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1991년 7월. 문위(文偉)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그렇지, 저 정도면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등신 머저리라고 해야 옳다.
아웃팅을 빌미로 자길 강간하려 했던 개새끼다(강간까진 할 생각이 없다고 변명하지만 그 말을 믿어줄 같은 사내새끼란 저런 등신 머저리가 아니곤 전무할 거다). 그따위 개새끼가 사과 한마디 했다고, 제법 부드럽게 대해준다고, 완전 홀라당 넋이 빠졌다. 빠져도 이만저만 빠진 게 아니다. 개새끼가 부어주는 대로 꼴딱꼴딱 잘도 마신다. 그닥 술에 강한 주당도 아닌 주제에.
하여간 이 ‘화가’라고 하는 이상야릇한 족속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다들 도대체 술에 웬수라도 졌단 말인가? 말이 술이지 솔직히 저건 독이다. 그것도 뒤끝이 몹시 안 좋다고 하는 동동주다. 싸구려 독주를 마치 보약이라도 되는 양, 주거니 받거니 서로 먹이지 못해 안달이다. 서로의 건강 따윈 눈곱만큼도 배려하지 못하는 저것들이 동료는 무슨 동료란 말인가. 여자들 미장원의 수다보다도 더 장황하게 펼쳐지는 수다엔 일관성도 없으며, 논리성 역시 전무하다. 지극히 주관적이다 못해 온갖 편견들로 똘똘 뭉쳐 있다. 얌전한 성격인 줄 알았건만 다들 독선이 하늘 높은 줄 모른다. 그러면서도 하는 짓들은 완전 어린애다. 뭔가 심오한 토론을 시작한다 싶으면 어느새 결론은 귀신 얘기로 난다. 그럼 귀신 얘기로 시작하면 어떻게 되냐고? 하. 귀신 얘기라고 무사히 살아남지는 못한다. 어디 무당이 용하다더라부터 시작해서 대마초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둥, 종교계 인사들 때문에 안 된다는 둥, 종교보다 더 썩은 게 정치 아니냐로 빠지더니, 요새 어딘들 안 썩었냐 하며 삼천포도 중구난방 수만 갈래 삼천포로 빠지는 귀신 얘기다. 언젠가 이곳에 처음 들렀을 땐 분신사마 놀이를 하더니, 오늘은 타로 카드로 열심히, 몹시도 경건(!)하게 점을 친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결론에 하나같이 ‘맞아, 맞아’를 연발하며 끝내주게 용한 점괘라면서 감동으로 눈을 빛낸다. 그야말로 철부지 코흘리개들이 따로 없다.
젠장. 그래. 인정한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삐딱하게 꼬여 있는 건 다 저 한세혁이라고 하는 독사 새끼(누가 지었는지 별명 한번 잘 지었다!) 때문이다.
오기 전부터 불안하더니, 애초의 예상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다. 화해를 했다는 것을 빌미로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앉은 채 도통 떨어질 줄을 모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저 자식의 흑심을 짐작했었다. 그에게 부러 거칠게 말하고 터프한 척 온갖 폼을 다 잡을 때부터 다 알아봤다. 그 방법이 제대로 안 통하니까 이젠 아예 대놓고 느끼 버전이다. 담백한 척, 마치 소중한 누이를 대하는 척,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깨질세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거다. 만지거나 음탕한 말을 하거나 하는 직접적인 성추행을 하지 않으면 다인가? 저 새끼는 이미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성추행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가 무슨 말을 내뱉을 때마다 귀여워서 미치겠다는 듯 수시로 샐샐 웃음을 흘리고, 내내 그의 의견에 은근히 맞장구를 치며 관대한 척 환심을 사고, 안 보는 척하면서 동동주를 마시는 그의 입술만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하는 등등, 그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도무지 늑대의 흑심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어쩐지 자신에게 여봐란 듯 보이기 위한 제스처인 것도 같아 더더욱 부아가 치민다. 새끼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면서 저따위 유치한 짓거리다. 사사건건 저열하기 짝이 없는 도발에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
권 사장에게 정중히 사과도 한 마당이라 다시 주먹질을 할 수도 없고(물론 또 그런 짓을 벌였다간 그가 몹시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에게 주는 상처란 자신에게 국한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충분하다 뿐이냐, 이미 차고 넘치다 못해 한강을 이룰 지경이다. 그런데 저 무가치한 놈 때문에 그에게 상처를 보태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젠장!), 그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만 삭힐 뿐이다.
그래. 그래, 물론 인정한다. 이건 질투다. 터무니없이 치졸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질투.
독사 새끼가 유치한 전술을 쓴다고 비웃을 계제가 아니다. 유치하기란 자신 역시 한가지다. 독사 새끼의 뻔히 눈에 보이는 도발에도 고스란히 말려들어가 속으로 펄펄 끓고 있으니, 대체 유치하다고 누가 누굴 비판할 수 있단 말인가.
시계를 본다. 맙소사, 벌써 밤 10시가 넘었다. 6시 무렵부터 시작된 술판이었다. 그런데도 파할 기미조차 안 보인다. 이쯤 되면 다들 진심으로 마시고 죽자고 작정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젠장. 오랜만의 만남이라고 그마저 좀처럼 놔줄 생각을 안 하니, 그도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공식적으로 그의 후배라는 입장상, 이미 어른이고 사회인인 그의 사교 생활에 개입할 수는 없는 현실이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 그야 물론 이 사람들에게 그와 자신과의 관계를 밝히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자신이 그토록 경계하고 있는 비밀을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까발린다는 건 스스로가 절대 용납할 수가 없다. 이 철부지 집단 내에 이미 자신과 그의 관계를 알고 있는 자들도 있다곤 하나, 그렇다고 혹여 세상 밖으로 흘러나갈지 모를 소문을 마냥 방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어린애들처럼 천진한 사람들이라 해도 저들 집단 역시 또 하나의 사회였다. 자신이 상대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냉정한 ‘세상’이다. 경계란 아무리 지나치게 해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가 슬쩍슬쩍 자신을 살피며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자신이 지루해하지는 않는지, 답답한 나머지 짜증이 난 게 아닌지, 속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그의 속내가 훤하게 읽힌다. 저렇게 몰래몰래 자신의 눈치를 보다간 조만간 곁으로 다가올 것이다. 슬쩍 소맷부리를 쥐며 미안하다고 속삭이겠지. 잔뜩 쫄아가지고선 심하게 더듬거리는 어눌한 말투로. 자긴 택시를 타고 갈 테니 먼저 돌아가라고.
젠장, 미쳤냐? 이 내가 저 시꺼먼 늑대 새끼 아가리 속에 널 팽개쳐두고 혼자 돌아가라고? 젠장, 누구 좋으라고? 내가 왜 면허를 땄는데? 내가 왜 이따위 철부지 소굴까지 따라왔는데? 지루한 것도 모자라 수시로 도발하곤 하는 저 유치한 독사 새끼까지 참아가며 왜 기다리고 있는데? 돌아가라고? 천만에. 혼자는 안 가. 절대 못 가. 내 걸 무사히 챙기기 전까진 절대 안 돌아가…….
폭발 직전의 사나운 기색을 읽었는지, 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지는 게 보인다. 젠장. 순식간에 분노가 가라앉으며 대신 익숙한 아픔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러지 마. 그러지 마라, 장인환. 네가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알기나 하는 거냐?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해. 내 눈치 보지 말고 제발 날아. 제발 스스로 날개를 펴서 날아봐. 나처럼 방약무인하게 움직여보라고. 매일, 매 순간, 그토록 온몸으로 적나라하게 가르쳐주건만 넌 어째서 단 한 가지도 제대로 배우려 들지 않는 거냐? 그렇게 약해 빠졌으니 어디서 원형 탈모증 같은 거나 걸려갖고 다니지.
젠장. 원형 탈모증이라니.
사랑을 나누다 그걸 처음 발견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예쁜 머리카락들이 군데군데 보기 흉한 땜통을 만들어내며 빠지는 가슴 아픈 과정을 마냥 지켜봐야만 한다니. 스트레스 상황을 제거하는 외엔 딱히 혁신적인 치료법도 없다는 걸 알기에 그저 속으로 전전긍긍하며 예의 상태를 주시할 뿐이다. 틀림없이 위 자신이라는 존재가 그의 머리카락을 빠지게 만드는 스트레스의 원인이란 걸 아는 마당에 달리 무얼 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그런 그를 동정해서 그의 사랑을 죽이는 행동을 하지 말 수도 없고.
아무렴. 그따위 섣부른 동정을 주기 위해 그와 동거를 시작한 게 아니다. 그따위 얄팍한 배려를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을 할 수는 없다. 하. 사랑이라니,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울화가 치민다. 분노는, 자신의 분노와 절망은 잠을 자고 있으되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채비를 갖추고 있다. 잔뜩 웅크린 채 복수할 대상을 찾아 벌건 눈시울을 희번덕거리고 있다. 배려라니 웃기지 마라. 자신은 배려 따윈 안 한다. 그것도 한시라도 빨리 죽여 없애야만 하는 저 치명적인 자신의 ‘적’에겐.
……죽이라고 했지? 죽이란 말이다, 네 사랑을. 나처럼 네 사랑도 죽여보란 말이야. 그래야 편해져. 그래야 네가 편해진다, 장인환. 그래야 탈모증도 낫고. 알겠나? 네 사랑을 죽여. 죽여버려, 장인환…….
“……저기…… 피…… 피곤하지, 위야?”
하, 역시…….
어느새 다가와 가만가만 자신의 소맷부리를 잡는 그다. 숨결이 토해질 때마다 짙은 알코올 냄새도 함께 토해지고 있다. 술 냄새는 역하지만 그에게서 나는 술 냄새는 한없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그의 아스라한 체취와 섞여 하반신을 직격하기 때문이다.
“……얘기들도…… 우리들끼린 재밌는 얘기지만 네겐 무지 지루할 텐데…….”
그렇게 넙죽넙죽 잘도 받아 마셔댔으면서 발음이 새지 않는 게 용하다.
“……미안…… 다들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여간해선 안 끝나네? ……너 먼저 집에 갈래? 난 택시 타고 가도 되니까…….”
얼씨구. 넌 어쩌면 이렇게 기대치에서 단 한 뼘도 벗어나지 않는단 말이냐.
“……응? 그렇게 해, 위야. 술도 안 마시는데 다른 사람 취하는 거 계속 기다려줘야 하는 게 제일 참기 힘든 일이라더라. 나도 주당이긴 하지만 맨 정신으로 술 취한 동료들 챙길 땐 진짜 짜증이 나더라구.”
“…….”
“……어……? 어, 응? 괜히 네 아까운 시간만 뺏고…… 오전 내내 운전 연습해서 많이 피곤할 텐데…….”
“피곤하지 않습니다. 제가 모시고 왔는데 제가 모셔다드려야죠. 후배 주제에 저만 먼저 가면 다른 분들 보기에도 안 좋겠죠. 제가 신경 쓰이시는 거면 밖에서 나가 기다리겠습니다.”
적당히 사나운 기색을 섞자 그의 얼굴이 완전 납덩이가 된다.
지끈 하고 익숙한 통증이 심장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할 수 없다. 역시 그에게 이만큼 효과가 직방인 방편은 없으니까. 비록 그를 또 상처 입혔고, 자신 역시 상처를 입게 됐지만.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연인은 본 체 만 체, 망설임 없이 술판을 빠져나왔다. 로비를 지나 곧장 건물 현관 밖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방이 잘된 실내에서 나오니 후덥지근한 한여름 밤의 열기가 단숨에 달려든다.
벌써부터 열대야의 조짐이 보이는 찜통 속보다야 에어컨이 가동 중인 전시실에서 기다리는 편이 훨씬 편하겠지만, 이편이 더 낫다는 걸 안다. 자신이 더위를 몹시 탄다는 것을 아는 그가 오래도록 자신을 기다리게 할 턱이 없다.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다가 마침내 주정뱅이 동료들을 버릴 결심이 서겠지. 이제 연인이 용기를 내 술판을 깨고 나오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젠 머리에 땜통까지 생기게 만드냐?”
젠장.
저절로 사나운 욕설이 씨불여진다. 현관 앞 계단에 앉아 그를 기다린 지 5분이나 됐을까? 기대하던 그 대신, 어디 시커먼 독사 새끼 하나가 옆에 와 쉭쉭거리고 있다. 역한 동동주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에게서 나던 술 냄새와 한가지일 텐데, 자신의 감각에 가해지는 자극은 극과 극이다. 한쪽은 참기 힘든 성욕, 한쪽은 참기 힘든 울화통.
“……하여간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 가지가지 해요. 귀엽게.”
“…….”
“그렇지? 네가 봐도 무지 귀엽지, 쟤?”
“…….”
“암만 봐도 볼수록 잡아먹고 싶어져. 너무 귀여워. 너무…….”
“…….”
“기분 나쁘냐, 애송이?”
“…….”
“하긴 넌 천양 초보 수 마초지. 지 계집 때타는 건 죽어도 못 견디는 소인배.”
“…….”
“솔직히 실토해봐. 실은 쟤 궁둥이에 정조대라도 채워두고 싶은 거지?”
“…….”
“그렇게 싫은 티 팍팍 내면서도 불안해서 혼자는 도저히 못 돌아가겠지? 혹시라도 때가 탈까 봐.”
“…….”
“면허 땄다며? 오늘 처음 시운전 한 거라지? 솔직히 불어. 쟤 감시하려고 면허 딴 거지? 면허 정지라 발이 묶인 이참에, 기사 흉내 내며 쟤 네 주머니에 꿰차곤 나 같은 놈 견제하려고?”
“…….”
“내가 바라보는 것조차도 짜증 나지? 바라만 봐도 때타는 거 같지?”
“…….”
“……그런데 왜 그러냐?”
“…….”
“그렇게 좋다면서 왜 괴롭히는 거냐?”
“…….”
“모를 줄 알았냐? 4년을 옆에서 바라본 녀석이다. 괴로운지 즐거운지 정돈 웃는 표정만 봐도 안다. 솔직한 녀석이라 감추려고 하면 더 잘 드러나거든.”
“…….”
“……누군가 그랬지. 슬픔이 깊으면 그가 하는 모든 동작이 다 울음이 된다고. 언젠가부터 늘 울더군. 얼굴은 웃는데…… 손놀림, 걸음걸이,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 머리카락을 터는 자태, 턱에 팔을 괼 때나 멍하니 그림을 보고 있을 때도…… 늘 울어…… 울더군. 온몸으로…….”
“…….”
“그늘이라곤 하나도 안 보이는, 참 곱게 자란 아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시커먼 게 늘 따라붙더란 말이지. 알고 보니 웬 불한당 애송이 마초 놈이 하나 나타나고부터라지?”
“…….”
“……속이려야 속일 수가 없지. 슬픔은 속이기엔 참 단순하고 순수한 종자거든?”
“…….”
“하긴 한 가지는 나도 걔한테 감쪽같이 속았지. 녀석도 게이인 줄 알았으면 그냥 안 뒀다. 애저녁에 먹어치웠지.”
“…….”
“……네놈이 끼어들기도 전에 진즉에 도장 찍어서 내 걸로 만들었을걸?”
“…….”
“모자라도 씌워 데려오지, 아니면 부러 자랑하는 거냐?”
“…….”
“괴롭히고 괴롭혀서 땜통까지 생기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존나게 사랑받고 있다고?”
“…….”
“자신만만하군.”
“…….”
“……후회하지 마라. 계속 당기면 부러질 줄 알지? 천만에. 걔는 네놈이나 나처럼 그렇게 차돌 같은 애가 아니다. 당기면 휘는 아이다. 약하고 또 약해서 고무줄처럼 언제까지나 죽죽 휠 아이지. 휘면서도 버틸 거다. 그런 면에서…….”
“…….”
“……그래, 실은 그렇기 때문에 네놈이나 나 같은 종류보다 훨씬 더 강한 건지도 모른다.”
“…….”
“……네놈이 저 아이와 무슨 싸움을 벌이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는 뻔하다. 네놈이 지게 될 거야. 네놈이 지는 데 10원 걸마. 그러니 괜히 저 애 할퀴면서 용쓰지 마라.”
“…….”
“당장 내 손 하나 타는 것도 못 견딜 놈이 무슨…….”
“…….”
“……어디 계속 당겨보시지. 저 애가 못 참고 아래로 바짝 휠 때 내가 옆에서 잽싸게 먹어치울 테니.”
“닥쳐.”
“왜? 듣기만 해도 귀가 썩는 거 같냐?”
“…….”
“뭐가 어때서? 어차피 버려질 아이인데?”
“…….”
“설마 언제까지나 주머니에 꿰차고 몰래 야금야금 처먹겠다는 개새끼 수작은 아니겠지?”
“…….”
“하긴 네놈이 그럴 리가 없지. 너처럼 욕심 사나운 마초 놈들은 사랑 하나에 목숨을 걸지는 않거든?”
“…….”
“고작 사랑 따위쯤이야 하고 치부해버리지.”
“…….”
“똑똑한 척하는 얼간이들이지. 사랑 따위라니, 세상엔 사랑만큼 중요하고 의미 깊은 일도 없는 건데 말야. 게다가 사랑이 얼마나 이루기 힘든 야망이냔 말이지. 인간 버러지로 세상에 나서, 그것만큼 손에 넣기 힘든 게 없는 건데, 얼간이들이 그것도 모르고…….”
“…….”
“……각오해. 울면서 이쪽으로 휘어지면 냉큼 잡아먹을 거라는 거. 난 신사가 아니거든, 절대.”
“…….”
“열심히 최선을 다해 여기저기 때를 묻혀 돌려주지.”
“…….”
“아, 물론 그때도 네가 여전히 쟤를 먹고 싶다고 한다면 말이지만. 싫증나서 버릴 거면 되도록 빨리 알려줘, 애송이. 그래야 완전히 내 손에 쥐고 실컷 빨아먹을 수 있을 테니.”
“…….”
“네놈이랑은 달라서 난 사랑에 목숨 거는 인종이거든. 일단 내 손에 쥐게 되면 절대로 안 놓칠 거다. 가능하다면 평생이 될지도 모르지. 그럼 이만. bonsoir, 애송이∼∼∼.”
“…….”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역한 술 냄새도 점점 휘발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다행이었다. 개새끼의 얼굴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게. 만약 고개를 들어 옆에 선 새끼를 쳐다봤다면 이토록 오래 참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도 거의 한계였을 게다. 놈이 여기서 더 계속 씨불였다면 자신의 독한 인내도 곧 명을 다했을 터……. 권 사장에게 사과한 지 단 몇 시간도 안 돼 또 주먹다짐을 벌일 수야 없지 않은가. 자신 이외의 문제로 그에게 또 상처를 입힐 수야 없지 않은가. 그게 아니라도 이미 상처로 차고 넘치는 그인데. 차고 넘치다 못해 스스로 머리카락을 뽑아내고 있는 그인데.
……와라…….
무언가를 박살 내고 싶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주먹을 계단 난간을 필사적으로 움켜쥐는 것으로 간신히 자제를 시킨다.
……어서 나와, 장인환…… 어서…….
당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 용한 무당이 어디에 산다느니, 정치가 썩었다느니, 양평 어딜 가면 손맛 끝내주는 손두부집이 있다느니, 베니스에서 괴짜 화가 모모 씨가 모모한 퍼포먼스를 벌였다느니, 그게 다 재능도 뭣도 없이 그저 튀고 싶어 벌이는 추태라느니, 그런 뻔뻔스러운 추태조차도 아트적 끼라느니, 어쩌니저쩌니 등등, 조잡스럽기 짝이 없는 미용실 수다들만 붕붕대고 있는 술판을 걷어차지 못해 불끈거리고 있는 두 다리를 껌딱지마냥 계단 바닥에 꾹꾹 눌러 붙이는 것으로 겨우겨우 자제를 시킨다.
……빨리 나와…… 한계야…… 한계다, 장인환…… 어서 냉큼 나오지 못해……?
입술 끝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때문이다.
……5분이야…… 5분 준다, 장인환…… 5분 안에 나와…… 더는 못 기다려…… 아니, 안 기다려…….
확확 몰려드는 더위를 참을 수 없다. 관자놀이며 코끝이며 등줄기로 어느새 줄줄 흘러 떨어지는 땀방울들이 미치도록 짜증스럽다. 에어컨 속에 있다 나와서 체감되는 더위는 평소 이상이다. 훨씬 더 집요하고, 훨씬 더 악질적이다.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시계를 본다. 1초에 한 번씩 그를 부른다. 초침이 빠르다. 어째 이렇게 빠른가. 평소보다 배는 빠른 것 같다. 이상도 하지. 마냥 흘러가는 시간은 끔찍하게도 느리게만 느껴지는데 눈에 드는 초침은 빨라도 너무 빠르다.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이 300개가 넘기 전에 장인환이 나와야 한다. 300개가 넘기 전에 용기 있게 술판을 깨고 나와야 용서해준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저 독사 새끼를…… 개새끼를…… 곁에 앉히고 희희낙락 웃어 젖히던 만용을 용서해준다. 둔해 빠져서는, 눈으로 희롱당하는 것도 모르고, 범해지는 것도 모르고, 사랑…… 받는 것도 모르고, 그저 유순하고 착해진 독사 선배라고 감격해선 생글생글 잘도 웃어주던 얼간이 짓도 전부 다 용서한다. 그러니까 나와라. 나와라, 장인환. 벌써 250개다. 261. 262. 269. 274. 277. 296. 298. 299. 땡. 오케이. 너, 죽인다…….
“……위…… 위야……?”
뽀얀 미소가 보인다. 귀엽고, 애틋하고, 가슴 시리도록 예쁜 이목구비가 보인다. 그리운 표정이 보인다. 표정이 말을 한다. 숭배와 헌신과 애정과 믿음이다. 오로지 그것뿐이다. 오로지 그것뿐이라 그건 마냥 그것대로 절대적이다. 내장이 싸아하니 텅 빈 것처럼 바람이 분다. ……사랑스러워…… 하느님, 너무너무 사랑스러워…….
하지만 336개째의 장인환이 지나가고서야 나왔다. 용서할 수 없다. 아무리 사랑스러워서 몸서리가 쳐져도 절대 용서해주지 말아야 한다.
오냐, 그래.
오늘 밤 널 죽일 거다.
각오해, 장인환.
“……그…… 마…… 많이 기다렸지? 집에 가자, 위야. 안에 다시 들어가서 인사는 안 해도 돼. 기하 선배한텐 그냥 간다고 말해뒀거든. 세상에, 이 땀 좀 봐……! 어느새 티셔츠가 흠뻑 젖어버렸네……!”
“……그 모자는 뭡니까?”
“……어, 에?”
“모자 말입니다. 지금 머리에 쓰고 계신 검정 야구 모자요.”
“……어……? 아……! 아아, 이…… 이거?”
“…….”
“……어, 어어, 저기…… 세혁 선배가 땜통 보기 흉하다고 쓰고 가래서…….”
씨팔, 죽여버린다!
“……이제 자긴 잘 안 쓰는 모자라고…… 마침 기하 선배 사무실에 굴러다니는 거 준다고…… 근데 정말 많이 보기 흉한가 봐…… 다들 엄청 놀리고…… 대머리 될지도 모른다고…… 휴우, 내일은 진짜 병원에라도 가봐야겠어, 위야…….”
죽여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