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2003년 7월. 장인환(張仁歡) (60/129)

22. 2003년 7월. 장인환(張仁歡)

남자의 시선이 일깨운 것은, 너무나 없애버리고 싶었던 나머지 그것이 존재하는지조차 잊어버린 그 ‘무엇’이었다. 

시퍼런 불꽃처럼 애타게 일렁이는 격렬한 눈동자였다. 그 속엔 결코 꺼지길 바라지 않는 남자의 분명한 열망과 애원과 호소가 사납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건 사람에 따라서는 아주 좋은 것이었다. 달콤하고 낭만적인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고, 매우 숭고하고 성스러운 가치로 칭송받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 없이 사는 사람은 죽은 사람에 불과하다며 일방적으로 매도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를 칭송하고 숭배하기 위해 인류는 무수한 소설과 시와 그림과 발레와 영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에겐 아니었다.

그 ‘무엇’은 인환에게 있어 아주 오래전에 까마득히 잊혔던 처절한 회한이었다. 까마득히 잊히지 않으면 도무지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숨을 틀어막는 독기였다. 내장이 쑥 끌려 나가 마침내 투둑 하고 끊어지는 참담한 고통이었다. 울다 울다 눈시울이 골골 썩어 문드러질 그리움이었다. 그랬다. 자신은 저 눈동자를 알고 있었다. 알다 뿐인가, 자신은 전문가였다. 저 눈빛에 관한 한 절대무공의 무림 고수이자 프로였다. 박사 논문을 쓰라고 한다면 몇 개라도 쓸 수 있었다. 수많은 부전공으로 가지치기를 하라고 한들 당근 얼마든지 오케이였다. 저것을 안다. 저 끔찍하고 달콤한 것의 정체를 안다. 신물이 날 정도로 안다. 너무나 끔찍해서 그저 조금 바깥으로 꺼내보는 것만으로도 기함을 하게 되는 그것. 아무리, 아무리 먹어도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끝없는 허기. 내내 전신을 담금질당하고 있는 듯한 화냥년의 욕망. 달콤한 기대로 하늘 끝까지 날아올랐다가는, 단숨에 심연 깊숙한 곳으로 굴러 떨어지곤 했던 나락의 연속. 추악하고 끔찍한 죄악.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는 처벌의 낙인…….

그 모두 봉인돼야 할 것들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다신 보지도, 듣지도, 또한 말하지도 말아야 할 끔찍스러운 판도라의 상자였다.

……제발…… 제발 그만해…… 그만해요…… 기억나게 하지 마…… 그러지 마요…….

인환은 필사적으로 비굴한 애원을 건넸었던 것 같다. 남자의 시선을 통해 가차 없이 까발려지는 감정과 기억과 회한과 공포에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반칙이다. 이건 정말 반칙이야……. 당신은 그러면 안 돼…… 당신의…… 이리 바닥까지 떨어진 짐승에 불과한 자신이라도 따스한 자비의 눈으로 들여다봐주는 당신이…… 당신은 제대로 있어야 해…… 나랑 같은 병에 걸려선 안 돼…… 당신만은 안 돼…… 절대로 안 돼…… 내 그림은 어떡하라구…… 그림마저 미쳐버리면 어떡하지……? 어떡해……? 그럼 난 어디로 가서 쉬라는 거지……?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하느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게 왜 이래? 그만해…… 그만해요…… 그런 눈을 하면 안 돼…… 당신은 절대로 그런 눈을 해선 안 돼…… 그건 지옥이야…… 살인이야…… 피야…… 내 혈육의 피비린내야……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의 길이라구…… 기억나게 하지 마…… 사…… 랑…… 이라고 말하지 마…… 그런 무서운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 마…… 당신은 몰라…… 너무해…… 왜 이러는 거야…… 당신은 그러면 안 돼…… 당신은 천사잖아…… 천사…… 내 그림의 천사잖아…… 안 돼……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기억나게 하지 마…….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남자에게 끌려들어 가며 인환은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아무리,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봉인된 사슬은 사납게 요동을 치며 밖으로 뛰쳐나오기 위해 기를 쓰고 있었다. 발밑에서 시시각각 퍼져 올라오는 공포와 회한과 슬픔의 응어리는 더 이상 인환의 통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사투를 벌이고 있는 넋은 거의 발광 직전이었다.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쥔 채 미친 듯이 빌라고 하면 빌 수도 있었다. 남자가 자기 발이라도 핥으라고 한다면 기꺼이 핥을 수도 있었다. 남자가 원하는 것이 육체만의 쾌락이라면 기꺼이 몸뚱이를 내어줄 수도 있었다. 온갖 사기꾼들과 폭력배들과 살인자들과 강간범들이 자신의 몸뚱이를 농락했었다. 한때 세상의 모든 것이었던 옛 연인은 어제도 농락했고, 오늘도 농락했고, 아마도 먼 후일까지 거듭 농락할 터였다. 아깝지 않았다. 절대로 아까운 몸뚱이가 아니었다. 절대, 저렇게 아까운 몸뚱이를 대하는 눈길로 애타게 바라봐줄 존재가 아니었다. 다 줄게. 다 할게. 핥으라면 핥고, 빨라면 빨아주지. 세상에서 제일가는 요란스러운 화냥년이 돼줄 테니까,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보지 마요. 기억나게 하지 마. 출구 없는 암흑, 추악한 오욕의 진창 속으로 끌고 들어가지 마. 끌려들어가지 마요. 다 한다니까? 다 해. 다 할 거야, 천사님. 부디 그 눈빛을 거둬만 준다면, 일거에 모든 사슬을 끊고 폭발 직전인, 저 시커멓고 거대한 죄악의 덩어리를 다시금 깊고 깊은 심연 속에 안전하게 가둬주기만 한다면…….

“……서…….”

뒤에 남겨진 어둠 속에서 심판자가 부르고 있었다.

“……거기 서, 장인환…….”

서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추악한 죄인의 모든 소유권은 저 무시무시한 자가 움켜쥐고 있었다. 잠자고, 먹고, 숨 쉬고, 화냥질을 하고, 울고, 웃고, 말하고 할 권리는 몽땅 다 저자의 명령에 의해서만 가능할 터였다. 설령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아름답고 좋고 숭고한 세계의 화신이라 해도, 그조차 저 음습하고 냉랭한 심판자의 소유권을 부정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인환은 남자를 향한 전진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순간, 심판자의 절대 명령보다도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자신을 끌고 있었다. 그걸 빛이라고 해도 좋고, 희망이라고 해도 좋고, 혹은 마지막 남은 숨구멍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무튼 자신은 저것만은 살려야 했다. 그래야만 자신이 산다. 그래야만 자신이 숨을 쉴 수 있다. 속죄를 계속할 수 있다. 더 이상 발광하지 않고…….

“거기 섯!!!!!”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한 힘이 빛을 따라 무턱대고 끌려가는 시체를 향해 작살을 꽂았다. 이상했다. 시체임이 분명한데도 여전히 내장이 끊기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팠다. 등줄기를 관통당한 채 부들거리는 몸뚱이 위로 검고 우울한 빗줄기가 화살처럼 들어와 박혔다. 아팠다. 인정사정없는 그 또한 심판자의 의지에 봉사하는 충실한 부관일 터였다.

“……이리 와…….”

다시 한 번 날아든 작살이 이번엔 양쪽 정강이 안쪽을 치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의지를 상실한 송충이가 버르적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흐엉흐엉. 기괴하고 끔찍스러운 송충이의 울음이 세상을 시커멓게 물들이며 메아리쳤다. 희망을 얘기해? 빛을 꿈꾼다고? 감히, 감히 너 따위가? 이제 와서 말이냐?

“이리 와, 장인환!!!!!”

연타로 들어와 박히는 작살에 더 이상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의 감각이 차갑게 굳어들고 있었다. 홍수로라도 심판할 기세로 거세게 몰아치는 빗줄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은 정말로 시체가 돼버리려는 모양이었다. 다행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림마저 빼앗긴다면 이미 끝장이 아니냐. 다 끝났다. 페이드아웃이다. 빛이 점점 더 꺼져들어간다. 머잖아 새까만 암흑이 도래하겠지. 자신인지 심판자인지, 지옥인지 그림인지, 천사인지 사랑인지, 더 이상 그 어떤 구분도 할 수가 없어지리라. 차라리 시체라면 더 이상 고통은 없겠지. 피가 통하는 살아 있는 몸뚱이로 있어봤자 더 이상 무얼 어쩌겠다구.

“장 선생님!!!”

파앗 하고 갑자기 눈앞이 밝아졌다. 양쪽 팔을 거세게 움켜쥐는 남자다운 악력이 느껴졌다. 어찌나 거센 힘인지 팔이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아직 살아 있었나? 자신은 시체가 아니었나?

“장 선생님, 나를 봐요!!! 봐요!!!”

퍼렇게 일렁이는 빛이 인환을 꿰뚫을 듯이 굽어보고 있었다. 처음, 반딧불처럼 미미하게 타기 시작하던 그것은 시시각각 그 기세를 커다랗게 확장시키며 다시금 인환의 넋을 움켜쥐기 시작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정신없이 시야를 가리고 있던 뿌연 물기를 뚫고 남자의 얼굴이 오롯이 떠오르고 있었다. 귀신의 흐느낌 소리처럼 불길하고 음산하기만 했던 송충이의 통곡 소리도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시선이, 움켜잡은 손아귀의 힘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강력한 최면 때문이리라.

자신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세찬 물보라에 푹 잠긴 천사의 얼굴이 매서운 의지를 담은 채 인환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는 입술은 한일자로 굳게 다물린 채 소리 없는 최면을 걸고, 굵은 쌍꺼풀이 진 화려하고 아름다운 눈매는 푸르게 일렁이는 광기로써 의지의 전도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한계까지 푹 젖어서 조각같이 수려한 이마며 목덜미를 착 휘감고 있는 새까만 머리카락은 심해의 수초처럼 온몸을 흔들며 무언가를 유혹하고 있었다. 도회적인 세련미를 물씬 풍기는 자주색 넥타이며 청회색 슈트조차 어딘가 원시적인 세상의 제복처럼 음험하고 도발적으로 비쳤다. 물에 푹 젖은 딥블루의 셔츠는 남자의 꽉 짜인 근육질의 몸에 단단히 달라붙은 채 위험천만한 원시의 도발을 잔뜩 증폭시키고 있었다.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고, 아니, 익숙하지 않다고 인환은 멍하니 판단을 흘리고 있었다. 저것은 자신의 수호천사에겐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광기였다. 일찍이 자신을 집어삼켜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광기이기에 더더욱 인환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것은 절대 남자에겐 익숙해져선 안 되는 것이라고. 허락되어선 절대 안 되는 ‘파멸’이라고……. 그럼에도 남자의 눈은 자신에게 익숙한 그것을 여전히 한가득 품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현재의 인환으로선 무슨 대가를 치른대도 절대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에너지였다. 당연했다. 이미 남자가 친 사슬에 온몸이 꽁꽁 묶여버린 인환이었다. 그저 공포와 고통일 뿐인 남자의 시선과 직면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건 당연히 실현 불가능한 기도가 되었다. 시선을 비끼기는커녕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남자는 그저 인환의 양팔을 움켜쥐는 것으로, 그저 단지 시선을 맞잡은 것만으로 순식간에 인환의 모든 것을 장악했고, 마치 꼭두각시 인형을 다루듯 완벽하게 인환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종하고 있었다.

“……데려갈 거예요…….”

빗소리에 섞여 남자가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몸은 알아듣는 것 같았지만 정작 진짜 자신이 알아듣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의지를 상실한 꼭두각시를 진짜 자신이라고 보긴 힘들었으니까.

“……훔쳐갈 겁니다. 아시죠? 저 남자로부터 당신을 훔치겠습니다.”

“…….”

“……당신은…… 아니,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될 겁니다.”

“…….”

“……당신이 원하는 남자는 나야…… 그렇지?”

“…….”

“……당신이 사랑을 주고 싶은 남자도 나고…… 아니, 의심하지 마요. 나는 알아요. 당신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 알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돼. 아니, 그냥 눈을 한 번 감기만 해도 알아들어. 그러니 눈을 감아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게요. 원하는 세상으로 데려다줄게요.”

“…….”

“……감아요. 눈을 감아요, 어서…….”

“…….”

남자는 어딘가 절박한 기색으로 애원하듯 되풀이해 말했지만 인환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눈을 감았다. 어째서 남자는 애원을 하는 걸까? 어째서 부탁을 하지? 자신은 이미 남자의 꼭두각시다. 그물에 걸린 나방이다. 사슬에 묶인 노예다. 새삼 애원을 하거나 부탁을 할 필요가 있는 걸까?

감긴 눈꺼풀 위로 빗줄기는 여전히 화살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시커먼 진흙투성이 연옥 속을 뒹굴던 몸뚱이가 비행접시처럼 불쑥 위로 떠올랐다. 겨드랑이 안쪽과 정강이 안쪽으로 단단한 남자의 팔 근육이 느껴졌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인환은 남자에게 안겨 일으켜진 모양이었다. 갑자기 중력을 상실한 몸에 속이 울렁거리는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뜨자 거무틱틱한 잿빛 하늘이 시야 가득 밟혀들었다. 흔들흔들. 남자가 걸음을 옮김에 따라 하늘도 크게 흔들렸다. 잠시 시야가 아래로 푹 꺼지는 듯싶더니 인환의 몸은 어느새 낯선 자동차 조수석에 밀어 넣어지고 있었다.

―장인환!!!!!!!!!!

문득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거대한 울부짖음이 들린 것 같았다. 아마도 환청이리라. 아무리 열심히 귀를 기울여봐도 사방은 그저 우레처럼 천지를 두드리는 빗줄기 소리뿐이었다. 그럼에도 인환의 고개는 마치 자동인형처럼 뒤를 향해 홀연 방향을 틀었다. 소리가 토해졌음직한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저절로 동공이 커다랗게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을 사슬처럼 얽매고 있는 남자는 보닛을 빙 돌아 운전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남자가 잠시 사슬을 느슨하게 푼 사이, 인환은 애초에 제 것이었던 의지를 되찾아보기 위해 빈사의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장인환!!!!!!!!!!

다시 한 번 머릿속 깊숙이 파고든 처절한 비명에 설핏 몸서리가 쳐졌다. 아아, 하지만 그 역시 환청이었나 보았다.

뿌연 운무 한가운데에 거무스름한 형태가 보였다. 부릅뜬 눈으로 아무리 꿰뚫어 봐도 무시무시한 자신의 심판자는 조금의 미동조차 없었다. 운무 때문인지 조각처럼 뚜렷한 이목구비가 반쯤 지우개로 지워진 듯 흐릿하게 형태를 잃고 있었다. 줄줄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빗줄기를 따라, 꽉 다물린 심판자의 입술도 아래로 아래로 줄줄 늘어지고 있었다. 흐릿하게 잿빛으로 뭉그러진 눈동자는 잘못 찍힌 판화처럼 공허하고 무표정했다. 자신의 심연 저 깊은 곳을 건드렸던 포효의 흔적이라곤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다행이었다. 아직 인환의 숨구멍은 조금 트여 있는 건지도 몰랐다. 트여 있는 숨구멍을 통해 남자가 만들어내고 있는 빛의 덩어리가 소리 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시커먼 심판자는, 그저 어둠뿐인 심판자는, 남자가 내뿜고 있는 빛의 덩어리에 속수무책인 듯 온몸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지워지고 있었다. 아니, 지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몸이 휘청하며 오른쪽 옆으로 기울었다. 차를 출발시킨 남자가 급하게 유턴을 한 때문이었다. 유령처럼 흐릿하게 지워지고 있던 존재가 순식간에 인환의 시야를 벗어났다.

별로 더 이상 확인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또다시 사슬처럼 자신을 꽁꽁 묶은 채 최면을 걸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빛의 최면이었다. 희망의 최면이었다. 노곤해진 의식의 틈으로 멀리 흐릿해진 유령의 잔재가 잠깐 떠올랐지만 인환은 눈을 부릅뜨는 대신 그저 못 이기는 체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빛이 점점 더 꺼져들어가고 있었다. 머잖아 새까만 암흑이 도래할 터였다. 그 시커먼 전조로 인한 공포와 고통이 너무나 극심한 나머지, 온몸을 꽁꽁 묶고 있는 남자의 사슬이 주는 답답함 따윈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아직 숨을 쉴 수 있었다. 형태가 불분명하긴 하지만 숨구멍은 아직 조금은 뚫려 있었다. 확실하게 숨구멍을 확보해두고 나면, ‘절대 암흑’의 공포가 가져다주는 끔찍한 고통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저기 저렇게 석상처럼 우뚝 선 채, 서서히 흐릿하게 지워져가고 있는 자신의 유령처럼 말이다.

와들와들 떨고 있는 오욕의 몸뚱이 위로 나른한 잠이 내려앉고 있었다. 애써 막지 않았다. 꼭두각시로 변태해 있는 한은 깨어 있을 필요 따윈 없었다. 졸음은 트럭처럼 쏟아지는데 몸뚱이는 왜 이렇게 경련하듯 떨고 있는 걸까. 잠시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스쳐갔다. 생각해보니 너무 추웠다. 공포도 당연히 떨림에 일조하고 있는 듯했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그럼 춥지도, 무섭지도 않겠지.

자신은 이 순간 남자의 완벽한 꼭두각시였다. 꼭두각시에게도 숨은 허락돼 있었다. 역시 자비로운 수호천사가 아닐 수 없었다.

“……정신…… 장 선생님…… 눈을…… 장 선생님!!!”

얼음장처럼 굳어든 몸을 누군가가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설핏 의식이 돌아오며 극심한 추위가 느껴졌다. 잔뜩 오그라든 몸은 정말로 쇠사슬에 묶이기라도 한 듯 추위로 움찔거릴 때마다 저릿한 통증을 유발했다. 가위에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절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아, 정신이 드십니까?!!! 걸으실 수 있겠어요?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요. 우선 몸부터 녹일 수 있게 호텔로 왔습니다. 옷도 갈아입으셔야 하구요.”

아프도록 자신의 어깨를 흔들고 있던 남자가 초조감과 근심의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남자가 꼭두각시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긍정의 대꾸였다. 별로 괜찮지 않지만, 괜찮기는커녕 아프고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꼭두각시는 당장 남자가 원하는 답을 주었다. 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양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단단한 악력이 등 쪽으로 이동하더니 인환의 얼굴은 순식간에 남자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남자의 팔은 이번에야말로 정확하게 인환의 몸을 사슬처럼 죄어 안고 있었다. 아직 덜 아문 늑골에 뻐근한 자극이 왔지만 참을 수 있을 정도라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온통 젖어 있는 옷가지가 얼굴 전체를 푹 뒤덮었다. 차갑고 축축했던 감촉은 이내 남자의 체온을 전달하며 미지근한 온기로 변했다. 젖은 옷가지 너머, 뺨에 맞닿아오는 단단한 가슴 근육의 감촉이 선명했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등줄기와 허리, 그리고 뒤통수를 분주히 오가며 정신없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애무라기보다는 마치 형태를 확인하려는 서투른 조각가의 손짓 같았다. 남자의 제법 빠른 숨결이며 조금씩 떨리는 손길에서 남자의 긴장과 동요가 어렴풋이 읽혔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인형이자 노예인 자신은 이리 태연한데 어째서 그 주인은 반대로 이토록 흥분하고 있는 걸까?

“……떨지 마요…… 두려워하지 마요…… 적어도 나만은 두려워하지 마요…….”

역시 이상하다. 떨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남자였다. 두려워하는 이도……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자신보다 남자 쪽인 것 같았다. 자신은 얼마를 잠들어 있었던 걸까? 얼마만큼 ‘그’로부터 멀어진 걸까? 절대적인 자신의 심판자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심판자 대신 눈앞의 천사 같은 남자에게 묶여버렸다는 현실도. 이 순간, 인환의 넋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두려움이라기보단 얼떨떨한 위화감이었다. 폐부 가득 들어차오는 알싸한 사내의 체취도, 몸에 닿아오는 근육의 감촉도, 애무하는 손가락의 움직임도, 모두모두 익숙해져 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어째서 이토록 다른 걸까? 당연한 현실이 믿을 수 없어, 내내 속으로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을 뿐.

얼마나 오래 안겨 있어야 하는가 하고 난처한 의심이 들 무렵 남자가 움켜쥐고 있던 인환의 어깨를 밀며 약간 떨어져 나갔다. 살피는 듯한 눈길이 인환의 전신을 훑어내리고 있었다. 조심스러웠던 그것은, 어느새 열렬한 격정과 참을 수 없는 환희를 담은 채 인환으로선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변해갔다. 양어깨를 찍어 누르듯 점점 악력이 더해지고 있는 남자의 손아귀는 신음이 흘러나올 지경으로 아팠다. 잠시 평온하던 심장의 울림이 다시금 세차게 진동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토해지는 숨길 또한 거칠고 가파른 상승 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시퍼런 불꽃이 일렁이는 저 두려운 시선이 삼켜버릴 기세로 자신을 얽어매고 있었다. 붙잡히면 붙잡힐수록 전신의 기력이 다 뽑혀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까마득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자신은 꼭두각시이니, 아무리 공포감에 허덕인다 한들 자신 쪽에서 먼저 시선을 돌릴 수는 없었다. 멍하니 남자의 눈을 마주한 채 흐늘흐늘 엿가락처럼 몸이 까부라지자, 남자의 시선에 커다란 당혹이 비쳤다. 어느새 남자의 눈시울을 가득 채운 것은 시퍼런 안광 대신 천사처럼 상냥한 신사의 배려였다. 늘 남자에게서 볼 수 있었던, 온통 빛으로 넘쳐나는 익숙한 그것에, 인환은 가까스로 기력을 모을 수 있었다. 멍하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괜찮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예리하고 섬세한 꼭두각시의 주인은 그제야 겨우 안도한 듯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를 틀어쥐고 있는 커다란 손아귀는 여전히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우선…… 몸을 따뜻하게 하고……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인환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 불분명한 어조로 남자가 중얼거렸다. 양어깨에 가해지던 아픔이 겨우 떨어져 나갔다. 깨질 도자기라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남자가 의자 등받이에 인환의 몸을 기대게 하더니 허둥지둥 차 밖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젖어서 이마와 목덜미를 자꾸만 치대는 머리카락이 귀찮은지,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러진 남자의 손가락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긁어 올리고 있었다.

운전석 문이 닫히자 찰나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빗소리가 아련히 들리고 있는 것을 보니 차는 어느 건물 주차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얼마 동안 달렸는지, 정확히 어디에 와 있는지, 물론 뿌옇게 김이 서려 있는 창문으로는 판별이 불가능했다. 별로 궁금한 마음도 안 들었다. 어딘들 상관이 있일까 싶었다.

조수석 문이 열리며 남자의 팔이 뻗어왔다. 남자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단호한 몸짓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 인환의 양쪽 겨드랑이 사이에 두 손을 집어넣었고, 거의 끌어안다시피 차 밖으로 인환을 꺼내주었다.

줄로 연결된 채 허공에 붕 뜬 꼭두각시라서일까…… 안 그래도 부실한 짝짝이 다리엔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휘청거리는 몸은 당연하다는 듯 남자의 품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공주님 포즈로 안겨 드는 몸에 위화감을 동반한 수치감이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치솟았다. 물론 버둥거린다거나 불만의 소리를 내뱉는다거나 하는 저항다운 저항이란 그럼에도 도무지 불가능했다. 자신은 여전히 남자에게 묶인 꼭두각시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남자는 인환을 안은 채 로비까지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을 벗어났다. 휑하니 뚫린 로비로 들어서고 나서야, 인환은 그곳이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B급 관광호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당한 세련미로 꾸며진 평범한 실내 장식이며 비교적 한적한 로비 분위기로 보아 그다지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폭풍우가 치고 있는데다 기온도 여름치곤 비교적 낮은 편이었지만 에어컨까지 끄고 있는 것은 좀 안타까웠다. 비정상적인 추위를 느끼고 있는 현재의 자신으로선 환영할 만한 일이었으되, 보통의 손님들에겐 무성의한 영업 행태라고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프런트 데스크에선 호텔 매니저로 보이는 제복 차림의 사내와 여자 하나가 눈을 휘둥그렇게 뜬 당혹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여자 쪽은 머리 위의 남자에게 홀린 듯 시선을 박을 채 움직일 줄 몰랐다. 남자와 눈이라도 마주친 모양인지, 눈꼬리가 위로 쭉 말려 올라가며 은연중의 교태가 여실히 드러나는 화사한 미소를 한껏 보냈다. 인환과 마찬가지로 물에 빠진 생쥐 꼴임에도, 여심을 홀리는 남자의 화려한 용모란 조금도 퇴색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프런트 데스크의 사내가 엘리베이터 근처에 있던 벨보이(로 보이는 젊은 남자)에게 빠른 눈짓을 했고, 벨보이 역시 신호를 받은 즉시 이쪽으로 서둘러 다가왔다. 안겨 있는 인환이 어딘가 몸이 불편한 환자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깁스가 돼 있는 오른손도 환자라는 오해에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환자로 오해받는 것이 호모라는 빈정거림을 듣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자신이야 상관이 없지만, 이 봄바람 같은 빛의 사람에게 그따위 더러운 오물이 끼얹어지는 것은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인환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는 게이가 아니었다. 이혼 경력이 있는, 자식까지 하나 딸린 확실한 이성애자라고 들었다. 자신을 만나기 전까지, 남자는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남자’로서 오로지 정도(正道)만을 걸어왔을 것이다. 만약 자비로운 신이 자신에게 그나마 온전한 단 하나의 숨구멍을 허락한다면, 남자는 이 황당한 오류를 금세 수정하고 다시금 그네의 정도(正道)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낙인찍힌 퇴물 화가와 얽히느니보다는, 남자에게 어울릴 만큼 훨씬 멋지고 근사한 연인들에게로, 드라마틱한 삶으로 조만간 방향을 되돌릴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당혹한 표정을 금세 태연하게 바꾼 프런트 데스크 뒤의 사내가 정중하게 물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잠깐 쉬어갈까 하는데 빈방 있을까요?”

머리 위의 남자가 힘 있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지막하고 맑은, 풍부한 감정의 울림이 그대로 드러나는 음색 역시 늘 듣던 심판자의 음습한 울림과는 많이 달라, 역시 이상야릇한 위화감을 느꼈다.

“예, 손님. 어떤 방으로 드릴까요?”

“적당히 쉴 수 있을 만한 방이면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이분의 건강 상태를 봐서 일박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으로선 옷을 세탁할 동안만 머물 예정이니 스위트룸까진 필요 없을 것 같군요.”

“그러십니까? 마침 전망 좋은 5층의 트윈 룸 하나가 비어 있으니 그곳으로 하도록 하지요. 달리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지요? 혹시 의사라도…… 이쪽 손님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시네요.”

“아뇨. 의사까진 필요 없습니다. 잠시 쉬면 좋아지실 겁니다. 숙박계는 먼저 이분을 방에 모셔다드리고 나서 작성해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손님. 미스터 한, 손님들을 방으로 안내해드리세요.”

사내로부터 키를 받아든 벨보이가 먼저 앞장을 섰고, 남자는 벨보이를 따라 엘리베이터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걸어갈 수 있겠습니다, 김 선생님. 이제 그만 내려주세요…….

남자에게 안겨 이동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빙빙 돌던 부탁의 말은 결국 단 한 번도 토해지지 않았다. 기력을 소진한 꼭두각시 주제라 간신히 말을 꺼낼 힘을 끌어 모았을 무렵엔 마침 엘리베이터가 5층에서 멈춰 섰기 때문이다. 좀 더 이동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해도 남자가 자신을 내려줬을지는, 물론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그리 멀리 않은 객실 문 앞에 멈춰 선 벨보이가 키를 꽂고 방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환하게 퍼지는 조명 빛을 따라 10여 평 크기의 아담한 트윈 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욕실과 벽장일 듯싶은 공간이 양쪽을 차지하고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자마자 현관 쪽에 면한 벽에 트윈 베드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침대 반대편일 창가 쪽엔 원형 테이블과 소파, 그리고 TV와 화장대와 냉장고들이 적당한 공간을 차지한 채 놓여 있었다. 현관 반대편 벽을 다 차지하고 있는 것은 창문인 모양으로, 밖에서 들어오는 빛은 두꺼운 이중 커튼으로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어딜 봐도 전형적인 비즈니스호텔의 그것처럼 보이는 방 풍경에 인환은 다시 한 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역시 자신들이 게이 커플로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닌 모양이었다.

방에 들어선 즉시 벨보이가 에어컨을 켜려 했지만 남자는 사양했다. 눅눅하고 후덥지근한 공기로 가득 들어차 있는 실내는 체온이 많이 내려가 있는 두 사람에겐 오히려 반가운 환경인 셈이었다.

“클리닝을 부탁드리려고 하는데, 잠시 후에 다시 와주시겠습니까?”

남자가 여전히 인환을 안은 채로 묻자 벨보이는 싹싹한 대답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방을 나갔다. 짐을 옮겨준 것도 아니고, 또 방 안 구석구석을 안내해준 것도 아니어선지 팁을 기대하는 기색조차 읽을 수 없었다. 하긴 이토록 심플한 방이니 안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으리라.

벨보이가 방을 나가자마자 인환은 겨우 바닥에 내려서게 되었다. 좀 전에 비해 별로 다리의 힘이 더해진 것도 아니라,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풍선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반사적으로 다가든 남자의 손아귀가 아니었다면 바닥으로 고꾸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리를 휘어잡힌 채로 인환의 상반신은 기대듯 남자의 품 안으로 쓸려 들어갔다.

축축하게 젖은 채 말라가는 남자의 슈트 깃에선 담배 냄새와 뒤섞인 코롱 냄새가 가득 뿜어 나왔다. 역시 낯설기만 한 남자의 체취요, 체온이었다. 몸이었다. 그 누군가처럼 담배도 술도 하지 않는, 그래서 마치 습기를 머금은 풀 냄새처럼 개운하기도 하고, 볶은 콩 냄새처럼 고소하기도 한 알싸한 살 냄새가 아니었고, 그 누군가처럼 유난히 더위를 타는 나머지 델 듯 뜨겁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높은 체온도 아니었다. 남자의 몸은 그 누군가보다는 약간 더 호리호리한 대신 만져지는 뼈대는 좀 더 굵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남자의 피부가 투명한 우윳빛이라면 그 누군가의 것은 길이 잘 든 황금색 나이프였다.

이상도 하지. 이렇게나 모든 것이 다르고 낯선데도 자신을 지배하는 상대의 권위에는 또한 매우 익숙해 있는 자신이었다. 남자는 ‘그’가 아니었다. 자신의 주인이자 신이자 생명인, 자신의 모든 것일 ‘그’가 아니었다. 심판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이 순간, 그와 똑같은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자신은 심판자를 섬기듯 눈앞의 남자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하긴 애초부터 존엄성을 상실한 송충이이니 상대가 누가 됐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뼛속까지 비굴한 노예근성으로 가득 들어차 있는 주제에 주인을 가린다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리라. 조금 불리하다 싶으면 이리저리 흔들리며 배신을 서슴지 않는 성노예. 그것이 현재 자신의 적나라한 참모습이었다.

이젠 거의 반사적으로 변한 손놀림으로 남자를 마주 안아주었다. 냉혹하고 무자비한 자신의 심판자를 필사적으로 끌어안듯이, 똑같은 열의와 성의를 가지고 남자의 등을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반항하려는 게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반응을 하려고 노력해봐…….

귀에 쟁쟁한 누군가의 명령이 준엄하게 떨어진다.

―……빚을 갚아야 하잖아, 장인환. 창피도 모르는 호모 새끼답게 열심히 발정을 해야지…….

명령을 따르기 위해 허둥지둥 기를 쓰지만 상대는 송충이의 노력이 매우 불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심장을 관통하는 냉혹한 비웃음이 여전했다. 두려웠다. 손길은 더더욱 바빠지고, 허리를 흔드는 교태도 더 음란해졌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상대는 더욱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멀었어…… 아직 멀었어, 호모 새끼…….

―……죽어도 놔주지 않을 거니까 도망칠 궁리는 단념하고 제대로 봉사하는 방법을 배워…….

뇌리에 끊임없이 명멸하고 있는 심판자의 비난에, 심판자를 애무하고 있는 건지 남자를 애무하고 있는 건지 판단력이 모호해졌다. 별로 구분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라, 인환은 몽롱하게 눈을 반개한 채, 마주 안은 상대를 향해 꼭두각시다운 충성스러운 봉사를 다채롭게 펼쳐주었다.

후욱 하고 남자가 거친 숨을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인환의 손길이 남자의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을 더듬고 있을 때였다.

남자의 양팔로 꽉 끌어당겨진 허리를 통해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는 남자의 성기가 설핏 감촉되었다. 남자는 인환의 다리 사이에 발기한 사타구니를 비비며 자연스레 피스톤 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인환의 허리며 등이며 엉덩이 할 것 없이 무례할 정도로 거침없이 돌아다니고 있는 남자의 손길은 여전히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심정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흥분 둘 다를 고스란히 드러낸, 흉포한 ‘사내’의 몸짓이었다. 그럼에도 익숙한 공포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인환을 질겁하게 만드는 것은 남자의 저 ‘시선’이었지 적나라한 욕망 따위가 아니었다. 절대 봉인된 무언가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머지 것에 대해선 인환도 천하무적이었다. 어차피 반항할 기력도, 자격도 없는 꼭두각시의 몸뚱이지만, 남자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다리를 벌려줄 작정을 기왕에 하고 있었다. 기술 좋은 창녀가 될 수 있다면 하고 빌고 또 빌고 있었다. 마음껏 배설하고 난 다음엔, 치미는 회한과 혐오감에 침을 뱉고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을 정도의, 그렇고 그런 더러운 화냥년이 말이다.

“……으…… 안 돼…….”

교성에 가까운 신음을 흘리며 남자가 번민하고 있었다. 섹스 행위와 다름없는 거친 허리 율동은 여전했지만, 인환의 상반신을 끊어버릴 기세로 세차게 조여들던 팔 힘은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이래선 안 돼…… 당신을 강간할 순 없어요…….”

고뇌에 찬 남자의 참회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강간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이렇게 열심히 화냥기를 총동원하고 있는 자신에게.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요……? 모를 거야…… 알 까닭이 없지…… 그러니 참겠어…… 당신에게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면…… 그땐…… 그때야말로 멈추지 않아…….”

“……?”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짐승처럼…… 굶주린 그대로 짐승이 돼서…… 얼마든지 안을 거야…… 안겠어…… 하지만 강간은 안 돼…… 절대 안 돼…… 할 수 없어요…… 얼마나 사랑하는데…… 소중하니까…… 너무나 사랑하니까 더 안 되는 거야…….”

“……?”

“……아니야, 강간이에요. 아무리 변명을 해도 이건 강간이 틀림없지. 당신은 협박을 당했으니까. 됐어. 겨우 진정했어요.”

남자가 킥킥거리며 웃는다. 맞붙어 있는 남자의 가슴 근육이 남자가 웃음을 흘릴 때마다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 부드러운 진동도, 두근두근 펌프질을 하고 있는 건강한 심장 소리도 너무 듣기가 좋아서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여운을 즐겼다.

“먼저 샤워하세요. 저녁 비행기로 올라갈 생각이긴 하지만 그도 장 선생님 상태 봐서 결정할게요. 피곤하시면 여기서 그냥 주무시고 올라가도 상관없고요.”

겨우 포옹을 푼 남자가 부드럽게 덧붙인다. 자꾸 시선을 맞추려는 기세여서 인환으로선 남자의 포옹이 풀리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저 무시무시한 퍼런 불꽃은 사라졌지만 언제 다시금 타올라 인환을 질겁하게 할지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슬금슬금 훔쳐본 남자의 표정은 상냥하고 다정한 자신의 수호천사 큐레이터로 되돌아와 있었다.

“……어딜 가고 싶으세요? 가시고 싶은 곳 있으면 말씀하세요. 어디든 데려갈게요. 파리? 뉴욕? 베니스? 뮌헨? 아무래도 근사한 미술관이 많이 있는 도시가 좋겠죠?”

“…….”

“아아, 하긴 아직 그럴 기운이 없으시죠. 괜찮아요. 포천 근처에 친구가 빌려준 별장이 있습니다. 일단은 당신을 그리로 납치하도록 하죠.”

“…….”

“……사랑을 하게 될 겁니다. 장 선생님과 나, 우린 사랑을 나누게 될 거예요, 거기서.”

“…….”

“……당신이 그림으로 꿈꾸던 그 방…… 제가 훔쳐보았던 그 방…… 우린 함께 그런 방을 만들게 될 겁니다…….”

“…….”

다시금 시퍼런 안광에 불이 붙기 시작하는 것 같아 인환은 기겁해서 고개를 떨어트렸다. 남자의 손이 뻗어와 턱 끝을 어루만지며 다시 위를 향하게 했지만 인환은 고집스레 남자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떨지 마요…… 제발…… 제발 두려워하지 마요, 내 사랑…….”

시야가 어둑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남자의 입술이 내려왔다. 찍어 누르는 듯한 격렬한 입맞춤이었다. 상반신이 다시금 억세게 죄어지며 남자의 온몸이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입술이 빨리며 남자의 발기한 성기가 거세게 밀어붙여졌다. 허리가 뒤로 활처럼 휘어지며 남자가 덮치듯 달라붙었다. 게걸음을 걷듯 남자가 정신없이 밀어붙인 끄트머리로 트윈 베드 중 하나가 와 닿았다. 기다렸다는 듯 남자는 인환의 전신을 뱀처럼 친친 휘감은 채 침대 위로 무너지고 있었다. 서로의 젖은 몸 따윈 고려의 대상조차 못 되는 듯싶었다. 어느새 단추가 다 풀려 반쯤 벗겨진 셔츠 속으로 남자의 손가락이 거침없이 쑤셔들었다. 염치없는 도둑은 인환의 몸 이곳저곳을 기어다니며 불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건 입안으로 숨어든 도둑 역시 한가지였다. 기교라곤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 거친 키스였다. 그저 불처럼 뜨겁고 격하고 숨 가쁜 흡입이 있을 뿐이었다. 미친 듯이 인환의 입안을 휘젓고 다니는 남자의 맹렬한 혀뿌리에서 한계까지 몰린 수컷의 욕망이 처절하게 읽혔다. 역시 별로 반항할 생각은 없었다. 강간이라는 이상한 말을 하긴 했지만 남자가 다시 생각을 바꾼 모양이라고 멍하니 생각을 흘렸을 뿐이었다. 이리저리 몸 안을 더듬던 남자의 양손이 마침내 사타구니 틈새로 뻗어왔을 때, 인환은 설핏 몸서리를 치며 남자가 바지를 벗기기 쉽도록 허리를 약간 들어주었다.

팬티와 바지가 한꺼번에 벗겨져 나갔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발가벗은 아랫도리에 한계까지 발기한 자신을 밀어붙이면서도 남자는 여전히 번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신음처럼 안 돼, 안 돼를 거듭 토하며 헐떡이고 있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가냘픈 주저는 대부분 미친 듯한 키스와 함께 단숨에 날아가곤 했다. 남자가 자신의 벨트마저 풀고 앞섶을 열어젖히자 이미 아랫배에 거의 닿을 듯 거대해진 남자의 페니스가 불끈 치솟았다.

……역시 이상야릇해……. 낯선 애무, 낯선 성기, 낯선 체취, 낯선 몸……. 별로 거부감은 들지 않으면서도 남의 옷을 잘못 빌려 입고 있는 듯한 생뚱한 위화감은 여전했다. 남자와 곧 몸을 섞게 되리라는 실감 또한 도무지 나지 않았다. 남자와 한 몸이 되면 이 낯설음도 사라져버리는 걸까?

“……제길, 안 돼!!!!!!”

발기한 남자의 페니스가 막 사타구니 틈으로 파고들려는 찰나, 비명 같은 탄식이 길게 토해졌다. 입술이 뭉개질 것만 같던 격한 키스도, 거센 포옹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갑자기 온몸이 붕 떠오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미처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인환의 몸은 벌써 욕실로 옮겨져 있었다.

“먼저 샤워하세요.”

욕조 안으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남자가 적당한 수온을 맞춘 뒤 샤워기를 틀었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앉혀준 그대로 욕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인환은 남자가 마지막 남은 양말과 셔츠를 벗겨 자신을 알몸으로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쉽지 않으리라는 예감. 남자는 지나치게 신사적이었다. 아니면 지나치게 자기 억제가 강하거나. 신사는 무슨 수로 공략해야 하나. 욕망조차 죽어버린 몸으로 과연 창녀 노릇을 잘할 수가 있을까? 불안한 궁리가 뇌리 속을 떠돌았다. 지금까진 그럭저럭 괜찮은 점수였던 것 같다. 옛 주인은 그래도 섹스를 할 때만은 행복해 보였으니까. 아아, 그렇지. 그는 복수심에 눈먼 심판자이니 당연한 노릇인가? 그로서는 그저 복수심만 충족시킬 수 있다면 창녀의 능수능란한 기교 따윈 필요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긴 애초부터 ‘그’는 성욕과는 거리가 멀었던, 꽤나 까다로운 금욕주의자였다. 금욕뿐인가, 어느 면으로 보면 섹스 자체를 혐오하는 쪽에 가까웠었다. 몸을 파는 남창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점잖고 고상한 취향 자체가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새 주인은 다를 것이다. 잘은 알 수 없지만, 남자는 아마도 수많은 여자들을 홀렸을 법한 연애의 달인으로 보였다. 달콤하고 화려한 외모에, 최고의 수컷다운 능력과 자신감에, 천사 같은 배려심에, 정도만을 걸어온 양갓집 도련님에……. ‘그’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여자들이 혹할 매력으로 가득했다. 여자들과의 평범한 연애가 문득 지루해졌다면, 섹스 테크닉 역시 웬만한 걸로는 만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깁스한 손도 그렇고, 제 손으로 씻겨드리고 싶지만 그건 아무래도 난처한 사정이 될 것 같군요. 짐승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자조적인 대꾸였지만 남자의 어조는 진지했다. 뽀얀 김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남자의 얼굴 표정 역시 긴장한 듯 굳어 있었다. 목 언저리까지 선연한 홍조며, 여전히 불룩하게 솟아 있는 사타구니 사이며, 남자의 욕망은 여전히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소리 없는 감탄사가 절로 뇌리 속을 흘렀다. ……정말 신사네……. 지금이야, 발기부전의 병신이지만, 인환 역시 젊은 날의 통제 불가능한 욕망을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의 자제심은 같은 성을 가진 수컷의 입장으로서도 혀를 내두를 지경의 ‘경이’였다.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으니까 그저 물을 묻힌다 하는 정도로만 간단히 하세요. 아직도 몸이 많이 찹니다. 땀이 날 때까지는 욕조 안에 계시구요. 현기증이 느껴진다거나 하시면 곧바로 절 부르세요.”

조금 부드러워진 상냥한 바리톤이 밀어처럼 달콤한 명령을 던졌다. 어쩐지 목이 메었다. 참지 말라고, 배려해줄 필요 따위 없는 성노예라고 남자를 붙잡기도 전에, 남자는 허물처럼 벗겨진 인환의 옷가지를 들고 재빨리 욕실을 나가버렸다.

주인의 명령대로 꼭두각시는 천천히 가벼운 샤워를 했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나니 겨우 사지의 힘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수시로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아득한 현기증도 더 이상은 생기지 않았다. 이동할 때마다 남자의 팔에 안겨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기뻐해야 할 일일 것이다.

쏟아지는 물소리에 묻혀 남자의 수음 소리가 간간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참을 필요 없는데, 정말로……. 하고 싶으면 해요…… 얼마든지 해도 괜찮아요, 김 선생님…….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남자를 향해 덧붙여보지만, 어쩐지 확실한 언어로 토해지지는 않았다. 이상했다. 실어증에라도 걸린 걸까? 자신의 새 주인은 자신의 목소리마저 사슬로 휘감아 꽁꽁 묶어버린 걸까?

15분쯤 흘렀을까. 느리면서도 가벼운 샤워를 끝내고 욕실 밖으로 나가자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숙박계를 쓰러 내려간 모양이었다.

화장대 옆 휴지통엔 남자가 쓰고 버린 욕망의 잔재가 허옇게 뭉쳐 있었다. 평소의 남자를 두고 생각할 땐 어마어마하게 부끄러울 일임에도, 동요는커녕 아무런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온몸이 단 몇 시간 만에 딱딱한 껍질로 뒤덮여버린 것만 같았다.

알몸을 하고 혼자 멀뚱하게 서 있는 것도 우스꽝스러웠고, 으슬으슬 한기도 느껴져서 인환은 커다란 바스 타월로 몸을 친친 휘감은 채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유혹은 남자가 돌아온 다음에 해도 늦지 않겠지. 아니, 지금 당장은 아닌가? 저녁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간다고 했는데? 아, 그렇다. 포천…… 포천이랬지. 섹스는 거기 가서 할 모양이다. 참, 나. 왜 뜸을 들이려는지 모르겠다. 빨리 끝나버리면 좋을 텐데. 빨리 끝내버려야…… 다시금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을 텐데…….

“……장 선생님……?”

부드럽게 흔들리는 어깨에 눈을 번쩍 떴다.

화사한 꽃미소를 가득 매단 큐레이터가 거의 얼굴을 맞붙이듯 가까이 댄 채 인환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그새 잠이 들었었던가 보았다.

남자는 비에 젖은 슈트가 아닌 커다란 흰색 바스 가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더 주무시겠습니까? 많이 피곤하세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남자의 상냥한 배려를 사양했다.

몇 시간을 잔 건지, 아니면 몇 분을 잔 건지 마냥 얼떨떨했다. 더 자고 싶은 건지, 일어나고 싶은 건지도 잘 판단이 안 됐다. 여전히 이중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창문으론 전혀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남자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는 목적만이 올바른 대꾸의 근거가 되었다.

“……저녁입니다. 7시 조금 넘었어요. 괜찮으시면 식사하고 바로 공항으로 가려고 합니다.”

7시라니. 적어도 두세 시간은 자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서두르면 서울 가는 10시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뭐라 해도 장 선생님 뜻이 우선입니다. 움직이실 수 있겠어요?”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올바른 대꾸를 주었다. 온몸에 한 꺼풀 딱딱한 막이 덧씌워진 마당에 가다가 쓰러진대도 고통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남자의 꽃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왼쪽 입꼬리 너머 움푹 팬 보조개가 말할 수 없이 선정적으로 느껴졌다.

“……꽁지에 불붙은 개처럼 서두르는 제가 한심해 보이시죠?”

“…….”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여유를 잃어버린 경험치는 조금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이렌느와 연애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죠. 아, 이렌느는 이혼한 전처입니다. 첫사랑이기도 하구요.”

“…….”

“……그러니까 본능대로 움직일 겁니다. 당신을 훔치겠다고 했죠?”

“…….”

화사하고 달콤한 미소는 푸르스름한 광기를 담은 음습한 시선에 떠밀려 맥없이 부서졌다. 자신의 상냥한 큐레이터 대신 사랑에 빠진 광인이 남자의 넋을 점령해버린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이내 질겁해선 눈꺼풀을 심하게 깜빡이는 것으로 인환은 극심한 동요를 감추었다. 다행히 시선 또한 자연스레 피할 수 있었다. 남자의 벌어진 바스 가운 깃 아래, 아름다운 쇄골 라인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쪽도 만만치가 않으니까…… 아직 완전히 훔친 게 아니니까…….”

“…….”

“……절대로 여유를 부릴 수가 없어요. 꼴사나워 보여도 참아주세요, 내 사랑…….”

“…….”

내 사랑이라니. 프랑스에서 성장한 사람이라선가, 듣기만 해도 닭살일 멘트를 너무나 쉬이 입에 올리는 남자다. 버터가 줄줄 흘러내리는 느끼 버전임에도, 저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와 어우러지니 마냥 안성맞춤이란 판단이 든다. 노말이든 게이든, 세상에 이만큼 뇌쇄적인 카사노바도 달리 찾기 힘들겠지.

쪽쪽.

가볍게 입술을 빠는 프렌치 키스를 한동안 되풀이하던 남자가 천천히 인환의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풀어진 건지 몸에 감겨 있던 바스 타월은 이미 흔적도 없고, 인환은 벌거벗은 알몸 그대로 남자의 눈앞에 서게 되었다.

감탄과 숭배와 욕망이 복잡하게 뒤섞인 수컷의 강렬한 시선이 가만가만 인환의 알몸을 핥고 있었다. 시선만으로도 범해질 수 있다면 인환의 몸은 금세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다. 남자는 시선으로 빨고, 시선으로 더듬고, 시선으로 깨물고, 시선으로 핥아 먹고 있었다. 온몸 구석구석 남자의 눈길이 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남자는 한참이나 넋을 잃은 채, 시퍼런 맹수의 욕망이 훨훨 흘러넘치는 시선을 통해 인환의 몸 안 깊숙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피부의 숨구멍 하나하나가 남자의 페니스로 가득 채워진 내벽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내벽은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거듭거듭 파고들어오는 거대한 육봉을 아무런 저항 없이 쑥쑥 빨아들이고 있었다. 명기가 따로 없었다. 화냥년 같으니.

“……아직…… 아직은 아니지…… 강간은 안 해. 절대로 안 해…….”

잔뜩 허스키하게 탁해진 목소리가 남자의 목울대를 치며 올라왔다. 어깨와 팔 근처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쓸고 있는 남자의 손가락은 마음속의 사투를 그대로 반영하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 돌아와요…… 어서 빨리 돌아와요, 내 사랑…… 그땐 온몸으로 사랑해줄 테니까…… 안고, 안고, 또 안아서…… 엉망진창…… 돌아버릴 지경으로 범해서…….”

“…….”

“……그러니 돌아와…… 어서 빨리 돌아와줘…… 내가 너무 성급했다고…… 너무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버렸다고 더 이상 자책하지 않게 해줘…… 내 사랑…… 내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나의 여왕이여…….”

“…….”

열에 들뜬 욕망의 신음은 이내 울 것 같은 회한으로 변했다. 여전히 닭살이 죽죽 돋는, 달달하기 짝이 없는 카사노바의 밀어였다. 온몸을 뒤덮고 있는 딱딱한 갑주 탓일까. 역시 수치감은 조금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몇 번 더 품 안에 껴안기고, 키스를 받고, 그보다 좀 더 긴 듯한 진한 애무를 받았다. 결국 흥분을 이기지 못한 남자가 욕실로 도망치듯 사라지고 나서야 인환은 간신히 남자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제부터 뭘 해야 하나 하고 멍한 시선으로 방 안을 굽어보았다. 옷들이 보였다. 완벽하게 세탁된 채 다림질까지 마친 인환의 셔츠와 팬츠, 그리고 얇은 카디건은 속옷과 함께 맞은편 침대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안쪽까지 푹 젖었던 운동화도 보송보송하게 세탁된 상태였고, 남자의 슈트며 다른 옷가지 역시 바삭거리는 깔끔한 비닐에 싸인 채 주인에게 입혀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가 수음하는 소리를 백뮤직 삼아 천천히 옷을 주워 입었다.

확실히,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잠을 잤던 것은 알 수 없는 피로 증세엔 특효였던 모양이었다. 현기증도 전혀 없고, 원래 마비 기가 있는 한쪽 다리의 뻐근함을 빼면 몸의 컨디션 역시 최상급으로 여겨졌다. 남자를 무리하게 배려하다 쓰러질 일은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다.

화장대 거울을 보며 그새 뻗친 정수리 부근 머리카락을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마침 남자가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남자의 표정은 조금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수치감이라기보단 보다 중요한 다른 근심이 남자의 마음속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 같았다.

한결 차분하고 플라토닉해진 시선이 찬찬히 인환을 훑고 있었다. 뻗친 머리를 열심히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는 꼴이 우스웠는지, 남자는 큼직하게 볼우물을 만들며 다시금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귀여운데요, 뭘. 드라이까지 할 필요는 없겠어요, 장 선생님.”

‘내 사랑’ 대신 되돌아온 격조 있는 옛 호칭으로, 남자가 좀 더 몸을 사리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필요 이상 뚫어지게 인환의 몸을 살펴보지도 않았고, 어루만진다든지, 껴안는다든지 하는 자연스러운(맙소사, 어느새 그것이 자연스러워지다니!) 스킨십 역시 자제하고 있었다. 꿈지럭거리는 굼벵이처럼 침대 위에 걸터앉아 묵묵히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있는 인환을 잠시 살피듯 들여다보곤 이내 남자도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청회색 싱글 슈트며 자주색 넥타이, 사선으로 둘러멘 카멜색 루이비통 가방까지, 남자는 어느새 러프하고 세련된 큐레이터 차림 그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두려운 시선으로 핥듯이 굽어보지도 않고, 자신의 몸을 만지지 못해 안달인 호색한처럼 집적거리지도 않으니, 그야말로 예전 자신의 수호천사 그대로였다. 오로지 그림만 보고, 그림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아니, 굳이 서로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오로지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로만 다시 존재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손 이리 주세요, 장 선생님.”

아아, 물론 그건 더 이상 현실이 아닌 이미 잃어버린 과거의 기쁨이리라. 남자는 그림 대신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그림에 대해 얘기하는 대신 사랑의 밀어를 건네길 더 좋아하게 되었고, 이심전심 묵묵히 서로를 비추어 보는 대신 이렇게 자신의 몸에 직접 닿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부축을 하기 위한 명분을 그대로 살리면서 남자의 단단한 손아귀가 인환의 왼손을 힘차게 움켜쥐었다. 깍지라도 낀 듯 단단히 결합된 서로의 왼쪽 손가락과는 별개로, 남자의 오른손은 인환의 허리를 감은 채 껴안듯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울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인환 또한 묵묵히 남자의 요구를 수용하고 있었다. 과연 약간의 숨구멍이라도 뚫려 있는 게 확실한 걸까? 생각하기조차 두려운 의심이 아찔하게 눈앞을 스쳐갔다.

“……뭘 먹을까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

“일식 좋아하신다는 건 아는데…… 회 먹을까요?”

“…….”

“……아니지, 비행기 탈 거니까 아무래도 가볍게 드시는 편이 현명하겠군요. 술도 좋지 않겠고…….”

“…….”

“제주도엘 왔으니 평범하게 옥돔 구이가 어떨까요?”

“…….”

첫 데이트에 나서는 소년처럼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를 제지할 만한 수단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밀어와 다름없는 ‘뭘 먹을까요’ 시리즈를 완결 짓기 위해, 인환은 남자가 ‘옥돔’까지 행진했을 때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막 지나쳐온 로비에서 호텔 직원들이며 간간이 눈에 띄는 객실 손님들로부터 의혹의 시선을 잔뜩 받아낸 터였다. 고통스러운 남자의 밀어를 끝장낼 수만 있다면 말린 소가죽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까요……?”

한쪽 볼우물이 파이며 화사하게 퍼지는 꽃미소에, 막 들어선 호텔 레스토랑 안의 시선들이 일제히 남자에게로 몰려들었다. 몸을 덮은 딱딱한 껍데기가 푸르륵하니 잠시 동요했다. 하지만 역시 그저 그뿐으로, 인환은 평소의 자신처럼 얼굴을 붉히는 대신 몽롱해진 시선으로 심드렁하게 레스토랑 안을 굽어보았을 뿐이었다.

까무룩 잠든 인환을 남자가 다시 깨웠을 때는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가로등조차 안 보이는 시골 오솔길을 남자의 승용차가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시곗바늘은 벌써 12시를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법 무리한 강행군이었다.

서둘러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바로 호텔 체크아웃을 끝낸 남자가 한 시간 정도를 운전해 도착한 곳은 제주국제공항이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아슬아슬하게 보딩 체크를 한 뒤 비행기가 이륙한 시각이 9시 40분. 김포공항 국내선 청사에 도착한 시각이 10시 반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도 여전히 장대비를 뿌려대던 제주도와는 달리 서울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수은주도 제주도보다 꽤나 높게 올라간 모양으로, 에어컨으로 서늘하게 식어 있는 공항 대합실을 빠져나오자마자 달려든 대기에선 후덥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물론 여정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서늘하고 한적한 한밤의 공항 대합실을 빠져나오니 다시금 경기도 포천까지의 기나긴 드라이브가 한계까지 지친 인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공항 주차장에 주차해두었던 남자의 승용차에 인환을 태운 뒤, 마치 첩보전을 치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단호하고 빠른 움직임으로 김포공항을 빠져나왔었다.

언제 잠이 들었던 것인가는 도무지 기억에 없다.

안정적인 진동과 창 밖으로 펼쳐지는 도시의 야경에 멍하니 시선을 주는 사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졸음이 쏟아졌었다. 오늘 하루 종일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훨씬 더 피곤하리라 여기긴 했지만 남자를 배려할 염치 따윈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긴 마지막으로 운전을 해본 지도 까마득하니, 괜히 배려한답시고 나섰다가 사고나 내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곧 도착합니다, 장 선생님. 많이 피곤하시죠?”

“…….”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남자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붙이고 있었다. 꽤나 피로할 법한데도, 남자는 제주도에서 저녁밥을 먹을 때 그대로의 여전한 빛과 활력으로 넘쳐났다. 옥돔 대신 산삼이라도 구워 먹은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별장 주변의 공기가 맑으니까 오늘 밤 푹 주무시고 나면 피로도 금방 풀리실 겁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

곧 조용해진 남자에 어느새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앉으며 수마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다시금 깊은 잠에 들 수는 없었다. 차창에 시소처럼 이마를 부딪치기를 몇 번, 서서히 속도를 줄이던 차가 마침내 완전히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일정하게 몸을 자극하던 진동이 사라지자마자 그토록 무겁게 내려앉던 눈꺼풀도 순식간에 또릿또릿해졌다.

차 밖으로 내려선 남자가 부지런히 보닛을 돌아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깜깜한 어둠에 익숙지 않은 눈은 뭔가 저절로 지지대를 찾게끔 했다. 잘 훈련된 기사의 손이 잽싸게 뻗어와 차 밖으로 내려서는 인환을 부축해주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시커멓게 정면을 가로막고 있는 2층 석조 건물이 보였다. 총 건평이 150평이 채 넘을까 말까 한, 소박하면서도 섬세하게 설계한 전형적인 전원주택이었다. 주택 외관을 빙 둘러싸고 있는, 꽤 넓게 조성된 정원이며 잔디밭들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지만, 집 안이고 집 밖이고 조명이라곤 완전히 꺼져 있어 그 정확한 모양새를 가늠할 순 없었다. 다만, 코끝에 진동하는 갖가지 꽃향기들로 미루어 잘 가꿔진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것만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아마도 날이 완전히 밝아야만 그 아름다운 자태를 온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공기는 청량했고, 기온 또한 한여름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여겨질 정도로 선선한 편이었다. 별장 너머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빛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별장은 제법 깊은 산중에 위치해 있는 듯싶었다.

몇 개의 돌계단을 넘어 현관 가까이 다가간 남자가 둘러멘 크로스백에서 PDA를 꺼내 들었다. 아마도 미리 기록해둔 현관 비밀번호를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멍하니 코끝을 파고드는 꽃향기에 몸을 맡기고 있는데, 삑삑거리는 전자음에 이어 찰칵 하고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 앞에서 머뭇거린 지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남자는 인환의 손을 잡은 채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눈을 찌를 듯 밝은 빛이 갑자기 환하게 시야를 점령했다. 전자동 센서인 모양으로 두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불이 켜지고 보일러가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눈에 들어온 실내는 놀랍도록 넓고 심플했다. 벽이며 가구며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으로 장식이 되어 있어 더욱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프로젝트 시스템과 오디오, 그리고 5인용 소파와 탁자 등의 가구는 최소한의 것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거실 삼 면이 다 유리인 듯 그 벽들을 가리고 있는 것은 진줏빛의 심플한 롤 스크린이었다. 그저 커다랗게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공간은 페치카의 의미인 모양으로, 타다 남은 나무토막과 덜 치워진 잿더미가 지나치게 미니멀리즘틱한 공간에 그나마 온기를 부여해주고 있었다. 남자의 친구 소유라서인 걸까? 외관은 어떤지 몰라도 실내 장식은 어디를 보나 지나칠 정도로 모던했다. 평범한 사고방식을 가진 재산가라면 별장으로 쓸 전원주택을 이렇게까지 단순하게, 아니, 실은 대담하게 디자인하진 않았으리라.

“……좀 썰렁하죠, 장 선생님?”

웃음기 가득한 어조로 남자가 말을 붙여왔다. 오랫동안 비어 있었음을 증거하듯 남자의 목소리는 집 안 구석구석으로 퍼지며 듣기 좋은 메아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불문학을 전공하는 후배인데 결벽증이 심한 친구죠. 저 같으면 이렇게 썰렁한 몰골로 돈을 처바르진 않겠어요.”

“…….”

“아뇨,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결벽증은 심해도 제가 어지럽히는 건 도리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놈이니까요. 뭐, 제게 빚을 많이 진 놈이니까 당분간은 얼마든지 벗겨먹어도 됩니다.”

“…….”

“덥지 않으세요? 에어컨 켤까요?”

“…….”

멍하니 고개를 흔들자, 남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달콤한 미소로 대꾸를 준다.

“주변이 산이라 시내보다는 공기가 많이 내려가 있죠.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면 오히려 추위가 느껴질 정도일 겁니다.”

내내 움켜쥐어져 있던 손이 비로소 풀어지나 싶더니 창가로 다가가고 있는 남자의 등이 보였다.

창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작은 리모컨 하나를 찾아냈고, 이어 리모컨을 작동시키자마자 벽을 가리고 있던 로만셰이드가 느리게 올라가며 창문이 열렸다. 추위가 느껴질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습기를 머금은 청명한 산 공기가 단숨에 실내로 전해지고 있었다.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로만셰이드로 보아 바람도 약간 불고 있는 모양이었다.

“……피곤하실 테니까 침실부터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샤워는 오후에 했으니 그대로 주무셔도 될 것 같아요. 옷 갈아입고 누우시면 제가 물수건으로 발과 다리만 좀 닦아드리고 주물러드리겠습니다.”

어느새 도로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2층 계단 쪽으로 인환의 허리를 끌고 있었다.

……발을…… 닦아준다고……? 다리를 주물러……?

남자의 행복한 의지에 질질 끌려가며, 멍하니 남자의 달콤한 밀어를 곱씹어본다. 빡빡한 여정에 짝짝이 다리가 좀 뻐근하긴 하지만, 인환은 그토록 과한 헌신까지 받을 마음 따윈 추호도 없었다. 정말로 남자가 자신의 발을 닦아주기라도 한다면, 인환은 부끄러움과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고 방바닥에 머리를 짓찧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띠리리리링~~~디링~링~~.

귀청을 두드리는 익숙한 전자음에 남자가 문득 걸음을 멈춘다. 소리는 남자의 재킷 안주머니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울리지 않고 있던 휴대전화가 왜 이제야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걸까. 막연한 의문이 귓가를 스쳐갔다. 좀 전에 PDA를 작동시키며 남자가 휴대전화의 전원도 함께 켰다는 것을 인환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여보세요?”

허리에 감긴 남자의 손가락이 살금살금 애무를 훔치고 있었다.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긴 했지만 이 순간 남자의 온 신경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여전히 인환이었다.

“여보세요? 말씀하십시오. 누구십니까?”

[…….]

“……전화 잘못……?!!!”

[…….]

“…….”

[…….]

“……당신…….”

[…….]

……두근…….

―장인환!!!!!!!!!!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장인환!!!!!!!!!!!!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용건을 말해.”

[…….]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용건을 말씀하십시오, 문 이사님.”

[…….]

―장인환!!!!!!!!!!!!!!!!!

남자의 귀에 걸린 폴더가 아무리 가까운들 숨소리까지 전해질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인환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침묵 저 너머로부터 비명처럼 다가든 빈사의 숨길을.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거대한 울부짖음을.

물론 아마도 환청이리라. 환청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자가 저리 잔뜩 굳은 얼굴로 맹렬하게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내 것은 기운을 좀 차렸나?]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이틀 주지…….]

“…….”

[……이틀 안에 제정신으로 돌려놔. 찾으러 갈 테니까.]

“닥쳐.”

[……네가 저지른 미친 짓이니까 제대로 수습해. 박살 나고 싶지 않으면.]

“닥쳐.”

그르렁거리는 음산한 괴물의 소리가 아득하게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이틀…… 이틀이야…… 돌려받으러 가겠다.]

“이미 늦었어. 넌 우릴 못 찾아.”

옛 주인의 포효였다. 아니, 현 주인의 의지였다. 미래의 주인이 되돌아와 호령하고 있었다. 다시금 준엄하게 떨어진 심판의 소리였다.

[……큭큭큭, 우리? 우리라고……?]

“어디 찾을 수 있으면 찾아내봐. 이쪽이야말로 기다려주지.”

[……이틀이 한계일걸? 내 것은 나 없이 이틀 이상은 버티지 못해……. 그러니 기다려보라구, 큐레이터 씨. 조만간 환장하게 될 테니까…….]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돌려받으러 가겠다. 그러니 다시 숨 쉬게 만들어놔.]

“미친 새끼!!!”

쾅!!! 와장창!!! 창!!!

박살이 난 채 이리저리 흩어지는 휴대전화의 파편들이 보였다. 와락 움켜쥐어진 두 팔이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주인을 닮은, 아니, 새 주인인 것도 같은 이상야릇한 남자가 인환의 몸뚱이를 질질 끌어당기고 있었다. 새 주인의 충실한 꼭두각시일 송충이는 열심히 열심히 새 주인의 의지에 봉사하려 기를 썼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몸은 납덩이처럼 늘어지며 자꾸만 밑으로 까라지고 있었다.

“……장 선생님, 제발!!!”

―장인환!!!!!!!!!!!!!!!!!

“……이러지 마요…… 돌아와요…… 다시 나를 봐요…… 보라구…….”

―장인환!!!!!!!!!!!!!!!!!

“……사랑을 하게 될 겁니다. 진짜 사랑을 나누게 될 거예요…….”

―장인환!!!!!!!!!!!!!!!!!

“……제발…… 제발 내 사랑, 눈을 떠요…… 눈을 뜨고 나를 봐요…… 당신이 원하는 상대는 나야…… 나라구…… 보이지 않아요? 저기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방이라구요. 당신과 나, 우리 둘만이 알 수 있는 방이란 말입니다. 알겠어요?”

―장인환!!!!!!!!!!!!!!!!!

“……제기랄, 내가 데려갈 거야…… 그 자식이 아니야, 나야!!! 나라구!! 내가 데려갈 거란 말이다!!!”

―장인환!!!!!!!!!!!!!!!!!

출렁 하고 몸뚱이가 파도를 탄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허우적거리는데, 누군가의 손이 자꾸만 바다 밑으로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몸은 어느새 발가벗겨진 채 거대한 인어의 희롱을 받고 있었다. 한계까지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기 위해 커다랗게 입을 뻐끔거리자 광란에 빠진 인어의 입술이 흡반처럼 달라붙어왔다.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어린애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런 자신이 불쌍해 보였는지, 끙끙거리며 허리를 흔들기 시작한 인어가 따라서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숨을 쉬기도 버거운데 지독하기 짝이 없는 울음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끔찍한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선 그저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젓는 수밖엔 없을 것 같았다.

“……윽, 흑, 흣!!! 흐아앗!!!”

거대한 인어가 버르적거리는 송충이의 몸뚱이 위해서 길게 토정하고 있었다. 뻐끔뻐끔 숨을 할딱이고 있는 송충이의 입술 위로 거대한 인어 이빨이 덥석 다가들었다. 비죽비죽 솟아난 수많은 송곳니 틈으로 검붉은 수액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송충이는 통째로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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