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2003년 9월. 장인환(張仁歡) (71/129)

33. 2003년 9월. 장인환(張仁歡)

“……어…… 아, 예, 여, 여보세요?” 

[예, 갤러리 현대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 아,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십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 어, 예…… 저기…… 저…….”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혹시 전화를 잘못…….]

“아, 아뇨!!! 거…… 거기 김강원 선생님 계십니까?”

[네?]

“……아, 아아, 후우…… 죄송합니다, 제…… 제가 좀 많이 긴장을 해서요…… 그, 거기 큐레이터 일을 하고 계신 김강원 선생님과 통화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아아, 전시팀장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에? 예? 그…… 글쎄 거기 큐레이터로 계시는…… 김강원 선생님이신데…….”

[전시팀장님 성함이 김자, 강자, 원자 되시거든요. 아마 맞으실 겁니다. 그런데 실례지만 누구시지요?]

“……예, 저는 화가 장인환이라고…….”

[예에?!!!!!! 장인환 선생님이십니까?!!!!! 지, 지난 7월에 개인전을 치르신 그 장인환 선생님이 맞으십니까?!!!]

“……네, 네에……. 7월에 김강원 선생님 도움으로 개인전을 치르긴 했는데…….”

[우앗!!! 죄, 죄송합니다!!! 그만 제가 몰라 뵙고…… 바, 바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아, 아, 네. 고맙습…….”

[자, 작품이 정말 너무 좋았습니다, 선생님!!! 저……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김 팀장님도 정말 대단하셨구요!!! 저…… 정말 요즘 보기 드문 좋은 전시였다고 생각합니다!!! 팬이 되었습니다!!!]

“……그…… 네에…….”

[아참, 제가 누군지 모르시죠?!!! 전 갤러리 현대 홍보사업부에 근무하는 송영탁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아, 예. 장인환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

[하하하하하, 성함은 이미 말씀해주셨습니다, 선생님!!! 사람들 얘기대로 정말 순수하신 선생님이신가 봅니다!!! 아하하하하…….]

“……아, 저기……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좀 급해서요…… 김강원 선생님은…….”

[앗!!! 어이쿠!!! 죄송합니다, 정말!!! 제가 그만 바쁘신 선생님을 붙잡고…… 죄송합니다!!! 금방 연결해드리겠습니다!!! 김 팀장님께선 도쿄에서 열렸던 아시아미술포럼에 참석하셨다가 오늘 오전에 돌아오셨답니다!!! 기획전 일로 다시 외근을 나가셨었는데 아마 지금쯤은 사무실에 돌아와 계실 겁니다!!! 그럼 바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선생님!!!]

“네…… 고…… 고맙습니…….”

띠리리리리~~~.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가뜩이나 잔뜩 긴장한 신경에, 전화기 너머 호탕이 지나쳐 호들갑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청년과의 대화는 인환의 곤두선 신경을 조금도 달래주지 못했다. 달래주기는커녕 오히려 흥분을 잔뜩 고조시키는 바람에, 정말로 한 달 동안 벼르고 별렀던 통화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끊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채 고맙다는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을씨년스러운 통화 대기음으로 넘어간 전화 수화기를 붙들고, 인환은 긴 심호흡을 했다. 마치 그로써 가슴 부근까지 잔뜩 차오른 긴장이 조금이라도 풀어지길 기대하며.

한 달 내내 그의 건강 걱정은 물론 돌변한 분위기와 태도에 적응을 하느라 솔직히 김강원에 대해선 뒷전이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엔 남자에 대한 아련한 근심이 남아 있었다. 분명 자신에 대한 감정이 농담이었다고, 아니, 실은 착각이었다고 수정된 고백을 듣긴 했지만 그것에 어느 만큼의 진심이 녹아나 있는지는 인환으로선 조금도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다. 100프로의 진심이라면 그야말로 축포를 터트려도 될 일이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내린 결론이라면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인환의 가슴을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몰아넣는 것은 남자의 연락 부재였다.

남자와 하동의 오래된 폐교에서 이별한 그날의 일은 아직도 인환에겐 혼란과 공포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어떤 식으로 남자에게 작별 인사를 했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그곳을 떠나왔는지, 인환의 머릿속은 마치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하얗게 비워져 있었다. 혹시라도 바보스러운 추태를 부렸다거나, 공포에 질린 나머지 추태를 넘어 울고불고 광기를 부렸다거나 한다면 정말이지 남자 앞에서 고개도 못 들게 될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불길한 예감이 거의 사실로서 추측이 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이기적이게도, 인환은 남자 쪽으로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먼저 연락을 취해올 줄 기대하고 있었다. 물론, 인환이 그 이별의 날, 치명적인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남자의 개인적인 연락처라곤 일절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남자의 직장인 갤러리 현대에까지 전화를 넣어 사적인 얘기를 할 염치도 없었다. 그렇게 차일피일 연락을 미루고 있는 사이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심히 시간이 가는 동안, 애초의 불길한 예측이 단지 그저 예측이 아닌 것은 아닐까 하고 인환은 잔뜩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자가 연락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적어도 남자는, 인환이 믿기에, 인환과 거의 등이 붙은 샴쌍둥이처럼 하나의 혼으로 단단히 묶인 예술적 동지였다. 여간해선 서로를 향한 신뢰나 우정이 빛이 바랠 까닭이 없다.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신이 남자에게 도대체 무슨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기에 남자가 자신에게 전화조차 하지 않는단 말인가. 자신은 남자를 이토록이나 그리워하고 있건만…….

불안했다. 솔직히 너무나 불안했다. 인환에게 염증을 일으킨 나머지 남자가 인환을 향한 우정과 신뢰를 거두어 갈까 봐. 자신의 그림도 쓰레기라며 기왕의 콩깍지를 거두고 냉혹한 평가를 내릴까 봐.

만약 사과로 되돌릴 수 있는 문제라면 수십 수백 번도 사과를 할 용의가 있었다. 머리를 조아리라면 기꺼이 땅에 머리를 짓찧을 터였다. 남자의 잃어버린 신뢰와 우정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찰칵.

[……예, 김강원입니다.]

흠칫.

“…….”

[……여보세요?]

“…….”

[여보세요? 말씀하십시오. 갤러리 현대의 김강원입니다.]

“…….”

놀랐다. 너무 놀라 입술이 딱 얼어붙어버렸다. 생각에 빠져 있다가 느닷없이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 기함을 해버린 탓도 있지만, 그보다 인환을 질겁하게 만든 것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리도 차가웠던가? 남자의 목소리가 이리도 싸늘했던가? 분명 너무나 낯이 익은 그리운 목소리임엔 틀림이 없건만, 풍기는 분위기는 180도나 달라 마치 목소리만 같은 로봇 같다는 착각이 일 지경이었다. 혹시 자신이 건 걸 이미 알고 이리 냉랭한 목소리를 내는 걸까? 혹시…… 혹시 정말로 자신에게 염증이 나서 아예 이참에 냉정하게 대하려고 작심을 한 걸까?

[……여보세요……? ……? ……? ?!!!!! ……!]

“…….”

[……선…… 생님……?]

……두근…….

[……선생님이시죠?!!!]

……두근…… 두근…… 두근…… 두근…….

[…….]

“…….”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

“…….”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

“…….”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왜 말씀을 안 해주세요, 선생님…… 더 이상 저랑 얘기하기 싫으세요……?]

아아, 하느님. 다행이다. 다정하고 다정한 울림…… 자신에 대해서라면 전폭적으로 다 믿고 수용해주는 듯한 완벽한 신뢰의 울림……. 역시 남자다. 남자가 맞았다. 이상하고 차가운 로봇이 아니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 저기…… 너무 죄송해서요…….”

[…….]

“……그…… 그날…… 무척 실례를 한 것 같은데…… 아무 기억도 안 나고…… 사…… 과도 드려야 하는데…… 전화 드리기도 너무 죄송해서…… 근데 김 선생님께서도 전화를 안 하시니까…… 전시회 일로도 다른 분이 대신 전화를 하고…… 불안해져서…… 제…… 제가 지긋지긋해지신 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

“……저기…… 저기…… 건강하시지요……?”

[……선생님.]

“……예, 예에…….”

[……선생님.]

“……예에, 김 선생님…….”

[……선생님.]

“……저…… 저기…… 예에…….”

[…….]

“…….”

[…….]

“…….”

[…….]

“……저…… 김 선생님……?”

[……그동안 바빴어요, 선생님. 그래서 미처 연락을 못 드린 겁니다. 많이 불안하셨어요?]

“……에…… 예에…… 걱정 많이…….”

[……어떻게 제가 선생님께 염증이 나겠어요? 선생님께서 제게 염증이 나시면 모를까…….]

“그, 그런……! 그런 일은 절대로……!”

[……몸은 괜찮으신 거죠?]

“……에…… 예…… 예에, 김 선생님. 건강해요. 선생님께서도 건강하시지요?”

[예, 그럼요. 전 괜찮아요. 후후, 일만 미친 듯이 죽어라 하고 있긴 하지만요.]

“에에……?”

[……그래도 일에 미치면 좀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있거든요. 요새 좀…… 아니, 뭐 별거는 아닙니다. 그냥 정말 바빴답니다. 그래서 선생님 신경도 못 썼어요. 그림은 많이 그리셨어요?]

“……예. 그냥 그럭저럭…… 김 선생님께서 개인전 부탁도 하셨고 해서 큰 작품 위주로 작업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하, 열심히 안 하셔도 돼요, 선생님. 선생님은 열심히 안 하시는 게 제가 더 안심이 된답니다. 작품이야 어떻게 해도 근사한 걸 아니까요. 그저 마음만 편히 하시고 작업하시면 좋겠어요.]

“……네…….”

[……참, 뉴욕에서 선생님 작품 인터뷰 하고 싶다고 친구 하나가 올 거예요. 뉴욕 타임스 아트 담당인데 눈이 밝은 친구예요. 나중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죠, 선생님?]

“……이…… 인터뷰요?”

[예. 통역은 제가 하면 되니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선생님. 그냥 평소 작품에 대한 생각만 말씀해주시면 되니까요.]

“……그…… 하지만 인터뷰는…… 제 옛날 얘기도…….”

[개인적인 일은 기삿거리로 삼지 않겠다고 약속을 받아두었답니다. 혹시 그 친구가 약속을 어기면 제가 반쯤 죽여놓을 테니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하, 실은 제가 무서워서 그런 짓은 못 할 테지만요. 서양 애들은 동양 무술을 조금만 할 줄 알아도 마치 살인 병기 취급을 하지요. 언젠가 시범 경기 하는 걸 보더니 그때부터 제 앞에선 설설 깁니다, 그 친구.]

“……후후, 그런가요?”

[예, 선생님. 진짜 부담 갖지 마시고 시간 내주세요. 타임지에 평론이 실리면 일단 유럽 쪽에 진출하기도 쉬워지지요. 미국과 유럽은 서로 견제 관계에 있긴 하지만 또 서로 영향도 많이 주고받거든요. 저로선 선생님 작품을 일단 베니스에 먼저 소개할 생각이에요. 유럽에 진출하려면 미국 쪽 언론을, 미국을 뚫으려면 유럽 쪽 언론을 움직이는 게 낫거든요.]

“……글쎄, 저는 잘…… 그런 건 잘 모르니까요…… 베니스에 나간다고 해도…… 그저 김 선생님께 실망만 안 드리면 정말 좋겠는데…….”

[……하하, 저 믿으시죠? 선생님께 해가 가는 짓은 단 한 가지도 하지 않을 친구라는 걸요.]

“……예, 그럼요…… 제겐 김 선생님뿐인걸요…….”

[…….]

“……김 선생님?”

[…….]

“……저…… 에…… 김 선생님?”

[……저도…….]

“……예……?”

[……하하…… 저…….]

“……김 선생님?”

[…….]

“……?”

[……후…… 안 돼…….]

“……김 선생님……? 저기 무슨…….”

[아뇨, 선생님. 일단 뉴욕 친구 들어오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아마 다다음 주 내로는 만나 뵐 수 있을 겁니다.]

“예…….”

[그전에라도 뵙고 싶은데 저희 무서운 감독님께서 눈에 불을 켜고 절 감시하고 계시거든요. 10월 기획전 때문에 요새 절 아주 복날 개 잡듯 잡고 계시죠. 하하, 물론 선생님 뵙게 되면 또 못 참고 이상한 짓 벌이게 될까 봐 겁이 나기도 하지만요.]

“……그…… 아…… 아무리 바빠도 건강 조심하시면서 일하세요, 김 선생님.”

[하하, 예. 선생님도요.]

“……저…… 저기 그…… 저, 김 선생님께서 주신 클로렐라 잘 먹고 있어요!”

[!!!]

“……그…… 아직 효과는 잘 모르겠구요…… 꾸준히 먹는 게 좋다고 하데요…… 열심히 잘 먹겠습니다, 김 선생님.”

[…….]

“……저기, 그럼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괜히 바쁘신데 전화 드린 것 같아 죄송하네요.”

[…….]

“……그 미국 친구분 오시면 연락 주세요. 언제든 전 괜찮으니까 그분 편하신 시간대로 약속 잡으셔도 되구요.”

[…….]

“……김 선생님……?”

[……예. 그러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예…… 그럼…….”

[…….]

“…….”

[…….]

“…….”

[…….]

“……저…… 김 선생님……?”

[……선생님 먼저 끊으세요…….]

“……아, 후후, 네. 그럼 들어가세요, 김 선생님.”

딸칵.

탱크처럼 요동치던 심장의 떨림은 어느새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리도 쉬이 마음이 가라앉다니. 지난 한 달 내내 남자를 생각하며 불안에 떨었던 게 거짓말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전화를 하는 건데 하고 억울한 심정까지 들 정도였다. 실로 남자가 인환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놀라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자신을 위한 든든한 방풍림 같았다. 그저 남자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인생의 격랑과 불운들이 그대로 스쳐 지나갈 것만 같은 확신. 그저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남자는 인환의 수호천사가 아닐까 하고 의심이 들었다. 만약 전생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남자야말로 인환의 아버지거나 엄마가 아니었을까? 혹은 집안의 제일 맏형이라든지…….

아, 참.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는 걸 깜빡했네? 제대로 사과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잠시 기왕의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지만 남자의 더없이 다정하고 친절했던 응대를 떠올리곤 그조차도 말끔히 털어냈다. 그랬다. 남자는 든든한 방풍림이었다. 땅에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채 그 스스로는 요지부동 흔들리지 않는, 강하고 너그러운 영혼이었다. 인환이나, 혹은 다른 누구라도 혹여 남자에게 실수를 한다고 하면, 그저 대범하게 한번 껄껄 웃고 용서를 해줄 것만 같은. 그랬다. 이제 남자에 대해서는 더는 의심하지 않으리라 인환은 새삼 다짐했다. 사소한 일들에 연연해 그때마다 남자에게 내쳐질까 불안해하는 자체가 남자에 대한 모욕처럼 여겨졌다.

그래, 믿자. 남자를 믿자. 남자가 하는 말은 100프로 다 믿어주자. 남자가 착각이라고 말하면 착각인 거다. 남자가 농담이라고 말하면 농담인 거다. 그래. 설령 그게 거짓일지라도 남자가 예스라고 대답하면 예스라고 앵무새처럼 되뇌도록 하자. 신뢰가 무언가. 사실이 신뢰는 아니지 않은가. 신뢰는 진실이다. 사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의 문제인 ‘진실’. 그래, 그랬다. 남자는 그저 ‘진실’ 그 자체라고, 현실의 모든 것이 마냥 혼란스럽고, 발을 디딘 땅바닥이 지진이 인 듯 불안하게 흔들려도, 그래서 질겁한 나머지 연방 ‘무서워’ ‘무서워’를 시시때때로 주문처럼 주절거리게 되는 요즘이라도, 단단히 중심을 잡은 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인환에게도 단 하나쯤은 있으리라고, 아니, 있다고 결정을 내리도록 하자. 그러자. 그렇게 하도록 하자.

“……선생님? 홍 기사님 도착하셨는데요. 좀 더 기다리시라고 전할까요?”

문밖에서 파출부 아줌마가 홍 씨의 도착을 알렸다. 딱 적당한 도착이었다. 저절로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고마운 나머지 나가서 홍 씨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고맙습니다, 홍 기사님. 너무 일찍 도착해주시지 않아서요…… 하는 다소 황당할 인사말과 함께.

실은 남자와 통화하는 중에 홍 씨가 들이닥치면 어쩌나 하는 근심 때문에도 인환은 남자와의 통화에 더 초조해했었다. 홍 씨가 자신의 행동거지에 대해 그에게 일일이 고해바치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남자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만큼은 인환은 매우 조심하고 있었다.

그가 저 인환의 수호천사에 대해 극심한 질투심(아니, 질투의 연기를!)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뒤로 인환은 그의 앞에서 남자에 대한 화제를 일절 피했다. 어떤 형태로든지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인 배려였을 것이다. 물론 그게 그저 연기일 뿐이라고, 너무나 교묘하게 위장된 역할극일 뿐이라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납득시키고는 있지만, 그래서 이토록이나 그의 이상야릇한 행동에 일일이 휘둘리지 말자고 결심에 결심을 거듭하고 있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의 황홀할 정도로 리얼한 역할극에 푹 빠져버리고 만다.

그가 회사를 가는 낮 동안의 몇 시간이 현실이라면, 그가 인환을 홀리는 밤은 완벽한 비현실의 공간이었다. 아니, 그조차도 확실치가 않았다. 솔직히 요즘의 인환은 어느 게 현실이고 어느 게 비현실인지 도저히 제대로 가늠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이러다가 정말로 미치는 게 아닐까도 싶지만, 그러나, 그가 인환에게 선사해주고 있는 비현실은 잔인할 정도로 완전무결한 천국 그 자체였다. 한번 맛보기만 하면 그 어떤 불만도 토해낼 수 없을 지경의 저 황홀한 꿈의 공간은, 인환에게 그전엔 감히 상상조차 해본 적도 없는 이상야릇한 욕망을 심어주었다. 솔직히 미쳐버린다는 것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아니, 솔직히 미쳐도 좋으니까, 이미 미친 거라도 상관없으니까, 이 비현실이 끊임없이 계속되기를 간절히 비는 자신이 있었다.

미친들 어떠랴. 아니, 기왕에 미친 것이라 한들 어떠랴. 이대로 광기의 감옥에 갇혀 현실보다도 더욱 현실 같은 천국의 백일몽을 꿀 수 있는 바에야. 그리고 그 백일몽이야말로 어쩌면 인환이 인생에서 유일하게 바랐던 적이 있는 꿈, 그야말로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다 못해 인생을 송두리째 산산조각 내버리는 것으로 그 참혹한 대가를 지불한 바로 그 /저주받을 꿈/인 바에야.

“……아, 아뇨. 아주머니. 준비 끝났습니다. 지금 내려갈게요.”

“예, 선생님.”

어쩔 수 없이 들뜬 목소리로 대꾸를 주자, 파출부 아줌마가 웃음기가 전염된 기분 좋은 답변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변하고, 또 집안 분위기가 변하면서 집을 채우고 있던 구성원들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파출부 아줌마도, 운전기사 홍 씨도 요즘엔 무척이나 자주 웃는 것 같았다. 아니, 실은 인환 자신이 너무 자주 웃어서 남들도 그렇게 웃는 것이라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준비해두었던 지갑과 손수건을 재킷 안쪽에 챙겨 넣은 뒤 마지막 점검 차원에서 거울을 살폈다. 슬쩍 홍조를 띤 가무잡잡하면서도 건강한 안색이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옷차림은 그가 사준 연갈색의 비즈니스 슈트였고, 머리도 깨끗이 이발이 된 상태였다. 어디로 보나 영락없는 중년 아저씨지만 그닥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니라고 자신도 모르게 되뇌고 있는 건 그의 세뇌 덕분이리라. 생각해봐라. 매일 밤 끝도 없이 귀여워, 귀여워 하는 입에 발린 칭찬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흔들리지 않겠는가 말이다. 사람은 간사해서, 그게 아부라는 걸 알아도 아부를 듣는 당시에는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저절로 입술을 실룩이며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실제로 귀엽기까지야 하겠냐만 해도, 그럭저럭 보기 흉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관대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그것도 그런 낯간지러운 선언을 하는 이가, 세상 누가 보기에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완전무결한 용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금요일이었다.

9월의 초입, 아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 가을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아무래도 추석쯤이나 돼야 늦더위도 한풀 꺾일 것이고 가을 기분도 나게 될 것이다.

날씨는 청명하고 하늘은 높았다. 그동안 밀린 회사 일을 처리하느라 지난 2주 내내 자정 무렵에나 퇴근하던 그가 오늘은 모처럼 일찍 퇴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날씨도 좋고 하니 밖에서 괜찮은 공연을 하나 보고 외식도 하자고 인환을 불러냈던 것이다. 말하자면 데이트인 셈이었다.

아아, 이젠 첫사랑에 빠진 소년 역할에서 약혼자를 데이트에 청하는 청년의 역할로 옮아가는 모양이지 하며 속으로 삐죽거리기도 했지만, 그의 전화를 받는 즉시 저절로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며 웃음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슴은 알 수 없는 기대로 떨리고, 얼굴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할 지경으로 발그레한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래. 연기면 어떠랴. 비현실이면 어떠랴. 미친들 어떠랴. 아니, 기왕에 미친 것이라 한들 어떠랴. 이대로 광기의 감옥에 갇혀 현실보다도 더욱 현실 같은 천국의 백일몽을 꿀 수 있는 바에야. 그리고 그 백일몽이야말로 어쩌면 인환이 인생에서 유일하게 바랐던 적이 있는 꿈, 그야말로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다 못해 인생을 송두리째 산산조각 내버리는 것으로 그 참혹한 대가를 지불한 바로 그 /저주받을 꿈/인 바에야.

거울 너머 조촐한 디자인의 연갈색 슈트를 걸친 중년의 사내가 보인다. 첫사랑에 빠진 연인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는 듯한, 아니, 그런 역할을 꿈꾸는 중인 중년의 절름발이 게이 화가 장인환이다.

꿈이란 것을 안다.

‘복수’의 일환이라는 것도 안다.

언젠가 이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꿈에서 깨게 되는 날, 그가 역할놀이에 싫증을 느끼게 되는 날, 저 앞의 초라한 화가는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지경으로 넋이 파탄 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실은 될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이 유일한 귀결일 것이다. 그럼에도 저 거울 속의 사내는 이 꿈을 축복하리라. 어쩌면 이 잔혹한 꿈이야말로 사내의 불운한 일생 중에서 가장 막바지에 타오르는 유일한 축복의 등신불(等身佛)일지도 모른다. 물론, 유일한 축복이기에, 그 대가는 상상을 초월할 극심한 고통으로 환원이 되리라. 세상엔 공짜가 없기에. 더더구나 그가 공짜는커녕 삶의 최소한도의 축복조차 기대할 염치가 없는,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을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죄인이라고 한다면. 영혼이 죽어버린 죄인이라고 한다면.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아주머니. 조심해서 퇴근하시구요.”

아래층으로 내려와 열심히 스팀 청소기를 돌리는 중인 파출부 아줌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나잇값도 못하고 잔뜩 들뜬 목소리를 부디 아줌마가 눈치채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예, 선생님. 선생님께서도 사장님과 재밌게 노시다 오세요.”

“……에…… 예에…….”

진심의 기원을 던져주는 파출부 아줌마의 인사에 곤혹감을 느끼며 홍 기사의 차에 오른다. 이미 산통진통 다 깨버린 터라 새삼 부끄러울 일도 없지만, 그래도 역시 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언급을 ‘일반’ 사람들로부터 들을 땐 어쩔 수 없는 자격지심이 일곤 한다. 아마도 그건 원죄 의식과 같은 것일 게다.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되는, 가지기를 바라서도 안 되는 존재에 대해 손을 내민 죄. 그네들과 같은 ‘일반’ 남자를 꿰어 더럽힌 죄…… ‘소돔의 씨’…….

“……날씨가 진짜로 좋네요, 선생님.”

홍 기사가 벌써 연희동 대로변으로 들어선 차의 속도를 높이며 점잖게 사교 멘트를 날린다. 네, 그렇네요. 파출부 아줌마처럼 호의가 가득 담긴 인사건만 집을 나서는 순간 품고 온 울적한 상념 탓에 인환이 던지는 대꾸는 건성이었다. 어린아이처럼 잔뜩 들떴던 심사가 먼먼 과거로부터 날아온 비수에 찔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왜 그 괴로운 단어가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고, 왜 파출부 아줌마는 시키지도 않은 인사(인사를 시켜서 하랴마는)를 해서 그놈의 괴로운 단어를 떠올리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인환은 대상을 지정하지 않은 푸념을 토해냈다. 한동안 울적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데 재킷 안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울었다.

그였다.

[……어디냐?]

“……어? 아아, 어디지? 저, 아저씨!!! 여기 어디쯤이죠?!!!”

폴더를 열자마자 다짜고짜로 위치를 묻는 통에 당황하고 만다. 휴대전화를 귀에 꼭 붙인 채로 홍 기사에게 커다란 목소리로 물으니, 그의 나지막하게 터지는 웃음소리가 폴더 너머로 들려온다. 이크. 또 실수다. 자신의 사소한 실수가 발견될 때마다 박장대소를 하거나 이렇게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리곤 하는 그는 이제 일상의 자연스러운 부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처음엔 몹시 곤혹스럽고, 또 민망한 나머지 일일이 얼굴을 붉히거나 했는데 이젠 별 동요 없이 그러려니 한다. 그의 웃음이 비웃음이 아닌 진실로 기분이 좋아서 내는 홍소(哄笑)라는 걸 아는 까닭이다.

폴더를 멀리 하곤 홍 기사에게 재차 묻자, 강남 쪽으로 접어들었으며 10분 이내에 그와의 도킹 장소인 역삼역 LG아트센터에 도착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폴더를 멀리 해봤자 이미 들을 건 다 들었을 그에게 재방송을 날리자 그가 알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참으로 무뚝뚝하고 일방적이기 짝이 없는 그이지만, 그로선 대단한 배려이고 친절이라는 걸 안다.

전화는 인환을 기다리고 있다는 무언의 의사 표시다. 고작 10분도 채 남지 않았을 거리를 못 기다리고 휴대전화를 때리는 건, 그만큼 그 기다림이 간절하다는 의미이다. 세상에. 그가 자신을 기다린다. 기다려준다. 그것도 간절하게. 또한 그가 자신에게 전화를 한다. 데이트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한다. 자기가 어딘가에 있다고,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달려오라고 전화를 한다.

언젠가 먼 먼 과거의 시간에 그를 꿈꾸었었다.

자신을 기다려주는 그를. 전화를 걸어 행선지와 일정을 상냥하게 알려주는 그를.

그랬다. 먼 먼 시간을 헤매고 헤맨 끝에, 부서진 화가의 꿈은 부메랑처럼 천국의 ‘복수’로 되돌아왔다.

가슴이 다시금 기대감으로 부풀기 시작했다. 울적한 상념은 그의 다정다감한 전화 한 통으로 단숨에 날아가버린 모양이었다.

가을의 초입이었다. 하늘은 맑고 파랬다. 늦더위도 조만간 물러갈 터였다. 온갖 문화 행사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예정돼 있는 계절이 또한 가을이었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삼기엔 차고도 넘칠 훌륭한 거리들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역할놀이에 푹 빠져 있는 인환의 주인은 그 훌륭한 거리들을 즐거이 활용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주인이 부여하는 황홀한 열락의 놀이에 충심으로 속아줄 준비가 돼 있는 사내가 또 하나 있었다.

사내는 약간 다리를 전다고 했다. 사내는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또한 사내는 그 누군가를 끔찍이도 원하고 또 원한 끝에 죄의 낙인을 받고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나락의 끝에서 죄인이 꿈을 꾼다고 한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꿈에 푹 빠진 채 헤어 나올 생각을 않는다고 한다. 너무나 푹 빠진 나머지 종종 그게 꿈이라는 사실도 잊는다 한다.

어쩌랴.

그것이 죄인이 마지막으로 꾸는 꿈인 것을.

실은 죄인은 절대로 도달해본 적이 없는 낙원인 것을.

저 먼 먼 시간을 넘어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낙원인 것을.

그러니 꿈이라도 좋다고…… 상관이 없다 하는데…….

LG아트센터 건물에 도착했을 때, 아니, 아트센터가 있는 지하 주차장에 홍 기사가 차를 세웠을 때부터, 인환은 묘한 기시감을 느껴야만 했다. 언젠가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은 매우 가까운 시기에…… 분명 처음 와보는 곳이었음에도 지하 주차장으로부터 공연장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며 에스컬레이터며 그 모두가 매우 낯이 익었다. 결국 의문은 인환이 막 2층 로비로 들어섰을 때 완전히 풀리게 되었다.

어림잡아 300여 평이 될까 말까 한,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공간은 공연이 시작하기 직전인지, 공연장 출입문이 개방되길 기다리고 있는 기백여 명의 관객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홍 기사의 안내를 받으며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로비로 들어선 순간, 인환은 인파의 한가운데, 다른 공간에 비해 비교적 덜 붐비는 현관 기둥 옆에 서서 뭇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아니, 발견이고 자시고 할 것까지도 없었다. 지금 이 장소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를 발견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정신없는 북새통 가운데서 오직 그 근처만이 공기가 달랐다. 일단 그의 주변으로 다가드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어 1차적으로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암암리에 그의 주변을 빙 둘러싼 채 서 있는 관람객들의 시선은 죄다 그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그를 통해 인환은 건물에 도착하고부터 내내 느껴왔던 기시감의 정체를 비로소 확인할 수가 있었다.

저기 저 장소에 똑같이 선 채 공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남자가 있었다. 똑같이 그 주변만 공기가 다른 남자가 있었다. 똑같이, 타인을 압도하는 화려한 외모와 강렬한 존재감으로 빛나는 남자가 있었다. 그랬다. 김강원이었다. 세상에, 도대체 며칠이나 지난 일이라고, 그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단 말인가. 나중에 남자를 만나게 된다면 미안해서 얼굴도 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설마 그가 이미 알고서 이곳을 최초의 데이트 장소로(물론 두 사람의 새로운 역할놀이가 시작된 이래 최초인) 지정했을까 싶지만, 그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수호천사일 남자를 따라다니던 열흘 남짓, 인환의 일거수일투족은 거의 대부분 그에게 보고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약간의 시간차를 둔 추적 때문이었겠지만, 자세한 여정은 물론 잠시잠깐 들른 중간 기착지들에 대해서조차 기행문을 써도 될 정도로 세세한 보고가 그에게 전해졌다고. ‘소독’이라는 말까지 써가며 그가 타는 듯한 질투심으로 고통스러워하던 그날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이 데이트 코스 역시 ‘소독’의 일환이란 말인가? 맙소사……. 정말로 억측일지도 몰랐지만 그러나, 인환은 그것이 자신의 무리한 억측만은 분명 아닐 거라고 마지못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뻐하는 걸까?

자신은 그의 질투를(아니, 실은 질투의 연기를) 기뻐하는 걸까? 데이트 장소조차 정화의 의식을 치르고 싶어질 정도로, 찌르는 듯한 질투심에 몸부림치는 그를, 그의 고통을 기뻐하는 걸까?

그가 보였다.

그는 아침에 본 그대로, 까마귀처럼 새까만 바탕에 흐릿하게 스트라이프 문양이 들어간 고급 맞춤 비즈니스 슈트 차림이었다. 셔츠 역시 새까만 실크의 드레스셔츠였고, 어두운 청보라색 넥타이가 포인트 컬러로서 네크라인에 단정하게 조여져 있었다. 역시 더위를 심하게 타는 그답게 재킷은 벗어 한쪽 어깨에 걸치고 있었고,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은 채였다. 다른 한 손엔 공연 팸플릿으로 보이는 제법 두툼한 잡지를 들고서, 양미간을 흐릿하게 찌푸린 주의 깊은 표정으로 펼쳐 보고 있었다.

한 달 내에 예전의 몸으로 회복하겠다던 그는 정확히 약속을 지킨 셈이었다. 물론 원래대로 완전히 돌아가려면 아직 2∼3킬로를 더 불려야 하지만, 일단 질병의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에서 인환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2∼3킬로가 더 빠짐으로써 음습하고 위험천만한 맹수의 기운이 더해졌으니 차라리 전화위복이라고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

본인은 절대로 의도하지 않는 일이겠지만, 주변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불러일으키며 서 있는 저 늠름하고 아름다운 남자가, 한 달 전 세 번씩이나 심장마비를 일으키며 생사를 넘나들었다면, 과연 이 무수한 인파들 중에 몇 사람이나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사장님……!”

홍 기사가 목소리를 높여 부르자 팸플릿을 보느라 바닥을 향해 있던 그의 고개가 번쩍 위로 올라왔다. 이어 직격하듯 인환에게로 날아드는 시선…….

하느님, 마치 조각처럼 표정 없던 얼굴이 슬쩍 말려 올라가는 입술 끝으로 해서 얼마나 호화찬란한 빛을 내는지 그는 알까? 권태조차 느껴지는 고요하고 무심한 시선이 인환의 시선을 마주 틀어쥐는 순간, 어떤 격렬한 열기를 품게 된다는 것을 그는 알까? 그리고 그것이 기왕의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용모와 어우러져 얼마나 주변을 압도하는 생기로 빛나게 되는지, 그는 도대체 알까? 알고는 있는 걸까? 그리고, 그리고…… 도무지 믿을 수는 없지만, 그를 그렇게 만드는 존재가 인환 자신이라는, 그 잔인할 정도로 황홀한 옛 부메랑의 꿈을 직면할 때마다 자신이 얼마만큼이나 커다란 기쁨으로 자지러지는지, 아니, 얼마만큼이나 끔찍한 두려움으로 가부러지는지 그는 알까? 알고는 있는 걸까? 그래서 꿈이라도 좋다고, 아니, 꿈인지 현실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발광해 있어도 좋다고, 이대로 완전히 부서지겠노라고, 매순간 열광적으로 번제(燔祭)를 올린다는 걸 알까? 도대체 알고는 있는 걸까?

“……늦었어.”

숨 막히는 기쁨과 들끓는 열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첫사랑에 빠진 ‘연인의 미소’가 얼굴 가득 화사하게 퍼져간다.

“……뭐가 10분이냐. 14분이다, 장인환.”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던 그의 은밀한 팬들을 일거에 차버리고 그가 한걸음에 인환에게로 다가온다. 기뻐 죽겠다는 듯이, 인환을 만난 게 기뻐서, 기뻐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은 날렵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단숨에 다가온다.

“……수고했어요, 홍 기사. 차 키는 내게 주고 퇴근하세요.”

코앞까지 다가와 거의 덮쳐누를 기세로 인환의 어깨를 안은 그가 홍 기사를 일별한다. 움찔움찔 다 알고 있다는 듯 짓궂은 웃음을 깨물며 홍 기사가 그에게 차 키를 넘겨주고 떠난다. 그가 물고 온 수많은 뭇 시선들이 인환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된다.

기왕에 봄바람처럼 설레던 가슴의 고동이 순간 더 빨라지는 건 불안감 때문이다. 헐떡이듯 간신히 억눌린 숨결이 더더욱 거칠어지는 건 또한 불안감 때문이다.

……누군가 알아볼지도 몰라…….

“……점심은?”

……아아, 어쩌면…… 마치 그와 자신을 찌를 듯 달려드는 무수한 호기심의 시선 가운데 누군가…… 누군가 어느 한 시선쯤은…….

“……머…… 먹었는데…… 지…… 지금이 몇 시라고…….”

“……제대로 먹었나? 또 그림 그린다고 대충 때운 거 아니고?”

……알아볼지도 몰라…….

“……머…… 먹었다니까…… 아…… 아줌마가 맛있는 쌀국수 해주셔서…….”

……누군가, 어느 한 사람 눈 밝은 이가…… 알아보면 어떡하지……?

“……쌀국수라…… 음, 그거라면 좀 먹었겠군.”

……어떡하지……? 너무 가까워…… 너무 달라붙었잖아, 위야…… 안 돼…… 그렇게 웃지 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몰라…… 앗, 손은 또 왜 잡는 거야…… 어떡해…… 어떡하지……?

“……소…… 손……!”

……바보…… 진짜 바보야…… 여긴 집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세상에, 다 쳐다보잖아, 진짜…….

“응?”

……정말 이상하게 보일 텐데…… 절대로 이상하게…… 아, 씨, 그런 눈으로 쳐다보니깐…… 제발 좀 그런 눈으로…… 이 손도 좀 놔…… 놔, 바보…… 다 쳐다보는데 정말…….

“……소…… 손…… 손 놔줘…… 바…… 바보가…….”

“왜?”

“……바…… 바보가! 이잇, 치우라니깐……!”

“안 놔줘. 안 놔줄 거야. 내가 왜 놔줘야 하는지 어디 열 마디 이내로 이유를 읊어봐, 장인환.”

“……위…… 위야아……!”

“몸부림치지 마. 완력으로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거 같나? 자꾸 몸부림치면 키스해버린다?”

“?!!!!!!!!!!!!”

“하하하, 땡. 타임 오버다. 열 마디면 많이 봐줬지, 나도.”

“!!!!!!!!!!!!!!!!!!!”

“……시뻘건 게 꼭 삶아놓은 고구마 같군, 아저씨가.”

“!!!!!!!!!!!!!!!!!”

“……더 빨개지면 진짜로 키스한다?”

“!!!!!!!!!!!!!!!!!!!!!!!”

“……얼씨구? 진짜로 해버려?”

“!!!!!!!!!!!!!!!”

“푸하하하하하…… 하하하…… 핫…… 하하하…….”

“……!!!!!!!!!!!!!!!!!”

“아하하하하…… 핫…… 하하핫…… 큭…… 큭쿡…… 큭큭큭크…….”

“……바…… 바보가…… 자…… 진짜 미쳤어…… 너…… 너…… 너, 진…… 지, 지, 진짜…… 진짜…….”

“……귀여워라…… 아저씨 주제에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응? 나잇값 좀 하시지그래? 응? 응?”

“……위야……! 제, 제…… 제발 목소리 좀……!”

“……귀여워…….”

“!!!”

“……너무 귀여워, 너무…… 귀여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아…….”

“!!!!!!!!!!!”

“……뭐가 그렇게 창피해……? 아니면 겁이 나서 그래……?”

“…….”

“……인환아, 저따위 건 아무것도 아냐…….”

“…….”

“……저따위 건 아무도 우리한테 위협이 되지 않아…… 내 말 믿어…… 내가 겪어봤기 때문에 확실히 알아……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다 쓰레기들이야…… 다 똥이야, 저런 것들…….”

“…….”

“……겁이 나면 날 봐…… 내 눈만 봐, 인환아…… 나만 봐…….”

“…….”

“……오랜만이네, 위야……?”

흠칫.

“……인연이긴 한가 보다, 우리…… 놀랐어, 정말…….”

……두근…….

“……보기 좋네? 진짜 놀랐어…… 놀라다 못해 끔찍한 왕쇼크야. 너도 그렇게 웃을 줄 알았구나. 하하, 정말…… 이런 사기가 다 있어…….”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정말 충격이야, 충격…… 진짜로 사기야, 이건…… 놀랐니? 하하, 그래도 아마 지금 나보다 더 놀라진 않았을걸? 어쩜 이런 우연이 다 있니? 아니, 기적이야, 이쯤 되면. 기적일 거야, 정말. 그렇지. 그래.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빈틈이 있으실 리가 없어…….”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뭐야? 왜 뒤로 숨겨? 나도 아는 분인데, 인사 드려야지. 왜 숨기니? 하하, 진짜…… 진짜…… 아아, 정말 이럴 수가 있나…… 이런 사기가…….”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뭐야? 기분 나빠. 내가 마귀할멈이라도 되니? 왜 숨기니? 내가 그분을 잡아먹기라도 한대니? 인사드린다고 했잖아!”

“……신애 씨? 무슨…….”

“너도 나한테 인사 안 해? 우리 갈라지고 처음인데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니?”

“……신애 씨……?”

“아아, 죄송해요. 하영 씨껜 실례를 범했네요. 제가 지금 너무 놀라서요……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가 봐요…….”

“……신…….”

“……지금 전남편을 만났거든요. 말씀드렸죠? 제 잘나신 전남편에 대해서는요.”

“!!!”

“……장 선배님, 오랜만이네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

“……저런, 얼굴이 백짓장이시네…… 아, 이런…… 참…… 정말 제가 마귀할멈이라도 된 기분이에요, 장 선배님. 정말 괴롭네요…….”

“…….”

“……장 선배님 쓰러지시겠다, 위야. 부축해드려. 하하, 하긴 이미 서로 꼭 껴안고 있는데 무슨…… 정말 다정하시네요, 두 분…….”

“…….”

……기절하지 말자고 되뇐다.

저 아름다운 여신 앞에서 기절 같은 비겁한 도피만은 절대 하지 말자고…… 필사적으로 그것만 되뇐다. 그래. 다른 건 다 어떻게 돼도 좋아. 그냥 기절만 하지 않으면 돼. 버텨. 꿋꿋이 버텨, 장인환. 네가 뿌린 씨야. 네가 뿌린 죄의 씨앗. 그래, ‘소돔의 씨.’ ……아, 그랬나? 그래서였나? 그래서 파출부 아줌마가 그런 말을 했나 보다. 그건 전조였구나. 오래전에 잊혔던 그 아픈 상처가. 그 아픈 죄의 낙인이 그래서 다시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거로구나…….

새하얀 스트랩 샌들이 보였다.

다른 디자인이긴 하지만 자신은 저것과 매우 비슷한 흰 샌들을 본 기억이 있는 것 같다.

여신은 하얀색을 참 좋아했었다. 순결의 상징인 것만 같아서, 그게 여신의 순결과 숭고와 존엄을 상징하는 것 같아서, 인환은 그 색을 몹시도 증오했었지. 그래.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흰색이 무던히도 잘 어울리는 어느 여신이 너무 미운 나머지. 너무나 부러운 나머지.

시선을 조금 위로 올리자 크림색의 우아한 정장 투피스가 보였다. 바이올린 케이스도 보였다. 8밀리쯤 될 우아한 담수 진주 목걸이도 보였다. 길고 탐스러운 생머리가 위로 우아하게 틀어 올려져 있다. 잘 다듬어진 손톱. 큰 눈. 예쁘다기보다는 아름답다고 해야 할 조각 같은 얼굴 생김새.

바이올린을 전공한다고 했다.

지금은 아주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됐다고 들었다.

마치 공주님처럼 우아한 여자였었다.

아니, 여신처럼 당당한 여자였었다.

그래서 신처럼 아름다웠던 그는, 역시 여신처럼 아름다운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아마도 양신애라고 했던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