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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the dead 2 - 20. 2003년 7월. 장인환(張仁歡) (58/129)

20. 2003년 7월. 장인환(張仁歡)

기상 악화로 서울발 제주행 10시 비행기는 두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만 했다.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가랑비만 촉촉하게 내리고 있어 대한민국 전역이 온통 폭풍우의 영향권에 들어가 있으리라고는 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불난 집에서 도망쳐 나오는 심정으로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지갑만 달랑 재킷 안주머니에 챙긴 채 그를 따라 나선 시각이 8시 45분. 홍 기사가 운전하는 황금색 볼보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9시 20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것에 안도하며 카운터로 다가갔지만 출발이 늦춰졌다는 직원의 사과가 탑승 수속 대신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 전에 출발 예정이었던 비행기도 전부 대기 상태라, 공항 대합실은 빼곡한 사람들로 장터처럼 붐비고 있었다.

“……어떡하지? 약속에 늦는 거 아니니?”

“점심 약속은 할 수 없지만 다시 형과 시간을 맞추면 됩니다.”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그의 대꾸는 평온했다.

“일단 카페테리아라도 들어가죠.”

북새통의 대합실 풍경을 대책이 안 선다는 얼굴로 굽어보던 그가 마침내 인환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그를 향해 힐끔힐끔 시선을 보내오는 무수한 여자들의 시선 덕분에 꽤 당혹감에 빠져 있던 인환이었다. 미녀와 야수가 쌍으로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각오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거의 흰색에 가까운 화사한 크림색의 리넨 슈트에 청회색과 살구색이 매치된 레일 스트라이프 무늬의 시원스러운 넥타이로 포인트를 준 그의 옷차림은, 수려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어울려 이루 말할 수 없이 섹시하고 강렬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어깨에 멘 은회색 크로스백도, 힘 있게 움켜쥐고 있는 새까만 노트북 케이스도 그와 결합하니 도회적인 세련미와 더불어 일하는 남자 특유의 파워풀한 에너지를 느끼게 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뽑아낸 빼어난 수컷의 전형이 아닐 수 없었으니 그 얼마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 것인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자석처럼 달라붙는 노골적인 시선들엔 한결같은 경탄과 욕망이 혼재돼 있었다.

물론 그에게로 향했던 시선은 어김없이 자신에게로도 옮겨져, 극심한 대조를 이루는 볼품없는 부록에 필요 이상으로 경악하기 마련이었다. 타인의 주목을 괴로워하는 신경질적인 기질의 절름발이 야수에겐 고문이 따로 없었다. 주목을 덜 받을 만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숨어들고픈 심정이었으니, 미녀의 제안이 왜 아니 반갑겠는가. 결국 호화찬란한 미녀가 이끄는 대로, 추레한 야수는 살랑살랑 꼬리까지 흔들어가며 카페테리아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제법 평수가 있는 카페테리아 역시 사람들로 만원이긴 했지만 다행히 빈 테이블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음료를 주문한 뒤, 그는 곧 제주도로 전화를 걸었다. 비행기 연착 소식을 전하는 한편, 약속 시간과 장소를 다시 정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풀려나 안도한 것도 잠시, 인환은 휴대전화 폴더 너머로 아련히 들려오는 억센 전라도 사투리에 새삼 가슴이 죄어드는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갑작스러운 외출에 아직 몸도 마음도 적응이 덜 된 상태였다(비행기까지 타야 하고 보니 외출이라기보단 여행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처음에 외출의 목적이 이윤열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에는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괴롭고도 두려운 만남이 되리라는 생각이 굳어지고 있었다.

물론 어젯밤 그가 해준 고백과 관련된 문제로 만남을 갖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자신은 그저 들러리일 뿐이라는 사실도. 그러나 뭐라 해도 저 이윤열이다. 그에겐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 자신에겐 속죄를 해야만 하는 또 한 사람의 피해자였다.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혁명 투사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볼품없이 초라한 노동자 몰골의 아름다운 영혼은 몹시 슬퍼 보였었다. 자신이 증오스러울 게 뻔한데도, 마르고 새까만 얼굴의 작은 영웅은 죗값을 치르고 편해지라며 자신을 위로해주었었다. 그러나 그 넉넉한 위로의 말은 그 어떤 저주의 주술보다도 더 인환을 괴롭게 했었다.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사내에게서 인환은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인간보다도 더 크고 성숙한 영혼을 목격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하룻밤 정도는 묵어야만 하겠군요. 필요한 물건은 제주에 도착해서 사도록 하지요.”

담담한 일침에 인환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마주 앉은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런가? 난 괜찮지만 넌 바쁘지 않아? 회사 일은…….”

“당장 급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회사 일보다 중요하니까요.”

“……응…… 그렇겠지…….”

“불안하십니까?”

“어……?!”

단도직입적인 물음과 함께 꿰뚫는 듯한 깊은 응시를 해와서 인환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 윤열이 형을 신경 쓰고 있지요?”

독심술이라도 쓰고 있나 보다, 이 무시무시한 자신의 심판관은.

“우리가 함께 지내는 걸 반대는 하고 있지만 휘처럼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닙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 네가 죄책감을 느껴야 할 상대는 나 하나로 충분해.”

정말 돗자리 하나 깔아줘야겠다.

뚫을 듯한 시선이 버거워서 쥐고 있던 아이스티 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죄책감이 하나로 뭉치든 둘로 분열을 하든 무슨 상관이랴. 무게도 동일하고, 고통도 한가지인 마당에.

“……데이트하는 건 처음이지……?”

나지막하게 톤을 줄인 바리톤이 천천히 던져졌다. 워낙 고요한 목소리인데다 웅성거리는 주변의 소음 덕분에 제대로 의미가 입력되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다시 만나고 나서 말이다, 장인환. ……카페에서 함께 차를 마시는 것…… 할 일 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 이렇게…… 마주 바라보는 것…… 처음이지……?”

담담한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할 수 없이 다시 고개를 들고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두근…….

낯선 표정이 보였다. 낯선 눈동자도 보였다. 격렬한 애정이 벼락 치듯, 순식간에 점령해버린 듯한 얼굴이요, 눈동자였다. 눈동자 저 안쪽에서 일렁이는 것은 북극점의 냉랭한 오로라 같기도 하고, 사막 한가운데서 타오르는 열기 같기도 했다.

“……모처럼 데이트 기분도 나는데…… 그래…… 어디…… 해볼까……?”

두근…… 두근…… 두근…….

입술 끝에 희미하게 걸린 그것은 잔혹하다고까지 느껴질 만큼 아름답고 매혹적인 미소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너무나 낯설고 두렵기까지 한 화사함이었다.

“……연.인.놀.이. 한번 해볼까……?”

“?!”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어때……? 어쩐지 더 자극적일 것 같지 않은가……?”

“……위…….”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붕대가 감긴 오른손이 뻗어와 아이스티 잔을 감싸 쥐고 있던 인환의 왼손에 닿았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터치…… 검지가 마치 그림을 그리듯 천천히 인환의 손등을 더듬고 있었다. 손목 부근에서 시작한 터치는 중지 끝까지 이어지고, 중지에서 약지, 그리고 새끼손가락 끝을 살짝 꼬집듯이 손톱 끝으로 누르다간 다시 손목 안쪽으로 이동해 깃털처럼 부드러운 애무를 거듭했다.

설핏 소름이 돋았다. 탱크처럼 요란스레 뛰고 있는 심장은 공포 때문인지 기대 때문인지 판단이 불가능했다.

“……그래, 그게 좋겠어…… 정말로……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걸……?”

주술을 걸 듯한 느린 움직임을 계속하며 그의 손가락은 마침내 인환의 손을 찻잔에서 떼어내 그의 입가로 이동시켰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슬로 비디오처럼 느린 동작으로 그의 도톰하고 섹시한 입술이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손가락 두 개가 그 안으로 천천히 삼켜지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축축하고 따스한 혀의 감촉이 느껴졌다. 흡입이 느껴졌다. 심연처럼 어두운 공간으로 전신이 쑥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급경사로 떨어지기 직전, 딱딱한 치아의 감촉이 설핏 제동을 걸었다. 살 안쪽 깊숙이 박혀 들어오는 그것은 단지 치아만이 아닌 섹스 그 자체였다!

“아……!”

숨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진공의 공간 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눈앞의 그만 보였다. 그가 연출하는 소리만 감각되었다. 번쩍 하는 소리 없는 뇌성이 새겨 넣은 듯한 격렬한 눈빛만이 생생했다.

너무나 빠른 세동을 거듭하는 심장이 마침내 터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났다.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저의를 알 수가 없어 머릿속이 교통사고를 일으키기라도 한 것마냥 삐걱거렸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겁내지 마.”

뜨겁게 일렁이던 시선이 문득 쏘는 듯이 자신을 얽어온다.

“……그저 조금 더 즐겨보자는 얘기야. 진짜 연인처럼 굴자는 얘기지, 당분간.”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눈빛도 홀연 신기루처럼 변해갔다.

“떨지 말라니까.”

“…….”

“떨지 마, 장인환.”

“…….”

아마도 하얗게 질린 자신의 얼굴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은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한 몸 때문이거나. 무시무시할 정도로 낯설기만 했던 매혹적인 연인의 가면이 떨어져 나가고 다시금 평소의 냉랭한 무표정으로 되돌아온 것은. 살피는 듯한 시선이 인환의 미세한 동요를 속속들이 핥고 있었다.

비로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페테리아 안이었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리고, 이쪽 테이블을 힐끔거리는 뭇 시선들도 눈에 들어왔다.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길고 긴 한숨이 되었다.

끅끅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그가 어깨를 떨며 웃고 있었다. 발작적일 웃음인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재밌어…… 이야, 정말 재밌군…… 이거 기대되는데……?”

마침내 얼굴을 든 그가 시선을 맞춰왔다. 비틀린 입술 끝엔 여전히 웃음이 매달려 있었지만 어쩐지 표정은 몹시 슬퍼 보였다. 어둡고도, 습하고도, 음울한……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 때문일 것이다.

그의 고개가 다시 아래를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잠시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애무를 펼치더니 곧 손바닥으로 열렬한 키스가 떨어졌다.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노골적인 입맞춤에, 가까이 있던 테이블의 시선들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지는 것이 보였다.

“……그…… 그만…… 하…… 하지 마, 위야…… 사람들이…….”

필사적인 인환의 애원은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손바닥에 퍼붓는 키스를 끝내는가 싶더니 이번엔 손가락 하나하나를 맛있게 빨아먹는 그였다. 새로운 장난에 푹 빠진 악동 같았다.

그의 행동이 노골적이었던 만큼, 구경꾼들의 시선도 더더욱 노골적이고 뻔뻔스러워져 갔다. 통로를 오가다 대놓고 이쪽을 기웃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인환의 얼굴은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만큼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마음은 좀 전의 반도 혼란스럽지 않았다. 겁이 나지도 않았다. 그랬다. 그저 새로운 징벌일 뿐이었다. 좀 더 효과적으로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연인놀이’라……. 뭐, 못 해줄 것도 없었다. 아니, 못 견뎌줄 까닭도 없었다. 견디다 뿐인가, 좋아라 장단까지 맞춰줄 수도 있었다.

연인놀이, 연인놀이, 연인놀이…….

아득히 잊히긴 했지만,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있어선 도가 튼 얼간이가 바로 자신이다. 그를 연인이라 착각하고 5년 동안 ‘연인놀이’를 했다. 더 이상 줄 수 있는 게 없을 것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연인놀이에 바쳤었다. 감히 그 누가 자신처럼 잘 놀 수 있었겠는가. 박사였다. 그 방면, 수십 수백 편의 논문도 쓸 수 있었다.

“……차 다 마셨나?”

비로소 인환의 손을 해방시킨 그가 물어왔다.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한 어조요, 눈빛이었다. 너무나 달콤해서 그대로 녹아버릴 것만 같은 부드러운 미소가 뚜렷하고 핸섬한 이목구비에 떠올라와 있었다. 가슴이 설레었다(설레도 되는 일이었다, 놀이니까). 홀딱 반한 나머지 꿈꾸는 것처럼 몽롱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바라봐도 되는 일이었다, 놀이니까).

“……그래……. 그럼 나가서 좀 걸을까?”

“……걸어……?”

“여기서 마냥 허송하기엔 시간이 아깝잖나. 국제선 청사였던 자리에 쇼핑몰이 생겼다는데 거기나 가볼까? 어때?”

“……가…… 가고 싶으면…… 나는 아무래도 좋지만…….”

“좋아.”

시원스러운 대꾸와 함께 그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카운터로 걸어가 계산을 했다. 끝이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로 웃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이지적이면서도 중후한 깊이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계산을 끝낸 그가 다시 테이블 앞으로 걸어왔다. 노트북 케이스와 크로스백을 챙겨 들더니 나머지 한 손으로 인환의 손을 감아 들였다. 얼굴이 또다시 새빨개졌지만, 어차피 카페테리아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의 주목을 받아버린 터라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수치감과 자격지심이 들 때마다 ‘연인놀이’라는 단어를 거듭 뇌리에 입력시키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카페테리아를 나와 지하보도를 타고 ‘스카이시티몰’로 이동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기는커녕 자랑스럽기까지 한 태도로 자신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는 그를 자꾸만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고, 자신의 느린 보폭에 맞춰 보폭을 줄여주었다. 연인처럼 미소를 주고 연인처럼 배려를 보내주었다.

여전히 가슴은 설레고, 내장 안쪽 저 깊은 언저리에선 미묘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마도, 10년 전에 그가 이렇게 자신을 대해주었다면, 자신은 기쁨으로 가슴이 터져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아, ‘연인놀이’이길 천만다행이었다.

1층의 옷가게들과 구두, 액세서리점들을 훑고, 2층의 전자상가에 들러 최신 기종의 컴퓨터들을 구경했다. 서점에 들러 각종 책들도 구경했다. 천상병 시인의 시집 한 권과 인쇄질이 좋은 피카소 화집 한 권을 샀다. 3층의 영화관에서 하는 영화들 중 한두 편은 시간만 허락한다면 보고 싶은 것들이기도 했다. 물론 영화를 볼 여건은 아니라, 그가 이끄는 대로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잡화점들을 순례했다. 계속 내리는 비에 대비해 우산을 하나 사고 있는데, 그가 아름다운 디자인의 패션 시계 하나를 사서 손목에 채워주었다. 어루만지듯 시계 밴드를 고정해주는 몸짓은 역시 다정한 연인 같았다. ‘연인놀이’라는 걸 깜빡 잊고 있다가 새삼 가슴이 철렁하기도 했다.

2층 로비의 벤치에 앉아 그가 사 온 타코야키를 소다수와 함께 먹고 있는데, 결혼식을 막 끝낸 듯한 신혼부부와 하객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게 보였다. 왁자한 웃음과 기쁨의 아우라가 가득한 일행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백년해로를 기원해주었다.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 어느새 11시 반이 되었다.

그가 공항 카운터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니, 예정대로 비행기는 12시경에 출발한다고 했다. 다행히 폭풍이 걷히고 있다고 했다. 지하 보도를 타고 다시 국내선 청사로 갔다. 우산과 책이 든 쇼핑백은 당연한 것처럼 그가 빼앗아 들었다. 자신은 맨손의 ‘왕자’가, 그는 어깨에 멘 크로스백과 노트북 가방과 쇼핑백들을 모두 짊어진 충직한 ‘기사’가 되었다.

탑승 수속을 하고 비행기에 올라 제법 지친 몸을 의자에 묻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지만 비는 그쳐 있었다. 비행기는 정확히 12시 6분에 이륙했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문득 소스라쳐서 눈을 뜨니 남자의 익숙한 체취가 폐부 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이 거의 파묻힐 기세로 기댄 채 인환은 침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등에 팔을 둘러 어깨를 껴안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춰왔다.

“곧 도착이야. 안 그래도 깨울 생각이었는데 잘됐군.”

잘생긴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며 빙그레 웃음이 만들어졌다. 낯설기만 한, 그러나 참을 수 없이 매혹적인 ‘연인의 웃음’이었다. 또다시 깜빡 잊고 있던 ‘연인놀이’가 생각나지 않았더라면 꿈인지 생시인지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을 것이다. 멀뚱멀뚱 바라보는 인환의 시선을 휘어잡은 채로 그가 손을 뻗어 입가를 닦아준다. 그의 손가락이 다녀가고 나서야 인환은 자신이 침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입술과 턱 언저리를 훑은 손가락은 그대로 그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붉은 혀가 뱀처럼 날름거리며 자신의 타액을 핥는 것을 인환은 여전히 몽롱한 수면기가 남아 있는 눈으로 멀뚱멀뚱 지켜보았다.

“……키스라도 하고 싶은데…… 빨리…….”

나지막한 어조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가슴 언저리부터 천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 홍조가 머리끝까지 점령한 것은 그로부터 몇 초쯤 후의 일이었다. 타액을 핥았던 손가락이 다시 다가와, 이마 위로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관자놀이 방향으로 쓸어주었다. 다정한 손가락은 이어 콧날을 따라 입술 선으로 미끄러지며 부드러운 터치를 거듭했다.

“……뻗쳤네…… 여기…… 머리카락…….”

정수리 근처 머리카락 한 줌을 어루만지며 혼잣말인지 밀어인지 알 수 없는 나지막한 속삭임을 토해낸다. 최면을 거는 것처럼 뜨거운 눈길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 구석구석을 핥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서 시선을 피하고도 싶지만, 눈빛에 담긴 어마어마한 순정과 숭배가 오도 가도 못 하게 만든다. 심장은, 설레는 정도가 아니라 따끔따끔 아픔이 느껴질 만큼 몹시 동요하고 있었다. ……놀이일 뿐인데…… 그저 놀이일 뿐인데…… ‘연인놀이’인 건데…… 아아, 어쩌면 가장 잔인한 징벌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기장의 착륙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사슬 같은 숭배의 시선이 마침내 풀어졌다. 얼굴을 애무하던 손길도, 어깨를 부드럽게 감고 있던 팔도 제 위치를 찾아갔다. 그러나 어느새 인환의 몸을 덮고 있던 담요를 접어 의자 밑에 치우고, 풀려 있던 서로의 안전벨트를 묶고, 보조 식탁을 제자리에 갖다 붙이는 그의 기사처럼 충직하고 상냥한 일련의 동작들은, 앞으로도 얼마 동안은 착실하게 되풀이될 ‘연인놀이’의 괴로움을 예고하고 있었다.

굉음을 울리며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 비행기가 마침내 땅으로 내려앉았다.

줄곧 내리게 될 비와 우중충한 잿빛 하늘만 예상하고 바라본 제주의 하늘은 놀랍게도 찬란한 햇빛으로 충만해 있었다. 폭풍주의보는 본토에만 해당하는 문제였던가 보았다.

10여 년 만에 다시 밟아보는 제주도의 이국적인 풍경은 한눈에 보기에도 별로 변한 게 없어 보였다. 미대생 시절엔 그 맑은 햇빛과 쪽빛 바다와 새까만 현무암, 그리고 죽죽 늘어선 야자수 그늘에 반해 이젤과 물감 통들을 들고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었다. 저 슬픈 전설의 이중섭이라도 된 양, 서귀포에서 두 달을 뭉개며 그림만 그려댄 적도 있었다.

“……일단 호텔부터 예약하고 움직이지. 배 안 고픈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공항 대합실로 이동하는 중에 그가 물어왔다. 점심때였지만 두어 시간 전에 먹은 타코야키가 아직 위 속에 남아 있었다. 멍하니 고개를 가로젓자, 그도 같은 생각인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따라 대합실 한쪽에 마련된 안내 데스크로 갔다. 그가 몇 군데의 호텔 전화번호를 물었고, 질문을 받은 데스크의 젊은 여자는 활짝 미소를 터뜨리며 몇 개의 호텔 팸플릿을 건네주었다. 7월 초순이라 아직 본격적인 휴가철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관광지답게 늘 일정의 인파는 확보하고 있는 곳이 제주도였다. 예약 없이 원하는 호텔을 당일에 체크인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제주도에 내려올 때마다 묵었던 아버지 소유의 호텔이 서귀포시에 하나 있었지만, 그건 까마득히 먼 과거의 추억이었다. 본가의 의붓형이 물려받은 후론 거지 취급을 해대는 통에 아예 발길을 끊어버렸다. 생면부지의 남남보다도 더 먼 사람들이니 반쪽의 핏줄이란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행히 호텔은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그가 맨 처음 전화를 넣은 그랜드호텔에 스위트룸 몇 개가 비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예약을 마친 다음 곧바로 택시를 잡아탄 뒤 호텔로 이동했다. 제주 시내에 있는 호텔이라 이동한 지 채 10분도 안 돼 택시는 호텔 앞에 도착했다.

제주그랜드호텔은 아담한 산책로와 야외 수영장이 딸린 전형적인 특급 호텔이었다. 객실 수가 500이 넘는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부대시설도 꽤 괜찮은 편이었지만, 인환이 볼 때 개성적이라거나 아름다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일을 위한 모임이라면 모를까, 여행자로서 쉬어가고 싶지는 않은 곳.

체크인을 한 그가 아케이드에서 렌터카를 예약하는 동안 인환은 먼저 15층에 있는 객실로 올라갔다. 그가 바로 움직일지, 아니면 식사를 먼저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잠깐이라도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약된 방은 전통 한식으로 실내 장식이 돼 있는 조촐한 스위트룸이었다. 병풍과 반침, 자개가 박힌 적동색 고가구로 꾸며진 온돌 침실과 역시 적동색 고가구들로 꾸며진 응접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구두를 벗고 응접실로 들어간 뒤 창문부터 열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답답한 슈트 재킷도 벗어 던졌다. 제주공항에 도착한 때부터 흐르기 시작한 땀이 만만치 않은 더위를 자각시키고 있었지만 에어컨을 틀고 싶지는 않았다. 김포공항의 쇼핑몰도, 비행기도, 그리고 택시까지, 내내 에어컨 속에서만 움직였기 때문에 신선한 공기가 그리웠다.

습기를 머금은 미풍이 천천히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제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창 밖 전망은 시원스럽긴 했지만 그리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제주도는 거의 대부분의 풍광이 아름다운 편이지만 역시 도심이라선지 제주시는 개중 질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래도 야자수 가로수며 쪽빛 하늘이며 공해 없이 선명한 대기 등등,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제주도 특유의 풍광은 어딘가 애틋한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어둠을 모르던 자신의 청춘이, 더럽혀지기 전의 순수가, 저기 저 그립고 익숙한 풍광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채 하염없이 떠돌고 있을 것이다.

한동안 멍하니 창 밖을 굽어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어 투시구로 그를 확인하고 문을 열자, 코끝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는 그가 고양잇과 짐승처럼 유연한 움직임으로 걸어 들어왔다. 응접탁자 앞으로 다가가더니 들고 있던 노트북과 크로스백, 그리고 인환의 쇼핑백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인환과 마찬가지로 재킷을 벗어 던지고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꽤 더위를 타는 그답게, 겨드랑이와 등 쪽이 땀에 젖어 셔츠에 짙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덥지? 에어컨 켤까?”

“아니, 견딜 만하니까 이대로 있지.”

안쓰러운 마음에 물어보지만 역시 그도 에어컨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가 손수건을 꺼내 배어나온 땀을 훔치기 시작한다. 손수건을 움직여가는 손엔 붕대가 단단히 감겨 있다. 여전히 크고, 늘씬하고, 또 아름다운 손…….

“……슬슬 배가 고파지는군. 밥 먹으러 갈까?”

2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인환도 허기를 느끼던 참이라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탁자 위에 손수건을 내려놓곤 그가 곧바로 팔을 뻗어왔다. 허리를 감아 들이는 손에 이끌려 그의 품에 고스란히 얼굴을 묻었다. 매끄러운 셔츠의 감촉과 더불어 코롱과 땀내가 밴 사내다운 짙은 체취가 코끝으로 확 풍겨왔다. 담배를 피우지도, 술을 마시지도 않는 그의 체취는 여느 남자들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습기를 머금은 풀냄새처럼 개운하기도 하고, 볶은 콩 냄새처럼 고소하기도 하다. 코끝이 아릿할 만큼 강렬한 체취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를 수용한다. 어루만져지고, 꼭 안기고, 그리고 키스를 받았다. 부드럽게 시작한 키스는 몇 분이 지나는 동안 상당히 격해지고 말았다. 바닥에 쓰러져 몇 번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셔츠 단추가 모조리 풀리고 어느새 유두를 빨리고 있었다. ……하려는 걸까…… 하고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데 의외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그다. 딱딱해지기 시작한 하반신은 아랑곳 않고, 인환마저 일으켜 세우더니 흐트러졌던 옷차림을 바로잡아주고 있다. 셔츠 단추를 꼼꼼히 채우고, 넥타이도 단정히 매어준다. 시선이 마주치자 조용히 눈웃음을 보낸다. 두근…… 또 낯선 그다. ‘연인놀이’…….

“……피곤하면 룸서비스를 부르든지.”

은근한 어조, 상냥한 배려.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자 다시 조용한 웃음. 두근…… 두근…… 두근…….

“……그래. 그럼 밖에서 하지. 윤열이 형과는 7시에 약속이 돼 있으니까 쇼핑하고 쉴 시간 좀 있을 거다.”

옷차림을 고쳐주고도 그의 손길은 여전히 인환의 몸 위를 헤매고 있다. 뺨을 어루만지고, 목덜미 맨살을 더듬고, 가슴 돌기 부근을 옷 위로 부드럽게 꼬집는다. 최면을 거는 것처럼 뜨거운 눈길도 여전히 인환의 눈동자를 얽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뻗쳐서 꼭 까치집 같군…….”

기내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정수리 근처 머리카락을 한 줌 움켜쥐며 혼잣말을 한다. 홀린 듯한 눈빛. 희미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는 역시 낯선 웃음. 물밀 듯이 복받치는 애정을 주체 못 해 마음껏 발산해버리는 순정 소년 같은 웃음이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아아, 정말로 가장 잔인한 징벌이 될 모양이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호흡이 버겁다고 느껴질 즈음, 그렇게 새로운 놀이에 푹 빠져 있던 악동이 마침내 인환을 놓아주었다.

인환이 부족했던 공기를 열심히 들이마시는 동안, 그는 노트북과 크로스백을 금고에 집어넣은 뒤, 재킷 안주머니에 휴대전화와 지갑을 챙기고 있었다. 재킷을 어깨에 걸친 채 유연한 짐승의 걸음걸이로 객실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인환은 잠시 곤혹스러운 얼굴로 굽어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세동을 거듭하고, 호흡도 여전히 좀 버거웠다. 하얗게 질렸다가 혹은 빨개졌다가, 수시로 변하는 낯빛은 카멜레온이 된 기분마저 느끼게 했다. 초조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단을 맞추는 일이 생각보다 힘에 부친다 해도, 견디는 외에 달리 무슨 방도가 있으랴.

호텔 1층에 있는 한식당에서 간단히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제주시 중심가로 나가 쇼핑을 했다.

편하게 걸칠 트레이닝팬츠와 티셔츠, 그리고 속옷과 양말과 셔츠들을 샀다. 혹시 몰라 운동화도 하나 샀고, 손을 다친 그를 위해 약국에 들러 연고제와 붕대도 샀다. 강렬한 햇빛에 눈을 부셔하자 그가 선글라스도 하나 사서 씌워주었다. 1박 예정이라 쇼핑할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쇼핑을 끝내고는 해안 도로를 타고 한 시간쯤 드라이브를 즐겼다. 렌터카 뒷좌석에 쇼핑백들을 집어넣은 그가 묵묵히 차를 몰기 시작한 지 10분이 지나서야 인환은 겨우 드라이브로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새까만 현무암과 비취색 바다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그리고 있는 해안 도로는 인환의 눈을 몹시 즐겁게 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만큼 유달리 더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아름다운 색채의 향연을 그대로 즐기고 싶어, 그가 씌워준 선글라스는 벗어버린 지 오래였다. 차창 밖으로부터 시원스레 파고드는 바람에선 짭쪼름한 바다 냄새가 났다. 인환이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까지 멀리 갈 생각은 없었을 텐데도 차는 어느새 성산에 도착해 있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지도와 시계를 살핀 그가 다시 차를 몰았다. 5분쯤을 더 달려 도착한 곳은 섭지코지였다.

“……내려서 좀 걸을까?”

강렬한 한여름의 햇살을 통째로 받아내고 있는 근사한 해안 절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의 제안을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그의 상냥한 부축을 받아 차에서 내렸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정말 여행을 온 것 같은 흥분이 느껴졌다. 이윤열과의 만남에 대한 근심 따윈 까마득히 잊히고 있었다.

성산 일출봉을 향해 죽 이어지는 언덕길을 천천히 산책했다. 유명 관광지답게 관광객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다. 눈을 아래로 향하면 파릇파릇한 이끼로 뒤덮인 새까만 기암괴석들이 수석 전시장을 방불케 할 멋들어진 모양새를 자랑하며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적시고 있고, 언덕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파란 잔디로 뒤덮인 초원 위로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고즈넉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평선 너머론,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손에 잡힐 듯 아련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마다 말할 수 없이 아늑하고 평화로운 기분을 주었다.

대개는 몇 발짝씩 앞서서 걸음을 옮기는 그였지만 인환이 많이 뒤처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기다렸다가 손을 내밀어주는 그였다. 부드럽게 감겨오는 그의 악력에 주변 시선을 신경 쓰고, 관광객이 가까이 온다 싶으면 잽싸게 손을 빼내었다. 그때마다 그의 끅끅대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30도 가까이 치솟은 기온에 햇살마저 강렬해서,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둘 모두 땀투성이가 됐지만 어느 쪽도 쉽사리 산책을 포기하진 않았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기 시작한 지 20여 분 남짓, 언덕배기 가장자리쯤에 세워진 교회 건물 하나가 생뚱맞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법 많은 수의 관광객들이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까지 찍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올인」이라는 유명 TV 드라마의 야외 세트장이었다. 피로해진 다리도 쉴 겸 마침 눈에 띈 편편한 구릉에 다리를 펴고 앉았다. 몇 미터쯤 앞서가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재킷을 벗어 어깨에 걸친 채,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그의 느슨한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푸릇푸릇한 초원과 이국적인 세트장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지, 그의 이국적이면서도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자신만큼 땀에 푹 젖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역시 자신이 야수라면 그는 미녀나 다름없다. 매혹된 시선은 자신만이 아니어서, 그를 스쳐 지나가는 인파 중 대부분이 한두 번쯤은 반드시 그를 되돌아보곤 한다. 여전히 낯설기만 한 ‘연인놀이 미소’를 보내오는 그에게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것도 같다. 볼 때마다 고동이 빨라지는 자신의 심장에도.

“……피곤하지? 그만 내려갈까?”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랬다간 이윤열을 만나볼 기력 따윈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응, 잠깐 쉬었다가…….”

헐떡이듯 대꾸를 흘리자 옆으로 다가와 자리를 잡는다. 크림색의 슈트라 얼룩을 염려해선지 자신처럼 땅바닥에 주저앉지는 않고 있다. 얼굴에 그늘이 들어 올려다보니 그가 재킷을 걸친 팔을 뻗어 차양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또 한 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뜨끈한 열기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익숙해지긴…… 개뿔…….

5분쯤 청량한 바닷바람에 땀을 식힌 후 자리를 털었다. 주차해둔 섭지코지 끝 지점까지 되돌아가는 데는 올 때보다는 시간이 덜 소요되었다. 도중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아가씨들에게 붙잡혀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연예인 아니냐는 애교 섞인 추궁도 당하고, 노골적인 추파임에 분명한 ‘어디서 묵으세요?’라는 질문도 받고…… 무뚝뚝한 ‘미녀’는 좀 바빴다. 물론 ‘미녀’보다 한결 붙임성이 좋을 ‘야수’는 아주 한가롭게 차에 도착했지만.

화덕처럼 달궈져 있는 자동차에 더 이상 에어컨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시동을 걸고 창문을 닫은 뒤 그가 에어컨을 켜자 곰팡이 냄새 같은 에어컨 냄새가 코끝으로 확 끼쳐들었다.

“……안전벨트 매지.”

차의 속도를 높이며 그가 다정한 어조로 주의를 준다. 차가 성산을 지날 무렵 힐끗 시계를 살피곤 한계치까지 액셀을 밟고 있었다. 어느새 5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약속 장소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촉박한 건지도 몰랐다. 서두른 덕분에 차는 30여 분 만에 다시 호텔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노트북부터 펼쳐들었다. 응접실 탁자 위에 부려진 짐들의 정리는 인환의 차지가 되었다. 벽장에 새로 사 온 옷들을 차례로 정리한 뒤, 그가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재킷을 옷걸이에 걸고 있는데 뺨에 차가운 감촉이 와 닿았다. 돌아보니 그가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병을 건네고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갈증을 자각하고 인환은 달게 받아 마셨다. 노트북으로 되돌아가는 그의 손에도 생수병이 들려 있었다.

“……잠깐 기다려봐.”

슈트를 벗고 트렁크와 러닝 차림이 된 인환이 욕실로 향하자 그가 나지막하게 제지했다.

“……금방 끝나니까 같이 하지.”

어렴풋이 드러나는 욕망의 색채에 잠자코 바닥에 앉아 기다렸다. 금방 끝낸다더니 그는 20분이 넘게 노트북을 붙잡고 씨름을 했다. 답답하거나 지루하지는 않았다. 속옷 차림이라 창문으로 시원스레 밀려드는 바람을 나름대로 즐겼기 때문이다.

마침내 욕실로 들어가 함께 샤워를 했다. 서로의 몸에 비누칠을 해주고, 애무를 하고, 몸을 맞비비며 입을 맞췄다. 당연히 섹스로 이어지리라 각오하고 기다렸건만 그는 자신의 몸을 얼싸안은 채로 수음을 했을 뿐이었다. 비누거품과 그가 뿜어낸 정액으로 끈적끈적해진 서로의 아랫도리를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 서서 천천히 씻어 내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그의 애무와 키스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목덜미와 허리와 등줄기와 허벅지가 끊임없이 쓰다듬어졌다. 생식기와 회음부와 엉덩이 틈새 은밀한 입구도 용서가 없었다. 코를 물리고, 귓바퀴가 통째로 삼켜지고, 입술은 그보다 좀 더 오래 먹혀들었다. 자신의 깁스한 오른손엔 물이 들어가지 않게 기를 쓰면서도, 붕대를 감은 그의 오른손은 비누와 물기로 범벅을 만들었다. 물줄기를 피해 하늘 높이 들어 올린 오른팔 안쪽을 빨고, 겨드랑이 움푹 파인 골짜기에 코를 묻곤 강아지처럼 비벼댔다. 느리고 부드럽고 달콤한 애무였다. ‘연인’ 같았다. 극진한 애정을 품은 ‘연인’의 애무였다.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흐느끼는 듯 안타까운 부름에 가슴이 아렸다. 그냥 ‘연인놀이’일 뿐이니까 가슴 아프지 말자고 자꾸만 다짐했다.

“……인환…… 흐…… 읏…… 아아…….”

신음하며 헐떡이며 바짝 치솟은 열기를 어쩌지 못해 몸서리를 치는 수컷이 안타까웠다. 그저 ‘연인놀이’일 뿐이니까…… 짐짓 모르는 체하자고 독한 마음을 품었다. ‘놀이’에 질리면 아무리 힘들다 애원해도 제 좋을 형편대로 쑤시고 들 남자라고…… 모질게, 모질게, 옛 기억을 반추했다.

흥분이 극에 달한 하반신이 막무가내로 사타구니 사이를 짓누른다. 그나마 언어도 사라지고, 무시무시한 짐승의 포효만이 욕실을 가득 메웠다. 은은한 황토 빛 타일이 발린 고급스러운 욕조 벽에 몸이 밀어붙여 진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자신을 짓누르던 몸이 마침내 거듭 커다란 용트림을 한다. 날카로운 단말마의 교성과 함께 뜨거운 것이 사타구니 사이로 왈칵 솟구쳤다.

국수 가락 같은 미지근한 물줄기가 달라붙은 두 몸뚱이 위로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팔다리가 나무뿌리처럼 서로를 얽은 채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끈끈한 타액으로 뒤범벅이 된 서로의 입술 언저리도…… 언제까지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차가 서귀포시로 접어들었을 무렵, 약속 시간인 7시는 이미 지나 있었다.

욕실에서 30분 이상을 허비한 때문이겠지만, 그는 ‘국회의원’과의 약속에 지각을 한 발칙한 현실엔 별로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하기야, 아무리 국회의원의 신분이라곤 하지만 그에겐 친형과 다름없는 사내이니 허물이 있을 턱이 없었다). 신경을 쓰기는커녕 궁극의 ‘연인놀이’가 절정으로 치달아, 표정이며 몸짓이며 달콤한 기쁨의 아우라가 떠날 줄을 몰랐다. 지독하게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한 자폐증 어린아이 같았다. 도무지 연기가 아닌 듯만 싶었다. 표정이 거의 없는 얼음장 같은 얼굴 저 너머에 어떻게 그런 눈부신 빛이 숨어 있는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14년 동안 알아왔던 ‘문위’라는 남자의 데이터를 새로 작성해야 하지 않나, 심각하게 고려를 해야만 할 형편이었다.

서부산업도로를 타고 30여 분을 달려 제주시 거의 반대편에 위치한 서귀포시에 도착한 시각이 7시 15분, 다시 약속 장소인 강정동까지 이동하는 데 5분이 더 소요되었다.

이윤열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듯한 그와의 약속 장소는, 의외로 특정 호텔이 아닌 어느 개인 소유의 별장이었다.

한라산 자락을 등지고 서귀포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갈색 톤의 중후한 2층 목조 건물 두 동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렇게 화려하지도, 또 그렇다고 너무 소박하지도 않은, 19세기 북미풍의 전형적인 목조 건축물이었다. 갖가지 관상수들로 잘 조경된 2천 평에 달할 넓은 잔디 정원을 끼고 들어앉은 건물의 모양새도, 그 주변으로 드넓게 펼쳐진 감귤 농장과 돌담들도, 그리고 이어지는 새파란 바다 풍경도, 모두 제주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절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일몰의 검붉은 기운이 별장 지붕 너머 하늘을 비단처럼 수놓고 있는 것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차는 형식적인 경계에 지나지 않을 나지막한 돌담을 지나 건물 뒤편에 마련된 주차장에 정차했다. 주차장엔 자신들이 타고 온 렌터카 말고도 얼핏 일고여덟 대의 승용차가 나란히 주차돼 있었다.

몇 걸음 앞서가던 그가 채 현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현관문이 열리며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누구여?! 위여……?!”

“예, 접니다. 좀 늦었네요, 형.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새파란 색의 헐렁한 트레이닝팬츠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팬츠 아래, 삐죽 튀어나온 앙상한 맨발엔 스포츠 샌들 비슷한 넓적한 모양새의 슬리퍼가 발등을 덮을 듯이 신겨 있었다. 티셔츠인 양 대충 걸치고 있는 것은 흰색의 반팔 러닝이었다.

자그마한 남자였다. 9년 전에 봤을 때에도 몹시 작다고 여겼는데 지금 봐도 여전히 자그마한 느낌을 주었다. 170센티 전후의 키이니 한국인치고 그렇게까지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깡마른 왜소한 체구가 더 그런 느낌을 부추겼을 것이다. 몸집과 마찬가지로 작고 갸름한 얼굴은 절대 미남이 아니었지만 묘한 호감을 주었다. 눈꼬리 근처와 입가엔 잔주름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표정 주름들이 뚜렷했는데 그게 또 전체적으로 동안인 얼굴과 묘하게 어울려, 환하게 웃고 있는 하회탈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흡사 필리핀 이주 노동자를 연상시키는 가무잡잡한 피부는 가느다란 뱁새눈의 날카로우면서도 총명한 눈빛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랬다. 외모는 전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 평범함 그 자체지만, 저 땅콩처럼 작은 남자의 안에 깃든 넋이 그 얼마나 크고 넓은가를 인환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기둘리긴 멀……! 어여 와! 싸게 싸게 들어와……! 밥은 아직 안 묵었제? 아짐씨더러 니 것도 준비허라고 혔는디…….”

얼굴에 활짝 웃음이 번지며 정말로 하회탈이 만들어진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새하얗게 드러나는 이가 눈부셨다.

“……오랜만이야, 문 이사. 요즘 얼굴 보기가 더 힘드네?”

“한 교수님, 안녕하셨어요?”

“오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문 이사님. 비행기가 연착했다면서요?”

“예, 안녕하셨습니까, 이 실장님?”

“어서 오세요, 문 이사님.”

“안녕하세요, 수영 씨?”

“이야, 진짜 오랜만입니다, 문 이사님! 요즘 많이 바쁘시지요?”

“안녕하셨습니까, 김 팀장님?”

이윤열의 뒤를 이어 중년의 사내 셋과 여자 하나가 연달아 쫓아 나와 예를 챙기는 바람에 인환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아마도 이윤열의 보좌관들일 그들은 이윤열과는 달리 완벽한 비즈니스 슈트와 투피스 차림을 하고 있었고, 한눈에 보기에도 냉철하고 사무적인 엘리트들이라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장소가 가져다주는 러프한 분위기와 이윤열의 지나칠 정도로 편안한 차림새에, 인환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단 오늘 정도는 가족 모임과 같은 성격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것과는 달리, 줄줄이 쏟아져 나온 낯선 이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들어가시죠. 마침 식사를 하려던 참입니다. 아직 저녁은 안…… 아, 저분…… 은……?”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그를 끌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일행 중 하나가 비로소 인환을 발견했다. 그와 이윤열과 또 나머지 네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인환에게로 쏟아졌다. 자신도 동행한다는 사실을 그는 미리 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인환은 자신을 단숨에 불청객으로 만들어버린 그의 무신경을 한순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제 연인입니다. 앞으로 알게 되시겠지만 직접 소개를 드리고 싶어서 오늘 함께 왔습니다. 장인환 선생님이십니다.”

코앞에 폭탄이 떨어졌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을 듯한 경악이 보좌관 네 사람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윤열의 가무잡잡한 하회탈 얼굴도 단숨에 굳어들었지만 다행히 보좌관들처럼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단 몇 초에 지나지 않을 숨 막히는 침묵은, 그러나 ‘영원’이 따로 없었다.

“……어…… 아…… 자,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안으로들 들어가시죠? 아무튼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장 선생님.”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먼저 충격을 수습했다. 그다음은 그야말로 일사천리, 얼굴과 이름을 제대로 익힐 틈도 없이, 네 명의 보좌관들은 언제 그랬냐 싶게 본래의 냉정하고 이지적인 얼굴로 되돌아가 인환에게 앞 다투어 인사를 건넸다. 인환 역시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며 저들에게 답례를 했다. 물론 그래봤자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며 희미하게 떨리는 음성은 절대로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지극히 간단한 인사를 마친 보좌관들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고, 현관 앞 덱엔 그와 이윤열, 그리고 인환만이 남게 되었다.

“허……. 허, 참…… 이를 워쩌케…… 워째야 쓸게라…….”

한동안 멀리 바다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혁명 투사가 나지막하게 탄식을 흘렸다.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은, 오늘 하루 종일 인환이 근심해왔던 그것과는 달리 경멸이나 미움은 보이지 않았다. 가무잡잡한 하회탈에 깃든 그것은 우려와 연민, 그리고 난처함이었다. 물론 인환이 가장 바라 마지않는 ‘용서’의 기색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긴 누이의 원수였다. 동생의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었다. 뿐이냐, 과거를 망친 것도 모자라 다시 현재까지 망치려 들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있겠는가. 대체 어떤 바보 천치가…… 그따위 철천지원수를 수용할 수가 있을 것인가!

“……니미…… 예삿일이 아니시…… 니미…… 니미 좆겉은 새끼…… 니가 말썽이여…… 니가…… 참말로 사람 환장허겄구마이…….”

“……형…….”

“염병헐 눔, 주딩아리 닥쳐싸야!”

“…….”

바다를 향했던 이윤열의 시선이 겨우 인환의 얼굴로 떨어졌다. 차분해진 표정이었다.

“……무척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 선생님. 많이 늙으셨네요…….”

“…….”

“……그간 고생 많으셨지요? 말씀은 이놈이랑 성준이 통해서 전해 들었습니다.”

“…….”

“일단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저녁 아직 안 드셨지요? 여기 아주머니 솜씨가 그만이랍니다. 재벌 집 일꾼들이란 달라도 많이 다르더군요. 경비도 공짜고…… 하하, 염치없이 빌붙길 잘했다고 여기고 있답니다…….”

“…….”

정감 있고 친밀한 전라도 사투리는 말끔히 사라지고 완벽한 발음과 억양의 표준말이 사내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담담하고 온화한 어조엔 감정을 숨기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그랬다. 자그마한 몸집의 강건한 혁명 투사는 진심으로 원수를 식사에 초대하고 있었다. 용서는 않을지언정 인간적인 존엄성은 지켜주는, 큰 그릇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9년 전, 마지막으로 사내를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환은 그것이 더 가슴 아팠다. 사내의 발아래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고픈 욕구로 전신이 떨리고 있었지만 그조차도 뻔뻔스러운 짓거리일 뿐이란 걸 알았다.

“……죄…… 송…… 합니다…….”

왈칵 치미는 이름 모를 설움 역시 가까스로 억누르며, 인환은 그 단 한 마디만을 내뱉을 수가 있었다.

사내가 이끄는 대로 집 안으로 따라 들어가니 어림잡아 30평은 넘을 넓은 거실(이라기보다 커다란 홀에 가까웠다)이 나타났다.

현관 맞은편 벽 한가운데엔 커다란 벽난로가 있고, 천장엔 샹들리에가, 거실 한끝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2층 복도와 연결돼 있었다. 다른 쪽 문들은 식당과 주 침실, 그리고 서재로 통하고 있었다. 19세기 북미풍 목조 주택의 본을 따라 만든 듯한 외장과 마찬가지로 내부 장식도 원목을 그대로 살린 중후한 갈색 톤의 실내 장식으로 마감이 돼 있었다. 한편엔 미니바가 설치돼 있고, 벽난로 가까이 티 테이블과 함께 죽 늘어서 있는 7인용 소파는 편안하면서도 중후한 느낌을 주었다. 아무리 봐도, 국회의원과 그 보좌관들이 일 관계로 출장을 와서 사용할 사무실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형적인 레저용 휴식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별장의 주인인 재벌 2세는 사내의 지지자 중 대표 격인 인물이었다.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는 가난한 국회의원을 여러모로 후원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이런 종류의 숙소 제공을 통한 후원도 심심찮게 이뤄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내를 따라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서른 명은 족히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은 널찍한 식당이었다. 식당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대형 마호가니 식탁 주위엔 보좌관들 넷이 차례로 앉아 있었고, 앞치마를 두른 나이 든 여자 하나와 30대 청년 하나가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이 의원이 들어서자 앉아 있던 보좌관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차렸다. 사내가 싸구려 운동복을 걸친 워낙 초라한 몰골이어서, 마치 최하급 생산직 노동자를 향해 최고의 화이트칼라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극렬 파업 현장을 보는 것처럼 몹시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불고기와 미역국이 주 메뉴인 식탁은 검소한 편이었지만 맛은 아주 일품이었다. 물론 잔뜩 긴장하지만 않았더라면 인환도 기꺼이 식사를 즐겼을 터였다. 냉철한 사람들답게 그가 안겨준 충격은 이미 완전하게 소화한 듯, 보좌관들의 태도에 거리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식탁의 분위기는 시종 화기애애하기 그지없었고, 릴랙스한 와중에도 이번 출장의 목적임에 분명한 정책 사안은 물론 요즘 최대 이슈 중 하나인 북한 핵문제를 놓고 격렬한 토론이 오가기도 했다.

이 의원이 제주도에 내려온 까닭은 사흘간 제주시에서 열리고 있는 ‘중국 사이버 아파트 건설 사업에 관한 한-중 교류 협력 포럼’에 참석하고, 이 일과 관련되어 내한한 중국 정부의 신식산업부 차관은 물론 다른 중국 통신업계 거물들과 교류를 쌓기 위함이라고 했다. 포럼 일은 그리 이 의원의 골치를 썩이는 문제가 아닌 모양이었지만, 북한 핵문제 쪽은 당면한 최대 난제인 모양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여권의 중진 의원들과 연계해서 내달 중엔 미국 출장까지 계획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정치에 관심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인환으로선 그들 사이에 오고 가는 격론의 제대로 된 의미도, 또 난관도 거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저들이 품고 있는 열의나 진지함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인들이란, 특히 국회의원들이란 서로 헐뜯기나 하고 붕당 싸움만 일삼았지 하는 일이라곤 도무지 없을 것이라는 인환의 선입견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통 식사를 못 드시네요?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듬뿍 퍼 담은 밥 한 공기를 거뜬히 비우고 덮밥까지 시켜 맛있게 식사를 마친 이 의원이 문득 물어왔다.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밥을 깨작거리는 인환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맛있습니다. 실은 점심을 늦게 먹어서요…….”

“예에…….”

같이 늦게 먹은 그 역시 한 공기를 말끔히 비운 상태여서 인환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사내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일 얘기 끝내고 잠시 시간을 내서 말씀 나누고 싶네요. 괜찮을까요, 장 선생님?”

대강 어떤 얘기가 오가리라는 게 짐작됐기에 인환의 가슴은 또다시 불안감으로 무거워졌다.

“……아아…… 예, 의원님. 일에 방해가 안 되신다면 전 괜찮습니다…….”

긴장으로 쇳소리가 된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 내며 인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날 호텔로 되돌아가게 될 때까지 그것이 이윤열과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그때까지만 해도 짐작도 못 한 인환이었다. 그가 이끌고 온 불청객은 인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은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충격과 동요를 사내에게 안겨줄 어마어마한 폭탄이었다.

느긋하고 화기애애한 식사가 끝나니 8시 반이 넘어 있었다.

식사 도중 가끔씩 손목시계를 살피던 그는 식사의 끝 무렵이 됐을 때 중요한 용건이 있다며 장소를 옮기자는 제안을 했다. 담담하지만 진지한 의지가 느껴지는 그의 태도에 이 의원도, 다른 네 명의 보좌관들도 긴장하는 눈치였다. 아마도 오랜 시간 고락을 함께해왔을 사람들인지라, 단순한 말투나 몸짓 하나만으로도 서로의 의중을 읽을 수 있는 깊은 교감을 나누고 있는 탓이리라.

일행은 식당을 나와 사무실로 쓰고 있는 서재로 갔다.

서재라고 하지만 휴양처에 있는 서재답게 책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30여 평 크기의 공간엔 창문 반대편 벽면만이 책장의 용도로 쓰이고 있었고, 대부분의 공간은 커다란 업무용 데스크 하나와 대여섯 개의 의자들, 그리고 석 대의 데스크톱 컴퓨터가 놓인 컴퓨터 책상 세트들로 꾸며져 있었다. 집 안에서 유일하게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는 듯,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가드는 서늘한 냉기가 식사 중에 느낀 더위를 시원하게 식혀주었다. 인환과 그가 도착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계속 진행 중이던 작업을 증거하듯 세 대의 컴퓨터는 모두 켜진 상태였고, 장방형의 업무용 데스크에도 갖가지 서류며 전문 서적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보좌관 중 하나가 어지럽혀진 데스크를 대강 정리하고 공간을 마련했다. 주방에서 차가 배달되자 모두 데스크 앞에 모여 앉았다. 몇 사람은 커피를, 나머지 몇은 녹차 잔을 받아들고 느긋하게 마시기 시작했지만,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조금 긴장된 상태였다. 자신이 계속 동석해도 되는 건가 점점 의심이 들고 있었지만, 나가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꺼낼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물론 그도, 이 의원도 인환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고, 그런 무심한 여유가 보좌관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모양이었다.

너무 무거워져버린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이 의원이 어느 정치인에 관한 농담을 했고, 보좌관들이 맞장구를 치며 웃음바다가 됐다. 배턴을 받듯, 유일한 홍일점인 정책 보좌관 함수영이 개그맨 흉내로 동일한 정치인을 비아냥거리는 바람에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돼서 주거니 받거니 농을 하는 동안 찻잔도 거의 비워졌다. 그가 신중한 어조로 말을 꺼낸 것은 이 무렵이었다.

“……제가 오늘 형을 뵙자고 한 건 주영무 의원에 관한 일 때문입니다.”

한쪽 발을 의자 바닥에 붙인 채로 하회탈을 만들며 웃고 있던 이 의원의 눈빛이 문득 날카로워졌다.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나머지 보좌관들의 얼굴에도 진지한 흥미가 깃들었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지난 7개월 동안 제가 정태근의 딸과 사귀고 있었지요. 형이 걱정하신 것 압니다. 한 교수님께서도, 이 실장님께서도 많이 걱정하셨겠지요. 언론에선 약혼한 사이라고까지 얘기가 나고 있었으니까요.”

“……약혼은 인자 안 헐 거라 허지 않았남? 장 선생님 땀시?”

이 의원이 새끼손가락으로 한쪽 콧구멍을 후비며(너무나 스스럼이 없어서 코믹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미심쩍은 듯이 반문했다.

“……제가 정태근의 딸과 사귄 건 주 의원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매장시키려는 목적이었죠.”

“?!!!”

모두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나 보았다. 이 의원을 포함한 네 보좌관들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무…… 무신…… 뭐…… 뭐, 뭐…… 뭔 지랄을 혔다고?!!!”

“……하지만 아무리 캐도 매장을 시킬 수 있을 만큼의 허점은 안 보이더군요. 고작 뇌물 수수 몇 건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의원직을 박탈당할 만큼의 거리로는 충분하더군요.”

“!!!”

“……형도 아시다시피 주 의원은 이번 불법 대선 자금 모금 건에도 연루돼 있지요. 제가 조사한 비리들마저 검찰에 기소를 당하면 상당한 도미노 효과를 일으킬 겁니다. 의원직 사퇴는 물론 앞으로의 정치 생명도 아예 끝장을 낼 수 있게 되지요.”

“…….”

“……증거는 확보했습니다. 사기 사건을 일으킨 토지 개발 업자를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거액을 챙겼더군요. 문제의 개발업자를 먼저 치는 게 관건인데 그러자면 형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믿을 만한 검찰청 사람들과의 연계가 불가피하니까요. 개발업자의 뇌물을 받은 고위 공직자가 한둘이 아니거든요. 대표적인 이가 주 의원이지만 검찰이나 경찰, 다른 건설부 고위 공무원에게까지 연줄이 닿아 있었습니다. 제가 찾아낸 자료는 그들에게 뇌물을 건넨 내역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 개발 업자의 회계 장부입니다. 정작 쑤시게 된다면 만만치 않은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겁니다.”

“……미…… 미친눔이…… 워쩌케 그란 짓을……! 니가 007이여?!!! 스파이질을 혔다 기런 말이여, 시방?!!!”

이 의원의 안색은 조금 창백해졌고, 대꾸하는 어조엔 황당함과 함께 약간의 노기마저 깃들어 있었다. 주 의원이라는 정적의 아킬레스건을 확보한 데 대한 기쁨보다는 그의 스파이 짓에 대한 실망감이 더 큰 듯했다.

“……예. 스파이 짓을 했습니다. 도덕적으로 류지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로서는 주 의원만큼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쓰러트리고 싶었으니까요.”

“시끄러! 시방 잘혔다는 소리여?!!!”

“형…….”

“성이라고 부르지도 말어야!!!”

“의원님, 일단 고정하시고…….”

“……그……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그야 주 의원이 악질 중에서도 최악질이긴 하지만…… 의원님 일도 사사건건 걸고넘어지기도 하고…… 하지만 어차피 여의도에서 털어 먼지 안 나는 인간은 별로 없지 않은가? 자칫하다간 여야가 몽땅 폭로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지. 게다가 검찰청을 움직이게 하려면 만만치 않은 고생을 각오해야 돼. 대통령님께 근접할 만큼 강력한 실세를 잡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지. 원내에서 의원님의 입지가 그렇게 강한 쪽이 아니라는 건 자네도 알고 있잖나. 지금으로선 많은 무리수가 따르는 일일세. 아무튼 기회 봐서 터트리기로 하고, 지금은 경제 현안에 힘을 집중하는 게 더 시급하다고 생각되는군, 문 이사…….”

“……처음부터 주 의원을 표적으로 삼는다면 물론 어렵겠지요, 한 교수님. 그러니까 개발 업자를 먼저 치자는 얘깁니다. 업자를 먼저 치면 나머지는 알아서 굴러갑니다. 이건 장담 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지금 바로 시작하지 않으면 기회를 잃게 될 겁니다. 개발 업자가 해외로 튈 작정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주 의원을 목표로 삼은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일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형에게도 좋은 일인 셈이니까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추진했으면 싶습니다. 형이 중수부의 실세들만 움직여주시면…….”

“개인적인 일?! 염병, 문딩이 겉은 눔아! 나가 무신 심부름센타 똘마닌 줄 알어야?! 글고 나 존 일?! 나가 언제 주 의원 족치라 혔어야?!!!”

“……형…….”

“시끄럽다!”

“형, 제 말씀을 더…….”

“허어, 니 참말로 분 질를껴?(화나게 할래?)”

“……강이 형을 죽였어요.”

“……?”

“강이 형을 죽인 놈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 나지막했다. 그러나 스스로가 던지는 선언의 효과를 충분히 알고서 하는 신중한 몸짓이었다. 이 의원의 고지식한 성격을 알고 있고, 또 그에 따른 저항도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으리라. 그리고 그 저항을 무너뜨릴 비장의 카드로써 그는 저 먼 과거의 상처를 끄집어냈다.

“……무…… 뭐라……?”

“…….”

“……뭐라고…… 니 시방…… 뭐라…… 무신…….”

“……그놈입니다…… 아시지요……?”

“……뭐…… 라…… 니…… 시…… 시방…….”

“……예전 안기부에 끌려 다닐 때 놈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그땐 얼굴만 새겨두는 수밖에 없었죠. 귀국하고 나서…… 형 일로 그쪽에 걸음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습니다. 다행히 놈은 절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

“……그동안 말씀 안 드렸던 건 형이 아셔도 마음만 아프실 것 같아서였습니다. 보궐에서 당선이 되시고 의사당에 입성하시게 되면서는 더더욱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하시죠……? 매일 보게 될 놈이니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못 할 짓이다 싶어서…….”

“…….”

과연 상상 이상의 폭탄선언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해버린 동생에게 짐짓 호통을 치고는 있었어도, 내심 그 저변에 깔린 동생에의 애정과 신뢰는 여전해 보이던 이 의원이었다. 투박한 사투리로 거푸 욕설을 내뱉곤 있었어도 심각하게 화가 난 어조라기보다는 도리어 짓궂은 장난기마저 느껴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 의원의 가무잡잡한 얼굴에서 일거에 핏기가 사라졌다. 하회탈을 연상시키던 인상 좋은 얼굴은 그야말로 시체처럼 굳어버렸고, 그를 향하고 있던 부드러운 눈길 또한 벼락처럼 닥친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격렬한 불길을 뿜어내고 있었다. 몹시 깡마른 손가락이었다. 가무잡잡하고, 마르고, 마디가 있는 투박한 손은, 태평스럽고도 천진스러운 움직임으로 단정하게 잘린 머리카락을 긁적이기도 하고, 코를 후비기도 하고, 눈가를 비비기도 했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마음의 고통이나 회한이라곤 절대 모를 것 같던 그 손이 극심한 동요를 드러내며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목을 죄는 듯한 무시무시한 침묵이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창백하게 질린 채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떼는 이가 없었다. 이 의원만큼은 아니겠지만 그의 형은 다른 네 명의 보좌관들에게도 채 빠지지 못한 가시였던가 보았다.

“……요…… 요…… 리 나와야…….”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너무나 낮아서 알아듣기 힘든 속삭임이 작달막한 혁명 투사의 입술로부터 흘러나왔다. 조금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는 천천히 문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찌걱찌걱 슬리퍼 끄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려왔다.

“……요리 나와…… 따로 이약(얘기) 쪼까 헐랑께…….”

막 문을 나서려다 말고 사내가 그를 돌아보았다. 텅 빈 눈길이었다. 사내의 마르고 왜소한 몸이 흡사 난쟁이처럼 더더욱 작아 보였다. 무거운 돌에 온몸을 콱콱 쥐어박히기라도 한 듯, 축 처진 사내의 어깨가 어쩐지 가슴 아팠다. 사내에게 있어 죽은 남자가 갖는 의미란 인환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건지도 몰랐다.

이 의원이 나가고 그가 따라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 의원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크고 늠름하고 강렬한 인상의 남자였다. 또한 무서운 남자였다. 속내를 읽을 길 없는 남자의 서늘한 무표정이 무서웠다. 흔들림 없는 남자의 집요함과 끈기와 의지와 독기에 기가 질렸다. 그러나 동시에, 남자로 하여금 그렇게 성장하게끔 한 남자의 폐허처럼 참혹한 운명에 인환은 남자처럼 증오를 느꼈다. 남자처럼 독기를 품었다. 자신 역시 복수를 당하는 입장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남자의 모든 복수가 성공하기를 빌었다.

남자가 나가고, 비스듬히 열렸던 서재 문이 조용히 닫혔다. 인환은 참았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 나와 있었나? 모기 안 물려?”

뒤에서 그의 흐릿한 물음이 들렸다. 방아를 찧듯이 정신없이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던 참이라 인환은 펄쩍 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 몰라…… 좀 깨물렸나……? 얘기는 다 끝났어?”

그가 현관 앞 덱에 서서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재킷을 마저 챙겨 입었고, 손엔 노트북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겨우 호텔로 돌아갈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내일 마저 해야겠지. 하루 만에 쇼부가 날 일은 아니니까…….”

천천히 대꾸하는 그의 깊은 눈은 부드러웠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토론과 계획, 그에 대한 비판과 재수정들이 서재 안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한 시간쯤 다른 방에서 그와 독대를 마친 이 의원은 울어서 시뻘겋게 부은 눈을 하고 서재로 되돌아왔었다. 완전히 그에게 설득당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 그가 노트북을 켜는 것을 시작으로, 그야말로 여섯 명의 전사들로 구성된 막강한 특수 부대와 보이지 않는 적들 사이의 가상 전쟁이 개시되었다. 9시 반쯤부터 시작된 작전 회의는 12시를 넘기고 새벽 1시가 가까워올 때까지 좀처럼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처음 두 시간까지는 나름대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또 전사들의 흥분에 공명하기도 해서 흥미진진하게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역시 정치는 체질이 아닌 인환이었다. 11시가 넘어가면서는 물밀 듯이 밀려드는 하루 동안의 피로를 도무지 참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비장하게 싸움에 임하는 전사들 앞에서 염치 좋게 꾸벅꾸벅 졸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인환은 몰래 서재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주방에서 차를 끓여 마시기도 하고, 밖으로 나와 파도 소리가 아름다운 조용한 해변을 산책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죽여나갔지만 그것도 한 시간이 고작, 결국 현관 앞 덱에 놓인 파라솔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졸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그럼 내일 여기로 다시……?”

“그래. 일단 호텔로 돌아가서 자고…… 아무래도 1박은 더 해야 할 것 같아. 아침에 체크아웃하고 아예 이곳으로 옮기려고 해. 불편해도 참아줬으면 좋겠군.”

나지막한 어조에서 피로가 느껴졌지만 입가엔 예의 ‘연인’의 웃음기가 떠돌고 있었다.

“나야 아무래도 괜찮지만…… 아무튼 인사하고 나와야겠네……?”

“됐어. 전부 곯아떨어졌으니까.”

그를 스쳐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인환의 팔을 잡더니 그가 상냥하게 덧붙였다.

“가자.”

그에게 허리를 끌어안긴 채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20분이었다. 새까만 밤하늘엔 제법 많은 수의 별들이 걸려 있었다. 공기는 상쾌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바다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있어 더위는 별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낯선 도로를 밤에, 그것도 잔뜩 피곤이 쌓인 상태에서 운전해 갈 그를 걱정했지만 의외로 그는 상태가 좋아 보였다. 아니, 그저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서귀포시로 차를 몰고 올 때의 그것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달콤한 기쁨의 아우라가 그의 얼굴을 여전히 생생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아, 스펙터클한 스파이전의 와중에도 ‘연인놀이’는 쭈욱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낮보다는 차량의 통행이 한결 뜸해진 한적한 도로를 단숨에 주파해 호텔에 도착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훌훌 옷을 벗어 던진 그는 다짜고짜로 인환에게 달려들어 키스부터 하기 시작했다. 벌거벗은 그의 전신에서 짙게 나는 사내 내음이 코를 찔렀다. 나가기 직전에 샤워를 했음에도 그의 몸은 그새 끈적한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인환 역시 같은 형편이었지만 샤워를 할 기력은 없었다. 요즘엔 진짜 결벽증이 의심스러운 그도 샤워를 생략한 채 부지런히 인환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샤워까지 하기 귀찮은데 섹스인들 오죽하랴. 어쩔 수 없이 방바닥으로 쓰러져 그의 애무와 키스를 받아들이고는 있었지만 마음속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어째 하루 종일 삽입을 시도하지 않은 그였다. 이제쯤은 그의 인내력이 바닥날 시점이라 여긴 것도 사실이어서, 그가 무얼 요구한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리라고 속으로 체념하고 있었다.

“……다리 괜찮나……?”

한동안 숨을 틀어막을 듯이 입술을 빨아대던 그가 문득 속삭여왔다. 키스는 목덜미 쪽으로 내려가 있었다. 속옷까지 몽땅 벗겨내서 그와 마찬가지로 알몸을 만든 것도 바로 몇 분 전이었다. 맨살에 닿는 딱딱한 방바닥의 감촉이 서늘해서 설핏 몸서리를 치다가 그가 얼굴을 드는 바람에 눈을 뜨고 시선을 맞췄다. 부드럽고도 깊은 시선이 되돌아왔다. 가슴이 죄어드는 것처럼 심장이 세동을 거듭하고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한다.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한 홍조를 뺨에 느낀다. ‘놀이’라는 걸 아무리 머릿속에 주입해도, 벌써 몇 번이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건지 셀 수가 없을 정도면서도, 여전히 면역이 되지 않는다.

“……다리 괜찮아……?”

그가 되풀이한다.

“……?”

병신 다리의 상태를 묻는 것은 알았지만 계속 섹스로 이어질 것을 각오하고 있던 터라 당장은 그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의문은 곧 상반신을 일으킨 그로 인해서 풀리게 되었다. 당혹해하는 인환에게는 아랑곳 않고 그가 부드럽게 다리를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오늘 좀 무리했을 거다. 아침에 공항에서도…… 쇼핑도…… 섭지코지를 간 것도…….”

상냥한 일침이 귓가를 간질이듯 다가왔다. 발가락 하나하나를 마찰하고 발목과 발바닥, 이어 정강이와 허벅지까지, 마비가 있는 다리는 놀라운 서비스를 받게 되었다. 황송한 나머지 감히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가슴이 뛰고, 얼굴은 화끈 달아오르고, 등줄기로는 식은땀이 달렸다. 놀이, 놀이, 놀이, 연인놀이, 연인놀이, 연인놀이…… 하고 숨 쉴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온전한 나머지 다리 근육마저 꼼꼼히 풀어준 그가 다시 몸을 겹쳐왔다. 온몸으로 깃털처럼 부드러운 키스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엄청 뜯겼군…….”

무심코 턱 언저리를 벅벅 긁고 있는데 그가 나지막하게 웃는다. 그제야 얼굴과 목, 그리고 팔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가려움증을 자각했다. 파라솔에 앉아 졸면서 여기저기 모기의 공격을 꽤 받은 모양이었다.

“……가려워……?”

눈에 몽롱하게 취할 듯한 별을 담고 그가 속삭인다. 누워서 올려다본 그의 상반신은 온통 딱딱하고 힘 있게 뭉쳐 있는 근육 덩어리로 보인다. 사내다운 굵은 목줄기부터 어깨선에 이르는 근육이 그가 상반신을 움직일 때마다 울퉁불퉁 율동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

목울대의 발간 모기 자국에 그의 입술이 와 닿는다. 딱딱한 이의 감촉이 살며시 파고들었다. 조심스레 깨물리고, 오랫동안 빨려들었다.

“……여…… 긴……?”

귓불 아래.

“……여기도……?”

턱 끝.

“……여기도…… 인가……?”

뺨.

“……여기도 있네…….”

광대뼈.

“……여긴…… 아니…… 지…….”

입술…….

가려운지 어쩐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니, 가려움 따위 신경이 가 닿지도 않았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너무나 빠르게 짧은 호흡을 거듭하고 있어 머릿속이 멍멍해졌다.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낯선 남자였다. 모르는 남자였다.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한 남자가 달콤한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장단을 맞춰줄 수 있을 만큼의 판단력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가쁜 숨을 할딱이며 그저 견디기에만 급급했다. 회오리바람 속에 갇히기라도 한 것마냥 넋이 이리저리 요동을 쳤다.

사랑받는 일엔 영 미숙하기 짝이 없는 어린 넋이었다.

사랑‘받는’ 건 몰랐다. 모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사랑‘하는’ 것만 알았다. 알고 있다 뿐인가, 박사였다. 그 방면으로 수십 수백 편의 논문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모양이었다. 사랑‘하는’ 것뿐 아니라 사랑‘받는’ 것이 필요했다. 사랑‘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온전한 ‘연인놀이’에 동참할 수가 있었다. 장단을 맞춰줄 수 있었다. 물론…… 반쪽의 지식만 차고 넘치는 얼간이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저 눈만 부엉이처럼 휘둥그렇게 뜬 채 전전긍긍해하며 ‘연인놀이’의 파도에 휩쓸려 들어갈 뿐. 장단을 맞추다니…… 댄스를 하다니…… 절대 가능할 리가 없었다!

새벽녘인 모양이었다.

커튼 틈으로 푸르스름한 여명이 비쳐들고 있었다.

사타구니 사이를 더듬어오는 손길에, 몽롱하게 꿈속을 떠돌던 의식이 훌쩍 현실로 떠밀렸다.

굴리듯 음낭이 주물러지고, 페니스가 펌프질을 당하고 있었다. 약간 아픔이 느껴졌다. 곧이어 뒤엉킨 체모 쪽으로 이동한 손가락이 빗질을 하듯 천천히 부드럽게 긁어 내렸다.

“……한 번만 넣을게, 인환아…….”

착 가라앉은 허스키가 뜨겁게 귓전을 두드렸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시트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새 침상이 만들어진 것인지는 기억에 없었다. 그저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핥아지고, 빨리고, 깨물린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애무와 키스를 거듭할 뿐, 삽입을 참는 그의 괴로워하는 얼굴도 기억에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잠에 침몰해 들어가며, 수음하는 그의 웅크린 모습을 설핏 본 기억도. 개처럼 엎드린 채, 끄떡거리며 용트림을 치는 거대한 성기를 맹렬히 훑어 올리던 그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도. 기억의 맨 끝은 죄의식과 황송함이었던 것 같다. 계산된 배려에 죄의식을 느끼고, 그럼에도 실제인 양 애틋한 연기에 취해 황송함을 느끼고.

그러나 역시 거기까지가 한계였던 모양이었다. 늘 새벽이면 더더욱 성욕을 주체 못 하던 그였다.

“……한 번…… 만…… 넣을 테니까…….”

주저하듯 동의를 구하는 것은 역시 ‘연인놀이’의 충실한 구현.

하루 만에 자란 턱수염이 따끔따끔 뺨을 문지른다. 생식기를 애무하던 손길은 자신이 잠에서 깬 것을 깨닫고 좀 더 강렬하고 노골적이 되었다. 모로 누운 자세인 인환을 그는 등 쪽에서 덮치듯 눌러오고 있었다.

“……딱 한 번…… 괜찮지……?”

괜찮지 않을 까닭이 있나. ‘연애놀이’를 주도하는 건 그이지 자신이 아니다. 자신은 그저 따라가며 고개만 끄덕여주면 끝. 자신의 페니스를 떡 주무르듯이 주물럭거리고 있던 그의 오른손에 자신의 왼손을 포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흐끅 하는 기쁨의 탄성이 그의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천천히 엉덩이가 들어 올려졌다. 팔꿈치로 상체를 지지하고 무릎을 꿇었다. 언제나 이 자세만 되면 왈칵 수치심이 치솟지만 오늘은 유달리 더 부끄러웠다. 그의 완벽한 연기 탓에 정말로 연인이라도 된 것 같은 황홀한 착각이 넋을 사로잡고 있는 때문이리라.

엉덩이 틈, 움찔거리는 입구로 축축하고 뜨거운 것이 와 닿았다. 꿈틀거리는 생물은 주변부터 천천히 핥는 것으로 정복을 시작했다. 거무스름한 치모가 드문드문 보이는 회음부를 씹고, 꽃잎처럼 피어난 주름을 꼼꼼히 핥고, 끝을 뾰족하게 해서 안으로 쑤시고 들었다. 쑤시고 든 혀는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굳어든 괄약근을 부드럽게 풀어나갔다. 전신으로 와다다다 소름이 일며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된다. 이를 악물고 시트를 꽉 움켜쥔 채 간지러움을 견딘다. 조금씩 흘러내린 타액이 흥건하게 아랫도리를 적실 무렵, 무시무시한 감각적 공격이 겨우 중단되었다. 양쪽 골반 뼈를 강하게 움켜쥐는 그의 두 손이 느껴진다. 엄지손톱이 지그시 엉덩이 살을 벌리더니 단단한 육봉 끝이 입구에 와 닿았다.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진 거대한 흉기는 바로 치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음미하듯, 입구의 갈라진 틈에서 회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반복해서 기둥을 비벼대고 있었다.

“……들어간다…….”

마침내 기쁨으로 의기양양해진 수컷의 허스키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흐윽!!”

느리고 끈질기기조차 했던 상냥한 애무로는 상상도 못 했던 단숨의 인서트였다. 뿌리까지 들어와 박힌 페니스에 허리가 활처럼 뒤로 휘었다. 골반을 쥐고 있던 그의 양손이 인환의 가슴과 아랫배를 움켜쥐며 몸을 밀착시킨다. 한 번, 두 번, 세 번, 깊고 느리게 찔러 올리며 흐름을 타기 시작한다. 간간이 크게 휘저으며 구석구석 유린을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놀고 있는 양손은 리듬에 맞춰 온몸을 쓸고 돌아다닌다. 고개를 들어 올려 키스도 하고, 축 늘어진 암컷의 생식기로 내려가 온갖 파렴치한 짓도 마다 않는다. 느리게, 음란하게 요동을 쳐댄다. 숨을 쉬기가 버겁다. 쳐올리는 강렬함에 얼굴이 가차 없이 바닥에 깔아 뭉개진다. 찌걱찌걱 살이 맞붙어 비벼지는 음란한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진다. 빈틈없이 달라붙은 두 개의 나신이 땀으로 푹 젖은 지도 이미 오래. 제 몸인지 남의 것인지 영판 구분이 불가능하다. 등 뒤의 수컷이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며 광란을 시작한다. 찌걱찌걱, 찌걱찌걱, 찌걱찌걱…… 가속도가 붙으며 하늘로 치솟더니 결국 심연을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흑…… 우앗…… 앗! 아…… 아파…… 우…… 흑!!!”

“……욱…… 흡웁…… 흑…… 핫…… 핫…… 앗…… 크윽…….”

“아……! 그…… 만……! 아…… 아아! 아…… 아파……! 하악!!!”

“으…… 흑…… 인…… 인…… 큭!! 아아아……!”

“흑…… 아아…… 하앗……! 아…… 위……! 위위…… 흑…….”

“우윽! 큽! 흡……! 으앗!! 학!!!!! 아아…… 악…… 인환아!! 흐악!!!인…… 아악!!!”

“……흐…… 아파……! 그…… 그만…… 아악!!!아! 아파……! 그…… 제발……! 악!!!”

“큭!! 훅…… 아아…… 인환……! 큭!!! 크헉!!! 아…… 아아!! 아아아!!!인…… 인환아……! 좋아!! 흐아아!!! 젠장……! 큭……! 크악!!!”

“아아……! 악!”

“후욱!!!!!!!!”

지독한 통증의 극점에 이르러 마침내 뜨거운 용암이 왈칵 끼쳐들었다. 바윗돌처럼 찍어 누르던 거대한 몸뚱이는 아래로 곤두박질쳐 박살이 났다. 아래에 깔린 몸 또한 가루로 부서진 것은 다르지 않았다. 기진맥진해서 한동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들리지 않았다. 아나콘다처럼 거대하게 꿈틀거리는 그의 몸이 자신의 전신을 휘감은 채로 요동치고 있었다. 손등 위로 깍지가 껴진 그의 손가락이 넝쿨처럼 자신의 전 존재를 움켜쥐고 있었다. 여전히 항문 속에 틀어박힌 채 떠날 줄을 모르는 그의 흉기가 자신을 묶고 있었다. 지배하고 있었다. ……떨어질 수 없을 거야…… 이 남자로부터 떨어질 수 있는 날은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거야…… 체념인지, 절망인지, 납득인지, 인환은 그렇게 알 수 없는 자각을 멍하니 흘리고 있었다.

곧 숨이 끊어질 것처럼 헐떡이던 호흡이 잦아들었다.

잔뜩 굳어진 채, 부들부들 떨며 경련하던 그의 몸도 차츰 부드럽게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결합을 풀지는 않았지만 ‘딱 한 번’의 약속은 지키려는지 허리를 돌리지는 않는다. 몸을 누르고 있는 그의 체중이며 얽힌 두 다리가 버거웠지만 밀어낼 기력도, 또한 의지도 없었다. 가쁘게 뿜어지는 격한 숨길을 등 뒤에서 느꼈다. 느릿느릿 자신의 등줄기를 핥고 있는 그는 막 교미를 끝낸 수사자처럼 느긋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

활짝 열린 창문 틈으로 바람이 불어들어 달라붙은 두 몸의 열기를 식혀주고 있었다. 날은 이미 완전히 밝아 있었다. 6시가 조금 넘은 것 같았다. 먹먹해진 귓가로 토해지는 그의 숨소리만이 고요한 정적을 아련하게 흔들고 있었다. 생각이 단절된 의식은 평온하고 따사로웠다. 눈꺼풀이 감기며 졸음이 쏟아졌다. 아침에 체크아웃을 하리라는 그의 말이 생각나 억지로나마 눈을 떠보려 노력했다.

“……더 자라…… 자도 돼, 인환아…….”

역시 돗자리 깔아줘야 할 남자다.

‘연인’흉내에 재미 들린 심판관의 상냥한 일침이 주저를 씻어주었다. 겨드랑이 사이를 두들두들 쓸고 다니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흐려졌다. 달콤한 잠이 살풋 내려앉았다.

부랴부랴 아침을 먹고 체크아웃을 하니 이미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가 깨워주지 않아, 8시 반까지 자신이 늦잠을 자버린 탓이었다.

얼마 안 되는 짐을 모두 챙겨 렌터카에 싣고, 곧바로 서귀포시로 이동했다. 별장에 도착하니 손님은 어제보다 한 명이 더 늘어 있었다. 30대 초반의 사내로 역시 이 의원의 보좌관 중 한 사람이었다. 별장에선 이미 어제의 전쟁이 재개돼 있는 상태였다. 두 팀으로 나뉘어서 한쪽에선 오후 2시부터 있을 포럼 준비가 한창이고(이 의원의 기조 연설문과 정책 제안서가 되풀이해 검토되고 있었다), 한쪽 팀은 주 의원에 대한 여러 가지 공격 기획안들을 구상하고 폐기하는 일을 거듭하고 있었다.

도착한 즉시 그는 서재로 불려 들어가고, 인환은 자신들을 위해 배정된 2층 손님용 침실에서 짐을 정리했다. 아침에 갈아입은 채 그냥 들고만 온 그와 자신의 속옷과 양말을 욕실에서 빨아 널고, 셔츠들은 주방 아줌마에게 부탁해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도록 했다.

고작해야 트렁크 하나도 안 될 짐을 정리하는 데 10분이 걸리겠는가, 20분이 걸리겠는가? 점심시간이라는 12시 반까지, 무려 세 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려야만 한다. 어느덧 본능처럼 물감 냄새와 캔버스의 감촉을 그리워하는 자신이 있었다. 고작 어제 하루 다른 일로 빈둥거렸을 뿐인데, 벌써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어 온몸이 뒤틀리는 걸 보면 확실히 자신은 어쩔 수 없는 환쟁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동거를 시작한 후 카센터 일을 그만두면서 자신의 그림에 대한 욕구는 좀 더 집요해지고 보다 절박해진 느낌이었다. 7년 동안 막노동과 그림 일을 병행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그리고 싶어 몸살을 앓은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저 마음이 몹시 울적할 때, 술로도, 극심한 육체노동으로도, 잠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저 지독한 우울증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때, 자신은 바닥까지 떨어진 절망 상태에서 고요하게 붓을 들었었다. 그랬다. 그저 일종의 치료이자 위안의 행위에 불과했다. 조금이라도 상태가 호전되면 인환은 그림 따윈 까맣게 잊고 생활 전선에만 매달렸었다. 일단 육체노동이다 보니 여간해선 그림을 그릴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밤늦게까지 자신을 한계 수준으로 몰아가며 노동을 하다 보면 그림은커녕 자취방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져 잠이 드는 것이 고작이었었다. 그저 보통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시간, 친구들과 만나 회포를 푸는 시간, 또 혹은 휴일에 TV나 보며 빈둥거릴 시간에 인환은 대신 그림을 그렸다. 인환에게 있어선 다른 그 어떤 놀이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안과 평화를 주는 신나는 놀이가 아닐 수 없었다.

아마도, 지금 이렇게 더 그림에 목을 매는 까닭은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7년 동안 인이 박힌 노동자의 삶이 졸지에 부르주아의 소일거리로 환골탈태를 했으니, 몸인들 정신인들 약간씩 미쳐 돌아간대도 할 말은 없을 터이다.

트윈 베드 한 쌍과 티 테이블, 그리고 트윈 소파 하나가 심플하게 장식돼 있는 낯선 침실에 주저앉아 인환은 그렇게 한동안 홈식과도 닮아 있는 그림에 대한 열망을 삼켜야 했다. 열망은 망상만을 낳아, 여전히 한창일 개인전이며 그림의 판매, 그리고 오주희와의 재회와 유럽의 큐레이터들에게서 받은 초대전 청탁에 이르기까지, 꼬리를 물고 떠오르며 인환의 넋을 산란하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정신없는 ‘연애놀이’에 휘둘리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김강원의 얼굴이 불쑥 떠오르게끔 만들었다.

갑자기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더운 열기가 확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은 물론이었다. 무조건 부끄럽다는 생각만 강박적으로 되풀이되었다. 얼굴의 홍조는 전신으로 번져 후들거리는 떨림마저 불러일으켰다.

녹아내릴 것만 같은 달콤한 기분을 주는 살인 미소가 눈에 선했다. 밀어처럼 속삭이는 상냥한 말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련했다. 입술 끝이 삐죽 올라가면 믿기 힘들 정도로 매혹적인 보조개가 움푹 만들어졌다. 아우터로 웨이브가 진 숱 많은 새까만 머리카락은 만지면 그대로 녹아버릴 것처럼 부드러울 것이다. 아름다운 선을 그리는 그림 같은 입술은…… 그 입술은…… 키스는…… 아아, 그렇지…… 그래…… 키스를 했다…… 그 사람과 자신은…… 자신은…… 정말은 믿어지지 않지만…… 키스를 한 거다…… 그토록 아름다운 청년과 키스를 나눴다……!!!

수치감이 극에 달하며 온몸이 배배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자세한 기억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입술의 감촉이며, 혀의 느낌이며, 타액의 맛이며, 도무지 흐릿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자신이 있었다. 사내가 왜 자신에게 키스를 했는지, 사내가 도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더 이상 깊이 이유를 캐지 않으려는 자신이 있었다.

분명 두려움 때문이겠지만, 그러나 동시에 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은 또한 분명한 설렘이었다. 노곤하면서도 달콤한 느낌…… 애틋한 느낌…… 반짝반짝 황금빛을 뿜어내는 소중하고 야릇한 그 어떤 것이었다. 이 야릇한 설렘과 전조가 ‘무엇’이라는 걸, 아니, ‘무엇’과 닮아 있다는 걸 자신은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절대로 정확히 알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게만은 금지된 ‘어떤 것’이었다. 절대 열어봐선 안 되는 강력한 결계로 봉인된 그 ‘무시무시한 어떤 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그 봉인을 뜯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사실에 자신은 가장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산 천상병 시집과 피카소 화집을 들쳐보는 것으로 일단 한 시간을 보냈다. 그것도 지루해지자, 이틀째 입고 있는 조금 구겨진 슈트를 벗고 어제 사서 결국 포장조차 뜯지 않았던 트레이닝팬츠와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달리 할 일이라곤 없으니 별장 주변을 산책하는 것이 그나마 유용하게 시간을 단속하는 행위이리라.

비닐하우스 안에서 노랗게 익어가는 감귤 밭을 돌고, 바닷가를 따라 2킬로쯤을 더 걸었다. 날은 더운 편이었지만 바다에서 수영을 할 만큼은 아닌 것 같았다. 한번 손끝을 담가본 물은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차가웠다. 도중에 만난 감귤 농장을 따라 안쪽으로 한참을 더 걸으니 자그마한 조계종 사찰이 하나 나타났다. 절간 같다는 표현 그대로, 무덤 속처럼 고요하고 청결한 경내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졸졸 떨어지는 약수 물로 갈증을 풀고, 대웅전 앞 그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변죽 좋은 토종개 한 마리와 놀아도 주고, 개와 함께 그늘에 앉아 한참을 쉰 다음 귀로에 올랐다.

별장에 도착하니 막 점심 식탁이 차려지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현관 앞 덱에 나와 있던 그는 조금 초조해 보였다.

“……어딜 갔었지?”

추궁하는 듯한 어조에 잠시 긴장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냥…… 바닷가 여기저기…… 날씨가 무척 좋아. 너도 좀 쉬면 좋을 텐데…….”

금세 표정이 풀어지며 환한 미소가 서린다. ……두근…….

“……오후엔 그러잖아도 좀 쉴 수 있을 거다. 혼자 지루하게 두지 않을 테니까…….”

두근…… 두근…… 두근…….

파동 치는 심장이 괴롭다. 그가 놀이에 지치기 전에, 자신이 완전히 적응하는 날이 올 리는 절대 없으리라고 거듭 불안해한다.

달콤한 유혹의 말을 흘리며 손을 잡아끄는 그를 따라 식당으로 갔다. 점심 메뉴는 함흥냉면이었다. 이번엔 인환도 꽤 맛있게 듬뿍 먹어주었다. 산책으로 기분 좋을 만큼의 허기를 느끼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신경을 쓸 여유도 없이 보좌관들과 열띤 토론을 거듭하는 이 의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제의 멤버와 오늘 가세한 한 사람의 멤버가 모두 함께 모인 식사 분위기는 어제저녁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화기애애하긴 하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 냉철한 긴장을 놓지 않고 있는, 정력적인 일벌레들의 모임 그 자체였다. 평소의 그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그도 말이 많았다. 공감하는 내용이면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특유의 차고 날카로운 어조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말이 없고, 지나칠 정도로 무뚝뚝하고, 게다가 감정이라곤 손톱만치도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을 만큼 냉랭하기만 한 그도, 동료들과 섞일 때에는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하고 새삼 놀라서 그를 바라보기도 했다.

식사를 마친 이 의원 일행은 나중에 합류한 한 사람의 보좌관만을 남기고 일제히 외출을 했다.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쉴 수가 있다는 의미는 이 의원의 외출에 기인한 얘기인 모양이었다. 이 의원 일행이 돌아오는 6시 무렵까지 그는 타임오프 상태였다. 이 의원 일행을 배웅하고 바로 서재로 들어간 그는 두 시간쯤 이곳저곳에 전화를 하거나, 노트북과 씨름을 하며 보냈다. 아마도 회사일 때문인 것 같았다. 그가 타임오프라곤 해도 역시 자신은 시간을 주체 못 하는 천덕꾸러기 신세인 모양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낮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그가 침실로 올라왔다.

“……나가자.”

뜨겁고 목마른 듯한 키스와 포옹으로 한동안 자신의 진을 빼더니, 차 키를 흔들며 유혹의 눈길을 보냈다. 위로 시원스레 치켜 올라간 무표정한 눈이 문득 휘어지며 예의 깊고 중후한 ‘연인’의 웃음을 만드는 것을 보고, 인환은 이번엔 또 ‘데이트놀이’가 시작되고 있는 모양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해는 중천이었고, 더위는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맑고 청량한 공기는 눈에 띄는 색채마다 한결 선명하고 화려한 빛을 뿜어내는 데 일조를 하고 있었다.

그가 렌터카를 몰고 처음 도착한 곳은 서귀포시 중심가에 위치한 아케이드 상가였다. 그와 자신의 슈트를 사기 위해서였다. 자신은 물론 인환의 것까지 각각 세 벌씩 챙기는 그를 의아한 눈으로 굽어보자, 체류가 예상보다 한참 길어질 것 같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했다.

친분이 있는 검사와 연락이 닿았고 내일 중으로 그 검사가 모임에 합류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검사와 면담을 갖게 되면 대충 쇼부를 보게 될 때까지 그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사정이 그렇게 됐다면 할 수 없겠지 하고 체념하면서도 인환은 내심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이윤열이라는 또 다른 양심의 심판자와 괴로운 며칠을 함께 흘려보낼 일이 까마득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언제 막을 내리게 될지도 모르는 그의 ‘연애놀이’도 암담하기만 했다. 물론 그렇다고 혼자서라도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혹은 실망한 속내를 털어놓는 일 따위 꿈도 꿀 수 없는 인환이었다. 주제를 알아야지. 자신이 누군가. 그저 그가 가라면 가고 있으라면 있어야 하는 얌전한 성노예가 아닌가.

옷가게를 나와 찾아 들어간 곳은 역시 ‘돗자리 깔아야 할’ 그답게 각종 미술 재료가 즐비한 화구점이었다. 집중이 힘든 불안정한 상황과 장소에서 본격적인 작업은 꿈도 못 꿀 일, 그저 입맛만 다시며 전문 용품들이 즐비한 통로를 그대로 지나친 후, 청소년 교재 코너에서 드로잉북 하나와 수채 도구, 목탄을 골랐다. 어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계산을 하는 그를 훔쳐보며, 인환은 혹시 이 남자가 자신을 이곳에다 영영 가두려는 목적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턱없는 의심을 했다. 그야 물론 터무니없는 망상일 것이다. 비록 새로운 놀이에 푹 빠져 있긴 하지만 아무리 남자의 취미가 고약하다 해도 그렇게까지 비이성적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쇼핑이 끝나자 본격적인 ‘데이트놀이’가 시작되었다.

서귀포야 이미 빠삭할 수준으로 익숙한 곳이었다. 천제연폭포니, 정방폭포니, 외돌개니 하는 유명 관광 명소들은 이미 인환에게 있어선 관광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지도에 의지한다고는 해도 대충이나마 제주도의 지리를 익혀두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드라이브 솜씨까지 보여준 그였다. 학생 시절에야 지독한 가난 때문에 수학여행조차 변변히 못한 그였지만, 인환이 모르는 9년의 시간 동안 그 모든 것을 역전시켜버린 그였다.

쇼핑백들을 차에 실으며 수영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던 그는, 내키지 않아하는 인환의 표정을 금세 포착해내곤 다른 궁리를 내기 시작했다(해수욕을 하기엔 바닷물이 차게 느껴졌고, 그렇다고 호텔의 피트니스 클럽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또 오늘 하루의 운동은 오전 중의 산책만으로 이미 차고도 넘칠 정도였다). ‘데이트놀이’는 결국 서귀포 시내의 이중섭거리와 기당미술관을 차례로 둘러보는 것으로 낙착을 보았다. 그림엔 통 관심이 없을 그로선 의외의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전적으로 인환을 위한 배려라는 것을 여봐란 듯이 들이대며 ‘데이트놀이’를 절정으로 끌어올리려는 그의 교활한 속셈일 것이다.

여하튼 미술관 방문이야 인환에겐 늘 즐거운 여흥이었으니, 두 시간 남짓한 ‘데이트놀이’는 나름대로 인환에게 흥겨운 기쁨을 선사했다. 언제 봐도 따스하고 애잔한 감흥을 주는 전설의 화가도 감동이었고, 혁신적이진 않지만 고만고만한 고전들로 소박한 위로를 주는 기당미술관도 의외의 기쁨이었다. 무엇보다, 그로선 지루하고 따분할 시간을, 말할 수 없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견뎌준 그가 몹시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해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현대적인 작품엔 자신에게 해석을 부탁하는 열렬한 관심도 보여주었으니, 감지덕지 황송한 나머지 더듬거리며 어설픈 평론가 흉내까지 내버린 자신이었었다. 이성으로는 연기일 뿐이라고 내내 되뇌면서도, 가슴은 뿌듯한 자부심과 기쁨이 샘물처럼 퐁퐁 치솟는 것을 절대로 막을 수 없었다. 대단한 남자였다. 그야말로 백만 불짜리 연기가 아닐 수 없었다. 처음 차를 타고 나올 때만 해도 그의 저의를 미심쩍어하며 심드렁했던 자신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즐거운 데이트였다고(아니, ‘데이트놀이’였다고) 인환은 그에게 완전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두 개의 미술관을 돌고 카페에 들러 차까지 마시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약속된 6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해는 점점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일몰의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느긋하고 풍요로운 저녁이었다.

차가 그리 속도를 내지 않았는데도 중심가를 빠져나와 별장으로 되돌아가는 데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별장으로 진입하기 직전 교차로로 접어들었을 때, 그가 어느 상가 근처에서 갑자기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려 그가 들어간 곳은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전문점이었다. 잠시 후 가게 문을 밀고 나온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아이스크림콘 한 개였다. 물론 인환을 위한 선물이었다(젊은 시절, 자신이 유일하게 즐겨 먹었던 피스타치오 아몬드는 또 어찌 알았을까?!). 아이스크림을 받아 드는 인환의 얼굴은 동요를 감추지 못한 채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정녕 무지 낯 뜨거우면서도 감미로운 폭력과 한가지일 거라고 막연히 짐작을 했다.

차가 정원으로 천천히 진입했다.

거의 비어 있는 주차장으로 보아 이 의원 일행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막 주차장 쪽으로 방향을 틀려고 했을 때, 정원 한쪽 구석에 주차가 되어 있는 못 보던 승용차 한 대가 눈에 띄었다. 새까만 색의, 한눈에 보기에도 최고급의 외제 승용차임이 분명한 그것은 막 서쪽으로 넘어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저녁 햇살을 받아 중후하고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차주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은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곧 풀리게 되었다.

음식 시중을 들고 있던 주방 아줌마와 30대 사내는 물론, 낯선 인물 둘이 막 현관 안으로 들어선 그와 인환을 향해 일제히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쉰 남짓으로 보이는 노신사였고, 한쪽은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전형적인 비즈니스맨이었다. 40대 사내 쪽은 생면부지임에 틀림없었지만 노신사 쪽은 어쩐지 낯이 익은 모습이었다. 180센티에 가까울 큰 키에, 그 나이대의 몸집이라곤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날씬한 몸집을 하고 있었다. 얼굴 또한 호남형에 가까운 미남이었는데, 젊었을 무렵엔 여자깨나 홀렸을 법한 얼굴이었다. 소박한 디자인의 연회색 슈트 차림 하며,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낡은 구두 하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차림새의 사내였지만 보면 볼수록 묘한 품위가 느껴졌다. 부드럽고 사려 깊은 미소가 총명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주곤 있었지만 어딘가 비범해 보이는 풍모를 온전히 다 숨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여어, 문 이사! 여기서 또 보게 되는구만! 그제 그렇게 황망히 헤어져버려서 안 그래도 무지 섭섭했다고…….”

사내가 인상 좋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에게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사내의 인사와 함께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불쑥 고개를 들고 떠올라왔다. 인환은 순간, 어린애와 같은 몰골로 반쯤 먹어치우고 있던 아이스크림콘을 당장 사라지게 만들고픈 발작적인 충동을 느꼈다. 전시장에서의 추태가 생생히 오버랩되며, 인환의 안색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랬다. 어딘가 낯이 익어 보였던 것도 당연했다. 사내야말로 스캔들의 처음과 끝을 고스란히 목격한 그 ‘노신사’와 동일 인물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안 회장님?”

그가 상체를 깊이 숙이며 예의 바른 인사를 챙겼다.

“그날은 몹시 죄송했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그만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회장님.”

“아, 우리 사이에 무슨. 거추장스러운 격식은 치우자고 내 그리 얘기하는 것을……. 자넨 너무 박정한 데가 있어, 문 이사. 섭섭하게스리. 아무튼, 됐네. 이렇게 다시 보니 됐지, 뭘.”

느릿하면서도 끝을 길게 끄는 듯한 사내의 어조는 독특했다. 몹시 친밀감을 주면서도 또한 카리스마적인 권위가 엿보이는 묘한 이중성이 느껴졌다. 그를 향한 온화한 시선 하며 격의 없는 대꾸에서 사내의 그에 대한 넘칠 듯한 호의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 그리고 이쪽은 참 아리따운 작품을 하는 화가님이시지요?”

내내 그에게로만 향했던 사내의 시선이 졸지에 인환에게로 쏟아졌다. 기왕에 당혹해버린 심사는 더더욱 패닉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이미 수습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나 있었다. 얼굴은 홍당무요, 손안의 아이스크림은 줄줄 녹고 있고, 그럴듯한 사교적인 멘트라곤 단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눈만 굴리며 어딘가 비범해 보이는 사내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긴 이미 가장 바닥까지의 치부를 보인 마당에 더 이상 뭐가 켕기랴 싶은 배짱조차도 은근슬쩍 싹트고 있었다. 그저 사내가 입이 가벼운 사람이 아니길 빌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태연한 그의 태도만 봐도 그에게 있어 사내가 위험인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아니, 위험인물이기는커녕 저 이 의원과 마찬가지로 그의 절대적인 영역 안에 속한 인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회장님이십니다, 장 선생님. 여기 별장을 형에게 빌려주신 고마운 분이지요. 형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든든한 후원자이시기도 합니다.”

다행히 그가 차분한 소개로 인환의 상태를 구원해주었다. 비로소 경직이 풀리며 사고 회로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처…… 음 뵙겠습니다…… 장인환이라고 합니다…….”

“……저런,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네. 허허, 장 선생님, 일단 욕실부터 들어가셔야겠어요. 카펫을 더럽히면 여기 관리해주는 어르신께서 무척 화를 내신답니다. 꽤 무서운 어르신이지요.”

부드러우면서도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의 사내는 기겁하는 인환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얼굴이 홍당무가 됐지만, 부랴부랴 욕실로 달려 들어가버린 통에 사내의 투시하는 듯한 시선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 것만 해도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몹시 피로한 기분이었다. 아이스크림 범벅인 왼손을 세면기에 씻으며 인환은 전신의 맥이 풀리는 듯한 심한 탈진감을 느껴야 했다.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 아닐 수 없는 제주도 여행이었다.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는 기대는 이제 단순한 기대 차원 이상의 것이 돼가고 있었다.

여기는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자신은 너무나 예민했고, 어둡고, 가라앉아 있었다. 움직임을 멈춘 기차역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달랐다. 너무나 빠르고, 격정적이고, 에너지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밝디밝은 활기가, 희망이, 삶이 충만한 곳이었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벼락 치듯 경적을 울리며 저들은 인환이 모르는 그 어딘가 먼 곳으로 용서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계에 속할 자신의 심판자 또한 자신의 목에 밧줄을 건 채 거듭 달리고 또 달리고 있을 터였다.

유예의 시간은 딱 밧줄의 길이만큼만 주어져 있을 터였다.

주르륵주르륵, 밧줄은 맹렬하게 끌려가고 있었다. 멈춰버린 기차가 따라와줄 것을 기대하며.

주르륵주르륵. 주르륵주르륵.

그렇게 밧줄이 풀려가는 동안은 아무도 파국을 예상치 못할 것이다.

멈춰버린 기차는 세상이 멈춰 있다 여길 것이요, 달리는 기차는 세상이 달리고 있다 여길 터였다.

아아, 물론 그러나.

파국은 절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었다!

이 의원 일행이 돌아오고, 늘어난 작전 회의 멤버가 몽땅 다 서재에 틀어박힌 지 세 시간 만에 안 회장은 서울행 마지막 비행기를 타러 제주공항으로 출발했다.

작품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며 진심으로 섭섭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안 회장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인환은 사내와의 빠른 이별에 내심 기뻐했다. 장난꾸러기 같은 온화한 웃음으로 다음을 기약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설마 하는 심정으로 어눌하면서도 형식적인 인사만을 건넸다.

되돌아간 안 회장을 대신해, 또 다른 달리는 남자인 유영묵 검사가 다음 날 별장을 찾았다.

대검 중수부 소속의 유 검사는 안 회장과 달리 하루를 묵다가 갔다. 함께 동행할 필요가 있다며 그를 부록으로 달고 올라간 것은 인환으로선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의원 일행과 그는 당연한 듯이 검사와의 동행을 받아들였다. 비로소 서울로 올라갈 수 있게 됐다고 내심 반기고 있던 인환에게 그는 별장에서 기다리라는 또 다른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내렸다. 일이 마무리된 것이 아니니 2∼3일 더 제주도에 머물러야 할 거라고 했다. 다음 날 내려올 테니 기다리라는 일방적인 명령에 절망했지만, 인환은 역시 반항의 말은 단 마디도 흘리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가 다시 제주도로 내려온 것은 약속한 날에서 하루를 더 보낸 후인 그 주 주말 오후의 일이었다.

도무지 그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가 자신을 가두려 한다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하게 들고 있었다. 그야, 이렇게까지 괴로우니 ‘제주도 감금’이 그가 자신을 벌주는 일환이라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마저 없이 이 의원 일행과 보낸 이틀은 그야말로 바늘방석에 앉은 듯한 이틀이었다. 자신을 대하는 이 의원의 태도는 친절하고 관대하기 그지없었지만, 그것은 그 어떤 냉혹한 경멸보다도 더 인환의 양심을 쑤시는 일이었다. 이 의원의 그 어떤 친절로도 죄의식의 무게는 덜어질 수 없을 터였다. 단 1그램도 가당치 않을 터였다. 결국 함께 식사를 하는 때 이외엔 그저 죽은 듯이 방 안에만 틀어박혀 스케치북을 채워나가는 수밖에 인환이 달리 할 일이라곤 없었다. 그나마 이 의원 일행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 돼주었다.

토요일이었다.

제주도에 내려온 지 6일째 되는 날 오후, 날은 아침부터 잔뜩 흐려 있었다. 평균 기온이 5도 이상 떨어졌고, 바람도 유달리 강하게 불고 있었다. 이 의원 일행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몽땅 제주시로 나가 있었고, 어쩐 일인지 주방 아줌마와 잡역부 청년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을 먹자마자 다시 달라붙은 목탄 작업에, 아슬아슬하던 스케치북이 마침내 바닥이 나버렸다. 맹렬히 흐름을 쫓아가던 작업이 졸지에 박탈을 당하자 인환은 상상 이상으로 초조해져버렸다.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당장 시내로 나가 사 오리라 마음먹고 지갑만 하나 달랑 든 채 별장을 나섰다.

금방 잡히리라 예상한 택시는 어쩐 일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산책 코스로도 적당한 거리이니 걷자고 작정하고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번화가에서 별장까지 차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건만 걷기 시작한 지 30분이 넘었는데도 주변은 여전히 감귤 밭 천지였다. 눈에 띄는 것이라곤 개인 별장과 펜션들, 그리고 또 감귤 밭이었다.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가끔 눈에 띄는 택시는 매몰차게 인환을 스쳐 그대로 휙휙 지나가버렸다. 바람이 너무 분다고 생각했다. 온통 잿빛인 하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곳곳에 보이는 나지막한 돌담들도 회색빛 하늘 아래서 보니 그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그림을 그릴 종이가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림을 그릴 수 없단 말인가. 언제까지 여기 갇혀 있어야만 하는가. 그저 모든 게 마냥 기가 막혔다. 외로웠다. 너무나 외로웠다. ……돌아와줘…… 돌아와줘, 빨리…… 빨리…… 빨리…… 빨리 와, 빨리…… 제발…… 제발 지금 당장 돌아와줘……! 속으로 악을 쓰듯이 기원했다. 상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누구라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이 뼛속 깊이 새겨진 외로움을 달래줄 이라면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빵!!!

빵!!! 빵!!! 빵!!! 빠앙!!!!!!

요란스러운 자동차 경적이 뒤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사납게 휘몰아치는 바람 탓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인환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딘가 낯익은 자동차 한 대가 인환으로부터 30여 미터쯤 떨어진 도로의 갓길에 세워져 있었다.

두근…….

차 문이 열렸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밝은 그레이의 더블슈트 차림인 장신의 사내가 뛰어내렸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표정이 거의 없는 깊은 눈이 똑바로 자신을 응시한 채 뛸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심하게 부는 바람 탓에 사내의 부드러운 암갈색 머리카락은 수세미처럼 잔뜩 헝클어졌다. 단추가 채워지지 않은 슈트 재킷이며 넥타이도 360도로 춤을 추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바윗돌처럼 늠름하고 다부진 체격도, 이국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선 굵은 이목구비도 너무나 낯익었다. 쌍꺼풀이 없는 큼직하고 아름다운 눈매도, 심연처럼 새까만 눈동자도, 모두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리움이었다. 영혼이었다. 부르고 있었지만, 속으로 악을 써서 부르고 있었지만, 울부짖으며 애원했지만, 설마 정말로 이렇게 당장 달려와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어딜 가는 거냐…….”

코앞까지 달려온 사내가 숨을 몰아쉬며 다그쳤다.

“……이렇게 허술한 꼴을 하고 어딜 가! 우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사내의 목에 팔을 감고 결사적으로 달라붙었다. 숨을 삼키는 듯한 신음 소리와 함께 사내가 움찔 몸을 긴장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더더욱 미친 듯이 달라붙었다. 단단한 근육으로 물결치는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코롱과 땀내가 밴 사내다운 짙은 체취가 코끝으로 확 풍겨들었다. 담배를 피우지도, 술을 마시지도 않는 사내의 체취는 여느 남자들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습기를 머금은 풀냄새처럼 개운하기도 하고, 볶은 콩 냄새처럼 고소하기도 했다. 코끝이 아릿할 만큼 강렬한 체취였다. 몸서리가 쳐질 만큼 자신이 좋아하는 그것이었다.

“……인환아……?”

사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인환아…….”

양쪽 뺨에 닿아오는 사내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인환아……!”

품 안에 결사적으로 파고들던 자신의 얼굴을 억지로 들어 올려 사내가 시선을 맞춰왔다. 휘둥그레진 사내의 눈동자는 걷잡을 수 없는 동요로 흔들리고 있었다. 섬광처럼 방전하는 격정이 사내의 눈 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연인의 눈동자였다. 아니, ‘연인놀이’에 심취한 악동의 눈동자였다.

“인환아!!!”

어마어마한 악력이 들어간 사내의 팔이 자신의 상반신을 품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부서질 듯한 아픔과 함께 허리가 활처럼 뒤로 휘어졌다.

“……좋아……?”

입술이 틀어막혔다. 사내의 입술이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자신의 온 넋을 빨아들였다. 입술이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혀가 끊어져버리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입안이 해지다 못해 먼지처럼 폭삭 주저앉는 게 아닐까 심장이 철렁했다.

“……좋아……?! 내가 좋아……?! 좋지……?! 아아, 좋지, 인환아……?! 좋지……?! 좋다고 말해!!!”

심판자였다.

“……제발 말해……! 말해, 인환아!! 말해!! 어서…… 좋지……?!!! 나, 좋아하지……? 그렇지……?!!!”

자신의 주인이자 신이자 영혼인 사내였다.

“……그럴 거야…… 아아, 그럴 거야…… 그래야 해…… 하느님……!”

좋아한다고 말해져선 안 되는 사내였다. 사랑한다고 인정되면 파멸인 사내였다. 파멸이었다. 그래. 그렇지. 봉인되었다. 봉인된 사내였다. 끝을 알 수 없는 저 깊은 수렁 속에 꼭꼭 눌려 아무도 열 수 없었다.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새까맸다.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못 열어…… 못 열어…… 못 열어…… 못 열어…… 못 열어…… 못 열어…… 못 열어…… 못 열어…….

폭풍이 올 모양이었다.

새까만 먹장구름이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소용돌이라도 일으킬 듯 휘몰아치는 바람에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아직 아픔이 남아 있는 갈비뼈가 뻐근했다. 그가 엄청난 악력으로 상반신을 죄는 때문이었다.

입술이 얼얼하고 혀뿌리가 쓰라렸다. 그가 미친 듯한 흡입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입술 언저리로 눈물 같은 타액이 흘러내렸다. 뒤로 휜 허리가 점점 더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갔다. 하반신을 밧줄처럼 죄어대는 그의 다리가 버거웠다.

어지러웠다. 너무나 어지러웠다. 다리는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을 막무가내로 달려가고 있었다. 폭풍처럼 휙휙 풍경이 지나갔다. 너무나 빨라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벼락 치듯 경적을 울리며 그는 자신이 모르는 그 어딘가 먼 곳으로 용서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자신의 목에 밧줄을 건 채 거듭 달리고 또 달리고 있었다.

유예의 시간은 딱 밧줄의 길이만큼만 주어져 있을 터였다. 주르륵주르륵, 밧줄은 맹렬하게 끌려가고 있었다. 멈춰버린 기차가 따라와줄 것을 기대하며. 주르륵주르륵. 주르륵주르륵. 그렇게 밧줄이 풀려가는 동안은 아무도 파국을 예상치 못할 것이다. 멈춰버린 기차는 세상이 멈춰 있다 여길 것이요, 달리는 기차는 세상이 달리고 있다 여길 터였다.

아아, 물론 그러나.

파국은 절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었다!

빵빵 하고 커다란 경적을 울리며 트럭 한 대가 자신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트럭 너머 거뭇거뭇 나지막한 돌담들이 보였다. 돌담 너머 주렁주렁 열린 노란 감귤이 탐스러웠다.

아, 그렇다.

여기는 제주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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