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1991년 7월. 장인환(張仁歡)
후들후들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가누며 손거울을 위로 치켜들었다. 커다란 욕실 거울에 비친 인환의 뒤통수가 손거울 위로 고스란히 옮겨졌다. 짐작한 대로 500원짜리 동전만 한 땜통 두 개가 정수리 한가운데 부근에 새로 자라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한 땜통들 중 가장 컸다.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자란 것이기도 했다. 사흘 전 점심때까지만 해도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니까.
원인으로 삼을 만한 사건들이야 일일이 꼽아볼 필요도 없었다. 오랜만에 선 화랑으로 가서 선배들과 동료들을 만난 것일 수도 있고, 독사와 화해한 것일 수도 있고, 면허를 딴 연인이 처음으로 운전하는 차를 시승한 것일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만 사흘에 걸친 연인과의 하드한 섹스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드한 섹스라. 글쎄. 그것을 그저 하드한 섹스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부를 수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을 추스르기도 전에, 구체적인 갖가지 괴로운 장면들이 순식간에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휘청 하고 갑자기 극심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며 다리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세면대 위에 손거울을 내팽개치다시피 하곤 곧바로 욕조 위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 괴로운 생각 때문에도, 하드 섹스 탓에 극도로 빠져나간 체력과 기력 때문에도.
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숨을 고르니 겨우 어지럼증이 가라앉았다. 바로 움직일 수도 있었지만, 인환은 좀 더 오래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서둘러 욕실을 나가봤자 당장은 할 일도 없었다. 아니, 할 일이 없다기보다 도무지 일다운 일을 할 수 있을 만한 기력이 거의 없었다. 몹시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는 땜통 치료를 위해서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병원을 가볼 생각이지만, 당장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없었다. 일단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충분히 쉬어준 다음 움직여도 움직여야 한다. 다행히 기운이 없는 것만 빼면 딱히 어디 상처를 입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수면 부족 증상과 이곳저곳 근육통이 생겨 움직일 때마다 뻐근한 통증을 주는 것 이외엔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강간은 아니라고 한 연인의 말이 거짓은 아닌 셈이었다. 설령 강간보다도 더한 충격과 상처를 입었다 해도, 그것은 육체적인 것은 전혀 아니었다. 강간은커녕 화간도 그런 화간이 없었으니까.
피식. 생각할수록 허허한 웃음만 꼬리를 물고 터진다. 내장 속이 온통 텅 빈 것마냥 허무했다. 도무지 아직도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천하의 화냥년이 됐으니 무언가 몸이 달라 보여야만 하는데, 샤워를 하며 굽어본 자신의 몸은 사흘 전과 그닥 다름이 없었다. 군데군데 피부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키스 마크의 양만이 좀 더 많아진 정도랄까.
바로 몇 분 전에 샤워를 했건만, 흥건하게 솟아난 식은땀으로 인해 등줄기는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들어 있었다. 이마와 관자놀이 근처에도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는데, 땀이 식어들어가며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꽤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기가 침범하지 않도록 바스 가운 앞섶을 깊게 여미곤 인환은 욕실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거실에 붙어 있는 욕실 안에까지 서늘한 한기가 맴돌고 있는 걸 보면 연인이 외출하면서 거실에도 에어컨을 켜둔 것 같았다. 설정 온도 또한 꽤나 낮게 책정해둔 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한기가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별로 쾌적한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현재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현명한 처사 같았다. 기력을 완전히 소진한 터라 더위를 이겨낼 저항력이 전무했다. 만약 연인이 에어컨을 켜고 나가지 않았다면 인환은 여전히 침대에 까라진 채 죽음 같은 깊은 잠으로 혼절해 있을 터였다. 아직 의사도 아니면서 그 방면으로의 지식과 재주는 참으로 놀라운 연인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몸과 건강 문제에 관해선 웬만한 의사 뺨칠 정도의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다.
도로 침실로 갈까 하다가 주방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샤워를 해서 그런지, 오전 내내 자각조차 못 했던 허기가 비로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욕이 생기면 조만간 기력도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부지런히 음식을 먹고, 지난 사흘 같은 하드한 섹스를 자제하기만 하면 그럭저럭 정상적인 신체 리듬으로 돌아올 것이다. 물론 연인의 야수가 또다시 부활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긴 해야겠지만.
하긴 당분간 웬만해서 그런 불상사는 벌어질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괴물 같은 체력을 지닌 연인이라지만 지난 사흘간 벌어진 짐승의 농탕질로 연인 역시 꽤나 지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 인환을 바라볼 때 연인의 표정에 떠올라 있던 끔찍한 환멸의 표정이라니. 땀과 정액과 말라붙은 타액 범벅인 몸을 채 가리지도 못한 채, 인환은 쓰라린 심정으로 연인의 또 다른 정신적 폭력을 견뎌야만 했었다.
광기가 사라진 침실만큼 추악하고 허무한 풍경도 드물 것이다. 욕구 충족 후에 내려다본 창녀의 몰골처럼 끔찍하게 혐오스러운 존재도.
깨끗이 샤워를 마친 문명인의 바스 가운 차림으로, 사흘이나 방치해 텁수룩하게 자라버린 수염까지 말끔히 정리한 모델의 얼굴로, 연인은 부스스하게 눈을 뜬 인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아주 꽤 오랫동안. 시선의 습격은 아마도 인환이 잠에서 깨기 훨씬 전부터였을 것이다. 혐오와 환멸의 감정 역시 인환이 자각하기 훨씬, 훨씬 전부터 연인의 넋을 점령하고 있었을 것이다.
연인의 괴로운 표정으로 미루어, 연인은 눈앞의 갖가지 오물 범벅으로 더럽혀진 창녀를 좀처럼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아마도 인환 역시 연인의 그 표정을 좀처럼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살아 있는 한 언제 어느 때까지라도, 마침내 늙어 꼬부라져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절대, 절대 뇌리에서 사라지는 일이 없을, 낙인 같은 상처다.
그랬다. 그러고 보니 그런 사정이 있었다.
두문불출, 의지를 상실한 섹스 머신마냥 폭풍 같은 포르노의 바다를 헤엄치던 연인이 비로소 사흘만의 외출을, 아니, 탈출을 감행한 것도 저 끔찍스러운 ‘혐오감’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혐오하는 건지, 인환 자신을 혐오하는 건지는 물론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다만, 비로소 연인에게 건실한 헤테로 마초로서의 자의식이 되돌아온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물론 이미 씨앗이 뿌려진 이상, 또 언제 어느 때 연인에게 포르노의 광풍이 몰아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번 따 먹은 금단의 과실이란, 그 끔찍스러운 쾌락의 달콤함이란 그리 쉬이 잊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리고 인환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역시 바로 그런 금단의 열매가 갖고 있는 불길한 속성이었다. 현재의 연인은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따로 없었다. 그야말로 ‘한창때’란 연인에게 가장 적절한 비유일 것이다. 연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재수가 없는 일일 터. 그야말로 한창때, 본의 아니게 오물을 뒤집어쓰게 됐다. 안 그래도 제어가 힘든 한창때의 성욕에 ‘금단의 과실’이라는 빨간 독이 떡하니 주어지고 말았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지나치게 추악하고, 그래서 더 지나치게 유혹적일 음습한 붉은 독. 맙소사. /소돔의 씨/라니. 그래. /소돔의 씨/랬지. 소돔의 씨. 젠장할. 무슨 그따위 지독한 이름의 독이 다 있냐. 듣기만 해도 마이너스의 기운이 풀풀 풍기지 않느냐 말이다. 소돔의 씨. 소돔의 씨. 소돔의 씨. 그러니 큰일이 나지 않았나. 연인은 이제 큰일 난 거란 말이다. 뒤집어쓴 오물이 하필이면 악종 중에서도 상 악종이 아닌 모양 아닌가!
냉장고를 열려다가 무심코 발을 멈춘다.
뚜껑이 덮인 음식 접시 몇 개가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인환을 위해 연인이 차려둔 음식인 모양이었다.
피식. 역시 인간의 몸과 건강 문제에 관한 한 연인만큼 철저한 예비 의사도 달리 없을 것이다. 지난 사흘간 포르노의 광란에 빠져 있을 때에도 연인은 음식에 관해서만큼은 조금도 이성을 잃지 않았었다. 하긴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짐승다운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야생성을 간직한 짐승일수록 먹거리 관리에 무심한 경우는 없는 법이니까. 연인의 식성을 따른 전통 한식과 인환의 취향을 고려한 세미 한식이나 경양식을 적절히 배분해서 연인은 섹스의 향연 틈틈이 식탁을 준비해주었었다. 지난 2년간 갖은 정성으로 연인의 식사를 준비했던 인환이 머쓱해질 정도로 연인의 배려는 꽤나 섬세한 편이었다. 질과 양의 면에서나 빈도의 면에서나. 아마도 주객전도란 이때 쓰려고 아껴둔 말이지 싶었다. 하기야, 그게 연인을 배려하는 인간으로서의 풍모라기보다는, 발정기의 암컷을 꾀기 위해 음식으로 소굴을 잔뜩 채우는 수컷의 인상을 풀풀 풍기긴 했지만.
식탁 위에 준비된 음식 접시를 보니 확실히 인환만을 위한 것으로 보였다. 야채수프와 크루아상, 그리고 과일과 반숙 달걀 두 개의 메뉴들이 그러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접시 뚜껑을 여니 먹음직한 음식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그토록 혐오의 시선을 보냈으면서도 연인은 자신만을 위한 음식을 준비해주고 외출했다.
뭉클하게 치미는 응어리에 어쩔 수 없이 눈앞이 흐릿해졌다. 설령 발정기의 암컷을 위한 것이든, ‘성욕 배출구’를 위한 것이든, 그래도 자신을 배려해줬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반듯하게 자란 모범 청년에, 속정 깊은 든든한 가장의 아우라가 아직도 고스란히 살아 있다. 그랬다. 그 많던 ‘싱아’는 멀리멀리 사라져버린 것 같아도 이렇게 여전히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맑디맑은 저 그리운 향기를 여전히 아련하게 풍기고 있었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서러운 식사를 했다.
느릿느릿 연인의 솜씨를 음미하며 정성껏 씹어 먹었다. 샤워로 솟아올랐던 식욕은 도로 말끔히 사라진 후였지만,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았다. 사라져버린 싱아의 아우라가 너무나 아까워 설거지조차 안타까웠다. 자신의 손으로 흔적을 지우는 것만 같았다. 아스라한 향기마저 맡아지지 않도록.
설거지를 마치고 바스 가운 대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과연 사흘 만에 제대로 주워 입는 옷다운 옷이어서 그런지 서늘한 위화감마저 느껴졌다(포르노의 바다에 옷이라는 문명의 이기는 조금도 필요가 없었다!).
역시 빈속일 때보다도 기력은 훨씬 좋아져 있었다. 운동량이 커져도 욕실에서처럼 심한 어지럼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쉬었다가 병원으로 움직여도 좋을 것 같았다. 연인이 없을 때 단행하는 무단 외출이긴 하지만, 적어도 오늘만은 연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어리석은 짓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피크로 치솟은 혐오감을 어쩌지 못해 거의 뛰쳐나가다시피 나가버린 연인이니, 비록 정확한 행선지는 알 수 없으나 이른 귀가는 무리일 것이다. 게다가 밤늦게까지도 저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외박까지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팔에 오들오들 소름이 일 정도로 빵빵하게 틀어진 에어컨을 끄고 거실 창문을 열었다. 후끈한 한여름의 열기가 단숨에 다가들었지만 워낙 서늘하게 식어 있던 실내라 그런지 도리어 기분 좋은 온기로 느껴졌다.
간단하게나마 청소라도 할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지만 연인의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도서관풍 아틀리에에 치울 건덕지가 있을 까닭이 없다. 인환이 무언가를 어지르기가 무섭게 연인의 ‘정리 정돈’이 달려들곤 하니, 집 안 어딜 둘러봐도 살풍경한 냉기만 감돈다.
그냥 음악이나 듣자. 막 오디오 쪽으로 걸어가는데 전화벨이 울었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참 이상한 일이었지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데자뷔라고까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환은 벨이 한 번 울리자마자 그냥 홀연 알게 되었다. 전화를 걸어준 이가 누구인지. 아니,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줄곧 상대를 생각하고 있었던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 사람 속에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고, 수화기를 집어 들며 인환은 조용히 뇌까렸다.
……이 사람이면 해답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이 사람이라면…… 짜증 나는 원형 탈모증을 고쳐줄지도 몰라…….
“……여보세요?”
……이러면 안 돼…… 이렇게 계속하면 안 돼…… 하고, 충고해줄지도 몰라…….
[도련님.]
“…….”
[……살아는 있냐?]
“…….”
[……죽었냐?]
“…….”
[애송이 마초 놈 성깔 하난 대단해 보이던데, 그냥 넘어갔을 거 같진 않고…….]
“…….”
[……살아 있지, 그래도?]
“…….”
[씨발, 자백하지, 뭘. 내가 그 새끼 좀 건드렸거든. 열 좀 받았을걸? 분풀이 심하게 당했냐?]
“…….”
[……억울할 게 있나. 자업자득이지. 그러게 왜 어디서 그따위 헤테로 마초 놈을 애인 놈으로 만드냐구. 그것도 하필이면 까마득히 어린 애송이를. 마음고생 하는 게 당연하지.]
“…….”
[……널린 게 매너 좋은 게이들인걸. 뒤끝도 없고. 상냥하고. 상처도 안 주는.]
“…….”
[……나도 알고 보면 꽤 괜찮았을 텐데. 그림엔 드러운 종자지만 애인한텐 아주 잘해주거든.]
“…….”
[괜찮냐, 정말? 그날은 나도 부아가 나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질투도 속에서 꽤나 부글거리고. 내키는 대로 싸지르고 보니 기분은 풀렸는데, 나중엔 니 걱정이 좀 되더라. 애송이 새끼가 달리 어디다 분풀이를 하겠나 싶은 게…….]
“……선배…….”
[……그래.]
“……선…… 배…….”
[그래, 인환아.]
“…….”
[……괜찮으니까 말해라. 들어줄게.]
“…….”
[……울지 말고 말해. ……나올래?]
“…….”
[……인환아.]
“……그…… 거…….”
[……울지 말고 말하라니까. 씨팔, 기분 존나 드럽네. 진짜……. 그 개새끼가 대체 또…….]
“……그…… 그거요…… 정말 그래요?”
[…….]
“……그…… 다른…… 다른 사람이랑 한 달만 자면 사랑이 죽어요?”
[!!!!!!]
“……누…… 눈 딱 감고…… 하…… 한 달만 뒹굴면…… 그러면…… 그러면 아프지 않을까요……?”
[…….]
“……더…… 더 이상 아프지 않을까요, 진짜로……?”
[…….]
“……아프지 않고…… 그 애 생각도 안 나고…… 사랑…… 사…… 사랑하지 않고…… 소돔의 씨도…… 안 뿌려도 되고…….”
[…….]
“……한 달…… 만…… 한 달만 뒹굴면…… 모르는 게이랑…… 매너 좋고…… 뒤끝도 없고…… 상냥하고…… 상처도 안 주는…… 그런…… 그런 게이랑 뒹굴면…… 눈 딱 감고…….”
[…….]
“……네? 그래요? ……그럴까요, 정말……?”
[…….]
“……그래요? ……선…… 배…… 선배…….”
[…….]
“……그렇겠죠? ……그…… 그럴 거예요…… 그죠……? 그럼 아프지 않을 거야…….”
[인환아.]
“……나…… 나…… 나는…… 그 애가 처음이어서…… 처음…… 사랑해서…… 자고…… 처음…… 처음 그 애하고만…… 그래서…….”
[인환아.]
“……그래설 거야…… 그 애만…… 그 애만 사랑해서 아파요…… 그런걸 거예요…… 그죠?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른 게이랑 자면…… 선배 말대로…… 여러 명이랑도 해보면…… 그러면 그 애를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인환아, 나올래?]
“…….”
[……술 사줄게. 나와라.]
“…….”
[……그만 울고…… 씨팔, 젠장. 개 씨발놈! 개 씨발 재수 개새 헤테로 마초 놈!]
“……선배…….”
[…….]
“……선배…….”
[……그래.]
“……선배, 아직도 나랑 하고 싶어요……?”
[…….]
“……나랑 할래요?”
[…….]
“……나 잘해요…… 기술 좋아요…… 나…… 나…… 그 애랑…… 그 애랑 무지 해봐서…… 화냥년이야…… 화냥년이에요, 나…….”
[…….]
“……응, 선배? ……나랑 해요, 네……? 해봐요…….”
[…….]
“……네……? 해요…… 선배랑 하면…… 소돔의 씨…… 안 뿌려도 돼…… 왜냐면 선배는 게이니까…… 선배도 게이죠…… 게이니깐…… 게이끼린 해도 괜찮은 거야…… 그죠……? 그죠, 선배……?”
[…….]
“……선배…… 서…… 선배……? 선…… 배…….”
[심봤다.]
“……선…….”
[심봤네, 씨팔……!]
“…….”
[개새끼…… 개 씨팔 놈. 개 씨팔, 개새 마초 놈.]
“…….”
[좋아. 나와라, 인환아. 어디 한번 해보자, 우리.]
“…….”
[개 씨팔…… 신나 죽겠네. 모처럼 찐하게 몸 풀게 생겼구만, 진짜. 이게 웬 떡이냐, 씨팔. 씨팔, 씨팔, 씨팔. 개새끼…….]
“…….”
[어디서 볼까? 호텔에서 볼까? 호텔이 편하긴 한데…… 근데 너 호텔 싫어하지? 그냥 내 아틀리에로 올래?]
“…….”
[아틀리에는 싫으냐?]
“……아…… 아뇨…….”
[……울지 마…….]
“……아뇨…….”
[인환아…….]
“……네…….”
[……괜찮을 거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와. 도중에 네가 싫다고 하면 관둘 테니까. 신사는 아니지만 말종은 아니다.]
“……네…….”
[기다리마.]
“……네…….”
[전화 끊어.]
“……네…….”
[끊으라니까.]
“…….”
[……그만 좀 울고. 넌 울면 진짜 눈이 개구리가 되는 건 아냐? 난 개구리랑 몸 섞는 취미 없다?]
“…….”
[끊자.]
“……네…… 이따 봬요, 선배…… 고맙습니다…….”
[하. 고맙긴. 심봤다니까. 나, 너 진짜 먹고 싶었다? 먹고 싶어한 지 꽤 됐어. 알지?]
“…….”
[끊자.]
“…….”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기다려줄 독사 같았다. 할 수 없이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멍하니 전화기만 바라보았다.
한여름의 눈부신 햇빛이 거실에 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시계를 살폈다. 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평온하고 고요한 오후였다. 한기마저 돌던 실내는 어느새 미풍 한 점 느껴지지 않는 후덥지근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가만가만 몸을 일으켜 침실로 갔다. 최대한 멋을 낼 생각이었다. 왠지 독사에게 무척 잘 보이고 싶었다. 어딘가 들러 멋진 선물이라도 사 갖고 들어가자고 결심도 굳혔다. 꽃이 좋을 것 같았다. 독사 성미엔 닭살 돋는다며 치를 떨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내심으론 기뻐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애교를 부리면 겉으로는 치를 떨며 몹시 구박을 하면서도 꽤나 관대해지곤 했던 게 기억이 났다. 피식.
이상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독사와 섹스를 하러 나가는 건데 별로 혐오감이 들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사의 키스를 떠올리면 혐오감으로 끔찍하게 몸서리를 쳤던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은 혐오감은커녕 따스한 친밀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친밀감뿐만이 아니었다. 어쩐 일인지 두근두근 가슴까지 설레기 시작했다. 독사와 섹스 하는 기분은 어떨까? 독사의 몸은 어떻게 생겼을까? 독사의 자지는 어떨까? 연인보다 클까? 작을까? 잔뜩 발기해서 자신의 거기로 들어오면 연인이 들어왔을 때처럼 그렇게 좋아서 흐앙흐앙 울음이 터지게 될까……? 맙소사. 혐오감 좋아하시네. 태연하게 줄줄이 낯 뜨거운 상상까지 하고 앉았는 거다, 화냥년이. 아이, 참. 근데 이 눈물은 뭐야. 더럽게도 안 그치네. 독사는 개구리 눈 싫다고 했는데.
벽장에서 고르고 골라 예쁜 핑크색 슈트를 꺼냈다. 연인이 참 예쁘다고 한 슈트였다. 자신에게 참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었던 옷이었다. 그 언젠가, 서로가 ‘친구’였던 시절에.
갑자기 서러운 울음이 복받쳐, 슈트를 침대 위에 던져두고 한참을 오열했다. 머릿속으론 독사의 페니스를 상상하면서 가슴속으론 그리운 기억을 떠올리고 울었다. 한참을 꺼이꺼이 신이 나서 울었다.
……아이, 참. 개구리 눈 되면 안 되는데……. 기력이 떨어진 나머지 가물가물 의식이 가부러지자, 독사를 떠올리고 간신히 설움을 진정시켰다.
침대에 누워 한참 동안 천장을 응시했다. 불규칙한 패턴의 천장 벽지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이후에 할 일들을 차근차근 뇌리에 적어나갔다.
슈트를 입고, 버스 정류장까지 걷기 귀찮으니까 콜택시를 부르고, 중간에 내려 꽃을 사고, 아, 와인도 사야지. 독사랑 저녁도 먹어야 할 테니까. 에, 또 그리고…… 그거 하고 나면 꽤 늦을 거야…… 늦게…… 늦게 들어오면 연인이 짜증 내는데…… 아아, 하지만 오늘은 괜찮아. 괜찮을 거야. 연인도 늦을지도 모르는걸. 아예 안 들어올지도 모르고. 아아, 그럼 외박이로구나. 무단 외박. 허니문 최초의 무단 외박. 아줌마 들어봐요, 글쎄. 울 신랑이 어제 외박을 했는데 말이에요…… 쳇. 허니문 좋아하네. 허니문은 무슨 허니문.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장인환. 넌 어째 그렇게 발전이 없냐. 천국 아니라고 했지? 내가 아까 아니라고 했어, 안 했어? 엉? 지옥이라고 했잖아. 지옥. 다시 한 번 말해줘? ‘지․옥’. 지옥. 지옥. 지옥. 지옥. 지옥…….
30분 남짓을 그렇게 멍하니 허송하고 보니 조금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짐작대로, 몸을 일으켜 세워도 그닥 어지럽지는 않았다.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거울을 봤다. 곳곳에 여실히 드러나는 땜통들에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모자라도 써야지…… 하고 장롱을 뒤져보지만, 핑크색 슈트에 어울릴 만한 아이템은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실은 모자 자체가 잘 안 어울리는 두상이었다, 자신은. 모델처럼 조막만 한데다 조각같이 완벽한 두상을 지닌 연인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변변한 모자 하나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냥 이대로 나가자고 체념하고 일어서는데, 그때 떠오른 것이 독사의 모자였다. 며칠 전 선 화랑에서 독사가 쓰고 가라고 준 모자. 검정색 야구 모자라 어찌해도 슈트에는 안 어울리지만, 어쩐지 독사는 도리어 기뻐할 것 같았다. 뭐, 길거리의 다른 사람들이 보면 좀 쪽 팔리겠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독사니깐.
기억을 더듬어 패션 소품을 모아둔 상자를 열어보았지만 독사의 모자는 어쩐지 눈에 띄지 않았다. 어럽쇼? 이게 어디 갔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벗은 뒤 크로스백에 넣어둔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때의 크로스백은 얌전히 제자리에 수납돼 있는데 모자만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모자가 자신과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장롱 속을 구석구석 뒤져도 금방 눈에 띄리라 여겼던 독사의 모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짜증을 잔뜩 입에 물곤 침실을 빠져나왔다. 사실 안 쓰고 나가도 그만인 아이템이지만, 일단 쓰기로 마음먹은데다 독사가 보고 좋아할 걸 생각하면 쉬이 포기가 안 되었다.
제법 오래 뒤져볼 각오를 했던 것이 무색하게, 독사의 모자는 거실에서 금세 발견되었다. 참으로 놀랍게도 거실 쓰레기통 속에서.
어째서 모자가 그 속에 들어가 있는가 하는 의문보다, 인환을 더 놀라게 한 것은 모자의 /가련한/ 상태였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모자로서의 기능을 하기엔 훼손이 꽤나 심각했다. 챙의 3분의 1 정도가 불에 그을린데다, 김치찌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검정색이라 처음엔 잘 안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여기저기 김치찌개 얼룩이 묻어 있었다. 비로소 어젠가 그제, 김치찌개를 먹은 기억이 났다. 아마도 연인이 찌개를 끓이면서 주방용 장갑 대용으로 사용하다가 이 꼴로 만든 모양이었다.
이리저리 살펴봐도 복원은 불가능했다. 결국 도로 쓰레기통 속에 던져 넣으며 잠시나마 연인을 원망해야 했다. 주방용 장갑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이걸로 찌개 냄비를 들어 올릴 건 또 뭐냐. 또 기왕에 쓰는 거면 좀 조심을 해주지. 괜히 아까운 모자만 버렸잖아. 메이커도 ‘나이키’씩이나 되는고만.
하지만 어째서 이 모자가 애먼 주방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자신할 순 없어도, 분명 크로스백에 넣어 가지고 아틀리에로 올라왔는데. 그리고 그다음 날, 거실에 굴러다니던 자신의 옷가지들을 치우며(야수로 변한 연인에 의해 현관 앞에서 넝마처럼 벗겨졌던 처량맞은 옷가지들이었다!) 함께 소품 상자 안에 넣어둔 것 같았는데.
땜통투성이 머리를 현관 앞 거울에 비추어 보니 모자가 아까운 마음이 새삼 간절했지만 별수 없이 단념을 하고 인환은 콜택시를 불렀다. 택시는 10분 만에 도착했고, 인환은 재킷 안주머니에 지갑만을 챙긴 가뿐한 차림으로 빌라 밖으로 빠져나왔다.
한여름의 땡볕이 내리쬐는 후끈한 거리는 그야말로 죽음이었다. 실온은 32도라는데 실제 체감 온도는 40도 가까이나 되었다. 몸 상태도 최악인데, 저 연옥 속을 20분이나 걸어간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빌라 앞에 정차해 있던 콜택시에 몸을 밀어 넣었을 땐 안도의 한숨마저 흘러나왔다. 에어컨이 틀어진 택시 안과 밖의 기온 차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에어컨을 끄고 나선 아틀리에 안도 꽤 더워졌다고 느꼈지만 길거리의 지열은 그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택시 기사가 목적지를 물었고, 인환은 풍납동으로 가자고 했다. 독사의 아틀리에가 있는 곳이었다. 차는 곧 출발했다.
몇 분 동안 차창 밖을 주시하며 땡볕 속 거리를 구경하다가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가까이까지 늦잠을 잤는데도 여전히 졸린다는 생각을 곱씹으며. 식곤증 때문인지도 몰라…… 하고 자기변명을 했다가, 실은 연인 때문이잖아…… 하고 고쳐 자백했다. 밤을 낮 삼아, 낮을 밤 삼아 사흘 동안 끊임없이 되풀이되던 ‘포르노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그렇게 해대고도 모자라 외간 남자를 찾아 다리를 벌리러 가는 자신은 대단한 화냥년인가 보다 하고, 싱긋 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궁금했다. 독사의 자지가. 얼마나 클까. 얼마나 길까. 색깔은 어떨까. 연인처럼 검붉은 색일까, 아니면 아주 새까말까. 얼마나 잘할까. 안으로 들어와 박히면 얼마나 황홀한 기분이 들까. 피스톤질은 또 얼마나 격렬할까. 야, 진짜. 가슴이 두근두근해. 아랫도리도 근질근질하잖아. 정말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다. 어서 빨리 독사의 자지를 먹을 수 있었으면!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정말로, 아랫도리가 근질근질했다. 뿌듯하게 힘이 들어간 구멍은 벌름벌름 움찔거리며 축축한 애액마저 질금거렸다. 배고플 만도 하지. 오늘 새벽, 하얗게 동창이 밝아올 때까지도 연인의 거대한 흉기를 쑥쑥 잘도 빨아들였던 명기의 구멍이었다. 사흘 낯 밤을 걸신들린 듯이 흡족하게 배를 채우다 느닷없이 텅 비게 됐으니 당근 배가 고플 밖에.
……아무 자지라도 좋으니까 어서 빨리 박아줘. 박아달라구…….
음부를 활짝 벌린 채 몸을 꿈틀거리며 뭇 사내의 자지를 구걸하는 창녀가 보였다. 카하하하하하. 발칙한 년. /저년/의 요사스러운 웃음소리가 끔찍하리만큼 귀에 쟁쟁했다.
“……새끼, 이게 다 뭐냐? 닭살스럽게.”
동네 어귀에서 산 칼라 꽃 한 다발을 내밀자 독사가 대뜸 욕설부터 뱉는다.
작업 중이었는지 독사는 기름때가 선연한 검정색의 헐렁한 멜빵바지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반라 차림이라 마른 듯하면서도 단단한 근육이 잡힌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안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공기로 봐서 에어컨도 켜고 있는 것 같았지만, 용접기로 쇠를 찢고 깨고 갈아붙이는 독사의 작품 스타일상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어떤 빵빵한 에어컨도 무용지물일 터였다. 역시 드러난 독사의 목덜미와 가슴골을 타고 쉴 새 없이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멋대로 자란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카락도,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채 이마와 목덜미에 가닥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그냥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요, 선배.”
생글생글 웃으며 애교를 한 방 날리자, 이내 귓불 근처로 붉은 기를 피워 올리며 독사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존나게 미운 개구리눈을 하고 애교는, 새끼가…….”
보일락 말락 웃음기가 걸린 날렵한 입술을 타고 보태지는 건 역시 퉁명스러운 욕설이다. 그러면서도 반대쪽 손에 들려 있던 와인보다도 먼저 받아 든 것은 역시 꽃다발이었다.
“들어와라. 밖이 덥지, 꽤?”
돌아서는 독사를 따라 들어간 곳은 1층짜리 별채를 커다란 창고풍으로 개조해 만든 독사의 작업실이었다. 250여 평쯤 되는 너른 대지엔 2층 단독 주택 한 채와 독사의 작업실로 쓰이는 별채가 제법 넓은 정원을 끼고 연달아 늘어서 있었다. 어릴 때부터 살던 집들 중 하나라는데 부모가 이민을 가면서 독사에게 물려준 것이란다. 사업가인 부모는 미국 LA에 있다고 하고, 결혼한 형 둘 역시 각각 독립해서 하나는 뉴욕에서 국제 변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또 하나는 부산에서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들었다. 얼핏 듣기론, 독사는 손위 형 둘과는 배다른 형제 사이로 독사의 친모는 후처인 셈이었다. 어찌 보면 인환과 비슷한 복잡한 가정사가 읽히지만, 인환의 사정보다는 훨씬 정상적이고, 또 안정적인 가정환경을 갖고 있었다. 적어도 독사네 양친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다. 인환의 집안처럼 수많은 첩들과 그 첩들 사이에서 난 사생아들에 본처의 적자들까지 한데 얽히고설켜 추악한 유산 싸움을 하지는 않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에는 동기들과 함께 꽤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독사의 집인 것 같은데, 졸업하고는 2년 전쯤 두어 번인가 와본 것을 제외하곤 처음 방문인 셈이었다. 그래도 이미 집 안의 구조라든가 분위기는 손에 잡힐 정도로 익숙한 것이었다. 아직 철부지 시절, 이곳 또한 동료들과 숱하게 부어라 마셔라 하며 예술과 그림을 향해 꿈을 불태우던 추억의 장소 중 하나였다.
80평쯤은 족히 넘을 독사의 작업실은 온갖 작업 도구들과 작품들로 대부분 채워져 있지만 그 외에도 비디오니 냉장고니 오디오 시스템이니, 혹은 간단히 차나 라면을 끓여먹을 수 있는 작은 싱크대 및 간이침대와 소파들까지, 살림을 살아도 충분할 정도로 모든 게 잘 갖춰진 하나의 거대한 원룸이었다. 신발을 신고 어슬렁거려야 한다는 점과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는 독사의 작품들, 또 제법 험악하게 생긴 갖가지 건축용 작업 도구들이 사방에 널렸다는 점에서 원룸이라기보다 공장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긴 했지만.
“……여긴 여전하네요, 선배…….”
그리운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인환이 가만히 중얼거리자, 싱크대 옆에서 머그잔에 와인을 따르고 있던 독사가 시선을 보내온다. 차분하고 고요한 시선이었다. 늘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에만 익숙해서 그런지, 딴에는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독사의 얼굴은 꽤나 핸섬해 보였다. 화해를 하고 나선 그토록 무섭게 느껴지던 독사의 날카로움이나 거친 개성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신기했다.
아마도 독사의 본심을 알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뛰어난 재능이 있는 선배로서의 엄격함이라거나, 칼날처럼 예민하게 날이 서 있는 예술가적 기질이라거나, 혹은 꽤나 삐딱한 성깔 등이 인환을 움츠러들게 했을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독사는 인환에게 있어 그야말로 ‘독사’ 그 자체였을 뿐이었다. 하늘같은 선배이자 접근하기 힘든 개성의 소유자로, 또 재능 있는 동료로서 서로 자극을 주고받는다고만 여겼을 뿐이지, 4년여의 제법 긴 사귐 동안 인환은 독사에게 동료 이상의 감정이나 호기심을 품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또 독사가 자신을 헤테로라 여겼듯이 자신 역시 독사를 철저하게 헤테로라 오해했다. 만약 독사가 자신과 같은 게이라는 걸 진즉에 알았다면, 어쩌면 두 사람의 관계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인환은 생각했다. 만약 연인을 만나게 되기 전 독사의 감정을 알게 됐더라면, 그래서 독사의 호의와 거친 프러포즈들을 다른 방식으로 받게 됐더라면.
“여전하다니 언제 적 얘길 하는 거냐, 도련님.”
독사가 와인 잔을 건네며 쓰게 웃는다.
“너, 2년 4개월 만이다, 마지막으로 여기 온 지.”
툴툴거리는 불만이 그대로 드러난 일갈은, 그러나 따스했다. 따스함이 느껴졌다. 세상에, 저 천하의 투덜이 스머프인 독사한테 ‘따스함’이라는 단어를 쓰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어…… 아아, 그렇게나 오래됐어요?”
독사가 인도하는 대로 손님 접대용 소파에 가 앉으며 인환도 따스한 대꾸를 전해주었다. 몸 상태가 바닥이라 독사가 준 와인잔은 탁자 위에 그대로 얌전히 올려놓았다. 안 그래도 툭하면 픽픽 쓰러지는데다 섹스까지 하게 될 텐데, 알코올마저 들어간다면 몸이 어떤 불길한 반응을 일으키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 네가 주희랑 유난히 친해지고부터였지. 난 그래서 네가 주희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씨팔, 하여간 내숭도 그런 내숭이 없었지. 아주 감쪽같이 속았어.”
“…….”
“……주희한테서 대충 듣게 됐다. 주희 통해서 그 개새끼랑 얽히게 된 거라며?”
“…….”
“아웃팅 아냐. 주희 잡을 일 아니다. 주희가 지난번 포천에서 있었던 일로 날 어찌나 갈구던지, 자백 안 할 수 없었다. 주희도 나 추궁하는 중에 나온 얘기고. 주희도 자세히 꿰고 있던데, 뭘.”
“…….”
“지난해 주희랑 껄끄러웠던 것도 그 새끼 때문이라지?”
“……욕하지 마세요, 선배…….”
“…….”
“……그 애 자꾸 욕하지 마…….”
“얼씨구. 또 우냐? 완전 청승이 따로 없구나, 씨발. 뭐, 그 애 욕하지 마? 아주 열부 났네, 열부 났어.”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요. 오버하지 마세요, 선배.”
“뭐가 아니냐. 눈이 빨갛구만.”
빨간 거야 아까 운 후유증이지.
절대 운 게 아닌데도 약을 올리는 독사가 얄밉다. 울컥해서 속으로 앙탈을 부리지만, 알아서 기던 후배 시절이 떠올라 버르장머리 없는 말대꾸로 소화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자신에 대한 감정을 알고 있다고 해도, 지난 4년간 하늘처럼 어렵게 떠받들던 선배다. 격의 없는 애교나 앙탈은 부드러운 기질의 기하 선배에게 하는 만큼 편하게 나오지는 않았다.
“멋 내고 왔구나.”
“…….”
“나 보여주려고 멋 낸 거지?”
“…….”
“또 삐졌냐? 울었다고 약 올려서? 하여간 속 좁기가 좁쌀이 따로 없어요, 존만 한 새끼가.”
“……안 삐졌어요.”
“……보기 좋다.”
“…….”
“……넌 분홍색이 잘 어울리지.”
“…….”
“……사내새끼가 분홍색이 잘 어울린다니 그도 존나 재수 털리는 일이긴 하다만.”
“…….”
시선이 느껴졌다. 막 작업을 끝낸 듯한 독사의 100호 크기 신작이 작업대 옆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무심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인환의 예민해진 더듬이는 독사의 시선을 선연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닥 흥분한 시선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말짱 신사의 눈빛만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의 깊게 인환의 상태를 살피며 독사는 지그시 욕망을 누르고 있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머리 좀 보자.”
“?”
“머리카락 말이야. 어디 땜통이 또 몇 개나 생겼나 보자고.”
들고 있던 와인을 원샷한 독사가 오른쪽 검지를 까닥까닥한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독사의 시건방진 수신호다. 과거, 작품 평을 해주겠다며 저 수신호를 할 땐, 또 어떤 독설이 떨어질까 달달 떨며 옆으로 다가가 머리를 조아렸었다. 이젠 저 수신호를 봐도 조금도 떨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또 못내 신기하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독사에게 비스듬히 상체를 기울인다.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마른 듯한 탄탄한 가슴 근육. 피부는 창백해 보일 정도로 새하얗지만, 반라의 상반신에서 느껴지는 것은 역시 만만치 않은 수컷의 에너지다. 독사의 기질답게 시니컬하면서도 날카롭게 벼려진 몸이었다. 거의 육체노동에 가까운 작업 스타일이라 그런지, 풍기는 분위기며 스타일은 세련된 댄디이면서도 벗겨진 몸은 완전 노동자인 게 또 독사다워서 신기했다. 독사의 손이 뻗어와 인환의 머리를 좀 더 앞으로 끌어당기자, 작업실 가득 배어 있던 담배 냄새와 코롱 냄새가 좀 더 강렬하게 다가들었다. 뻗어온 손아래, 겨드랑이 사이에서 풍겨오는 수컷의 호르몬 냄새도.
“굉장하구만. 아예 꽃밭이로구만, 꽃밭.”
“……조…… 좀 심하죠……?”
“심하지. 조만간 대머리 되는 건 맡아논 당상 되시겠어.”
“…….”
“큰일이네. 넌 두상도 별로 안 이쁜데, 율 브리너처럼 아예 밀고 다닐 수도 없고.”
“…….”
“……뭐가 그렇게 슬프냐.”
“…….”
“……뭐가 그렇게 슬퍼서 머리까지 죄다 뽑아낼 정도로 우는 거냐.”
“…….”
“널 슬프게 하는 새끼가 누구냐.”
“…….”
“……그 새끼가 그렇게 좋으냐?”
“…….”
“고작 그런 애송이 새끼 하나 때문에 이렇게 부서지고 있는 거냐?”
“…….”
“한심한 새끼…….”
“……?!”
뒤적뒤적 머리카락 속을 헤집던 독사의 손이 그대로 뒤통수를 움켜쥐곤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왈그락.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머그잔 두 개가 밀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는 비었고 하나는 반쯤 와인이 차 있는 잔이었다. 그러나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는 대동소이했다.
독사의 심장 소리가 꽤나 크게 들린다. 숨을 내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도 보이는 것보다 진폭이 요란하다. 한쪽 귀가 완전히 독사의 가슴팍에 파묻혀 있는 탓이다. 두 다리는 탁자에 주저앉은 자세고, 상반신은 완전히 독사에게 끌어안겨 있다. 80센티 폭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안긴 자세라 엉거주춤, 꽤 불안정한 무게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어깨 뒤로 감긴 독사의 팔이 주는 완력이 만만찮아선지 그닥 불편함이 느껴지진 않는다. 뺨에 닿아 있는 독사의 체온은 땀 때문인지 그닥 뜨겁게 느껴지진 않는다. 처음 봤을 때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땀으로 푹 젖어 있진 않지만, 그래도 제법 축축하게 젖어 있는 피부는 몹시 부드럽고 탄력이 있었다. 만져보고 싶을 만큼.
가만가만, 독사의 등으로 손을 뻗어본다. 멜빵 끈 밑에 자리한 우묵하게 파인 척추 뼈 근처를 어루만지자 독사가 움찔, 어깨를 떨며 몸을 긴장시킨다.
“……유혹하는 거냐?”
확연한 욕망이 읽히긴 하는데도, 독사의 목소리에 동요는 없다. 평소처럼 그저 쿨하고 시니컬할 뿐이다.
“……예, 선배…….”
오히려 욕망으로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는 쪽은 인환 자신이었다. 어느새 자지가 반쯤 일어서 있는 쪽도 자신이었다. 똥구멍을 움찔움찔 떨며 심장을 세동시키고 있는 쪽도 자신이었다. 화냥년도 이런 화냥년이 없었다.
“……후회할 텐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 속을 헤집으며 부드러운 애무만을 주고 있던 독사가 떠보고 있다.
후회하면? 자신이 후회하면 하지 않겠다는 건가? 하.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신사 아니라며. 먹고 싶었다며. 먹고 싶어한 지 꽤 됐다며.
“……괜찮아요.”
조용하지만 확고한 대꾸와 함께 등줄기를 더듬던 손을 앞으로 끌어와 가슴 근육을 어루만졌다. 슬쩍 젖꼭지를 비틀자, 이번엔 좀 더 심하게 전율을 일으키는 독사다.
“후회 안 한다고는 대답 안 하네?”
“…….”
어쩐지 자신을 밀어내려고 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탁자 위에 걸쳐 있던 다리를 앞으로 뻗어 독사의 몸 위로 전신을 완전히 밀어붙였다. 자신의 체중이 온전히 실린 독사의 몸도 소파 뒤로 무너져 내렸다. 양팔을 벌려 독사의 상반신을 꼭 껴안자 두 사람의 몸은 소파 위로 완벽하게 포개진 채 빈틈없이 달라붙게 되었다.
“……괜찮아요…….”
약간 벌어진 독사의 사타구니 사이에 자신의 것을 포개곤 슬슬 비벼보았다. 독사의 작업복과 자신의 팬츠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자지가 만났다. 자신은 이미 완벽하게 발기해 끈끈한 수액까지 흘리고 있건만, 어째 독사는 요조숙녀처럼 잠잠하기만 했다. 왈칵 핏대가 올랐다. 뭐하자는 거야! 자존심이 몹시 상한 나머지 쌍욕이 절로 나왔다. 물론 뇌리 속에서만. 여전히 하늘같은 선배다. 알아서 기어야 한다.
“……괜찮다니까요…… 해요…….”
손바닥에 닿는 독사의 맨살을 농염하게 어루만지며 속살거렸다.
낡긴 했지만 제법 빳빳한 질감을 주는 독사의 작업복이 몹시도 거슬렸다. 서둘러 양쪽 멜빵을 독사의 어깨에서 끌어내렸다. 허리춤의 단추도 풀어 벌리자, 독사의 치부가 단숨에 드러났다. 꽤나 궁금했던 터라, 인환은 수치도 잊고 슬쩍 아래로 시선을 내려 독사의 심벌을 확인했다. 훌륭하다. 절로 감탄이 터졌다. 볼품없는 자신의 것에 새삼 자격지심이 생기는 순간이다. 길이도 길고, 굵기는 더 좋고, 모양도 색깔도 왔다다. 반쯤밖에 발기하지 않았으니, 제 모양을 갖추고 나면 더 훌륭해 보이겠지. 독사가 속옷을 안 입고 작업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 그건 그것대로 고마운 습관이라고 속으로 큭큭거렸다. 속옷까지 벗기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약간 상반신을 들어 올려 독사를 완전한 나신으로 만들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몹시 뛰었다. 얼굴도 발갛게 달아올라, 잔뜩 흥분한 상태임을 독사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독사는 빤히 인환의 하는 양을 지켜보며 스스로를 방치하고 있다. 인환의 허리께를 쥐고 있는 양손으로 그저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다. 그저 고요하고 고요하다. 몸은 고요한데 눈동자만 불길을 뿜는다. 인환의 기분을 살피는 것도 같고, 욕망을 참고 있는 것도 같고, 기회를 더 엿보고 있는 것도 같고,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도 같다. 속내를 도통 모르겠다. 역시 좀 부아가 났지만, 어느새 훌륭하게 일어선 독사의 자지에 그럭저럭 만족했다.
“……제 옷도 벗겨주세요, 선배…….”
독사의 목덜미에 이를 세우며 허스키하게 속삭였다.
독사의 어깨와 가슴과 엉덩이를 부지런히 쓰다듬고, 하반신을 꿈틀거리며 독사의 발기한 자지를 자신의 허벅지로 어루만지는 이중고를 치른 끝에 간신히 독사의 적극성을 끌어낼 수 있었다.
조신한 처녀처럼 소파 밑에 얌전히 깔려 있던 독사가 와락 몸을 일으켜 세웠다. 동시에 인환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통에 자세는 단숨에 역전이 되고 말았다.
역시 저 단단한 근육은 그저 폼이 아니었나 보다. 완력이 장난 아니었다. 등에 낀 쿠션이 거슬려 몸을 약간 바르작거리자, 자신이 빠져나가는 줄 알았는지 독사의 손길이 단숨에 자신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난폭하기도 난폭했고, 무엇보다도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힘이 느껴지는 독사의 손길에 인환은 황홀한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에 드는 수컷을 발견했을 때 짓곤 하는, 화냥년의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울지 마…….”
“……?”
“……그렇게 울지 마, 인환아.”
“……?”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딘가 김을 새게 하는 독사의 한마디에 얼굴 가득 퍼져 있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딴 애송이 때문에 그렇게 울지 마…….”
“…….”
“울지 마라…… 울지 마…….”
“…….”
뾰로통해져서는 독사의 바짝 솟은 젖꼭지를 슬쩍 꼬집어 뜯었다. 광란의 도화선이었다. 흐느끼는 듯한 탁한 신음성이 독사의 창백한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물고기처럼 표정이 없던 독사의 눈시울에 설핏 사나운 정염이 스쳐 지나갔다.
슈트 재킷이 우악스럽게 벗겨져 나갔다. 셔츠 단추를 차례로 풀어 내리는 것이 짜증 났는지 독사가 찢어발기듯이 앞섶을 열자 폭죽이 터지는 것마냥 사방으로 단추가 튀어나갔다.
두 팔이 위로 바짝 들려 올라갔다. 인환을 만세 부르는 자세로 만든 독사가 상반신의 옷가지를 다 벗겨내는 데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하반신도 사정은 한가지였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인환은 그대로 독사의 품 안으로 먹혀들었다. 독사의 양팔이 상반신을 휘감자 담배 냄새와 땀 냄새와 코롱 향기가 섞인 독사의 수컷 냄새가 왈칵 파고들었다. 얼굴이 막무가내로 독사의 가슴팍에 밀어붙여진 바람에 입과 코가 막혀버려 잠시 동안 가쁜 호흡을 내질러야 했다.
축축하고 미지근한 온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독사의 매끄러운 등을 정신없이 어루만지며 하반신을 독사의 허벅지에 마구 비벼댔다. 서로 다른 체온이 뒤섞이며 더한 열기를 만들어내자 습하고 비릿한 살 냄새가 코끝에 진동했다.
처음 독사의 손길이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왔을 때, 그 기묘한 선뜩함에 아주 잠깐 몸을 떨었지만, 인환은 이내 눈부신 미소로 독사의 접촉을 환영했다. 자신의 음경과 음낭을 한꺼번에 품은 독사의 손이 다소는 거칠게 위아래로 쓸어내리며 기왕에 흥분한 몸을 절정으로 몰아갔다.
“……흐으윽……! 흡……! 흑……! 흐아앙!!!”
마주 안은 독사의 등에 손톱을 세우며 허리를 활처럼 뒤집었다. 턱 끝으로 뜨겁고 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독사의 입술이었다. 독사의 이빨이었다. 짜릿한 아픔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턱 끝으로 설핏 핏기가 맺혔다. 흐앙흐앙 고양이 소리를 내자, 잘근잘근 물어뜯던 키스는 통째로 아래턱을 잡아먹는 것 같은 격렬한 흡입으로 변했다. 마침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하반신의 자극에, 인환은 고래고래 교성을 내지르며 두 다리로 독사의 허리를 친친 휘어 감았다. 손톱을 잔뜩 세워 독사의 등줄기를 낭자하게 긁어내린 것은 물론이었다. 도리질을 하며 몸부림을 치는 통에, 부지런히 키스할 구멍을 찾던 독사의 입술이 마지못해 목덜미로 떨어졌다. 찌르르한 통증을 목덜미에 느끼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오르가슴이 왔다.
“……흐아아앙! 아흑!!! 아, 아아!!! 흐아아아앗!!!!!!”
어깨를 끌어안은 독사의 한쪽 팔이 밧줄처럼 인환을 죄어대고 있었다. 몸서리쳐지는 수컷의 포옹이었다. 성기를 통째로 움켜진 채 인환의 절정을 이끌어낸 오른손은 사정의 순간, 비호처럼 빠른 속도로 방향을 틀더니 회음을 지나 은밀한 동공 속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길고 딱딱한 손가락 두 개가 안쪽 내벽을 벌리며 한계까지 박혀들었다. 정확히 문질러지는 전립선의 자극에 인환은 입을 딱 벌린 채 자지러졌다.
화등잔만 하게 부릅뜬 시야 저 너머로 고통이 벼락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나 찰나의 순간이라 고통을 자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제대로 인식한 것은 다만 전신으로 파도처럼 엄습하고 있는 오르가슴의 전율뿐이었다. 까무룩 덮쳐드는 어둠 너머, 움찔움찔 반딧불처럼 파득거리며 경련하는 몸이 아득하게 보였다. 뱀처럼 사납게 요동치고 있는 하반신도 아스라이 감지돼왔다. 누군가의 키스가 사납게 입술을 틀어막고 있었다. 까만, 아주 새까만 키스였다. 고통 저 너머로 연인이 다가와 있었다. 그리운 연인의 숨결을 찾아 깊이 숨을 고르며 인환은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울지 마…….”
“…….”
“……울지 마라…….”
“…….”
“나는 네가 더 이상 울지 말았으면 좋겠다…….”
“…….”
“……부서지지 않아도 좋다, 인환아. 더 이상…….”
“…….”
“……이 이상은 부서지지 마라, 제발.”
“……해요…….”
“…….”
“……해주세요, 선배…….”
“…….”
“……여기다 넣어줘요…… 여기다 선배 자지를 넣어줘…….”
“…….”
“……가득가득 선배를…… 가득가득 넣어 채워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선배…… 그만해요…… 화딱지 나요…….”
“…….”
“……빨아드릴까요? 그럼 선배 넣어줄래요? 나, 오럴 잘해요.”
“인환아.”
“……빨아드릴게요. 이거 치워봐요, 선배. 내가 위로 올라갈게요.”
“인환아.”
“아, 씨…… 진짜 왜 그래요! 하자고 했잖아요! 모처럼 찐하게 몸 풀자매요?! 심봤다며?! 신사 아니라면서요?!”
“…….”
“치워 봐요! 무거워……! 윽! 아, 씨! 뭐하시는 거예요?! 저리 치워요! 치우세요, 선배!!! 안 치워요?!!!”
“…….”
“빨아드린다니까요! 선배는 물건도 아주 훌륭해서 빠는 맛도 근사할 것 같단 말예요!!! 아씨, 치우라니까요!!!”
“…….”
“아, 씨…… 아, 씨…….”
“……까마득한 후배 주제에 건방지게 자꾸 욕 씨불일래, 너……?”
“선배!!!”
“……새끼가 오냐오냐 해주니깐, 아주 간댕이가 부어터졌구만…….”
“이거 놓으시라잖아요!!! 선배가 이상한 짓 하시니까 그러죠!!! 저 안 울어요, 안 운다구요!!! 왜 자꾸 남의 얼굴만 문질러요?!!!”
“시끄럽다.”
“하자매요!!! 하자고 해놓고 왜 이제 와서 잘난 척이에요!!! 신사 아니라매요!!! 아씨, 그만 만져요!!! 눈물도 하나도 안 나오는데 괜히…… 도대체 왜 그러시냐구요!!! 기분 잡치게…….”
“……신사는 아니지. 하지만 불한당도 아니라고 했지?”
“……?”
“나 원하지도 않는 새끼랑 붙어먹는 짓 재미없어. 존나 자존심 상해.”
“……그…… 그…… 그…… 그게 무슨…….”
“도중에 네가 싫다고 하면 관둔다고 했잖아. 신사는 아니지만 말종도 아니라고.”
“……제…… 제가 언제 싫다고…….”
“새꺄, 귀신을 속여라. 어디서 건방지게…… 내가 너한테 한 번이나 속지 두 번 속을 줄 아냐? 씨팔, 그래도 존나 기대했더니만 결국…….”
“제가 언제요?!!! 지…… 지금도 이렇게 유혹하고 있는데 팍팍하게 그러시는 쪽도 선배잖아요!!! 자존심 상하는 건 저라구요!!!”
“……오늘만 날이냐? 사내새끼 몸에 굶주린 것도 아니고, 진짜 내키면 그때 해도 늦지 않아. 4년이나 지켜봐왔는데 더 기다린다고 해도 뭐…….”
“…….”
“……질질 짜기만 하는 놈 붙들고 혼자 자위하는 변태도 아니고, 내가 미쳤냐? 진짜 자존심 상해, 새꺄. 내가 이태원에서 얼마나 존나게 잘나가는데 나 싫다는 놈 붙들고…….”
“…….”
“……팔자에도 없는 보모 노릇이나 하고…….”
“…….”
“……나, 너 좋다, 새꺄. 말했지? 4년 동안이나 지켜봐왔다고.”
“…….”
“……그래서 안 된다는 거다. 자포자기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서 내게 다가오길 바라니까.”
“…….”
“절망해서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놈한테 이용당하는 거 싫어. 기다린 4년이 아까워서라도 난 그렇게 못 한다.”
“…….”
“맞어. 내가 무슨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날 잡아 잡수 하는 놈을 물리치겠어? 날 잡아 잡수 하지 않으니까 그러지.”
“……하…… 자고 했잖아요…….”
“……울지 마.”
“……심…… 심봤다고 해놓고…… 하자고 오라구선…….”
“울지 말랬지. 조낸 꼴사나우니까.”
“아, 씨, 내가 언제 운다고 자꾸 그래요, 선배는……! 아무리 개구리눈이 됐지만 너무하신 거 아녜요? 선배 눈은 해태십니까?”
“…….”
“……하여간 성깔만 더러우신 줄 알았는데 거짓말까지 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
“한 달만 뒹굴면 아프지 않게 된다고 했으면서…….”
“…….”
“……모르는 게이랑…… 매너 좋고, 뒤끝도 없고, 상냥하고, 상처도 안 주는 게이랑 뒹굴면 그 애 생각 안 하게 될 거라고 했으면서…….”
“…….”
“……아프지 않고…… 그 애 생각도 안 나고…… 사랑하지도 않고…… 소돔의 씨도…… 안 뿌려도 된다고…….”
“니가 그걸 못 하잖아, 새꺄.”
“……?!”
“오늘도 봐. 내가 모르는 게이냐? 모르는 게이라서 나랑 뒹굴러 온 거야? 아니지?”
“…….”
“……아니잖아. 내가 안 내키면 그만둬도 된다고 하니깐 안심해서 쭐레쭐레 쫓아온 거잖아. 실컷 울러 와놓곤 어디서 큰소리야, 큰소리가. 귀신을 속이지 나는 못 속인다고 했지, 이젠?”
“…….”
“거짓말 아니야. 그렇게 괴로우면 눈 딱 감아. 눈 딱 감고 이태원으로 가. 종로통으로 빠지든지. 그러면 돼.”
“…….”
“널 좋아하지만 말릴 생각은 없어. 아니, 좋아하니까 더더욱 말리고 싶지 않아. 적어도 그러면 넌 더 이상 부서지진 않을 테니까.”
“…….”
“……적당한 사랑이 좋은 거야. 일생을 걸고 싶은 사랑이라면 너무 거대해도 안 돼. 너무 거대하면 거기에 눌려 짜부라져 죽을 수가 있거든. 그러니 일생 사랑하려면 사랑이 적당한 크기여야만 해.”
“…….”
“……그런데 암만 봐도 지금 네 건 너무 커 보인단 말이지. 조만간 가까운 시일 내에 찢어져도 완벽하게 찢어발겨질걸? 다신 이어 붙일 수도 없을 만큼 너덜너덜…….”
“…….”
“만약 그러게 되면 내게로 와. 내가 너덜너덜해진 널 조금씩 기워줄 테니까.”
“…….”
“……기워서 살게 해줄 테니까…….”
“…….”
“……사랑을 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가르쳐줄 테니까…….”
“…….”
“……평생을 가는 사랑도 있다는 걸 알려줄 테니까…….”
“……서…… 선배 말은 이해하기 힘들어요.”
“…….”
“……오히려 클수록 평생을 유지하는 게 더 쉽지 않은가요?”
“……그 새낀 좋은 남자가 아니야.”
“…….”
“눈을 내리까는 버릇이 있더군. 감정을 숨기는 데 도가 튼 새끼지. 완벽하게 바리케이드를 치고 세상을 훔쳐보고 있어. 잔뜩 웅크리고 있다간 언제든 튀어 올라 목을 물어뜯을 채비를 하는 놈이지. 헤테로 마초 중에서도 가장 악질 종자야. 아무도 안 믿어.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 아니, 사실은 전부 다 증오하지. 자기 소굴 안에 들어온 것 이외의 것은. 그 새끼한텐 세상의 모든 것이 적이야.”
“…….”
“널 지켜볼 때도 눈을 아래로 깔고 한순간도 안 놓쳐. 마치 먹잇감을 노릴 때처럼. 발톱을 세우고 세상을 훔쳐볼 때처럼. 자기 사람까지 그렇게 경계하는 새낀 나도 보다보다 첨 봤다, 씨팔 놈.”
“…….”
“그렇게 원한과 증오가 깊은 놈인데 네 사랑이 들어갈 수나 있겠어? 그 지독한 벽을 꿰뚫고?”
“…….”
“그냥 어디서나 흔히 굴러다니는 적당히 ‘나쁜 남자’ 새끼가 아니야. 대물이야.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놈이 아니지.”
“…….”
“상처 입다 못해 갈가리 찢어발겨질 거야. 아주 너덜너덜.”
“…….”
“상처를 허용하는 게 사랑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 거냐? 하, 그거야, 낭만이지. 적당히 ‘나쁜 남자’한테나 통용되는.”
“…….”
“그 대물의 크기만큼 너만 뭉게뭉게 사랑을 키우겠지. 어떻게든, 무리해서라도 대물을 다 가릴 만큼 자라지 않으면 안 되니까. ‘나쁜 남자’에 홀리는 여자들이 흔히 잘 빠지는 함정이지. 아니, 자기최면. 이렇게 키웠으니까, 이만큼 크게 혼자서라도 사랑을 키웠으니까 ‘나쁜 남자’ 새끼를 다 덮을 수 있을 거라고. 그 악종인 냉기를 다 가릴 수 있을 거라고.”
“…….”
“물론 천만의 말씀 되시겠다지. 둘이 같이 해도 모자랄 판국에 혼자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라. 네가 커지는 만큼 그 새끼도 딴 궁리로 더 자란다는 걸 알아야지. 네가 하늘을 다 가릴 만큼 커졌다고 생각될 때 한번 그 새끼를 봐봐. 그때 가서 그 새끼를 함 보라구. 네 것만 키우느라 혼비백산하는 중에 그 새낀 더 거대해져 있을 테니까. 네가 덮어버려야 할 냉기를 그 새끼도 부지런히 더 키우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 테지. 그래도 그간의 노력과 정성이 아까우니까 부족한 그것으로라도 열심히 덮어보려고 하겠지. 물론 절대 부족의 크기이니 다 덮이기는커녕 좍좍 찢어발겨질밖에.”
“…….”
“……그렇게 깨닫게 됐을 때 내게로 와. 그렇게 좍좍 찢어져버렸을 때. 내가 열심히 기워줄 테니까.”
“…….”
“……울지 마. 너도 어렴풋이는 깨닫고 있었을 텐데 뭘.”
“…….”
“……알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해. 여기서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
“…….”
“뻔히 보이는 길인데 끝까지 가보겠다는 거야?”
“……그만…… 하고 싶어요…….”
“…….”
“……저도……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그런데 안 돼요…… 그럴 수가 없어요…… 없나 봐요, 아직…….”
“…….”
“……그래서 선배랑 하려고 온 건데…… 그만두려고…… 여기서 그만 그치려고…… 그런데 아니라면서요…… 저랑 하는 거 싫다면서요…… 아니, 제가 싫다고 한다면서요…… 제가 아직 그만두려고 하지 않는다면서요…… 이렇게 선배한테도 발정하고 있는데 그래도 아니라면서요…… 이해할 수 없어…… 이게 발정이 아니면 도대체 어떤 게 발정이란 거예요…….”
“……우는 거지.”
“……?”
“……온몸으로 울어 젖히는 거.”
“…….”
“항상 울고 있잖아, 너. 귀신을 속여라, 귀신을.”
“…….”
“…….”
“…….”
“…….”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뺨 언저리로 뜨겁다 못해 아픔이 느껴지는 액체가 그제야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독사가 의기양양, 고요한 얼굴로 인환의 패배를 들여다보고 있다.
내가 운다고? 울었다고? 천만에. 자꾸 운다, 운다 하니깐 그러는 거잖아. 애꿎은 사람 앞에 놓고 너 운다, 너 울고 있다, 어럽쇼? 울고 있네……? 하고 열심히 세뇌를 하니깐 그러는 거잖아. 제 고집 세우기도 힘든 사람 앞에 앉혀놓고 어디 세뇌해봐, 안 넘어가나. 자꾸 운다, 운다 하니깐 결국 눈물이 나잖냐구. 젠장, 그런 거 아니냐구…….
축축하고 따스하고 하얗고 늘씬한 근육질의 몸이 인환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낯선 몸이었다. 참으로 낯선 몸이었다.
얇고 날카롭고 이지적인 선을 그리는 분홍빛 입술이 몇 번이나 인환의 입술 근처를 핥으며 쪼는 듯한 키스를 주고 있었다. 낯선 키스였다. 참으로 낯선 키스였다.
자신의 사지를 친친 휘감은 채, 위에서 자신을 찍어 누르고 있는 180센티미터의 장신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얽혀든 체온도, 담배 냄새와 섞인 코롱 냄새도, 겨드랑이 호르몬 냄새도, 끈적하게 들러붙는 매끄러운 피부도, 연인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크고 작은 근육들의 조합도, 사자 갈기처럼 제멋대로 자라 있는 숱 많은 머리카락도, 날카롭고 쿨한 인상의 핸섬한 얼굴도…… 모두 너무나 낯설어 몸서리가 쳐졌다.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지치지도 않고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는 애무의 손길도, 사타구니 사이에 디밀어진 채 은근히 비벼지고 있는 발기한 자지도, 굵은 음낭도, 까슬한 체모도, 다리털도, 모두모두 도무지 낯설기 짝이 없어 짜증이 났다.
어느새 또 한계까지 발기해서 독사의 아랫배를 탕탕 찌르고 있던 자지가 김빠진 맥주처럼 가늘게 골골거리며 축 늘어지고 있었다. 독사의 키만큼 길고, 독사의 손목만큼 두껍고, 독사의 어깨 근육만큼 단단한, 참으로 훌륭한 물건인 독사의 자지를 품지 못해 뱀처럼 벌렁벌렁 꿈틀대며 안달하던 똥구멍이 늙은 창녀의 그것처럼 힘을 잃은 채 활짝 풀어지고 있었다.
오들오들 소름이 이는 건 느닷없이 닥친 위화감 때문이었다. 아니, 울컥울컥 토기를 불러오는 혐오감 때문이었다. 낯선 몸의, 낯선 키스의, 낯선 자지의, 그 모든 낯선 것들의 접촉이 싫어 못 견디겠어서, 순식간에 닥친 냉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벌벌 떨고 있는 때문이었다.
독사가 옳았다.
왜 이렇게 눈물이 멈추지 않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아직 아닌가 보았다.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다. 아직은 그만두자고 도저히 백기를 들지는 못하겠다. 연인을 놔주겠다는 그 한마디가 아직도 그렇게 안 떨어진다. 이제 사랑을 멈추겠다고, 그만두겠다고, 널 죽이겠다고, 세상에, 그 말 한 마디 하기가 뭐 그리 어렵다고 이 난장이란 말인가.
그래. 독사가 옳았다. 아무렴. 하늘같은 선배였다. 미워 죽겠는데도 늘 옳은 말만 하는 독사였다. 심장을 쿡쿡 쑤시는 독설만 내뱉어서 독사였다. 그런데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무시가 안 됐다. 늘 옳은 말만 하니까. 옳은 충고만 하니까.
그래. 그래. 독사가 다 옳았다. 그래. 니가 다 해먹어라. 나 울고 있다. 우는 게 맞다. 줄줄줄줄. 눈물이 홍수처럼 흘러내린다. 눈물샘, 그래, 잘도 고장이 났다.
그래. 그래. 그래…….
독사 니가 다 옳다. 다 옳은데…… 이제 키스는 제발 하지 말아줘요…….
거기 만지지 마요…….
영영 대머리 될까 봐 얼마나 신경 쓰이는 줄 알아요, 그 땜통…….
거기도 만지지 마……
젠장, 손가락 빼…….
빼라니까…….
하읏…….
찌르지 마요, 제발…….
제발…….
싫어서 견딜 수가 없어…… 선배…… 선배, 제발요…….
제발 날 만지지 마요…….
머리카락 속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독사의 손이 하얗게 구멍이 뚫린 땜통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어온 독사의 손가락이 전립선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꾹꾹 찌르고, 부드럽게 문지르고, 끈적하게 비비고 돌리고, 슬쩍슬쩍 꼬집고 있었다.
낯선 손길이었다.
가슴이 시리도록 낯설기만 한 손길이었다.
무방비하게 스스로의 속살을 활짝 드러낸 채, 땜통도 전립선도 그저 마냥 울기만 했다.
……싫어서…… 싫어서…… 연인이 아니어서…… 연인의 손길이 아니어서…… 연인의 사랑이 아니어서…….
아아, 그래…….
그래서 마냥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