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1992년 1월. 장인환(張仁歡)
“……그럴 수밖에 없었어. 급한 일이라……. 음, 그래. 미안. 선배들껜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줘. 난 거의 다 암기했으니까 모레 테스트도 염려하실 필요는 없다고.”
혹시 자신의 기척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기라도 할까, 인환은 숨을 죽인 채 얼음땡이 됐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사타구니와 아랫배 근처를 오가며 조물조물 애무 중인 연인의 손길에 그만 교성을 내지르고 말 터이다. 등 뒤로 연인의 품에 안겨 있어, 연인이 말을 할 때마다 달라붙은 피부를 통해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들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말 그대로 한 몸 같아서, 당당하게 거짓말을 하는 연인의 강심장이 새삼 경탄스러웠다. 인환은 급한 집안 사정으로 연인을 만나러 온 연인의 친척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섹스 후 나른해진 몸을 서로 겹친 채 쾌락에 빠져 있다는 것을, 수화기 너머 상대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급조된 거짓말을 술술 풀어헤치는 연인의 어조는 그만큼 담담하고 천연덕스러웠다.
“아니, 숙소엔 늦게라도 돌아가야지. 키도 따로 갖고 있으니까 너흰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눈 붙이도록 해. 다들 많이 피곤하잖아. 음, 그래. 좀 더 빨리 연락 못 한 건 정말 미안하다. 알았어. 그래, 쉬고…… 내일 보자.”
전화 끊어지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어렴풋이 들렸다. 그래도 인환은 연인이 팔을 쭉 뻗어 침대 헤드 테이블 위에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줄곧 숨을 참고 있었다.
“……어깨가 굳었습니다. 긴장 푸세요. 이제 괜찮으니까.”
수화기를 내려놓았던 오른손이 그대로 인환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소중한 듯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에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오르가슴을 빌미 삼아 그토록 울어댔는데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었나? 꿈만 같았다. 이렇게 어루만지고, 섹스 하고, 함께 몸을 꼭 붙인 채 따스한 시간을 흘리고 있다니.
혹시라도 또 사납게 내쳐질까 차마 만날 생각은 하질 못했었다. 무척 다정해진 연인이지만, 마치 1년 전쯤으로 되돌아간 듯 정말로 아끼는 친구처럼 정성을 쏟아주고 있는 요즘의 연인이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엔 연인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이 늘 남아 있었다. 전부 다 받아들여지진 않으리란 걸, 아무리 친구라도 자신의 어느 한 부분, 연인의 심기를 거스르는 부분은 분명 남아 있다고 확실히 아는 까닭이었다. 절대로 선을 넘어선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선’ 안에 포함된 것이야말로 그의 프라이빗한 개인 생활이란 것을. 그의 가족, 그의 학교, 혹은 그의 미래 같은 것들…….
중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조차도 한번 가본 일 없는 연인이라 했다. 대학에 들어가고도 1년 내내 엠티 한 번 참가하는 걸 못 봤었다. 모두 동생들 때문이라 했다. 어린 동생들을 떼어두고 한가하게 놀러 다닐 여유가 없었노라고. 그런 그가 일주일이나 동생들을 떼어놓고 공부를 하러 내려왔다. 의대생이라면 반드시 참가해야만 하는 스터디 여행이었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와야만 했던 거다. 그야말로 프라이빗한 개인 영역이었다. 친구의 호의를 고스란히 이용하고 있는 흑심 품은 게이 주제라면 절대 침범해선 안 되는 영역이었다. 그럼에도 참지 못했다. 일주일은커녕 단 닷새조차도.
아니, 이틀이었다. 이틀이 한계였다.
이상했다. 정말로 자신은 미친 게 아닐까 진심으로 회의가 들었었다. 그의 목소리도 못 듣고, 그의 얼굴도 볼 수 없었던 이틀이 지나고 나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공부하는 일주일 동안 자신도 열심히 그림이나 그려야지 하고 애초에 품었던 참한 생각은 까맣게 날아갔다. 오로지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 오는 건 연인의 목소리, 연인의 얼굴, 연인의 냄새, 연인의 몸…… 연인과의 섹스였다!
몇 달째, 이틀에 한 번꼴로 연인과 섹스를 했다. 아니, 그저 페팅이 전부인 유사 섹스를 했다. 완전히 한 몸이 되는 건 고작해야 일주일에 한 번, 혹은 그보다 긴 열흘에 한 번. 아마도 그래서인가 보다고, 화냥기에 완전히 침몰해버린 것 같은 스스로의 몸에 저주를 퍼부었다. 자위나 하라고, 그렇게 못 견디겠으면 그의 사진이나 들여다보며 음란한 구멍 안에 딜도라도 집어넣으라고, 욕을 퍼부어주었다. 그렇게 하루를 견뎠다. 물론 다음 하루도 그렇게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침이 지나니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겨 더 이상 못 보게 되면 어떡하나, 방정맞은 망상조차 일었다. 저녁이 되니 당장이라도 차를 몰고 뛰쳐나가고 싶어 발광했다. 미친놈처럼 머리를 쥐어뜯으며 참으라고, 진짜 제정신이냐고, 또 연인의 미움을 받고 싶으냐고 흐느꼈다. 정말로 못 말리는 화냥기였다.
결국 4일째의 밤을 채 넘기지 못한 채 심야의 국도를 달려 양평에 왔다. 깊은 밤. 엄청난 한파 속의 리조트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드문드문 켜진 불빛만이 어느 미친 게이의 외로움을 위로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리조트 이름은 알아도 정확히 어떤 객실에 묵는지는 알지 못했다. 내선 전화번호도 알지 못했다. 나흘 내내 전화 한 통 안 해준 연인이 서운해 눈물이 났다. 결국 콘도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운 채 어디로 가야 할지, 아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 흔들리며 흐느끼기만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냈더니 새벽이 왔다. 희뿌옇게 밝아오는 여명에 조금 제정신이 들었다. 판단력도 조금 돌아왔다. 생각을 시작한 넋이 연인의 습관을 더듬었다. 만약 평소의 연인 그대로라면 새벽 운동을 빼먹지 않을 것이다. 시계를 살폈다. 6시 45분. 여름이라면 이미 운동을 마치는 쪽에 가깝지만, 언제든 거의 동틀 무렵 운동을 시작하는 연인은 밤이 길어지는 딱 그만큼 겨울 운동 시간도 늦추고 있다. 그렇지. 요즘의 운동 시간은 아침 7시쯤. 시계를 봤다. 7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리조트 본관인 콘도 정문 쪽으로 차를 이동시켰다. 이 위치에선 리조트의 전경을 대부분 살필 수 있었다. 운동장으로 보이는 저 아래 커다란 잔디 구장은 물론이고 특별히 더 열심히 주변을 살폈다. 곳곳에 켜진 가로등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5분이 채 되지 않았다. 커다란 장신의 그림자가 50여 미터쯤 떨어진 별채 건물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본관보다 약간 지대가 낮아 그림자의 움직임은 너무나 잘 눈에 들어왔다. 꽤 떨어진 거리였지만 알 수 있었다. 모를 리가 있는가. 이 추위에, 이 새벽에, 게다가 공부하러 내려온 겨울 리조트에서 운동을 하러 나오는 부지런한 인간이 달리 몇이나 있을까. 부지런하다 못해 철두철미한 인간이. 저 압도적인 장신도, 단단한 근육질의 몸도, 그럼에도 깃털처럼 가벼운 저 몸놀림까지, 세상에 똑같은 인간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 보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반갑고 기뻐서 눈물이 핑 돌았다. 눈동자 가득, 가슴 가득 연인을 품어 안았다. 포근한 만족감과 더불어, 이틀이 지나면서부터 미치도록 피를 끊게 하던 광기가 차분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 시간여가량 연인을 바라보았다. 더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가 차에서 내리고도 싶었지만, 차분해진 이성과 함께 분별력도 되돌아와 있었다. 그대로 멀리 떨어진 차 안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연인만 바라보았다.
연인이 스트레칭을 하고, 달리고, 다시 스트레칭을 하는 사이 날이 완전히 밝았다. 리조트도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마침내 운동을 끝낸 연인이 다시금 숙소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커다란 장신이 건물 모퉁이 안쪽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거듭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치 함께 운동을 끝내기라도 한 것마냥 뿌듯한 만족감이 들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몇 시간째 차 안에서 꼼짝 않은 몸도 그제야 피로를 호소하는 게 느껴졌다. 잠시 더 연인을 훔쳐볼까 하다가 이내 단념했다. 앞으로도 시간은 많았다. 무리하다가 혹시라도 실수를 하면 그런 낭패가 없을 거다. 지금은 약간이라도 쉬어두는 편이 현명하리라.
차를 뒤로 뺀 후 근처의 다른 숙소를 찾아 달렸다. 이정표의 지시대로 5분쯤 달렸더니 아담한 모양새의 5층 건물이 인환을 반겼다. 체크인을 한 뒤 외투만을 벗은 채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곯아떨어졌다. 기절하듯 잠이 든다는 말이 딱 맞았다. 지난 사흘간의 초조와 불안과 열기와 그리움이 수렁 같은 잠을 불렀다.
지독한 공복감 속에서 다시 눈을 뜬 것은 점심도 한참을 지난 무렵이었다. 얼떨떨한 시선으로 낯선 방 안을 굽어보았다. 창 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린 지 꽤 된 모양으로 몇 센티는 족히 쌓인 채였다. 우아 하고 어린애처럼 기쁨의 탄성부터 터져 나왔다. 눈 속에서 연인과 함께 겨울 리조트에 있다니(물론 연인은 모른다 해도)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었다. 게다가 올해에는 유난히 눈이 박하지 않았던가.
룸서비스로 거의 48시간 만의 식사를 했다. 간소한 한식이었는데 꿀맛이 따로 없었다. 식후연이 간절했지만 참았다. 끊으려고 몇 달째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거의 끊어가고 있으니 조금만 더 참으면 될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는 샤워를 하고 정성껏 몸단장도 했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고, 또 좀 창백했지만 연인을 직접 만날 것은 아니니 괜찮았다. 정신없이 내려오느라 옷도 아무거나 손닿는 대로 주워 입었었는데 그리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단단히 차려입고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살피니 오후 4시쯤. 눈은 거의 5센티를 가뿐히 넘겨, 조만간 10센티에 육박할 만큼 쌓이고 있었다. 낑낑대며 차에 스노체인을 장착하고 단숨에 리조트로 왔다. 별로 눈에 띄진 않으면서 리조트 전면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의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마냥 기다렸다. 아침처럼 또 실컷 볼 수 있을까, 그리 많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연인은 눈이나 비가 내릴 때의 질척함을 질색한다. 날이 이러니 어쩜 내일 아침까지 숙소에 틀어박힌 채 꼼짝 않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해도 별로 실망스럽진 않다. 초조하지도 않다. 그저 이렇게 죽치고 있다 보면 언제든 다시 한 번쯤은 볼 수 있겠지 싶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남은 이틀을 버틸 수 있을 거다. 아니, 굳이 버티는 것도 아니다. 이미 함께 있지 않은가. 연인은 몰라도 자신은 안다. 이렇게 둘이 함께 있다는 걸. 함께 남은 이틀을 보내고 살짝 먼저 서울로 올라가면 완전 범죄지, 뭘. 핫핫. 그저 감개무량, 감사의 웃음이 절로 난다. 서울에서의 사흘이 지옥이었는데, 자신은 어느덧 이렇게 행복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며 사방이 온통 눈 천지가 되어가는 걸 그렇게 조용히 구경했다. 가족 단위, 혹은 연인들, 혹은 연수를 나온 기업체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점점 더 본관 앞으로 몰려나와 너도나도 눈장난을 즐기는 행복한 모습도 봤다. 부럽다는 생각이 잠깐, 그래도 이걸로 충분하다고 허세를 부리는 것도 잠깐, 따스한 히터 기운에 잠시 졸다가 소스라쳐 깨어나기도 잠깐…… 그렇게 세 시간여가 흘러갔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쉼 없이 쏟아지는 함박눈도 여전했다.
실내등을 켜고 무심히 전방을 주시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별채 쪽으로부터 익숙한 실루엣이 등장한 것은.
두근…….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상체를 휙 빼곤 눈을 부릅떴다.
주변 사람들보다 머리통 한 개 반은 더 크고 늠름한 장신의 몸이 본관 앞 작은 실개천 쪽으로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양손을 재킷 주머니에 찌른 채, 무심한 시선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걷고 있었다. 연인이었다.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수시로 살피게 되는 별채 쪽이어서 더 빨리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의 숨을 멈추다시피 하고서 핸들을 꼭 움켜쥐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뛰었다. 어쩐지 얼굴이 빨개졌다가, 다시 조금 창백해졌다. 마치 연인도 자신을 바라보기라도 하는 양. 물론 아니었다. 연인은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지만 주변의 무수한 놀이패들을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오히려 힐끔거리며 주시를 하는 쪽은 반대편들이었다. 깊게 눌러쓴 후드와 친친 감긴 목도리로도, 멋대가리 없는 낡은 모직 팬츠나 오리털 패딩 재킷으로도 연인의 막강한 포스는 채 다 숨기지 못했으니까.
개천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지나 막 본관 앞 광장으로 접어든 연인은 잠시 멈춰 선 채 인파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본관 쪽으로 시선을 가져가기도 하다가 곧 마음을 정했는지 리조트 진입로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기왕에 세동을 거듭하던 심장이 아예 철렁 내려앉았다. 주차장 쪽이었다. 연인은 인환이 타고 있는 차 앞으로 곧장 직진해 다가오고 있었다!
맙소사! 핸들을 쥔 두 손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생각이 하얗게 비워졌다. 아니, 수만 가지 생각들이 뒤죽박죽 엉키고 있었다.
……마주치기 전에 그냥 도망쳐버릴까? 아냐. 설마 차를 자세히 보려구. 아마 알아보지 못할 거야. 요즘은 BMW도 흔해빠졌는걸. 게다가 이렇게 엄청난 눈에 덮여 있잖아. 시야를 거의 가릴 정도로 엄청난 함박눈이 내리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그래도 만약 알아본다면…… 하느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연인이 채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까지 왔을 때, 인환은 피가 마르는 긴장을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서 도저히 더는 바라볼 수가 없어서였다. 무서워하는 건지, 아니면 기대를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의 마음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몇 초……. 시선은 피했지만 인환을 스쳐 좀 더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연인만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뽀득거리는 발자국 소리는 물론, 마치 숨소리까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물론 착각일 터였다. 그리고 다시 몇 초…… 아니, 몇 십 초…… 문득 서늘한 한기가 등줄기를 싸하게 훑으며 달려 나갔다. 바닥을 향했던 고개가 도로 홱 치켜 올라갔다.
일거에 숨이 멈췄다.
되돌아온 시커먼 거구의 그림자가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심장도 찰나 동안 뛰기를 멈췄으리라.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쏘는 듯이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 순간 틀림없이…… 인환은 잠깐 의식을 잃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너무 미안하니깐 이젠 미안하단 소리도 잘 못 하겠다…….”
사타구니 틈으로 성기와 음모를 쓰다듬느라 젖어든 연인의 손이 위로 올라가 유두를 조몰락거린다. 연인의 손에 묻은 자신의 체액이 도로 자신의 몸에 뒤범벅이 되는 모양이 어쩐지 에로틱하면서도 친밀하게 느껴진다. 엉덩이 근처에 닿아 있는 연인의 것도 흠뻑 젖은 채다. 몇 번이나 했다. 정말로 걸신들린 듯이 해버렸다. 온 침대가 질척해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그의 체액으로 가득 들어차 있는 내벽 안에서도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물기를 내보내주고 있다. 자신의 회음부를 거쳐 허벅지 아래까지 흘러내린 질척한 액체는 자신을 흠뻑 적시는 것도 모자라 밀착돼 있는 연인의 성기와 음모 또한 끊임없이 적셔대고 있다. 자신은 연인을 적시고 연인은 자신을 적신다. 역시 무척 야하면서도 친근하다. 조금도 부끄럽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팔베개를 만들어주고 있는 다른 손이 상반신을 감싸듯 어깨를 끌어안은 채 모로 세운 인환의 팔 안쪽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다. 정말로 꿈같다. 반쯤 미쳐서는 제멋대로 연인의 영역을 헤집었는데도 연인이 화를 내지 않다니. 게다가 이렇게 다정하게 안아주다니.
“……어떻게 그새를 못 참냐…… 나도 참, 내가 다 질린다, 그지?”
자신의 어깨를 감고 있는 연인의 팔을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덧붙여본다. 늘씬하게 뻗은 연인의 손가락들을 하나하나 조물거리다가 갈색 솜털이 무성한 사내다운 팔등을 쓱쓱 빗질하듯 손가락으로 굵어도 본다. 자신을 만지는 애무의 손길이 너무나 다정하기만 해서, 저절로 어리광이 새고 저절로 수다가 샌다. 일곱 살 연상이라는 사실도 말짱 까먹어버리자고, 뻔뻔한 마음이 속살거린다. 연인의 품에 등을 기댄 채라 시선을 느끼지 않아 더 그런 것 같다. 연인의 아름다운 검은 눈도, 때론 뜨거운 듯, 때론 쏘는 듯 깊은 눈빛도 인환에겐 꽤나 버거운 자극인 탓이다. 볼 때마다 해롱해롱 정신없이 매혹되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심장이 조여드는 것처럼 두려움을 주기도 하니까.
“……이틀이 지나니까 진짜 미칠 것 같더라. 보고 싶고…… 목소리도 듣고 싶고…… 조금…… 아니, 솔직히 많이 안기고 싶고…… 정말 이상하지?”
“…….”
대꾸는 안 주지만 뜨겁고 깊은 숨결이 정수리 쪽에서 뒷목덜미로 흠뻑 쏟아진다. 곧 목덜미 속으로 힘껏 파묻히는 연인의 입술이다. 기분 좋은 전율이 와다다다 달려 나간다. 물기가 느껴지는 도톰한 입술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쪽쪽, 가벼운 립 키스를 거듭하고 있다. 살랑 하고 봄바람 같은 웃음이 샌다. 아아, 좋아라. 좋아라, 정말…….
“……생각해보니깐 이틀에 한 번씩 꼬박꼬박 하기 때문인 거 같애. 그…… 물론 끝까지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도 꽤 야한 짓이라서…… 삽입하는 거만큼 기분 좋기도 하고…… 아니, 솔직히 어떤 땐 삽입하는 것보다 더 좋을 때도 있더라.”
“…….”
“……훗…… 네 얼굴도 더 자세히 보고 그러니까…… 정말로 어떤 땐 안기는 것보다 더 황홀해져서…….”
“…….”
“암튼 습관이란 거 정말 무섭잖아. 섹스 중독도 무서운 거라고 그러던걸, 사람들이. 게다가 난 너한테 홀딱 반한 상태니 더 심하게 중독되는 것 같더라구.”
“…….”
“저, 그래서 말인데, 규칙적으로 이틀에 한 번씩 하는 건 그만두자, 위야. 응? 너도 별로 안 좋아하잖아. 오늘처럼 쌓여야 겨우겨우 기분 좋게 하곤 하잖아. 그러니까 그럴 때만 하자. 응? 나도 괜찮거든? 너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해도 좋고, 열흘에 한 번도 좋고…….”
“안 됩니다.”
어딘가 서늘한 말투에 잠시 몸이 굳었다. 그러나 애무의 손길도 여전히 다정했고, 목덜미와 어깨와 등을 오가며 소중하게 립 키스를 해대는 것도 여전해서 금세 또 흐물흐물해졌다.
“……안 돼?”
“예. 물론 달리 자극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성욕이 치솟는 건 대체로 일주일 정도의 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전 이틀에 한 번꼴로 고객들과 섹스를 했습니다. 이틀 정도가 되면 자연스럽게 정이 차오르기 때문에 어떻게든 빼주고픈 욕구를 느낍니다. 그야말로 습관인 셈이죠.”
“……그런…….”
“선생님과 이틀에 한 번 페팅을 하는 것은 그래서 즐겁습니다. 못 참을 정도로 심한 성욕을 느끼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무심해지지도 않는 거죠.”
“……아아.”
“그래서 선생님은 싫으신 겁니까?”
“에?”
“저 때문에 중독이 되시는 거요.”
“……아, 아니…….”
“정 꺼려지신다면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니 참아보죠. 선생님께서 꺼리시는 일을 괜히 제 나쁜 습관 때문에 계속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럼 그냥 일주일에 한 번만 하는 것으로…….”
“아, 아냐!!! 아냐, 위야!!! 그런 거 아냐!!!”
저도 모르게 펄쩍 뛸 듯이 외쳐 부정했다. 동시에 홱 돌아간 몸 탓에 연인의 다정한 포옹이 순간 느슨해졌다. 시선이 마주쳤다. 여느 때처럼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깊은 눈길이었다.
“……꺼리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난…… 이렇게 중독돼서 괜히 더 너를 귀찮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해서…….”
“…….”
“……오늘도…… 이렇게 버티지 못하고 공부하는 데 찾아오기나 하고…… 어른답지 못하게 폐나 끼치고…….”
“폐 아닙니다. 저도 많이 쌓였었으니까요.”
“……그, 그렇게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아무튼 나야 좋지. 넌 자꾸만 까먹는 거 같은데, 난 널 정말 좋아한단 말야. 너랑 어떤 걸 하든 좋아서 죽는데…… 싫을 리가 없잖아. 너만 좋다면 난 언제든…….”
“…….”
더 이상은 어쩐지 뻔뻔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뜻은 제대로 전달되겠지. 영리한 연인이니.
“……그러니까 네 마음대로 해도 돼. 내가 좀 귀찮게 해도 괜찮은 거면 굳이 이틀에 한 번씩 하는 거 그만둘 필요는 없어. 네가 기분이 좋다면 더더욱 그렇지.”
계속 시선을 마주하기가 창피해서 연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연스레 새는 사내놈의 어리광을 부디 연인이 혐오스러워하지 않길 기도하며. 양팔을 올려 살금살금 연인의 등을 껴안자 다행히 기다렸다는 듯 마주 안아주는 연인이다. 쪽쪽.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립 키스도 그대로, 등줄기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다정도 그대로. 팔랑팔랑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 헤에 하고 입술이 저절로 벌어진다. 쪽쪽. 자신도 연인의 황금빛 가슴골에 큰 소리로 입을 맞춰주었다. 그러자 푸들거리는 종마의 다리 근육처럼 볼록 융기한 가슴 근육이 크게 들썩였다. 그게 또 기분 좋아서 헤헤헤, 바보처럼 웃음을 걸었다. 연인의 양팔에 힘이 더해졌다. 도발에 대한 응징처럼. 일순 꽉 조여든 상반신에 아야 하고 또 어리광을 부렸다.
“……계약이 유지되는 한 제 몸은 온전히 선생님의 것입니다.”
조금 가라앉은 중저음이 감미롭게 덧붙인다.
“눈치 보지 마시고 언제든 선생님 취향대로 즐기셔도 된단 뜻이죠. 그런데도 늘 이렇게 제 배려를 해주시니, 솔직히 어찌해야 할까 고민 될 때가 많습니다. 고마운 마음이 더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정말로 고마워하는 듯,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에서 우정이 뚝뚝 떨어진다. 감격이 울컥울컥, 잔뜩 빨개진 얼굴로 마구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 고맙긴 무슨! 나, 나야말로 진짜 고맙지…….”
잔뜩 쉬어 터진 목소리로 겨우 덧붙였다. 뭔가 더 고마운 마음을 전할 감동스러운 멘트를 궁리해보지만, 보태봤자 마음에 품은 감정의 단 1프로도 표현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멈춰버린다. 그저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바라보는 시선에서, 전해주는 체온에서 감정이 조금이라도 전해지길 기원할 뿐이다.
“……눈 그친 것 같지?”
마음이 평온하면 저절로 흘러나오는 애교를 담뿍 담아 또 수다를 시작해본다. 연인의 따스한 품 안에서 가물가물 잠이 드는 나른한 기분도 좋지만, 연인의 섹시한 중저음을 듣는 것은 몇 배나 더 짜릿하게 좋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말수가 적은 연인인데, 지난 닷새 동안이나 저 그리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잔뜩 굶주렸던 허기가 가라앉으려면 오늘 밤 내내 연인에게 말을 붙인대도 부족할 것만 같다.
“예. 창 밖을 보니 확실히 눈발이 보이질 않네요.”
귓가에서 둥둥 울리는 중저음이 리듬 좋은 북소리 같다. 정수리 위에 뿜어지는 연인의 숨결 또한 행복한 파도 소리.
“굉장히 많이 쌓였을 거야.”
“그렇겠죠.”
“눈사람 만들고 싶다.”
“후후…….”
“눈싸움도 하고.”
“기운도 없으시면서 무슨 눈싸움을요.”
“헤헤, 하긴.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긴 하다.”
“체력 돌아오시면 한 번 더 할 겁니다. 눈싸움 버전도 괜찮겠죠.”
“웃! 안 돼! 취소, 취소! 진짜 더 이상은 안 돼. 못 해. 진짜야.”
“하하하, 압니다. 일단 오늘 밤은 저도 실컷 했으니까요.”
“……곧 돌아가야지?”
저도 모르게 내뱉고는 후회한다. 금세 기분이 시무룩해진다.
“아마도요. 저도 선생님과 아침까지 함께 있고 싶지만 그럼 다들 절 패 죽이려고 할 겁니다. 창일이가 꽤 눈치가 빠르거든요. 대충 믿어주는 것 같긴 했는데 외박까지 하면 진짜 의심할 거예요.”
“그건 안 되지.”
시무룩해졌던 기분이 ‘의심’이란 한 마디에 금세 걱정으로 돌변한다.
“동기들이야 어차피 여자친구로 알고 있으니 그저 놀림이나 더하고 말 테지만, 선배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골학 하러 와서 연애질이나 한다고 찍히겠죠. 벌써 마스터했다고 변명한들 자세부터 글러먹었다며 패려고 들걸요? 의대가 좀 그렇거든요. 선후배 관계가 철저해서 선배들한테 찍히면 꽤나 고달파지죠.”
“저런! 그럼 정말 조심해야겠네.”
“그래도 새벽까진 괜찮을 겁니다. 선배들이야 일찍 잠들 거고, 동기들도 서너 시쯤엔 다들 곯아떨어질 테니 그때 몰래 들어가면 되겠죠.”
“……그래도 괜찮을까? 어쩐지 좀 불안하다.”
“걱정 마시고 잠깐이라도 주무세요. 새벽에 깨워드릴게요.”
“……배 안 고파?”
“선생님은요?”
“조금.”
“그러고 보니 저녁 안 드셨죠?”
“헤헤…….”
“뭐라도 해 먹을까요?”
“이 시간에? 여긴 그냥 작은 펜션이라 슈퍼도 없는걸? 낮엔 주문하면 룸서비스를 해주던데 지금은 밤이라서 아마 안 될걸?”
“리조트로 가서 사 오면 되죠. 차로 5분도 안 걸리니까요.”
“……그건 너무 귀찮지 않아? 게다가 괜히 갔다가 동기들이랑 부딪치기라도 하면…….”
“아닐걸요. 다들 암기하느라 정신없을 겁니다. 일주일 내내 밥 먹고 자는 거 빼면 숙소에 박혀서 책만 들여다본 애들인걸요.”
“그래도…….”
“더 늦기 전에 갔다 오죠. 실은 저도 저녁을 걸러서 꽤 허기가 졌었거든요.”
“정말?!!!”
“예. 금방 갔다 올 테니 기다리세요, 선생님. 졸리면 그냥 주무셔도 되구요. 준비되면 깨워드릴게요.”
더 이상 미적거릴 틈도 없이 연인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포근한 포옹도, 다정다정 애무도 순식간에 욕실로 사라져버려 한참 동안 멍청히 욕실만 바라봐야 했다. 정말 부지런하기 짝이 없는 연인이었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온몸을 감싸고 있던 연인의 따스함이 아쉬워 울컥 목이 멨다. 밥 먹는 것보다 함께 있는 게 천만 배는 좋단 말야, 속으로 삐죽거렸다. 차라리 말을 꺼내지 말걸, 후회도 잠깐 했다. 그러나 연인도 배가 고팠다는 말을 떠올리며 겨우 섭섭해진 심사를 달랬다. 10분쯤 후, 말끔히 샤워를 마친 연인이 샴푸 냄새를 풍기며 걸어 나왔다. 젖은 몸을 닦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객실 구석구석 널려 있던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챙겨 입더니 싱긋 웃음을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방을 나가버렸다. 갔다 온다는 말도 다시 안 해준 것을 깨닫고 섭섭한 기분이 업그레이드 됐다간, 이내 헤헤 웃으며 연인의 체취가 짙게 배 있는 베개를 끌어안았다. 눈을 꼭 감고 흠씬 들이마셨다. 밖에서 어렴풋이 차 소리가 들렸다.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몇 번을 세야 연인이 돌아와줄까. 행복한 연상이 끝도 없었다.
숫자를 세다 그대로 잠이 들었던가 보았다.
코끝으로 파고드는 음식 냄새에 겨우 눈을 떴을 땐, 이미 두어 시간쯤이 지난 밤 11시 무렵이었다. 깨끗이 닦여서 보송보송해진 몸과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떡국과 김치가 깨어난 인환을 반기고 있었다. 우성리조트까지 가서 떡국 재료와 김치들을 사 온 연인은 음식을 만드는 것도 모자라 기절하듯 잠든 자신을 말끔히 씻기기까지 했다.
채 감격을 실감하기도 전에 아직 잠에 취한 얼떨떨한 얼굴로 연인의 팔에 안기다시피 식탁으로 가 함께 식사를 하고서야 겨우 제정신이 들었다. 떡국 두 그릇을 뚝딱 비워버린 연인은 인환이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인환의 먹는 모습을 굽어보았다. 눈길은 다정하기만 해서, 때때로 목이 메는 바람에 식사 시간이 더 늘어나야 했음은, 또한 인환만 아는 사실이었다.
잠깐 눈을 붙이고, 또 배 속이 든든해지자 부쩍 기운이 났다. 기왕에 철인의 체력을 자랑하는 연인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잠깐 TV를 틀어 전국적인 폭설 소식을 듣다가, 창 밖에 대단한 존재감으로 쌓여 있는 눈 더미를 구경도 하다가, 결국 서로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그대로 베드인을 해버렸다. 기운나면 한 번 더 하겠다는 다짐을 철저하게 지켜준 연인이었다(그야, 솔직히 말하면 한 번이 아닌 두 번이었지만).
그대로 기절하듯 두어 시간쯤을 더 잔 인환이 다시 깨어난 시각이 새벽 3시쯤. 연인은 리조트로 돌아갈 채비를 완전히 끝내놓고 있었다. 역시 또 보송보송해진 몸에 깨끗해진 침대 시트가 연인의 수고를 증거하며 깨어난 인환을 반겼다. 틀림없이 잠 한숨 자지 않았을 터였다. 생생한 활기에 넘치는 얼굴에서 수면 부족의 낌새라곤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지만.
잠시 또 얼떨떨해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옷을 주워 입었다. 이제야말로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었다. 혈관을 따라 서늘하게 퍼지는 섭섭한 기분이, 채 다 떨어지지 못한 수면욕을 일거에 가져가버렸다. 연인은 또 가만히 옆에 서서 옷을 입는 인환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다정하게 풀어진 얼굴로, 때때로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음을 보내기도 하면서.
올 때처럼 연인이 운전을 하고, 자신은 조수석에 앉아 연인만 바라보았다. 리조트로 되돌아가는 5분은 어째 올 때보다도 더 쏜살같은지 마냥 속이 상했다. 선배들 눈치 봐서 내일 잠깐 빠져나올까요? 아, 자정이 지났으니 오늘이로군요. 이 시간쯤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시무룩한 자신의 표정을 슬쩍 일별하며 연인이 물었다. 당장에 예스를 외치고 싶어하는 철없는 심보를 꾹꾹 밟아버리고 어른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배들한테 찍히면 큰일이잖아. 절대 안 돼. 짐짓 근엄하게 덧붙였다. 자신의 허세가 보이는지, 연인이 전방을 주시한 채로 빙그레 웃음을 흘린다. 그럼 올라갈 땐 함께 가요, 선생님. 오후까지 뒤풀이를 하진 않을 테니 대충 봐서 펜션으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괜찮죠?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또 물어온다. 달래는 듯한 어조였다. 어쩐지 철부지로 완전히 낙인이 찍혀버린 것 같아서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이 헤 벌어지며 만족스러운 웃음이 터진다. 전자동으로 끄떡거리고 있는 고개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운하고 섭섭했던 심사는 금세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40시간도 채 안 남은 행복한 귀경길을 공상하는 사이 차가 리조트에 도착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그토록 소란스러운 활기에 넘치던 리조트도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간간이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지만 거개가 다 리조트 직원들 같았다.
연인과 마주쳤던 바로 그 장소에 차를 세운 연인이 밖으로 빠져나갔고, 자신도 자연스레 연인을 따라 내렸다. 연인의 일행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이 스쳤지만, 새벽 4시를 향해 가는 데 설마 부딪치랴 싶었다. 연인 또한 딱히 제지하지 않아서 더 안심했다. 헤어짐을 안타까워하는 자신처럼, 연인도 조금쯤은 아쉬워하는 게 아닐까 싶어 기뻐졌다.
추운데 왜 나오세요? 슬쩍 주변을 살피며 연인의 옷깃을 부여잡자, 걱정이 담긴 중저음이 나지막하게 떨어진다. 어서 가셔서 좀 더 주무셔야죠. 덧붙여진 음성도 상냥하기 그지없다. 그냥. 별이 너무 밝아서. 한참을 궁리하다 참으로 창의적이지 못한 대꾸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별이요? 하고, 고개를 훌쩍 하늘로 치켜드는 연인이다. 금빛 가로등에 비친 선명한 이목구비가 아름답다. 언제 봐도 조각처럼 완벽한 내 연인의 얼굴. 활처럼 휜 목덜미 가운데, 불쑥 솟은 목울대를 만져보고 싶어 좀이 쑤셨지만 참았다. 그저 좀 전부터 끈질기게 놓지 않고 있던 연인의 패딩 재킷 자락을 좀 더 확실하게 움켜쥐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저쪽에 천체 망원경도 몇 대 설치돼 있던데 가볼까요? 느닷없이, 좋아서 팔짝 뛸 만한 의외의 멘트가 떨어졌다. 별이 뜬 걸 보니 날이 완전히 갠 모양입니다. 정말 서울보단 좀 더 많이 보이긴 하네요. 공기도 공기지만 불빛이 그만큼 적어서겠죠? 한동안 하늘을 굽어보며 덧붙여진 연인의 말이었다.
연인이 슬며시 손을 쥐어온다. 연인의 옷깃을 잡고 있던 바로 그 손이었다.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쥐고 있던 자신의 손가락을 살살 풀어헤치더니 그 빈틈을 비집고 깍지를 낀다. 가슴이 몹시 설레었다. 당장 펜션으로 쫓겨 가진 않을 모양이었다. 쫓겨 가는 게 다 뭐냐. 좀 더 함께 있는 것도 좋아 죽는데 별구경까지 시켜준단다. 맙소사, 이런 횡재라니.
“……처음 산책하다가 발견했죠. 콘도 뒤로 가벼운 등산 코스가 있는데 그 초입쯤에 있더라고요. 이틀 전 밤에 보니 대충 배율도 맞춰져 있길래 한참을 구경했죠.”
연인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자신의 불편하고 느린 보폭에 딱 맞춘 느릿한 걸음걸이였다.
“……겨울철 별자리라 꽤 볼 만하더군요. 가장 밝은 시리우스도, 그 옆에 프로키온도, 베텔기우스, 알데바란, 리겔, 그리고 카펠라도……. 음, 새벽이라 거의 기울고 있겠지만요.”
안 그래도 아름다운 중저음이 연달아 로맨틱한 이름들을 토해내고 있으니 그야말로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발목까지 밟혀드는 불편한 눈 더미도, 옷깃 틈으로 점점 싸늘하게 다가드는 추위조차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춥지 않으세요?”
“어, 아니. 전혀.”
“별로 주무시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무리하시다가 몸살이라도 나실까 봐 걱정됩니다. 잠깐 둘러보시곤 곧 돌아가셔야 합니다?”
“……응, 그럴게. 바로 펜션으로 갈게. 별만 보곤…….”
뭐, 그것도 그때 가봐야 아는 일이고 하고 속으로 슬쩍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장인환 하고 찔린 양심이 연타로 보태지긴 했지만.
“……늦었구나.”
갑작스레 파고든 낯선 사내의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했다. 저도 모르게 마주 쥔 손에 힘을 주며 소리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인 역시 흠칫 몸을 긴장시키며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방향을 바꾼 순간, 기다렸다는 듯 싸한 담배 냄새가 맡아졌다.
“……긴가민가해서 따라와봤는데 맞네. 후후. 급한 집안일이라더니 데이트였나 보지? 다들 외박하는 게 아닌지 감시하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거야 원. 왕 대박이로구나, 문위.”
별채 단지로 이어지는 오솔길이었다. 연인의 숙소가 있는 방향이라는 걸 직감하는 순간, 뒤통수가 강타당하는 듯한 아득한 충격이 느껴졌다. 바닥으로 뚝 떨어진 심장이 엄청난 기세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말을 붙인 사내는 외투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엉거주춤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10여 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라 서로 표정까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키에 약간 마른 듯한 체구를 지닌 해사한 청년이었다. 고작해야 20대 중반도 채 안 돼 보이는. 잘생긴 콧날과 섬세한 느낌을 주는 입술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무테안경 탓에 눈빛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청년은 추운 듯 어깨를 조금 웅크린 자세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선배님.”
뾰족한 기색이 완연한 대꾸가 연인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마주 쥔 손에 순간 강한 악력이 가해지는 바람에 인환의 얼굴은 좀 더 창백해졌다. 이제라도 손을 놓을까, 다급한 궁리가 스쳤다. 한편으론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절망적인 판단도 들었다.
“……무섭네. 얼굴 좀 펴라, 문위. 잡아먹겠다는 것도 아닌데. 이건 내게도 꽤 곤란한 교통사고라구.”
추위로 굳은 입술이 슬쩍 말리며 청년이 웃는 게 보였다.
“……무단으로 빠져나가 죄송합니다. 미리 선배님들께 양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미처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한파보다도 더 냉랭한 연인의 목소리가 위에서 떨어졌다. 공포로 뻣뻣하게 굳은 몸만 아니었다면 고개를 들어 연인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눈빛으로라도 애원했겠지. 보나 마나 시퍼렇게 살기를 피우고 있을 연인의 시선을 붙잡고. ……그럼 안 돼, 위야! 그렇게 당당하게 굴면 안 돼! 지금은 두 손으로 싹싹 빌어서라도 저 사람 입을 막아야 한단 말야! 선배라며! 찍히면 힘들어진다며! 호모라고 소문나는 것도 모자라 선배한테 시건방진 놈이라고 찍히면 어쩌려고 그래……!
연인과, 인환의 얼굴과, 또 마주 깍지를 끼고 있는 두 사람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던 청년이 주머니에 숨어 있던 손을 빼 입에 문 담배를 쥐곤 서너 번 더 빨아댄다. 반쯤 남아 있던 담배는 그것으로 거의 필터가까이 줄어들었다. 마침내 땅바닥에 던진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 난 청년의 시선이 다시금 연인의 얼굴로 되돌아갔다.
“……후후. 내 참, 이렇게 거만스러운 후배의 사과는 또 처음일세. 하긴 그게 너다운 거 같긴 하다. 별명이 ‘폐하’라더니 정말 딱이네.”
청년이 또 웃는다. 자꾸만 웃는 청년에 인환의 심장은 더 오그라붙는 것만 같았다. 연인과 마주 쥔 손이 전해주는 온기가 아니었다면 긴장과 두려움으로 애저녁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벌이라면 무엇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수고해주시는 선배님들께 죄송한 짓을 했으니 마땅히 사죄를 드려야겠죠.”
더 서늘해진 연인이었다. 단숨에 씹어뱉듯이 떨어지는 대꾸에 말 그대로 사죄의 의미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누군가 위협을 주거나 공격해 들어오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연인이란 걸. 더한 살기와 흉포함으로 맞선다는 걸. 어딘가 미적거리는 듯한 청년의 태도가 연인에겐 더한 위협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하긴 청년에게 들킨 자체부터 이미 엄청난 위협이었다. 덧붙여진 연인의 대꾸가 사죄의 말이 아닌 본격적인 선전 포고라는 걸, 인환도 알았고 눈앞의 이 해사한 청년 역시 알아들은 것 같았다. 청년의 웃음 띤 얼굴이 문득 차가워졌기 때문이다.
“……무엇이 죄송한 짓인데?”
추위로 파리해진 청년의 입술 끝이 좀 더 위로 올라갔다. 언뜻 웃음이 더 짙어진 것 같았지만, 그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열심히 골학 가르쳐주는 선배들이나 필사적으로 공부하는 동기들 몰래 빠져나가 연애질 하는 것? 아니면 그 대상이 남자라는 것?”
기절할 것 같았다. 마주 쥔 손을 통해 연인의 흉흉한 분노가 한계까지 솟구치는 걸 생생히 알 수 있었다. 당장 청년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내지른대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후자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 게이라는 게 그렇게 당당해?”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청년은 말을 하는 내내 연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추위 때문인지 남자치곤 좀 왜소한 어깨를 수시로 부르르 떨면서도, 입가에 머문 웃음에서도 또 낭랑한 목소리에서도 무언가 유쾌한 즐거움이 가득 뿜어 나왔다.
문득 마주 쥔 연인의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이었다. 마구잡이로 뛰고 있던 심장이 그야말로 아래로 뚝 떨어졌다. 비호처럼 재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간 연인은 어느새 청년의 코앞까지 다가서 있었다.
“……으, 우왓!!!”
휘둥그레진 인환의 눈에 오른손으로 청년의 사타구니를 힘껏 움켜쥐고 있는 연인이 보였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로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청년은 연인을 밀쳐내려는 듯 양손을 뻗어 연인의 팔과 어깨를 잡고 있었다.
“……무, 뭐!!……! 뭐 하는!!……! 큭!!!”
연인에게 닿아 있던 청년의 양손이 순식간에 연인의 자유로운 왼손에 의해 제압당했다. 한꺼번에 청년의 두 손목을 움켜쥐더니 옆으로 밀친 채 사정없이 힘을 가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신음을 참는 듯한 청년의 숨소리가 청년이 느끼고 있을 법한 고통을 선연하게 증명해주고 있었다. 청년의 사타구니를 움켜쥔 연인의 오른손은 적당히 힘 조절을 하며 청년의 성기를 애무하고 있었다.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청년의 파리한 입술에서 신음인지 교성인지 모를 애매한 헐떡임이 흐릿하게 퍼져 나왔다. 순간, 입술 끝만 야비하게 올라간 질 나쁜 웃음이 연인의 조각 같은 얼굴에 떠올랐다. 여전히 잘 갈무리된 살기가 형형했다.
“선배님은 죄송합니까?”
웃음기가 밴 매혹적인 중저음이었다. 청년의 귓가에 바짝 입술을 들이댄 채 연인이 달콤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제게 발정하실 때마다 죄송하시던가요?”
두근……. 미친 듯이 방망이질을 치던 심장이 이번엔 다른 이유로 극심하게 요동쳤다. 땅을 딛고 선 두 다리가 와들와들 떨렸다. 종류가 다른 공포가 더 공포스러운 것 같았다. 발정한다고? 연인에게 발정하곤 한다고? 설마…….
“……흑……! 흐응∼∼ 하앙∼∼ 그…… 그만해…… 제, 제발…… 알았다구…… 아, 알았으니까…… 크흑!!!”
잔뜩 억눌린 낯선 교성이 연달아 청년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흐느적거리는 몸이 잠깐 연인에게 기대는 듯하자, 연인이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뒤로 물러섰다. 청년은 곧바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쌓여 있던 눈 더미가 청년의 양손과 두 발에 뒤채이며 사방에 눈발을 날려댔다. 벌어진 두 다리를 통해 얼핏 드러난 청년의 사타구니는 확연하게 부풀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흐릿하게 덧씌워진 것도 수상쩍은 홍조였다.
“……비…… 빌어먹을…… 젠장…….”
미세한 떨림이 청년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청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나지막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어 긴 한숨이, 그리고 피식거리는 쓴웃음이 연달아 청년의 입술에 머물다 사라졌다.
“……알고 있었나? 티 안 내려고 그렇게나 기를 썼는데…….”
연인을 향한 질문이라기보단 스스로를 향한 조소 같았다. 연인은 묵묵히 청년을 내려다보며 여전히 사나운 살기를 뿜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저런 충격을 가까스로 수습한 청년이 이윽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엉덩이며 바지며 소맷부리며 온통 눈 범벅이었는데, 청년은 그것에까진 신경을 못 쓰는 듯, 약간 비틀거리며 선 채 연인에게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웬 횡재냐 싶었는데, 이래서야 피장파장이니 협박은 못 하겠구만.”
“…….”
“……그만 좀 노려보시지, 후배님? 전신이 따끔따끔한 게 진짜로 화살을 맞는 것 같다구. 내가 부러 훔쳐보려던 것도 아니고. 말했지? 이건 내게도 일종의 교통사고라고.”
“…….”
“……벼랑 위의 꽃이라지? 서울대 최고의 킹카는? 진짜 여자애들은 대단해. 어떻게 그리 딱 알아보는 걸까? 남자들의 가치란 걸? 하여간 그 말이 맞아. 넌 내게도 벼랑 위의 꽃이었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마초로 보이길래 차마 욕심 내볼 생각도 못 했었단 말이다. 근데 이렇게 딱 걸려주다니, 갑자기 홱 돌지 않겠어, 나라도? 너 진짜로 꼴리거든? 진짜로 예뻐. 아주 예뻐. 세상에 뭐 이런 예쁜 새끼가 다 있나 싶은 것이…….”
“…….”
“……상상도 못 했는데 같은 게이다 싶으니 확 욕심나잖아. 유혹하고 싶어서 미치겠다구. 지금도…… 협박이라도 해서 갖고 싶어졌다면 믿겠어?”
“…….”
“후흐흐, 교통사고라니깐. 진짜 교통사고야. 느닷없이…… 욕심이 확 생겨버리네…….”
“…….”
“……그렇게 보지 마. 더 꼴리니깐. 나란히 아웃팅 당해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려고 해. ……위험하지? 그러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좀 마. 아우, 씨팔. 진짜 꼴려서 미치겠네. 그러니까 왜 거길 만져가지고…… 그거 알아? 요 며칠, 너 반찬 삼아 화장실에서 무지 해댄 거. 물론 그런 상상도 많이 했거든? 아까처럼 네 손이 만져주는 상상…….”
“아가리 닥치시죠, 선배님. 맞아 죽고 싶지 않다면.”
“푸하하하하하…….”
“…….”
“……위…… 위야…….”
“넌 빠지시지? 네가 말려주지 않아도 괜찮거든?”
싹 웃음을 지운 청년의 시선이 느닷없이 인환에게로 떨어졌다. 내내 인환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던 청년이었다. 마치 인환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연인에게만 탐욕스러울 지경으로 시선을 쏘아대던 자였다. 그러던 친구가 인환이 슬며시 다가가 연인의 손을 쥐자 냉랭한 시선으로 노려본다. 금방이라도 청년을 향해 주먹을 내지를 것만 같은 연인을 어떡해서든 막아보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지만, 그것이 도리어 청년의 부아를 돋운 모양이었다. 청년의 솔직한 적의를 온몸으로 자각한 덕분에 흠칫 몸을 굳혔지만, 청년의 의도대로 연인의 손을 놓진 않았다. 오히려 더 꼭 움켜쥐었을 뿐이다.
“의대 선후배 간에 심각하게 의견 조정을 하고 있는데 감히 끼어드나? 눈치 없고 싹수없기가 지대구나, 너? 그런다고 네 애인한테 도움이 될 것 같나? 네가 스터디 하는 데까지 따라와서 애인을 불러대니 지금 이 사달이 난 게 아니냐? 어리다고 철딱서니 없는 게 다 용서될 줄 아나?”
“반말하지 마십시오. 선배님보다 훨씬 연상이십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차마 뭐라고 대꾸를 못 하고 있는 인환 대신 청년의 다소 흥분한 연타를 막은 이는 연인이었다. 살벌하게 덧붙인 단 한 마디였을 뿐이지만 청년의 기세를 가라앉히기엔 즉효였다. 다시금 연인을 향한 청년의 얼굴은 조금 얼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무단으로 외출한 잘못은 제게 있지, 제 연인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선배님 말씀대로 이건 선배님과 제 문제일 뿐입니다. 함부로 제 연인을 끌어들여 모욕하지 마십시오.”
연인의 손을 꼭 쥔 채 거듭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한결 차가워진 목소리이긴 했지만, 당장 청년의 숨통이라도 조일 듯 사나운 살기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여기서 저 선배라는 청년에게 주먹다짐을 해봐야 오히려 역효과라는 걸 연인이라고 모르지 않을 터다. 감정만 얼추 진정된다면 영리한 연인이니 좀 더 효과적인 대처법을 생각해낼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지금 인환이 가진 유일한 희망이었다.
“……연상? 나보다 훨씬 연상이라고?”
“…….”
“……믿을 수 없어…… 저 얼굴이 어디가! 딱 고삐리 같은데……?!”
“끌어들이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선/배/님.”
“…….”
여전히 얼빠진 청년의 얼굴이 도로 인환을 향했다. 살피는 듯한 시선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미묘한 짜증과 적의가 인환의 전신을 한참이나 훑고 있었다. 투시당하고 평가받는다는 불쾌감에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인환은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액면 그대로 단순히 책임감 강한 ‘선배’로서의 오지랖이었다면, 인환은 청년에게 좀 더 주눅이 들고 죄책감을 느꼈을 터이다. 그러나 앞서 들은 청년의 일견 대담하고 놀라운 고백들이 그런 감정을 말끔히 앗아갔다. 죄책감은커녕, 연인을 두고 청년이 내내 자위를 했다는 사실에 눈물이 찔끔 솟을 지경으로 화가 치밀고 불쾌감이 일 뿐이었다. 지금 죄책감을 느끼고 있고, 또 지독하게 걱정을 하고 있는 대상은 오로지 연인이 유일했다.
“……설마 그 7년 연상이라는 ‘누님’이 저 사람인가……?”
“…….”
“……맙소사! 정말로 그런 닭살 이벤트를 했단 말야, 저 사람한테?!”
“그만두시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제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
으득거리며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누그러졌던 연인의 살기가 다시금 기름 뿌린 봄 들녘처럼 화드득 일어났다. 일촉즉발이었다. 무서워서 도저히 연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다. 그저 간절히, 간절히 연인의 손만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다행히 청년에게도 연인의 한계가 보였던 모양이었다. 인환과 연인의 얼굴을 다소 가벼운 시선으로 거듭 훑던 청년의 얼굴에 긴장이 서리는 것이 보였다. 덜덜덜덜. 고급스러운 다운 점퍼에 감싸인 마른 어깨가 사정없이 떨리는 게 보였다. 단순히 추위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연인을 두려워하는 것도 같았고, 그 이상으로 독하게 반발심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닥닥닥. 간간이 치아 부딪는 소리를 내는 걸 보니 정말로 추운 모양이었다. 그리 허술한 차림으로는 보이지 않는데도 그런 걸 보면 유달리 추위를 타는 것 같았다. 진지해진 청년의 시선은 이제 완벽하게 연인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연인의 살기 어린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청년은 그렇게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테 없는 안경이 자꾸만 빛을 반사해서 정확한 눈빛을 읽을 수 없는 게 답답했다.
“……제안 하나 할까?”
이윽고 청년의 입술에서 그 ‘고민’의 결과물이 떨어졌다. 어쩐지 듣기 괴로운 얘기일 것 같아 인환은 저도 모르게 연인의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 제법 오랫동안 한기에 노출된 인환의 손 역시 연인의 체온이 직접 닿지 않은 부분은 완전히 싸늘해진 상태였다. 평소에도 여간해선 온기를 잃지 않는 연인의 따스한 손이 마주 감싸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나랑 한 번 할래, 아님 스무 대쯤 맞을래?”
두근…….
“대신 잊어주마. 오늘 밤 목격한 것은. 응? 딱 한 번만 나랑 하지? 정말로 내 입에는 지퍼 채워줄 테니.”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푸하하하하…….”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와우, 진짜 벌레 씹은 얼굴이네? 그렇게 싫어? 이래 봬도 나 꽤 인기 좋아. 수륙양용. 탑이고 바텀이고 양쪽 다 가능하고 테크닉도 아주 괜찮거든?”
닥닥닥닥. 풋풋풋. 닥닥. 덜덜덜. 푸후후……. 이 부딪는 괴상한 소리와 키득거리는 웃음, 그리고 가련할 정도로 떠는 몸이 다 끔찍하게 느껴졌다. 치아가 다 보일 정도로 활짝 웃는 얼굴은 더더욱 호러였다. 귀티가 느껴질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이토록 끔찍한 혐오감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다니. 도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저 청년은? 지금 자신은 무슨 소리를 들은 거란 말인가……?
“너도 게이면서 왜 그래? 한우물만 파면 재미없잖아. 식성이 아니라도 꼴리면 대충 하게 되지 않나? 아, 옆에 애인 때문에 그래? 하지만 애인도 이해할걸? 나이도 잡수실 만큼 잡수셨다니 더 그러시겠지. 지금 누구 때문에 네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는데. 안 그래?”
“…….”
“……이런, 정말 싫은가 보네. 지대 닭살스러운 이벤트까지 벌여서 얻은 애인이라더니 쉬 지조를 버릴 생각은 없나 보군. 순애보란 건가? 아우, 씨발. 볼수록 더, 더 꼴리네, 정말…….”
“…….”
“……뭐, 나도 그리 쉽게 넘어오리라곤 생각 안 했으니까. 일단 유혹은 뒤로 미루도록 하고……. 하지만 20대는 양보 못 해, 문위.”
“…….”
“아까 벌이라면 무엇이든 달게 받겠다고 했지? 잘못 했으면 당근 벌을 받아야지, 아무렴.”
“…….”
“기억나나? 신입 OT 때 너 패려다 외려 물 먹은 의기 선배?”
“…….”
“이유 없는 폭력엔 굴복할 수 없다고 했지? 전두환 씨발 정권이 형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서 군기 비슷한 것만 봐도 홱 돌아버린다고. 미친놈한테 물리고 싶으면 어디 때려보라고 했던가? 푸후후후. 그때 의기 선배 얼굴 진짜 가관이었지. 정말 겁먹은 거 같았거든? 그 독종이 말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푸후후후. 하여간 그때부터였지. 그렇게 의기 선배 물 먹이는 거 보고 정말 반했거든? 엄청 꼴렸지. 너랑 하고 싶어서. 안 되면 때려보기라도 하고 싶다고. 저 아름답고 완벽한 육체가 상처 입고 피 흘리는 걸 한 번쯤 보고 싶다고. 아픔을 못 이긴 나머지 애원하고, 헐떡이고, 끝내는 구슬피 우는 건 또 얼마나 근사할까! 아아, 그럼 정말 얼마나 섹시할까! ……그렇게 열렬하게 몽상하고 갈망했지. 아마도 섹스 하는 것 이상으로 찌릿찌릿할 거라고.”
“…….”
“……언젠가 걸리기만 해봐라, 그땐 가만 안 둔다. 평생 자볼 수는 없을 벼랑 위의 고고한 한 떨기 꽃일 테니, 선배로서 한번 때려라도 보자……. 푸후후, 단단히 별렀지.”
“…….”
“……어때?”
“…….”
“어떠냐? 이만하면 나도 순정(純情)이지?”
“…….”
“애절한 순정이야, 이것도.”
“…….”
“……그때 의기 선배가 너 때리려던 방망이 지금 내가 갖고 있지. 이번에 너 골학 시키러 내려간다고 하니까 의기 선배가 주데? 독종인데다 뒤끝도 지대거든, 그 선배. 하긴 수많은 후배들 면전에서 그렇게 완벽하게 당했으니 뒤끝이 장난 아니겠지. 아마 천년만년이라도 거뜬히 끌고 다닐걸?”
“…….”
“그러니까 딱 스무 대만 맞아라. 그럼 오늘 일은 묻어두마. 아예 기억 속에서도 지워주지. 딱 스무 대만 맞아.”
“지저분한 변태 새끼.”
“!!!”
한때는 정말로 연인이 폭발을 하는가 싶었다. 아니, 아마도 이미 그러한 순간을 맞이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흉포하고 격정적인 야수인 만큼, 인내력에 있어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이가 또한 연인이었다. 갈수록 끔찍해져만 가는 청년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연인의 이성은 차츰 더 침착해졌다. 이윽고, 완벽하게 감정을 컨트롤 해낸 듯한 연인의 입에서 떨어진 단 한마디의 대꾸는 그저 냉담한 경멸이었다. 화를 낼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벌레보다도 못한 존재를 향해 내려지는 무자비한 사형 선고였다.
시종 유쾌한 듯 끔찍한 독설을 뱉어내던 청년의 얼굴이 그야말로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것도 그때였다. 덜덜덜덜. 청년의 어깨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닥닥닥. 치아를 부딪는 소리도 여전한 양념……. 그제야 인환은 깨달았다. 청년이 내뱉은 도발적인 언사들이 대단히 위악적인 허세였다는 것을. 설령 그것에 일말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청년은 그 말 그대로 실천을 할 생각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도. 아마도 청년은 그저 연인의 굴복을 바랐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너 계속 빳빳하게 굴래? 하는. 싫으면 빌어봐. ‘제발 비밀을 지켜주세요, 선배님!’하고 싹싹 빌어보라구. 그럼 기분 좋게 네 소원을 들어줄 테니……. 그런 일종의 거만한 으름장이었던 셈이다. 설마 이렇게 연인이 덥석 미끼를 물고(아니, 실은 물려주고!) 청년을 궁지로 몰아넣을 줄은 미처 생각 못 했을 터였다. 청년의 떨림은 가련했다. 닥닥닥 치아 부딪는 소리도, 시체 같은 얼굴도 차마 더 이상은 직시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새삼 연인의 동정을 얻어내기엔 청년은 이미 손쓸 수 없는 지점에까지 도달해버리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듯 연인은 가차 없었다. 연인을 향해 날을 세운 자는 설령 그것이 그자의 본심이 아니었다 해도 무자비한 복수의 칼날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말씀드렸죠? 내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인간들은 난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그냥 두지 않는다고요…….
연인의 서슬 퍼런 맹세가 새삼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순간이었다.
“그럼 이건 계약인 셈입니까, 선배님?”
마침내, 너무나 담담해서 더더욱 잔혹하게 들리는 연인의 나지막한 중저음이 떨고 있는 패잔병에게 떨어졌다.
“제가 스무 대를 맞는 대가로 완전히 잊어주시는 거죠, 오늘 일은?”
“…….”
“예? 말씀하세요. 확실히 해야죠. 방망이로 스무 대. 결코 만만치 않은 대미지거든요?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는 한 응할 마음은 없습니다.”
“…….”
“선배님들 몰래 빠져나간 데 대한 벌은 받을 생각이지만, 스무 대를 맞는 건 조금 과한 처벌이라 생각됩니다. 선배님도 동의하시죠?”
“…….”
“그러니 이건 징벌의 의미라기보다 같잖은 선배님의 입막음 값이라 여겨도 되겠습니까? 제가 바로 이해했죠?”
“…….”
“알겠습니다. 확실히 징벌이 아닌 선배님과의 계약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저도 남은 5년을 구설수에 시달리면서 보내고 싶진 않으니까요. 계약하죠. 맞겠습니다, 스무 대. 그럼 방망이 가져오시겠습니까? 장소는 잔디구장이 좋겠네요. 상체를 지지할 벤치도 있으니까요. 잔디구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위…… 위야……!”
“씨팔…….”
그저 벌벌 떨기만 한 채 꿀 먹은 벙어리였던 청년이 문득 중얼거렸다. 앞서 와는 달리 독기가 잔뜩 들어간 사나운 욕설이었다. 반사적으로 돌아보고 나서야, 인환은 자신의 행동이 또 한 번 청년의 오기를 자극한 것을 알았다. 청년의 시선은 정확히 연인의 팔을 움켜쥔 인환의 양손에 가 닿아 있었다. 어떻게 해도 손쓸 수 없는 지점이란 자각은 있었지만, 연인이 방망이로 스무 대를 맞는다는 끔찍한 현실이 새삼 인환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막을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만이라도 있다면 막고 싶었다. 연인의 성격상 도저히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 말라고. 제발 다 무르고 그냥 선배의 어깃장을 받아주라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자존심을 버리라고. 그래서였다. 마음속의 애원을 온통 다 긁어 담아 연인의 팔에 매달린 것은. 그리고 자신의 그 작은 몸짓이야말로 청년의 어깃장에 통째로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해버리고 말았다!
“……씨발, 좆같이…… 시건방진 새끼…… 지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선배를 개떡으로 알고…… 그래, 어디 한번 맞아봐라…… 벼랑 위의 꽃 좋아하네…… 어디 얼마나 독보적으로 예쁘게 울부짖는지 똑똑히 봐주마!”
닥닥닥. 덜덜덜덜. 닥닥닥. 덜덜덜덜. 무테안경 너머, 표정을 알 길 없는 눈이 짐승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기왕에 정상적인 사고가 마비된 것 같은 청년에겐 이제 오기밖에 남은 게 없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나마 ‘선배’로서의 구겨진 자존심과 그에 따른 상처뿐이거나. 이까지 드러내 보이며 웃는 섬뜩한 얼굴 어디에서도 연인에 대한 호의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알 수 없었다. 인환으로선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였다. 연인을 상상하며 자위를 할 정도라면 좋아하는 게 아닌가? 좋아한다면서 저렇게 악의적으로 찍어 누르고 싶은 걸까? 상처주고 싶은 걸까? 아무리 자존심이 상한들, 선배라는 권위에 상처를 입은들, 좋아하는 상대를 두고 저렇게까지 하고 싶은 걸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랑은 저런 게 아니었다. 저 비슷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기꺼이. 어서 방망이나 가져오시죠. 의기 선배님 방망이라니 선배님도 별로 창의적이신 건 아닌가 봅니다만, 어디 얼마나 잘 군사 정권 흉내를 내시는지 한번 봐드리기로 하죠.”
연인이 청년의 악의적인 웃음에 피식 웃음을 무는 것으로 화답했다. 입술 끝만 살짝 틀어 올린, 상대에 대한 경멸을 여봐란듯이 드러낸 미소였다.
아주 잠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던 청년이 왈칵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어두워 잘 안 보여 그렇지, 틀림없이 피가 설핏 비쳤을 만큼 힘껏 악물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인환은 뒤돌아 숙소 쪽으로 달려가는 청년의 뒤태를 볼 수 있었다. 악의와 분노와 체념과 오기와 슬픔이, 그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다른 감정이 읽힐 것만 같은 끔찍한 뒷모습이었다.
“……위…… 위야아…… 위야…… 위야, 위야, 위야아……! 위위!!!”
청년의 끔찍한 떨림이 그대로 전이된 것만 같았다. 이가 딱딱 부딪치게끔 지독하게 느껴지는 추위도 한가지였다. 잠시 사라진 청년처럼 떨고, 청년처럼 치아를 부딪는다. 그리고 그런 몸으로 연인의 팔을 와락 껴안은 채 애원을 한다. 그만두자. 그만두자, 위야. 그만두고, 용서 빌고 그러자. 제발 그렇게 하자…….
“……자동차로 가 계세요, 선생님.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테니.”
사나운 살기도, 냉랭한 경멸도 일체 사라진 다정한 눈이 인환을 굽어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담담하기만 한 목소리는 정말로 악몽 같은 현실을 그저 악몽에 불과한 게 아닐까 의심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이 무시무시한 추위가, 지독한 공포가, 특정인에 대한 믿기 힘든 혐오감과 환멸이 생생하게 현실을 자각시키고 있었다.
“가 계세요. 금방 끝내고 갈게요. 선생님이 보시는 거 싫습니다.”
연인의 팔을 움켜쥐고 있는 인환의 양손을 조물조물 어루만지며 연인이 덧붙인다. 맙소사. 웃기까지 한다. 진심으로. 다정하고 또 다정하게. 상냥하고 또 상냥하게.
“선생님이 해주실 일도 있어요. 아무래도 그렇게 맞으면 치료는 해야 할 겁니다. 리조트 1층에 24시간 하는 슈퍼가 있습니다. 거기 구급약도 파니까 준비 좀 해주세요. 파스나 연고 같은 그런 거면 됩니다. 아, 혹시 모르니까 붕대랑 반창고도요. 부탁드립니다. 제발 걱정은 하지 마시구요. 금방 갈게요.”
하느님. 순간 하늘이 노래지는 것만 같다. 온몸의 떨림이 더 심해져서 연인을 붙든 채로 연인의 품에 체중을 지지해야만 했다. 순식간에 뿌옇게 변해버린 시야를 도통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울지 마세요. 별거 아닙니다. 의대생들 사이에선 종종 있는 얼차려일 뿐이에요. 오히려 잘된 셈이죠. 몇 대 맞고 비밀을 지킬 수 있으니. 걸려든 상대가 저런 질 나쁜 변태 새끼인 게 천만다행이죠.”
“……벼…… 별게 아, 아니라니……. 아, 아니…….”
“울지 마시라니까요. 그 변태 새끼 팔 보셨죠? 힘이라곤 쥐뿔도 없어 뵈지 않습니까? 그런 팔로 때려봐야 별 자극도 안 갈 겁니다. 그 새끼도 의대생이라 진짜 심각해질 때까진 안 할 거고요. 기술적으로 팬다고 하죠, 다들.”
“……하지…… 하지 말면…… 아, 안 하면…… 그, 그냥 사과하고…….”
뜨뜻한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뺨을 연인의 손이 쓱쓱 닦아준다. 여전히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눈빛만은 엄격했다.
“안 된다는 거 아시죠? 그 새끼도 열받을 대로 받았으니까 이제 와 물러설 순 없습니다. 약하게 나가면 앞으로도 이걸 빌미로 계속 집적댈 거예요. 밟을 수 있을 때 확실히 밟아놔야 합니다. 워낙 질이 안 좋은 새끼 같아서 그렇게 해놔도 좀 골치가 아플 것 같긴 하지만요.”
“……그…… 그런…… 그래도…… 다, 다치면…… 마, 만약 심하게 다치기라도 하면…….”
“그렇게까진 못 한다니까요. 그 문젠 염려 안 하셔도 돼요, 선생님. 자, 가세요. 얼른요. 그 새끼 오기 전에요.”
연인의 손이 얼굴에서 떨어지며 인환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벌벌 떨며 휘청거리는 게 다 보일 텐데도 일절 동정이 없었다.
“가시라니까요. 그 새끼가 다른 선배들이나 동기들을 데려올지도 몰라요. 그럼 진짜 곤란해지는 거 아시죠?”
마지막 협박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몸이 단숨에 연인에게서 떨어졌던 것이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청년이 사라진 숙소 쪽을 봤다가, 연인의 얼굴을 봤다가, 다시 숙소 쪽을 향했다. 충격에 빠진 넋이 당장은 판단을 내리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우유부단한 혼란도 곧 끝이 났다. 검은 인영 하나가 별채 단지가 시작되는 길모퉁이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목격한 덕분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몰랐다. 인환은 사력을 다해 뛰고 있었다. 연인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최대한 빨리 달리기 위해 기를 썼다. 빨리 달리려 할수록 더 크게 절룩거리는 병신 다리도 개의치 않았다. 연인을 돌아다볼 수도 없었다. 행여 돌아봤다가 저 무시무시한 청년이라거나 혹은 연인의 다른 일행들과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다. 필사적인 질주는 구름다리를 건너 본관 건물인 콘도 정문까지 왔을 때에야 끝이 났다. 이 정도 떨어지면 적어도 연인과 동행이라는 의심은 안 받을 것이다. 과연 인환의 시야엔 어느새 뭇 타인들이 하나둘 밟혀들고 있었다. 도로의 눈을 치우는 콘도 직원들이 몇 보이고, 손님들로 보이는 이들도 꽤 눈에 띄었다. 얼굴에 눈물범벅을 하고 숨을 몰아쉬는 인환이 이상한지, 그들 중 몇몇은 힐끔힐끔 시선을 주기까지 했다. 심장은 여전히 기막힌 공포로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연인을 돌아다볼 용기는 조금 남겨놓고 있었다.
연인을 두고 온 산책로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주었다. 본관으로부터 거의 100여 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였지만 그래도 연인의 기척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 연인뿐만이 아니었다. 예의 그 청년으로 보이는, 상대적으로 왜소한 그림자도 눈에 들어왔다. 청년의 손에 들린 커다란 야구방망이마저 한눈에 들어오자 인환은 다시금 벌벌 떨기 시작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1∼2분쯤 뭐라고 더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더니 마침내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잔디구장 쪽이었다. 어제 아침 연인이 운동을 하던 바로 그곳이었다. 두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한 산책로로부턴 200여 미터나 떨어진 곳이지만 인환이 서 있는 본관 앞으로부턴 50여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산책로를 꼭짓점으로 한 이등변삼각형의 반대편에 잔디구장이 있는 셈이었다. 물론, 구장을 좀 더 잘 보려면 인환도 연인들이 가고 있는 방향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가장 잘 보이는 지점을 자신은 알고 있었다.
불편한 다리를 무시한 채 기를 쓰고 달렸다. 연인 일행보다 먼저 진입로 주차장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걱정 말고 구급약이나 준비하라는 연인의 야속한 부탁은 까맣게 잊혔다. 그저 이상한 변태 선배로부터 심하게 맞을 연인만이 뇌리에 가득했다. 여차하면 달려갈 수 있도록, 그나마 가장 잘 보이는 지점에서 연인을 지켜볼 터였다.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눈물을 참기 위해서도 기를 썼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그새를 못 참고 따라온 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미칠 듯한 자책과 후회가 벌레처럼 넋을 갉아먹는 것도, 다스리고 또 다스렸다. 눈물도 그만. 자책도 그만. 지금은 그저 연인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저 지독한 상황에서 연인을 안전하게 구해낼 수도 없는 마당에, 혹여 또 다른 일행들 눈에 띄게 될까 옆에 있을 수도 없는 마당에, 자신이 할 일이란 그저 이렇게 멀리 떨어진 채 눈을 부릅뜨고서 연인을 지켜보는 일밖엔 없을 터였다. 겁쟁이처럼 절대 외면하지 말고, 용기 있게 견뎌내야만 할 터였다.
가쁘게 숨을 헐떡이며 잔디구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다지 빠르진 않았는지, 연인 일행도 막 구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쪽 축구 골대 쪽에 벤치 몇 개가 있었고, 연인이 태연한 몸짓으로 벤치 하나에 쌓여 있던 눈을 털어내고 있는 게 보였다. 상대적으로 작은 몸집인 청년의 그림자는 땅바닥에 야구방망이 끝을 대고 서서 온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정말로 추위에 약한 사람이구나. 잠시 처지도 잊고 청년에게 동정심이 일 정도로 떨어댔다. 그에 비해 연인의 몸짓은 지극히 평화롭고 무덤덤했다. 누가 때리려는 자고 누가 맞으려는 자인지 두 그림자만 봐선 도저히 짐작도 못 할 터였다. 그랬다. 두 사람의 생각이며 몸짓들이 그렇게나 잘 들여다보였다. 죄다 알아볼 수가 있었다. 30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두 사람의 숨소리조차 들리는 것만 같았다. 물론 착각이었다.
연인이 벤치 위로 양팔을 뻗어 체중을 지지한 채 엎드려뻗쳐를 하는 게 보였다. 와들와들 떨고 있는 청년을 향해 뭐라고 말을 하는지 입가에서 뿜어 나오는 습기가 좀 더 풍성해졌다가는 이내 사라졌다. 움찔해서는 방망이를 고쳐 쥐는 청년을 통해 그것이 청년을 향한 비웃음이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럭저럭 광기를 가라앉히고 있던 것 같은 청년의 자태에 다시금 흉흉한 적의가 서리는 게 보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들거리는 전신…… 이윽고, 청년이 엎드려뻗쳐를 한 연인의 옆에 자리를 잡는 게 보였다. 방망이를 움켜쥔 청년의 두 손이 번쩍 치켜 올라간다. 그러고는…….
몇 분이 몇 시간처럼 흘러갔다.
아니, 몇 날, 몇 달의 지옥보다도 끔찍했다.
울부짖지 않기 위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당장 뛰쳐나가려는 다리를 말리기 위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청년은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때리는지 어쩌는지, 연인의 말은 말짱 거짓말 같았다. 거짓말이 틀림없었다. 연인의 엉덩이와 허벅지 위로 무지막지한 폭력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퍽퍽. 퍽. 퍽. 30여 미터나 떨어져 있는데 내리쳐지는 방망이 소리가 너무나 잘 들렸다. 대신 마땅히 들려와야 할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신음 소리 또한 일체 없었다. 퍽퍽. 퍽퍽퍽. 그저 사나운 살기만 휘몰아쳤다. 병적이고, 악의적이고 도착적인…… 이상야릇하고 끔찍한 살기였다.
연인은 다섯 대에서 조금 비틀거렸다. 열한 대쯤에선 지지하고 있던 양팔을 놓치고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순간, 저절로 시선을 돌리려는 스스로를 입술을 짓씹으며 참아냈다. 방울방울 흐르고 또 흘러내리는 눈물 탓에 아무리 눈을 깜빡거려도 연인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경련이 일 듯 떨리는 손을 들어 벤치 다리를 움켜잡는 것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왜소한 남자는 씩씩거리며 연인이 다시 일어서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연인이 다시 벤치 위에 팔을 길게 뻗고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퍽퍽퍽. 퍽퍽…….
멈춰진 지옥의 시간 속에서 연인은 두 번 정도 더 땅바닥을 굴렀다. 왜소한 남자는 처음보다 더 오래 연인을 기다려야 했다. 그 와중에 남자는 쓰고 있던 무테안경을 벗어 던지기도 하고, 무어라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기도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물론, 못 알아들어도 하등 상관이 없을 하찮은 의미였으리라. 오히려 물처럼 고요한 쪽은 연인이었다. 애원은커녕, 숨소리도 신음 소리도 없었다. 왜소한 남자가 그리도 기대해마지 않던 구슬픈 울음은, 물론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무 대가 다 끝났을 때, 마지막으로 땅바닥에 굴러버린 연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것은 나지막한 웃음소리였다.
남자가 방망이를 집어 던지는 것이 보였다. 무어라 또 히스테릭한 고함을 질러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계약’은 완성되었고 남자는 더 이상 연인에게 어떤 위해도 가할 수가 없었다. 기진맥진한 몰골로 남자 또한 땅바닥에 널브러지는 게 보였다. 아마도 그즈음이었을 거다. 한동안 미동도 않던 연인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은.
너덜너덜 찢어발겨졌던 가슴이 그제야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얼어붙었던 피가 그제야 산 사람처럼 핏줄을 돌기 시작했다. 눈 더미를 움켜쥐고 있느라 발갛게 얼어버린 두 손으로 미친 듯이 눈가를 문질렀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였다. 이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연인을 제대로, 정확히 쳐다보기 위해서였다. 얼간이처럼 펑펑 울고 있는 눈으로가 아니라.
어떻게 알았는지, 연인은 정확히 인환이 주저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계속 엉거주춤 절뚝거리면서, 도저히 견디기 힘든지 잠시 멈춰 서선 가쁘게 심호흡을 토하기도 하면서.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낯빛이 보였다. 잔뜩 일그러져 있는, 조각처럼 뚜렷한 이목구비도 보였다. 연인의 콧등이며 이마를 적시고 있는 것이 눈이 녹은 흔적만은 아니라는 걸, 미어지는 가슴의 통증을 통해 알았다. 당장 연인이 겪어내고 있을 지독한 고통이 피같이 흘러내리고 있는 식은땀을 통해 생생하게 증명되고 있었다.
서로의 눈을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지점까지 왔을 때 연인이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추고 깊은 심호흡을 했다. 엉거주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있는 장신의 늠름한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다 보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싱긋. 문득 연인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며 진한 미소가 번진다. 미간은 고통으로 잔뜩 구겨져 있는데도 마냥 기분이 좋게만 느껴지는, 햇살처럼 환한 웃음이었다.
“……아야.”
농담 같은 엄살이 연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아파 죽겠네. 부축 좀 해주세요, 선생님.”
하나도 안 아픈 듯, 익살스러운 중저음이었다. 웃음기가 가득 밴 눈꼬리가 활처럼 올라가는 것 같더니 이내 눈꺼풀이 아래로 착 감겨들었다. 파르륵하니 떠는 긴 속눈썹이 보였다. 필사적으로 손을 내뻗었다. 그러나 연인에게 가 닿기엔 아직 너무 먼 거리였다.
땅바닥으로 연인의 몸이 무너지는 게 보였다. 순간, 본능적으로 양팔을 앞으로 내밀어 연인이 상체의 급소들을 보호하는 것도 보였다. 쿵. 장신의 거구가 20센티 이상 쌓인 눈 바닥 위에 나뒹굴었다. 부조리한 폭력이 주는 최후의 대미지였다.
미처 일어서지도 못한 채 인환은 엉금엉금 기다시피 연인에게 다가갔다. 겁에 질린 몸은 미칠 듯한 조바심에 일체의 도움도 되지 못했다.
“……위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밭에 거의 틀어박힌 채 잔뜩 일그러져 있는 게 보였다. 눈뭉치를 가득 움켜쥔 연인의 양손을 통해 연인이 그래도 기절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그것은 수전증에 걸린 것처럼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더운 피가 다시 돌았다. 잠시 뛰기를 멈췄을 것 같은 심장도 그제야 뛰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제야…… ‘저것’이 핏자국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새하얀 눈 더미 위에 점점이 찍힌 거무스름한 것이 연인의 진행 방향을 따라 죽 이어져 있었다.
연인의 피였다.
“……조금…… 만 부축해주세요, 선생님.”
눈 더미를 움켜쥐고 있던 손 하나가 천천히 풀어지더니 인환을 향해 뻗어왔다. 눈밭에 박혀 있던 얼굴도 약간 위로 들린 채 인환을 향하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채 잔뜩 일그러져 있는 얼굴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었던 허세조차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아무래도 병원엘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간단한 응급 처치로는 안 되겠어요.”
괴로운 표정과는 달리 여전히 익살스러운 어조로 연인이 덧붙였다. 느릿하고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변태 놈이 제대로 미쳤는지 사력을 다하네요. 우는 걸 볼 수 없으니 피라도 보고 싶었나 보죠.”
피식 하고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며 질 나쁜 웃음이 흘렀다. 물론 아주 잠깐이었다. 나머지 한 손으로 눈밭을 짚고 상체를 들어 올리려 하자, 그나마의 비웃음도 말끔히 씻겨나갔다. 사라진 비웃음 대신 이를 악문 가느다란 신음이 연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반사적으로 인환의 몸도 따라 움찔하며 울음 섞인 신음이 토해졌다.
“……괜…… 찮으니까…… 그만 우시고 손 좀 잡아주세요. 어서요.”
홀린 듯 연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가락의 감촉에 문득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남은 한 손까지 가져가 연인의 손을 감싸 쥐곤 오뚝이같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비가 된 것처럼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던 몸에 그제야 겨우 힘이 들어간 덕분이었다.
연인의 겨드랑이 아래로 어깨를 밀어 넣으며 부축하자, 연인이 기대듯 비틀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겨우 중심이 잡힌 몸에 연인의 체중이 묵직하게 전해졌다. 그리 힘겹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불편한 자신의 한쪽 다리를 배려해 완전히 몸을 의지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엉거주춤 앞으로 구부려진 채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거구임에도 중심만은 확실하게 잡고 있었다.
연인에게 고통이 덜 가도록 최대한 조심해서 차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톡. 막 몸을 돌린 순간, 거무스름한 액체가 한 방울 바닥에 떨어지는 게 보였다. 이를 악문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간간이 떨어지는 핏방울을 무시하기 위해 기를 썼다. 부러 상처도 보지 않았다. 낡은 모직 팬츠의 천을 다 적시고도 모자라 바닥에까지 피가 떨어질 정도로 상처가 심한 터다. 만약 그를 봐버리면 자신 또한 충격과 아픔에 완전히 맥이 풀려버릴지도 모른다. 기절하든 쓰러지든 연인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 다음에나 가능할 일이었다. 오로지 연인을 부축해 차로 옮기는 일에만 필사적으로 신경을 세웠다.
차까지 되돌아오는 길…… 20미터도 채 안 될 거리가 2킬로보다도 더 먼 거리처럼 느껴졌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 뼈까지 상하진 않은 것 같아요. 찰과상 정도야 치료하면 금방 나으니까 그렇게 울지 마세요. 고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텐데도 연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자신을 위로하기 바빴다. 차로 오는 짧고도 긴 여로 중 내내. 그만 말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하는 순간, 연인을 부축해 병원에 데려갈 정신력 또한 바닥 날 것만 같았다.
“……뒤에…… 타겠습니다.”
반대하지 않았다. 의자에 제대로 앉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뒷좌석의 문을 열자 연인이 조심스레 몸을 굽혀 차 안으로 들어가더니 모로 튼 자세로 자리를 잡고 누웠다. 덜덜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가누며 연인의 몸 위에 안전벨트를 감았다. 양털 시트는 어느새 연인이 흘린 핏자국으로 낭자했지만 역시 그를 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의식을 차단했다. 간신히 벨트를 조여 묶은 다음 본관 쪽으로 달려가 직원으로 보이는 사내 하나를 붙들었다. 응급 환자라고 하고 양평 시내의 가장 가까운 응급실 위치를 물었다. 돌아본 사내의 눈이 놀람으로 휘둥그레졌다. 응급실을 찾는 자체보다 눈물범벅인 자신의 얼굴에 더 놀랐으리라. 사내는 콘도에도 의무실이 있고 급하면 구급차를 쓸 수도 있다며 환자가 어디 있느냐고 되물었다. 구급차 소리에 잠시 혹하긴 했으나 인환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이 일로 문제가 커진다면 연인의 다른 일행들에게까지 자신의 정체가 알려질 위험이 있었다. 결국 연인이 왜 다쳤는가에 생각이 미치자 구급차에 대한 미련은 사라졌다. 구급차를 쓸 정도는 아니라고, 병원 이름과 위치만 알려달라고 했다. 사내는 ‘양평길병원’이 양평에 있는 유일한 응급 의료 센터라며 위치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분 거리이니 그 근처에서 다시 물어보면 알려줄 거라 했다. 미심쩍어하는 얼굴의 사내를 남겨두고 차로 되돌아 뛰었다.
씩씩거리는 호흡을 겨우 가누며 차에 도착해 뒷좌석부터 살폈다. 마치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창백한 낯빛의 연인이 보였다. 물론 잠이 들었을 리는 없었다. 여전히 고통을 참는 듯 잔뜩 찌푸려진 얼굴은 잠과는 지극히 멀리 있었다. 부리나케 운전석에 앉은 뒤, 차를 출발시켰다.
채 다 치워지지 못한 눈이 얼어 도로는 곳곳이 빙판길로 변해 있었다. 뒷좌석의 연인만을 뇌리에 박은 채 안전운전에만 온 신경을 다 쏟았다. 전신이 긴장하니 끝 간 데 없이 줄줄 새던 눈물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빙판길에 시야까지 흐렸다면 그야말로 최악이었으리라. 속도를 변경하거나 과속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차체가 흔들렸고 그때마다 연인은 신음을 참지 못했다. 좌석 등받이에 상처가 부딪친 때문이었다. 아무리 조심해서 운전을 해도 차를 완벽하게 무진동 상태로 만들 수가 없었다. 연인의 신음 소리가 그대로 인환의 가슴을 찢어발겼다. 연인이 신음을 흘릴 때마다 자신도 사지의 힘이 빠지며 쑤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더 아팠으면 싶었다. 차라리 자신 쪽이 더욱더 아파서 대신 연인의 통증이 줄어들 수만 있다면.
리조트를 출발한 지 15분쯤 됐을까, 양평으로 올 때 지나친 기억이 있는 시외버스터미널은 쉬이 찾을 수 있었다. 따로 물을 필요도 없이 터미널 앞 사거리로 접어드니 길병원을 안내하는 작은 이정표가 보였다. 이정표를 따라가자 1분이 채 안 돼 목적하던 건물이 나타났다. 곳곳에 환하게 불을 밝힌 창문들과 커다랗게 빛나는 입간판에 비로소 작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길병원이었다. 연인을 치료해줄 수 있는 곳까지 무사히 운전해 올 수 있었다. 커다란 산을 하나 넘은 기분이었다.
연인의 상처를 살펴본 응급실의 레지던트들이 하나같이 얼굴을 굳혔다.
치료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피와 진물에 전 채 상처에 들러붙어버린 속옷과 청바지를 가위로 잘라 벗기고 감염을 막기 위한 세척과 소독, 그리고 표피로부터 떨어져나간 죽은 살점들을 일일이 핀셋으로 떼어낸 후 연고와 습포제를 도포하는 응급 처치가 가장 먼저였다. 마지막으로 상처에 붕대를 감아 고정한 후엔 뼈와 근육의 손상을 정확히 알아보기 위한 엑스레이 검사가 있었다. 다행히 뼈는 이상이 없고, 허벅지 근육에도 심한 충격이 가 모세혈관이 많이 터지긴 했지만 파열한 근육은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다만 엉덩이와 허벅지 모두 타박상을 넘어 피부가 찢기고 터지는 심한 찰과상을 입었다고 했다. 좀 더 심한 쪽은 엉덩이였는데 안쪽의 진피까지 손상돼 자칫했으면 이식 수술을 해야 했을 정도로 큰 상처라고 했다. 그나마 허벅지 쪽의 찰과상은 나은 편이었지만 오히려 지방층이 더 얇아, 충격이 좀 더 가해졌다면 근육에 커다란 손상이 왔을 수도 있다고 했다. 전치 4주나 될 큰 상처라 했다.
누구한테 어떻게 맞았기에 이 꼴이냐며,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라면 진단서를 끊어줄 수도 있다고, 굳은 표정의 의사들이 마침표를 찍듯 덧붙였다. 진통제를 맞아 한결 편한 표정이 된 연인은 담담히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의사들의 호의를 거절했다. 연인도 의대생이라고, 골학 하러 왔다가 선배한테 당한 얼차려일 뿐이라고 했다.
의사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에는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연인만큼 심하게 당한 적은 없을지 몰라도 그들 또한 연인과 비슷한 통과의례를 거쳐 의사가 된 때문이리라. 요즘도 이렇게 심하게 하는 데가 있냐고, 어느 의대냐고 슬쩍 묻기도 했다. 두 번째 질문은 명백한 호기심 때문이라 여겼는지 연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통제와 항생제 때문인지 엎드려 누운 연인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치료 내내 주로 연인하고만 대화를 하던 의사들이 인환에게 주의를 기울인 것도 그 무렵이었다. 보호자랍시고 연인의 침상 곁을 지키고 섰을 뿐, 창백한 표정으로 벙어리처럼 내내 입을 다물고만 있는 인환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던 모양이었다.
“보호자시라구요?”
“…….”
“문위 환자의 보호자 되는 분 맞으시지요?”
“……어, 아아…… 네. 제가 보호자입니다.”
잠긴 목소리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단 한 마디라도 하면 그대로 감정이 드러날 것만 같아 입을 다물고만 있었더니 그새 목이 잠긴 모양이었다. 연인의 병상에서 말을 붙인 의사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의사가 웃는 게 보였다.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당장은 끔찍해 보이시겠지만, 근육과 뼈도 이상 없고, 진피층도 그리 심하게 손상된 게 아니니 열심히 치료하면 큰 흉터 없이 아물 수 있을 겁니다.”
의사의 어조엔 약간이나마 동정심이 담겨 있었다. 얼굴은 창백한데다 뻣뻣하게 굳은 태도가 연인의 상처로 겁을 먹은 때문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의사의 호의를 일축하고 다시 연인의 병상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심하게 겁을 집어먹었던 것은 맞지만 상처가 어렵지 않게 회복되리라는 의사들의 진단에 어느 정도 해소가 된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 자신이 몸을 잔뜩 굳힌 채 말문을 닫고 있는 것은 그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지독한 연인의 상처에 충격을 받은 것보다, 아파하는 연인을 따라서 거의 비슷한 아픔을 느끼는 것보다, 그에 못지않게 더욱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연인과 자신의 관계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일이었다.
학교 선배라는 자가 아웃팅을 빌미로 협박을 해 연인을 상처 입힌 끔찍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누군가가 연인과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가 비슷한 고통을 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인환은 반쯤은 이성이 나간 상태였다. 자제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연인을 상처 입힌 자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터져버리거나, 혹은 상처 입은 연인을 안고 또다시 울음을 터트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는 자책감에 결국 덜미가 잡힌 나머지 울고불고 연인 앞에 무릎을 꿇게 될지도 몰랐다. 감정을 드러낸 나머지 만천하에 서로의 관계를 까발리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함부로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쉬이 할 수 없었다. 주변의 모르는 타인 전부 다가 적이요, 감시자였다. 지금 인환이 저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는 그저 말문을 닫는 것, 그저 인형처럼 무감감각하게 서서 일체의 행위를 억제하는 것뿐이었다.
“입원하시겠습니까?”
응급의 둘 중 한 사람은 마침 들어온 다른 환자 병상으로 가고 남은 한 사람이 인환에게 다시 물어왔다. 입원이요? 멍한 어조로 되묻자, 상처가 심해 병원과 집을 오가는 것이 불편할 테니 이틀 정도는 입원하는 편이 좋으리라고 했다. 감염이 되면 열이 날 수도 있고, 감염 증세가 보이는 즉시 내원해 의사에게 상태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또 하루에 네다섯 번은 습포제를 갈고 연고를 발라 집중 치료를 해야 흉터 없이 아물게 할 수 있는데 집에 그렇게나마 치료를 해줄 이가 있는지도 물었다. 며칠 동안은 매우 주의를 요한다고 했다. 자칫 감염이라도 일으키면 세포가 괴사할 수도 있고, 그럴 경우 피부 이식 수술이 불가피하다고도 했다. 피부 이식 수술이라는 말에 눈앞이 핑 돌며 어지럼증이 일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창백해지는 자신의 낯빛에 놀랐는지 의사는 여간해선 그리 되지 않는다고 서둘러 덧붙였다. 단지 만일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상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뿐이라고.
“……일단 아침까진 두고 보구요…… 환자가 깨어나면 물어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공부하러 내려온 참이라 입원을 해도 괜찮은 건지 전 잘 모르겠거든요.”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렇게 대꾸를 한 게 고작이었다. 자신이 함부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새로 질겁할 두려움이 추가된 터라 인환의 머릿속은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인환으로서야 당장 입원을 시키고 싶지만(또 정말 입원을 시켜야 할 정도라면 서울로 이송해 더 괜찮은 병원으로 데려갈 테지만), 말 그대로 연인은 스터디 때문에 단체로 내려온 터였다.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지 않고 연인만 바로 서울로 데리고 올라가도 되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상처가 이렇게 심한데 무슨 소리냐고 의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예과 1년차라니 골학 공부야 또 기회가 있을 거고, 지금은 무엇보다도 상처를 회복시키는 게 급선무라고도 했다. 같은 경험을 치러낸 의사이니 아마도 눈앞의 이 응급의가 하는 말이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환은 확답을 보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연인이 결정할 문제였다. 일단 기다려달라고 재차 부탁하자 그제야 응급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주었다.
잠든 연인의 상태를 다시 한 번 체크한 의사와 간호사 한 명도 곧 다른 병상으로 가버리고, 사면에 쳐진 칸막이 커튼을 통해 인환은 겨우 주변과 유리될 수 있었다. 불특정 다수의 감시자들로부터 잠시나마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침상 곁에 우두커니 선 채 인형처럼 굳어졌던 몸을 천천히 보호자용 의자에 앉혔다. 힘이 풀린 다리가 떨리고, 연인을 향해 뻗은 손가락들도 마구 떨려왔다. 감정의 폭발을 막기 위해 그저 병상 자체만을 응시할 뿐 연인의 얼굴이나 상처 쪽으로는 되도록 시선을 주지 않았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얼굴을 겨우 다시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고개만을 옆으로 돌린 채 엎드려 누운 불편한 자세로 연인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여전히 창백하게 질려 있는 연인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잔뜩 억눌렸던 감정이 일거에 튀어나오려 발버둥을 치는 게 느껴졌다. 물론 그렇게 발광하도록 스스로를 내버려둘 순 없었다. 아직은 안전하지 않았다. 그저 잠깐 유예의 시간이 주어졌을 뿐, 이 시간, 그리고 이곳은 절대로 안전한 시간도, 또 장소도 아니었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서 몇 번이나 긴 심호흡을 토하는 것으로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후우. 마지막으로 내뱉어진 긴 한숨을 끝으로, IV 바늘이 꽂히지 않은 연인의 오른손을 살며시 쥐어보았다. 따뜻했다. 낯빛은 여전히 창백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따스한 손은 고스란히 되돌아와 있었다. 어쩐지 그것만으로도 무언가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신경도 좀 더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품고 있는 사랑은 늘 이렇게 연인에겐 흉기가 될 터이지만, 언제든 오늘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럼에도 연인의 손이 늘 지금처럼 한결같은 따스함으로 자신을 품어준다면, 자신은 그것만으로도 위로받을 수 있노라고. 세상에 의해 용서받지도 또 허용되지도 못할 ‘배덕의 사랑’이지만, 그럼에도 강단 있게 세상과 마주할 수 있노라고…….
식은땀에 젖은 채 이마에 제멋대로 늘어진 머리카락이 보였다. 혹 간호사들이 들여다볼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빗질하듯 가만히 쓸어 넘겨주었다. 땀에 젖은 이마며 콧잔등은 손바닥으로 조심조심 닦아주었다. 꽤 간지러울 법한데도 연인은 미동조차 없었다. 약기운도 약기운이지만,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한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반백수이다시피 한 자신은 토막잠이라도 잤는데, 열공 모드여야 할 연인은 밤을 새우며 자신의 시중만 들어줬다. 기왕의 자책감에 새삼 지독한 회한이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연인의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발에 수갑이라도 채워놓을 거야……. 담담하지만 독한 맹세를 되뇌었다. ……다시 또 이렇게 연인의 개인 영역에 무턱대고 침범하고픈 광증이 인다면, 발에 수갑이라도 채워서 너를 막을 거야.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혹은 석 달이든, 연인이 기다리라고만 하면 그냥 얌전히 기다려줄 거야. 맹세해. 이틀이 넘든 안 넘든, 연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몸서리가 쳐지고, 연인이 보고 싶어 미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다시는 이렇게 연인을 위험하게 만들진 않을 거야. 맹세해. 만약 또 이런 어리석은 짓을 벌인다면, 또 이런 식으로 연인을 상처 입힌다면, 절대로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잊지 마. 넌 연인에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야.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야. 마음대로 드러내도 된다고 누가 그러디? 그래서 욕심대로 하니 좋니? 연인을 저렇게 만드는 게 좋아? 아니라고? 그래. 그러면 맹세해. 다신 안 그런다고. 앞으론 미치지도, 집착하지도 않는다고. 그저 연인이 정해준 자리에서…… 그렇지, ‘사이좋은 섹스 파트너’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겠다고. 다른 것은 일체 욕심 내지 않고 얌전히 연인이 주는 호의와 우정만 받아먹겠다고. 연인이 기다리라면 기다리고, 섹스해주겠다면 기쁘게 섹스하고, 친절과 다정을 주면 그것대로 감격하고…… 연인이 곁에 있어주는 그때까지는…… 그렇게 죽은 듯이 살겠다고.
눈알이 빠지는 것처럼 아팠다. 기왕에 눈꺼풀이 부어터지도록 울어댄데다 눈시울에 열기는 느껴지는데 눈물은 더 나오지 않는 까닭이었다. 독기를 사리무니 확실히 눈물샘을 잠재우는 데도 효과 만점인 것 같았다. 연인의 손바닥으로 여러 번 부드럽게 문질러보았다. 위야 손이 약손. 위야 손이 약손. 마치 통증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어린애 같은 주문을 되뇌며. 신기하게도 조금 아픔이 덜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커튼 너머로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렸다. 새로 응급 환자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문득 소스라쳐선 허겁지겁 연인의 손을 내려놓았다. 환자의 신음 소리, 괜찮을까요? 하고 묻는 보호자의 겁에 질린 목소리,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응급의의 간결하고 빠른 질문들…… 온갖 불안한 소리들이 커튼 너머에서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마치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처럼 심장이 동당동당 맹렬하게 뛰다 가라앉았다. 커튼을 들치고 칸막이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직 없었으므로.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고작 연인의 손을 잡은 것뿐인데 그런 것에까지 일일이 겁을 내야 하나 싶어 서러워지다가, 곧 기왕의 독한 맹세를 떠올리곤 얌전히 침묵했다. 독해져야 했다. 더, 더 독해져야만 했다. 결심이 서자 비로소 연인의 상처를 직시할 용기도 생겼다. 아픔이 크면 클수록 독기를 확고히 다질 수 있을 터이므로.
시트를 들치자 병원용 파자마가 대충 입혀진 연인의 하반신이 보였다. 독한 마음보에도 불구하고 파자마에 손을 대자마자 부들부들 전신이 떨려왔다. 물론 무시했다. 고무줄 부분을 아래로 살짝 잡아당기니 붕대로 반쯤 덮여 있는 양쪽 엉덩이가 보였다. 역시 붕대로 친친 감긴 허벅지의 일부도 보였다. 습포제를 도포하고 그 위에 몇 겹이나 되는 붕대를 덧씌운 상태임에도, 붕대 위로 벌겋게 번져 있는 핏자국과 샛노란 진물 자국이 선연했다. 붕대가 채 다 덮지 못한 엉덩이와 허벅지의 거의 대부분이 시퍼런 피멍 자국으로 낭자했고 물에 불어터진 시체처럼 퉁퉁 부어오른 부기는 끔찍했다. 벌벌 떨리는 손을 겨우 가누며 파자마를 도로 끌어올리고 시트도 본래대로 얌전히 덮어주었다. 입안으로 찝찔한 피 맛이 느껴졌다. 무의식적으로 씹고 있던 입술에서 피가 새고 있는 모양인데 아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죽여버리고 싶다. 불쑥 솟구친 엄청난 살의에 피가 타는 것 같았다. 그놈이 한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두들겨 패서 반쯤은 죽여놓고 싶다. 가능하다. 마해영의 애인한테 슬쩍 부탁하기만 하면 된다. 일반인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두들겨 패는 것쯤은. 하. 연인의 상처를 직시하니 확실히 독기가 더해지는 건 맞는 것 같다. 다만, 스스로의 맹세를 다지는 데보다, 직접적인 가해자였던 그 선배라는 놈에게로 향한 살기에 더한 자양분이 된 것 같긴 하지만. 그게 시작이었다. 연인이 깨어나기까지 두어 시간가량, 마음을 어지럽히는 불온한 망상은 끝이 없었다. 왜소한 남자는 수없이 맞고, 피가 튀고, 사지가 부러졌다. 고통을 못 이겨 엉엉 울고,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싹싹 빌고, 마침내는 철철 피를 흘리며 엉금엉금 기어갔다. 방법과 강도를 약간씩 달리한 수많은 시뮬레이션 속에서 남자는 그렇게 선혈이 낭자한 채로 수 없이 죽어가야만 했다. 놀라웠다. 자신의 내면에 이토록 악의적인 살기가 잠자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정말로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라도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실천했을 터다. 마해영 애인의 전화번호는 자신의 크로스백 안주머니 명함첩에 얌전히 들어 있다. 응급실 바깥에 공중전화가 있다는 것도 안다. 당장 나가서 전화 한 통만 하면 된다. 후후후. 불길하고 괴악한 웃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커튼이 들쳐지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어느새 다 들어간 IV 바늘을 뽑기 위해서였다. 간호사는 바늘을 뽑고, 주사 두 대를 더 놓고, 또 체온도 한 번 더 쟀다.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졌던 연인이 주사 때문인지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눈꺼풀이 두어 번 깜빡이자 몽롱함 대신 또렷한 이지가 아름다운 먹빛 눈시울에 깃들었다. 주삿바늘이 꽂혔던 팔 안쪽을 잠시 향했던 시선이 곧장 인환에게로 날아왔다. 시뻘겋게 들끓던 악의와 살기가 안개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상한 세계에서 헤매다가 순식간에 고향으로 되돌아온 듯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 동안은 이쪽도, 저쪽도 현실감이 없었다. 미동도 않은 채 심연처럼 검고 투명한 연인의 눈동자만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열은 여전하지만 더 이상 오르지는 않고 있네요. 그래도 언제든 갑자기 치솟을 수 있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간호사가 살랑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연인을 향해 말했다. 연인이 대꾸가 없자 머쓱하게 얼굴을 붉히고는 주삿바늘과 빈 수액 팩이 담긴 작은 은쟁반을 들고 다시 커튼 밖으로 나갔다. 채 다 닫히지 않은 커튼 틈으로 푸르스름해진 창문이 보였다. 날이 밝은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커튼을 완전히 쳐서 본래의 임시 밀실을 만들었다.
“……제가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탁하게 잠긴 중저음이 인환을 완벽하게 현실로 일깨웠다. 잔상처럼 시야를 어지럽히던 왜소한 남자의 피투성이 시체가 말끔히 사라지고 여전히 창백한 낯빛의 아름다운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손목시계를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두 시간쯤.”
“그렇게나요?”
조금 놀란 듯 먹빛 동공이 커지며 되묻는 연인이다.
“선생님은요? 계속 그렇게 앉아 계셨던 겁니까?”
다정과 염려가 섞인 질책에 문득 목이 멘다. 옆으로 시선을 피하며 간단히 대꾸했다.
“……응.”
“깨우시죠.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는데 많이 피곤하시죠?”
“……아니.”
“눈이 빨개요. 많이.”
“…….”
“얼굴빛도 안 좋고요.”
“괜찮아, 난. 나보다 네가 걱정이지. 아픈 건 어떠니? 여전히 통증이 느껴져?”
“아뇨. 진통제 덕분인지 잘 모르겠어요. 후후, 잠깐 눈도 붙였더니 살 만한데요?”
“…….”
“치료는 다 끝난 건가요? 의사가 뭐래요?”
“……이틀 정도는 입원하는 게 좋대. 감염이 있을지도 모르고, 하루에 네다섯 번은 붕대를 갈고 집중 치료를 해야 흉터 없이 아물게 할 수 있는데 집에선 무리일 거라고.”
“……입원까지 할 필요야…….”
“……자칫하면 피부가 괴사할 수도 있대. 내 생각에도 며칠은 입원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위야. 서울 집에 올라가 오 박사님께 부탁해도 되지만, 그보단 입원하는 게 빠른 치료엔 더 도움이 될 거야.”
누가 짠돌이 아니랄까 봐 입원이란 소리에 난색부터 표하는 연인의 말을 자르고 서둘러 덧붙였다.
“……기왕에 입원할 거면 서울에 올라가서 입원하는 게 좋을 텐데, 문제는 네 공부 때문에 어째야 할지 모르겠더라. 바로 올라가도 괜찮은지, 아니면 다른 동기들과 마저 일정을 마쳐야 하는지 말야. 먼저 네 얘기부터 들어보고 입원 결정하겠다고 의사한테 말해놨어.”
무슨 이깟 상처로 입원이냐며 당장 퇴원하겠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연인은 한참 동안 고심하는 눈치였다. 마침내 떨어진 대꾸는 인환의 독기 어린 ‘맹세’를 뒤흔들 만한 그런 것이었다.
“……일단 선생님은 오늘 당장 서울로 올라가세요.”
“……?!”
“지금 펜션으로 가셔서 눈 좀 붙이셨다가 피로 풀리시면 바로 올라가시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해주세요, 선생님.”
“……위야…… 네, 네가 이런데 어떻게 나 혼자…….”
“제 걱정 하시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게 제일 나은 방법이에요, 선생님.”
“……위…….”
“사실 골학은 여름방학에 다시 한 번 해도 돼요. 윗기 선배들 테스트만 남겨둔 상태니까 굳이 다시 하지 않고 테스트만 받아도 되구요. 제가 남는 건 그 새끼 때문이에요.”
“!!!”
주변을 의식한 듯 연인의 목소리가 한 톤 더 낮아졌다. 주의해서 들어야만 가까이 앉은 인환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조용한 목소리였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그놈도 일부러 떠벌리진 않겠죠. 하지만 그걸로 안심할 순 없어요. 이 기회에 그놈 신용도를 조금이라도 끌어내려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혹시 그놈이 소문을 흘리더라도 수습하기가 좀 더 쉬워질 테니까요. 그 자식이 이 정도로 팬 건 확실히 부당하니까 동기들이나 선배들에게 광고할수록 제겐 더 유리한 입장이 되죠. 거기다 골학 테스트까지 무사히 마치면 다른 윗기 선배들은 더 미안해할 겁니다. 연애질을 한 건 잘못이지만 테스트까지 단방에 통과했으니 더더욱 처벌이 과했다는 질책을 듣게 되겠죠. 선배들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건 제가 아니라 그놈이 되게 만들 겁니다.”
감정 없이 담담하게 이어지는 연인의 말에 오싹 소름이 일었다. 뇌리 속에서 몇 번이나 처절하게 죽어간 왜소한 남자가 문득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제가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악감정이 있어 팼다’가 되는 거죠. 얼차려까지는 서로 용인이 돼도 이유 없는 악감정으로 패는 것까지 봐주는 선배들은 별로 없습니다. 의대 선후배 관계에서의 평판이란 게 그런 거죠. 일방적으로 후배들이 불리한 것 같지만 어차피 선배란 위치도 그들보다 더 윗기 선배들 눈치를 보게 마련이거든요. 서로서로 ‘평판’이란 명분하에 감시를 하고, 또 감시를 받는 셈이죠.”
말을 하면서도 거듭 머리를 굴리는지 어딘가 먼 곳을 향해 있던 연인의 시선이 인환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좀 더 깊어진 눈시울이 사슬처럼 인환의 시선을 죄고 있었다. 꽤 오래 뜸을 들이는 걸로 봐서 이어질 주제는 좀 더 심각한 쪽인 것 같았다.
“……동기들에게 흘릴 겁니다. 이번 일로 선생님과 헤어졌다고요. 소문을 흘리면 그놈은 더 욕을 들어먹겠죠. 잘되는 커플 갈라놓은 악질 선배쯤 되려나요?”
정말 심각하구나. 순간 망치로 뒷덜미를 강타당한 듯 아찔했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어차피 인환은 연인의 동기들 사이에선 7년 연상의 ‘누님’으로 존재한다. 허상의 캐릭터 속에서 실체는 이미 죽은 인간인 것이다. 헤어지든, 열렬하게 진행 중이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어차피 사실이 아닌 것을.
“……그 빌미로 여자애들과 가끔씩 미팅도 하게 될 거예요.”
이번엔 정말로 쓰러질 것만 같은 충격이 왔다. 서 있었다면 정말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순간 하얗게 색이 바래버리는 시야가 그를 증명했다. 깊은 눈길로 그런 인환을 묵묵히 굽어보던 연인이 손을 뻗어왔다. 따스한 감촉이 병상 모서리를 쥐고 있던 손등에 느껴졌다.
“……입학하고 단 한 번도 여자애들과 미팅을 하지 않았다는 건 조금 이상하게 비치겠죠. 지금까진 선생님이란 가상의 연인이 핑계가 돼주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죠. 그대로 게이라는 소문이 돌면 치명적일 겁니다.”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근심과 염려가 가득 담긴 상냥한 눈길도, 원망스럽기는 한가지였다.
“그래서예요, 선생님. 다른 뜻은 없습니다. 수시로 미팅 하고 여자애들을 갈아치우는 바람둥이로 미리 선입견을 잡고 있으면, 게이라는 소문쯤은 그저 헛소리로 치부되겠죠.”
“…….”
“여자애들과 미팅 같은 거 해봤자 그런 애들과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아시잖아요. 계약이 끝나는 시점까지 전 선생님 소유란 걸.”
“…….”
“선생님.”
“…….”
“선생님, 저 좀 보세요.”
“…….”
“……선생님?”
“……응.”
“……정말 내키지 않으세요?”
“…….”
“그렇게 기분이 나쁘시다면…… 그럼 미팅 건은 없던 일로 할까요?”
“……어, 응? 아니……? 어, 아니! 아니, 괜찮아! 괜찮아, 위야! 괜찮아!”
홀연 정신이 들었다. 맹세했잖아. 자각과 동시에 맹렬하게 부정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맹세했다. 미치지도, 집착하지도 않겠다고. 그저 연인이 정해준 자리에서…… 그렇지, ‘사이좋은 섹스 파트너’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겠다고……. 순간적인 당황으로 조금 높아졌던 목소리 톤을 연인만큼 나지막하게 끄집어 내렸다. 주의해야지. 사방이 적이요, 사방이 감시자였다.
“……너 여자애들 귀찮아하는 거 아는데 뭘…… 괜찮아. 조금 속상하긴 하지만 네 말이 맞는걸. 그 사람 정말 이상한데, 약속 안 지키고 소문내면 어떡해. 이왕 하는 거 철저하게 대비해야지. 미팅 해. 많이 할수록 좋을 거야. 솔직히 나도 대학 다닐 때 부러 여자애들이랑 많이 사귀고 그랬었거든. 다이어리에도 여자애들 전화번호가 두 배는 더 많이 적혔었지. 그것만큼 게이라는 걸 숨기기에 좋은 방편이 없었으니까. 속여야 하는 여자애들한텐 많이 미안했지. 다행히 다리가 이러니까 진짜 애인 사이로 발전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하하, 이래 봬도 소문엔 짝사랑 전문이었다, 나?”
그래. 맹세했지. 다른 것은 일체 욕심 내지 않고 얌전히 연인이 주는 호의와 우정만 받아먹겠다고. 연인이 곁에 있어주는 그때까지는…… 그래. 그렇게 죽은 듯이 살겠다고.
“……근데 쪼금 걱정되기는 한다. 나는 다리라도 불편했지만 넌 뭘로 여자애들을 막지? 혹시 나 같은 짝사랑 전문 스토커가 붙으면 어떻게 한담?”
농담 반 진담 반, 웃음기를 머금은 채 투덜거렸다. 잔뜩 애교가 들어간 가벼운 어조로. 스스로가 대견스러워서 도리어 눈물이 날 뻔했다. 정말로 하나도 불안하지 않았다. 더 이상 서운한 기분도 안 들었다. 웃음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마음 편할 때만 전자동으로 투하되는 애교 폭탄도 연타로 나와주었다. 다정, 다정, 쓰다듬어주는 따스한 손에 슬쩍 깍지를 끼고 마주 상냥, 상냥,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선생님은 제가 허용한 사람이니 괜찮아요. 그건 이미 스토커 짓이 아니라 저도 기분 좋게 느껴지는 상냥한 관심일 뿐이죠. 다른 어느 누구라도 제게 감히 스토커 짓 따윌 하도록 허용하진 않을 겁니다.”
“헤헤, 역시 난 특별대우네, 그럼?”
“……특별대우가 아니라 비교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혹시라도 신경 쓰지 마시라고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여 심각하게 대꾸해주는 연인이 오히려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살피는 듯 인환을 굽어보는 연인의 시선은 여전히 깊고 조심스러웠다.
“……응. 알았어. 그럴게, 위야. 그 문제론 진짜 신경 쓰지 않을게. 네가 서울대 최고의 킹카에서 최고의 바람둥이로 등극했다는 풍문이 들려와도 눈 하나 깜짝 안 할게. 자, 약속.”
조물조물 어루만지던 손에서 새끼손가락만 하나 따로 걸어 약속을 주었다. 여전히 심각한 연인의 얼굴에 생글거리는 웃음으로 반격하며 도장 찍고 복사까지 하는 서비스도 더해주었다.
“……그럼 치료는 어떻게 할래? 역시 입원 수속해야겠지?”
새로운 환자가 들이닥쳤는지 주변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반사적으로 연인의 손에서 자신을 떼어내며 물었다. 웃음기도, 애교도 쏙 집어넣은 진지한 어조였다. 이 문제만큼은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고 단단히 작심하고 있는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는. 마음을 읽은 연인이 그제야 피식 웃음을 만들어낸다.
“예. 아무래도 저 혼자서는 힘드니까요. 내일 테스트까진 입원하게 해주세요. 테스트 끝나고 상태 봐서 동기들이랑 같이 버스로 올라갈지, 아니면 구급차를 타고 갈지 결정할게요. 입원비랑 치료비는 서울 올라가면 돌려드리겠습니다.”
선선히 따라주는 연인이 고마워 저도 모르게 얼굴이 헤 풀어졌다. 돈 얘긴 고집을 부려봤자 안 통할 연인이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빼서 연인의 지갑에 넣어주었다. 비상금 2만 원과 천 원짜리 두 장, 그리고 동전들 몇 개가 전부인, 언제 봐도 가슴 아픈 낡은 지갑이었다. 보물단지라도 된 양 정성스럽게 연인의 지갑을 연인의 패딩 재킷 안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자, 연인이 피식 웃음을 문다.
“……테스트는 제대로 받을 수 있겠어? 열이라도 나면 내일은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수도 있어.”
“공부는 다 했는데요, 뭘. 테스트라고 해봤자 선배들이 뼈 이름 적어주면 그중에 아무거나 뽑아서 해당하는 뼈들 골라 외운 대로 설명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냥 아이큐 테스트 같은 거니까 무리가 될 빌미조차 없죠. 쿡쿡. 엉덩이가 이래서 제대로 의자에 앉지는 못하겠지만요. 아, 그것도 무리는 무리일까요?”
슬쩍 상처 부위를 돌아보며 연인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상처를 조롱거리로 삼는 연인에겐 차마 따라 웃을 수가 없어서 그저 가만히 그런 연인만 바라보았다. 정말로 아이큐 테스트 같을 리야 없겠지만 믿어주기로 했다. 아무리 걱정이 된다 한들 자신은 먼저 올라가야만 했다. 연인 곁에 어슬렁거릴수록 그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걸,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납득하지 않았는가.
“……많이 피로해 보여요, 선생님.”
어느새 웃음을 멈춘 연인이 고요하게 덧붙였다.
“어서 댁으로 돌아가 쉬세요. 저도 내일은 올라가니까 이틀은 안 지나는 셈이죠?”
이틀. 그래. 애초에 그 ‘이틀’이 문제였지. 연인 없이 이틀도 못 버틴 이상야릇한 광증이.
“……바로 성북동으로 와줄 거야?”
“예.”
“……동생들은?”
“……이 꼴로 집에 가면 오히려 동생들이 놀랄 거예요. 겁먹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제대로 앉을 수 있게 될 때까진 집엔 안 갈 겁니다. 한 며칠 더 성준이 신세를 져야죠.”
“응. 그래. 그렇게 해.”
연인의 동생들한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재빨리 대답을 주었다. 냉큼 맛난 떡밥을 잡아채는 자신의 모습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마지노선인 ‘이틀’보다도 연인의 상태가 더 걱정이 돼서일 뿐이라고 차마 떳떳하게 스스로를 변명해줄 순 없었다. 어쩌면 상처의 원인 제공자인 자신보다 지금의 연인에겐 동생들이 더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될지도 몰랐다. 적어도 동생들은 연인에게 가장 안전한 진짜 ‘가족’이었으므로. 그럼에도 사양하지 않는다. 장남다운 책임감과 배려심을 이용해 하루라도 빨리 연인과 함께이길 바란다.
“얼른 가시라니까요. 선생님 걱정돼서 제가 더 못 쉬잖아요.”
연인이 웃으며 다시 한 번 채근했다.
“리조트에도 연락해야잖아. 너 병원에 있다고.”
떠밀리듯 일어서면서도 머릿속은 그저 연인에 대한 근심만 가득했다. 걱정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가야지. 재빨리 사라져주는 게 가장 큰 도움이라니깐. 아냐,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좀 더 미적거려도 돼. 이제 아침일 뿐인걸. 착한 천사가 채근하면 반대쪽 나쁜 악마가 유혹했다.
“간호사한테 전화해달라고 부탁할게요. 선생님은 입원 수속만 해주세요. 날도 밝았으니 다들 깼겠죠. 어쩜 그 새끼가 먼저 불었을지도 모르고요.”
“……응.”
“……어서요. 그 새끼가 불었으면 다른 선배들이 들이닥칠지도 몰라요.”
역시 미련을 잘라내는 데는 이만한 수단이 없었다. 채근하는 연인의 눈빛을 알면서도 줄곧 미적거리던 몸이 그제야 바짝 긴장을 했다. 병상 프레임에 걸어두었던 크로스백과 외투를 허둥지둥 주워들었다.
“……가, 갈게…… 치료 잘 받고…… 무사히 얼른 올라와.”
“…….”
“……지, 진짜 갈게, 위야…….”
“…….”
갑자기 초조해져서 우왕좌왕하는 손목을 연인이 불쑥 붙잡았다. 몇 번 의미 없는 작별의 다짐만 되풀이해 중얼거리던 입술이 떡 얼어붙었다. 줄곧 고요하던 연인의 눈이 느닷없이 활활 타고 있었다. 심장이 콱 짜부라지는 것처럼 충격이 왔다. 시선이 사로잡히고, 기왕에 사로잡힌 손목은 더 거세게 움켜쥐어졌다. 시퍼렇게 일렁이고 있는 아름다운 눈이 무엇인가를 호소하고 있었다. 아니, 수많은 어떤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텔레파시 초능력이 진심으로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연인의 그 어떤 속내도 정확히 읽어낼 수가 없었다. 읽어낼 방법조차 몰랐다. 그저 연인이 보여주면 보여주는 대로, 말해주면 말해주는 대로만 이해하고 읽을 수 있을 따름이었다.
필사적으로 서로의 시선을 문 채 몇 초가 지나갔다. 아니, 몇 분인지도 알 수 없었다. 커튼 밖에서 팡 하고 무언가가 부딪치는 괴상한 소리가 났고, 그것으로 숨 막히는 서로의 주시도 끝이 났다. 피멍이 들 정도로 아프게 쥐어졌던 손목도 곧 풀어졌다. 무언가 말해줄 것을 간절히 기대했던 게 무색했다. 연인은 시선을 피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천사와 악마도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어졌다.
미안해. 내 잘못이야. 용서해줘.
응급실을 벗어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못했다. 한 번이라도 돌아본다면, 그길로 되돌아가 그런 뻘소리를 지껄여댈 것만 같아서였다. 알고 있었다. 피가 낭자하게 얻어터질 이는 어느 왜소한 변태 새끼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잘못했다고 엉엉 울며 빌 자도 자신이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고 빌어버리면, 사이좋은 ‘섹스 파트너’의 위치조차 흔들릴까 겁이 난 때문이었다. 미안하다고 울면, 기왕에 모르는 체 용서해준 연인의 부아를 새삼 돋우게 될까 무서워진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올라가는 게 좋다. ‘미안하다’는 사과도 절대 꺼내선 안 된다. 적어도 이번 일에 대해서만큼은. 그래. ‘미안하다’는 사과를 늘 달고 사는 자신이라 할지라도.
“……접수하시겠습니까?”
접수대의 여자가 생긋 웃는다. 멍한 정신으로도 병원 원무과는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입원 수속을 하려 한다고 대답하자 여자가 컴퓨터를 두들기더니 몇 가지 종이쪼가리를 넘겨주었다. 여자의 주문대로 이런저런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원무과는 무척이나 한산했고, 덕분에 입원 수속은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돌려받은 확인증을 응급실로 되돌아가 제출하고 병원을 나섰다.
뚜벅거리는 자신의 구둣발 소리가 병원 계단을 삭막하게 울렸다. 8시를 향해 가는 아침이었다. 전날의 폭설이 무색하게 활짝 갠 공기는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차갑고 청명했다.
적어도 제정신으론 돌아갈 수 있게 되지 않았나. 걸음을 더할수록 시려오는 가슴에 스스로 온기를 주었다.
무언가 많은 것을 대가로 지불한 것 같지만, 그래도 죽어도 못 잊을 달콤한 한겨울 밤을 선물받지 않았나. 아무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걱정하지 마. 연인도 곧 괜찮아질 거야. 무쇠처럼 튼튼하니까 금방 털고 일어나줄 거야. 하룻밤만 지나면 다시 곁으로 돌아와줄 테니까 옆에서 정성껏 보살펴주면 돼. 그럼, 그럼. 괜찮고말고. 게다가 나흘 밤만 지나면 연인의 생일 파티도 할 수 있잖아. 평창동 김천댁 아줌마한테 부탁해서 연인이 좋아하는 음식도 산더미처럼 많이 만들어달래야지. 집 안도 풍선이랑 꽃으로 예쁘게 꾸미고…… 준비해둔 선물도 주고…… 연인도 엄청 즐거울 이벤트를 만드는 거야. 괜찮아. 별거 아니야. 무쇠처럼 튼튼한 연인이니까 이까짓 일쯤 금세 훌훌 털고 일어설 거야…….
온통 눈 천지인 병원 주차장이 보였다. 채 다 털어지지 못한 눈 더미를 여전히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자신의 BMW도 보였다.
즉시 서울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체크아웃 수속을 채 못 한 펜션이 걸렸다. 펜션에서의 꿈같았던 지난밤도 연달아 떠올랐다. 조급했던 기분은 단숨에 날아갔다. 기념품이라도 하나 챙겨 가야지. 뭣하면 객실 안내표라도. 피식. 겨우 제대로 된 웃음이 나왔다. ……아니, 눈물이었나?
“청소 다 마쳤습니다, 선생님. 확인해보시고 미진하다고 여기시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침실 밖에서 기운찬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뚫어져라 전화기만 바라보고 있다가 소스라쳐서 거실로 나왔다. 거실엔 파란 작업복(인지 제복인지 아리송한) 차림의 청년 둘과 아줌마 두 사람이 서서 밝은 얼굴로 인환을 맞고 있었다. 오전에 부른 청소 업체 직원들이었다. 두어 시간 먼저 청소를 마친 침실만큼, 구석구석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해진 집 안을 알 수 있었다. 청소뿐 아니라 소독을 위해서도 부른 전문가들이었지만, 소독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는지는 비전문가인 인환은 모를 일이었다. 다만 알아주는 전문 청소업체이니, 웬만큼은 마무리가 지어졌으리라 믿을 수밖에 없으리라. 직원들이 안내해주는 대로 집 안 곳곳을 대충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대금 계산을 마치고도 애프터서비스 문제까지 줄줄 읊으며 미적대려는 직원들을 서둘러 돌려보냈다. 마음은 여전히 조급했다. 연인이 언제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다. 어수선한 집 안에 아픈 연인을 들일 수는 없었기에, 청소 내내 초조했던 인환이었다. 업체 매니저가 한나절은 잡아야 한다더니, 처음 견적을 낸 것과 별다를 것 없이 총 다섯 시간 30여 분이나 걸린 그야말로 ‘대청소’가 되었다.
어제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의 주치의인 오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인의 부상에 대해 조언을 듣고 오늘 연인이 돌아오면 왕진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오 박사는 환자의 상태를 본 후 입원 결정을 해도 될 것이라며 먼저 집 안을 소독할 것을 권했다. 양평의 병원에서 이틀 정도 입원을 권했다면 서울에 와서도 굳이 입원을 할 필요까지는 없을 거라고도. 다만 집에서 치료를 할 경우, 감염 우려 때문에라도 한 번쯤은 집 안을 소독하는 것이 좋다고 했고, 인환은 기꺼이 그에 동의했다. 다만 당일 의뢰가 안 돼 할 수 없이 연인이 올라오는 오늘 오전으로 시간을 잡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미적거려 인환을 더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연인이 올라오기 전에 업체 직원들은 모두 철수하고 말끔해진 아틀리에만 남겨진 셈이지만, 한편으론 또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아리송하기도 했다. 솔직히 인환에게 있어선 무조건 연인이 빨리 집에 도착하는 것이 더 좋은 게 아닌가 말이다.
어젯저녁, 간호원을 통해 대신 안부 전화를 해준 것을 제외하곤 감감 무소식인 연인이었다. 연인 성격에 간호사에게 자주 전화 부탁을 할 수 없으리란 것도, 아픈데 공중전화까지 걸어가 직접 전화를 넣기도 수월치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면서도 인환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간호사는 ‘상태가 양호하다’는 말이 거의 전부였다. 애매한 말이었다. 열이 나는 건 아닌지, 많이 아파하는 건 아닌지, 혹시 연인의 일행 중 병실을 지켜주는 이는 없는지,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간호사는 그리 썩 친절하지 않았다. 성의 없는 한마디를 마치자마자 바쁘다는 핑계로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오늘 이 시간까지 감감 무소식인 연인이었다. 간밤엔 지독하게 피로한 심신에도 불구하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거의 설치다시피 했고, 오늘도 아침 일찍 들이닥친 청소 업체 직원들 탓에 내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별일이야 없겠지 싶다가도, 한번 불안한 생각이 들면 끝이 없었다. 그건 연인의 상처에 대한 걱정에서부터 저 불량한 악질 변태 놈이나, 혹은 그놈의 아웃팅 협박, 그리고 오늘 연인이 본다는 테스트 문제까지 한도 끝도 없었다. 실로 피가 마르는 심정이라는 표현이 이해가 되었다. 연인에게 떠밀리듯 혼자 올라올 때에는 그것이 최선만 같았는데 막상 이렇게 불안한 이틀을 보내고 있자니, 괜히 먼저 올라왔다는 후회가 수시로 치밀었다. 곁에서 지키진 못하더라도 양평에 숨어 있다가 대충 눈치 봐서 연인이 떠나올 때 따라서 쫓아올라오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 후회가 그것이었다. 물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뭐라 해도 인환은 한시라도 빨리 연인으로부터 떨어져야만 했었다. 저 악질 변태 놈 때문에라도 그것은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상태는 어떻지?
오싹. 잔뜩 쉬어터진 음산한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라 인환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몸서리를 쳤다.
―……어디 부러진 건 아니지? 근육은 괜찮대?
시동을 걸고 막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오려던 참이었었다. 인환의 전진을 거칠게 막아서는 하얀색 소나타 한 대 때문에 인환은 빙판길에도 불구하고 급정거를 해야 했고, 덕분에 핸들에 이마를 찧는 가벼운 부상도 당하고 말았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차라리 좀 더 다치거나 차가 망가지는 것이 더 나았을 거라고까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접촉 사고를 낼 뻔한 상대가 저 악질 변태 놈만 아니었다면.
차창이 내려가며 드러난 상대방을 확인한 인환의 얼굴은 그야말로 사색이 돼버렸다. 하도 놀란 나머지 치가 떨리는 놈에 대한 분노조차 까맣게 잊었을 정도였다. 놈은 병원까지 따라왔던 모양이었다. 따라온 것도 모자라 어쩌면 이 시각까지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걱정이 되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성격은 꼬일 대로 꼬인 변태 놈일지언정 적어도 연인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것은 분명했으므로. 아니면 겁이 났는지도 모르지. 이성을 잃을 정도로 폭행을 가한 스스로에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는지도.
―……당신 표정 보니 그리 심하진 않은가 보네? 그렇지? 하긴 그 정도까지 패진 않았으니까…….
굳은 표정의 인환을 한참 동안 살피던 해사한 얼굴에 문득 웃음이 걸렸다. 즐거운 듯한, 뭔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질 나쁜 웃음이었다.
―……애인 안 돌봐주고 어딜 가는 거야? 아, 쫓겨 가는 거야? 나 때문에? 잘 생각했어. 괜히 잘난 애인 옆에서 미적거리다가 나 같은 놈 또 만나면 곤란하잖아?
변태 놈이 다시 웃었다. 온몸을 굳혔던 충격이 사라지고, 대신 순식간에 치솟은 엄청난 살인 욕구에 전신이 타는 것만 같았다.
―……순진한 체리보이인 줄만 알았는데 화낼 줄도 아네?
연인이 맞은 까닭만을 필사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연인이 기꺼이 부당한 고통을 감내한 이유만을 곱씹고 또 씹었던 것 같았다. 그랬다. 저 눈앞의 괴상한 인간을 차째로 밀어버리고픈 절박한 욕구를 참기 위해, 자신은 아주 오랫동안 참았던 것 같았다. 폭발해선 안 되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폭발해버리면, 그 대미지는 저놈에게 가는 게 아니라 고스란히 연인에게로 되돌아갈 터였다.
―……약속은 지켜. 안 그러면 위야보다 내가 먼저 그쪽을 패 죽이고 말 테니.
어딘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목소리였다. 그것이 자신이 토해낸 담담한 응수라는 것을 인환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붉게 타는 것 같던 시야가 도로 새하얘졌다. 곳곳이 눈 천지인 병원 주차장 풍경이 비로소 제대로 보였다. 내내 웃고 있던 인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지만 직시하지는 않았다. 바라볼 가치조차 없는 자였다. 천천히 숨을 고르고 차창을 닫았다. 여전히 운전석 차창을 내린 채 이쪽을 살피는 상대의 차를 피해 20미터쯤 후진했다. 놈의 차가 정면을 가로막고 있어 직진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주차장의 끄트머리 가까이 후진하자 왼편으로 빠지는 우회로가 나왔고 인환은 망설임 없이 핸들을 틀었다. 15분여를 운전해 펜션에 도착했을 때쯤에야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전신으로 소름이 달려 나갔다.
잠시 동안은 끝까지 참아낼 수 있었던 스스로를 대견해했던 것 같았다. 한편으론 정말로 밀어버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이를 갈기도 했던 것 같았다. 물론 그 이후로 오랫동안, 인환의 마음을 내내 지배한 것은 오로지 ‘두려움’이었다. 저 악질 인간이 또 연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잔뜩 겁을 집어먹은 ‘나약한 자신’이었다. 인환 자신을 빌미로 또 연인을 협박할까 두려운 나머지 몸서리를 치고 있는 자신.
―……상태는 어떻지?
오싹. 어제 아침, 병원 주차장에서의 대면이 떠오를 때마다 저절로 진저리가 쳐지곤 하는 몸을 이를 갈며 참아내었다.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인간인데, 불쑥불쑥 떠올리곤 하는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다. 연인이 돌아와야 해. 그래. 어서 연인이 곁으로 돌아와줘야만 해. 그래야 이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연인은 강한 남자였다. 질 나쁜 변태 놈의 치졸한 협박 따위에 쉬이 무너질 남자가 아니었다. 그랬다. 더 이상 불안해할 필요도 없고 자책감에 휩쓸리지도 말아야 할 터다. 연인만 자신의 곁에 있으면 된다. 그것만 확보되면 더 이상 자신이 두려워할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진저리를 넘어 으슬으슬 떨리기까지 하는 몸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폈다. 활짝 열어젖힌 거실 창문들이 시야에 밟혀들었다. 털 코트를 걸치고 있으면서도 추운 것이 당연했다. 여전히 영하 10도 안팎을 오르내리는 한파에, 청소 내내 몇 시간 동안이나 열려 있던 창문이었다. 청소를 끝내고도 30분 정도는 더 환기를 하고, 이후에도 네 시간 정도는 창문을 약간 열어두라는 업체 직원들의 말에 그대로 두었던 것이 기억났다. 시계를 살피니 2시 57분. 30분을 정확히 채울 필요까진 없겠지 싶어 10센티 정도의 틈만 남긴 후 거실 창을 닫았다. 이어 욕실이며 서재, 발코니와 다용도실까지 차례로 돌며 나머지 열린 창문들을 몽땅 닫아걸었다. 집 안 곳곳에 온갖 종류의 세정제와 소독제 냄새가 흐릿하게 배어 있긴 하지만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창문을 다 닫고 나니 실내는 금세 훈훈해졌다. 종일 걸치고 있던 털 코트를 벗고 주방으로 갔다. 아침부터 꼬르륵거리며 허기를 호소하던 위장은 아예 감각조차 없었지만 뭐든 먹어둬야지 싶었다. 배 속이 비면 사고는 더 마이너스로 치달을 터였다.
어제 사다 놔둔 새우 리소토가 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다. 아침부터 굶어 배가 몹시 고팠을 텐데도 아무런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하루 종일 이 리소토 한 봉으로 버텼었지. 배 속을 채워야 해, 멍하니 그런 생각만 씹으며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배가 차니 담배 생각이 또 간절해졌다. 안 될 말이었다. 끊는 중이었다. 반드시 끊는다. 연인과 관련해서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흡연 욕구는 간절해지지만, 그때마다 유혹에 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몇 번이나 유혹에 져서 한두 대씩을 꼭 피우고 만다. 그때마다 의지 박약인 스스로를 저주하곤 하는 자신이었다. 이번만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테다. 새삼 이를 악물며 각오를 다졌다. 그 악질 변태 놈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결코 담배에 손을 대진 않을 것이다!
식탁 위에 놓아둔 과일 맛 캔디를 꺼내 입에 물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그것만으로는 불안해서 침실로 가 니코틴 패치까지 찾아 팔목에 붙였다. 시선은 자연스레 전화기로 향했다. 엄마한테서 한 번, 미대 동창으로부터 한 번, 마해영으로부터 한 번이 오늘 온 통화 내역의 전부였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전화는 여전히 없었다. 그래도 오늘 돌아온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을 터였다. 오늘 돌아오기에 더 전화를 할 필요성을 못 느낄지 모른다. 아니, 연인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그러니 전화 따윈 기대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면 된다. 기다리다 보면 연인은 돌아와줄 것이다. 그리고 연인을 기다리는 일에 한에서만큼은 이미 이골이 나 있는 자신이었다.
그랬다. 어느덧 4년이었다. 햇수로 4년째. 89년 봄, 촌스러운 고딩 교복 차림의 어린 연인과 조우한 이래, 자신은 늘 연인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연인과 마주하고, 직접 시선을 마주치는 시간보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몇 배는 더 많았을 터였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 그 언젠가 이별이 찾아오게 되면 자신은 그야말로 끝이 없는 기다림의 시간만 보내게 된다. 영원히 돌아와주지 않을 연인을 그리며, 연인 없는 무간지옥의 시간을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연달아 알사탕을 빨아 먹으며 하릴없이 전화통만 바라보는 스스로가 끔찍해, 해 질 무렵부턴 작업에 들어갔다. 간신히 의지력을 짜낸 결과였다. 요즘 작업하는 것이 연인의 초상 연작이라 그런지 막상 몰입하니 시간은 한결 수월하게 흘러갔다. 이렇게 연인을 몰래 그릴 때마다 항상 소원하곤 한다. 연인을 직접 앞에 모델로 세운 후 그리고 싶다고. 몇 번 부탁을 해볼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반추상에 가까운 초상화라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그러니 딱 한 번만 모델이 돼달라고. 요즘처럼 상냥하고 친절해진 연인이니 어쩌면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희망적인 상상을 해봤었다. 하지만 막상 연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면 무서워져서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호모 화가의 호모삘 나는 그림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고 면전에서 싸늘하게 거절당할까 무서웠다. 아니, 한 술 더 떠 이렇게 몰래 그리는 일조차 못 하게 할까 봐 무서웠다.
며칠 전부터 작업하다 놔둔 12호 F 크기의 소품은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니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노란색을 주조로 사용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연인의 웃고 있는 뒤태를 소재로 해서일 것이다. 뒷모습이기에 좀 더 실사에 가깝게 그렸고, 수법이 조금 유치해진 만큼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연인이 모델이라면 만화처럼 그려도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이 나올 것이다. 정신없이 몰두한 지 한참이 지난 것 같았다. 느닷없이 울린 벨소리에 붓을 떨어트릴 만큼 화들짝 놀라야 했다.
잠깐은 놀란 심장을 다스리느라 바빴고, 또 잠깐은 화가 엄청 솟구쳤고, 마지막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전신의 힘이 빠졌다. 반사적으로 벽시계부터 눈이 갔다. 8시 17분. 작업에 들어가고 나서 꽤 시간이 흘렀던가 보았다. 연인이 돌아와줄 법한 시간이긴 했다. 하지만 연인이라면 비밀번호를 누를 텐데…… 희망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인터폰으로 다가갔다가 화면을 확인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인이었다!
담담한 표정의 연인이 인터폰 화면으로부터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연인 옆에는 처음 보는 낯선 사내도 서 있었는데, 사내는 연인의 왼팔을 부축하듯 잡고 있었다. 낯선 사내가 화면 쪽을 바라보다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벨을 누르려는 모양이었다. 멍하니 서 있다가 한 번 더 울리는 벨소리에 쫓기듯 버튼을 눌렀다. 찰칵 하는 신호음과 더불어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길병원 구급 기사입니다. 문위 환자분 댁이 맞으시지요?”
연인의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구급 기사라는 사내가 환하게 웃는 게 느껴졌다. 사내가 잡고 있던 연인의 팔을 놓았고, 연인은 안정적인 자세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처럼 얼굴이 창백하지도, 다리를 절듯 불안정한 자세도 아니었다. 언뜻 봐서는 환자라는 사실조차 믿기 힘들 정도였다. 희미한 소독약 냄새와 함께 익숙한 연인의 체취가 인환을 스쳐 거실 가운데로 퍼졌다. 굳은 채로 멍하니 서서 시선만 병아리 새끼처럼 연인을 졸졸 따라 소파 앞까지 갔다.
“그럼 무사히 모셔다드렸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조리 잘하십시오. 아, 그리고 여기 문위 환자분 짐입니다.”
잠시 현관문 밖으로 나갔던 사내가 다시 들어와 외쳤다. 사내는 두 손에 쥐고 있던 커다란 배낭을 현관 앞에 부리고는 간단한 작별 인사와 함께 서둘러 사라져버렸다. 미처 고맙다는 인사를 되돌릴 틈도 없었다.
“……인사는 빌라 입구에서 제가 했습니다. 현관문 닫고 이리 오세요.”
이미 환자라고 믿기 힘든 연인이 뒤에서 불쑥 말했다. 얼이 빠진 듯 현관 앞에서 멍청히 서 있는 인환이 답답했던지 말투가 확연한 명령조였다. 자동인형처럼 연인의 명령을 따라 소파 앞에 서 있는 연인의 앞까지 다가갔다. 연인은 대충 걸치고 있던 패딩 재킷을 벗어 소파 위에 던지고 있었다. 익숙한 체크무늬 모직 셔츠가 재킷 아래 드러났고, 연인은 그마저도 벗어버려 낡은 청색 울 티셔츠 차림이 됐다. 낡은 트레이닝팬츠에 역시 낡은 티셔츠. 연인이 인환의 아틀리에를 어슬렁거릴 때면 늘 입곤 하는 편한 실내복 차림 그대로였다.
느닷없이 기쁜 일이 생기거나, 혹은 너무나 바랐던 일이 이루어지면 잠시 동안은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는 얘기가 맞는 것 같다.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연인이 돌아와줬다는 실감이 안 났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연인의 상태도 그런 비현실감을 부추겼다. 잠에서 깨어나면 인환은 다시금 혼자 연인을 기다리고 있을 뿐인 냉랭한 현실과 마주할 것 같았다.
“……그림 그리고 계셨어요?”
연인의 시선이 이젤이 펼쳐진 작업대 쪽을 향했다가 인환이 걸치고 있는 물감 얼룩 범벅인 작업용 앞치마로 이동했다.
“그래서 멍한 표정이셨군요. 선생님은 작업하실 땐 완전히 넋이 나가시는 것 같아요. 그림 이외의 것은 단 하나도 안 보이는 것처럼…… 알고 계십니까?”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연인이 알아서 덧붙이고 있었다. 눈으로 코앞까지 다가설 것을 요구하는 연인을 따라 앞에 서자 연인이 팔을 뻗어 안아왔다. 상반신이 통째로 꽉 죄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넘치는 포옹이었다. 보드라운 티셔츠의 감촉과 함께 폐부로 파고드는 연인의 체취가 짙어졌다. 소독약 냄새도 좀 더 강해졌다. 곧 물결치는 가슴 근육이 얼굴을 누르며 코를 틀어막았다. 인환의 양팔도 반사적으로 연인의 등을 끌어안았다. 티셔츠 너머 단단하게 자리 잡혀 있는 연인의 승모근을 손바닥으로 힘껏 눌러 결합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연인의 가슴 근육에 눌려 비틀리고 짜부라진 코 탓에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질식사 직전, 뒤통수를 조여오던 커다란 손이 살짝 방향을 틀어 고개를 옆으로 향하게 해주었다. 숨이 편해진 대신 오른쪽 귀와 뺨이 마시멜로처럼 짓눌렸다. 두근, 두근, 두근……. 인환만큼 빨라진 연인의 심장 소리가 바짝 붙은 귀를 통해 생생히 전달되었다. 너무 좋아하는 연인의 부드러운 숨소리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돌아왔다. 하느님. 진짜로 무사히 돌아온 거구나…… 그제야 실감이 나며 피가 끓어올랐다. 좋아서 몸서리를 쳤다.
“……추우세요?”
기쁨의 전율을 오해했는지 연인이 물었다. 목소리도 또한 자신이 너무 좋아하는 나지막한 중저음. 다시 한 번 기쁨의 전율이 흘렀다.
“……아니. 그냥 너무 좋아서…….”
전율의 여운을 고스란히 드러낸 목소리가 수줍게 떨려나왔다. 피식. 연인도 기분이 좋은지 바람 같은 웃음소리가 대답으로 샜다. 머리카락 속을 헤집고 있던 연인의 손이 아래로 타고 내려와 인환의 고개를 들게끔 했다. 역시 너무나 좋아하는 먹빛 눈동자가 시야 가득 들어찼다. 슬며시 그 위를 덮는 아름다운 눈꺼풀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눈을 뜬 채로 키스를 당했다. 눈꺼풀 안쪽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동공의 움직임을 멍하니 쫓다가 인환도 곧 거대한 열기에 휩쓸렸다. 눈을 뜨고 있는 건 더 이상 불가능했다. 혀 안쪽을 부드럽게 휘어 감는 농염한 움직임에 전신의 힘이 풀리며 교성이 샜다. 지지력을 잃어버린 다리를 연인의 두 팔이 힘껏 지탱했다.
한참 후에 입술이 떨어졌다. 섹스가 차라리 덜 야할 것 같은 키스였다. 쪽쪽. 실처럼 길게 이어진 타액을 연인이 야한 소리를 내며 빨아 삼켰다. 이어 거의 맞붙어 있던 코가 빨리고,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차례로 빨리고, 타액으로 푹 젖은 입가 곳곳이 핥아졌다. 후희 같은 립 키스 내내 연인은 인환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키스의 여운 때문인지 연인의 눈시울은 흠뻑 젖어 있었다. 지독하게 야한 눈이었다. 마주 보기가 숨이 막힐 만큼. 완전히 발기해버린 자신만큼 연인의 그곳도 딱딱하게 변한 채 인환의 아랫배 근처를 찌르고 있었다.
“……아주 달콤해요. 사탕 맛이…… 담배 생각이 또 간절하셨나 봐요.”
“……응.”
탁하게 내려앉은 중저음은 눈시울보다도 더 야했다.
“……상처는 어때? 아픈 건 좀 나았어?”
발정할 정도면 이미 물어보나 마나일 터지만 그래도 겉보기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고작 이틀 만에 나을 상처가 아닌 것은 인환도 잘 알고 있었다. 구급차로 올라온 것도 그렇고, 거의 전희와 다름없는 키스를 끝내고도 소파에 인환을 밀어붙이지 않는 것만 봐도 비디오였다.
“잘 아물고 있다네요.”
“침대에 가서 누워. 며칠은 방심하지 말아야지.”
“올라오는 내내 누워 있었는걸요. 병원에 있는 이틀은 말할 것도 없구요. 선배들이 돌아가면서 병실을 지키는 통에 아픈 척 엄살 피우느라 혼쭐이 났죠. 엎드려 누워 있는 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그래도 가서 누워. 병원에서도 아직 심각하다 여기니깐 구급차에 태워 보냈겠지. 오 박사님, 늦게라도 들러달라고 부탁했어. 네 상태 보고 계속 입원해야 할지 결정해주신대.”
“입원은 더 이상 필요 없어요. 애초부터 입원까지 할 생각도 없었던걸요. 통원 치료만 해도 충분합니다. 퇴원할 때 길병원 의사도 그렇게 말했고, 구급차도 제가 병원 측에 부러 부탁한 겁니다. 창일이가 자꾸만 여기까지 동행하겠다고 우겨서요. 그놈 떼어놓으려니 그 방법밖에 없더라고요.”
부러 과장하는 것도 아니고, 담담하게 웃는 웃음까지 연인의 말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온몸을 죄고 있던 보이지 않는 사슬이 하나하나 풀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묵직하게 심장 언저리를 누르고 있던 압박감도 점차 느슨해졌다. 또다시 몸에 설핏 흐르는 전율은 기쁨에 가까운 안도의 그것이리라.
“……저를 위해서 조금만 서 계셔주세요, 선생님. 아직 마음 놓고 의자에 앉을 정도는 아니라, 선생님을 안으려면 이렇게 서 있거나 엎드려 누워야 하거든요. 엎드려 눕는 건, 말씀드렸다시피 허리에 곰팡이가 슬 것 같아서 패스하겠습니다.”
웃음기가 밴 중저음이 코앞에서 노래하듯 내뱉어지고 있었다. 장난처럼 인환의 머리카락 속을 열심히 헤집고 있는 연인의 손길은 거칠면서도 다정했다. 표정에서도, 몸짓에서도 연인의 유쾌한 기분이 선명하게 묻어나왔다. 아아. 정말 안심해도 되는 모양이었다. 연인이 무사히 자신의 곁에 돌아와준 것도 현실이고, 연인이 기운을 차리고 있는 것도 현실이고, 무엇보다, 기분이 무척 좋은 듯한 연인도 현실인 모양이었다. 양평에서의 일이 연인 뜻대로 잘 해결된 것이 확실했다. 연인의 상처 못지않게 인환을 겁에 질리게끔 했던 트러블이 무사히 봉합된 것이다.
“……테스트는……?”
확인하듯 묻는 질문에 연인은 당연하다는 듯 시원스레 웃는 미소로 답을 알려주었다.
“엄청 아픈 척 낑낑대며 리조트로 가서 시험을 쳤죠. 동기애들 중 반 정도는 통과했고 반은 재도전해야 해요. 제가 통과하니까 예상대로 선배들은 몹시 곤란해하더군요. 미안해하기도 했고요. 그 새낀 테스트에도 참가 안 했어요. 독감에 걸려서 다른 선배와 어제 먼저 올라갔다고 하더군요. 저처럼 꾀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요.”
네가 무슨 꾀병이야 하고 부정하려던 말은 연인이 또 입술을 겹치는 바람에 그대로 먹히고 말았다. 몸속을 울리는 전율이 점점 더 심해졌다. 심하게 떠니 연인이 금세 입술을 떼고 재차 물었다.
“……정말 추우신 거 아녜요?”
야한 눈에서 순식간에 사려 깊은 눈으로 변태한 시선이 인환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아냐. 정말 좋아서 그래. 너무 좋아서…… 네가 무사히 돌아온 것도 좋고, 테스트 잘 통과한 것도 좋고, 그 이상한 변태 선배 놈이 또 너를 괴롭히지 않은 것도 다 너무 좋아서…….”
“예. 집에 오니까 저도 기분 좋아요.”
“……응…… 응, 위야…… 응…….”
상냥하게 웃으며 ‘집’이라고 말해주는 연인에게 감격해 목이 메었다. 이곳이 인환만의 ‘아틀리에’가 아니라 연인에게도 ‘집’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연인의 동생들이 있는 고척동만큼은 아니겠지만 이곳도 연인에겐 그만큼 편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혀 기대치 않은 보너스를 듬뿍 받은 샐러리맨의 심정으로 인환은 연인의 품에 얼굴을 비벼댔다. 고양이처럼 가릉거리며 또 한 번 크게 진저리를 치자, 연인은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정수리 위에 쪽 하고 입을 맞추더니 추위를 타는 애완동물을 안아주듯 끌어안은 팔에 좀 더 힘을 준 것은 물론이었다.
“그래도 실내 공기가 평소보다 좀 서늘한 것 같긴 해요. 이상한 방향제 냄새도 나고…… 아, 청소하셨어요?”
세심한 눈이 집 안을 휘 둘러보곤 이내 변화를 감지해냈다. 연인이 집에 상주하고부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청결해진 아틀리에지만, 전문가들이 손을 댄 것과는 확실히 다를 것이다. 전등갓에 쌓인 오래된 먼지조차 단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으니, 청결에 예민한 연인이 그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응. 청소 업체 직원 불러서 했어. 오 박사님이 감염 우려가 있으니 집 안을 대청소해주는 게 좋다고 해서. 아직 소독제 냄새가 좀 남아 있지? 몇 시간 동안은 창문을 조금 열어놓으라고 하더라구.”
쪽쪽. 정수리에 거듭 입을 맞추던 연인의 입술이 인환의 입술로 되돌아왔다. 쪽쪽. 쪼오옥. 쪽. 거듭되는 젖은 마찰음이 부끄러울 지경으로 요란스러웠다.
“그러실 필요까진 없는데요…… 업체를 부르신 거면 돈도 꽤 깨졌을 텐데…….”
다소 질책이 섞인 말이었지만, 연인은 여전히 웃음을 입가에 문 채 입술을 빨아 당기는 립 키스를 계속했다. 쪽쪽. 쪼옥. 쪼오옥. 쪽쪽. 서로의 얼굴 곳곳에 타액을 흠씬 묻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제멋대로 구는 데 재미가 들린 장난꾸러기 같았다. 농밀한 색기가 가득함에도, 드물게 유쾌한 연인의 기분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입맞춤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로 기분이 좋은가 봐……. 인환도 입술 끝이 저절로 말려 올라가며 들뜬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렇게 밀착해서 서로의 타액까지 나누는 마당에 연인에게 전염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몹시 설레었다. 기분이 풍선처럼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겸사겸사 한 거야. 이사한 지도 꽤 돼서 한 번쯤 소독해줄 필요가 있었거든.”
“예…….”
쪽쪽. 욕심껏 인환의 입술과 그 근처를 지분거리던 음탕한 입술이 마침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자국이 안 남을 정도로만 목덜미 여기저기를 살짝살짝 깨물다간 곧 강아지처럼 열심히 핥아댔다. 간지러운 전율이 아랫배 근처를 찌르르하게 달구며 인환을 무아지경으로 몰아갔다. 안 되는데……. 낭패감이 일었다. 입원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환자를 상대로 발정할 수는 없었다. 연인이야 언제 어느 때든 욕망을 조절할 수 있겠지만, 그쪽 방면의 의지력이라곤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는 인환에겐 무리였다. 흥분한 나머지 연인의 상처를 건드릴 위험이 있는 마당에 무턱대고 성적인 자극에 몰입할 수는 없었다.
“……밥…… 저녁…… 안 먹었지……?”
고개를 슬쩍 빼는 것으로 간신히 연인의 입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따라오는 입술에,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예. 먹어야죠. 배고파요. 이틀이나 병원 밥만 먹었더니 속이 텅 빈 것 같아요.”
경동맥 근처에 입술을 묻은 채로 연인이 중얼거렸다. 여전히 나른하고 섹시한 중저음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정말 배가 고프긴 한 건지 따져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랫배를 찌르고 있는 연인의 딱딱함은 선정적인 목소리만큼이나 저의를 의심스럽게 했다.
“……불고기 정식 시킬까?”
“냉장고에 밑반찬 좀 있나요?”
“……응. 그그저께 김천댁 아줌마가 또 가져다주셨더라고. 너 스터디 여행 가서 많이 먹을 사람 없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셨든. 돌아오면 더 허기져 있을 거라고 그때 먹이라더라. 알지? 아줌마 너 먹이는 데 재미 들리신 거?”
“후후, 그럼 대충 먹어요. 냉동실에 돼지고기 남은 거 넣고 김치찌개 해드릴게요.”
“무슨 소리야! 아픈데 무슨 요리를 하겠다고…….”
“그럼 다른 거부터 먹게 해주실래요?”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입술이 조금 떨어졌다. 서로의 코끝만 붙인 상태에서 연인이 시선을 얽어왔다. 역시나 지독하게 야한 눈. 약간 충혈된 눈자위며 축축하게 젖은 눈시울을 직시하자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노골적으로 선정적인 주시였다. 그럼 그렇지. 저의가 의심스러웠다구…….
“……넌 환자야…… 그거 하다가 상처 벌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후후, 그야 피 좀 보고…… 또 좀 아프겠죠.”
“……절대 안 돼. 아물 때까지 정말 주의해야 한댔잖아.”
“아물고 있어요.”
“……거짓말. 고작 이틀 만에?”
“진짠데…….”
“……‘진짜’ 안 돼. 의자에 마음 놓고 앉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그거 금지야.”
“‘진짜’, 이러시기예요, 선생님?”
“후후후…… 정말 기분이 좋네, 나의 위위…….”
“…….”
“……빨리 아물어야 동생들한테 가지…… 솔직히 ‘진짜’로 할 생각은 아니지?”
“…….”
“……두근거려…… 네가 즐거워하니까 막 여기가 두근두근…… 설렌다, ‘진짜’…….”
“…….”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거야, 위야? 테스트 통과한 거?”
“…….”
“……음, 그럼 변태 선배 놈 물 먹인 거?”
“…….”
“……그럼 상처 잘 아무는 거 같아서? 아님, 집에 무사히 돌아와서?”
“…….”
“하하, 전부 다라구? 다 신이 나?”
“……예…….”
힘겹게 토해지는 듯 묵직한 대답이었다. 흥겨운 웃음이 서서히 걷힌 연인의 검푸른 눈동자엔 무언가 거친 열기만 일렁이고 있었다. 심해처럼 깊어진 시선으로부턴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그저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깊고 무거운 어떤 ‘의미’만을 흐릿하게 감지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진지해진 연인을 따라 인환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봄바람처럼 설레는 가슴은, 그러나 여전했다. 가슴이 대신 전해주는 언어를 통해 연인도 여전히 기쁨에 설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환의 시선을 사슬처럼 포박한 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연인이 이윽고 인환의 얼굴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연인이 처음 집 안에 들어섰을 때처럼 연인의 가슴 근육에 얼굴이 통째로 짜부라졌다. 뒤통수를 짓누르듯 쓰다듬는 손길은 거칠고 열정적이었다.
“……전부 다 신나요. 다 좋아…….”
“……응…….”
“……좋아요.”
“……응, 그래…….”
“……진짜 좋아…… 좋아…… 좋…… 아…….”
“……그래, 위야…….”
“……너무 좋아요…….”
“…….”
열기 어린 목소리가 거듭 감추지 못할 환희를 호소했다. 무언가에 잔뜩 억눌린 그것이 안타까운 듯, 혹은 인환이 알아주지 않는 게 억울하다는 듯, 우는 듯 웃는 목소리였다. 무언가의 환희를 인환도 함께 누리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알아주고도 싶었지만 알 수 없었다. 그저 짜부라진 코맹맹이 소리로 열심히 대꾸해주는 게 고작이었다. 연인의 양팔에 힘이 더해질수록 그조차도 힘들어졌다. 몇 분 전, 연인이 처음 집 안에 들어섰을 때처럼 연인의 가슴 근육에 눌려 비틀리고 짜부라진 코 탓이었다. 다행히 질식사 직전, 뒤통수를 조여오던 커다란 손이 살짝 방향을 틀어 고개를 옆으로 향하게 해주었다. 숨이 편해진 대신 오른쪽 귀와 뺨이 또 마시멜로처럼 짓눌렸다. 두근, 두근, 두근……. 여전히 빠르게 고동치는 연인의 심장 소리가 바짝 붙은 귀를 통해 생생히 전달되었다. 너무 좋아하는 연인의 숨소리도 생생하게 들려왔다. 함께 누리지 못해도, 전부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연인을 따라 인환의 심장도 빠르게 울렸다. 빠른 울림을 통해 심장은 연인의 환희를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 마치 서로의 심장이 연결돼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역시 섹스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생각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몸이 따라가주지 않았다. 처음의 과도한 흥분이 가시자마자 연인은 환자다운 지친 기색을 완연히 드러내 보이며 소파에 누워버렸다. 끓여주겠다던 김치찌개는커녕 주문한 불고기 정식도 마지못해 먹어치우는 기색이 역력했다. 배 속은 허한데 식욕이 없다고, 연인은 웃으며 싱겁게 변명했다. 원인은 미열 때문이었다. 혈색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어서 안심했건만, 확실히 고작 이틀 만에 그 심한 상처가 아물 리는 없었던 거였다. 그도 저녁 늦게 왕진해준 오 박사를 통해 겨우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틀 만에 제대로 보는 상처는 어째 더 참혹해 보였다. 붉은 기로 번지기 시작한 피멍은 상처의 면적을 더 크게 보이게끔 했고, 딱지가 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도포한 습포제 탓에 심하게 찰과상을 입은 부위는 피와 진물로 전 채 크게 부풀어 있었다. 저절로 신음이 터지고 눈물이 솟구칠 것 같아, 입술을 깨물며 겨우겨우 감정을 억제했다. 오 박사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아끼는 후배 이상의 티를 낼 순 없었기 때문이다. 오 박사는 잘 아물고 있다는 믿기 힘든 말로 인환의 초조감을 그나마 덜어주었다. 흉터 문제를 신경 쓴다면 2∼3일 더 입원하면 좋겠지만 젊은 사람이니 답답증을 느낄 거라고도 했다. 결국 집에서도 주의 사항만 잘 지켜 치료하면 굳이 입원할 필요까진 없다는 진단이 떨어졌다. 다만 이틀에 한 번씩 근처 병원에 들러 의사에게 상태를 보이라는 조언도 해주었다. 아무는 정도에 따라 집에서의 처치도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반드시 들러야만 한다고. 인환이 할 일도 주어졌다. 무려 네 시간마다 한 번씩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가는 임무가 그것이었다. 상처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핑 돌고 손이 떨리는 인환에게 있어선 대단히 무리한 임무였지만 할 수 없었다. 그조차도 못해서 매번 바쁜 오 박사를 부를 수도, 그렇다고 따로 간호사를 고용할 수도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연인의 얼굴을 볼 낯이 없을 것이다. 사내 주제라면 절대 부릴 수 없는 엄살인 것은 인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상대가 연인이 아니라면 그런 일쯤은 자신 있게 할 수 있겠지만, 연인에겐 그저 변명으로 들릴 터였다. 질겁한 심장은 마음 깊숙이 숨긴 채 오 박사의 시범을 눈을 부릅뜨고 보았다. 진물과 피범벅인 기존의 붕대를 걷어내고 소독과 치료를 한다. 그리고 다음은 습포제를 도포한 뒤 붕대를 감고 고정한다. 과정은 단순했다. 일단 익숙해지면 어린아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간단하지? 하고 오 박사는 시범을 마친 후에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창백해진 얼굴로 인환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오 박사는 껄껄 호탕하게 웃어댔다. 안색이 변한 것을 그저 단순히 피고름에 비위가 상한 탓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등짝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아프게 한 번 때리더니 ‘남자가 고거 가지고는’이라며 비웃음까지 떨궈주었다. 졸지에 간이 쥐똥만 한 졸장부 취급을 받았지만 거기까진 신경도 가지 않았다. 그저 가슴 아픈 연인의 상처와, 그럼에도 감정을 드러내선 절대 안 된다는 의지만이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오 박사가 돌아가고 30분이 채 안 돼 연인은 잠이 들었다. 역시 진통 성분이 든 항생제 효과와 미열 탓인 듯했다. 인환도 연인의 옆에 누워 한동안 연인의 얼굴만 들여다보다 쉬이 잠이 들었다. 지난 며칠 동안의 불면과 피로가 한꺼번에 들이닥친 때문이리라. 다만 간만에 주어진 깊은 숙면은 연인이 밤새 끙끙거리며 몸을 뒤채는 통에 여러 번 깨어나야 하는 핸디캡도 덤으로 선물받아야 했다. 연인은 엎드려 자거나 모로 자다가도 자기도 모르게 정자세로 눕곤 했고, 그때마다 상처에 전해지는 통증에 신음성을 토하며 깨나곤 했다. 곧 도로 잠이 들긴 했으나, 잔뜩 찌푸려진 미간과 굳은 표정에서 연인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피곤해하는가는 선명하게 읽혔다. 입원한 내내 종일 잤다고 하면서도 이내 잠이 들어버린 까닭이 짐작되는 길고 긴 밤이었다. 항생제와 미열 때문만은 아니었다.
괴롭고 불편한 그 밤은 연인을 힘들게 한 만큼 인환에게도 힘든 하루를 주었다. 연인은 날이 밝아도 내내 피로해했고, 식사를 하거나 동생들에게 전화를 거는 일, 혹은 잠깐 동안 책을 읽거나 하는 시간 이외에는 줄곧 맥을 못 추고 다시 잠이 들곤 했다. 하도 걱정이 된 나머지 오 박사에게 전화를 했는데, 오 박사는 당연한 반응이라며 상태가 호전되면 숙면도 취하게 되고 낮 동안의 피로감과 무력감도 사라질 거라고 했다. 오 박사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불신감마저 들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연인이 한시라도 빨리 나아지길 기도하는 수밖에.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상황은 거의 다르지 않았다. 연인은 인환 혼자라도 편히 자라고 손님방에서 칩거하려 했지만, 그럼 걱정돼서 더 못 잔다는 억지로 연인의 각방 선언을 막아냈다. 둘째 날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걱정 근심에 찌들어 하루를 보냈는데, 셋째 날이 되니 그럭저럭 여유가 생겼다. 상처도, 또 연인의 상태도 확연하게 호전되진 않았지만 적어도 더 이상 나빠지는 일 또한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인의 상처를 돌보고 붕대를 가는 것도 점차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어갔다. 맨 처음엔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며 오 박사의 가르침을 되뇌기 바빴지만, 두 번 세 번 되풀이하는 사이 차츰 여유가 생겼다. 걱정이 크니 마음은 그만큼 독해지는 모양이다. 이러다 간호사 자격증을 따도 되겠다고, 상처에 연고를 바르며 연인에게 농담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로써 3일째…… 연인의 생일이었다.
생일의 기적이었을까? 하. 그럴 리는 없겠지만, 확실히 연인의 상태는 많이 나아져 있었다. 간밤에도 종종 상처의 아픔에 깨어나곤 했지만 그 전날보다는 확실히 덜 깨는 듯싶었는데, 아침에도 병든 닭처럼 졸기만 하던 연인이 의외로 쌩쌩해졌다. 거의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인환의 기분은 그야말로 날아가는 듯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차비를 하고 연인을 근처 외과 병원으로 데려갔다. 의사는 죽은 조직 밑에서 새살이 돋고 있다고 했다. 흉터가 안 지게 하려면 딱지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니 그 점만 주의하면 이번 주말 중으론 상처가 아물 거라고 했다. 아직 마음 놓고 의자에 앉을 정도는 아니지만, 조심만 하면 조금씩 앉아도 되고 밤에 정면으로 누워 자도 그리 통증은 느끼지 않을 거라 했다. 무엇보다, 낮에도 비몽사몽인 연인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니 그것만으로도 인환은 기운이 펄펄 나는 느낌이었다. 지난 이틀간 병든 닭 같기만 했던 연인을 보다 보니 인환 또한 자신도 모르는 새 상당히 의기소침해져 있었던 것이다. 평소 철인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한 모습의 연인의 모습만 봐온 터라 대미지는 더했을 것이다. 정말로 ‘생일의 기적’이었다. 줄줄이 희소식만 꺼내주는 의사의 얼굴에 뽀뽀라도 해주고픈 심정이었다.
인환의 반의반만큼도 기뻐하지 않는 것 같은 심드렁한 얼굴의 연인을 모시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은 말 그대로 ‘구름 속의 산책’이었다. 베테랑 간호사가 간호를 잘한 덕분이라고, 연인에게 공치사까지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연인은 그런 인환이 재미있는지 피식피식 헛웃음을 물곤 했다. 시일이 지나면 당연히 아물게 돼 있는 것을 무에 그리 좋아하냐며 초를 치는 연인이었다. 물론, 식초는커녕 빙초산에 듬뿍 절여져도 인환은 끄떡도 하지 않을 터였다. 완쾌를 향한 고지가 보이는 것도 좋고, 기운을 차린 연인에게 둘만의 생일 축하 파티를 해줄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지난해, 연인이 자신의 생일에 해준 것처럼 근사한(물론 근사한 만큼 가슴이 찢어지기도 했다만) 깜짝 생일 이벤트는 이미 물 건너갔지만,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축하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게 됐다. 지지난해의 생일엔 스토커처럼 비칠까 봐 눈치가 보여 못 하고, 지난해 생일엔 연인과 친구가 돼보겠다고 이별한 뒤 필사적으로 노력하던 시기라 혼자서 울며 보내야만 했었다. 전화로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조차 못하고서, 주인 없는 케이크에 홀로 촛불을 켜고, 「해피 버스데이 투 유」를 부르고, 울면서 꾸역꾸역 케이크를 먹어대는 청승만 떨었었다. 당근, 한이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짝사랑 게이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해야 할까, 드디어 올해! 1992년 1월 19일의 생일은 온전히 축하를 해줄 수 있게 됐다. 올해엔 스토커처럼 보일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친구 흉내를 내며 마음을 억누르지 않아도 된다.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아틀리에로 접어드는 골목 입구에 빵집이 하나 보여 무심코 차를 세울 뻔한 건 지나치게 들뜬 때문이리라. 생일 케이크는 양평에서 돌아온 날 바로 신라호텔에 주문을 해두었었다. 점심때쯤 배달해줄 터였다. 집 안을 장식할 풍선이며 리본들도 벌써 사둔 지 오래고(무려 한 달 전이다!) 예쁜 생일 꽃바구니 역시 양평에서 돌아온 즉시 주문을 해뒀다. 다만 음식만은 어찌 될지 몰라 김천댁 아줌마에게 부탁만 해둔 상태였다. 연인의 상태가 나아지면 연인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종류별로 다 준비해달라고 할 터였고, 여전히 아파하면 그냥 간단히 미역국과 갈비찜 정도만 준비해 보내달라고 할 터였다. 물론 집에 돌아가는 즉시 전부 준비해달라고 전화를 할 것이다. 저녁 식사에 맞춰 배달을 부탁하면 김천댁 아줌마는 신이 나서 가져다줄 것이다.
지난여름 무렵부터 연인이 아틀리에에 거의 상주하게 된 이래 김천댁 아줌마가 밑반찬들을 가져다주는 일도 훨씬 자주 있게 되었다. 한식을 좋아하는 연인은 당연히 아줌마의 반찬들을 좋아했고, 가져다주기 바쁘게 무서운 식성으로 먹어치우곤 했다. 한식보단 일식과 양식을 좋아하는데다 입이 짧은 인환 혼자일 때는 일주일에 한 번 가져다주는 것도 반 이상을 버리곤 했었다. 아줌마는 연인과 마주치기 전부터 연인의 먹성에 거의 열광하다시피 했는데, 그건 일주일에 한 번씩 아틀리에를 방문할 때마다 아줌마가 버려야 할 음식들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지난가을 불시에 찾아든 아줌마(다분히 계획적이었다!)는 미처 피하지 못한 연인과 마주치게 되었고, 그 즉시로 연인의 광팬이 된 것은 물론이었다. 잘 먹는 총각이 얼굴도 ‘알랭 들롱’이라며, 아줌마는 아이돌에 열광하는 10대 소녀처럼 흥분했다. 실로 환갑이 가까운 아줌마에게도 연인의 미모는 저항하기 힘든 매력이었나 보았다. 결국 일주일에 한 번이 고작이던(그것도 인환이 오지 말라면 2주일에 한번일 때도 있었던) 밑반찬 배달의 주기가 일주일에 두 번으로 급상승하게 됐다. 다만, 그만큼 자주 부딪쳐야 하는 김천댁 아줌마 탓에 인환은 둘의 관계에 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저 ‘아끼는 후배’와 선배의 관계일 뿐이라는 거짓말을 의심받지 않기 위해, 아줌마 앞에서는 철저히 감정을 숨겨야만 했다. 물론 속이는 것은 의외로 쉬웠다. 연세가 있는데다 촌부 출신이라 그런지 게이가 정확히 어떤 사람들인지조차 상상 못 하는 아줌마였다. 연인이 불우한 가정 형편 때문에 인환의 집에서 자주 신세를 지는 것뿐이라는 거짓말에도 그저 혀를 끌끌 차며 안쓰러워하는 것이 다였다. 잘생겼지, 서울대 다니지, 먹성 좋지, 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청년이 참 안됐다며 아줌마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양심에 푹푹 찔린 나머지 아줌마의 방문을 더 꺼리게 된 것은 물론이었는데, 이미 연인이 아줌마의 반찬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라 못 오게끔 하는 핑계를 만드는 일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연인 또한 거북함을 느끼는지, 아줌마가 들르는 월요일과 목요일의 오전 시간대엔 귀신처럼 집을 빠져나가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이따가 김천댁 아줌마 오실 거야, 위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연인에게 미리 자진 납세를 했던 것도 저간의 구구한 사정의 결과였다. 아줌마를 거북해하는 연인을 알고 있었고(차마 그 이유까지 상상하는 건 무서워서 그만둔 지 오래지만), 연인의 재빠름 덕분에 6개월에 가까운 반동거 기간동안 아줌마와 연인이 실제로 부딪친 것도 총 세 번에 불과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진 납세를 하면서 좀 쫄긴 했었다. 이틀 전 월요일엔 연인이 아프다는 핑계로 아줌마를 못 오게 했고, 또 연인이 완쾌될 때까지는 전면 출입 금지를 시킬 작정도 하고 있긴 했지만, 오늘만은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연인이 좋아할 ‘가정식 생일상’은 오직 김천댁 아줌마만이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었다. 침실에서 자는 척하면 될 거라고, 약 먹고 겨우 잠들었다고 핑계를 대고 잽싸게 쫓아 보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열심히 변명을 더하며 자진 납세를 했었는데 의외로 연인은 상관없다고 담담히 대꾸했을 뿐이었다. 월요일에 오지 못하게 했으니 늦게라도 오는 모양이라고 대충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오늘이 연인의 생일이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연인의 동생들과 친구인 김성준, 그리고 연인의 대학 동기들로부터 줄줄이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 것은 아침 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이었다. 짐작대로 생일 축하 전화였다. 연인은 그제야 본인의 생일을 알아차렸고,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줄줄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 시작했었다(물론 동생들과 김성준의 전화는 특유의 흐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무척 기쁜 듯 받긴 했지만). 번호를 달리하는 연인만의 전용 전화를 연인이 부러 개통한 것이 지난해 9월 무렵이었는데, 실로 그 유용성이 여실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가장 먼저, 가장 멋들어지게 축하 파티를 해주고픈 욕심 따위 기왕에 버린 인환이었지만, 그래도 조금 침울해지는 것까진 어쩔 수가 없었다. 인기인임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호들갑스러운 통화 행진에 뒤늦게 가세해 축하 인사말을 더해봤자, 신선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을 터였다. 연인이 아프지만 않았다면 자신이야말로 대대적인 깜짝 이벤트를 벌일 작정이었다고, 속으로 툴툴거리며 병원 갈 준비를 했다. 연인이 먼저 아는 체를 해준 건 그때였다. 의대 동기 하나의 전화를 마지막으로 줄줄이 이어지던 축하 전화가 겨우 잠잠해지자, 연인의 살피는 시선이 인환에게로 곧장 떨어졌다. 입이 댓 발이나 나왔다며 천인공노할 유언비어부터 주워섬기더니 빙긋, 웃음까지 물어버린 연인이었다.
―……오늘 김천댁 아주머니를 부르신 건 제 생일상 때문인가요?
묵묵히 옷을 갈아입은 후 연인에게도 병원 가자고 재촉이나 하는 인환을 피식거리는 웃음을 깨물며 내내 힐끔거리던 연인이 느닷없는 기습 공격을 던졌다. 아침 먹기 전만 해도 자기 생일인 줄도 모르더니, 그새 눈치 백 단을 넘어 아예 인환의 머릿속에 들어앉아버린 연인이었다. 당장은 말도 안 나왔다. 그저 입을 딱 벌린 채 눈이나 껌뻑거릴 수밖에.
―누구보다도 먼저 축하해주시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들한테 선수를 빼앗겨서 삐지셨죠?
하.
―제가 아파서 차마 내색 못 하신 건데, 아침부터 저 귀찮게 축하 전화만 줄줄 오니까 속상하신 거고요?
우씨. 돗자리를 깔아라, 진짜. 너 머리 좋은 건 다 아는데, 위야. 내 쪼잔한 속내 정도는 제발 몰라주면 참 좋겠거든!
―……오늘 병원 가서 괜찮다고 그러면 저녁에 간단히 생일 축하 파티 해주려고 그랬어. 너랑 나 둘뿐이긴 하지만…….
얼굴이 조금 빨개져선 그렇게 또 자진 납세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을 연인은 한동안 바라보며 웃었고, 품에 다정하게 안아주었고, 또 달콤한 키스도 해주었다. 가장 두근거렸던 건 귓가에 토해진 나지막한 한마디.
―둘뿐이라 전 더 좋은데요.
다분히 성적인 의미가 내포된 일변이었지만 그래도 몹시 기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만큼은 아닐지라도 연인 또한 단둘만의 파티를 원하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전혀 기대치 않았던, 감동적인 보너스가 아닐 수 없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걱정은 여전했어도 이런저런 기대감으로 술렁거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터이다. 결국 ‘생일의 기적’이 일어나주었고, 인환은 지난 2년 동안 맺힌 한을 기어코 풀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빌라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각이었다. 저녁 식사 전까지 생일 인테리어로 혼자 집 안을 꾸미려면 조금 빠듯할 시간이기도 했다. 조급한 마음도 들었지만 즐거운 기대감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준비하는 자체도 엄청 기쁠 터였으므로. 우선 연인부터 쉬게 하고 하나씩 차근차근 시작하면 충분할 거야…….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계획과 음모들이 즐겁게 굴러다녔다.
“피곤하지? 가서 눈 좀 붙여, 위야. 점심 먹을 때 깨워줄게.”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자동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연인은 아침나절과 별다름 없이 혈색도 좋고 기운도 생생해 보였지만, 지난 사흘간의 경험이 노파심을 만든 탓이었다. 물론 연인은 코웃음으로 일축했다. 코트를 벗어 인환에게 건네준 다음 연인이 한 일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것이었다. 조심스러운 몸짓이긴 했으나 별로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은 채 확실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연인 대신 얼굴이 잔뜩 구겨진 쪽은 물론 인환이었다.
“……괘…… 괜찮아?! 아, 아프지 않아, 위야……?!”
걱정으로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연인을 향했다. 자신의 엉덩이와 허벅지에도 욱신거리는 아픔이 느껴졌다. 연인을 살피며 온몸에 잔뜩 힘을 주었으니 그저 기분 탓만도 아닐 것이다.
“예. 괜찮아요. 약간 저릿하긴 한데 별로 아프진 않아요.”
스스로도 몸 상태를 확인하듯 잠시 가만히 있던 연인이 이윽고 대꾸를 주었다. 살짝 찌푸려졌던 미간도 어느새 편안히 되돌아와 있었다.
“……그래도 아직 의자에 앉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이제야 겨우 아무는 거 같은데…….”
“아물기는 다친 날부터 아물기 시작했죠. 괜찮습니다. 그간 바로 눕지 못해 정말 답답했는데 오늘 밤부턴 제대로 잘 수 있겠네요.”
“……그래…… 그건 잘됐는데…… 그래도 아직은…….”
“쿡쿡, 어째 제가 아픈 게 아니라 선생님이 아프신 거 같아요. 이마랑 미간이랑 잔뜩 찡그려져 있어요. 이리 가까이 와보세요.”
“……어? 어어…….”
“자, 이렇게 펴시면…….”
연인의 눈짓에 따라 무릎을 꿇고 마주 앉자 연인이 얼굴로 손을 뻗어왔다. 이마를 두 손으로 잡더니 죽죽 늘이듯 펴곤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바삭하게 마른, 거친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며칠째 계속된 미열과 수면 부족 탓이리라.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커다란 두 손이 연신 머리카락 속을 헤집어대더니, 이어 관자놀이께로 이동해 양쪽 귓불을 잡고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눈꼬리가 아래로 접히며 웃는 아름다운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대로 홀라당 넋이 나가 연인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는 건 당연지사. 심연처럼 깊은 먹빛 눈이 웃음기를 드러내며 자잘하게 일렁였다. 쪽쪽. 쪼옥. 쪽. 최면을 걸듯, 연인은 그렇게 시선을 맞춘 채로 인환의 이마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인환 또한 숨을 죽인 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눈…… 감아보세요.”
나지막한 중저음이 저의가 분명한 명령을 했다. 입술을 이마에 거의 문지르듯 쉴 새 없이 키스하는 터라 간질거리는 감촉과 뜨거운 숨결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너도 감으면…….”
“최소한 한 사람은 뜨고 있어야 정확히 맞추죠.”
“……매번 눈 감고도 잘만 하면서…….”
“후후…… 코끼리 부딪쳐도 모릅니다?”
“……응…….”
부딪칠 리가 없다. 자신 쪽은 눈을 안 감을 테니까. 이렇게 예쁜 얼굴을, 보기만 해도 넋이 나가는 달콤한 얼굴을, 눈을 감아 차단하기가 싫다.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했던 웃음을 요 며칠은 수시로 만들어내곤 하는 연인이다. 안 그래도 기적 같은 이목구비에 쾌활한 웃음기가 더해지니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부상이 가져다준 과민 반응 때문이리라 추측을 하면서도, 차마 그것까지 좋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다. 실컷 연인의 웃음을 구경하고픈 때문이다. 상처가 완치돼 연인이 다시 본래의 과묵하고 진중한 성품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연인의 웃는 얼굴을 뇌리에 각인시킬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오래오래 들여다보고픈 거다.
연인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왔다. 입술이 겹치는 순간, 연인의 허리 근처를 헤매고 있던 자신의 두 손이 자연스레 등 뒤로 넘어갔다. 끌어안긴 했어도 연인만큼 엄청난 힘으로 죌 수는 없었다. 뇌리 한구석에는 여전히 연인의 상처에 대한 기억이 폭탄의 뇌관처럼 남아 있었다.
뜨거운 혀의 감촉이 입안 가득 들어차고, 비벼오는 질척한 느낌에 온몸의 신경이 흐물흐물해졌다. 감은 눈꺼풀 아래 이리저리 움직이는 연인의 동공이 보였다. 곱고 섬세한 속눈썹의 그늘도 보였다. 눈을 뜰 땐 드러나지 않던 속 쌍꺼풀을 따라 촘촘히 나 있는 속눈썹은 믿기 힘들 만큼 길고 아름다웠다. 예뻐…… 너무너무 예뻐…… 예뻐……. 설레는 감탄은, 그러나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연인의 키스가 점점 짙어져 더 이상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때문이었다.
저절로 온몸의 힘이 풀리고, 저절로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연인이 밀어붙이는 대로 카펫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것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불길에 휩쓸렸다. ……상처에 무리가 가면 안 되는데…… 가까스로 짜낸 의지가 어렴풋이 경고를 주었지만 그도 곧 까맣게 잊혔다.
―……저도 만져주세요, 선생님…….
소름 끼치게 섹시한 요청이 귓가에 토해졌다. 연인의 오른손은 이미 인환의 팬티 안쪽을 파고들어 양쪽 고환을 음탕하게 굴리고 있었다. 순종적인 노예의 손이 즉각 연인의 사타구니 틈을 더듬었다. 연인의 낡은 트레이닝팬츠는 벗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대로 속옷까지 파고들어가 이미 가득 팽창해 있는 흉기를 손바닥 가득 품어 안았다. 이틀에 한 번씩, 요청은 늘 절대 명령이 되었다. 가랑이 틈에 서로의 손을 집어넣고, 만지고, 주무르고, 굴리는 일련의 과정들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매번 놀라울 정도로 창의적인 섹스가 되었다. 지난 몇 달, 기왕의 수많은 쾌락의 기억들이 기대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두 마리의 수컷은 극도로 발기했다. 뿌리에서부터 귀두 끝을 향해 뿌리듯 손가락을 미끄러뜨리고, 질질 새기 시작한 음액을 손바닥 잔뜩 발라 귀두 구멍을 문질러 자극시키면 서로는 끙끙거리며 교성을 참지 못했다. 다시 귀두 끝에서 뿌리 쪽으로 역주행해 내려가면 다가올 쾌감에의 기대에 입안 가득 침이 고여 들었다. 넘치도록 들어찬 서로의 타액은 곧 서로의 목구멍 안쪽으로 미친 듯이 빨아 삼켜졌다. 서로의 혀끝을 빨고, 비벼대고, 깨무는 사이, 아래를 더듬는 부지런한 서로의 손들은 소외됐던 불알을 음란하게 굴려도 주고, 불알 주름 사이사이 손톱으로 긁어도 주고, 손가락을 좀 더 뒤로 넘겨 회음과 항문 언저리를 농염하게 애무해주었다. 한쪽이 중지를 주름 틈으로 불쑥 쑤시고 들어가면 다른 한쪽은 더 깊이 파고들어 전립선 근처를 박아댔다. 서로의 입안을 침범한 혀는 음낭이 되고, 서로의 항문을 파고든 손가락은 그대로 페니스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미친 듯이 범하고 범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맹렬하게 허리를 흔들고, 음경을 맞비비고, 항문 깊숙이 손가락을 박아 넣고, 내벽을 할퀴고, 격렬하게 피스톤 질을 해댔다. 박으면서 동시에 박히는 수컷 최고의 쾌락을 무아지경 속에서 서로 만끽했다.
띠리리리리∼∼∼∼
막 오르가슴에 달한 두 몸뚱이가 전화벨 소리를 쉬이 인식할 수는 없었으리라. 아마도 한참을 울리다 끊어졌을 전화는 몇 분이 지난 후 다시 울리기 시작했고, 먼저 연인이, 그리고 곧 인환도 제정신을 차리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로의 배 위에 사정한 후, 덮치듯 인환을 끌어안은 채 숨을 고르고 있던 연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며 나지막한 신음성을 토하는 것을 보니 상처에 무리가 간 것은 확실한 모양이었다. 근심 어린 눈으로 연인을 응시하자 괜찮아요 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연인이 일변했다. 입가에 흐릿하게 밴 웃음기로 보아 통증이 심하진 않은 것 같았다. 띠리리리리∼∼∼∼. 녹초가 돼서 늘어진 인환을 잠시 살피듯 굽어보던 연인이 끈질기게 울어대고 있는 전화기 앞으로 걸어갔다. 벨소리가 같아 듣기만 해선 누구의 전화인지 헛갈리곤 했는데, 두 대의 전화기를 번갈아 살펴보던 연인이 다시 인환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선생님 전화네요.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담담히 물어오는 목소리에서 정사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도 어느새 감쪽같이 가다듬어져 있었는데, 짙은 색의 트레이닝팬츠라 서로의 정액으로 흠뻑 젖은 것조차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공기 중에 떠도는 희미한 밤꽃 냄새라든가, 약간 상기된 채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만 아니라면 완전 범죄가 됐을 것이다. 억울해. 속내 어딘가가 슬쩍 삐지는 순간이었다. 함께 사랑을 나누는데 어째서 매번 인환 자신만 나가떨어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괴물 체력이라도 그렇지. 게다가 연인은 지금 환자가 아니냐!
“……응.”
기운을 긁어모아 겨우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풀어헤쳐진 앞섶도 서둘러 지퍼를 채우고,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아무래도 샤워를 해야겠지만 전화가 더 급했다. 김천댁 아줌마일 수도, 혹은 케이크나 꽃 배달원일 수도 있었다. 막 일어서려는데 귓가로 무선 전화기가 디밀어졌다. 연인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연인이 반쯤 무릎을 굽힌 자세로 인환의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수화기를 대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겹도록 울려대던 전화벨도 어느새 멈춰 있었다.
“……여보세요?”
정사의 여운을 그대로 드러낸 탁한 목소리에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연인이 소리 죽여 웃는 게 보였다. 살짝 노려보자, 정수리 위로 조용한 입맞춤이 내려왔다.
예상대로 꽃 배달원이었다. 곧 도착할 거라며 자새한 집 위치를 묻는 전화였다. 대강의 약도를 알려주고 끊음 버튼을 누르자 연인이 도로 전화기를 가져갔다. 움직일 때마다 상처가 아픈지 미간이 구겨지는 게 보였다. 환기가 되도록 거실 창문부터 열곤 바로 연인에게로 다가갔다.
“……침실로 가자. 상처 괜찮은지 보게.”
무아지경 중에도 연인의 엉덩이나 허벅지 쪽으로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러나 인환의 손길이 아니라도 연인이 그저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상처는 다시 벌어질 수가 있었다.
“진짜 괜찮아요. 맹세해도 좋아요.”
그저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일축하는 연인이 야속해 힘껏 째려보지만 연인 또한 요지부동이었다.
“지금 침실로 갔다간 또 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래요. 정 걱정 되시면 배달부 다녀간 다음에 보여드릴게요.”
짓궂은 협박은 효과가 있었다. 또 이성을 잃을 수는 없었다. 줄줄이 이어질 방문객들을 떠나, 크게 움직일 때마다 이맛살을 찡그리곤 하는 연인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흠칫해선 연인으로부터 잽싸게 떨어졌다. 연인이 재미있다는 듯 피식거리며 가로로 고개를 흔드는 게 보였다.
흠뻑 웃음을 머금은 채로 연인이 욕실로 사라지자, 인환도 침실 안쪽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현관 벨이 울린 건 그 즈음이었다. 심하게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호사스러운 핑크색 장미 꽃바구니와 새하얀 데이지 꽃다발이 배달되었다. 장미 꽃바구니는 연인에게 직접 선물하기 위해, 데이지 꽃은 집 안을 장식하기 위해서였다. 서둘러 사인하고 배달부를 보내고 나니 마침 옷을 갈아입은 연인이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이미 통화를 엿들은 연인이기에 굳이 감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쑥스럽고 두근거리기는 한가지라서 연인에게 꽃바구니를 내미는 인환의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진짜 선물은 이따 저녁에 줄게. 미역국이랑 해서 밥 먹고…… 케이크에 촛불도 켠 다음에…….”
담담한 표정으로 꽃바구니를 받아 드는 연인에게 고작 그런 심심한 멘트나 던지는 게 고작이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은 선물과 함께 주려고 아껴두었다. 물론, 이른 아침부터 걸려온 축하 전화 행렬에 대한 옹졸한 ‘뒤끝’이었다.
연인은 바구니 안의 장미와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오늘만 해도 헤프게 보여주던 저 ‘피식’ 웃음도 없고, 별처럼 눈망울을 일렁여 보여주던 짓궂은 장난기도 사라지고 없었다. 어쩐지 다른 이유로 조심스러워져서 연인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제야 다정한 미소와 함께 남은 한 팔로 인환을 안아주었다.
“……선생님께 어울리는 꽃이네요. 제가 아니라.”
“응?”
“분홍색은 선생님한테 가장 잘 어울리거든요.”
“……그, 그런가?”
“예. 정말 예쁘죠. 정말…… 아주 예쁜 색이에요…….”
“……?”
모호한 칭찬이었다. 분홍색이 예쁘다는 건지, 선물한 장미꽃이 예쁘다는 건지, 아니면 분홍색이 잘 어울리는 인환이 예쁘다는 건지(물론 그런 뜻은 절대 아니겠지만) 아리송했다. 인환이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아껴서인지 어째 연인도 고맙다는 흔한 답사가 없었다. 그래도 일단 긍정적인 칭찬인 것 같아 나름대로 흡족해진 인환이었다. 핑크색 장미는, 처음엔 불같은 사랑을 의미한다는 붉은색으로 하고 싶었지만 너무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 정한 차선책이었다. 다행히 연인은 차선책을 꽤나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덤으로 다정하게 안아주기까지 했으니, 닭살 짓에 질색하는 무뚝뚝한 연인의 성미를 고려할 때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연인의 품 안에서 호사스러운 장미향과 연인의 체취에 한꺼번에 취해보려 했더니 또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엔 김천댁 아줌마였다. 인환의 전화를 기다리다 못해 먼저 걸어온 것이다. 아차해선 첫 번째 메뉴로 정해서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첫 번째 메뉴’란 구색이 다 갖춰진 한정식 식단이었다. 아줌마는 이미 그럴 줄 알고 재료 준비까지 다 마쳐놓았다고 했다.
아줌마의 전화를 끊고 나자 이번엔 연인에게 전화가 왔다. 보성의 이윤열 부모님으로부터였다. 역시 생일 축하 전화였다.
연인이 전화를 하는 사이 인환은 주방으로 가서 점심 식탁을 차렸다. 아침에 먹었던 메뉴에 베이컨 구이와 계란프라이만 더해진 간단한 식탁이었다. 근사한 정찬이 저녁을 기다리고 있으니 적당히 배를 채우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물론 다시금 본래의 식욕으로 돌아온 연인은 밥 두 공기를 거뜬히 비워냈지만.
점심 식사가 끝나곤 연인은 거실을 서성이며 TV를 보거나 소파에 엎드려 누워 책을 읽었다. 인환은 그 옆에서 풍선을 불고 리본을 만들어 집 안 곳곳에 걸었다. 색색의 화사한 리본들엔 모두 데이지 꽃 몇 송이를 함께 묶어두었다. 큼지막하게 ‘해피 버스데이 투 문위’라고 써 붙인 작은 현수막도 거실 샹들리에 위에 붙였다. 연인에게 선물한 꽃바구니는 거실 정중앙에 펼쳐놓은 특별 생일상 한가운데에 화려하게 장식했다. 보기엔 간단했지만 꼬박 세 시간여에 걸친 노가다를 필요로 하는 생일 인테리어였다. 그런 인환의 노고를 내내 지켜보면서도 연인은 그저 가끔씩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을 뿐 결코 도와주려 하진 않았다. 물론 도와주려 했대도 자신 쪽에서 펄쩍 뛰며 거절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배달된 케이크도 꽃바구니 옆에 얌전히 놓였다. 마침내 실내 조경 공사를 완벽히 끝내고는, 심히 흡족해져선 달라진 집 안 전부를 카메라에 담았다. 물론, 소파 위에서 엎드려 누웠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뭉개고 있는 연인의 모습도 꽤 많이 찍어둘 수 있었다. 상처 탓에 그저 낡고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일 수밖에 없는 모습이 눈물 나도록 안타깝긴 했지만. 고깔모자조차 차마 써달라고 할 용기가 없어서, 인환만 잔뜩 멋을 부린 다음 머리에 파란색 반짝이 고깔모자를 뒤집어썼다. 연인의 상처에 붕대를 가는 일도 반짝이 고깔모자를 쓴 채로 해치웠다. 다행히 연인은 보다 지루해졌는지 소파 밑 카펫 바닥에 엎드린 채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 점심때 그 난리를 치며 섹스를 하고, 무려 여러 번 의자에 앉기까지 했는데도 연인의 상처는 별로 이상이 없어 보였다. 역시 ‘생일의 기적’이 틀림없었다. 자타공인 베테랑 간호사의 솜씨로 재빨리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은 뒤 그 위에 뽀뽀까지 살며시 얹어주었다. 하루속히 나아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되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연인의 몸이라면 다 환장하는 자신이지만, 요 예쁜 궁둥이에는 특히나 더더욱 열광하는 엉덩이 페티시 변태가 바로 자기라고 슬쩍 자진 납세도 하면서.
상처에 연고를 바를 때 잔뜩 얼굴을 찡그리며 깨어나는 듯했던 연인은 붕대를 마저 감고 나자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생일 인테리어 공사도 다 끝이 났고, 연인의 붕대도 갈았고, 이제 김천댁 아줌마가 가져다줄 음식을 끓이고 데워 생일상만 차리면 만사 오케이였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인환도 연인의 옆에 엎드려 누웠다. 연인처럼 고개를 모로 틀어 양팔에 뺨을 붙인 채 연인의 자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생일 조경을 하느라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고, 그 탓에 보일러 온도 또한 평소보다 높여두어선지 연인의 얼굴은 약간 상기돼 있었다. 콧등에 살짝 땀까지 밴 걸 보니 더위를 느끼나 보았다. 일어나서 도로 온도를 낮출까 하다가, 담요를 덮어준 것도 아니니 그대로 두자고 고쳐 생각했다. 껴안듯이 베고 있는 쿠션을 좀 더 안정적으로 괴어준 뒤, 이마 위로 부드럽게 늘어져 있는 암갈색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어주었다. 보고 또 봐도 그립고, 보고 또 봐도 설레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두근, 두근. 사랑해. 두근, 두근. 응, 사랑해. 두근, 두근, 두근. 응, 응, 그래도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위위……. 고요하게 뛰고 있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인환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처럼 달고도 행복한 잠이었다.
띠리리리리∼∼∼∼.
10분을 잤는지, 한 시간을 잤는지 당장은 알아챌 수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느닷없이 울린 전화벨 소리에 소스라쳤기 때문일 것이다. 번쩍 뜬 시야로 가득 밟혀든 건 연인의 찌푸린 얼굴이었다. 단잠을 방해받은 불쾌감 탓인지, 찌푸린 얼굴 그대로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채 연인도 인환의 얼굴을 굽어보고 있었다.
“……내가 확인해볼게, 위야. 넌 더 자.”
“……아뇨. 꽤 잔 것 같아요.”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며 던진 말끝에 되돌아온 연인의 대꾸는 얼굴보단 온화했다.
흘러내린 고깔모자를 다시 제대로 쓰고 작업대 쪽으로 갔다. 다행히 울리고 있는 전화는 인환의 것이었다. 한순간 받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절실하게 들었다. 심장도 약간 불안스레 뛰는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안 받기엔 또 그래서 수화기로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여보세요……?”
[우리 아들 잤어? 목소리 무지 섹시하네?]
두근…….
“……엄…… 마?”
적어도 지금 현재로선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였다. 불안스레 뛰던 심장의 울림에 더 가속이 붙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어진 엄마의 몇 마디는 결국 예감이 들어맞았음을 알리는 지극히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마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로 혈류가 몰리는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가슴은 목소리까지 흔들릴 지경으로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막무가내였다. 무슨 말로도 막을 수 없다는 걸 어쩐지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변명거리도 떠오르지 않아 떠밀리듯 응응, 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기적’은 무슨……. 잔인한 조소가 뇌리 깊은 곳에서 울렸다. 네 복에 무슨…….
“……선생님?”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었는지 어느새 연인이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지독한 실망감에 차마 연인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엉망이었다. 다 엉망이었다. 물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이 순간은 정말 눈치 없는 엄마가 미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대놓고 원망할 수도 없었다. 도대체 누굴 원망한단 말인가. 그토록 연인을 사랑한다면서도 엄마한테 커밍아웃을 할 용기조차도 못 내는 어느 겁쟁이가 아니라면!
“……어머님께서 오신답니까?”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참지 못하고 채근했다. 눈이 마주치면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아서 그냥 외면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응. 아줌마가 얘기했나 봐. 네 생일 차려주러 간다고. 엄마도 함께 오겠대. 지금 출발하니깐 알고 있으라고…….”
분명 바로 코앞에 연인의 맨발이 보이는데 연인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짜증이 났단 증거였다. 아니, 잔뜩 긴장해 경계심을 높이고 있단 의미였다.
“……미안…… 엄마, 전부터 별렀거든. 너 보고 싶다고. 아줌마가 하도 자랑을 하니깐…… 그야 네 칭찬 해주는 건 좋았지만…… 엄마가 무척 궁금해했거든…… 같이 동거하다시피 하니까 걱정도 되고 그러신 거지…….”
“…….”
“……아프다고 침실에 피해 있는 거 가지곤 안 될 거야. 틀림없이 널 무척 귀찮게 할 텐데…… 일단 근처 카페에라도 피해 있어, 위야. 오래 있진 않을 테니 한 한두 시간쯤 지난 뒤에 전화해보고 엄마 가면 다시 들어오면 돼.”
“…….”
“……미안…… 가뜩이나 아픈데…… 근데 어쩔 수가 없네…… 아줌만 대충 속이는 게 가능한데, 엄마는 아무래도 좀 힘들어. 날 잘 아시니까…… 아무리 감추려 해도 너 좋아하는 거 티 날 거야……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언젠간 다…….”
“…….”
“……저번에 우리 갔던 ‘느티나무’ 있지? 성북국민학교 뒤편에 있는 카페. 거기서 딱 한 시간만 기다려줄래? 너 집에 급한 일 생겨서 나갔다고 하고…… 내일이나 올 거라고 하고 엄마 금방 돌려보낼게. 응?”
“…….”
“……정말 미안해, 위야. 지금…… 아, 아직 5시도 못 됐네? 응, 그러니까 30분쯤이면 엄마 도착할 거구…… 30분쯤 더 있다가 ‘느티나무’로 전화해줄게. 응? 위야, 미안…… 딱 한 시간 정도만 기다려주라…….”
바윗돌처럼 미동도 않던 연인이 돌아서는 게 보였다. 줄곧 연인의 발등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인환도 그제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곤 연인을 직시했다. 이미 뒤태만을 보인 연인이 침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잠시 뒤에 다시 나온 연인의 팔엔 코트와 배낭이 들려 있었다. 절박해진 두 눈이 연인의 시선을 허기지게 찾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그리고…….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싸늘하게 굳은 표정 없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연인이 차가우면 차가울수록 더 심각하게 화를 내는 중이라는 걸 인환은 안다. 거기 더해,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을 하고 있다면 인환의 무엇으로도 연인을 풀어줄 길이 없다는 것을. 연인이 스스로 화를 풀고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한 연인에게 기대할 건 전무하다는 것도.
“……동생들에게 가 있겠습니다. 오늘 밤은 거기서 잘게요. 전화 드리겠습니다.”
담담하게 풀어놓는 몇 마디는 너무나 간결해서 더 냉랭하게 느껴졌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데, 연인은 태연스레 코트를 걸치고 그 위에 배낭을 메었다. 양말도 신고, 작업대 쪽으로 가서 치료약과 붕대들이 들어 있는 구급상자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약을 챙기는 걸 보니 동생들한테 가서 자겠다는 말도 빈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연인은 빈말 따윈 절대로 않는 성미였다. 그러고 보니,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되면 동생들에게 가겠노라고 했었다. 연인은 아까도 몇 번이나 소파에 앉아 있곤 했었다. 그리도 오매불망 그리는 동생들에게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럼 울 엄마는 그저 핑계인 건가? 애초부터 오늘 동생들한테 가볼 생각이었던 터라 겸사겸사 핑계를 대고 돌아가는 건가? 생일 파티도 귀찮았던 걸까? 자신이 하도 좋아라 오버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맞춰준 것뿐일까……?
몇 년 전 생일에 혜윤이가 선물했다던 낡은 털모자까지 쓴 연인이 현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걸 고스란히 바라보면서도 몸도 마음도 바짝 굳어버려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 자신이 뭘 어떻게 한대도 연인을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냥 가슴이 답답하고, 혹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비명이라도 지르고플 만큼 억울했다. 조금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연인인데, 요란스러운 고깔모자는 자신이 쓰고 있고, 연인은 과거의 생일 선물이나 ‘좋아라’ 쓰고 있으니 말이다.
현관문이 열리고, 늠름한 뒤태마저도 순식간에 문 밖으로 사라졌다. 립 서비스에 불과할 형식적인 작별 인사도 없었다. 언제 돌아오겠다거나, 몇 시쯤, 아니, 오늘 중으로 전화를 걸겠다는 언질조차 없었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얄미울 정도로 예의 바르게, 조용히 닫히는 문소리였다.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한동안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나쁜……. 나쁜, 나쁜, 나쁜, 나아쁜……. 원망하고 또 원망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아니, 누구를 원망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뒷말은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정말 딱 한 시간이었다.
아니, 정확히 24분 머물다가 갔다. 확실히 엄마는 엄마였다. 인환의 기분 상태가 심상치 않다 알아챘는지, 가져온 음식들만 냉장고에 바리바리 채워두곤 아줌마와 함께 잽싸게 쫓겨가주셨다. 연인이 갑자기 사라진 까닭이 좀 더 그럴듯하고, 심하게 우울해진 인환의 기분 상태 또한 제대로 납득시킬 수 있는 변명이라면 누군가의 ‘부고’ 정도밖에 없었기에,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연인의 친조부가 돌아가셨다는 거짓말을 고했는데, 다행히 엄마는 고스란히 믿어주었다.
엄마가 가고 나니, 그를 따라가듯 해도 기울었다. 그러곤 또 기다림. 기왕에 이골이 나 있는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그랬다. 어느덧 4년이었다. 함께하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몇 배는 더 많았을 저 익숙한 ‘기다림’이었다. 하도 익숙하니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아프지 않을 거라고, 아니, 아프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앞으로는 더 많이, 지금 이 시간보다 몇 십 배, 아니, 몇 천배는 더 길 영겁의 시간을 기다리게 될 테니 그만 익숙해지라고, 익숙해져야만 한다고 가만히 독려했다.
정성이 담뿍 담긴, 그러나 비전문적이라 조잡하기 짝이 없는 생일 인테리어가 점점 어둠 속에 함몰돼갔다. 특별히 마련된 생일상 앞에 앉아 가만히 어둠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가 가로등 불빛에 비쳐 흐릿하게 부각되었다. 정성껏 포장한 선물꾸러미도 보였다. 엄마 때문에 벗어두었던 고깔모자도 보였다. 연인 몫의 고깔모자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자신 것을 집어 들고 다시 머리에 썼다. 고깔모자까지 뒤집어쓰니 당장 해피 버스데이 투 유 송이라도 불러줘야 할 것만 같았다.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그냥 촛불이라도 켤까? 잠깐 유혹을 받았다. 그럼 덜 외로울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역시 미련이 남았다. 아니, 그건 ‘한’이었다. 처녀귀신뿐만이 아니었다. 짝사랑 게이가 한을 품어도 오뉴월에 서리가 내릴 터였다. 시계를 살폈다. 고작 7시 반이었다. 자정이 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혹시 아는가. 그전에 연인이 돌아와줄지. 물론 너무 많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연인은 꽤 많이 화가 난 것 같았고, 그 정도를 가늠했을 때 99.9999%정도는 동생들과 함께 생일 밤을 보낼 터였다. 서슬 퍼런 분노를 냉랭한 담담함으로 포장한 채 집을 나선 연인이다. 빈말 따윈 안 하는 연인이 약까지 챙겨 동생들에게 갔다. 정말이지, 돌아와줄 가능성은 0.0001%도 없다.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걸까 하고 열심히 가늠해보지만 도무지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없는 것은 별개로 치더라도 말이다. 연인을 흉물 취급하며 숨기려 들어서일까? 하지만 연인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인환의 존재는 철저하게 숨기려 들지 않는가. 김천댁 아줌마를 되도록 피하려 드는 까닭도 혹여 게이로 의심받을까 거북해서가 아닌가. 양평에서 당한 아웃팅 협박의 여파 때문일까? 자신과의 관계가 불특정 타인들에게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그만큼 더 위험해지니까? 혹은 새삼 게이와 자는 게 끔찍해진 것일까? 서로 가족들에게 철저하게 숨길 수밖에 없는, 그만큼 사회적으로 용납받지 못하는 처지인 존재와 어울리게 된 스스로가 문득 참을 수 없을 만큼 역겨워져서?
어떤 이유든 다 납득할 수 있을 거다. 다 납득해주겠으니 그냥 돌아와주기만 했으면 싶었다. 적어도 오늘 밤 자정 중으로는. 설령 내일 아침 일찍 다시 뛰쳐나가도 좋으니까, 제발 오늘 밤만큼은 자신과 함께 보내주었으면. 부디…… 제발 부디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게해주었으면. 부디 이 밤이 가기 전에. 하느님.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말해주는 건데. 케이크 오자마자 촛불도 켜고 축하해주는 건데. 해피 버스데이 투 유를 부르고 선물도 주고 하는 건데. 도대체 왜 미적거렸던 걸까…… 뼈를 깎는 후회가 독처럼 퍼져갔다.
11시가 넘어가니 확실히 포기 쪽으로 저울이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연인이 집을 나간 지 이미 여섯 시간이 넘은 터다. 고척동 동생들과 간단히 축하 파티를 하고, 다들 사이좋게 일찍 잠자리에 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애초부터 많은 기대를 한 것이 아니었다. 많기는커녕 0.0001%도 못 된다고 자인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렇다고 기다리는 것을 그만두진 않았다. 인환에게 있어 연인을 기다리는 일은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무슨 일을 하든, 혹은 무슨 생각을 하든, 연인을 기다리는 것은 자연스레 동시다발로 행해지는 인환의 일과였다. 그러니 지금도 그저 자연스럽게 기다릴 뿐이었다. 안 올 줄은 알지만, 기다리는 습관을 멈출 수는 없으니 마냥 기다리길 계속하는 것이다.
포기와 함께 한동안 어둠만 스민 집 안에 비로소 전등을 켰다. 더 이상 시계는 보지 않기로 했다. 주인 없는 생일상 앞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느라 굳어버린 온몸에도 스트레칭을 해주었다. 한동안은 지독하게 저린 발 탓에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세 시간이 넘는 정성스러운 노가다를 통해 꾸민 화사한 공간을 웃으며 굽어보았다. 정말 유치했다. 아무리 게이라지만 저 정도로 소녀 취향이라니. 제정신이었다면 낯 뜨거워 얼굴도 못 들었을 것이다. 연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고뇌가 콩깍지를 걷어내니 비로소 참혹한 현실이 보였다. 그렇다고 금방 치울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기다리는 도중엔 절대로 치워질 수 없는 콩깍지이기도 했다. 같은 이유로 케이크에 촛불도 못 켰고, 또한 같은 이유로 먼저 밥도 먹지 못했다. 주방 식탁엔 데워지지 못한 미역국이며 연인이 좋아하는 온갖 한정식 요리들이 맛깔스럽게 놓인 채 먹어줄 입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TV를 켜고 동물 다큐멘터리 하나를 시청했다. 내용은 당근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그냥 화면만 멀거니 들여다봤다. 저 독수리 나는 게 참 멋지네. 사냥당한 영양은 너무 끔찍하구나. 맙소사, 잔인해라. 저 피 좀 봐. 그저 기계적인 감상만 뇌리를 스쳐갔다. 사자 떼가 사냥당한 영양 한 마리를 둘러싸고 포식하는 장면이 화면에 펼쳐지고 있었다. 잔혹하지만 경이롭기도 한 그 장면에 넋을 놓은 채 울었던 것 같았다.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멍하니 기계적으로 옮겨간 시선 끝으로 장신의 커다란 덩치가 포착되었다.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크게 뜬 건데도 잘 보이지 않았다. 뿌옇게 퍼져 보이는 시야 덕분에 울고 있는 자신을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나갈 때에도 온몸이 얼음땡이 되더니 돌아올 때도 한가지였다. 몸도 꽁꽁. 마음도 꽁꽁.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당장은 아무런 말도 안 나왔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힘껏 눈꺼풀을 감았다가 뜨니 비로소 조금 시야가 밝아졌다.
현관 안쪽에 배낭을 집어 던지고 있는 연인이 보였다. 똑바로 인환을 직시하고 있는 연인의 얼굴 표정은 참혹할 정도로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신발을 벗고 성큼성큼 이쪽으로 온다. 인환이 앉아 재미있게 TV를 시청하고 있는 생일상 앞이었다. 모든 동작이 전광석화처럼 빠르고 거칠었다. 자신을 향해 손이 뻗어오는 게 보였다. 얼음장 같은 찬 기운도 함께 훅 하고 다가왔다. 꽤 오랫동안 차가운 거리를 헤맨 듯했다. 와락 움켜쥐어진 멱살에 혹시 때리는 걸까? 하고 멍하니 의심을 품었다. 정말 심하게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연인의 얼굴은 무시무시했으니까. 그러나 역시 기우일 뿐이었다. 멱살째 들어 올려진 몸이 그대로 연인의 품 안으로 틀어박혔다. 먼저 얼굴이 짜부라지고, 이어 가슴이, 갈비뼈가, 마지막으로 허리가 으스러져버릴 것처럼 연인의 우악스러운 양팔에 조여졌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큰 연인에 맞춰 상반신이 통째로 들리니 두 발 역시 바닥에 닿을 듯 말듯 대롱대롱 건들거렸다. 연인의 얼굴도 인환의 목덜미 사이에 와락 파묻혔다. 얼음이 들러붙기라도 한 것처럼 차가운 감촉에 저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하느님, 얼마나 오랫동안 밖에서 헤맨 거니. 이렇게 추운데…… 아픈데…… 동생들한테 간다더니 아니었어? 등이며 허리춤이며 어깨며 할 것 없이 거칠게 쓰다듬어지며 조여졌다. 뒤통수와 머리카락까지 마구잡이로 헤집어지는 통에 쓰고 있던 고깔모자가 와락 구겨지며 수명을 달리했다.
“……미아해오! 이양애요! 미야애요! 미안……!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미안…… 미안해요! 미안……!”
인환의 목덜미에 완전히 들러붙어버린 것 같은 입술에서 웅얼웅얼 언어 비슷한 것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우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
“……제발 그만 울어요…… 다 제가 잘못했으니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아…… 안 울어…….”
“선생님!!!”
“……나 안 울어…… 안 울어…….”
“선생님……!”
“……지, 진짜야…… 이, 이건 그냥…… TV 보다가…… 여, 영양이 죽는데 정말 끔찍해서…….”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아, 안 운다니깐…….”
“……파티 해요, 선생님…… 아직 12시 안 넘었어요.”
“……저, 정말……?”
“……예. 시계 안 보셨어요? 아직 10분이나 남았는걸요. 촛불 켤 시간은 충분해요.”
“……모, 못 봤어…… 가슴 아파서…… 11시 넘어가니깐…… 정말 가슴이 막 찢어지잖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선생님. 다신 안 그럴게요. 정말 안 그럴게요. 용서해주세요.”
“……기뻐…… 나 지금 너무 기뻐, 위야…….”
“예…….”
“……하느님, 너무 좋아…… 꿈만 같아…….”
“예…… 예, 선생님…… 예…….”
“…….”
그 후론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미친 듯이 서로를 껴안고, 미친 듯이 서로의 몸에 키스했다. 10분밖에, 아니, 껴안고 키스하는 사이 몇 분이 더 줄어버리는 바람에 더 아슬아슬해진 시간대에 맞추느라 정신없이 케이크에 촛불을 밝히고, 다시 껴안고 또 키스하고, 그사이사이 해피 버스데이 투 유를 불러주고, 그럼 연인은 또 몸서리를 치며 그런 인환의 입술을 틀어막고 키스의 소나기를 퍼부었다. 연인이 소원을 빌고 촛불을 끄는 행사는 결국 자정을 넘기는 바람에 뒤로 밀려버렸다. 아니, 밀리고 자시고 할 새도 없었다. 생일상 옆 카펫 바닥에 그대로 깔아뭉개진 인환의 몸 위에 올라탄 연인이 그저 키스하고 껴안고 만지느라 환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인환이 필사적으로 ‘소원……’ 하고 중얼거리자, ‘방금 빌었어요!’ 하는 헐떡이는 대꾸가 떨어졌다. 딴짓에만 정신이 팔린 짐승의 변명이라 도무지 믿을 수가 없긴 했지만 그냥 믿어주기로 했다.
미처 꺼지지 못한 촛불은 고스란히 타내려가 생크림 위에 도롱도롱 눈물처럼 맺힌 후 명을 달리했다. 생크림 케이크는 입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먼저 윤활제로 변해 인환의 사타구니 안쪽에 흠뻑 발라졌다. 정성껏 포장해두었던 선물은 연인의 목에 걸리기 전에 발가벗은 채 으슬으슬 떠는 인환의 상반신을 덮는 데 먼저 사용되었다. 폭 60센티에 길이가 2미터에 가까운, 동대문시장표 울 목도리였다. 무지무지 간지 나는 모양새보다도 연인은 그 출신 성분이 더 마음에 든 듯했다. 5만 원이 채 넘지 않는 착한 가격대에도 매우 흡족해했음은 물론이었다. 주방 식탁에 차려진 미역국과 연인이 좋아하는 온갖 한정식 요리들도, 생일날 자정을 훨씬 넘긴 다음 날 새벽에야 겨우 제 맛을 뽐내며 두 사람의 입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고척동 집에 안 갔었어?”
흠뻑 쾌락을 탐식한 나른해진 심신으로 비로소 물을 수 있었다. 서로 두 번이나 오르가슴에 올랐지만 몸은 여전히 연인과 깊숙이 결합된 채였다. 연인은 모로 누운 자세로 인환의 등을 꼭 껴안은 채 여전히 반쯤 발기해 있는 페니스를 내벽 안쪽 깊이 박고 있었다. 꽤나 거친 결합 탓에 입구며 안쪽이 모두 다 얼얼하게 아팠다. 카펫 바닥에 사정없이 쓸린 등이며 팔꿈치, 무릎팍도 쓰라리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찢어지지 않은 게 어디냐. 헤헤, 생크림 케이크 덕분이려나? 앞으로 둘러진 연인의 양팔을 마주 꼭 껴안고서 쓸모없지만 행복한 망상을 잔뜩 굴리고 있는 즈음이었다.
“……가려고는 했는데…… 동생들도 걱정되던 참이라서요.”
쪽, 뒷목덜미에 연인이 부연(敷衍)하듯 강하게 입을 맞췄다.
“……안 갔어?”
따지려던 게 아닌데 따지는 것처럼 들렸나? 조금 침울한 대꾸에 마음이 아팠다. 처음, 다짜고짜 품에 안겼을 때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연인의 몸이 생각나 물어본 거였는데, 연인에겐 원망이거나 투정쯤으로 비쳐졌나 보았다. 서둘러서 덧붙였다.
“……몸이 정말 차가워서 놀랐었어. 그렇게 추운데 내내 밖에 있었던 거야, 그럼?”
“아뇨. 전철 탔다가 종점까지 가고…… 다시 성북동으로 되돌아왔죠. 내려서 집 앞까지 왔다가, 또 불쑥 화가 치미는 바람에 다시 전철 타고…… 전철 안에서만 네 시간이니까 하루 종일 밖에 있었던 건 아니죠.”
“…….”
“……선생님 걱정 돼서 동생들한테도 못 가겠고…… 그렇다고 그냥 집에 들어오자니 화는 여전히 안 풀리고…… 뻘짓 한 거죠. 일곱 시간 동안이나.”
“……미안…… 화나게 해서…….”
쪽쪽, 다시 목덜미로 강한 입맞춤이 떨어졌다. 상반신을 죄는 팔의 힘도 더 강해졌다. 안으로 파고들어와 있는 연인의 성기도 움찔하더니 좀 더 커지고 있었다.
“아뇨. 선생님이 사과하실 일 아니에요, 절대. 제가 병신인 겁니다.”
나지막했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울 엄마 때문이잖아. 다신 오늘 같은 일 없게 할 거야. 뭐라고 핑계를 대든…… 그래. 이참에 김천댁 아줌마도 오지 못하게 해야겠다. 따로 사람 구했다고 해야지.”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선생님. 그런 게 아니에요. 어머님은…… 선생님 어머님은 언젠가 한 번쯤은 뵙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단 한 번만이라도…… 뵙고 인사드리고 싶다고……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것도 아니까…….”
“……위야……?”
빠르고 격렬한 어조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한 번쯤은 엄마를 보고 싶었다는 말에 어쩐지 코끝이 찡해졌다. 고맙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적어도 엄마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닌 듯했고, 인환은 그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도 김천댁 아줌만 못 오게 할 거야. 너도 불편하고…… 여기 사정을 생중계하듯 해서 자꾸 엄마를 충동질하게 되니깐 안 돼. 장정 두 사람 몫의 집안일이라 아무래도 벅차다고 하면 그리 섭섭해하시지도 않을 거야. 일주일에 두 번씩 반찬 나르는 것도 솔직히 무리한 일이었지. 워낙 오래 집안일을 해주셔서 나도 당연히 받아들였던 거지만 두 집안 살림을 해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환갑이 가까운 아줌마한텐 무리지. 여러모로 다른 파출부 하나 새로 구하는 게 나아.”
“예. 그건 그렇겠네요.”
“……그럼 대체 뭣 땜에 그렇게 화가 난 거야? 말해줄 수 없어?”
“…….”
“……내가 알면 곤란한 일이야?”
“…….”
금세 심각해진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역린을 건드린 것이라는 걸. 아마도 그만큼 연인에겐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알고 싶었다. 이미 화를 다스리고 자신에게 돌아와주었다. 새삼 같은 문제로 연인이 또 화를 낼 것 같진 않았기에, 좀 더 대담하게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인환 역시 잔머리의 대마왕이었다.
“……예. 아시면 제가 매우 곤란해지죠.”
한참 후에 연인이 마지못해 대꾸를 주었다. 우울하게 가라앉은, 몹시도 슬픈 목소리였다. 듣고 바로 후회를 했다. 더 이상 캐묻지 말걸. 연인을 저렇게 슬프게 만들 정도라면 그냥 모르는 체 묻어둘걸.
“……비밀인 거네…….”
“비/밀/입니다.”
“……응.”
“예.”
“…….”
“…….”
“…….”
“……무덤까지 가져갈 겁니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일 테니 그냥 죽을 때까지 비밀로 남겨둬야죠.”
쪽쪽. 쪽. 하도 진중하게 떨어지는 통에 마치 낙인처럼 느껴지는 깊은 키스가 다시 목덜미를 점령했다. 아름다운 중저음은 너무나 슬프고, 키스는 너무나 열정적이었다.
“……용서해주세요…….”
가슴이 에일 정도로 슬픈 목소리가 여전히 낯설게 들리기만 하는 사과를 다시 한 번 꺼내놓았다.
“……아니, 용서해주시면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사과를 하는 연인은 생소하다. 어차피 용서할 거리도 없으니, 이내 덧붙여진 정반대의 요구는 들어줄 수도 있을 터다. 그러나 너무나 슬펐다. 울지 않는데 우는 것보다도 더 슬픈 목소리였다. 몇 만 배는 더 슬플 그런 거였다. 이래서야 용서해줄 수도, 혹은 용서해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냥 가슴만 막 에이듯 아팠다.
“……응…… 응, 그럴게. 무슨 얘긴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그냥 다 할게, 위야…….”
더 아상 캐묻지 않을게.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 그런 의미였는데 정답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더 울적해진 기색의 연인은 사정없이 양팔에 힘을 주어 안겨 있는 상반신을 아프게 했다. 목덜미로, 정수리로, 어깨로, 등줄기로…… 거듭 이어지는 키스의 행렬도 마음이 아프기는 한가지였다. 팔을 뒤로 뻗어 연인의 젖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위로하듯, 가장 부드럽고도 가장 따스할 몸짓을 했다. 인환의 간절한 마음이 가 닿았는지, 연인의 몸이 파르륵하니 전율했다. 흐느끼는 듯한 신음성도 함께 토해졌다. 안에 들어 있던 연인의 몸이 단숨에 한계까지 커지더니 내벽을 압박했다. 가쁜 숨을 토하며 뒤로 허리를 휘었다.
연인이 춤을 추듯 크게 엉덩이를 튕겼고, 빠져나갈 듯 미끄러졌던 흉기가 곧 강하게 파고들었다. 두꺼운 귀두 끝이 바로 전립선을 직격했다. 순간 사방에서 파직거리는 스파크가 튀며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찌르르한 전율과 함께 사지가 뒤틀렸다. 다시 한 번, 두 번, 세 번…… 최대한 깊고 강하게 전립선이 찔려졌다. 우아아아. 낯 뜨거운 교성이 고래고래 울려 퍼졌다. 푸들푸들 떨며 몸부림을 치는데도 연인은 봐주지 않았다. 상반신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끔 옭아맨 채로 무시무시하게 공격해 들어왔다. 눈을 뜰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그만큼 빠르고, 거칠고, 또 깊었다. 우둘두둘 거칠게 혈관이 튀어나온 페니스의 표피가 내벽의 주름을 날카롭게 헤집으며 마찰을 가했다. 빠져나가면 수축해 빨아들이고, 쑤시고 들라치면 활짝 벌려 가장 깊은 곳까지 맞아들였다. 한계까지 푹 젖은 채 서로 어떻게든 오래 달라붙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몽둥이처럼 딱딱하고 두꺼운 귀두 끝은, 금방이라도 사정할 듯 뚝뚝 액을 흘리면서도 악착같고 포악하게 버티며 퍽퍽 극점을 찔러댔다. 내벽은 그때마다 깊숙이 통째로 베어 문 채 벌름벌름 경련을 일으켰다. 속도가 격렬해질수록 마찰도 깊어졌다. 더 이상의 깊은 결합도 없을 것 같았다. 서로가 환희로 자지러질 확신이었다. 온몸이 바스러지는 것 같은 극도의 희열이 몰려왔다. 막을 수가 없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연인의 팔 힘이 올무처럼 죄어들었다. 최후의 일격에 허리가 활처럼 뒤로 휘어지고 사지가 오그라들었다. 내벽의 주름이 미칠 듯이 꿈틀거리며 한계까지 수축했다. 뒤로 뻗은 손가락 사이로 연인의 머리카락을 힘껏 움켜쥐었다. 울컥거리며 토해진 연인의 정액이 몇 번이나 내벽 안쪽을 때리는 것이 느껴졌다. 정점의 쾌락에 울부짖는 연인의 으르렁거림도 들려왔다. 둘이었다. 다시 함께였다. 믿을 수 없는 기적에 망연자실, 어린애처럼 엉엉 울음이 터졌다. 뿌듯하게 조여진 성기 끝으로부터 마침내 오르가슴이 왔다. 핏핏핏. 눈물만큼 진한 감정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이대로 죽고 싶다고, 진심으로 소원했다. 고개가 뒤로 꺾이며 연인의 입술이 내려왔다. 폭풍처럼 사나운 숨결이 가쁘게 섞여들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기척이었다. 온기였다. 극도의 환희에 마음껏 넋을 보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