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1991년 5월. 장인환(張仁歡)
나흘이 지나자 하반신의 참혹했던 상처는 일어나 앉거나 천천히 걸음을 옮길 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돼 있었다.
월요일 오전, 침울하게 들리는 빗소리와 함께 간신히 의식을 차린 인환은 곧 자신의 몸 상태가 꽤나 심각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버릴 것처럼 온몸에 열이 올랐고, 관절 마디마디가 마치 칼로 저미는 것처럼 쑤셔들었다. 하반신의 상처에서는 일어서기는커녕 옆으로 돌아눕기도 힘들 지경으로 참혹한 통증이 올라왔다. 조금만 힘을 주어 움직여도 뜨뜻한 핏줄기가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최초의 오르가슴으로 인환이 정신을 잃은 후에도, 연인은 온 밤 내내 혼절한 몸뚱이를 틀어쥔 채 수없이 능욕을 거듭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반신의 상태가 그토록 너덜너덜해지진 않았을 터였다. 땀과 정액과 피로 온통 더럽혀져 있는 상태라는 찝찝한 자의식엔 단 한순간의 신경조차 미치지 않았다. 문명인으로서의 기초적인 결벽증 따윈 압도적인 고통에 파묻혀 완전히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애초부터 바닥을 치고 있던 컨디션이었으니 상태는 최악이라 칭할 만했다. 자연 치유를 기대하며 방치해뒀다간 위험한 상황까지 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예감이 아닌 확신이었다. 강간 자체만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게이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지만, 인환처럼 근 몇 달을 바닥까지 떨어진 체력과 정신력으로 근근이 버텨온 얼간이라면 그도 장담할 수만은 없는 일일 터였다.
온통 시뻘겋게 시야를 장악해버린 독한 열기에 다시금 까무룩 혼절하려는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인환은 엉금엉금 침대를 기어갔다. 잠자리 날개처럼 부드러웠던 자신의 실크 파자마가 넝마 조각으로 구겨진 채 침대 발치 아래 팽개쳐져 있었다. 후들후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몸뚱이를 겨우겨우 추스르며 파자마를 주워 입은 뒤 미메시스에 전화를 걸었다. 얄팍한 자존심이나 수치심 따위 챙길 계제가 아니었다. 마음의 상처로 자살할 요량이 아니라면 생면부지의 사람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다. 그나마 인환의 사정을 대충 꿰고 있는 연상의 게이 친구 마해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환에게 있어선 그나마 자비로운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게으른 주인장답게 오후 늦게야 미메시스로 출근한 마해영이 메시지를 전해 듣고 인환의 아틀리에에 도착한 시각은 막 해가 지기 시작한 저녁 무렵이었다. 몇 시간째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혼곤한 연옥 속을 헤매고 있던 인환은,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구원의 벨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응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현관문을 열어주기 위해 움직일 수 있기는커녕, 의식조차 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메시스 웨이터에게 남긴 메시지에 현관 비밀 번호를 함께 남긴 것이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마해영이 집 안으로 뛰어들었을 무렵엔 인환은 완전히 정신을 놓은 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마해영에게 들쳐 업힌 채 자동차로 옮겨지고, 이어 빌라 근처의 종합병원 응급실로 부리나케 옮겨진 시각이 저녁 7시 무렵. 위기를 넘기고 간신히 의식을 차린 것은 다음 날 새벽 입원실 침대 위에서였다.
상태가 제법 심각했었다고 한다. 40도 가까이 아슬아슬할 정도로 열이 올라갔고, 항문 열상도 외과적인 수술이 필요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고 했다. 체중이 단기간에 급격하게 빠진데다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라, 당장에 직접적인 원인을 찾기 힘든 고열은 심장에 꽤나 무리를 주고 있었다고 했다. 열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됐다면 심장마비가 왔을지도 모른다고, 다음 날 아침 회진을 돌던 담당 의사가 딱딱한 어조로 위협을 했었다. 항문 열상은 물론 직장의 내상도 심각하니 완치될 때까지는 성행위를 금해야 한다고 덧붙이는 의사의 눈빛엔 희미한 환멸과 함께 동정이 담겨 있었다. 인환이 게이인 것도, 또한 상처가 강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도 의사는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의사의 냉정하면서도 동정에 찬 일별을 마주 대하면서도, 인환은 난생처음으로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까보였던 수치감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마치 강력한 마취 주사라도 맞은 듯, 일체의 감각과 감정들이 완전히 마비가 된 것만 같았다. 그것은 온몸을 저미는 듯한 육체의 통증이거나 타버릴 듯한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침대 머리맡에 앉은 채 말없이 인환의 초췌한 얼굴을 굽어보고 있던 마해영의 얼굴 표정은 지나칠 정도로 나른하고 서늘해져 있었다. 심각하면 할수록 나른하게 표정이 풀리는 이상야릇한 친구였다. 인환에 대한 걱정뿐만이 아니라, 그 무언가에 꽤나 화가 나 있는 상태라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었다.
―그 애송이 강간범을 신고할래요?
입원해 있던 나흘 내내, 사내는 인환에게 그 어떤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그렇다고 양심을 찌르는 냉정한 책망도 하지 않았었다. 입원한 지 만 하루가 지나 체온이 가까스로 정상을 찾았을 때, 그나마 제정신을 차린 듯한 인환의 공허한 표정을 살피며 사내는 확인하듯 그 단 한 번의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총명하면서도 진중한 사내였다. 당장은 그렇게 침묵을 지켜주는 것이 인환을 위한 최대한의 배려라는 것을 사내는 알고 있는 듯싶었다.
한동안 멍하니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인환은 입가에 설핏 미소를 물곤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내의 나른하고 퇴폐적인 눈꼬리가 아래로 휘며 살짝 찌푸려졌지만 사내 또한 더 이상의 대꾸는 없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상황만 놓고 보면 재고의 여지도 없을 무자비한 강간이지만, 산전수전 다 겪었을 이 연상의 사내는 알고 있었다. 인환의 저간의 무모한 고집과 집착, 그리고 그 어리석고도 추악한 연애 사정을. 기회가 닿을 때마다 마해영은 심각하게 경고를 해주곤 했었다. 작금의 사태 또한 사내가 예견했던 불상사 가운데 하나였을지도 몰랐다.
마해영의 침착하고 헌신적인 간호 덕분인지, 인환의 몸은 애초의 심각했던 상태에 비하면 꽤나 빠르게 회복이 되고 있었다. 온갖 검사들을 위해 사내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 곳곳으로 끌려 다녔던 것은 목요일 오전, 더 이상 심각한 위험은 없으니 통원 치료를 시작해도 되겠다는 의사의 판단 아래 퇴원한 것이 입원한 지 나흘째이던 금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여전히 헌신적인 사내의 팔에 의지해 아틀리에로 돌아오니, 기다렸다는 듯 꼬리를 물고 울리는 시끄러운 전화벨들이 인환을 맞고 있었다.
엄마는 물론이고 기하 선배와 경자, 오주희, 그 외 포천에 남겨두고 온 동료들이었다. 기하 선배와 경자가 함구하는 이상, 연인과 한세혁이 심각한 주먹다짐을 치른 원인을 동료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이상야릇한 의구심과 걱정을 떨칠 수 없었는지, 동료들은 기력이 다한 인환을 붙든 채 꽤나 오랫동안 괴롭혀댔다. 조금 살이 오르나 싶다가 다시금 수척해진 요즘의 자신 때문에 부쩍 의심과 걱정이 더해진 엄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조만간 평창동에 들르지 않으면, 그래서 엄마의 각종 보양식 공세를 감당하지 않으면 또다시 평창동으로 끌고 가 죄수 생활을 시키리라는 엄마의 엄포가 인환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저간의 사정을 대충 알고 있는 기하 선배와 경자, 그리고 오주희만이 간단한 안부를 챙기는 것으로 서둘러 전화를 끊어주었을 뿐이었다(하기야, 아무리 긴 전화 통화로 기진맥진해진들, 연인에게 강간당해 사경을 헤맬 뻔했다는 한심한 현실 따윈 죽어도 까발릴 수 없을 터였다). 마해영의 근심스러운 시선은 전화를 받는 내내 인환을 살피고 있었다. 몸 상태가 나아지면서 정신적인 충격도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자신의 차분한 전화 응대에서도, 또한 안정적인 표정에서도, 지난 나흘간 마해영을 근심케 했을 심각한 공황 상태의 증거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자의 안부 전화를 마지막으로 30분이 멀다하고 줄기차게 울려대던 전화벨 소리가 뜸해졌을 무렵, 마해영도 그제야 그네의 조폭 연인에게 연락을 취했다. 수화기 너머로 쩌렁쩌렁 울리는 조폭 연인의 날카로운 고함 소리를 훔쳐듣고 나서야, 인환은 마침내 친구의 조폭 연인을 무려 나흘간이나 독수공방시킨 죄책감이 자각되었다. 저 이윤열의 구속 사건 이래 마해영에게도, 또 그네의 조폭 연인에게도 다시 한 번 말로 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무참한 능욕의 현장을 증거하며 피와 정액이 낭자하게 말라붙어 있던 침대 시트를 새것으로 갈아주고, 냉장고 상태를 점검해주고, 덧붙여 이틀은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의 따스한 전복죽을 끓여주는 것으로, 지난 나흘간의 헌신적이고도 친절한 보살핌을 마감한 마해영은 금요일 저녁이 돼서야 미메시스로 출근을 할 수 있었다. 인환은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습한 응어리를 간신히 눌러 삼키며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친구를 전송했다. 몸조리 잘하라는, 내일 출근 전에 또 들르겠다는 사내의 배려에도 고맙다는 인사치레조차 되돌려줄 수 없었다. 지독하게 어리석고 한심한 꼬락서니만을 보여주고 있는 마당에 자기 연민의 눈물이라니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요즘의 자신이란 그야말로 동정할 가치조차 없는 철면피가 아닌가. 친구라 한들 염증이 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자업자득이었다. 강간을 당했다구? 도대체 누가? 도대체 누가 강간을 당하고, 또 그 누가 강간을 했단 말인가? 지독한 집착으로 상대를 움켜쥐고 있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옴짝달싹할 수 없게끔 상대를 억압하고, 강제하고 있는 진짜 강간범이 도대체 누구냔 말이다!
토요일이 되었다.
연인과의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다. 애초의 ‘계약’에 의거한다면.
며칠째 계속 흐리거나 비를 뿌리던 날씨가 완전히 개어 있었다. 모처럼의 찬란한 햇빛이 눈이 시릴 지경으로 침실 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텅 빈 허기가 오전 내내 미적거리며 머물던 수면 욕구를 겨우 몰아내주었다. 꽤 오랜 시간을 잔 듯, 시곗바늘을 보니 어느새 10시가 넘어 있었다.
인환은 한결 상태가 좋아진 몸을 이끌고 근 일주일 만의 샤워를 했다. 입원해 있던 나흘을 포함해 지난 일주일 동안 먹은 음식이라야 죽 세 사발이 다인지라, 다행히 배변 욕구는 들지 않았다. 어기적거리며 걸음을 옮길 수 있기는 했지만 변기에 앉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반신의 실밥은 다음 주 월요일에 풀기로 되어 있었다. 완치될 때까지 대량의 출혈 사태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전히 미세하게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는 몸의 물기를 닦고 파자마 대신 부드러운 잿빛 저지 트레이닝팬츠에 흰색 면 티로 갈아입었다. 늘 연인과의 데이트가 있는 토요일이지만, 평소대로 멋을 부린 옷차림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실은 알고 있었다. 만약 연인의 방문이 확실하기만 하다면, 자신은 그 어떤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평상시처럼 화려하고 멋들어진 명품 슈트로 도배를 했을 터였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아닌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연인은 적어도 오늘만큼은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연인은 금요일 오후나 저녁 무렵쯤 아틀리에로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재확인하곤 했었다.
[내일은 역시 선생님 댁으로 가면 됩니까?] [몇 시까지 가면 될까요?] [시내에서 데이트를 하시고 싶다고요?] [아뇨,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등등, 지극히 서늘하고 무미건조한 어조로 질문을 던지며 마지못해 남창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곤 했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어제는 연인의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마해영을 배웅하고 난 직후부터 밤늦게까지 온몸이 벌벌 떨리는 두려움과 기대를 동시에 품은 채 연인의 전화를 기다렸건만, 밤 11시쯤 마해영의 안부 전화가 걸려온 것을 끝으로 전화벨 소리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연인이 왜 전화를 하지 않은 것인지, 내일 약속(을 빙자한 남창의 의무 수행)은 과연 지켜질 것인지 등등에 대한 의문들은 그저 사소하고 하찮게만 여겨졌다. 인환은 연인이 자신을 무자비하게 강간한 까닭이란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엄청난 충격이자 고통이었던 저 커다란 의문에 비하면 다른 의문들은 어쩜 답을 몰라도 좋을 하찮은 것들일 터였다. 한세혁과의 싸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로 인한 본의 아닌 아웃팅 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니라면 그 모든 근본적인 원인일 인환 자신에 대한 환멸과 증오 때문이었는지, 도무지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 어떤 것도 모두 연인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들이긴 하지만, 인환은 연인의 지독하리만큼 냉철한 이성과 자제심 또한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웬만한 일에 그 정도로 이성을 잃을 연인은 아니다. 하긴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인가. 결과적으로 연인이 분노를 터트리고 있는 대상은 인환 자신이었다. 이성을 잃을 만큼 격분하고, 가차 없이 폭행을 가하고, 더 나아가 어쩌면 자신의 존재를 연인의 세상에서 말끔히 지워버리길 갈망할 정도로 연인은 자신을 지독하게 증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젯밤, 약 기운에 취해 마지못해 까무룩 잠에 빠지며, 인환은 연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 섭섭해하는 동시에 그 이상으로 적이 안심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었다. 전화가 없다는 것은 예정된 내일의 데이트가 취소되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두렵고도 고통스러운 만남을 갖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내일만은 연인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두려웠다. 연인을 만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확신은 인환에게 섭섭함과 안타까움을 주는 이상으로, 온몸을 떨게 했던 서늘한 불안감을 순식간에 몰아내주고 있었다. 맙소사. 도대체 어쩌다가 연인과의 만남을 기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단 말인가…….
알고 있었다.
인환은 잔뜩 겁에 질린 자신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환멸이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뭐라 핑계를 댄대도 며칠 전 그 밤의 일은 야비한 강간이자 무참한 폭행이었다. 2년 전 그를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그에게 짐승처럼 능욕을 당했던 그 밤이 고스란히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아니, 육체가 입은 상처는 물론 정신적인 쇼크 면에서도 현재의 그것은 2년 전의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욱 심각한 대미지였다. 게다가 2년 전의 그것은 연인이 제정신을 차린 즉시 진심 어린 사과까지 받아내지 않았던가.
사랑받았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아니, 적어도 친구로서 그의 따스한 호의를 받았던 소중한 기억들이 뼛속 깊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현재의 자신에겐. 2년 전, 아직 냉랭한 타인으로만 다가왔던 연인과는 사뭇 다른 추억들을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있었다. 어쩌면 그 따스했던 추억들이 현재의 고통을 더더욱 증폭시키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인환은 현재 연인과의 만남에 소스라치는 공포를 느낄 정도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랬다.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하는 연인이지만, 보고 또 봐도 매 순간 미치도록 그립고 소중한 연인이지만, 강간과 폭행에 대한 공포는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인 모양이었다. 절대적인 사랑으로도 극복이 안 되는 상처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가슴 아프게도.
옷을 갈아입고, 마해영이 끓여주고 간 전복죽을 데워 먹은 뒤 약까지 삼키고 나니 더 이상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릴 기력도 없었지만, 그리고픈 의욕도 전혀 생기지 않았다. 책장을 뒤지며 읽을 만한 것이 있나 뒤져보았으나 거기서도 소득은 없었다. 아니, 읽고 싶거나 읽어야만 하는 책들은 널려 있을 테지만, 역시 의욕 부재가 원인이었다. 무엇에도 온전한 집중력이 따라오지 않았다. 약 기운 때문은 아닐 것이다.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기운이 달려 비스듬히 누운 채 꾸벅꾸벅 졸다가, 오랫동안 고정된 자세 탓에 허리에 통증이 느껴지자 다시 일어나 앉기를 되풀이했다. 음악을 틀었다가 시끄러워 다시 끄고, 갑자기 고요한 집 안의 침묵이 견딜 수 없게 느껴져 TV를 켜고 한동안 집중적으로 들여다보았다. 집중이래야 열댓 개가 넘는 케이블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것이 다였지만.
의식 안으로 도무지 들어와 박히지 않는 TV 화면이 짜증 나, 인환은 마침내 지갑을 찾아 들고 빌라 밖으로 나섰다. 신간 영화나 만화책이라도 빌려서 보면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부자연스럽게 어기적거리는 걸음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사람들의 시선 따윈 무시했다. 치질 수술을 했다거나 혹은 고래를 잡은 것 등으로 오해를 할지언정, 남자에게 강간을 당해 아래가 찢어졌다고는 사람들은 차마 추측하지 못하리라. 뭐, 애초부터 왼쪽 다리를 약간 절고 있어 그닥 별스럽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절름발이 치질 환자라. 맙소사. 아무리 생각해도 동정을 하기엔 심하게 웃긴 배합이지 않은가. 킬킬거리는 헛웃음을 내내 입가에 매단 채, 인환은 단골집인 영화마을 비디오점까지 한참을 걸어갔다.
주말 오후라 그런지 비디오점 안은 손님이 꽤 많은 편이었다. 비디오테이프들과 함께 책 대여점까지 겸하고 있는 제법 큰 매장이라 더 그러할 터였다. 이곳 말고 빌라에서 좀 더 가까운 비디오점이 하나 더 있지만 인환은 주로 이곳을 애용했다. 신간의 종류가 더 많고, 같은 테이프라도 비축분을 충분히 뽑아 진열해두기 때문에 신간 대여를 위해 기다릴 일이 그만큼 드물기 때문이다. 이 동네에 아틀리에를 마련한 이래, 신간 비디오테이프나 만화책을 빌리기 위해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었다. 연인과 함께 들른 적도 꽤 많았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 친구 흉내를 내던 그 짧지만 달콤했던 어느 한 시절이었었다. 피식. 그러고 보니 이곳 또한 연인과의 가슴 시린 추억이 어린 장소로구나……. 올봄, 다시 연인의 몸을 사게 되면서는 단 한 번도 함께 들르지 않았었다. 토요일의 약속된 데이트. 자신과 연인은 그 언젠가의 달콤했던 한때처럼 요즘도 여전히 비디오테이프들과 만화책들을 함께 보긴 하지만, 여기 영화마을까지 내려와 그들을 빌리는 일은 온전히 인환 자신만의 몫이 되었다. 연인과 함께하는 단 한순간도 떨어지기가 아쉬운 나머지, 연인이 빌라에 도착하기 전, 아침 일찍부터 집 안을 대청소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준비하고, 온몸을 깨끗이 씻고, 화려한 명품 옷으로 멋을 내고, 이어 마지막 코스로 이곳에 들르는 것이다. 연인과의 황홀하면서도 고통스러운 한때를 가까스로 이어줄 고마운 소품들을 빌리기 위하여…….
그닥 당기는 신간이 없어 비디오테이프는 패스. 언젠가 연인과 함께 꽤나 재밌게 보았던 「북두의 권」 뒤편 4권을 빌린 후 인환은 비디오점을 벗어났다.
햇빛이 화살처럼 날카롭다.
하루 종일 전신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는 현기증이 보다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심한 더위가 느껴졌다. 고작해야 5월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뿐이건만, 더위는 거의 한여름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걸어서 15분 거리인 빌라까지 가는 동안, 인환은 내내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머리 꼭대기까지 치미는 더위와 어지럼증을 다스렸다. 두 배에 가까운 30여 분만에 가까스로 빌라에 도착했을 무렵엔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당장 침대에 드러눕고 싶을 만큼 완벽하게 지치고 말았다.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순식간에 창백하게 식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에어컨은 약하게 가동 중이었지만 땡볕에 시달리던 몸이 느끼는 체감 온도는 상당했다. 더구나 자신의 현재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어리석은 외출을 했다고, 하더라도 차라리 차를 운전해서 갈 것을 하고, 인환은 비로소 늦은 후회를 곱씹었다. 걱정이 담긴 경비원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현관문의 비밀 번호를 눌렀다. 무조건 침대로 직행하리라. 잠을 자든, 그저 눈을 감고 쉬든, 몸 상태는 적어도 지금보단 견딜 만해지리라.
네 권의 만화책이 든 검정 비닐봉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봉지를 놓친 모양이었다.
자신은 지금 충격을 받은 걸까? 아니면 공포에 질린 걸까? 천만에, 그 둘 다 정답이 아니다. 전율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존재’에, 자신은 지금 온몸의 신경줄이 녹아 흘러넘치는 듯한 기쁨과 환희의 전율을 흘리고 있었다.
집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는 건, 인환이 현관문 안으로 한발을 들이밀자마자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현관 앞에 얌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커다랗고 낡은 흰색 농구화 따윈 전혀 인환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가물가물 까라지는 시선의 끝으로 트럭처럼 밟혀든, 늠름하고 아름다운 존재 탓이었다.
‘연인’은 거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채 인환을 마주 보고 있었다.
낡디낡은 청바지가 보이고, 역시 심하게 낡아 빛바랜 암청색 반팔 면 티가 보였다. 늠름한 양어깨엔 두툼하고 커다란 책 배낭끈이 아직 단단히 둘러메져 있었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되는 모양이었다.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이 인환 못지않게 땀으로 범벅인 걸 보면 틀림없었다. 티셔츠 역시 양쪽 겨드랑이 근처와 목 아래 가슴 부근이 땀에 흠뻑 젖은 채 검게 변색돼 있었다. 안 그래도 인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더위를 타는 연인이었다. 인환 자신이 흘러내린 땀으로 범벅인 마당에 연인이야 땀으로 목욕을 했대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그토록 싫어하는 땡볕 무더위에 완전히 침식당했는데도 어떻게 저리 변함없이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가 있는 걸까. 자신의 꼬락서니란 소금물에 절인 배추처럼 시들어 있는데. 무의식적인 감탄과 탄식이 기쁨의 전율에 몸서리를 치고 있는 인환의 뇌리를 가만히 스쳐갔다.
선명하고 큼직큼직한 이목구비, 거대한 육식동물의 그것 같은 단단하고 날렵한 근육들, 모델처럼 긴 팔다리, 우아한 피아니스트 신동의 손가락……. 어딜 어떻게 들여다봐도 마냥 한숨처럼 아름답고 꿈처럼 매혹적인,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용모를 하고 있는 연인이었다. 한세혁과의 주먹다짐의 흔적인 멍 자국이 아직 얼굴과 양팔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그따윈 저 완전무결한 피조물에는 조금의 흠집조차 되지 못했다. 그나마 대부분 누르스름하게 변색이 돼 있는 걸 보면 조만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포천에서 서울까지의 귀경길 내내 인환을 가슴 아프게 했던 연인의 상처는 이제 무사히 아물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미끄러지듯 현관 바닥에 주저앉고 마는 인환을, 핥는 듯한 격렬한 시선이 무자비하게 덮쳐들었다. 더위로 펄펄 끓고 있는 체온과 불길처럼 타고 있는 눈빛과는 달리, 연인의 표정은 암벽처럼 단단하고 차게 굳어 있었다.
아무런 말도,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공포, 두려움, 부끄러움, 모멸감, 기쁨, 혼란, 환희…… 그 외에도 정확한 이름을 붙이기 힘든 수만 가지 감정들이 폭풍우처럼 인환의 뇌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물론 그 수만 가지 감정들 중 가장 강력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야말로 몸서리가 쳐질 만큼 거대한 ‘기쁨’이었다. ‘그리움’이었다. ‘애정’이었다. 두려웠다고? 적어도 오늘만은 연인을 보지 않길 기원했다고? 강간과 폭행에 대한 공포는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인 모양이라고? 절대적인 사랑으로도 극복이 안 되는 상처가 존재하는 모양이라고? 맙소사. 창피한 줄 알아라, 장인환! ‘연인과 함께’라는 가공할 기쁨에 취한 나머지 완전히 넋을 잃은 주제에. 치유 불가능의 상처를 입은 영혼 따윈 까맣게 접어둔 채 사막의 단비처럼 갈급한 그리움을 허겁지겁 채우기 급급한 주제에. ……말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생각이 들어찰 여지가 없었다. 곧 쓰러져도 하등 이상치 않을 빈사의 몸뚱이였다. 빈사의 정신이었다. 그저 시체처럼 창백해진 낯빛으로 숨 가쁜 호흡만을 가느다랗게 토해낼 수 있을 뿐…….
한참 동안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던 연인이 이윽고 인환을 향해 천천히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등에 진 책 배낭끈을 풀어 소파 위에 내려놓느라 잠시 멈췄던 발걸음은 다시금 일방통행의 진행을 거듭했다. 무언가 망설이는 듯, 혹은 생각에 잠긴 듯 느릿하기만 한 보폭이었다. 느린 움직임과는 대조적으로, 인환의 시선을 틀어쥐고 있는 연인의 새까만 눈동자는 단호하면서도 집요했다. 뚫어버릴 것처럼 강렬하고 매서운 시선이었다. 마치 단단한 쇠줄로 엮인 거대하고 압도적인 그물에 의해 온몸이 친친 휘감겨버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연인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더 이상 고개를 치켜들지 않아도 비슷한 눈높이의 연인을 볼 수 있었다.
연인의 팔이 뻗어왔다. 연인의 오른손에 의해 어깨가 틀어잡힌 채 상반신이 앞으로 끌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느릿하면서도 부드러운 손놀림이었다. 강렬한 땀 냄새와 비누 냄새가 뒤섞인, 그리운 연인의 체취가 콧속으로 물씬 파고드는가 싶더니 인환의 머리는 어느새 연인의 품속에 파묻히듯 안겨 있었다. 무게중심이 완전히 앞으로 쏠린 나머지 양다리와 발목이 불안정하게 꺾였다. 연인의 늠름한 품 안이 받아주지 않았다면 인환은 그대로 현관 바닥에 고꾸라졌을 터였다.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주저앉은 채, 연인은 고요하면서도 완강한 포옹을 한참 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인환이 얼어붙은 것과 마찬가지로 연인의 침묵 또한 굳건했다. 딱딱한 근육의 감촉이 선연한 연인의 늠름한 가슴팍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면 티를 사이에 두고 인환의 얼굴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티셔츠 위로 비쭉 솟아 있는 연인의 발기한 유두가 인환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닿을 듯 말 듯 코끝을 건드리고 있었다. 등 뒤로 인환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는 연인의 오른손도, 허리춤을 끌어당기듯 어루만지고 있는 왼손도, 느리고 부드러운 움직임은 여전했다. 포옹 역시 그 손길만큼이나 느긋하고 부드러웠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불분명한 혼란스러운 감각이 인환을 사로잡고 있었다. 안기기 직전 확인했던 차디찬 무표정만 아니라면 다정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부드러움이었다. ……다정하다니, 설마 그럴 리가. 만약 그렇다면 이토록 사시나무 떨리듯 온몸이 떨릴 리가 없겠지. 제대로 숨조차 쉬기 힘들 지경으로 완전히 넋이 나갈 리가 없겠지. 아무렴. 뭐라 해도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밤의 차디찬 폭력을. 단절을…….
문득 신발이 차례로 벗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몇 초 전까지 내내 인환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던 연인의 오른손이 범인이었다. 부드러운 양가죽 스니커즈라서인지, 바닥에 파묻히듯 불안정하게 꼬여 있는 자세에도 불구하고 연인은 별 힘도 들이지 않고서 쉬이 목적을 달성했다.
부드럽기만 했던 포옹이 마침내 풀렸다. 연인의 가슴팍에 가로막혔던 시야가 밝아지는가 싶더니, 몸이 위로 번쩍 들리고 있었다. 공주님 포즈로 인환을 안아 든 연인 때문이었다. 온몸의 떨림이 더더욱 심해지고, 심장은 금세 마비라도 일으킬 듯 격렬한 세동을 거듭하고 있었다. 연인의 느릿하면서도 단호한 발걸음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은 침실이었다. 아니, 침대 위였다!
깃털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연인이 인환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연인이 눕혀준 자세 그대로 인환은 헤드 쿠션에 반쯤 등을 기댄 채 와들와들 몸을 떨고 있었다. 엄습한 강렬한 현기증 탓인지 시야가 불분명해졌다. 만남의 기쁨과 희열 대신 뼛속 깊이 아로새겨진 폭행에의 두려움이 온 넋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공기 중에 녹아들어 완벽하게 사라지고 싶으리만치, 그것은 온전히 수용하기 힘든 아득한 공포요 절망이었다.
침대 발치에 우두커니 선 채 연인은 묵묵히 인환을 굽어보고 있었다. 시커먼 장막이 시야를 가리고 있기라도 한 것마냥, 커다랗고 압도적인 연인의 실루엣만이 감지될 뿐 연인의 표정은 조금도 읽을 수가 없었다. 표정을 읽을 수 없으니 연인의 의중을 헤아리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무자비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방 안으로 비쳐들고 있는 밝은 햇빛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이를 악물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자꾸만 가부러지려는 의식을 놓지 않기 위해 기를 썼다. 제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느님,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안 돼!
“……오…… 오…… 오…… 오늘…… 봐…… 봐줘…….”
너무나 작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쉰 목소리가 떨리는 입술을 타고 가까스로 흘러나왔다.
“……오…… 오…… 오늘은…… 상처…… 수…… 수술…… 실밥…… 워…… 월요일에…….”
“…….”
“……전화…… 저…… 저…… 전…… 전화하지 않아서…… 오늘은…… 오늘 너 안 올 줄 알고…… 찌…… 찢어져서…… 그…… 거기가 조금…… 벼…… 병원에…… 병원…….”
“…….”
“……수…… 수술했어, 위야…… 지…… 진짜야…… 조금…… 좀…… 찢어져서…… 그…… 그러니까 실밥…… 워…… 월요일에 뽑으니까…….”
“…….”
“……어…… 언제든 하…… 하고 싶으면……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지…… 지금…… 오늘은 차…… 참아주면…… 진짜야…… 나중엔 진짜 네 맘대로…….”
“…….”
문장은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고, 목소리는 꺼져가는 촛불처럼 하염없이 흔들렸다. 횡설수설, 입이 엉망인지 귀가 엉망인지, 아무리 말을 보태봐도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 대화라면 지금의 자신은 벙어리나 진배없었다. 스스로도 알아듣기 힘든 횡설수설로 무시무시한 강간범의 의지를 누를 수 있을지는 절대 믿어지지가 않았다.
짤랑 하고 벨트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땀에 흠씬 젖은 연인의 티셔츠가 벗어 던져지고, 청바지와 팬티들이 침실 한구석으로 처박혔다. 순식간에 알몸이 돼버린 시커멓고 거대한 존재의 움직임이 전하는 의사는 일목요연했다.
까마득한 절망감과 함께 속수무책의 체념이 왔다. 역시 자신은 벙어리가 된 모양이었다. 침대 발치가 육중한 체중에 의해 움푹 눌리는 것이 느껴졌다. 연인의 거대한 나신이 점점 가까이 다가들고 있었다. 차고, 딱딱하고, 가차 없는 접근이었다.
아득한 현기증이 파도처럼 시야를 점령했다. 불에 달궈지는 마른오징어처럼 상반신이 옆으로 와륵 오그라들었다. 그립고 그리운 연인의 체취가 폐부 가득 밀려드는 것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멀어졌다. 시커먼 어둠이 요람처럼 포근하게 다가들었다.
자꾸만 얼굴을 간질이는 차가운 감촉에 인환은 마지못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천장이 느릿하게 돌고 있었다. 어지럼증 때문일 것이다.
자꾸만 인환의 의식을 일깨우던 차가운 감촉이 다시금 얼굴로 다가들었다. 그것은 얼음물에 적신 수건이었다. 수건이 잇달아 닿고 있는 피부마다 상쾌한 감각이 기분 좋게 따라왔다. 한동안 눈꺼풀을 깜빡이며 꿈처럼 나른한 감각에 취해 있던 인환은 마지못해 현실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천장이 매우 느리게 돌고 있는 듯한 야릇한 감각을 빼면 어지럼증은 그닥 심하지 않은 편이었다. 시야도 온전히 맑아져 있었다. 애초의 둔중한 아픔 이상의 고통이 자각되지 않는 걸 보면 하반신도 아직은 무사한 모양이었다. 자신은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고, 설핏 시선 끝에 밟혀들고 있는 연인의 커다란 실루엣도 그대로인 걸 보면 강간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어쩐지 인환의 정신은 물처럼 잔잔하고 평온했다. 기절하면서 기력이란 기력을 다 뽑아 썼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공포에 질릴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기절하기 직전의 끔찍스러운 혼란과 혼돈이 마냥 꿈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한동안 얼굴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얼음 수건이 목덜미 아래로 내려갔다. 목덜미에서 쇄골로, 이어 어깨에서 가슴팍으로, 움직임은 꼼꼼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상쾌한 감각을 따라 인환의 시선도 자연스레 움직였다. 얼음 수건 너머 길고 아름다운 피아니스트 신동의 손가락이, 탄탄한 팔 근육이, 늠름하게 벌어진 어깨가, 완전히 무르익은 청년답게 굵고 건장한 목줄기가, 이어 조각처럼 뚜렷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차례로 인환의 시야를 비집고 들어왔다.
인환과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연인이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한 팔로 침대 바닥을 짚은 안정적인 자세로 연인은 인환에게 얼음찜질을 해주고 있었다. 또다시 열이 오른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자신은 혼절을 했고, 무더위에 지쳤으며, 보나 마나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이었을 것이다. 환자(로 보이는 자)를 위해 연인은 최소한도의 적절한 응급조치를 취한 것일 터였다. 그야말로 ‘적절한’ 응급 조치였다. 의식은 선명했고, 패닉에 빠졌던 넋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시력도 정상으로 돌아온 모양인지, 보고 싶은 것들이 빠짐없이 다 시선 안으로 잡혀들고 있었다. 그래. 보고 싶은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연인의 얼굴도, 표정도…….
불그스름한 노을빛이 방 안 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무심코 벽시계를 살피니 7시 37분. 어느새 저녁이었다. 잠깐 동안 정신을 잃은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잠깐’이 생각보다 기나긴 잠깐이었나 보다. 영화마을로 나들이를 나간 시각이 오후 3시쯤이었으니 서너 시간은 족히 잠들어 있었다고 봐야 옳다. 얼음찜질 덕분인지 적당히 기분 좋은 서늘함이 온몸을 사로잡고 있었다. 한풀 꺾인 더위는 지는 해와 더불어 얌전히 서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듯했다.
“……됐어, 위야…….”
힘없는 목소리는 여전하지만 그래도 처음처럼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다. 다행이야. 진짜 벙어리가 된 건 아니구나.
“……많이 시원해졌어. 기분 좋아. 이제 그만해도 돼.”
“…….”
가슴 근처를 배회하고 있던 수건이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침대 머리맡의 협탁 위로 던져진다. 수건 대신 다가온 것은 연인의 두 팔. 인환의 몸은 그대로 연인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반사적으로 굳으며 잘게 떨어대는 몸을 연인은 가차 없이 힘주어 포옹하고 있다. 상반신은 연인의 품에 완전히 파묻혔고, 하반신은 연인의 탄탄한 허벅지 틈에 갇힌 채 친친 동여매졌다. 그도 모자랐는지, 연인은 얼굴을 인환의 왼쪽 목덜미 근처에 박은 채 이와 혀로 예민한 피부를 자근자근 씹어 삼키고 있었다. 잔뜩 굶주린 야수와 한가지였다. 먹히고 있는 것 같았다. 강렬한 체취, 단단한 근육의 꿈틀거림, 까칠한 다리털의 감촉, 델 듯 뜨거운 체온, 등과 허리와 엉덩이를 천천히 힘 있게 쓸고 있는 커다란 손바닥, 잔뜩 발기해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는 딱딱한 생식기……. 약해진 정신으로 받아들이기엔 그 모든 연인이 충분히 버거웠다.
“……그렇다면 언제쯤 섹스 할 수 있습니까?”
잔뜩 탁해진 바리톤이 나지막하게 추궁했다. 한계까지 차오른 수컷의 성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어조요, 목소리였다. 벙어리의 횡설수설을 연인이 정확히 알아들었다는 것을 인환은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단 한마디의 냉담한 추궁으로 충분했다.
“……그…… 그건 잘…… 정확하게는……. 실밥은 월요일에 뽑는다고 했는데…… 그래도 2주 정도까지는 절대로 하지 말라고 의사가…….”
“제기랄.”
거칠게 내뱉어진 욕설과 함께 등줄기를 쓸고 있던 연인의 손아귀에 와락 힘이 가해졌다. 애초에 빈틈없이 달라붙어 있던 상반신이라 포옹이 강해지니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반사적으로 가늘게 헐떡이자 연인의 팔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럼에도 난폭하고 억센 느낌은 조금도 줄어들지가 않았다. 온몸이 짜부라지는 것만 같았다. 겁을 집어먹고 있는 상태라 더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복잡하게 얽혀들어 있는 두 다리 사이, 거대하게 부푼 연인의 페니스는 언제라도 거칠고 사나운 흉기로 변해 인환을 상처 낼 수 있을 터였다.
“……제가 무섭습니까?”
흥건한 타액을 낭자하게 남기며 인환의 목덜미를 통째로 먹어치우고 있던 연인이 문득 이를 갈았다. 여전히 차고, 무자비하고, 불길 같은 증오를 품고 있는 목소리였다. ……무엇이 이토록 증오스러운 걸까? 인환 자신일까? 그래, 자신이겠지…….
“……아…… 아니…….”
“거짓말.”
냉혹한 웃음기가 격렬한 키스와 더불어 입술을 휘감았다. 목구멍을 후벼 파는 듯 혀끝이 강간을 한다. 찌르고, 비비고, 빨고, 삼켜들었다. 주르륵 하고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질척한 타액이 입가를 지나 턱 끝까지 낭자하게 흘러넘쳤다. 키스가 격렬해질수록 인환의 허리가 활처럼 휘며 뒤로 넘어갔다. 쪼옥. 쪽. 쭈웁. 쪽. 쪽. 추릅. 춥……. 거칠고 무자비한 흡입에 인환의 입술은 벌겋게 충혈되며 금세 부풀어 올랐다. 등 뒤로 서늘한 시트 감촉이 느껴졌다. 완전히 침대로 밀어붙인 채 본격적으로 먹어치울 요량인 모양이었다. 압도적인 연인의 몸이 빈틈없이 달라붙으며 인환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허벅지 사이로 연인의 불끈거리는 거대한 페니스가 사정없이 찌르고 비벼대는 것이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선명했다.
“……떨지 마세요. 기분이 나쁩니다.”
“……흑…….”
“우시는 겁니까?”
“…….”
“기분 나쁘다고 했죠? 닥쳐요.”
“…….”
“젠장.”
“……사과…….”
“?”
“……사…… 사…… 사…… 과…… 사과해주면 무섭지 않을 텐데…….”
“…….”
“……미안…… 저…… 전에처럼 사과해주면 아…… 안 떨 수 있을 거 같은데…….”
시뻘건 불꽃을 내뿜으며 훨훨 타오르던 연인의 눈동자가 잠시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차디차게 식어갔다. 불꽃은 푸르게 변해 더더욱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거칠게 내뿜어지는 호흡은 거의 닿을 듯 마주 보고 있는 인환의 얼굴을 불태우고 있고, 허벅지 사이에 격렬하게 비벼지고 있는 생식기는 실제로 안에 삽입되어 거세게 유린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켰다. 광포한 수컷의 본성을 여봐란 듯이 증명하듯 연인의 거센 피스톤질이 아물기엔 아직은 요원한 하반신의 상처를 아프게 했다. 압도적인 리듬으로 흔들릴 때마다 쓰라린 통증이 내벽을 할퀴고 있었다.
“왜 제가 사과를 해야 합니까?”
채찍처럼 후려치는 힐문은 차라리 욕설 같았다. 쪽, 쪽, 쪽. 아랫입술을 물어뜯듯 다정하게 쏟아져 내리는 정열적인 입맞춤은 그야말로 다.정.하기만 해서, 연인의 날선 힐문에 더한 모멸감을 안겨주었다.
“언제든 성욕 배출구로 이용해도 좋다고 하셨잖습니까. 전 말씀하신 대로 했을 뿐인데요?”
“…….”
“그만 떠십시오. 기분 나쁘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 합니까.”
“…….”
“다리 벌려요. 부탁하신 대로 오늘은 삽입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꼴려도 환자를 안는 취미는 없으니까 배려해드리는 겁니다.”
“…….”
“젠장! 배려해주겠다는데 왜 우는 겁니까!”
“…….”
“닥쳐요. 당장 그치지 않으면 박을 겁니다.”
“…….”
냉혹하게 내뱉은 협박은 효과가 있었다. 침대 시트만 부여잡은 채 벌벌 떨고 있던 두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자, 막 터지려던 응어리가 간신히 가라앉았다. 떨림은 여전했지만 여운처럼 한두 방울 더 흘러내리던 눈물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행히 떠는 것까지 협박의 수단으로 삼을 생각은 없는지, 연인은 흐릿하게 미간을 구긴 채 마지막 피치를 올리고 있었다. 성욕으로 붉게 충혈된 아름다운 눈시울이 잡아먹을 듯 인환의 눈을 틀어쥔 채 요동치고 있었다. 역시 자신에게 비비는 것만으론 부족했는지, 연인은 약간 위로 허리를 틀더니 잠자고 있던 인환의 페니스와 연인의 그것을 한꺼번에 틀어쥐고 용두질을 쳤다. 시뻘건 불길을 품고 있는 용광로는 극점까지 달아오른 채 팽창하고 있었다. 겁에 질린 와중에도 동물적인 본능은 여전히 살아 있는 모양인지, 맞닿은 채 거세게 비벼지는 연인의 흥분에 인환 역시 조금씩 발기하고 있었다. 아랫배로 피가 몰리며 저릿한 사정감이 눈시울을 덥혔다. 입가를 힘껏 틀어쥐고 있던 양손이 저절로 뻗어나가 연인의 허리를 갈퀴처럼 끌어안았다. 연인의 강렬한 피스톤 운동 탓에 단단한 근육이 잡힌 연인의 강인한 어깨가 리드미컬하게 인환의 입술을 때리고 있었다. 북받치는 애정은 자연스레 혀를 내밀어 짭짤한 맛이 나는 연인의 매끄러운 피부를 애무하게끔 했다. 비 오듯 흐르는 연인의 땀은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따라 아래 깔린 인환에게로 거침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향 냄새와 닮은 강렬하고 매혹적인 연인의 호르몬 냄새가 연인의 겨드랑이 근처에서 뿜어 나왔다. 사정 직전인 것 같았다. 몸서리가 쳐지는 강렬한 유혹이었다. 흐느끼듯 신음을 흘리며 인환은 그 속에 한껏 얼굴을 파묻었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연인의 겨드랑이 체모에 입술과 코끝을 대고 실컷 비벼댔다. 그립고 그리운 연인의 체취가 폐를 터트릴 지경으로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저릴 듯한 기쁨의 전율이 온몸의 신경줄을 알알이 훑으며 스쳐갔다. 사랑해. 사랑해, 위야.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빳빳하고 무성한 연인의 체모가 인환의 것과 뒤엉켜 귀두 끝에서 스며 나온 서로의 체액으로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안으로 안으로, 영혼 깊숙이까지 격렬하게 찔러드는 듯한 연인이 꿈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요동치는 서로의 음경과 뻣뻣하게 굳은 음낭이 열기로 한데 녹아 용암처럼 흘러내렸다. 인환의 등을 휘감고 있던 연인의 한 팔이 강렬한 힘으로 상반신을 사슬처럼 옥죄었다. 깃털 하나조차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두 육체가 하나로 달라붙었다. 목덜미와 어깨 사이, 부드러운 살집 위에 무수한 키스 마크를 남기며 헤매고 있던 연인의 입술에서 단말마의 탄성이 터졌다. 흐아아악. 잠시 바짝 굳어든 야수의 육체가 비명처럼 절박하게 요동쳤다. 왼쪽 쇄골 바로 위, 연약한 목덜미 근처로 연인의 단단한 치아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이내 아찔한 통증이 뇌리를 습격했다. 절정의 흥분에 취한 연인은 야수처럼 스스로를 발산하고 있었다. 힘껏 틀어박힌 치아 틈으로 진득하니 흘러내리고 있는 혈액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크게 허리를 흔드는 것으로 강렬하게 최후의 용트림을 마친 연인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절박한 교성이 터졌다. 흐앗! 마침내 연인의 귀두 끝에서 뭉클거리는 정액이 터졌다. 뜨겁고 축축한 그것은 움찔움찔 긴 여운을 끌며 인환의 생식기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흡족해진 야수의 오르가슴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움찔움찔 연인의 허리가 요동쳤다. 약간 기세를 누그러뜨린 거대한 흉기도 허리의 율동을 따라 느릿하게 불끈거렸다. 연인의 커다란 손아귀 속에 함께 품어진 성기를 통해, 연인의 저 격렬한 오르가슴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환에게 선명하게 전해졌다.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던 연인의 입술이 헐떡이며 인환의 입술을 찾았다. 뱀처럼 미끄덩거리는 혀가 거침없이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연인의 입술에선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목구멍 깊숙이 밀어붙여진 혀끝에 아슬아슬한 구토감이 올라왔다. 이내 휘감고 빨고 비비는 적나라한 애무에 흐늘흐늘 온몸이 녹아들었다. 잇몸을 더듬는 연인의 입술 탓에 슬쩍 틈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아스라한 인환의 교성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서로를 움켜쥔 채 더듬고 있던 연인의 손아귀에서 연인의 생식기가 바짝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페니스는 굵고 딱딱해졌고, 양쪽 음낭 역시 바짝 굳어진 채 위로 솟아올랐다. 단숨에 애초의 힘과 공격성을 되찾은 흉기가 인환의 볼품없는 페니스를 또다시 맹렬하게 찌르고 있었다. 연인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예민한 서로의 귀두 끝이 얽히며 기쁨의 눈물을 줄줄 흘려댔다. 믿기 힘든 회복력이었다. 더욱 믿기 힘든 연인의 성욕이었다. 마치 그간의 본의 아닌 금욕 생활에 대해 연인의 하반신이 반란이라도 일으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아아……!”
“흐읍……!”
흐릿한 자신의 비음에 연인이 화답하듯 억눌린 짐승의 교성을 토해냈다.
“……아…… 흑…… 위…… 아아, 위야……!”
“크윽……! 으…… 흡……! 흐악……!”
“……하아…… 아…… 학……! 하아아…….”
“읏, 읍, 윽! 흐읍……!”
연인이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타액과 땀으로 흥건한 인환의 입술이 연인의 불길 같은 키스 세례로 다시 한 번 틀어막혔다. 입술에서 시작한 키스는 이내 콧망울로, 뺨으로, 귓바퀴로, 관자놀이로, 하다못해 머리통 끝까지 올라갔다. 정수리 근처를 질겅질겅 깨물고 있는 연인의 치아에서 무시무시한 섹스의 광기가 느껴졌다.
“……아…… 아아……! 흑…… 위…… 위위……!”
“크윽! 헉! 흐웃!!!”
가슴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두려움과 저항감이 남김없이 사라졌다. 저릿한 육체의 욕망이 인환의 전신을 폭풍처럼 강타하고 있었다. ……원해…… 위야가 날 원해…… 원하고 있어……. 흐느끼며 헐떡이며, 인환은 어느덧 맹렬하게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연인의 축축하고 부드러운 손바닥이, 무섭게 용트림을 하고 있는 뜨거운 자지와 불알이, 무성하게 얽혀든 빳빳한 체모가, 모체의 자궁 속처럼 따스하고 축축하게 인환을 감싸주는 연인의 정액이…… 모두 견디기 힘든 거센 유혹이었다. 오르가슴이었다.
“……위……! 위위……! 흐…… 흐아아앗!!”
“큭!!”
극치의 쾌락이 뇌리를 강타했다. 연인의 등 뒤로 교차해 정신없이 끌어안고 있던 두 손아귀에 저절로 힘이 가해졌다. 고양이처럼 손톱을 세웠다. 뜨겁게 분출하는 정액의 흐름을 따라 연인의 매끈한 등줄기 위로 기다란 핏방울이 맺혔다. 연인을 할퀴다니, 발정 난 암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처절한 오르가슴의 교성은 거의 동시에 절정을 맞은 연인의 입술에 의해 완전히 틀어막혀 있었다. 연인의 허리가 크게 꿈틀거리며 빨판에 흡착된 것처럼 온몸이 조여들었다. 연인의 강건한 사지가 부서트릴 기세로 인환을 끌어안은 때문이었다.
서로의 입술이 빈틈없이 달라붙고, 사지가 뒤엉키고, 성기가 녹아 흘러넘쳤다. 키스는 섹스가 되고, 섹스는 키스가 되었다. 혀가 된 생식기가 부드럽고 달콤한 애무를 서로에게 뿌렸다. 생식기가 된 혀가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뚫고 들어갔다. 꼭 들어맞는 요철처럼 깊이깊이 박혀서는 절대로 서로를 놔주지 않았다. 흐늘흐늘 녹아 달라붙은 채 연인이 자신인지, 자신이 연인인지, 결코 알 수 없었다. 삽입한 것 이상의 완벽한 오르가슴이었다.
“……으…… 흑! 흐억! 큭……! 흐업!!!”
연인의 이가 또다시 굶주린 야수처럼 인환의 곳곳을 물어뜯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진동했다.
연인이 자신을 물어뜯은 건지, 자신이 연인을 물어뜯은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무시무시한 광기와 짐승의 욕정이 해일처럼 서로에게 밀어닥치고 있었다. 그것이 희망인지 절망인지, 마냥 혼돈뿐이었다.
감당키 힘든 쾌락과 고통과 희열에 몸부림치며, 인환은 어느덧 시커먼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얼음 수건이구나.
자꾸만 까라지는 인환의 의식을 간신히 일깨운 것은 자신의 웃음이었다. 그랬다. 자신은 지금 웃고 있었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흐릿한 미소지만 그것은 애틋한 기쁨을 증거하며 인환의 넋을 홀리고 있었다. 웃음의 이유로는 이 이상으로 행복한 이유가 없다. 연인이 자신에게 또다시 얼음찜질을 해주고 있었으므로.
서늘하고 기분 좋은 감촉은 뺨을 스치고, 이마를 더듬고, 이어 목덜미와 가슴과 아랫배와 허벅지들을 차례로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샤워를 한 기억이 없건만 보송보송한 개운함이 온몸을 감싸고 있다. 얼음찜질을 해주기 전에 깨끗이 닦아준 듯싶었다. 시트까지 간 모양인지, 등에 와 닿는 침대 시트의 감촉은 몸 상태만큼이나 개운했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불편한 감각을 주고 있었던 곳은 하반신의 익숙한 상처와 목덜미 아래, ‘야수’에게 물어뜯긴 욕망의 상흔뿐이었다. 무심코 손을 가져가보니 그곳 역시 연인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았는지 연고가 발린 채 커다란 밴드가 달라붙어 있었다. 밴드 위로 슬쩍 어루만지는 것뿐인데도 꽤나 아릿한 통각이 스쳐가는 걸 보면 생각보다 상처가 심한 듯했다. 물론 별로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눈을 뜨고 연인의 모습을 찾았다.
두렵지 않았다. 곤혹스럽던 몸의 떨림도 사라졌다. 언젠가 또 연인을 격분시키는 일이 터졌을 때 연인이 다시 짐승처럼 자신을 유린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은 그날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종아리 근처를 문지르며 내려가 있던 연인의 시선이 인환의 시선을 느낀 듯 마침내 위로 올라왔다. 시선이 마주쳤다.
지나치게 맑고 깨끗해서 흡사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보이는 새까만 눈동자가 큼지막한 눈시울 아래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그리운 온기는 조금도 찾을 수 없었지만, 그저 그 비현실적인 아름다움만으로도 인환은 신에게 경배를 드리고픈 심정이었다. 익숙한 냉기와 단호함이 서린 표정에도 인환은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거절은 익숙했다. 그저 조금 아프면 그만일 일이었다. 아픔도 물론 역시 익숙했다.
인환의 상태를 살피는 듯, 한동안 침착하게 시선을 마주치고 있던 연인이 이윽고 얼음 수건을 치우곤 팔을 뻗어 인환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낯익은 데자뷔에 잠시 긴장했지만, 숨 막히는 포옹이 뒤따르진 않았다. 연인은 그저 인환의 등을 침대 헤드 쿠션 위에 기대게 했을 뿐이었다. 손길은 부드럽고 온화했다. 인환이 환자임을 그제야 인정하는 듯 꽤나 조심스러웠다. 물론 다시금 빤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선에선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심장만 감지될 뿐이었지만.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모양인지 방 안을 밝히고 있는 빛은 협탁 위 스탠드 불빛이 유일했다. 조도가 높지 않아 그저 뿌옇게 사물의 형태만을 겨우 드러내주는, 그럼에도 연인의 아름다운 모습과 서글픈 속내를 헤아리기 위한 등불로써 부족함은 전혀 없었다.
말없이 서로를 응시한 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인환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연인 역시 별로 대화의 필요성은 못 느끼는 듯했다. 그저 무심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인환을 고요하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인환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벌거벗고 있는 몸에선 정사의 자취라곤 찾을 수 없었다. 결벽증이 있는 연인이니 애저녁에 샤워를 했겠지. 인환이 연인을 위해 욕실에 비치해두었던 샤워 코롱 냄새가 연인의 체취와 뒤섞인 채 달콤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앞으로 뻗어나가 침대 가에 늘어져 있던 연인의 팔을 움켜쥐었다. 뿌리쳐지는 것을 각오했지만 어쩐지 연인은 가만히 앉아 인환의 조심스러운 접촉을 굽어보고 있었다. 연인의 얌전한 반응에 좀 더 용기가 생겼다. 따스하고 매끄러운 감촉에 이끌리듯 단단한 팔목을 쓸고, 이어 좀 더 아래로 내려가 길고 우아한 손가락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조심조심 눈치를 살피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자, 얌전히 끌려오던 연인의 상반신이 대답처럼 인환을 포옹했다. 인환에게 잡혀 있지 않은 나머지 오른손이 등 뒤로 돌아가 인환의 견갑골 근처를 어루만지듯 껴안았다. 특별히 힘을 주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부드럽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포옹이었다. 연인의 묵직한 체중이 완전히 실리자 침대 매트리스가 앞으로 크게 기울었다. 잡고 있던 연인의 손을 놓고 인환도 연인의 등 쪽으로 팔을 교차시켜 꼭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 너머 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연인의 따스한 숨결이 인환의 목덜미와 귓불 언저리를 맴돌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감촉. 연인의 혀와 입술이 번갈아 귓불을 빨고 있었다. 포옹이 깊어지며 반쯤 발기한 연인의 성기가 아랫배를 스치듯 애무했다. 귓불을 애무하던 키스가 입술로 다가왔을 무렵엔 그것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발기해, 맑고 투명한 액을 조금씩 흘리기 시작했다. 연인을 발작적으로 사로잡고 있는 성욕이 아직까지도 채 다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상했다. 이상야릇할 정도로 과도한 성욕이었다. 역시 전혀 평소의 연인답지 않았다.
분명 연인은 어딘가가 변해 있었다.
물론 인환의 애정을 거절하고 냉대하고 있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뭔가 한 꺼풀 벗어던진 듯한 야릇한 초연함이 연인의 아우라를 점령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수용하는 듯싶기도 했고, 동시에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어른이 돼버리기라도 한 듯, 흐릿하게 남아 있던 소년다운 풋풋함과 우유부단함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다 자란 성인 남자 특유의 강건하고 흉흉한 수컷의 에너지가 전류처럼 흘러넘치고 있었다. ‘성욕 배출구’라고, 예전의 연인이라면 입에 담기도 싫어했을 말을 태연히 내뱉고, 또 그 말 그대로 지금 이 순간까지 인환의 몸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 증거하듯, 인환을 대하는 태도에도 전혀 스스럼이 없었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일체의 고민 없이 그 무엇이라도 짓밟고 나아가는 ‘정글의 맹수’ 자체였다. 맹수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 설명할 의지조차 전혀 세우지 않는 것 같았다. 만약 그네의 앞길을 막아서는 어떤 존재가 나타난다면, 맹수는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대신 그저 그네의 사나운 발톱으로 상대를 무자비하게 찢어발길 것이다. 무시무시했다. 실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한 마리 야수가 정글의 어둠 깊은 곳에서 문득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무시무시한 변화였지만,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인환에게 특별히 더 두려움을 주지는 않았다. 두려움은커녕, 어쩌면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리고 섬세한 연인은 그만큼 사회나 인환 자신이 주는 상처에 취약했다. 쉬이 멍든 가슴에선 수시로 피눈물이 흘러내렸었다. 그리고 그 피눈물은 마치 부메랑처럼 고스란히 인환에게 되돌아오곤 했다. 그 몇 배는 될 고통과 상처를 부록으로 매달고서. 철벽처럼 굳건해진 연인이라면 그만큼 상처를 입는 일도 드물 것이다. 연인이 상처를 입지 않으면 인환에게 가해지는 보복 역시 그만큼 줄어들 터였다.
“냉장고 안에 전복죽이 있던데 그냥 데우기만 하면 됩니까?”
숨이 막힐 듯한 농염한 키스 끝에, 연인이 그르렁거리듯 물어왔다. 곧바로 유사 섹스에 돌입하지나 않을까 근심했던 인환으로서는 느닷없게까지 여겨지는 질문이었다.
“……배 안 고파…….”
부정의 말은 곧이어 들린 꼬르륵거리는 소리로 무색해졌다. 그제야 연인의 느닷없는 물음에 납득이 갔다. 자신의 배 속에서 들리는 요란스러운 울림이 연인의 욕망에 찬물을 끼얹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데워드릴 테니까 드시고 약 드십시오.”
“…….”
쪽, 쪽, 쪽. 추웁.
냉담한 간병인의 세리프를 던졌음에도 농염한 욕망이 서린 연인의 깊은 키스는 여전했고, 한계까지 발기해 있는 성기도 여전히 인환의 아랫배를 때리며 불끈거렸다. ……또 사정할 기운은 없는데……. 역시 끝까지 가려는가 보다 하고 헐떡이듯 신음을 토해내는데, 몇 번이나 주린 듯 입술을 빨아대던 연인의 격렬한 키스가 간신히 떨어져 나갔다. 결박을 당한 듯 빈틈없이 조여대던 포옹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완벽하게 체중을 지지해주던 연인의 두 팔과 상반신이 떨어져나가자, 인환은 무너지듯 헤드 쿠션 위로 몸을 기댔다. 가쁜 숨결을 추스르는 것이 흥분한 몸을 추스르는 것보다 더 힘겨웠다. 역시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성행위를 하고, 한술 더 떠 두 번이나 사정했던 것도 한계치를 뛰어넘는 무모한 짓이었을지도 몰랐다. 이래서야 심장마비가 온다 해도 할 말이 없다.
가까스로 호흡을 고른 후 시선을 들어보니, 연인은 속옷조차 걸치지 않은 알몸 그대로 침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한껏 발기한 흉기가 연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끄덕끄덕 위아래로 용두질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각처럼 늘씬하게 뻗어 내린 등줄기 위로 길게 핏자국이 이어져 있는 것도 보였다. 자신의 손톱이 낸 상처였다. 화끈한 열기가 머리끝까지 덮쳐들었다. 새빨개진 얼굴을 자라목처럼 움츠리며 인환은 허겁지겁 시선을 피했다.
치솟은 욕망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거침없이 문을 나서는 연인을 보니 새삼 연인의 변화가 절실하게 느껴졌다. 흥분 상태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듯한 연인의 과도한 성욕에도, 그럼에도 개의치 않는 듯 태연자약한 수컷의 뻔뻔스러움에도 모두 서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직 어린 풋풋한 고등학생일 때에도 인환의 정신 연령을 훌쩍 추월해 있던 연인이었다. 완전히 성장해버린 낯선 청년은 말해 무엇 하랴. 더 조심스럽고, 더 부끄럽고, 더 자격지심이 일고, 주체할 수 없이 더 휘둘리게 되겠지. 그래. 그 이상으로 더, 더 압도적으로 반하게 되겠지…….
어떻게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몇 배는 더 멀어진 것만 같았다.
한동안 멍하니 서글픈 상념을 곱씹고 있다가 인환은 화들짝 놀라 부랴부랴 침대에서 내려섰다. 걸을 때마다 하반신이 아프고 컨디션 또한 바닥이지만, 그렇다고 침대에 얌전히 누워 연인을 하인처럼 부리고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콘솔 위에 얌전히 개켜져 있던(이 역시 꼼꼼한 연인의 작품이리라) 트레이닝팬츠와 티셔츠를 서둘러 주워 입었다. 성급한 움직임 탓에 가라앉았던 어지럼증이 도지는 것도 같았지만 참을 수 있었다. 아니, 참을 것이다. 코끝으로 파고드는 전복죽 냄새와 고소한 빵 냄새들이 자신의 나태함을 질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거실로 나가니 연인은 여전히 벌거벗은 채로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기도 하고 그 이상으로 부끄럽기도 해서, 인환은 알몸의 연인에게서 되도록 시선을 피한 채 조심조심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마해영이 끓여주고 간 전복죽이 인환의 몫, 연인을 위해서는 구운 식빵과 계란 프라이, 그리고 아무렇게나 썬 햄 덩어리가 고작이었다. 초라한 식탁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자니, 새삼 연인에게 미안해졌다. 오늘마저도 연인이 와주리라곤 예상 못 했기에, 토요일 아침이면 평창동 아줌마를 불러 준비해두곤 했던 전통 한식 요리 역시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너 빵 싫어하는 거 아는데…… 미안…….”
“…….”
변명하듯 사과를 흘리는 인환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잠시 고요한 시선이 인환의 얼굴로 떨어졌지만 그뿐, 연인은 냉장고에서 꺼내 든 우유를 커다란 머그잔에 듬뿍 따라 마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미적거리며 그런 연인의 눈치를 살피던 인환도 마지못해 식탁 앞에 앉았다.
안 그래도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식사하는 것을 꺼리는 연인이었다. 토요일 저녁 식사는 마지못해 먹어주긴 하지만, 아무리 먹고 가라고 애원해도 다음 날 아침이면 ‘집에 가서 먹겠습니다’란 냉랭한 대꾸와 함께 서둘러 집으로 사라져버리는 연인이었다. 그런 연인에게 있어 정성을 다해 준비한 최고급 한식 요리든, 메마른 빵 쪼가리든 둘을 구분 짓는 것은 애초부터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전복죽은 딱 먹기 좋을 만큼 데워져 있었다. 식욕도 없고, 마해영에겐 미안했지만 이미 어젯저녁과 오늘 아침의 끼니가 되어준 전복죽에도 충분히 물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인환은 눈앞의 죽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워냈다. 연인이 차려준 저녁 식탁이었다. 연인이 덥혀준 죽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연인 역시 맛없다는 티는 조금도 내지 않은 채 그 몫의 접시들을 깨끗이 비워내고 있었다. 거구의 나신이 식탁 앞에 앉아 무심하게 식사를 하는 모습은 너무나 생경해서, 안 그래도 형편없는 저녁 식사를 연인에게 떠넘기고 말았다는 자책감으로 풀이 죽어 있는 인환을 더더욱 주눅 들게 했다. 포크로 찍은 햄 덩어리를 입안 가득 욱여넣는 모습을 슬며시 훔쳐보다가 이내 설핏 몸서리를 치며 시선을 내렸다. 커다랗고, 압도적이고, 위험천만한 정글의 맹수가 느릿느릿 무심하게 사냥감을 씹고 있었다. 눈앞의 낯선 맹수가 진실로 자신이 눈물겹게 짝사랑하고 있는 연인인지 문득 의심스러워졌다. ……왜 그래. 왜 그렇게 변했니. 물으면 대답해줄래? 그럴래, 위야……? 차마 토해지지 못할 애달픈 물음이 내내 입술 언저리를 맴돌았다.
띠리리리리∼∼∼∼.
막 식사를 끝내고 연인이 찾아다준 약봉지와 물 컵을 받아 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대로 무시할까 싶었지만, 약을 다 삼키고 나서도 꽤나 오랫동안 벨이 울려 마지못해 수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인환 씨?]
마해영이었다.
[몸은 좀 어때요? 죽 먹고, 약도 꼬박꼬박 먹고 있죠? 또 열이 오르거나 하진 않고?]
마해영답게 쿨하고 나른한 어조였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애정 어린 염려를 못 알아챌 리가 없는 자신이었다. 지난 나흘간의 헌신적인 친절이 새삼 뇌리를 스치며 코끝을 찡하게 했다.
“……괘…… 괜찮아요, 형. 많이 좋아졌어요. 걷기도 훨씬 편해졌고…….”
[진짜루?]
“후후, 네, 형. 진짜로요.”
[음, 목소리엔 힘이 좀 돌아온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직접 얼굴을 봐야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건데…… 음, 음……. 그놈이 나빠. 그놈 때문에 아직 제대로 안심하지 못하잖아요.]
“……그놈?”
[아까 인환 씨 집에 들렀다가 그 애송이 강간범한테 면전에서 쫓겨났지 뭐야. 짜릿한 스트립쇼 하난 덕분에 잘 봤지만. 강간범 주제에 노출증까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요.]
맙소사!
“……그…… 어…… 언제요, 형?”
[출근하기 전에. 한 5시쯤 됐었나?]
그제야 출근 전에 잠깐 들르겠다던 어젯저녁의 작별 인사가 겨우 생각이 났다. 기절했을 때 들렀던 모양이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맹수로 환골탈태한 연인이 친절하게 마해영을 맞아들였으리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식탁을 치우고 있던 연인에게로 슬쩍 시선을 주니, 부쩍 사늘해진 시선이 당혹감으로 얼굴을 붉힌 인환을 핥듯이 살피고 있었다. 부랴부랴 시선을 내리곤 수화기를 꼭 움켜쥐었다.
[싸가지가 바가진 줄은 알았지만 어째 몇 달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기고만장해졌더군요. 더 위험스러워졌기도 하고. 잔뜩 흥분한 몸을 해가지구선 물어죽일 듯이 노려보는데 정말 섬뜩했다구, 인환 씨.]
“…….”
[얼굴만 보고 간다는데도 극구 자기가 돌볼 거라고 신경 끊으라데? 허, 참.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애송이 강간범 주제에. 허긴 이제 더 이상 애송이라고 할 순 없겠더만요. 조만간 우리 손 사장까지도 찜 쪄 먹겠어.]
“……죄송해요, 형…….”
[……괜찮은 거지? 힘들면 말해요, 인환 씨. 우리 손 사장 끌고 가서 본때를 보여줄 테니까.]
“안 돼요!”
[…….]
“……저…… 절대 안 돼요, 형! 그러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아요.”
[…….]
농담이란 걸 알면서도 자동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 마해영의 저 무시무시한 조폭 애인이 당장이라도 쳐들어와 연인을 두들겨 패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아…… 아시잖아요…… 문제는 제 쪽인걸요.”
[…….]
“……기운 차리면 가게 들를게요. 정말 괜찮으니까 이제 더 이상 제 걱정은 마세요, 형.”
[……그래요. 기운 차리면 가게로 와요. 그때 다시 얘기해, 인환 씨.]
“네. 들어가세요.”
[몸조리 잘해요. 또 전화할게요.]
“네, 형.”
전화가 끊기고도 한참 동안 수화기를 든 채 질겁한 새가슴을 진정시켰다. 정말로 연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은 견딜 수 없으리라. 그리 가슴 아픈 상황을 맞느니, 차라리 연인에게 몇 번이고 강간을 당하고 말리라…….
“형이라니, 어떤 형입니까?”
“흐엑!!”
갑자기 시야를 가로막은 거대한 그림자에 저절로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기겁한 손아귀에서 흘러 떨어지는 수화기를 길고 우아한 피아니스트 신동의 손이 가볍게 잡아채더니 전화 받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벌거벗은 정글의 맹수. 연인이었다. 식탁 정리를 마쳤는지 어느새 인환 가까이 다가온 연인이 시퍼런 냉기를 풀풀 풍기며 서 있었다.
“선생님을 몹시 걱정해주시는 것 같군요. 이복형인가요? 이복형제들과는 사이가 안 좋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딘가 잔뜩 뒤틀린 어조였다. 이성으로 똘똘 뭉친 차디찬 냉기가 아니라면 마치 윽박지르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이복형이 아니라…….”
“아니라구요?”
“……어…… 어어. 해…… 해영 형…… 해영 형이야. 미메시스의. 아까 들렀다면서……?”
“…….”
죄인처럼 주눅이 들게 만들던 냉담한 추궁이 겨우 멈췄다. 그러나 시퍼런 불길이 이글거리는 시선 공격은 여전했다. 마치 채찍을 맞고 있는 것처럼 온 신경이 아프게 느껴졌다. 자신의 무언가가 또 연인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래요. 아까 선생님께서 주무실 때 마 사장님께서 들르셨습니다. 많이 걱정하시더군요.”
“……어…… 어어.”
“정말 선생님을 많이 아끼시나 봅니다. 전엔 잘 몰랐는데……. 그때 윤열이 형 일도 그렇고…… 그렇게 두발 벗고 도와주시고…… 웬만해선 그러기 쉽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응.”
“그러고 보니 그분도 게이시죠?”
“어? 어, 어어…… 그, 그렇지.”
“……요즘도 미메시스에 자주 가십니까?”
“어?”
“미메시스 말입니다. 게이 바요.”
“어? 어어…… 가…… 가끔…….”
“거기 말고도 자주 출입하시는 단골 게이 바가 또 있나요? 물론 있으시겠죠?”
“……어? 어어……?”
“자꾸 되묻는 것은 좋지 않은 말버릇인 것 같군요. 기분이 몹시 나쁩니다. 매번 그렇게 말귀를 잘 못 알아들으시는 겁니까?”
“……어? 어, 아니…… 그…… 그게…… 저기…… 저기, 미안…….”
“그래서요?”
“……?”
“게이 바요. 단골 게이 바.”
“……어? 아아, 게이 바…… 그…… 글쎄 잘 기억이…… 요즘엔 미메시스만 가끔 가는데…….”
“그래요? 미메시스는 좀 고리타분하지 않나요? 다른 게이 바에선 마음만 맞으면 즉석에서 섹스도 가능하다고 하던데, 마 사장님은 자유분방한 분위긴 싫어하시나 봐요?”
“……그…… 글쎄…… 그건 나도 잘…….”
“하긴 선생님과 친하신 걸 보니 대충 짐작이 갑니다. 선생님도 게이치곤 좀 보수적이신 편이니까요.”
“……어…… 어어, 그런가……?”
“네. 친하실 수밖에 없겠죠. 그렇겠죠.”
“……어어…… 그, 그래…….”
“그렇게 친하고 걱정해주시는 선배 형이 있어서 저도 무척 안심이 됩니다. 고마운 일이죠.”
“어. 으응…….”
“…….”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보일 듯 말 듯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던 몸은 이젠 여봐란 듯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그저 시퍼런 분노의 불길만을 확연히 감지할 뿐, 연인이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연인은 이것저것 질문을 했고, 기분이 나쁘다고 했고, 안심이 된다고도 했다. 고마운 일이라고도 했다. 그래. 고마운 일이라고 하니 됐어.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맙다는 건 좋은 일이잖아. 그거면 돼. 그거면 된다구. 겁내지 마. 떨지 마. 자꾸 떨면 연인이 또 기분 나쁘다고 할지도 몰라. 더 화를 낼지도 몰라…….
군함처럼 커다란 발이 보였다. 연인의 발이었다. 억센 뼈와 단단한 혈관들이 도드라져 보이는,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드는 아름답고도 강인한 맨발이었다. 서양 모델처럼 팔다리도 유난히 기럭지가 길더니, 발가락까지 유별나게 길고 우아했다. 허벅지와 종아리를 가득 뒤덮고 있는 갈색의 체모가 발등과 엄지발가락에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반 곱슬로 약간 동글게 말려 있는 그 모양새가 사랑스러웠다. 깔끔하고 가지런하게 깎여 있는 분홍색의 예쁜 발톱들도 눈물이 날 지경으로 사랑스럽기는 한가지였다.
“……침대로 가요.”
나지막하게 억눌린 바리톤이 귓가를 울렸다.
소스라치듯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인환은 자신이 꽤 오랫동안 연인의 두 발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채찍으로 후려치는 듯, 혹은 날카로운 이빨로 인정사정없이 물어뜯는 듯 거듭되던 연인의 냉랭한 힐문도 그친 지 오래라는 사실도. 인환이 연인의 발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연인 역시 묵묵히 인환의 둥그스름한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대로 가요.”
되풀이해 토해지는 명령과 함께 연인의 손이 다가왔다.
일체의 반항을 허락하지 않는 단단한 악력이 인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연인이 이끄는 대로 인환의 몸은 종잇장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어지럼증이 도진 건지, 기력이 떨어진 건지, 흐릿해진 시야로 밟혀든 풍경들이 느리게 원무를 췄다. 인환의 상반신을 거의 품 안에 끌어안다시피 하고서 연인은 침실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언제 또 발기했는지 알 수 없는 야수의 흉기가 위로 활처럼 휜 채 연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완벽하게 무르익은 수컷의 뻔뻔스러움이었다.
하아아.
가느다란 한숨이 긴장으로 메말라 있던 인환의 입술 끝을 적시며 조용히 흘러나왔다.
공기가 변했다. 극심한 떨림이 가라앉았다는 것을 알았다. 시퍼런 불꽃을 너울거리며 타올랐던 연인의 분노가 가라앉았다는 사실은 그보다 먼저 깨달았다.
연인이 화를 내지 않는 한 자신이 겁내야 할 일은 생기지 않는다. 아직은 낯설기만 한 정글의 맹수가 화를 내는 일도 좀처럼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맹수는 강하다. 맹수는 상처받지 않는다. 아니, 상처를 조금 덜 받는다. 상처를 받아도 금방 아문다. 곪지 않는다. 그러니까 화내지 않는다. 아프지 않으니까. 아프지 않을 청년이다. 어른이다.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 자신보다 훨씬, 훨씬 어른일 것이다.
그래. 충분했다. 그거면 아주 충분했다. 연인의 까닭 모를 변화를 반겨 맞을 이유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