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1992년 1월. 문위(文偉)
“어이, 문위. 이리 와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막 현관문을 밀고 나오자 본과 선배 하나가 위를 불러 세웠다. 창문 옆 테라스에 설치된 파라솔 벤치엔 위를 불러 세운 선배 말고도 다른 남자 동기 둘이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패딩 점퍼만을 간단히 걸쳐선지 다들 추위에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사위가 어둑어둑한 아침 7시 무렵이었다. 대부분 7시를 넘겨야 겨우 일어나곤 하는 동기들도 그렇고, 선배도 그렇고, 일찍 밖에 나와 떨고 있는 걸 보니 담배가 몹시도 고팠나 보다.
“운동 가냐?”
담배 냄새가 싫어 무심코 얼굴을 돌리자 피식거리는 웃음이 추위로 굳은 허여멀건 얼굴에 떠올랐다. 이승욱이라고 했던가. 이번에 골학을 지도해주러 양평까지 내려온 본과 선배들 중 하나인 2학년 선배였다. 작지 않은 키에 마른 몸, 그리고 척 보기에도 공부벌레를 연상시키는 새하얀 얼굴에 무테안경이 특징인 남자였다. 다른 네 명의 선배들처럼 앞으로의 의사 생활에 거의 동고동락할 여지가 많은 자라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고 있는데, 어쩐지 뒤가 께름칙한 느낌 때문에 될수록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귀티 나게 잘생겼다는(여자 동기들의 평이었다) 얼굴도 그렇고, 자신에 대해 미묘한 호기심이 느껴지는 시선도 찝찝했다. 딱히 직접적인 사인을 주진 않고 있지만, 다년간의 남창 생활이 남긴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 혹은 다른 어떤 것에 매혹된 인간 특유의 미묘한 색기가 감지됐기 때문이다. 남자들이라 해서 자신의 몸을 향한 탐욕이 다르지 않다는 걸, 이미 신물 나도록 잘 알고 있다. 확률적으로 매일 부딪치게 되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신에게 동경을 느끼거나 아니면 수컷 특유의 호승심을 느끼거나 둘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한 5퍼센트 정도는 눈앞의 이 해사한 선배처럼 정욕의 대상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를 눈치챈다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날 정도로 불쾌해서 거개 모르는 체하고 있지만, 이렇게 앞으로도 자주 얽힐 수밖에 없는 자가 그 대상이 될 땐 도무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터다. 물론, 역시 뭇 대상들처럼 일단 모르쇠로 일관하기만 한다면 별 문제는 없을 거다. 동성애자라는 건 거의 100퍼센트 불리한 핸디캡으로 작용한다. 자신처럼 철저한 헤테로로 보이는 종류를 향해 고백을 한다거나, 혹은 감정을 내보이는 대범한 치들은 아마 거의 없을 터이므로. 눈앞의 이자도 그렇다. 미묘한 분위기는 감지되지만, 특별히 티를 낸다거나, 유혹의 낌새라곤 전혀 맡아지지 않는다. 그 상태를 유지해주기만 한다면 자신 또한 깍듯한 선배로서 예의를 지킬 마음을 먹고 있다. 비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표정이 역겹긴 해도.
“정말 부지런하네. 이렇게 추운데 하루도 빼먹지를 않는구나.”
예 하고 간단히 대꾸하자 담담한 감탄이 이승욱의 얄팍한 입술에서 새어나온다. 귀티 나게 생겼다는 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 면도를 하지 않았는지 퍼렇게 드러난 수염 자국에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진다. 여자처럼 고운 이목구비란 뜻이겠지 하고 감상을 정리해본다.
“빼먹긴요. 이 자식 근육 못 보셨죠, 선배? 지독한 운동 페티시 아니면 그런 완벽한 근육은 못 만들 겁니다. 진짜 눈알 튀어 나와요. 밸 꼴려서. 일부러 만들래서 만든 게 아니라, 그야말로 매일 꾸준히 근육을 사용해준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종류라니까요.”
동기 하나가 담배를 뻑뻑 빨아들이며 끼어들었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한꺼번에 훅 뿜어내는 바람에 이번엔 사양하지 않고 얼굴을 찌푸려 싫은 내색을 비쳤다.
“우헤헤헤∼∼∼. 괴롭냐? 열 받아서 그런다, 짜샤. 담배 연기 먹고 그 징글징글한 뇌세포들 좀 죽이라고. 우린 ‘골(骨)’들 외우느라 진짜 골[腦] 빠개지는데, 너만 여유 작작 운동 나가시는 거 되게 열받거든? 어떻게 된 새끼가 골학 공부하러 온 건지 리조트를 즐기러 온 건지 분간이 안 가요.”
“맞다. 징그러운 놈이 어째 담배도 안 피워요. 불공평하게.”
“하하하∼∼. 문위, 친구들한테 인기 없네? 매일 이렇게 다굴당하는 거냐?”
“다굴은요, 선배!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이 단체로 이 자식한테 다굴을 당하는 거죠. 오죽하면 이 자식 별명이 ‘폐하’겠어요?!”
“……몸에 안 좋은 거 알면서 끊으면 되잖아.”
“으아악! 저거 봐요! 저 얄미운 거! 누군 끊고 싶지 않아 안 끊나?!”
“새꺄, 아침부터 스팀 팍팍 도니까 빨랑 꺼져라. 운동을 하시든, 리조트를 즐기시든 상관 안 하마! 눈앞에 뼈다귀 귀신들만 왔다 갔다 하시는 불쌍한 우린 들어가서 뼈다귀들이랑 마저 훌라댄스나 출란다.”
무뚝뚝하게 대꾸를 던졌더니 동기 둘이 쌍으로 거품을 뿜는다. 눈빛이 형형한 게 정말 열이라도 받는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을 물었다. 덩달아 뾰족한 반응을 주고 싶어도(아마도 그러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안쓰러운 연민 탓에 그저 덤덤한 표정만 만들어질 뿐이다. 스트레스와 피로로 날카로워져 있지만, 악의는 없다는 걸 뻔히 아는 까닭이다. 오늘로 5일짼데 둘 다 창백한 낯빛 하며, 눈 밑 다크 서클이 굉장하다. 물론 이 둘뿐만이 아니다. 이번 골학 스터디에 참가한 동기들 거의 대부분의 얼굴이 이렇다는 걸 알고 있다. 수면 부족인데다 나름대로 꽤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단 의미. 하긴 공부할 양이 장난 아니었다. 다들 서너 시간의 수면도 채 다 채우지 못하고서 공부한 내용과 책의 내용들을 암기하기에 바빴다. 일주일 안에 다 소화시키려면 자신으로서도 제법 달려야만 했으니, 동기들이 받는 압박감은 더 심각할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페니실린쇼크’ 동아리 전원이 참가했고, 동아리 이외에 예과 A반에서 3명이 더 이번 골학 스터디 여행에 동참하고 있다. 다들 예과 내에서도 선두 그룹에 속하는 동기들이었다. 성취욕이 높은 만큼 중압감 역시 동일하게 받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다른 동기들보다 한 학기 먼저 시작하는 골학 공부라 해도, 또 이번 여름방학에 한 번 더 스터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만만히 여기는 동기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일단 시작했으니 이참에 동아리 전원이 마스터해서 ‘페니실린쇼크’의 위상을 보여주자고 투지를 불태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들 골 빠개질 여름방학엔 반대로 신나게 바캉스나 즐길 야심을 세우고 있단 소리도 들었었다. 물론 그런 건 그저 다 허세일 뿐이고, 남들보다 한 학기 먼저 시작한 만큼 성취욕과 경쟁심이 남다르단 의미일 게다. 그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지의 산물이기도 하고.
위로서야 지금 하든 혹은 여름에 하든 별 상관이 없다고 여겼지만, 어차피 선배들의 지도가 필요한 골학을 혼자 공부할 순 없었다. 미리 공부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 포함 도합 열여덟 명의 동기들이 본과 선배들 다섯 명과 함께 모여 이 양평의 제법 큰 리조트에 내려온 것이 닷새 전 아침인 1월 10일이었다. 지도해줄 선배들을 포함해 20명이 넘는 대인원이 한데 모여 공부할 공간을 찾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그는 동기 가운데 리조트 사업을 하는 준재벌가의 도련님이 있어 쉬이 해결되었다. 숙소와 식사가 무상 지원된 것이다. ‘페니실린쇼크’의 대다수는 열광했고, 또 크게 고무되었다. ‘한 방에 끝내자!’의 가열찬 골학 슬로건도 내걸렸다. 물론…… 오늘로 5일째, 동기들의 얼굴은 도착 첫날의 열기가 무색할 만큼 누렇게 뜬 채 잔뜩 초췌해져 있었다. 지도차 함께 내려온 선배들 다섯은 그럴 줄 알았다며 통쾌해했다. 감히 예과 1년차 주제에 한 번에 갈 생각을 했냐고, 골학을 얕잡아본 벌이라고.
“웃어? 지금 웃어? 짜샤, 너 비웃는 거지?! 죽을래?!”
“어우, 씨! 너 죽었어! 스터디 끝나고 보자!”
“짜식들, 그만들 해. 니들 머리 나쁜 게 죄지, 문위가 뭔 죄냐? 니들도 억울하면 두뇌 개발 좀 해보든가. 담배도 끊어보고.”
“선배까지 왜 그러세요! 이 좋은 맛 땜에 쫓겨나 함께 고생하시면서! 담배 동지 주제에 담배 끊으란 무정한 말씀이 나오십니까요?”
“하하하, 그래. 그건 또 그러네. 한 번 맛들이면 좀처럼 끊기 힘들지.”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배님.”
“어? ……음, 그래라. 이따 보자.”
“예.”
“새꺄, 오늘 눈 올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등산은 하지 마라. 미끄러져 발이라도 삐끗하면 울 불쌍한 해골들 더 빠개질라.”
“쿡쿡, 그래. 저 새낀 굴러도 해골에 흠 하나 안 날 거야, 틀림없이.”
정말로 거품을 물 기세인 동기들에게 쫓기듯 테라스를 벗어났다. 비죽 입가에 걸린 웃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껄끄러운 이승욱을 긴 시간 상대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준 동기 둘이 고맙기 짝이 없었다.
거의 날이 밝은 것 같은 사위를 헤치며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이 리조트 단지의 중심이랄 수 있는 양평우성콘도 본관 앞 잔디구장(콘도로부터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장형 방갈로 단지가 위 일행이 묵고 있는 숙소였다).
양평우성리조트는 뒤로 유명산 자락을 병풍처럼 낀 커다란 콘도 본채 하나에 별장형 방갈로 단지가 셋, 그리고 각종 레포츠 시설이며 유락 시설이 고루 갖추어져 있는 제법 큰 리조트 시설이었다. 이 정도로 큰 리조트 체인을 몇 개 소유하고 있다면 이미 준재벌 수준은 넘어선 게 아닐까 쓴웃음이 인다. 그런 집안에서 자식을 후계자 수업이 아닌 좋아하는 의학 공부를 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사실도 좀 의외다. 역시 집안 좋은 도련님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는 동아리라고, 새삼 감탄했던 자신이다. 덕분에 편하게 골학 공부를 할 수 있으니 꽤 고마운 노릇이기도 하고.
패딩이 두껍게 들어간 트레이닝 재킷에 후드까지 깊게 덮어썼건만, 얼굴을 스치는 찬바람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도착한 첫날엔 영상에 가까운 날씨더니, 다음 날부터 전국적인 한파가 몰아닥쳐 연일 영하 10도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어차피 겨울 운동에도 익숙해 있어 별 문제는 못 느끼지만, 어제까지처럼 산책 코스를 경보로 오르내리는 일은 그만두자고 판단했다. 동기의 지적대로, 어제부터 날이 흐린 것이 꼭 눈이 올 듯했기 때문이다. 말이 산책 코스지, 겨울에 제대로 된 등산 장비 없이 함부로 돌아다니기엔 좀 위험한 코스였다. 콘도 뒤 산자락을 빙 둘러싸듯 이어져 있어 경사가 꽤 심한 지점이 많아서였다. 결국 본관 앞 잔디구장(잔디 이파리들은 이미 다 죽어 노란 시체만 남아 있지만)에서 몇 바퀴만 달리자고 작정하곤 몇 분 만에 구장에 도착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리조트 내 운동장이라선지 구장엔 위 자신 이외엔 사람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이른 아침인데다 날씨 탓도 있을 것이다.
찬 공기에 그대로 노출이 돼 굳어 있던 얼굴이 스트레칭을 끝내고 축구장을 트랙 삼아 본격적인 달리기에 돌입했을 땐 조금씩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숙소를 나섰을 때부터 약간 추위가 느껴졌던 몸 역시 한가지였다. 달린 지 10분이 채 못 돼 전신으로 땀이 차올랐고, 무아지경에서 50여 분 동안 트랙을 돌았을 무렵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며 육체의 흥분을 삭히자, 다시금 서서히 추위가 느껴졌다. 땀에 젖은 채라 더할 것이다. 이 상태로 지체하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10분간의 마무리 스트레칭을 끝내자마자 숙소로 되돌아왔다.
일행이 머물고 있는 방갈로 4동이 전부 텅텅 비어 있는 걸 보니 다들 본관(콘도) 레스토랑으로 식사를 하러 간 모양이었다. 도착 둘째 날 아침에도 오늘처럼 운동을 하고 돌아오니 숙소 문이 모두 잠겨 있었다. 땀범벅인 몸을 하고 도로 본관까지 동기들을 찾아가 키를 받아 들고 돌아오는 해프닝 끝에 위 자신만을 위한 여벌 키를 받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재빨리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 다시 숙소를 나왔다. 시계를 보니 8시 40분. 날은 완전히 밝아 있었지만 많이 흐린 탓인지 여전히 어둑어둑한 느낌이 들었다.
콘도 본관 안으로 들어서자 로비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로비가 있는 1층에 슈퍼마켓이며 카페, 기프트 숍이나 오락실 같은 유락 시설들이 대거 포진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아리 일행의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지하 1층의 직원용 식당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다시 로비 근처로 되돌아와 공중전화 박스 앞에 섰다. 고척동으로 전화를 넣기 위해서였다. 아침과 저녁 두 차례씩 안부 확인을 하고 있지만 역시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연인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긴 해도 일주일씩이나 동생들을 못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성준에게도 잠깐씩 들여다봐달라고 부탁을 해두었지만 완벽하게 마음이 놓이는 것은 아니었다. 고작 일주일 사이에 별일이야 있겠냐만, 몇 년 동안 이미 체질화된 ‘동생 콤플렉스’를 새삼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너 번 벨이 울린 끝에 혜윤이가 전화를 받았다.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으며 휘는 씻는 중이라 했다. 방학이라고 게으름에 빠지면 어쩌나 했는데 그럭저럭 둘 다 평소의 리듬을 잃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스파르타식 조율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생들 역시 내밀화한 어둠을 품고 있고, 그 어둠이야말로 동생들로 하여금 평범한 사춘기를 경험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동생들이 한편으론 안쓰럽고, 또 한편으론 대견하게 여겨진다. 부디 건강하게 어서어서 자라주기를. 더 이상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게 강한 어른이 되기를. 재잘재잘 밝게 수다를 떠는 혜윤이의 목소리를 음악 삼아 버릇 같은 기도를 되뇌었다.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안부를 주고받은 뒤, 좀 더 편해진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또 ‘누님’이랑 통화하는 거냐?”
느닷없이 코앞까지 디밀어진 전창일의 얼굴에 흠칫 몸이 굳어졌다. 시선을 좀 더 뒤로 물리니 전창일을 위시한 동기 서넛이 전화 박스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딱 보기에도 이젠 제법 익숙해진 ‘놀리는 얼굴’들이라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크 서클이 한 발이나 늘어진 얼굴에 능글능글한 장난기라니, 자체가 호러였다. 연인의 생일 이벤트 이래 툭하면 이런 식으로 약점을 끄집어내곤 하는 동기들이다. 한 번쯤 자리를 마련하라는 요청(이라는 이름의 강요)을 매번 거절하는 벌이라며 수시로 들이댔다. 결국, 조만간 헤어졌다는 선언을 하는 것으로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있는 요즘이었다.
“동생들 안부 전화야.”
“오호라, 근데 왜 숙소에서 안 하고? 공중전화라니, 우리 중 누가 훔쳐 듣기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가 아니고?”
“훔쳐듣든지.”
시큰둥하게 덧붙이자 다들 김새는 얼굴이 된다. 열심히 부인해봤자 더 놀릴 뿐이라는 걸 알기에 터득한 ‘무덤덤 스킬’이었다.
“짜식, 여유 있어 좋구나. 여자친구랑 전화질까지 해대고.”
“다들 초죽음인데 저 얼굴 뺀질뺀질 한 거 봐라. 진짜 팔자도 좋지, 폐하.”
“아무렴. 공기 좋은 곳에서 잠도 일곱 시간 꼬박꼬박 다 자고, 매일 운동에 밥도 두 공기씩 퍼 먹는데 얼굴이 안 좋을 수 있나? 저 자식은 골학 하러 온 게 아니라 놀러 온 거라니깐. 저 자식한텐 숙박료랑 식대 모조리 다 받아내야 돼. 최정호 아버님께 찔러야 한다구. 우리 중에 뺀질이 하나 있다고.”
놀림은 어느새 원망 섞인 성토로 변해 있었다. 피식 웃음이 걸리려는 걸 지그시 참고 식당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밥 먹으러 간다.”
손까지 흔들자 뒤에서 우우우 하며 잔뜩 피폐해진 늑대들의 합창이 따라왔다. 마음만은 더 심술을 부리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준다는 원망이 하나 더 보태져 있는 것 같았다.
놀러 온 거라……. 확실히 그 말이 맞는 건지도 모른다. 두뇌를 쓰는 일 자체가 자신에겐 일종의 놀이이기도 하거니와, 연인과 동생들로부터 완벽하게 떨어져 있는 덕분에 육체적인 면으로는 대단히 편한 쪽이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탓에 지금처럼 일주일가까이 규칙적으로 일곱 시간 숙면을 취하는 일도 드물었다. 연인과의 일상은 편안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극도의 쾌락과 그 이상의 번민, 그리고 사랑과 고통이 늘 공존하는 이상야릇한 연옥이었다. 육체는 늘 열에 들뜬 듯 예민하고 격렬했으며, 정신은 천국과 지옥의 양극단을 수시로 오르내리며 늘 폭풍을 일으켰다. 그랬다. 서울의 일상에 비하면 확실히 자신은 지금 놀고 있다. 아니, 놀고 있다기보다는 쉬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맑은 공기, 충분하고 규칙적인 숙면, 적절한 스트레스를 주는 공부와 인간관계, 먹음직한 식사, 그리고 가벼운 운동. 무엇하나 ‘휴양’스럽지 않은 아이템이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 자신은 행복한가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글쎄…… 과연 예스라 말 할 수 있을까? 또한 평화로운가 하고 묻는다면 글쎄…… 역시 예스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폭풍이 인다. 내면 깊은 곳에서. 고요히 웅크린 채 점점 힘을 더해가는 그것이 팽이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그립다. 보고 싶다. 미치도록 그립고 미치도록 보고 싶다. 한 시간이 하루 같고 하루가 한 달 같다. 지난 닷새는 마치 1년이 지난 듯 아득하기만 하다. 다 때려치우고 당장 서울로 뜨고 싶은 것을 순간순간 이를 사리물며 참아내고 있다. 동생들이 걱정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지경으로 초조하다. 하루 종일 전화통을 붙들고 연인과 통화를 한대도 이 강박적인 불안과 초조는 가라앉지 않을 터다. 그래서 더 전화를 못 한다. 숙소 내선 번호 또한 알려주지 못한다.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어질 사태를 아니까. 새벽마다 몽정을 하며 깨어난다. 아무도 몰래 먼저 일어나 욕실에서 젖은 팬티를 빤다. 피폐해진 동기들 틈바구니에 구겨 자면서도 발정이라니. 사정이야 어떻든 연인을 향한 욕망은 늘 한결같기만 해서 웃음이 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자신의 손길 없이 이틀을 버티기 힘들도록 길들이고 있건만, 오히려 길이 든 쪽은 자신이란 말인가? 기가 막히지만, 뭐 언제는 제 뜻대로 사랑했던가, 씁쓸한 체념도 든다.
그래. 행복하지 않다. 절대 평화롭지 않다. 폭풍이 불고 있다. 사나운 폭풍이. 정신없이 휩쓸려 사달이 나기 전에 부디 일주일이 가기를 간절히 빌고 있다. 동기들 골[腦] 때린다는 골학(骨學)은 그래서 차라리 숨구멍이다. 머릿속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뼈다귀들의 모양새와 명칭들을 억지로 구겨 넣고 있다 보면 그 순간만큼은 ‘폭풍’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니까.
음식 냄새가 코끝으로 와르르 몰려든다. 갑작스레 닥친 사나운 허기에 위장이 요동친다. 고개를 드니 직원용 식당이 보인다. 막 식당을 빠져나오는 중인 동기 몇도 보인다. 말을 걸어오는 그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후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하더니 막 해가 진 6시 30분 현재도 기세가 거의 줄지 않고 있었다. 폭설이 될 조짐이었다. 피폐해진 동기들은 처음엔 환호하다가 이미 10센티 이상 쌓인 아름다운 설원 풍경을 굽어보며 우울해했다. 눈 내리는 리조트에서 뼈다귀 귀신들이 들락날락하는 환영이 보일 정도로 공부만 해야 하는 신세가 새삼 처량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위는 다른 이유로 조금 우울해졌다. 유난히 눈을 좋아하는 감상적인 연인 생각이 더 간절해진 때문이었다. 별로 눈이 내리지 않은 올겨울이었다. 내려도 조금 쌓였다가 금방 녹아버려 안타까워하던 연인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연인이 저 풍성한 눈밭을 보면 얼마나 좋아할 것인가? 서울에도 눈이 올까? 아마도 오겠지? 평소처럼 신이 난다며 정원에 나가 눈사람 만들기를 시도할까? 아니면 찻잔을 든 채 거실 창가에 앉아 조용히 눈 구경을 할까……? 애잔하고 설레는 망상들이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밥 먹으러 안 가냐, 문위?”
멍하니 넋을 놓은 채 한참을 숙소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나 보았다. 어깨를 툭 치며 물음을 던지는 동기 덕에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고개를 돌리니, 거의 좀비 형상의 동기들이 하나둘 숙소를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저녁 식사 시간인 모양이었다. 그나마 식사 시간만큼은 마음 편히 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선지 단 1분도 낭비하지 않으려는 동기들의 동작은 재빨랐다. 말을 붙였던 동기조차 금세 사라지고 방 안에 남은 이는 위 혼자뿐이었다.
무릎 위에 펼쳐져 있던 원서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뼈 그림들로 도배가 돼 있는 그것은 이제 페이지 수며 그림의 색깔이며 스펠링 하나조차도 몹시 익숙했다. 더 이상 외우는 데 시간을 투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내일과 모래 이틀이 더 남아 있지만, 선배들의 가르침은 모두 끝이 난 셈이다. 남은 하루는 그저 외우고 또 외우는 일의 반복……. 물론 대충 끝이 보이는 자신은 그저 가볍게 마무리만 하면 될 터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 일요일 아침, 다른 윗기 선배들이 와서 시험을 치고 나면 마침내 자유. 비로소 연인 곁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 그럭저럭 참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끝까지 무사히. 폭풍에 휩쓸리지 않고서. 이제 필사적으로 외울 일이 없으니 조금 걱정이 들기도 한다. 신경이 느슨해진 만큼 망상과 욕망은 더더욱 심해질 것이므로. 그래도 이제 고작해야 이틀. 48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참을 수 있을 거다. 참아내야 한다, 끝까지 무사히. 길들이려는 주제에 먼저 길들어, 고작 일주일도 못 참고 정해진 일정을 팽개친 채 서울로 내달릴 수는 없다. 추태도 그런 추태가 없을 거다. 연인이야 얼마든지 속여 넘길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이었다. 연인에게 그토록 휩쓸리는 스스로를 자신은 죽어도 용납하지 못할 터였다.
책을 덮고 스웨터 위에 패딩 재킷을 더 챙겨 입었다. 식당에 가는 대신 조금 걸을 생각이었다. 오후 내내 앉아만 있었더니 별로 식욕이 없다. 늦게라도 배가 고파지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면 될 테지.
목도리를 단단히 감고, 고무줄을 조여 후드까지 깊게 눌러쓴 뒤 숙소를 나섰다. 눈이 내려선지 밖은 오전보다는 덜 추운 것 같았다. 바람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송이가 큼직한 함박눈이 비교적 얌전하게 사위를 덮고 있었다. 리조트 진입로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제법 쌓인 눈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밟혀들었다. 방수 처리가 안 된 운동화라 눈길을 걷기엔 적당치가 않았다. 그리 오랜 산책은 못 하리란 사실이 조금 아쉬웠다.
방갈로 단지를 벗어나 약간 지대가 높은 본관 앞으로 올라서자 환하게 불을 밝힌 콘도가 정면으로 보였다. 눈이 내리는 때문인지 꽤 많은 인파가 콘도 밖 광장으로 몰려나와 눈 구경을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가족 단위의 사람들은 무리 지어 눈싸움들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로 부대끼는 광장을 피해 콘도 왼편에 있는 주차장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금요일 저녁이라선지 주차장엔 지난 며칠 동안 보아온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승용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막 도착했는지, 가득 짐을 내리는 차들도 몇 보였고, 잔뜩 눈을 덮어 쓴 채 얌전히 잠자고 있을 빈 승용차들도 보였다. 세미나용 관광버스도, 콘도 리무진 버스도 보였다. 새하얀 눈에 덮여 있으니 주차장조차도 삭막해 보이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연인의 어린애 같은 감상주의가 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진입로를 따라 50여 미터쯤 죽 이어져 있는 주차장을 거의 벗어날 무렵이었다. 다소 무심해진 시야 속으로 무언가가 밟혀들었다. 아니, 밟혀들었다는 사실을 위는 몇 미터쯤 지나치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지나온 방향으로 뒤돌아섰다. 헛것을 본 건가 싶어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한동안 멍청히 서 있어야 했다. 눈을 부릅뜨고 의식을 집중했다. 역시 익숙했다. 익숙하다 뿐인가, 거의 온몸에 온 세포에 알알이 각인돼 있다시피 한 이의 물건이었다.
주차장에 세워진 다른 차들처럼 눈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그것은 은색 BMW였다. 저 은색 BMW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로 그 BMW일 확률은 지극히 희박하다는 걸 이성은 머뭇거리고 있으면서도 가슴은 확신했다. 굳이 번호판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저걸 모를 리 없다. 보일 듯 말 듯한 보닛의 기스 하나, 타이어의 모양새 하나, 어둡게 선팅된 차창 너머에서 흐릿하게 퍼져 나오고 있는 노란 실내등 하나, 그리고 그 등불에 비친 가느다란 실루엣 하나…… 굳이 일일이 확인하지 않았다 해서 자신이 저걸 못 알아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왔구나. 와주었구나, 결국. 그래. 내가 이런데 너라고 제대로 버텨낼 리가 없지. 그렇게 길들였으니까. 이틀 이상은 버티기 힘들도록…….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나? 지붕에 한 자나 쌓인 눈을 보니 점심때부턴가? 아니면 그 이전부터? 어제는? 어제도 여기 있었나? 여기서 이렇게 조용히 숨죽인 채 네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어? 혹시라도 운 좋게 마주칠까 봐? 이렇게나 운 좋게? 그래, 마치 기적인 것처럼……? 폭풍이 일었다. 압도적으로 세력을 확장해버린 폭풍이었다. 도저히 휩쓸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깊게 심호흡을 거듭하며 오랫동안 폭풍을 다스렸다. 아니, 다스리려고 필사적이었다. BMW가 눈을 뒤집어쓰고 있듯, 자신의 어깨며 후드로 덮인 머리 위에도 차츰 솜뭉치 같은 눈 더미가 소복하게 쌓이고 있었다.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폭풍과는 달리 마냥 고요하게 내려앉고 있는 바깥의 눈이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이가 갈렸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데도 폭풍은 좀처럼 기세를 줄이지 않았다. 기세를 줄이기는커녕, 죽어도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그저 휩쓸려버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살며시 유혹이 왔다. 체념이 왔다.
꽁꽁 묶인 채 폭풍에 끌려갔다. 몇 걸음을 더 걸어 범퍼 앞에 우두커니 선 채 한동안 차 안을 굽어보았다. 선팅도 완벽하고, 실내등도 흐리기만 해서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도무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거무스름한 흔적만이 흐릿하게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서로가 서로의 눈을 걸신들린 듯 탐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풍에 온전히 휘말려든 넋이 절규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걸 안아. 더 이상 참지 말고 안아. 안고 천국을 찾아…….
천천히 뒤돌아섰다. 콘도 진입로를 향했던 발걸음을 다시금 재촉하자, 잠시 후 뒤에서 부드러운 엔진 음이 따라왔다. 발걸음을 빨리하면 행여 폭풍이 더 거세질까 두려운 나머지, 느리고 느린 보폭으로 오랫동안 걸어 내려갔다. BMW는 자신의 속도에 맞춰 거의 기다시피 경사가 진 진입로를 내려오고 있었다. 미칠 듯이 휘몰아치고 있는 격정은 걸음을 더할수록 더 사납고 더 뜨겁게, 혹은 더 차게 갈무리되었다.
더 이상은 한계다 싶은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발을 멈췄다. 돌아보자, 따라 멈춘 BMW가 5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멀리 콘도 불빛이 아스라했다. ‘사람의 자리’로부터 못해도 300여 미터쯤은 떨어져 나온 듯했다. 이 정도면 ‘짐승’은 마음을 놓아도 될 것이다. 드문드문 진입로를 밝히고 있는 가로등 외엔 주변은 거무스름한 산 그림자뿐이었다. 새하얗게 부서지고 있는 눈보라조차도 압도적인 산 그림자의 검은 어둠을 완벽히 몰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검은 어둠은 똑같이 검은 ‘폭풍’을 감쪽같이 숨겨줄 터였다.
차 앞으로 다가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따스한 히터의 온기가 얼어붙은 얼굴 위로 확 끼쳐들었다. 정면으로 시선을 향한 연인의 프로필이 보였다. 희미한 실내등에 비친, 검은 외투와 블랙 진, 귀마개가 달린 귀여운 검정 털모자를 얼핏 알아볼 수 있었다. 차마 이쪽을 마주 보지 못하는 가는 몸은 역시 조금 떨리고 있었다.
조수석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도둑처럼 은밀하고, 강도보다도 재빠르게. 자리에 앉자마자 운전석으로 양팔을 뻗었다. 흠칫 놀라는 몸뚱이를 미친 듯이 부둥켜안았다. 허리를 조이고, 머리통을 휘저었다. 손안에 감기던 털모자가 바닥에 떨어지고 녹아내릴 듯 매끄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정신없이 헤집어대니 번쩍번쩍 정전기가 일었다. 자신의 어깨와 등, 그리고 후드 위를 가득 덮고 있던 눈 더미가, 몸이 크게 흔들리자 차 안 여기저기로 날려 떨어지며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개의치 않았다. 부서져라 자신의 것을 끌어안고 짓뭉개지도록 키스를 퍼부었다. 따스한 피부와 달큰한 내 것의 살 냄새가 혈관을 온통 들끓게 했다.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원망을 퍼부으며 미친 듯이 내 것의 외투를 벗겼다. 따스한 알몸을 가로막고 있는 두꺼운 그것을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각도를 바꿔가며 입술을 겹치고 실컷 씹어 삼켰다. 외투를 팽개치고, 그 속의 캐시미어 스웨터를 밀어올리고, 다시 그 속의 울 셔츠를 찢어발겼다. 써늘하고 무도한 손길이 마침내 따스하고 매끈한 피부에 가 닿자 간신히 만족한 짐승의 웃음이 터졌다. 통제되지 못한 내부의 폭풍이 노도처럼 밖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제 세상을 만난 짐승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입술을 빨고, 목덜미를 씹고, 쇄골을 깨물고, 가슴 산을 더듬고, 마침내 맛있어서 미치곤 하는 앙증맞은 열매를 입안 가득 물어들였다. 쪽쪽. 안으로 세차게 흡입하자, 사랑스러운 몸뚱이가 뒤로 활처럼 허리를 휘었다. 쿵 하고 내 것의 정수리가 운전석 차창에 부딪는 소리가 났다. 재빨리 손을 뻗어 소중히 감싸 쥐었다. 혹시라도 상처가 나는 일이 없도록. 쪽쪽. 쪽쪽쪽. 아픔인지 쾌락인지 알 수 없는 귀여운 신음이 애절하게 울려 퍼졌다. 적당히 해갈된 주린 입술이 다시금 기어 올라가 헐떡이는 입술을 틀어막았다. 샅샅이 더듬고 안쪽 깊숙이 혀를 밀어 넣자, 더한 삽입의 욕구가 눈앞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내 것의 허리를 꼭 부둥켜안은 채 가까스로 서로의 바지 지퍼를 내릴 수 있었다. 자신만큼 휘어지도록 발기한 앙증맞은 물건이 속옷 가운데서 툭 튀어나왔다. 쓱쓱쓱쓱. 서로의 성기를 한꺼번에 움켜쥐고 미친 듯 비벼댔다. 쓱쓱. 찌걱찌걱. 쓱쓱. 착착착. 폭풍이 거세질수록 손바닥 안은 방울방울 질척한 수액으로 범벅이 되었다. 어디든 박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수음질을 멈추고 내 것의 몸뚱이를 반대로 돌려 무릎 사이에 앉혔다. 꼿꼿이 일어나 흉흉하게 먹잇감을 찾는 물건을 엉덩이 골 아래 회음부로 밀어붙였다. 한 손으로 앞을 감싸 쥐니 잠시 욕구 불만으로 허덕이던 자신의 창녀도 겨우 만족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아지경 낑낑거리는 몸을 품 안에 꼭 끌어안고, 가느다란 사타구니 사이에서 힘차게 허리를 흔들었다. 착착착. 착착. 찌걱찌걱. 착착. 귀여운 허벅지가 점점 젖어드는 소리가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허릿질이 더더욱 격렬해졌다. 착착착. 찌걱찌걱. 착착착. 부드러운 허벅지 근육에 비벼진 귀두 끝으로 조금 앞에서 달랑거리는 귀여운 고환을 치대는 음란한 짓거리는 끔찍한 쾌락이었다. 병신처럼 입술을 헤 벌린 채 몸서리치는 환희를 만끽했다. 오래 끌지 않았다. 사납게 휘몰아치고 있는 폭풍은 습관적인 인내조차 말끔히 거둬갔다. 지진이 닥친 것처럼 경련이 이는 몸뚱이를 친친 부여감고 뒤통수에 얼굴을 파묻었다. 입술로 자근자근 머리카락을 깨물며 전심전력 내리꽂았다.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파도처럼 서로의 전신이 흔들렸다. 이리저리 갈 곳을 몰라 헤매다가, 달큰한 뒷목덜미와 어깨가 만나는 사랑스러운 지점에 마침내 이를 박아 넣었다. 일체의 에너지가 페니스 끝으로 몰리며 눈앞이 하얘졌다. 오르가슴이었다.
“……가깝습니까?”
파도에 휩쓸린 채 좀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 내 것을 향해 다그쳐 물었다.
“……숙소, 여기서 가깝습니까?”
부들부들 떠는 사랑스러운 몸을 꼭 끌어안고 재차 다그치자 그제야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운전하실 수 없죠?”
다시 멍하니 끄덕끄덕.
“그럼 길안내만 해주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끄덕끄덕.
귀여워 견딜 수가 없어, 다시금 몇 번이나 입술을 겹친 후에 간신히 연인을 떼어냈다. 금단 증상에 사로잡힌 것처럼 기갈에 날뛰는 몸이 허전해진 품 안에 즉시로 불만의 비명을 내지른다. 물론, 참아야 한다. 더 커다란 기쁨을 누리기 위해 당장의 허기란 찍어 눌러야만 한다.
연인을 조수석으로 밀고 자신은 운전석에 자리를 잡았다. 대충 옷매무새를 고쳐주고 안전벨트도 잊지 않는다. 미동도 않은 채 연인은 자신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만 있다. 쉬이 제어가 안 되는 떨림을 다스리려는지 하염없이 자신만을 바라볼 뿐이다. 열렬하고 애틋한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마주 보면 또다시 핀이 나간다는 것을 안다. 안 된다. 안전한 곳에서 제대로 한 몸이 돼야 한다.
여전히 흉물스레 꼿꼿이 발기해 있는 젖은 음경을 가까스로 바지 속에 구겨 넣고 지퍼를 채웠다. 자신의 안전벨트도 마저 채운 후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속도를 많이 높이진 않는다. 아무리 마음이 바쁘게 달린들 안전을 무시할 순 없다. 눈길에 연인을 태우고 있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예상대로 밖은 이미 폭설 사태였다. 다행히 타이어엔 스노체인이 감겨 있었다.
“……정면을 보세요.”
넋을 놓은 채 자신만 바라보는 연인에게 냉정한 일침을 놓는다. 길 안내를 위해서라기보다 자신 역시 자꾸만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연인을 마주 바라보고, 궁극엔 품에 안고픈 욕구를 간신히 견디고 있다. 짐승이 날뛰는 데 연인의 애틋한 눈빛만 한 것이 없다.
“앞을 보십시오. 우회전입니까?”
탁하게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움찔해선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정표를 보고 다시 한 번 움찔해선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귀여워 애써 웃음을 깨물었다. 워낙에 느린 속도로 달리고 있던 차라 당황한 연인과는 반대로 자신은 여유롭게 커브를 틀었다.
우회전 두 번에 좌회전 두 번. 정말로 가까웠다. 연인이 묵고 있을 숙소는 리조트에서 자동차로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리조트보다 더 유명산 안자락 깊숙이에 둥지를 틀고 있는 아담한 5층짜리 펜션이었다. 펜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 몇이 진입로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는 게 보였다. 손님일 다른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리조트처럼 사람으로 붐비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다.
펜션 뒤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연인을 부축해 내렸다. 곧 넘어질듯 자꾸만 비틀거려 단단히 안아 들고 싶었지만, 감시의 눈초리는 어디에나 있었다. 세상의 눈을 완벽하게 차단할 때까지 참아야만 했다. 연인의 한쪽 팔꿈치를 단단히 틀어쥔 채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그새 서로의 몸 위에 냉큼 올라탄 눈송이를 털어내고, 직원 하나만 달랑 지키고 있는 로비를 지나 구석진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잠시 연인을 굽어보자 약간 창백한 낯빛이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본다. 부드러운 금빛 전등 아래, 촉촉하게 젖은 눈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순간 덜컹 울린 심장의 고동을 애써 진정시키며 무뚝뚝하게 명령했다.
“……키 주세요.”
미세하게 떨리는 손이 코트 주머니에서 객실 키를 꺼내준다. 503호. 키를 손안에 꼭 움켜쥔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 5층 버튼을 눌렀다. 비좁은 공간에서 더욱 진하게 파고드는 연인의 달콤한 체향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바지 속에서 한계까지 발기한 하반신이 몹시도 불편했다. 그저 연인의 팔꿈치만을 움켜쥔 자세를 고수하기 위해, 기를 쓰고 이를 사리물어야 했다.
503호. 힘겹게 도착한 둥지가 바로 코앞에 보였다. 급한 마음 탓인지 좀처럼 제대로 맞춰지지 않는 열쇠 구멍에 짜증이 일었다. 본능처럼 한 손으로 연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행히 다음 순간 문이 열렸다. 미끄러지듯 안으로 뛰어든 즉시 문을 잠그고 연인을 품에 안았다. 현관 바닥으로 키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개의치 않았다. 굳이 불을 켜지 않아도 맞은편 창문으로부터 뿌옇게 빛이 스며들고 있어 침대를 찾는 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허겁지겁 신발을 벗고, 차례로 서로의 옷가지를 벗어 던지며 침대로 갔다. 비틀비틀 헐떡이며, 엉금엉금 기다시피. 먼저 키스부터 해야 할지, 혹은 부둥켜안아야 할지, 아니면 옷부터 벗겨야 할지, 갈팡질팡 마음만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오래 참았다. 너무나 오래 참았다. 이틀이었다. 자신 없이 이틀을 버티지 못하도록 길들였다. 성공이었다. 결국 이렇게 참지 못하고 왔다. 사무치도록 사랑스럽게 떨며 자신에게로 와주었다. 그저 또 한 번 느긋하게 승리의 축배를 들면 그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자신까지 기갈에 날뛰는지 모르겠다. 길들인 건가? 길들인 게 확실한가? 혹시 자신이 길든 건 아니고? 제기랄. 아무래도 좋았다.
연인을 밑에 깔고 뜨겁고 습한 체액 속에 푹 잠겨들었다. 온몸의 구멍을 활짝 열고, 달큰한 연인을 통째로 들이마셨다. 짓누르고 비비고 빨고 마음껏 씹어 먹었다. 길길이 날뛰어도 저항 없는 공간이 눈물 나도록 감사했다. 사랑스러운 몸뚱이 어딘가가 부딪치거나 깨질까 심장을 조일 필요 따윈 더 이상 없다.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다.
폭풍이 인다. 도무지 휩쓸리지 않곤 견딜 수 없는 거대한 해일이다. 연인의 몸을 활짝 열고, 기왕 미쳐버린 흉기를 불쑥 밀어 넣었다. 순간 파드득 떨리는 몸뚱이를 이리저리 어루만지며 안심시킨다.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매끄러운 피부를 쓸고, 쪽쪽,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립 키스로 곳곳에 도배를 한다. 윤활제가 없는 나머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가까스로 하나가 되었을 땐 엉엉 울고 싶을 만큼 끔찍한 감동을 느꼈다. 기가 막혔다. 희열이 극에 달하니 저속한 쾌락도 성스러운 합일이 되는구나. 꽉 끼워 맞춘 두 몸뚱이를 벌벌 떨며 이제 비로소 하나라는 기적을 만끽했다. 토사가 무너진다. 바람이 거세 눈을 뜰 수조차 없다. 두 팔을 친친 감아 꼭 껴안았다. 입을 맞추고, 또 입을 맞췄다. 서로의 이마를 꼭 붙인 채 서로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서로 꽉 맞물린 시선은 무엇으로도 풀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촉촉하게 눈시울을 적신 연인을 따라 자신도 푹 젖어들었다. 이대로 충분했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