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2003년 7월. 장인환(張仁歡)
깊고 어두운 수면의 늪으로부터 인환의 의식을 깨운 것은 코끝으로 흐릿하게 파고드는 음식 냄새였다.
갓 구운 듯한 고소한 빵과 베이컨 냄새에 무의식적으로 코를 벌름거리며 인환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밤에 얼핏 눈에 들어오던 아래층 거실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모더니즘 계열로 장식된 10여 평 크기의 널찍한 침실이 생경하게 시야로 밟혀들었다. 남쪽 벽면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창문이 진주 빛깔의 두꺼운 롤 스크린에 가려진 탓인지, 방 안은 정확한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어둑어둑하게 물들어 있었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앤틱한 모양새의 자명종 시계를 더듬어서 보니 11시 15분, 한참이나 늦은 기상이었다.
낯선 침실과 낯선 기상이 만들어내는 생뚱한 위화감에, 인환이 적응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혼란스러운 기억의 연속은 어젯밤 기절하듯 잠에 떨어지기 직전, 아름다운 큐레이터가 자신의 옷을 벗기고 온몸에 키스를 하던 것을 마지막으로 완벽하게 끊겨 있었다.
‘남자’에 의해 폭력적이다시피 광기 어린 몸짓으로 벌거벗겨졌던 상태를 기억하고 있건만, 현재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꽤나 큰 사이즈의 고급스러운 파자마였다. 아마도 기절한 후 남자가 입혀주었을 것이다. 꽤 오랜 시간의 수면 때문인지 근육 이곳저곳이 뻐근한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봐서, 남자는 이번에도 삽입 섹스를 시도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사나운 풍랑과도 같았던 남자의 몸짓과 광란하던 붉은 눈빛들이 확실하게 기억이 났다.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기기 직전, 인정사정없이 범해지겠구나 하고 조용히 체념했었던 것도. 그 정도로 성적인 자극이 가해진 상태에서 그만둘 수 있는 남자라니,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는다.
비록 지금은 발기 부전에, 성적인 쾌락을 지각하는 감각을 거의 잃어버린 인환이지만, 그래도 인환 역시 생물학적으로 ‘남자의 몸’을 갖고 태어났다. ‘남자의 몸’이 지닌 섹스의 메커니즘이란 것을 모르지 않는단 얘기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갖고 있는 성적 쾌락의 메커니즘이란 단순성의 극치라고 단언해도 무방할 정도로 매우 기계적인 것이다. 그러니 큐레이터가 자신의 몸을 상대로 증명해 보여주고 있는, 저 아슬아슬할 정도로 위태로운 균형은, ‘그 단순성을 단순히 의지력만으로도 지배할 수 있다’고 하는, 꽤나 범상치 않을 남자의 개성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처럼 믿기 힘든 자제력의 남자가 아닐 수 없단 얘기…….
침대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켜는 것으로 뻐근해진 근육을 달래보았다. 습관처럼 욕실을 찾아 걸음을 옮기지만 별로 샤워를 할 필요까진 없어 보였다. 몸은 쾌적한 느낌이 들 정도로 깨끗한 편이었다. 아마도 역시 남자의 배려일 것이다. 언젠가처럼 젖은 타월로 닦아주었겠지.
생리적인 배설을 하고, 이를 닦고 세수까지 마친 다음 욕실을 나왔다. 머리도 감고 싶었지만 역시 깁스한 팔이 걸렸다. 왼손 하나로 못 감을 것도 없지만 입고 있는 파자마가 비누투성이가 될 것이 뻔했다. 이제쯤 깁스를 풀 시기인 것 같지만, 이 외진 별장에서 당분간은 창녀로 지내야 할 것 같으니 좀 더 참아보자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았다. 파자마는 아주 질이 좋은 최고급품이었지만 파자마를 입고 식사를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싶었다. 다행히 어제 입고 왔던 인환의 옷이 단정하게 개켜진 채 창가의 콘솔 위에 놓여 있었다. 어제 입고 있었던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속옷이었는데, 입던 속옷 대신 인환의 사이즈보다 한 사이즈가 더 큰 새 트렁크 팬티가 포장 상자에 담긴 채 놓여 있었다. 아마도 별장의 주인일 남자의 속옷일 테지만, 새것이라 그런지 그닥 찝찝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니 제법 더위가 느껴졌다. 방 안과 욕실을 왔다 갔다 한 것뿐이건만, 그 정도 운동으로도 조금씩 땀이 배어 나왔다.
확실히 한여름 날씨고, 침실엔 에어컨이 켜 있지 않았다. 창문은 활짝 열린 채였지만, 그도 두꺼운 롤스크린에 가려서 바람이 들어올 통로는 막힌 셈이었다. 롤스크린을 걷어볼까도 싶었지만, 작동법을 잘 모르겠어서 곧 포기해버렸다. 그나마 별장이 산속에 있어선지 여러 불리한 조건에 비해 더위는 그닥 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음식 냄새가 좀 더 강렬해졌다. 무언가를 켜놓은 모양인지 제법 시끄러운 소리가 거실 가득 퍼지고 있었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홈쇼핑 방송의 쇼 호스트가 열심히 물건을 홍보하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는 중인 커다란 프로젝션 TV가 보였다.
남자는 거실 한쪽 벽에 설치된 페치카 옆에 선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남자가 TV 화면에 제법 진지하게 시선을 주고 있는 걸 보니, 그저 무의미하게 TV를 켜놓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남자는 잿빛의 저지 트레이닝팬츠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올라붙은 탄탄한 엉덩이 근육이며 허벅지 근육이 유난히 두드러지는 걸로 봐서 역시 별장 주인의 옷을 빌려 입은 모양이었다. 별장 주인의 옷들은 인환에겐 한 사이즈가 컸고, 남자에겐 한 사이즈가 작았다.
커피 잔을 든 채 부드럽게 흘러드는 햇빛을 통째로 받고 있는 남자는 아름다웠다. 약간 긴 듯한 머리카락을 목덜미 근처에서 자연스레 층지게 아우터로 커트한 유럽풍 헤어스타일이며(뷰티숍 아가씨들이 이를 ‘댄디 롱 웨이브’ 스타일이라고 부른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도시적인 러프한 실내복이며, 느슨하게 풀어진 표정 등등, 기왕의 빼어난 용모와 더불어 서구적인 이미지까지 덧붙여지니 도시의 보헤미안 여피 왕자님이란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집에서조차 캐주얼보다는 클래식한 귀족의 옷을 고집하는 ‘그’와는 참으로 다른 스타일이었다. ‘그’가 직선이라면 큐레이터는 곡선이었다. ‘그’가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군림하며 전진하는 지상의 폭군이라면, 큐레이터는 주변을 훌훌 벗어던지고 홀로 하늘을 나는 자유로운 보헤미안이었다.
“……오가피가 몸에 그렇게 좋다는군요, 장 선생님.”
아름다운 남자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며 그를 떠올리고 있었기에, 인환은 느닷없이 들린 남자의 한마디에 움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TV에 열심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어, 남자가 자신의 기척을 알아채고 있는 줄은 몰라서였다.
“혈압에도 좋고, 스트레스와 신경 쇠약에도 그만이라네요. 애들한텐 키를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하고요. 관절염에도 좋고, 무엇보다도 기력을 보호한다고 합니다. 정력에도 좋다는 얘기지요.”
남자가 열심히 거론하는 상품은 바로 TV에서 선전 중인 상품이었다. 왕왕 울리는 프로젝션 스피커를 통해 쇼 호스트의 격앙된 목소리가 남자가 한 얘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선전하고 있었다. 남자는 여전히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빛내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연인의 눈빛이어서 인환은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세련된 여피 왕자님이 홈쇼핑 애청자라는 사실은, 또한 상당히 건강에 신경을 쓰는 웰빙 보보스족이라는 설정은 무척이나 의외인 셈이었다. 그런데 그 의외성 또한 어쩐지 여피 왕자님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보헤미안적 기질과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쇼 호스트의 과장 광고(가 틀림없겠지. 인환으로서는 홈쇼핑 업체들의 격앙된 선전들이 늘 너무 과하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를 철저하게 믿고 있는 듯 눈을 빛내는 남자가 몹시도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바로 주문하라네요. 장 선생님도 드셔보시겠어요? 저도 먹어볼 생각인데, 둘이 함께 먹어보면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왜, 위약 효과라는 말도 있지요, 선생님? 전 몸에 좋다는 건 거의 다 먹어보는 편인데 그게 위약 효과인지, 아니면 진짜 어느 정도 효과를 가지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남자가 커피 잔을 페치카 선반 위에 놓곤 거실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부지런히 다가간 곳은 거실 소파 옆으로, 남자의 크로스백이 놓여 있는 곳이었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낸 남자는 좌탁 위의 전화 수화기를 들더니 즉시로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자동 주문을 하면 천 원이 더 저렴하다는 너스레에 인환은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무슨 횡재라도 하는 거라는 듯 남자의 ‘천 원이 저렴하다’는 한마디는 그야말로 전투에 이긴 자의 승전보를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제 보니 남자는 보헤미안 여피도, 건강 염려증에 걸린 보보스 웰빙족도, 세련된 도시의 왕자님도 아닌 모양이었다. 대형 할인마트나 공짜를 무척 밝히는 쪼잔 보이가 남자의 진실한 정체인 건지도 모른다고, 인환은 심각하게 남자를 재평가했다. 할인마트 시식 코너를 돌며 공짜 음식을 시식하는 남자의 모습을 상상하니, 연달아 웃음이 절로 터졌다.
슬쩍 이쪽을 향하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주 찰나지만, 자신의 웃음을 발견하고 안도한 듯한 남자의 표정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로 찰나의 순간이라서 자신이 착각을 한 건지, 진짜로 남자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건지는 잘 판단이 안 됐다.
“……제가 드린 클로렐라는 잘 드시고 계시죠?”
자동 주문 전화를 걸면서 남자가 쾌활하게 물어온다. 클로렐라? 기억을 더듬기 위해 미간을 좁히자, TV를 향해 있던 남자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다.
“잊고 계시는군요. 섭섭합니다, 장 선생님.”
“…….”
“그날 드린 건강식품인데 안 드시고 계시죠?”
“…….”
한참이나 기억을 더듬은 끝에 인환은 지난 개인전 리셉션 날, 남자가 전시장 앞에서 선물했던 자그마한 상자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그날 집에 돌아와서 어디 서랍에 넣어둔 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건강식품이라기에(인환은 그런 유의 식품들에 그닥 호의를 가진 편이 아니라) 그저 건성으로 생각했고, 무엇보다도 그 직후 리셉션장에서의 폭풍 같은 사건들이나, 다음 날 바로 연인에 의해 제주도로 끌려오는 바람에 남자의 정성스러운 선물에 대해선 까맣게 잊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안 드시고 계시는군요…….”
“…….”
“그건 진짜로 좋은 식품이라는데…….”
“…….”
“……에이, 이놈의 오가피도 그냥 사지 말까 보다.”
“……?!”
“장 선생님도 안 드시는데 제가 혼자 무슨 재미로 먹겠어요? 저 혼자만 웰빙 하긴 안 내켜요,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죠.”
“……!!!”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남자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거의 완성되어가던 자동 주문 천 원 할인의 횡재도 잃고 말았다.
“……이제부터 제 건강은 장 선생님께 달려 있어요. 장 선생님께서 안 드시면 저도 안 먹을 겁니다. 그러니 클로렐라 꼭 드세요. 서울에 올라가면 제가 먹기 시작한 것 있으니까 함께 나눠 먹어요. 아셨죠?”
“…….”
“……장 선생님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됐으니 다시 금연 시작입니다. 끊기가 정말 힘들지만 장 선생님 생각하면서 참아볼 생각이에요. 장 선생님 때문이라면 쉬이 끊을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선생님과 떨어져 있는 단 몇 분도 아깝게 생각이 되곤 하니까요.”
남자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장난꾸러기같이 응수했다. 자잘하게 부서지는 햇살처럼 환하고 아름다운 미소가 남자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남자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다시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하라고 말하고 싶은데, 여전히 입술이 마비라도 된 듯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왜 이렇게 말을 할 수 없는 건지. 분명 어제부터인 것 같은데. 어제 남자를 따라나서면서부터…….
마음속에서 몇 번이나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다시 주문하세요 하는 말을 되뇌다간 이내 포기했다. 정말로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을 남자가 알게 된다면 몹시 걱정을 할 것 같았다. 남자의 ‘오가피’에 대한 아쉬움은, 그래도 클로렐라나 오가피를 먹는 것보다 담배를 끊는 것이 건강엔 더 도움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접었다. 정말로 자신 때문에 담배를 끊을 수 있다면 그도 좋은 일이겠지. 기술 좋은 창녀가 돼서 남자의 욕망을 마음껏 배설하게 해주고, 덤으로 금연까지 선물한다면 꼭두각시 창녀로선 대단한 업적을 이룬 셈이 된다. 소중한 남자를 위해. 소중한 그림을 위해. 그래…… 이 세상에 자신을 그나마 붙여주고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의미를 위해. 하지만 한편으로 인환을 위해 금연을 노력한다는 남자의 한마디는 저 새까만 심연 깊숙한 곳에 가두어버린 과거의 어느 한때를 떠올리게 했다. 자신 역시 한때 목숨이었던 ‘연인’을 위해 금연을 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필사적으로. 하지만 그 노력은 결국 ‘연인’과의 파탄이 나고서야, 그것도 담배를 피울 수 없는 인위적인 공간에 갇히고 나서야 간신히 실현될 수 있었다. ‘연인’이 없을 때의 일시적인 금연이 오히려 반작용을 불러 흡연 양은 더더욱 기하급수적으로 늘기만 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연인’을 완전히 잃고 나서야 겨우 금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너무 애써서 노력하진 마요……. 속으로 남자를 향해 가만히 중얼거렸다. ……건강을 위해 금연을 시도하는 건 좋지만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는 그런 노력 따윈 하지 마요…… 그런 건 노력하는 게 아니야……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랍니다…… 그건 저주받은 노력이거든요…… 그런 노력을 하면 저주를 받아요…… 분수에 맞지 않는 걸 바라면 저주가 내려와요…… 원하는 것을 절대로 손에 쥘 수 없는 가혹한 저주가요……. 멍하니, 남자가 그저 이심전심으로나마 알아들어주기를 기원하며…… 되풀이, 되풀이해 한참을 중얼거렸다.
“……이리 오셔서 식사하세요, 선생님. 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먹었습니다. 늦게까지 주무시게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어제 많이 고단하셨지요?”
어느새 식탁 곁으로 다가간 남자가 여전히 부서질 듯한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했다.
자동인형처럼 남자의 손끝만을 응시하며 식탁으로 다가갔다. 남자가 마치 숙녀를 에스코트하듯 식탁 의자를 빼주었고, 인환은 몹시도 황송스러워 당혹해하며 남자의 극진한 배려를 받아들였다.
식탁 위엔 늦어도 한참 늦은 잠을 깨게 만들어준 고소한 빵과 베이컨, 그리고 반숙 달걀과 크림수프와 샐러드 등, 간단하면서도 정성이 듬뿍 담긴 아침 식탁이 펼쳐져 있었다. 남자가 그곳에 마지막 화룡점정을 찍듯 포크를 인환에게 건네주곤 맞은편에 앉았다.
“……어서 드세요, 선생님. 오른손 깁스 때문에 불편하실 것 같아 달걀과 베이컨은 드시기 좋게 제가 미리 잘라두었습니다. 혹시 제가 마주 앉는 게 불편하시면 말씀하시고요.”
버릇처럼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남자가 덧붙였다. 잠시 남자의 말을 곱씹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알몸까지 속속들이 다 보여준 꼭두각시 창녀 주제에 새삼 남자가 쳐다본다고 의식을 할 까닭이 없었다. 남자가 다시금 자신의 구원의 천사였던 근사한 큐레이터로 되돌아와준다면 모를까, 인환은 남자의 시선이 별로 두렵지 않았다. 화가의 자격으로라면 남자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모든 모습에 수치감과 자격지심을 느끼고 괴로워했겠지만, 욕망의 대상인 창녀의 신분이라면 굳이 거리낄 턱이 없었다.
인환의 말없는 대꾸에도 온화한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에 꽤 허기를 느끼고 있었기에 인환은 열심히 식사에 몰두했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식사가 끝나는 10여 분 동안 그저 조용히 인환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제 내내 느껴지던, 감탄과 숭배와 욕망이 복잡하게 뒤섞인 수컷의 강렬한 시선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표정은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눈빛 역시 고요했다. 그것이 남자 나름대로의 배려인지, 아니면 인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인내한다고 해도 남자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사모하는 연인에 대한 애틋한 배려요, 육욕을 불러일으키는 연인에 대한 격렬한 인내였다. 같은 길을 가는 예술적 동지로서의, 즉 흠모하는 화가를 대하는 큐레이터로서의 플라토닉한 동경도 아니었고, 그저 지극히 육체적 욕망만을 불러일으키는 화류계 여자를 바라볼 때의 저속한 음란도 아니었다. 인환이 남자의 시선에서 발견하기를 구하는 것은 후자의 두 가지 경우뿐이었으나, 남자의 눈빛은 좀처럼 변화의 조짐을 보일 것 같지 않았다. 일단 한번 몸을 섞고 나면 달라질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제발 그러길 바라 마지않지만, 그 역시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이…… 그 괴롭고도 두려운 것이…… 저 아래, 심연 속에 봉인해버린 그것이…… 끊어내기에 얼마나 질기고 또 질기며, 모질고 또 모진 것인가를 아는 까닭에, 인환으로선 더더욱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일단 그것에 한번 걸려들고 나면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박살 내버린다는 것을 이 남자는 알까? 자신 혼자만의 인생뿐 아니라 주변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 동료, 그 모든 소중한 인연들까지 산산조각 내 잡아먹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까? 저 남자는 과연 그걸 알고도 그 길로 뛰어들려고 하는 걸까? 인생뿐만이 아니었다. 고작 인생의 실패라는 것 따위는 넋의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희생일 터였다. 넋의 죽음이라는 것, 영혼의 죽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인간 존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남자가 과연 알고 있을까? 과연 알고나 있는 걸까? 아니,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이 생(生)이 다하고 다시 몇 번의 생으로 거듭난다 해도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을 그 깊고 깊은 어둠을, 도무지 극복이 불가능할 심연을, 남자는 도대체 감이라도 잡고 있기나 하는 걸까……?
“좀 더 드시지요, 선생님.”
식탁 위에 차려진 분량은 인환의 평소 식사량의 거의 두 배에 가까웠기에 실컷 먹어치우고도 반 정도가 남아 있었다.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자 남자의 얼굴에 근심이 걸렸다.
“그거 가지고 기운이 나시겠어요? 식욕이 없으신 겁니까?”
식욕이 없다니, 평소보다 훨씬 더 포식을 했구만. 머릿속으로 반론을 제기하며 남자를 말갛게 바라보았다. 남자의 눈에 비친 근심이 과장이 아닌 걸로 봐서 남자 역시 버려두고 온 옛 주인처럼 대식가인 모양이었다. 하긴 둘 다 비슷한 거구의 덩치를 갖고 있으니, 그를 유지하려면 식사량 역시 보통 이상일 것이다.
“……억지로 드시라는 건 아니니 그런 눈으로 바라보진 말아주세요, 장 선생님. 무슨 일이든 제가 장 선생님께 억지로 강요하진 않을 겁니다. 정말 믿어주시면 좋겠어요. 식사는…… 아무래도 원래 그렇게 위가 작으신 모양입니다. 그렇죠?”
남자가 조용히, 쓸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꾸를 주자 남자가 몸을 일으켜 세운다. 너무나 우아하면서도 재빠른 동작이어서, 인환이 자신이 치우겠다고 미처 만류를 하기도 전에 남자는 벌써 식기 세척기 속에 더럽혀진 접시들이며 포크와 스푼들을 차곡차곡 집어넣고 있었다.
“……곧 별장을 떠날 겁니다. 준비하실 일 있으면 준비하세요, 선생님.”
남자가 식기 세척기 버튼을 누르며 의외의 말을 했다. 거실로 가야 할지, 아니면 주방에서 남자가 식탁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야 할지 우물쭈물 남자의 하는 양만 지켜보던 인환은 모든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그 사람이 휴대전화 위치 추적을 해올지도 모릅니다. 비겁하게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것 같아 몹시 언짢지만, 그래도 선생님을 훔친 지 만 하루 만에 그 사람에게 도로 뺏기긴 싫으니까요. 선생님 앞에서 그 사람과 승강이를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도 괴롭고요.”
말을 마친 남자가 잼 병과 버터를 냉장고 안에 넣었다.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듯한 남자의 태도에서 어쩐지 인환의 반응을 몹시 의식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남자의 우려대로, ‘무언가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남자에게 감히 반론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일단 말이 잘 안 나오는 것도 문제였고(정말로 실어증에라도 걸린 게 아닐까 슬슬 걱정이 되고 있었다. 혼자 있을 때 말하는 연습이라도 해봐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이미 남자의 꼭두각시가 되기로, 그를 새로운 주인으로 섬기기로 한 마당에 무슨 반항이란 말인가 싶기도 했다.
……어서 빨리 남자와 몸을 섞어야 할 텐데…….
바로 이동해야 한다는 남자의 명령을 굳이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막연한 조급증이 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엔 기절하는 바람에 남자와 제대로 몸을 섞지 못했다(자신이 만약 의식이 말짱한 상태로 좀 더 유혹을 했더라면 남자의 독한 자제심도 쉬이 무너졌을지 누가 알겠나). 이제 식사도 마쳤으니 슬슬 남자를 유혹해보기로 작정을 굳히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또 이동한다니……. 한시라도 빨리 남자와 섹스를 해야만 했다. 어째서 이렇게 조급한 마음이 드는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1분 1초라도 빨리 남자에게 다리를 벌려야 한다는 절대적인 의무감만은 확실히 자각하고 있다. 남자가 질릴 때까지, 더 이상 자신의 몸뚱이를 탐하지 않을 때까지, 그래서 결국 그 무시무시한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
주방 정리를 마친 남자는 이어 집 안에 남은 자신과 인환의 자취들을 깨끗이 치우기 시작했다. 남자와 인환의 옷가지들이며 크로스백, 그리고 부서진 남자의 휴대전화며 다 마신 술잔과 커피 잔들까지, 모두 제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갔다. 욕실로 가선 사용한 흔적이 있는 새 칫솔과 치약, 그리고 바스 가운과 타월 및 비누도 전부 쓰레기 봉지에 담아 남자의 차로 이동시켰다. 인환이 벗어둔 고급 파자마조차도 쓰레기 봉지로 내팽개쳐지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마치 증거 인멸을 하는 살인자처럼 남자의 행동은 몹시도 치밀하고 신중해 보였다.
남자는 인환에게도 무언가 준비할 게 있으면 하라고 했지만 딱히 무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챙겨야 할 소지품이라야 벗어둔 카디건과 팬티 한 장뿐이었고, 그조차도 남자의 치밀한 손길에 거두어진 지 오래였다. 결국 남자의 증거 인멸이 모두 끝날 때까지 인환이 한 일이라곤 그저 거실 한구석에 멍하니 선 채 남자의 하는 양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모든 정리를 마친 듯한 남자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옷을 갈아입는 일이었다. 약간 작았지만 남자의 완벽한 근육질 몸매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던 잿빛의 저지 트레이닝팬츠와 검은색 티셔츠가 벗겨지고 어제의 셔츠와 슈트가 남자의 몸을 감싸게 되었다. 인환의 멍한 시선을 꽤나 의식하고 있을 법한데도 거실 한복판에서 옷을 훌훌 벗어 젖히는 남자는 거침이 없었다. 하긴, 남자는 원래 결혼해서 자식까지 둔 헤테로였었다. 아무리 인환에게 깊은 감정을 갖게 됐다고 해도, 동성인 사내의 시선에 민감해지는 /게이 성향/ 따위엔 아직 물들지 않았을지 모른다. 제발, 부디, 영영, 남자가 그따위 반역적인 것에 물들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이리 오세요, 선생님.”
벗어둔 트레이닝팬츠와 티셔츠를 다른 증거품들을 모아둔 검정 쓰레기 봉지에 마저 넣은 남자가 나지막하게 인환을 부르며 돌아보았다. 이제 떠나자는 의미가 담긴 시선이었다.
꼭두각시가 달리 할 일이란 게 있을 턱이 없었다. 몇 걸음 다가가자 남자가 손을 뻗어 인환의 허리를 안아왔다. 절제가 되어 있으나 확실한 힘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남자의 따뜻한 체온과 함께 코롱 냄새와 샤워젤 냄새, 그리고 옅은 담배 냄새들이 뒤섞인 남자의 체취가 선명하게 감각 속으로 파고들어왔다.
“……기다리고 있어요, 내 사랑. 아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제게 걸어와주세요. 되도록…… 한시라도 더 빨리…….”
“…….”
“……너무 갑작스러우실 거라는 거 압니다. 선생님께서 준비가 되실 때까지 최대한 제 감정을 묻어두고 싶었습니다. 절대 강제로 밀어붙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돼버렸어요. 하지만 후회는 안 합니다. 그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믿고 싶어요.”
“…….”
남자의 입술이 정수리 근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기만 하는 긴 키스가 이어졌다.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은 부담감이 먹장구름처럼 시야를 가득 메웠다. 허리를 죄는 악력도 답답했고, 애정이 넘치는 나머지 닭살이 죽죽 돋는 남자의 키스도 거북하기 짝이 없어, 인환은 그저 안절부절 남자의 키스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내 힘으로 당신을 살려낼 겁니다. 살게 할 겁니다. 당신이 이 지상에 발을 꼭 붙일 수 있도록 내가 할 거예요, 내가……. 반드시…… 내 사랑…….”
정수리 근처를 떠돌던 남자의 입술이 쪼는 듯한 키스를 거듭하며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관자놀이와 귓불을 스쳐 뺨을 타고 내려온 그것은 마침내 인환의 입술 근처에 도달했고, 축축하고 뜨거운 혀를 내밀어 인환의 아랫입술을 천천히 핥아 올렸다. 약간 미는 듯한 느낌에 조금 입술을 벌려주자 남자의 혀가 요동치며 급하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단숨에 입안을 장악한 생기 넘치는 생물은 노도처럼 곳곳을 유린하며 돌아다녔다. 인환의 혀를 빨고, 잇몸을 핥고, 입천장과 목구멍 안쪽을 번갈아 넘나들며 펌핑을 했다. 마치 혀로 섹스를 하는 것만 같은 음란하고 격렬한 키스였다. 옛 주인의 키스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몹시도 생소한 키스였다. 격렬함과 열기는 비슷했으되, 방식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옛 주인이 머릿속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폭풍처럼 몰아치는 쪽이라면, 남자는 끈기 있게 천천히, 그러면서도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음란으로 물고 늘어졌다. 남자는 섹스가 무엇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것 같았다. 만약 인환이 임포가 아니었다면 단숨에 발기해서 그대로 액을 뿜어냈을 정도로 현란한 테크닉이었다.
“……여기서 그만두지 않으면 또 당신을 바닥으로 밀어 넘어뜨린 채 미친놈처럼 자위를 하게 되겠죠…….”
꽤 오랜 동안의 격한 흡입 뒤에 남자가 간신히 입술을 떼며 속삭였다. 과연, 바로 코앞에서 인환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갈급한 성욕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딱 달라붙은 하반신 사이로 단단하게 부푼 채 무의식적으로 인환을 찌르고 있는 것은 남자의 음경이었다. 서로의 타액으로 낭자한 인환의 입가와 턱 언저리를 남자의 혀가 돌아다니며 말끔히 청소를 했다. 남자의 입가 역시 인환과 그닥 다르지 않은데도 그건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듯했다. 하긴 청소는 그저 빌미일 뿐이고 그 역시 애무에 가까운 키스에 불과했지만.
“……그럼 출발할까요?”
추행 같은 키스 뒤에 남자의 몸이 겨우 떨어져 나갔고, 대신 남자의 손이 인환의 한쪽 손을 움켜쥐었다. 마치 초등학교 어린애를 이끌듯이 남자가 인환의 손을 꼭 쥔 채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활짝 열어둔 창문 덕에 집 안에서도 내내 풍기던 상큼한 풀냄새와 짙푸른 수목의 냄새들이 좀 더 강렬하게 다가들었다. 한여름 정오의 날씨답게 대지는 바짝 달아올라 있었지만, 확실히 산속이라 그런지 더위보단 청량감이 더 느껴졌다. 고개를 들고 정면으로 시선을 던지니, 눈앞에 펼쳐진 것은 너무나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과 드넓은 잔디밭이었다. 뒤로 병풍처럼 둘러진 나지막한 산이며, 저 멀리 아련하게 흐르는 개울물 들을 보아하니 별장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는 셈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잘 지어진 석조 건물이며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한 정원이며, 어딜 봐도 그림엽서의 한 장면이었다. 막상 이 아름답고 한적한 풍경을 뒤로하고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젯밤 늦게 도착한 터라 채 그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인데, 만약 알았다면 남자에게 좀 더 있자고 부탁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치밀한 증거 인멸 과정을 낱낱이 지켜본 터라 이제 와서 더 있자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부탁을 한다면 남자 역시 원래의 계획을 무시하고 좀 더 버티겠지만, 그건 역시 주제넘은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꼭두각시에겐 꼭두각시만의 역할이 있는 법이었다. 특히나 남자의 저 위험천만한 ‘기대’를 물리쳐야만 하는 입장에 있는 자신이라면 더더욱 행동을 조심해야만 하리라.
남자는 현관 앞에서 좀 떨어진 정원 한편에 주차돼 있던 자신의 승용차 앞에 도착해서야 인환의 손을 놓아주었다. 뒤 범퍼를 열어 증거물이 담긴 검정 쓰레기봉투를 집어넣은 남자는 다시 인환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잡고 조수석 쪽 차 문으로 에스코트를 했다. 이거야, 정말 어느 나라 공주님이거나 상류층 레이디가 따로 없었다. 상대로 하여금 저절로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남자라니, 참으로 여자들에겐 동경하는 이상의 왕자님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극진한 매너와 배려가 카사노바로서의 의도된 행위가 아니라, 남자의 진심에서 우러난 행위로 보인다는 점이 더더욱 놀라웠다. 그저 모든 행동이며 몸짓이 자연스럽기만 해서, 한국적인 가부장 남성상에 익숙해 있는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위화감이나 부담감조차 전혀 안 든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건 보통의 여자들뿐 아니라 당장 그런 취급을 받고 있는 인환 역시도 한가지였다. 확실히 대부분의 성장기를 프랑스에서 보낸 남자의 이력 때문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끄덕여도 보지만, 또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천성일 것이다. 아마도, 틀림없이. 그랬다. 남자는 타고난 페미니스트였다. 그것도 하나의 인격체로서도 완전히 성숙한 아름다운 페미니스트. 여자에겐 그야말로 최상급의, 하늘이 내린 남편감 내지는 연인감이라는 것.
약간 홀린 듯한 기분으로 조수석에 올라타자 남자가 안전벨트를 매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벨트의 잠금쇠를 찾기 위해 인환의 앞으로 바짝 숙여진 완벽한 페미니스트의 프로필은 그것대로 또 완벽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약간 구겨진 듯한 슈트도 남자의 도회적인 아름다운 외모를 전혀 손상시키진 못하고 있었다. 어떤 여자일지, 앞으로 남자의 연인이 될 여자는 참으로 행복할 거라고, 인환은 잠깐 동안 미래의 그 누군가를 몹시 부러워했다. 넋이 죽어버린 꼭두각시 창녀로선 감히 절대로 꿈꿀 수 없을 최고의 행운이리라.
안전벨트를 꼼꼼히 챙긴 남자가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자리를 잡았고, 시동을 걸자마자 차는 이내 출발했다. 나무 그늘 밑에 두어선지 차 안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차창을 열자 시원한 산바람이 들어왔고, 인환이 그에 쾌적함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 역시 상쾌한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차는 몇 분 만에 별장을 벗어났고, 이내 산비탈을 한쪽 편에 낀 좁은 국도로 접어들었다. 차창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남자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조각 같은 핸섬한 외모가 보태지니 그건 그대로 CF의 한 장면이 되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수치도 자격지심도 잊은 채 인환은 한동안 멍하니 남자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절 뚫어지게 바라보시면 사고가 날지도 모릅니다, 선생님.”
“……?”
“가슴이 두근거려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기분은 좋지만 선생님 안전을 위해 시선을 돌려주셔야겠어요.”
“…….”
“……제 얼굴이 마음에 드십니까?”
“…….”
“……다행이네요. 적어도 외모만큼은 선생님 눈에 든 모양이로군요.”
“…….”
“……제 다른 부분도 선생님께 다가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얼굴이 마음에 드느냐는 질문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주자, 남자는 눈부신 미소로 그네가 느끼고 있을 황홀한 기쁨을 표현해주었다. 햇살처럼 아름다운 그 미소에 다시금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부담감이 엄습했다. 고개를 남자의 반대편으로 돌려 차창 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창 밖 역시 한창 무르익은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충만해 있었지만, 옆에 앉은 남자의 빼어난 아름다움에는 좀처럼 미치지 못할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고, 당신의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완벽하다고, 덧붙이고 싶었다. 그래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죽은 영혼을 간직한 퇴물 화가와는 전혀 맞지가 않는다고. 죽은 화가를 가까이했다간 당신도 파멸하고 만다고, 그 무시무시한 죽음의 에너지에 당신도 새까맣게 물들어버릴지 모른다고, 간절한 애원의 말들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애원조차도 시꺼먼 얼룩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 말은 이제 필요 없었다. 말도 독이었다. 몸짓도 독이었다. 얼굴도, 몸뚱이도, 생각도, 사상도, 그림도 다 독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다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독약이었다. 남자를 죽음으로 오염시키게 될 끔찍한 바이러스였다. 에이즈였다. 그러니 침묵하리라. 움직이지 않으리라. 숨을 멈추리라. 멈추게 되리라…….
남자가 속도를 높이는지, 차창 안으로 뛰어드는 바람이 좀 더 거세졌다. 어느새 좁은 국도를 벗어난 승용차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차창 밖 저 멀리 병풍처럼 둘러진 이름 모를 산들엔 짙푸른 신록이 가득했다. 생명만이 가득했다.
남자와 같은 ‘생명’이었다.
여름이었다.
남자의 차가 별장을 떠난 지 한 시간 20여 분 만에 멈춘 곳은 서울이었다. 그것도 시내 중심가라고도 할 수 있을 잠실 종합운동장이었는데, 인환으로선 좀 의외인 곳이었다. 증거 인멸을 하고 도주한 도망자치곤 대낮처럼 훤히 트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남자는 종합운동장 부지 내에 있는 체육공원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웠고, 인환을 내리게 한 뒤 누군가의 결혼식이 치러지고 있는 듯한 야외 결혼식장으로 인환을 에스코트했다. 그리 심하게 무더위가 느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처럼 만만찮은 한여름 날씨에 야외에서 결혼식을 치르다니 대단히 로맨틱한 커플인가 보다 하고 인환은 내심 감탄을 했다. 과연, 결혼식장으로 꾸며졌던 듯한 중앙 무대는 소녀 취향의 극을 달리는 레이스와 리본과 풍선과 또 온갖 화려한 꽃 장식들로 넘쳐났다. 심심찮게 날아다니는 풍선들이며 신랑 신부는 보이지 않고 대신 성장을 한 남녀들만 곳곳을 어슬렁거리는 걸로 봐서 결혼식은 막 끝이 난 모양이었다.
인파들로 수라장인 결혼식장 한가운데를 피해, 남자는 빈 벤치 하나를 찾아 인환을 자리에 앉히고는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양해를 구한 뒤 식장 쪽으로 걸어갔다. 스쳐 지나가던 선남선녀들 대부분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남자를 되돌아보고 있었다. 남자가 자신의 옛 주인과 마찬가지로 몹시도 눈에 띄는 용모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확실히 지금처럼 뭇 공중의 폭발적인 반응이라는 것은 언제 봐도 놀라운 구경거리였다. 남자는 시선들, 특히 젊은 여자들의 뜨거운 눈빛들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결혼식 무대 뒷정리 중인 사람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30대 여자 하나와 역시 정장 차림의 30대 사내 하나가 남자를 알아보곤 환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게 보였다. 이어진 포옹과 가벼운 인사 키스는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 되었다. 남자를 눈으로 좇고 있던 뭇 여성들의 입에서 소리 없는 감탄의 한숨이 터졌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서양식 인사에, 낯선 여자와 사내 둘 다 남자와 출신 성분이 같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슷한 연배며 또 비슷한 서구적 분위기로 봐서 프랑스에서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낸 동기거나 친구들일 것 같았다. 옷차림은 물론 가슴 한복판에 달린 자그마한 배지는 저들이 결혼 이벤트 회사 직원들임을 알려주었다.
남자와 몇 마디를 주고받던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인환을 향했다. 남자가 턱짓으로 인환을 가리킨 때문이었다. 남자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따스하게 웃고 있었고, 낯선 남녀 둘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인환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올가미에 걸린 듯한 답답함이 또다시 가슴을 짓눌렀다. 힘을 빼고 사지를 늘어뜨린 채 벤치에 앉아 있던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곤 낯선 남녀 둘이 그랬던 것처럼 인환도 가볍게 목례를 해주었다. 한순간에 밝아진 두 사람의 표정을 인지한 찰나, 남자가 두 사람을 팔로 제지하는 게 보였다. 인환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려는 것을 막고 있는 듯했다. 남자와 친구들 사이에 가벼운 승강이가 이어졌고, 승리는 이내 남자의 것으로 돌아갔다. 아쉬운 듯 혀를 차며 남자로부터 떨어진 친구들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게 보였다. 따라 웃는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 주변으로 마치 빛의 파동이 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주변 가득 작열하고 있는 한여름 오후의 햇살이 무색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여기고 있는 이는 비단 인환뿐만이 아닌 듯, 기왕에 결혼식장 가운데로 가까이 갈 때부터 시선을 보내고 있던 뭇 하객들은 이제 아예 노골적으로 남자 근처에서 발걸음을 멈춘 채 서로 귀엣말을 중얼거리며 남자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막 피로연 장소로 이동하려는 하객들의 발걸음을 사로잡은 남자와 세 친구의 친밀한 대화는 5분쯤 계속되었다. 그 5분의 끝 무렵, 남자가 힐끔 이쪽을 보며 인환을 살피는 것 같았고, 그것으로 세 사람만의 짧은 동창회는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여자가 메고 있던 숄더백에서 무언가를 꺼내 남자에게 건넸고, 그를 받아 든 남자는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이별을 고했다. 하나는 휴대전화인 것 같았는데, 그 나머지가 무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남자로부터 내팽개쳐진 채 박살이 나던 휴대전화의 최후가 선연하게 떠올라왔다. 남자가 언제 웨딩 플래너 친구들과 연락을 취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인환은 더더욱 남자의 치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사에게 쫓기는 범인들이니만큼, 추적을 효과적으로 피하기 위해선 다른 사람 명의의 휴대전화만큼 유용한 물건도 없으리라.
재킷 안주머니에 여자로부터 받아든 물건들을 집어넣으며, 인환을 향해 되돌아오는 남자가 보였다. 눈부신 햇살의 파동을 만들어내던 남자의 웃음기는 어느새 말끔히 걷혀, 신중하고 사려 깊은 표정이 남자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근심까지는 아니어도, 친구들과 상봉했을 때처럼 무구한 기쁨을 드러내고 있는 표정은 아니라서 가슴이 아릴 정도로 안타까웠다. 그랬다. 역시 남자도 전염이 되고 있었다. 자신에게 깃들어 있는 깊고 깊은 어둠에.
“……좀 더우시죠, 선생님? 그래도 답답한 차 안보다는 밖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남자가 손을 뻗어와 인환의 양손을 잡아 일으키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인환만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너무나 나지막한 속삭임이라 마치 밀어처럼 들렸다. 연인을 에스코트하는 것마냥 노골적인 애정과 배려심이 풀풀 풍기는 남자의 몸짓에, 남자에 대한 걱정으로 온몸이 굳어지는 인환이었다. 훤한 대로변에서 성인 남자 둘이 연출할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으니까. 가뜩이나 뭇 대중들의 시선을 흡반처럼 끌어들이는 남자이니 더더욱 질겁을 할 수밖에. 서둘러 남자에게서 몸을 떼어내며 남자의 시선을 잡은 채 멍하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로잡혀 있던 양손도 뿌리치다시피 밀쳐냈다. 부디 자신의 우려를 남자가 이해해주길 바라면서. 자신이야 무슨 상관이 있으랴만, 남자는 아니다. 인생의 황금기를 맞아 한창 잘나가는 최상급의 남자가 아닌가. ‘게이’라는 마이너스 딱지를 이리도 쉽게 남자의 화려 찬란한 경력에 붙여줄 수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인환의 눈을 지그시 굽어보던 남자가 이내 쓸쓸한 미소를 보내왔다.
“……저 때문이시란 것 압니다.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도 잘 알고 있고요. 하지만 저 역시 그따위 얄팍한 사회적 편견에 무너질 만큼 시시한 남자가 아닙니다, 장 선생님.”
“…….”
“만용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사회가 제게 맞지 않으면 사회를 극복하자가 제 방식입니다. 그것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잘 알기에 사회가 제 자아에 상처를 줄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요.”
“…….”
“……하지만 선생님의 근심을 잘 이해합니다. 그 근심이 어떤 깊은 상처들에서 연유하는가도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구요. 그러니 앞으로 제가 사람들 앞에서 선생님에 대한 애정 표현을 자제한다고 하면, 그건 그저 선생님을 위한 배려 차원의 조심성에 불과할 뿐일 겁니다.”
“…….”
담담히 말을 마친 남자가 인환으로부터 두어 걸음 정도 더 떨어지더니 고갯짓으로 따라오라는 신호를 주었다. 다행이었다. 인환 자신을 위한 것이든, 혹은 남자를 위한 것이든 이유는 중요치 않았다. 눈빛으로도, 몸짓으로도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연인의 태도를 고수하던 남자가 마치 소원한 동료를 대하듯 거리를 둔 것이다. 세심한 남자는 현재로선 가장 묵직할 인환의 근심거리를 흔쾌히 제거해줬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인환은 남자를 향해 속으로 가만히 고맙다는 인사를 흘렸다. 관계가 변해도 역시 남자는 변함없이 자신의 자상한 수호천사일 큐레이터였다. 굳이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그저 그림 하나만으로 모든 소통이 가능하게 되는.
앞서 걷는 남자의 늠름한 등을 새삼 반한 눈길로 주시하며, 보스를 따라 걷는 꼬붕처럼 남자를 열심히 따라 걸었다. 남자가 발을 멈춘 곳은 역시 좀 전에 차를 세워두었던 주차장이었고, 남자는 조수석의 문을 열어 인환을 에스코트 하는 대신, 먼저 운전석으로 몸을 밀어 넣는 담백한 행동으로 기왕의 약속을 실천했다. 꼭두각시 창녀는 보스에게 반한 꼬붕처럼 감지덕지한 시선으로 그런 남자를 바라보았음은 물론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따뜻한 시선으로 인환을 재촉하는 남자를 따라 조수석에 올랐다. 의자에 앉자마자 남자가 상체를 가까이 가져오더니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다시금 연인을 대하는 듯한 남자의 극진한 배려에 몸을 굳힌 채 가만히 남자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일단 뭇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남자는 남자가 원하고 있는 본래의 역할로 돌아왔다. 새 주인이니 어쩌겠는가. 당분간은 주인의 꼭두각시가 견딜 수밖에.
“……우선 병원부터 들르겠습니다, 선생님. 오른팔의 깁스, 이젠 떼도 될 것 같아서요.”
“…….”
남자가 예지력이 있는 건지, 아니면 옛 주인처럼 의사의 혜안도 갖춘 건지, 아니면 단지 배려심이 극진해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다만 인환은 현재로서 자신의 가장 거추장스러울 문제를 이토록 예민하게 집어내는 남자의 능력에 그저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잠실 종합운동장을 빠져나간 차가 5분쯤 만에 도착한 곳은 잠실 주공아파트 단지 상가 내에 위치한 자그마한 외과 병원이었다.
의료보험증은커녕 신분증 비슷한 것도 없었지만 깁스를 푸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아파트 단지 내의 병원이라 그런지 외과라기보단 소아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대부분의 환자들이 초등학생에도 못 미치는 어린아이였다. 간호사들과 아픈 애들을 거느린 30∼40대 주부들의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남자 덕분에, 인환은 가시 방석에 앉은 심사로 30여 분을 기다려 겨우 의사의 진찰을 받고 깁스를 풀 수 있었다. 사진을 따로 찍어볼 필요는 없을 정도로 금간 뼈가 아문 것은 확실하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힘을 쓰는 일은 하지 말라는 의사의 주의도 받았다. 제법 오랫동안 묶여 있던 덕에 막상 깁스를 풀고 나니 두꺼운 석고 붕대로 감겨 있던 오른팔과 손목은 마치 입고 있어야 할 것을 벗은 채 알몸이 된 듯한 위화감마저 느껴졌다. 물론 그런 당치 않은 위화감도 남자와 함께 병원을 나설 때쯤엔 까맣게 잊혔지만.
“……치료비 계산하고 오겠습니다.”
남자가 인환을 대기실 의자에 앉히곤 로비로 갔다. ‘자신의 병원비를 왜 남자가 계산해야만 하는 걸까’ 내지는 ‘하지만 병원비를 계산하려고 해도 현재의 자신에겐 10원짜리 동전 하나도 없지 않은가’ 등등의 생각을 흘리며 잠깐 부담감을 느꼈다가, 이내 노예란 주인 소유의 재산에 불과하므로 그닥 부담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거라고 고쳐 생각했다.
남자를 기다리는 동안, 의자에 앉아 확연히 달라진 두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 달 남짓한 동안 햇빛에서 차단됐던 때문인지, 왼손과 팔목은 좀 더 까맣게 그은 오른팔과 손등에 비해 창백하게 보일 정도로 하얗게 표백돼 있었다. 검은 손도, 하얀 손도 둘 다 마르고 갈라지고 푸석푸석한, 헐벗은 노동자의 손임엔 다르지 않았다. 한동안 가만히 양쪽 손을 들여다보다가, 오른손목에 채워두었던 시계를 풀어 표백된 반대쪽 손목에 채워주었다. 옛 주인이 제주도로 내려오던 길에 스카이시티 몰에서 사준 패션 시계였다. ‘연인놀이’의 일환으로 부여된 아이템. 현란한 큐빅이 박혀 있는 백금의 프레임에, 심플한 검정색 가죽의 밴드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패션 시계였다. 거무스름한 피부색의 오른팔보다 확실히 더 시계가 돋보이긴 한다고, 인환은 내심 흡족해했다. 시계를 사서 손수 채워주던 옛 주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설핏 떠올랐으나, 서둘러 기억을 지워냈다. 떠올리면 안 되는 얼굴이었다. 아직은 떠올리면 안 되는 주인이었다. 지금은 그저 눈앞의 새 주인만 생각해야 한다고, 그래야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다고, 열심히 스스로를 타일렀다. 상이야. 한 달 동안 답답하게 갇혀 있던 걸 잘 견뎌준 상이야. 가만가만 시계를 쓰다듬으며 멍하니 되뇌었다.
병원비를 계산한(그것도 보험증이 없어 비싼 액면가 그대로를 지불한) 남자가 간호사들과 주부들의 열렬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다시 인환의 앞으로 되돌아왔다. 의자에 앉은 인환을 일으켜 세웠을 때 잠깐 팔을 쥐며 부축을 했을 뿐, 남자는 줄곧 몇 걸음을 앞서 걸으며 인환을 아파트 단지 내 주차장으로 인도했다. 역시 뭇 대중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동료거나 친구인 척, 인환의 의사를 배려해주고 있는 상냥하고 세심한 새 주인이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차에 오르고, 안전벨트를 매주고, 이어 따스한 미소를 띤 채 지그시 시선을 맞추는, 연인으로서의 일련의 에스코트 과정을 고대로 리플레이 하는 중인 남자가 물어왔다(타인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차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남자는 전광석화보다도 빠르게 역할 모델을 바꿨다!). 무심코 손목시계를 살피니 과연 오후 5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인환이야 12시 정도에 늦은 아침을 먹었다고 하나, 그보다 먼저 식사를 마쳤을 남자는 몹시도 시장기를 느낄 법한 시간이었다. 허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남자를 위해 얌전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신이 별로 배가 고프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남자는 틀림없이 자신이 식사를 하자고 할 때까지 그대로 쫄쫄 굶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인환이 마치 대단한 수학 문제의 정답이라도 맞힌 것처럼 환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크게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차를 출발시켰다.
10여 분쯤인가를 더 달려 남자가 차를 세운 곳은 석촌호수 근처의 조촐한 2층 한정식 집이었다. 아담한 모양새이긴 하지만 꽤나 고급스럽게 보이는 외장재로 마감한 흔적이며, 범상치 않은 세련된 디자인이 돋보이는 건물 외관이며, 아마도 상류층을 주 고객으로 둔 최상급 레벨에 속할 레스토랑으로 보였다. 10여 년 전의 인환이라면 그닥 낯설지도 않고 또 위화감을 느낄 만큼 주눅이 들지도 않았겠지만, 엉거주춤하게 다리를 끌며 남자를 따라 들어가는 기분은 마치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주워 입은 것 같은 거북함이었다. 인환이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은 이제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 아니라 어디 변두리 동네의 싸고 맛있는 기사 식당이었다. 격식에 맞게 옷을 차려입어야 하는 대신 싸구려 점퍼와 작업복을 걸치고도 거리낌이 없어야만 하는 ‘소박함’이었다. 감옥에서의 2년 6개월은 물론, 출소 이후의 나름대로 비참했던 7년이란 인환을 뼛속 깊이 가난한 노동자로 전락시키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확실히 경험과 세월이란 무섭다는 생각에 저절로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와 인환은 한복 차림의 예쁘장한 아가씨의 인도를 받으며 드넓은 연회장을 연상시키는 1층 홀을 지나 지하의 좌식 방으로 안내되었다. 남자가 들어서자마자 지배인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중년 여인이 반가이 맞는 것이며, 비록 아가씨의 안내를 받고 있다곤 하나 이미 가야 할 곳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듯한 단호한 걸음걸이로 봐서, 남자의 단골 레스토랑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지하의 좌식 방들은 운동장 같기만 하던 1층 홀에 비해 정말로 상류층의 상견례 장소로나 쓰일 법한, 작지만 나름대로 화려한 정통 한식 사랑방들의 구조를 하고 있었다. 아가씨는 방들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 앞까지 걸어가더니 단아하고 우아한 품새로 미닫이문을 열어주었다.
열 평 크기의 방 안엔 교자상 두 개를 나란히 붙여놓은 듯한 크기의 상이 한가운데에 놓여 있고, 한쪽 벽엔 병풍과 커다란 도자기, 그리고 반침들이 나란히 장식으로 놓여 있었다. 남자는 인환을 출입문 맞은편에 앉힌 후 그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역시 또 연인 관계에나 있음직한 자리 배치가 신경이 쓰인 나머지 슬쩍 안내해준 아가씨를 쳐다보았지만, 아가씨는 둔한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한결같이 예의 바른 표정으로 남자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남자는 딱히 아가씨가 내미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늘 시키는 것으로 2인분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손님을 보는 시선이 아니라, 동경하는 배우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남자를 몰래몰래 훔쳐보던 아가씨가 90도 가까이 허리를 굽힌 정중한 인사와 함께 방을 나갔고, 5분여를 기다렸을까,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진다는 표현이 걸맞을 법한 한정식 요리가 줄줄이 배달되었다. 유난히 넓어 보이던 교자상 한 개는 금세 호사스러운 요리 접시들로 가득 채워졌고, 방 안은 이내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들로 가득해졌다. 시중이 필요한 신선로 요리를 개인 종지에 담고, 막 구워진 갈비 요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기까지 마친 아가씨가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와 함께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남자의 시선은 번개처럼 인환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본능적으로 시선을 마주치니, 역시 마주 보기엔 너무나 환한 천상의 미소가 인환을 맞았다.
“아선 그룹의 안 회장님께서 소개하셔서 알게 된 레스토랑입니다. 딜러 노릇을 할 때에만 고객들을 접대하는 곳이지요.”
나지막하게 말을 꺼낸 남자의 손길이 자연스럽게 허리 근처로 파고들더니 셔츠 위로 부드러운 애무를 했다. 부드럽게 쓸어내리다간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을 힘 있게 주무르기도 했다. 색향이 느껴질 정도의 집요함이라기보단 무의식적인 자연스러움에 가까웠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남자의 열렬한 애정을 드러내 보여주는 손길이었다.
“늘 이용할 만큼 그리 넉넉한 형편도 아니고 허영도 없습니다만, 선생님껜 어떻게든 최고만 해드리고 싶네요. 연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내놈의 치졸한 프라이드라 비웃으셔도 좋습니다.”
사랑 고백을 하듯 속삭여오는 남자의 음색은 너무나 낮고 달콤해서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곤란해. 남자의 눈길도, 말투도 곤란하기 짝이 없다. 일거수일투족을 핥는 듯한 눈길은 너무나 뜨겁고, 그저 차려진 음식에 대한 간단한 소개일 뿐인 몇 마디 말들은 숨 가쁘게 느껴질 정도로 격렬한 밀어처럼 들려온다. 곤란하다. 곤란하기 짝이 없다. 별미 반찬이나 생선살들을 발라 숟가락 위에 놓아주는 남자의 배려 또한 곤란한 나머지 순간순간 닭이 되어 날아갈 지경이었다. 배가 무척이나 고플 법한데도, 남자는 마냥 인환의 식사 시중만 드느라 자기 식사는 그저 건성일 뿐이었다. 그나마 시종처럼 인환을 챙기는 틈틈이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것이 다행이랄까.
처음 몇 분간은 남자의 그런 과도한 열정이 몹시도 불편했지만, 어떡해도 남자를 말릴 방도는 없는 것 같아서, 그저 이도 꼭두각시의 의무려니 하고 참기로 했다. 납득을 하고 나니 입맛도 그럭저럭 돌아서 인환은 밥 한 공기를 무사히 비울 수가 있었다. 밥을 맛있게 먹어주는 것도 남자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 생각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입안에 착 감기는 듯한 음식 맛은 굳이 노력을 하지 않아도 꽤나 식욕을 자극한 때문이었다. 과연 나라를 대표하는 재벌가 회장님의 입맛을 사로잡은 최고의 한식당답다고 경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선 그룹의 안 회장은 남자와도 꽤나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옛 주인과도 허물이 없어 보이는 회장님인 걸 보면 사람의 인연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접점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은 두 주인들이 공통의 친구를 갖고 있었다.
하긴, 아홉 명만 거치면 이 세상의 어떤 사람과도 다 연결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혼자라는 건, 고독하다는 건 다 섭리를 모르는 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의 감정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물처럼 연결이 돼 있는 것도 모르고, 이리 깊은 밤 사막에 홀로 떨어진 낙오자처럼 막막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이리 제 갈 길을 찾지 못한 채 끝도 없는 암흑 속을 홀로 헤매고 있다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그래. 착각이란 말이지. 진실이 아닌 허상이란 말이지. 그런데, 왜 이토록 아픔은 생생한가. 뼛속 깊이까지 파고드는 냉기란, 또 왜 이렇게 시리고 또 시릴 수 있단 말인가. 왜 끝나지 않는가, 이 지독할 정도로 선명한 고통이라는 것은. 착각이라는데. 그저 허상일 뿐이라는데…….
“……그렇게 슬픈 표정으로 오미자 화채를 마시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선생님.”
문득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소스라쳐선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열기가 가득한 눈길로 인환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낯설지 않은 시커먼 어둠이, 슬픔이, 남자의 습기 어린 눈시울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맙소사. 어느새 또다시 남자에게 자신의 독을 전염시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식사의 끝 무렵, 시중을 드는 아가씨가 들어와 화채와 다식으로 이루어진, 보기에도 호사스러운 후식을 놓고 가는 바람에, 옆에 찰싹 달라붙다시피 앉아 인환의 몸을 이리저리 애무하던 손길은 겨우 떨어져 나갔지만, 남자는 여전히 본인의 식사보단 인환을 핥듯이 주시하거나, 배려(라기보단 거의 시중)하는 일에 더 몰두하고 있었다. 1분 1초가 멀다 하고 자신을 살피니, 도무지 감정을 숨기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 같았다.
“……그렇게 슬프게 웃는 사람도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는 남자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
남자의 대꾸를 통해 자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겨우 자각했다. 역시 실패였다. 어설픈 미소 따위로는, 거짓 웃음 따위로는 이 예리한 남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가 없다. 자신의 독을 퍼트리지 않을 수가 없다.
“……입가에…… 묻었어요, 선생님…….”
남자의 단단한 두 팔이 품 안으로 인환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상반신이 통째로 남자의 품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아직은 많이 낯선 남자의 체취가 좀 더 강렬하게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힘 있는 포옹이었지만 그닥 거칠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고개가 위로 들렸다. 남자가 한쪽 손으로 뒤통수를 받친 때문이었다. 거의 1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남자의 얼굴과 마주 보게 되었다.
“……마음에 들어요, 선생님 이런 버릇.”
“…….”
“……키스할 좋은 핑계 거리가 되니까요.”
“…….”
“……넋을 저 멀리 날려버리신 것처럼…… 입가에 자꾸만 음식 부스러기를 묻히시곤 해요.”
“…….”
“……어디로 보내시는 건가요?”
“…….”
“……아니, 어디로 가 계시는 겁니까? 거긴 저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걸까요?”
“…….”
“……그렇게 슬픈 곳은…… 말이죠, 선생님…….”
“…….”
점점 더 낮아지던 남자의 바리톤은 마지막 한 마디를 뱉을 땐 거의 알아듣기조차 힘이 들 지경이 되었다. 줄곧 눈동자를 향해 있던 남자의 눈시울이 조금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축축하고 따스한 감촉이 입술에 와 닿았다. 남자의 혀끝이었다. 정말로 입가를 더럽히며 오미자 화채를 마시고 있었던 건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화채의 찐득한 감촉을 자각하기도 전에 남자의 뜨겁고 축축한 타액이 입술 전체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남자의 입에서도 자신처럼 달큼한 오미자 냄새가 났다.
입술을 핥고 빠는 키스가 점점 깊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남자의 혀가 입안 깊숙이 파고들었다. 입천장 안쪽이 탐욕스레 더듬어지는 것과 동시에 어깨와 허리 근처에 감겨 있던 남자의 팔에 좀 더 힘이 가해졌다. 포옹이 깊어지자 어쩔 수 없이 책상다리가 풀렸고, 인환은 남자의 허벅지 위에 타고 앉은 자세로 하반신까지 찰싹 달라붙은 꼴이 되었다. 어느새 발기한 남자의 성기가 엉덩이 근처를 지그시 압박하고 있었다. 허리와 등줄기를 부지런히 오가며 점점 더 격렬해지는 애무의 손길에서 남자의 갈급한 욕망이 읽혔다. 어쩌면 일류급 한정식 집 룸에서 남자와의 첫 섹스를 치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인환은 멍하니 생각했다. 별로 어디든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되도록 남자가 아웃팅을 당할 위험은 피하는 게 좋을 텐데 하고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했다. 그랬다. 그런 생각만 들었다. 남자의 격렬한 키스를 정신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 몇 분 동안에.
“……미쳤나 봐…….”
입술을 맞붙인 채 남자가 신음처럼 웅얼거렸다. 입안을 초토화시키며 사납게 물결치던 뜨거운 덩어리는 어느새 빠져나가 있었다. 호흡 곤란의 아슬아슬한 한계치까지 치닫던 두 사람의 숨결은 서로의 얼굴을 향해 사납게 뿜어지고 있었다. 인환이 헐떡이는 것 못지않게 남자의 숨결도 질주를 끝낸 말처럼 거칠기 짝이 없었다.
“……아직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참기가 힘들어요. 참을 수가 없어요. 믿어지지가 않아서…… 당신을 훔친 게 안 믿어져서…… 그래선 거 같아…… 이렇게 내 품에 당신을 품을 수 있다는 게 그저 기적만 같아서…….”
“…….”
“……신사답지 못했다는 걸 아는데…… 막무가내로 훔쳐내긴 했는데…… 아직 당신은 날 받아들인 게 아니란 걸 아는데…… 참아야 한다는 것도 알아요, 그런데…….”
“…….”
“……정말 미친 거 같아…… 미쳤어…… 그런 것 같죠, 선생님……?”
“…….”
그래요. 그러니까 빨리 제정신으로 돌아와요. 남자의 눈을 열심히 마주 보며 기원을 올린다. 더 늦기 전에 돌아와요. 안 그러면 큰일 나. 당신 아주 큰일이 나게 돼…….
눈빛만의 호소를 알아들은 걸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남자의 눈동자 속에서 사납게 휘몰아치던 붉은 열기가 차츰 축축하고 푸르스름한 슬픔의 색으로 바뀌고 있었으니까.
“……아뇨. 아뇨, 선생님. 바뀌지 않아.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아. 이미 늦었어요.”
흥분으로 경련하듯 떨고 있던 남자의 입술 끝이 삐죽 올라가는 게 보였다. 왼쪽 입꼬리 너머 움푹 패는 보조개는 살인적일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를 만들어냈지만 눈빛에 서린 깊은 우수를 전부 다 상쇄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니 선생님께서 와주세요. 제게로 다가와주세요. 제가 다가갈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
“……기다릴게요. 기다릴 수 있어요. 언제까지든 기다릴 테니까…… 성급했던 절 용서하시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 제게 다가오시고 싶은 기분이 들거든…… 그땐 망설이지 말고 오세요. 와주세요, 제발…… 제발…….”
“…….”
남자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해서 울지 않는다고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이내 남자의 슬픔과 동화되어 축축한 습기로 변태했다. 문득 뜨거운 온기를 뺨에서 느끼는 순간, 남자의 혀끝이 다가와 뺨으로 흘러내린 물기를 닦아내고 있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접촉이었다. 순결한 수호천사의 세례만 같았다. 아무렴. 남자는 눈처럼 순결했다. 더럽혀지지 않았다. 천사의 세례는 더럽혀지지 않은 존엄한 영혼만이 할 수 있는 성사(聖事)였다.
“……그만 나갈까요, 선생님?”
뺨과 눈시울을 오가며 성천사의 끝없는 세례가 거듭되는 동안 어느새 눈물이 잦아들었나 보았다. 약간 벌어진 입술에 찍힌 낙인처럼 깊은 키스를 마지막으로 남자의 입술이 떨어졌고, 오랜 키스로 인환처럼 붉게 부풀어 오른 남자의 입술에서 허스키한 밀어에 가까운 질문이 흘러나왔다. 허리와 등줄기를 오가며 부드럽고도 격렬한 애무를 거듭하던 남자의 손길은 어느새 인환의 양쪽 뺨을 꼭 움켜쥔 채 손바닥의 뜨거운 체온을 전하고 있었다. 꼿꼿하게 발기한 채 허벅지와 아랫배 근처를 찌르고 있던 남자의 페니스도 어느새 기세를 줄이고 있었다. 인환의 눈물이, 아니, 실은 남자의 슬픔이 남자의 관능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남자가 슬퍼하는 것은 괴롭지만, 그래도 지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 냄새가 가득 들어찬 교자상 밑에서 다리를 벌린 채 순결한 남자를 아웃팅 시키는 추태만은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사의 자취란 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숨겨지지가 않는다. 특히나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고객으로 상대하는 고급 레스토랑의 눈치 빠른 지배인이며 종업원들에게라면.
“……음악 좋아하시죠?”
“…….”
나가자는 남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다시금 달콤한 밀어처럼 되풀이해 물음을 속삭였다.
“……예전 장 선생님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클래식 음악 좋아하셨다고 해서요. 낭만적인 이탈리아 오페라도 좋아하시고, 포르노나 영화도 참 좋아하고, 순정만화도 좋아하셨다면서요? 「베르사유의 장미」랑 「유리가면」을 가장 감명 깊게 읽으셨다는 기사 보고 웃었어요. 선생님답다고 생각했죠.”
“…….”
“……물론 그건 10년도 더 전의 일이고…… 지금은 많이 다르시겠죠. 그래서 더 안타까워요…….”
“…….”
“……왜 전 그 10년 전에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을까? 왜 이제야 만나게 됐을까……? 이렇게 상처 입으시기 전에…… 고통받기 전에…… 왜 미리 만나 선생님을 지켜드릴 수가 없었던 걸까……. 하긴, 그때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사랑하게 되진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안타까워요. 선생님과 너무 늦게 만나게 됐다는 사실이요…… 많이…… 아주 많이 억울합니다.”
“…….”
“……억울해…… 인생의 거의 절반을 선생님을 모르고 살았다는 게…… 내 반쪽을…… 내 분신을……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게…….”
“…….”
“……이렌느와도 이렇지는 않았어요…… 이런 게…… 이런 필사적인 감정이 있을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어요.”
“…….”
“……무거운 게 아니었어. 내게 있어 사랑이란 감정은…… 로맨틱한 즐거움…… 그렇죠. 그저 인생의 그저 수많은 즐거움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즐거움은, 기쁨은 자주 찾아오는 것이긴 하지만 영원하진 않다는 거…… 아무리 즐거워도 다른 모든 어리석은 짓거리들과 마찬가지로 덧없고 실속 없는 짓거리일 뿐이라는 거…… 그런 것일 뿐이라고만 생각했죠. 영원할 수 있는 건 그저 예술뿐이라고만…….”
“…….”
“……그런데…… 그런데 이런 절박감이라니…… 기쁘지 않아…… 즐거운 게 아니야…… 절대로 즐겁지 않아…… 사랑은 절대로 로맨틱한 게 아니었어요.”
“…….”
“……함께하지 않으면…… 내 품에 안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은 그 지독한 상실감이라니…… 고통이라는 거…….”
“…….”
“……사랑스러워…….”
“…….”
“……사랑해…… 너무나 사랑해…… 너무나…….”
“…….”
“……기적 같아…….”
“…….”
“……기적일 거야…… 당신이 존재한다는 거…… 이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거…… 당신과 함께라는 게…….”
“…….”
“……나는 이제야 신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랑해…… 너무나 사랑해요, 인환 씨…….”
“…….”
“…….”
“…….”
“…….”
“…….”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와 그에 따른 고통이 눈빛에 드러났나 보았다. 타버릴 것처럼 인환의 시선을 핥던 남자의 눈빛에 설핏 고통이 어리는가 싶더니, 고해성사처럼 토해지던 남자의 열렬한 고백이 가까스로 중단되었다. 마치 그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않은 듯, 말을 마친 남자는 몹시도 거칠게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코와 입술이 거의 맞닿을 듯 서로의 얼굴이 달라붙어 있는 통에, 남자의 아릿하고 습한 숨결은 직방으로 인환의 폐부 깊숙이 전해지고 있었다. 여전히 낯설기만 한 새 주인의 숨결이었지만 그 맹렬한 열기로 남자는 강요하고 있었다. 익숙해지라고. 1분 1초라도 빨리 익숙해지라고. 이제 그네가 자신의 주인이라고. 인환을 지배할 새 주인이라고. 아련한 담배 냄새와 낯선 코롱 냄새, 그리고 사내 특유의 사향 냄새가 뒤섞인 남자의 체취 역시 윽박지르긴 한가지였다. 다른 냄새를 잊으라고. 이제 이 냄새만 기억하라고. 오로지 이 냄새를 풍기는 사내에게만 다리를 벌리라고.
그랬다. 냄새였다. 낯선 수컷의 냄새만이, 냄새가 윽박지르고 있는 명령만이, 꼭두각시 창녀의 노예근성을 자극하는 수컷의 호르몬만이 창녀의 의지를 움직일 수 있었다. 육체와 육체가 접촉해 반응하는 화학 반응만이 창녀의 신경 세포에 알알이 기록될 수 있었다. 말로써 절절하게 토해지는 남자의 사랑 고백 따윈 그저 공염불에 불과했다. 그랬다. 사랑이라니. 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 마. 그런 건 없어. 그런 언어는 존재하지 않아. 꼭두각시 창녀의 세상엔 절대 존재하지 않는 언어지. 존재하지 않는 언어 따위 아무런 주박이 되지 못한다구. 그러니까 그만해. 그만해요. 가슴만 답답하잖아. 짓눌리고 짓눌려서 숨도 제대로 안 쉬어지는 것 같잖아. 그러니까 그만해. 그만해요, 아름다운 큐레이터 씨. 순결한 내 천사님. 날 압사시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제발……. 제발, 천사님…….
“……숙소에 틀어박히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니까 괜찮은 공연 있으면 보고 들어가요, 선생님.”
인환의 의사는 자꾸만 밀어내면서도 감정에 있어서만큼은 매우 쉽게 공명을 해주는 섬세한 남자답게, 남자가 겨우 부담 없는 화제로 돌아왔다.
“……음악을 더 이상 즐기시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선생님의 아름다운 방에선 절대로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요. 음악은 살아 있는 세속의 사람들이나 줄길 수 있는 놀이죠.”
“…….”
“……그건 그것대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공(空)의 세계지만 음악이 함께 있어도 그리 나쁘진 않을 거예요.”
“…….”
“……아니, 어쩌면 더 아름다운 방이 될지도 모르죠. 아니, 아니, 더 이상 아름다워지지 않아도 좋으니까 난 그 방에 음악이 흘렀으면 좋겠어요. 가득가득 흐르다 못해 방 밖으로도 파도처럼 흘러넘쳤으면 좋겠어요. 살아서…… 살아 계신 선생님과 함께 그 방으로 가고 싶어요.”
“…….”
“……그러니까 제 말은 공연을 보고 숙소로 들어가자는 부탁이랍니다. 이를테면 데이트 신청인 셈이죠.”
“…….”
줄곧 인환의 양쪽 뺨을 어루만지고 있던 남자의 손길이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힘 있는 악력을 엉덩이 근처에서 자각한 순간, 인환의 몸은 어느새 위로 일으켜 세워지고 있었다. 남자가 일어서며 인환의 몸 역시 안아 일으킨 때문이었다. 제법 오랜 시간을 쪼그린 자세로 남자에게 안겨 있었던 모양인지, 저릿한 전류가 두 다리에 느껴졌다. 저린 다리 때문에도, 혼란스러운 마음 때문에도, 인환의 몸은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했고, 비틀거리는 몸은 다시금 선 채로 남자에게 안기게 되었다.
“……이런. 다리 많이 저리세요?”
“…….”
“……젠장. 제 잘못입니다. 불편한 자세이신 것도 모르고 제 욕심만 채우고 있었군요. 여기 다시 앉아보세요. 주물러드릴게요.”
남자의 손길을 가볍게 밀어내며 고개를 열심히 가로젓는 것으로 괜찮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약간 저리기야 했지만, 생각만 해도 닭살이 죽 돋는 남자의 배려란 그저 부담의 가중이나 다름없었다. 필사적인 마음이 통했는지, 남자는 잠시 인환의 눈을 들여다보다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왼쪽 보조개가 깊게 패는, 예의 살인적인 미소였다.
“……노예의 시중에 익숙해지셔야 할 거예요, 선생님. 선생님은 제 여왕님이시니까요.”
맙소사. 아무리 남자의 지나친 액션을 막으면 뭘 하나. 곤란한 닭살 공격은 그저 몇 마디 밀어만으로도 충분했다.
저절로 붉어지는 얼굴을 어쩌지 못해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잠시 밀려나 있던 남자의 손이 다시 다가왔고, 인환은 남자의 한쪽 팔에 허리를 껴안긴 채 방을 빠져나왔다. 문을 나서자마자, 내내 음식 시중을 들던 아가씨가 총알처럼 빠르게 다가왔다. 남자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한 자신의 모양새가 신경 쓰였지만, 아가씨의 예의 바른 얼굴에선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저 다리가 불편한 자신의 장애가 좋은 핑계거리가 되기만을 빌었다.
1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까지 안내를 마친 아가씨를 뒤로하고 올라가니, 이번엔 앞서 현관에서 남자를 환대했던 지배인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음식 맛은 괜찮았는지,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우아한 중년 여인은 꼼꼼하면서도 상냥하게 훌륭한 지배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껴안듯이 인환을 안고 있는 남자를 모르지 않을 법한데도, 그에 대해선 마치 장님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남자는 싹싹한 태도로 지배인이 하는 질문들에 제법 상냥한 대꾸를 주었고, 다시 오겠다는 인사치레와 함께 계산대로 가 계산을 했다. 남자가 카드 대신 현금(비록 수표이긴 했지만)을 꺼내자 계산대의 아가씨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그도 순간의 일일 뿐이었다. 거스름돈까지 착실히 챙긴 남자는 수 명의 종업원들과 매니저의 선망에 찬 눈길을 고스란히 받으며 인환을 두어 걸음 앞세운 채 식당을 빠져나왔다. 남자가 계산을 할 무렵부터 다리가 저린 증상도 말끔히 사라져 다행이었다. 남자의 부축 없이도 남자를 따라 걸을 수가 있었고, 덕분에 끝까지 따라오는 식당 안의 무수한 시선들로부터 더 이상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었다.
(남자의 표현대로) 인환을 여왕처럼 승용차 안까지 에스코트한 남자가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웨딩 플래너 친구들로부터 받은 휴대전화였다. 시동을 거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고, 오가는 몇 마디의 말을 통해 인환은 통화 상대가 남자의 비서 격인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는 인환은 잘 알 수 없는 일 관계 얘기를 5분쯤 나누었고, 마지막으로 오늘 날짜의 괜찮은 클래식 공연에 대해 질문했다. 예술의 전당과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들이 차례로 거론되었고, 영국로열발레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 김덕수 사물놀이들까지, 레퍼토리 역시 종횡무진 옮겨 다니다가 최종 낙착을 받은 것은 LG아트센터였다. 더불어 첼로 독주라는 말, 스티븐 이셜리스라는 아티스트 이름이 부록으로 거론되었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LG아트센터가 있는 역삼역을 향해 차를 출발시켰다.
시골길을 드라이브하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클래식한 실내악 공연을 관람하고…… 어떻게 보면 참으로 로맨틱할 전형적인 데이트 코스였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꼭두각시 창녀가 아니라, 그야말로 ‘남자의 여왕’이라면, 이건 그야말로 누구나가 꿈꾸는 왕자님과의 근사한 데이트라고. 하지만 아무리 남자가 우긴다고 해도 창녀가 성녀가 될 수는 없었다. ‘여왕’은 더더욱 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이건 데이트는 아니었다. 그저 남자의 취향을 배려한 꼭두각시 성노예의 맞춤 서비스에 불과할 뿐.
남자의 말 그대로, 이제 인환의 세계에 음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도 고상하고 우아하며 품위가 있는, 절제와 조화의 미덕을 자랑하는 클래식 음악은 언감생심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음악은 살아 있는 자들의 유희였다. 죽은 자에겐 그저 깊은 잠을 방해하는 소음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데이트라니. 어떻게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 데이트를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소음을 음악인 척 즐길 수 있단 말이냐. 그야, 흉내는 낼 수 있겠지. 산 자의 눈치를 살피며, 산 자가 하는 대로 리듬을 타면 그만이겠지. 멜로디가 들리는 양, 산 자를 속일 수 있기만 하면.
고요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운전에 열중해 있는 ‘산 자’를 훔쳐본다. ‘죽은 자’는 감히 짐작조차 못할 엄청난 열기를 잔뜩 속에 감추고 있을 아름다운 드라이버였다.
그래요. 음악이라니. 음악이 흐르는 방이라니. 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 마요. 그런 건 없어. 그런 방은 존재하지 않아. 죽어버린 꼭두각시 창녀의 세상엔 절대 존재하지 않는 방이에요. 존재하지 않는 방 따위 아무런 주박이 되지 못해. 그러니까 그만해. 그만해요. 가슴만 답답하잖아. 짓눌리고 짓눌려서 숨도 제대로 안 쉬어지는 것 같잖아. 당신이 전염될까 봐. 중독될까 봐. 이 추악한 암흑의 색에 까맣게 물들게 될까 봐. 그러니까 그만해. 그만해요, 아름다운 큐레이터 씨. 순결한 내 천사님. 날 압사시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제발……. 제발 그만해요, 천사님…….
그래. 언젠간 알아들을 것이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애원을 하면. 텔레파시를 보내면.
섬세한 천사님이니까. 죽은 창녀의 언어도 조용히 들어주고 공명해주는 마음 착한 천사님이니까. 산 자들의 아름다운 선율 너머, 흐릿하게 유령처럼 떠오르다 사라져갈 악다구니의 애원을.
그래.
언젠간 전해질 것이다.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창녀의 소음을.
언젠간 알아볼 것이다.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끔찍한 죄악의 불협화음들로 가득 들어찬 황폐한 방 안 풍경을.
그래.
저 예민한 천사님이라면.
착하고 순결한 구원의 천사님이라면.
그네가 훔쳐본 ‘방 안’이 진실로 낙원이 아니라, 그저 용서받지 못할 괴물 한 마리가 죽지 못해 숨어 살 뿐인, 악취가 넘쳐나는 소음의 소굴일 뿐이라는 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데이트 코스를 준비해본 일이 까마득해요.”
살아 있는 드라이버가 웃고 있었다.
“……하도 오랜만의 일이다 보니까 이렇게 평범한 코스들밖에 안 떠올라요, 선생님.”
아름다운 큐레이터였다.
“……아니, 오랜만이 아니라 마치 처음 같아요. 그래요. 어쩌면 진짜로 첫사랑인지도 몰라…….”
어느 추악한 시체의 수호천사였다.
“……그렇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머리가 완전히 백지가 될 순 없는 노릇이겠죠?”
“…….”
“……기억이 나지 않아요…….”
“…….”
“……사랑했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데이트를 했었는지…… 아니, 실은 누굴 사랑했었는지조차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가 않아.”
“…….”
“……그냥 선생님뿐이에요.”
“…….”
“……장 선생님만 머릿속에 꽉 차서 완전히 바보가 돼버린 것 같아…….”
어떻게든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될 희망이었다.
그랬다.
죽은 창녀의 마지막 한 ‘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