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2003년 7월. 문위(文偉)
막상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그토록 사납게 몰아치던 바람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굵은 빗줄기는 하늘 위를 소용돌이치던 흙먼지들에 무게를 주고, 이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하나둘 땅 끝으로 곤두박질치게끔 만들었다.
창문과 지붕을 때리는 빗줄기 소리에 차분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연인에게서 더 이상 히스테리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지독한 우울증의 징후였지만,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자신은 그렇게까지 절망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그가 최후의 도피처로서 자신을 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물론 이 역시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심보가 만들어내는 얄팍한 위로였지만 지금으로선 자신이 매달릴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꿈같은 며칠이었었다. 낙원과 다름없는 며칠이었었다. 그러나 이젠 현실로 되돌아가야만 할 때였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연인놀이도, 의도적인 감금과 단절도 이제 막을 내려야만 할 터였다. 자신에겐 천국이었으되, 연인에겐 지옥이었다. 이제 연인을 제 있을 곳으로 돌려주리라. 자신만큼의 천국은 아니지만 그나마 여기보다는 좀 견디기 수월할 곳, 그네만의 연옥의 성으로 보내주리라. 물론 자신은 괜찮을 것이다. 단 며칠의 천국만으로도, 선명한 그 기억만으로도 자신은 앞으로 충분히 견뎌나갈 수 있다.
연인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좀 더 힘을 기울였다. 연인의 하반신을 휘감고 있던 다리에도 좀 더 압박을 가했다. 자신은 넥타이도 풀지 않은 슈트 차림 그대로였고, 연인 역시 팬츠와 셔츠를 제대로 갖춰 입은 상태라 연인의 체온이며 체취에 대한 욕망은 한결 더 절박했다. 그렇다고 서로의 옷을 벗기려 들었다간 분명 욕구를 참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목구멍을 무엇인가가 콱 틀어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눈시울로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지만 눈물을 흘릴 만큼 자신은 감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멍하니 초점을 잃은 눈으로 방 안 한쪽 구석을 쏘아볼 뿐이었다. 트윈 베드 한 쌍과 티 테이블, 그리고 트윈 소파 하나가 심플하게 장식돼 있는 이 자그마한 손님용 침실을 자신은 영원히 추억할 터였다. 그랜드호텔의 스위트룸도, 섭지코지에서의 산책도, 이중섭거리와 기당미술관도, 그 모든 제주도가 영원히 기억의 갈피에 새겨질 선명한 낙인이 될 것이다.
“……그림 그리고 싶은데…….”
품 안의 소중한 것이 조심스럽게 소원을 말했다. 아랫배 속으로 휑하니 이는 찬바람을 견뎠다. 안고 있던 팔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입술 끝에 닿아오는 정수리 위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키스를 되풀이했다.
“……종이가 떨어져서…… 중심가로 종이 사러 가려던 참이었거든…….”
“…….”
“……저기…… 지금 할 거 아니면 종이 사러 가면 안 될까?”
“…….”
“……위야, 나 정말로 그림…….”
“알았으니까 그만하세요. 곧 데려다드릴 겁니다.”
충분히 의도되고 계산된 냉랭한 일갈을 던졌다. 비로소 뒤집어쓴 심판자의 가면에, 연인의 몸이 움찔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별로 섹스를 하고픈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사리지 마세요. 좀 피곤해졌을 뿐입니다. 여자를 안고 있으면 스트레스도 완화가 되는 법이니까요.”
“…….”
가슴팍에 푹 파묻혀 있던 얼굴이 빼꼼 기지개를 켠다. 지난 며칠 동안 보아왔던 표정 중에서도 가장 평온한 표정이 된 연인이 슬금슬금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전형적인 심판자의 얼굴로 되돌아온 자신에 안도하고 있을 연인의 심사가 손에 잡힐 듯 전해져왔다.
“……저…… 끝…… 난 건가……?”
“…….”
“……끝…… 난…… 거지……? 그…… 저…… 연인놀이…….”
“…….”
“……위…… 야……?”
“…….”
“…….”
대꾸 따윈 의미가 없었다. 이미 몸짓으로, 혹은 표정 하나만으로 그의 의식을 건드리는 데는 도가 튼 인간이 자신이었다. 예상대로, 자신의 의도된 표정에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다. 찌르는 듯한 익숙한 아픔이 내장을 스치고 지나갔다.
“……갑시다. 일어나세요.”
팔다리의 힘을 풀고 마지못해 그를 놓아주었다. 이렇게 언제까지고 내 안에 가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기쁨으로 제정신이 아니겠지, 틀림없이. 그러나 곧 윤열이 형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전에 그가 그토록 소원하는 일을 들어줘야만 하리라.
다리가 저린 모양인지 그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비틀거린다. 쪼그리고 앉은 자세에서의 오랜 포옹 때문이었다. 비틀거리는 그의 어깨를 잡아 다시 침대 위에 앉히고 오랫동안 다리를 주물러주었다. 연인놀이는 종말을 고했지만 그 단 며칠 사이 몸은 자연스레 자신이 주는 배려에 적응한 모양이었다. 별로 놀라거나 의심하는 기색 없이 연인은 순순히 자신에게 다리를 내맡겼다. 할 수 있는 한껏 뜸을 들여 어루만졌다. 정성껏, 다시는 못 만질 몸뚱이이기라도 한 양,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아끼고 또 아꼈다. 온전히 내맡겨진 다리는, 그러나 2분이 채 안 돼 다시 제 좋을 대로 발딱 일어서고 있었다.
“……우산 챙기세요.”
보일 듯 말 듯 다리를 저는 애처로운 몸짓으로 지갑을 챙기는 그를 향해 무뚝뚝한 주의를 준다. 이미 지옥을 품고 있는 자신의 속내를 알 길 없는 박정한 연인은 종이를 사러 간다는 극히 단순한 현실에 어린애처럼 들뜨고 있었다. 그가 한두 걸음 자신을 앞서갈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그래야만 허리를 껴안거나 상냥한 부축을 하며 걷고 싶은 무의식적인 욕구를 견딜 수 있었다. 주의해야만 했다. 연인놀이는 이제 끝났다. 더 이상 낙원이 아니었다.
현관문을 밀치자 제법 굵은 빗줄기가 바람을 타고 안으로 들어왔다.
사방이 비릿하고 알싸한 비 냄새로 가득했지만 내리기 시작한 지 10분이 채 안 돼서인지 대기는 그리 습하지 않았다. 연인에게서 우산을 빼앗아 들고 연인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은 채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안을 핑계거리가 될 수 있다면, 질척한 비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으리라고 멍하니 생각을 흘렸다.
막 주차장 모퉁이를 돌려는 찰나, 낯선 자동차 한 대가 정원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그 순간, 어째서 자신이 걸음을 멈추게 되었는지는 나중에 생각해봐도 그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운명을 염탐하고, 조롱하고, 저주하는 신이 만일 존재한다고 한다면 바로 그 심술궂은 신의 장난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고약스러운 성질의 것일 터이다.
차는 점차 속도를 줄이며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무틱틱한 운무를 만들어내는 거센 빗줄기가 사방에서 차를 때려대며 구슬 같은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차가 멈춰 섰다. 자신과 연인이 서 있는 지점으로부터 10미터쯤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차 문이 열리며 다부진 몸집의 장신의 사내 하나가 걸어 나왔다. 재빨리 우산을 펼쳐든 사내는 한두 걸음 떼는 듯하다가는 이내 걸음을 멈춘 채 이쪽을 향해 조용히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세련된 디자인의 청회색 싱글 슈트는 물론, 강렬한 자주색 넥타이가 사내의 수려한 외모와 어우러져 무척 화려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아우터로 길게 웨이브가 진 새까만 머리카락은 사내의 도회적이면서도 세련된 매력을 돋보이게끔 했고, 굵은 쌍꺼풀이 진 총명한 눈매며 부드러우면서도 의지가 느껴지는 입술은, 사내가 품고 있을 법한 날카롭고도 풍부한 감수성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길고 날카로운 창 하나가 느닷없이 내장을 찔러들었다. 한 번 찌르고 두 번 비튼 다음, 창은 그대로 등을 뚫고 날아가 저 멀리, 거무틱틱한 운무로 가득한 허공 어디쯤인가 들어가 박혔다. 분노 같은 것은, 혹은 미칠 듯한 질투심 같은 것은 거의 자각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틀렸다 하는 절망, 늦었다 하는 통한의 고통만이 전신을 사로잡아 온몸을 꼼짝할 수조차 없었다. 뼈가 바스러지는 것만 같은 끔찍한 통증이 탱크처럼 전신을 밟고 지나갔다. 전조였다. 아마도 전조였을 것이다.
“……장 선생님…….”
속내를 한 치도 숨기지 않은 사내의 벌거벗은 감정이 직격탄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뜨겁고, 진지하고, 격정적인 고백이었다.
“……흑……!”
팔 안에 감겨 있던 몸이 대답처럼 신음을 흘리며 부르르 전율하는 것이 느껴졌다.
“……장 선생님…….”
“……웃……! 흐윽……!”
“……장 선생님…….”
“안…… 그런…… 윽……!”
“……장 선생님…….”
“……흐…… 으…… 웃…….”
“……장 선생님…….”
“…….”
사내의 손에 들려 있던 우산이 힘없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검고 우울한 빗줄기가 사선을 그으며 세차게 사내를 때려대고 있었다. 사내의 머리카락이며 슈트며 얼굴은 순식간에 질척거리는 물기로 흠뻑 젖어들었다. 온통 거무죽죽한 잿빛으로 죽어버린 세상에서 사내의 눈만이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파랗게 꿈틀거리는 사내의 눈동자는 품 안의 연인을 사로잡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품 안의 몸뚱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끅끅거리는 신음을 토해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양팔로 상체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마치 위험스러운 그 무엇인가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듯이. 잔뜩 웅크린 몸은 떨다 못해 시계추처럼 크게 흔들거리며 무의미한 저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 모든 저항이 사라져, 어느 순간 몸뚱이가 자신의 손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위가 정신을 차렸을 땐, 몸뚱이는 자신에게서 몇 미터쯤을 앞서서 사내를 향해 걸음을 떼고 있었다. 아니, 걸음을 뗀다기보다는 몸이 질질 끌려가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몸뚱이 역시 몇 미터 앞의 사내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질척한 물기로 흥건해졌다. 찍찍 끌리는 빗속의 몸뚱이는 인간의 몸이 아니라 그저 꿈틀거리는 시커먼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드륵드륵 뼈를 바스러뜨리며 지나가는 탱크 소리가 들렸다. 통각이 마비된 까닭일까, 더 이상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소리만 요란스레 울렸다. 귀를 찢어발길 것처럼 소리만 가득 들어차왔다.
“……서…….”
하지만 늦어버렸다…….
“……거기 서, 장인환…….”
손을 뻗을 수 있는 시점은 이미 지나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 섯!!!!!”
꿈틀거리는 시커먼 덩어리가 끌려들어 가는 것을 멈췄다. 그러나 단지 멈추었을 뿐 뒤를 돌아보지도, 되돌아서기를 시도하는 일도 없었다. 웅크린 몸뚱이가 부르르 진동을 거듭했다. 구슬이 튀듯 수십억 개의 물보라가 몸뚱이 위에서 춤을 추었다.
“……이리 와…….”
몸뚱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땅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리 와, 장인환!!!!!”
쪼그리고 앉은 몸뚱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엉흐엉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뼈가 갈려들고 있었다. 전신의 뼈가 바스러지는 고통을 위는 그저 남의 일인 양 무감각하게 지켜보았다.
등을 보인 몸은, 그러나 결코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