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1991년 7월. 장인환(張仁歡)
거실과 현관 등이 동시에 켜지는가 싶더니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제법 요란한 소리였을 것이지만 현실감이 없었다. 연인이 내뿜는 흉흉한 살기를 온몸으로 맞아 온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수갑처럼 단단히 틀어쥐어진 왼쪽 손목에 미처 아픔을 느낄 틈도 없이 인환은 순식간에 집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허겁지겁 겨우 신발을 벗었는가 싶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몸은 거실 소파 위에 거칠게 내던져지고 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부들부들 사지에 일던 오한이 차츰 가라앉았다. 새까만 공포의 심연에 함몰되기 직전, 인환의 정신을 도로 온전히 끌어올려준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공포를 심어준 그 당사자였다.
비수처럼 시퍼렇게 날이 선 시선이 한참 위에서 인환을 굽어보고 있었다. 연인은 무언가에 격분한 듯했지만, 적어도 그 흉흉한 눈빛엔 오늘 아침 마지막으로 일별했을 때의 저 지독한 환멸과 혐오감은 들어 있지 않았다. 다행이지 않은가? 적어도 화를 내준다는 것은 연인이 아직 인환의 무언가에 불만족했단 뜻이고, 불만족했다는 것은 인환에게 그 무언가를 먼저 기대했었단 뜻이었다. 자신에게 연인이 ‘기대’할 만한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의미다.
그야말로 희망이었다. 하느님이었다. 외면받는 것보다는, 증오하고 혐오하고, 궁극엔 환멸한 나머지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연인이 자신을 떠나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처럼 연인의 흉흉한 살기를 온몸으로 뒤집어쓰는 쪽이 백번 나았다. 외박까지 각오하지 않았던가. 한데 외박은커녕, 제법 이른 시각에 자신의 곁으로 되돌아 와줬다. 이렇게 다시 자신에게 연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었다.
“……저녁…… 먹었어?”
찌를 것 같은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말을 꺼내보았다. 그나마도 최고의 용기를 끌어낸 터라 ‘화났니?’거나 ‘무슨 일 있었니?’ 따위의 직접적인 질문은 차마 들이댈 수 없었다. 연인의 알싸한 체향에 섞여 제법 짙게 풍겨 나오는 먼지와 땀 냄새가 연인의 꽤나 부지런했을 법한 하루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낡은 청바지 곳곳엔 흙먼지로 보이는 이물질들이 보이고, 잿빛의 면 티셔츠 위로 땀에 젖은 선명한 얼룩이 가슴골이며 겨드랑이 사이, 등까지 낭자했다.
“……아…… 아직 안 먹었으면 뭐 맛있는 거 시켜줄까? 너 불고기 도시락 좋아하잖아…….”
하얗게 탈색돼 있던 연인의 아랫입술이 지그시 악물리는 게 보였다. 지독한 자제심으로 분노의 폭발을 참고 있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라앉았던 공포심이 다시금 불쑥 치솟으려는 것을 연인의 손등을 살며시 어루만지는 것으로 이겨냈다. 크고 단아한 손은 마디가 하얗게 불거지도록 잔뜩 움켜쥐어져 있었다.
“……샤워부터 할래? 하…… 하루 종일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
힘껏 뿌리쳐진 손 탓에 이어진 상반신까지 소파 등받이 위로 휘청 기울었다. 어눌한 말꼬리도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채 인식하기도 전에 인환의 몸은 재빨리 다시 앞으로 끌려갔다. 연인의 양손이 재킷 자락을 움켜쥔 채 끌어당긴 때문이었다. 무릎을 접은 채 소파 앞에 마주 앉은 연인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악물렸던 연인의 입술이 크게 벌어지는 것 같더니 턱 끝으로 날카로운 아픔이 달렸다. 순식간에 눈물이 핑 고일 정도의 통증이었다.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지며 두 눈이 꾹 감겼다. 찰나의 순간 후 다시 눈을 떴을 땐 고통을 불러일으켰던 연인의 날카로운 치아는 인환의 아랫입술 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그것엔, 턱을 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애무라기보단 거의 고문에 가까울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뭡니까?”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사나운 위협이 뜨거운 호흡과 함께 얼굴 전체로 훅 끼쳐들었다. 검푸르게 일렁이는 먹빛 눈동자 속에 인환의 창백한 얼굴이 가득 들어앉아 있는 게 보였다.
“……제가 낸 흔적들이 아니로군요. 여기와 여기. 어떤 개새끼입니까?”
재킷 옷섶을 잡고 있던 손이 안쪽의 셔츠로 이동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단추들이 떨어져나가며 가슴팍이 드러났다. 순간 다가든 서늘한 냉기는 고장 난 정신이 만들어낸 착각일 터였다. 에어컨이 꺼져 있는 실내는 섭씨 30도가 넘는 찜통 속이었으니까.
“목덜미와 가슴은 워낙 지저분해서 잘 모르겠군요. 창녀처럼 화려해요. 제가 낸 건지, 어떤 개새끼가 낸 건지 구분을 못 하겠습니다.”
무도한 손길이 목덜미며 가슴을 지분거리며 이리저리 이동했다. 그악하게 떨어지고 있는 말투 못지않게 야비하고 잔혹한 손길이었다. 인환의 시선을 움켜쥔 채 검푸르게 일렁이고 있는 눈빛은 금방이라도 인환의 숨통을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 개새끼와 섹스 했습니까?”
“……?”
“오늘 아침까지 그렇게 해댔는데도 모자랐던 겁니까? 아무한테나 다리를 벌리는 게 그렇게도 쉽던가요?”
“……?”
“가볍기가 창녀가 따로 없군요. 말씀해보세요. 그새를 못 참겠던가요? 여기에 박아줄 물건이면 누구라도 좋았던 겁니까? 누구라도 좋으니까 항상 박아줬으면 했나요? 그래요?”
“…….”
“남창은 저인데 적성은 선생님 쪽이 천부적인 것 같군요. 항상 누군가의 물건에 박혀 있어야만 안심이 되는 모양이니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
“분홍색이라니, 천박하기가 낯이 뜨거울 정도로군요. 정말 잘 어울려요. 창녀보다 더 밝히는 게이에겐 더할 나위 없는 색이죠. 그래서 이렇게 야하게 차려입고 뭇 사내놈을 사냥하러 나가셨던 겁니까? 그새를 못 참고요?”
“…….”
“좋았습니까? 만족을 주던가요? 오늘 선생님에게 박은 개새끼 물건 말입니다. 저보다 크던가요? 저만큼 잘 흔들어요? 선생님의 천박한 화냥기를 만족시켜주던가요? 그래요?”
“…….”
멍해진 정신은 인지 능력마저 앗아간 듯싶었다. 한동안은 연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니까. 으르렁거리는 나지막한 포효는 점점 더 격하고 음습해졌고, 인환의 몸을 더듬고 문지르고 희롱하던 손길 또한 갈수록 거칠고 야비해졌다. 비로소 제 의미들을 간신히 인식했을 무렵엔 인환은 아랫도리만 벌거벗겨진 채 개처럼 수치스러운 자세로 소파에 엎드려 있었다. 양쪽 치골 사이를 움켜쥔 연인이 우악스럽게 엉덩이를 치켜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청바지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 또한 얼핏 들었던 것도 같았다. 그러고는 고통…… 오로지 순수한 고통뿐이었다.
전희는커녕, 삽입을 수월하게끔 하는 배려 따윈 일체 없었다. 비록 지난 사흘간 광란의 포르노를 연출하는 데 쓰였다고는 하나, 몇 시간 전엔 독사의 손길에 얌전히 희롱당하기까지 했다고는 하나, 말끔히 씻겨 본모습을 찾고 있던 곳이었다. 윤활제 없이는, 정성스레 풀어주지 않고는 웬만해선 연인의 크기를 감당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더구나 폭행의 의도만을 지닌 난폭한 삽입에 그것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가장 두꺼운 귀두 부분이 채 다 들어오기도 전에, 인환은 얄팍한 점막이 찢겨나가는 것을 알았다. 뜨끈하게 아래로 젖어드는 질척함 또한 어렴풋이 자각했다. 제대로 된 의식은 거기까지였다. 일체의 자비 없이 휘몰아치는 거대한 흉기는 막무가내였다. 퍽퍽,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하반신으로부터 참기 힘든 끔찍한 동통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견디다 못해 눈을 부릅뜬 채 몇 번 비명을 지른 것 같았다. ‘제발, 제발’ 하고 어름어름 애원을 중얼거린 것도 같았다. 그나마도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건, 거의 체념해버린 희망 때문일 터였다. 어떻게 애원해도 연인은 용서해주지 않을 거라는 것. 연인의 분노가 풀리기 전엔, 설령 이대로 자신의 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연인은 그만두지 않으리라는 것. 자신이 할 일이란 그저 견디는 일뿐이라는 걸…… 인환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나…… 깨어나요…… 는다고 봐주지 않아…….”
뜨거웠다. 온몸을 태워버릴 듯, 끝없는 지평선을 이루는 거대한 지옥불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끔찍한 화기였다. 전신이 축축한 땀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참기 힘들게 느껴지는 더위와는 달리 오한이 든 것처럼 덜덜 떨고 있는 전신이 이상스러웠다. 얼마 동안인지 모르나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고 대답해요. 안 그럼 더 아플 겁니다.”
소파에 엎드린 채 당한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거실 바닥이었다. 먼지 냄새와 기름 냄새가 어렴풋이 배어 있는 카펫의 부드러운 감촉이 뺨에 느껴졌다. 가까스로 돌아온 의식이 가장 먼저 자각한 것은 연인의 몸에 여전히 꼬챙이처럼 꿰여 있는 자신의 사지였다. 엎드려 누워 있는 인환의 몸 위에 연인의 압도적인 몸이 겹쳐져 있었다. 내장 가득 들어차 있는 듯한 연인의 거대한 흉기 또한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피스톤 운동은 멈춘 상태라 기절하기 직전까지 느껴야만 했던 지독한 고문은 더 이상 없었지만, 서로의 심장이 뛸 때마다, 혹은 숨을 쉴 때마다 안에서 율동하는 쓰라린 압박감은 여전한 공포였다. 지옥불 같은 뜨거움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실내는 찜통 속이었고, 찜통 속보다 더한 뜨거운 열기가 인환을 온통 감싸고 있었다.
“이리저리 굴리는 더러운 몸뚱이로 내 물건을 먹으려 했던 겁니까?”
어깨와 팔로 더듬더듬 오르내리는 연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흡사 애무와 다름없는 느릿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뒷목덜미와 귓불 근처를 더듬고 있는 것은 연인의 키스. 입술의 부드러운 잔 터치가 움직여 가는 길목마다 불처럼 끼쳐드는 연인의 숨결이 있었다. 열렬하면서도 사려 깊은 숨결이었다. 거침없이 내뱉어지는 잔혹한 일갈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제가 선생님 전용이라면서요? 아무리 남창이라지만 될 수 있으면 깨끗한 몸이 좋다면서요? 깨끗해야만 하는 건 남창에게만 해당하는 조건이었습니까? 고객은 아무렇게나 몸을 굴려 더러워져도 된다는 거죠? 고객은 왕이니까. 그런 겁니까?”
“…….”
“대답해요. 그런 겁니까?”
“흑! 아…… 아파…… 하지…….”
“아픕니까? 그럼 대답해요.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을 해주시면 아프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래 봬도 남창이 지금 좀 화가 났거든요. 비정규직 남창이라도 스트라이크를 할 권리는 있지요. 제가 생각했던 조건과 선생님께서 생각하셨을 법한 조건이 달랐던 모양이더라구요. 고객이 남창에게 정절을 요구했을 땐 고객도 마땅히 그것을 지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게다가 고객은 에이즈의 위험이 상존하는 문란한 게이, 언제 어느 때 치명적인 질병에 감염될지 남창도 모를 노릇이지요. 돈 때문에 몸을 팔긴 하지만 목숨까지 담보로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안 그런가요? 몸 파는 것도 서러운데 생명의 위협까지 각오해서야 진짜 미칠 노릇 아니겠습니까? 한데 생각해보니, 그 부분에서 서로 정확한 합의를 한 게 아니더라구요.”
“……아…… 아파…… 위…… 야…… 제발…….”
“그래요. 많이 아플 겁니다. 피가 흥건한 걸 보면 상처도 심하겠죠. 저도 편치는 않습니다. 선생님 여기, 지금 절 지독하게 조이고 있거든요. 금방이라도 끊어져 먹힐 것만 같아. 가만히 있으니 더 미치겠군요. 이해하시죠? 발기하고 삽입해서 흔들지 않는 게 수컷한텐 얼마나 참기 힘든 노릇인지요? 하지만 참아야겠죠. 원래 협상을 하려면 사주 쪽이나 노조 쪽이나 서로 조금씩 피해를 입는 법이니까요.”
“…….”
“확실히 합시다. 전 앞으로도 에이즈 걱정을 해야 하는 겁니까? 요즘엔 가끔씩 콘돔도 잊곤 하는데 앞으로 다신 그러지 말아야 할까요? 키스할 때도 조심해야 하는 겁니까? 거친 딥 키스는 자제할까요? 위험수당은요?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문란한’ 게이와의 성 접촉엔 항시 에이즈 감염의 위험이 따릅니다. 산재도 그처럼 높은 위험도의 산재를 가정하진 않는 법이죠. 그에 따른 위험수당이라면 감히 측정이 힘들 겁니다. 선생님께 미리 받은 8천만 원으론 어림도 없을지 모르죠. 자, 어떡할까요? 위험수당을 지급하시고 지금처럼 문란하게 아랫도리를 휘두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착각했던 것처럼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엔 서로 정절을 지키도록 할까요?”
“…….”
“울지 말고 대답하세요. 손해 보는 척 어영부영 넘어가자는 속셈이십니까? 확실히 말씀하세요.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조건을요. 그럼 저도 그에 따른 제 요구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당장 그쳐요. 남자 주제에 감정을 질질 흘리며 짜는 꼬락서니 정말 짜증 납니다.”
“…….”
“그치라고 했죠?”
“흐윽! 아파! 악……!”
“그치고 대답하란 말입니다!”
“……안…… 해…….”
“뭐라고요?”
“……윽…… 흑…… 다…… 다른 남자하고 안 해…… 아까도 안 했어. ……그냥…… 오…… 오늘은 그냥…… 이건…… 너무 괴로워서…… 세혁 선배 만나러 갔다가…….”
“…….”
“……아니, 아니…… 네 말대로 세혁 선배랑 섹스 해보려고 했었어. 그래보려고 했었어. 미안…….”
“…….”
“……세혁 선배랑…… 세혁 선배가 아니라도…… 다른 모르는 남자랑 가볍게 섹스하고…… 네 말대로 난잡한…… 아무하고나 잘 수 있는 그런 몸뚱이가…… 창녀가 되어보려고…… 그래서 만나러 갔었다…… 세혁 선배랑 할 수 있으면…… 다른…… 다른 누구라도…….”
“…….”
“……근…… 데…… 근데 못 하겠어서…… 결국 못 하겠어서…….”
“…….”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나만…… 내 입장만 생각했었어…… 나는 그런 쪽으론…… 에이즈라거나…… 그런 생각은 미처 못 했었는데…… 미안…… 미안, 위야…… 안 해…… 절대 안 해…… 앞으론 절대 그런 생각도 안 할게…… 너랑 사랑하는 동안엔 다신 절대로 어떤 남자와도…….”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객 입장에서 다른 남자와 자유롭게 섹스 하고 싶은데 억지로 참으실 필요까진 없으니까요.”
“참는 거 아냐…… 아니야, 위야…… 나…… 알잖니, 난 너를…… 너를…….”
“사랑이란 역겨운 말로 포장하지 마십시오. 선생님과 제 관계, 돈을 매개로 한 스테디한 섹스 파트너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언제든 쉽게 질릴 수 있는 관계죠. 서로 간에 정절을 요구할 필요성도 보건위생상의 문제에 불과하니까요.”
“…….”
“절 산 고객은 선생님이십니다. 제 몸에 질리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오늘처럼 제 뒤통수나 치지 마시구요.”
“…….”
“그럼 이제 협상은 타결된 셈인가요? 선생님께서 제 몸을 사고 계시는 동안엔 다른 섹스 파트너를 두진 않으시리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
“정확히 답변해주십시오. 제가 바르게 이해한 겁니까?”
“……응…….”
“뭐라고요?”
“……응, 그래…… 그래, 위야…… 그래…….”
“…….”
미동조차 없는 정적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목덜미와 귓불을 오가던 애무와 키스도 멈췄고, 등과 어깨, 그리고 허리 근처를 이리저리 어루만지던 부드러운 손길도 멈춘 지 오래였다. 연인의 커다란 두 손은 양쪽 옆구리 근처에 축 늘어져 있던 인환의 손등 위에 깍지를 끼듯 움켜쥐고 있었다. 찜통 속 같은 한여름 열기 속에서 연인의 나지막한 숨소리만이 흐르는 시간을 자각시킬 따름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인환의 손을 움켜쥐고 있던 연인의 두 손이 조심스럽게 바닥을 지지하더니 몸을 일으키는 게 느껴졌다. 한쪽 골반 뼈 근처로 우릿한 악력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그와 비교도 안 되는 극심한 통증이 하반신으로부터 올라왔다. 연인이 삽입돼 있던 성기를 천천히 빼고 있었다. 나름대로 배려의 몸짓이었겠지만, 이미 상처를 입을 대로 입어버린 하반신엔 그 어떤 위로도 되지 못했다. 차라리 단숨에 빠졌더라면 통증 또한 순식간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참지 못한 자신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거실 가득 울려 퍼지는 것이 들렸다. 아까부터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소리 없는 눈물에 순전히 고통을 원인으로 한 그것이 더해 홍수라도 이룰 것 같았다. 뺨을 대고 있던 카펫 바닥이 거무스름한 눈물 얼룩으로 낭자했다. 덕분에 좀처럼 그치기 힘들어졌지만 차라리 그것이 더 나았다. 마음에 입은 상처 때문이 아니라 육체가 입은 상처로 우는 것은 그나마 덜 창피할 터였다. 사내 주제에 감정을 질질 흘리며 우는 꼬락서니란 스스로에게도 역겨운 노릇이었다.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 끝에 너울거리며 떨어지는 옷가지들을 보니 연인이 옷을 벗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바지 지퍼만 내린 채 모멸적으로 인환을 안은 연인의 징벌이 새삼 실감이 되었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기왕에 너무 많이 상처를 입어서, 연인이 더 이상 무슨 지독한 짓을 한대도 별로 아플 것 같지 않았다. 알몸이 된 연인이 인환의 나머지 옷가지들도 벗기고 있었다. 연인의 손길은 한껏 조심스러웠지만,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상처 난 아래가 욱신거렸다. 두 사람분의 옷가지를 다용도실로 가져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엎드린 자세 그대로 멍하니 좇았다. 욕실로 이어지는 연인의 뒤태를 마저 좇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면 방향을 틀어 바라봐야만 하는데, 그럴 기력도 없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옷이 벗겨지며 새삼 자각했던 하반신의 통증이 무서웠던 것이다. 조금만 몸을 움찔거려도 우릿하게 퍼지는 동통은 지독했다. 조금이나마 통증이 줄어들 때까지 얼음땡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빌었다. 연인의 분노가 온전히 스러져 더 이상은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를.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할 때까지만이라도 섹스를 요구하지 않기를. 뭐…… 더 괴롭힌다 해도 자신으로선 속수무책,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올 줄 알았는데, 연인은 욕실로 들어간 지 채 2분이 못 되어 다시 인환에게 다가왔다. 무릎을 꿇고 앉는 연인의 손에 들린 것은 여러 장의 젖은 수건이었다. 피부 위로 닿는 차가운 감촉에 설핏 몸서리를 치자, 연인의 다른 쪽 손이 안심이라도 시키듯 부드럽게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어깨와 등과 팔다리가, 마지막으로 사타구니 안쪽이 조심스레 닦였다. 상처 입은 항문 근처로 물수건이 파고들어오자 저절로 다리가 오므라들었지만 연인은 늘 그렇듯 가차 없었다. 무언의 단호한 손길이 몸을 열 것을 명령했고, 인환은 멍하니 눈물을 쏟으며 복종했다.
“아프면 참지 말고 비명을 지르세요.”
문득 떨어진 무뚝뚝한 어조에선 그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연인의 무감정이 차라리 분노보다 시리고 아파, 선혈이 낭자한 하반신이 말끔히 닦이는 동안 내내 인환은 도리어 기를 쓰고 비명을 참았다. 그저 어떻게 해도 잡히지 않는 눈물만 소리 없이 주룩주룩 흘려보냈을 따름이었다. 몸을 뒤집어 앞쪽까지 깨끗이 청소를 마친 연인은 침실로 들어가 구급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찢어진 입구는 물론 안쪽 점막까지 손가락을 집어넣어 꼼꼼하게 연고를 바르는 손길은 역시 일말의 동정조차 없이 단호했다. 악물린 입술을 타고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가 흡사 천박한 교성 같아 부끄러웠다. 창녀처럼 지저분할 터였다. 이리저리 굴리는 더러운 몸뚱이. 연인의 귀에도 그렇게 들릴까 봐 무서웠다.
에어컨을 켰는지 어느새 서늘한 냉기가 다가들어 있었다. 다행이었다. 이 이상 계속 찜통 속에 있다간 열사병에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몸이 붕 뜨는 것이 느껴졌다. 연인이 인환을 안고 침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맞닿은 피부에 느껴지는 연인의 알몸이 선명하게 자각되었다.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은 아프고, 축축하게 땀에 젖어 있는 피부는 뜨거웠다. 세혁 선배의 집에서 샤워를 한데다 연인의 손에 의해 말끔히 청소까지 된 인환의 몸에 비해 연인의 몸은 여전히 먼지와 땀투성이였다.
“……샤워 해야지…….”
인환을 침대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곤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눕는 연인을 향해 멍하니 중얼거렸다. 결벽증이 있는 연인의 성미를 익히 알고 있는 인환으로서 본능에 가까운 잔소리였건만 어쩐지 연인은 들은 척도 않는 것 같았다. 모로 눕힌 인환의 등에서 양팔을 둘러 품에 안은 채 연인은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등줄기를 쓰다듬고 있는 손길은 다정했다.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인환의 눈물이 땀내와 알싸한 체향이 진동하고 있는 연인의 가슴팍에 거침없이 문질러지고 있었다.
“……샤워 안 해? ……저녁밥 먹고 들어온 거야……?”
더 이상 흉흉한 살기도, 격렬한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 연인이 믿어지지 않아서 사족처럼 덧붙여보는 인환이었다. 샤워를 할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연인이 인환에게 화를 내지 않는 연인만큼 믿어지지가 않았다. 연인의 뜨거운 품 안은 아늑하고도 평화로웠다. 마치 극진하게 사랑을 주는 진짜 연인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서러운 착각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한숨처럼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너무 낮아서 그저 웅웅 울리는 중저음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단조로운 어조는 상냥했다. 아니, 상냥하게 들렸다. 이마와 정수리 사이에 거의 달라붙어 있던 연인의 입술에서 떨어진 한마디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자 등줄기를 오르내리던 연인의 손길이 더더욱 다정해졌다. 마치 깨어질까 두려운 유리 세공품을 더듬는 것 같은, 어딘가 애틋하고 간절한 손길이었다.
“……왜 아무하고나 자는 창녀의 몸이 되고 싶은 건데요?”
몇 분 전의 사나운 추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어휘 선택이었지만 분위기는 거의 180도로 달랐다. 몇 분 전의 그것이 폭발할 듯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면 지금의 그것에선 설명하기 힘든 아릿한 감정이 느껴졌다. 담담하고 고요하게까지 느껴지는 아름다운 음성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더 이상 연인에 대한 두려움도, 또 수치감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저 막연한 슬픔만이 인환의 넋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고 나면 널 사랑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조금…… 조금은 덜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만두고 싶어졌습니까?”
“……?”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드신 겁니까?”
“…….”
“그것 봐요. 사랑이라고 해봤자, 죽을 만큼 사랑한다고 해봤자 실은 죽지는 못하는 거죠. 결국 그런 겁니다.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심엔 그 어느 것도 못 당하는 법이거든요.”
“…….”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그만두세요.”
“…….”
“아니, 제발 부디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세요. 선생님의 안에 품은 그것…… 빨리 죽여버릴수록 선생님껜 이득이니까요.”
“…….”
연인의 한숨 같은 덧붙임에 이어 입술이 내려왔다. 눈물로 흠뻑 젖은 인환의 뺨이 천천히 핥아지고 있었다. 뜨겁게 물결치는 혀와 입술의 감촉에 온 넋이 전율했다. 구석구석 빠짐없이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다정한 애무였다. 설움이 왈칵 목울대를 찌르고 올라왔다. 비명처럼 억눌린 흐느낌이 토해졌다.
“……아냐…… 윽…… 흑…… 그…… 런 거 아니야…….”
“…….”
“……내가 힘들어서 그런 거 아냐…… 네가…… 네가 변할까 봐…… 소돔의…… 널 더럽히고 타락시킬까 봐…… 내가…… 내 사랑이란 게…… 나쁜…… 더러운…….”
“…….”
입술의 움직임이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새까만 먹빛 눈이 파고들 듯 인환의 시선을 움켜쥐고 있었다.
“……무서웠어. 너무 무서워…… 넌 점점 변하는 거 같고…… 넌 섹스 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요즘엔 나랑 하는 거에도 아무 거리낌도 없는 거 같고…… 소돔의 씨…… 넌 노말인데…… 노말이었는데 내가 변태적인 섹스로 물들여 더럽히는 거 같아서……. 넌 요즘 이상했으니까…… 진짜 이상하지…….”
“…….”
“……웃기지? 나 아직 양심은 남아 있었나 봐. 네 몸을 사랑하긴 하지만 네 정신은 더 좋아해. 네 정신이 더럽혀지는 건 못 참을 거 같더라…… 진짜 웃기지? 만약 널 타락시킨다면…… 널 혹시라도 게이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내 사랑이란 게 대단한 건가 싶은 게…….”
“…….”
“……그게 무서웠어…… 너무 무서워,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숨이 턱턱 막히고…….”
“…….”
“……알량한 양심이지? 돈으로 네 몸을 사는 주제에 네 몸을 타락시키는 건 또 지독하게 겁을 내다니 말야. 못된 사랑이란 건 알아도…… 그래도…….”
더 이상의 비참한 한탄은 이어지지 않았다. 연인의 입술이 인환의 입술을 틀어막아버린 때문이었다. 키스는 갑작스러웠고 격렬했다. 양팔로 옥죄어진 상반신은 끊어질 것 같았고 혀와 입술은 마치 불이라도 붙은 것마냥 얼얼했다. 몇 분인지 몇 초인지, 이리저리 방향과 각도를 달리하며 키스가 거듭되는 동안 뇌 속이 온통 핥아지는 것마냥 백지 상태가 되었다. 까마득히 혼절할 지경으로 숨이 턱에 받쳐서야 길고 격렬한 키스가 끝이 났다.
“……웃기네요.”
활화산처럼 훨훨 타고 있는 연인의 시커먼 동공이 코앞에 있었다. 살기인지 분노인지 욕망인지, 알 수 없는 열기로 가득한 눈빛이었다. 저절로 온몸에 한기가 달렸지만 이상하게도 무섭다는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잘 들어요. 난 게이 따윈 안 됩니다.”
“……위…… 야…….”
“만약 내가 게이가 된다면 살해된 형의 이름을 걸고 선생님을 죽일 겁니다. 맹세하죠.”
“…….”
이토록 단호하고 형형한 눈빛을 보고도 겁에 질린 반론을 떠밀 수는 없었으리라. 그래, 우스웠다. 연인의 말마따나. 그간 온 머리가 땜통 범벅이 될 정도로 공포에 질렸던 자신이 새삼 우스울 지경이었다. 게이라니. 연인이 게이 섹스로 타락하다니. 이토록 강철 같은 의지의 소유자인 연인이 변한다고? 혹은 변했다고? 아아, 나가 죽어라, 장인환. 만약 연인이 변한다면 그전에 장인환 네가 먼저 노말로 변태하리라. 그렇지. 그럴 것이다. 의지와 줏대라곤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는 장인환이 더 쉽고 빠를걸? 연인이 게이가 되느니 장인환이 노말 되는 게.
“……주제넘었단 생각이 드시죠?”
“…….”
“같잖은 오지랖이었죠?”
“…….”
“아시겠습니까? 다시 한 번 더 맹세하죠. 형 이름에 걸고. 혜윤이와 휘의 장래를 걸고. 만약 제가 장래에 게이가 된다면, 선생님의 게이 섹스에 중독돼 정신을 못 차리고 사내새끼 엉덩이만 쫓게 된다면, 그땐 제가 선생님의 숨통을 끊는 것으로 복수를 해드리죠.”
“…….”
“말씀드렸죠? 내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인간들은 난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그냥 두지 않는다고요.”
“…….”
이상했다.
끊임없이 줄줄 흘러내리던 눈물이 어느 순간 멈춰 있었다. 그간 심연 저 깊은 곳에 앙금처럼 남아 담금질을 해대던 지독한 불안과 죄책감과 공포심이 마치 꿈이었기라도 한 양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무어라 이름 붙이기 힘든 헛헛한 체념이 넋 속에 깃들기 시작했다. 체념은 절망과 비슷한 것도 같았다. ……사랑받을 수 없을 거야……. 누군가 심술궂게 속살거렸다. ……그가 절대 게이로 타락하지 못하는 한, 너 역시 절대로 그의 사랑을 받는 일은 없을 거다……. 어때, 기쁘지? 안심해. 이젠 겁낼 필요 없어. 마음껏 그를 사랑하라구.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알고 있었잖아? 어차피 너 혼자만의 사랑 아니었던가……?
신기했다. 현실인지 꿈인지 얼떨떨했다. 흡사 최면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아니, 강력한 주술이나 다를 바 없었다. 무슨 사이비 종교 교주의 강령처럼 연인의 맹세는 순식간에 인환의 온 영혼을 지배해버렸다.
아플 정도로 옥죄던 상반신이 조금 느슨해진 것이 느껴졌다. 형형하게 번들거리던 연인의 살기 어린 눈빛도 어느덧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등줄기를 간질거리는 손길은 여전히 달콤할 정도로 상냥했다. 서양인처럼 뚜렷하고 선 굵은 이목구비가 부드럽게 풀어져 가슴이 떨릴 지경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연인을 닮은 교주의 얼굴이었다.
“눈 감으세요.”
“…….”
“명령입니다, 그만 눈 감으세요.”
“…….”
“……주무세요. 쓸데없는 망상은 그만두시고요. ……옳지. 착하군요.”
“…….”
폭도처럼 잠이 밀려들었다. 이상했다. 정말 최면에라도 걸린 것 같다고, 인환은 까마득히 멀어져가는 의식의 끝에서 가냘프게 뇌까렸다.
[널 좋아한다고 했다던데? 너랑 사귀는 사이니까 침 흘리지 말라고 선전 포고하더란다. 다시 한 번 집적대면 한독사 죽여버리겠다고 도장 찍어주시고 복사까지 마쳤다던데? 가뿐하게. 분위기 끝장 살벌해서 또 둘이 치고받고 싸우는 줄 알고 경자가 간이 콩알만 해졌다데? 기하 선배가 감시해선지 다행히 둘 다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2차 대전 벌어져도 꽤 재미있었을 거 같지 않냐? 그 새끼 미끈한 낯짝만은 끝내주잖아. 한독사도 꽤나 반반한 쪽이고. 꽃미남 둘이 울긋불긋 붓고 찌그러진 얼굴로 서로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한 게 아니니까. 그야, 호모들 치정 싸움에 애꿎은 선 화랑까지 부서지면 기하 선배는 울겠지만……. 에그, 울 불쌍한 기하 선배! 암튼 싸움으로 번지지 못한 건 섭섭했는데, 그래도 나 그 새끼 폭탄선언 땜에 간만에 식겁해서 턱이 다 빠지는 줄 알았지 뭐냐. 그 새끼가 널 좋아한다니…… 너랑 사귄다는 말을 했다니…… 처음엔 경자가 웬 쉰 소리를 하나 했다, 나. ……사실이니? 아니지?]
속사포처럼 길게 이어지던 수다가 잠시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수화기 너머 오주희의 어조는 가볍다 못해 경쾌하게까지 들렸다. ‘쪄 죽지 않고 잘 살고 있냐?’ 하고, 여자 특유의 거친 안부 인사로 시작했던 몇 분전과 거의 다름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제법 오래 뜸을 들이며 인환의 대꾸를 기다려주고 있는 여자의 태도는 실제로 가벼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여자는 그저 인환의 마음이 가벼워지도록 배려하고 있을 뿐이었다. 인환에겐 죽었다 깨나도 가벼울 수 없는 주제란 걸, 여자도 또 인환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한순간은 여자에게 거짓말을 할까 잠시 유혹을 느꼈었다. 연인이……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니. 그와 자신이 사귀고 있다니. ‘사실’이라고 거짓을 발설하는 그 순간만이라도 ‘진실’이 될 수만 있다면. 하지만 결국 인환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것은 솔직한 부정의 한마디였다.
세혁 선배라면 모를까, 오주희에게만큼은 거짓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여자의 감정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도, 인환은 여자에게만큼은 채 다 비워지지 않은 죄책감 같은 것을 늘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뭐라 해도 인환은 여자의 옛 애인을 훔쳐 빼앗은 천하의 후레자식이었다. 기왕의 원죄에 동일한 상대를 두고 다시금 거짓을 보탤 순 없었다.
“……세혁 선배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나한테 계속 미련 갖게 하는 것보단 낫잖아. 남창으로 그 앨 산 게 아니라 서로 좋아하는 걸로 해두면 세혁 선배도 쉬 단념할지도 모르고…… 최소한 내 걱정은 덜 하게 되겠지. 그렇게 믿게 해두고 싶었어. 내가 그러라고 한 거야.”
실은 자신이 부탁을 한 게 아니라 일을 저지르고 온 그가 그저 통보를 한 것에 불과했지만, 인환은 완곡하게 돌려서 덧붙였다.
닷새 전이었다. 폭행하듯 안아 인환을 상처 입힌 그다음 날, 인환을 병원에 데려가 치료까지 시켜주고 집에 돌아온 직후, 연인은 곧바로 다시 차를 몰고 나갔었다. 밤이 이슥해졌을 무렵 굳은 얼굴로 되돌아온 연인은 ‘독사를 만났으며, 연인이 인환 자신을 좋아해서 서로 사귀는 사이라고 말해두었다’고 했다. 그 문제로 더 이상 신경 쓰기 싫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말해두는 편이 독사도 미련을 버릴 테니 인환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일리가 있었다. 연인과 자신의 문제에 관한 한, 관계의 진실이 친구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또 독사에게 계속 미련을 갖게 하는 것도 인환으로선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차라리 연인이 진짜로 인환을 좋아해서 사귀는 사이라고 못을 박아두는 편이, 독사는 물론 다른 동료들에게도 좋은 모양새로 비칠 수 있을 터였다.
“……선배만 알고 있어. 세혁 선배한텐 말하지 마. 기하 선배나 경자한테도. 게이라는 것도 들켜서 민망한 참인데, 헤테로를 짝사랑한 나머지 남창으로 사버리다니 진짜 꼴 우습잖아…… 알면 다들 걱정할 테니까. 나 창피한 건 둘째치고, 그 애도 자기 남창 일 하는 거 얼마나 끔찍해하는지 아는데 소문 퍼질까 봐 겁나. ……음…… 그리고 세혁 선배도 나 많이 좋아해주는 거 알게 됐거든. 그 마음 받아줄 것도 아닌데 더 이상 마음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미련 두게 만드는 일도 정말 싫고…….”
제법 길고 담담하게 이어진 대꾸가 끝난 후에도 수화기 너머 여자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인환 이상으로 연인의 본질을 꿰고 있을 여자이니, 애초부터 나경자가 전해준 핑크빛 소식을 액면 그대로 믿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여자는 나름대로 기대를 했었던 걸까? 한참의 침묵 후에 이어진 것은 긴 한숨 소리와 더불어 연달아 터지는 나지막한 욕설들이었다.
[……지랄…… 쥐가 고양이 생각하고 앉았네. 니가 지금 한독사까지 챙기게 생겼니? 게다가 싸가지 남창 새끼 걱정까지! 허, 참! 하여간 지랄 맞은 오지랖이에요.]
“후후, 오지랖씩이나…… 내 주제에 무슨…… 그냥 그편이 다 서로 편한 거니까지…….”
[하긴 그 얼음덩이가 널 좋아한다고 했다니 어디 말이 되는 소리여야 말이지. 처음엔 나도 약간 미심쩍었었는데…… 한독사랑 포천에서 거하게 한판 뜬 일도 꽤 수상쩍었잖아? 하지만 생각할수록 코웃음만 나오더라. 아무렴. 그 독종이 행여나! 순진한 경자 기집애야 그 새끼 정체를 모르니 가슴이 떨렸다는 둥 어쨌다는 둥 뻘소리를 해대고 난리지.]
“……모르는 체해. 그래줘, 선배.”
[내가 동네방네 나팔 불고 다니는 성격이니? 게다가 고약하게 꼬이기만 한 남의 연애사를? 염려 붙들어 매셔.]
“……응.”
[……그냥 걱정 돼서 걸어본 거야. 그 새끼가 선 화랑에 나타나서 별 해괴한 퍼포먼스를 싸지르고 갔다기에 또 네게 무슨 심술을 부리는 건 아닌가 하고.]
“……심술은 무슨. 요새 얼마나 잘해주는데…….”
[하, 퍽이나 잘해주시겠다!]
“진짠데…….”
[그 새끼 관련 찬양은 듣고 싶지 않거든? 끊자. 작업 중이었다며? 마저 일이나 해.]
“어, 그럴게. 선선해지면 선배 아틀리에에…….”
여자는 작별 인사도 채 마무리 짓기 전에 통화를 끊어버렸다.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양 급작스러웠다. 연인에 대한 변명 따윈 단 한 마디도 들어주기 싫다는, 그녀 특유의 고집스러운 시위가 느껴져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은연중에 드러났을지도 몰랐다. 연인을 변명해주고 싶은 자신의 기분이. 아니, 체념과도 비슷한, 절망의 가장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평화를 기뻐해야 할지 혹은 슬퍼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는 자신의 현 상태가. 누군가에게라도 사정을 말하고, 그를 통해 자신을 확인받고 싶은 욕망이 요 며칠, 순간순간 마음을 어지럽혔을 정도니까. 조금은 기뻐해도 된다는. 아주 절망적인 상황만은 아니라는 약간의 위로 같은 것.
……하지만 사실인데…… 요 며칠은 정말 잘해줬단 말야, 선배. 화도 안 내고, 눈빛도 다정해지고, 차가운 말조차 단 한 마디도 뱉지 않았는걸. 마치 예전 친구였을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란 말야……. 여자의 고집에 못지않을 똥고집으로, 인환은 끊어진 전화 수화기에 대고 실컷 덧붙여주었다.
징벌에 다름 아닐 강간을 당한 다음 날부터였다. 인환을 대하는 연인의 태도는 확실히 변해 있었다. 특별한 언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가 입힌 상처 치료에 불과한 병원 나들이에 에스코트를 해주는 외엔 평소와 달리 특별한 배려를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인환은 알 수 있었다. 연인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180도로 뒤바뀌었다는 것을. 인환을 향한 연인의 억눌린 분노와 혐오, 그리고 위악적인 적대감이 홀연 사라져버린 것이다. 더불어, 병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과도하게 폭주하던 음습한 성욕 또한 거짓말처럼 차분히 가라앉았다. 물론 항문에 입은 상처가 꽤나 심각했던 만큼, 당분간은 섹스를 할 상황이 아니기는 했다.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자제하는 듯한 연인의 조심성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보다 근본적으로는, 어둡고 끈끈하며 위험천만한 어떤 열기가 연인에게서 거의 사라졌다.
물론 연인의 일시적인 변덕일 수도 있었다. 그의 ‘에이즈포비아’를 건드리는 바람에 자신은 징벌치곤 좀 과하다 싶은 폭행을 당했었고, 연인은 그것에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끼는 것인지도 몰랐다. 죄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안함 비슷한 꺼림칙함이 연인을 자극했고, 그것이 본의 아닌 일시적인 친절로 나타나고 있는 것뿐일지도. 그건 그날 밤 이래, 인환 자신이 연인을 게이로 타락시킬까 봐 겁을 집어먹었던, 저 편집증과도 같은 공포를 말끔히 몰아낸 일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연인은 자신의 주제넘은 공포증을 통렬히 비웃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을 동정했을는지도 몰랐다. 화인처럼 인환을 태우던 죄의식을 단숨에 날려 보내준 것도 연인의 단 한마디 냉혹한 맹세였으니까. 연인이 게이가 되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는. 만약 게이가 된다면 자신의 숨통을 끊어주리라는.
아무튼 그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건, 인환은 덕분에 지난 몇 달간의 지독한 고통들을 상쇄시킬 만큼의 기묘한 평화와 행복감에 젖어들고 있는 중이었다. 봄볕 같은 가냘픈 기쁨이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 새록새록 피어오르고 있었다. 8000만 원을 올가미로 다시금 그의 몸을 산 이래,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연인의 우정과 호의가 보일 듯 말 듯 신기루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야 물론, 그리 큰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연인의 일시적인 변덕일 뿐이리라는 추측은, 아마도 거의 정확할 터였다. 새삼 연인의 우정이 되돌아온들, 그것을 액면 그대로 기뻐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궁극적으로 자신이 욕심내고 있는 것은 그의 사랑이지 우정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기왕에 보여주었던 우정의 무상함을, 인환 자신이 처절하게 피 흘리며 노력했던 ‘우정 찾기’의 끝, 그 절망의 도로(徒勞)를 이젠 몸서리가 쳐질 지경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환은 연인의 이해하기 힘든 변덕스러운 친절을 기뻐하고 있었다. 슬퍼하는 것도 같았다. 아니, 기뻐하고 있는지 슬퍼하고 있는지, 자신의 마음 상태에 대해 정확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좋다고 체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마치 감정을 느끼는 무엇인가에 마비가 온 것만 같았다. 그랬다. 요 며칠 인환을 안정시켜준 고요한 평화는 저 이상야릇한 ‘마비 상태’를 대가로 지불하고 있었던 것이다.
멍하니 거실 창 밖을 굽어보았다. 녹음이 무성한 한여름의 정원에 비로소 늦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저녁 8시가 막 지난 시각이니 곧 완전히 캄캄해질 것이다. 하루 종일 틀어두고 있는 에어컨 탓에 실내는 꽤 서늘한 편이었다.
일몰 직후의 음험한 땅거미며 고요하고 서늘한 아틀리에 내부를 굽어보고 있자니 문득 사무칠 지경으로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못 본 지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연인의 얼굴이 절절하게 그리웠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연인은 농구공을 옆에 낀 채 운동을 하러 나갔다. 성북동 아틀리에에서의 반동거가 시작된 이래 연인은 새벽이나 해가 진 저녁 시간에만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있었다. 올해 들어 유난한 폭염 때문일 것이다. 걸어서 30여 분 거리에 있는 경신고등학교나 성균관대학교 운동장이 연인이 택한 체육관이었다. 농구공을 들고 나간 때는 성균관대학교 운동장에 있는 농구 코트에서 나홀로 농구를 하거나 우연히 만난 운동 친구들과 팀을 짜 2대2 게임을 하기도 하고, 농구공 없이 나간 때는 경신고등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트랙을 돌았다. 몇 번 스토커처럼 연인을 미행한 결과 알아낸 코스였다.
이토록 그리우니 작업이고 뭐고 연인이나 보러 나가야겠다. 변덕 같은 결정에 망설임은 없었다. 가끔 그랬던 것처럼 멀리서 잠깐 보고 도망 오면 될 일이니까. 하반신의 상처도 걸음을 걷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는 아물고 있었다. 상처 때문에 병원에 가는 이외에는 두문불출했던 지난 닷새였다. 혹시 연인의 눈에 띈다면 답답해서 나와봤다고 변명해도 될 일이다. 친절해진 요즘이니 설령 스토커 짓을 했다고 눈치챈들 그리 화를 낼 것 같지도 않다. 그래. 마냥 겁을 낼 일만은 아니야.
끊어진 지 오래인 수화기를 그제야 내려놓고, 작업용 앞치마도 서둘러 벗어 던졌다. 티셔츠는 그대로 두고 아래쪽 반바지만 다리를 전부 가려주는 긴 면바지로 갈아입었다. 혹시 몰라 지갑만 뒷주머니에 챙긴 뒤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빌라 현관을 벗어나자마자 끈적끈적한 찜통더위가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금세 온몸이 땀투성이가 됐다. 성균관대학교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한 지 채 10분이 안 가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는 빈 택시를 발견했다. 행운이었다. 연인이라면 뛰어서 10분도 채 안 되는 거리지만 인환의 느린 걸음으론 40분 이상 걸어야만 하는 난코스였다. 몸 컨디션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하느님인 셈이었다. 몇 분 만에 도착한 성균관대학교 후문 앞에서 택시를 세우고 캠퍼스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이미 완벽한 어둠이 내려앉은 후였지만 곳곳에 켜진 가로등이며 건물 창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불빛 덕분에 시야는 꽤 밝게 확보되고 있는 편이었다. 방학인데다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도 캠퍼스 곳곳에서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대학생들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나마 더위가 수그러드는 틈을 타 연인처럼 운동을 하러 나오거나, 캠퍼스의 녹음에 피서 겸 산책을 나온 일반인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농구 코트가 잘 내려다보이는 스탠드 위에 도착하니, 의외의 인파가 코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게 보였다. 어림잡아도 100명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응원 구호 같은 제법 요란스러운 소음들이 터져 나오는 거며, 코트를 이리저리 뛰고 있는 열 명 남짓한 선수들을 보니 대충 상황이 짐작되었다. 소규모의 1대1이나 2대2 게임이 아니라 5대5 정규 시합이 벌어졌는가 보다. 그리고 그들 한가운데, 익숙하면서도 사무치게 그리운 얼굴이 보였다.
게임을 시작한 지 제법 된 모양으로, 연인의 낡디낡은 잿빛 반팔 티셔츠며 하늘색 트레이닝복 반바지는 물론, 보기 좋은 근육으로 뭉친 늠름한 몸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도 가로등 불빛에 비쳐 번들거리는 연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연인은 오른편 사이드에서 중앙으로 드리블을 해 가다 가드 하나를 제치고 막 레이업 슛을 던지고 있었다. 매끈하게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간 공은 바닥에 튕기며 치솟아 올랐고, 키 큰 청년 하나가 공을 낚아채 반대편 골대 쪽으로 달려 나갔다. 반대편 선수인 모양이었다. 공을 따라 나머지 선수들 무리가 굶주린 들개 떼처럼 우르르 청년을 뒤쫓았다. 집요한 승부 근성을 드러낸 아름다운 얼굴 또한 들개 무리 가운데 끼어 있었다.
게임은 이후에도 30분이 넘게 지속되었다. 연인은 게임 내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고, 슛을 던지고, 가드를 하고, 파이팅을 외쳐댔다. 열기로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가쁘게 숨을 고르며 게임에 몰입해, 사나운 수컷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오로지 이기는 것 외엔 일체의 생각을 끊어낸 듯한 연인처럼, 그를 바라보는 인환 또한 머릿속이 텅 비워졌다. 허기진 그리움과 고독도, 타들어가는 듯 갈급한 소유욕도, 애틋한 기쁨과 헛헛한 슬픔까지도, 모두 다 하얗게 잊혔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연인의 모습만이 인환의 전부가 되었다. 충분했다. 눈앞에 아름다운 연인이 있고, 그를 볼 수 있는 자신을 절실히 자각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인환은 충분히 지복(至福)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박빙의 접전 끝에 게임은 연인 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승리자들은 통렬하게 기뻐했고, 패자들은 울화통을 터트렸다. 구경꾼들은 그저 무더위를 날릴 정도로 좋은 구경을 했다며 흥겨워했다. 돈까지 걸린 내기였는지, 양팀 주장으로 보이는 청년 둘 사이에 제법 묵직한 지폐가 오고 가는 게 보였다. 인환의 지복도 그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손목시계를 살폈다. 9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대충 연인의 귀가 시간이었다. 돌아가야지. 함께 돌아가고 싶은 욕망도 가누기 힘들지만, 스토커 짓은 들키지 않을수록 좋다는 것을 잘 안다. 연인의 ‘뛰어서 10분’이 자신에겐 ‘걸어서 40분’이기도 하다. 연인에겐 이래저래 밉보일 짓인 거다. 단념은 빠르고 단호했다. 무작정 집에서 튀어나올 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스탠드 통로를 부지런히 가로질러 대운동장을 빠져나왔다. 농구 코트를 완전히 벗어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돌아본 시선의 끝에 인파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쪽으로 얼핏 시선을 돌린 연인을 본 것 같았다. 찰나 동안 시선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순간,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처럼 놀라버린 인환은 부리나케 고개를 돌리곤 대운동장을 벗어났다.
잠잠했던 심장이 가파르게 뛰고 있었다. 새삼 후끈한 열기가 전신으로 덮쳐드는 듯 착각이 이는 것은 비단 무더위 탓만은 아닐 터이다. 가소롭구나, 장인환. 친절해진 요즘이니 스토커 짓 따위로 화를 낼 것 같지 않다고? 겁낼 일만은 아니라고? 이렇게 필사적으로 빨리 걷고 있으면서? 혹시 진짜로 시선이 마주쳤던 게 아닌가, 몇 분 전의 기억을 자꾸만 플래시백하고 있으면서도? 무섭지? 솔직하게 말해봐, 장인환. 연인이 언제 돌변해 또 널 무시무시하게 할퀴게 될지 겁나는 거지?
올 때처럼 운 좋게 택시가 잡히면 좋을 텐데. 후문을 막 벗어나며 뇌까린 기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자리를 뜨는 건데. 택시를 못 잡으면 연인이 먼저 집에 도착하게 된다. 좀 전에 자신을 못 봤더라도 빈집에 도착하면 뭔가 미심쩍어할지도 모른다. 쫓기는 듯한 초조감은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을 몰아갔다.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일인데. 그냥 보고 싶어 따라왔다고 하면 뭐 어떤가. 어차피 자신은 그를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것을 연인도 안다.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로이지 병적인 스토커 짓은 아니란 얘기다. 잠깐씩 반항적으로 뇌까려도 보지만 역시 순간일 뿐이다. 불안한 망상은, 불쾌감을 숨기지도 않은 채 잔뜩 찌푸려진 연인의 한결같은 얼굴만 생중계해댈 뿐이다.
“으앗!”
퍽. 문득 외마디 신음 소리와 함께 오른편 어깨가 무언가에 심하게 부딪쳤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던 시도가 무색하게 심하게 휘청거리던 인환의 몸은 그대로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윽!”
“으왓……!”
“원영아!”
참기 힘들 정도의 고통과 충격이 하반신으로부터 올라오는 바람에 잠시 동안은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걷는 것엔 무리가 없었지만 직접적인 충격이 가해지는 것엔 여전히 속수무책인 엉덩이였나 보다. 한참 동안 끙끙거리며 통증을 삭히고 나서야 비로소 주의력이 되돌아왔다.
히스테릭한 여자의 항의와 함께 거칠게 토해지는 욕설의 퍼레이드가 이어지고 있었다. 두서없이 이어지는 젊은 남녀의 사나운 비난을 통해 인환은 자신과 부딪친 상대도 엉덩방아를 찧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불운하게도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도. 설상가상, 여자는 남자 파트너와 데이트 중인 아베크족인 모양이었다. 넘어진 여자보다 옆의 파트너가 인환을 때려죽일 기세로 닦아세우고 있었다. 인환보다 먼저 일어나 히스테리를 쏟아내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인환보단 충격이 덜한 듯했지만, 어쨌든 실수를 한 쪽은 인환 같았다. 그저 혼비백산 걸음을 빨리하는 통에 앞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걸었으니.
“……죄송……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씨팔, 죄송하다면 다야?! 절름발이면 절름발이답게 조심해서 걸어야지 어디다 대고 들이대, 들이대길?!”
얼굴이 타버릴 정도로 달아올랐다. 심장은 이젠 다른 이유로 쿵쿵 펌프질을 해댔다. 밤인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아직 인적이 드문 캠퍼스 안인 것도 다행이었다. 둘 다 아니라면 쪽 팔려 죽었을지도 몰랐다. 10미터쯤 앞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이쪽을 힐끔거리는 서너 명만 제외하면 구경꾼은 달리 없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다치진 않으신 거죠?”
“다치지 않아? 니가 의사야? 다치지 않았는지 다쳤는지 니가 봤어? 봤냐구?!”
“아씨, 치마가 찢어진 거 같애, 자기야∼∼.”
“……옷이 상한 거면 보, 보상을…….”
“아우, 짜증 나 죽겠네! 이게 얼마짜리인 줄이나 알아요, 당신?!”
“지금 보상이 문제야?! 씨팔, 그렇게 심하게 넘어졌는데 우리 원영이 뼈에 금이라도 갔으면 어쩔 거야?!”
어쩐지 덫에 걸린 듯한 낭패감이 일었다. 둘 모두 10대 후반이거나 고작해야 20대 중반쯤으로 보임에도 다짜고짜 반말을 해대는 것도 그렇고, 사방에다 대고 광고하듯 언성을 높이는 것도 그렇고, 고약한 쪽에 속하는 애송이들 같았다. 여자친구 앞이라고 더 오버하는 모양새의 남자 쪽도 한숨이 나고, 싸가지 태부족으로 보이는 여자애도 그 나물에 그 밥, 유유상종이었다. 쪽 팔림과 불쾌감이 어우러진 울화통이 순간순간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지만, 시비를 가려봐야 불쾌감만 더할 터였다. 인환은 어떻게든 서둘러 무마를 하고 자리를 뜨자고 마음을 굳혔다.
허둥지둥 바지 뒷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막 지갑을 꺼내 들려고 하던 찰나, 갑자기 눈앞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게 보였다. 커다란 낡은 농구화가 시야 가득 밟혀든 것도 순간이었다. 짙은 땀 냄새가 섞인 익숙한 체향이 코끝으로 훅 끼쳐들었다. 가파르게 세동을 거듭하던 심장이 한순간 덜컹 하고 급정거를 한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일순 호흡조차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뭐야…….”
나지막한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정수리 위에서 떨어졌다.
“……괜찮으십니까?”
갈무리된 분노가 차갑게 일렁이는 탁한 중저음이었다. 화가 났구나. 것도 트리플 A급이네. 성능 좋은 인환의 ‘사랑 더듬이’가 단숨에 연인의 상태를 짚어내었다.
“……위야…….”
지갑을 꺼내기 위해 뒤로 돌아가 있던 오른팔 위로 힘찬 악력이 느껴졌다. 단호하고 강렬한 손아귀 힘이었다. 반대편 팔까지 틀어잡히는가 싶던 인환의 몸은 아차 하는 사이 번쩍 들려 연인의 바운더리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괜찮으세요? 거기 말고 달리 아픔이 느껴지는 데는 없어요?”
“……이, 이봐……! 요…… 당신 이 절름발이랑 아는 사이…….”
“닥쳐. 박살 내기 전에.”
“무…… 무, 뭐?!!!”
가로등을 등진 탓에 짙은 음영이 진 이목구비가 위에서 인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까만 구슬처럼 번들거리는 야수의 동공에 통째로 삼켜지는 듯한 아찔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너희들 상습범인가?”
한동안 인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인환의 상태를 살피던 연인이 마주한 젊은 아베크족을 향해 섬뜩한 일갈을 던졌다. 연인의 무시무시한 살기에 주눅이 든 것은 인환만은 아니었던지(하긴 누군들 쉬이 태연할 수 있으랴!) 얼음땡처럼 굳은 채 이쪽 눈치만 살피고 있던 두 사람이 흠칫 몸을 떨었다.
“……사, 상습범이라니…… 당신 지금 무슨 말을…….”
“가당찮게도 그건 아닌 모양이로군. 내가 봤어. 따라오고 있었으니까. 너도 한눈팔다 부딪치지 않았나?”
“……그, 저기…….”
“쌍방 잘못인데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면 곤란하지. 더구나 다친 쪽은 네가 아니라 외려 이쪽 같은데, 안 그런가?”
“그걸 당신이……!”
“자…… 자기야, 그…… 그냥 가자…….”
“불만이면 경찰서 갈까? 가서 시비를 가리도록 하지. 저기, 처음부터 보고 있던 목격자들까지 있으니 마침 잘됐군. 어느 쪽이 더 실수를 했는지 확실히 가리도록 하지. 다친 쪽이 있으면 책임 소재도 따져봐야겠고.”
“자기야아∼∼. 난 괜찮으니깐 그냥 가자아∼∼. 응……?”
“칫, 재…… 재수가 없으려니깐 별…….”
단 몇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색이 된 두 남녀가 뛰다시피 캠퍼스 안쪽으로 사라져버리는 데는. 당연했다. 나름대로 이성적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듯 보였지만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때려 부숴버릴 것처럼 사나운 살기를 흩뿌리고 있는 연인의 흉악한 기세를. 드문 거구에 장신, 땀에 푹 젖은 운동복 차림은 기왕에도 조폭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이질적인 위화감까지 더해주고 있었다. 얼굴까지 일생 몇 번은 보기 힘들 초미남이니, 두 남녀가 넋이 반쯤 나간 것도 당연한 노릇이었다. 분노 게이지를 트리플 A급으로 높인 이상으로 연인이 지독한 인내심의 소유자인 것을 저들은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겨야 할 터이다.
“……아픈 데 없어요? 정말 괜찮으신 거죠?”
줄행랑을 친 어린 아베크족의 뒤태를 한동안 흉흉하게 노려보던 연인의 시선이 인환에게로 되돌아왔다. 재차 상태를 묻는 어조는 처음보단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수위는 B플러스급 정도? 다행이다. 살기가 사라진 것을 보니 인환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대답 좀 해주세요. 병원 안 가도 되겠습니까?”
재차 물음을 던지는 차분한 중저음에, 그제야 반사적으로 고개를 휘저었다.
“……아, 안 다쳤어. 하나도……. 그냥 엉덩방아를 찧어서 상처 난 데가 좀 아팠을 뿐이야.”
“……많이 놀라셨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떨고 있던 두 손이 어느새 연인의 커다란 손아귀 안에 감싸인 채 연인의 가슴 부근까지 치켜 올라가 있었다. 인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먹빛 동공이 잠깐 마주 쥔 손을 향해 내려갔다가 곧 얼굴로 되돌아왔다.
“……아니…… 별로, 그냥…….”
너 때문이야……. 쪽 팔리고 불쾌하긴 했지만 놀라지는 않았었다구. 네가 갑자기 나타나 무섭게 살기를 뿌려대니 이렇게 떨리는 거란 말이야……. 강렬한 연인의 시선에 사로잡힌 채 속으로 멍하니 덧붙였다. ……아니? 아직도 이렇게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려. 네가 다시 내게 화를 내고 상처를 줄까 봐 무섭거든…….
“……그러게 왜 막무가내로 뛰어가시는 겁니까? 다리도 불편하시면서. 질이 좋지 않은 애들한테 걸려 봉변까지 당하잖습니까. 제가 따라오지 않았으면 어쩌실 뻔했어요.”
한결 차분해진 바리톤이 가벼운 질책을 담아 덧붙였다. 애송이 커플에 대한 분노가 여전히 앙금처럼 남아 있긴 했으나, 인환에 대한 염려와 배려 또한 선명하게 느껴졌다. 안심이 되고 감동한 만큼 목울대 근처가 먹먹해졌다. ……상냥하잖아. 고마워라…… 아직도 여전히 다정하고 친절하네……. 잘됐다. 나와보길 잘했어……. 질겁했던 심장이 점차 안정을 찾고 있었다. 어쩐지 눈물이 고일 것만 같아 인환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연인의 시선을 피했다.
“……봐, 봤어……?”
“예.”
“……그랬구나……. 그냥 답답해서 산책 좀 할까 싶어 나왔는데…… 네 운동에 방해될까 봐 그랬지…….”
“끝낼 시간 됐는데요, 뭘.”
“……응.”
“…….”
대화가 끊기고도 연인은 한참 동안 묵묵히 인환의 얼굴을 굽어보았다. 인환으로서도 뭐라 더 대꾸할 말이 없어 두 사람은 마주 본 자세 그대로 한참을 조용히 서 있어야 했다. 속내를 알길 없는 시선이며, 마주 잡은 연인의 손아귀 힘에 점차 견디기 힘들 만큼 초조감이 일 무렵, 연인이 비로소 떨어져나갔다. 연인은 지나온 대운동장 방향으로 10여 미터쯤 걸어가더니 길가에 떨어져 있던 농구공을 주워 들고 인환에게 되돌아왔다.
연인이 멈춰 서기 전에 인환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연인도 나란히 인환과 보조를 맞추기 시작하자 자연스러운 귀로가 만들어졌다. 연인은 드리블을 하듯 간간이 공을 튕기기도 하며 잠자코 인환의 느린 걸음을 따르고 있었다. 표정은 담담하고 태도는 무심해 보였지만 인환을 향한 배려가 강하게 느껴졌다. 한 시간 전쯤, 인환이 막무가내로 아틀리에를 빠져나올 때만 해도 상상조차 못 한 귀갓길이었다. 성대 후문을 빠져나와 인접해 있던 버스 정류장이 보이자 인환은 잠시 발을 멈추고 확인하듯 연인을 바라보았다.
“선생님만 괜찮으시면 저도 상관없습니다. 답답해서 나오셨다면서요? 산책 삼아 그냥 걸어가죠.”
인환의 말없는 주저를 그대로 읽어낸 듯한 답변이 떨어졌다. 찜통더위 속 귀갓길이 10분에서 40분으로 늘어나도 상관이 없다니, 다시 한 번 목이 메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왜 이렇게 상냥하니? 묻고 싶었다. ……어째서 이렇게 잘해주는 거야, 요 며칠? 앞으로도 계속 잘해줄 거니? 친절하게 대해줄 거야? 몇 달 전 친구로서 날 좋아해주었던 것처럼? 아니면 그냥 잠시 변덕을 부려보고 있는 거니? 그도 아니면 이것도 그냥 화풀이의 일환이야? 네 몸을 다시 산 나를 아직 용서하지 못했잖아. 이렇게 잘해주다가 다시 상처를 주면 내가 몇 배는 더 아플 줄 알고 그러는 건 아니니……? 묻고 싶은 말들은 한도 끝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단 한 개의 질문도 입 밖으로 토해지지 못했다. 연인의 진심을 확인받는 게 무서웠다. 가냘픈 기대가 무참하게 박살이 날까 봐 무서웠다. 혹은 질문이 떨어진 그다음 순간 바로 연인의 변덕이 떨어질까 봐도.
연인의 황송한 배려를 묵묵히 감정을 삭이는 것으로 받아들인 후, 인환은 다시금 천천히 귀로에 올랐다. 연인만큼은 아니겠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인환의 온몸도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찜통더위 속 한여름 밤은 걷기에 친절한 날씨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인환은 그마저도 감사했다. 동네의 특성상 기왕에 인적이 드문 것도, 또 아름다운 단독 주택들과 빌라, 그리고 아기자기한 카페와 맛집들로 죽 이어진 아늑한 거리에도 감사했다. 퉁퉁퉁. 연인이 수시로 바닥에 공을 튕기는 젊음과 활력의 소리들도 고맙기 짝이 없었다.
“……시합 봤어. 돈내기 같은 것도 자주 하는 거야?”
성대 주변을 벗어나 양현관 방면으로 15분쯤 걸었을 무렵, 인환은 길게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조심스레 말을 걸어보았다. 그저 이렇게 고요한 감사가 충만한 가운데 함께 걷는 것만도 행복했지만, 수다를 떨면 조금 더 행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퉁퉁 아스팔트 위를 울리던 규칙적인 공 울음이 일순 중단되었다.
“아뇨.”
잠깐 인환 쪽을 힐끗 응시하던 연인이 담담하게 대꾸를 주었다. 연인의 손가락이 땀에 푹 젖은 채 이마 위에 가닥가닥 달라붙어 있던 머리를 귀찮은 듯 쓸어 올리는 게 보였다. 닦아도, 닦아도 새롭게 흘러내리는 땀방울들이 연인의 큼직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느릿하게 덧붙여지는 매혹적인 중저음은 꿈처럼 몽환적으로 들렸다.
“오늘 처음이었어요. 도발해온 녀석들이 전문 꾼들 같더군요. 여기 코트에서 몇 번 마주쳐 안면을 익힌 애들이 있었는데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랬구나…….”
“덕분에 20만 원 벌었죠.”
“2, 20만 원씩이나……?!”
“예. 판돈이 100만 원이나 하더라고요. 각자 나눠 가졌습니다.”
“……정말 꾼들이었나 보다.”
“예.”
“……질 때도 있을지 모르니까 너무 자주는…….”
“다신 안 할 겁니다. 오늘은 애들 부탁이 절박해서 어쩔 수가 없었거든요. 순진한 애들 꼬셔서 털어먹으려던 놈들도 재수 없었고요.”
“어어…….”
“도박은 중독성이 있죠. 저처럼 물욕이 강한 놈은 빠져들기 십상이라 오락 게임 이상은 안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그래? 정말?”
“예. 카드, 화투, 체스, 경마 등등 도박 성향이 들어간 놀이엔 다 환장을 하죠. 대부분 혼자 놀긴 하지만요.”
“……놀랐다. 너 도박 좋아하는 건 처음 알았어…….”
“찢어지게 가난한 청년 가장한텐 지극히 위험할 취미죠. 까딱 방심했다간 패가망신도 각오해야 할걸요?”
나지막하면서도 시니컬한 웃음이 뒤따랐다.
……기분이 좋은가 보네……. 참으로 보기 힘든 연인의 웃음이 믿어지지 않아, 인환은 거의 걸음을 멈추다시피 늘어져선 멍하니 연인의 프로필만 바라보았다. 비죽이 올라간 입꼬리며 부드럽게 휘는 선 굵은 눈매가 가슴이 저릴 만큼 아름다웠다. ……웃다니…… 웃다니…… 하느님, 얼마 만에 보는 연인의 미소란 말이냐……. 말도 꽤 많이 하잖아……? 그래. 말이 많아진 것도 다정해진 변화 가운데 하나였지……? 기뻐라…… 정말 몇 달 전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네……. 슬픔 같은 기쁨이, 체념 같은 설렘이, 찰랑찰랑 포말을 그리며 넋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연인의 얼굴도 곧 정면으로 돌아섰다. 느릿하게나마 계속 이어지던 두 사람의 걸음이 거의 동시에 멈춘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연인의 등 뒤로 서울성곽의 거무스름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있는 것이 보였다. 지극히 고색창연한 풍경 속에, 반대로 지극히 현대적인 모양새의 아름다운 청년이 그림처럼 녹아들어 있었다. 큼직큼직한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피부만 아니라면 그대로 조각이라 해도 믿어질 터였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몇 분이 흘렀다. 아니, 단지 몇 초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50센티쯤 떨어진 거리에서, 인환의 시선을 조이듯 끌어안은 채로 연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검푸르게 일렁이고 있는 깊은 눈빛은 괴로운 것도 같았고, 반대로 흥겨운 것도 같았으며, 어떻게 보면 불타오르는 격분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아마도 그 어떤 감정조차 전혀 읽을 수가 없다는 게 가장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저 어둡고 깊은 심연이 감추고 있음직한 그 어떤 것도 인환에겐 결코 허용되지 않을 터였다.
문득 연인의 손이 다가왔다. 농구공을 들고 있지 않았던 왼손이었다. 너무나 좋아하는 연인의 알싸한 체취가 좀 더 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폐부가 혼미한 기쁨으로 가늘게 헐떡였다. 잠시 인환의 정수리 위에 포개듯 손바닥을 겹치고 있던 손이 조심조심 머리카락 속을 헤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영문을 몰라 멍청히 서 있기만 하다가 곧 까닭을 알게 되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드러낸 땜통들 주변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손가락 끝을 통해서. 머리통 전체에 섬처럼 군락을 이루고 있는 그것이 연인의 손길 아래서 새삼 적나라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전히 빠집니까?”
나지막하게 떨어진 물음의 의미는 다소 뜬금없이 느껴졌다. 꿈처럼 비현실적인 순간을 지나온 덕분인 것 같았다. 약간 허스키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다정하게 들렸다. 또한, 몽환적인 기분을 더욱 부추기는 서글픈 지복과 다름없었다.
“……아니, 별로……. 요 며칠은 잘 안 빠지는 거 같아. 잘 모르겠지만…… 증상이 멈춘 것도 같고…….”
멍하니 반쯤 의식을 방기한 채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맞을 겁니다.”
땜통들을 더듬고 다니던 손길이 어린아이를 쓰다듬듯 정수리 위를 천천히 몇 번이나 계속해서 쓰다듬고 있었다. 다독이듯 혹은 애무하듯, 역시 눈물겨운 다정함이었다.
“빠졌던 부위들도 곧 제 모습을 찾게 될 테죠.”
일견 뜬금없는 예언에 의심조차 들지 않는 자신이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검푸르게 일렁이는 깊디깊은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믿지 못할 일이란 도무지 없을 것만 같았다. 최면…… 일까, 이것은? 세뇌일지도 모른다. 뭐든 아무래도 좋았다.
“이유, 묻지 않으십니까?”
“…….”
“……겁이 납니까?”
“…….”
끊임없이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이번엔 가슴 쪽으로 이동했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얇은 면 티는 무도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침입에 전혀 방패가 되지 못했다. 마치 진찰이라도 하는 듯 연인의 손바닥이 지그시 심장 부위를 누르고 있었다. 설핏 몸을 떨자, 연인이 또 조그맣게 웃음을 지었다.
“……무섭게 뛰고 있네요. 그렇게 겁이 나는 겁니까? 제가 도로 고약하게 변할까 봐?”
연인이 모르는 것이 도대체 있기는 한 걸까? 아니면 연인은 인환의 마음을 고스란히 비춰주는 초능력 거울이라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변하지 않을게요. 선생님을 완전히 떠나기 전까지는 절대.”
“…….”
“……지쳤습니다.”
“…….”
“지쳤지요, 저도. 선생님을 계속 미워하는 일에.”
“…….”
“선생님을 계속 상처 입히곤 하는 악랄한 짓거리들에.”
“…….”
“그래선지도 몰라요. 아니, 그래서일 겁니다. 그만두고 싶어진 건.”
“…….”
“……어차피 한동안은 선생님과 같은 시간을 살아야겠죠. 그게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혹은 그 이상이 될지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무슨 패악을 떤대도 그 상황이 변하는 일은 없겠죠. 그럴 바에야 서로를 힘들게 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
“선생님을 괴롭힌다고 제 속이 풀리지도, 또 편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아니, 편해지기는커녕 더 끔찍해지기만 하더군요.”
“…….”
“친구로서 좋아했던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까요.”
“…….”
“아시죠? 저, 선생님 참 많이 좋아했습니다.”
“…….”
한동안 심장 근처를 누르고 있던 연인의 왼손이 도로 머리로 올라왔다.
투웅…….
연인의 오른손과 허리춤 사이에 끼어 있던 농구공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연인의 오른손마저 인환의 머리 위로 다가든 덕분이었다.
퉁. 퉁. 퉁. 투둥…….
바닥에 떨어진 공은 몇 번을 튀어 오르다 내리막길로 굴러갔다. 무한정 굴러 내려갈 것 같아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은행나무 가로수 주변을 둘러싼 철제 둔덕에 맞아 장렬하게 전진을 멈췄다.
“그 마음만큼만 다시 선생님께 애정을 드리겠습니다.”
“…….”
“예전처럼. 솔직하게 마음 가는 대로 할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겁내지 마세요. 의심하지도 마시구요. 선생님과 완전히 헤어지기 전까진 제가 다시금 태도를 바꾸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약속드릴게요.”
“…….”
아마도 약속은 진심일 것이다. 빈말은 단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연인이니 거의 틀림이 없겠지.
아아. 아아, 젠장. 하느님, 젠장. 마침내 용서가 떨어졌다. 간절하다 못해 거의 포기해버렸던 자비로운 신탁이.
다시금 그 귀한 우정을 되돌려주겠노라고. 필요 이상의 상처는 더는 주지 않겠노라고.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저 이별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자신의 착각일까 봐, 혹은 일시적 변덕에 지나지 않을까 무섭고 무서워서 차마 물어보지 못했던 변화의 이유를, 연인은 그런 자신의 나약한 마음조차 보듬어 기꺼이 펼쳐 보여줬다. 하느님이었다. 차마 염치가 없어 꿈도 꾸지 못한, 귀하디귀한 용서였다.
“별로 기뻐하시진 않네요.”
“……. (아니, 기뻐.)”
“압니다. 선생님 입장에선 그리 달가울 일도 아니겠죠.”
“……. (아니라니깐, 위야. 나 지금 행복해. 무척 많이 행복한 거 같아.)”
“그래도 이젠 서로 편해져요, 선생님. 남은 우리 시간…… 편하게 배려해주고, 편하게 즐기고, 또 편하게 섹스 해요. 사이좋은 섹스 파트너처럼요.”
“…….”
“감정적인 문제는 서로 깊이 개입하지 말도록 하고요.”
“…….”
땜통투성이 머리카락 속을 피아니스트의 아름다운 두 손이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오래전 어디선가 길을 잃어버린 듯, 애잔하고 허허로운 손길이었다. 기쁜 듯 슬픈 것은 인환 자신일 텐데 어쩐지 연인의 손이 더 기뻐하는 듯했다. 더 슬퍼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위로하듯 마주 안아주었다. 눈을 꼭 감고서…… 연인의 하얀 두 손 위에 자신의 것을 포갠 채 하염없이 어루만져주었다. 조물조물, 감미로운 자장가처럼.
……슬퍼하지 마세요…… 절망하지도 마요…… 더 이상 아픔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마냥 기뻐하기만 하세요…….
마냥 상냥하게 위로를 얹어주었다. 지금 이 순간, 스스로에게 들려주고픈 가장 절실한 위로를.
……사랑만을 생각해요…… 허락된 사랑이 저기 저렇게 예쁘게 남아 있잖아요…… 그럼요…… 그거면 충분하지요…… 그대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랍니다…….
“……지 마…….”
너무나 낮아서 거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연인의 중얼거림이 바람결에 실려왔다.
“……대 용서…… 지 말…….”
멍하니 귀를 기울여보지만, 되풀이해 떨어진 다음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은 한가지였다. 조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자연스레 눈을 뜨자 깊은 음영이 드리운 아름다운 얼굴이 코앞까지 내려와 있었다. 여전히 검푸르게 일렁이고 있는 깊은 눈빛은 괴로운 것도 같았고, 또는 흥겨운 것도 같았으며, 어떻게 보면 불타오르는 격분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여전히. 여전히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많이 녹아 있는 것 같은 아픈 눈이었다. 또 한참 동안 그것에 사로잡힌 채 멍하니 넋을 놓았다.
문득 인환의 양쪽 뺨과 귀를 덮치듯 감싸 쥐고 있던 연인의 커다란 양손에 좀 더 힘이 가해졌다. 손의 의도에 따라 고개가 약간 옆으로 기우는 것도 느껴졌다. ……키스를 하려는 모양이네……. 멍해진 머리가 느릿하게 경고를 주고 있었다. ……걱정이네…… 길거리 한복판인데…… 아직 사람들이 심심찮게 오가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아, 이건 제대로 알아듣겠다.
“……괜찮습니다. 눈 감으세요.”
이것도.
“눈 감아요.”
또 최면인가? 아니, 세뇌에 가깝다니까. 에이, 몰라, 몰라. 모르겠다구. 연인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반자동으로 눈이 감기자 촉촉하고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와 닿았다. 꼬물꼬물 입안까지 밀고 들어온 말캉한 것은 좀 더 촉촉하고 힘이 넘쳤다. 빈틈없이 맞물린 서로의 입술 끝으로 침이 흘러내렸다. 입안 깊숙한 곳에서 연인의 혀가 일대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점입가경이었다. 와락. 상반신이 느닷없이 연인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강철처럼 단단한 팔 근육이 인환을 힘껏 부둥켜안고 있었다. 허리와 등줄기로 저릿한 아픔이 달려 나갔다.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연인의 체온이 온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청결한 비누 냄새와 아릿한 땀 냄새, 그리고 퇴폐적인 사향 내음이 절묘하게 뒤섞인 연인의 체취 또한 한가지였다. 마냥 그립고 또 그리웠다. 자꾸만 목이 메었다. 다행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할 것 같은 키스였다.
가장 따듯했을지도 모를 ‘친구’였다.
포옹은, 그래서 마냥 아프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