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1991년 7월. 문위(文偉) (57/129)

38. 1991년 7월. 문위(文偉)

아직 이른 저녁이라서일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유난히 들어와 박히는 까닭은. 

하긴 8시가 넘은 시각이니 아주 이른 저녁은 아닌 셈이다. 다만 낮이 워낙 길어진 탓에 아직까지 주변으로 빛의 잔상이 퍼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물을 식별하기엔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한 빛의 양이었다.

남의 이목을 끄는 용모를 갖고 태어났다는 건 생존에 있어 여러모로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의 이 눈에 띄는 용모 또한, 자신이 가진 무기들 중 제법 몇 손가락 안에 들 법한 가장 강력한 무기들 중 하나라고 내심 흡족해하고는 있는 편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처럼 조용히 쉬고 싶을 때는, 더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평화의 장소에서 고요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는, 이 두드러진 용모야말로 제일의 방해꾼이 되곤 한다. 좀 더 평범한 용모의 청년이었다면, 자신이 주택가 골목 한구석에 주저앉아 두어 시간 동안 한곳만 바라본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뭇 사람들의 노골적으로 이상하다는 듯한 시선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누군가를 기다리려니 하고, 다들 한 번 잠시 힐끗 시선을 주곤 곧 제 갈 길로 바삐 사라져갈 것이다.

물론 사람들의 노골적인 호기심에 찬 시선에 대해서 그닥 신경을 쓰지 않게 된 것도 꽤 오래전의 일이다. 직접 와서 부딪치지 않는 한, 아니, 실제로 무수히 많은 대시를 받곤 하지만 그조차도 무시하기란 자신으로선 참으로 쉬운 일이다. 연예인 기획사들의 컨택을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요, 담 큰 여자들의 노골적인 프러포즈를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같은 수컷으로서 맞장을 떠보려는 양아치들의 어택을 받은 적도 부지기수다. 요즘엔 심심찮게 동성애자들의 유혹마저 걸려올 정도이니, 그런 일이라면 이제 이골이 났다고 해도 좋다.

그러니 지금도 그저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다. 저들은 그나마 가까이 다가와 직접적인 대시를 걸 정도의 용기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소시민들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평소대로 무시가 되지 않는다. 저절로 차단막이 쳐지곤 하는 신경조차 팽팽히 살아, 잔뜩 털을 곤두세우고 있다. 어디 다가오기만 해봐. 오기만 해봐라. 재수 옴 붙었네 하고 혼비백산 줄행랑을 치게 만들어줄 테니. 그렇게 잔뜩 이를 사리물고 있었다.

장소의 문제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하루 종일 길거리에서 시간만 낭비해버린 도로(徒勞) 때문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연희동 ‘우리 집’ 앞이다. 안양까지 내려갔다가 결국 윤열이 형 얼굴도 못 보고 그대로 헛걸음을 했었다(형이 가벼운 소요 사태의 주모자로 찍혀 면회 금지 처분을 받는 바람에, 갈급한 위안을 찾아 떠난 작은 여행길은 더한 상실감을 품고 쫓겨올라온 시린 추방길이 되었다). 둘 다 삐딱한 앙심을 다지기엔 좋은 핑계거리다.

짙은 암청색 페인트가 칠해진 육중한 철문이 보인다. 철문을 따라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잿빛 화강암 담장도 보인다. 담장 밖으로 뻗어 나와 있는 건 조경이 잘된 유실수들과 상록수들의 나뭇가지. 높은 담장 너머, 보일 듯 말 듯 삐죽삐죽 솟아 있는 회색의 박공지붕이 안타깝다. 조금 더 몸을 위로 기울이면 제대로 보일까 싶지만, 그게 닭짓에 불과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가정부인지 안주인인지 알 수 없는 뚱뚱한 몸집의 중년 여자가 두어 번 대문을 들락거렸다. 좀 전엔, 손자인지 아들인지 알 수 없는 국민학생 하나가 학원을 갔다 오는지 제법 묵직해 보이는 책 배낭을 지고 안으로 들어갔었다. 아이가 들어갈 때 삐죽 열렸던 대문은 찰나의 틈새만을 슬쩍 내비친 채 다시금 굳게 닫히고 말았다. 두어 시간 정도 더 기다리면 가장이 올 시간이고, 그 틈에 좀 더 안을 훔쳐볼 수도 있겠지만, 이쯤에서 포기하자고 결심을 굳힌다.

/그/가 보고 싶다. 가슴속이 텅 빈 것처럼 시리고 또 시려서 더 보고 싶다. 당장이라도 보고 싶기 때문에 더 이상 여기서 미적거릴 수가 없다.

/그/가 보기 싫어 떠난 여정이었는데, /그/가 끔찍해서 윤열이 형에게 도피를 한 건데, 연희동 ‘우리 집’으로 숨어든 건데, 그새 얼마나 시간이 지났다고 또 보고 싶다. 미쳐버릴 것처럼 보고 싶다.

그가 보기 싫어? ……응.

그가 끔찍해? ……응, 그래.

거짓말 하지 마, 문위. 보기 싫은 건 너잖아. 끔찍한 건 너잖아. 끔찍하게 추악한 건 자신이면서 왜 그 사람을 핑계 대는가. 치졸한 질투심을 못 참고 온갖 행패는 다 부린 주제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하긴 행패가 아닌가? 물론, 그것도 아니지. 행패를 핑계 삼아 짐승의 더러운 음란을 잔뜩 채운 주제에. 그 사람에게 하고 싶었던 이런 짓, 저런 짓, 이런저런 더러운 짓거리들 다 했잖아. 그 시커먼 머릿속에 벌레처럼 기어 다니고 있던 포르노들, 그 사람에게 하고 싶어 평소 몸서리를 쳤던 시뻘겋고 비릿하고 끈적끈적한 쾌락, 그 사람 몸에 잔뜩 처바르곤 신이 나서 싸질렀잖아, 흠뻑. 아주 흠뻑. 흠뻑. 그 사람 몸이 네 정액으로 가득 흘러넘칠 때까지. 익사해버릴 때까지.

반론할 기력도 찾지 못한 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가 보고 싶어……

텅 빈 공허감에 수수깡처럼 메마른 넋이 이리저리 휘둘린다.

……그가 보고 싶어…… 당장 보고 싶어서 환장할 것 같아…….

골목 안을 스쳐 지나가는 뭇 시선들이 따갑다.

짐승 새끼. 네가 사람이냐. 사람으로 그게 할 짓이냐. ……그렇게 욕설을 퍼붓는 것 같다. 한결같이 자신에게. 이를 사리물며 마주 노려보지만, 어쩐지 다가서지 않고 다들 피해 갈 뿐이다. 면전에 대놓고 짐승 같은 개새끼 하고 욕설을 퍼붓지 않는다. 맞장을 뜨려고 하지 않는다. 공격하지 않으니 반격할 명분도 없다. 명분이 없으면 정당방위가 아니게 된다. 그저 폭력이 된다.

질투할 권리나 있나?

버릴 거면서. 아니, 버렸으면서. 웬 질투냐, 질투가. 추악한 짐승 새끼 주제에.

―……실은 쟤 궁둥이에 정조대라도 채워두고 싶은 거지……?

닥쳐.

―……솔직히 실토해봐. 그렇게 싫은 티 팍팍 내면서도 불안해서 혼자는 도저히 못 돌아가겠지? 혹시라도 때가 탈까 봐…….

닥쳐.

―……하긴 넌 천양 초보 수 마초지. 지 계집 때타는 건 죽어도 못 견디는 소인배…….

닥치랬지.

―……솔직히 불어. 쟤 감시하려고 면허 딴 거지? 면허 정지라 발이 묶인 이참에, 기사 흉내 내며 쟤 네 주머니에 꿰차곤 나 같은 놈 견제하려고……?

씨팔. 닥쳐, 개새꺄.

―……내가 바라보는 것조차도 짜증 나지? 바라만 봐도 때타는 거 같지……?

닥쳐!!! 닥쳐!!! 닥쳐어어어어!!!!!!!!

“꺄악!!!”

째지는 듯한 여자의 비명 소리에 홀연 정신을 차렸다. 문득 앞을 보니 눈을 휘둥그렇게 뜬 여자 하나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왼쪽 어깨 쪽으로 우릿한 감각이 지나가는 걸 보니 여자랑 부딪쳤던 것 같았다.

멍하니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겁에 질린 얼굴. 자신이 지금 얼마나 사나운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감탄이 어린 표정. 두드러진 용모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화를 내는 것도 잊은 채, 여자는 자신의 얼굴을 그저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다.

죄송합니다.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고 사과를 해야 하지만, 안 한다. 하지 않아도 하등 해가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데 왜 굳이 내가 니들에게 사과를 해야 하나. 도대체 왜 내가. 사과는커녕 안 그래도 박살을 내고 싶어서 손가락에 경련이 일다시피 하는데, 지금.

“……그…… 저…… 저기…… 죄송해요…… 제가 앞을 잘 안 보고 다녀서요…….”

갈아 마실 것 같은 속내가 표정에 드러났을 법한데도 여자가 웃는다. 샐쭉 하고 교태를 부린다. 가슴 아래, 덜컹덜컹 뛰고 있는 심장 소리를 다 듣고 있는데. 몸은 이미 공포에 질려 있는데, 몸은 이미 자신 안의 살기를 느끼고 있는데, 여자가 웃는다. 달뜬 듯한 숨을 토하며 은근한 의도를 전달한다. 아아, 그렇다. 그렇지. 잘난 용모가 지닌 위력이라는 것은. 살기를 숨기기에 이토록 좋은 블라인드가 없다. 이토록 유용한 가면이 따로 없다. 본능은 지혜로우나 지식은 어리석다. 잘난 용모란, 특히 자신처럼 아주 제법 많이 잘난 용모란 위험할 까닭이 없다고 여자의 지식이 훈수를 둔다. 심장은 맹렬하게 위기 상황을 전달하고 있건만 두뇌는 유유자적 신이 났다. 어머나, 너무 잘생겼어. 모델 같아. 아니, 배우야. 배우가 틀림없어. 와우, 내일 학교 가서 애들한테 자랑해야지. 어리석고 철없는 두뇌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윙윙윙윙, 잘도 들려온다. 등신 같은 기집애. 등신 같은 새끼. 등신 같은 인간. 등신 같은 세상. 가만두나 봐라. 내가 니들을 가만두나 봐…….

여자를 팽개친 채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그가 보고 싶다. 그를 봐야 한다. 당장 그를 봐야만 한다. 당장. 당장. 당장.

……질투할 권리나 있나?

……버릴 거면서. 아니, 버렸으면서……. 웬 질투냐, 질투가. 추악한 짐승 새끼 주제에…….

승용차인지 택시인지, 아무 차에나 대고 무턱대고 손을 휘두른다. 그를 봐야만 한다,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다. 너무나 보고 싶다. 그 얼굴. 예쁜 그 얼굴.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또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는, 짐승을 깨어나게 하는, 내 속의 짐승, 짐승, 더러운 짐승이 깨어나서 그를…… 그를…… 하느님, 보고 싶어…… 보고 싶어…… 그가 보고 싶어, 지금 당장…… 어떻게 하루 종일 그를 내버려둘 수가 있었나…… 어떻게 하루 종일 그를 안지 않고 참을 수가 있었지……? 어떻게 하루 종일 키스도 않고…… 도대체 어떻게 참았냐…… 어떻게 참았던 거냐, 문위, 너…….

마음이 급하다. 가슴이 몹시도 두근거린다. 관자놀이 근처로 급하게 맥박 치는 혈류 탓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10분조차 너무 안타깝다. 다행히 금세 택시가 하나 잡힌다. 망설이지 않고 올라탄다.

“성북동으로 빨리 가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예에, 손님.”

……질투할 권리나 있나?

……버릴 거면서. 아니, 버렸으면서……. 웬 질투냐, 질투가. 추악한 짐승 새끼 주제에…….

……어떻게 버릴 거야?

이렇게 하루도 못 참을 거면서 어떻게 그를 버려? 응? 어떻게 버린다는 거지……?

……질투할 권리나 있나?

……버릴 거면서. 아니, 버렸으면서…….

……질리지 않아서 그래.

……니가 질투할 권리가 있어? 더러운 짐승 새끼. 속에 더러운 정액만 꽉 들어찬 놈.

……아직 질리지가 않아서 그래. 그래서 그런 거야. 질리면 괜찮아. 질리면 참을 수 있어. 더럽게, 더럽게 안고, 내 정액으로 흠뻑 더럽혀서, 내 눈물 콧물로 홍수를 이루고, 덕지덕지 내 땀으로 범벅을 만들고, 사방에 침을 발라 온통 다 빨아먹어서, 걸레를 만들어서, 포르노를 만들어서, 창녀를 만들어서, 화냥년을 만들어서, 그래, 그렇게 해서 버리면 돼. 그럼 보고 싶지가 않아져. 이렇게 미치지도 않아. 단 하루, 단 한나절 못 봤다고 환장하지 않아. 환장하지 않게 돼.

……그래서 니가 질투할 권리가 있어? 더러운 짐승 새끼. 속에 더러운 정액만 꽉 들어찬 야수 놈.

……권리 있어. 아직 있어. 아직 질리지 않았어. 질릴 때까지는 내 거야. 내 몸뚱이야. 손대지 마. 손대기만 해. 당장 부러뜨려버릴 테니까, 개새꺄.

……뻔뻔스럽긴, 천하의 개 호로 짐승 새끼.

……안 질렸어. 아직 안 질렸으니까, 건드리지 마. 건드렸다간 박살을 내줄 테니까. 기다려. 기다려봐. 내가 어떻게 박살을 내주는지.

……하, 개포르노 남창 새끼 주제에 지 계집 때타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다?

……궁둥이에 정조대를 채우고 싶냐고? 그래, 채울 거야. 꽁꽁 채워서 아무도 박지 못하게 할 거야. 꽁꽁 숨겨서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해야지. 왜냐구? 내 거니까. 아직은 내 거니까. 질리지 않았어. 나대지 마. 아직 나대지 마. 아직 넌 내 창녀니까. 내 화냥년이니까. 내 계집이니까. 내 신부니까. 내 아내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씨팔. 젠장. 젠장. 젠장. 두고 봐. 두고 봐, 개새꺄…….

“……손님……?”

“…….”

“……손님? 도착했는데요? 성북동입니다.”

거듭 되풀이된 부름에 설핏 현실을 자각한다. 한적하고 호사스러운 빌라촌이 차창 밖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낯익은 거리다. 찰나를 이동한 것 같은데 어느새 그의 동네다.

얼떨떨한 얼굴로 기사를 본다. 백미러에 비친 기사의 얼굴도 좀 전에 부딪쳤던 여자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겁에 질린 눈. 잔뜩 오그라든 심장. 또한, 여자와 같은 어리석은 생각으로 본능을 무시한다. 본능의 경고를. 거참, 뉘 집 자식인지 인물 한번 잘났네. 큰 일 할 관상이로구만. 핸들만 20년째 잡아서 내가 또 사람 하난 볼 줄 알지. 참, 너 같은 자식새끼 둔 부모들은 얼마나 자랑스럽고 든든하겄냐. 참, 부럽구먼. 부러워. 어리석고 속없는 두뇌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윙윙윙윙, 잘도 들려온다. 등신 같은 아저씨. 등신 같은 아줌마. 등신 같은 인간. 등신 같은 세상. 가만두나 봐라. 내가 니들을 가만두나 봐…….

“여기 거스름돈입니다, 손님.”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아저씨.”

차비를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들고 있던 크로스백을 고쳐 메며 주변을 살핀다. 익숙한 24시간 편의점 간판이 보인다. 생각에 빠져 있던 탓에 바로 빌라 앞에다 내려달라는 당부를 잊어버린 탓이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하며 만족한다. 5분 남짓만 걸으면 그의 아틀리에다. 그를 보고 싶다는 숨넘어가는 듯하던 갈망은, 마치 순간 이동을 해 온 것 같은 비현실감에, 잠시 그 갈급함을 가라앉히고 있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머리를 매만진다.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몸에 달라붙어 있던 티셔츠와 낡은 청바지도 떼어내고, 잔뜩 굳어 있던 목줄기도 주물러본다. 오랜 도로(徒勞)에 몸은 온통 땀과 먼지투성이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즉시 샤워를 해야 할 형편이지만, 그전에 그를 먼저 한 번이라도 품겠다고 작정을 굳힌다. 작정과 동시에 아랫도리가 뿌듯하게 발기를 한다. 아직 몇 분 더 걸어야 할 형편이라 조금 곤란한 생각이 들었다. 청바지 안에서 불룩 솟아버려 걷기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하지만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곧 그를 볼 수가 있다. 그를 안을 수가 있다. 키스를 할 수가 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래서 질려 떨어질 때까지. 질려버릴 때까지, 영원히 언제까지나…….

들릴 듯 말 듯, 도란거리는 말소리에서 익숙한 기척을 감지해내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아니, 그건 일도 뭣도 아니었다. 본능이었다. 수컷에겐 본능적으로 자신의 암컷을 알아보는 더듬이가 몸 어느 한구석에 반드시 달려 있다. 소리를 내지 않아도, 암내를 풍기지 않아도,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그렇다. 노력도, 무엇도 할 필요 없이 그저 그냥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저기 내 암컷이 있다고. 내 신부가 있다고. 내 아내가 있다고.

울컥울컥 요동치는 심장과 좀 더 바짝 솟아오른 음경을 가까스로 다독이며 좀 더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내 것이 보였다. 아내였다.

아내는 빌라 바로 앞 공터에 주차된 차 앞에 서 있었다.

낯선 차였다. 정확한 차종은 알 수 없으나 꽤 고급인 차체로 보아 고가의 외제 차가 분명했다. 뭔가…… 상당히 안 좋은 예감이 뇌리를 스치는 찰나…….

흠칫.

온몸이 순식간에 바짝 긴장을 한 것은 차의 색깔이었다. 새까만, 칠흑처럼 검은 색.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어느 개새끼를 연상시키는 색. 그제 아침 불태워버린 그 새끼의 모자도 검정색이었다.

……두근…….

심장이 꽉 조여지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며 재빨리 가로등 뒤 그늘로 몸을 숨긴다. 왜 자취를 숨겨야 하는지 스스로가 답을 내리기도 전에, 현명한 본능이 충고를 했다.

아내를 마주 보고 선 장신의 사내새끼가 보였다. 약간 마른 듯한 근육질의 몸을 덮고 있는 것은 까만색 일색인 세미 정장 슈트. 셔츠도 재질만 달리 한 검정색이었고, 넥타이도 검정색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아내의 가냘픈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맞은편 새끼와 몹시도 대조적인 옅은 분홍색의 여름용 슈트였다. 예쁘고 귀여운 아내의 얼굴과 몸뚱이에 몹시도 잘 어울리는 옷가지. 안의 셔츠도 슈트보다는 좀 더 옅은 흐린 분홍색의 실크 셔츠. 타이는 매지 않았다. 게다가 단추를 거의 다 열어놓은 모양인지, 마르고 가냘픈 가슴팍이며 애틋한 쇄골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마주 선 개새끼가 안 보는 척하면서 안을 훔쳐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벌어진 가슴엔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저 흐릿하게 웃으며 개새끼가 한 말에 고개를 흔들고 있을 뿐이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스무 시간도 채 안 되었을 것이다. 아내를 마지막으로 일별한 지. 아내는 마지막에 봤던 그대로 창백한 낯빛에 지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늘 새벽까지 내내 괴롭힌 탓에 개구리눈으로 퉁퉁 부어 있던 눈도 그대로였다. 아니, 그대로라고 보긴 힘들었다. 좀 더 부어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물론 십중팔구는 자신 때문이겠지), 새삼 또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직까지 저렇게 부어 있을 턱이 없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개새끼의 손이 아내의 머리 위로 올라간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소탈하게 머리카락 속을 헤집는 듯하더니 이내 희끗희끗 귀여운 속살을 보이고 있는 땜통들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마치 아내의 밀부를 애무하듯이, 부드럽게 문지르고, 찌르고, 슬쩍슬쩍 비벼 올린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아내가 슬픈 듯이 개새끼를 응시한다.

개새끼가 웃는다. 눈꼬리를 아래로 한껏 아래로 휘며 웃는다. 핥아 먹을 것처럼 뚫어져라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붉게 흘러넘칠 듯한, 발기한 수컷의 눈빛이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아내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는 척하면서 개새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다.

허공에 손을 쳐든 어정쩡한 자세로 개새끼가 허탈하게 웃는다. 갈 곳을 잃은 손가락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번엔 아내의 코끝으로 향했다. 엄지와 검지로 부드럽게 움켜쥐는 듯하다간 이내 입술로 내려온다. 도톰하게 부어 있는 입술이다. 음심을 숨길 생각도 않는 수컷의 손가락이 땜통을 어루만질 때보다도 더 애틋한 움직임으로 입술 언저리를 더듬는다. 격렬한 정사의 자취를 단숨에 알 수 있을 법한 붉은 낙인이 거기에 있었다.

오른쪽 아랫입술 끝에서 그 아래 피부에 걸쳐 이빨로 물어뜯긴 듯한 검붉은 핏자국. 낙인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턱 줄기 끝엔 확연하게 잇자국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제법 큰 상흔이 만들어져 있었다. 항생제를 발라 치료를 하지 않으면 덧날 것이 뻔할 만큼, 그것은 키스 마크라기보다 물어뜯긴 상처라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당연히 상당히 과격했음직한 정사 중 수컷에게 물어뜯긴 상처였다. 상처일 것이다. 과격한 정사라면 오늘 새벽까지 자신과 아내가 미친 듯이 벌인 짓거리가 아닌가. SM 포르노가 무색할 지경으로. 하지만 자신은 도무지 저걸 만든 기억이 없다. 아무렴. 저것은 절대 자신이 찍은 게 아니다. 아내의 몸뚱이 은밀한 부분들에 저것보다 더 심한 상흔을 무수히 만들어놓기는 했으나, 저것만은 아니다. 자신이 한 짓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형의 무덤에다 대고 맹세도 할 수 있다.

“……아, 씨. 하지 마세요…….”

아내가 다시 고개를 슬쩍 뒤로 빼며 개새끼의 손길을 피한다. 순간 껄껄 터지는 시니컬한 웃음소리.

“잊지 말라는 다짐이야. 아까 내가 한 말들.”

“…….”

“그리고 오늘 일도.”

“…….”

“4년이나 기다렸는데, 좀 더 기다린대도 별로 초조하지는 않으니까.”

“…….”

“……정 힘들면 전화해. 오늘처럼 위로해줄 테니까. 보모 노릇은 진짜 닭살인데, 넌 예외로 쳐주지, 당분간.”

“……그만 가세요, 선배. 많이 늦었네요…….”

“너 먼저 들어가.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멀어져가는 사람들 뒷모습 바라보는 게 얼마나 슬픈데요. 선배 먼저 들어가세요. 오늘 일 고마워서 특별히 배웅해드리는 거예요.”

“새끼, 하여간 닭살 돋게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니깐, 귀엽게…….”

“…….”

“……잘 있어. 전화 기다린다…….”

“…….”

음흉한 손길로 안내의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쓸어대던 개새끼가 겨우 몸을 돌린다. 앞 범퍼를 돌아 지 꼬락서니처럼 시꺼먼 차에 올라탄 개새끼가 열린 차창 안에서 손을 흔들었고, 아내가 말간 웃음으로 답례를 했다. 차창이 닫혔고, 차는 조금 미적대는가 싶더니 아내가 가볍게 손을 흔들자 이내 출발했다.

역시 최고급 차종답게, 사라지려고 마음먹으니 눈 깜짝할 만큼의 찰나였다. 멀리 편의점 불빛이 보이는 골목 끝으로 시커먼 덩치가 빨려 들어갔다. 그러곤 그만이었다. 사라져버렸다. 그래, 사라져버린 거다. 당장 박살을 내야 할지, 아니면 좀 더 참고 기회를 봐야 할지, 채 궁리를 다지기도 전에.

움켜쥔 손아귀에 통증이 느껴져 힘을 빼고 아래를 보니, 양손바닥 안이 땀으로 축축하다. 기왕의 땀범벅에다 새로 비 오듯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땀방울들로, 몸뚱이의 사정도 갈퀴처럼 움켜쥐어졌던 양손과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더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서늘했다. 마치 에어컨이 빵빵하게 켜진 실내로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천천히 그늘에서 걸어 나온다.

빌라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기척을 느꼈는지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아내가 돌아본다. 휘둥그렇게 커지는 사랑스러운 동공.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아예 납빛이 된다.

처음 손이 떨리는 것을 시작으로, 떨림은 이내 가느다란 양팔로, 어깨로, 허리로, 허벅지로, 종아리로, 차례차례 번져간다. 지진이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만 같다.

빌라 안에서 퍼져 나오는 불빛을 받아 아내의 얼굴이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저 얼굴도 좀 전에 부딪쳤던 여자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좀 전에 자신을 태워다준 택시 기사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겁에 질린 눈.

잔뜩 오그라든 심장.

또한, 여자와 같은 어리석은 생각으로 본능을 무시한다. 택시 기사와 같은 순진해 빠진 생각으로 무시한다. 본능의 경고를.

……너무나 아름다워. 너무나. 넌 어쩌면 그렇게도 예쁘니. 응? 어떻게 그렇게 예쁠 수가 있니, 위야. 아아, 너무 좋아. 좋아해. 네가 너무 좋아, 위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널 너무너무 사랑해…….

어리석고 철없고 속없는 두뇌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윙윙윙윙, 잘도 들려온다.

등신 같은 내 아내. 등신 같은 기집애. 등신 같은 아저씨. 등신 같은 아줌마. 등신 같은 개새끼. 등신 같은 인간. 인간들.

그래, 이 등신 같은 세상아.

내가 너 때문에 무엇을 희생해야 했는지 네가 아느냐.

그걸 아느냐.

네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그 어떤 소중한 것을 버렸는지 네가 아느냐.

그걸 아느냐.

이 등신 같은 세상아.

그래, 가만두나 봐라.

내가 니들을 가만두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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