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1991년 10월. 문위(文偉)
“……아픕니까?”
귓불을 터치하듯 가볍게 한 번 훑고, 귓바퀴 안쪽의 복잡한 굴곡을 질척하게 핥아 올렸다. 타액을 가득 바르며 거듭 음란하게 혀를 굴려본다.
“……아픈가요……? 여전히?”
귓구멍 속에 입술을 아예 틀어박듯이 지분거리며 되풀이해 속삭이자 그가 힘겹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칠게 날숨을 뱉어낸다. 마무리로 혀끝을 세워 귓구멍 깊숙이 찌르니, 거칠게 할딱이며 물고기처럼 파드득 몸을 뒤틀었다. 덕분에 막 연결을 끝낸 페니스가 둔중하게 꿈틀거렸고, 그 자극은 차지게 달라붙어 있는 내벽을 통해 서로의 전신으로까지 퍼져나갔다.
“……하아…… 흣……! 그…… 만…….”
창 밖으로 푸르스름한 박명이 밟혀들고 있다. 이른 새벽의 침실은 비릿한 정액 냄새와 매캐한 살 냄새로 가득하다. 말라붙은 정액과 땀 얼룩이 낭자한 시트는 잔뜩 구겨지고 흐트러진 채 간밤 정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증거하고 있다. 모두가 지극히 음란하고 추악해서 썩 마음에 드는 배경 설정이다. 불결할수록 도착적인 쾌락은 배가 된다. 그와의 거듭되는 정사를 통해 얼마 전에야 겨우 터득할 수 있었던 귀한 진리이다.
“……야해…… 선생님 여기…… 당신…….”
끊임없는 괴롭힘 끝에 벌겋게 부어오른 젖꼭지를 말과 눈짓으로 희롱해본다. 수치스러운지 움찔, 굳어드는 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엽다. 굵은 귀두 끝으로 안쪽 전립선 근처를 한 번 날카롭게 긁어 올렸다. 크게 앓는 소리와 더불어 가느다란 허리가 관능적으로 휜다. 위의 어깨를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던 손가락이 쾌감을 못 견디고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고개까지 한껏 뒤로 젖힌 때문에 귀여운 목울대가 자그마한 방울처럼 움푹 도드라져 보인다. 목구멍이 칼칼해질 정도로 자극적인 풍경이다. 안에 박혀 있는 음경에 더욱더 피가 몰리고, 한계까지 커진 크기 탓에 짜릿한 압박감 또한 배가된다. 씹어 먹히는 것처럼 내벽이 조여들고 있다. 이대로 끊어져버린대도 좋겠다고 뇌까린다. 지독한 쾌감에 순식간에 눈앞이 빨개진다. 입안으로 가득 침이 고이며 난폭한 사정감이 엄습한다. 안 된다. 아직은 갈 수 없다. 금방이라도 사납게 돌진하고픈 욕구를 위는 필사적으로 참아낸다.
“……이러면 조금 덜 아프죠……?”
진동하듯 잘게 내벽을 비벼댈 뿐 가만히 박고서 재차 그를 슬쩍 떠본다. 부러 잔뜩 갈라져 나오게 목소리를 까는 것은 좀 더 그의 퇴폐를 자극해보려는 야비한 술책일 뿐이다. 위 역시 자잘한 쾌락의 늪에 함몰된 상태지만, 꼭대기에 오르려면 아직 한참을 더 달려야 한다. 좀 더 오래 박고 싶다. 좀 더 오래…… 한 몸이고 싶은 절절한 갈증이다. 그러자면 되도록 함께 도달하는 편이 좋다. 일단 서로 템포부터 맞춰놓아야 그다음의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니까.
조루인가 의심이 될 만큼 지나치게 예민했던 처음 몇 달이 무색하다. 요즘의 그는 그때처럼 빠르게 가지 않는다. 위 자신이 한 번 할 동안 두세 번이 고작이다. 처음과 비교하면 일취월장한 지구력이지만 체력은 그때의 3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다. 몸이 많이 약해져서일까? 아니면 마음을 지나치게 다친 탓인가? 그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 책임이 있을 터다.
심장 언저리로 익숙한 아픔이 달려 나간다. 물론 무시한다. 자신 안의 사랑을 죽이려면 먼저 양심부터 말살해야만 한다.
“……이제 움직일까요, 선생님?”
물론 입에 발린 소리일 뿐이다. 아직은 생각 없다. 좀 더 참을 수 있을 거다. 참을수록 오래 박는다. 오래…… 아주 오래 그의 몸 안에 머물 수 있다.
“……좋아요……?”
“……흑…… 흐앙…….”
“……좋죠, 여기……?”
“……흐앗! 윽, 흑, 아악……!”
잘게 비비고, 때론 느리게 원을 그리며 내벽을 꾹꾹 눌러댄다. 모두 전립선을 제외한 주변부들일 뿐이지만, 애를 태울수록 쾌감의 기대치도 높아갈 것이다. 높은 기대치 끝에 올 오르가슴엔 그만큼 극상의 쾌락이 따른다는 것을 모르진 않겠지. 요즘 제대로 길을 들이고 있는 덕분에 숙맥인 그도 침대 위에서만큼은 제법 교태가 흐르고 있지 않는가. 짐승의 쾌락을 아는 자의 천박한 교태가.
“……여기는 좀 더 해드릴까요? 쫙쫙 조여드는 게 선생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탁탁탁. 느린 리듬으로 어느 한 지점을 집중적으로 깊게 박다가 반쯤 빼기를 반복한다. 힘 있게 허리를 쳐댈수록 달라붙은 점막 사이로 질척하게 살 부딪는 소리가 요란하다. 탁탁탁. 타당. 팽팽하게 굳어진 고환으로 마침표를 찍듯 그의 회음부를 치대며 애무한다. 억눌린 그의 신음은 마침내 잔뜩 고양된 짐승의 교성으로 돌변한다. 안쪽을 사납게 긁으며 찍어 누를 때마다 그의 발가락이 잔뜩 오그라들며 경련한다. 자신의 등을 헤집고 있는 그의 손가락이 고양이처럼 손톱을 세우고 있다. 점점 이성을 잃어간다는 의미다. 꽤나 만족스럽다. 마른 입술을 축이며 비릿하게 웃음을 머금어본다. 좀 더 속도를 내볼까?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아직 광란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움켜쥐고 있던 가는 허리를 고쳐 잡고 좀 더 피치를 올렸다. 탁탁탁. 흐앙, 흐앙. 탁탁. 흐앙. 앙. 탁탁탁. 헉. 훗. 웃. 흐악……. 짓뭉개듯 틀어박을 때마다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귀여운 대꾸가 사랑스럽다. 미치도록 사랑스럽다.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처럼 좋아서 견딜 수가 없다. 아아, 섹스가 이토록이나 기분 좋은 것이었다니!
양쪽 허리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좀 더 아래로 내린다. 무릎팍 안쪽을 태울 듯 애무하다 마침내 양발목을 움켜쥔다. 치부가 드러나도록 양옆으로 활짝 벌리자 아래에 깔린 그가 흐느끼며 애원을 보낸다. ……싫어……. 흑. 싫어. 제발. 위야……. 망할. 아직도 수치심이 남아 있었던가? 물론 봐주지 않는다. 그럴 일은 절대 없다. 그럴수록 더 넓게 벌려 무참한 시선의 능욕을 계속한다. 찢어질 듯 벌어진 연약한 주름 사이로 흠뻑 젖은 자신의 흉기가 힘차게 넘나들고 있는 게 보인다. 핏줄과 힘줄이 크게 도드라진 채 검붉게 빛나고 있는 페니스. 지극히 추악하고 더럽고 무도한 욕망. 시커먼 음모의 숲 한가운데에서 패왕처럼 우뚝 치솟아 있는 저 뻔뻔스러움이 위는 썩 마음에 든다. 가차 없이 연인을 유린하는 흉포함도, 인간의 존엄 따윈 애저녁에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은 짐승스러움도. 연인의 구멍이란 구멍엔 전부 다 박아 넣을 수 있는 마법 또한 가능하다면, 온몸이 전부 다 물건이 돼서 요철처럼 연인과 꽉 맞물릴 텐데. 그러면 결합은 더욱더 굳건해지겠지. 세상의 그 어떤 것들로도 절대 서로를 갈라놓을 수 없도록.
“……하아…… 위…… 위야……! 흑……!”
느리고 깊게, 느리고 깊게. 빠르고 얕게, 빠르고 얕게. 마침내 크게 빙글 휘돌려 가차 없이 할퀴곤 거칠게 빠져나온다. 그러곤 다시 느리고 깊게. 빠르고 얕게. 밀리고 밀린 연인은 이제 거의 제정신이 아니다.
“흑! 흑! 흐앙! 앙앙…… 흐아앗, 거기!!! 흐앗!!! 제발…….”
마침내 애원이 떨어졌다. ‘어째서 거길 찔러주지 않아?’ 하고, 흐느끼듯 투정을 부리기 시작한다. 굴복은 빠르고, 교태는 앙큼스러워졌다. 그제보단 어제가, 어제보단 오늘이. 점점 더 나아지겠지만 이미 세상 최고의 화냥년이다. 나만의 사랑스러운 요부. 쿡쿡.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일견 건전한 성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그를 속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은근히,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짝살짝 사기를 치고 있는 요즘의 자신이다. 무분별하게 자주 안을 필요는 없다(물론 수시로 안고 싶어 미치는 이쪽 사정은 논외로 치고). 사랑하거나 집착하는 속내를 내비쳐서도 절대 안 된다. 별로 내키지 않는 척, 마지못해 몸을 내어주는 척, 우선 가면을 쓴다. 그가 착각하고 있는 대로, 결벽증에 섹스 혐오증을 부록으로 단 어느 가련한 남창처럼. 완벽하게 속아 추호의 의심도 세우지 않을 때까지 연막을 친 다음, 마침내 단숨에 낚아채 먹어치운다. 물론 막상 먹어치울 땐 인정사정 안 봐주고 미치게 만들어야 하지. 하늘 아래 이런 세계가 있었나, 얼간이처럼 홀랑 넋이 빠지도록. 치명적 중독. 육욕의 바다. 미친 듯한 육욕 외엔 다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천천히 독을 주입하는 거다. 감히 자신 이외의 개새끼들엔 차마 욕망을 품을 엄두조차 안 나도록. 아무렴. 철저하게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거지. 자신이 버리기 전엔 죽어도 자신을 먼저 떠날 수 없도록.
―……세혁 선배랑 섹스 해보려고 했었어. 그래보려고 했었어…….
씨팔. 싫은 기억이 일순 눈앞을 벌겋게 태운다. 꿈에라도 다신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기억.
―……세혁 선배가 아니라도…… 다른 모르는 남자랑 가볍게 섹스하고…… 네 말대로 난잡한…… 아무하고나 잘 수 있는 그런 몸뚱이가…… 창녀가 되어보려고…….
씨팔. 씨팔. 씨팔. 개소리. 웃기는 소리. 넌 나만의 창녀야. 나 이외엔 아무도 널 못 가져. 알아? 내가 질려서 버릴 때까진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아…….
정말로 자신은 미친 것인지도 모른다. 환장할 탐욕과 메말라 쩍쩍 갈라지고 있는 황폐한 갈증은 자신을 점점 더 도착적으로 몰아갈 뿐이다.
막장까지 가버리고 나면 이 지독한 허기가 가라앉을까? 순간순간 막다른 벼랑에 떠밀리고 있는 듯한 초조감이 사라져버릴까? 갖고 싶어서, 실은 가지고 싶어 미치겠어서, 지랄 발광을 떨어대는 광기가 사라지게 될까……?
물론, 단 1퍼센트의 가능성만 있다 해도 자신은 간다. 갖은 욕망과 쾌락에 짓무르고 썩어들어가서 더 이상 욕망을 품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면. 종내는 쿨하게, 한편 시원섭섭하게, 기꺼이 그를 버릴 수만 있게 된다면. 망각의 저편으로 그를 뻥 차버릴 수 있게만 된다면. 포르노가 되고, 변태가 되고, 도착이 되고, 궁극엔 막장으로 떨어져 더 이상 인간이라 칭할 수 없는 축귀로 화한다 해도…… 그래, 간다. 자신은 간다. 물론 결코 혼자만 망가질 생각 또한 추호도 없는 자신이다.
자신이 망가진다면 자신의 것인 그 역시 망가져야만 한다. 그가 완벽히 망가져야 자신이 산다. 그가 갈기갈기 찢어발겨져야만 자신은 그가 펼친 그물 속에서 비로소 빠져나올 수 있게 되리라. 양심이라구? 하, 양심. 그따윈 통렬하게 찢어발겨주겠다. 애초부터 자신은 돼먹지 못한 말종이므로.
탁탁탁…… 탁탁…… 탕탁…… 타앙…… 탁탁탁…….
“……제발…… 흐윽! 윽! 흐아앙……!”
아직이야. 아직이야, 내 사랑. 내 귀여운 창녀. 내 성스러운 아내여. 조금만 더 참아봐…….
“……하아…… 아, 아아아……! 흑……! 위…… 위야아…….”
애절하고 교태 서린 신음에 심장이 저릿하다. 참기 힘들 지경으로 몸이 비비 꼬이는 것만 같다. 온몸의 혈관이 열린다. 더운 열기가 가닥가닥 퍼진 신경줄을 타고 극도의 쾌락을 부추긴다. 당장이라도 연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을 만큼. 그러나 역시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독기를 부려본다. 연인이 간절히 원하고 있는 전립선은 그저 지그시 문질러주기만 한다. 힘차게 공격하는 지점은 여전히 그 옆. 혹은 그 아래. 그리고 그 위. 갈 듯 가지 못하게 아슬아슬한 경계를 유지하며 극도의 자극으로 몰아붙인다. 스스로도 견디기 힘들어지면 잠시 멈춰 코끝을 연인의 목덜미에 짓이기듯이 박고 달큰한 내음을 흠씬 들이마신다. 어물어물 흐느끼는 입술을 핥고, 빨고, 개처럼 깨물어도 본다. 우아한 신사의 키스는 사절이다. 될수록 거칠게, 아프게, 사납게……. 경동맥 부근에 이빨을 세우자, 욕구 불만으로 경련을 일으키다시피 하는 내벽의 움직임이 선연하다. 온갖 신경이 몰려 있는 귀두 부위로 찌릿찌릿한 쾌락이 몰려든다. 지진이 오는 것처럼 땅이 요동을 친다. 오르가슴의 전조. 아아, 한계다.
“……위…… 위……! 위위!!!”
응……. 응, 그래, 내 사랑. 내 귀여운 새끼고양이……. 자, 가자…… 이제 그만 함께 달려가보자.
연인의 허리를 단단히 고쳐 쥐고 이를 악물었다. 거대한 해일이 밀려온다. 압도적인 풍차와 마주 선 돈키호테처럼 눈을 크게 부릅떴다.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찔러 넣자 아래 깔린 몸뚱이가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한껏 치솟은 마른 다리가 풍랑에 휩쓸린 난파선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페니스를 물어뜯고 있던 속살이 파도처럼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예고된 반응. 예고된 지배. 완벽히 연인을 소유하고 있다는 몸서리쳐지는 기쁨이 온 넋을 강타했다. 관자놀이께가 붉게 물들며 혈관이란 혈관이 모조리 곤두섰다. 제대로 된 의식은 거기까지였다. 한계를 끊어낸 야수는 미친 듯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가속이 붙은 두 몸뚱이가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땅 아래 세상이 점점 아득해지고 있었다. 산산이 부서지는 넋을 얼핏 의식한 순간, 허리 아래가 요동치며 격렬한 오르가슴이 닥쳤다. 자신의 전부가 연인의 몸속으로 무섭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블랙홀이었다. 극한의 쾌감에 함몰되지 않도록, 위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어, 엄마. 어, 이따 꼭 들를게. 미안…… 나 아침잠 많은 거 알잖아. 용서해주라…… 에이, 미역국이야 데우면 되잖아. 헤헤, 엄마 미역국은 몇 번이나 데워도 꿀맛이기만 한걸…….”
덜 마른 머리카락을 털며 욕실을 나서자 잔뜩 갈라진 허스키 보이스가 기분 좋게 귀청을 자극한다. 지난밤 내내, 그리고 이른 새벽까지 실컷 괴롭힌 보람이 있다. 싱긋. 불한당처럼 입술 끝이 비열하게 올라가는 것을 필사적인 인내로 참아낸다. 귀여운 시선이 흠칫해선 쪼르르 이쪽을 향했기 때문이다.
아담하게 마른 사내의 나신이 침대 헤드쿠션 위로 반쯤 기대 있다. 무르익은 가을, 유리창 안으로 비쳐든 황금빛 아침 햇살이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카락 위에서 찬란히 부서지고 있다. 시트 위로 반쯤 드러나 있는 알몸의 상반신엔 지난밤 위가 만든 키스마크들로 온통 도배가 돼 있다시피 하다.
중간고사 기간인 지난 2주 동안 금욕을 했었다. 물론 시험은 그저 핑계일 뿐이고, 치밀하게 계산된 사육의 일환이었을 따름이다. 그를 적절히 조정하고 속여 넘기면서 타락한 욕망을 취하는 것. 시험 마지막 날이었던 어젯밤, 위는 그간 참고 참았던 야수를 마음껏 풀어헤쳤다.
막 잠에서 깬 탓인지 전화를 받는 폼이 영 어설프고 아방하게 보인다. 마냥 여리고 순수한 것이 소년은커녕 서너 살배기 아가라 해도 믿어질 정도다. 간밤과 오늘 새벽, 자신의 품 안에서 자지러지던 음란한 창녀의 자취는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래서겠지. 저 기묘한 언밸런스가 더더욱 치명적으로 자신을 매혹시키곤 하는 거겠지.
시선이 마주친다. 상냥한 친구의 가면을 재빨리 뒤집어쓰곤 슬쩍 미소를 보내준다. 돌아온 답례는 수줍은 듯 눈길을 돌리는 소리 없는 웃음. 곧 기뻐서 못 참겠다는 듯 입까지 크게 벌어지는 ‘헤벌레’로 진화한다. 어찌나 활짝 웃는지, 좍좍 얼굴 근육이 풀어지는 소리까지 다 들리는 듯하다. 또 자신의 미끈한 면상에 홀린 모양인지 헤죽헤죽 팔불출 웃음을 달고 정신없이 훔쳐보기 바쁘다. 어머니와 통화 중인 것 같은데 도무지 조심성 제로인 내 고양이다. 통화는 건성이고, 그저 온 의식과 시선이 위 자신에게로만 향해 있는 것을 알겠다. 쯧쯧, 저래서야. 게이라는 것을 필사적으로 숨겨야 할 유일한 가족이라면서…….
“……어…… 어? 어어! 물론이지. 듣고 있어, 엄마. 어. 어, 그래. 얼른 일어나 씻고 준비할게. 어? 글쎄…… 한 12시쯤? 에이, 지금이 10시인데 어떻게 11시까지 가. 씻고 준비하려면 한 시간 가지고도 모자란단 말이야. 에이, 씨. 별로 멋 안 부린다니까, 요즘엔……?”
조곤조곤 되풀이되는 허스키 보이스에서 사랑스러운 애교가 뚝뚝 떨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른이 코앞인 사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무심히 옷을 갈아입는 척, 귀청을 곤두세운다. 의혹이 깃든 시선을 고요히 갈무리한 채 내 고양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는다. 대화 내용 중의 무언가가 걸리는 까닭이다. 귀여운 말투에 간질간질 아랫배가 당기고, 배시시 사랑스러운 웃음에 온통 넋이 나갈 것 같아도 뇌리 한구석은 싸늘하게 제 기능을 유지하고 있단 증거다. 그 점이야말로 연인과 자신의 차이. 이 치명적 연애 게임에서 자신이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어, 응. 12시까진 꼭 갈게. 나 아직 아침도 안 먹었걸랑. 가서 엄마 집 식탁을 환상적으로 초토화시켜주고 오지, 모. 흐흐, 알았으. 오케바리. 끊어, 엄마.”
통화가 끝났다.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슬슬 이쪽 눈치를 살피며 쭉 기지개를 켜는 사랑스러운 몸이 보인다. 모르는 척, 갈아입은 운동복을 들고 다용도실로 가져간다. 세탁기 불림 버튼을 누른 후 거실로 나오자, 바스 가운을 걸친 그가 침실 문을 비집고 걸어 나오는 게 보인다. 새벽 정사 후, 침대 시트를 갈고 기진해 잠든 그를 씻긴 이도 자신이다. 딱히 샤워까진 필요치 않은 스스로의 상태를 자각한 모양이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식탁 위에 놓는다. 격렬한 운동 후라 목도 마르고 약간 허기가 느껴진 때문이다. 그를 위해 남겨둔 상차림을 치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그가 평소처럼 식탁으로 다가와 맞은편에 앉는다. 겨우 그와 자신의 스케줄 타임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새벽에 그를 씻기고 나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혼자 밥을 먹은 뒤에 근처 고등학교 운동장까지 마라톤을 뛰고 온 자신이다. 땀범벅인 몸을 다시금 씻어 내리고 등교 준비를 마칠 때까지도 그는 침대 위에서 잠에 취해 있었다. 서로 잠이 드는 시점은 비슷한 것 같은데 타임 스케줄은 대부분 오늘처럼 어긋나기 일쑤다.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한, 식사도 수면도 놀이도 섹스도 모두 함께 하고픈데 도무지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 게으른 연인이다. 체력이 자신에게 한참을 못 미치는 연인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토록 사랑한다면서 갈급한 쪽은 오히려 자신인 현실이 우습다. 물론 연인은 상상조차 못 하겠지.
2년이다. 2년을 기한으로 정했다. 2년. 730일. 17520시간. 그 안에 승부를 보는 것으로. 그 시간 안에서 실컷 탐하고, 실컷 사랑하고, 실컷 망가뜨린다. 그 시간 안에서 사랑의 싹이란 싹은 모조리 뿌리째 뽑아 다 태워버릴 테다. 그래. 그러곤 떠나야지. 미련 없이. 연인을 버리고 미련 없이 떠나야지…….
“댁에 가신다면서요? 가셔서 식사 하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식어버린 콩나물국을 한 모금 떠먹고 있는 그를 굽어보며 슬쩍 포석을 깔아보는 자신이다. 미미한 홍조가 눈가에 떠오르는 게 보인다.
“……어, 그럴 거긴 한데…… 그래도 네가 준비해준 음식들인데 아깝잖아. 맛이라도 보고 가야지.”
이어 퍼지는 쑥스러운 웃음. 민망한지 시선을 내린 채 남은 반찬도 골고루 한 번씩 집어먹고 있다. 모르는 척, 자신은 오만하게 마주 앉아 1리터들이 우유팩을 말끔히 비워내기만 했다.
“무슨 특별한 날인가 보죠? 어머님께서 아침부터 댁에 부르시는 걸 보니.”
이미 완전히 눈치를 깠지만 역시 모르는 체해버리는 자신이다.
10월 24일.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오늘은 그의 생일이리라.
친구로서 가벼이 축하 인사나 건네주기만 해도 눈앞의 착한 연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좋아할 것이다. 그저 자신이 그의 생일을 알아주었다는 그 사실 하나에 감동해서는. 그러나 위로서는 그러고 싶지 않다. 친구의 애정을 주겠노라는 거짓말로 히스테리 상태의 그를 겨우 진정시키긴 했지만(실로 기대 이상의 효과였다! 꽃밭을 이루던 머릿속의 땜통들이 일거에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그토록 불안정해 보였던 연인의 심리 상태가 확연히 안정을 찾았다!), 남은 2년을 그와 친구로 지내고픈 마음은 역시 눈곱만큼도 없다. 친구인 척 연기하되, 실은 연인으로서 그의 모든 시간을 공유할 작정을 굳히지 않았는가. 그래서 쓰임에 맞게 연인을 철저히 길들이기로. 사육하기로. 아무렴. 누가 뭐래도 철저하게 그를 소유할 것이다. 자신의 연인으로서. 신부로서. 아내로서. 아니, 그 모든 친밀한 관계를 초월한 최상의 어떤 존재로서. 물론 그는 꿈에도 모르도록 철두철미하게 속여 넘긴 채로. 그렇지. 실수는 단 한 번이면 족하다.
게이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는, 느닷없이 닥친 교통사고처럼 충격적인 현실과 마주하는 바람에 자신은 잠시 핀이 나갔었다. 그저 스스로의 감정을 추스르는 것에만 급급한 나머지 하마터면 연인을 아주 망가트릴 뻔했다. 물론, 자신이 버린 후에 망가지는 것은 상관없다. 기왕에 버린 후라면 자신에겐 전혀 대미지가 없을 터이므로. 그러나 자신이 버리기도 전에, 자신의 온 마음이 연인으로 가득 차 있는 현시점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아직은 한 몸이다. 공동 운명체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서로 찰싹 달라붙어 있는 마당에 자신이라고 온전할 리가 없다. 지금 연인이 망가지면 자신 또한 망가진다. 미친다. 발광한다. 파멸이다. 아무렴. 이번 독사 개새끼의 일을 통해서 절절히 깨닫지 않았는가. 만약 한계 수위를 넘어 연인이 결국 절망했다면. 그날 정말로 연인이 독사 새끼와 섹스를 해버렸다면! 윽. 젠장. 상상만 해도 심장이 잡아 찢겨나가는 것만 같다. 젠장. 젠장. 빌어먹을. 두고 봐라. 다신 그따위 어리석은 헛짓은 안 한다. 결코 다시는……!
“……특별하긴 뭘…… 그냥 얼굴 보고 싶으시니까 그러는 거지. 요즘 엄마한테 좀 많이 무심했거든…….”
잠시 곤란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며 떨어진 대꾸다. 엎드려 절 받는 건 기쁘지 않다? 아니지. 괜히 부담이라도 주게 될까 걱정이 든 때문일 게다.
“근데 어제 중간고사 끝났다며? 오늘 벌써 수업 있는 거야?”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는 잔머리가 귀여워 입술을 깨문다. 저절로 실실 퍼지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다. 편해지자고 했지만, 편하게 섹스 파트너로서의 우정을 나누자 했지만, 편해지는 것은 연인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너무 자주 웃는 팔불출 웃음은 그래서 논외다. 사랑에 빠진 얼간이 그대로 감정이 질질 새어나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스터디 모임이 있어서요.”
가벼운 대꾸로 연인의 잔머리에 동조했다. 마지막 우유 한 모금을 꿀꺽 삼킨 채 지그시 시선을 주자, 또 좀 빨개지는 귀여운 얼굴이다. 바스 가운 틈으로 점점이 붉은 자국이 찍힌 가슴팍이 보인다. 모양새가 활짝 만개한 연꽃 같았다.
“어어, 그렇구나…… 그럼 일찍 들어오겠네?”
“아마도. 뒤풀이를 하긴 할 테지만, 하더라도 전 일찍 빠져나올 생각입니다. 고척동 집에 들러 동생들도 살펴볼 생각이고요. 그래도 6시 전까진 들어올 수 있습니다.”
“…….”
“……무슨 할 얘기가 있으신 겁니까?”
“어? 어, 아니! 저, 그냥…… 난 오늘 좀 늦을 거 같거든. 그래서 너 혼자 저녁 먹게 할까 봐 그게 좀…… 혼자 밥 먹으면 맛없잖아…….”
“댁에서 저녁까지 들고 오시게요?”
“어, 아니. 그건 아니구. 음…… 저녁엔 선 화랑에서 약속이 있거든. 친구들이랑.”
“…….”
선 화랑과 ‘친구들’이란 두 마디에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자연스레 연상되는 독사 새끼의 시커먼 자태가 순식간에 뇌리를 점령했다. 사납게 구겨지려는 얼굴 근육을 필사적인 인내로 참아냈다.
아무렴. 이렇게 이성을 잃고 흥분할 일은 아니다. 생일이니 당연히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을 것이다. 독사 새끼와 단둘이 만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설령 만난다고 해도 지난번처럼 깜찍한 반항을 작정할 그가 아니었다. 요 석 달 남짓, 자신이 그에게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그의 외적인 환경으로든, 내적인 심리 상태로든 온통 위 자신으로만 가득 차게끔 강력하게 세뇌를 시키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러니 일단 차분히 생각해보자. 연인만 흔들리지 않으면, 날강도 놈으로부터 연인을 지킬 수단과 방법이란 무수히 많다. 자, 생각하자. 우선 차로 바래다주고 또 데려오는 패턴은 더 이상 써먹을 수가 없다. 음주 운전으로 정지됐던 연인의 면허는 이미 한 달 전에 풀렸으니. 자, 자, 그럼 다른 방법은 뭐가 있을까. 그렇지. 차라리 그런 정공법이 더 효과적일까나……?
“……그랬습니까? 잘됐네요. 모처럼이신데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재밌게 놀다 오세요. 저도 집에 들르는 김에 동생들과 저녁 먹고 느지막이 돌아오겠습니다.”
시선을 피하는 듯싶으면서도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한 그다. 찰나 동안 굳어졌던 위의 표정을 읽었는지, 눈이 둥그레졌다간 이내 헤벌쭉 웃음이 번진다. 대꾸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보다 안심시키기 위해 익숙한 ‘친구’의 미소도 흠뻑 뿌려주었다. 가식의 극치이건만, 순진한 연인은 늘 그렇듯이 꿈에도 눈치를 채지 못한다.
그래. 그렇게만 가면 되는 거다, 내 귀여운 고양이. 내가 가르쳐준 지도로만, 내가 갈무리해준 먹이들로만 보퉁이를 가득 채운 채 안심하고 길을 떠나는 거야. 온몸에, 온 마음에, 온 영혼에, 그저 오로지 내 냄새만을 각인한 채로…… 마침내 파국에 이를 때까지.
“……그럼 저 먼저 나가볼게요, 선생님.”
식탁을 대충 치우고 책 배낭을 둘러멨다. 못내 아쉬운 듯, 귀여운 연인은 현관 앞까지 쭐레쭐레 따라 나온다. 운동화를 마저 신은 뒤 잠깐 몸을 돌리자 바로 아래 연인의 얼굴이 있다. 시선이 마주친다. 흔들리는 새까만 동공에서 자신에게 설레고 있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랑은…… 열렬하고 슬프고 또한 헌신적인 사랑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순간, 북받치는 애정을 어쩌지 못해 무턱대고 팔을 뻗는 자신이다. 연인의 등에 양팔을 돌려 힘껏 부둥켜안았다. 자신의 품에 딱 맞는 이 사랑스러운 몸뚱이. 꽉꽉 조여 안고, 또 조여 안는다. 몇 번이나 입술을 겹친 채 키스하고 또 키스한다. 작별 인사가 아니라 섹스 전의 전희 같다. 젠장. 늘 이렇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그 즉시로 감정이 샌다. 줄줄. 줄줄. 구멍 난 양말처럼. 사랑에 환장한 얼간이 팔불출 그대로. 뿌듯하게 일어서려는 하반신을 자각하고서야 가까스로 연인을 놓아줄 수 있었다.
“……이따 저녁에 뵙겠습니다.”
평소의 ‘다녀오겠습니다.’ 대신 복선이 깔린 작별 인사를 던진다. 자신의 키스에 이미 반쯤은 넋이 나가버린 연인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호시탐탐 자신의 것을 노리는 개새끼의 영역에 얌전히 연인을 들이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자신의 것을 지키는 일은 연인의 상태와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이므로.
“응…….”
퉁퉁 부은 얼굴과 수줍은 미소, 갈라진 목소리, 나머지 열렬한 애정까지. 모두 흡족하게 안으로 갈무리한 후 돌아서서 현관문을 닫았다. 싱긋. 더 이상 참을 필요 없는 웃음이 입가에 매달린다. 속이 꽉 들어찬 듯 충만한 기쁨. 충만한 쾌락. 충만한 애정.
빌라를 벗어나자 점퍼 깃 틈으로 파고들어오는 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인적 드문 화려한 골목길. 높다란 담장들 너머, 울창하게 가지를 뻗고 있는 정원수들에도 어느새 가을이 깊다. 10월 24일. 오늘은 연인의 생일이다. 제법 긴 하루가 될 것이다. 캠퍼스로, 고척동으로, 다시 캠퍼스로, 그러고는…….
‘오늘 밤엔 자고 가면 안 되냐’는 혜윤이의 모처럼 투정에도 그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불퉁한 얼굴을 하고 슬쩍슬쩍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휘의 귀여움에도.
요즘 확실히 동생들에게 소흘해지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연인에게로 온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그럴싸한 자기변명도 있다. 가족을 위해 사랑을 죽이기로 하지 않았나. 일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대신, 앞으로 남은 2년의 시간만큼은 부디 위 자신을 위해 쓰게 해달라고. 부디 그 시간까지만 자신을 얽매지 말아달라고. 복이라곤 쥐똥만큼도 없을 초라한 인생에, 유일하게 주어진 ‘낙원’일 테니.
매달리는 어린 동생들을 무정하게 떼어놓고 다시 학교로 향했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5시 40분 무렵이었다. 학교와 집(고척동 집과 연인의 집)만을 쳇바퀴처럼 돌 뿐인 자신에겐, 캠퍼스 내 빈 동아리 방이나 빈 강의실 외엔 프라이버시를 누릴 만한 공간이 달리 없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영등포시장에 들러 꽃다발과 풍선, 그리고 플래카드를 완성할 재료들을 사 들고 캠퍼스 정문 앞에 도착한 시각이 7시 무렵.
플래카드는 조절 끈을 풀면 70센티 폭의 천이 아래로 펼쳐지며 메시지가 보이는 형태로, 도매 시장에서 살 때부터 이미 그 기본 틀은 완성돼 있었다. 풍선을 불어 리본과 달고, 플래카드 천에 적당한 문구만 그려 넣으면 대충 그럴듯한 모양새가 나올 것이다.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DIY 작업을 끝내고 선 화랑으로 직행할 수 있을 터였다.
“……문위……? 문위니?”
“야, 저거 문위지?”
“에에……?”
“위야라고?! 집에 간 거 아니었어?!!!”
“어어? 정말! 진짜 문위네?! 야, 문위!!!”
일단의 시끄러운 외침들이 문득 위를 가로막았다. 막 정문을 지나 동아리실이 있는 학생관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중이었다. 제법 많은 수의 그림자들이 10여 미터쯤 떨어진 정면에서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현실감이 거의 없는 뇌리 속으로 가벼운 탄식이 지나갔다.
날이 어두워진 터라, 우스운 꼴을 하고 있어도 그리 쪽 팔린다는 생각은 없었다. 설령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한들, 타인의 시선에 그리 신경을 쓰는 편도 아니라 거의 방심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 게 옳다. 시간도 늦은데다, 인맥도 극히 좁은 자신이 동아리실로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설마 아는 사람을 만날까 싶었던 것이다. 한데 그것이 이런 낭패를 부를 줄이야.
연인에 대한 잔영만 내내 곱씹고 있었기에, 고개를 들고 익숙한 얼굴들을 확인했음에도 한동안은 그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와아∼∼. 위야구나! 어떻게 된 거니?! 뒤풀이하러 도로 온 거니? 그러잖아도 우리 지금 4차 가는 중인데……!”
“잘됐네?! 깐깐쟁이 김 교수님 모셔다드리는 거 되게 귀찮았는데 덕분에 위야도 다시 보고?!!!”
“짜아식, 문위!!! 너 뭐냐, 그거?!!!”
“저거, 저거……!!! 저거 꽃다발 맞지?!!”
“꽃다발?!!!”
“그…… 그, 그러네……! 뭐야, 이 짜식!!! 집에 간다더니!!!”
“자, 장미다…… 빠, 빨간 장미…… 안개꽃도 풍성하게 뿌려주시고…… 저거 몇 송이냐? 야, 눈 좋은 놈들! 저거 몇 갠지 좀 세어 봐!”
“야, 야! 이거 진짜 뭔가가 있다! 구려! 무지무지 구려! 으아악! 문위 이 새끼가!!!”
“저건 플래카드지?! 맞지?!”
“당근 플래카드지! 형태 하며 색깔 하며, 어우, 저 핑크색 좀 봐! 지대 왕소름이닷! 진짜 낯간지러운 포스가 풀풀 나지 않냐, 창일아?”
“……위, 위야……?”
“프러포즈냣?!!! 상대가 누구야?!!! 여자친구 없다메?!!!”
“으아아!!! 진짜 쇼크다!!! 장미 쇼크!!! ‘폐하’가 장미로 프러포즈를 한다네?!!!”
“누구야?!!! 대체 언 여자애냐?!!! 얼마나 대단한 여자길래 우리 얼음 마왕 ‘폐하’를 함락시킨 겨?!!!”
“이 왕 내숭!!! 새끼, 우리들한텐 어째 감쪽같이 숨기고!!!”
“흐흐흐, 난 이럴 줄 알았지∼∼. 어쩐지 좀 냄새가 나더라고∼∼∼.”
“어후! 어후! 후아아∼∼. 그럼 이제 ‘페니실린’에서 나만 혼자 솔로야?!!!”
“뭐가 너만이냐, 이동운?! 나도 있다! 성우, 재철이, 세경이, 희종이, 형주, 지현이도 아직이다! 아직! 죽지 마라!”
“난 빼주시지, 전창일 군∼∼∼? 미학과 초미남한테서 애프터 받았거드은∼∼∼?”
“어우, 씨발! 스물일곱 개다, 저거! 장미 스물일곱 송이! 연상인가 봐!”
“뭐어?!!!”
“진짜?!!!”
“일곱 살이나 연상이란 말야?!!!”
“오 마이 갓∼∼!!!”
잠시 달아났던 현실감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빼도 박도 못 하는 지점까지 자신을 몰아넣었다.
무려 열네 명이었다. 시꺼먼 사내 녀석들 아홉에 여자애 다섯. 불과 몇 시간 전, 이번엔 반드시 뒤풀이에 끼게 만들겠다는 엄포를 놓으며 자신을 반협박 하던 무리. 전창일이 이끄는 스터디 동아리(……라기보다 아직은 친목 동아리의 성격이 몹시 강한) ‘페니실린쇼크’였다. 순식간에 포위망을 좁히듯 위를 둥그렇게 둘러싼 동기들은 뭔가 건수를 잡았다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일제히 짹짹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설마 이 자식들이 아직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을 줄이야! 낭패감에 뒷골이 띵 아파왔을 때는 이미 동기들의 기세에 완전히 휩쓸려버린 후였다.
방학 때 골학(骨學)을 지도해줄 본과와 레지던트 선배들 세 명이 바쁜 시간을 쪼개 동아리실을 방문했었다. 본과 공부를 대비한 준비와 의대생으로서의 처신, 혹은 대학병원 생활과 같은, 이런저런 정보와 조언들을 챙겨듣는 시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나름대로 유익한 시간들이라 위도 두 시간 남짓한 강의를 경청했고, 수고한 선배들을 위해 교수 식당의 점심 접대에도 따라갔었다. 그러나 선배들을 배웅한 뒤, 스터디는커녕 놀자판으로 변해버린 모임에까지 어울려줄 만큼 위는 한가한 형편이 아니었다. 동생들도 꼭 살펴봐야 했지만, 특히 오늘은 더 시간을 쪼개 이리저리 움직여야만 할 사정이 있었으니까. 모임을 빠져나오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지난 8개월간의 부대낌을 통해 동기들은 이미 자신의 철저한 마이페이스에 이골이 난 상태였으므로. 너무 쉬이 빠져나왔던 건지도 모른다. 보다 난처한 상황에서 이리 다시 붙들린 것을 보면. 천벌인지도. 말 그대로 ‘스터디’ 모임엔 열심히 참여해주지만, ‘친목’ 모임으로 변질될 시엔 여간해선 보이콧을 해버리는 자신이었다. 여유가 없는 생활이라곤 해도, 그게 변명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하게 처신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확실히 자신은 저 악의 없고 소박한 동아리 친구들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고 있진 않았다. 냉담한 스스로를 새삼 반성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런 자신을 향해 여전히 한결같은 호의를 보여주는 저들에게 막연한 의무감만을 느낄 뿐. 명색이 스터디 모임이니 자신의 괜찮은 머리 정도는 저들에게 도움이 돼주어야겠지 하는 박한 배려 같은 것.
얼굴을 굳힌 채 어떡하면 저 귀찮은 그물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를 하고 있는데, 무리 중 제법 덩치가 큰 윤재철이 코앞으로 불쑥 다가섰다. 전투적인 기세에 저도 모르게 뒤로 몇 발짝 물러서자, 통쾌한 웃음소리들이 사방에서 터졌다.
“으하하하, ‘폐하’가 굳었다! 굳었어!”
“큭큭큭, 살다 보니 폐하가 쩔쩔매는 꼴도 다 보게 되네.”
“크흐흐, 짜식도 사람인데 그렇지 뭘! 딱 걸리셨습니다요, 폐하! 똥폼 잡아봤자 좆까 안 통한다는 거 아시죠?”
“이동운, 뺏어!”
“욥!!!”
“……?!”
날렵한 손 하나가 다가와 비호처럼 꽃다발을 빼앗았다. 어어 하고 멍청한 신음을 채 다 내지르기도 전에 이번엔 다른 손에 들려 있던 플래카드와 DIY 재료 봉지들이 차례로 강탈당했다.
“……뭐하는 짓이야…… 이리 돌려줘.”
무뚝뚝한 항변은 왁자한 소음들의 쓰나미에 묻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후엔 그야말로 속수무책, 모래수렁 같았다. 한번 주도권을 빼앗기니 좀처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아니, 마음 한구석에 늘 앙금처럼 자리 잡고 있던 부채감들이 허를 찔린 틈새를 비집고 왈칵 터져 나온 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도무지 평소처럼 삭막한 냉기를 뿌릴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꽤나 낯간지러운 꼬락서니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붉은 장미 꽃다발에(게다가 간질간질 안개꽃까지!) 플래카드, 불지 않은 색색의 풍선들과 리본들…… 평소의 자신이라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핑크 무드 아이템들이 아닌가. 그저 철저히 이기적인 영역싸움의 일환일 뿐이라는 걸, 이 속 좋은 도련님들, 혹은 양가집 아가씨들이 상상이나 할 일이겠는가. 위 또한 그네들과 다름없이 로맨틱한 연심에 설레는 애송이쯤으로 단숨에 규정되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위가 거리를 두는 만큼 저들 또한 자신에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동경과 우정과 경쟁심과 연대감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기묘한 심리 상태로. 그러나 방금 전까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핑크 무드 아이템’들은 그 일말의 거리감마저 단숨에 부서트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간의 조심성은 과격한 놀림과 스킨십으로, 그간의 동경은 필요 이상으로 들뜬 이상야릇한 열기로. 여기서 더 이상 정색을 유지한다면 더더욱 꼴이 우스워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 ‘포기’야말로 잔뜩 벼르고 있던 동기들의 기세를 토네이도급으로 격상시킨 원흉이 되었다는 걸, 위는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앞으론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데 상당한 곤란이 따르리라는 사실도.
취조하듯 밀어붙여진 끝에 동아리실로 끌려갔다. 말 그대로 ‘끌려가야’만 했다. 전후 사정을 실토시키더니(당연히 그들 입맛에 맞는 얘기를 지어낸 것으로, 생일을 맞아 짝사랑 중인 일곱 살 연상의 여자에게 고백을 하려 한다는) 너도나도 도와주겠다고 오지랖을 펼쳐 보였다. 물론 끔찍하게 곤혹스러운 오지랖이었다.
사내놈들은 너도나도 풍선을 불어대고, 여자애들은 아이템들이 ‘너무 뻔하다’며 사비를 털었다. 보다 호사스러운 아이템들이 일사천리 동아리실로 공수돼 왔다. 간단히 ‘생일 축하합니다, 선생님’으로 장식되었을 플래카드는 ‘그대에게 건너가려고 강을 만들었습니다♥ 태어나 제게 다가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의 끔찍한 닭살로 대체되었다. 그도 모자라 온갖 색색의 하트와 꽃송이와 응원 멘트가 적힌 리본들이 줄줄이 장식되었다. ‘어떤 분이실지 되게 궁금합니다!’ ‘크흑, 선생님 덕분에 이 자식이 드뎌 인간으로 보입니다! 길들이시느라 무척 고생하셨겠네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누님! 괴물을 인간으로 만들어주신 대단한 누님!’ ‘저는 전창일이라고 합니다♡ 예과 A반 과대입니다♡ 언제 한번 꼭 뵙고 싶습니다♡’ ‘받아주시면 우리 학교 여자애들의 공공의 적이 되실 거예요. 심사숙고해주세요.’ ‘부디 이 모난 돌을 거둬 둥글게 만들어주시옵소서. 비위맞추기 무자게 힘듭니다, 제수씨!’ ‘비결이 뭘까요, 언니? 훗훗. 서울대 최고의 킹카, 벼랑 위의 꽃이었던 우리 위야를 어떻게 사로잡으셨는지 정말 궁금해요.’ ‘난중에 속 썩이면 말씀하십시오. 저희 페니실린쇼크가 책임지고 애프터서비스 해드리겠습니다. 제 전화번호는 86*-769*…….’ ‘새꺄, 니 전화번호는 거기 왜 적는 거야?! 누님, 이 새끼 지독한 똥방귀 되시겠습니다. 예과 최고의 스컹크니까 사뿐히 밟아주시옵소서! ……그런데 제 전화번호는요…… 75*-442*…… 큼큼, 위야의 각종 비리가 궁금하시다면 언제든…….’ ‘어, 이거 뭐야! 너, 이 자식 비겁하게!!!’ 등등…… 응원 멘트인지 짓궂은 놀림인지 판단이 모호하긴 했지만.
덕분이었을까? 애초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각에 핑크빛 닭살 무기가 완성되었고, 위는 정확히 7시 56분에 관훈동 방향으로 가는 전철에 몸을 실을 수가 있었다. 도합 열네 명의, 야유인지 저주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격려를 배터지게 주워 먹은 것은 물론이었다. 얼얼했다. 부디 성공하길 빈다며 놈들의 손에 무자비하게 얻어맞은 등의 아픔이 전철에 타고서도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한바탕 회오리에 휩쓸린 듯, 여전히 얼떨떨하고 반쯤은 기가 막힌 나머지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나마 따라오겠다고 강짜를 부리지 않아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조금 유쾌했던 것도 같다고 씁쓸하게 인정했다. 저들의 호들갑 덕분에, 잠시 잠깐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준비하는 양 행복한 망상에 젖어들었었단 사실도. 정말로 달콤한 연심에 설레는 소박한 애송이가 된 양. 손안에 든 새빨간 장미 꽃다발에 쪽 팔려 하다가, 그럼에도 연인의 기쁨을 상상하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순진한 팔불출처럼.
그러나 역시 그뿐이었다. 깃털처럼 가볍고 행복했던 기분은 교대역에서 3호선 전철을 갈아타는 시점부턴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을 쳤다. 쾌활하게 호들갑을 떨어대던 동기들의 얼굴이 차츰 뇌리에서 비워졌다.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힐끔거리며 웃음을 흘리는 전철 안의 뭇 시선들에도 무심해졌다. 시커먼 독사 새끼의 얼굴이 떠오르며 잠시 질투심에 피를 끓이다가, 곧 면전에서 박살을 내줄 장면을 상상하며 삭막하게 조소했다. 연인에게 생각이 미쳤을 땐 역시 또 심장을 베이는 것 같은 지독한 통증이 일었다. 가련한 연인은 곧 자신이 벌일 얼토당토않은 이벤트에 다시금 심한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우울했다. 무릎 위의 꽃다발이며 플래카드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지나치게 화려해서 더더욱 가벼워 보이기만 하는 지독한 천박함. 당장이라도 발로 짓뭉개버리고픈 살인적인 욕구가 치밀었다. 물론 그럴수록 더 소중하게 손안에 틀어쥔 자신이었다. 소중한 무기였다. 내 것을 온전하게 지켜줄, 더할 나위 없이 악랄하고 무자비한 무기였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딱 맞는, 교활하고 비정한 수단이었다. 고쳐 생각하니 또 몹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붉은 장미는 흠 하나 없이 깨끗하고, 그 주변 풍성한 안개의 바다는 은밀하게 교태스러웠다. 동기들의 순진한 야유와 격려들이 부록으로 달려 있는 플래카드는 형형색색의 풍선과 리본과 형광색 사인펜들로 도배돼, 세상 어떤 장식품들보다 애틋한 정성이 느껴졌다. 싱긋. 다시 터진 웃음은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온 즐거운 미소였다.
상처받겠지. 자신이 잠시 설레고 행복했던 만큼, 연인도 잠시 설레고 행복해하겠지, 물론. 그리고 아파할 거야. 진심을 기만하는, 진심을 비웃는 목적으로 쓰인 무기들에 가차 없이 베여서. 아파서 울겠지, 자신처럼. ……멋지지 않은가? 내 사랑,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천생연분인 부부가 어디 있겠나?
[……이번 정차할 역은 안국역, 안국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내려야 할 역이었다. 기계적인 안내 멘트에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되며 일체의 번민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로지 사나운 호승심, 그뿐이었다.
부딪치는 인파에 무기들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고쳐 쥔 뒤 전철을 빠져나왔다. 선 화랑이 있는 6번 출구로 나와 15분쯤 걸으니 목적하던 한성호텔이 보였다. 지하 1층 아케이드로 들어갔다. 귀금속과 명품 옷들이 즐비한 화려한 쇼윈도들을 지나 조금 외진 모퉁이를 도니 눈에 익은 자그마한 화랑이 나타났다. 유리창 너머로 환하게 불이 밝혀진 내부가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곧 문을 닫을 시간 같아 시계를 살피니 8시 45분이었다. 입구 프런트에 앉아 화랑을 지키는 젊은 여자 외엔 손님은 단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잠시 화랑을 뒤로 돌아 안쪽 사무실로 들어갈까 고민을 하다 그냥 화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권 사장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십중팔구 모두 안쪽 사무실에 몰려 있을 것이다. 곧 별 영양가 없는 수다들과 더불어 부어라 마셔라 하며 소주잔들이 돌기 시작할 테지. 몇 번 와보진 않았지만 볼 때마다 화랑을 지키는 것은 권 사장이 아닌 프런트 앞의 저 젊은 여자였다. 도무지 그림 장사를 할 생각은 있는지, 현실 감각 부족하기가 연인의 동료답다고 쓴웃음이 인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여자가 일어서는 게 보였다. 발갛게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인사하는 여자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아는 체를 했다.
“……안녕하세요, 문위 군? 안쪽 사무실로 들어가보세요. 모두들 거기 계세요.”
여자가 기왕에 알고 있는 사실을 덧붙였다. 자신이 들고 있는 호사스러운 무기들에 대충 눈치를 깠는지, 여자의 미소는 좀 더 짙어졌다. 지난번에 독사 새끼한테 선전 포고를 하는 장면은 여자를 포함, 당시 화랑에 있던 모두가 목격했었다. 손님 열댓 명과 권 사장과 나경자, 그리고 우은표가 그들이었다. 아마도 오늘은 좀 더 멤버가 늘어 있을지 모른다. 아니, 늘어 있을 거다. 틀림없이. 늘어난 멤버 중에 연인의 실체를 아직 모르고 있는 자들이 섞여 있다면 오늘 자신이 벌일 고약한 퍼포먼스는 또한 본의 아닌 아웃팅인 셈이 된다. 물론 전혀 개의치 않는다. 연인을 배려할 생각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그날 굳이 독사 새끼를 찾아 여기로 오지도 않았을 거다.
“아뇨. 조금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 해서 따로 선생님을 뵙고 싶습니다. 죄송하지만 여기로 선생님을 불러주실 수 있나요?”
‘부끄러운 고백’은커녕 이렇게 말해둘수록 여자의 호들갑이 커지리라는 걸 안다. 여자의 호들갑을 전해 들은 철없는 환쟁이들이 연인만을 보내주고 얌전히 앉아 있을 까닭도 없다. 아무렴. 다 끌고 와라. 많으면 많을수록 더 통쾌해질 테니.
“제겐 중요한 일이라서요. 부탁드립니다.”
담담한 부탁의 말끝으로 무뚝뚝하게 일별하자 여자의 홍조가 더 진해진다. 여자의 눈은 이젠 아예 로맨틱한 기대에 대한 흥분으로 별처럼 빛나고 있다. 재차 부탁드린다며 겸손한 척 고개를 숙이자, 여자가 채 대꾸를 할 생각도 못 한 채 안쪽 사무실로 달려갔다.
2∼3분쯤 됐을까? 아니, 그보다 더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전시실 안쪽으로부터 우당탕거리는 요란스러운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여자가 미처 닫지도 못하고 사라진 안쪽 출입문으로 눈에 익은 얼굴들이 대거 포진했다. 몇몇은 입구에서 얼음땡이 됐고, 보다 뻔뻔스러울 몇몇은 전시실 안에까지 걸어 들어와 자신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약간씩 술기운이 도는 불그레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지만 정신은 말짱한 듯, 표정들이 한결같은 경악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충 열댓 명쯤. 거의가 아는 얼굴이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서넛 끼어 있었다. 권 사장도 보이고, 오주희도 보였다. 지난번의 나경자와 우은표도 보이고, 유일한 화랑 지킴이 여자도 되돌아와 있었다. 그러곤 포천에서 본 사람들이 네다섯. 또한 처음 보는 남자 둘에 여자가 하나. 연인은 보이지 않았다. 독사 새끼도. 순간, 서늘한 독기가 정수리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가뿐하게 참아냈다. 어렵진 않았다. 기색이 느껴졌다. 기왕에 전시실을 가득 채운 눈치 없고 철없는 들러리들처럼 요란스레 발소리를 내지 않아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아도, 자신은 알 수 있었다. 연인이 곧 자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리라는 걸. 충격으로 새파래진 얼굴을 하고. 그렇지. 저 봐라. 단 한 치도 자신의 계산에서 빗나가는 법이 없는 연인이다. 출입문의 사각 프레임을 배경으로 다갈색의 벨벳 재킷과 세련된 명품 진, 그리고 앙증맞은 헌팅캡으로 한껏 멋을 부린 연인이 서 있었다. 귀여워라…… 하느님, 너무 귀여워……. 열정과 탐욕으로 불처럼 일렁일 자신의 시선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숨기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다. 아니, 만천하에 드러낼수록 더 좋은 ‘악마의 시간’이다.
독사 새끼는 연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여차하면 연인을 감싸 안을 태세란 게 눈에 보여서 가소로웠다. 시체처럼 당장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아직도 기사 흉내를 내려는 모양이지. 흘낏 시선을 주었을 뿐, 무시하고 다시 연인에게만 집중했다.
얼어붙어버렸는지, 문 앞에 선 연인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10미터쯤 떨어져 있는데도 와들와들 떨고 있는 전신이 다 보였다.
“선생님.”
좀 더 다가와.
“선생님.”
겁내지 마, 내 사랑. 날 겁내지 말아줘.
“…….”
그렇지, 좀 더 가까이 다가오라니까…….
“……위…… 야……?”
꺼져 들어가는 촛불처럼 가느다란 부름이 들렸다. 충격과 당혹 가운데서도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도를 읽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는 속내가 손에 잡힐 듯 읽혔다. 가슴이 아팠다. 그 이상으로 환장하리만큼 사랑스러웠다.
……거짓이 아니야……. 거짓 고백으로 포장된 진심을 가만히 되뇐다. ……당신은 죽을 때까지 모를 테지만…… 모르게 만들 테지만, 이것은 거짓이 아니야…… 어딘가 누군가는 알아줄 테지. 아니, 알고 있을 테지. 그저 영역싸움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저 마음 깊은 곳에선 나 역시 한 번쯤은 이렇게 하고 싶었다는 걸. 한번쯤은 순진한 애송이가 돼서 첫사랑의 연인에게 프러포즈하고 싶었다는 걸. 북받치는 사랑을 어쩌지 못해 전전긍긍하며…… 가슴을 두근거리며…… 사랑에 빠진 바보 팔불출이 돼서 연인에게 선물할 꽃다발을 고르고 싶었다는 걸…….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해피 버스데이 투 유∼∼∼.”
단 한 소절 만에 지독한 음치로 판명 나는 축가를 나지막하게 불러대기 시작했다. 반신반의와 기대와 의심 사이에서 점점 더 형편없이 얼굴이 질려가는 연인 탓이었을까? 스스로도 믿기 힘든 낯 뜨거운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대신 은밀하게 숨겨졌던 유치한 욕망과 애절한 슬픔만이 오롯이 자리를 잡았다. 멈출 수 없이 흘러나오는 감정 그대로 내달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감정을 숨길 필요 없다는, 풀려난 금제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 이상 계산 따윈 필요 없었다. 그저 연인의 눈을 사슬처럼 휘어감은 즉시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을 뿐이었다.
“해피 버스데이 디어 인환∼∼ 해피 버스데이 투 유∼∼∼.”
듣는 사람들마다 폭소를 터트리곤 했던 자신의 지독한 음치도 지금만큼은 별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노래를 시작하기 전이나, 그 중간이나, 그리고 막 노래를 끝낸 다음에도 그저 숨 막히는 정적만이 전시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본래 세워두었던 순서대로, 축가를 부른 다음 조절 끈을 풀어 플래카드를 아래로 펼쳐 내렸다. 수십 개의 리본과 색종이 가루, 스물일곱 색색의 풍선들이 풀어지며 동시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대에게 건너가려고 강을 만들었습니다♥ 태어나 제게 다가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오색의 형광펜으로 굵직굵직하게 쓰인 끔찍한 닭살 멘트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기왕에 경악한 환쟁이들의 입과 눈들은 더 이상 커질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랗게 벌어졌다. 하도 황당해 놀림이 섞인 야유조차 미처 내뱉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 역시 아무래도 좋았다.
순서의 마지막, 장미 꽃다발을 연인에게 선사하기 위해 몇 걸음 더 연인에게로 다가갔다. 파래졌던 얼굴은 어느새 시체처럼 하얗게 탈색돼 있었다. 경련이 일듯 후들거리는 떨림도 여전했다. 괜찮아. 연인을 향해선지 스스로를 향해선지 알 수 없는 위로를 뇌까린다. 괜찮아. 쓰러지면 안아주면 되니까. 울음을 터트리면 눈물을 닦아주면 되지. 아파하면 상처를 어루만져주면 돼. 기뻐 전율하면 또한 함께 기뻐 웃어주면 되지. 괜찮아. 아무것도 무서워할 필요 없어. 함께 있으니까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내 사랑…….
꽃다발을 연인의 가슴 가까이 가져다대고 한참을 묵묵히 기다렸다. 그저 연인의 사랑스러운 눈동자만을 힘껏 끌어안은 채. 무자비할 정도로 진심을 드러내 보이며. 가차 없이 자신의 열망을 펼쳐 보여주었다. 마침내 연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구겨지며 울음을 터트리는 게 보였다.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손끝이 가까스로 장미 다발을 받아 들었다. 마치 향을 음미라도 하듯, 꽃다발 틈에 한가득 얼굴을 묻은 채 어깨를 떨며 운다. 숨죽인 오열이었다.
다 되었다. 하느님, 이제 다 되었다. 또 한 번 연인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연인의 어깨 너머, 지독한 패배감과 절망이 드리운 독사 새끼의 얼굴이 보였다. 증오와 슬픔과 고통으로 어쩔 줄 모르는, 비참해 보일 지경으로 가련한 꼬락서니였다. 성공이었다. 성공적으로 연인을 베고, 독사 새끼의 사랑도 잔인하게 베어버렸다.
‘무기’를 팽개쳤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으므로. 플래카드가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단말마의 신음을 흘렸다. 자유로워진 두 손을 뻗었다. 광기와도 다름없을 시퍼런 열정으로 연인을 부둥켜 안았다.
겹쳐진 두 몸뚱이 사이에서 장미 다발이 순식간에 짓이겨진다. 핏빛 얼룩이 두 사람의 옷깃을 적시며 퍼져간다. 고개를 좀 더 아래로 기울이자 짙은 장미향과 더불어 연인의 달큰한 체향이 기분 좋게 폐부로 파고든다. 따뜻한 목덜미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정신없이 비벼댄다. 자신의 품에 꼭 맞는 애틋한 몸뚱이에 저절로 충만한 웃음이 샌다. 상처 입은 새처럼 발발 떨고 있는 가슴 시린 모양에도 저릿한 오르가슴이 인다. 자신이 상처 입혔다. 자신이 입힌 극심한 상처로 연인이 울고 있다. 그렇지. 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상처 입힐 수 있는 자는 세상에서 자신만이 유일하다. 당연히 자신만이 유일해야 한다. 물론 기쁨도 한가지. 이 사람의 지옥도, 천국도 모두 자신의 품 안에서만이 유일해야 한다. 아직 유일한 것이 아니라면 유일하게 만들 거다. 비릿한 웃음이 샌다.
문득 고개를 쳐들고 어깨 너머 독사 새끼를 본다. 시선이 마주친다. 슬쩍 입술 끝만 틀어 올리는 비소를 통렬하게 날려주었다. 고통스럽지? 고통스러워서 미치는 것 같지? 자, 봐라. 더 아프고 싶다면 계속 지켜봐둬. 이 사람이 누구의 것인지. 육체도, 정신도, 영혼도, 모두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누구의 노예인지.
찌릿찌릿 전율이 일 정도의 승리감에 도취된 채 시선을 연인에게로 도로 가져간다. 뾰족하게 마른 턱 끝에 양손가락을 붙이고 고개를 들게 한다. 온통 눈물범벅인 사랑스러운 얼굴이 드러난다. 어물어물 무언가를 아련하게 호소하는 중인 귀여운 입술도 보인다. 창백한 낯빛에 붉어진 뺨, 그 위로 번들거리는 물빛 유혹은 지독할 정도로 색정적이다. 순식간에 발기해버리는 짐승의 성욕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가는 허리를 으스러뜨릴 정도로 죄어 안곤 입술을 겹친다. 빨고 핥고 깨물고…… 숨 한 올까지 다 빨아 마실 기세로 격렬하게 키스한다.
순식간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넋이 하늘로 비상한다. 주변을 가득 메운 선량한 환쟁이들의 경악도, 지나치게 고상하고 품위 있는 전시실도, 아마도 자신보다는 꽤나 신사였을, 그래서 자신과는 애초부터 상대도 안 됐을 독사 새끼의 절망도 까맣게 잊힌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품 안의 연인뿐. 온전히 자신의 것일 이 사랑스러움만이 세상에 가득 들어차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