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2003년 7월. 김강원(金鋼圓) (63/129)

25. 2003년 7월. 김강원(金鋼圓)

공연이 끝난 것은 시작한 지 꼬박 두 시간 만인 밤 10시였다. 

연주가 종반으로 치달을 무렵인 9시 30분쯤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그는 기를 쓰고 참는 듯하다가는 결국 강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잠들었다.

로열석이 매진돼 제법 구석진 자리에 앉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체온을 어깨에 느끼며 애수 어린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소나타를 감상하는 기분은 최고의 감미로움이었으나 연주자에겐 꽤나 실례되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졸기 시작한 것은 9시 30분부터였지만, 그가 지루해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한 시간도 더 전이란 것을 강원은 예민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레퍼토리도 대중적인 편이었고, 연주자 역시 꽤나 감성적이며 기량 또한 뛰어난 일급 첼리스트였으나, 그 어떤 것도 천재 화가의 감동을 불러일으키진 못한 모양이었다. 지루한 것을 억지로 참는 듯한, 그러나 연주자에 대한 예의상 차마 나갈 생각은 없는 듯한, 불안정한 기운이 옆자리의 소중한 이에게서 공연 내내 풀풀 풍겨 나왔었다. 이로써 그가 더 이상 음악을 즐기지 않으리라는 짐작은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었다. 어떤 형태로든지 희로애락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에 대해 그는 극도의 경계를 느끼고 있었다. 오로지 고요한 침묵과 평화만이 존재하는 그의 낙원에 인간적인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부러 감정 따윈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확인 사살이긴 했어도 강원은 내심 고통에 가까운 쓰라린 패배감을 맛봐야만 했다. 그가, 아니, 그의 예술 세계가 그만큼 견고하고 완전무결하다는 반증이기에, 큐레이터의 입장으로선 지극히 경탄할 만한 일이긴 할 터였다. 그러나 그에게, 저 /감정이 사라져버린 천재 예술가/에게 열렬한 개인 감정을 품고 있는 연인이라면 문제는 아주 달라진다. 구하고 싶은 감정 자체가 말끔히 사라져버린 이에게 어떻게 구애를 한단 말인가. 메말라버린 우물에서 어떻게 단 한 방울의 물기라도 마시게 해달라고 부탁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설령 주고 싶은 마음이 동한다 해도 그네는 결코 줄 수가 없지 않은가.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혹시라도 습기가 생기는 건 아닐까, 다시금 그의 메마른 영혼이 풍부한 천상의 선율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아닐까, 간절한 기도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미 결과의 패가 훤히 다 보임에도 불구하고 연주회장을 박차고 나오지 않은 것은. 마지막까지 가보면, 마지막 한 소절이 끝날 때까지 버텨보면 조금은 달라져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라고. 너무 성급했다고, 역시 실수를 한 거라고, 끊임없이 심장을 때려대는 자책의 망치를 혹시라도 멈출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절박한 기대 때문이라고.

물론 기대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그만큼 기도는 더 절박해진다. 역으로 말해, 절박하면 할수록 그만큼 기도는 이루어질 가능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었다.

10시였다.

자신의 절박함은 아랑곳없이 결국 기도의 끝이 도래했고, 강원은 연주자의 커튼콜을 지켜보며 조용히 패배를 받아들였다. 옆에 앉은 소중한 이는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잠이 든 지 오래였다.

어깨에 닿아오는 그의 따스한 체온으로 쓰라린 패배감을 진정시켰다. 팔걸이에 걸쳐진 그의 거칠어진 손마디를 꼭 움켜쥐는 것으로 실망한 패자에게 위로를 주었다.

어차피 쉬운 길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성급했다는 것도 알았다. 딱히 그를 온전히 소유할 수 있으리라고 자신하지도 않는다. 소중한 연인과의 영원한 낙원을 꿈꿀 만큼 순진하지도, 또한 어리석지도 않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달리 돌아갈 길이란 없기에 그저 앞으로 달릴 뿐이란 것을 안다. 최선을 다해 그를 살리리라는 걸. 그를, 그리고 그의 ‘방’을 이 세상에 붙잡아두리라는 걸.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어떤 수단이라도 다 써서라도,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으리란 걸.

아니, 설령 끝까지 실패한다고 해도 그조차 기꺼이 감수하리란 것도 안다. 만약 실패한다면, 실패가 기정사실이라면, 자신 역시 그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면 그뿐이라고. 이쪽 세계에 속한 모든 것 따위 다 버릴 용의가 있다고.

그래. 설령 그것이 자신의 온전한 인생과 밝은 미래 그 자체라고 한들 아까울까 보냐. 그와 그의 ‘방’에서 함께 존재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곳이 애초에 꿈꾸던 낙원이 아니라, 낙원의 모습을 취한 지옥의 허깨비라 할지언정.

“……선생님…….”

기울어진 귀여운 머리를 껴안듯이 쓰다듬으며 그를 깨운다. 좀 더 깊이 안고 싶다. 좀 더 많이 쓰다듬고 싶다. 좀 더 따스한 체온을 온몸에 느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도피가 필요하다. 뭇 공중의 시선이 없는 곳으로 가야만 한다. 그가 자신의 아웃팅을 근심하기 때문이다. 그의 아픈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마당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아웃팅 따위 하나도 겁나지 않는다고’, 만용을 휘두를 생각은 없다. 그를 지키는 일엔 그의 상처를 지키는 것도 포함이 된다. 철저하게 그를 기준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의 아픔과 기쁨과 희망만이 나침반이다. 그것이 사랑에 빠진, 아마도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할 첫사랑에 빠진 김강원이란 사내의 유일무이한 지침이 될 것이다.

“……선생님, 일어나세요. 공연 끝났습니다.”

“…….”

“……선생님?”

“……어…… 아…… 아…… 응……?”

……두근…….

관자놀이 근처 두피 안쪽을 힘주어 애무하자 그가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신음 소리를 냈다. 수면기가 완연한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환하게 밝아진 천장과 강원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다간, 이내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 에……?”

“……갑시다, 선생님. 공연 끝났어요.”

“……아아…….”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 박동이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빨라졌다. 그를 만나고 만 이틀 동안 그로부터 단 한 마디의 말도 듣지 못했다. 깨어나면서 내뱉어진 불분명한 물음은 기실 신음 같은 웅얼거림에 불과했지만, 강원의 기대감을 피크로 치솟게 만들기엔 충분한 최초의 의사 표시이기도 했다.

“……지루해하신다는 걸 알면서도 고집을 부렸습니다. 선생님과의 첫 데이트라서요.”

“…….”

“……많이 피곤하시죠?”

“…….”

“……제 집으로 모셔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게 안타까워요. 그래도 제일 편안할 것 같은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당분간은 호텔에서 주무시게 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

“……장 선생님……?”

“…….”

“…….”

휘둥그레졌던 귀여운 눈시울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게 보였다. 몽롱한 수면기는 완전히 걷히고, 명징하게 인식한 현실이 그의 사랑스러운 눈시울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눈빛에 서린 그의 고통과 근심과 애수가 강원의 가슴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헛된 기대로 호들갑을 떨던 심장의 박동도 차츰 가라앉았다.

그래.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상으로 친다면 고작해야 40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선량한 사람이라서, 약하고 또 약한 사람이라서, 이렇게 가슴 아픈 방법 이외엔 자신의 협박에 달리 저항을 할 줄 모른다. 그로선 도무지 원치도 않고 또한 상상도 못 했을 강원의 고백으로 받은 충격을 이런 식으로밖엔 소화를 못 해낸다. 그래, 그러니 기다리는 외엔 달리 최선의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가 온전히 충격을 다 흡수할 때까지. 자신의 당돌한 배신 또한 온전히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왜 말을 해주지 않느냐고, 제발 이제 그만 말로써 자신을 받아들여달라고, 이 이상 더 그를 윽박지르며 코너로 몰 수는 없었다. 그래, 오직 기다리는 외엔 자신이 할 일이란 더 이상 없었다.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저 굳건한 묵비권이 그의 의지이기만을 간절히 비는 외엔. 만약 일말의 불안대로 그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실어증에 빠진 것이라면, 자신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이다. 너무 서둘렀다고, 경솔했다고, 지난 이틀 내내 자신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매서운 자책이 결국엔 숨통을 죄게 될 것이다. 후회한다고, 도로 물리겠다고, 백기를 든 채 어린애처럼 엉엉 울부짖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곧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조금만 더 견뎌주세요.”

가만가만 속삭이자, 당신이 더 걱정이라는 대꾸가 순한 눈빛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괜찮습니다. 당신이 걱정이에요, 김 선생님. 정말로 당신이 걱정이 돼요. 희미한 수줍음이 깔려 있는 어눌한 말투가 귀에 쟁쟁했다.

순간 엄습하는 목멘 안타까움에, 그의 섬세하고 고운 눈시울로부터 서둘러 시선을 거둬들였다. 계속 시선을 맞추다간 이성을 잃고 그에게 키스를 퍼부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선을 뗀 대신 부축하듯 그의 팔을 잡고 무대 반대편 출구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도무지 저항이라곤 할 줄 모르는 온순한 몸은 너무나 가볍게 강원의 영역 안으로 끌려오고 있었다. 그 또한 바짝 소진돼버린 그의 생명력을 증거하는 것만 같아 몹시도 가슴이 아팠다. 너무 멀었다. 아직 너무 멀리 있었다, 자신의 가련한 연인은. 연인의 몸뚱이가 수수깡처럼 가볍게 손안에서 다뤄질수록, 진짜 연인은 점점 더 강원의 손아귀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좌석이 천 개는 족히 넘음직한 널찍한 1층 관람석 안은 안내인 몇을 빼곤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늦어도 한참이나 늦게 빠져나오는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호기심에 찬 시선들을 경계하며, 신중하게 그의 허리춤을 안아 들었다. 게이라는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만큼의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확실하게 그를 안을 수 있는 교활한 접촉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그의 장애는 몹시 가슴 아픈 일이지만, 확실히 다른 면에선 꽤나 편리한 핑계거리가 된다는 생각에 씁쓸한 조소가 흘렀다.

제법 늦게 관람석을 빠져나왔음에도 2층 로비는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역시 초만원이어서 강원은 여전히 그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특히나 여자들의 무수한 시선이 꼬리표처럼 자신을 따라왔지만 팔을 풀진 않았다. 다리가 불편한 그를 부축하는 것뿐이라고 오해를 해주면 좋고, 내심으론 연인 사이라고 간파해주기를 은근히 더 기대했다. 데이트를 즐기러 온 연인 사이라고, 이 작고 마른 사람이야말로 바로 자신의 소중한 애인이라고, 스피커에다 대고 커다랗게 외치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비록 그것이 연인의 뜻과는 정반대의 짓거리이긴 할지언정.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후덥지근한 공기가 단숨에 다가들었다. 더위가 부쩍 더 느껴지는 건 두 시간이 넘도록 과도하게 틀어진 에어컨 속에 있다 나와서일 것이다. 슬쩍 아래로 시선을 내리고 보니 그의 가무잡잡한 얼굴 곳곳에도 어느새 이슬 같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를 안은 팔을 푸는 헛짓을 할 까닭은 없었다. 자신의 낡아 빠진 볼보 승용차를 주차시켜둔 곳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30미터는 더 걸어야 했으니까. 데이트도 좋긴 하지만,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연인을 마음껏 만지고 안을 수 있는 둥지가 확실히 더 좋겠다는 수컷다운 음습한 판단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렇지. 남은 휴가는 되도록 그와 단둘이 지낼 수 있는 실내에서 보내자고 결심을 굳히고 있는 강원이었다.

이 바쁜 와중에 장기 휴가라니, 차라리 죽이라고 울부짖는 르네에게 사정사정해서 얻어낸 여름휴가는 아직 이레가 더 남아 있었다. 10월에 있을 대규모 기획전을 생각하면 확실히 열흘에 가까운 장기 휴가는 무책임한 짓거리임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후회는커녕 근심의 감정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설령 기획전을 통째로 실패한대도, 그 때문에 현대에서 잘려 (물론 일시적일지언정) 실업자가 된다 해도, 이 소중한 시간을 연인 이외의 다른 일에 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이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정말로 좋아하는 일이긴 하나, 지금의 강원에게 연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어떤 소중한 것도 연인에겐 비할 수가 없었다. 아니, 다 포기할 수 있었다. 다 망가진대도 상관하지 않을 터였다. 그를 가질 수만 있게 된다면. 그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주기만 한다면.

물론 그것은 자포자기가 아니었다. 절박한 거래였다. 기원이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이 섭리라면, 강원은 그를 갖기 위해 자신이 기왕에 가진 모든 것을 전부 다 대가로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절대로 자포자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 야망이었다. 사내로서, 수컷으로서 품을 수 있을 법한 가장 큰 야망이었다. 오직 한 사람. 오로지 하나의 존재. 자신에게 유일무이하게 허락된 진정한 배우자를 품 안에 끌어안기 위해서.

“……에어컨은 켜지 않겠습니다, 선생님. 탁한 공기 속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갇혀 계셨으니까요. 호텔로 가면 어쩔 수 없이 또 에어컨 속에 갇힐 테니 더우시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그에게 안전벨트를 매주며 밝은 웃음으로 일별했다. 만지는 족족 손바닥에 감지되는 마른 몸이 애처로워 저절로 찡그려지는 미간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표정 없는 말간 눈이 조용하게 강원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으로 전해지는 소중한 이의 대꾸는 역시 늘 한결같았다. 당신이 더 애처로워요. 당신이 더 가슴 아파요. 나를 사랑하는 당신이 더…… 더 목이 메어와…… 그러니까 멈춰요. 여기서 그만 멈춰요…….

자신의 그것만큼 간절한 애원을 못 본 척 시선을 돌려버린다. 시동을 걸고 속도를 높인다. 목적지는 강남 근처의 별 네 개짜리 러브호텔. 기억도 안 나는 원 나잇 상대들과 가끔씩 즐기곤 했던 장소. 소중한 이와 함께하기엔 턱없이 추하고 꺼림칙한 장소지만, 달리 추적을 피할 수 있을 만한 곳으로는 그 이상으로 적절한 공간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 자신의 무시무시한 적…… 이자 경쟁자인 그 사내. 소중한 이의 넋을 사슬로 꽁꽁 묶은 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그 남자. 저 미쳐버린 야수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공간으로는 제격이라는 걸.

그랬다. 고작 이레였다. 이레의 시간 동안 연인의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면 자신은 지금보다 더욱 힘겨운 상황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상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랬다. 알고 있었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고 경계에 경계를 거듭한다 한들, 연인을 완벽하게 훔쳐낼 수는 없다는 것을. 언젠가는 반드시 저 흉포한 지배자의 손아귀에 걸려드는 날이 온다는 것을. 강원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많기는커녕 부족해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레. 고작 이레의 시간. 좀 더 운이 좋다면 그보다 더 며칠, 혹은 몇 달…… 그 부족한 시간 동안 연인을 불러내야만 했다. 저 지옥의 사내가 뿜어내고 있는 시커먼 아우라로부터. 그래서 자신을 바라보도록. 자신을 향해 발걸음 뗄 수 있도록.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그래. 자책은 할지언정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쉬이 포기할 수 있는 가벼운 감정이 아니었다. 폭주하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경솔하게 저질러버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토록 선명한 감정을 두고 언제까지나 기다리고만 있진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 기왕에 벌어질 싸움이었다. 자신은 ‘운명’이라고 하는 신파조의 단어를 믿진 않았지만, 이제부턴 믿기로 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남은 것은 피를 토하고 죽어 나자빠진대도 싸워야만 할 일이었다. 절대로 멈추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이길 수 있을 때까지, 가진 패를 다 걸고 저 무시무시한 경쟁자와 승부를 겨뤄야만 할 터였다. 물론, 그것은 서로의 목숨을 건 혈투가 될 터였다.

오른편 어깨로 문득 따스한 온기가 다가들었다.

마침 빨간불이라 차를 멈춘 채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연인의 자그마한 머리가 어깨 아래로 슬쩍 기울어져 있었다. 차를 출발시킨 지 채 10분도 안 지났건만 소중한 이는 어느새 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정수리 위에 강원이 내뿜는 숨결이 은은히 머물고 있었다. 소중한 존재를 시야에 가득 담은 채 강원은 자신도 모르게 사무치는 웃음을 머금었다.

사납게 휘몰아치고 있던 수컷의 호전성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가라앉고 있었다. 피투성이 전장은 어느새 꽃이 만발한 사랑의 낙원으로 변모해 있었다. 뼈를 깎는 근심도, 심장을 짓누르는 고뇌도 오른쪽 어깨 위로 내려앉은 천사의 깃털에 떠밀려 저 멀리 나풀나풀 사라지고 있었다.

목구멍이 꽉 메며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 사랑해, 장인환…….

핸들을 왼손으로 바꿔 쥐며 소중한 이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샴푸 냄새와 달콤한 체취가 어우러진 머리카락 틈에 얼굴을 파묻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복받치는 설움을 참기가 무척이나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라니. 에라이, 이따위 망할 놈의 사랑이라니.

기를 쓰고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에 저절로 욕설이 터졌다. 대상을 알 길 없는 욕설이었다. 신호 대기로 차를 세운 게 천만다행이었다. 힘 있게 눈꺼풀을 깜빡거리자 뜨뜻한 액체가 단숨에 뺨으로 굴러 떨어졌다. 완벽하게 무장 해제된 심장은 느닷없이 몰아닥친 애수를 다스리기엔 너무나 무력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하나……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나, 나는…….

다 바쳐도…… 이 사무치는 감정 하나에 삶을 몽땅 다 갖다 바쳐도 가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젠장할, 하느님……!

사랑이 이렇게나 아프다는 걸…….

이토록이나 내장을 쥐어짜게 만든다는 걸, 강원은 난생처음으로 깨달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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