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1992년 5월. 문위(文偉)
“그쪽은 신촌까지 소문이 자자하더라? 의예과 2학년 문위. 자칭, 타칭 서울대 최고의 킹카라며? 것도 역대 토털 왕중왕이시라고?”
맞은편 여자애가 칵테일을 원샷 하더니 대뜸 반말조로 나왔다.
“작년까지만 해도 벼랑 위의 꽃이었는데, 올해부턴 실연시킨 여자애들 수만 해도 벌써 한 다스가 넘는다더라? 오는 여자애들 안 막고, 가는 여자애들은 더더욱 환영이라며? 소문이 다 사실이니? 얼굴값이라는 건가? 하긴 너 참 잘생기긴 했다. 마음에 쏙 들어.”
도발적인 말투와 다소 드센 몸짓과는 달리 꽤 예쁘장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니, 객관적으로 빼어난 축에 속하는 미인일 터였다. 약속이 잡힌 그제부터 주선자인 전창일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댄 걸 보면 대충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지난해엔 이대 메이퀸 후보에도 올랐다고 했다. 한마디로, 남자들에게 떠받들리는 데 익숙한 ‘여신’이란 소리다. 초면에 던지기엔 상당히 무례하게 비칠 수 있는 말을 서슴없이 툭툭 내뱉는 것도 그렇고, 그런 스스로가 남자애들에겐 결코 밉보일 리 없다는 확신이 엿보이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고, 그만큼 순진하면서도 괄괄한 타입. 물론 자신에겐 가장 피곤한 타입이었다.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맞춰주는 시간은 짜증스럽겠지만, 이런 여자애일수록 재빨리 털어버리고 집에 돌아갈 수 있게끔 해주니까. 이를테면, 차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차일 수 있다고 해야 할까. 수법도 아주 간단한 편이다. 여자애가 원하는 ‘머슴질’을 따라주지 않는 것으로 그만이니까. 평소보다 더 빨리 집에 갈 수 있겠다 싶으니 여자애의 거슬리는 건방도 제법 귀엽게 보였다.
“……왜? 초면에 반말이라 기분 나쁘니? 남자가 왜 그래? 보기보다 쪼잔하네?”
피식. 웃긴 계집애네. 아직 파트너도 정해지지 않은 터라 일단 관망해보기로 하고 가만히 여자애를 바라보는데, 자기 말을 씹는다 여겼는지 금세 날카로워져선 재차 묻는다.
“기분 나쁘다뇨! 우리 위야가 원래 좀 말이 없는 편이랍니다. 대답 기다리자면 저희도 속이 터질 때가 참 많아요. 물론 반말 좋죠! 아닌 게 아니라 이참에 우리 말 놓을까? 다들 동갑인데 편하고 좋지 않나? 친해지기도 더 쉽고.”
여자애의 뾰족한 기세를 금세 알아차린 전창일이 잽싸게 끼어들어 분위기를 무마시켰다. 위가 사양한 머슴질에 기꺼이 발 벗고 나설 기세였다. 머리 좋고 사교성 좋은 놈이라, 저런 타입의 공주님이 남자를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 스타일인지 모를 리 없다. 그러나 놈 역시도 어쩔 수 없는 수컷이었다. 시각적 본능에 약한 서글픈 수컷의 운명이랄까. 그저 미인이면 모든 게 다 용서된다는 말도 안 되는 슬로건을 놈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샐샐거리며 여자애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모자라, 테이블 밑으로 자신의 발을 툭툭 차며 ‘야, 제발 좀 고분고분해라, 응?’의 아우라를 맹렬하게 보내오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집에 들어가기까지의 초치기에 들어간 위는 만사가 심드렁해졌다. 분위기를 띄우는 전창일에게 편승해 다른 세 명의 동기들도 재롱잔치를 시작했고, 마주 앉은 이대 신방과 여자애들 다섯 명도 새침한 듯 수줍은 듯 속 보이는 여우짓으로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일단 판이 깔렸으니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은 없었다. 적당히 말을 섞어주며 시간을 축내다가 파트너가 정해질 것 같으면 마주 앉은 공주님을 슬쩍 충동질해 둘만 빠져나오면 되고(둘만 있게 되면 그야말로 차이는 데 채 10분도 안 걸리게끔 할 자신이 있었다), 파트너고 뭐고 없이 함께 놀자 판으로 분위기가 형성되면 클럽이든 주점이든 그대로 떠밀려 가다 슬쩍 빠져나오면 된다. 전자는 좀 더 속성인 대신 귀찮고, 후자는 좀 더 시간을 잡아먹는 대신 속 편할 것이다.
느슨해진 신경으로 아기자기한 실내장식으로 꾸며진 카페를 굽어보았다. 남녀 커플들이나 자신들처럼 단체미팅족들로 실내는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축제 시즌인데다 주말이었다. 거의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인파로 붐비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학교 근처에선 제법 알아주는 분위기 좋은 카페라 했다. 인파의 대부분이 서울대생일 거고 나머지가 그들의 파트너들일 터였다. 테이블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면면들을 죽 훑어보고 있자니 지금 여기서 내가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자괴감이 일긴 한다. 이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집에 가 동생들 공부나 봐주고, 그도 아니면 자격증 하나라도 더 따기 위해 서클 세미나에나 참석할 텐데. 물론 그 무엇보다, 자신을 지극히 행복하게 해주는…… 귀여운 연인에게로 가서 실컷 사랑을 나눌 수가 있을 텐데 말이다. 연인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자연스레 입술 끝이 올라가며 미소가 걸린다. 설레는 기분과 그리운 마음, 그리고 당장 달려가지 못하게끔 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동시에 떠올라 넋을 어지럽혔다. 긍정과 부정의 감정이 한동안 박빙의 전투를 벌이다 기어코 부정적인 생각이 승리를 거두고 만다. 잔뜩 의기소침해져선, ‘도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인지’ 하고 탄식 같은 한숨을 흘리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당분간은 미팅을 그만둘 수도, 줄기차게 여자애들과의 소문들을 양산해내는 일도 멈출 수가 없었다.
86학번 선배로부터 들었다며, 전창일이 저 변태 새끼의 소문을 조심스레 들려주었을 땐 비로소 올 것이 왔구나 싶은 비장감조차 들었었다. 아직까진 변태 새끼가 자신을 짝사랑 중이라는 선에서 소문이 잠자고 있지만, 언제 어느 때 들불처럼 살이 붙어 퍼져나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덕분에 위도 3월 개강과 동시에 미팅 붐이 인 학교 분위기에 편승해 아낌없이 몸을 굴려줄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사귈 필요까지는 없었다. 연막을 피울 목적으로는 될수록 많은 상대와 소문을 내고, 개중 몇몇을 선택해 서너 번 만남을 가져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양다리면 좋고, 오다리면 더더욱 좋았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인, 딱 그 정도의 간격만 두고 여자애들을 곁으로 끌어 모았다. 바람둥이의 소문까지는 좋고, 실제 특정한 누군가와 심각한 사귐으로 발전하는 일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호감까지는 환영하지만, 사랑 운운하며 독점욕과 관심을 바라는 듯한 시선을 느끼면 그길로 절교 선언을 주었다. 계획은 적중했다. 위는 단 석 달 만에 희대의 바람둥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얻어냈고, 덤으로 첫사랑의 상처를 극복 못 해 방황 중일 뿐이라는, 극히 호의적이며 동정적인 평가도 함께 받아 챙겼다. 바람둥이이면서도 비난받지는 않는, 간교한 나쁜 남자 캐릭터를 자연스레 몸에 익히게 되었다.
“……문위라고 했던가? 그쪽은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 혹시 숨겨둔 여자친구 생각?”
오른쪽 대각선 쪽에 앉은 다른 여자애한테서 질문이 날아왔다.
“진짜 죽인다, 그대. 우수에 찬 프로필이 잡지 화보 그대롤세. 여자친구라고? 오, 노! 각 잡힌 폼만 보면 좀 더 심각한 고뇌를 해야 마땅할 거 같지 않니?”
한동안 생각 속을 떠돌던 의식이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잠잠히 시선만 주자 한 다리 건너 다른 여자애가 킥킥거리며 덧붙였다. 웃을 때 살짝 삐져나오는 덧니만 기억에 남은 여자애였다. 심각한 거 뭐? 광주사태라든가 통일 문제 같은 것? 아님 인류의 평화려나? 이거 왜 이러십니까들? 차별적 발언인 거 아시죠? 겉만 번드르르하다고 속까지 느끼할 줄 아십니까? 문위 이 자식 이거 이래 봬도 순 토종입니다요. 된장국 없으면 밥도 잘 못 먹고요, 불고기라면 환장을 합니다. 대신 스테이크는 맛없다고 항상 반 이상을 남기죠. 여자친구 있을 때에는 닭 여러 마리 잡을 유치한 이벤트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해치웠다죠. 이벤트? 뭐야, 뭐야. 무슨 이벤튼데? 말해봐요, 창일 오라버니. 차별이야, 차별. 이 자식도 코딱지도 후비고 방귀도 뀐단 말이다. 쓰읍, 닥쳐라 윤재철. 레이디들 앞이다. 호호호호. 깔깔깔깔. 하하. 호호. 덧니의 부연 때문이었는지 한동안 자신이 화제의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도 잠시, 별다른 대응이 없자 화제는 이내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동기들만 있을 때와는 약간 달라진 화제들이 오르내렸지만 그래봤자 그도 20대 초반의 평범하고 유복한 대학생들이나 할 법한 심심한 것들이었다. 지난 석 달 동안 몇 번이나 되풀이해 들어 식상하기조차 한 화제들도 몇 개 다시 도마 위에 오르다 실컷 두들겨 씹히곤 내려갔다.
통성명을 한 카페에서 그렇게 한 시간여를 보내고 나자 일행은 자리를 옮기자는 전창일의 의견에 동의했다. 동기들도, 또 여자애들도, 파트너는 당장 정하지 않는 쪽으로 생각을 굳힌 듯 소지품을 꺼내놓고 선택당하길 기다리는 면 팔리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2차 장소는 짐작대로 나이트클럽이었다. 가장 물이 좋다는 이유로 이태원까지의 원정대가 형성되었다. 그건 꽤 마음에 안 들었다. 안 그래도 학교 근처에서 하지 않는 미팅은 거개 다 보이콧을 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이태원까지 가서 클럽을 정해 자리를 잡는 데까지 한 시간, 대충 어울려주는 데 또 한 시간이 더 필요할 터였다. 고민은 짧았다. 원정대에 끼어 두 시간이나 쓸데없이 낭비를 하고 싶진 않았다. 여자애들 중 가장 미인인 공주님을 혼자 가로채면 분명 나중에라도 동기들의 집중포화를 맞겠지만, 그보다는 의미 없이 버려질 두 시간이 더 아까웠다. 일각이 여삼추였다. 한시라도 빨리 연인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우린 따로 가지.”
여자애의 손을 덥석 잡고 전철역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물론 원정대는 전철을 타기 위해 우르르 서울대입구역으로 몰려가던 중이었다. 여자애는 흠칫 놀란 것 같았지만 자신의 손을 뿌리치진 않았다. 불시에 허를 찔려선지, 동기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어버버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다른 여자애들 역시 한가지였다.
일행들로부터 50여 미터쯤 떨어졌을 때 뒤를 돌아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동기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위를 성토하고 있었다. 남겨진 여자애들 때문에 이쪽을 쫓아오진 못하고, 그렇다고 그냥 보내주자니 못내 억울한 모양이었다. 얄밉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으로 한 서린 늑대들에게 쐐기를 박고 과감히 발길을 돌렸다. 여자애의 보폭에 맞추자 발걸음은 한결 느긋해졌다.
시계를 살폈다. 오후 3시 56분이었다.
딱 4시 30분을 목표로 잡았다. 그럴듯한 카페 하나를 잡고 앉는 데 10여 분. 나머지 20분은 적당히 여자애의 비위를 맞춰주는 데 쓰고. 그리고 마지막 5분 정도는 자신을 위해 쓰일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의 계획을 위해.
카페가 있던 낙성대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묵묵히 걷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여자애도 말이 없었다. 여전히 제법 힘을 줘서 잡고 있는 손목을 뿌리치지도 않는다. 슬쩍 곁눈으로 보니 여자애는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하,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듯싶었다. 자신의 느닷없는 일탈 행동을 무슨 기사의 과감한 용기쯤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더불어 일종의 열렬한 구애 행위로 받아들인 것인지도. 여자애의 성격상 그런 착각을 할 만하긴 했다. 그리고 잠자코 따라온다는 것은 자신의 구애를 받아들였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조금 난감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찰나의 호감에까지 일일이 죄책감을 느낄 만큼 자신은 말랑하지도 않고, 또 양심적인 놈도 아니었다.
“……레몬 소주 좋아해?”
손바닥 안에 갇힌 여자애의 체온이 거북해 손을 뗄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마침 수줍은 여신이 말문을 열었다. 주변을 휘 둘러보니 보도 왼편에 죽 늘어서 있는 상가 중에 소주방 간판이 하나 보였다. 슬쩍 손을 놓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술 안 마셔.”
“에? 정말?! 왜애?!”
눈이 땡그래져선 여자애가 과장되게 묻는다. 여럿이 함께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자연스러운 애교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술 안 마시는 게 무슨 대단한 기벽인 줄로만 아는 단순한 시선이 자신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피곤하다, 정말……. ‘머슴질’이 생활화돼 있는 전창일의 신경줄이 새삼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취하는 거 싫어해.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는 게 싫어.”
“엑?! 뭐야, 그거…… 재미없다. 그럼 무슨 재미로 살아?”
휴, 역시 피곤해. 더 이상 대답해줄 말도 없어 가만히 있었더니, 알아서 재잘재잘 수다를 시작한다. 차라리 그게 더 낫다고 안심했다. 여자애의 수다를 건성으로 들으며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다. 여자애와 30분을 때울 카페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어디든 재빨리 들어가야만 저 불편하기 짝이 없는 뭇 시선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주말 오후 낙성대역이라, 발에 채는 게 거의 다 서울대생들이었다. 대부분 자신의 얼굴을 아는 듯, 걸어가며 마주치는 여자애고 남자애고 할 것 없이 죄다 자신의 얼굴과 옆의 여자애를 번갈아 힐끔거리곤 했다. 역시 심하게 짜증스러웠지만 바람둥이의 평판엔 도움이 되리라 위안하며 참았다. 마침 20여 미터쯤 전방에서 언젠가 가본 적이 있는 조용한 카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마다 칸막이가 돼 있어 적당히 프라이버시도 지켜지는 곳이었다는 게 기억났다. 방향을 정하고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옆의 여자애가 어쩐지 미적거리는 게 느껴졌다.
“……땀 많이 흘리네? 더위 타는 편인가 보다.”
걸음을 멈춘 여자애가 손바닥만 한 작은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꺼림칙한 기분에 저절로 미간이 구겨지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까치발을 하곤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아까 처음 봤을 땐 민소매 티 차림이라서 좀 의아했어. 이제 겨우 5월 중순이고, 또 오늘은 그렇게 덥지도 않잖아. 몸짱이라고 광고하는 건가 싶었지. 근데 너 지금 땀 흘리는 거 보니까 이해가 간다. 열이 많은 체질인가 보지?”
직접 피부를 맞대는 것보다도 더 기분이 불쾌해졌다. 사귄 지 한참은 된 커플들에게서나 나옴직한 친밀한 접촉이 아닌가. 뇌리로 연인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스쳐가며 참기 힘든 죄책감이 일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여자애의 접촉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당장 마음 가는 그대로 여자애를 밀칠 수는 없었다. 열에 대여섯은 서울대생들로 득시글거리는 길거리 한가운데였다. 또한 그 무엇보다, 차이는 쪽은 여자애가 아닌 위 자신이어야만 했다.
“……예쁜 애긴 한데 별로 기분 좋아 보이진 않는구나, 문위. 그런데도 잘 참는 것 같네?”
기억에 있는 목소리가 오른쪽 옆에서 들렸다. 땀을 닦아주던 여자애의 손이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여자애가 몸을 홱 틀어 옆을 바라보았다. 위의 시선도 간발의 차이로 여자애의 뒤를 쫓았다.
내장이 스멀거리는 불쾌감은 점점 더 참기 힘든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이 눈치 없는 어린 여자애 때문인지, 아니면 느닷없이 앞길을 가로막은 저 ‘여자’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 둘 다일 것이다.
“……무슨 뜻이죠? 굉장히 불쾌하게 들리네요? 방금 그 말요. 문위랑 아는 사이이신가요?”
여자애의 날선 목소리가 여자를 향했다. 여자애는 고작 두어 마디 말로 여자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단숨에 읽어낸 것이다. 눈치 없는 행동은 자신에 한해서였나? 아니, 그걸 애교라 생각했겠지. 그녀가 마음에 드는 남자애란 언제든 허물없이 만져도 되고, 과분한 승은을 내리듯 들이대도 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자기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겼겠지. 그녀만은 그럴 권리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당당한 자신감. 순진한 유아독존.
여자는 파랗게 적의를 불태우고 있는 어린 여자애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둘 다 ‘여신과(科)’긴 한데, 과연 관록이 다르다고 속으로 잠깐 감탄을 했다. 무시당한 여자애는 당장에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폭발은 겨우 참고 있는 듯했다. 여자애도 알았을 것이다. 포스부터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생물학적인 나이야 두 살 차이에 불과하더라도, 정신력에 있어서나 지력에 있어서나 하늘과 땅만큼의 수준 차이가 있다고.
“……요즘도 여전히 바쁘니? 여자애들과 미팅 하느라?”
자신의 눈을 똑바로 직시한 채로 여자가 물어왔다. 여자는 새하얀 셔츠형 블라우스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여자의 트레이드마크일 바이올린 케이스도 여자의 오른손에 가지런히 들려 있었다. 긴 생머리는 하나로 단정하게 묶었고, 장식품은 가느다란 금장 손목시계와 작고 우아한 큐빅 이어링이 다였다. 흔히 볼 수 있는 서울대 여학생들의 간소한 평상복 차림인데도 여전히 여신처럼 우아한 미를 발산하는 걸 보면 확실히 범상치 않은 포스의 여자였다. 물론 그런 대단한 여자든, 혹은 눈치 없는 어린 여자애든, 둘 다 자신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한가지였다.
“시간 좀 내주겠니? 바쁜 것 같아 미안하지만, 오늘만큼은 반드시 네 해명을 들어야겠어.”
불편하게 거슬리던 기분이 여자의 은근한 협박조에 꼭대기까지 솟구친 분노로 변했다. 애원도 참아주기 힘든데 협박이라. 단 한 번도 여자라는 생물에게 손찌검을 해본 적은 없지만, 지금 눈앞의 이 여자에게 있어서만큼은 순간적인 욕구를 참기가 힘들었다.
서울대 최고의 바람둥이로 전락한 이래, 여자는 심심찮게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만나줄 것을 요구했다. 스토커처럼 집요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저 우연한 만남에 의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위가 경계심을 품지 않을 딱 그만큼의 선 밖에서, 여자는 내내 자신과의 접촉을 시도해오고 있었다. 지난 축제 때 단호하게 거절한 것으로 여자와의 인연은 끝인 줄 알았었다. 단념한 줄 알았었는데 아직까지 미련을 아껴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미련이 깊은 여자들을 더 경계하는 자신의 습성상, 위는 그렇게 다가드는 여자를 더더욱 상대해주지 않았었다. 얘기할 것도, 해명할 것도 없었다. 반대로 여자의 얘기를 들어줄 까닭도 없었다. 보통 같았으면 사색이 돼서 나가떨어질 정도로 냉혹한 힐난도 서슴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좀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생각조차 안 하는 듯싶었다.
“……무섭네. 언제 봐도 소름이 끼치는구나. 네가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볼 때마다.”
여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나왔다. 원래 새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진심의 살기를 흘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바람둥이들은 대부분 페미니스트라는데 넌 아닌가 봐? 여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으니…… 음, 그런가? 실은 바람둥이가 아니라는 얘긴가?”
“이, 이봐요! 실례잖아요! 남 얘기하는 데 갑자기 끼어드는 건 무슨 뻔뻔한 심보죠?! 왜 이렇게 무례해요?! 얘랑 미리 약속했어요?! 아니죠?!”
“내게 30분만 내줘. 30분만 내 얘길 들어주고, 또 내가 듣고 싶은 얘기도 들려줬으면 해. 물론 네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전제하에. 그럼 앞으론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을게.”
“이봐욧!!!”
“……주변을 봐, 위야. 진짜 창피하지? 나도 창피해. 부끄러워 죽을 거 같아. 서울대 최고의 카사노바가 여자애 두 명에게 둘러싸여서 치정극을 연출하는 걸로 보이겠지? 아마도?”
“도대체 제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시간.”
“선배님께 낭비할 시간은 없습니다.”
“아아, 자꾸 그렇게 독하게만 말하지 마. 너무 아프다, 정말……. 안 그래도 알아. 알아들어. 많이 요구하는 게 아냐. 딱 30분이야. 저 여자애에게 줄 30분만 내게 할애해주면 안 되겠니? 아까 보니까 너도 지루하고 귀찮아서 미칠 것 같은 얼굴이던데?”
“뭐, 뭐예요?!!! 듣자듣자 하니깐 이 여자가 점점!!! 이봐, 너! 문위! 나두 정말 못 참겠다! 이 여자니, 나니?! 지금 당장 정해! 정말 쪽 팔려 죽겠으니까!”
“30분을 드리면 더 이상 질척거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실 수 있습니까?”
“문위!!!”
“……그렇게 말하지 말랬잖아…… 몹시 아파. 아프다구. 이 모진 자식아…… 잘 알아들으니까 너도 내게 예의를 지켜줘. 물론 그동안 내가 널 질리게 한 점은 있겠지만, 그건 네가 아예 상대도 안 해주려고 하니까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구. 앞으론 그렇게 무턱대고 귀찮게 하진 않을 테니까 그런 말은 말아줬으면 해.”
“좋습니다. 딱 30분 드리죠. 약속은 반드시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야!!!”
“미안해. 우효연이라고 했던가? 애프터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 창일이 통해서 연락할게. 또 보자.”
“야, 문위!!! 너!!!”
확실히 쪽 팔린 보람이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쩌면 한 큐로 귀찮은 두 여자를 동시에 떨쳐버릴 수 있게 된 건지도. 여자의 은근하면서도 집요한 집착에 슬슬 대책을 세울 필요성을 느끼던 차이기도 했다. 어차피 어린 여자애를 위해 버려질 쓸모없는 30분이었다. 그 쓸모없는 30분을 투자하는 것으로 앞날이 편해진다면 무시로 일관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다.
새파래졌다가는 도로 새하얘지고, 다시 또 새빨개지는 여자애를 남겨두고 돌아섰다. 어린 여자애와 들어가려 했던 아담한 카페가 보였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여자가 우아한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남겨진 여자애가 뒤에서 뭐라고 앙칼지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다시 볼 여자애도 아니었다. 주선자인 전창일이나 다른 동기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자신을 성토하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여자애가 아니라 자신이 남겨졌어야 동기들의 다굴이 좀 덜할 테지만, 느닷없이 끼어든 바이올린과 선배는 그 이상으로 좋은 핑계거리가 돼줄 것이다. 여자에 비교하면 어린 여자애에게 가진 동기들의 선호도란 고작 병아리 수준이었다. 뭐라 해도 여자는 서울대 남학생들에게 있어 영원한 마돈나였다.
“여유부릴 형편이 안 돼서 받아줄 수 없다고 했지? 부양해야 할 동생들이 있어서 안 된다고. 동생들이 무사히 어른이 될 때까지는 연애놀음에 빠질 마음 없다고.”
30분이라는 시한 때문이었을까? 창백한 얼굴의 고혹적인 미인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대뜸 본론부터 찌르고 들어왔다. 망설임 따윈 없었다. 마치 출전을 앞둔 성녀 잔 다르크처럼 어떤 비장함마저 읽혔다.
“진심이었다는 걸 알아. 정말 결심이 확고한 것 같아서 나도 일단 단념하고 물러섰었지. 그런데 어째서 그 단호함이 단 1년도 못 가게 된 걸까?”
“사람의 생각이란 늘 변덕스러운 법이죠. 저라고 예외일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지. 넌 특별히 예외인 종류지. 난 내 안목을 믿고 있어.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의심의 여지조차 없지. 그래서 반한 거니까.”
“…….”
“아무튼 이상하잖아? 졸업하고 정말 반듯한 직장을 가지기 전까진 연애의 연자도 생각 안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희대의 바람둥이로 변해서 나타난 거야.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어울려서도 안 되는 캐릭터로 말야. 그런 널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
“선배님의 생각 따윈 관심 없습니다. 저에 대한 평가 또한 마찬가지구요.”
“그동안 꾸준히 지켜봤어. 넌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연기하는 것 같더구나. 사람들로 하여금 진짜 ‘바람둥이’로 오해받고 싶다는 듯이 말야.”
“오해?”
“응, ‘오해’지. 넌 바람둥이가 아냐. 정말 바람둥이라면 왜 나는 그 명단에서 빠져 있지?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잔 더 환영이라며? 이렇게 다가가려고 필사적인데 왜 난 안 되지? 근데 나만이 아니더라구. 상대가 좀 심각해질 것 같으면 여지없이 깨지던걸? 아니, 일부러 깨지게끔 만든다고 해야 할까? 대개는 네 쪽이 차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유도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더군. 결국 감이 오더라. 아, 일부러 그러는구나. 역시 여자애들한텐 여전히 관심조차 없구나.”
“스토커 짓에 취미가 계신 줄은 미처 몰랐군요.”
“……예의 지키랬지? 아프다고 얼마나 더 호소해야 하니? 네가 모질게 군다고 해서 내 맘이 쉬이 떠날 거 같아? 그럴 것 같았으면 지난해 5월에 이미 끝났어.”
“…….”
“그래서 더 생각했지. 왜 그러는 걸까? 시간 개념도 철저한 애가 뭐하러 쓸모없는 노력을 하는 걸까? 여자 밝히는 ‘바람둥이’라는 세상의 규정이 왜 필요한 걸까?”
“…….”
“아, 그에 관련해서 또 한 소문이 있었지. 7년 연상이라는 여자친구. 겨울방학 때 헤어졌다면서? 하지만 난 그런 여잔 몰라. 동생들이 어른 될 때까진 연애놀음에 빠질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한 한 남자만 알지. 아, 7년 연상이란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건 익숙했어. 7년 연상의 ‘여자’는 모르지만 7년 연상의 ‘남자’는 나도 한 사람 알고 있지. 그 사람이 널 짝사랑하는 것도 알아.”
“…….”
점점 더 재미없어지고 있었다. 대화 내용도 그렇고, 대화 상대는 더더욱 그러했다. 머리로 피가 몰려들었다. 손발이 싸늘해지고 전신의 근육이 긴장으로 바짝 당겨지는 건, 위협을 감지한 수컷 특유의 본능 때문이리라.
“더 재미난 소문도 들었는데 알려줄까? 의대 본과 2학년 남자애 중에 이승욱이라는 애가 있지? 최근에 게이라고 커밍아웃했다던가? 아무튼 그 애가 네게 홀딱 반했다고 하더라? 의대생들 사이에선 암암리에 퍼지고 있는 소문이라던걸? 네가 그 마음을 안 받아줘서 악감정 품고 널 죽도록 팬 사건도 있었다고 하데? 지난 겨울방학 때 말야. 7년 연상이라는 여자친구도 그 때문에 헤어졌다더군.”
잔 다르크가 아니라 셜록 홈즈 흉내를 내고 있었던 건가? 여자라는 생물임에도 절절히 패고 싶은 기분이 들었던 게 당연했다. 만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아니, 웬만한 수컷들은 명함도 못 내밀, 강하고 치밀한 여자였다. 만약 남자였다면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호승심을 품었을 법한 그런 여자…….
여자의 수다가 거듭되던 내내, 패는 게 아니라 완전히 죽여서 파묻어버리고 싶다고 줄곧 상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열망이 아무리 강한들 그건 현실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를 상대하려면 다른 방법을 써야만 했다. 자칫하다간 여자가 친 그물에 그대로 먹혀들어갈 수도 있었다. 판단이 거기에 이르자 폭발 직전이던 살기를 서서히 갈무리해 들이기 시작했다. 진검 승부였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절대 질 수 없는 진검 승부.
“갑자기 여자 밝히는 바람둥이로 변한 건실한 아이. 그리고 그 아이를 짝사랑한다는 게이 이승욱. 그보다도 더 전부터 그 아이를 짝사랑해왔던 7년 연상의 남자…….”
“…….”
“……아까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연기하는 것 같다고 했던가? 그래, 그 아이는 무얼 감추기 위해선 거 같니? 그 아이를 짝사랑한다는 게이 이승욱? 아니면 그 아이를 짝사랑해왔던 7년 연상의 남자? 여자친구로 잘못 알려진 채 그 아이와 사귀고 있었다는 그 남자? 그도 아니면 이건 어떠니? 실은 그 아이도 ‘게이’라는 것?”
“…….”
여자의 우아한 목소리는 주변을 경계하듯 한층 더 낮아졌다. 높은 칸막이와 제법 되는 음악 소리로 해서 옆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나, 지나다니는 이들이나 대화를 엿들을 가능성은 전무해 보이는데도 여자는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는 듯했다. 얼굴은 이미 백짓장이고,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여자의 고운 손도 하얗게 변한 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살기를 지웠는데도 어째 여자의 떨림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해.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사랑해왔지. 가망이 없는 것 같아 그만두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는데도 잘 안 됐어. 열렬한 첫사랑이었거든.”
줄곧 침착하게 자신과 시선을 맞추던 여자의 눈길이 비로소 아래로 떨어졌다. 눈꺼풀 아래, 반짝이며 일렁이고 있는 것은 촉촉한 물기였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 애가 끔찍해할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협박을 해서라도 사실을 듣고 싶었지. 그래야만 완벽하게 그 앨 단념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
“……그 아인 게이니?”
“…….”
“……게이가 맞아?”
“…….”
여자의 시선이 다시금 자신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반짝이며 일렁이던 물기는 커다란 물방울로 변해서 선 고운 뺨으로 뚝뚝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호흡도 조용했고, 흐느끼는 소리 따윈 일절 내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줄줄 흘려보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잔혹한 운명에 희롱당한 비련의 여주인공 그 자체였다. 코웃음이 쳐졌다. 무엇하나 남부럽지 않게 자란 희대의 공주님이 갑자기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니 누가 믿을까. 것도 싸구려 감정 하나에 휘둘렸다고 말이지. 1∼2년의 유통기한이 고작일 싸구려 감정 하나에.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까?”
서서히 전신의 신경을 일깨웠다. 가장 적절할 가면으로 자연스레 무장을 한다. 괜찮은 여자지만 어림없다. 기왕에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할 텐데, 덤으로 자신을 사랑하기까지 한단다. 하, 사랑이라니. 그것으로 패는 충분하다. 싸움이 될 건덕지조차 없다. 시작도 하기 전에 여자는 이미 패했으니까.
“말을 조금 바꿔볼까요?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건요?”
“……지켜……?”
“예. 지키는 겁니다. 제 자신과…… 무엇보다도 제 가족을요.”
“……무슨…….”
“게이요? 그게 뭔가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아니로군요. 그럼 그 반대일까요? 그 아이는 여자를 사랑하나요? 이런, 그것도 아닌데 어쩌죠? 그 아인 여자한테도 역시 관심 없습니다. 그럼 그 아인 뭘까요? 남자를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여자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런 남잔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위야…….”
“아, 하긴 사랑하는 존재가 있긴 하군요. 그 아이가 유일하게 애정을 느끼는 존재. 그건 가족이죠. 부양해야 할 두 동생 말입니다. 그럼 그건 근친상간이 되는 건가요? 그 아인 근친상간의 변태일까요?”
“위야……!”
“가만 생각해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네요. 동생들을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지만 동생들한테 발정하진 않거든요?”
“…….”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그 아인 동생들을 위해서 몸을 팔죠. 아직 학생이라 돈을 벌 마땅한 다른 수단이 없었거든요.”
“?!!!!!!”
“상대도 가리지 않았죠. 여자들한테도 팔고 남자들한테도 팝니다. 돈이 많을수록, 대신 사랑이니 뭐니 질척하게 집착하지 않을수록 좋은 고객이라 여기죠. 그런 일을 뭐라고 부르더라? 아, 매춘이라고 하던가요? 맞습니다. 매춘이죠. 그 아인 돈을 매개로 자신의 섹스를 팝니다.”
“!!!!!!”
“그러나 고객들을 사랑하진 않죠. 정확히, 그 아인 게이도 아니고 헤테로도 아닙니다. 그들과 섹스는 하지만 사랑하진 않으니까.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음, 그 아이의 정확한 정체성을 말씀드릴까요?”
“…….”
“예. 바로 ‘남창’입니다. 여자와 남자 가리지 않고 매춘을 하는 그저 ‘남창’일 뿐이죠.”
“…….”
“별로 광고할 만한 정체성은 아닌 것 같죠? 게다가 요즘 고객은 7년 연상의 남자라고 하죠? 남창인 것도 모자라 호모 소리까지 듣게 생겼으니 어떡해야 할까요? 그래도 명색이 의대생인데, 몇 년만 더 죽어라 참으면 번듯한 의사가 될 수 있는데, 남창에 호모라고 미리 똥칠을 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 아이 자신도 그렇지만, 그 아이의 어린 동생들은 또 어떨까요? 당연히 상처받겠죠? 그걸 그냥 두고만 봐야 할까요?”
“…….”
“사방에 적들뿐인데…… 호시탐탐 섹스를 탐욕스레 바라질 않나, 스토커처럼 달라붙어 비밀이나 캐려고 하질 않나, 줄 수도 없는 마음을 달라고 커밍아웃을 하네 마네, 열혈 첫사랑이네 마네 하며 달라붙으려고 하질 않나, 그런 지긋지긋한 인간들 천지인데…… 그 아이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얼 어째야만 했을까요? 사랑하는 동생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바람둥이란 소문이요? 당연히 그럴듯한 방어막 아니었겠습니까? 남창에다 호모라는 똥칠을 당하느니 말입니다.”
“…….”
안 그래도 커다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다. 테이블 위에 놓였던 두 손은 하도 떨림이 심해 찻잔을 툭툭 건드리다간 기어코 테이블 밑으로 숨어버렸다. 그토록 청산유수로 셜록 홈즈 흉내를 내던 입술도 벙하니 굳어진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게임오버.
차마 말을 보탤 수가 없을 거다. 아니, 무슨 말도 떠오르지 않겠지. 잘 자란 양갓집 규수 아니시던가? 추하고 어두운 세계란 그저 책으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을 공주님 아니시던가. 차마 스스로와는 절대 인연이 없을 거라 여겼던 똥물을 통째로 뒤집어쓰셨다. 충격이 상당할 터다. 말할 수 없겠지. 생각조차 나지 않겠지. 완벽하게 단념하고 싶다고 했던가? 뭐, 그건 이제 쉬워질 거다.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몸을 섞어온 더러운 남창과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겠지. 확실히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남창’이란 폭탄을 던져도 될까, 잠시 동안 고민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다. 호모설 만큼이나 치명적인 핸디캡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으니까. 그러나 여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만큼 조잡한 꼼수를 쓰지도 않을 여자였다. 약점을 잡고 협박은 하되, 막상 가치가 없어지면 세상에다 대고 소문을 낼 만큼 가벼운 여자도 아니었다. 아니, 소문을 내는 스스로를 용납 못 할 것이다. 적어도 여신 같은 자존심을 가진 여자니까. 장담한다만, 한때나마 남창을 사랑했던 스스로를 지우고 싶어 견딜 수 없어질 때가 올걸?
“자, 듣고 싶어하셨던 것을 전부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절 귀찮게 하진 않으시겠죠? 모쪼록 약속은 지키시는 선배님이길 빕니다.”
기분은 더러웠지만 나름대로 홀가분했다. 석 달 내내 신경을 건드렸던 치통 같은 여자였다.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화장 고치시고 나오세요. 찻값은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남창질 덕분에 그 정도 여유는 있으니까요.”
“사랑해.”
흠칫. 옆자리에 둔 책 배낭을 어깨에 메고 일어서려는데 여자가 일갈했다. 떨리지도, 작지도 않은 확고한 목소리였다. 도저히 헛소리라 치부할 수 없으리만큼.
“사랑해, 문위. 널 사랑해.”
선전 포고를 하듯 여자가 서늘하게 되풀이했다. 여전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릴 뿐인 여자의 얼굴을 힐끗 주시했다가 곧 칸막이 바깥쪽으로 걸음을 떼려 했다. 여자의 팔이 뻗어 나오더니 느슨하게 늘어진 자신의 민소매 티를 움켜쥐었다. 움켜쥔 손가락의 힘은 대단치 않았어도 자신의 진로를 막으려는 의지만은 확고한 몸짓이었다.
“……미안…… 다 들었는데도 단념할 수가 없어…… 단념이 안 되는 것 같아…….”
“…….”
“……어쩌지? 듣고 나니까 더 사랑하게 된 거 같아. 미칠 것 같아. 네가 가엾고 사랑스러워서 정말 미칠 것 같아…….”
더 이상은 흐느낌을 참기 힘든 듯, 여자의 목소리는 확실하게 울먹이고 있었다. 얼굴도 잔뜩 일그러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짜증만 났다. 그래? 그래서 뭘 어쩌라고? 미쳐? 미칠 것 같아? 그러니 다시 또 귀찮게 굴겠다는 거야, 뭐야? 당신 사이코야? 아니, 스토커지? 채 뱉어지지 않은 힐난이 뇌리 속에서 아우성이었다.
“……몰라…… 몰라, 몰라, 모르겠어…… 나도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어…… 네가 말해줄래?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은지……?”
“약속은요?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은요?”
“……귀찮게 안 해…… 네가 싫어하는데 어떻게 그래…… 그건 이제 안 해…… 절대 안 할 거야, 위야…….”
“…….”
“……어떡하지? 나 어떡해……? 이렇게 좋아서 견딜 수가 없는데 어떡하면 좋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 네가 어떻게 알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며 어떻게 알아?”
“아무도 사랑하지 않지만, 아무도 영원한 사랑을 품고 살진 않는다는 것은 압니다. 아무리 절실한들 그것에는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요. 고작해야 1∼2년 정도라죠? 그때까지만 견디세요. 그럼 됩니다. 그때가 되면 제정신이 드실 테니까요.”
“…….”
“작년부터라고 하셨죠? 그럼 이제 잘해야 1년이네요. 내년 이맘때도 같은 마음이시라면 저도 달리 생각을 해보도록 하죠. 아, 생각보다 유통기한이 길구나. 2년보다 더 길 수도 있구나…… 그렇게 판단을 수정해보도록 하죠.”
“…….”
“앞으로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으신다는 약속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선배님의 마음속 문제야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죠. 상관하고 싶지도 않구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티셔츠를 움켜쥐고 있는 여자의 손을 뿌리치는 건 너무나 쉬웠다. 우느라 완전히 넋을 잃은 것 같은 여자를 남겨두고 카페를 나왔다. 역시 기분은 더러웠다. 최악이었다.
사랑을 모른다고 했나?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 무슨. ‘유통기한 2년’이라는 저 망할 놈의 통념에만 사활을 걸고 있는 자신이 말인가? 그래, 2년이다. 반드시 2년이어야만 한다. 사랑의 유지 기한이. 그래서 자신 또한 2년으로 정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2년. 작년 여름부터 내년 여름까지. 그 기간까지만 마음 놓고 사랑하자고. 미련이 남지 않도록 실컷 사랑하자고. 그러곤 버리자고.
비탄에 잠긴 여자의 흐느낌이 잔상처럼 남아 내내 시야를 어지럽혔다. 마치 자신의 모습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어쩌지 못해 전전긍긍해하는 요즘의 자신. 다가올 이별을 상상할 때마다 괴롭고 괴로워서 자학을 거듭하곤 하는 자신. 그럼에도 연인과 함께하는 매일매일이 행복해서 또한 몸서리를 치곤 하는 자신. 여자의 기분 따위 알 바 아니지만, 여자를 통해 투영되는 자기 자신과 연인의 모습만은 가슴을 메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게끔 했다. 갈라진 틈새로 익숙하지만 참기 힘든 고통이 줄줄 새어나왔다. 망할. 당장 연인이 보고 싶었다. 당장 연인을 봐야만 이토록 참기 힘든 통증이 멈출 것이다.
시계를 살폈다. 4시 40분. 일단 전철을 타고 30여 분쯤 간 다음 마을버스를 타고 5분, 그리고 나머지 10분쯤을 더 걸으면 된다. 그러면 연인이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빌라가 나온다. 그래. 넉넉잡고 한 시간만 참으면 이 고통이 멈출 거다. 이토록 목마른 그리움도.
일체의 생각을 잘라내고 전철역으로 뛰었다. 비탄에 잠긴 여자의 모습도 그저 눈을 한 번 질끈 감는 것으로 뇌리에서 털어냈다. 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등줄기와 이마는 땀으로 살풋 젖어들었다. 그리 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까지 계속된 때 이른 더위 탓에 민소매 티를 걸쳤는데, 오늘은 날씨가 좀 흐려선지 그닥 덥지 않았다. 조급해진 마음에 그나마 다행인 셈이었다. 연인을 만날 때까지 이렇게 중간중간 전력 질주를 해야 할 터이므로.
전력 질주의 끝, 마침내 빌라가 보였다.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조용한 부촌에 딱 어울릴 법한 그런 모양새에 그런 분위기인 고급 빌라였다. 사랑스러운 기분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간혹 보더라도 그저 위화감만을 느껴야 했던 저따위 호사스러운 건물에까지 애정이 생기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땀범벅인 채로 헐떡이며 건물 안으로 뛰어들자 로비의 경비원이 공손히 인사를 한다. 이젠 자신 역시 연인과 함께 이곳 주인으로 여기는 태도다. 기분 좋게 웃으며 아틀리에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720119. 익숙하다 못해 거의 전자동으로 입력된 번호를 누르자 삐삑 하는 전자음과 함께 도어록이 열렸다.
현관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자마자 거실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토요일인데……!”
작지만 확실한 불평이었다. 무언가 억울한 듯 물기마저 느껴지는 뾰로통한 목소리였다.
“예, 좀 늦었죠? 서클 모임에 들르느라구요.”
배낭을 던져놓으며 바쁘게 대꾸했다. 호흡이 달떴다. 연인을 품을 기대감이 피크로 치솟아, 차마 미팅 때문이라 솔직할 수 없었다. 미팅을 했다는 말을 할 때마다, 티를 안 내려고 기를 쓰긴 하지만 반짝이던 눈빛이 기운 없이 스러지는 것까진 차마 숨기지 못하는 연인을 아는 까닭이다. 두다다다다. 거실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발소리. 그리고 좁은 현관 통로에 비로소 드러나는 귀여운 얼굴…… 사랑스러운 몸뚱이! 마르고 섬세한 사지가 활짝 벌어지는 게 보였다. 저절로 양팔이 들려 올라가며 마주 안을 채비를 한다. 도움닫기를 하듯 두 다리가 둥실 위로 뛰어올라 자신의 목에 매달렸다. 대롱대롱 매달린 몸뚱이를 그물을 조이듯 와락 품에 안았다. 화답처럼, 사랑스러운 두 다리가 자신의 허벅지를 힘껏 휘감고 조여든다.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달콤한 연인의 단내에 뭉클, 심장이 울었다. 쪽쪽쪽. 쪽쪽. 쪼옥. 쪽. 쪽. 쪼쪼쪽.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에다 홍수처럼 키스를 퍼붓는다. 입술과 눈가와 이마와 턱 끝과 눈썹과 콧망울과 광대뼈와 속눈썹과 관자놀이 등등, 어느 한 군데도 빠트리는 곳은 없다. 서로 먼저 해치우겠다고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다. 결국 어느 한쪽이 귓불이나 목덜미, 혹은 쇄골 쪽으로 물러나는 것으로 타협을 본다. 품 안의 생물은 몹시도 따스하고, 달콤하고, 또 맛있다. 자신의 입맛에 꼭 맞는 귀여움이요 아름다움이요 사랑스러움이다.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목이 다 멘다. 이런 기적이 다 있을까, 어디서 이런 기적적인 생물이 태어나 내게 와준 건가 싶어 감사한 나머지 없던 하느님에 대한 신앙심까지 불끈거리며 치솟곤 한다. 몇 분 전까지의 고통과 조바심이 아득하게 잊혀간다. 이 순간 넋을 가득 채우는 것은 그저 배부른 야수처럼 흡족한 충만감…… 문위라는 전 존재가 온전히 다 꽉 채워진 듯한 극치의 행복감, 바로 그것이다.
문어처럼 감기며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드는 연인을 답싹 안은 채로 신발을 벗고, 거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저 서로 정신없이 입을 맞추고, 서로 만지고 꼬집고 쓰다듬고 애무하느라 바빠 전진 속도는 달팽이보다도 더 느리기만 하다. 간신히 소파에 도착할 즈음에서야 서로에 대한 갈급한 허기가 좀 가신다. 연인을 안은 채로 소파에 앉으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자연스레 파고들어 자리를 잡고 앉는 연인이다. 귀여운 궁둥이를 쓱쓱 자신의 허벅지 위에 문지르고, 쪽쪽쪽 자신의 입술에 소나기처럼 립 키스를 퍼부어대며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린다. 아니, 강아지다. 절대적인 신뢰와 절대적인 애정, 그리고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며 그의 주인에게 오체투지 하는 강아지 그대로다.
“……그림 그리고 계셨어요?”
그냥 버릇 같은 물음일 뿐이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연인의 일과 정도야 이미 자신의 손바닥 안이다. 그래도 굳이 말을 붙이는 건, 그저 연인의 귀여워 미칠 것 같은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응…… 너 그리고 있었어. 너만 그리고 있었어. 하루 종일 오로지 너만…….”
뭉클 하고 또 한 번 심장이 운다. 목이 메고 코끝이 시큰거린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애정이 울컥 치솟는 바람에 사지가 다 덜덜 떨린다.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제한다. ……너만 그리고 있었어. 하루 종일 오로지 너만……. 더할 나위 없는 고백이다. 세상 어떤 사내놈도 좀처럼 듣기 힘들 완벽한 사랑 고백. 완벽한 하모니. 완벽한 선율. 지상 최고의 감미로운 음악.
“저 없는데도 가능하세요?”
쪽쪽쪽. 다시 한 번 입술을 빨아 당기는 립 키스 세례를 시작하며 연인을 떠본다. 귀여운 두 다리가 자신의 허리를 꼭 감고 있는 덕분에 자유로워진 양손으론 연인의 작은 머리통을 꼭 감싸 쥔 채 뺨을 문질문질 애무했다. 한 달 전쯤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뽀글이 파마를 해선 연인의 머리통은 완전 양배추 인형이 되었다. 찰랑거리는 생머리도 미치도록 좋았지만, 부들거리는 양배추 인형도 귀여워서 미칠 것 같다.
“……어어…… 음…… 그야 네가 모델을 서주면 진짜 완벽하지만…… 음음, 그래도 넌 이젠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는걸. 네 얼굴이랑 몸은 어떻게 생겼는지 전부 다 알아.”
“호오. 그럼 이제 모델 안 서드려도 되는 건가요?”
다시 또 툭 던지듯 떠본다. 예상대로 금세 울상이 되는 귀여운 얼굴. 쿡쿡. 아아, 진짜 미치겠다. 귀여워서 미쳐 죽을 거 같다, 젠장…….
“……그…… 그, 그건 곤란해…… 너를 주제로 한 시리즈로 가을에 개인전 할 거라고 기하 선배한테 큰소리 빵빵 쳐놨단 말야. 모처럼 네가 모델 해주겠다고 허락해줘서 동네방네 자랑질 다 해놨는데, 그러는 게 어딨어…….”
“큭큭큭, 눈 감고도 그리신다면서요?”
“우씨…… 그건 그냥 필(feel) 많이 안 들어가는 그런 그림들이지. 정말 주제 들어간 심각한 작품 하려면 반드시 널 보고 그려야 한단 말야.”
“하아…… 그 「자지, 자지, 자지!」처럼요?”
며칠 전에 50호 크기쯤 돼 보이는 커다란 반추상화에 붙인 제목을 발견하고 속으로 얼마나 웃어댔던가. 분명, 두어 시간이나 벌거벗고 모델을 서준 기억이 있는 그림이었다. 벌거벗은 남자의 누드가 주제라는 것도 알겠고, 지독히 관능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의 성적 이미지가 배경으로 들어가 있는 것도 알겠는데, 도무지 모델이 자신인 줄은 아리송했던 작품이었다. 그저 자신이 모델이라니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는데, 한구석, 포스트잇으로 자그마하게 붙어 있던 그림의 제목이라니!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자지, 자지, 자지! 그야말로 자신의 몸에 대한, 좀 더 구체적으론 자신의 페니스에 대한 성스러운 경배였다! 하여간, 자신이 열심히 모델을 서준대봤자 서는 의미가 과연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었다. 지난 1월, 자신이 잠든 사이 몰래 자신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연인을 발견하곤, 가슴이 아파져서 모델이 돼줄 것을 허락했었다. 물론 자신인 줄 알아보기 힘든 작품에 한해서라고 단서를 달았었다. 그러나 그 단서조차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 대부분 인물인지도 알아보기 힘든 추상화였고, 그나마 형태를 알기 쉬운 반추상조차 거기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볼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닮게 그린 것을 보고 싶다고, 요즘은 도리어 자신 쪽에서 연인을 찔러볼 정도였으니까.
“우씨…… 그, 그건 또 언제 봐가지고…… 야! 지, 지금 놀리는 거지, 너……?”
빙고. 온몸이 분홍색으로 물들어선 입을 삐죽이는 연인이다. 푸하하하하. 걷잡을 수 없이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갈무리한 채 연인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가벼운 립 키스로는 도무지 주체가 안 되는 격렬한 애정을 몽땅 입술에 담아 연인에게 입을 맞췄다. 물고, 핥고, 쑤시고 들어가 마침내 영혼까지 흡착해버릴 기세로 힘껏 빨아 마셨다. 오래고도 격렬한 흡입에, 서로의 입술 주변이며 턱이며 목덜미까지 흘러내린 타액으로 범벅이 되었다. 겨우 좀 진정이 된 감정에 입술을 떼자 연인이 하아하아 하며 사랑스러운 한숨을 토해냈다. 아쉬운 나머지 벌어진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끝없이 깨물고 빨아 당겨, 기어코 연인의 눈에 괴로운 물기가 생기게끔 했다. 그제야 마지못해 연인의 입술을 해방해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원하시는 한 언제든 모델 서드릴게요.”
놀리는 기색을 지우고 진지하게 대답해주자, 연인의 물기 어린 눈이 별처럼 반짝인다. 그게 또 너무 예뻐서 양쪽 눈꺼풀 위에 쪽쪽 입을 맞춰주었다.
“……지금도 시간 좀 있으니까 옷 벗을까요?”
속으론 다른 욕구를 억누르기에 바빴지만 일단은 신사처럼 그렇게 말해본다. 벗었다가 분위기가 동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누가 뭐라 하겠는가 말이다. 부러 유혹하려던 것도 아니고, 그저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가 된 건데 뭐가 어때서? 어제도 했다. 그것도, 최소한인 일주일 주기를 절대 앞당겨선 안 되는 완전 삽입의 하드섹스를 말이다. 가벼운 페팅 섹스를 한다고 해도 그조차 내일이나 돼야 가능하단 말씀. 그러니까 굳이 유혹할 마음은 없지만…… 뭐 그렇다고 또 참지도 않겠다는 얘기다, 내 말은(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지금? 하지만 오늘은 너 집에 가는 날이잖아. 동생들이랑 자고 올 거라고…….”
조심스러운 눈길이 기대를 담고 자신의 눈치를 살핀다. 요 표정도 또 너무 귀엽다. 하느님, 하긴 안 귀여운 데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저녁 먹고 바로 안 가?”
“내일은 일요일인걸요.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겁니다. 자정 전에만 들어가는 걸로 하죠, 뭘.”
금세 또 별처럼 빛나는 눈이 숨길 수 없는 기쁨을 드러낸다. 끙차 하는 과장된 기합을 넣으며 연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조금 얼떨떨해하는 연인이 보는 앞에서 잽싸게 옷을 벗어 던졌다. 전력 질주로 달려오느라 온몸이 땀으로 얼룩져 있지만 별로 신경은 쓰이지 않는다. 이대로 모델 삘 좀 뿌리다가 연인을 유혹해서 두어 번쯤…… 아니, 세 번쯤만 하고 샤워하면 된다.
부러 탄탄한 엉덩이 쪽을 보여주며 작업대로 간다. 성기도 좀 더 덜렁거리도록 걸음을 크게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꾸만 한계까지 발기하려는 것을 숫자를 세서 가까스로 참아낸다. 결단코, 먼저 발정하는 쪽은 연인인 것으로 착각하게끔 해야 한다. 어쨌든. 계획대로 연인이 유혹받고 있는 건지 어쩐지 확실치는 않지만, 잠시 어리바리해져 있던 연인도 부랴부랴 자신을 따라오는 게 보인다.
늘 모델 서는 자리에 놓여 있는 등나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자, 연인이 작업대 쪽으로 가서 이젤에 새 캔버스를 끼운다. 어제까지 작업하던 것은 다 완성했는가 보다. 물론 그림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떤 포즈를 취할까요?”
역시 그저 형식적으로 물어볼 뿐이다. 그렇게 물을 때마다 연인은…….
“……어, 그냥 너 편한 대로 앉으면 돼, 위야. 답답하면 서도 좋고.”
하고 대답해주니까. 그러면 자신은 흥겨운 속내를 가까스로 감춘 채 가장 야하게 보일 법한 포즈를 취한다. 그렇지. 가령 지금처럼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치부를 몽땅 다 드러낸 자세를 말이다. 발걸이 쿠션 위에 한쪽 발을 치켜 올려두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페니스뿐만 아니라 고환은 물론 회음을 거쳐 거무스름한 항문 주름까지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인다. 반쯤은 드러눕듯이 등받이에 느긋하게 등을 기댄 채로 한쪽 팔은 팔걸이에, 나머지 팔은 가랑이 사이에 슬쩍 걸쳐둔 채 연인을 바라본다. 시선이 마주친다. 한동안은 연인도 얼굴이 새빨갛게 돼선 어쩔 줄을 모른다. 자신의 노골적인 자세에 도리어 수줍음을 느끼는 거다. 물론 그저 너무 귀여울 뿐이다. 그래도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 이내 혼란을 수습하곤 표정이 심각하게 변한다. ‘연인’이 아니라, 그저 모델을 보는 ‘화가’의 눈으로 변해버린다. 그래. 바로 그 지점부터가 싸움의 시작이다. 연인의 예술가적 기질과의. 혹은 연인의 타고난 재능과의. 저걸 죽이고 진짜 연인을 끌어내야만 한다. 자신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에 환장하는 진짜 연인을. 자신만의 연인을. 그래, 그림 따위 모른다. 예술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싫다. 자신이 모르는 그런 개똥같은 것들과 연인을 공유하는 게 끔찍하도록 싫다. 연인에게 최우선 순위는 바로 나 자신이어야만 한다. 그 언제 어느 때든. 아무리 연인이 타고난 재능 있는 화가라 할지라도. 그래, 이건 질투다. 치졸하기 짝이 없는 유치한 질투. 아무렴. 자신을 모델로 한 연인의 작품이 죄다 선정적인 관능미를 뿌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것만 원하는데, 아무리 숭고한 예술로 포장한들 본색이 드러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러니까 연인이 밝혀서가 아니다. 게이 화가니 당연하다고? 천만의 말씀. 화가는 비교적 얌전하다. 얌전하다 못해 지극히 조신하다. 실은 모델이 밝힌다. 밝히다 못해 조신한 화가를 유혹하지 못해 안달을 한다. 빠지지 마. 예술로 도망치지 마, 내 사랑. 나는 여기 있어. 여기 앉아서 이렇게 당신만을 원해. 원하고 있어. 당신의 그것. 나를 통째로 다 때려 박을 수 있는 당신의 그것. 황홀한 구멍. 천국의 섹스…….
한동안은 전략적 후퇴를 한다. 성욕을 거세하고 숫자를 센다. 혹은 양도 센다. 일단 연인의 재능이 방심할 수 있도록. 겁먹지 않고 자신을 직시하도록. 그렇게 연인의 예술이 춤을 추도록 방기해둔다. 너무 자신의 욕심만 채웠다간 언젠가는 둔한 연인도 눈치를 채게 될 테니까. 연인의 재능에 자신을 모델로 세우는 건 하등 도움이 안 된다고, 마침내 깨닫게 되겠지. 그럼 다신 모델이 되어달라는 귀여운 부탁 따윈 하지 않을 거다. 하. 물론 그렇게 내버려둘 순 없지. 자신은 연인의 모든 걸 사랑하지만, 연인의 재능과의 이 자그마한 전투 역시 몸서리쳐지게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그래, 이건 전략적인 후퇴. 아니, 전략적인 제휴라고 해야 할까? 그대와 나, 공존을 위한 음습한 담합이겠지…….
아틀리에 안에 어느덧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다. 흘낏 시계를 살핀다. 연인의 예술과 놀아준 지 한 시간 남짓. 이제쯤 반격을 가할 때다. 지루하지만, 동시에 지루하지 않았던 한 시간. 예술에 몰두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일도 즐거웠지만, 이제 슬슬 나만의 연인이 필요하다. 몸 이곳저곳의 긴장을 풀고 기지개를 한 번 쭉 켠다. 흠칫 하고 저 건너의 연인이 어깨를 떠는 게 보인다. 이미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본능이 경고를 준 때문이리라. 자신이 기지개를 켜면 그다음은 몹시 위험하다고.
뻐근하게 굳어들었던 신경줄이 찌릿찌릿 펴지며 환호성을 내지른다. 그에 동조하듯 자신도 모든 금제를 풀고 마음껏 섹스를 발산한다. 자신을 감싸고 있던 담담한 아우라가 순식간에 농염한 색기를 띤다. 슬쩍 살펴본 연인의 얼굴도 어느새 새빨간 홍당무. 빙고.
연인이 작업하는 내내, 몇 번 자세를 바꿔준 데 이어 다시금 새롭게 자세를 바꾼다. 전략적 담합 시엔 의도적으로 자제해주었던 바로 그 자세…… 치부를 훤히 드러낸 노골적인 그것으로.
가랑이 사이, 느슨하게 늘어져 있던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슬쩍 음모를 긁어내려본다. 캔버스에 부지런히 붓질을 하던 손이 움찔 하고 멈칫거리는 게 보인다. 후후. 쿠션 위에 걸쳐둔 다리도 좀 더 위로 들어 올려 어둑한 항문 주름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해준다. 주름 근처까지 거무스름한 음모가 나 있어 연인은 특히 더 매혹되는 장소다. 지루한 듯, 무릎을 굽혀보기도 하고, 굽힌 무릎을 왔다갔다 가로로 건들거리기도 한다. 그럼 사타구니 틈이 보이다 안 보이다 할 것이다. 가려운 듯 음낭 주름을 조금 긁적거리기도 해보자. 음낭과 페니스가 동시에 사정없이 덜렁거린다. 연인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하하. 음낭을 긁적이던 손을 들어 가슴 언저리도 쓱쓱 쓸어본다. 가슴 근육이 두어 번 불퉁거린다. 이미 팽팽하게 일어선 지 오래인 유두가 잡힌다. 근질거림을 참을 수 없어 꼬집듯 긁적거린다. 그렇다. 어디까지나 근질거려서일 뿐이다. 그렇게 믿어줘야만 한다, 내 귀여운 연인아. 꼴깍, 꼴깍, 꼴깍. 하하하. 연인이 몇 번이나 침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하다. 파안대소가 터지려는 것을 역시 필사적인 인내로 참아낸다. 하품도 크게 해본다. 덕분에 눈시울이 순식간에 촉촉이 젖어들고, 기왕의 색욕에 더해 짐승처럼 번들거릴 것이다. 시선이 마주친다. 붓을 든 연인의 오른손은 이미 옆으로 축 늘어진 채 벌벌 떨고 있다. 색색거리는 숨이 가쁘다. 얼굴은 기왕에 홍조로 예쁘게 달아올라 있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우적우적 씹어 먹어치우고 싶지만 악착같이 참는다. 절대로! 네버! 연인이 먼저 자신을 덮쳐야 한다!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리는 것으로 지루함을 가장한다. 게슴츠레하게 눈꺼풀을 내려 졸린 눈을 만든다. 자, 이제 시작이다. 자신은 그저 졸릴 뿐이다. 졸리니까 발기도 그저 무의식중에 이루어지는 생리 현상일 뿐이다. 절대로 연인에게 발정하는 것이 아니다. 겨우 연인의 기색을 살펴볼 수 있을 정도까지만 남기고 눈꺼풀을 완전히 내린다. 감은 듯 만 듯한 실눈은 연인에겐 더더욱 야해 보일 것이다.
의자 팔걸이에 양팔을 축 내린 채로 발기를 시작한다. 뇌리 속의 금제를 풀자마자 불끈 하고 튕겨 오르더니 순식간에 30도쯤 각이 선다. 다시 한 번 하품. 그리고 다시 한 번 게슴츠레한 주시. 연인의 시선은 뚫어져라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를 핥고 있다. 울창한 음모의 숲을 뚫고 페니스의 각도가 20도쯤 더 올라간다. 이윽고 거의 90도가 되자 완전히 출렁거리며 요동을 친다. 다시 하품. 불끈. 아예 아랫배까지 뚫고 올라올 기세다. 마침내 귀두 끝으로 질척한 액이 샌다. 참지 못하고 아래로 뚝뚝 흘러내린다. 전등 불빛을 받아, 두툼한 기둥을 따라 죽 이어지는 은하수길이 생겨난다. 이쯤에서 최후 통첩.
고개를 아래로 꾸벅거린다. 완전히 잠들었다는 신호. 잠은 개뿔. 물론 말짱 거짓말. 흐헙. 헛바람을 켜듯 연인의 숨 들이켜는 소리가 귀청을 두드린다. 푸하하하하. 의자 바닥을 깔아뭉개듯 슬쩍 엉덩이를 한 번 돌리자 활시위처럼 탄력 있는 페니스가 탕 하고 아랫배를 치고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챙강. 연인이 무언가를 팽개치는 소리가 난다. 그러곤 두다다다다. 거실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발소리. 빙고. 빙고. 빙고.
꾸벅꾸벅 졸던 몸이 등나무 의자째 뒤로 넘어갔다. 연인이 말 그대로 강간범처럼 자신을 덮쳐든 때문이다. 뒤로 넘어진 몸은 연인과 한 몸이 된 채 두어 번 거실 바닥을 굴렀다. 갈퀴처럼 자신을 죄고 있는 연인의 양팔 탓에 당장은 팔을 뻗어 마주 안아줄 수가 없다. 상관없다. 의자며 거실 바닥에 몸 곳곳이 거칠게 부딪치느라 제법 아픔이 느껴졌지만, 물론 그도 말짱 무시했다. 광기 어린 키스가 얼굴 여기저기에 소나기처럼 퍼부어지고 있다. 더 이상 속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자는 척할 필요도 없었기에 눈을 부릅뜬 채 번들거리는 욕망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위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안아줘. 안아줘, 당장. 박아줘. 여기다 널 통째로 다 박아줘. 박고서 미친 듯이 흔들어줘. 날 범해. 마음껏 범해서 너널너덜하게 해줘. 찢어발겨줘. 네 창녀로 만들어줘. 다 줄게. 날 다 줄게. 내 창녀를 줄게. 네게만 줄게. 내 사랑. 내 사랑. 내 연인. 하느님, 내 남편. 다 줄게. 다, 다, 내 모든 건 다 네 거야. 전부 다 네 거야. 난 없어. 네가 다 가져가서 난 없어. 없어, 없어, 없어…….
단순하고, 순진하고, 절실하고, 순수하고, 솔직하고…… 그래서 더 성스러운 극치의 애정과 절대적인 복종이 자신의 발아래 떨어졌다. 흡족해진 야수는 물론 한 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희희낙락, 게걸스레 받아먹었다. 꿀꺽. 몸서리쳐지는 기쁨의 전율이 전신을 강타했다. 양팔을 크게 벌려 자신의 암컷을 힘껏 품어 안았다. 양다리를 문어처럼 친친 감아 통째로 먹어치웠다.
―……응. 잘 왔어. 잘 왔어, 내 사랑. 내 귀여운 연인. 내 사랑스러운 암컷. 나만의 음란한 창녀야…….
기뻐 날뛰는 야수가 몸서리를 치며, 그르릉거리며 희열에 찬 대꾸를 주었다. 개선장군처럼, 혹은 패왕처럼. 이윽고, 매우 흡족하게…… 제 암컷의 안으로 가차 없이 진군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