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2003년 8월. 장인환(張仁歡)
그가 나흘 만에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주 침실(안방) 옆 손님방에 기거하던 상주 간호사가 병원으로 되돌아갔다. 역시 상주하다시피 이곳에서 출퇴근을 하던 김성준도 집으로 돌아갔고, 바쁜 의정 활동 중에도 매일 저녁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아와 그의 상태를 살피고 가던 이윤열도 안심한 듯 발길을 끊었다. 매일 들르는 주치의만 여전히 하루에 한 번씩 들러 그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거나 염증 약들과 보양식 거리들을 파출부 아줌마와 운전기사 홍 씨에게 산더미처럼 처방해주고 갔다.
주 침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무시무시하게 생긴 갖가지 의료 기기들도 말끔히 치워지고 애초의 침실용 가구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살벌하게 생긴 중환자용 전동 침대도 몹시도 화려하고 세련된 모양새의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로 바뀌었다. 기존의 퀸사이즈 침대는 어디로 갔을까 잠깐 궁금해졌지만, 침대 말고도 바뀐 가구는 많이 있다는 것이 기억이 났다. 한 달 전쯤 제주도로 내려오기 전에 보았던 익숙한 가구들 몇몇 또한, 용도는 같아도 모양새나 질 면에서는 훨씬 더 호화찬란하고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바뀌어 있었다.
가구가 바뀌어서 그런 걸까. 전체적인 집 안 분위기도 이상야릇할 정도로 밝아져 있었다. 거실이며 주 침실이며 하다못해 인환의 아틀리에로 쓰이고 있는 2층 손님방들이나 2층 거실조차 온통 빛으로 넘쳐났다. 커튼은 낯간지러울 지경으로 알록달록 화사한 이중 커튼으로 바뀌고, 벽지도 앤틱하면서도 로맨틱한 꽃무늬로 새로 발랐다. 물론 그건 집주인의 명령 때문이었다. 이틀 전, 아직 전동 침대 위에 누워 매우 조심스럽게 몸 컨디션을 회복시키고 있던 집주인이 회사 기획실 정 실장과 비서실 윤 실장 두 사람을 번갈아 부르더니 줄줄이 (인환으로선 의아하기 짝이 없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몇 가지 가구를 바꾸고 벽지와 커튼을 바꾼 것뿐인데도 그 효과는 실로 놀라웠다. 처음, 연인에게 안겨 이 집에 온 첫날 느꼈던, 마치 사람이 살지 않을 것 같던 을씨년스러움은 더 이상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간 이것저것 가구가 늘면서 조금 집다운 집이 되었다 싶긴 했어도, 이번 실내 개조가 가져다준 변화엔 비할 바가 못 됐다. 밝고 화사하다 못해 마치 무슨 웨딩 잡지 신혼 인테리어 특집호를 보는 기분이었다. 저 주방 한쪽에서 분홍 앞치마를 두른 갓 결혼한 새댁이 뛰쳐나온대도 인환은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인환이 어리둥절해하는 것과는 반대로, 인환 이외에 다른 집안 식구들은 집 안의 변화를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것 같았다. 요리를 하다가도 바뀐 벽지나 커튼에 시선이 머물면 파출부 아줌마의 내성적인 얼굴에는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감돌았고, 운전기사 홍 씨도 집 안으로 들어올 때면 이리저리 실내를 둘러보며 ‘벽지가 참 보기 좋습니다’와 같은 보시용 멘트를 연발하며 기쁜 듯한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 때문에 매일 저녁 집에 들러 그에게 보고를 하곤 하는 신 전무나 윤 실장, 정 실장도 별말은 없었지만 미소를 머금은 채 하늘거리는 신혼풍 커튼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물론 그 끝에 인환의 얼굴까지 슬쩍 훔쳐보는 것도 잊지 않아서, 인환을 종종 머쓱하게 만들곤 했다. 아아, 물론. 물론……. 인환으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버거운, 작금의 ‘가장 쇼킹한 변화’에 비하면 그 모든 집 안의 변화들은 새 발의 피만큼도 놀랍지 않을 내용이긴 할 것이다.
그랬다.
가장 쇼킹하고, 매번 그 변화를 대할 때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다시 보고 또 한 번 다시 보고, 그도 모자라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도 되새김질을 하듯 자꾸만 생각해보게 되는 극심한 변화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건…… 그것은…….
그랬다.
그건 이 모든 변화를 주도한 /집주인/ 당사자의 변화였다!!!
그가 죽었다는, 아니, 죽어간다는 이윤열의 협박에 기함해 완전히 넋을 잃은 채로 연희동 그의 집에 돌아온 다음 날이었었다. 아니, 그날 새벽이었다고 정정해야겠다.
인환은 상주 간호사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트럭처럼 덮쳐든 잠에서 마지못해 깨어나야만 했다. 인환이 임자 없는 야산의 무덤처럼 퉁퉁 부어오른 개구리눈을 하고 깨어 일어난 곳은 그의 환자용 전동 침대 위였는데, 당연한 것처럼 인환의 몸은 그에게 꽉 껴안긴 채였다. 그것도 하반신만 팬티까지 벌거벗은 알몸으로!!! 그의 명령에 따라 옷을 벗은 것까진 흐릿하게 기억이 남아 있긴 했지만 맨 정신으로 그 부끄러운 모습을, 그것도 생면부지의 젊은 여자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은 아닌 밤중의 홍두깨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어리둥절하고, 엄청 수치스럽고, 게다가 더 놀라운 건 침대 시트가 온통 피투성이였다는 점이다. 간호사가 놀라 비명을 지른 것도 ‘알몸으로 서로 끌어안은 채 자고 있는 호모들’ 때문이 아니라 침대 위의 난장 때문이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억울하게도, 그날 이후 예쁘장하게 생긴 젊은 여자 간호사의 얼굴을 인환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간호사가 그와 자신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시트 위에 낭자했던 피는 당연히 그의 것이었다. 그의 몸에 연결돼 있던 온갖 주삿바늘들이 배려 없이 막무가내로 뽑혔던 때문이라고 나중에 마주친 주치의가 설명해주었었다. 아마도 인환이 범인일 것 같진 않고, 그가 거센 몸부림의 와중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서로 미친 듯이 껴안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끝이 없을 것처럼 길고 격렬한 키스를 나눴던 것 같기도 하다. 울고불고, 키스하고, 빨고, 깨물고, 껴안고, 또 서로 비벼대고 애무했던 기억……. 죽지 말라고 울부짖었던 기억……. 기운 없는 그가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끈질기게 그의 입술과 콧망울과 뺨과 눈두덩을 물고 빨던 기억……. 물론 절대로 정확하진 않다. 그게 혼곤한 잠에 빠진 직후에 꾼 꿈속의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 밤, 그와 재회한 직후의 기억은 그저 꿈속의 일인 것마냥 흐릿한 혼돈으로만 남아 있었다. 이윤열이 전달한 ‘부고’가 준 충격은 인환조차 그 대미지를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감당하기 힘든 상처로 완전히 혼비백산해버리게 되면 상처 자체의 기억조차 날아가버리기도 한다는 걸, 인환은 이번 이윤열의 잔혹한 거짓말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를 만나러 서울로 되돌아오기까지의 여정 따윈 새까만 암흑이었고, 그나마 그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던 주 침실에서의 기억들은 그래도 제법 드문드문 살아남아 인환을 당혹시키고 있었다. 다만 그게 현실인지 꿈인지 여전히 아리송하다는 점이 다를 뿐. 정말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는, 아팠긴 해도 그나마 인환보다는 맨 정신이었을 그만이 정확히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의 변화는…… 저 쇼킹할 정도로 놀라운 그의 모든 변화들은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그 밤을 기점으로 시작됐다.
쇼크 하나, 그가 웃는다.
놀라지 마라, 장인환. 진짜다. 거짓말 아니다. 그가 웃는다. 그것도 하하하 하고 커다란 웃음소리를 내기까지 하면서. 물론 게다가 그것도 자주. 아니, 아니, 자주 정도가 아니라 툭하면 웃는다. 별것 아닌 일에도 웃는다. 어제 아침엔 잘 넘어지는 인환이 잠이 덜 깨 눈을 부비며 주방 쪽으로 걸어가다가 마침 파출부 아줌마가 물을 주기 위해 가져다 놓은 토피어리 화분을 미처 못 보고 걸려 넘어질 뻔한 적이 있었다.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크게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았는데, 거실 소파에 앉아 쉬고 있던 그가 처음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란듯하더니 다음 순간 바로 박장대소를 한 것이다. 어찌나 시원스럽고 커다란 웃음소리를 내던지, 파출부 아줌마도 놀랐고, 홍 기사도 놀랐고, 출근길에 잠깐 들른 정 실장도 놀라서는 다들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본 적이 없다. 아니,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웃는 모습은. 그것도 하하하 하면서 그의 매혹적인 바리톤이 왕왕 울리는 커다란 웃음소리는. 그의 미움만 잔뜩 받았던 과거 10여 년 전에는 물론이고 재회한 후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그의 웃음이 인환에게 준 놀라움은 그냥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완전 지구가 거꾸로 도는 충격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 쇼크 하나 되시겠다.
그리고 쇼크 둘, 그가 부드럽고 상냥하게 인환을 대한다.
기함하지 마라, 장인환. 진짜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가 부드럽다. 그가 상냥하다. 그것도 완전 닭살이 돋을 지경으로 무지무지 많이 상냥하고 부드럽다. 마치 인환을 공주님처럼 사사건건 배려하고 에스코트한다. 그것도, 폐가 여전히 아파 침대에 하루 중 태반을 누워 있어야 하는 와중에도. 다정하고 상냥한 시선으로 인환을 바라보고, 나지막하고 무뚝뚝하지만 너무나 부드러워 감미롭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시시콜콜한 수다와 잔소리를 하기까지 한다. 물론 게다가 그것도 매우 자주. 아니, 아니, 자주 정도가 아니라 툭하면 인환을 향해 말을 걸고, 인환을 향해 미소를 짓고, 인환의 몸을 껴안고 쓰다듬고 어루만진다. 마치 깃털을 어루만지듯이, 강아지를 애무하듯이, 솜사탕을 핥아 먹듯이. 키스는 더더욱 가관이다. 아픈 폐 때문에 강제적으로 쉬어야 하거나 치료를 받는 시간만 아니면 수시로 인환을 침대 위로 끌어올려 쉴 새 없이 물고 빠는 감미로운 키스를 한다. 너무 혀를 빨아 당겨서 아프지 않느냐고 묻기도 하고, 너무 입술을 깨물어서 부어올랐다고 실황 중계까지 하고, 목구멍 깊숙이 더 자기 혀를 넣고 싶지만 토기를 일으키게 만들기 싫으니까 참는다고 웃기까지 한다. 혀뿐만이 아니라 자기 음경을 인환의 귀여운 거기에 깊이깊이 박고 싶다고, 박고 싶어서 미치겠다고, 몸이 회복되면 각오하라고, 나지막한 바리톤으로 귓가에 음란한 성희롱을 속삭이기까지 한다. 정말이다. 음경이니, 거기 털이니, 동그란 두 개의 귀여운 구슬이니, 축축하고 따스한 내 사랑스러운 깊은 동굴이니, 그 깊은 동굴에 어서 파고들어가 하루 종일 나오고 싶지 않다느니 하는 낯 뜨겁고 유치하고 음탕하고 저속한 밀어와 고백들이 그의 입술로부터 거침없이 줄줄이 사탕으로 토해지곤 한다. 물론 다정하게. 물론 상냥하게. 저것(!)이 과연 자신이 알고 있고 또 알아왔던 그가 맞는 건지, 도저히,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지경의 닭살 버전으로.
그리고 쇼크 셋, 그가 완전히 반말로 바뀌었다.
황당해하지 마라, 장인환. 진짜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가 반말을 한다. 물론 동년배 친구거나 아랫사람, 혹은 몹시 친밀한 관계의 사람에게나 할 수 있을 법한 완벽한 하대를 인환에게 거침없이 툭툭 내지른다. 재회한 이래,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들 때 무시무시한 어조로 반말 명령을 한 적도 많긴 했지만, 요즘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무심하고 담담하게 하대만 던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하대를 써온 사이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나머지 뻔뻔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인환을 부르는 호칭 역시 너무나 닭살이 돋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어조의 ‘인환아’. 혹은 ‘장인환’. 정말 놀라운 건, 그렇게 종일 그의 낯선 하대를 들어야 하는데도 인환 역시 전혀 위화감을 못 느낀다는 거다. 마치 이젠 당연히 그런 식으로 불려야만 한다는 듯이.
그리고 쇼크 넷, 그가 자꾸 묻는다.
무엇을?
무엇을?
무엇이냐구?
그건…….
……질겁하지 마라, 장인환. 그건 그냥 그의 악취미다. 진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의 새로운 ‘복수’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거짓말 아니다. 그가 묻는다. 차마 대답을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질문을 한다. 그것도 잔뜩 열이 올라 발갛게 변한 얼굴로, 마치 사모하고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볼 때처럼 수줍고(맙소사, 그가 수줍어하다니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헛소리란 말이냐!) 동요를 감추지 못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부드럽게 인환의 온몸을 어루만지고 있는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 역시 조금씩 떨기까지 하면서 수시로 묻는다. 게다가 인환이 어떤 대답을 하건 이미 대답의 내용 따윈 들으나 마나라는 듯이 자신만만한 웃음을 머금고서. 정말로 이미 결과를 확신하는 것처럼 짓궂은 장난꾸러기의 음흉한 눈길로 인환의 눈을 들여다보기까지 하면서. 물론 게다가 그것도 자주. 아니, 아니, 자주 정도가 아니라 툭하면, 그야말로 눈만 마주치면 듣고 싶다는 듯이 수시로 그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무엇을?
무엇이냐구……? 세상에, 그래……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날 좋아하지……?”
“!!”
“……대답해봐, 인환아…… 좋아하지……?”
“…….”
“……좋아하잖아…… 그렇지……?”
“…….”
“……그렇게 힘든가……?”
“…….”
“……그 대답을 하기가 그렇게 무서워?”
“…….”
“……뭐가 그렇게 무서워?”
“…….”
“……뭐가 그렇게…….”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대답을 하기는커녕 대답할 말을 상상하는 것조차 사무치도록 두려운 질문. 저 아래 깊이깊이 봉인해버린 질문. 끝을 알 수 없는 저 깊은 수렁 속에 꼭꼭 눌려 아무도 열 수 없는 질문. 그래. 저건 아무도 찾을 수 없다. 새까맸다.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묻고 있었다. 그것이 어디에 갔느냐고. 어디로 숨어버렸냐고.
하느님, 그가 끊임없이 되묻고 있다.
되풀이, 되풀이, 마치 주박이라도 걸듯이 인환에게 같은 질문만 거듭 던지고 있다. 염불처럼, 기도처럼, 주술처럼…… 혹은 신께 드리는 최상의 경배처럼.
/나·를· 좋·아·하·고· 있·지·?/ 하고…….
상주 간호사가 돌아가고 나서 다시 이틀이 지난 저녁이었다.
죽에서 일반식으로 식사를 바꾸게 된 기념으로, 파출부 아줌마가 고기를 좋아하는 그를 위해 맛있는 바비큐 폭립 양념을 잔뜩 해놓고 갔고, 모레가 말복인 게 미심쩍을 만큼 밖의 기온도 그리 덥지 않아서, 정원에 나가 조촐한 바비큐 파티를 하게 되었다. 홍 기사가 정원 한편에 놓인 바비큐 그릴에다 폭립을 구워주웠고, 마침 들이닥친 정 실장과 윤 실장, 그리고 신 전무까지 함께 모여 맛있는 저녁을 먹게 되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간단한 티파티도 했고, 30분쯤 회사 일에 대해 보고를 마친 직원들이 돌아가고 홍 기사도 퇴근했다. 저녁 전에 주치의도 들러 그의 상태를 살피고 갔기에 더 이상의 손님은 없으리라 여긴 인환이 대문이며 담장 근처를 살피며 문단속을 하고 있는데, 그가 예의 상냥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환을 부른 것이다.
그는 저녁 내내 파티장 역할을 했던 커다란 파라솔 아래 앉아 있었다. 8인용 테이블 옆 주물 의자가 아닌, 그를 위해 마련된 1인용 등나무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오랜만에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는지 그는 손님들이 돌아가고도 좀처럼 집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아직은 환자인 그를 거의 노심초사하며 돌보는 중인(유능한 주치의가 있고, 간호와 보양식을 담당하는 홍 기사나 파출부 아줌마도 있고, 뻔질나게 드나들며 그를 살피고 있는 김성준까지 있긴 하나, 이미 한번 그의 생사여탈에 관해 질겁해버린 인환이 병아리를 돌보는 어미닭이 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귀결이었다) 인환 역시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었다.
“……문단속은 홍 기사가 다 하고 갔지 않나. 와서 앉아라, 장인환.”
“……어…… 어어, 응…….”
역시 아직은 그야말로 어리둥절 쇼크 자체인 그의 ‘상냥’ 내지는 ‘다정’ 공격에 쩔쩔매며 주춤주춤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꽤나 포식을 한 편이라 소화를 위해서도 별로 의자에 앉고 싶지는 않아서, 그의 등나무 의자 옆에 가만히 서서 폐가 걱정인 주인님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앉기 싫어?”
“……어…… 어어…… 소화 좀 시키려구…….”
“그렇군.”
역시 무조건 명령이 아닌, 일단 인환의 상태를 항상 먼저 살피고 명령을 내려도 내리는 요즘의 그다. 당근, 낯설고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렇군 하고 긍정의 대꾸를 주더니 곧바로 손이 뻗어온다. 어루만지듯 살며시 인환의 오른손을 쓸어내리다간 이내, 부드럽게 깍지를 껴온다. 등나무 흔들의자에 길게 눕듯이 앉아 있는 탓에 평소처럼 인환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는다거나, 자기 무릎 위에 앉히거나 하지는 않는다.
역시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 잔뜩 빨개진 얼굴로 마주 쥔 손가락을 바라본다. 길고 우아하고 예쁜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은, 생사를 넘나드는 심각한 질병에 시달린 탓에 단숨에 11킬로가 빠진 그의 몸처럼 뼈마디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있다. 볼 때마다 안타까워서 목이 메는 대목이다. 아무리 기적처럼 빠르게 기력을 회복하고 있다고 해도, 저렇게 마른 해골이라면 기적이 아니라 만판 구라다. 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그를 만나게 된 14년을 통틀어 이토록 해골처럼 마른 그를 본 적이 없다. 그는 그인데 그가 아닌 것만 같다. 마치 쇼크 자체인 그의 요즘 변화를 몸으로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나마 워낙에 아름다운 남자라 이리 뼈마디가 앙상한 해골이라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 미모는 여전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말라서 그런지, 사나운 야수처럼 압도적인 남성미가 줄어든 대신 어딘가 애수랄까, 섬세한 데카당스가 느껴진다.
“……내 손이 예쁜가?”
흠칫.
“……아름답다고 생각해?”
“…….”
저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질문에 얼굴로 순식간에 화끈한 열기가 끼쳐들었다. 질문의 끝이 어디로 가게 될지, 지난 며칠간의 곤혹스러움을 통해 생생히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요하게 인환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하고, 상냥한 시선이다. 마치 연인처럼. 끔찍이도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볼 때처럼. ‘연인놀이’ ‘연인놀이’ ‘연인놀이’…… ‘연인놀이’?
천만에. ‘연인놀이’라니. 그런 게 아니다. 아아, 차라리 정말 ‘연인놀이’처럼 여겨진다면 그 얼마나 마음이 놓이랴. 저 제주도에서의 ‘연인놀이’에서조차 그의 이런 시선은 받아본 적이 없다. 이리도 따스하고 열렬하고 맹목적인 시선이란…… 하느님, 절대 없다. 단연코 맹세할 수 있다.
“……날 봐, 인환아. 내가 예쁜가?”
“…….”
“……보라니까…… 시시때때로 훔쳐보는 걸 알고 있어. 내가 예쁜 거지?”
“…….”
“……계속 눈 안 마주칠 건가……?”
“…….”
“……속으로 보고 싶어하는 거 다 알아…… 나도 네 얼굴이 보고 싶어. 얼굴 들어봐, 인환아.”
“…….”
점점 더 낮고 은밀해지는 목소리에 온몸이 배배 꼬이는 것만 같다. 이제 얼굴은 물론 목까지 시뻘게져서 흐릿한 가로등 불빛만으로도 인환의 동요를 다 알아챌 수 있을 정도다.
“……나는 네 얼굴이 더 예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제발 얼굴 좀 자세히 보여줘, 인환아.”
우아아, 진짜로 미치겠네!!!!!!
“……민망한가?”
“…….”
“……얼굴 안 들면 진짜로 부끄러워서 죽고 싶게 만들 수도 있는데?”
“…….”
확확 달아오르다 못해 완전 불타는 고구마가 돼버린 얼굴을 마지못해 그에게로 향한다. 계속 무시했다간 그의 협박이 단지 협박으로 그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시선을 들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금쯤은 짓궂은 웃음을 머금고 있을 줄 알았는데 놀리는 기색이라곤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말라서 처연한 애수를 띠는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그저 따스하고 부드럽게 인환의 얼굴을 마주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새하얀 모시로 된 반팔 셔츠에 역시 새하얀 트레이닝팬츠 차림인 그는 어둑어둑한 암녹색 장원(莊園)에 방금 내려앉은 새하얀 날개의 천사처럼 현실감이라곤 전혀 없다. 청결하고 우아하고 고혹적이고…… 너무나 완전무결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애수 어린 얼굴도, 몸도…… 그저 마냥 꿈결처럼 몽롱하고 황홀하기만 하다.
“……심하게 말라서 보기 흉하지 않나?”
“…….”
“……그래? 이런데도 그렇게나 예뻐?”
“…….”
“……그걸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하는 거야. 콩깍지가 씐다고도 하지.”
“…….”
“……내게도 그런 콩깍지가 하나 씌어 있는 셈이지.”
“…….”
“……날 좋아하지……?”
“!!”
“……대답해봐, 인환아…… 좋아하지……?”
“…….”
“……좋아하잖아…… 그렇지……?”
“…….”
“……그렇게 힘든가……?”
“…….”
“……그 대답을 하기가 그렇게 무서워?”
“…….”
“……뭐가 그렇게 무서워?”
“…….”
“……뭐가 그렇게…….”
“…….”
그래. 그가 이상하다. 그가 돌았다. 정말 돈 게 틀림없다. 폐만 약해진 게 아니라 머리까지 약해진 게 틀림없다…… 고 인환은 질겁한 와중에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세뇌했다. 아니면 역시 이것은 그의 새로운 ‘복수’ 차원의 놀이인 셈이라고. 물론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만약 저것이 진실이라면, 저 눈빛이 고백해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인환은 미치게 될 것이다. 공포와 충격과 슬픔을 견디지 못해 완전히 발광을 하게 될 것이다.
봉인되었다. 봉인된 단어였다. 봉인된 대답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저 깊은 수렁 속에 꼭꼭 눌려 아무도 열 수 없어야 했다. 아무도 찾을 수 없어야 했다. 새까맸다.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인환 자신에게는 물론, 그게 그라면 더더욱 새까매야만 했다. 그에게라면 더더욱 밝혀져선 안 되는 대답이었다. 봉인이 풀려선 안 되는 대답이었다. 아무렴. 풀리는 즉시 인환은 발광하게 될 거다. 안다. 알고 있다. 눈앞의 이 꿈처럼 아름다운 남자만은 안 된다. 만약 이 남자마저 풀려버린 지옥의 대답으로 파멸한다면, 인환은 견딜 수 없다. 견딜 수 없을 거다. 세상은, 세계는 완벽하게 역전한다. 발을 디디고 있는 땅이 허공이 된다. 그래. 발광하고 나면 이게 삶인지 죽음인지 조금도 분별할 수 없게 되겠지. 고통인지 기쁨인지도.
“……호…… 호, 호, 혹시…… 너…… 너…… 네가 나 좋아하는 거야……?”
잔뜩 겁에 질린 쉰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너무나 떨리고 있어 마치 홀로 버려진 어린아이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마흔이 코앞인 중년 사내의 그것이라곤 창피해서 자백하기도 힘든 그런 목소리. 그런 어조. 하지만 아무리 창피하더라도 다시 물어야만 한다. 되물어 확인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 발광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이…… 이, 이, 이상해…… 너…… 너 요새 진짜 이상해…… 왜…… 왜 자꾸 이상한 짓만…… 지, 지, 진…… 진짜…… 지, 진짜로 너 나 좋아하는 거야……?”
그래. 이것은 방어 주술. 좀 더 강력한 결계로 봉인을 튼튼히 다지기 위한 방어의 주박. 단단히 묶고 또 묶어 다시는 풀리지 않도록. 저 어둡고 어두운 심연 깊숙한 곳에 파묻어 그 누구도 다신 꺼내 볼 수 없도록.
깍지를 낀 그의 손에 악력이 더해진다. 손가락 마디에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악력이다. 저렇게 말랐는데도 주어지는 힘만은 그대로니 그도 놀라울 일이다. 공포를 이기지 못해 파르륵 떨고 있는 자신의 손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황당한 자신의 질문에 기가 막혀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공격성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전자 때문이라면 호의고 후자 때문이라면 적의다. 그리고 이 순간 인환이 그에게 절실히 원하고 있는 것은 후자의 반응이다. 그래, 원한다. 그걸 원한다. 제발 자신이 원하는 그런 대답이 흘러나오기를…….
“……제정신인가?”
“…….”
“……네가 날 좋아하느냐고 물었지, 내가 널 좋아한다고는 안 했는데?”
“…….”
“……아저씨 주제에 공주병까지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
“…….”
“……어떻게 하면 그런 상상을 다 하나. 내가 널 좋아한다고? 네가 우리 혜윤이를 어떻게 만들었는데…….”
“…….”
휴우.
잔뜩 억눌린 안도의 한숨이 뇌리에서 길게 토해진다. 고저도 없고, 마냥 나긋나긋한 어조이긴 하지만 일단은 원하는 대답이 다시금 토해졌기 때문이다.
마주친 그의 눈빛은 여전히 상냥하고 부드럽다.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어려 있는 따스한 미소도 여전하다. 대답과 동시에 풀린 악력이 손가락에 부드럽게 전해진다. 엄지손가락으로 인환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고 있기까지 하다.
저 눈빛으로, 저 표정으로, 저 애무로, 인환의 죄를 담담히 단죄하는 그다. 가장 참담한 아픔을 태연하게 지적하는 그다. 절대 잊지 말라고. 네 죄를 잊지 말라고. 그리고 여전히 ‘복수’는 계속되고 있다고. 그러니 착각하지 말라고.
그랬다. 확실히 방어 주술로는 이만한 게 없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그가 좀 더 진지해 보일수록, 좀 더 그의 눈빛에 의심이 짙어질수록, 인환은 저 ‘질문’을 되묻는 것으로 스스로를 방어한다. 아직은 발광할 수 없다. 미치고 싶지 않다. 아무리 넋이 죽어버린 천하의 죄인이라지만, 적어도 여기가 현실인지 꿈인지, 혹은 삶인지 죽음인지는 경계를 분명히 하고 싶다. 죄를 지었고, 그래서 벌을 받는다. 벌을 받으면 혹시라도 그 죄가 조금이나마 희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조차 스스로에게서 박탈할 수 없다. 죄인인지 아닌지, 그조차도 분별할 수 없는 광인이 될 수는 없단 얘기다. 그래. 자신은 절대로 미치고 싶지만은 않다.
성공한 ‘방어 주술’ 덕분에 간신히 몸의 떨림이 가라앉는다. 그의 저 무시무시한 질문 덕에 순식간에 싸늘해졌던 얼굴에도 다시금 열기가 느껴진다. 아무리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저만한 연기력은 할리우드의 대 배우들도 따를 자가 없을 거라고 속으로 새삼 혀를 내두른다. 분명 그의 지적에 따끔한 아픔을 느낀 것이 확실한데도, 저 능청스러운 명배우는 자신으로 하여금 여전히 심장을 두근거리며 얼굴을 붉히게끔 만들고 있었다. 죄인에의 단죄가 아니라, 마치 무슨 열렬한 사랑 고백이라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만든다. 감미로운 표정으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가만가만 조심스럽게 반응을 살피는 듯 수줍은 애무로.
“……그…… 그…… 그렇지……? 그…… 그럴 줄 알긴 했지만…… 그…… 그래도 네가 요즘 하도 이상하니깐…….”
“…….”
“……지…… 진짜로 차…… 착각하기 쉽게…… 네가…… 요…… 요새 정말 이상하게 그러니까는…….”
“…….”
“……그, 그…… 뻐…… 뻔뻔스럽다고…… 지…… 진짜 뻔뻔스러운 질문이라고 나도 생각하긴 했어…… 미안…….”
“…….”
부드럽게 핥는 듯한 시선이 인환을 굽어보고 있었다. 애수 띤 아름다운 눈에 일렁이는 것은 그저 ‘복수’의 일환인 연기일 뿐이건만, 어째 첫사랑에 빠진 자의 수줍고도 조심스러운 열기처럼만 보이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리 와 앉아, 인환아.”
“?!!!”
“……괜찮아. 안고 싶어서 그래. 여기 무릎에 와 앉아.”
“?!!!!!!!”
“……아직 기운은 좀 없지만 그래도 안을 수는 있겠어. 이리 와라.”
“!!!!!!!!!”
“……강제로 하고 싶진 않아…… 상처 입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그래도 안고 싶군…… 무척…….”
“…….”
“……싫으냐?”
“…….”
“……네가 느끼지 못한다는 건 알아. 그래도 널 원해. 괜찮다면 안고 싶어, 인환아. 무척…….”
“…….”
참 이상한 남자다. 아니, 이상하다 여겨질 정도로 연기력이 뛰어난 남자다.
자기 음경을 인환의 귀여운 거기에 깊이깊이 박고 싶다고, 박고 싶어서 미치겠다고, 몸이 회복되면 각오하라고, 나지막한 바리톤으로 귓가에 음란한 성희롱을 끊임없이 속삭여대던 남자다. 음경이니, 거기 털이니, 동그란 두 개의 귀여운 구슬이니, 축축하고 따스한 내 사랑스러운 깊은 동굴이니, 그 깊은 동굴에 어서 파고들어가 하루 종일 나오고 싶지 않다느니 하는 낯 뜨겁고 유치하고 음탕하고 저속한 밀어와 고백들을 거침없이 줄줄이 사탕으로 토해내던 남자다. 바짝 말라 해골처럼 처연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침대에 묶여 있던 지난 며칠 동안 내내. 그런데 이제 와 새삼 조심스러워한다. 수줍어한다. 인환의 반응을 살피며 애절한 구애(가 아니라 물론 섹스에의 초대겠지)를 한다. 아니, 구애를 하는 것처럼 뛰어난 연기를 한다.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 1년을 기한으로 묶어둔, 어느 초라한 성노예에게. 그것도, 추하고 볼품없이 늙어버린 중년의 게이 성노예에게.
비위가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만큼 복수심이 독하다고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뭐, 하긴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랴. 성노예면 성노예답게 의무에 충실하면 그뿐인 것을. 다만 어찌나 연기력이 뛰어난지 마치 진짜처럼 착각을 하게 되는 게 문제다. 진짜로 사랑을 받는 것만 같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진짜로 수줍은 첫사랑의 구애를 받기라도 하는 양, 몸은 떨리고 얼굴은 온통 홍조로 물드는 것이 문제다. 그의 수줍음이 고스란히 이쪽에도 전해져 인환 역시 수줍고 민망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거다. 맙소사. 진짜로 복수도 이렇게 교활한 복수가 따로 없을 거다!
살짝 당겨지는 손끝에 이끌려, 고구마보다도 더 시뻘게진 얼굴로 주춤주춤 그의 무릎 위에 올라가 앉았다. 팔걸이가 있는 흔들의자라 약간 몸을 튼 자세로 그의 벌어진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내리고 두 팔을 그의 목에 감아 균형을 잡았다. 올라서는 순간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의자가 앞뒤로 심하게 흔들렸지만, 이내 조용히 진동이 느려졌다. 의자 등받이 뒤로 완전히 기대있던 그가 몸은 그대로 둔 채 두 팔을 뻗어 인환의 상반신을 꼭 끌어안자, 느릿하게 흔들리는 의자 위에서 서로의 몸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뤘다.
병 때문인지, 그토록 더위를 타던 그답지 않게 후덥지근한 온도 속에서도 그는 별로 땀을 흘리지 않고 있었다. 손바닥에 와 닿는 바삭거리는 세모시의 감촉이 청결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완전히 그의 목덜미 근처에 파묻자, 익숙한 체취가 좀 더 강렬해지는 것과 동시에 바비큐 폭립의 냄새가 흐릿하게 풍겼다. 자신에게도 고기 냄새가 배어 있을 것이다.
떨어져서 보면 해골처럼 보일 정도로 말랐건만, 막상 실제로 품에 안겼을 때 느껴지는 그의 몸은 여전히 단단하고 압도적이다. 워낙에 기본 덩치가 늠름하니, 평균치들의 그것에 비하면 역시 야위었다는 말이 무색해진다. 무릎 위에 올라가 안긴 것인데도 거의 정면으로 그의 얼굴이 보인다. 15센티 이상의 키 차이에 덩치 차이는 그보다 더 심하니, 완전 고무신짝에 달라붙은 껌이다. 역시 해골처럼 야위었다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떨지 마, 인환아. 나도 떨리니까…….”
“…….”
“……그렇게 부끄러워?”
“…….”
“……아무도 안 봐. 홍 기사가 문단속 철저히 했고, 담장은 3미터나 되지.”
“…….”
젠장. 누가 정원에서 섹스 하는 게 창피하댔나? 이렇게 귓가에서 밀어처럼 다정하게 소곤거리니까 그게 창피한 거지. 이렇게 떨리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자신을 애무하니까. 이렇게 닿을 듯 말 듯 수줍은 키스를 망설이니까. 마침내 이렇게…… 잔뜩 억눌렸던 애정을 일거에 폭발시키듯 격렬하게 키스하니까…….
조심조심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교대로 쪼고 핥으며 반응을 살피던 그가 결국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격렬한 흡입을 한다. 등에 둘러졌던 그의 팔에도 힘이 더해지며 상반신이 거세게 조여졌다. 아프다더니. 말랐잖아…… 하고 순간 뇌리로 불평이 쏟아질 만큼 거칠고 폭압적이었다.
“……으응…… 흡……!”
“……츕…… 후우…… 아픈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아니, 혹은 몇 초? 굶주린 맹수처럼 허겁지겁 인환의 입술과 입안을 집어삼키던 그가 흠칫 몸을 긴장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들려온 달콤하고 허스키한 물음. 갑자기 달려들었던 사나운 기세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입술을 떼어낸 그다.
서로의 입술 끝에 매달린 타액을 실처럼 길게 연결한 채로 그가 열렬하게 인환의 눈을 응시하고 있다. 아직 병색이 남아 있는 그의 황금빛 피부는 인환보다는 못할지언정 확연한 홍조를 숨기지 않고 있다. 정말로 착각하기 딱 좋을 홍조라, 속으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인에게 키스하는 숨 가쁜 흥분과 쑥스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홍조였기에. 새하얀 세모시 옷깃 위에 아련히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는,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워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까진 도무지 멈춰지지가 않는다. 그게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흥분과, 설렘과, 수줍음으로 온몸을 전율하게 된다.
새삼 넋을 잃은 채 그의 눈을 홀린 듯 마주 보자, 그가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며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는다. 다음 순간, 쪽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인환의 입가를 빨았고, 두 사람의 입술을 연결하던 타액의 실도 고스란히 그의 입안으로 삼켜졌다.
“……거칠게 안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역시 잘 안 되는군…….”
입술을 거의 붙인 채로 그가 여전히 쑥스러운 듯 사과를 한다. 사과라니, 진짜 돌겠다. 돌겠는데, 어째 심장의 고동은 더 빨라지고, 얼굴로 치닫는 열기는 더 심해지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몇 번이나 주린 듯 억제된 입맞춤을(그의 표현에 의하자면 /거칠지/ 않은 입맞춤!) 거듭하던 그가 마지못해 서로의 몸을 약간 떼어내더니 인환의 허리춤으로 손을 내린다. 그저 옷을 벗기려 하는 것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움찔 몸이 굳어들 정도로 긴장을 한다. 이상할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다. 물론 그의 낯설면서도 감미로운 미소와 말투와 몸짓 때문이다. 한결같이 부드럽고, 다정하고, 상냥하다. 닭살이 오소소 돋을 지경으로 정중하고 예의 바르다. 수줍다. 조심스럽다. 극진하다.
떨리는 손끝이 바지 지퍼를 내리고 안으로 파고든다. 무릎까지 오는 건빵 바지에 반팔 면 티, 그리고 속옷들이 인환이 걸치고 있는 전부였다. 예전의 그였다면 단숨에 그 모두를 찢어발기듯 벗겨 내던졌겠지만, 새롭게 변신한 ‘첫사랑에 빠진 소년’ 모드의 그는 무지 느리다. 가만가만 허리춤을 더듬고,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고, 뒤로 돌아가 궁둥이 근처도 한참을 어루만지다간, 겨우 바지 하나를 벗겨낸다. 그것도 여전히 몹시 떨리는 손길로. 벗기기 쉽도록 허리를 약간 들어주자 그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마치 고맙다는 듯이. 황송하다는 듯이. 매혹적인 울림의 바리톤이 아하하 하고 고막을 두드리자 등줄기로 짜릿한 전율이 스쳐 지나간다. 하느님, 진짜로 못살겠다. 진짜로 너무한다, 이 남자. 쑥스러운 나머지 그의 목덜미에 완전히 얼굴을 파묻어버린다. 순간 흠칫 전율하는 그의 몸……. 팬티를 벗기고 있던 손길이 좀 더 다급해진다. 엉덩이 아래 뿌듯하게 발기해 있던 그의 분신이 단숨에 흉기로 돌변해버린 것을 선연하게 자각한다. 팬티와 함께 신고 있던 슬리퍼마저 잔디가 깔린 정원 바닥에 떨어진다. 티셔츠는 바지보다는 좀 더 빨리 벗겨졌는데, 어쩐 일인지 그 밑의 러닝은 그대로 두는 그다.
“……다 벗기고 싶지만 네가 배 아픈 건 싫으니까…….”
갑자기 심장이 뭉클하며 목이 멘다. 진짜 심하다, 이 남자. 너무 심하다. 심하다고 욕을 하면서도 감지덕지 감동한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이는 자신은 또 뭐란 말이냐.
아래쪽이 벗기고 벗겨지느라 분주한 대신, 위쪽은 부드럽지만 열렬하게 서로를 물고 빠느라 바빴다. 어느새 서로의 입가와 턱 주변은 온통 서로의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나도 벗겨줘, 인환아…….”
입술과 코를 맞붙인 채 그가 애틋하게 부탁을 날린다. 물론 말이 부탁이지 실은 음란하고 달콤하고 고혹적인 유혹의 밀어다.
완전히 새빨개져서 두근두근 요동을 치는 심장을 가까스로 다독이며 손을 그의 바지춤으로 내린다. 타고 올라앉았던 하반신을 이리저리 비적비적 중심을 옮겨가며 간신히 그의 바지를 벗기는 데 성공했다. 고무줄 허리띠에 면으로 된 부드러운 트레이닝팬츠지만 의자에 서로 포개 앉은 자세로는 어떻게 해도 꼴사나운 모양새가 나왔다. 그가 근사한 늑대의 몸짓으로 능수능란하게 자신을 나체로 만든 건, 단지 그가 자신보다 아래에 있어서라는 것으로 스스로의 꼴사나운 비비적거림을 변명했다. 옷을 벗기며 숨이 넘어갈 만큼 유혹적인 키스를 할 수 있는 것도, 다 그처럼 경험이 풍부한 늑대들에게나 통용되는 걸 거라고, 왠지 심통이 나서 조금 거칠어진 몸짓으로 그의 팬티를, 그리고 새하얀 날개 같은 세모시를 연이어 벗겨냈다.
역시 마르긴 너무 말랐다. 크고 압도적인 뼈대는 그대로이되, 아무리 봐도 예전의 그 무쇳덩어리처럼 굳건하게 불끈거리던 근육이 아니다. 새삼 또 목이 메고 가슴이 아릿해진다.
“……괜찮아. 한 달 내에 예전으로 회복시킬 테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마라.”
상냥한 밀어와 함께 뺨으로 떨어지는 가벼운 키스. 그제야 한참 동안이나 넋을 놓고 그의 가슴팍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그의 눈빛에 서린 감정 역시 따스한 위로였다. 마치 자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애인이나 약혼자를 위로하는 듯한.
서로의 눈을 맞춘 채로 한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의 등 뒤쪽으로 완전히 허벅지를 감아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겹쳐 있어, 서로의 숨결이나 체온, 심장 박동이며 몸의 떨림, 혹은 미묘한 표정 변화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심지어 미세한 밤바람에 흔들리는 서로의 솜털까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다. 너무나 예민하고 섬세하게 서로를 향해 열려 있어, 도저히 감정을 숨기기란 불가능하다. 그건 그 역시 한가지일 것 같은데, 여전히 그의 눈빛에 서린 표정은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그것처럼 열렬하고 극진하다. 가슴이 저릴 만큼 애절하다.
“……나 안 좋아하지……?”
또 이 무슨 만용이 났는지 모르겠다. 또 이 무슨 뻔뻔스러움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냥 저절로 그런 추궁이 내뱉어진다. 이상할 정도로 가슴은 두근거리고, 이상야릇할 지경으로 목멘 설움이 인다. 위기감이 인다. ‘방어 주술’이라도 펼치지 않으면 정말로 울음을 참을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인가 보다.
“……지…… 진짜로 나 좋아하는 거 아니지, 위야……?”
“…….”
“……그…… 그…… 그런 거 맞지……?”
“…….”
열렬하고, 극진하고, 애절한 시선엔 깃털만큼의 미동도 없다. 그저 약간, 아주 약간 아련한 물기가 일렁인다는 착각이 일 뿐.
“……그래…… 내가 돌았냐?”
오랜 동안의 숨죽인 응시 끝에 한숨처럼 토해진 대꾸는 여전히 감미로운 속삭임.
“……내 결혼 생활을 망치고, 내 인생을 망치고, 내 소중한 혜윤이마저 망가뜨린 원수를 내가 어떻게 사랑하냐.”
꼼짝 않고 인환의 눈동자를 붙든 채 한 마디 한 마디 고해처럼 토해지는 절박감. 성스러운 기원처럼 하늘 꼭대기까지 닿을 애절한 울림. 그리고 전율처럼 사방으로 흘러넘치는 열렬하고 맹목적인 애정…….
……아마도 피붙이에 대한 애정이겠지. 그렇겠지.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해. 그래야 안 미쳐. 그래야 발광하지 않아…….
“……어떡하냐…… 못생긴 아저씨 주제에 이 공주병을…… 응, 인환아……?”
“…….”
“……안 좋아해…… 안 사랑해…… 죽도록 사랑하지 않아…….”
“…….”
“……네가 사라져버리면…… 나도 숨을 멈출 것처럼…… 그런 사랑이 아니야…… 안 사랑해…… 죽어도 사랑하지 않아……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너는…… 너 따위는 절대 사랑하지 않아, 장인환…….”
“…….”
뺨이 뜨겁다. 뜨거운 뺨보다 더 활활 타는 뜨거운 눈길로 삼켜버릴 것처럼 인환을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입술을 가까이 가져온다. 뜨거운 줄기를 이루는 축축한 그것을 그보다 더한 열기를 품은 다정한 혀가 극진하게 핥아 올린다. 핥고, 빨고, 또 핥고, 또 빨고, 또다시 핥아 올린다. 절박하고, 애틋하고, 열렬하고, 수줍고, 그리고 애절하게…… 그렇게 목숨을 걸고서…… 그렇게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키스를 한다.
―……안 좋아해…….
그래.
―……안 사랑해…… 죽도록 사랑하지 않아…….
그래. 이것은 방어 주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너는…… 너 따위는 절대 사랑하지 않아…….
좀 더 강력한 결계로 봉인을 튼튼히 다지기 위한 방어의 주박.
단단히 묶고 또 묶어 다시는 풀리지 않도록.
저 어둡고 어두운 심연 깊숙한 곳에 파묻어 그 누구도 다신 꺼내 볼 수 없도록.
“……내가 돌았냐……? 돌지 않고서야 내가 널 어떻게 좋아하냐…… 좋아하는 건 너잖아…….”
서로의 입술을 꼭 붙인 채로 문질문질 애무를 거듭하며 그가 허스키하게 중얼거린다.
“……네가 날 좋아하지…… 그래, 네가 날 좋아해…… 내가 예뻐서 환장을 하곤 하지…….”
서로의 성기를 꼭 붙인 채로 문질문질 섹스를 거듭하며 그가 애절하게 고백을 한다.
“……그래서…… 그 자식도 내버려두고 내게로 돌아온 거야…….”
아무렴.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해. 그래야 안 미쳐. 그래야 발광하지 않아…….
“……그 자식이 여기에 키스했어……?”
“……?”
“……그 자식이 여기에는……?”
“…….”
“……여기도 이렇게 나처럼 음란하게 어루만졌겠지……?”
“…….”
“……이렇게 마주 달라붙어서…… 이렇게 비비고 빨고 깨물고는 했겠지……?”
“…….”
[방어 주술’에만 빠져 있어 처음엔 그의 변화를 읽지 못했었다. 여전히 목소리는 감미롭고, 애무는 부드럽고, 또한 키스는 애틋해서, 그의 눈빛이 약간 바뀌었다는 걸 미처 알아채지 못했었다.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얼굴이며 어깨며 목덜미며 머리카락에 무수히 퍼부어지는 억눌린 키스의 열기를 통해서. 등을 껴안아오는 손가락의 감촉이, 그 수줍던 떨림에 문득 사나운 전류가 섞여들었다는 깨달음을 통해서. 아주 극히 작은 미세한 변화였기에, 그래서 더더욱 극심한 질투의 고통이 느껴진다는 예리한 자각을 통해서.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인환아…… 그건 다 이렇게 소독하면 그만이니까…….”
“…….”
“……이렇게…… 내 입술로…… 내 키스로…… 침으로…… 애무로…… 이렇게…… 내 정액으로…… 흠뻑…… 흠뻑…… 큭!!! 흡!!!”
“…….”
“……흑!!! ……윽!!! 흐앗!! 그래, 이렇게…… 흠뻑 적셔서…… 깨끗이…… 깨끗하게…… 큭!!!”
“…….”
“……윽!!! 큭!!! 이…… 인환!! 큭!!! 흐아앗!!!!!”
“…….”
토정의 끝에 뒤로 휘어지려는 그의 몸을 좀 더 단단히 받쳐 안았다. 매끄러운 마른 몸에 흥건히 밴 땀이 인환의 달라붙은 피부 위에 고스란히 섞여든다. 얼굴이며, 목덜미며, 가슴팍이며, 팔뚝이며, 손목이며, 손바닥이며, 그의 입술이 닿을 수 있는 범위로 드러나 있는 맨살의 피부란 피부는 온통 그의 타액으로 범벅이 돼 있다. 함께 그의 손안에 잡힌 채 사납게 주물러지던 성기도 그의 몸에서 뿜어 나온 정액으로 인해 흠뻑 젖어 있었다. 서로의 몸을 가르는 단 한 장의 옷가지인 러닝조차도 어느새 한쪽 팔이 빠진 채 느슨하게 반대편 어깨에 늘어져 있었지만 그가 흘린 땀이며 낭자한 타액의 공격을 빗겨가진 못했다. 알몸의 피부보다도 더 푹 젖었다는 건 그가 부러 그렇게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공정하리라.
“……흐…… 그…… 그래, 이렇게…… 후우…… 하아…… 학…… 하아…… 이…… 이렇게 다시 소독하면 그만이니까…….”
“…….”
“……그…… 후욱…… 후…… 후우우…… 그…… 그렇지……? 하아…… 하…… 네가 좋아하는 건 나니까…… 그…… 그따윈 그저 소독만 하면…… 소…… 소독만 하면…… 후우…… 후…… 그만인 거겠지……?”
“…….”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가쁜 호흡 와중에도 사납게 억제된 질투를 토해낸다. 상처받은 순정의 처절한 고통을 절규한다. 정말 놀라운 연기다. 놀라운 ‘복수’다. 진짜로 착각하게 된다. 진짜 질투로 미치는 것만 같은 그에게 전염이 된 나머지, 찌를 듯한 죄책감이 인다. 마치 연인의 순정을 배반하고 양다리를 걸친 철없는 계집애가 된 기분이다. 하. 양다리라니. 양다리라니. 진짜로 코미디가 따로 없다.
“……후…… 하아…… 하아…… 젠장, 그…… 그런데 왜 이렇게 숨이 가쁜 거야…….”
자조처럼 내뱉어지는 웅얼거림. 펄쩍 놀라서는 눈을 홉떠 그의 상태를 살핀다. 소년의 수줍은 홍조는 어느새 온데간데없고 마치 시체처럼 창백해진 얼굴이 인환을 열렬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파르륵하니 눈꺼풀까지 떨며. 쑥스러운 듯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아름다운 입술도 하얗게 질려 있다. 폐 때문이다. 아픈 폐가 문제다.
심하게 헐떡이는 그의 폐가 걱정이 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그의 가슴 부근에 정신없이 입술을 눌러대고 있다. 오르가슴의 여운으로 잘게 부서지듯 경련하고 있는 그의 어깨와 등줄기도 어떡하면 그를 빠르게 진정시킬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염을 담아 열정적으로 쓰다듬고 애무를 거듭한다. 근심의 시선 탓에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성적인 반응들이 아프기 전에 비해 훨씬 더 나약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리라. 11킬로다. 무려 11킬로나 빠졌단다. 심장마비도 세 번이나 왔단다. 사지를 헤쳐 나온 그다. 약한 것이 당연하지. 약해진 것이 당연하지.
문득 목이 또 메어와, 입술을 꼭 깨문 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는다. 아릿하고 쌉싸름한 풀 냄새 같은 그의 체취와 땀 냄새와 정액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폐부를 가득 채울 기세로 파고든다. 대단한 남자다, 하여간. 자기 체액으로만 인환을 범벅으로 만들어 소독을 하겠다더니 정말 과장이 아니다. 그 말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폐 속으로까지 침투를 한다. 폐 속의 허파꽈리란 꽈리는 전부 다 그만의 냄새로 가득 들어차 있을 거다. 어찌나 가득 차 있는지 당분간은 다른 냄새라곤 하나도 못 맡을 것만 같다.
“……조금…… 후…… 하아…… 헉…… 헉…… 후우…… 진…… 진정만 하면 돼……. 후우…… 괜찮아, 인환아…… 괜찮아…….”
“…….”
“……후우…… 제일 중요한 여기도 소독해야 하는데…… 이래서야 제대로 소독이 가능할지 모르겠군…….”
“…….”
“……내 걸로만 소독해야 하니까…… 이…… 이번만…… 하아…… 후…… 유…… 윤활제 없이 그냥 한다, 인환아…… 조심하긴 할 테지만 그래도 아플 거야…… 후우…… 하…… 하지만 괜찮지……? 참을 수 있지……?”
“…….”
“……후우…… 후우…… 며…… 몇 번이나 여길 썼어……?”
“…….”
“……괘…… 괜찮아…… 널 비난하려는 게 아니야…… 쓴 만큼만 오늘 밤에 소독을 해야 하니까 묻는 거야……. 몇 번이지?”
“…….”
“……이런, 또 울리려던 게 아닌데…….”
“…….”
“……인환아…… 인환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말 안 해도 돼…… 인환아……? 후우…… 젠장…….”
“……한 번…….”
“!!!”
“……따…… 딱 한 번…….”
“…….”
“……그…… 그래도 한 건 아니구…… 김 선생님이 정말 신사라서…… 그냥 한 번…… 자는데 내가 몰래 유혹해서…… 집어넣긴 했는데…… 금방 빼서…….”
“…….”
“……상처만 나고…… 안 했어…… 그냥…… 그냥 착각하신 거래…… 내 그림이 정말 좋아서…… 나도 좋아하는 줄 착각했다고…… 막상 하니까 기분 나빠지셨나 봐…… 그…… 그래서 그…… 금방 빼시더라…… 아…… 아무튼 그래서 딱 한 번이니까…….”
“…….”
활짝 열린 채 빈틈없이 달라붙어 있는 서로의 마음이 거짓을 발 못 붙이게 한다. 아니, 적어도 인환의 진실만큼은 도저히 까발리지 않곤 못 배기리라.
자신의 회음부와 은밀한 밀부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괴로운 듯이 몇 번이나 했냐고 묻는 그가 아팠다. 도무지 자신이 어떤 경우든 그를 괴롭힌다는 게 말이 되는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설령 그는 연기일 뿐일지라도, 그저 또 다른 교묘한 ‘복수’극일지라도, 그저 본능처럼 자연스레 솟아나오는 이 찌르는 듯한 죄책감을 어떻게든 덜고 싶었다. 질투로 괴로워하는 듯한(괴로워하는 듯 연기를 하는 듯한)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별것 아니라고, 그저 착각일 뿐이었다고, 김강원은 괜찮을 거라고, 더 이상 그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라고, 또한 양다리를 걸친 철없는 계집애가 만약 존재한다면 부디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변명하고 싶었다.
“……아…… 아무튼 누…… 누가 나 같은 다 삭은 아저씨를 좋아하겠니…… 그야 착각은 할 수 있겠지만…… 막상 해보면 정말 기분이 안 나긴 할 거야…… 게다가 발기까지 안 되고…….”
“…….”
“……아, 아무튼 그래서 나도 안심했어, 위야…… 김 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고…… 나도 그분 상처 입히게 될까 봐 진짜로 무서웠거든…… 처음엔 말도 잘 안 나오더라…… 또 죄짓는 게 아닌가 싶어서, 참…….”
“…….”
“……그러니까, 에, 아, 아무튼 딱 한 번이었으니까…….”
“…….”
‘……한 번만 소독하면 된다’고 무심코 재잘거리려다가 움찔 놀라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이렇게 그가 펼치는 ‘복수혈전’에 정신없이 말려들다가는 완전히 현실감을 상실하고 말겠다는 자책이 문득 솟아났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의 표정이 너무나 어둡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만 했고, 그것도 제대로 하지도 못한 거라고 하면 그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보았다. 어쩐지 더 심한 질투심을 느끼는 것도 같고, 무언가 다른 것으로 괴로워하는 것도 같아서, 인환은 그저 숨을 죽인 채 그의 다음 반응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또 울게 만들었군…….”
차마 그의 어두운 시선을 계속 지켜볼 수가 없어 고개를 떨군 채로 그의 등만 어루만지고 있는데, 자조 섞인 나지막한 울림이 들려왔다. 여전히 다정하고 감미롭기만 한 목소리여서, 꽉 조여지고 있던 폐부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울리고 싶지 않은데…… 이미 울린 것만으로도 차고 넘쳐 강을 이룰 정도인데…….”
눈물은 이미 그쳤지만 축축하게 젖어 있는 뺨이 마음에 걸렸던가 보았다. 풀죽은 소년의 첫사랑이 우울한 상념으로 가득한 회한을 말한다. 첫사랑의 열기를 품은 다정한 입술과 혀가 축축해진 뺨을 또다시 극진하게 핥아 올린다. 핥고, 빨고, 또 핥고, 또 빨고, 또다시 핥아 올린다. 절박하고, 애틋하고, 열렬하고, 수줍고, 그리고 애절하게…… 그렇게 목숨을 걸고서…… 그렇게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키스를 한다.
“……다리…… 좀 더 들어봐, 인환아…….”
자신의 밀부를 어루만지던 손끝이 한쪽 허벅지를 슬쩍 밀어 올리며 의사를 전달한다. 다시금 흉흉한 기색이 완연한 그의 페니스가 거의 달라붙어 있던 인환의 치부를 조금씩 때리고 있었다. 얌전하게 순종했다. 다리를 좀 더 넓게 벌리고 그가 쉬이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활짝 열었다. 그가 흥건하게 젖어 있는 서로의 치부를 더듬어 손가락에 흠뻑 그의 정액을 바르더니 천천히 안으로 접근했다. 가슴 저리게 메마른 피아니스트 신동의 손가락이, 어쩔 수 없는 긴장으로 꽉 오므라든 주름을 달래듯 부드럽게 헤치더니 안으로 조심스레 파고들었다.
느리고, 느리고, 또 느린 접촉이었다.
부드럽고, 부드럽고, 또 부드러운 진입이었다.
상냥하고, 상냥하고, 또 상냥한 달램이었다.
아래로 파고든 손가락이 어느새 두 개로 늘고, 또 세 개로 늘고, 마침내 네 개로 늘어나 부드러운 초대를 거듭하는 동안, 위쪽의 입안으로 파고들어 희롱하는 혀의 움직임은 대신 점점 더 격렬해졌다.
머릿속이 멍해지며 점점 더 하반신의 힘이 풀려갔고, 삽입 섹스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도 점차로 무뎌졌다. 무엇보다, 가슴을 몹시 설레게 하는 그의 부드럽고 따스한 접촉이 인환의 그나마 흐릿하게 남아 있는 불안감을 없애주었고, 지금 인환의 몸을 완전히 품은 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남자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이끌어내주었다. 무섭지 않았다. 이 남자가 주는 상처라면 하나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점점 더 아득해지는 부유감에 허리를 뒤로 휘며 축 늘어지는 순간, 그의 손가락들이 조심스레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움찔 몸을 떨자, 그의 까슬하고 뜨거운 혀가 위로하듯 인환의 혀뿌리를 농염하게 어루만졌다. 갑자기 텅 빈 공간에 어쩔 수 없는 허기를 아쉬워하는 순간, 딱딱하게 굳은 덩어리가 불쑥 빈 공간으로 다가들었다.
“……다리…… 인환아, 내 허리에 꼭 감고…….”
허스키한 바리톤의 울림이 달콤하게 귓가를 울렸다. 단단한 그의 두 팔이 등 뒤로 교차하듯 인환의 상반신을 받치고 있었다. 이미 완벽하게 남자의 지배권에 든 나른한 몸이 자동인형처럼 명령에 복종했다.
두 다리로 나무뿌리처럼 그의 허리를 꽉 움켜쥐자 회음 부위를 불끈거리며 배회하던 거대하고 딱딱한 덩어리가 불쑥 안으로 파고들었다. 눈앞에 번쩍 불빛이 인 듯한 착각과 함께 하반신으로 엄청난 통증이 직격했다.
“……흐아악!!!!!”
“큭!!!”
단숨에 뿌리까지 파고든 격렬한 삽입이었다. 하반신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과 압박감에 저절로 숨죽인 비명이 터졌다. 두 눈이 희번덕 부릅뜨이고, 그의 등 뒤로 교차돼 있던 양팔은 필사적으로 손톱을 세워 스스로의 고통을 알렸다. 참으려 기를 썼지만 고양이처럼 일어선 손톱은 잔인할 정도로 가차 없이 만져지는 피부 위를 긁어 내렸다. 그나마 그의 허리에 감긴 두 다리가 워낙 단단히 결합해 있어, 사납고 격렬한 삽입이 주는 충격과 통증을 간신히 견딜 수 있을 정도만큼만 완화시켜주었다. 인환이 느끼는 고통을 그 역시 느끼는지, 일단 결합이 이루어지자 거친 호흡만 토해내며 한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인환의 상반신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끔 꽉 껴안고 있는 그의 양팔도 그저 어마어마한 힘만 주고 있을 뿐, 어루만진다거나 위치를 이동하는 일은 없었다.
“……후우…… 괜찮은가……?”
“……흑…… 윽…….”
“……인환아…….”
“……하아…… 아…… 흑…….”
“……인환아……?”
“……흑…… 위…… 야…….”
“……됐어…… 움직이진 않을 거니까 더 이상 아프지도 않을 거다…….”
“……위위…….”
“……한…… 번에 넣는 게 상처를 내지 않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후우…… 괜찮나……?”
“……위야…… 흑…….”
“……피는 안 나는 것 같아…… 후으…… 괜찮아…… 괜찮아…… 괜찮을 거야…….”
“…….”
“……다리 더 감아봐…… 괜찮으니까 아프면 등 더 긁어도 돼…… 자세는 편한가……?”
“……으…… 흣…… 괜찮…….”
“……후…… 후후…… 실은 나도 아파, 인환아…… 힘…… 아래…… 더는 안 풀리겠지……? 하긴 일단 한 번 빼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위위…….”
“……후…… 그래…… 그렇게 내 이름 좀 불러봐…… 흔들지 않아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고개 들어봐…… 키스하게…… 옳지…… 또 울었어……?”
“……위위…….”
“……왜 자꾸 울어…….”
“……위야아…… 흑…….”
“……아직 많이 아픈가……?”
“…….”
“……하하, 그렇지? 이제 숨 쉴 만하지……?”
“……위…… 위위…….”
“……울지 말아…… 왜 울어, 자꾸…… 괴롭게…….”
“……윽…… 흐으…….”
“……키스하자, 인환아…… 그만 울고…… 촉…….”
“……위…… 위위…… 훕…… 쪽……! 쪽, 쪽, 추웁…… 흐웁…….”
“……음…… 읍…… 후으…… 쪽, 촉…… 쫍…… 쪼옥…….”
“……으응…… 흐으움…… 위…… 야…… 흡…….”
“……쪼옥, 쪽, 쪽, 쪽 쪼오옥, 츱…… 이름…….”
“……으응…… 흐응…… 츕…….”
“……이름 좀 불러봐, 인환아…… 내 이름…… 빨리 사정해야지 괴로워서 안 되겠어…… 후후, 역시 참기가 힘드네…… 막…… 미친놈처럼 질주하고 싶어져…… 아아, 역시 너무 기분 좋아, 인환아…….”
“……위위…… 흑…….”
“……따뜻하고…… 축축하고…… 깊어서…… 좋아…… 내 거지…… 내 거란 말이지, 이게…….”
“…….”
“……아아, 하느님, 너무 좋아……! 좋아서…… 좋아서…… 죽어도 다신 나오고 싶지가 않아…… 네게 이렇게 깊이 파묻은 채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네 여기를 막 헤집어서 난장판으로도 만들고도 싶고…… 아아, 제길…… 제정신이 아닌 거야…….”
“……위위…….”
“……그래…… 내 이름…… 불러줘…… 네 귀여운 목소리로…….”
“……위위…… 위…… 훕……! 하아아…… 훕, 쪽, 쪽, 쪼오옥…….”
“……쪼오옥…… 이름…… 인환아…… 내 이름…….”
“……위…… 위위…… 위야…….”
“……옳지…… 옳지, 그래…… 더…… 더 불러줘…….”
“……흐윽…… 흡…… 훕, 읍, 쪼옥…… 움…… 위이…….”
“……쪽, 쪼옥, 촙…… 키스도 하고 싶은데 이름도 듣고 싶고…… 아아, 젠장……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모르겠어…….”
“……쭙, 추웁, 쭙쭙, 쪼오옥…… 하아…… 학…….”
“……하아…… 후…… 쪽, 쪽, 쪼옥…… 인환아…….”
“……응…… 응, 위위…….”
“……인환아…… 인환아…… 쪽, 쪽, 춥…… 인…… 쪽…… 쪼옥, 츄웁…….”
“……쪽…… 쪼옥, 츄웁…… 위…… 이…… 위야아…… 흑……!”
“……귀여워…… 귀여워…… 귀여워…… 하느님…… 너무…… 하느님, 너무 귀여워…… 흑!!! 큭!!!!!! 쪼옥, 쪽, 츕…… 인…… 인환아아!!!”
“……하아아…… 아…… 위위……!”
“……큭……! 큽!! 흐윽!!!”
“……읏…… 흐윽……! 아…… 아파……!”
“……미안…… 인환아, 조금만……! 흐읏!! 움직…… 흐앗!! 큭!!!”
“……아……! 아파!!! 아아…… 흑!! 위윗!! 흐앗!!”
“……인환…… 큭!! 흣!! 크으윽!!!!!!”
“……아파……! 아아, 위야아아…… 아……! 흐윽!!!!!!”
“……흑!! 인…… 인환아!! 큭!!!!! 인환아아…… 윽!!!!!!!”
“……아아…… 아…… 아파…… 아악!!!!!”
그의 탄탄한 두 팔에 잔뜩 억눌린 상반신이 아픈 건지, 가끔씩 수컷의 충동을 누르지 못하고 그가 깊게 찔러대는 그곳이 아픈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 둘 다일 것이다. 정신없이 물고 빨고 씹고, 다시금 물고 빠는 그의 열렬하고 맹목적인 키스로 숨이 막히는 건지, 한계 상황까지 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수컷의 충동을 참고 있는 그의 초인적인 배려에 숨이 막히는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역시 아마도 그 둘 다일 것이다. 어질어질한 고통과, 숨 가쁜 산소 부족과, 저 멀리서 아득하게 울리는 진실의 종소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내벽 깊은 안쪽으로 그의 뜨거운 정액이 봇물처럼 끼얹어졌다.
약간 앞쪽으로 기울어 있던 그의 몸이 인환의 상반신을 와락 끌어안은 채로 의자 등받이 뒤로 넘어갔다. 진저리를 치며 숨 가쁜 교성을 토해내는 그의 몸은 상처 입어 죽어가는 짐승처럼 처절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승천을 놓친 채 노도처럼 사나운 피의 폭풍을 일으키는 시퍼런 청룡 같기도 하고, 거대한 눈사태에 휩쓸려 시뻘건 피를 뿌리며 떠내려가는 거대한 백호 같기도 했다. 인환을 놓치면 당장 빈사의 숨이 끊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필사적으로 인환과의 깊은 결합을 유지하려 요동치고 있었다. 그의 불안과 공포와 분노와 슬픔은 인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인환 역시 그로부터 죽어도 떨어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완벽하게 맞물려 있는 내벽 안쪽으로, 경련하는 그의 페니스가 몇 번에 걸쳐 눈물 같은 토정을 계속하고 있었다. 마치 멈추면 그대로 결합이 풀리기라도 할까 봐, 끊임없는 미련과 고집과 집착과 애원을 담아 길고 긴 울음을 울고 있었다.
사납게 요동치며 울부짖고 있는 짐승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두 다리로, 두 팔로, 열 개의 손가락으로, 한 개의 입술과 또 한 개의 아누스로, 갈퀴처럼 쫙 펼쳤다간 그의 전 존재를 꽉 움켜쥔 채 도로 오그라들어 영영 놓지 않았다. 누르고 짜부라트려, 짐승을 압사라도 시킬 기세였다. 무슨 미친 짓이냐고, 누군가 간섭을 하길래 압사당해도 좋을 거라고 이를 갈며 되받아쳤다. 압사당해도 좋으니 우릴 그만 내버려두라고. 그만 이리 달라붙어 죽게 내버려두라고. 죽어가는 짐승은 온통 기쁨으로 자지러졌다.
“……후우…… 흑…… 하아, 아, 하악, 하아…… 학……!”
“……하아…… 아…… 학…… 학…… 위…….”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학…… 학…… 헉…… 하아아…….”
“……하아…… 하…… 위…… 위위…… 가…… 가슴…….”
“……학…… 학…… 학…… 하아…… 하아…… 젠장……! 흑! 흐욱……! 흑…….”
“위……! 위야!! 하아…… 아, 아파……?!!! 아…… 폐가 아파?!!!”
“……후우…… 하아…… 하아…… 하…… 아…… 아…… 괜찮…… 하아…… 괜찮아…….”
“위야!!!”
“……후…… 후우…… 훅…… 괜찮아…… 젠장…… 후우…….”
“……위…… 위야, 지…… 진짜 괜찮아?!!!”
“……후우…… 가…… 가만있어…… 움직이지 마…….”
“……위…… 위야…….”
“……후우…… 하아아…… 하아…… 제…… 젠장…… 정말 몸이 맛이 갔나 보군…… 안 돼, 빼지 않을 거니까 가만있어…….”
“…….”
“……하아…… 후우…… 하…… 또 우냐, 장인환……?”
“…….”
“……괜찮다. 한 달 내에 예전으로 회복시킬 거라고 했지……?”
“…….”
“……울지 마라, 제발…… 몸이 이 꼬락서니인 것보다 네가 우는 게 더 괴로우니까…….”
“…….”
“……땅에 눕힐 거다. ……괜찮지?”
“…….”
“……집 안에…… 침대에서 하면 좋겠지만 지금은 어쩐지 빼기가 싫군. 한 번 더 하면 조금은 덜 섭섭하겠지.”
“…….”
“……잔디가 무성해서 등이 배기진 않을 거야. 옷가지를 깔아도 되고…….”
“……위야…….”
“……후우…… 괜찮아. 조금 아프긴 해도 숨을 아예 못 쉬는 것도 아니니까.”
“……위야아…….”
“……내 것으로 소독도 했고, 상처도 안 입은 거 같으니 한 번 더 할 수 있어. 하자, 인환아. 이번엔 제대로.”
“……위위…….”
“……참, 나…… 괜찮다니까. 봐, 안 느껴져? 너도 느껴지지? 다시 일어선 거?”
“…….”
“……봐, 부드럽게 움직이잖아. 흠뻑 젖어서 아프지 않을 거야.”
“…….”
“……울지 좀 마. 왜 이렇게 자꾸 울어. 괴롭다고 했지, 내가?”
“……이상해…….”
“……?”
“……위야가 이상해…… 정말…… 무서워…… 무서워…… 그냥 나…….”
“…….”
“……이…… 이상하잖아…… 위야가 이상한 거 알아……? 진짜로 이상해, 너무…… 너무 이상해…… 잘…… 나는 잘…… 너무…….”
“…….”
“……그…… 그럴 리가 없는 거 아는데…… 그런데…… 그래도 자꾸만…… 이상해…… 이상한 착각이 생겨…… 아, 정말 이상해……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러지……?”
“…….”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어…… 위야가 이상하니깐…… 글쎄, 그런 게 아닌 거 알지만…… 그래도…….”
“…….”
“……그래서…… 이상하게 눈물이 나와…… 너무 슬퍼…… 무서워…… 너무 무서워지고…… 슬퍼…… 몰라…… 내가 이상한 건가? 그런가? 그렇겠지……?”
“…….”
“……위야가 폐 아픈 것도 슬프고…… 걱정이 많이 되고…… 아니, 그런 것보다도…… 나한테 왜 이렇게…… 위야가 이상하게…… 그러니깐 그게…… 아니, 물론 이것도 복수지……? 복수라는 거 아는데…… 그런데도 그게 잘…….”
“…….”
“……지…… 진짜지……?”
“인환아.”
“……지…… 진짜 나 안 좋아하는 거 맞지……?”
“…….”
“……어? 그…… 그렇지? 나 안 좋아하지? 그…… 그…… 그…… 그런 거 맞지……?”
“…….”
“……마…… 말해줘봐봐…… 응? 그래? 그렇지? 맞지……?”
“장인환.”
“……여기 아프게 해도 돼…… 찢어져도 참을 수 있는데…… 참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난 네가 사정하면 숨을 잘 못 쉬게 되니깐…… 그게 걱정이 되는 거고…… 나는 별로…… 아무튼 나는 신경 안 써줘도 되는데…….”
“……인환아.”
“……그런데 위야가 왜 그러는 건지 잘…… 아아, 하긴 복수지…… 복수일 텐데…… 복수하는 거뿐인데…… 나…… 나도 알아, 위야…… 잘 아는데 있지…….”
“……인환아…….”
“……응? 맞지? 나 안 좋아하는 거지? 그렇지? 이거 복수하는 거 맞지?”
“…….”
“……응? 그래? 위야, 그러니? ……나 안 좋아해?”
“……그래.”
“…….”
“……몇 번이나 말해야 하나? 내가 미쳤냐? 너 따윌 좋아하게?”
“…….”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너는…… 너 따위는 절대 사랑하지 않는댔지?”
“…….”
“……그러니까 그만 울어, 제발…… 제발 좀…….”
“…….”
“……바닥에 눕힐 거야…… 잔디니까 걱정은 안 되지만…… 그래도 아프면 말해, 인환아.”
“…….”
“……다리 꼭 감아봐. 팔에도 힘주고. ……일어난다?”
“……흑…… 윽…… 흐어어…….”
“……젠장…….”
“……흐어…… 엉…… 윽…… 흑…… 흑흑…… 위…… 위야…… 윽…… 헝…… 흐아…….”
“……후우…… 젠장…… 빠질 거 같다. 그만 좀 울고 다리 더 꽉 감아봐…….”
“……흐윽…… 윽…… 윽…… 위야…….”
“……울지 마라, 쉬…….”
“……흐윽…… 윽…….”
“……귀여워…… 귀여워…… 너무 귀여워…… 하느님, 가슴이 아파…… 찢어지는 것처럼…… 폐가 맛이 가서 그렇겠지? 그런 거겠지……?”
“……흐어어…… 우아…… 흐으…… 윽…… 위…… 위야아…….”
“……그래, 그런 거야…… 이렇게 눈물이 줄줄 나오는 것도 다 폐가 아파서야, 장인환.”
“……흐으…… 무서…… 무서워…… 이런 거…… 흑…… 흑…… 윽…… 너무 무서워…….”
“무섭지 않아. 괜찮을 거야, 인환아. 괜찮을 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
“……흑…… 윽…… 흑…… 혜윤이…… 혜윤이 어떡해…… 무서워…… 다 무서워…….”
“……혜윤이…… 그래, 혜윤이…… 내 소중한 혜윤이…… 내 소중한 혜윤이…….”
“……흐아아…… 흑…… 윽…… 무서워……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윽…… 흑…… 흐아아…… 흐엉…… 헝…… 헝…… 흑…… 으윽…….”
“……괜찮을 거야, 인환아…… 괜찮아…… 우리 괜찮을 거야…… 괜찮아질 거야…….”
“……우…… 울지 마, 위야…… 흐엉…… 흐어…… 엉…… 울지 마아아…….”
“……움직일 거다…… 거칠게 움직일지도 몰라. 아프면 말해…… 반드시 말해, 인환아…….”
“……흐윽…… 위…… 위위…… 위야아…….”
등나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도 인환을 품에 안은 채 한참을 흐느끼기만 하던 그가 이윽고 천천히 몸을 내렸다.
선뜩한 잔디의 감촉이 벌거벗은 등줄기에 와 닿았다. 열대야에 가까운 습하고 더운 공기가 주변을 떠도는 것에 비해 푹신한 잔디가 깔린 정원 바닥은 상상 이상으로 서늘했다.
그가 결합 부위가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땅바닥에 천천히 서로의 알몸을 묻고 있었다. 마치 축축하고 따스하고 아늑한 무덤 속에 천천히 안기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목에 팔을 꼭 감은 채 자신이 느끼는 안락감을 그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눈꺼풀을 크게 깜빡여 시야를 가득 가리고 있는 눈물을 털어냈다. 별이 보였다. 짙은 도시의 스모그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빈사지경의 존재감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별들이었다. 그가 목에 감긴 인환의 팔을 풀어내며 조심스럽게 서로의 손을 맞잡아왔다. 마치 십자가에 매다는 것처럼 인환의 양팔을 옆으로 활짝 벌려 땅바닥에 누르더니, 그 위로 그의 두 손을 겹쳐 단단하게 서로의 깍지를 낀다. 어느새 인환의 두 다리는 활짝 벌어진 채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벌어진 두 다리처럼 하늘을 향해 열려 있던 시선이 자연스레 그의 얼굴로 옮아갔다. 너무나 가슴을 아리게 하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얼굴이 다시금 뿌옇게 변한 시야 가득 밟혀들었다.
해골처럼 마른 탓에 안 그래도 뚜렷한 이목구비는 그야말로 앙상한 조각상이 따로 없었다. 핏기 없는 입술은 꺼칠하게 갈라져 있고, 움푹 팬 아름다운 눈시울에선 눈물이 홍수처럼 줄줄 흘러넘쳤다. 꺽꺽거리는 설움을 걷잡을 수 없어 파들파들 경련을 하며 울음을 쏟아내고 있는 인환과 한가지였다. 새까맣고 새까만 심연의 눈동자가 불길을 뿜어내는 것처럼 뜨겁게 달궈진 채 인환의 온몸을 핥고 있었다. 무섭도록 아름다운 눈길이었다. 제멋대로 자란 길고 긴 암갈색 머리카락이 땀과 눈물로 흠뻑 젖은 채 창백한 이마와 뺨 위에 사납게 뒤엉켜 있었다. 무섭도록 아름다운 남자였다.
깍지 낀 손가락으로 와락, 부서질 것 같은 악력이 달려들었다. 압도적인 크기로 채워져 있던 하반신이 크게 요동치며 뒤로 빠져나갔다가 그 이상의 압도적인 기세로 안으로 찔러들었다.
“……흐악!!!”
허리가 활처럼 휘며 사지가 쭉 펴졌다.
……깊어…….
눈을 희번덕 홉뜨며 되뇌었다.
너무나 깊은 삽입에 탄식과도 같은 뇌까림이 흘러나왔다. 안쪽 깊은 곳을 사정없이 찔러댄 흉기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도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크고 압도적인 기둥을 따라 여린 내벽과 점막이 아쉬운 듯 흡착하며 달라붙었다. 그가 기왕에 뿜어낸 정액 탓에 내부의 움직임은 끈적하니 교활해졌고, 요철처럼 맞물리는 결합은 더더욱 음란하니 단단해졌다. 그리고 다시 폭풍처럼 사나운 인서트!
“흐아앗!!!!! 아악!!!!!!!”
……깊어…….
다시 한 번, 피비린내의 포효!
“흐아악!!!!!!!”
……깊어…….
느리고도 깊고 강력한 흡입이 인환의 허리를 난도질할 것처럼 사정없이 박혀들고 있었다.
……깊어…… 하느님, 너무 깊…… 어…….
처음 몇 분간은 후벼 파낼 것처럼 강력하고 느린 진입만을 거듭하던 흉기가 어느새 폭풍처럼 빨라지고 있었다. 더 깊고, 더 사납고, 더 무자비한 난도질이었다. 와락와락 움켜쥐어진 손가락을 막무가내로 밀어뜨리며 죽어가는 짐승이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핏줄기가 인환의 알몸과 그 알몸이 파묻혀 있던 축축한 무덤 위로 낭자하게 흩뿌려졌다. 안 돼! 안 돼, 죽지 마!!! 죽지 마!!! 울부짖으며 흐느끼며 애원하며, 죽어가는 짐승을 위로한다. 두 다리를 사슬처럼 교차해 짐승의 피땀으로 낭자한 몸뚱이를 꽁꽁 붙들어 맨다. 화답처럼 기쁨의 전율을 흘리는 짐승의 몸뚱이가 더한 포효로 아래를 찔러들었다. 찌르고 또 찌르고, 또, 또 무자비하게 찔러댄다. 눈을 화등잔만 하게 부릅뜬 채 악악, 비명을 내지른다. 마르고 마른 애처로운 근육이 단단하게 물결치며 분노에 찬 용트림을 뿜어내고 있는 게 보인다. 저 아름다운 것을 손안에 넣고서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애무하다 못해 물어뜯고 찢어발겨보고도 싶은 자신의 무서운 충동에 인환은 문득 전율했다. 짐승의 손이 왜 자신을 십자가의 형틀에 묶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내버려둬줘. 날 풀어줘. 풀어줘. 풀어줘, 짐승아. 시뻘겋게 충혈된 서로의 두 눈에서 서로의 욕구가 읽혔다.
광란에 빠진 짐승이 순간 인환의 광기를 개방시켜주었다.
냉큼 이빨과 손톱을 치켜세운 채 짐승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립고 그리운 체취가 전율처럼 흘러넘치는 짐승의 가슴 근육에 사납게 이를 박아 넣었다. 짐승의 매끄러운 등줄기에 집게발처럼 손톱을 세운 채 살점을 잡아 뜯듯이 찔러 넣었다. 도드라진 유두를 피가 나오도록 힘껏 깨물자 짐승이 황홀한 쾌락의 비명을 토해냈다. 짐승이 토해낸 땀과 눈물과 정액으로 범벅인 짐승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고 자근자근 씹어 삼키자 짐승이 끙끙대며 열락의 피안으로 넘어갔다. 안 돼. 안 돼, 죽지 마. 너 혼자 죽지 마. 함께 가. 나도 함께 가야 해. 아무렴.
무덤이 보였다. 축축하고 따스하고 아늑한 안식의 무덤이었다.
……무서워…….
사나운 용트림과 함께 짐승이 토정하고 있었다. 죽어가고 있었다. 하늘 꼭대기까지 치솟았다가 단숨에 급강하하는 지옥의 추락이 보였다. 추락은 아래로, 아래로 길게 이어졌다. 안쪽의 내벽에서 꿈틀꿈틀 지진을 일으키던 짐승의 거대한 흉기로부터 분수처럼 핏물이 토해졌다. 단말마의 신음은 길게, 아주 길게 흐느낌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시커먼 몰락.
팔을 뻗어 결사적으로 짐승의 목을 끌어안았다. 살려달라 울부짖으며 몸서리를 치는 빈사의 짐승이었다. 물론 짐승의 소원은 들어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건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인 것 같았다.
……무서워…….
그렇지. 이렇게 꼭 끌어안은 채, 함께 떨어지는 일은 아주 쉬워 보였다. 추락하는 두 개의 몸뚱이 주위로 아릿하고 습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덤 냄새였다.
……무서워…….
아무렴. 무서운 일이었다.
……무서워…….
살아가는 일은 죽음보다 더 가부러지는 공포였다.
……무서워…….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무덤 냄새가 너무나 고마웠다.
……무서워…….
여기 이렇게 꽁꽁 숨어서 나가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그럼 짐승도 무섭지 않을 터였다. 짐승도 무서워 가부러지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랬다. 짐승 혼자 무서워 떨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죽지 마.
짐승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파들파들 경련하는 짐승도 인환을 꼭 마주 안아주었다.
혼자 죽지 마.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꼭 품고 나가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축축하게 썩은 진흙이 기분 좋게 시체들 위로 내리덮였다. 금세 캄캄한 어둠이 다가들었다. 포근했다. 사방이 포근한 암흑이었다.
……무서워…….
아니, 무섭지 않아.
당당하게 으름장을 놓아주었다.
물론,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