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 1991년 5월. 장인환(張仁歡) (49/129)

30. 1991년 5월. 장인환(張仁歡)

아직 어린 혜윤이에게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만약 혜윤이가 좀 더 나이를 먹었더라면, 그래서 어울리고 있는 상대의 기분을 쉬이 읽어 내릴 수 있는 혜안을 갖추고 있었더라면, 인환은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젠 인환 자신의 누이동생이라 해도 좋을 어린 혜윤은 인환의 억지웃음을 억지라 여기지도 않았고, 웃음 속에 숨겨진 고통과 불안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다. 

혜윤이와 팔짱을 낀 채 연인의 ‘일일주점’ 부스가 있던 학생회관 앞을 벗어나, 서울대입구 전철역 근처까지 걸어갔다. 대학원생 기숙사 앞에 주차해둔 차를 빼기 위해선 다시 캠퍼스 안쪽까지 걸어 들어가야 했기에, 차라리 그냥 걸어가자고 혜윤이와 의견일치를 보았다. 후일 생각해봐도, 여전히 구경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 혜윤이와 걷는 내내 도무지 어떤 대화들을 나눴는지, 가는 도중 무엇들을 구경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인환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좋아하는 피스타치오 아몬드의 달콤 쌉싸름한 맛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다시 캠퍼스로 되돌아오던 피로한 여정도, 신이 나서 이리저리 이끄는 혜윤이를 따라 축제의 한가운데를 떠돌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죽이던 기억도 완벽하게 지워지고 없었다. 무척 많이 웃었던 것 같은데, 도리어 오랜 시간 통곡을 한 것처럼 얼떨떨했다. 별 시답잖은 화제로 수도 없이 수다를 떤 것도 같은데, 일생을 벙어리로 산 것마냥 명치끝이 몹시도 답답했다. 찰나의 한순간인 것도 같았고, 영원처럼 길고 긴 시간을 보낸 것 같기도 했다. 위에서 미로에 갇힌 쥐 실험을 내려다보기라도 하듯 모든 여정이 명확해 보이기도 했고, 인환 자신이 쥐가 돼 사방에 머리를 짓찧으며 미로 속을 헤맨 듯한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시 학생회관 앞 잔디밭에 도착했을 때에야, 인환은 조금씩 시간 감각을 되찾고 있었다. 공간감도 설핏 자각되기 시작했고, 한결 기세를 누그러뜨린 햇빛의 기운도 느낄 수가 있었다. 언뜻 붉은 기가 퍼지기 시작한 하늘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관악산 신록의 압도적인 평화는 새삼 가슴을 시리게 했다.

시계를 보니 6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혜윤이는 6시쯤 다시 오라던 오빠를 맞으러 부스 쪽으로 갔고, 인환은 학생회관 앞 계단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렸다.

불안하게 이리저리 미로를 헤매고 있는 실험쥐가 보였다. 실험쥐는 땀에 젖고 구겨진 살구색의 명품 슈트를 걸치고 있었다. 소박한 생김새와 달리, 기생처럼 요사스레 치장한 실험쥐의 차림새가 병적으로 그로테스크해 보였다. 실험쥐는 몹시 지쳐 보였다. 반쯤 넋을 놓은 채 우두커니 실험쥐를 살펴보다가, 인환은 간신히 각각 따로 놀던 눈앞의 실험쥐와 인환 자신을 일체화시킬 수가 있었다.

부드러운 미풍 한 조각이 땀에 젖은 이마와 콧등을 서늘하게 치고 지나갔다.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문득 아련한 행복감이 전신으로 노곤하게 스며들었다. 기분 좋은 자각이었다. 실험쥐는 이제 몇 분만 더 기다리면 다시 연인을 볼 수가 있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슴 떨리게 섹시한 몸을, 빼어난 보석처럼 독보적인 ‘영웅’만의 호화찬란한 아우라를 가까이 품을 수 있다. 아무렴. 세상에는 고통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실험쥐는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했다. 판단을 그만두고, 그래서 예측하기를 멈추고, 결국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만 하면, 행복은 의외로 거머쥐기 쉬운 곳에 위치해 있는 거라고. 그저 ‘현재’를 고스란히 살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자꾸만 자꾸만 고행 같은 세뇌를 거듭했다.

두어 시간 전, 일일주점 부스 안에서의 만남에다 생각의 그물을 친다. 연인은 의외로 그리 화가 난 것 같지가 않았었다. 화를 내기는커녕, 실험쥐를 대하는 태도에선 온기라고 판단해도 좋을 정도로 부드럽고 상냥한 기운이 스며나왔었다. 물론, 혜윤이를 비롯해서 수많은 동기들이 주시하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이 연상인 고객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최악의 경우 격분해서 쫓겨날 것까지 각오했던 실험쥐에게 있어 그건 거의 지옥에 있다가 천국에 오른 것과도 같은 급작스러운 신분 상승이었다. 그리고,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적어도 오늘 하루만은, 아니, 적어도 이 축제의 한마당 안에서만큼은 연인은 온건한 태도를 버리지 않을 터였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한 행복의 조건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렇지. 적어도 이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 즉 ‘현재’라고 하는 찰나만을 손안에 움켜쥐면 그만이다. 몇 시간 후, 혹여 연인과 단둘만이 됐을 때 연인의 사나운 비난을 듣게 된다든지, 혹은 언젠가 저 양신애처럼 완벽한 공주과의 여자가 나타나 연인을 빼앗아간다든지 하는, ‘불.행.한. 미.래.’를 부러 끌어들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아무렴, 단지 그것만으로도 실험쥐는 충분히 ‘행.복.한. 현.실.’을 살 수가 있다!

폭소를 터트리고, 고함을 지르고, 흥얼흥얼 유행가를 부르고, 응원을 하고, 휘파람을 불고, 야유를 퍼붓고, 혹은 성원을 보내고, 기합을 넣기도 했다가는 엉터리 성부로 나뉘어 엉망진창 코러스를 넣기도 하고……. 해가 기울고 있건만, 크고 작은 갖가지 아우성들은 지치지도 않고 사방에서 넘쳐나고 있었다. 싱그러운 젊음들만이 발산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특권이리라. 저 넘치는 에너지들을 그저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나눠 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분명 나이만으로 친다면 인환 역시 저들과 별 차이가 없건만(없다 뿐이랴,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들이거나 늦깎이 대학생, 혹은 대학원생들에 견준다면 인환보다 연상일 친구들도 부지기수이리라), 마치 80줄 넘은 노인과 한창 피어나고 있는 10대만큼의 커다란 괴리감이 느껴졌다.

혜윤이가 사라진 지 30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곗바늘도 어느새 6시 1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일주점 부스 쪽으로 줄곧 시선을 고정하고 있지만 소중한 사람들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6시에 교대를 해준다던 동기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설령 교대조가 나타났다고 해도 저 열혈 과대 전창일이 쉽사리 연인을 보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대박 난 일일주점 매상의 일등 공신은 연인이 분명해 보였으므로.

주머니를 뒤져 벌써 세 개비째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딱히 거듭 담배가 당겨서라기보단 연인과 혜윤이가 오기 전에 하루 필요량의 니코틴을 한꺼번에 저축해두려는 생각 때문이리라. 요즘 연인과 함께일 땐 되도록 금연을 하는 터라, 마치 그 반대급부라도 되는 양 연인이 사라지고 나면 평소 양의 배가 넘을 정도로 줄담배를 피우곤 하는 인환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연인을 생각하면(비흡연가들은 담배 냄새가 밴 애연가들의 체취를 싫어한다고 하는 소리를 들은 다음부터 인환은 좀 더 필사적인 마음이 돼 있었다)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좀처럼 쉽지가 않은 건 아무래도 의지박약인 자신의 천성 때문이리라. 완전히 끊을 수가 없다면 적어도 연인과 함께 있을 때만이라도 피우지 말자고 결심했는데, 차라리 그게 더 스트레스를 주는지, 결과적으로 흡연양은 전보다 훨씬 늘어났다. 그래도 언젠가 반드시 끊긴 끊어야 하는데……. 빈속에 줄담배를 태운 때문인지 훨씬 더 나른하게 전신으로 퍼지는 니코틴 효과를 절감하며 인환은 멍하니 다짐을 흘렸다.

뿌옇게 퍼지는 흰 연기 틈으로 언뜻 빨간 두건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와락 죄어든 심장 부근에 손을 갖다대며 인환은 본능적으로 부랴부랴 담배를 비벼 껐다.

인파로 가득한 부스 쪽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중인 두 사람이 보였다. 굳이 상대를 자세히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고개가 차례차례 돌아가는 것만 봐도, 그들이 누구라는 것은 명약관화했다.

혜윤이는 인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매달리듯 오빠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애정을 품는 이들에겐 거침없이 스킨십을 하는 것만 봐도, 혜윤이는 두 오빠들과는 달리 꽤나 다감하고 붙임성 좋은 성격이었다. 키 160이 채 넘을까 말까 한 작고 가냘픈 몸에 청바지와 티셔츠라는 아이템이 더해지니, 멀리서 보면 오누이 사이가 아니라 가히 부녀지간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하긴 가장이자 보호자인 셈이니 혜윤이에게 연인이란 실제로도 아버지와 다름이 없을 터였다.

거의 발목까지 덮던 검정색 앞치마는 벗어두고 온 모양이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섹시한 청바지에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붉은색 셔츠가 더해져, 어깨 견장에 금술만 달리지 않았다 뿐이지 혜윤이 말마따나 그야말로 왕자님의 풍모 그대로였다. 이마에서부터 시작해서 정수리를 완전히 덮은 채 뒷목덜미에서 길게 매듭을 지어놓은 붉은색의 실크 두건은 연인이 걸음을 옮기는 데 따라 나비 날개처럼 하늘거리며 사방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곳곳이 구겨지고 땀으로 흠씬 젖어 있었지만, 그조차도 왕자님다운 품위와 화려함엔 조금도 손상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굳이 꾸미지 않아도 거리에 나서면 늘 모세의 기적을 연출하던 연인이니 저토록 호사스러운 공작새의 모양새야 말해 무엇 하랴. 노골적으로 들여다보고, 돌아보고, 마주 스쳐 지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와 훔쳐보고, 한술 더 떠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여자애들까지 있었다(축제 기간이라선지 카메라를 갖고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변의 센세이션엔 이미 익숙해져 있을 연인인지라 허락 없이 사진을 찍어대는 동기들에게 잠깐씩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주었을 뿐, 연인의 시선은 줄곧 인환을 향하고 있었다. 혜윤이에게 잡혀 있지 않은 오른손엔 제법 묵직한 검정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는데, 그 생뚱맞은 아이템만 아니었더라면 그야말로 잡지 카탈로그 촬영 중인 모델이라고 해도 믿어질 터였다.

줄곧 오빠에게 뭐라 수다를 떨던 혜윤이가 인환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커다랗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선생님!!”

그물처럼 촘촘하게 얽혀오는 연인의 시선 때문이었으리라. 혜윤이의 신이 난 부름은 그저 이명처럼 무의미하게 인환의 귓가를 스쳐갔다. 담배꽁초를 든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던 계단에서 몸을 일으켰다. 본능적인 미소가 입가에 어리는 것이 느껴졌다. 바람처럼 다가든 행복감 덕분인지 전처럼 웃음을 만드는 것이 그리 힘겹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들 때까지 연인의 얼굴만을 홀려서 응시하다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혜윤이에게도 마주 미소를 보내주었다.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피울 수도 없는 담배꽁초를 들고 있는 손가락이 여지없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혜윤이가 아직 어린 것이 얼마만 한 구원이란 말인가. 이다지도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어른이라니.

“많이 기다리셨죠, 선생님?! 창일이 오빠가 자꾸만 오빠를 붙잡아서 이렇게 늦어졌지 뭐예요! 선생님 기다리고 계시다고 졸라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어휴, 아직도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예쁜 언니들도 아직 무지 많이 줄 서 있구요!”

“……그…… 그랬어……?”

“왓왓왓, 안 돼, 오빠!!! 그 두건 벗지 말라구 했잖아!!! 왕자 해적 같아서 얼마나 멋진데!!!”

혜윤이의 절규가 무색하게 단숨에 벗겨진 실크 두건이 연인의 얼굴에 문질러지고 있었다.

“으악!!! 그 이쁜 걸로 땀을 닦는 게 어딨어!!! 오빠 바보!!! 망했잖아!!! 아유, 이 머리 봐라!!! 다 주저앉아서 영구 같아졌잖아, 씨!!!”

까치발을 디딘 채 손을 뻗은 혜윤이가 하루 종일 두건에 눌려 납작해진 연인의 머리카락을 부랴부랴 정리해주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부러울 정도로 사이좋은 오누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혜윤이의 열성 덕분인지 납작하게 두피에 달라붙어 있던 연인의 영구 머리는 금세 본래의 세련된 헤어스타일로 변모했다. 이리저리 뻗친 것까지는 속수무책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연인의 야성적인 매력을 더해주고 있어서 혜윤이는 곧 실크 두건의 매력은 포기한 모양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두건을 연인의 손에서 빼앗더니 옆에 멘 크로스백에 얌전히 집어넣고 있었다.

혜윤이 못지않게, ‘왕자 해적 두건’이 땀수건으로 전락한 사실에 아쉬워하던 인환도 사자 갈기처럼 야성적인 모양새로 정리된 연인의 머리카락을 새삼 홀린 듯 응시했다. 재회한 입학 초기 무렵보다 훨씬 더 길어 보였지만 딱히 미용실이나 이발소에 들러 다듬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럼에도 웬만한 배우나 모델들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세련되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확실히, 고딩 시절의 스포츠 스타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르익은 청년의 위험스러운 매력을 물씬 풍기는 매혹적인 스타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혜윤이에게 두건을 뺏기곤 한동안 묵묵히 인환의 눈을 뚫어져라 핥고 있던 연인이 불쑥 코앞으로 다가들었다. 기겁해서 뒤로 주춤거리던 인환의 한쪽 팔꿈치에 단단한 악력이 느껴졌다.

“……담배꽁초 이리 주세요, 선생님.”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그의 손이 다가와 잽싸게 꽁초를 빼앗아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벌써 20여 미터쯤 떨어져 있던 휴지통에 꽁초를 버리고 있는 연인의 등이 보이고 있었다.

“오빠가요, 선생님 아무것도 안 드셨다고 외국 사람들 모여 있는 가게에 들어가서 이상한 맛있는 것 많이 사 왔어요! 오빠도 배고프다고 같이 먹을 거래요! 주점에선 일만 하느라 고기 먹을 틈도 없었대요! 웅∼∼, 근데 저도 또 먹고 싶어요! 아까 고기랑 파전이랑 실컷 먹었는데 오빠가 사는 음식들 보니까 막 군침이 넘어가는 거 있죠?! 굉장히 신기하고 맛있어 보이더라구요! 선생님, 배고프시죠? 오빠가 지금 건 선생님도 좋아하실 거랬어요! 마카로니랑 치즈랑 섞은 연어를 올리브기름에 튀긴 거라는데요, 진짜 맛있어 보였어요!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을 한 어느 예쁜 외국인 언니가요, 오빠 너무너무 잘생겼다구, 막 데이트 신청도 하구요, 비싼 와인도 공짜로 주구요, 롤빵도 몇 개씩이나 공짜로 집어주고 그랬어요! 거기 말고 다른 외국인들 가게에서두 오빠한테 맛있는 거 공짜로 줄 테니깐 들어오라구 자꾸만 불러서 제가 친절하게 거절하느라구 혼났어요! 오빠는 굉장히 무뚝뚝하잖아요! 예쁘고 잘생긴 언니들이랑 오빠들이 친절하게 말 거는데두 인상만 쓰고 그냥 지나가기만 하구요! 정말 울 오빠는 조금만 웃어줘두 사람들이 참 좋아할 텐데, 제가 다 미안해서 혼났어요!”

“……아까보단 혈색이 돌아오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하신 덴 없습니까?”

혜윤이의 따발총 수다에 미처 대꾸를 못 하고 있는데, 어느새 다시 가까이 다가온 연인이 인환의 팔꿈치를 부드럽게 쥐며 물어왔다.

“……어…… 어어, 아니…… 괘, 괜찮은데…….”

“괜찮아 보이진 않으세요. 힘드시면 언제라도 말씀해주세요, 선생님. 혜윤이는 제가 데리고 다니면 되니까요.”

“……어…… 어, 어…… 응…….”

“……몸도 안 좋으신데 혜윤이 때문에 괜한 고생 하게 해드리네요.”

거의 귓가에서 속삭이고 있다시피 되풀이되는 연인의 상냥하고 부드러운 어조에, 얼굴로 자연스레 핏기가 몰려들었다. 하루 종일 부스 안에서 땀으로 목욕을 한 것을 반증하듯, 강렬한 땀 냄새가 코롱 냄새에 뒤섞인 감미로운 체향과 더불어 코끝에서 진동했다. 애틋한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익숙한 두려움 때문인지, 가슴이 몹시도 설레었다. 혹시라도 혜윤이에게 이상하게 보일까,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운 덕분에 손가락의 떨림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괘, 괜찮아, 위야. 진짜로 괜찮아…… 나, 나도 무척 즐거운걸. 혜윤이 오랜만에 만날 수 있어서 좋았고…… 네 학교 축제도 볼 수 있어서 좋고…….”

“…….”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고개를 땅바닥으로 향하고 있는데, 연인의 단단한 한쪽 팔이 살며시 어깨를 감싸 안아온다. 두어 시간 전, 일일주점 부스 안쪽으로 인환을 이끌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보도 쪽으로 방향을 정하는 확고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연인의 에스코트에, 인환은 멍해진 채 자동인형처럼 연인이 끄는 대로 종종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드실 만한 음식들을 좀 샀습니다. 여긴 너무 시끄러우니까 자하연으로 가죠.”

속내는 전혀 알 수 없어도, 연인이 자신을 위해 음식을 산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감격으로 목이 메는 것을 참기가 힘들었다. 모험을 한 보람이 있었다. 혜윤이와 별다름 없이 꽤나 소중한 취급을 받고 있지 않은가. 맙소사. 이다지도 달콤한 착각이라니. 독약처럼 치명적인 천국이라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척, 뜨거워진 눈시울을 슬쩍 가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어깨에 둘린 연인의 팔이 마치 화덕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인환의 속도에 맞춰 보폭을 줄여준 연인의 배려도 모르는 척, 그저 걷는 일에만 신경을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팍 삭은 밉상 고객은 연인의 부축(을 받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을 받아 나란히 걸어가고, 오히려 두 사람이 보호해줘야만 할 혜윤이는 두 사람 뒤에서 깽깽이 발로 뛰며 따라오는 이상야릇한 그림이 연출되고 있었다. 하긴 외모만으로 치면 인환 역시 연인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동생뻘로 오해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려한 명품 슈트가 무색할 소년 같은 동안에, 안색은 병자처럼 창백하고, 지나치게 깡마른 몸집도 그닥 정상으로 보이진 않을 터였다. 자신의 멋지지 못한 동안에 대해 달가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지금만큼은 차라리 그게 다행이지 않은가 싶기도 했다. 파릇파릇한 새내기 연인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속내야 얼마나 시커멓게 주눅 들고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외모로 평가되는 나이대로는 그럭저럭 어울리긴 하지 않을까 기대가 되기도 했다.

수많은 시선들을 온몸으로 받으며, 몇 번인가는 주인 모를 카메라에 찍히기도 하면서 인환 일행은 5분여 만에 ‘자하연’이라는 인공 연못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문대 건물 두 동과 식당 건물 하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자하연은 지금까지 지나쳐온 캠퍼스 곳곳과 별다름 없이 수많은 인파의 침해를 받고 있었다. 커다란 타원형의 연못가 주변은 빙 둘러싸듯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녹음이 우거진 것이 제법 운치가 있는 공간인 걸 보면 사람들의 인기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근처에 특별한 행사를 하고 있는 곳이 없어 시끄러운 소음은 비교적 덜한 편이었다. 모여 앉은 학생들 역시 축제에 걸맞을 시끄러운 오락을 하는 게 아니라, 대부분 조용히 담소를 나누거나 무언가를 먹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멈춰 선 채 빈자리를 찾듯 눈을 가늘게 뜨고 연못가를 훑던 연인이 마침내 자리를 잡은 곳은 수령이 20년은 족히 돼 보임직한 커다란 단풍나무 옆 잔디밭이었다. 열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연인이나 혜윤이나 별 신경을 쓰는 것 같진 않았다. 인환 역시 더 이상의 자격지심은 느끼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던 터라, 얌전히 연인의 맞은편 자리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풀물 들지 모르니까 이거 깔고 앉으세요, 선생님.”

내내 들고 있던 검정 비닐봉지 속 내용물을 풀어헤치던 연인이 문득 청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옆자리에 까는 것이 보였다.

“……괜…… 찮은데…….”

“여기 앉으세요. 분홍색(이 아니라 실은 살구색이지만, 색감이 둔한 연인에겐 대부분 분홍색으로 보이리라) 슈트라 풀물 들면 금방 티가 날 겁니다.”

“…….”

귀 끝까지 홍조가 몰려드는 통에 심장은 자라처럼 오그라들며 더더욱 두근거렸다.

먹거리에 온통 정신이 나간 혜윤이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인환은 마지못해 연인이 마련해준 황송한 방석 위에 엉덩이를 묻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되도록 연인과 떨어져 앉자고 했던 인환의 작은 궁리는 수포로 돌아가버린 셈이었다. 물론 세차게 방망이질을 치고 있는 심장을 보건대, 궁리가 틀어진 것에 대해 자신은 별로 애석해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진짜 맛있다, 오빠! 아우, 배만 안 부르면 금상첨화일 텐데! 선생님 이거 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어요!!!”

어느새 나무젓가락을 쪼갠 혜윤이가 입안으로 부지런히 음식을 퍼 나르고 있었다. 확실히 한식만을 고집하는 연인보단 입이 덜 까다로운 혜윤이었다.

연인의 볼품없던 검정 비닐봉지에서 나온 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피크닉 도시락 세트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포장은 비록 스티로폼으로 만든 일회용 도시락이었지만 내용물은 연어를 재료로 한 최고급 전통 이탈리아 요리였다. 버터 롤에 마멀레이드와 잼이 담긴 미니 팩도 있고, 음료수 캔과 와인 병과 종이컵도 있었다. 아무리 봐도 연인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확실히 자신만을 위한 메뉴들이었다.

혜윤이의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를 안주 삼아 느긋한 정찬을 즐겼다. 물론 음식 맛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와인은 향긋했고 연어 스테이크도 객관적으로 훌륭한 요리임엔 틀림없는 것 같았지만, 맛을 느낄 수 있는 혀의 감각 기관이 몽땅 마비라도 된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도시락을 말끔히 비운 것은 그저 연인의 배려에 대한 감격과 황송함 덕분이었으리라. 연인 역시 묵묵히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지만 결코 맛으로 먹고 있을 턱은 없었으니까. 몇 시간 전, 아틀리에에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대충 때운 이래 연인 역시 내내 굶은 것 같았다. 입맛에도 맞지 않을 서양 요리를 그나마 부지런히 넘길 수 있는 것도 그만큼 심한 공복감 때문이었으리라. 그랬다. 인환을 위해 맛없는 요리를 참고 먹어주는 연인에게 감격하지 않았다면, 마치 소중한 대접이라도 받고 있는 듯 황홀한 착각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입맛에 맞는 요리였다 한들 인환은 절대로 말끔히 도시락을 비우진 못했을 터였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간 지 시간이 꽤 지난 듯했다.

사방이 땅거미로 거뭇거뭇해졌고,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이 운치 있게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흐릿한 물비린내와 신록의 냄새가 한결 강하게 느껴졌다.

혜윤이가 자하연 식당 앞 커피 자판기까지 뛰어가 뽑아다준 다디단 커피를 후식으로 마시며 시계를 보니 바늘이 7시 1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혜윤이의 수다에 동참하느라 생각보다 식사 시간이 더 길어진 듯했다. 그나마 간혹 혜윤이에게 맞장구를 치는 인환에 비하면 거의 벙어리라 해도 좋을 지경인 오빠는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지, 혜윤이의 즐거운 흥분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세가 아니었다. 소원했던 지난 몇 달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혜윤이의 수다 소재는 어느덧 축제 구경에서 혜윤이의 일상생활로 옮겨가 있었다. 공부 얘기며 친구들 얘기, 두 오빠들과 신경전을 벌인 얘기며 그간 봐두었던 온갖 비디오 영화, 감명받은 만화책 얘기 등등 소재는 한도 끝도 없어 보였다.

“……가수 이진섭 보고 싶다더니 여기서 계속 수다나 떨래?”

과연, 오빠의 무뚝뚝한 한마디가 던진 파괴력은 굉장했다. 끝이 안 날 것 같던 혜윤이의 수다가 드디어 멈춘 것이다.

“흐에엑……?!!!”

“7시에 공연 시작한다고 했는데, 이진섭 벌써 나왔다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꺄아악! 안 돼애애애애∼∼∼!!!! 난 몰라!!! 오빠 너무해!!! 진작 말해주지!!”

그다음엔 그야말로 토네이도가 휘몰아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오붓하게 널려 있던 피크닉 상은 회오리바람에 휘말리듯 가차 없이 쓰레기통으로 던져졌고, 마치 권총처럼 크로스백을 어깨에 둘러멘 혜윤이는 양쪽 팔에 연인과 인환의 팔짱을 각각 낀 채 공연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기막혀하면서도 줄곧 기꺼이 어린 누이의 응석을 받아주고 있는 듯한 연인이나,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그에 더해 매순간 이토록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주기까지 한 은인과 다름없었다!) 인환에게 있어 ‘혜윤이 태풍’을 잠재울 수단은 단 한 가지도 없을 터였다. 질풍노도처럼 단숨에 캠퍼스를 가로질러 공연이 벌어지고 있는 노천강당에 도착했을 무렵엔 연인도, 인환도 모두 숨이 턱에 닿은 채 헉헉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가장 여리고 약할 혜윤이 하나만 멀쩡해 보였다. 두 명의 보호자와 마찬가지로 땀에 흠뻑 젖은 채 가쁜 숨을 토해내면서도, 기대감에 번쩍번쩍 빛나는 눈으로 빈자리를 찾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대 주변을 탐색하는 눈길이 흡사 사냥 직전의 매처럼 집요하고 날카로웠다.

무대를 향해 반타원형의 계단으로 층층이 관람석이 이어져 있는 노천강당은 이미 인파로 대만원이었다. 확실히 인기 가수와 개그맨까지 동원된 축제의 하이라이트이고 보니, 축제를 즐기려는 대학생들은 대부분이 노천강당으로 모여든 것 같았다. 얼핏 봐도 천여 명이 훨씬 넘어 보였다.

고개를 들고 전방을 살피니 고대 그리스의 노천극장을 방불케 하는 휑하니 뚫린 반타원형의 공간이 시야 가득 메워들었다. 정성들여 꾸민 듯, 중앙 무대는 아마추어들의 공연 무대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꽤나 화려하고 정교해 보였다. 무대 양쪽 끝에선 애드벌룬이 날고, ‘느티 놀이 한마당’이라 쓰인 대형 현수막 주변엔 오색의 풍선들이 가득 달라붙어 있었다. 오색찬란한 조명등이 연주되고 있는 록 음악에 맞춰 불나방처럼 경박스레 이리저리 춤을 추고, 서울대를 상징하는 커다란 청람색 교기는 무대 한쪽에 굳건히 세워진 채 오만한 권위를 흩뿌리고 있었다.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화려한 조명등만큼, 강당 안을 가득 진동시키며 초대형 스피커로부터 흘러나오는 록 사운드 역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웬만한 중견 가수의 공연 무대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하긴 대학 축제 행사만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이벤트 회사까지 생겨날 정도라니, 고작해야 대학 축제일 뿐이라고 얕잡아볼 수만도 없을 것 같았다.

오프닝 공연이 시작된 지 20분이 지난 때문인지 분위기는 꽤나 무르익은 듯해 보였다. 교내 록 밴드들의 연이은 등장을 보니 아직 본 공연은 시작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인환을 닮아 소심한 혜윤이는 어디로 갔는지, 앞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낯선 남학생에게 아직 가수 이진섭이 안 나왔냐고까지 묻고 있는 모습에, 두 사람은 실소를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안 나왔다는 확답을 듣고 나서야 혜윤이의 질풍노도는 겨우 가라앉았다. 늦게 온 덕에 무대 앞쪽의 로열석은 이미 다른 학생들로 가득 차 있어, 인환 일행은 중간보다 훨씬 뒤쪽에 위치한 오른편 구석에 간신히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 혜윤이가 가운데 앉고, 인환이 그 오른편에, 연인이 왼편에 각각 자리를 잡고 앉았다. 특별히 연예인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록 음악을 좋아하지도 않는 인환인지라, 혜윤이가 공연에 빨려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인환의 신경은 온통 한 자리 건너 연인에게로만 집중되고 있었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무대 위에만 화려하게 쏟아지고 있는 오색의 조명 때문인지, 관람석 쪽은 옆에 앉은 사람의 얼굴 윤곽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상대적으로 어둑어둑했다.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연인에게로 다가드는 동경과 호기심에 찬 뭇 공중의 시선도 거의 없었고, 연인을 향한 인환의 수상쩍은 열정을 눈치챌 누군가의 예리한 안목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가운데를 막고 있는 혜윤이조차도 양편에 앉은 두 보호자에게 신경을 쓰기엔 좋아하는 가수와 개그맨의 등장에 잔뜩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그랬다. 연인이 불쾌해하지만 않는다면, 실컷 바라볼 수도 있는 축복받은 환경과 다름없었다. 실은 연인과 데이트를 하는 중이라고 황홀한 백일몽에 잠긴다 한들 그 누가 자신을 나무랄 것인가.

물론 그렇다고 연인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을 턱은 없었다. 연인에게 거침없는 시선을 주기엔 인환은 여전히 연인을 겁내고 있었다. 백일몽은 그저 백일몽일 뿐, 둘 사이엔 보호해야 할 어린 누이동생 또한 떡 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가능한 것은 오로지 상상하는 일뿐이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온몸을 떨며, 그저 연인과 함께 앉아 있다고, 멋진 데이트 중이라고 끝없이, 끝없이 공상에 잠기는 것뿐이었다. 공상만이 안전했다. 황홀한 백일몽만이 기왕의 상처에 새로운 상처를 더해주지 않을 터였다.

“……선생님……?”

자리를 잡고 앉은 지 10분쯤 지났을까…… 혜윤이의 등 뒤로 불쑥 다가든 연인이 조용히 물음을 던져왔다.

“……사람이 더 들어차면 볼일 보러 가기도 쉽지 않을 테니 지금 화장실에 들렀다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순간 심장이 땅바닥으로 툭 내동댕이쳐지는 듯한 충격이 엄습했다.

연인의 입술과 바짝 가까이 붙은 귀만이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마침 대단히 시끄러운 곡의 연주가 끝이 난 터라, 인환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와락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대를 긁는 듯한, 낮고 허스키한 음색에 깃든 그것은 뜨겁고 찐득한 짐승의 욕정이었다. 적나라한 짐승의 욕망이 아무런 소음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고스란히 심장을 직격하고 있었다.

파르륵하니 떨기 시작한 인환의 손가락들 중 하나를, 역시 혜윤이의 등 뒤로 슬며시 접근한 연인의 손가락이 슬쩍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몸서리쳐지는 전율은 마주친 손가락을 통해서도 노도처럼 흘러들었다.

기절할 것만 같았다. 흥분과 긴장으로 설레고 있던 전신의 핏줄기가 기름을 부은 것마냥 단숨에 거대한 불기둥으로 변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쿵쾅거리며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무대 위에서 터져 나오는 앰프 소리보다도 더 압도적인 기세의 소음으로 변해 인환의 귀청을 두드리고 있었다.

……설마…… 설마, 설마…….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고개를 가로저어봐도, 닿을 듯 말 듯 접촉해오고 있는 연인의 손가락 끝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대낮처럼 훤하고 일목요연했다.

짐승이 깨어나고 있었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야수가 어슬렁어슬렁 주변을 배회하며 인환의 몸뚱이를 향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혜윤아, 선생님과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꼼짝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어, 어? 나갔다 온다구? 어디? 화장실 가는 거야?”

“그래.”

“에이, 앞에 자리 나면 옮기려고 그랬는데…… 빨랑 갔다 와, 오빠.”

“……선생님?”

“…….”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키는 연인이 보였다. 몇 사람인가를 타 넘으며 통로 쪽으로 전진하고 있는 연인의 크고 늠름한 등을 인환은 한참 동안 넋을 놓은 채 바라봐야만 했다. 줄줄이 사탕으로 길게 늘어앉아 있던 인파를 무사히 타넘은 연인이 비좁은 통로에 선 채 물끄러미 인환을 응시하고 있었다.

―따라오세요!

뜨겁고 탁한 열기로 번쩍번쩍 빛을 내뿜고 있는 짐승의 눈이 거듭 단호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무대 쪽에서 뻗어 나오던 시뻘건 조명 줄기 하나가 섬광처럼 연인의 이목구비를 훑고 지나갔다. 사진이 찍히듯 선명한 야수의 형상이, 찰나 동안 시야에서 명멸하곤 단숨에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가버렸다. 뇌리에 새기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었다.

“……미…… 미안합니다. 좀 지나갈게요…….”

입에 발린 사과의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미…… 미안…… 죄송합니다…… 자…… 잠깐만 비켜주시겠습니까……?”

파도를 타듯 휘청거리는 몸으로 서로를 가로막고 있던 인파를 타 넘었다. 확고한 힘이 넘치던 연인의 몸짓과는 달리, 인환의 그것은 비굴할 지경으로 위태롭게 보였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몸을 연인의 팔이 가뿐하게 받아 드는 것이 느껴졌다. 폐부 가득 들어차오는 연인의 강렬한 사향 냄새를 새삼 자각했을 무렵엔, 인환은 어느새 어둠이 가득 내려앉은 한적한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연인에게 어깨를 끌어안긴 채, 거의 끌려가다시피 절뚝거리고 있는 왼쪽 다리가 몹시도 거추장스러웠다. 뛰고 있는 건지, 걷고 있는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추운 건지, 더운 건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왜 이렇게 온몸이 떨리는 걸까……. 아니, 왜 이렇게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 걸까……. 생각다운 생각 또한 하나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땀으로 축축해진 얼굴을 서늘한 밤바람이 아프게 스쳐 지나가곤 하는 것을 어렴풋이 자각할 수 있을 뿐이었다.

녹음이 울창한 나무들과 잔디밭들과 화단을 지나쳤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과 멀리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에서 내비치는 불빛들이 이정표가 돼주었지만, 반쯤 넋이 나간 인환에겐 쓸모없는 이정표에 불과했다. 확고한 이정표야말로 연인이었다. 다급하게 이리저리 헤매는 것 같기도 했지만, 연인은 확실한 목적과 방향성을 갖고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축제의 피날레이자 하이라이트인 노천강당 공연으로 몰린 때문인지, 시야에 잡히는 교정마다 텅 빈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한산했다. 어둑어둑한 길을 가끔씩 스쳐가는 맞은편 학생들이 불안정한 모양새로 걸어가는 두 사람을 의아하게 쳐다보기도 했지만, 축제 기분이라도 내는 줄 알았는지(아마도 둘 중 하나가, 혹은 둘 다가 술에 취하기라도 한 줄 알았으리라) 그 이상의 깊은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천만다행이었다.

크고 살풍경한 모양새의 5층 건물이 문득 시야 가득 밟혀들었다. 별 장식 없이 밋밋한 ㄱ자형의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축제 기간이 무색할 지경으로 벌집처럼 빼곡하게 늘어선 건물 창문에선 두서너 개 건너 하나꼴로 환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밤낮 없이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는 제약실습동 건물이었다).

연인은 환한 불빛이 비추고 있는 건물 현관 안으로 거침없이 인환을 끌고 들어갔다. 장방형의 로비를 지나니 죽 이어진 긴 복도가 나왔고, 긴 복도를 한 방향으로 따라 지나고 보니 위층으로 이어지는 어두컴컴한 계단이 나왔다. 연인은 몇 층인가를 더 걸어 인적이 전혀 없는 듯한 어둑어둑한 층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멈춰 섰다. 잠시 멈춰 서서 혹시나 들려올지 모르는 인기척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가는, 다시금 앞으로 단호한 걸음을 재촉했다. 미로와 다름없는 어둡고 텅 빈 강의실과 실험실들이 그림자처럼 뒤로 길게 이어졌다.

무턱대고 헤매는가 싶게 이리저리 방향을 틀던 연인이 마침내 가장 후미진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던 남성용 화장실 안으로 인환을 이끌었다.

그간 지나쳐온 빈 실험실들과 마찬가지로, 단 세 칸밖에 없는 비좁은 공중 화장실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어딘가에 창문이 달려 있으련만,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빛의 그림자 따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로등 불빛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후미진 위치로 보나, 단 세 칸밖에 안 되는 양변기 칸막이로 보나, 유난히 작은 규모로 보아 직원 전용 화장실인 듯싶었다. 희미한 지린내보다 상쾌한 방향제 냄새가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짐작에 확신을 주었다.

당연히 불은 켜지 않았다.

연인이 가장 안쪽 칸인 듯한 화장실 문을 밀어젖혔다. 덜컹거리는 문소리며 삐걱거리는 경첩 소리에 심장이 다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건지, 코앞으로 닥친 쾌락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떨고 있는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양변기 위에 인환을 밀어붙인 채, 연인이 등 뒤로 자물쇠를 단단히 채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손으로 양변기 뚜껑을 짚는 것으로 미처 중심을 잡기도 전에, 연인의 흥분한 몸이 단숨에 밀착해 들어왔다.

겨드랑이 틈새로 파고든 연인의 단단한 두 팔이 가슴 부근에서 교차해 끌어안고 있었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강한 악력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뒷목덜미 근처로 떨어지는 것은 연인의 화덕처럼 뜨거운 숨결이었다. 비좁은 화장실 칸막이 안은 순식간에 땀내가 섞인 연인의 강렬한 체취로 가득 들어차고 있었다.

“……아직도 들어가면 안 되겠죠?”

“……아……!”

속삭이는 건지 탄식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야수의 으르렁거림이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고막을 핥는 듯한, 참을 수 없을 만치 유혹적인 목소리였다.

“……젠장…… 돌아서봐요…….”

연인의 짜증 섞인 명령을 당장은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귓불을 깨물고 뺨 근처를 핥아대던 연인의 입술이 허겁지겁 인환의 것 위로 겹쳐든 때문이었다. 단숨에 목구멍 안쪽 깊이 파고든 연인과 함께, 뻣뻣하게 얼어 있던 온몸의 근육들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어느새 풀어진 허리춤 사이로, 연인의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날쌔게 비집고 들어왔다. 일말의 망설임도, 동정도 찾을 길 없는 사나운 손길이었다. 인환은 순식간에 한계까지 솟아올랐다. 버석거리며 서로를 향해 비벼지는 옷자락의 소음에, 숨이 넘어갈 듯한 격렬한 성욕을 느꼈다.

“……들어가고 싶어…… 아아, 젠장…….”

“……흑…….”

“……이리…… 돌아서요…… 바싹 붙여…… 더…… 더 가까이…….”

“……흐윽……! 위…… 야……!”

“……더 붙이라니까……! 흔들어…… 허리…… 비벼봐요…….”

마주 끌어안긴 몸뚱이 위로 다시금 바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덮쳐들었다. 짜부라트려 죽이기라도 할 기세였다. 어느새 지퍼가 내려갔는지 인환과 마찬가지로 불쑥 위로 솟은 연인의 페니스가 인환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등은 비좁은 화장실 칸막이벽에 밀어붙여진 채고, 앞에선 연인의 한 손이 엉덩이를 움켜쥔 채 그물처럼 휘감아오고 있는 통에, 인환은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아! 아파!!!”

두 개의 생식기를 모아 쥔 손에 가해진 연인의 악력이 너무나 강해, 한계까지 치솟았던 인환의 욕망은 불쑥 터진 서러운 흐느낌과 함께 순식간에 스러졌다.

“……흑……! 아파…… 조…… 조금…… 만…….”

“안 돼!”

“……위야…… 아파…… 제발……! 으웃!! 흡……!”

“가만있어! 뒤로 빼지 마요! ……죽여버릴 테니까…… 윽……! 큭……! 그래…… 아아…… 좋아…… 좋아, 선생님……!”

“……아…… 아파…… 아파……! 흑!!!”

“……아프지 않아…… 함께 가요…… 함께…… 더…… 더…… 비벼줘…… 흐읍!! 큭!!!”

“……윽! 흑! 흑……! 흐아…… 아…… 아아!!!”

“……울지 마…… 울지 마요…… 흣……! 가…… 함께…… 함께 가자구……!”

“위위!!!”

눈물범벅이 된 얼굴 위로 탐욕스러운 짐승의 키스가 떨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의 저항은 불가능했다. 대화도 불가능했다. 혼란과 두려움에 겨운 신음 소리조차 조금도 내지를 수가 없었다. 빈틈없이 틀어막힌 채 하나로 연결된 야수의 입술 때문이었다.

아픔인지 쾌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연인의 광기 어린 발정에 맞춰 필사적으로 허리를 흔들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섹스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섹스라기보단 차라리 입속으로 먹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환의 몸은 머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차례차례 야수의 이빨 밑에서 우적우적 씹혀 삼켜지고 있었다. 그렇게 야수의 배 속으로 떠내려간 인환의 피와 살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물컹한 수액으로 녹아내린 채 야수의 세포 구석구석까지 노곤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아니, 잡아먹히고 있는 것은 오히려 야수 쪽인 것도 같았다. 아니, 아니,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인환과 야수는 이빨을 드러낸 채 서로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아귀 같은 식욕이었다. 그렇게 남김없이 다 먹어치운 다음에야, 서로는 긴 트림을 하며 마음을 놓았다. 그제야 키스하고, 빨고, 물어뜯고, 어루만졌다. 그리고 마침내 ‘섹스’를 했다. 오르가슴을 움켜쥐었다.

고통과 한가지인 극치의 쾌락이 저릿저릿 온몸의 신경줄을 으스러뜨리며 정수리 끝까지 뻗치고 있었다.

“아……! 아아아……! 아악!!”

“흐읍!!”

야수의 피와 살점과 수액들이 새하얀 오르가슴과 함께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진동하는 피비린내에 몸서리를 치며 인환은 길고 긴 비명을 피워 올렸다.

물소리가 들렸다.

세면대 위로 떨어지는 수돗물 소리였다. 졸졸졸졸. 촤아아. 촤아. 양변기 뚜껑 위에 앉아 뒤로 등을 기댄 자세로 인환은 멍하니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손수건에 물을 적신 연인이 세면대와 칸막이 안쪽을 왕복하며 인환의 하반신을 말끔히 닦아주었었다. 섹스의 흔적이란 조금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얌전하게 지퍼까지 채워진 하반신을 보니, 지금 들리고 있는 물소리는 연인을 위한 것인 모양이었다.

감은 눈꺼풀 사이로 빈틈없이 파고들어오는 불빛이 가혹했다. 더 이상 어둠의 외투를 빌려 입을 필요가 없어졌으니 연인은 망설임 없이 화장실 스위치를 올렸으리라.

호흡이 정상 리듬을 되찾았을 무렵엔 눈을 뜰 수도, 또 몸을 일으켜 세울 수도 있을 정도로는 기운이 모여 있었다. 그럼에도 인환은 좀처럼 눈을 뜰 수도, 또 몸을 일으켜 세울 수도 없었다. 낯선 화장실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자고 싶을 만큼 극도의 피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주 잠시, 이대로 아틀리에로 돌아가버릴까 하는 유혹을 느꼈지만, 그건 그야말로 극히 짧은 순간의 유혹이었을 뿐이었다. 연인과 단 한순간이라도 더 함께 있고픈 원망(願望)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유혹이었다.

아무렴. 언제까지 늘어져 있을 수는 없었다. 가장 큰 소원을 택한다면 당장 일어나야만 했다. 저 멀리 노천강당에선 아무것도 모를 순진한 혜윤이가 연예인들의 화려한 입담에 넋을 놓은 채 두 보호자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강당을 벗어난 지 얼마나 지난 걸까. 너무 늦어지면 혜윤이가 걱정을 할 텐데…….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고 시계를 살폈다. 8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정확히 가늠할 순 없지만 적어도 30분은 족히 지난 것 같았다.

아직도 오르가슴의 여운에 후들거리고 있는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칸막이를 걸어 나왔다. 힘이 풀려선지 병신 다리가 유난히 더 절름거리는 것 같아 보여 괴로웠다.

세면대 쪽으로 시선을 주니, 수도꼭지 밑으로 허리를 접은 연인이 머리를 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연인은 상반신을 벗어젖힌 반라 차림이었다. 새빨간 ‘해적 왕자의 셔츠’가 화장실 입구 쪽 벽에 붙은 핸드드라이어 위에 단정하게 걸쳐져 있었다.

결벽증이 있는 연인답다고나 할까. 공중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는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연인의 상반신은 마치 멱을 감기라도 한 듯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오후 내내 흘린 땀으로도 모자라 섹스까지 했으니 어떻게든 샤워를 하고픈 욕구가 굴뚝같았으리라. 당장 잠을 자고픈 인환의 욕구와 당장 샤워를 하고픈 연인의 욕구 중 누구 것이 더 강렬할까 하는 쓸데없는 비교를 하며 인환은 멍하니 실소했다. 꽤 오랫동안 쏟아지는 물줄기 사이에 머리를 들이민 채 연인은 단 한 방울의 비눗기도 없이 말끔히 머리카락을 헹구고 있었다. 인환을 닦아주었던 손수건에 물을 묻혀 손이 닿는 상반신 곳곳을 말끔히 씻은 것은 물론이었다.

몇 분이 더 지났을까, 수도꼭지를 잠근 후 고개를 든 연인이 마침내 인환을 돌아보았다.

새까만 눈동자 속엔 여전히 야수의 그림자가 어슬렁어슬렁 떠돌았지만, 대충 허기를 채운 것에 만족했는지 표정만은 매우 평온해 보였다. 살피듯 인환의 전신을 훑어 내리던 연인은 이내 꽉 짠 손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기 시작했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손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무리였으리라. 몇 번이나 손수건의 물기를 짜서 머리카락을 훔쳐보지만, 사자 갈기처럼 야성적으로 늘어진 암갈색 머리카락에선 아래로 아래로 물방울이 쉴 새 없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결국 포기를 한 모양인지, 청바지 주머니에 젖은 손수건을 찔러 넣곤 벽에 걸쳐두었던 셔츠를 주워 입는 연인이다. 기왕에 땀투성이였던 셔츠라, 물에 젖은 반라의 몸과 만나니 쫄티가 무색할 지경으로 몸에 착 들러붙는다. 즉시 희미하게 일그러지는 양미간이 연인의 불편한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주었다. 지독히도 성실한 모범생 스타일만 아니라면, 금방 씻은 몸에 땀투성이 셔츠를 걸치기보단 반라로 캠퍼스를 활보하는 쪽을 선택했을 연인이었다.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살피는 듯한 시선이 다시금 인환을 향했다. 입에 발린 물음 같지는 않았다. 동정심을 보내진 않을지언정 인환의 상태가 그닥 좋지 않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정확히 숙지하고 있을 연인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댁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서늘한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무감정한 물음이었다.

“……괘…… 괜찮아…….”

“고집 부리지 마세요. 무리하시다가 쓰러지시기라도 할까 봐 신경이 쓰입니다.”

“……아냐……! 지, 진짜 괜찮아. 아…… 아래쪽도 거의 다 나았고 탈골됐던 어깨도 이젠 끄떡없는걸. 진짜야. 이제 아픈 데는 하나도 없어, 위야.”

“선생님.”

“……살 빠진 건 내가 워낙 물렁살이라 그래. 진짜라니까. 며, 며칠 잘 먹으면 또 금방 통통하게 찌는 체질인걸. 석주네 전시도 도와줬었고…… 친구들이랑 하는 그룹전 준비도 슬슬 시작해야 하고…… 요즘 계속 바쁜 일들이 있어서 그런 것뿐이야. 신경 쓰지 마, 위야.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

“……그, 그리고 오늘 진짜 너무 즐거웠는걸. 졸업한 지도 꽤 돼서 축제가 이렇게 재밌다는 거 잊고 있었어. 혜윤이 수다 듣는 것도 너무 즐겁고…… 그…… 그리고…….”

“…….”

“……그리고…… 너…… 너랑 함께 다니는 게 제일 행복하거든, 나…… 무, 물론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너는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

“……오늘 불쑥 학교에 찾아와서 미안해…… 화 안 내줘서 정말 기뻤어, 위야…….”

“…….”

“…….”

“…….”

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몇 마디째부터 바닥으로 고개를 떨어뜨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언제 어느 때 연인의 울화를 건드릴지 알 수 없는 인환에게 있어, 대화 중에 시선을 피하는 것은 최소한의 자기 보호 본능이었다.

연인의 군함처럼 커다란 발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 동안 연인의 처분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절대로 혼자 먼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연인이 끝까지 가라고 화를 낸다면 인환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뭐라 변명을 한대도 오늘의 자신은 연인에게 있어 불청객 그 자체일 뿐이었다.

“……꽤 늦었습니다. 혜윤이가 걱정하겠네요.”

이윽고 나지막하게 연인의 처분이 떨어졌다. 여전히 감정을 읽기 힘든 냉랭한 어조였지만 의미는 긍정적이었다. 억지로 인환을 쫓아 보낼 의사는 없는 것 같았다. 숨죽인 한숨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던 인환의 입술 틈으로 길게 뿜어 나왔다. 좀 더 연인과의 데이트(!) 백일몽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연인의 팔이 뻗어와 인환의 허리 근처를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오늘 하루 종일 인환을 설레게 만든 익숙한 부드러움이었다. 부축하듯 연인이 가까이 달라붙자, 화장실 가득 미미하게 떠돌고 있던 싸구려 비누 냄새가 좀 더 강렬하게 폐부를 파고들었다. 반쪽짜리 샤워 덕분인지 그토록 강렬하게 진동하던 연인의 땀 냄새는 많이 수그러들어 있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연인의 허리께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셔츠 자락을 마주 쥐는 것으로 연인의 황송한 배려를 받아들였다. 가슴은 몹시 설레고 손도 바보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떨렸지만, 인환은 용기를 내 연인의 몸과 접촉했다. 흠씬 젖은 뜨거운 체온이 달라붙은 셔츠 너머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연인의 팔에 좀 더 힘이 가해지며 인환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그만큼의 체중을 연인의 팔이 고스란히 지탱해주고 있었다.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설령 그게 고객에 대한 마지못한 예의에 불과할지라도, 인환에게 있어선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연인만의 애정 표현과 다름없었다.

노천강당으로 되돌아오는 귀로는 갈 때에 비하면 대단히 느긋한 편이었다. 혜윤이가 걱정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연인은 별로 서두르는 기색 없이 인환을 부축하듯 부드럽게 에스코트해주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딘 인환의 절름발이 보폭에 맞춰주었고, 숨이 가빠지면 그조차도 멈추고 인환의 얼굴을 살피며 기다려주었다.

건강한 정상인의 걸음걸이라면 10분도 채 안 될 거리였지만, 그렇게 연인의 느긋한 배려를 만끽하며 오다 보니, 두 사람이 노천강당에 도착했을 무렵엔 8시가 훨씬 지나 있었다. 초대 연예인들의 출연이 주축이 된 2부 공연이 시작된 지도 꽤 된 듯싶었다. 두 사람이 떠나왔을 때보다 한결 늘어난 관람객 덕분인지, 드문드문 보이던 빈자리조차 좀처럼 찾을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이 앉았던 자리 또한 새로 유입된 관람객들의 엉덩이에 벌써 점령당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공연 분위기는 완전히 무르익었고, 무대와 구경하는 관람객들이 혼연일체가 돼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사운드는 여전히 크고 화려했고, 현란한 조명 쇼도 분위기를 띄우는 덴 역시 한가지였다. 2부 공연이 끝나는 9시부터 노천강당 안은 혜윤이가 그리도 고대하던 테크노 댄스 파티장으로 변모한다고 했다. 과연, 당장 무도장으로 바뀐대도 조금의 위화감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사방에서 광란의 기운이 팽배하고 있었다.

“……저 인파를 뚫기는 쉽지 않겠군요. 아무래도 선생님은 여기서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공연 끝나면 이쪽으로 오라고 혜윤이에게 전하고 오겠습니다.”

혜윤이가 앉아 있는 사이드 쪽을 한동안 살피던 연인이 담담히 명령했다. 인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설령 자리가 아직 비어 있다고 해도 인환으로선 도저히 뚫기 힘든 인의 장막이었다.

무대를 정방향으로 바라보는 위치에 서 있는 인환을 힐끗 일별한 연인이 거침없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인환에겐 철옹성처럼 막강해 보였던 인의 장막도 연인에게 있어선 그저 모래성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연인은 별로 어렵지 않게 혜윤이에게 다가갔고, 짧게 몇 마디 주고받은 뒤 혜윤이의 크로스백을 받아 챙겨선 금세 인환에게로 되돌아왔다. 걱정할까 우려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혜윤이는 완전히 공연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빠의 몇 마디 말에도 귀찮은 듯 건성으로 대꾸하는 것 같던 혜윤이의 시선은 무대 위에서 막 열창을 시작한 가수 이진섭에게 완전히 고정돼 있었다.

“소음이 덜할 것 같으니 좀 더 언덕 쪽으로 올라가죠, 선생님.”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쓸며 가까이 다가온 연인이 무뚝뚝하게 명령했다. 비누에 감은 탓인지 약간 부하게 부풀면서 마르고 있어, 연인의 선명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야성적으로 보였다. 여전히 흠뻑 젖은 채 찰싹 달라붙어 있는 셔츠 탓에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마저 고스란히 드러나니, 흡사 붉은 가죽을 걸친 대형 고양잇과 짐승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이 우아하고 섹시했다. 주변이 어두웠기 망정이지, 만약 대낮이었다면 여학생들로 하여금 몇 시간 전 이상의 센세이셔널한 소동을 일으키게끔 했을 터였다.

“이리 오세요.”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인환은 연인에게 팔을 잡힌 채 노천강당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잔디밭 쪽으로 좀 더 올라가게 되었다. 고작 20여 미터쯤을 걸어 올라갔을 뿐인데 몹시 숨이 밭았다.

“여기 앉으세요.”

헐떡이며 숨을 고르고 있는데, 어느새 자리를 잡고 앉은 연인이 다시금 담담하게 명령을 던진다. 연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연인 옆자리에 넓게 펼쳐져 있는 새빨간 실크 두건이었다. 두어 시간 전 부랴부랴 혜윤이의 크로스백으로 사라졌던 귀.한. 두건이 연인의 손수건처럼 초라한 방석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인환에게 있어선 연인의 손수건 이상의 감격으로 목이 멜 소중한 전락이었다.

“……그…… 그거 빌린 거라면서…….”

마음과는 달리 한 번쯤 거절을 해보는 건 두건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혜윤이가 안타까워할까 봐서다. 뭐라 해도, 기왕에 자랑스러운 제 오빠를 근사한 ‘왕자님 해적’으로까지 신분 상승시켜준 아이템이 아닌가.

“창일이한텐 어차피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제가 가진다고 해도 뭐라 그럴 녀석도 아니구요. 앉으세요. 피곤하시잖습니까.”

“…….”

연인에게 언젠가 이 두건을 달라고 부탁해보자고 멍하니 되뇌며 인환은 연인이 마련해준 방석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자하연 앞 손수건 방석에 앉을 때처럼 여전히 조금 목이 메었다.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멀리 언덕 아래 무대로 시선을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고작 20여 미터를 더 떨어졌다고, 스피커 소음도 한결 덜했고 색색의 조명 빛도 좀 더 아스라해졌다.

닿을 듯 말 듯 인환 곁에 가까이 앉아 있는 연인의 체취가 감미롭게 코끝으로 다가들었다. 많이 휘발한 비누 냄새 대신 그리운 땀 냄새가 좀 더 강렬해져 있었다. 대낮의 무더위를 믿기 힘들 정도로 캠퍼스의 기온은 꽤나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산속에 위치한 캠퍼스라 일교차가 심한 듯했다. 슈트 차림인 인환도 약간 서늘한 기운을 느낄 정도인데 얇은 셔츠 한 장, 그것도 땀으로 푹 젖어 있는 것을 걸치고 있을 연인은 추워하기는커녕 여전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혜윤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인파를 헤치며 몸싸움을 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확실히 평범한 현상은 아니었다. 그토록 더위에 치이면서도 늘 강철 같은 체력을 유지하는 걸 보면 그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환의 ‘영웅’이 아닐 수 없었다.

침묵 속에 잠긴 채 인환은 한동안 조용히 무대를 구경했다.

연인은 한쪽 무릎을 세워 턱을 괸 채 무대 쪽에 시선을 주고 있었지만, 인환과 마찬가지로 무대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반영하듯, 입술이 무방비하게 살짝 벌어져 있고 이마 역시 약간 굳어 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향해 시선을 주고 있진 않지만, 어쩐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순간, 인환이 연인을 절실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인 역시 인환을 꽤나 의식하고 있다고. 물론, 그 ‘의식’의 숨은 의미야말로 서로 180도 다르긴 했지만. 인환의 ‘의식’이 애정과 사모를 의미한다면 연인의 ‘의식’은 그저 성적인 긴장감에 불과했다. 완벽하게 무르익은 야수의 성욕이 느닷없이 노도처럼 연인을 덮친 것이다.

자신은 어쩜 이런 사태를 은밀히 계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인환은 스스로에게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용 남창이라는 명목으로 연인 주변의 모든 여자들을 정리시킨 이면에는, 연인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탐해주길 기도했던 교활한 속내가 깔려 있었으리라고. 연인이 훌쩍 성장해버린 까닭까지는 알 수 없어도, 인환의 저 숨은 기도는 완벽하게 이루어진 셈이었다. 어부지리 격과 다름없었지만 어차피 결과는 한가지였다.

그러나 과연 자신은 그 결과에 만족하고 있는 걸까? 상상도 못 했던 연인의 성숙한 욕망에 기뻐 날뛰고 있는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건 아니라는 대꾸가 흘러나왔다. 그래,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었다. 그 어떤 미친 인간이 있어, 연인에게서 ‘성욕 배출구’ 취급을 받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으랴. 행복해할 수 있으랴.

“……마…… 많이 즐거운가 봐, 혜윤이.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나라도 진작 가수들 공연장에 데려가주는 건데…….”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연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어보았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고통을 주는 저 서로 다른 ‘의식’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인의 깊은 시선이 잠시 인환의 프로필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연인을 쳐다볼 용기는 여전히 없어, 인환의 시선은 혜윤이 못지않게 뚫어져라 전방의 무대만을 파고 있었다.

“……그…… 그야 물론 공부에 방해만 되지 않는 거면 말이지.”

“…….”

“……아, 아직 중학교 3학년이고 공부도 굉장히 잘하니까…… 아직은 조, 좀 더 놀아도 될 거 같은데…….”

“…….”

“……무, 물론 네가 알아서 잘 신경 써주긴 할 테지만…….”

“…….”

아무리 기다려도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다. 빤히 바라보는 냉담한 시선에서도 긍정적인 대꾸를 읽을 순 없었다. 거듭되는 ‘무대응’만으로도 인환은 연인의 단호한 거절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당신이 뭔데 내 소중한 누이 일에 참견을 하느냐는.

“……혜윤이 그림도 잘 그리는 거 같더라. 만화 그림들만 보긴 한 거지만 재능이 상당해 보였어. 제대로 미술 교육을 받기만 하면…… 그, 내…… 내가 틈틈이 가르쳐줄 수도 있고…….”

“그림은 돈 많은 사람들이나 취미로 할 수 있는 공부죠. 혜윤이는 공무원이나 교사로 만들 겁니다. 힘들지 않을 직업에 힘들지 않을 인생을 선택하게 만들 생각이죠. 적당히 일 좀 하게 하다가 괜찮은 남자가 나타나면 바로 시집을 보낼 생각입니다.”

마침내 연인의 대꾸가 떨어졌다. 좀 더 용기를 내본 인환의 접근은 결국 단호한 거절로 일단락을 맺은 셈이었다.

한층 더 싸늘해진 연인의 시선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팔등에 설핏 소름이 돋는 것은 제법 쌀쌀하게 느껴지는 산바람 탓만은 아닐 터였다.

“……응…… 그, 그렇지…… 아무래도 여자로서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라면 교사나 공무원이긴 할 거야…….”

최대한 열렬한 어조로 연인의 생각에 동의를 표해주었다. 새삼 별로 아파할 일은 아니었다. 아무렴, 늘 있는 일이었다. 연인이 그어둔 선 밖으로 가차 없이 밀쳐질 뿐인.

잠깐 땅바닥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금 현란한 조명이 명멸하고 있는 무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혜윤이 못지않게 무척이나 흥미진진해하고 있는 시선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그런 시선으로 바라봐주길 기원했다. 연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나약한 늙다리 게이 고객이고 싶지 않았다.

“오빠!!! 선생님!!”

느닷없이 파고든 외침에 인환은 펄쩍 뛰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10여 미터쯤 전방에서 혜윤이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공연이 다 끝난 건가?

혜윤이를 중심으로 삼삼오오 모여 자리를 뜨고 있는 무수한 인파가 시야 가득 밟혀들고 있었다. 오색찬란하게 무대 위에서 명멸하던 조명 빛은 날카로운 레이저 빛으로 변해 공중으로 쏘아 보내지고 있었다. 무대 양쪽에 설치된 초대형 스피커에선 공격적으로 변한 레이저 조명에 맞춰 현란한 테크노 음악이 귀청을 찢을 듯 퍼져 나오고 있었다. 보여주기 위한 무대 대신 직접 즐기는 마당놀이 판으로 무대는 빠르게 변태하고 있었다. 운영진으로 보이는 50여 명의 남녀 대학생들이 강당 곳곳을 종횡무진 누비며 VIP석에 마련돼 있던 의자들을 치우고 있었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초대형 호프 맥주통들이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총학생회가 주관한다는 ‘프리비어(free beer)’ 행사 때문이었다). 테크노 파티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무한정으로 지급될 예정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맥주들이 속속 강당 앞마당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랬다. 어느새 본 공연이 모두 끝이 나고 ‘테크노 댄스 파티’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공연을 관람한 사람들이 전부 파티에 참가하는 건 아닌 모양으로, 노천강당 안에 남아 서성이는 인파 못지않게 강당을 빠져나가는 인파들도 상당수였다. 아니, 숫자만으로 치자면 강당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언뜻 보면 그야말로 개미굴로 부지런히 먹이를 나르고 있는 개미 떼와 한가지였다.

다가오는 혜윤이와 부산한 무대 주변을 번갈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인환은 문득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쪽 뺨과 어깨 근처로 축축하면서도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동일한 온기는 등을 지나 허리춤으로 이어진 연인의 팔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맙소사! 인환은 연인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기대 잠들어 있었다!!!

무언가 실수를 한 건 아닐까, 자신들이 혹 수상쩍어 보인 건 아닐까, 게이로서의 겁 많은 자격지심이 회초리처럼 뇌리를 직격했다.

자각과 동시에 인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새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들었는지 도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기를 써야만 했다. 휘청거리는 몸을 옆에 버티고 선 떡갈나무 기둥에 간신히 의지했고, 바로 인환을 뒤따라 일어선 연인의 팔이 뻗어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최악의 사태를 막아주었다.

“조심하세요. 괜찮으니까 제게 기대시구요.”

나지막하고 평온한 연인의 음성이 인환의 혼란을 빠르게 잠재워주었다. 인환의 두 팔을 움켜쥔 채 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연인의 손은 굳건한 바윗돌마냥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워낙 주변이 소란스럽기도 하고, 두 사람이 앉아 있던 장소가 빛이 제대로 닿지 않는 비교적 후미진 곳이라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수상쩍은 시선을 보내오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열심히 언덕배기를 오르는 혜윤이조차 인환을 깨운 최초의 부름 이후로는 제대로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참으로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입가부터 닦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침 흘리셨습니다. 혜윤이가 보면 놀리겠군요.”

연인의 무뚝뚝한 지적에 또다시 혼비백산, 부랴부랴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는 인환의 얼굴은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핥는 듯한 연인의 시선이 느껴졌다.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반칙이다. 좀 깨워주지 않고. 자다가 만약 실수라도 했다면(자신도 모르게 연인을 끌어안는다든지 하는) 무서울 정도로 화를 낼 사람이 아닌가. 어쩔 수 없는 원망이 연인에게로 퍼부어진다. 물론 속내로만. 아직 잠이 덜 깨서인가. 아니면 간덩이가 꽤나 부어오른 때문이거나. 얄미울 정도로 태연하게 인환의 당혹을 지켜보고 있는 연인이 몹시도 야속하게만 생각되었다.

“선생님!! 오빠!!”

거의 덮쳐들 듯 두 사람 앞으로 뛰어든 혜윤이가 인환을 완전히 현실로 이끌었다. 연인에게 붙잡혀 있던 팔을 혜윤이를 향해 슬쩍 돌려 빼는 것으로 인환은 혜윤이의 열광적인 흥분을 기꺼이 달게 맞았다. 더 이상 인환을 부축할 필요성이 없어졌으므로 연인도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다만 핥는 듯 촘촘한 시선의 공격만은 여전했다.

“진짜 재밌었지, 오빠?!!! 굉장했죠, 선생님?!!! 이진섭 노래하는 거 들었어, 오빠?!!! 세 곡이나 부르고 앙코르로 두 곡이나 더 불렀다?!!! 그거 들었어?!!! 들었지?!!! 라이브를 그렇게 잘하는지 나 몰랐다?!!! 실제로 보니까 텔레비전으로 볼 때보다 열 배는 더 멋있게 생긴 거 같은 거 있지?!!! 위야 오빠랑 휘야 오빠보다는 쬐끔 못하지만 그래도 진짜 잘생겼어, 오빠!!! 가수 말고 탤런트 해도 될 거 같더라?!!! 어, 참!!! 개그맨 손영철은 봤어, 오빠?!!! 손영철 보셨어요, 선생님?!!! 「웃음 전망대」서 손영철 아저씨랑 콤비 개그하는 우성택도 나온 거 알어?!!! 진짜 웃겼다?!!! 말을 어쩜 그렇게 웃기게 해?!!! 너무 웃겨서 눈물이 다 나는 거 있지?!!!”

혜윤이의 흥분과 즐거움에 더 이상 보태줄 건 없는 것 같았다. 듣는 쪽도 맞장구를 쳐줄 필요성을 못 느꼈지만, 혜윤이 역시 대답을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숨 쉴 틈 없이 토해지고 있는 감탄사들을 설명할 길은 없으리라. 두 사람의 보호자는 그저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우두커니 선 채 속수무책으로 이어지는 혜윤이의 따발총 수다를 한동안 얌전히 경청해주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그럴싸한 놀이 문화에 많이 흥분했다곤 해도 본래 얌전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말이다. 언젠가는 두 보호자들에게도 익숙할 ‘진짜 혜윤이’로 되돌아와줄 터였다. 이 밤의 끝이 지나고 나면, 어딘가 이상야릇한 공간에 서 있는 것처럼 혜윤이에게나 인환에게나 몹시도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 축제의 한마당을 벗어나기만 하면. 그리고, 사실 그 끝은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집에 갈 거지? 피곤하지 않니?”

한참이나 방방 뛴 끝에 겨우 주변 시선을 의식한 듯 목소리 톤을 한결 죽인 혜윤이를 향해, 연인이 비로소 물음을 던졌다. 절대로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걸 짐작하고 있는 듯, 차분한 어조는 명령이 아닌 권유이자 부탁의 기색을 띠고 있었다. 보관하고 있던 크로스백을 도로 메주는 다정다감한 손길에서도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떠냐’의 아우라가 풀풀 풍겨 나왔다.

“피곤하긴 뭐가 피곤해! 오빤 참! 디스코도 한번 안 춰봤는데?! 대학생 언니 오빠들 춤추는 것도 아직 못 봤구!”

“남 춤추는 걸 봐서 뭘 하겠다는 거냐.”

“당근 언니 오빠들 멋있는 스텝 배우는 거지! 나두 수학여행 가서 기초는 뗐단 말야! 내가 얼마나 디스코 잘 추는지 오빠 모르지?! 테크노 스텝도 진짜 잘한다, 나?!”

“……춤은 나중에 대학 들어가서 배워도 돼.”

“어우, 몰라, 오빠!!! 약속했잖아! 나 시험 잘 치면 축제 몽땅 구경시켜준다구!!! 아직 축제 다 안 끝났잖아! 그리구 오빠도 춤 잘 춘다며?! 고등학교 때부터 잘 췄다며?! 선생님이 그러셨단 말야! 오빠가 아무리 뭐라고 그래도 나 테크노 파티까지 다 구경하고 집에 갈 거니깐! 선생님이 늦게라도 데려다주신다고 했으니까 피곤하면 오빠나 먼저 집에 가! 오빠 춤도 꼭 보고 싶지만 할 수 없지 뭘! 나 이따가 블루스도 꼭 춰볼 거다?! 선생님이 파트너 해주신댔어!”

연인의 시선이 잠시 인환을 향했다가 다시 누이에게로 돌아갔다. 입가에 흘린 침을 닦을 때보다 더 심한 수치감이 느껴졌다. 혜윤이의 천진함과 악의 없음에 떠밀려 파트너를 약속해버린 몇 시간 전을 도로 무르고 싶었다. 그야, 인환이라고 아주 춤을 못 추는 것은 아니다. 상대 여성의 발을 밟지 않고도 한두 곡쯤은 무사히 블루스를 땡길 수도 있긴 하다. 다만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균형이 맞지 않는 다리 움직임이 꽤나 꼴불견으로 보인다는 게 문제지. 연인 앞에서 눈치 없이 뒤뚱거리고 있는 어느 얼간이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확 끼쳐드는 붉은 기를 부디 연인이 눈치채지 말았으면 하고, 간절히 빌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가긴 누가 먼저 가. 널 놔두고.”

잠시 뜸을 뒀다가 토해진 연인의 어조에선 체념의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딱 한 시간 만이다? 한 시간만 봐줄 거야, 문혜윤. 10시 되면 즉시 집에 돌아가는 거다.”

“애걔, 겨우 한 시간?!!! 테크노 파티 12시에 끝난다는데?!!!”

“12시에 끝나는 건 대학생 선배들이고, 넌 아직 미성년자야, 문혜윤. 선배들이 쫓아내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지.”

“우, 씨! 진짜 치사해∼∼∼!!!”

몇 번 더 불만스레 툴툴거리긴 했지만 혜윤이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순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지식한 오빠로선 최대한의 양보를 선물해준 것이라는 걸.

서로 만족스러운 타협점을 찾은 오누이의 분위기는 한결 더 화기애애해졌다. 누이를 바라보고 있는 연인의 무뚝뚝한 표정은 아주 미세하게나마 부드럽게 풀려 있었고, 다시금 ‘느티놀이 한마당’ 공연으로 화제를 옮긴 혜윤이도 믿음과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줄곧 오빠를 주시하곤 했다.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저토록 애정에 넘친 연인의 시선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모진 대가라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인 관계가 아니라 설령 친남매 사이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손톱만큼의 불만도 없을 것 같았다.

넋을 잃은 채 한참 동안 연인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나 보았다. 문득 마주쳐오는 연인의 눈빛에서 살피는 듯한 날카로운 기색이 느껴졌다. 가슴이 철렁해선 부랴부랴 혜윤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탐욕스러운 눈빛이었으리라.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추한 이기의 눈빛이었으리라.

임시 방석으로 전락해버린 실크 두건을 그제야 발견했는지 안타까운 탄성을 내지르던 혜윤이가 두건을 집어 들곤 탈탈 먼지를 털었다. 어쩐지 미안한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호화찬란한 보석이 박힌 그 어떤 존귀한 두건을 잃어버린대도 혜윤이라면 조금도 아쉬워할 자격이 없을 것 같았다. 인환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부자인 사람이야말로 바로 혜윤이였으니까.

“……그만하고…… 잠깐 들렀다 올 데가 있으니까 여기서 선생님과 기다리고 있을래?”

제법 길어지려는 혜윤이의 잔소리를 무뚝뚝하게 자르며 연인이 물었다.

“들러? 어딜 들러? 또 화장실 가는 거야? 참, 아깐 왜 그렇게 늦었어? 걱정했잖아, 오빠.”

“가만 앉아 있기 답답해서 선생님이랑 잠깐 산책했어.”

기왕에 홍조를 머금고 있던 인환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도둑이 제 발 저린 인환과 달리 연인은 얄미울 정도로 동요가 없었다. 연인 특유의 담담한 어조는 마냥 고요하기만 했다.

“이번엔 오래 안 걸려. 5분 안엔 돌아올 테니까 선생님 너무 귀찮게 하지 말고 있어.”

“5분이라구? 그럼 그냥 같이 가면 되잖아. 나도 한 시간 반이나 돌계단에 앉아 있었더니 엉덩이 무지 아파, 오빠. 그리구 화장실도 급하고. 그냥 모두 같이 가자, 응?”

“선생님 많이 피곤해하셔. 화장실 갈 거면 너나 따라오든지.”

“응, 알았어. 괜찮죠, 선생님? 우리 금방 갔다 올게요.”

“괜찮고말고. 화장실 급하다며 빨리 가봐, 혜윤아.”

묻는 듯한 인환의 표정은 아랑곳없이, 벌써 등을 보인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는 연인이었다. 재촉하듯 대꾸를 해주자 혜윤이 역시 연인을 따라 잽싸게 달려 나갔다.

자동인형처럼 돌아간 인환의 시선은 열심히 두 사람의 뒷모습만을 좇고 있었다. 가능한 한 크게 눈을 부릅떠보았지만, 언덕 아래로 죽 이어진 보도는 몹시도 어둑어둑했고, 달리 귀로에 오른 수많은 인파들에 섞이기까지 한 나머지, 두 사람의 흔적은 금세 인환의 시야로부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고작 5분에 불과할 이별임에도 이상하게 가슴이 서늘했다. 마치 냉혹한 결별 선언을 듣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산 공기 특유의 차갑고 시린 기운이 뼛속 깊이까지 침투하고 있었다.

어디를 들른다는 걸까? 누군가와 약속이라도 돼 있는 걸까? 정문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것으로만 봐서는 연인의 목적지를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천강당은 캠퍼스 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정문의 정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디를 목적지로 삼는다고 해도 연인이 가고 있는 방향은 메인 게이트인 정문 쪽일 수밖에 없었다.

연인에게 기대 깜빡 잠들었던 떡갈나무 주변 잔디밭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이상할 정도로 우울하게 가라앉아가는 기분을 추슬러보기 위해서였다. 한계까지 지친 피로감보다 기묘한 마음의 불안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나마 잠깐 눈을 붙이는 것으로 기력을 모으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밑도 끝도 없는 정체 모를 수렁 속으로 깊숙이 까라졌을 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두 사람을 따라갈 것을 하고 뒤늦은 후회를 곱씹기도 했다. 공연이 끝난 지 10분이 채 안 되건만, 벌써 파티 준비를 거의 완벽하게 갖춘 듯한 강당 쪽을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했다. 홍대 클럽가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인기 DJ가 마이크를 통해 뭐라 뭐라 유머러스한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2부 공연만으로도 이미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놀자판 분위기련만, 그에 성이 차지 않는지 좀 더 분위기를 띄우려는 DJ의 재기발랄한 멘트들은 좀처럼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중한 두 사람과 함께였다면 비교적 재미있게 들어주었을 인기 클럽 DJ의 재치와 위트도 지금의 인환에겐 그저 정신 사납게만 느껴졌다.

자주 시계를 보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열심히 세뇌했다. 그저 한 호흡 한 호흡 숨을 쉬는 일에만 신경을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은 몹시도 더디게 흘러갔다. 시계를 확인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약속한 5분은 벌써 지난 것 같았다. 그래도 시계를 보진 않았다. 확인 사살이 무서웠다.

공짜 맥주를 배급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기 시작한 남녀 학생들이 보였다. 어쩐지 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인환 역시 공짜 맥주 대열에 합류하고픈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안 될 일이었다. 10시가 넘기만 하면, 인환에겐 즉시 누이 혜윤이와 연인을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줘야만 하는 드라이버로서의 막중한 의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젠장. 어떡하지? 약속된 5분이 몇 배는 더 지난 것만 같은 괴로운 착각이 전신을 사로잡고 있었다. 더 이상 기다렸다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히스테리를 견디고 있는데, 고대해마지 않던 그리운 부름이 멀리서 환청처럼 들려왔다.

“선생니임!!”

환청이 아니었나?

“선생님!!”

두 번째 부름은 좀 더 커지고 명확해졌다. 벌벌 떨고 있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인환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오른팔을 휘휘 내저으며 달려오고 있는 혜윤이가 보였다. 평소 연인의 모습과 한가지일 낡은 티셔츠에 낡은 청바지, 그러나 얼굴과 표정만은 싱그럽고 예쁘기 그지없는 누이 혜윤이였다.

초조한 시선은 좀 더 애타는 심정으로 다른 소중한 이를 찾았다. 혜윤이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기자, 고맙게도 익숙한 붉은 셔츠가 시야 가득 밟혀 들어왔다. 몸에 딱 달라붙는 유명 메이커의 새 청바지도. 기쁨과 안도감으로 인환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어둠침침한 속에서도 그쪽만 훤하게 빛이 비추는 것 같았다. 정문 쪽으로 귀로를 서두르는 인파들이거나, 테크노 파티에 참가하기 위해 새로 유입되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할 것 없이 연인을 힐끔거리긴 한가지였다. 당연했다. 안 그래도 주변의 뭇 청년들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더 큰 키에 조각처럼 다듬어진 근육질의 몸집이 더해지니, 시선을 끌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자 갈기처럼 야성적으로 휘날리는 암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하느님. 조각처럼 뚜렷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도 틀림없었다. 틀.림.없.는. 연인이었다.

찰나의 한순간, 친친 얽어매 들어오는 듯한 야수의 번뜩임이 설핏 인환의 얼굴을 핥고 지나갔다. 너무나 찰나라서 착각을 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이내 평온한 무표정으로 되돌아온 연인이 문득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게 보인다. 어라? 왜? ……지금 누구한테 고개를 끄덕이는 거지? 혜윤이는 한참을 앞서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는데?

연인이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덕분에 확보된 시야 끝으로 하늘거리는 연두색 시폰 원피스 자락이 설핏 눈에 들어왔다.

……두근…….

백금 체인을 따라 에메랄드가 영롱하게 박혀 있는 고급스러운 펜던트도 언뜻언뜻 보였다. 주변의 어둠 탓에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새하얀 스트랩 샌들도. 유럽 어딘가의 유명 메이커일 자그마한 양가죽 핸드백이 걸린 팔은 희고 가늘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길고 탐스러운 생머리가 서늘한 산바람에 까마귀 날개처럼 하늘거리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손톱, 긴 생머리, 큰 눈…… 예쁘다기보다는 아름답다고 해야 할 조각 같은 얼굴 생김새……. 연인의 무뚝뚝한 한마디에 자동적으로 퍼지는 웃음은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섹시하면서도 감미로웠다.

바이올린을 전공한다고 했다. 마치 공주님처럼 우아한 여자였다. 아니, 여신처럼 당당한 여자였다.

양신애였다.

“……있죠…… 있죠, 선생님……? 그 언니래요. 그 언니요…… ‘노예 경매’요.”

혜윤이의 목소리는 꽤나 낮고 은밀했다. 연인과 양신애를 의미심장하게 번갈아 훔쳐보는 시선도, 인환의 귓불을 잡아당겨 입술을 거의 붙인 채 소곤거리는 품새도, 일급비밀을 털어놓으며 양심선언을 하는 내부 고발자와 한가지였다.

“……55만 원요…… 55만 원 주고 오빠를 산 언니요…….”

혜윤이의 ‘내부 고발’이 생각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인환은 순간 왈칵 목이 멜 정도로 크게 위로받았다.

“……어제 일일 데이트 다 못 했대요. 그래서 오늘 마저 데이트 해주는 거래요. 어어…… 음, 원래는 24시간 동안 ‘주인님’을 위해 봉사해줘야 하는 건데, 저 언니가 오늘 오빠가 테크노 댄스 파티 파트너가 돼주면 24시간 봉사해준 걸로 쳐주겠다고 했대요.”

“…….”

그래. 지레 겁낼 일이 아니다. 연인은 아직 어리다. 스무 살 새내기로 새신랑이 된 사람이 있단 소린 아직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무렴. 아직 ‘그때’가 된 건 아니다. ‘그때’가 된 게 아니라면 절대로 겁먹을 필요는 없다. 연인은 내 거다. 아직은 오로지 자신만이 소유할 수 있게끔 허락된, 오로지 자신만의 ‘전용 남창’이다. 그래, 그래. 그렇고말고. 공주님은…… 저 조물주가 꽤나 공들여 제작했음직한 아름다운 여자는…… 그저 연인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자들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왕자님이 아니더냐. 유사 이래 서울대 최고의 킹카란다. 저런 여자애들이 벌떼처럼 우글거리는 팬클럽이 벌써 수도 없이 창단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닥 예리한 안목이 아니라도 여자라면 한 번쯤 꿈꾸게 되는 먼 별나라의 왕자님이 그녀들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니까. 당연히 손을 뻗고 싶겠지. 만져보고 싶을 것이다. 과연 저 왕자님의 존재가 현실인지, 환상인지. 아무렴. 축제가 아니더냐. 축제는 환상을 손으로 만지고 확인해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부여해주기도 한다. 동경하는 왕자님이 서빙해주는 동동주를 마실 수도 있고, 노예 경매로 왕자님을 ‘구입’해, 단 하루뿐인 백일몽을 즐길 수도 있다. 약간의 일탈쯤은 누구라도 눈감아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인 것이다.

“와, 근데 봐도 봐도 진짜로 이쁘다! 정말 인형 같아요, 선생님. 그죠?”

인환의 귓불을 놓아준 혜윤이의 목소리는 어느새 내부 고발자에서 연인의 누이동생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첨 봤을 때 진짜로 깜짝 놀랐어요. 영화배우인 줄 알았지 뭐예요. 미스코리아 나가도 충분히 1등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목소리도 너무너무 이쁘죠? 바이올린을 켠대요. 저렇게 이쁘게 생긴 언니가 바이올린으로 멋있는 연주를 하면 정말 클래식 음악도 하나도 안 지루할 것 같아요.”

물론, 혜윤이의 줄줄이 토해지는 감탄사는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파티가 시작된 지도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공짜 맥주가 선물해준 적당한 취기에다 재기발랄한 DJ의 카리스마,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분위기를 광란으로 몰아가는 테크노 음악의 현란하고 몽환적인 사운드는 후미진 노천강당 바닥으로 모여든 수많은 젊은이들의 넋을 홀라당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다들 무아지경으로 몸을 흔드는 와중에도 눈을 힐끔거리며 훔쳐보기를 멈추지 않는 상대가 있었으니, 바로 공주님과 연인이었다. 인환도 익히 알고 있는 연인의 섹시한 춤사위야 두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바이올린과의 공주님’ 역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엔 일류 연예인 못지않았다. 혜윤이의 감탄사를 그대로 복사해 모두의 의견이라고 들려준대도 억울해할 이들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테크노 댄스엔 도무지 어울리지도 않을 시폰 원피스를 휘감고서 잘도 섹시한 춤사위를 펼치고 있는 공주님이었다. 외모가 주는 선입견으로 치면 도도하고 새침한 공줏과였는데, 춤을 추는 모양새로 상상해보면 또 요염한 살로메과였다. 물론 그 두 가지 개성을 모두 다 갖고 있는 야누스적인 타입일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 농구하는 연인을 함께 관람하며 서로 몇 마디 말을 텄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주님은 여전히 연인에게 홀딱 반해 있었다. 그런 종류의 감정에 있어선 제법 예민한 인환이 아니라도 이 노천강당 테크노 파티장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연인과 공주님의 모습을 잠깐이라도 바라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확연히 알 수가 있을 터였다. 바라보는 눈빛에서,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살포시 퍼지는 눈웃음에서, 요사스러울 정도로 교태로운 움직임으로 연인의 몸에 슬쩍슬쩍 부딪치는 스킨십에서, 저 ‘특별한’ 감정은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반했다고. 좋아한다고.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아니, 사랑인지도 모른다고……. 공주님은 조금도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한편 대단한 여자가 아닐 수 없다고, 괴로운 패배감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건 바로 공주님의 저 솔직한 당당함 때문이었다. 여봐란 듯한 당당함은 공주님을 풋내 나는 미숙한 여대생에서 순식간에 만인의 여신으로 승격시켜주는 가장 화려한 수단이자 액세서리였다.

당해낼 수 없었다. 아니, 당해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저 공주님이 그저 그런 연인의 오빠 부대 대원 중 하나가 아니라면, 만약 연인의 특별한 상대이기라도 하다면, 인환 따윈 절대로 공주님을 이길 수 없을 터였다. 예감도, 자격지심도 아니었다. 그건 태양처럼 눈부신 ‘진리’ 그 자체였다.

“꺄아!!! 뉴키즈다!!! 뉴키즈온더블록이에요, 선생님!!! 이 노래 저도 알아요!!! 우리도 나가요!!!”

혜윤이의 두 손이 다시금 인환의 팔꿈치를 끌었다.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10대 아이돌의 음악이 나오니, 좀 진정이 된 듯하던 혜윤이도 다시금 흥분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미 약속한 한 시간 가까이 초대형 춤판을 누비며 한바탕 댄스 솜씨를 뽐낸 혜윤이였다. 그 시간 내내 웃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있었을 뿐인 인환 역시 혜윤이에게 이끌려 몇 번이나 춤판 한가운데서 뒤뚱거리는 얼간이 짓을 펼친 전과가 있었다. 이제부턴 구경만 할 거라고, 중간 블루스 타임을 마지막으로 사이드로 빠진 지 오래건만, 이미 혈관 깊숙이까지 딴따라 여신이 강림한 듯한 혜윤이는 막무가내였다.

“뉴키즈요!!! 뉴키즈예요, 선생님!!! 우리도 딱 한 곡만 더 춰요!!! 네?!!! 이 곡만요, 예?!!!”

괴로워서,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허나 견뎌야만 했다. 주변이 워낙 들뜬 분위기여서 그런지, 혜윤인 얌전하고 수줍음 많은 본래의 혜윤이로 도무지 되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꺅!!! 오빠 봐요!!! 신애 언니를 거의 껴안고 있어요!!! 꺅, 야해!!! 진짜 야해욧!!!”

가슴이 아파서,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견뎌야 했다. 찰랑찰랑, 한계 수위를 보이는 울음보따리가 금방이라도 억제를 끊고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인환은 ‘선생님’이었다. 때론 ‘선배님’이기도 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아니, 이 장소에서 인환에게 허락된 유일한 역할 모델이었다.

“빨리요, 선생님!!! 빨리 무대 가운데로 가요!!!”

도살장에 끌려들어가는 암소처럼 꿰엑꿰엑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다. 물론 소리 없는 비명이었다. 어려서, 아니, 순수해서 더 무지한 혜윤이가 인환의 소리 없는 비명을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혜윤이에게 틀어잡힌 팔에 으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소리 없는 통증이었다. 눈먼 통증이었다. 벙어리였다.

……보기 싫어…… 보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보기 싫어…… 안 볼 테야…… 혜윤아, 더 이상…… 더 이상 내게 저런 것을 보게 하지 마…… 내 연인을 보게 하지 마…… 다른 사람을 품고, 다른 사람에게 웃고, 다른 사람에서 밀어를 속삭이는 내 연인을 보게 하지 말아줘…… 내 연인을 가려줘…… 눈을 멀게 해줘…… 소리를 멈춰줘…… 귀머거리가 될 테야…… 벙어리가 돼야지…… 그러니 혜윤아…… 혜윤아, 제발!!!

무도장 중심부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음악 소리는 천둥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현란한 사이키 조명은 비수보다도 더 날카롭게 눈을 찔러들었다. 공짜 맥주를 원 없이 포식한 선남선녀들에게선 맥주 괴물처럼 고약스러운 냄새가 났다. 춤이 아니라 광란이었다. 전쟁이었다. 살육이었다. 도처에 살육자와 시체 더미들뿐이었다. 살점들을 이리저리 토해내며 인환 역시 사방팔방으로 찢어발겨졌다.

막춤을 추는 ‘단결’ 두건이 보였다. 연인의 열혈 과대 친구 전창일이었다. 설핏 안쪽으로 파고드는 인환과 혜윤이를 발견했는지 하늘을 찌르고 있던 군바리 막춤 손가락이 이마 쪽으로 떨어지며 경례를 붙인다.

―끝내주죠, 선배님?!!!

귀를 찢는 음악 소리 탓에 조금도 떠오르지 못하는 목소리 대신 입술 모양이 뜻을 전해주었다. 설핏 퍼지는 웃음으로 대꾸를 주었다. ‘선배님’의 얼굴이었다.

“오빠!!! 신애 언니!!”

거의 달라붙을 듯이 서서 관능적인 커플 댄스를 펼치고 있던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이쪽을 향했다. 설핏 핏발이 느껴지는 야수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인환의 몸을 핥고 지나갔다. 인환 이외엔 잘 알아채기 힘들 찰나의 순간이었다. 도도한 여신의 시선도 잠깐 인환의 얼굴을 응시했다. 여신은 연인과 마찬가지로 전신이 땀투성이였지만, 처음 그녀를 봤을 때처럼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고고했고, 우아했으며, 또한 아름다웠다.

무언가 의미를 품은 시선으로 인환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다가 여신은 곧 서글서글한 미소를 얼굴로 끌어왔다.

―어서 오세요, 선배님…….

역시 설핏 퍼지는 웃음으로 대꾸를 준 인환이었다. 전창일 앞에서보다 훨씬 더 ‘선배님’다운 얼굴이기를 기도하며.

―문혜윤, 이 곡이 마지막이다?!

표정만으로 누이에게 일침을 준 연인이 방향을 약간 틀자, 연인과 공주님 주변으로 둥글게 포진해 있던 의예과 동기들이 연인을 중심으로 일제히 원을 만들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이는 역시 막춤의 황제 전창일이었다. 인환과 혜윤이까지 포진하고 나니 얼추 열댓 명도 넘는 맴버들로 바리케이드가 쳐진 초소형 무대가 만들어졌다. 무대는 멤버들을 차례로 바꾸며 솔로들의 막춤 경연장으로 화했다. 전창일을 필두로 일일주점 주방장들과 웨이터들이 줄줄이 그 뒤를 이었다. 웨이터들의 여자 파트너들도 가세했다. 연인도, 공주님도, 혜윤이도 절대 과녁을 피해가지 못했다. 인환이라고 봐줄 턱이 없었다. 입을 크게 벌린 채 바보 같은 웃음을 터트리며 인환도 깽깽이 스텝을 한 자락 선보였다. 다들 폭소를 터트렸다. 연인만 웃지 않았다. 봐주지도 않았으니 웃을 까닭도 없었다. 성별 불문, 저릿저릿한 관능을 꾀는 야스러운 테크노를 연인은 흡사 무기처럼 휘둘렀다. 바라보지 않아도, 잔뜩 웅크린 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야수를 알 수 있었다. 짐승의 욕망이었다. 위험천만한 야수를 마음껏 발산하며 연인은 제왕처럼 춤판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질겁할 정도로 포악하고 야비했지만, 암컷을 꾀기에는 그 이상의 음란한 페로몬도 없을 터였다.

인환뿐만이 아니었다. 여자란 여자는 죄다 넘어갔다. 파트너를 대동한 여자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저 살생부엔 몇몇 남자도 끼어 있을 터였다. 심장이 잡아 찢기는 듯한 질투심을 꾸역꾸역 삼키며 속으로 울었다.

공주님은 미소를 보냈다.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어쩐지 속 시원한 웃음은 아닌 것 같았다. 공주님의 시선이 불편했다. 여전히 무언가 의미 깊은 시선이었다.

괴로워서, 괴로워서, 인환은 더 크게 웃었다. 더 병신같이 오버했다. 너무나 웃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아니, 눈물이 나왔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알기를 바라지 않았다. 알려지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찰랑찰랑, 한계 수위를 보이는 울음보따리가 당장이라도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인환은 ‘선생님’이었다. 때론 ‘선배님’이기도 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아니, 이 장소에서 인환에게 허락된 유일한 역할 모델이었다.

뉴키즈에 이어 시나위와 박남정과 모튼 하켓이 차례로 지나갔다. 이쯤 되면 DJ도 막나가자는 거였다. 궁극엔 마이클 잭슨의 문워커였다. 테크노란 말이 무색할 올드 앤드 뉴였다. 물론 광란한 ‘서울대’들 중 거기에 토를 다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다들 마이클 잭슨처럼 뒤로 걸었다. 인환도 뒤로 걸었다. 아니, 걷는 척을 했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공주님이 연인의 목에 팔을 감더니 열렬하게 입을 맞췄다. 마이클 잭슨의 피날레 중이었다. 휘파람이 날고 야유가 터져 나왔다. 혜윤이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스텝을 밟는 것도 잊었다. 탕 하고 방아쇠가 당겨졌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춘 인환이었다. 키스는, 오래……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아니, 계속된 것처럼 착각을 했다. 제멋대로의 착각이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죽어야 할 거다. 괴로워서, 괴로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한계였다. 탕. 맙소사. 봇물처럼 터지는 울음보따리……!

웃음과 야유와 괴성과 마이클 잭슨의 문워커와 의예과 새내기표 막춤들을 뒤로하고 뛰었다. 아니, 걸었다. 아무도 보지 않으니 울음은 얼마든지 울 수 있었다. 하지만 달리는 건 안 된다. 인환은 아직도 ‘선배님’이었고 혹은 ‘선생님’이었다. ‘선배님’은 느긋하게 볼일 보러 가는 중이다. 후배들의 스태미나를 따라갈 수 없는 ‘선생님’은 볼일을 핑계로 도피 중인지도 모른다. 볼일을 보든 도피를 하든, 그저 ‘선배님’다운 모습만 보여주면 된다. ‘선생님’다운 체통만 지켜주면 그만이다. 질투에 미쳐 달린다면 절대 양식 있는 ‘선배님’이 아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일이다.

그래서 양식 있는 ‘선배님’은 화장실에 들러 볼일을 보는 척도 했으며, 스태미나 보충이 필요했던 ‘선생님’은 프리비어 행사장까지 느긋하게 도피도 했다.

프리(free)하게 얻어 갈 수 있었던 맥주는, 그러나 거의 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고작 두 잔을 얻어 마셨을 뿐인데 자유(free)가 끝났다고, 면전에서 서울대 총학생회가 비장하게 선언했다. 여기저기 죽 늘어서서 ‘자유’를 기다리고 있던 춤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춤꾼들의 원성과 더불어 양식 있는 진짜 ‘선배님’이 눈을 떴다. 나잇값을 해야 할 ‘선생님’도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맙소사. 드라이버로서 막중한 의무가 주어져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정말이지. 그만 좀 해라, 장인환. 꼴불견도 이런 상 꼴불견이 없다.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맥주잔 뒤로 감추며 그나마 두 잔만 마신 게 천만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맥주 두 잔 정도론 인환을 취하게 할 수 없다. 됐다. 그거면 충분하다. 아직 막중한 의무까지 박탈된 것은 아니다. 10시가 넘었다. 이젠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 연인과 혜윤이를 데려다줄 시간이다. 인환은 돌아오는 생일에 스물일곱 살이 된다. 충분히 양식 있는 ‘선배님’이다. ‘선생님’이었다.

“……운전하셔야잖습니까.”

……두근…….

“많이 드신 건 아니죠?”

화를 내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어딘가 시무룩한 어조였다. 그럼에도 인환은 좀처럼 연인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눈물범벅이었던 얼굴은 등 뒤에서 연인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손바닥으로 잽싸게 닦았지만, 새빨개진 눈시울이며 홍당무가 된 얼굴까지 완벽하게 감출 순 없을 것이다. 젠장. 왜 따라온 거야. 공주님과 춤추고 있었잖아. 키스했잖아. 아주, 아주 길게 키스했잖아. 그런데 네가 왜 여깄어…….

“잔 이리 주세요.”

“…….”

“대리 운전 시키실 거 아니면 주십시오.”

“……두…… 두 잔 정도는 괜찮아…… 아…… 알잖아…….”

“…….”

“……아…… 안 취했어, 위야…… 아…… 아까 와인도 아주 쪼금 마셨고…… 자고 났더니 그것도 완전히 깨버렸고…….”

“그럼 혜윤인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

고집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주춤주춤 돌아서서 반쯤 남은 맥주잔(실은 종이컵)을 연인에게 넘겼다. 30센티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을 근접한 위치에서 연인이 잔을 받았다.

죽어라 바닥으로 시선을 피했다. 운 흔적을 감출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시선을 마주친 채 ‘나 울었어요’ 하는 적나라한 고백을 던질 순 없었다.

내내 땅바닥을 향해 고개를 내린 채 연인의 처분을 기다렸다. 바람결을 따라 살랑살랑 풍겨오는 연인의 땀내 나는 체취에도 평소처럼 가슴이 설레지가 않았다. 상처를 입은 때문이리라. 평정심을 불러오기엔 제법 큰 상처였다. 연인과 공주님의 키스 장면이 망막에 잔상처럼 긴 여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노예 경매 때 절 산 선배입니다.”

……두근…….

“고객 아닙니다. 오늘 하루만 상대해주는 것으로 의무는 끝납니다.”

“…….”

“섹스는 안 합니다. 선생님 전용이니까. 전 실수하는 일은 없습니다.”

“…….”

“그러니까 괜한 소란 피우지 마세요. 혜윤이한테 눈치채이고 싶으신 건 아니죠?”

“…….”

“동기들한테서도 의심받긴 싫습니다. 전 게이가 아닙니다.”

“…….”

동일한 양심선언으로 사랑스러운 내부 고발자가 위로를 줬다면, 연인이 준 것은 새로운 상처였다.

고급 양가죽 스니커즈가 보였다. 군함처럼 거대하고 굳건한 연인의 발을 감싸고 있는 럭셔리 아이템이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참 단단해 보이는 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발이 흔들리는 일은 절대로 없겠지. 방향을 잘못 찾는 일도, 물론 절대로.

극심했던 마음의 동요가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혜윤이의 천진한 ‘내부 고발’엔 목이 메면서도, 상처에 소금을 뿌려대는 연인의 냉랭함엔 도리어 진정이 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픈데…… 아프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견뎌졌다. 봇물도 터지지 않았다. 터지기는커녕, 이미 터져버린 감정까지 댐처럼 굳건하게 틀어막히는 기분이었다.

“……문위……? 너 문위지? 의예과 1학년 문위.”

연인의 군함 발 위로 누군가의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길고 긴 그림자였다. 연인만큼 긴 게 꼭 J․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 같았다.

“……혹시 너 문강 선배라고 아냐? 이름이 비슷해서 긴가민가했는데 외모까지 판박이네?”

인환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연인의 군함 발 위로 침입한 ‘키다리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키다리 아저씨는 자상한 ‘저비스 도련님’이라기엔 인상이 꽤나 날카롭고 강렬한 사람이었다. 연인과 거의 비슷한 큰 키였는데, 몸집이 마른 탓인지 연인보단 약간 더 작아 보였다. 쌍꺼풀이 없는 날카로운 눈빛에 피부는 흰 편이었고, 머리카락은 댄디 올백으로 자연스레 뒤로 넘긴 세련된 스타일이었다. 뛰어난 미남이라곤 할 수 없지만, 호남형의 이목구비는 여자라면 한 번쯤 가슴을 두근거릴 만큼 매력적이었다. 청바지에 셔츠와 면 티를 레이어드 해서 걸친 옷차림도 강당 안에 모여 춤판을 벌이고 있는 주변의 무수한 남학생들과 별다름이 없이 소박해 보였지만, 꽤나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진중한 분위기며 좀처럼 웃을 것 같지 않은 냉정한 표정이 청년을 또래 남학생들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게 했다. 아니, 실제로도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십중팔구는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일 터였다.

“……친척인가? 아니, 형제지? 친형제 맞지?”

청년은 꽤 흥분한 듯싶었다. 표정은 차가울 정도로 날카로웠지만, 연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눈빛에선 기묘한 열기마저 느껴졌다.

“……형은 죽었습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싸늘한 대꾸였다.

슬쩍 표정을 살피니 연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단숨에 핏기를 잃은 창백한 낯빛에, 인환은 자신의 상처 입은 마음은 금세 뒷전에 밀어둔 채, 연인의 상태부터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조에서 느낀 적대적인 냉기는 착각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연인의 죽은 형 문강은 연인에게 있어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 같은 상처였다. 연인이 웬만해선 그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는 최악의 금기가 아닌가. 생면부지의 청년은, 물론 잘 모르고 한 일이었겠지만, 연인의 가장 큰 상처를 건드린 것이다.

“……내가 실례를 했나? 하긴, 제 소개도 하지 않고 개인적인 일을 물었으니 불쾌할 법도 하군.”

청년의 눈빛에 서려 있던 기묘한 열기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다소는 들뜬 흥분이 사라지자 본래 청년의 분위기일지 모를 날카로우면서도 위압적인 에너지가 청년의 얼굴을 한결 남성적으로 보이게 했다.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 남자의 차분함으로 순식간에 마음을 다스리는 청년을 보고 있자니, 역시 저 범상치 않은 아우라가 새삼 강하게 인식되었다. 확실히 보통의 청년과는 많이 달랐다.

“……국문학과 3학년 안영찬이라고 한다. 문강 선배는 고등학교 다닐 때 알게 되었지. 우신고등학교 선배셨다. 가끔씩 우리 같은 후배들 모임에 와주셨거든. 강이 선배가 ‘구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실 때였지. 우리들 우상이셨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 돌아가시긴 했지만…….

씁쓸하면서도 슬픈 눈빛으로 청년은 차마 다 토해지지 못한 말을 덧붙이고 있었다.

아아, 이건 더 나빴다. 연인의 얼굴은 더더욱 차게 굳어졌고, 분노인지 회한인지 알 길 없는 심정적 열기가 눈시울 근처를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잠시 찢어발길 기세로 청년을 쏘아보는 것 같았지만, 이내 가면 같은 평온한 무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연인 역시 범상치 않은 타입임에 있어선 눈앞의 청년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정말 형을 많이 닮았구나. 네 얘기는 꽤 듣고 있었다. 어쩐지 이름이 강이 선배를 생각나게 해서 계속 귀에 밟히곤 했는데…… 정말 강이 선배 동생일 줄이야…….”

연인을 이미 문강의 동생으로 확신한 모양이었다. 연인의 얼굴을 응시하는 청년의 눈빛엔 아련한 동경과 애수가 떠올라 있었는데, 별로 자세히 듣지 않아도, 청년에게 문강이 차지하고 있는 무게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었다.

“……잠깐 시간 좀 내줄래? 널 소개시켜주고픈 사람들이…….”

“회장! 그쪽 선배들 간다는데, 빨리 와서 인사 안 해?!”

갑자기 난입한 또 다른 청년이 안영찬의 팔을 잡는 것이 보였다. 안영찬과 어딘가 분위기가 비슷한 대신 키와 몸집은 그보다 현저히 작았다.

“회장, 선배들한테 왕창 찍힌 거 알아? 문화 축제로 만들라고 했지 이렇게 놀자판 축제로 만들 줄은 몰랐다고 여간 툴툴거리는 게 아니야. 빨리 가서 달래줘야지. 안 그럼 서울대 최초로 총학생회장 자리에서 탄핵되는 인물이 될지도 모른다구.”

“몰아내라 그러지 뭘. 한 번쯤은 비정치적으로 놀아도 되잖아. 다른 땐 선배들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있는데. 하여간 선배들도 너무 팍팍하다니까. 무늬만 볼 줄 알지 본질을 볼 줄 몰라요. 이깟 축제 하나로 감히 어떻게 내 사상을 의심할 수 있냐고? 게다가, 우리라고 언제까지 ‘전대협’ 선배들 눈치나 봐야 하겠냐. 축제는 어디까지나 서울대만의 놀이 행사라구. 몇 년 동안 그 힘든 탄압 겨우 이겨내고 선배들이 어떻게 해서 다시 일으켜 세운 총학생회인데…… 이것도 다 연막의 일환일 수 있단 걸 왜 몰라.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줄창 연설을 해댈 땐 언제고. 그건 그저 눈 가리고 아웅인 개소리였나 보지?”

“아이고, 어디 선배들 앞에서도 그따구로 까대보지 좀 그러십니까?! 오늘 밤 운영위원 놈들 집에 바리바리 전화가 간다는 데 내 100원 걸겠소, 동지. 정신이 썩어 빠진 부르주아 회장이라고, 당장 갈아치우라고 하나같이 입에 거품들을 무실걸?”

“후, 선배들은 어디 있냐? 강당에선 못 봤는데?”

“이런 데 어울릴 분들이신가? 미 제국주의 문화라면 다들 치를 떠시는걸. 본부 풍물 동아리실에 진을 치고 계시지.”

“……딱 15분만 시간 낼 수 있겠냐, 문위?”

친구(이자 학생회 임원으로 보이는)를 줄곧 상대하던 안영찬의 시선이 다시 연인에게로 향했다. 부탁이 아니라 강요의 느낌을 받은 것은 인환만은 아닌 것 같았다. 연인의 얼굴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안영찬은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독선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 특유의 대범함과 여유였다. 과연 범상치 않을 수밖에.

안영찬과 새로 난입한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인환은 안영찬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의 이 키 큰 ‘저비스 도련님’이야말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안영찬은 대부분의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그러하듯 역시 극렬 운동권(주사파) 출신으로, 그 출신 성분에 어울리지 않는 비정치적 축제를 주관해서 구설수에 오른(물론 ‘전대협’ 같은 대학생 정치 집단들 사이에서만) 꽤나 특이하고 종잡을 수 없는 개성을 소유한 청년이었다.

“……강이 선배와 함께 뛰셨던 84, 85학번 대선배들도 와 계시다. 너 보면 진짜 반가워들 하실 거야. 강이 선배 당하시던 그때 다들 구속되거나 수배돼서 엄청 고생들을 하셨으니까. 만나 뵐 때마다 강이 선배랑 이윤열 선배 얘기 많이 하신다. 이윤열 선배는 너도 알지? 알 거라 믿는다. 윤열 선배는 강이 선배와 의형제 사이라고 들었다. 몇 달 전에 선배들과 윤열 선배 면회를 간 적도 있었지.”

“…….”

“……그냥 얼굴만 보여줘. 정말 다들 기뻐하실 거야. 넌 잘 모르겠지만 너 진짜 강이 선배 복사판이라구.”

“…….”

“경계하지 마라. 널 우리들 조직에 들게끔 홀리려는 게 아니야. 네가 이쪽 성향이 아니란 건 알겠다. 형이 그렇게 갔으니 우리들이 무척 마음에 안 들 거라고도 짐작하고 있지. 하지만 강이 선배는 같은 동지라는 걸 떠나 인간적으로도 정말 좋아하고 동경하던 선배였다. 그건 다른 선배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거야. 음, 이건 글쎄…… 일종의 진혼굿이라고 여기렴. 우리한텐 강이 선배는 진짜로 뼈아픈 한이란다. 그 서러운 한이 풀리기 전엔 우리 모두가 강이 선배를 놔줄 수 없다고나 할까. 아니, 사실 우릴 묶고 있는 쪽이야말로 강이 선배겠지만…….”

“…….”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가슴 찡한 설득이었다. 몇 문장만 더해진다면 어딘가의 추모제에서 낭독해도 될 훌륭한 연설문이 되리라. 그러나 연인은, 연인의 가슴은 움직이지 않았다. 선동적인 연설 몇 마디 따위로 저 깊은 상처가, 증오와 분노의 나날들이 위로받을 까닭이 없었다. 연인의 표정은 여전히 사나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두 운동권 선배들을 주시하고 있는 시선에선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제가 오히려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선배님께서 제 변변찮았던 형에게 주시는 관심으론 너무나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시 연인은 이미 어른이었다. 감정대로만 행동하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만 한 불이익을 주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성숙한 야수가 능수능란하게 적절한 대답을 끌어내고 있었다.

“가시죠. 형과 어울리셨다는 선배님들이라면 저도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잔뜩 일그러졌던 얼굴 표정은 어느새 평온한 무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안영찬을 굽어보고 있는 시선에서도 예의 바른 호의가 묻어나왔다. 마치 안영찬에게 품었던 최초의 적대감이 진짜 적대감이 아니라, 단지 아픈 상처를 건드린 데 대한 마음의 동요 때문이었노라 변명을 하는 듯했다.

“그래! 고맙구나, 위야! 위야라고 불러도 되겠지? 그것 참 근사한 이름이로구나. 강이 형 이름도 그렇지만. 누구라도 한번 들으면 절대 잊어버릴 일은 없겠어.”

“예. 편한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그럼 갈까?”

안영찬과 다른 학생회 청년이 앞장섰고 연인도 따라나섰다. 인환을 향한 짤막한 ‘명령’은 등을 보인 자세 그대로 떨어졌다.

“……곧 돌아올 테니 혜윤이 잠깐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연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잠깐 안영찬이 인환을 돌아보았지만, 연인의 무성의가 인환에 대한 호기심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바꿔놓았다. 독선적이고 강한 남자 특유의 무관심한 눈빛이 형식적인 일별을 했고, 인환 또한 눈빛만의 형식적인 인사를 돌려주었다. 설령 저 운동권 청년과 연인과의 관계가 죽 이어진다 해도, 인환과는 다시 볼 일이라곤 거의 없을 사람이었다.

―……곧 돌아올 테니 혜윤이 잠깐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어둠 속으로 사라진 연인의 뒷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망막에 새기고 있다가 인환은 천천히 춤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인의 ‘명령’을 기억에 떠올린 때문이었다. 명령이 아니라도 당연히 자신이 보호해야 할 소중한 누이동생이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만져보았다. 눈물 자국은 만져지지 않았다. 약간 부어오른 눈두덩이며 충혈된 눈시울이 걱정됐지만, 어린 혜윤이의 순진함에 기대를 걸었다. 혜윤이 사전에 다 큰 어른이자 ‘선생님’인 인환이 우는 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전창일을 위시한 연인의 동기들이거나 양신애에게야 맥주 때문이라고 변명을 흘리면 미심쩍어할지언정 그럭저럭 통할 것도 같았다. ‘선생님’이거나 ‘선배님’의 역할 모델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란 얘기다. 역할 모델이 멀쩡해주기만 하면 어떻게든 견딜 수 있다. 아니, 견뎌내야만 한다. 이 괴로운 춤판이 끝날 때까지는, 그래서 혜윤이와 연인을 무사히 집으로 배웅해줄 수 있을 때까지는 반드시 견뎌내야만 한다.

양신애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저절로 따라오는 연인과의 키스 장면에 순간 가슴이 찢어졌지만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무는 것으로 고통을 외면했다. 극심한 동요는 연인의 모진 ‘내부 고발’로 인해 많이 가라앉았다. 고객이 아니라고 했다. 아직 인환의 전용이었다. 그래서 그녀와 섹스 따윈 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로써 노예 의무는 끝이라고 했다. 키스했지만, 그건 연인의 의사완 무관했다. 그래. 일방적인 감정일 뿐이다. 공주님 홀로 불타고 있는 것이다. 만인의 왕자님이 아니더냐. 기왕의 익숙한 진실에 새삼 쇼크를 받을 필요는 없다. 아무렴. 그러니 참을 수 있다. 참을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몇 분만 지나면, 아니, 좀 더 크게 써서 몇 십 분만 더 지나면 인환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귀로에 오를 수가 있다.

“……위야는 어디 갔나요, 선배님?”

욱신.

“……함께 계시는 것 같던데…… 그새 어딜 간 거죠?”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저도 이제 가봐야 하는데…… 집이 엄해서 12시 전엔 반드시 들어가야 하거든요. 후후, 다행히 위야가 택시로 바래다준다고 해서요.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딜 간 걸까요?”

괜히 땅만 보고 걸었나 보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가까이 접근한 걸까. 맙소사. 다 틀렸다. 도저히 못 견딜 것 같다. 너무해. 이건 반칙이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너무해. 이건 선전 포고도 없는 거잖아. 견제용 성명서도 발표하지 않았었잖아. 이런 게 어딨어. 난 이제 어떡하라구. 어떻게 참으라구…….

“……서…… 선배가 불러서 잠깐 본부 쪽에 갔다 온다고 했습니다.”

‘선배님’의 연기다. 누가 봐도 절친한 ‘선배님’이라고 믿을 수 있게끔 완벽한 연기를 펼쳐야만 한다. 필사적인 인내로 공포심을 견딘다. 폭발에 대한 공포다.

……키스 하지 마…….

추악하고 추악한 질투의 폭발이다.

……그에게 키스 하지 마. 그는 내 거야. 내 전용이야. 네가 뭔데 마음대로 키스해? 여자면 다야? 계집애면 다냐구……?

찰랑찰랑. 수위가 점점 높아간다. 한계가 코앞이다. 일촉즉발. 깃털 하나의 무게만 더해져도 수위는 넘친다.

하지만 안다. 찰랑찰랑. 한계까지 차 있지만 수위는 결코 한계를 넘지는 않는다. 자신은 폭발하지 않는다. 폭발하기만 하면, 견뎌내지 못하면, 자신은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버려진다. 연인에게. 완벽하게 외면당한다. 다시는 연인을 볼 수 없게 될지 모른다. 그건, 그 어떤 끔찍한 질투보다도 더한 고통이다. 고통보다 더한 절망이다. 암흑이다. 죽음이다.

“……총학생회장이라고 하더군요. 위야 형하고 꽤 가까이 알던 사이인 것 같았어요.”

새하얀 스트랩 샌들이 보인다. 인어의 발처럼 인공적으로 완벽하게 빚어진 듯한 예쁜 발도 보인다. 가느다란 은색의 발찌가 비늘처럼 찰랑인다. 뭔가 약점은 없을까, 야비한 관심을 기울여보지만 어딜 봐도 너무 예쁘다. 너무나 예쁘고 하얗고 작은 발. 연인의 군함처럼 커다란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너무 다르니까 둘이 절대로 어울리지 않아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반대일 것 같은 생각만 든다. 왈칵 치미는 토기처럼 참기 힘든 고통과 분노가 목울대를 엄습한다. 어울리다니. 뭐가 어울린단 말이냐, 씨발.

“……그 형은 몇 년 전에 군대 가서 죽었죠. 운동권이었는데 강제 징집으로 살해당한 겁니다.”

어때? 이건 몰랐지? 넌 몰랐던 사실이지? 그래, 네가 알면 뭘 얼마나 알겠니? 고작해야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란 주제에 그의 상처에 대해 얼마나 알겠어? 근데 반했다구? 좋아한다구? 사랑인지도 모른다구? 야, 이년아, 웃기지 마. 네가 뭘 알아? 뭘 안다구 내 위야를 사랑한대? 응? 그 지저분한 입으로 어딜 더럽히는 거야? 계집애면 다니? 좀 반반하면 다야? 공주님이면 다야? 어딜 손대? 어딜 손대니? 쌍년. 죽여버릴 거야. 진짜로 죽여버릴 거야. 내 위야에게 또 한번 멋대로 손대면 그땐 정말 죽여버릴 테야, 너!!!

“……녀석에겐 진짜 아픈 상처인데…… 걱정입니다. 운동권 애들을 참 싫어하거든요.”

독 같은 위악(僞惡)이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꾹꾹 억눌린 고통은 끔찍한 증오감으로 변해 아름다운 여신을 직격하고 있었다. 독기가 사방에 자욱하게 퍼지자, 인환은 비로소 공주님을 바라볼 용기가 생겼다. 자연스럽고, 유쾌하고, 또 상냥한 ‘선배님’의 웃음도 얼굴에 잘 매달렸다. 웃었다.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웃으며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건 진실인가요, 선배님?”

……두근…….

단단한 여신의 시선이 똑바로 부딪쳐왔다.

가까이에서 보면 볼수록 놀라운 미모였다. 조각처럼 균형이 잡힌 완벽한 이목구비는 그야말로 너무나 완벽해서, 마치 마네킹 같은 느낌을 주었다. 여신으로 코스프레하고 있는 마네킹이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역시 각오를 가뿐히 뛰어넘는 여신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인환의 웃음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단숨에 굳어진 그것이 쩡 하는 비명을 지르며 수십 수만 개의 파편으로 부서져 내리는 것을 인환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언젠가 전 딱 한 번 선배님의 거짓말을 들은 적이 있지요.”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선배님과는 그때 말씀을 나눈 게 처음이자 전부였으니까 선배님은 제게 있어 100프로 거짓말만 하시는 분이 되고 말았죠. 물론 앞으론 달라질 확률이겠지요. 앞으로 위야만큼 선배님도 자주 뵙게 될 것 같고, 또 그때마다 제게 늘 거짓말을 하시진 않을 테니까요.”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위야에게 여자친구가 있다고…… 그것도 죽고 못 사는 여자친구가 있다고…… 아주 오래된 사이라고…… 그때 선배님께서 왜 제게 그런 거짓말을 하신 걸까…… 어젯밤에 정말 오랫동안 그 이유를 추리해봤어요. 다행히 밤을 새우기 전에 답이 보이더군요. 물론 확신한 건 아니에요. 확신은 오늘 선배님을 다시 뵙고 나서 하게 됐죠.”

“…….”

“……선배님은 제 둘째 오빠를 닮으셨어요.”

“…….”

“아, 어딜 닮으셨냐고요? 그야 눈이죠. 눈이 무척 닮으셨어요.”

“…….”

“……좋아하는 /남자/들을 바라볼 때의 눈이요.”

“?!!!!!”

여신은 웃지 않았다. 인환처럼 웃다가 굳어져 부서진 게 아니라, 애초부터 웃음 따윈 머금고 있지 않았다. 춤판이 벌어지는 내내, 아니, 그 몇 시간 전, 일일주점 테이블에 앉아서부터 내내 달고 있던 매혹의 미소가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웃지 않는 여신은 공포였다.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맙소사. 당장 기절할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비워진 머릿속을 그대로 반영하듯 얼굴빛도 새하얀 눈처럼 창백해졌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손은 그 이상으로 격렬하게 전율했다. 심장도 제멋대로 뛰고, 숨결은 한계치 이상으로 가빠졌다. 두 손으로 심장을 움켜쥔 채 필사적으로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안 그럼 호흡 곤란으로 당장이라도 폐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불쌍한 오빠죠. 집안에선 거의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아요. 그게 오빠 잘못은 아니었는데…….”

“…….”

“……오빠가 여덟 살 때 피아노 개인 레슨을 해주던 남자한테 상습적으로 추행을 당했거든요. 아주 유명한 피아니스트라 집안의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을 못 했었죠. 그 짐승이 자그마치 1년 동안이나 오빠에게 그런 더러운 짓을 했는데 우리 중 아무도 몰랐죠, 아무도.”

“…….”

“……알아챘을 땐 너무 늦었던 거예요.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오빠를 치료할 순 없었죠. 사춘기가 지나면서 완벽한 게이가 돼버렸거든요.”

“…….”

“……오빠는 저처럼 모태 신앙이에요. 동성연애는 죄악이라는 사실을, 지옥불에 떨어질 끔찍한 소돔의 죄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더더욱 방황하죠. 머리는 죄를 인식해도, 이미 악마의 침해를 받은 병든 육체는 끝없이 더한 죄악들만을 갈구하니까요.”

“…….”

“……그래서 전 용서할 수가 없는 거예요. 소돔의 피는 마치 뱀파이어처럼 제 동족을 찾기 위해 혈안이 돼 있죠. 한번 물리면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이빨을 가지고서 저희 오빠처럼 무고한 희생양들을 찾아 날뛰고 다닌답니다. 물론 무고한 희생양도 일단 물리면 어쩔 수가 없어요. 그들도 애초의 악마들과 똑같이 돼버리거든요. 아무리 후회하고 또 후회해도, 하나님 앞에서 피를 토하며 참회를 해봐도, 한번 피를 마셔버리기 시작하면 절대로 멈추질 못하죠. 바로 우리 오빠처럼요.”

“…….”

“……같은 동성의 남자를 물기 위해 돌아버려요. 어떻게도 안 되는 걸 알죠. 그래서 용서를 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불쌍하고 가슴이 아파도 오빠도 그들과 똑같은 소돔의 씨일 뿐이니까요.”

“…….”

“……소돔의 씨들이 퍼지는 건 견딜 수가 없어요. 불쌍하고 불쌍한 우리 오빠가 생각나거든요? 근데 위야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거예요. 한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까 너무너무 불안하고 무서운 거 있죠.”

“…….”

“……네. 그래요, 선배님. 저 위야 좋아해요. 정말 좋아해요. 자존심도, 부끄러움도 하나도 신경이 안 쓰일 정도로 정말 너무너무 좋아해요. 정말 좋아하는데…… 사랑하는데…… 옆에 소돔의 씨앗이 버티고 있는 것 같은 거예요. 호시탐탐 위야를 노리고서 좋은 사람인 척, 천국의 사람인 척 양의 탈을 쓰고 있는 거예요. 그걸 생각하면 정말 미칠 것만 같아요.”

“…….”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내버려둬야 할까요? 그 사람을 경계하라고, 언젠가 네 목을 물고 소돔의 씨를 뿌릴 사람이라고 고자질을 해버릴까요? 아뇨. 위야는 제 말을 믿지 않을 거예요. 왜냐면 그 소돔의 씨가 저보다 더 오래 위야 옆에 있었거든요. 친구의 위치로, 선배의 자격으로, 선생님의 신용으로 그 애 옆에서 기생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토록 오랜 친밀감과 믿음을 저버리고, 고작 두어 번 얼굴 본 게 다인 학교 선배의 말 따윌 믿어주겠냐구요?”

“…….”

“……하지만 전 포기하지 않아요. 그깟 걸로 포기하기엔 위야를 너무 사랑하니까요. 아니, 설령 위야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전 가만히 두고만 보진 않을 거예요. 과거의 우리 오빠처럼 무고한 위야가 악마의 수중으로 떨어지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으니까요.”

“…….”

“……어쩌면 이것도 주님의 뜻이지 않나 생각해요. 위야를 지키라고, 모든 사정을 아는 저를 통해 악마의 전파를 막으라고…… 그래서 주님께서 저로 하여금 위야를 사랑하게 만드신 게 아닐까 하고요.”

“…….”

“……아, 얼굴이 정말 창백하세요, 선배님. 피곤하시죠? 제가 너무 오래 선배님을 붙잡았나 봐요.”

“…….”

“……원래는 이렇게 수다를 떠는 성격이 아닌데 오늘은 좀 많이 흥분 했나 보네요. 위야랑 어제 오늘 연달아 데이트를 하게 돼선 거 같아요. 정말 저답지 않게 바보짓도 하고 말이죠. 갑자기 입 맞춰서 위야가 많이 놀라더라구요. 찾아서 사과해야겠어요. 본부 쪽으로 갔다고 하셨나요? 총학생회장과 함께 갔다면 대학 본부겠네요. 오늘 전대협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들었거든요.”

“…….”

“그럼 먼저 가서 위야 찾아올게요, 선배님. 혜윤인 여전히 저쪽에서 창일이랑 다른 애들이랑 무아지경이니까 금세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

탁, 탁, 탁, 탁, 탁…….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새하얀 스트랩 샌들이었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따라, 그 새하얀 빛도 점점 더 유령처럼 희미해지고 있었다.

몇 초가 더 지나간 것 같았다. 저 새하얀 유령의 잔상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나서야, 인환은 자신이 다시금 땅바닥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위악으로 무장한 객기는 찬란한 여신의 공격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스러져버렸다.

연인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여신의 얼굴마저 이제 앞으로 십중팔구는 제대로 볼 수 없으리라. 연인의 동기들인 전창일 무리들 역시 별로 다를 것 같진 않았다.

‘소돔의 씨’라니. 듣기만 해도 마이너스의 기운이 풀풀 풍기는 혐오스러운 규정이었다. 자신이 ‘소돔의 씨’가 확실하다면 감히 얼굴 빤빤히 들고 /무고한/ 이들을 쳐다봐선 안 된다. 아이고. 이러다간 아예 하늘은 절대로 쳐다볼 수 없게끔 고개가 완전히 아래로 굽어버리는 건 아닐까, 잠깐 허무맹랑한 걱정이 들었다.

혜윤이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오른쪽 측면으로 3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현란한 사이킥 조명이 여전한 댄스 파티장이 보였다. 제대로 필이 오른 무수한 젊음들이 서로 복잡하게 뒤엉킨 채 무아지경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혜윤이 역시 여전히 무대 한복판에서 춤 솜씨를 뽐내고 있다 했으니 찾는 데 별로 수고로울 건 없었다. 인환도 잠시 전까지 병신다운 깽깽이 스텝을 열심히 밟은 곳이 아닌가.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니 잠시만 이대로 앉아 있도록 하자. 잠시만. 제대로 걸을 수 있게끔 다리에 힘이 돌아올 때까지만.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리자 눈알이 빠질 듯 욱신거리던 통증이 조금 덜해진 느낌이 들었다. 눈이 편해지니 어쩐지 귀도 평화로워지는 듯했다. 귀를 찢는 음악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청력과 시력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해서일까? 다른 감각 기관도 점점 둔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바늘로 콕콕 찔리는 것만 같던 피부의 아픔이 그저 아릿한 기억으로만 남았다. 수도 없이 난도질을 당해 피를 철철 흘리던 심장의 아픔도 꽤나 둔탁해졌다.

사방이 점점 고요해지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너무나 평화로워서 혹시 자신은 기절한 게 아닐까 잠깐 의심이 들었다. 정말 기절한 건지도 몰랐다. 하긴…… 기절했다고 한들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어차피 곧 오뚝이처럼 튕겨 일어날 자신인데. 자신에겐 막중한 의무가 있었다. 기절해 쓰러질 자격은 없다. 자상하고 양식 있는 ‘선생님’은 혜윤이와 연인을 집까지 안전하게 배웅해줘야만 한다. 아니, 참. 연인은 그녀를 바래다준다고 했었지. 그럼 혜윤이만 데려다주면 되는 거구나. 옳거니. 두 사람에서 한 사람으로 줄었으니 부담은 조금 덜해진 셈인가? 어쨌든. 길게 기절할 여유는 없으니 그냥 좀 이러고 있다가 일어나도록 하자. 일어나서, 혜윤이에게로 돌아가야지. 아직도 무대 한복판을 누비며 전창일 무리들과 테크노 삼매경에 빠져 있다는 혜윤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내 혜윤이. 내 작고 소중한 누이동생. 아니, 연인의 소중한 누이동생…….

“……선생님……?!!!”

갑자기 오른팔이 와락 틀어잡혔다. 어마어마한 악력이 끌어당기는 통에 팔이 빠지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아, 아파라. 젠장. 진짜 아프잖아.

“선생님, 왜……?!!! 괜찮으십니까?!!!”

역시 기절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통증에 찔끔 솟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놀랐는지 제법 창백해진 낯빛이 보인다. 이야. 진짜 잘생겼다. 어쩜 저렇게 조각같이 완벽하게 빚은 이목구비가 다 있을까. 누구 애인인지 진짜 잘났다.

“……위야…….”

위야…….

“……위야…….”

위야……. 세상에. 이름까지도 참 잘난 자신의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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