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2003년 7월. 장인환(張仁歡)
‘튼튼한 몸으로 슬기롭게 공부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상화 어린이.’
하얀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교문을 들어서자, 이젠 완전히 눈에 익은 초딩틱한 교훈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긴 이미 오래전에 폐교된 초등학교이니 교훈이 초딩틱한 건 당연한 노릇인가?
교실이 네 개밖에 안 되고, 교무실 겸 서무실이 한 개인 단층짜리 건물은 아무리 오지 벽촌의 초등학교 건물이라지만 초라해도 너무나 초라했다. 건물 지붕에 해당할 테라스 부분에 저 초딩틱한 교훈은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로 자랑스레 쓰여 있었다. 그를 지킬 수 있을 아이들은 이제 단 한 명도 없지만, 그래도 그만은 영원히 퇴색하지 않을 진리라는 듯이.
하긴 가만 살펴보면 저만큼 현명한 인생의 지침이 또 있을까 싶다. ‘튼튼한 몸으로’, 요건 육체의 건강. ‘슬기롭게 공부하고’, 요건 지혜. ‘바르게 행동하는’, 요건 도덕적 인성. 저 세 가지만 한결같이 품고 살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월등한 인생의 승자가 될 수 있을 터이다.
아무튼, 저리 지혜로운 진리를 품은 현자이니, 어쩌면 저것은 지어질 때부터 이미 자기 운명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마을을 떠나 번화한 도시로 이주하면서 더 이상 가르칠 아이들이 없어 언젠간 폐교가 되리라는 것을. 물론 건물이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 의식을 갖고 있다면 말이지만.
이곳이 어딘지, 서울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 곳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어디라고 지명을 말해주긴 했지만, 어차피 지도를 보지 않는 한, 이름 따윈 무의미할 터였다. 그저 오지 중에서도 상 오지, 깡촌 중에서도 상 깡촌이란 것만 알 수 있었다.
남자를 따라 승용차로 무려 열 시간을 달려 내려온 곳이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빠른 교통편을 이용하면 네 시간 반이면 주파하는, 좁다면 좁은 땅덩이 대한민국에서 열 시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면 말 다 했지 싶다. 그러니 사람들이 떠날밖에. 폐교가 될밖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왕도로부터 차로 열 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니.
물론 그 반대급부랄까, 사람들이 사라진 자리엔 자연만이 남았다.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은, 그야말로 천연 그대로의 자연이. 그리고 평화가. 외모도, 내면도 완전 도회풍인 남자가 어떻게 이런 깡촌을 알고 있었던 걸까 하는 의문은, 폐교가 된 초등학교 건물을 작업실 겸 주택으로 개조한 이곳에 도착한 직후에 알게 되었다.
폐교가 된 상화초등학교 건물엔 새 주인이 있었다. 머리가 반백이 다 된 50대 중반의 사내가 장시간의 여행에 지친 인환과 강원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사내의 이름은 박호신이라고 했다. 사내는 인환과 같은 화가였다. 인환보다도 까마득한 연배의 선배라 인환의 이름이라도 들어봤을까 싶었지만, 솔직히 인환으로서도 처음 듣는 생면부지의 작가였다. 물론 그도 남자를 통해 화가의 이력을 듣고 나선 쉬이 납득이 되는 사실이었지만.
사내는 그림을 전공한 적도 없고, 30대 후반까지 어느 자그마한 중소기업의 중견 간부로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림은 그저 취미로 틈틈이 붓을 놀리는 수준이었다고. 그러다 부인과 자식 둘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불행한 사고를 당한 뒤, 오랜 방황 끝에 늦깎이 화가가 된 것이라고. 화단에 데뷔한 지도 몇 년 안 되고, 남자가 사내를 알게 된 시기도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라고 했다. 학연, 지연으로 똘똘 뭉친 한국 화단에서 사내처럼 공중에 붕 뜬 작가가 쉬이 자리를 잡기란 사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일 터였다. 그러나 사내는 비록 운명은 비극적이었으되, 그쪽 방면으론 꽤나 운이 좋은 셈이었다.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내로라하는 실력과 재능을 겸비한 천재 큐레이터의 눈에 들게 된 것이다.
과연, 왜 남자가 인환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대목이었다. 사내와 자신은 운명에서 참패한 공통의 경험을 갖고 있었다. 참패한 운명 대신, 둘 다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그림을 그린다는 점에서도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내는 /살아/ 있었다. 바로 그것이 사내와 인환을 반대편으로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물론 그것이 남자가 사내를 인환에게 소개시켜준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견뎌내기 불가능할 것 같은 절망이 반드시 죽음을 잉태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일단 죽음을 맞아도 다시금 부활할 수 있다고,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고, 남자는 사내를 통해 간절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부디 살라고. 다시 살아달라고. 남자가 사는 세상으로 건너와달라고…….
글쎄,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마음먹은 대로 스스로 부활을 이룰 수만 있다면. 의지를 세워 삶을 희망할 수 있다면. 누군들 살고 싶지 않으랴. 빛을 꿈꾸지 않으랴. 속죄와 구원을 바라지 않으랴…… 일단 사람으로 태어난 바에야.
그러나 그건 이미 죽은 자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제 삼자, 그래, 기독교도들이 말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든 뭐든, 아무튼 죽은 자를 대속해줄 누군가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키스로 죽음의 잠을 깨워줄 왕자님이 있어야만 한단 말이지. 죽은 자는 알 수 없다. 이미 자기가 죽었는지, 혹은 살았는지. 혹은 죽었다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 그 어떤 것도 알아낼 수가 없다. 왜냐구? 그야 당근 이미 죽어버렸으니까지. 생각할 의식도, 머리도, 가슴도 없는데 어떻게 무언가를 알아낼 수가 있단 말인가.
물론 저 안의 사내가 있다. 오막살이 집 한 채, 아니, 오막살이 폐교 한 채 지어놓고, 보드라운 한지 작업을 이용해 생의 희망을 노래하는 소박한 중년의 화가. 살아 있는 증거 되시겠다.
남자의 증언에 의하면 사내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했다고 한다. 집에 연쇄 살인범 강도가 들어 열 살과 여덟 살 난 아들 둘을 난자하고, 아내는 강간한 뒤 불에 태워버렸단다. 남자는 사내가 그때 한번 죽었다 한다. 난자당한 아들 둘과 강간당한 뒤 불태워진 아내와 함께 사내도 죽었다 한다.
좀처럼 믿어지지 않지만 믿긴 해야겠다. 인환이 보기에도 사내는 살아 있으니까. 산 사람처럼 말하고, 산 사람처럼 웃고, 산 사람처럼 그림을 그린다. 딱 보기에도 산 사람의 그림이다. 그러니 믿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인환이 믿기 힘든 것은 저 부활의 과정이다. 남자의 증언에 의하면 사내 스스로 부활했다고 하는데, 맙소사! ‘그것만은 도저히 믿기 힘들다’ 되시겠다. 분명 뭔가가 있을 것이다. 숨겨진 뭔가가. 숨겨진 주 예수 그리스도거나, 숨겨진 오로라 공주의 왕자님들이 말이다.
물론, 호기심은 생기되 굳이 열심히 알아내고픈 의욕은 없다. 깡촌 오지 폐교의 생활은 그 자체로 고요한 평화였다.
상냥한 자신의 천사 큐레이터로 되돌아와준 남자와, 또 조용히 웃기만 하는 부활한 사내와 함께 지내게 된 지 오늘로서 엿새째다. 그 엿새는 요 근래 몇 달간의 피로와 고통을 고스란히 상쇄시켜주기에 충분한, 더할 나위 없는 천국의 나날이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만 같았다. 공간도 사라진 것만 같았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니 현실도 사라져버렸다. 성노예가 돌아가야만 할 옛 주인도 사라져버리고, 상냥한 천사 큐레이터의 고백이 정말로 농담이었는지 아닌지 고민할 필요도 사라져버리고, 그림을 그리면서 이게 삶인지 죽음인지 일일이 분간해내야만 하는 힘든 작업도 사라져버렸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장인환과 그림 속에 표현된 ‘방’ 안의 장인환이 일치했다. 아니, 일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음이 삶 같고, 삶이 죽음 같았다. 이렇게 평화로운데, 죽음이 곧 삶 같은데, 굳이 부활을 욕망해야만 하는지 아리송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엿새째인 오늘은 중복이었다.
아침에 아랫마을(이라고 해봤자, 70∼80대 노인들 대여섯 명이 마을 주민들의 전부인)로 내려가 커다란 장닭 두 마리를 얻어 온 사내가 한 솥 가득 삼계탕을 끓여주었다. 푸짐하고 맛있는 삼계탕으로 든든하게 몸보신을 한 세 사람의 은둔자는 각자 볼일을 보러 흩어졌다. 사내는 작업실로 개조한 교무실에서 캔버스에 붙인 작은 한지 조각 입자들로 조밀함과 성김, 짙음과 옅음의 우주적 분포에 대해 말을 걸고 있었고, 인환은 사내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동구 밖 과수원에서 산등성이 백련암 절까지 즐거운 하이킹을 했다. 엿새 전, 서울에서 남자와 무리하게 합체를 시도하다 입은 하반신의 상처가 완전히 나아, 걸음을 걷기도 한결 수월해진 기념이었다. 돌아오는 길엔 너무 더운 나머지 백련암 근처 계곡에 들어가 메기와 열목어들이 뛰노는 일급수에서 멱을 감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남자는 그림 재료를 사다달라는 사내의 부탁을 받아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하동 시내로 출장을 갔다(인환이 사내의 그림 재료들을 빌려 쓰는 바람에 좀 더 빨리 재료가 떨어진 것은 아닐까 몹시 찔리는 대목이었다). 휴대전화도 안 터지는 오지였으니, 남자에게 있어선 하동 시내로의 외출이 유일한 문명 나들이인 셈이었다. 남자는 이틀에 한 번꼴로 하동 시내로 나가 두 사람의 은둔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을 사 온다거나 서울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면 남자와 약속한 이레째. 남자의 휴가가 끝나는 날이었다.
―……아직 휴가가 일주일이나 남아 있습니다. 그동안 제게 더 생각해볼 기회를 주세요…….
남자가 깊이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일주일만 더 함께 지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분명 선생님께 욕망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니까, 서로 기분이 동하면 섹스를 해도 되고요…….
기분이 동하면 섹스를 해도 된다고 했지만 남자는 이 엿새 동안 인환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있었다. 부러 조심하는 듯한 인상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 처음 남자를 만났을 때, 인환의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해주는 구원의 천사로서 다가섰을 때처럼, 남자는 성적으로 지극히 담담하고 플라토닉해 보였다. 그전 이틀간의 광적인 지분거림이 마치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일주일 안에 결론 내겠습니다. 그러니까 일주일만 더 저와 함께 지내주세요…….
정말로 남자는 결론을 내린 걸까? 내일이면 약속한 일주일째였다. 속으로야 이미 결론을 내린 것도 같았지만, 이젠 인환도 남자의 속내를 파악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 서로의 영혼에 ‘공명’하던 것이 그 언제 적 일이란 말인가. 다시금 그런 관계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정녕?
―……선생님을 화가로서 존경하는 건지, 아니면 연인으로서 원하는 건지, 그도 아니면 그저 단지 육체적인 욕망일 뿐인 건지, 일상적인 공간에서 제대로 정확히 판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저 화가로서만 존경해주는 거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한발 양보해서 그저 육체적인 끌림이라 해도 괜찮다. 남자가 만족할 때까지 열심히 봉사해주면 그만이니까.
―……괜찮아요. 겁내지 마세요, 선생님. 이제 선생님을 두렵게 하는 짓은 절대 안 해요…….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부디. 부디 제발 남자가 또 자신을 겁나게 하지 말기를. 연인으로서 구애하지 않기를. 사랑한다는 무서운 고백을 하지 않기를…….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오직 그 결론만 아니라면 다 받아들일 수 있다. 만만세다.
유리문을 밀고 복도로 들어서니 바로 교무실 문이 보인다. 사내의 작업실이다. 사내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도록 살금살금 발소리를 줄이고 인환과 남자의 몫으로 주어진 손님방으로 간다. 손님방 문엔 ‘4, 5, 6학년’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다. 워낙에 학생이 없어 1, 2, 3학년이 한 반을 이루고, 나머지 4, 5, 6학년이 또 다른 한 반을 이뤘나 보다.
여하튼, 사내가 인환과 남자를 위해 준비해준 교실은 꽤나 고급스럽다. 좀 비좁기는 하지만 세 사람 정도는 충분히 잘 수 있는 퀸사이즈의 침대도 하나 있고, 손님이 더 늘었을 때를 대비해 라꾸라꾸 침대도 하나 구비돼 있다. 태양열 발전기를 이용해 마음이 내키면 TV도 볼 수 있고, 시원한 일급 계곡표 생수를 늘 마실 수 있도록 자그마한 냉장고도 하나 비치되어 있다. 사내가 직접 만들었다고 하는 벽장과 테이블(이라기보단 평상)도 있고, 아이들이 쓰다 버린 책걸상을 재활용해 만든 식탁 세트도 있다. 옆 교실인 ‘1, 2, 3학년’ 교실이 주방으로 개조되어 있는데, 주방에서 만들어진 음식들을 가져다가 먹기만 하면 된다. 단지 하나 아쉬운 점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후끈거리는 이 더위다. 물론 역시 태양열표 전기를 끌어다 쓸 수 있는 에어컨도 하나 달려 있긴 하지만, 그야말로 전기는 비상시를 대비해 아낄 수 있는 데까지 아끼는 게 좋다는 사내의 조언이 있었다. 어차피 땡볕이 내리쬐는 오후까지만 버티면 산기슭에 자리한 학교 건물이어서 금세 선선해진다. 오늘이 중복인데도 새벽녘엔 이불을 덮지 않으면 으슬으슬 추울 정도니 말 다 했지. 굉장한 일교차를 보여주는 집이라 처음 이틀까진 적응하느라 조금 애를 먹은 기억이 있다. 물론 남자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덕분에, 추위를 느낄 때면 어느새 남자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가 있던 자신이었었다. 인환이 먼저 남자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간 건지, 아니면 남자가 부러 안아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새벽에 일어나보면 자신은 늘 남자의 단단한 팔 안에 안긴 채였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남자를 깨울까 봐 숨을 죽인 채 살그머니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요 엿새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벌어진 새벽녘의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계곡에서 빤 속옷을 창가에 널고 새 속옷을 주워 입었다. 하이킹을 하느라 땀투성이가 된 티셔츠와 반바지도 보송보송한 새것으로 갈아입은 것은 물론이었다. 시계를 살핀다. 4시 34분. 조금 있으면 해가 질 테지만 아직은 막바지 땡볕이 기승을 부릴 시간이다. 더위를 잊는 덴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 좋은 처방이 없다.
사내가 빌려준 이젤과 캔버스가 창가 쪽 테이블 옆에 놓여 있다. 마음껏 장난질을 칠 수 있을 만큼 목탄과 콘테도 넘쳐난다. 물론 값비싼 기름과 물감은 식객 주제에 바랄 처지가 아니다. 이젤 앞에 의자를 바짝 붙이고 앉는다.
남자는 저녁 무렵에나 돌아올 모양이다. 지난 이틀은 하동 시내엘 나가도 서너 시간이면 돌아왔는데 오늘은 좀 늦는 것 같다. 하긴 곧 휴가가 끝난다니 문명권으로의 재진입을 위해 이것저것 볼일이 산더미일 거다. 솔직히 그토록 능력 좋은 남자가 열흘 가까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은둔할 수 있다는 것도 무척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워낙 능력이 출중해서인 걸까? 열흘 동안 은둔해도 잘릴 염려조차 없는 슈퍼맨이라는 의미.
근 열흘 가까이 남자와 거의 붙어 지내서인 걸까? 남자가 없는 몇 시간 동안의 별리에 몹시도 위화감이 느껴진다. 남자가 그립다. 남자의 압도적으로 커다란 키며 아름다운 근육질의 몸, 배우가 무색하게끔 빼어나게 잘생긴 이목구비들이 그립다. 남자의 온화하고 상냥한 눈빛도. 인환과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왼쪽 볼우물이 깊게 패는 살인미소도. 이젠 제법 익숙해진 남자의 강렬한 체취도. 인환의 새로 그린 그림을 볼 때마다 진심으로 매혹된 듯 황홀해하는 몽롱한 표정도.
그래. 남자가 저녁에 돌아오면 기뻐할 그림을 또 그리자. 뭐라 해도 남자는 인환의 그림을 사랑해준다. 그림은 괜찮다. 그림은 사랑해줘도 된다. 사랑해주면 정말 고맙지. 아무렴. 다 고맙다. 다. 남자의 모든 것이 다.
잠시 캔버스를 노려보며 궁리를 한다. 일점을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하는 가장 기초적인 궁리다. 물론 궁리는 그것으로 끝이다. 일단 새하얀 벽지 위에 손을 대기만 하면 그 나머지는 궁리의 소관이 아니다. 그건 일종의 접신이다. 접신하면 ‘방’이 보인다. 궁리도, 생각도, 관념도, 고뇌도, 슬픔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 무아의 ‘방’. 그래. 이제 또 그 ‘방’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어디 보자. 그래, 여기다. 일 점. 일 점. 일 점…….
차륵.
거칠거칠한 아마포 캔버스 위에 콘테가 스치는 기분 좋은 소음을 끝으로, 현실이 사라졌다.
낙원이 내려왔다.
“……장…… 선생……?”
“…….”
“……장 선생, 일하고 있나?”
“…….”
“……장 선생, 그만하고 식사하시게. 저런, 그러다 눈 나빠지지. 이렇게 어두운 데서 작업을 하면 어떻게 하나, 자네?”
부활한 사람의 목소리가 인환을 부르고 있었다. ‘방’에서 빠져나오긴 싫었지만, 인환을 부르고 있는 생명의 목소리도 기분 좋을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부활한 자의 아우라가 주는 평온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인환은 천천히 현실로 빠져나왔다.
출입구에 선 사내가 전등 스위치를 올리는 게 보였다. 순식간에 사방이 환해졌고, 인환은 덕분에 시린 눈을 비벼 갑작스러운 빛의 홍수가 준 충격을 완화시켜야 했다. 사내가 켠 전깃불로 몹시 눈이 부신 걸 보면 날이 꽤나 어두워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새하얀 캔버스에 모노톤 작업이라 광선 양이 변한 것도 미처 자각을 못 했다.
“……화가가 눈을 아껴야지. 화가 재산 목록 1호 아닌가. 작업에 빠지면 무아지경이 된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렇게 눈을 함부로 혹사하면 못쓰네.”
“……예, 박 선생님. 조심하겠습니다.”
“암만.”
작업용 앞치마를 걸치고 있는 사내를 보니 사내가 또 저녁 식탁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흐릿하게 풍기는 된장찌개며 고등어구이 냄새에 송구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식객으로 민폐를 끼지는 것도 모자라 식사 준비조차 대부분 사내가 해주었던 지난 며칠간의 기억도 송구스러운 마음을 더 부채질했다. 요리하는 걸 즐길뿐더러 손님에게 자신이 가꾼 푸성귀로 식사 대접을 하는 일도 무척 좋아한다는 사내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루 이틀이지, 까마득한 연배의 선배 작가로 하여금(물론 나이 면에서) 매번 식사 시중을 들게 하는 게 편한 기분일 리는 없었다.
서둘러 작업대를 정리하며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 민망한 마음을 감췄다. 사내가 부를 때 잽싸게 가 먹어주는 것이 뻔뻔한 식객이 마음 넓은 집주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리라.
“이런, 벌써 8시가 넘었네요? 김 선생님께선 아직 안 돌아오셨나요?”
자연스럽게 또 다른 식객의 안부도 확인해보았다.
“글쎄, 오늘은 좀 많이 늦으시는구만. 늦을 거라고 언질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저녁 식사 전까진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 가로등도 없는 낯선 산길을 운전할 것도 좀 걱정스럽고…….”
“……늦는다고 하셨나요?”
“음, 만나볼 분들이 있다고 하시더군. 장 선생 저녁 식사 준비도 꼭 부탁한다고 했지.”
“…….”
“지극 정성인 친구야. 내게도 정말 잘해주시지만, 자네한테 하는 걸 보니 내 경우는 쨉도 안 되겠어, 하하…….”
“…….”
“……뭐, 워낙에 철두철미한 친구이니 걱정도 사치일 게야. 우리끼리라도 먼저 식사나 합시다, 장 선생.”
“……예, 박 선생님.”
잠시 걱정이 스친 것도 사실이지만 사내가 옳았다. 남자는 이쪽에서 걱정할 만큼 허술한 일은 벌이지 않으리라. 그건 믿음도 기대도 아니었다. 그저 남자와 며칠을 가까이서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알 수 있게 되는 남자의 ‘개성’이었다. 옛 주인 이외에 ‘완벽’이라고 저 이마 위에 찬란한 명패를 달아줄 인간을 또 만나게 되다니. 이런 걸 인복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좀 아리송해졌다. 뭐, 인환에게 있어선 인복일지 모르나 두 ‘완벽’한 인간들에게 있어선 저주에 불과하겠지만.
사내를 따라 주방으로 개조된 1, 2, 3학년 교실로 갔다. 주방엔 된장찌개와 고등어구이와 김치, 그리고 각종 푸성귀 쌈으로 이루어진 풍성하고 소박한 식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인환은 지난 엿새 동안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내와 함께 과식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포식을 했다. 확실히 공기 맑은 천혜의 오지라 그런지 입맛이 무척이나 돌았다. 물론 그 무엇보다도, 남자가 선물처럼 가져다준 마음의 평화가 과도할 정도의 식욕을 돋우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을 것이긴 하지만.
식사를 끝냈을 무렵엔 그나마 남아 있던 빛의 잔상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시각은 밤 9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시골에서 밤에 작업을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내의 충고에 힘입어, 인환도 해가 떨어진 후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모깃불을 피우고 옥수수를 쪄 먹거나, 사내가 키우는 똥개인 누렁이와 산책을 하거나, 유일한 문명과의 연결선인 TV를 시청하거나 하는 것이 요 엿새 동안 매일 저녁에 하던 일과들이었다.
사내가 작업실에서 저녁 9시 뉴스를 시청하는 사이 인환은 설거지를 하고 누렁이 밥을 준 다음, 역시 포식을 한 누렁이와 함께 산책길에 올랐다. 산골 마을 밤 산책은 좀 위험하기도 해서(인가도 드물고 가로등도 없기 때문에) 그리 먼 거리를 오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왕복 30∼40분은 족히 소요되는 오솔길을 누렁이의 안내를 받으며 즐거이 걷곤 했던 매일이었다. 물론 절대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완벽’표 남자가 곁에서 호위를 해주곤 하니 더더욱 즐거울밖에.
하지만 호위 남자가 없는 오늘, 똑같이 기분 좋아야 할 산책 코스는 확실히 평소와는 꽤나 달랐다. 시커먼 산등성이며 멀리서 들리는 온갖 산짐승들의 울음소리들이며, 무섭다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약간의 불안감을 안겨주기엔 충분했다. 남자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몇 시간 전보다 더 심해졌는데, 그런 자신의 마음 상태에 인환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이래서야 엄마와 떨어진 어린애와 한가지가 아닌가. 도대체 나이가 몇이냐, 장인환. 남자는 자신보다도 무려 다섯 살이나 어린 연하다. 연장자로서의 위엄은 바랄 처지가 아니라 쳐도, 어디 어리광을 부릴 군번이던가. 아무리 남자가 자신의 수호천사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수용해준다 하더라도 엄마 취급은 너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남자에게 의지를 해도 너무 의지를 한다고, 인환은 새삼 스스로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이제 내일이면 이 꿈결 같은 낙원 생활도 종말을 고하리라. 별 이변이 없는 한 남자에게 의지하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틀림없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엄마 잃은 어린아이로 퇴행해 남자를 그리는 일은 없을 터였다. 아니, 없어야만 했다.
뭐라 해도 남자는 큐레이터다. 큐레이터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큐레이터의 호감을 받는 화가일 뿐이고. 우정을 나누는 것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서로의 존재가 없으면 심각하게 타격을 입을 정도의 우정이라면 그건 매우 곤란하다. 화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해주고 조력해주는 것을 넘어 완전히 서로가 서로의 세계에 매몰돼버릴 위험이 있다. 비판과 견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저 맹목적인 추종만 있는 평론가와 작가의 관계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안 그래도 남자는 이미 과할 정도로 인환의 작품에 공명해주고 있다. 여기서 더 이상 남자와 가까워져선 안 된다. 서로의 예술 세계를 위해서나, 또한 사생활적인 면에서나. 특히나 남자를 위해서는 더더욱. 인환 자신이야 덤인 인생이니 여기서 더 떨어질 나락도 없지만, 남자야 다르지 않은가. 그야말로 앞길이 구만리인 창창한 재원이 아닌가 말이다. 퇴물 화가 하나 때문에 남자의 경력에 오점이 생기고 개인사에조차 파멸의 그늘이 드리우게 된다면, 인환은 도저히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빵빵.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며 익숙한 경적 소리가 울렸다. 제법 깊은 상념에 빠진 채 걷고 있던 탓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기습에 펄쩍 뛰듯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다음 순간 인환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뛰기 시작했다. 남자의 승용차였다. 남자의 낡은 흰색 볼보 자동차가 내는 경적 소리…… 남자가 돌아왔다!
저 멀리 길 끝에서 남자가 헤드라이트를 깜빡이며 인환에게 신호를 주고 있었다. 자동차의 속도는 거의 멈출 것처럼 현저히 줄고 있었다.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다. 아아, 역시 남자가 너무 좋았다. 너무너무 그리웠다.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이다지도 남자가 보고 싶었다니! 속도를 줄인 차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선, 그 채 1분도 안 될 찰나 동안 인환은 그야말로 등이 꼬챙이에 꿰인 새우처럼 안절부절못했다. 1분 1초라도 빨리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1분 1초라도 빨리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1분 1초라도 빨리 남자의 체취를 맡고 싶어서, 1분 1초라도 빨리 남자의 손을 맞잡고 싶어서. 1분 1초라도 빨리…… 남자의 모든 것을 품에 꼭 껴안고서…….
비포장인 도로는 딱 승용차 두 대가 간신히 마주 스칠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은 2차선 도로였다. 남자는 개울가를 옆에 끼고 걷고 있던 인환과 누렁이의 2미터쯤 앞에서 차를 세웠다. 그 2미터의 거리도 아쉬워 인환은 차가 멈춰 서자마자 승용차 앞 범퍼까지 한달음에 다가섰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또 쥐 죽은 듯 고요했기에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은 유난히 밝게 느껴졌고, 비교적 소음이 적은 볼보의 엔진 음도 마치 모터 소리처럼 요란하게 들렸다.
“선생님?”
드디어 차 문이 열리며 그리운 얼굴과 목소리가 모습을 나타냈다. 후리후리한 키와 늠름한 몸집에 걸맞은 밝은 미색의 리넨 슈트 차림인 남자는 어두컴컴한 깡촌 산기슭 풍경을 단숨에 세련된 보그지 표지 뒷배경으로 바꾸어놓았다.
“……느…… 느…… 느…… 늦으셔네요, 김 선생님!!!”
아이고, 말더듬이도 모자라 이건 인사가 아니라 거의 괴성 수준의 고함이다. 정말 안달 난 어린애가 따로 없다. 하지만 너무 좋은걸. 좋아서 견딜 수가 없는걸. 남자와 다시 만나게 된 게.
“……차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는 그렇게 접근하지 마세요, 선생님. 급발진이라도 하게 되면 몹시 위험합니다.”
얼굴 가득 환한 살인미소를 머금은 남자가 주의를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역시 엄마다. 모습은 근사하기 짝이 없는 최고의 킹카면서 엄마의 잔소리를 한다. 좋아서, 너무 좋아서 입이 저절로 헤벌쭉하니 벌어진다.
“……헤헤, 네에, 김 선생님…… 너…… 너무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늦었죠?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남자가 밀어처럼 나지막하고 달콤하게 물어왔다. 핥는 듯한 연인의 눈길이 더해졌다면 잔뜩 겁을 집어먹었겠지만, 지난 엿새 동안 늘 그래왔듯이 남자의 눈길은 마냥 상냥하고 다정하기만 했다. 엄마 같기도 하고, 형 같기도 하고, 때론 아버지 같기도 한(정말 창피하게도, 도무지 연하의 동생 같은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는 게 신기했다) 인환의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품어주는 보호자의 눈길이었다.
“……어, 에…… 헤헤…… 예, 조…… 조금…….”
쑥스러워져서 슬쩍 열이 오른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남자보다도 더 상냥하게 대꾸해주었다.
“……저는 많이 기다렸습니다. 고작 몇 시간 못 뵌 것뿐인데 한시라도 빨리 뵙고 싶어 혼났어요.”
“……어…… 어…… 에에…… 그…… 그, 그…….”
“하이구, 이거야 원, 대패 사 와야겠네! 닭살 돋아 살 수가 있나! 보자보자 하니까 이 친구들이, 정말~~~?!”
……두근…….
“……반가워하실 분들을 더 모셔왔어요, 선생님. 저분들 기다렸다가 모시고 오느라 늦은 겁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세혁아, 넌 아무렇지도 않냐? 배불뚝이 아저씨 주제에 저따위 눈꼴신 닭살의 퍼레이드가?!”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배불뚝이 아줌만 당신이잖아, 오주희. 인환이가 어때서. 저만하면 상태 괜찮게 삭은 거로구만.”
“어쭈? 첫사랑이라고 편드는 거냐, 한세혁? 아무리 눈에 뭐가 씌어도 그렇지, 저게 어디 괜찮게 삭은 거냐! 심해도 무지 심하게 아저씨스럽구만! 너보다 열 살은 더 늙어 보인다구!”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그만해라, 주희야. 마음 약한 우리 인환이 상처받겠다. 그리고 세혁이 말 맞구만, 뭐. 그 나이에 뚱뚱보가 안 된 것만도 얼마나 대견하냐. 석주랑 은표 봐라. 완전 켄터키 프라이드 아저씨가 다 됐잖냐. 걔들에 비하면 진짜 양호하지, 저 정도면.”
“그 나이? 그 나이라고 했어? 인환이보다 열 살은 더 잡수셨다는 마 사장님께서도 저렇게 퍼펙하신데?”
“후후, 좋게 봐주시니 저도 깨물어드리고 싶네요, 주희 씨.”
“오우, 농농! 그건 안 되죠, 마 사장님. 울 앙드레가 알면 사달 나요! 쪼잔해 갖고 의처증은 또 얼마나 심한지……!”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하하, 모두들 내리셔서 걸어가시겠습니까? 좁은 차 안에 끼어 가시는 것보단 그게 더 낫겠네요. 20분 정도만 걸으시면 되니까요.”
“음, 사내들은 전부 다 내리쇼. 곧 애 엄마가 될 예정인 존귀한 산모께선 그냥 미남 씨가 모는 차 타고 갈래.”
“하하, 예. 오 선생님은 저도 말리고 싶습니다. 기온도 선선해서 산책하기 좋은 곳이지만 아무래도 어두운 밤길이니까요.”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애 때문이 아니라 꽃미남과 단둘이 드라이브를 하고 싶어서지? 하여간 그놈의 미남 밝힘증은 여전하구만, 오주희 여사. 병이야, 그것도.”
“너 아까부터 자꾸 나 갈굴래, 한독사? 오랜만에 한판 뜨자 이거냐?”
“산모가 한판은 무슨 한판이야! 말 좀 곱게 써라. 배 속에서 아가가 다 듣고 있다구. 세혁이 너도 남 말 할 처지냐? 툭하면 독사처럼 쏘는 것도 병이야. 어째 다들 그 나이 먹도록 철이 안 들어요, 철이. 선 화랑 시절이 고스란히 리플레이 되는 것 같구만.”
“하하하…… 그만들 하시고 나오세요, 선생님들. 장 선생님께서 지금 선생님들이 뵙고 싶어 못 견디시는 것 같아요. 어서들 나오셔서 우리 장 선생님 좀 상냥하게 위로해주시겠습니까?”
“우악, 진짜 닭살이야, 김 선생!!! 인환이가 왜 저 지경인가 했더니 전부 김 선생 때문이구료?!!!”
“하하하하…… 예, 오 선생님. 제가 좀 죄 많은 인생입니다. 하하하하…….”
오직 남자에게만 신경을 기울이느라 차 안을 미처 살피지 않았었다. 실내등이 꺼져 있긴 했지만 조금 아래로 시선을 돌리기만 해도 차 안의 인영들을 발견해내긴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남자가 설마 손님들을 달고 올 줄도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인환이 받은 쇼크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 목소리는…… 저 목소리들은…….
조수석 문이 가장 먼저 열렸다. 보기에도 힘겨운 뒤뚱거리는 몸짓으로 만삭의 중년 여자가 바닥에 내려서고 있었다.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그리운 사람이었다. 한 달 안쪽으로 출산 예정일이라고 한 걸 보면 그야말로 어제오늘 하는 중일 텐데 어떻게 이 먼 오지 깡촌까지 내려올 생각을 했나 모르겠다. 참, 예나 지금이나 무모한 건지, 대담한 건지 알다가도 모를 여장부다. 만삭의 여장부가 완전히 중심을 세울 무렵, 뒷좌석의 문들도 차례로 열렸다. 새하얀 양복 차림의 마르고 호리호리한 사내가 제일 먼저 내렸다. 부드럽고 새까만 머리카락, 투명할 정도로 깨끗한 안색, 군살 하나 없는 180센티미터의 늘씬하고 유연한 몸매는 도저히 40대 중반의 사내라곤 믿어지지가 않았다. 몸매나 안색뿐만이 아니었다. 지나칠 정도로 나른해 보여, 차라리 그게 더 사람들의 신비감과 긴장감을 자아내는 우아하고 단정한 이목구비조차 10년 전 그대로였다. 설마 보톡스 주사라도 맞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름의 흔적조차 찾기 힘든 것은 심해도 너무 심하다 싶었다. 오주희가 옳았다. 10년 가까이 연상일 사내는 도리어 인환보다 10년은 더 젊어 보였다. 마해영이었다. 저 미메시스의 소중하고 소중했던 유일의 게이 친구 마해영이었다.
“……기절하지 마, 인환 씨. 나 많이 삐져서 인환 씨 쓰러져도 안 받아줄 거야. 우리랑 영영 인연 끊고 살라 그랬지? 울 손 사장도 인환 씨 괘씸하다고 만나면 한번 손봐주겠다는 거 말리느라 꽤 애먹었었어.”
정말로 안 받아줄 모양인지, 나른하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마해영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선다. 뒤로 물러선 마해영 탓에 막 뒤따라 내리던 또 다른 사내 하나가 어깨를 부딪쳤고, 사내는 싹싹하고 온화하게 마해영에게 사과를 했다. 싹싹하고 온화한 그 목소리 역시 가슴이 저릴 만치 그리웠다.
“……주희가 하도 엉망이라고 구라를 쳐놔서 그런지 난 잘 모르겠다, 인환아. 생각보다 그렇게 안 늙어 보여. 괜찮아. 옛날처럼 멋 부리고 다니면 금세 또 아름다워질걸? 너 우리 그룹의 꽃돌이였잖아.”
하, 역시 사람 좋은 기하 선배답다. 저 사람 좋은 온순한 눈동자에 비친 것은 분명 충격과 연민과 아픔이다. 꽤나 정을 쏟았을 어느 못난 후배 놈의 처절한 전락을 고스란히 직면한 데 대한 충격이자 연민이자 아픔이리라. 그럼에도 입에 발린 소리는 정말 입에 발렸다. 문제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도 그 소리를 스스로 믿어버린다는 데 있다. 선배의 눈에선 악인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미운 인간도 없다. 진짜로 없어서가 아니라 선배가 워낙 사람이 좋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다 자기 같은 줄 안다. 선배 역시 10년 전과 그닥 달라지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어쩐지 저 선배라면 10년 후에도 하냥저냥 똑같을 것 같다. 예술 업계 종사자들이 나이를 안 먹는 건 순수함 때문이다. 비교적 젊었을 때의 순수를 그대로 간직한 채로 늙어가기에. 또 ‘순수’ 하면 못 말릴 정도로 순수한 사람이 저 기하 선배가 아니던가. 아마도 옛 선 화랑 멤버들 중에서 기하 선배가 가장 나중에 늙을 거다. 이건 거의 100퍼센트 달성 가능한 예측이다.
“……솔직히 그건 무리라고 봐요, 선배.”
청바지에 산호색 반팔 티셔츠를 걸친 또 다른 사내 하나가 기하 선배와 마해영 틈에 끼어들었다. 날카롭게 찌르는 듯한 시니컬한 어투지만 목소리가 워낙 좋기 때문에 냉기보단 일단 호감부터 느끼게 된다고 경자가 저 목소리에 대한 감상을 말해준 적이 있었다.
“……주희야 원래 남자들 외모 평가에 있어선 심하게 가혹한 편이긴 하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 인환이 맛이 간 건 사실이죠. 아무리 멋을 부린들 예전의 영화는 찾기 힘들걸요? 그땐 진짜 귀여웠다구요. 얼마나 귀여운지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덕분에 진짜 푼수 짓 많이 했죠. 제가 얼마나 인환이 먹고 싶었는데요.”
이미 터져나갈 것처럼 박동을 빨리하던 심장은 더 이상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차라리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얼굴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이미 백지장인 것 같고, 그야말로 다리에 힘이 풀려, 마해영 말대로 누군가 후 불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으니 말이다. 이게 기쁨인지 공포인지 아픔인지 슬픔인지 모르겠다. 그 어느 쪽으로 판결을 내린대도 일단 크기부터 너무나 압도적인 감각의 홍수인지라, 그저 정신을 잃지 않고 견디는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인내를 필요로 했다. 뜨거운 액체가 고일 틈도 없이 무턱대고 줄줄 흘러내리는데, 콧물까지 가세를 하니 이거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러잖아도 맛이 갔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리 멋을 부려도 예전의 영화(영화가 있었는지는 또 금시초문이지만)를 찾기 힘들다지 않는가. 말끔하니 점잖게 그리운 친구들을 맞아도 봐줄까 말까 한데 이건 추해도 보통 추한 게 아니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넋 나간 미친년처럼 입을 헤 벌리고, 눈을 홉뜨고, 사지는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보너스로 눈물 콧물 범벅을 만들고 있으니……. 독사도 그렇지. 좀 부드럽게 둘러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찔러대니까 더더욱 진정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아아, 제기랄. 하지만 어쩌랴. 독사는 역시 10년이 가도 마냥 독사인 것을. 독사는 곧 죽어도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질 않는다. 아무렴. 독사가 달리 독사냐. 심장을 쿡쿡 쑤시는 독설만 내뱉어서 독사였다. 미워 죽겠는데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무시가 안 됐다. 늘 옳은 말만 하니까. 옳은 충고만 하니까. 성질이 똥같이 더러워도 늘 옳기 때문에, 저 하늘의 별처럼 늘 한결같기에 누구도 독사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함부로 하기는커녕 기하 선배와는 다른 의미로 그룹의 리더로서 존경을 받지 않았나. 시니컬하고 쿨한 댄디이자 실력도 짱이고, 게다가 핸섬한 얼굴과 늘씬한 덩치까지 더해지니 온 미대 학우들의 우상이 되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었다. 온통 시커먼 의상으로 도배를 하고 독사가 캠퍼스를 활보할 때마다 뭇 열혈 팬들의 시선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습도 미대는 물론 타 대학까지 파다한 유명한 전설이 되었었다. 물론 독사가 게이인 건 독사를 알게 모르게 흠모하고 있던 수많은 여류들에겐 숨겨진 참담한 비극이었을 테지만.
여전히 검은 옷을 입고 있어야 할 것만 같은데 어째 독사는 품이 꼭 맞는 평범한 청바지에 블루 티라는 푸른색 일색이었다. 아마도 인환으로서는 처음 보는 독사의 유색 옷차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별다른 위화감은 들지 않았다. 독사 역시 다른 친구들처럼 외모가 10년 전 거의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담담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더해져 더욱 젊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눈가에 살짝 자리 잡은 잔주름만 아니라면 여전히 20대라고 우겨도 별다른 저항은 받지 않을, 젊고 매혹적인 댄디 그 자체였다. 그랬다. 아주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독사는 어딘가 약간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그건 그네가 입고 있는 옷차림의 변화가 주는 만큼의 의외성과 매력을 더해주고 있을 뿐, 10년 전, 독사가 강렬하게 뿜어내고 있던 비범한 천재로서의 카리스마는 여전히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여전히 같은 생각이시면 제가 오늘 한 선생님을 저 산등성이 어딘가에 암매장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웃음기가 가득한 일침이 뒤에서 들려왔다. 분명 농담조였지만, 그 속에 은근한 뼈가 들어 있다는 것을 인환은 흐릿하게 감지할 수가 있었다(물론 인환에겐 그저 ‘은근한 뼈’에 불과했지만, 죽 모여 있는 일행들 누구에게나 날카로운 협박으로 들렸다는 건 인환으로선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익숙해진 커다란 손이 뻗어와 충격으로 휘청거리는 인환의 상반신을 어느새 단단히 죄고 있었다. 인환의 어깨와 허리 부근을 교차해 끌어안은 남자의 팔뚝 근처로 점점 더 강한 압력이 느껴졌고, 그럴수록 남자의 단단한 가슴 근육과, 여름 슈트의 용도로는 안성맞춤일 까칠한 리넨 섬유의 감촉, 그리고 따스한 체온들이 등에 좀 더 강렬하게 자각되었다.
……아아, 그렇지. 그렇지. 여긴 하동 근처의 깡촌 오지 분교다. 이 남자와 함께 왔다. 꿈같은 휴가였다. 낙원 속의 일주일이었다. 그래. 이 남자가 있다. 이 남자가 인환을 지탱해준다. 과거가, 시간이 통째로 들이닥쳐 자신을 후려쳐도 이 남자가 있으니 자신은 현실을 잃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는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 그리운 얼굴들이 보였다. 꿈이 아니었다. 가끔씩 꾸곤 하는 슬프고 그리운 꿈들이 아니었다. 그립고 그리운 추억 속의 과거가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여긴 오래전 폐교된 상화초등학교. 뒤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자신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 남자는 자신의 상냥한 구원의 천사님. 그래.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고도 과거와 조우할 수 있다. 청춘과 조우할 수 있다. 조용히 손을 뻗어 안녕 하고 인사할 수 있다. 인사해도 된다.
“……첫사랑엔 무조건 예외가 적용되는 거요. 당신도 알 텐데, 김 선생?”
시니컬한 독사 특유의 냉소가 툭 내질러졌다. 남자처럼 농담조이긴 했는데 어딘가 아득하고 슬프게 들렸다. 뿌옇게 변한 시야 때문에 목소리마저 아득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맛이 가도…… 자글자글한 주름에…… 잡티 기미…… 얼굴을 기어 다니는 새까만 개미들투성이에…… 배불뚝이 아저씨가 됐어도…… 열병 같은 첫사랑에 빠졌던 풋내기에겐 여전히 분홍색 재킷을 이쁘게 걸치고 생글거리는 애교를 날리며 캠퍼스를 누비던 첫사랑 그대로 보이는 법이오.”
독사가 두 걸음을 앞으로 더 걸어 가까이 다가왔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을 등지고 있어 잘 보이지 않던 독사의 표정이 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잘 지냈냐, 도련님?”
똑바로 인환의 눈을 쏘아보는 독사의 눈시울이 빨갛다.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이기까지 하는 독사의 얼굴 근육이 경련하듯 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얇아서 꽤나 신경질적으로도 보이는 날카로운 모양새의 잘생긴 입술은 좀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도 잘 지냈다…….”
안녕 하고 청춘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