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1991년 5월. 문위(文偉)
파리 떼처럼 붕붕거리고 있는 수많은 타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눈은 정확히 상대를 찾아낸다. 하긴 뭇 타인들뿐이랴. 위 자신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일 피붙이 혜윤이조차 단숨에 흡인력을 잃고 만다.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도 더 먼저, 눈은 본능처럼 가장 원하는 것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모양을 냈다.
저 사람이 아니라면 어울리는 남자가 없을 옅은 살구색의 슈트다. 원래도 핑크색 계통의 옷이 유난히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던가. 보랏빛에 가까운 자주색의 넥타이 역시 저 사람이 아니라면 광대처럼 보일 것이다. 너무나 말라서 품이 겉돌긴 하지만, 예쁘장한 얼굴이나 애수 어린 저 사람의 분위기엔 도리어 그게 더 안성맞춤이리란 생각이 든다.
저릿한 혈액이 단숨에 아래쪽으로 몰려든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한 몸으로 침대 위에서 뒹굴던 상대다. 습관이 돼버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아직 부족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부족해서다. 충분히 안지 못했다. 아직 질리지 않았다. 저 예쁘고 사랑스러운 몸뚱이에 질리지 않는 한, 아마도 자신은 늘 이렇게 짐승의 발정을 품게 되리라.
아래쪽이 몹시 거북하다. 몸에 딱 달라붙는, 단단한 천의 새 청바지를 입은 것이 천만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그 위에 앞치마를 두른 것도. 새 청바지와 앞치마를 걸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 수많은 뭇 타인들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했을 것이다. 대명천지에, 동성의 사내 몸에 짐승처럼 환장해서 물건을 세우는 호모 새끼로.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는 불안한 눈동자가 읽힌다. 늘 그렇듯이 마음 약한 ‘연인’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자신이 또 화를 내는 게 아닐까, 미움을 참을 수 없어 격분하는 건 아닐까, 독수리 발톱에 채인 참새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가슴이 발기발기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엄습한다. 연인의 불안은, 고통은, 그 몇 배는 에너지를 증폭시켜 위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잔인한 부메랑이다. 상처 입은 가슴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깊은 상처는 웃음을 앗아간다. 기쁨을 시들게 한다. 사랑하는 이를 눈 속에 담는 기쁨을. 물론,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버린 연인이다. 적이다. 웃어주면 안 된다. 마음을 드러내선 안 된다. 사모하는 열기를, 그리워하는 애틋함을,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고 기쁨에 떠는 시선을, 절대 읽게 해선 안 된다. 속내를 읽히는 즉시, 자신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리라. 완전히 참패해서 다신 재기하지 못하게 되리라.
그래. 긴 싸움이 될 것이다. 완전히 무너뜨려 다신 회복할 수 없게 만드는 쪽은 자신일 거다. 자신 안에 깃든 사랑을 죽이고, 연인의 안에 깃든 사랑도 초토화시킨다. 그로 인해 연인이 산산이 부서진다고 해도 자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 살아남으면 그만이다. 자신만 세상 속에 온전히 두 발로 디디고 굳건히 서면 그뿐이다. 적이다. 적이라는 걸 명심하자. 그것도 쉬이 이길 수 없는 대단히 강한 적. 상대를 파멸시키지 않고선, 아니, 파멸을 각오하지 않고선 감히 대적할 엄두도 내지 말아야 할 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연인의 피를 빨아 마실 테다. 연인의 생살을 찢어 오도독 오도독 씹어 삼켜야지. 그래야 자신이 산다. 혜윤이가 살고, 휘가 살고, 윤열이 형이 살고, 성준이가 산다. 엄마, 아버지, 강이 형이 저 강 건너에서 억울하다고 울부짖지 않는다. 우는 것은 저 사람 하나면 족하다. 연인 하나면 된다. 수학까지 갈 필요가 없다. 저학년 기초 산수다. 산수는 간단하다. 이득이 남는 쪽에 베팅을 한다. 저 사람을 울릴 것이다. 그야, 자신 역시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그건 아직 싸움을 지속할 때의 얘기. 일단 이기게 되면 자신 역시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된다. 다시 웃게 될 것이다. 저 사람 따윈 까맣게 잊은 채, 길고 긴 자신만의 길을 흥겹게 걸어가겠다. 그럴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겠다, 바로 위 자신이.
……아래쪽이 불편해…… 몹시…….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빨리 질리게 돼야 할 텐데. 적어도 저 몸뚱이만이라도 질리게 된다면 최고의 승기는 자신에게 떨어진다. 그야, 쉽지는 않겠지. 서두를 생각은 없다. 초조해할 필요도. 느긋하게 하고 싶은 대로 실컷 안으면 되니까. 더 이상 안지 않아도 그리 괴롭지 않게 될 때까지.
“……방해되는 거 아니니? 혜윤이가 혼자는 심심하다고 해서…….”
언제부턴가 자신 앞에선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사람이다. 말더듬이가 된 것치곤 또박또박 잘도 변명을 주워섬긴다. 혜윤이도 곁에 있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최대한 용기를 끄집어내고 있는 중이겠지. 하지만 알 수 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애처롭게 떨고 있을 속내를. 저 여리고 섬세한 넋을. 심장을.
사랑스러운 얼굴에서 가까스로 시선을 접는다. 잠시라도 시선을 접는 것은 생살을 찢는 듯한 고통이지만, 기꺼이 달게 받아야 할 몫이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기꺼이 견디지 않으면 무너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져서, 지금 당장 저 사람을 어딘가로 끌고 가 실컷 범하고 말 테지. 등신같이. 진정해, 문위. 안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이야. 그저 약간의 시간과 공간의 제약만을 받을 뿐이지. 저 먹음직스러운 몸뚱이는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전리품일 터. 몇 시간만 참으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먹어치울 수가 있지 않은가. 진정해. 진정해. 참지 않으면 위험해져. 여긴 시식의 장소로는 적절치 못해. 아무렴. 아주 불리하지. 상식과 이성으로 무장하고서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위험천만한 동맹군들이 사방에 널려 있지 않나 말이다. 저들은 언제라도 자신을 저들의 울타리 밖으로 몰아낼 힘을 가지고 있었다. 사내놈과 사랑에 빠진 변태 호모 새끼란 그 어떤 막강한 갑옷과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해도 무조건 참패당할 수밖에 없는, 태생부터가 가장 초라하고 비참할 밑바닥 인종이란 말이다.
바짝 메마른 목구멍으로 꿀꺽 침을 삼킨다. 서빙용 쟁반을 쥐고 있던 손가락에 지그시 힘도 주어본다.
“……혜윤아.”
그렇게, 뭇 타인들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편일 누이를 돌파구로 삼았다.
“……선생님 네가 모시고 왔니?”
묵묵한 통증을 견디며 연인의 얼굴로부터 어린 누이에게로 간신히 시선을 옮겨간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순진한 누이의 표정은 즐거움이 지나쳐 흥분으로 샴페인처럼 보글거리고 있다. 더위로 발갛게 익은 얼굴을 보니 벌써 이리저리 캠퍼스를 누비며 구경에 열을 올렸던 모양이다. 동행했을 연인 역시 꽤나 땀을 흘리고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귀찮게 한 거겠지.
“어, 잘했지, 오빠?! 나, 선생님 정말 오랜만인 거 알지?! 마침 선생님두 안 바쁘다고 하셔서 내가 열심히 꼬셨다?! 헤헤, 잘했지?! 선생님이랑 나, 벌써 여기저기 많이 구경했걸랑?! 그래도 더 자세히 구경하고 싶은 데가 무척 많은 거 있지?! 근데 배고파서 오빠 먼저 보러 왔어! 헤헤, 맛있는 안주 준다고 한 약속 잊은 거 아니지?! 우와, 파전 냄새 죽인다아아∼∼∼! 김치 삼겹살 냄새도! 추웁∼∼. 어느 게 더 맛있을까?! 근데 오빠, 많이 바빠?! 정말 사람들 많다! 이 언니들 다 오빠네 가게 줄인 거지?!”
어지간히도 흥분했는지 말꼬리가 한 옥타브쯤 올라가 있다. 재빠르게 이리저리 튀는 화제 전환에도 영 두서가 없다. 차분하고 얌전한 성품의 누이로선 꽤나 의외의 모습이다. 평소라면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얼굴을 붉힌 채 오빠 뒤로 몸을 숨겼을 아이인데. 늘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오빠가 둘이나 되니 그새 면역이 생긴 건가? 예전처럼 겁을 먹기는커녕, 외려 타인의 시선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번쩍번쩍 빛나는 애교 섞인 눈빛에서 묘한 허영심까지 읽힌다. ……우리 오빠예요! 진짜루 멋있게 생겼죠, 선생님……?! 얼마 전, 누이의 담임 선생과 면담을 하러 학교에 갔을 때 의기양양해서 외치던 누이의 표정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하긴 중학교 3학년이면 한창 성장할 시기지. 여자애로서의 자의식 역시 충분히 성숙할 시기.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성장해가는 누이를 보는 것이 늘 기쁨인 것만은 아니다. 아니, 기쁨보다는 근심이 심중의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가장으로서의 근심이리라. 온전히 다 성장할 때까지, 아니, 제대로 된 행복한 결혼을 시킬 때까지는, 그래서 더 이상 위 자신이 어미닭처럼 품고 보호할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는, 자신의 이 불안한 근심과 세상에 대한 경계는 결코 사라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바쁘신 선생님 억지로 끌고 나온 거 아니야?”
“어어? 아니라니깐! 선생님도 한가하시다고 했단 말야! 축제 구경도 하고 싶다고 하셨는걸?! 그죠, 선생님?!”
가느다랗게 여윈 연인의 팔을 누이가 움켜쥐는 것이 보인다. 땅속으로라도 당장 꺼져들 듯 기운 없어 보이는 기척에 가슴 한쪽이 서늘해진다. 누이의 애교스러운 채근에 흐릿하게 웃는 표정에서도 위태로움이 감지되기만 해서, 괴로운 나머지 지그시 입술을 깨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 많이 피곤하신 것 같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라, 혜윤아.”
자동적으로 손이 뻗어나가 연인의 어깨를 감싸듯 부스 안쪽으로 이끄는 자신이 보인다. 연인의 팔을 가볍게 쥐고 있던 누이 역시 기다렸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따라 들어온다.
자신의 손길이 닿자마자 흠칫 몸을 굳히던 연인은, 아무런 저항 없이 팔 안에 감겨들며 그저 홀린 듯 자신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자신이 화를 내리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던 듯, 자신의 다소는 친밀한 대응에 많이 당황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부드러운 응대가 연인에게 어떤 기대감을 품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잠시 주저했지만, 이내 별 상관이 없으리라고 고쳐 생각한다.
달콤한 기대가 후일 더 큰 절망을 불러들이곤 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안다. 연인이 절망하면 할수록, 상처 입으면 입을수록, 자신의 승리는 보다 더 확고해진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니 일일이 계산을 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미 마음속에서 저버린 상대가 아닌가. 죽이려 기를 쓰고 있는 ‘사랑’이 아닌가.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몸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상대하면 그만이다. 마음에서 버린 연인 따위란 어차피 빈껍데기에 불과할 뿐인 몸뚱이, 그저 성욕 배출구로나 쓰면 충분하지. 아무렴. 손안에 쥔 싸구려 인형을 대하듯 실컷 가지고 놀면 그뿐이다. 욕심껏, 질릴 때까지 유린한 다음에 휴지통에 던져버리면 그뿐.
당혹해서 어쩔 줄 모르는 연인의 속내는 모르는 척, 부스 가장 안쪽, 어설픈 요리사(과 동기)들에 의해 갖가지 안주들이 요리되고 있는 곳까지 연인을 이끌었다.
“……빈 테이블이 없으니까 여기라도 앉아서 기다려주시겠어요? 드실 만한 걸 가져다드릴게요. 혜윤이 너도 앉아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뭘 먹을 분위기는 절대로 아닌데다, 삼겹살이니 막걸리니 파전이니, 줄줄이 늘어놓인 음식 접시를 아무리 둘러봐도 연인이 즐겨 먹는 음식이라곤 단 한 가지도 발견할 수가 없다. 그저 의자에 앉히는 것으로나마 연인의 기운이 돌아오길 기도할밖에.
“지금은 바빠서 정신없으니까 대충 먹고 선생님 모시고 나가, 혜윤아. 6시쯤 교대할 친구들도 오니까 학교 안내는 그때 해줄게.”
“응, 오빠. 그럴게. 진짜 무지 정신없다. 그쵸, 선생님? 너무 시끄러워서 얘기도 잘 못 하겠어요.”
“어? 선배님도 오셨네요?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선배님? 저 전창일입니다. 기억하시죠?”
혜윤이 손에 파전 접시와 나무젓가락을 넘기고 있자니 어느새 전창일이 다가와 연인에게 아는 체를 한다. 개점하자마자 부스에 손님들 발길이 끊이지 않으니 온종일 돈 주머니를 쓰다듬으며 싱글벙글하고 있던 열혈 과대다. 덕분에 귀찮고 피곤한 며칠을 겪고 있는 자신이지만, 서울대 노예 경매 사상 55만 원 낙찰가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라고, 부스 중 수익률이 가장 좋을 거라고, 총학생회 선배들 사이에서도 자기 신망이 무지 높아질 거라고, 그게 다 킹카 친구를 둔 자기 능력과 안목 덕분이라고, 옆에서 내내 귀가 따갑도록 천연덕스러운 너스레를 떠는 통에 차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성가시긴 해도 확실히 주변을 늘 유쾌한 분위기로 이끄는 썩 괜찮은 친구였다.
“……그럼. 기억하고말고. 저번엔 무척 신세졌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변변히 못 했네?”
“인사는요, 선배님! 오히려 제가 더 죄송했는걸요. 외려 저희들 때문에 다치신 거 같아서 마음 많이 쓰였어요. 다행히 이 녀석 편으로 거진 나으셨다고 소식 전해 듣고 안심했습니다. 흉터도 안 생기셨네요. 아직 자국은 약간 남아 있지만요. 다행입니다, 선배님.”
“후후, 덕분이지 뭘. 그나저나 축제 준비하느라 꽤 바빴겠네? 사람들도 많이 들어오고…… 고생하는구나.”
“헤헤, 고생은요. 이 녀석 꼬시는 게 쫌 힘들었죠, 뭐. 덕분에 문전성시라 무쟈게 기분 좋습니다요, 선배님. 저희 부스는 그야말로 여자애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죠, 으하하하…….”
“……그러게…… 줄서서 기다리는 애들도 많고…….”
“하여간 이 녀석 인기 폭발이라니깐요. 저번에 체육관 사고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인기가 식을 줄을 몰라요. 알고 보면 진짜 파쇼에다가 싸가지 마초인데, 하여간 여자애들한텐 인간성은 뒷전인 모양이에요. 진짜 인간성 100점 만점인 호청년이 여기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도 모르고, 쯧쯧……. 어라라? 그러고 보니 이 예쁜 꼬마 아가씬 뉘시여? 누군갈 무쟈게 닮으셨네그려?”
“……안녕하세요, 창일이 오빠시죠? 저 혜윤이예요, 문혜윤. 저번에 집에 전화하셨을 때 인사 드렸었는데…….”
“오오, 네가 혜윤이냐? 야, 너 진짜 이쁘다. 누군가완 달리 성격도 무쟈게 이쁜 거 같은걸?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뻐!”
“헤헤, 고맙습니다. 창일이 오빤 울 오빠가 얘기해준 그대로이신 거 같아요.”
“그러냐? 오빠가 내 얘기 하디? 그래, 뭐라고 그랬는데? 설마 막 험담하고 그런 건 아니겠지?”
“에이, 험담은요! 진짜 재미있는 오빠라고 그랬는걸요∼∼∼.”
“재미있어? 어째 칭찬은 아닌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뒷골을 때리는데, 이거?”
“어이, 전창일!!! 계산 안 해?!!! 손님 기다리잖아!!! 저쪽 테이블 손님도 벌써 나갔는데 빨리 안 치우고 뭘 해?!!! 문위, 너도 부지런히 주문 받아야지!!!”
주방 파트 동기 하나가 끝도 없이 이어지려던 전창일의 수다를 막아주었다. 연인과 혜윤이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전창일이 허둥지둥 계산대 쪽으로 사라진다. 산만한 놈 같으니.
혜윤이가 킥킥거리며 전창일의 차림새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제대로 뇌리에 걸려들지가 않는다. 온 신경이 연인의 기척에만 몰려 있는 탓이다. 연인의 여윈 얼굴엔 약간이나마 핏기가 돌아와 있다. 전창일의 너스레에도 그럭저럭 평온한 대꾸를 하던 걸 보면, 온건한 자신의 태도에 조금쯤은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 보인다. 자신의 쓰라린 가슴 통증 역시 빠르게 아물어가는 것을 느낀다. ……얼마나 아파야 할까. 앞으로 얼마나 더. 얼마나 더 많이. 연인을 아프게 하고, 그래서 자신 역시 상처를 입고……. 얼마나. 얼마나 더 많이…….
“……선생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음식이 없군요. 맥주도 다 떨어져서 마트에 새로 주문한 것 같긴 한데 언제 올지 모르겠네요. 일단 이걸로라도 목을 축이세요, 선생님.”
거품이 보글보글 이는 사이다 한 잔을 손에 쥐여주자 겨우 시선을 맞춰오는 연인이다. 그럭저럭 평온해 보이는 표정이지만 잔을 건네주며 슬쩍 스친 손가락은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다.
“……어…… 고…… 고마워, 위야…….”
시끄러운 소음에 거의 파묻힐 듯한 여린 목소리. 마치 기도라도 하듯 양손으로 사이다 잔을 꼭 움켜쥔 채 자신을 바라본다. 보일 듯 말 듯 물기가 어린 맑고 깊은 눈망울을 응시하고 있자니, 가까스로 가라앉혔던 성욕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 느껴진다. 젠장. 어서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어서 빨리 시간이 가서, 온갖 물감 냄새와 그리운 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연인의 아틀리에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저 사랑스러운 몸뚱이를 당장 안을 수만 있다면! 뜨겁고 축축한 곳으로 당장 뚫고 들어가, 깊이깊이 자신을 파묻은 채 마음껏 흔들 수 있다면!!!
“야, 문위!!! 너도 얼렁 주문 안 받을 거야?!!!”
계산대 근처에서 전창일이 소리친다. 단결이라 쓰인 이마의 붉은 두건 덕분인가, 흡사 노조 투쟁가처럼 기세가 등등하기 그지없다. 철없는 놈.
“먹고 싶은 거 있음 더 가져다 먹어, 혜윤아. 선생님 모시고 구경하다가 6시 지나면 다시 이 앞으로 오고. 알았지?”
“어, 오빠. 걱정 마.”
가까스로 욕망을 다잡고서 낯선 인파 속으로 뛰어든다. 돌아보지 않아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좇고 있는 애틋한 시선을 느낀다. 애정을 느낀다. 숭배를 느낀다. 마치 그에 대한 화답처럼 욱신 하고 엄습하는 심장의 통증은 이젠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아무렴. 익숙해져야 하고말고. 익숙해져야지. 앞으로도 꽤 오래…… 아니, 아주아주 오래,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랫동안 지속될 통증일 테니.
부스 안쪽 테이블들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잔을 돌리고 있는 이들 중엔 얼추 커플들이 반, 여학생들만의 그룹이 반을 차지하고 있다. 단순히 성비만으로 치면 여학생들 머릿수가 3분의 2를 넘는 것 같다. 부스 밖에서 진을 친 채 기다리고 있는 여자들까지 합하면 그야말로 여인 천하인 셈이다. 서울대에 여학생이 이렇게나 많았나 싶을 정도. 예과 1학년도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여학생의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서울대가 아니던가. 확실히, 전창일의 너스레처럼 자신을 보기 위해 몰려들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외모가 좀 번듯하다고 자신이 무슨 연예인도 아니건만. 하긴, 동기들이라도 여자는 여자, 여자들 홀리는 재주 하난 기가 막히게 타고난 일급 남창이 아니냐. 다 자업자득이지. 나이트클럽에서 고객들을 유혹할 때와는 또 다른 자의식이 거듭거듭 일어서지만 예전처럼 그리 아프지는 않다. 더 아픈 고통을 품고 있는 탓이리라. 모기에 물린 가려움증 따위 생살이 뜯기는 듯한 통증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모르는 척, 달콤한 유혹의 시선들을 무시하며 부지런히 여자 동기들의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한다. 에어컨도 없는 야외에서 그저 천막 하나로 초여름의 땡볕을 막아내자니 지붕 꼭지까지 꽉 들어찬 더위가 녹록지 않게 느껴진다. 그나마 수완 좋은 전창일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대형 냉풍기 두 대를 부스 안에 들여놔서 피크까지 치솟은 열기를 겨우겨우 식혀주고 있다. 등 쪽과 겨드랑이가 땀으로 젖은 지 오래지만 대충 견딜 만하다고 생각한다. 두어 시간만 참으면 땡볕의 기세도 수그러들 것이고, 또 전창일의 끈질긴 ‘의리 그물’로부터도 그럭저럭 풀려날 수가 있다(노예 경매에 응해주고, 과에서 하는 일일주점에 참가해 서빙을 해주는 게 도무지 ‘의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긴 하나).
“……정말 바쁜가 보네? 하긴 줄이 장난 아니더라. 나도 한참이나 기다렸거든?”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드니 제법 낯이 익은 얼굴이 미소로 시선을 맞는다. 도떼기시장처럼 붐비고 있는 부스 속에서 혼자 테이블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는 걸 보니 여간한 강심장이 아니다. 역시나 많이 낯이 익은 얼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잠시 기억을 더듬어본다.
옳거니. 어제 노예 경매에서 55만 원으로 자신을 샀던 선배 여학생이다. 음대를 다닌다고 했던가. 이름이 뭐였더라. 인영? 신영? 신혜? 아, 그래. 그렇지. 신애였다. 양신애.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다는 3학년 선배.
“정말 경쟁이 치열한걸? 어제 경매 때도 너 놓칠까 봐 필사적이었는데 오늘이라고 별다르지 않네?”
생글거리는 미소가 우아한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몹시 요염하다. 하늘거리는 연두색의 시폰 원피스가 마치 천사의 날개처럼 늘씬한 몸매를 감싸고 있다. 잘 다듬어진 손톱, 긴 생머리, 큰 눈, 예쁘다기보다는 아름답다고 해야 할 조각 같은 얼굴 생김새, 백금 체인을 따라 에메랄드가 영롱하게 박혀 있는 고급스러운 펜던트, 단정한 모양새지만 외국의 유명 메이커일 스트랩 샌들, 역시 유럽 어딘가의 유명 메이커일 자그마한 양가죽 핸드백……. 타고난 육체는 물론, 그 육체를 감싸고 있는 문명의 꺼풀들까지, 한결같이 최상급 레벨에 속할 여자. 드물게 빼어난 용모가 부스 안의 몇 안 되는 남학생들의 시선을 죄다 흡수하고 있다. 계산대 앞에서 동기들과 수다를 떨고 있던 전창일까지 눈에 하트를 달고 이쪽을 훔쳐보고 있다. 여자의 욕망이 자신에게로 집중되고 있다는 걸 조금도 숨기고 있지 않음에도, 여자를 향한 동기들의 시선은 마치 여신을 대하는 것과도 같은 순수한 동경과 선망으로 가득 차 있다. 부럽기까지 한 어린 동기들의 무지다. 세상에 여신 따윈 없다. 그저 ‘여자’와 ‘어린 여자’, 즉 남자를 아는 암컷으로서의 여성과 무경험의 소녀만이 있을 뿐이다.
“……오셨습니까, 선배?”
적당한 거리를 두며 깍듯하게 인사를 던진다. 잠시 동안(여자의 일견 집요해 보이는 욕망을) 잘라내려면 꽤나 귀찮아지리라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쳤지만, 이내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하고 체념한다. 연인을 잘라내는 데만 온 에너지를 집중하기에도 자신은 충분히 버겁다. 단 한 톨의 관심도, 애정도 갖고 있지 않은 타인들 따위야, 들러붙든 떨어져나가든 그 무슨 상관이 있으랴.
“……섭섭하네. 누나라고 부르라니깐…….”
“주문하시겠습니까?”
“……별로 먹고 싶진 않은데…… 그냥 너 보려고 온 거지만 그래도 테이블 하나를 혼자 차지하고 앉았는데 뭐라도 주문은 해야겠지? 후후, 안 그럼 매상 떨어진다고 창일이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볼 테니까.”
“생각 없으시면 주문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선배.”
“술 말고 맥주나 한 캔 마실까?”
“죄송합니다만 맥주가 다 떨어져서 배달을 기다리는 중이라서요. 도착할 때까지 음료수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음, 그럼 그냥 콜라 줄래? 콜라는 되지?”
“예.”
“그리고 과일 안주 한 접시도 갖다줄래?”
“예.”
“잠깐만, 위야. 아직 주문 안 끝났어.”
메뉴판을 받아들고 돌아서려는데 여자의 손가락이 셔츠 소매를 붙잡는다.
“……어젠 저녁만 먹고 놓아줬지만 오늘은 안 되는 거 알지? 이따가 테크노 댄스 파티 파트너로 널 보쌈 해 갈 예정이거든? 혹시 다른 약속 있는 건 아니지?”
활처럼 치켜뜬 여자의 아름다운 눈시울이 똑바로 시선을 마주쳐온다.
“……후후, 약속 있다고 해도 안 봐줘. 넌 24시간 동안은 내 머슴이란 말야. 응, 그러니까…… 어제 저녁 식사하고 차 마시느라 보낸 시간이 정확히 세 시간하고도 14분이었으니깐 아직 스무 시간이나 더 남았다구.”
생글거리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여자가 밉지 않은 으름장을 놓고 있다. 보통 남자라면 누구라도 황송해서 그 앞에 무릎을 꿇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교이리라. 그래. 사내와 사랑에 빠진 변태 호모 새끼만 아니라면 말이다.
“어라? 진짜 섭섭하네? 선배가 수줍은 거 무릅쓰고 데이트 신청을 하는데 그 석고상같이 딱딱한 표정이 다 뭐니?!”
“…….”
“어이, 머슴 후배. ‘얼음땡’이 되시었소?”
“…….”
“……후후후, 농담. ……얼굴 풀어, 위야. 약속 있는 거면 할 수 없지 뭐. 만약 너도 파트너가 없고 또 축제 피날레를 즐기려는 거면 그냥 함께 즐기자고 청하려던 것뿐이었으니까…….”
눈을 흘기고, 한숨을 쉬고, 윙크를 던지고,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여자는 여자로서의 교태스러운 무기란 무기는 전부 동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똑바로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가늘게 떨기만 하던 여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대담해졌더라? 아, 그렇지. 자신에게 여자친구가 아직 없다고 대답해줬을 때부터였다. 여자가 안내하는 대로 학교 근처의 꽤 근사한 레스토랑에 도착해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낙찰된 노예로서 에스코트를 해주던 내내, 누가 후배고 또 누가 선배인지도 모르게끔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여자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감을 되찾고 있었다. 빼어난 유전자와 빼어난 집안 환경의 수혜를 전 존재로 입고 있는 최상품답게, 여자는 우아하면서도 매혹적인 교태를 뿌리며 차츰차츰 자신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노골적인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지만, 여자는 온몸으로 그네의 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번지는 미소, 부드러운 말투, 나지막하면서도 요염한 웃음소리, 그리고 자신을 응시하는 열기 어린 시선들을 통해서.
“……약속은 없습니다. 설령 약속이 있더라도 당연히 남은 스무 시간은 더 봉사를 해드려야죠, 선배. 춤은 별로 즐기지 않지만 에스코트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예의를 가장한 거리 두기만큼 여자의 연심을 잘라내기에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고 여긴다. 과연, 자신의 대꾸가 떨어지자마자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미소가 굳는 것이 보인다. 최상급 밸류의 프라이드가 상처를 입은 채 가늘게 떨고 있다. 동정심은커녕 일말의 배려심도 생기지 않는다. 그저 어딘가 익숙한 의무감만이 의식을 채울 뿐이다. 여자는 자신의 24시간을 사는 대가로 55만 원의 거금을 투자했다. 자신은 아직 네 시간밖에 지불하지 않았다. 글쎄, 남창과 대학교 축제 기간 중의 노예 신분 사이에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 단지 자신을 대가로 돈이 오갔고(물론 그 돈은 전액 전창일의 호주머니 속으로, 아니, 총학생회의 축제 기금으로 몽땅 넘어갔지만) 자신은 남창일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을 통해 그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우아, 진짜? 다행이다! 거절당할 것까지 각오하고 왔는데…….”
간신히 입술을 움직여 미소를 끌어오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쾌활하게 들린다. 역시 그 나이치곤 꽤나 강한 여자다. 그녀보다 적어도 10년은 훌쩍 연상일 고객들도 저렇게나 빨리 냉정을 찾지는 못했었다. 강한 만큼 쉽게 떨어져나갈 것 같지도 않지만 뭐. 아무러면 어떤가. 그래봤자 언젠가는 반드시 떨어져나갈 타인임과 다르지 않은 것을. 자신의 인생에 손톱만큼의 영향력도 미치지 못할 타인인 것을.
“오빠, 파전이랑 김치 삼겹살이랑 진짜 맛있었다?! 창일이 오빠가 실컷 먹으래서 2인분이나 먹었어! 근데 선생님은 별로 생각 없다고 하나도 안 드셨어. 대신 아이스크림 드시고 싶대. 지금 배스킨라빈스 사 먹으러 갈 거다, 우리? 아이스크림 사 먹은 다음에 축제 구경하다가 6시쯤 다시 올게. 그럼, 오빤 서빙 열심히 하구우∼∼∼?”
시끄러운 소음 탓에 유난히 톤이 높아진 누이의 목소리가 기관총처럼 연달아 귓전을 두드린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시선의 끝으로 누이와 팔짱을 낀 연인이 보인다. 키와 몸집은 누이의 그것을 훌쩍 넘기고 있음에도, 마치 누이에게 사로잡힌 가련한 처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연인이다. 좀 전보다 한결 더 창백해 보이는 안색에, 희미하게 퍼지던 실소는 금세 아릿한 통증과 근심으로 변태하고 만다. 너무나 핏기가 없다. 말라도 너무 말랐다. 안다. 그 모두가 자신 때문이라는 걸. 자신이 주고 있는 끊임없는 상처 때문이라는 걸. 목구멍으로 왈칵 치미는 뜨거운 응어리를 참기 위해 다시금 지그시 입술을 깨물어본다. 납치라도 해서 어디론가 끌고 가고픈 격렬한 욕구가 전신의 핏줄기를 들끓게 만든다. 연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아도 되고, 그래서 자신 역시 상처를 받지도 않을, 어딘가 멀고 먼 유토피아가 반드시 존재할 것만 같다. 저 가느다란 손목을 틀어쥐고 마냥 달리다 보면, 그 어딘가에 반드시 도착할 것만 같은 황홀한 착각에 숨이 콱콱 막힐 지경이다. 아아, 젠장. 이토록 끔찍한 음식 냄새들이라니!
“……그래, 이따 보자. 정신없으니까 선생님 모시고 빨리 나가.”
비좁은 테이블 사이를 씩씩하게 누비며 누이가 연인의 팔을 끌고 부스 입구 쪽으로 걸어간다. 사로잡힌 가련한 처녀의 분위기 그대로 누이에게 끌려가면서도 연인의 고개가 자꾸만 이쪽을 향한다. 의외로 연인의 시선이 줄곧 부딪치고 있는 곳은 자신이 아닌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다. 입술은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눈시울은 몹시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마치 서로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이 꽤나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서로 눈인사를 나누는 듯도 하고, 상대의 속내를 읽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물론 지나친 억측이리라. 언젠가 과 선배로부터 형식적인 소개를 받은 기억이 있긴 하지만 자신만 해도 어제 겨우 안면을 튼 여자다. 연인과 여자가 서로를 알고 있을 까닭이 없다.
“……후후, 여동생이지?”
예쁜 살구색의 슈트에 감싸인 그리운 뒤태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부스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여자의 부드러운 웃음소리에 문득 현실을 자각한다.
“……아까 부스 입구 쪽에서 둘이 얘기하는 거 봤어. 저기 주방 쪽에서 창일이랑 얘기하는 것도. 사이가 정말 좋은가 보네? 축제까지 구경시켜주는 거 보면…….”
먼먼 유토피아에의 격렬한 갈망이, 미칠 듯한 갈증이, 신기루처럼 홀연 휘발하고 있다. 여기는 학교고, 학생회관 앞 잔디밭이고, 일일주점 부스 안이고, 자신은 현재 전창일의 ‘의리 그물’에 사로잡힌 포로 신세일 뿐이다. 낙원 따윈 그 어디에도 없다. 그저 악취와 다름없는 지독한 음식 냄새가 진동을 하는, 이상야릇한 대학 축제의 한복판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아주 예쁘게 생겼더라. 너랑은 별로 안 닮은 거 같지만. 동생은 엄마 쪽을 많이 닮았나 봐?”
“…….”
“나중에 나한테도 소개시켜줄래? 선생님이라고 했던가? 동생이랑 같이 계시던 분. 그분과도 무척 친한 것 같더라. 그분도 소개시켜주면 좋구…….”
“…….”
“……저쪽 테이블에서 너 부른다, 위야. 가봐. 나만 너 독점한다고 여기저기서 째려보는 통에 무서워 죽겠다. 여자 후배들에게서 오늘 미움받은 것만으로도 10년은 수명이 늘었겠는걸?”
“그럼 주문하신 것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선배.”
당신 따위에게 왜 내 소중한 이들을 소개시켜줘야 하냐고, 참지 못한 사나운 대꾸가 나가기 직전, 다행히 여자가 욕심을 거둬들였다. 아마도 서늘하게 굳어든 표정을 통해 자신의 속내를 읽어 내린 듯했다.
깍듯한 인사와 함께 여자를 향했던 순간적인 적의조차 버리고 다시금 전창일의 ‘의리 그물’로 뛰어들었다. 노예인지 머슴인지, 혹은 남창인지, 역할 모델이 아리송한 그물에 사로잡힐 시간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다. 의리 그물에서 노예, 혹은 머슴 그물로 갈아타기 전, 잠깐은 틈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아주 잠깐, 연인의 존재를 욕심껏 만끽하며 자신은 다시금 낙원을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아직 충분하지가 않았다.
자신은 충분히 꿈꾸지 않았다.
언젠가 질리도록 꿈을 꾸고 나면, 그땐 미련 없이 연인을 버릴 수 있다. 더 이상 낙원을 갈망하지 않을 것이다. ‘의리 그물’이든 ‘머슴 그물’이든, 세상의 모든 그물이란 그물에 기꺼이 사로잡혀줄 수 있다.
그래, 그 언젠가. 충분히 안고 난 다음에는.
충분히 사랑하고 난 다음에는.
그래서 그 언젠가 사랑을 완벽하게 살해하고 말리라…… 그다음에는 반드시……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