로 도망치는 짓은 이제 더 이상 무의미하리라. 품 안의 구원을 한참 동안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빨아먹을 듯한 키스를 마냥 되풀이했다.

처음 단 한 번의 결합으로 혼절해버린 뒤, 휘몰아치는 짐승의 광란에도 불구하고 전혀 깨어날 생각을 안 하던 몸은, 그 모든 부드러운 자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동도 없다. 죽은 건가……? 하고 의심이 갈 정도다.

고통에 겨운 넋은 그러나 그닥 공포에 질리진 않는다. 이 몸뚱이가 죽는다면 자신 역시 산목숨은 아니리라는 것을 이젠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이 이렇게 살아 있는 한 이 몸뚱이는 살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심장이 이렇게 생생한 고통을 호소하며 펌프질을 거듭하는 한, 이 소중한 몸뚱이 역시 언제까지나 자신에게 따스한 체온을 전해줄 것이다. 뭔가 억지 논리 같지만 역시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조금씩 발기를 시작한 페니스가 어느새 내 것의 아랫배를 쿡쿡 쑤시고 있다. 더 이상 할 생각은 없다. 마지못해 내 것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기진맥진한 몸은, 비릿한 구토감과 함께 심한 어지럼증을 불러일으킨다. 침대 가에 앉아 한참 동안 호흡을 골라본다. 뺑뺑이처럼 빙글빙글 돌던 방 안이 느릿느릿 멈추고, 역한 토기도 그럭저럭 참을 만해졌다.

반쯤은 말라 꾸덕꾸덕한 습기를 머금고 있는 티셔츠와 바지들을 천천히 주워 입었다. 옷에선 쉰 냄새와 비슷한 역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온갖 오물로 더럽혀진 모양새는 더 가관이었다. 별로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다.

방을 나가기 전, 잠시 내 것에게로 시선을 가져가보았다. 자신이 팽개친 모양새 그대로 침대 위에 널브러진 창백한 나신이 트럭처럼 재빠르게 눈동자 속으로 돌진한다. 죽은 건가……? 싶게 생명력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 아프다. 마른 몸에 눈물이 난다. 잔혹한 능욕의 현장을 증거하듯, 울긋불긋 핏자국이 낭자한 시트는 구역질이 올라올 만큼 끔찍하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거다. 별로 걱정이 되진 않는다. 연민 또한 어림없다. 소중한 연인에게 연민을 보낼 만큼 자신은 위선자가 아니다. 연애란 전쟁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연인은 적이다. 이제 알겠다. 적에게 연민을 품는 자가 혹 있단 말인가? 진담이라면 등신이고, 농담이라면 위선자다.

멍하니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히피 스타일로 커팅 돼 움직일 때마다 찰랑찰랑 귀엽게 바람을 일으키던 머리카락이다. 지금은 온통 자신의 체액으로 더럽혀진 채, 가닥가닥 떡이 돼 붙어 있다. 빗질하듯 몇 번을 훑고, 마지막으로 이마 뒤로 가지런히 넘겨주었다. 손가락으로 콧망울을 조몰락거리고, 입술도 한 번 쓱 어루만져보았다. 자신이 수십 번도 더 빨아댄 입술은 약간 벌어진 채 도톰하니 부어 있다. 그렇게 어루만지다 보니 다시금 아랫도리가 발기했다. 곤란하군. 마지못해 손을 떼고 몸을 돌려세웠다. 생살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독한 아픔이 엄습한다. 이별의 통증이다. 별로 못 참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지독한 통증은 단 한순간도 자신을 놔주지 않고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뒷짐으로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주방을 지나치며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먹고 싶은 마음은 별로 안 든다.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 앞으로 왔다. 물기가 여전한 운동화에 간신히 발을 쑤셔 넣었다. 현관문을 열고, 다시 닫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수위에게 기계적인 목례를 하고 빌라를 벗어났다.

아침이다. 아침인 것 같은데 천지가 어둑어둑 불길한 기분이 든다. 뿌연 운무를 만들어내며 빗줄기가 수직으로 떨어진다. 바람이 없어 그저 조용하게 수직으로만 떨어진다. 주룩주룩, 거리 곳곳에 부대끼며 울리는 소리도 차분하다. 얼굴이며 팔이며, 드러난 피부마다 때려대는 빗줄기의 감촉이 시원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산을 빌렸어야 했나 잠깐 후회하다 말아버렸다. 꾸덕꾸덕 말라가던 옷은 금세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무심코 주머니를 뒤졌지만 돈이 나올 리 없다. 올 때에도 돈을 챙기는 것을 잊어 세 시간이나 걷지 않았나. 바지 뒷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구깃구깃 습기를 먹어 형태가 뭉개진 폴라로이드 사진 두 장. 어젯밤에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문득 참을 수 없어져서 집을 뛰쳐나오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이다. 두 손으로 소중하게 부여잡고 한참을 내려다본다. 이미 뭉개진 형태에 다시 빗물이 떨어져 사진 속의 그는 그저 시커먼 얼룩 덩어리로 보인다. 하지만 거듭거듭 뚫어져라 들여다보면 다시금 천천히 형태가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머릿속에서, 기억 속에서 살아나는 것일 테지만.

문득 시선들이 느껴져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정류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며 인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신을 굽어보고 있다. 미친놈을 보는 시선이다. 그러고 보니, 그들 모두의 손엔 형형색색의 우산들이 하나씩 쥐여 있었다. 고작 우산 하나 안 들었다고 미친놈 취급을 하는 세상이 기가 막힌다. 6∼7천 원짜리 우산 하나 없으면 졸지에 정신병원에 갇힐 수도 있겠구나. 놀라운 자본주의의 폭거여.

사진을 다시 바지 뒷주머니에 소중하게 집어넣고 걷기 시작했다. 대로변을 지나고, 사거리를 횡단하고, 상가와 시장들을 지나갔다. 학교, 파출소, 호텔, 병원들도 지나갔다. 공원도 지나가고, 백화점도 지나갔다. 철길도 횡단하고, 지하철역도 몇 개는 지나쳤다. 비는 그사이에도 쉼 없이 쏟아져 내렸다.

다리에 피곤이 느껴졌다. 조금씩 걸음이 느려지고 있는 것 같다. 느려진들 별로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리 서둘러야 할 일이 무얼까 생각해보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혜윤이와 휘가 좀 걱정을 할 거고, 학교 수업에도 지장을 받을 거다. 늦으면 그냥 제끼자고 생각도 한다. 늦으면, 이라니.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주제에. 지금쯤 9시 교양 국어 수업이 시작됐겠지.

“……저…….”

옆에서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보통보다는 제법 빠를 자신의 보폭에 종종거리며 따라오고 있던 여자를 언젠가부터 눈치채고 있었기에 별로 놀라지는 않는다. 걸음을 멈추고 여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고급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옷차림을 한 20대 후반의 여자다. 얼굴도 꽤나 잘났다. 여자는 들고 있던 우산을 한껏 위로 치켜든 채 자신의 머리에 씌워주고 있었다. 그 덕분에 자신을 때리던 빗줄기가 여자로 목표를 바꿔 삼곤 좋아라, 떨어진다. 여자의 세련된 보랏빛 블라우스는 순식간에 습기를 잔뜩 머금어 검푸른 색으로 변해갔다.

“……저기…… 아까부터 따라왔어요.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요.”

“…….”

“……많이 다치신 건가요? 어디 목적한 곳이 있어요?”

“…….”

“……웬만하면 차를 타고 가시죠. 저, 차 있는데…… 제가, 가시는 곳까지 모셔다드릴까요?”

“…….”

“……혹시 병원에라도…….”

“……아파…….”

“……?”

“……아파…….”

“……저……?”

“……여기가 아파…….”

“?!!!”

“……너무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아…….”

“……?!!! 저…… 시…… 심장이요?……! 심장병이세요?!!!”

“……아니, 마음이 아파…… 실연했거든…….”

“!!!”

“……누가 좀…… 아프지 않게 해주면 좋겠는데…….”

“…….”

“……미칠 것 같아…… 너무 아파…… 지독해…… 너무해…… 지독해…….”

“?!!!!!!”

“……버릴 거야…… 버려야 돼…… 그렇지……? 그렇겠지……?”

“……이…… 이봐요…… 그…… 런…….”

“……어떻게 그래…… 난 혜윤이도 있고…… 휘도 있고…… 어떻게 그래…… 그럴 수 없어…… 절대 못 해…… 안 돼…….”

“우…… 울지 마세요……! 아, 이런 참……! 세상에…….”

“……버릴 거야…… 버려야 돼…… 그래야 하는데…….”

“……우…… 울지 마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나…… 남자가……!”

“……너무 아파…… 아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누가 좀…… 누군가…….”

“…….”

“……나랑 섹스 할래요?”

“?!!!!!!”

“……나 섹스 잘해……. 틀림없이 당신 마음에 들 거야. 내 몸 탐나지 않으십니까?”

“……이…… 이봐요!!! 사…… 사람을 어떻게 보고!!!”

“허세 부리지 마요. 나 탐나죠? 탐나서 따라온 거잖아.”

“…….”

“섹스 해요. 내겐 위로가 필요하고 당신에겐 쾌락이 필요하지. 이 이상 완벽한 거래가 어딨어?”

“…….”

“싫은가? 그래요?”

“…….”

“……싫으면 말고. 당신 갈 길로나 가라구.”

“…….”

경악에 찬 여자를 내버려두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고통은 어떻게 해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자신을 따라다니겠지. 그것은 예감이었다. 아니, 전조였다.

“……이…… 이봐요!!! 그런 소릴 그렇게 울면서 하는 게 어딨어요?!!! 꼭 진짜 같잖아!!! 진짜 아픈 것 같잖아!!!”

찰팍, 찰팍, 찰팍. 빗물을 차며 여자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따라잡은 여자는 가로막듯이 전방에 버티고 서서 다시금 우산을 기울여주고 있었다.

“……가엾어라…… 정말 실연한 모양이네…….”

“…….”

“……울지 마요. 정말 슬프게도 우는군요, 당신…….”

“…….”

“……울지 말라니까. 이쪽도 우울해져요. 가슴이 저리다구요, 당신 눈물.”

“…….”

“……저도 실연한 적 있어요. 3년 반 동안 사귄 남자친구한테. 정말 죽을 것처럼 아프더라구요.”

“…….”

“……설마 섹스 하면서도 우는 건 아니죠?”

“…….”

“……이리 와요, 미남 씨. 우선 비부터 피하고 보자구요.”

“…….”

여자가 팔을 잡아끌고 있었다. 거절하지 않았다. 천천히 보폭을 줄여 여자와 보조를 맞춰 걸었다. 한참 동안 걷고, 멈추며 울고, 그러다 다시 또 한참을 걸어갔다. 여정의 끝엔 여자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다리를 혹사시키는 대신 여자의 차로 방향을 틀어 다시 어딘가로 떠났다. 차창 밖으로 눈에 익은 풍경들이 보였지만, 정확히 어딘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가 차를 세운 곳은 한적한 변두리 러브호텔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층인가를 올라가고, 객실에 들어가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여자는 무슨 모성 본능이라도 발동이 됐는지, 욕실까지 따라 들어와 자신의 몸을 씻겨주었다. 아마도 섹스 전의 전희였겠지만, 전희라 보기엔 여자의 손길은 지나치게 조용하고 건조했다. 울음이 멈추지 않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연신 혀를 찼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남자는 처음 봐요 하고 여자가 쓸쓸하게 웃었다.

이렇게 얼룩덜룩 사방이 상처투성이인데도 정말 너무 아름다워요.

하지만 내 남자는 안 되겠지요.

자신의 눈물에 여자도 우울해진다고 하더니 과장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자는 우울하게, 아주 우울한 기색으로 자신의 몸에 비누칠을 해주고 있었다.

욕실을 나와, 침대 위에서 여자와 뒤엉킨 채 꽤 오랜 전희를 했다. 여자는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열심히 자신의 페니스를 주물럭거렸지만, 우습게도 물건은 발기의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30분을 넘게 낑낑거리며 어떻게든 불을 붙여보려던 암수 한 쌍은 차츰차츰 실망하고 이내 쓸쓸해져갔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지.

헐떡이듯 숨을 고르며 여자가 자신을 위로했다. 시트를 가슴까지 끌어당겨 덮은 여자의 몸짓에서 여자의 부끄러움과 고독을 느꼈다. 자신의 고통을 느꼈다.

아무렴. 위로받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위로 따위로 사라질 고통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고통은 어떻게 해도 멈추지 않는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자신을 따라다닐 것이다. 그것은 예감이었다. 아니, 전조였다.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후 옷을 주워 입었다. 피와 진흙과 그리고 딸기들은 오래도록 내려앉은 빗줄기에 어느새 그 흔적들을 지우고 있었다. 옷에 남아 마지막까지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그저 묵직한 습기뿐이었다.

누군지 너무 부럽다.

침대 위의 여자가 중얼거렸다.

정말 사랑하나 봐요. 나도 누군가에게서 그렇게 사랑받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역시 신파다. 여자들은 너무나 로맨스에 집착을 한다. 사랑 때문에 죽다니. 고작 사랑 때문에.

죽을 것같이 괴로워도 죽지는 않는다. 않을 거다. 미칠 것같이 아파도 미치지는 않는다. 않을 거다. 자신에겐 혜윤이도 있고, 휘도 있다. 자신의 목숨은 자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혜윤이의 것이고, 휘의 것이고, 윤열이 형의 것이고, 성준이의 것이다. 강이 형의 것이고, 엄마의 것이고, 또한 아버지의 것이다. 함부로 죽을 수 없다. 미칠 수 없다.

쓸쓸한 여자를 모텔에 두고 다시 길을 떠났다.

비는 여전히 조용조용 거리에 스미고 있었다. 자신의 어깨에, 가슴팍에, 머리카락에, 얼굴에, 그리고 심장에.

여자를 만나는 바람에 목적지는 더 멀어진 모양이었다. 도통 어디가 어딘지 알 길이 없었다. 미아가 된 모양이었다.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어디든 길을 따라가기만 가면 목적지는 나올 테니까. 예상보다 조금 늦어지겠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는다. 그리 서둘러야 할 일이 무얼까 생각해보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혜윤이와 휘가 좀 걱정을 할 거고, 학교 수업에도 지장을 받을 거다. 늦으면 그냥 제끼자고 생각도 한다. 늦으면, 이라니.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주제에. 교양 국어도 이미 놓치고, 현대 철학사 강의도 끝난 지 오래다. 지금쯤은 11시 생물학 수업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거리가 보였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을까 조금 고민이 되었다. 일단 그가 있는 쪽으로 가보자고 작정을 굳힌다. 그렇다고 다시 그의 집으로 들어가 직접 얼굴을 보겠다는 건 아니다. 그럼 더 괴로우리라는 걸 안다. 그저 그가 머무는 집, 그의 동네, 그의 거리, 그의 숨결 가까이 도착해 다시 이정표를 세우려는 것뿐이다.

곧 2년이 된다. 그를 처음 만난 지 2년.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그의 숨결 하나를 이정표 삼아 자신은 잘도 길을 찾아 나올 수 있었다. 암흑에 덜미를 잡히지 않고. 절망에 발을 헛딛지 않고. 물론 그렇게 그에게 의지하다 보니 더 큰 암흑과 절망에 잡아채인 셈이 됐지만.

바지 뒷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구깃구깃 습기를 먹어 형태가 뭉개진 폴라로이드 사진 두 장. 어젯밤에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문득 참을 수 없어져서 집을 뛰쳐나오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이다.

두 손으로 소중하게 부여잡고 한참을 내려다본다. 이미 뭉개진 형태에 다시 빗물이 떨어져 사진 속의 그는 그저 시커먼 얼룩 덩어리로 보인다. 하지만 거듭거듭 뚫어져라 들여다보면 다시금 천천히 형태가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머릿속에서, 기억 속에서 살아나는 것일 테지만.

아름다운 나침반 위로 눈물 같은 비가 후둑후둑 듣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때리고, 이마와 뺨을 지나고, 다시 목덜미와 가슴팍을 지나 바닥까지 물길을 이루고 있는 저 빗줄기였다. 강물을 이룬 빗줄기는 노도처럼 산기슭을 헤치며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랬다. 어딘가로 흘러가려면, 걸음을 멈추지 않으려면, 빗줄기는 필수적이었다. 설령 그것이 이렇게 그를 지우고, 형태를 소멸시키고, 종내는 사랑한 기억까지 영영 망각의 저편으로 흘려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사지가 찢겨나가는 듯한 몸서리쳐지는 아픔에 엉엉 통곡을 거듭했던 기억까지도.

거리의 시선들이 느껴졌다. 미친놈을 보는 시선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 모두의 손엔 형형색색의 우산들이 하나씩 쥐여 있었다. 아무도 자신처럼 구겨지고 비에 젖은 사진 쪼가리를 붙든 채 울고 있지 않았다. 고작 우산 하나 안 들었다고, 고작 연인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눈물 좀 흘린다고 미친놈 취급을 하다니, 야박한 세상이 아닌가.

물론 개의치 않았다. 실연한 날이다. 사랑을 깨닫자마자 그다음 날로 실연해버린,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얼간이다. 그만하면 동정을 받아도 싼 놈이 아닐까?

아무렴. 좀 더 비를 맞고 서 있겠다. 좀 더 울부짖겠다. 새로운 이정표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이 비가 그칠 때까지, 그리운 연인을 좀 더 오래, 아니, 아주 오랫동안 눈에 담겠다. 그런 다음 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연인의 흔적을 바지 뒷주머니에 소중하게 접어 넣고, 얼룩 같은 상처를 가슴 깊숙한 곳에 꽁꽁 숨기고, 다시 먼 길을 떠날 것이다.

그럼 다른 어느 누구도 자신을 미친놈처럼 보진 않겠지.

미칠 것 같아도 자신은 미치지 않겠다.

죽을 것 같아도 죽지 않겠다.

길은 여전히 저 멀리, 저 앞 멀리로 아득히 뻗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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