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1991년 5월. 장인환(張仁歡)
연인은 일요일 밤이 돼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가주었다.
역시 도무지 까닭 모를 변화였다. 연인은 그 밤 내내 새벽 무렵까지 인환의 몸을 장난감처럼 움켜쥔 채 격렬한 자위를 했다. 조금 걱정했던 것과는 반대로 인환까지 흥분을 시키며 사정을 유도하진 않았지만 끊임없이 인환을 만지고, 또 그 스스로를 만지게 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인환의 손목을 잡아끌며, 마치 최음제라도 맞은 양 온 밤 내내 거대하게 발기 중인 연인의 생식기를 애무하게끔 했다. 지칠 대로 지친 인환이 잠이 든 것은 자정 무렵으로, 잠깐잠깐 의식이 돌아왔을 때에도 인환의 시선에 잡힌 연인은 여전히 뿌연 스탠드 불빛 속에서 자위를 하고 있었다. 때론 인환의 손가락 사이에 성기를 문지르고 있기도 했고, 때론 인환의 아랫배나 허벅지 안쪽, 그리고 치부 사이를 맹렬하게 비비고 있기도 했다. 어슴푸레 날이 밝을 무렵 겨우 잠이 들었던 연인은 두어 시간쯤 후에 깨어나 다시금 지난밤의 광기를 연출했다. 정오가 거의 다 돼서야 침대에서 겨우 벗어나 함께 샤워를 했고, 이어 늦은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토요일 저녁 식탁 메뉴와 별다를 것이 없는 초라한 식탁이었다. 역시 연인이 식탁을 준비했으며, 식사 후 식탁 정리를 한 이도 연인이었다. 연인이 일요일 정오까지 남아 있는 것도, 게다가 함께 아침 식사까지 하는 것도 모두 믿어지지가 않아, 인환은 감격하기에 앞서 무척 어리둥절해해야만 했다. 물론 연인은 식사 후에 다시 인환을 침실로 끌고 가는 것으로 인환의 당혹감을 피크로 치솟게 했다. 상황이 그쯤 되자 인환은 연인의 상태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연인이 섹스 중독증에 걸린 게 아닐까, 이렇게나 많이 사정하다가 혹시 복상사를 일으키는 건 아닐까, 무언가 달리 고민이 되는 일이 있어 이렇게 무리하는 건 아닐까 등등, 걱정이 바이러스처럼 뭉게뭉게 증식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연인의 광기에 가까운 색탐은 해질 무렵이 되자 겨우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수면 부족에다 과도한 정사의 흔적이 여실한 퀭한 눈을 하고서 그저 인환을 갈퀴처럼 끌어안은 채 누워 있기만 했다. 잠깐 졸기도 하고, 주방에 나가 물을 마시기도 하고,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기도 했지만, 밤이 이슥토록 인환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것 같다가도, 느닷없이 달려들어 인환의 온몸에 미친 듯한 키스의 비를 내리기도 했다. 간밤에 심하게 깨물린 상처에 더해 이미 인환의 몸은 불그스름한 피멍과 키스 마크들로 도배가 돼 있는 상태였다. 물고 빨고 핥고, 종내는 발기해서 이미 연인의 체액으로 범벅이 돼 있는 인환의 하반신에다 다시금 성기를 비비며 길게 사정을 했다. 연인이 제정신을 차린 시각이 정확히 언젠지는 잘 몰랐지만,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가 깨보니 침대 옆은 텅 비어 있었다. 만 이틀 동안 거실 소파 위에 얌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책 배낭과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현관 앞의 군함처럼 커다란 농구화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어 있었다. 마침내 연인이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적어도 더 이상 연인의 복상사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인환은 연인을 만나게 된 이래 처음으로 연인과의 헤어짐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물론 그조차도 잠깐의 안심에 불과하리라곤 그날의 인환으로선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만.
적어도 돌아오는 주말까지는 연인을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인환이 느닷없는 연인의 방문을 받은 것은 그렇게 이별한 지 만 하루도 안 된 다음 날 저녁 무렵의 일이었다.
월요일이었다.
병원에 가서 실밥을 뽑아야 했기에 인환은 제법 일찍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도 두 그릇쯤은 남은 전복죽을 눈물을 머금고 먹어치운 후 샤워를 했고, 대충 집 안 청소도 했다. 평창동 아줌마를 부를까 싶었지만, 분명 자신의 반쪽이 된 얼굴을 보고 걱정을 할 것이 뻔하기에(나아가 엄마에게 고자질을 할 것도 불을 보듯 뻔하기에) 그만두었다. 죽이라면 지긋지긋해서 간단한 장도 봐다놓았고(그래봤자 식빵과 초밥, 치킨, 샐러드 같은 즉석 요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른 아침부터의 중노동들에 지쳐 잠시 낮잠을 자기도 했다.
어느 미술 잡지의 인터뷰 요청 전화로 잠이 깬 김에 기하 선배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이틀 전에 퇴원했다는 한세혁의 상태를 재차 묻기 위해서였다. 아직도 놈에 대한 원한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존경하는(물론 실력만!) 선배였고 또 동료였다. 뭐라 했든 자신을 이유로 심하게 다쳐 입원까지 했다. 마음이 쓰이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기하 선배는 문병을 가라지만, 그래서 화해하라지만 아직 그러기엔 인환 자신이 입은 대미지도 만만찮았다. 그날 연인의 강간이 한세혁과의 주먹다짐에도 원인이 있지 않을까 조금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조만간 화해할 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착한 기하 선배를 일단 안심시킨 후 전화를 끊었다. 용서하진 않아도 언젠가는 화해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분야에서 뒹구는 한, 아주 안 보고 살 수야 없지 않은가.
마트에서 산 초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약을 먹었다. 하반신의 상태는 시시각각 나아지고 있었다. 오늘 아침 겨우 변을 봤는데 우려했던 심각한 유혈 사태는 없었다. 걸음을 걷기도 어제와는 또 달랐다. 이대로 약만 꾸준히 먹고 연고만 발라도 금방 완치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그래도 오늘 병원엔 반드시 가야 한다.
또다시 낯선 사람에게 치부를 보여야 하는 일이 끔찍해, 미루고 미루다 병원에 들른 시각이 오후 4시쯤. 육체의 고통보다는 지독한 수치감에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하고 집에 돌아온 시각이 5시 30분쯤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잠을 자는 것으로, 인환은 수치로 입은 마음의 상처를 가까스로 달랬다.
비몽사몽한 의식을 깨운 것은 현관 벨소리였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무심코 시계를 살피니 시곗바늘은 7시 1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들린 벨소리에 노곤한 정신이 겨우 맑아졌다. 누구지?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중얼중얼, 강제로 깨어난 데 대한 짜증을 입술에 걸며 몸을 일으키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근…… 순간, 심장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연인이다. 연인밖에 없다. 현관 비밀 번호를 알고 있는 이는. 아니, 아니, 마해영도 알고 있긴 하지, 참. 그럼 마해영인가?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요란스레 펌프질을 하고 있었다. 절대 연인일 리가 없다고 도리질을 하면서도, 헤어진 지 하루 만에 연인이 또 방문을 할 리가 없지 않느냐고, 이성은 발작적으로 부정적인 발언을 거듭 쏟아내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요동치는 심장은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파르륵하니 떨림을 시작한 손가락도 흥분과 기대와 불안과 두려움과 기쁨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인환의 이성을 비웃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이다. 공기가 변했다. 침실 문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단숨에 변해버린 공기가 대신 알려주고 있었다. 저 문 너머에 자신이 미치도록 사랑하는 이가 와 있다고.
휘청거리며 침실 문가로 걸어갔다. 자기도 모르게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혹시 침을 흘린 게 아닐까 싶어 입가도 닦고 있었다. 눈곱이 끼었을까 부랴부랴 눈을 비비기도 했다. 번개처럼 시선을 내려 옷차림을 확인했다. 세련된 카키색 면바지와 군청색 반팔 티다. 병원에 가느라 그나마 옷다운 옷을 걸쳤던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문을 열었다. 거실로 한 걸음을 나서기도 전에 시선은 곧장 보고 싶은 상대를 찾아냈다.
연인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아직 신발을 벗지 않고 있어서 혹시 그대로 되돌아 나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잠시 불안한 의심을 했다. 땀으로 푹 젖은 낡은 청바지와 하얀색 폴로 티. 커다란 책 배낭. 그제와 별다를 것 없는 차림새다.
빤히 바라보는 고요한 시선.
아직도 낯설기만 한 정글의 맹수지만 그제 처음 거실에서 부딪쳤을 때처럼 시린 냉기를 뿜어내고 있지는 않다. 알 수 없는 분노로 펄펄 끓고 있지도 않다. 다만 같은 것은 병적일 정도의 과도한 성욕. 음습한 야수의 욕망. 통째로 씹어 삼킬 듯한 수컷의 적나라한 시선이었다.
아직인가 보았다. 연인을 사로잡고 있는 지독한 욕구 불만은 어제로 몽땅 해소된 것이 아니었나 보았다. 야수는 설명하지 않았다. 망설이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초연하게 그 스스로를 인환에게 들이밀고 있었다. 그래서 인환은 야수 대신 스스로 설명을 하고, 망설이고, 또 부끄러워했다. 욕구 불만 때문이구나. 어떻게 하지? 왜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거야, 새삼스럽게.
온몸을 발갛게 물들인 채 당혹해하는 인환에게 한동안 빤히 시선을 주던 야수가 이윽고 신발을 벗곤 거실을 가로질러 가까이 다가왔다. 그제처럼 소파에 책 배낭을 던져놓고, 걸음을 옮기면서 동시에 땀에 흠뻑 젖어 있는 티셔츠를 벗어젖힌다. 바지 벨트를 풀어 청바지도 벗어 던지고 있다. 땀에 젖어 잘 벗겨지지 않자 조금 짜증이 났는지 속옷과 함께 벗겨 내리는 손길이 조금 거칠었다. 거실 소파를 가로질러 침실 가까이 다가섰을 무렵엔 연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속옷을 벗어 던질 때만 해도 시커멓고 무성한 치모 아래 파묻혀 있던 성기는 어느새 활처럼 위로 휜 채 한계까지 발기해 있었다.
야수의 시선이 다시금 똑바로 인환을 향했다. 약간 붉게 충혈돼 있는 흰자위를 보니 그제의 수면 부족이 아직 회복이 덜 된 모양이었다. 단 10센티도 떨어져 있지 않은 바로 코앞까지 연인이 다가서자, 땀 냄새와 비누 냄새가 뒤섞인 연인의 강렬한 체취가 훅하니 끼쳐들었다. 인환의 몸은 반사적으로 파르르하니 전율했다.
“……하…… 학교에서 바로 오는 길이니?”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거듭거듭 스스로 설명을 하고, 망설이고, 또 부끄러워하는 중인 인환이 별 소용없을 대화를 꺼내본다.
“……바…… 밥은 먹었어? 아직 안 먹었지?”
“…….”
“……지…… 지금 차려줄까?”
“…….”
“……배고플 텐데…….”
“…….”
“……그…… 그래도 샤워 먼저 해야지…… 땀 많이 흘렸어, 너…… 샤워하고 하자, 위야…… 나도 오늘 나갔다 와서 더러워…… 땀도 좀 흘렸구…… 병원에도 들렀기 때문에…… 너…… 너 찝찝한 거 싫어하잖아…….”
“…….”
정글의 야수는 물론,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설명하지 않으며 설명할 필요도 없고 가차 없으며 수치도 모르는, 뭇 짐승들의 왕이기 때문이었다.
손목이 붙잡혔다. 아픔이 느껴질 만큼 단단한 악력이었다.
전광석화처럼 다가든 연인의 입술이 크게 벌어지더니 인환의 턱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힘차게 빨아들이다간 이내 자근자근 깨물고 있었다. 순식간에 다리의 힘이 풀리며 주르륵 무너지는 몸을 연인의 단단한 팔이 수월하게 받아 안았다. 입가가 서로의 타액으로 범벅이 될 때까지 턱과 그 주변을 물고 빨던 연인이 이내 인환의 벌어진 입술로 배를 갈아탔다. 입안 깊숙이 까끌한 연인의 혀가 뱀처럼 요동치며 파고들었다. 잇몸을 애무당하고 혀가 깨물렸다. 뒤로 피하면 단숨에 낚아채선 비비고 빨고 물어뜯어 혼이 쑥 빠지게 만들었다. 흥건한 연인의 타액이 목구멍 속으로 물처럼 쉴 새 없이 넘어갔다. 서비스가 아니었다. 남창의 예의 바른 기교란 더 이상 기억조차 나지 않을, 음탕하고 천박하고 야하고 지저분한 욕망이었다. 짐승의 키스였다.
온몸이 짜부라질 듯한 강한 포옹과 딥 키스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금세 숨이 차올라 폐가 잔뜩 부풀었다. 어쩔 수 없이 흥분하기 시작한 생식기가 연인의 탄탄한 허벅지 근육에 문질러지고 있었다. 티셔츠 위로 비벼지고 있는 것은 자신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연인의 거대한 흉기였다.
더 이상 숨을 참기 힘들다는 절박감이 들 무렵 연인의 입술이 귓불 근처로 옮겨갔다. 귓구멍 속으로 혀를 밀어 넣고 돌리다간 이내 귓바퀴를 자근자근 씹어댔다. 오랫동안 번갈아 연인의 공격을 받은 양쪽 귀는 연인의 타액으로 초토화가 됐다. 도톰한 귓불들은 그보다 더 오랫동안 연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폭풍 같은 연인의 키스에 휘둘리며 그렇게 침실로 끌려갔다.
침대에 밀어붙여지며 순식간에 알몸이 됐다. 처녀를 겁탈하듯 갈급하고 흉포한 손길이었다. 벌거벗겨진 나신 위로 역시 벌거벗은 야수의 몸뚱이가 무자비하게 겹쳐들었다. 두 사람분의 체중을 실은 매트리스가 삐걱삐걱 신음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신음하고 있는 것은 인환 자신이었다.
연인은 자정이 넘어 돌아갔다.
안타까웠지만 저녁을 굶긴 채 돌려보내야만 했다. 연인의 품에 갇혀 잠시도 침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연인은 인환이 잠에 떨어진 틈을 타 자취를 감추었다. 거실 바닥에 팽개쳐둔 청바지와 팬티와 티셔츠가 사라졌고, 책 배낭과 군함같이 커다란 농구화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그리고, 도무지 믿기 힘들었지만 연인은 다음 날 저녁에 또다시 나타났다. 역시 청바지와 티셔츠와 팬티와 책 배낭, 그리고 군함 농구화들과 함께였다.
자정 무렵 돌아갈 때까지 장장 다섯 시간 가까이 연인과 한 일이라곤 물론 섹스뿐이었다. 삽입이 배제된 유사 섹스. 연인은 또다시 저녁을 굶게 됐으며, 인환 역시 저녁을 굶어야 했고, 전날보다 더 피로에 지친 몸으로 침대에 밀어붙여져야만 했다. 다음 날 새벽에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뜬 인환을 반긴 것도 역시 책 배낭과 청바지와 군함 운동화들이 사라진 텅 빈 거실이었다.
설마 오늘은 아니겠지 했던 인환을 비웃기라도 하듯, 연인은 다음 날인 수요일에도 어김없이 인환의 빌라에 나타났다. 어쩐지 이번엔 아이템들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우선 책 배낭이 없는 빈손이었고, 청바지 대신 검정색 트레이닝팬츠가, 그리고 낡은 검정색 야구 모자와 흰색 민소매 티가 연인의 늠름하고 아름다운 몸을 매혹적으로 감싸고 있었다. 군함 농구화도 검정색 스포츠 샌들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동네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무턱대고 차를 집어타고 달려온 것처럼도 보였다. 무엇보다도 찾아온 시간대가 달랐는데, 학교 수업이 끝나는 해질 무렵이 아니라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축제 기간입니다.”
의문을 담고 홀린 듯 바라보는 인환을 향해, 연인은 다소 쌀쌀맞은 어조로 마지못해 대답을 흘려주었다.
……축제라. 그렇구나. 축제 기간이라 수업이 없었던 모양이로군. 그래도 그렇지. 처음 맞는 대학 축제를 팽개치고 집에서만 빈둥거리다니 너무하잖아…….
하지만 그게 또 너무나 연인다워서 인환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 약간의 시간 여유가 연인의 이상 성욕을 누그러뜨리는 데도 도움을 준 모양이었다. 연인은 지난 며칠처럼 그렇게 무조건 인환을 침대로 끌어들이진 않았다. 아틀리에에 도착한 즉시 욕실로 들어가 샤워부터 했으며, 혹시나 해서 인환이 정성껏 준비해두었던 진수성찬을 찾아내 포식을 했고, 인환이 만들어준 딸기 주스까지 말끔히 비워냈다. 소화를 시키려고 했는지 인환을 끌고 빌라 밖으로 나가 한 시간 가까이 산책까지 했다. 돌아오는 길엔 근처 공원에 들러 농구를 하고 있던 소년들 틈에 끼어 15분짜리 내기 게임도 치른 연인이었다. 빌라에 도착해 다시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씻어냈고, 인환의 몸도 씻어주었다. 물론 서로의 몸을 씻어주며 서로의 성기를 만져주는 자위를 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달라붙어 섹스를 하기 시작한 것은 저녁 식사까지 제대로 마친 저녁 8시 무렵이었다.
연인은 그날 밤 자정엔 돌아가지 않았다. 역시 축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날밤을 새우다시피 섹스를 했다. 새벽 무렵엔 정말로 참기 힘들었는지 인환의 다리를 활짝 벌려 항문과 내벽의 상태를 확인했다. 많이 아물었지만 역시 삽입을 했다간 다시 찢어질 위험이 농후했기에, 상처를 들여다보는 연인의 얼굴은 실망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수치감에 온몸이 시뻘게진 채 벌벌 떠는 인환을 아랑곳 않고, 연인은 인환의 손을 끌어당겨 또다시 격렬한 자위를 시작했다.
연인은 인환이 차려준 아침까지 먹고 다음 날 오전 느지막이 동생들에게로 돌아갔다. 지난 며칠과 같으면서도, 또한 묘하게 다른 날이기도 했다.
그렇게 수요일과 목요일을 보내고 금요일이 되었다.
연인은 금요일 밤 늦게 다시 찾아왔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새벽 1시가 거의 다 된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아이템이 또 바뀌어 있었다. 평소의 연인에 비하면 무척이나 화려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청바지는 새것이었고, 못 보던 붉은 셔츠는 인환도 알 수 있는 고가의 명품이었다. 현란한 모양새의 양가죽 스니커즈까지, 도무지 연인의 것이라곤 믿기 힘든 차림새에 순식간에 잠이 다 달아난 인환이었다. 연인의 얼굴엔 불그스름한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얼굴이 아니더라도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자극하는 술 냄새를 통해 연인이 꽤나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축제 때문에요.”
역시 의문이 가득 담긴 인환의 시선에 퉁명스러운 단답이 떨어졌다. 구체적인 사연은 알 수 없었지만, 그 한마디로 모든 게 납득이 갔다. 분명 연인의 의사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학교 친구들 때문이겠지. 친구들에게 끌려 마지못해 캠퍼스 곳곳을 누비는 연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러고 보니 연인이 걸치고 있는 옷들도 어딘가 어색하다. 사이즈도 꼭 들어맞지 않는 것 같고, 한 번도 누군가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섬유 냄새까지 맡아질 정도로 새것이다. 틀림없이 친구들 중 하나의 소유물일 것이다.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연인은 꽤나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귀찮은 듯이 옷을 벗었고, 마지못해 욕실로 가 샤워를 했다. 인환의 몸엔 여전히 강한 욕망을 느끼는 듯했지만 다른 날처럼 섹스를 시도하진 않았다. 그저 알몸으로 만든 인환을 품 안에 꼭 끌어안은 채 얌전히 잠을 청했을 뿐이었다. 하긴 새벽 1시였다. 그의 취향에 반해 하루 종일 시달렸을 테니 지쳤을 법도 했다. 뿐이냐, 근 일주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색에 탐닉했던 연인이었다. 아무리 한창때의 나이라지만 정상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광기였다. 진심으로 연인의 복상사까지 걱정한 자신이 아닌가.
다음 날 아침, 알코올 기 때문이었는지 피로 때문이었는지, 연인은 연인으로선 매우 드문 늦잠을 잤다.
8시가 돼도 일어날 생각을 않는 연인이 걱정이 된 나머지 인환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자, 연인은 묵직한 눈꺼풀을 겨우 들며 인환을 향해 팔을 뻗어왔다. 연인의 팔에 끌려 중심을 잃은 몸이 연인의 몸 위로 넘어졌다. 허리를 조여 안는 연인의 단단한 팔을 통해 연인이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연인의 눈꺼풀이 마치 새의 날갯짓처럼 느리게 파닥이는 것이 보였다. 초점이 불분명한 아름다운 눈동자가 나른하게 인환의 시선을 잡고 있었다. 길고 긴 속눈썹이 애수 어린 눈망울에 매혹적인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홀린 듯 시선을 마주한 인환을 굽어보고 있는 연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불가사의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진짜 온기는 아니다. 아직 남아 있는 몽롱한 수면 기운이 연인을 무방비하게 만든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꿈속에서라면 연인은 자신을 덜 미워할는지도 몰랐으니까.
“……일어나서 아침 먹어야지……. 오늘도 학교에 가야 하는 거 아냐?”
무방비한 핸섬한 얼굴에 새삼 반한 나머지, 인환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마지못한 채근을 했다. 마주 안은 연인의 허리와 옆구리를 어루만지고 있던 인환의 두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대답은 연인의 느릿느릿한 모닝 키스였다. 어쩐지 몹시 설레고 가슴이 아픈 키스이기도 했다. 연인의 입안에서는 술맛이 섞인 아릿한 단내가 났다. 너무나 달콤해서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키스는 오래,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부드럽고 달콤했던 접촉이 점점 격렬해지고, 가슴 아픈 무언의 고백이 난폭한 욕정으로 변할 때까지.
언제 바스 가운이 벗겨지고, 언제부터 연인의 밑으로 깔리게 됐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마냥 천사처럼 순수해 보였던 연인의 무방비한 눈시울에 언제부터 저 익숙한 야수가 들어차게 됐는지도. 그저 자연스러운 일인 것만 같았다. 무척 익숙하고 당연하게끔 여겨졌다. 정글의 맹수는 이제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인환의 세포 구석구석까지 모조리 뚫고 들어올 것만 같은 연인의 부푼 페니스가 다시금 광란을 시작하고 있었다.
서너 차례 격한 질주를 마무리한 다음에야 연인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10시가 넘어 있었다.
당연한 것처럼 아침 식사는 거의 점심 식사가 되고 말았다. 식사를 마친 연인은 서둘러 샤워를 했고, 단 5분 만에 외출 준비를 끝냈다. 역시 학교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내 연인을 해바라기하고 있던 인환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회오리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고가의 명품 셔츠와 최고급 스니커즈와 단 한 번도 사람의 손을 안 탄 멋들어진 청바지로 도배를 하고서. 절대로 연인 같지 않은, 화려한 공작새의 모습을 하고서.
연인이 사라져버린 현관문에 멍하니 시선을 고정한 채 인환은 오랫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시린 걸까. 그야 연인이 가버렸기 때문이지. ‘성욕 배출구’의 임무를 다한 늙다리 꼰대쯤은 더 이상 상대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5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눈부신 신록으로 가득한 젊음의 시절이었다. 한 걸음만 밖으로 떼기만 하면, 늙다리 ‘성욕 배출구’ 대신 또래의 싱싱한 젊음들이 성찬처럼 연인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젊음은 그 자체로 축제였다.
하지만 오늘은 토요일이기도 했다. 연인과의 날이었다. 연인과의 데이트가 있는 날. 아니, 남창으로서의 의무가 있는 날. 남창은 적어도 오늘만은 일체의 스케줄을 작파하고 늙다리 꼰대와 함께 어울려줘야만 한다. 돈으로 남창을 산 야비한 물주이기도 하고, 그 위치가 짜증 난다 싶으면 종종 ‘성욕 배출구’가 돼주기도 하는, 무척 재수 없는 꼰대. 절름발이에 늙다리인 게이와 말이지. 아무리 싫고 혐오스러워도 오늘만은 함께 지내주어야만 한다. 그게 계약이었다. 토요일의 계약. 계약의 날이란 말이다……!
상처 입은 넋이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밉살스러운 억지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연인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이 문득 견딜 수 없게 느껴져 인환도 곧바로 외출 준비를 했다. 마냥 넋을 놓고 있다간 하루 종일 울게 될 것 같아서였다. 물론 외출이라고 해야 특별히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원래는 어제가 약속이었던 병원을 목적지로 정했다. 하반신은 거의 아문 것 같았다. 아마도 오늘 방문을 끝으로 더 이상 치부를 까야만 하는 고통은 없으리라.
연인의 화려한 매혹에 자극받아 인환도 공들여 멋을 냈다. 너무나 살이 빠져서, 1년 전에 딱 두 번을 입고 장롱에 모셔두었던 옅은 살구색의 새미 캐주얼 정장이 마냥 헐렁헐렁했다. 시계와 넥타이와 구두도 갖고 있는 중 최고급품으로 도배를 했지만, 꼬챙이처럼 마른 몸에 퀭한 얼굴이 부록으로 더해지니 도무지 멋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소년이 어른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았다.
거울 속에 비친 한심한 꼬락서니에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문득 전화벨이 울렸다.
[……선생님?!]
수화기 너머로 찾아든 상대는 뜻밖의 인물이었다.
“……혜윤이……?”
[네, 선생님! 저예요! 혜윤이요! 그동안 안녕하셨죠?!]
유난스레 밝은 목소리가 노래하는 것처럼 인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가슴이 뭉클하며 그리움과 애정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들꽃처럼 가냘프고 작은 몸집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온화하면서도 애교가 넘치는 차분한 말투가, 때 묻지 않은 순수하고 착한 성품이, 줄줄이 꼬리를 물고 기억 창고로부터 빠져나왔다. 아아, 맙소사. 정말 얼마 만에 듣는 기분 좋은 목소리인가. 지난가을 연인과 잠깐 이별한 이래 얼굴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동안 짬짬이 서로 통화를 주고받긴 했지만, 그조차도 연인과 다시 험악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요 근래엔 단 한 번도 없었다. 견디기 버거운 상처들을 연타로 얻어맞고 있어 혜윤이에게까진 미처 신경이 가 닿지 못한 때문이었다.
“……어…… 어어, 혜윤아. 그래…… 너도 잘 지냈지? 몸은 건강하고?”
어쩐지 또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인환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정말 울어버린다면 어린 혜윤이가 얼마나 당황할 것인가.
[네 선생님! 죄송해요오오∼∼∼. 그동안 연락 못 드려서요…….]
“……죄송하긴! 나도 마찬가지인걸. 그동안 나도 많이 바빴거든. 미안해, 혜윤아. 연락 자주 못 해서.”
[에이, 자꾸 그러지 마세요, 선생님. 진짜 더 죄송해지잖아요…….]
“……어어, 그래…… 그래…….”
[저기 있잖아요, 선생님. 오늘 시간 있으세요?]
“시간?”
[네. 오늘 위야 오빠 학교에 놀러 가려구요. 선생님이랑 같이요.]
“……무…… 무…… 뭐……?”
두근…… 심장이 또 철렁 내려앉는다. 순간적으로 얼굴의 핏기가 사라지며 극심한 현기증이 엄습한다. 인환은 후들거리는 무릎을 수화기를 꼭 움켜쥔 채 거실 바닥에 주저앉는 것으로 간신히 진정시켰다.
아아, 그래. 늘 이렇다. 연인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얼굴을 부딪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때마다 자신의 심장은 늘 버그를 일으키곤 한다. 그렇다. 연인은 자신에게 있어 병이다. 불치의 심장병이다.
[며칠 전부터 오빠네 학교 축제걸랑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래요. 전부터 오빠한테 구경시켜달라고 조르고 있었는데, 요번에 중간고사 잘 봤다고 오빠가 겨우 허락해줬어요. 치, 그것도 학교 빼먹으면 절대 허락 안 할 거라고 해서 오늘 토요일이라고 간신히 허락받았지 뭐예요. 진짜 울 오빠 넘 치사하죠?]
“…….”
[큭큭큭. 있잖아요, 선생님. 어제 오빠가 빨간 옷을 입었어요. 굉장히 멋졌어요. 진짜 왕자님 같더라구요. 오빠 친구한테서 빌렸대요. 노예 경매하느라 멋을 잔뜩 부린 거래요. 무지 이쁜 언니한테 낙찰이 됐는데 글쎄 무려 55만 원이었대요. 세상에나 55만 원이나 주고 울 오빠를 사다니, 그 이쁜 언니도 미쳤나 봐요. 그 돈 주고 오빠 사봤자 그냥 저녁 먹고 데이트 한 번 하는 게 다라는데 정말이지.]
“…….”
……네 오빠는 훨씬 더 비싸단다, 혜윤아. 이 세상 돈을 다 긁어모아도 네 오빠를 사지는 못한단다…….
[오늘은 오빠네 과에서 ‘일일주점’을 하는데요, 오빠도 거기 웨이터 한대요. 동동주는 안 되지만 파전이랑 제육볶음이랑 다른 안주 맛있는 거는 공짜로 실컷 먹게 해준다고 약속했어요. 오빠네 가게서 저녁 먹고 노천극장에서 하는 야외 공연도 보구요, 아참! 거기 가수 이진섭이랑 개그맨 손영철도 나온대요. 손영철이 사회 보구요, 오빠네 학교 밴드들 여럿이 연주도 할 거래요. 진짜 신나겠죠, 선생님?]
“…….”
[거기다 진짜 하이라이트는요, 선생님. 밤늦게 피날레로 테크노 파티를 한다는 거예요. 디스코요, 선생님. 저번에 수학여행 갔을 때 우리 반 애들한테서 저도 디스코 배웠거든요? 애들이 저보고 잘 춘대요, 에헤헤헤.]
“…….”
[에헴. 아무튼 그래서 저도 그 피날레를 젤 기대하고 있어요. 오빠는 저더러 어리다고 디스코도 안 가르쳐주구요, 진짜 치사하게, 막 무시하고 그래요. 그러니까 본때를 보여주려구요. 그리구 오빠는 어디 얼마나 잘 추나 봐뒀다가 못 추면 막 놀려주려구요. 에헤헤헤헤……. 맨날 뚱하고 잘 웃지도 않으면서 무슨 춤을 춘다고. 선생님도 정말 안 믿어지시죠? 오빠 춤 잘 추는 거요?]
“…….”
……혜윤아, 네 오빠는 춤 진짜로 잘 춰…… 세상 그 어떤 여자라도 홀딱 반할 정도로 정말 멋있게 잘 춘단다…… 나 같은 게이들도 몽땅 다 반할 정도로 말야…….
[……선생님? 선생님, 듣고 계세요? ……여보세요……?]
“……어……! 어어, 혜윤아. 듣고 있어.”
[헤헤, 네. 선생님! 에, 그러니깐 오늘 같이 가요, 선생님. 어어, 물론 선생님 바쁘지 않으시면요. 선생님도 너무 보구 싶구, 축제도 놀러 가고 일거양득이잖아요, 헤헤. 그쵸?]
“……아, 그게…….”
[아, 오늘 바쁘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바쁘시면 그냥 저녁때 잠깐만 뵈어도 되는데…… 오빠가 아무리 쫓아내려구 해두, 저요, 테크노 파티 할 때까지 개길 거니깐 밤늦게라도 오시면 돼요, 선생님! 네에?! 선생니임∼∼∼!!!]
……유혹이었다. 도저히 뿌리칠 수 없을 유혹이었다. 늙다리 꼰대로선 차마 눈 돌릴 수 없는 매혹이었다. 젊음의 축제였다. 언감생심 도저히 다가가기 힘든 세상이었다. 연인의 나라였다. 그 매혹의 나라를 흘낏 훔쳐볼 수 있는 기회였다.
[네에? 안 돼요? 잠깐도 시간 안 나시는 거예요? 우우, 진짜 저 선생님도 많이 보고 싶은데…… 저 혼자 돌아다니면 재미도 없을 건데…… 씨이, 휘야 오빤 잔뜩 심통 나서 안 간다구 하구…… 우웅…… 선생님, 진짜 안 돼요?!!!]
“……아, 아냐! 괜찮아, 혜윤아! 나, 나 바쁘지 않아! 약속 없어……!”
[우앗?! 정말요?!!!]
“……어…… 어어…… 정말…….”
……그래, ‘토요일’이었다.
[유우후, 신난닷!!! 울 선생님 최고!!!!]
어차피 연인과의 날이었다.
연인과의 데이트가 있는 날. 아니, 남창으로서의 의무가 있는 날. 남창은 적어도 오늘만은 일체의 스케줄을 작파하고 늙다리 꼰대와 함께 어울려줘야만 한다. 돈으로 남창을 산 야비한 물주이기도 하고, 그 위치가 짜증 난다 싶으면 종종 ‘성욕 배출구’ 가 돼주기도 하는, 무척 재수 없는 꼰대. 절름발이에 늙다리인 게이와 말이지. 아무리 싫고 혐오스러워도 오늘만은 함께 지내주어야만 한다. 그게 계약이었다. 토요일의 계약. 계약의 날이란 말이다!
“……오…… 오빠랑 몇 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니, 혜윤아? 지…… 지금 준비하면 너무 늦은 거 아닐까?”
[에이, 늦기는요! 그냥 아무 때나 오빠 주점으로 오랬어요. 헤헤, 위야 오빠야 실은 제가 아주아주 늦기를 바랄지도 모르지만요.]
“……그럼 지금 내가 마중 갈까?”
[우왓, 정말요……?!!! 아참참…… 하지만 그럼…… 선생님 불편하실 텐데…… 괜찮아요, 선생님. 전 그냥 학교에서 뵈어도 돼요. 저 버스 잘 타요. 길눈도 밝구요. 그리구 서울대는 지하철로 가면 직방이잖아요. 마중 오지 않으셔도 돼요.]
“아냐, 혜윤아. 어차피 운전해서 갈 건데 뭘. 같이 만나서 가면 더 재밌잖아. 나도 그동안 혜윤이 어떻게 지냈는지 자세히 듣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그럼 넘 죄송한데…….]
“지금 갈게, 혜윤아. 마침 옷도 다 갈아입었으니까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쫌 있다 보자, 응?”
[선생님……?!]
“끊는다아∼∼∼? 금방 갈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뭔가 더 사양의 말을 하려는 혜윤이의 의도를 재빨리 끊어버렸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인환의 손은 사시나무 떨듯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혜윤이의 해맑은 목소리를 듣기가 너무나 괴로워서 심장이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듯 서러운 피눈물을 흘렸었다. 뇌리를 왔다 갔다 하는 혜윤이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하기가 너무나 부끄러워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내내 눈을 감고 있었었다. 그럼에도 유혹의 힘은 막강했다. 도저히 손을 뻗어 움켜쥐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처럼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며 용기를 기원했다. 연인에게서 무슨 보복을 당하더라도 절대로 겁먹지 말자고 격려하고 또 격려했다.
연인의 시퍼런 분노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연인은 오늘 자신을 진심으로 죽이려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젠가 차를 댄 기억이 있는 주차장은 이미 대만원이었다.
풍선이 날고, 각종 현수막이 벽과 허공에 도배가 돼 있고, 인파는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해가 기울기엔 요원한 시각이라(서두른 보람이 있어 고작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무더위 또한 아직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주변을 아무리 훑어봐도 인환처럼 긴팔 옷을 입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여든 인파의 대부분이 가벼운 캐주얼 차림을 한 어린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캠퍼스 곳곳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간신히 손바닥만 한 주차 공간을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위치적으로도 꽤 후미진 곳인 대학원 기숙사 근처였다. 주로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본부 앞과 아크로폴리스, 그리고 학생회관과 문화관들을 지나쳐 들어온 상태라, 본격적인 구경을 위해선 다시 캠퍼스 중심부 쪽으로 걸어 나와야 했다.
땡볕에 땀을 줄줄 흘리며 제법 걸어야 했는데도 눈에 닿는 모든 것이 신기한지 혜윤이는 마냥 신이 나 했다. 연인의 입학식 때 잠깐 와봤을 때에도 혜윤이가 몸담고 있는 중학교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규모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직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의 헐벗은 캠퍼스에도 감탄을 했는데, 풍성하고 화려한 신록으로 무장한데다 엄청난 인파들까지 가세하니 혜윤이의 입이 딱 벌어질 만도 했다. 연신 부러움에 찬 시선으로 대학생 언니 오빠들을 훔쳐보기도 하고, 자기도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서울대 갈 거라고 굳센 다짐을 두기도 했다.
적성에 맞는 과기만 하면 되지, 뭘. 어린 나이에 혹여 입시 스트레스라도 받는 건 아닐까 싶어 설핏 염려를 흘리면서도, 인환 역시 별 이변이 없는 한 사랑스러운 소녀의 소원이 이루어지리란 것을 확신했다. 연인네 집안 내력이야말로 엘리트 종에서도 초 엘리트 집안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서울대 전체 수석에 6년 전액 장학금을 받는 연인도 연인이지만, 동생인 휘와 혜윤이도 나름대로 전액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징그럽다면 징그러울, 불세출의 능력을 타고난 핏줄이 아닌가 말이다(그러고 보니 죽은 형도, 또 이윤열도 모두 서울대 출신이라고 했지). 비록 경제적으론 몰락했을지언정 비상한 두뇌와 월등한 육체 조건에서만큼은 따라올 자들이 별로 없었다.
구기 대회가 한창인 종합 운동장과 테니스 코트를 지나치고, 각 동아리들의 전시회가 풍성하게 펼쳐지고 있는 수많은 소롯길들도 지나치고, 플리마켓이 열리고 있는 중앙 도서관 앞 잔디밭도 구경했다. 전통 무예 동아리의 택견 시범이 열리고 있는 자하연 앞 잔디밭에도 눈도장을 찍었고, 그 바로 옆에 천막을 친 전통 찻집에 들러 냉녹차도 사서 마셨다. 미대 건물을 지나칠 땐 건물 안에까지 들어가서 좀 더 오래 기웃기웃했다. 공과대 앞 공터에서 열리고 있는 풍선 터트리기 대회를 구경하며 ‘이 더위에!’ 하는 감탄을 흘렸고, 2식당 건물 맞은편에서 열리고 있는 노래방 가요 경연 대회도 잠깐 구경했다. 무엇보다도 캠퍼스 구석구석 어디에나 넘쳐나는 사람들을 실컷 구경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거나 커플 데이트를 즐기는 서울대 재학생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인환처럼 그저 구경을 하거나 아니면 행사에 초청돼 온 듯한 일반 사람들도 꽤 되는 것 같았다. 물론 개중엔 혜윤이처럼 호기심에 찬 틴에이저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예상했던 그대로 곳곳이 젊음이었다. 빛이 넘치는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역시 어울리지 않았다. 이 수많은 빛무리들 중에 시커먼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옴팡 쉬어버린 늙다리 게이 장인환이었다. 신이 난 혜윤이가 이끄는 대로 밝은 빛이 비추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거침없이 뚫고 들어갔지만, 인환은 절대로 그들과 온전히 섞일 수는 없었다. 그저 습관 같은 음울한 미소를 매단 채 정신없이 낯선 미로를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학생회관 앞이라고 했다.
새하얀 천막들이 마치 도떼기시장같이 복잡하게 줄을 지어 펼쳐져 있었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진짜로 도떼기시장이었다. 중앙 도서관 앞 잔디밭에 펼쳐진 플리마켓이 주로 개인이나 동아리들의 창작품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면, 학생회관 앞 잔디밭에 펼쳐진 것은 그야말로 먹자골목이었다. 장소가 장소라서인지 지금까지 지나쳐온 그 어떤 곳보다도 학생회관 앞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무리 볼거리 놀 거리가 좋아도 먹거리만큼 유혹적인 건 없는 모양이었다.
전 세계 먹자골목의 축소판이라고 해야 할까, 규모는 작았으되 인환이 보기에도 먹거리라면 없는 게 없을 것 같았다. 전통 한식을 취급하는 천막도 있었고, 중국집도 보이고, 하다못해 순대와 떡볶이를 파는 부스도 있었다. 재외국인학생회가 주관하는 소규모의 국제 음식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천막들도 있었다. 전통 주점도 있었고 호프집도 눈에 띄었다. 미니 칵테일바는 물론, 일일 카페도 몇 개씩이나 부스를 차지하고 있었다. 각 부스마다 개성 넘치는 아이디어와 메뉴로 무장한 채 구경에 지친 방문객들을 유혹하는 중이었다.
혜윤이는 갖가지 음식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는 수많은 천막들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난 오빠를 찾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피로감이 물밀 듯이 엄습했다. 혜윤이에게 잡힌 손목이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숨은 또 왜 이렇게 찬 것인지. 더웠다. 너무나 더웠다. 옷을 입은 채로라도 좋으니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쓰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천막이란 천막을 빠짐없이 훑던 혜윤이가 마침내 걸음을 멈춘 곳엔 유달리 여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주변 천막까지 침범을 해서 주동자들끼리 작은 실랑이까지 일고 있는, 제법 커다란 꽃 무더기였다(가만 보니 저 꽃무더기의 정체란 놀랍게도 부스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 구불구불 얽히고설킨 대기 줄이었다).
“어?! 오…… 오빠다!!! 오빠!!!!!”
통통 튀는 혜윤이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주변을 울렸다. 꽃무더기 중 몇몇이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더워…….
“오빠!!! 오빠!!! 나 왔어!!! 나 왔다니깐?!!! 오빠!!!!!! 위야 오빠아아!!!!!”
온통 낯선 얼굴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딘가 눈에 익은 얼굴이 하나 인환의 시선을 끌었다. 아담한 키에 우량아처럼 통통한 몸집을 하고 있는 남학생이었다. 도수 높은 뿔테 안경에 익살맞은 표정이 몹시도 유머러스한 느낌을 주는. 남학생은 흰색 모시로 된 개량 한복을 입고 있었다. 옷차림은 그럭저럭 전통 주점의 호스트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지만 이마를 질끈 동여맨 적색의 ‘단결!’ 두건이 너무나 언밸런스해서 그만 실소를 자아냈다. 자세히 보니 역시 낯이 익었다. 밝고 유쾌하고 스스럼이 없는 청년이었다. 아스라한 기억 창고의 틈을 비집고 마침내 청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불쑥 삐져나왔다.
―으하하하, 고맙습니다, 형님!!! 덕분에 살았습니다요!!!
연인의 의예과 동기인 전창일이었다.
“……혜윤이……?”
나지막한 부름에 주변 풍경이 핑그르르 맴을 돌았다. 전창일의 유머러스한 패션은 더 이상 인환의 관심을 끌 수가 없었다.
“……선생님……?”
“오빠!!”
“…….”
너무 덥다. 사방을 진동하는 파전 냄새에 희미한 욕지기가 치밀었다. 양쪽으로 축 늘어뜨린 소매 아래, 꽉 움켜쥔 두 주먹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빈사의 용기를 긁어모으기 위해 잠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흐릿하게 약해지려는 시야를 몇 번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으로 굳게 다잡았다.
연인이 보였다.
걸치고 있는 청바지는 새것이었고, 못 보던 붉은색 셔츠는 인환도 알 수 있는 고가의 명품이었다. 현란한 모양새의 양가죽 스니커즈 역시 한가지였다. 몇 시간 전에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진 그대로, 역시 화려한 공작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새 약간 달라진 아이템이 있다면, 머리를 반쯤 덮고 있는 멋들어진 실크의 붉은 두건과 거의 발목까지 내려온 검정색 앞치마. 새로 가세한 아이템들 역시 길고 늘씬한 몸매를 고스란히 돋보이게끔 해서, 호화찬란한 공작새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해주고 있었다.
“……선생…… 님……?”
공작새가 조금 앞으로 나서자 꽃무더기들 사이에 애틋한 동요가 일었다. 신음인지 감탄인지 유혹인지, 판단이 불분명한 괴성들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검고 푸른 심연의 바다가 단숨에 인환의 시선을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혹여 밀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인환은 잠시 숨을 멈춘 채 커다랗게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