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 1993년 4월. 문위(文偉) (77/129)

44. 1993년 4월. 문위(文偉)

[또 그 사람 집에서 자고 오는 거야?] 

수화기 너머 휘의 어조가 금세 사나워진다. 한동안 납득한 것처럼 얌전하더니 요즘 다시 삐딱하게 굴고 있다. 개강하고부터 주말과 일요일은 늘 연인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게 불만인 것이다. 대신 주중엔 매일 동생들과 함께 보내는데도(물론 이틀에 한 번씩은 연인과 보내느라 자정을 훌쩍 넘겨서야 집에 들어가긴 하지만, 어쨌든 주중엔 항상 동생들 집에서 자고 있다), 주말과 휴일을 늘 따로 떨어져 보내니 역시나 허전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주말과 휴일이라도 통째로 투자하지 않으면 금단 증상이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다. 연인과 함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줄어드는 만큼 기분이 극도로 초조해지고 우울해진다.

본과로 올라가고 나니 확실히 수업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과연 의대는 의대로구나 하고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었다. 고3 수험생 때보다도 더 빡빡한 스케줄의 연속이었다. 고3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하버드 장학생도 문제없었을 거라고, 동기들이 하나같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주중엔 아침부터 저녁 6∼7시까지 꽉 채운 여덟 시간 풀타임 전공 수업이 있고, 주말에도 오후까지 전공 수업이 있었다. 수업 시간 자체만이 아니라 내용까지 빡세기 그지없어서, 그를 따라가기 위한 스터디까지 두어 시간 하다 보면 저녁 8∼9시가 훌쩍 넘어가기 일쑤였다. 거기에 동생들을 돌보는 시간까지 빼면 그야말로 연인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줄어들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잠깐 얼굴 보는 것이 다였다. 것도 말이 이틀에 한 번이지, 실제론 주중에 거의 한두 번이 고작이었다. 고작 한두 번 연인의 아틀리에에 들러 두어 시간 동안 함께 보내다가 밤에는 반드시 동생들에게 돌아가곤 한다. 연인을 대면하자마자 허겁지겁 몸부터 겹치고, 비몽사몽 졸다간 별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안타깝게 이별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절박한 안타까움은 주말과 휴일을 통째로 꼬라박아 연인과의 미친 듯한 교접으로 풀어야만 했다. 지난 1년 8개월여 동안은 두 집 생활도 그리 부담이 가지 않았었다. 수업은 널럴한 교양 위주였고, 일단 마음 놓고 연인을 사랑하자고 작심한 터라 정신적인 혼란도 거의 없었으니까. 그러나 요즘은…….

[내일도 늦게나 들어올 거지?]

말없이 한숨만 쉬고 있었더니 휘의 불퉁한 목소리가 재차 물어온다. 아니, 이쯤 되면 물음이 아니라 질책이다. 불만이 가득한 질책.

……형이 이럴 수 있어? 아무리 그 사람에게 매여 있다지만 너무한 거 아냐? 혹시 그 사람 좋아하는 거 아냐? 조금이라도 좋아하니까 그렇게 잘해주는 거 아니냐구? 우리가 형 제대로 볼 수 있는 날도 주말이랑 휴일뿐인데, 요샌 온통 그 사람만 상대하고 있잖아. 혜윤이도 얼마나 울적해하는 줄 알아? 형 얼굴 보기 힘들다고…….

닷새 전 들었던 휘의 사나운 외침이 귀에 쟁쟁하다. 다혈질인 녀석치곤 잘 참나 했더니 역시나 폭발해버렸다. 식목일인 지난 5일은 월요일이었고, 주말부터 월요일까지 자신은 몽땅 연인과 함께 보내버린 터였다. 그날 늦게 마지못해 고척동 집으로 돌아가니 휘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그렇게 쏘아붙이기 시작했었다. 애초 식목일은 동생들과 보낼 작정을 하긴 했지만, 막상 그날 아침이 되자 자신은 다시금 연인을 안고 또 안아버리고 말았다. 전날인 일요일에도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었건만 병적인 욕망은 조금도 스러질 줄을 몰랐던 것이다.

“……점심 전까진 들어갈게.”

[정말?]

“그래. 삼겹살 사 갖고 갈게. 오랜만에 셋이서 실컷 구워먹자.”

[정말이지?]

여전히 불퉁한 기가 남아 있는 휘를 가까스로 다독여 공중전화를 끊었다. 3시에 수업이 끝나고, 스터디 두 시간까지 마치고 나니 벌써 5시가 넘었다. 조금씩 낮이 길어지고 있지만 연인의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역시 해가 졌을 것이다.

저절로 조급해지는 마음에 전철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거의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곧 만나게 될 연인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넘칠 것 같은 그리움에 한편으론 달뜨고, 한편으론 지독하게 우울해졌다.

갑갑했다. 곧 2년이었다. 자신과의 약속은 이제 넉 달 남짓이면 기한이 다한다. 그 안에 어떻게든 승부를 봐야 하는데, 감정의 크기는 애초의 그것에서 단 1밀리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줄어들기는커녕 더 자란 것 같은 의심마저 든다. 시간이 갈수록 더 선명해지고 확고해진다. 마치 문신처럼.

그렇다. 연인을 사랑하는 것은 마치 영혼 위에 찍힌 문신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영원히 지워지지도, 또 지울 수도 없는. 그렇다면 파내야 한다. 기를 쓰고라도 파내야만 한다. 파낸 자리에 커다란 흉터가 남겠지만, 그러나 일단 파내진 것은 더 이상의 색채도, 또 형태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저 흉물스러운 흔적만을 남긴 채 아스라이 잊혀갈 것이다.

여하튼 자연스레 지워버리든, 아님 억지로 파내버리든, 되도록 함께 지내야만 뭔가 결판을 내기도 쉬워질 것 같은데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고, 그래서 마음은 더더욱 초조하다. 사면초가에 갇힌 듯한 느낌. 요즘 유달리 더 연인과의 섹스에 탐닉하게 되는 까닭도 이런 불안정한 정신 상태가 원인일 것이다.

그나마도 그런 요즘이 차라리 행복한 쪽이 아닐까 의심되는 것은 더욱 문제였다. 넉 달이면 이조차의 만남도 끝인데…… 아니, 반드시 끝내야만 하는데, 도저히 생각조차 하기가 싫어진다. 이별이 예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이별이란 단어의 뜻조차 모르고 있는 듯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아예 그쪽으로는 생각을 모으려 하지 않는 것으로써. 그러나 의식적으로 아무리 생각을 지우려 한들, 본능이 모를 까닭이 없다. 다가올 불행을, 아니, 고통을 예감한 본능은 육체고 정신이고 할 것 없이 미치도록 연인에게 집착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마치 금단 증상의 고통을 두려워해 더더욱 마약에 탐닉하는 중독자 같은 꼬락서니가 아닐 수 없었다. 전형적인 중독자처럼 연인을 보고, 연인을 만지고, 연인의 몸 안에 자신을 결합시켜야만, 비로소 닥쳐올 이별에 대한 공포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도로 연인으로부터 떨어지고 나면 잠시 잊었던 그것이 다시금 활발하게 넋을 좀먹어 들어오기 시작하한.

720119. 삐빅. 여전히 거침없이 열리는 도어록에 제기랄 하고 욕설이 터진다. 그렇게 비번을 바꾸라고 수시로 종용을 하건만, 연인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절대로 바뀌지 않는 도어록의 비밀번호가, 마치 죽어라 기를 써도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감정 같기만 해서 짜증이 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연인의 변함없음 또한 증명하는 것만 같아, 반대로 기쁨에 자지러지는 자신이 있다. 이율배반이다. 변하지 않는 스스로는 증오스럽고, 역시 변하지 않는 연인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니. 이다지도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파렴치할 수가 있을까.

“……와, 왔어……?!”

현관 안으로 들어가 책 배낭을 던져놓자마자 연인의 절절한 인사가 자신을 맞는다. 작업 중이었던 듯, 편한 실내복 차림에 물감 얼룩투성이 앞치마를 걸치고 있다. 숨길은 가쁘고, 얼굴은 달아올라 있다. 분명 기쁨에 떨고 있지만 태도는 극히 얌전하기만 하다. 강아지처럼 두다다다 달려와 안겨들고 곧 키스의 소나기를 퍼붓던 격렬한 인사 대신, 언젠가부터 다시 만난 희열을 애써 억누른 채 현관 앞에 서서 조심스러운 인사말을 건넬 뿐이다. 요즘 연인의 태도는 많이 조심스러워졌다. 아마도 개강 이후 얼굴 보는 시간이 현격히 줄어든 뒤부터일 것이다. 아니, 시점이 문제가 아니라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한 연인이니, 아무리 숨기려 한들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눈치채지 못할 까닭이 없다. 그 원인 또한 감히 상상조차 못할 테니 그저 불안스럽기만 할 테지. 그저 공부에 치여서일 뿐이라는 자신의 궁색한 변명을 아직까진 믿어주는 것 같긴 하지만, 틀림없이 본능은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수시로 우울해지는 자신을. 또한 수시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칠어지곤 하는 자신을. 짜증이 늘어버린 자신을…….

“……배고프지? 밥 차릴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자 또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보이지 않는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다. 깊은 애정으로 반짝이는 눈길이 자신의 얼굴에서 떠나질 않는다. 변함없이 예쁘고 사랑스럽고 애틋하다. 또 목안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고, 가슴이 울컥거리는 통증이 인다. 와락 움켜 안아 자신을 통째로 박은 채 부서트리고만 싶은 절박한 욕구. 이것이 애정인지, 분노인지, 혹은 욕구 불만인지 해석해보려던 것조차 그만둔 지 오래다.

“사흘 만이에요.”

그래, 사흘만이다. 이번 주엔 수요일 밤에 잠깐 보고 오늘이 처음이다. 화요일엔 전공 특강이 있어 못 오고, 다음 날인 수요일에 잠깐 봤기에 목요일 방문도 보이콧 해버렸었다. 물론 자의가 아니라 역시 스터디가 길어져서였다. 말이 사흘이지, 석 달은 지난 것만 같다.

“……그러니까 이리 오시라구요.”

‘에……?’ 하고 잠시 어리바리한 표정이 됐다간 이내 발갛게 얼굴을 붉힌다. 침실 쪽으로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자신을 따라 연인도 종종걸음으로 달려온다. 걸어가며 재킷과 티셔츠를 벗고, 청바지 벨트도 벗어 내던진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땐 이미 알몸이었다. 페니스도 기왕에 발기 상태였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파고든 연인의 체취를 맡은 직후부터였다.

막 침실로 따라 들어온 강아지를 단숨에 품었다. 품 안의 강아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조금 떨고 있었다. 꿈처럼 아득해진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적인 애정과 신뢰로 가득한 내 것의 눈동자. 내 아내의 눈동자……. 영원히 바라보고픈 욕구와 당장 파고들어 입을 맞추고 하나로 결합하고픈 욕구가 서로 이기겠다고 전투를 벌인다. 잠시 버티는 듯하다가는 이내 패배해버린 눈꺼풀이 감기고, 곧 키스에 굶어 죽은 아귀가 되살아났다. 찢어발기듯 품 안의 연인을 발가벗긴다. 조금씩 떨고, 수줍어하고, 혹은 설레고 있던 사랑스러운 몸뚱이를 허겁지겁 안아 들어 침대로 간다. 소중하게 눕힌 알몸 위에 자신을 겹치고 전신의 체중으로 힘껏 깔아뭉갠다. 일체의 저항이 없는 사랑스러운 몸뚱이가 사지를 활짝 열고 자신을 맞아들인다. 서로의 입술이 달라붙고, 어깨와 가슴 근육이 달라붙고, 뾰족하게 솟은 젖꼭지끼리 맞붙어 이지러진다. 서로의 아랫배와, 성기와, 허벅지와, 종아리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서로를 향해 얽혀든다. 짓누르며 달라붙은 서로의 피부를 통해 서로의 체온이 이어진다. 체취가 섞이고, 타액이 섞이고, 땀과 음액이 질척하게 뒤섞인다. 서로가 서로를 만지고, 핥고, 깨물고, 비빈다. 마치 꼭 달라붙어 있는 서로의 존재를 재차 확인이라도 하듯. 뇌수가 녹아들 지경으로 황홀한 충만감에 서로의 육체가 자지러진다. 마음과 넋이 몽땅 다 하늘로 부상해버린다. 그러다 보면 누가 연인이고, 누가 자신인지 아리송해진다. 무아지경이다. 그저 오로지 결합에 대한 욕구만이 전 존재를 활활 태울 뿐이다. 둘로써 달라붙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완벽히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하나가 돼서, 흐물흐물 녹아버려야만 한다. 마침내 연인의 가랑이를 활짝 열고 온전히 정복을 시작한다. 하나로 녹아 죽기 위한 힘찬 도약이다. 귀두 끝으로 주름을 문지르고, 슬쩍 입구를 찔러도 보고, 기둥으로 퉁퉁 튕겨도 보고, 그렇게 빈틈을 노리다간 불시에 와락 삽입한다. 그러곤 안으로, 안으로, 더 이상 파고들 빈틈이 없을 때까지 깊숙이 자신을 파묻는다. 흐아앙. 숨넘어가는 교성과 함께 뜨겁고 촉촉한 내벽이 페니스를 통째로 깨문 채 힘껏 수축한다. 흐욱. 찌르르한 기쁨의 전율이 맞붙은 점막을 통해 전신의 신경줄로 전달된다. 그를 끝으로 이성은 말짱 날아가버린다. 기쁨을 끝없이 증폭시키는 피스톤질만 격렬하게 거듭될 뿐이다. 찌르고 뽑고, 찌르고 뽑고, 박고 할퀴고, 박고 할퀴고, 느릿느릿 크게 빙글 돌렸다간 다시금 미친 듯한 가속으로 찔러 넣는다. 되풀이, 되풀이해 강하게 마찰되고 튕겨지는 성기의 표면을 통해 점점 더 넋이 하얗게 비워진다. 비로소 한 몸이 된 서로가 흐물흐물 녹아들어간다. 아픔인지 쾌락인지 모호할 지독한 쾌감은 결국 인간이었던 자를 통제 불능의 짐승으로 전락시킨다. 인간적 고뇌도, 우울도, 슬픔도, 번민도…… 고통도, 두려움도 더 이상은 없다. 인간의 넋을 공포와 전율로 가득 몰아넣었던 이별의 고통은 어느새 하얗게 탈색돼버렸다. 고통받았던 기억조차도 말끔히 사라져, 짐승은 그저 희희낙락, 극상의 쾌락 속을 허우적거릴 뿐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더 이상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영겁의 시간 속…… 그저 웃으며 헐떡이며 맹렬히 질주해갈 뿐이다…….

“……집에 가야 하잖아…….”

연인이 잔뜩 쉬어터진 목소리로 다정하게 재촉한다. 쥐어짜듯 간신히 새어나오는 엄청난 목소리다. 하긴 이틀 내리 봐주지 않았다. 어젯저녁부터 지금까지, 장장 거의 24시간 내내 몇 번이나 해댔는지 모른다. 일고여덟 번쯤부턴 더 이상 세는 것도 불가능해졌었다. 배고프면 대충 먹고 지치거나 졸리면 잠깐씩 잠이 들고, 깨어나면 다시 달라붙었다. 단 한 번도 씻지 않았고, 정액과 땀과 침 범벅인 시트조차 단 한 번도 갈지 않았었다. 수면 부족으로 온몸이 나른하고, 성기는 쓰라리고, 배 속이 허전해도, 전부 다 개의치 않은 채 발정난 개처럼 그 짓만 해댔다. 이젠 사정하면 요도 끝이 쓰라리며 묽은 정액만 흘러나온다. 자신이 이 지경인데 연인이라고 온전할 턱이 없다. 목소리는 듣기 힘들 지경으로 탁하게 쉬고, 온몸엔 울긋불긋 붉은 열꽃이 피어 있고, 머리는 부스스, 얼굴은 퉁퉁 부은 채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안도 밖도 흠씬 축축하게 젖어 있는 몸뚱이는 서로의 침과 땀과 정액 냄새로 진동을 한다. 손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없이 늘어진 몸을 그래도 아쉬워서 놓아주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다. 모로 누워 마주 꼭 끌어안은 채, 연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물고 빨며 개처럼 핥아주고 있는 자신이다. 등 뒤로 팔을 뻗어 허리를 꽉 죄고 있는 다른 손은 연인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거나 항문 안쪽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어 젖은 내벽을 애무하거나 하고 있다. 양쪽 허벅지와 종아리는 물론, 연인의 허벅지와 종아리들을 사슬처럼 죄고 있다. 입안에 들어온 손가락을 빨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고, 항문 속에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하며 유사 섹스를 할 때마다 쿨쩍거리는 소리도 너무나 듣기 좋다. 자신이 질펀하게 안에다 싸질러놓은 정액이 손가락을 타고 줄줄 흘러나오는 감촉은, 물론 진저리가 쳐질 지경으로 흡족하다. 그런 자신의 짓궂은 손가락이며 손등을 연인 역시 쪽쪽 소리가 나게 마주 뽀뽀를 해주고 있다. 완전히 기진해버린 몸이라, 그걸 제대로 된 뽀뽀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저 가쁜 할딱임인지, 입만 삐죽삐죽 내민 뽀뽀 흉내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한편으론 가여운 생각이 들면서도, 도무지 놓아주고픈 생각은 들지 않으니 자신도 확실히 못 말릴 늑대 새끼임엔 틀림이 없다.

“……그…… 흑……!

곤란한 대답 대신, 중지로 전립선 근처를 문지르듯 꾹 누르자 연인이 헐떡이는 신음을 토한다. 어느새 바싹 일어선 음경이 서로 맞붙어 있는 성기를 통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토록 지치게 만들었음에도 여전히 발기하는 걸 보면, 역시 전립선을 자극하는 만큼의 즉효는 없는 듯싶다. 조금 섭섭한 기분도 든다. 함께 지쳐도 자신은 그저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쉴 새 없이 물건을 세워대는데, 연인은 이렇게 직접적인 자극을 줘야만 마지못해 일어선다. 체력의 문제인가, 아니면 사랑의 깊이 차이인 건가. 젠장. 어쩐지 깊이 생각하기가 싫어진다. 체력의 문제일 뿐이야. 서둘러 변명하듯 뇌까린다. 절대 자신이 더 많이 연인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 거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저, 점심때까진 돌아가겠다고 했다며…… 저, 저녁엔 윤열이 형도 온다고 했고…….”

다시금 떨어지는 허스키하고 부드러운 채근. 기진맥진한데다 흥분까지 해 도저히 말을 이을 상태가 아닐 텐데도 재차 채근하는 걸 보면 자꾸만 미적거리는 자신이 꽤나 걱정이 되긴 하나 보다.

하긴 벌써 날이 어둑해지고 있다. 어제 휘와 통화할 때만 해도 반드시 점심 전까진 집에 들어가기로 작정을 했건만, 연인을 안다 보니 말짱 잊고 말았다. 결국 점심 무렵 휘의 재촉 전화를 받았고, 가긴 갈 테니 조금 늦어지더라도 걱정하지 말라는 우격다짐으로 서둘러 끊어버렸었다. 윤열이 형까지 저녁때 들르기로 했다며 빨리 오라는 휘의 성화는 그저 짜증만 유발했을 뿐이었다.

지난 1월, 가석방 조처로 풀려난 형은 시민 단체 일을 시작하면서 자주 고척동 집에 들러 자고 가곤 했다. 자신이나 동생들이 걱정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감옥 생활 중에 더욱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은 듯싶었다. 자신도 생각보다 빨라진 형의 출감을 뛸 듯이 기뻐했고, 또 잦은 방문 역시 좋아라 했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물론 그건 연인과 관련된 문제였다. 말하지 않는 이상 모르겠지만, 그래도 형의 얼굴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일고 또 초조감도 더 가중되곤 했다. 그걸 휘 녀석이 어떻게 알았는지, 형을 빌미로 은근히 자신의 행동에 족쇄를 채우려 들었다. 정확히는, 연인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능한 한 줄이도록 간섭을 하려 들었다. 결국 또다시 압박을 주는 녀석에게 짜증이 나면서도 딱 한 번만 더 하고 가야지 했는데, 그 ‘딱 한 번’을 하는 사이, 그 결심조차도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윤열이 형이 오면 동생들은 더 걱정할 까닭이 없었다. 자신보다도 더 동생들을 잘 돌봐주는 형이 있는데,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고 달콤한 변명이 생겨버린다.

“……예. 곧 가야죠. 일어날게요. 곧…….”

입안에 들어온 연인의 귀여운 손가락들을 살살 깨물며 마지못해 입에 발린 대꾸를 주워섬긴다. 내벽을 애무하던 중지를 슬쩍 빼서 회음부를 더듬고, 이내 앞으로 가져와 손안 가득 귀여운 성기를 움켜쥐기도 한다. 음낭과 음경을 모두 한꺼번에 틀어쥐고 주물럭거리다간, 자신의 것과 함께 품어 서로 꾹꾹 눌러도 본다. 예민해진 표피로 달리는 쓰릿한 아픔 덕분에 더 이상 비비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대꾸에 진심은 뒷전, 머릿속에 가득한 것이라곤 그저 음란하고 퇴폐적인 연인과의 농탕질뿐이었다.

그야, 뇌리 한구석으로는 ‘정말 이제는 집에 가봐야 하는데……’ 하고 의지를 세우고 있기도 하다. 적어도 저녁 식사만은 집에 가서 윤열이 형과 동생들과 해야 한다고. 약속한 삼겹살도 사 가지고 가서 말이지. 하지만 다른 한구석에선 그것이 말짱 허약하기 짝이 없는 결심이라는 것도 자각하고 있다. 가긴 가야 하지만, 저녁 식사 전엔 반드시 돌아가야 하지만, 그 ‘반드시’가 ‘대충 되는대로’의 의미라는 것을 말이다.

연인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더 이상 섹스는 할 수 없다. 아마도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지 않는 한은. 연인처럼 여전히 발기해 있긴 하지만 그야 계속 자극을 받아 그런 거고, 이미 몸은 한계라는 걸 자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집에 가긴 정말 싫다. 아니, 집에 가기 싫다기보다 당장 연인과 떨어지기가 죽기보다도 싫었다. 더 이상 섹스를 못 해도 좋다. 그냥 지금처럼 이렇게 서로를 품고 체온을 섞은 채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으니, 가능한 한 함께 있었으면 싶었다.

“……저…… 흑…… 흐웃……! 저, 저녁은 집에 가서 먹어…… 하앙……! 응? 꼬…… 꼭 그렇게 해, 위야…….”

서로 맞물린 채 눌리는 성기 탓에 끙끙거리는 교성이 샌다. 타이르듯 자신에게 다짐을 주지만, 덕분에 권위라곤 일절 서지 않는다. 자연스레 엉덩이를 튕기며 서로를 향해 피스톤질을 하고 있다. 실제 삽입만 없다 뿐이지, 여느 때보다도 더 깊게 결합돼 있었다. 서로 애틋하게 교접 중인 주제에 아무리 가라고 야단을 쳐봐야 실감이 안 난다. ……예, 그럴게요……. 질책이 건성이듯, 대꾸도 건성이다. 그저 흐늘흐늘 젖어든 서로의 몸과, 나른해진 성욕과, 그럼에도 전혀 지치지 않는 서로를 향한 열렬한 애정뿐이다. 연인의 손과 손가락들이 온통 자신의 침으로 범벅이 되었을 무렵 다시금 입술을 연인에게 가져가 키스를 했다. 혀를 연인의 입안으로 깊이 파묻고 목구멍 안쪽까지 피스톤질을 한다. 연인의 도톰하고 보드라운 혀끝도 자신의 목 안쪽 깊숙이까지 파고들어와 박고 있다. 자신의 타액으로 흠뻑 젖은 연인의 두 손이 자신의 양쪽 관자놀이 사이를 헤집고 들어온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채 뭉쳐 있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치는 손길은 여전히 극진한 애정으로 넘치고 있다. 자신의 나머지 한 손도 화답하듯 연인의 젖은 머리카락 틈으로 파고든다. 손가락으로, 혀로, 성기로, 궁극엔 온몸으로 섹스를 한다. 상냥하고 다정한 애무, 느릿하고 나른한,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격정적인 키스, 깊고도 깊은 성기의 결합, 무엇 하나 희열을 주지 않는 것이 없다. 아래서 이루어지는 페팅 섹스만큼 머리카락 속과 입안에서의 섹스도 마냥 나른하고 농밀하다. 오르가슴은 너무나 멀고, 올라갈 기력도 딸리고, 올라갈 생각도 없다. 그저 이렇게 마냥 뜨겁게 흥분한 채 서로 박기를 계속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멀리서 현관 벨이 울렸다.

극도의 성적인 전율 속에서 무아지경으로 떠밀리고 있던 두 몸뚱이가 동시에 흠칫 긴장을 했다. 느닷없고 폭력적인 개입이었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마지못해 서로의 입술을 떼곤, 서로를 애절하게 바라보았다. 땀범벅으로 붉게 달아오른 서로의 얼굴이며, 잔뜩 충혈된 채 번들거리는 눈시울이 서로 동시에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완벽한 합일의 순간이 잔혹하게 깨져버리고 말았다. 예정 없이 울린 현관 벨은 그만큼 두 사람의 천국에 잔인한 흙발을 들이민 격이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희미하게 몸을 떨고, 혹은 빈틈없이 얽혀든 사지에 힘을 더하기도 하면서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만 열렬히 응시했다. ‘무시해요.’ 눈으로 부탁했다. ‘그럴까?’ 사랑스러운 눈이 대꾸했다. ‘네, 그냥 무시해요.’ 거듭 부탁했다. 아니, 부탁이 아닌 명령이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눈이 고민했다. 잠시 동안은 명령대로 ‘무시’ 쪽으로 결심을 굳힌 듯싶었다. 그러나 현관 벨은 여전히 날카롭게, 거듭거듭 울리고 있었다. 웬만해선 단념하지 않을 듯 제법 끈질긴 기세였다.

“……아, 맞다. 반상회…….”

잔뜩 가라앉은 허스키가 마침내 힘겹게 말을 토했다. 그것으로, 애정과 근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번민은 끝이 났다. 연인의 목소리로 떨어진 생뚱맞은 단어를 통해 현실이 완벽하게 끼어들었던 것이다.

“……바, 반상회 참석하라고 왔을 거야…… 며칠 전에 성북1동에서 연쇄 강도 사건 있었잖아. 그거 땜에 경찰들이 와서 안전 지침 강의한다고 그랬거든.”

기진맥진 겨우겨우 토해내는 목소리가 안쓰러웠다. 반상회 따위라니, 기도 안 차서 다시금 무시하라는 명령을 내리려는데, 강도 사건이란 한 마디에 도로 침묵했다. 강도 사건이라니. 그렇다면 ‘반상회 따위’가 아니었다. 연인의 안전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굳이 직접 참석까진 않더라도 안전 지침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아마 반장일 거야. 아파서 참석 못 한다고 그러고…… 나중에 배포된 안전 지침만 찾으러 가겠다고 하지, 뭐.”

마지못해 떨어지는 기색이 역력한 연인이 일어나 앉으며 덧붙였다. 간발의 차로 따라 일어나 연인의 어깨를 팔 안에 보듬었다. 땀에 젖은 몸이 한기를 느끼는지 여윈 어깨가 살짝 떨리는 게 감지되었다. ‘제가 나갈게요. 그냥 인터폰으로 말해두면 되죠?’ 떠는 몸도, 한눈에도 기진맥진한 느린 몸짓도 모두 안쓰러워 그렇게 묻자 연인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로 젓는다. ‘……내 목소리 아는데,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그냥 내가 돌려보내는 게 나아, 위야.’ 덧붙인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보다 확실하게 주의를 들어줘야 할 이는 이곳에 상주하는 연인일 터였다. 막상 팔 안에 들어온 몸뚱이가 아쉬워 가만히 있자니, 잠시 잠잠했던 현관 벨이 또 울리기 시작했다. 움찔 몸을 떤 연인이 자신으로부터 황급히 떨어지며 침대 아래 던져져 있던 바스 가운을 주워 입었다.

“……너도 이제 집에 갈 준비 해, 위야. 벌써 어두워지고 있잖아. 저녁 전까진 꼭 들어가야지.”

망할. 확실히 현실이 끼어든 게 맞다. 연인의 어조엔 몇 분 전 침대 위에서의 그것과는 달리 확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어떻게든 자신을 집에 돌려보내려 하고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침실 밖으로 서둘러 걸어 나가는 연인의 뒤태를 응시하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욕설을 거듭 뇌까렸다. 하긴 이제쯤은 움직여야만 한다. 저녁 식사 시간까지도 늦는다면 휘 녀석은 그야말로 완전히 삐져버릴 것이다.

반쯤은 체념한 상태로 침대에 도로 몸을 누인다. 결심을 굳혔건만 그래도 여전히 혈관 속을 떠도는 질긴 미련 탓이다. 자고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이대로 연인을 품에 안고 함께 잠이 들 수만 있다면……. 두 사람의 온갖 체취와 체액 범벅인 더럽혀진 침대에 엎드린 채 힘껏 폐부를 부풀렸다. 사랑스러운 연인의 살 냄새가 선명하게 맡아진다. 물론 그 외, 온갖 종류의 체액 냄새도. 자신의 냄새 역시 함께 섞여 들어가 있을 것이다. 불결함에 대한 찝찝한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그저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만큼 감각을 달뜨게 만드는 극상의 페로몬이라 여길 뿐이다. 두 사람의 것이 모여 완벽한 하나를 이룬다. 저도 모르게 비죽 흥겨운 웃음이 샌다.

쿵. 쿵. 쿵. 쿵…….

바닥을 미세하게 울리는 거친 발걸음 소리에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침실로 점점 가까워지는 울림은 절대로 연인의 발자국 소리가 아니었다. 한쪽 다리를 약간 끄는 듯이 걷는 연인은 저토록 거칠게 울림 있는 소리를 내지도 못한다. 단숨에 알아챈 본능이 전신을 순식간에 칼처럼 긴장시켰다. 전광석화보다 빠르게 하반신에 시트를 감은 채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침실 문이 벌컥 열린 것도 그와 거의 동시였다.

위협을 감지한 전투 본능이 꼭지까지 살기를 끌어올렸다. 가장 효과적일 공격 자세를 취한 채 문 앞에 선 침입자의 얼굴로 시선을 보냈다.

“……형……?”

느닷없이 망치로 뒤통수를 가격당했다 해도 이렇게까지 혼비백산하진 못했을 것이다. 순식간에 꼭지까지 솟구쳤던 살기는 그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하얗게 기화해버렸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이 굳어들었다. 허리춤에 휘감았던 시트조차 놓쳐버렸다는 사실도, 당장은 깨닫지 못했다. 강이 형의 부고를 전해 들었을 때 이래로, 이토록이나 자신을 경악케 한 충격도 달리 없었으리라.

“……이…… 이, 이, 이…… 이 무신…… 니…… 니가…….”

까맣게 탄 자그마한 얼굴이 보였다.

낡은 감색 공장 점퍼에 쥐색 면바지를 받쳐 입은 작고 왜소한 몸집도 보였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에, 너무나 익숙한 몸집이었다. 자신만큼 경악했을 얼굴은 핏기를 잃은 채 누렇게 변해 있었다. 부들부들 심하게 떨리고 있는 입술도 시체라고 착각할 만큼 거의 잿빛이었다. 소처럼 맑은 까만 동공은 휘둥그레진 채 자신의 나신 곳곳에 자리한 붉은 섹스 마킹들을 샅샅이 더듬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듯, 아니,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새까만 동공은 충격과 혐오와 고통과 분노와 슬픔 등등, 온갖 격렬한 감정들로 폭풍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하느님 맙소사…… 하느님…… 윤열이 형이었다!!!!!

“……나…… 나, 나, 나, 남창…… 남창질이라고…… 사, 사, 사…… 사내새끼…… 헌테꺼정 몸띵이를 판다고…… 휘…… 휘야가 썩은 통시깐 거튼 소릴 혀쌌킬레…… 나가 그눔 싸대기를 떼렜는디…… 속에서 천불이 솟아 더는 못 참고…… 그리 북새질을 쳐쌌고 왔는디…… 그, 그눔아를…… 또 고러크름 거짓부렁을 혀싸면 대갱이를 팍 조사뿌린다고…… 나넌…… 나가…… 위야가…… 그럴 성아가 아니라고…….”

꺼져가는 듯 힘겨운 목소리였다. 헐떡거리는 불안정한 목소리에서도, 넋이 나간 듯 표표한 어조에서도, 도저히 숨겨지지 않는 사무치는 고통이 생살처럼 터져 나왔다. 온갖 더러운 흔적들로 가득한 몸뚱이로부터 다시금 자신의 눈동자로 되돌아온 형의 시선이 절박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말해. 절대 아니라고 말해. 다른 사정이 있는 거라고, 이건 오해라고, 그저 오해일 뿐이라고 변명을 해. 그럼 믿어줄게. 네가 아니라고만 하면 그냥 믿을게, 위야……. 처절하고 비통한 애원이었다. 당장 목숨을 팔아서라도 들어주고픈 끔찍한 동통이었다.

“……아니라고 혔는디…… 나가 아니라고 혔어야…… 시방 어서 그 지랄 거튼 소릴 하능가 혀고…… 거짓깔 말어야…… 그눔의 쌔바닥을 빼서 때기를 처불은다 싸코…… 안 그냐……? 시상에, 위야…… 안 그냐……?”

이대로 전신이 폭삭 부서져 가루가 되고 싶다고, 가능하기만 하다면, 무얼 걸어도 좋으니까 그렇게 당장 소멸하고 싶다고 멍하니 되뇌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채로 사지가 결박된 듯 모든 것이 정지했다. 생각도 정지했고, 움직임도 정지했고, 세상도 정지했다. 끔찍했다. 온 넋이 부서져버리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에 정말로 돌아버리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아니, 정말 돌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미쳐버린 건지도 모른다. 세상이 미친 건지, 자신이 미친 건지 확실치는 않지만.

“아야, 이 오살헐 눔아아아아!!!!!!”

멈춰버린 세상에서 형의 시뻘게진 눈시울만 보였다. 당장 쳐 죽일 기세로 달려들고 있는 형의 새까만 얼굴만 보였다. 하느님……. 뭐든, 어떻게든 해야만 하는데 도통 움직일 수가 없다.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형의 매서운 주먹이 얼굴을 강타한다. 눈앞에서 불덩이가 터졌다. 턱뼈가 부서지는 듯한 격통과 함께 몸이 방바닥 위로 나뒹굴었다. 사정없이 패대기쳐진 충격을 채 가누기도 전에 형의 발길질이 사방에서 작열한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속사포처럼 전신을 강타한다. 아픔을 피해 몸을 웅크려보려고도 하지만 기왕에 얼음땡이 돼버린 몸은 좀처럼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흡사 전신에 독한 마비 약을 주사 맞은 것만 같다. 뻣뻣하게 굳어진 근육이며 뼈들이 맷돌에 갈리는 것처럼 아프고, 가슴속은 갈가리 찢어지는 듯 아프다는 감각만 간신히 자각하고 있을 뿐이다. 어디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조차 잘 구분이 안 간다. 빨리 다 아프고 편해지고 싶다. 그냥 이대로 형에게 맞아 죽는대도 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다.

―……아아, 강이 형이다. 하느님,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지? 강이 형이랑 한가지다. 정말 조금도 봐주질 않네. 정말로 때려죽일 기세로구나…….

그냥 그런 멍한 생각만 흘러간다. 역시 강이 형은 완전히 자신을 떠나간 게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 죽도록 고통스러우면서도, 그래도 ‘강이 형과 함께다! 윤열이 형과 함께로구나!’ 하는 벅찬 전율 같은 것. 혼자가 아니야. 나 혼자가 아니야. 혼자서만 동생들을 책임지고 있는 게 아니야. 나 혼자만 힘겹게 세상과 맞서고 있는 게 아니야. 강이 형이 있어. 윤열이 형이 있어. 절대로 나 혼자 고독한 게 아니야…….

“이 부랄꼽팽이를 댕겅 짤라 불놈의 개새끼!!! 워째 이래쌓냐?!!! 조단조단 말얼 혀보랑께?!!! 대갱이를 팍 조사뿌릴텡께?!!! 싸게싸게 씨불이지 못혀?!!!!! 요 눔!!! 요 징헌 눔!!! 요 썩는 놈에 통시깐거튼 눔아!!! 이 무신 짓이여?!!! 이 무신 짓이여?!!! 강이가!!!! 강이가!!! 나가!!! 나가!!! 시상에, 강이 상호럴 워쩌크름 보라고!!! 워쩌크름 보라고!!! 맴을, 이 성 맴을 니눔이 요로크름 찢어놔싸야!!! 아이, 문딩아!!! 아이, 이 썩을 눔아!!! 이 오살헐 눔아!!! 니는 속 쓸개도 없어야?!!! 남창이라니, 남창이라니이이?!!! 니, 간뎅이에 부황 들었나?!!! 시상에 공것이 어디 있간디!!! 차라리 나자빠져 뒈져 뿔지!!! 언제부텀?!!! 언제부텀 했어야?!!! 언제부텀 더러운 갈보 짓을 한 겨?!!! 강이가…… 니 성이 갈보짓을 월매나 몰악시럽게 생각혔는지 니가 알어, 몰러?!!!!! 알제?!!! 알제?!!! 어이 이 오살 급살 당창헐 눔아얏?!!!!!”

“……그, 그, 그, 그만하세요!!!!! 유, 윤열 씨, 제발 그만하세요!!!!!! 제, 제, 제가 잘못했어요!!!!! 제 잘못입니다!!!!! 위야는 잘못 없어요!!!!!! 제가, 제가 위야를 유혹했습니다!!!!! 제가 꼬셨습니다!!!!! 휘가 감옥에 갈까 봐 걱정으로 어쩔 줄 모르는 위야를 제가 꼬신 겁니다!!!!! 제 돈으로…… 제가 돈을 대주겠다고 더러운 제안을 한 겁니다!!!!! 아직 미성년자인 애를…… 동생이 걱정돼서 어쩔 줄 모르는 미성년자를 제가 타락시켰어요!!! 예, 그런 겁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어린앨 돈으로 사는 쳐 죽일 더러운 호모 새끼가 접니다!!! 그, 그러니…… 다 제 잘못이니 절 때리세요!!! 차라리 절 때리세요, 윤열 씨!!!!!”

소나기처럼 온몸으로 떨어지던 발길질이 겨우 멈췄다. 새로운 고통이 더해지진 않았으나, 기왕에 부서지고 찢긴 상흔이 주는 통증은 여전해서 당장은 정신을 곧추세우기가 불가능했다. 코와 입술 언저리가 근질거려 무심코 문지르며 눈을 부릅떴다. 코피가 터진 건지, 문질러진 손등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차츰차츰 스러지는 전신의 통증 덕분에, 하얗게 탈색됐던 의식도 조금 돌아왔다. 어느새 공처럼 말려 있던 몸을 펴며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시야가 확보되자마자 귀청도 트였다. 무의미하게 붕붕거리던 것 같던 이명이 선명한 의미를 띤 채 뇌리로 파고들었다.

“……어, 어,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교, 교생 실습하러 위야 다니던 고등학교에 갔다가…… 그, 그러다가 반했습니다!!! 하, 하, 한눈에 반해서…… 미쳐서…… 네, 제가 미친놈입니다!!! 환장한 놈입니다!!! 환장을 했습니다!!! 어린 소년의 몸에 눈이 뒤집혀서…… 뒤집혀서…… 수단 방법 안 가리고 꼬셨습니다!!! 돈이 궁하다는 거 알고 이용했습니다!!! 그래요!!! 제가 쳐 죽일 놈입니다!!!!! 소돔의 씨…… 더러운 짐승 새끼입니다!!! 그러니 절 죽이세요!!! 차라리 절 죽이세요!!! 절 패 죽이세요!!!!!”

쉬어터진 가느다란 목소리가 온몸의 기운을 필사적으로 쥐어짜 내듯 절규하고 있었다. 얼음처럼 굳어졌던 몸이 그나마 반응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막이 낀 것처럼 뿌연 시야가 그리운 소리를 따라 이동했다. 채 1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서 소중한 이가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었다. 형의 바짓가랑이를 필사적으로 움켜쥔 채 와들와들 떨고 있는 가는 몸이 보였다. 흐트러진 바스 가운 틈으로 점점이 키스마크가 찍힌 뒷목덜미와 한쪽 어깨가 보였다. 앙상한 장딴지와 발목들도 보였다. 땀에 젖은 채 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이 카펫 바닥까지 흘러내려와 있었다. 얼굴을 통째로 바닥에 꼬라박고 있는 때문이었다. 경련하듯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몸이 마치 땅이라도 파고 숨어들려고 기를 쓰는 두더지 같았다. 비참하고 초라한 버러지처럼 소중한 이가 그렇게 형의 자비를 구걸하고 있었다.

극도로 사나워진 형의 기세라면 충분히 뿌리칠 수 있을 법한데도, 형은 꼼짝도 않고 선 채 그저 연인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자신을 팰 때처럼 눈빛은 여전히 흉흉한 기세였지만 그만큼 냉정한 이지가 형의 표정에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형을 멈추게 하고 이지를 되찾게 해준 이는 역시 연인이었던가 보았다. 형의 움직임이 멈추고도 한참 동안 더 절규를 계속하던 연인이 형처럼 얼음땡이 된 채 심하게 몸을 떨어댔다. 마치 생사여탈권을 지닌 왕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사형 집행 직전의 노예와 같은 모양새였다. 가슴이 찢어발겨지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물론 처음과는 극히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다른 상대 때문이었다.

“……하지 마세요, 선생님…….”

연인만큼 쉬어 터진 목소리가 절로 기어 나왔다. 권위 따위 도저히 부릴 군번이 아닌데도 목소리엔 연인을 향한 단단한 의지가 저절로 실리고 있었다. 다시금 흉흉한 살기를 드러내며 움찔 어깨를 떠는 형이 보였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연인이 받는 고통은 그 몇 천 배는 증폭돼서 자신에게로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었으니까.

“……그러지 마세요. 일어나세요.”

절대적인 지배의 아우라 때문이었을까? 온통 눈물범벅인 연인의 얼굴이 지옥 밑바닥으로부터 기어 올라왔다. 고통이 하이에나처럼 씹어 삼키고 지나간 얼굴이 거기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하이에나가 다시금 이빨을 갈며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게 보였다. ‘저는 괜찮아요. 그러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괜찮아요…….’ 몇 번이나 거듭거듭 눈빛으로 다독였다. 최면을 걸었다. 아프지 말라고. 겁먹지 말라고. 다른 이에겐 쥐뿔도 효과 없을 최면이지만, 눈앞의 연인에게 있어 자신의 의지는 언제 어느 때라도 절대적인 지상 명령이란 것을 안다. 입맛을 다시던 고통의 하이에나가 스러진다. 다 죽어가던 빈사 상태의 겁쟁이가 비로소 숨을 쉬는 게 보인다. 여전히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줄줄 눈물을 쏟고 있지만, 귀여운 까만 동공에 들어차는 것은 실낱같은 생기였다. 희망이었다.

“……3년 전에 저희를 도와주셨던 까닭도 그래서였습니까?”

냉담하고 낯선 목소리가 회초리처럼 쏟아졌다. 연인이 먼저 얻어맞아 나가떨어졌고, 이내 자신도 소스라쳤다.

“……보성의 부모님께선 언제든 꼭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제가 안기부서 고문당해 죽어 자빠지지 않은 건 전부 다 장 선생님 덕분이라고, 틈만 나면 그렇게 장 선생님 말씀을 하셨더랬지요. 저나 부모님껜 생명의 은인이라고요. 한데 더 이상 은혜 갚을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유…… 윤…… 윤열 씨…….”

“……제 소중한 동생의 몸뚱이를 대가로 지불할 바에야 차라리 그들에게 고문당해 죽는 편이 더 나았을 겁니다.”

“형!!!”

“……유…… 윤열 씨…….”

“옷 입어.”

“……형…….”

“삐대쌓지 말고 퍼뜩퍼뜩 입지 모더야?!!!!!”

흉흉해진 일갈이 재차 떨어졌다. 더 이상은 상대하기 싫다는 듯 형은 그 한마디를 끝으로 침실을 나갔다. 자신은 물론,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는 연인에게도 일절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얼굴만 든 채 자신과 형을 번갈아 바라보던 연인의 고개가 다시금 바닥에 떨어졌다. 엎드린 채 여전히 비에 젖은 참새처럼 떨고 있는 가냘픈 몸이 비수처럼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다가가 품에 꼭 껴안아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계제가 아니란 것도 알았다.

“……괘…… 괜찮니……?”

꺼져갈 듯 가는 목소리였다. 부스럭거리며 옷을 주워 입는 자신에게 던져진 물음이었다. 고통과 근심으로 제정신이 아닐 텐데도 여전히 자신의 안위부터 살피는 연인이었다. 심장이 뭉클 하고 속울음을 울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도무지 현실감이 없는 악몽 같았다. 그토록 완벽한 천국에 있다가, 알몸으로 북풍한설의 생지옥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아프고 춥기만 한데, 당장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쩐지 아직도 천국에 있는 것만 같았다. 힘 있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만 하면 연인을 품에 안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코랑 입술에…… 피…… 피 많이 나…… 사, 사방이 피멍이야…….”

촛불처럼 가는 목소리가 재차 되풀이했다. 여전히 카펫 바닥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어 시선을 불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자신이 그나마 한 모금 떠 넘겨준 생기를 아직 품고 있는지, 다시금 잔뜩 겁에 질려 절망하진 않았는지, 몹시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접기로 했다. 연인에 대한 것은 일단 모두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이 현명했다. 지독하게 상처 입은 형을 위해서도, 또 같은 이유로 더욱 상처 입었을 연인을 위해서도.

“……괜찮습니다. 어디 부러진 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코피도 이제 그쳤는걸요.”

최대한 간결하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대수롭지 않게, 연인이 무서워하지 않도록.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건 속옷과 바스 가운뿐이라 벽장으로 가서 새 옷을 꺼내 입었다. 고척동 집에 있던 옷의 태반이 이곳으로 옮겨와 있다. 아니, 고척동 집보다도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야말로 동거의 증거 같아서 흐릿하게 조소가 흘러나왔다. 정말로 환장을 했지. 이토록 미쳤는데, 사달이 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애초에 다혈질인 휘 놈이 형을 들먹이며 협박을 해댈 때부터 예상했어야 했다. 좀 더 자제를 했어야만 했다. 물론, 미리 알았다고 해도 자제가 됐을지는 미지수였지만.

팬티 위에 청바지와 티셔츠를 걸치고 그 위에 다시 후드재킷을 걸쳐 입었다. 땀이며 침이며 질펀하게 얼룩져 있는 정액 등등, 섹스의 흔적이 낭자한 몸 위에 그대로 옷을 껴입은 건데도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 정말로 자신의 결벽증이 의심스럽기만 하다. 하긴 이건 단지 연인에게만 국한된 느슨함이란 걸 머리 한구석은 알고 있다. 연인과 함께한 그 어떤 것도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더럽기는커녕 그 어떤 순결한 것들보다도 더 마음이 끌리는 애틋함이다.

“……곧 전화 드리겠습니다.”

달리 해줄 말이 없어 그것으로 작별 인사를 주었다. 더 말을 보탰다간 그대로 목이 메는 바람에 감정이 줄줄 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연인보다도 더 참담한 심정이라는 걸, 연인보다 더 겁에 질려 있다는 걸, 연인보다 더 지금 이 순간을 함께 견디고 또 위로받고 싶다는 걸, 그리고 그 모든 이유들이 연인을 사랑해서라는 걸, 전부 다 줄줄이 까발릴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연인은 무릎 꿇고 엎드린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없었다. 석고대죄를 하는 죄인보다도 더 초라하고 가련한 몰골이었다. 가슴이 쫙쫙 찢어지는 바람에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 연인을 외면한 채 침실을 나왔다.

문소리가 나자 현관 앞에 서 있던 형이 돌아본다. 이미 신발까지 고쳐 신은 모양새가 가슴을 친다. 단 1분 1초도 더 이상은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였다. 자신에겐 그 어떤 곳보다도 더 희열을 주는 낙원인데,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에겐 마치 지독한 악취라도 풍기는 더러운 매음굴로 보이는 모양이다. 뭐, 일견 틀린 말은 아닐 게다. 표면적으로 연인은 자신의 몸을 돈으로 사고 있으며, 자신 또한 연인과 몸을 섞는 내내 풍족한 생활비를 꼬박꼬박 받아왔으니까. 그래. 매음이었다.

싸게 나와야. 힐끗 일별하는 것으로 형이 명령했다. 여전히 서슬이 형형한 창백한 얼굴이었다. 처음의 충격은 다스린 모양인지, 더 이상은 떨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 강한 형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세상에서 가장 강한 형이었다. 육체는 자신이 한 손으로라도 부서뜨릴 수 있을 만큼 약하지만, 저 지극히 고고하게 버티고 있는 정신의 경지는 감히 자신으로선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대인의 영역이란 걸 안다. 그래. 그러니 괜찮을 거다. 형은 이겨낼 거다. 이겨낼 수 있을 거다. 자신의 그 어떤 지저분한 타락도.

재게 걷는 형을 따라 빌라를 나왔다. 묵묵히 최초의 길 끝에 도달한 형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암디 조용헌 이약 헐 곳으러 가야. 우새스럽지(창피하지) 안 헌 곳이 어디여.’ 사방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형이 물어왔다. 고급스러운 카페며 레스토랑들은 숱하게 널린 동네지만 한참은 더 걸어야 하고, 또 그런 곳에서 형의 질책과 분노를 받아내긴 싫었다. 5분쯤 떨어진 위치에 있는 작은 공원 쪽으로 형을 이끌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형에게 맞은 곳이 욱신거려 신음이 샜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티를 내면 형은 후일 더 괴로워할 것이다.

5분 만에 도착한 곳은, 공원이라기보단 그저 나무 좀 심어놓고 벤치 십여 개와 정글짐, 그리고 시소 등등 놀이기구가 몇 개 설치된 어린이 놀이터였다. 지나다니며 볼 때보다도 훨씬 더 작게 생각되는 공간엔 사람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날이 저물고 있어 어둑어둑한데다 아직 4월 초입이라 날씨조차 제법 쌀쌀한 때문이리라. 역시 최적의 선택이었다. 몸도 마음도, 형에게 좀 더 얻어맞을 장소론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전부 얼마여?”

공원 안쪽으로 좀 더 걸어 들어가자마자 뒤따라오던 형이 일갈했다. 서릿발처럼 한도 끝도 없이 냉랭한 어조였다. 이다지도 화가 난 형을 보는 것도 강이 형의 죽음 이래로 처음이로구나 싶었다.

“장 선상헌티 빚진 돈 말이여.”

무슨 뜻인지는 처음부터 알아들었지만 당장은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빚인 걸까? 멍청이가 돼버린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다. 그렇구나. 그게 빚일 수도 있구나. 언젠가 자신이 능력이 되면 갚을 수도 있는 빚. 그렇다면 자신은 연인에게 몸을 판 것이 아닌 게 된다. 이미 발가벗겨진 진실 그대로, 자신은 그저 지난 4년 동안 연인과 사랑을 나눈 것뿐이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역시 자신의 형이라고, 내 소중한 형이 틀림없다고, 새삼 형에 대한 벅찬 애정이 솟구쳤다.

“……휘…… 합의금 8천까지 합하면 1억9천만 원쯤 됩니다.”

수치로 벌게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몸을 돌려 형을 향하긴 했지만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트린 채였다.

“……보성 땅 닥닥 긁어 팔어묵어도 택도 읍쓸 액수로구만.”

하얗게 변했던 머릿속이 이번엔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보성 부모님의 시커멓게 탄 주름투성이 얼굴들이 선연하게 시야를 스쳐갔다. 입안의 침이 바짝바짝 말라들어갔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정말로 땅이라도 팔 것이다. 그럴 형이요, 그럴 부모님들이었다. 세상에, 그 땅이 어떤 땅인데, 부모님들께 그 땅이 어떤 땅인데 그리 놔두란 말인가.

“……빚 아닙니다…….”

마른침을 꿀꺽 집어삼킨 후 가까스로 목소리를 이끌어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거듭 말을 토해내기 위해 기를 썼다.

“……아닙니다. 이미 제 몸으로 대가를 지불한 겁니다. 결코 갚을 필요 없는 돈입니다.”

“이이…… 이눔의 자슥!!! 주둥아리를 확 지져뿔까?!!!”

“빚 아닙니다!!! 죽어도 아닙니다!!! 네, 저 갈보짓 했습니다!!! 선생님 상대로 몸 팔았습니다!!! 얼마나 해댔는지 형은 모르시죠?!!! 그 돈이 하나도 안 비싸게 느껴질 정도로 실컷 했습니다!!! 물고 빨고 박고, 4년 내내 선생님과 그 짓 한 거밖에 기억에 없습니다!!! 절대로 빚 아닙니다!!!”

“이런 염빙할 눔이 뒤져 불라고 작정을 했어야?!!!!!”

잦아들었던 형의 분노가 또다시 폭발했다. 인정사정없이 달려든 주먹질에 연타로 얻어맞고 그대로 땅바닥을 굴렀다. 그 위로 떨어진 발길질과 주먹질은 더더욱 그악스러웠다. 공처럼 몸을 웅크린 채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심장의 아픔은 육체 위로 떨어지는 아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때리는 형의 고통 또한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그 땅이 어떤 땅인데 그리 허무하게 날려버린단 말이냐. 자신들의 가난만으로도 지긋지긋한데, 저 보기만 해도 짠한 보성의 부모님들까지 빚쟁이들의 먹이로 던져줄 수는 없었다. 연인의 돈을 갚는 건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반드시 성공해서 자신이 버린 연인을 찾아갈 것이다. 아니, 굳이 찾아가지 않더라도 돈을 전해줄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그저 기다리면 된다. 인내하면 된다. 자신은 인내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는가. 자신 있었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었다. 자신의 명예는, 아니, 연인의 명예는, 아니, 아니, 우리들의 찬란했던 ‘첫사랑’은 그때나 가서야 세상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매춘이 아니었다고, 절대로 갈보짓이 아니었다고, 남창과 고객이 아니라 그저 첫사랑에 빠진 연인들이었을 뿐이라고, 세상에다 대고 떳떳하게 선언할 수 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구둣발 앞코에 스쳐 눈가도 찢어지고, 코도 입술도 다시 터져 진득하니 흘러내리고 있는 피 냄새로 사방이 진동을 했다. 옷 위로 맞아서 그런지 몸 위로 떨어지는 통증은 그럭저럭 처음보단 나았지만 그도 시간이 지나니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졌다. 언제까지 이 고통이 계속될까, 속울음을 참으며 뇌까리는데 다행히 형의 발길질이 점차 느슨해지고 있었다. 점점 더 힘이 떨어지는 탓일 것이다. 다시 몇 십 초쯤 흘렀을까, 마침내 나가떨어진 형이 웅크린 자신의 앞에 널브러졌다. 심하게 헐떡이는 숨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렸다. 혹시라도 기절해버린 건 아닐까 싶어 고개를 들고 형을 살폈다. 애초부터 체력이 바닥인 형이었다. 그에 더해 고문 후유증이라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형의 속은 이미 골병이 들 대로 든 상태였다. 몸은 20대지만 실제 속은 70대 노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맞는 자신보다도 형 쪽이 더 대미지가 클지도 모를 일이었다. 양팔을 뒤로 뻗친 채 다리를 바닥에 뻗고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형이 보였다. 힘에 겨운 듯 보였지만, 다행히 상태가 아주 나쁜 것 같진 않았다. 적어도 육체적인 면으로는.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형의 얼굴은 땀과 눈물범벅이었다.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 형의 강함을 알고 있는 속내는 더더욱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못 볼 것을 본 것마냥 움찔해선 도로 시선을 내렸다. 역시 육체로 떨어지는 자신의 아픔 따위 형의 아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내내 계속되고 있는 저린 듯한 통증에, 가슴 언저리를 움켜쥐곤 공처럼 깊이깊이 몸을 웅크렸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당장 형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뇌까리는 것도 한가지였다.

“……그려. 그거이 빚은 아이라 혔응게 그긴 그랗다고 치자. 인자 야그가 달라졌응게 그리 되먼 헤어져야 헐 것이 아니드라고?”

흠칫.

“서울대도 디갔응게 과외 겉은 거도 돈 솔찬허시 안 나오겄냐? 그라고 나도 그간에 일허고, 서로 쪼깐씩만 보태먼 홀릉할릉 살 만헐 것이여. ……그랑깨 헤어질 거제? 장 선상허고 말이시.”

“…….”

“헤어질 거제?”

“…….”

“워째 말을 못 혀?!!! 나눔 속 타라고 역부러 비비 트는 거시여?!!!”

“…….”

“장 선상허고 헤어질 거제?”

“…….”

사방이 짙은 땅거미로 가득했다.

가로등이 켜진 지도 꽤 됐고, 공원 너머 고요한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고급 빌라며 단독 주택들의 창문으로부터 아스라이 불빛들이 번져 나오고 있는 것도 꽤 오래되었다. 조만간 완벽한 어둠이 찾아오겠지만,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완벽하게 새까만 어둠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두려울 정도로 짙은 어둠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냥 새까맣고 새까맣기만 했다.

소매로 쓱쓱 얼굴을 문질러 닦은 형은 어느새 담담히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노가 가라앉은 만큼 사람을 휘어잡는 형 특유의 카리스마도 완전히 회복하고 있어서 그러마고 대꾸를 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 같았다. 더구나 굳이 형이 채근하지 않아도 기왕에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버릴 작정을 굳히고 있었다. 형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형 말마따나 이젠 더 이상 남창질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간 모아둔 돈도 있고, 과외 아르바이트 몇 탕만 뛰면 졸업할 때까지 그럭저럭 버틸 수는 있을 터다. 휘도 일단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보탤 수 있을 거고, 휘와 혜윤이의 학비 또한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다들 공부 하나는 잘하는 터라 4년제 장학금도 문제없을 실력이었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대학에 들어간 시점부터 남창질은 이제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을. 남창질을 빌미로 한 연인과의 관계도 이제 넉 달이면 기한이 다한다는 것을. 그러니 그저 대꾸만 해주면 그만일 일이었다. 헤어지겠다고. 그러잖아도 이제 곧 헤어질 작정을 하고 있었다고. 그러면 형도 마음이 놓일 것이고, 자신 또한 형의 너그러운 용서를 기대하며 홀가분하게 형과 집에 돌아가면 그뿐일 터였다. 그런데도 쉬이 대답이 안 나왔다. 아니, 안 나오는 게 아니라 못 나오고 있었다. 입이 딱 붙어버린 것처럼, 목소리가 꽝꽝 얼어버린 것처럼, 단 한 마디가 토해지지 않았다. 연인과 헤어지겠노라는 그 단 한 마디가.

“헤어질 거제……?!!!!!”

담담히 가라앉았던 형의 음성이 천지를 흔드는 호통으로 변했다. 군중을 단숨에 휘어잡곤 하는 매서운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연설을 할 때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절대선(絶對善)의 호통이었다. 더 이상 분노가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형은 명령하고 있었다. 따르지 않으면 그대로 죽을 것 같은, 아니, 완벽하게 그 존재조차 부정당할 것만 같은 준엄한 절대 명령이었다. 온몸이 벌벌 떨려왔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두들겨 맞을 때도 꿈쩍 않던 공포가 전신을 사로잡았다. 당장이라도 대답하라고 공포에 질린 몸이 종용했다. 물론, 그럼에도 대꾸는 여전히 안 나왔다. 내면의 무언가가 맹렬히 반항하고 있었다. 대답하면 끝이다. 끝장이다. 대꾸해버리고 나면, 그때야말로 정말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대충 어떻게’라든가, ‘헤어질 때가 되면 자연스레 헤어지면 되는 거겠지’ 따위가 아니었다. 그 어떤 변명도, 미적거림도 절대 용납이 안 된다. 그러니 대답하면 안 돼. 대답하면 끝이야. 종말이야. 지옥이야. 지옥이 시작돼버려…….

“문위……!!!!!!”

“아직요!!!”

흠칫.

천지를 진동시킬 만한 고함 소리였다. 자신도 놀랐지만, 형은 더 놀란 것 같았다. 뒤로 기울어 있던 형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정자세를 취했다. 휘둥그레진 눈이 반항적으로 부릅뜬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긴 힘이며 기세에서 형의 권위에 조금도 밀리지 않는 어조였으니 형이 놀라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형이 받은 충격도, 상처도, 자신의 미래도, 혹은 동생들 걱정조차도…… 그 어떤 것도 말끔히 사라졌다. 그저 연인과의 이별만이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더 이상 미룰 수도 없고 미뤄지지도 않을 연인과의 이별만.

하느님, 비로소 실감이 되고 있었다. 형의 일갈을 통해, 겨우겨우 자각했다. 자신은 원치 않고 있다. 절대로 이별 따윈 상상조차 못 할 만큼, 자신은 연인과의 이별을 고려조차 하질 않고 있었다. 말이 이별한다, 이별할 생각이다, 툭하면 그렇게 스스로를 향해 뇌까리곤 했지만, 그저 말뿐이었다는 걸,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했다는 걸, 비로소 자각한 것이다.

“……위야…… 니……?”

“아직요!!! 아직이요!!! 아직 안 돼요!!! 넉 달 남았으니까 아직 못 헤어져요!!! 헤어질 수 없어요!!!”

“이, 이눔아가…….”

“아니,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제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데 누가 뭐라겠어요?!!! 안 그래요, 형?!!! 아무리 형이라도 이건 제가 결정해야 하는 일 아닌가요?!!! 제가 시작했으니 제가 끝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전 아직 끝내고 싶지 않거든요?!!! 선생님이랑 아직은 더 할 게 많이 남았거든요?!!! 그러니 못 헤어져요!!! 싫어요!!! 죽어도 못 해요!!! 절대 못 해요!!! 안 해요!!!”

“……위…… 위야…….”

“넉 달만 더 지나면 안 그래도 버릴 생각이었어요!!! 저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잔인하게 차버릴 생각도 했어요!!! 아니, 아직도 해요!!! 매일 밤마다, 어떻게 하면 제게 대한 미련을 잘라내버릴 수 있게 만들까, 신이 나서 궁리하곤 해요!!! 마주 바라볼 때도 하고, 키스 할 때도 하고, 섹스 할 때는 더더 많이 해요!!! 그 사람 몸 안에 좋아라 물건을 박은 채 이렇게 좋은데 어떻게 버리지?!!! 어떻게 하면 쉽게 버릴 수 있을까?!!! 열심히 생각해요!!! 근데도 생각이 안 나요!!! 생각하기조차 싫어요!!! 아파!!! 온몸이 찢겨나가는 것처럼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미쳐요!!! 그 사람 버릴 생각만 하면 정신이 홱 돌아버리는 것만 같아요!!! 그래서 생각을 못 해요!!! 생각이 안 나요!!! 어떻게 하면 버릴 수 있는지, 도저히 생각을 못 하겠어!!! 그러니까 못 버려요!!! 아직은 못 해요!!! 안 돼요!!! 절대 안 돼……!!!!!”

전 존재를 고스란히 꿰뚫는 거울처럼 맑은 형의 눈동자가 자신을 헤집고 있었다. 일체의 위선도, 일체의 거짓도 발을 못 붙이게끔 하는 맑디맑은 눈빛이었다. ‘절대선’은 ‘절대공포’와 다름이 없었다. 기왕에 심하게 떨리던 몸은 아예 경련을 일으키는 것마냥 격하게 펄떡거리고 있었다. 휘둥그레졌던 눈이 경악으로, 그리고 다시 분노로, 또다시 경악했다간 도로 분노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슬픔을 함께 잉태한 커다란 고통으로 안착했다. 형이 본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듯, 몇 번이나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바람이 불었다.

서늘한 밤의 한기를 품은 뼛속까지 시리게끔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니 이 떨림은 바람 때문일 터였다. 이 두려움도 바람 때문일 터였다. 자신처럼 할 말을 잊은 듯한 형의 몸 역시 다시금 떨리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아무렴. 형까지 떨 정도인데 자신은 오죽할까 보냐 싶었다. 그러나 외면하지 않았다. 두려워서 죽을 것 같은데도, 절대 외면하지 않았다. 외면하면 지는 거였다. 형의 의지에 떠밀려 연인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럴 수는 없다. 절대로 못 헤어진다. 안 헤어진다. 아직 할 게 많다. 해주고픈 것도 많다. 2년을 넘기면 어떤가. 굳이 2년이 아니라고 한들 누가 뭐랄 것인가. 내 맘이었다. 아직 질리지 않았다. 아직 버릴 때가 아니었다. 나중에 그 언젠가, 진짜 질리게 되면 그때 버리면 되는 거였다. 안 그런가? 다 내가 시작하지 않았나? 그러니 끝내는 것도 나 자신이 돼야 하지 않는가.

몇 분인지 몇 십 초인지의 시간이 흘러갔다. 영겁처럼도 길게 느껴졌다. 그토록 기나긴 전투였다. 고통이었다. 형도 자신도 더 이상 회복되기 힘들 만큼 처참하게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장 선상헌티 사과럴 혀야 쓰겄구만…….”

마침내 형이 항복을 선언했다. 지친 듯 슬픈 목소리였다.

“……미성년자를 홀린 것이 아이라 갈보 눔 꾐에 넘어가 심 주고 몸띵이 주고, 쉬 띠치지도 못허고서 경을 친 거였구만이시.”

“…….”

“사랑허냐? 장 선상을 사랑혀?”

“…….”

“……혀서 그라고 아파쌓냐? 아파싸서 환장허겄어? 지랄발광 혀서 천지사방에 꽥꽥 멱따는 소리럴 질러대는 도야지맹키로?”

“…….”

“오살헐 눔.”

“…….”

“오살, 급살, 당창헐 눔.”

“…….”

“아니제. 그거시 사랑은 아니제.”

“…….”

“……니가 사람에 새끼로 났으먼 그리 혀먼 안 되제. 사람 하날 갖고 그지 행투 고약허게 해감서 통친 작대기맹키로 병신 팔푼이 취급을 혀선 안 되제. 장 선상을 사랑헌다먼 더 그리혀먼 안 되제. 절대 안 되제. 이 썩을 눔아. 염빙할 눔아. 참말로 니 그라고 허고 싶든? 대그빡에 똥배끼 안 든 짐승 새끼맹키로?”

“…….”

“사내먼 어떻고, 계집이먼 어떻나. 기왕 뽀작 맴이 가는 것을 워쩌겄어야. 베러불라먼 싸게싸게 베러불고, 각시 삼을라먼 가심에 따숩게 품고 비내(비녀) 올려줘야제. 지멋대로 돼나케나 해불어싸써야 쓰간디? 그 미친 지랄 염빙 짓거리가 사랑이간디?”

“…….”

항복이 아니었나 보았다. 독기를 뺀 나머지, 그것이 공격인 줄도 모르고 마냥 좋아라 성문을 열어젖힐 수밖에 없는, 트로이의 목마처럼 치명적인 공격이었나 보았다. 슬픔이 가득한 연민의 눈이 자신을 헤집고 있었다. 영혼 곳곳을 하나도 빠짐없이 샅샅이 찌르고 지나가는 그것에 더 이상의 아집은 설 자리를 잃고 있었다. 기를 쓰고 독기를 내뿜은 채 형을 마주 노려보았지만 그도 고작 몇 초의 반항에 불과했다. 무너지고 있었다. 속속들이 다 무너지고 있었다.

역시 형이었다. 자비로우면서도 준엄한 심판에 드륵드륵, 고통이 탱크처럼 전신을 밀고 지나갔다. 가슴이 완벽하게 찢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지경으로. 사방에 조각조각 찢겨 널브러진 살점에서 피 같은 통증이 흘러나왔다. 완패였다.

흐허어어어.

기어코 비명 같은 울음이 왈칵 터져 나왔다. 놀이터가 떠나가랴 울부짖는 짐승 새끼의 비명 소리였다.

알고 있었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사랑도 뭣도 아니었다. 천하에 용서받을 길 없는 괴물의 희롱질이나 다름없었다. 형이 옳았다. 언제나 옳았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인간 말종인 자신은 상대도 안 되는 형이었다. 그런 종자였다. 강이 형도, 윤열이 형도. 애초부터 자신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비명 같은 울음은 금세 꺼이꺼이 울부짖는 대성통곡으로 변했다. 뼈를 깎는 회한이 전신을 덮쳤다. 공처럼 웅크려든 몸이 더더욱 깊숙이 쪼그라들었다. 전신이 바늘로 콕콕 찔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비로소 완벽하게 자각한 이별의 슬픔이, 고통이, 알알이 터져 나왔다. 아파서, 지독하게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고, 죽여달라고, 그 누군가에게 애원하고플 만큼 끔찍한 고통이었다.

한동안 그런 자신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형이 손을 뻗어왔다. 앙상하게 마른 거인의 손가락이 경련하듯 떨리는 등줄기며 어깨를 다정스레 쓸어주고 있었다. 그래도 제 피붙이라고, 사람 새끼도 아닌 종자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고 있었다. 애정과 연민을 주고 있었다. 그럴 가치도 없는 짐승 새끼였는데.

바람이 몹시도 차가웠다.

4월이었다.

때 이른 겨울이었다.

“에이, 씨! 또 말도 않고 끊어버리네! 어떤 새끼야, 도대체!”

휘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지 마. 전화기 망가지겠다, 오빠.” 혜윤이의 얌전한 책망 소리도 얼핏 들렸다. 그러고 보니 금요일이었던 그제도, 또 주말이었던 어젯밤에도 몇 번 휘의 똑같은 신경질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그제쯤부터라……. 그제야 마비되어 있던 뇌가 겨우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벌써 일주일이 넘었구나. 알 것 같았다. 휘나 혜윤이가 받으면 그냥 끊어버릴 수밖에 없는 수화기 너머 상대를. 이틀이거나 고작 사흘이 한계인 인내심으로 일주일이나 참았다면 그로선 꽤나 오래 견딘 것이다. 윤열이 형이랑 그 사달을 내고 사라졌으니 전화를 걸어 상황을 확인하는 일조차 겁이 났겠지. 틀림없이 지독하게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불안하고 초조한 나머지 하루 종일 전화기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모양새가 눈에 선했다. 아마도 겁에 질린 참새처럼 떨고 있겠지. 그럴 것을 알면서도 전화 한 통 걸어줄 생각은 여전히 나지 않는다. 전화를 걸어 일단 안심시켜준들 그게 그에게 얼마 동안이나 위안이 될까 싶다. 조만간 그의 심장에 비수를 꽂을 예정이다.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지옥 이상으로 그에게 고통을 주게 될 잔혹한 비수를. 일시적인 마취제를 놓아준다고 해봤자 그게 그를 위하는 일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자신이 처한 무기력증에도 한 원인이 있을 거다. 좀처럼 그에게 전화를 못 하는 이유 중에는.

다 망했다. 토대까지 폭삭 주저앉아버렸다. 도저히 일어서기 힘들 지경으로. 완전히. 폭삭. 그만큼 엉망진창이었다.

먹고, 자고, 학교 가고, 동생들을 돌보고…… 그저 관성처럼 매일의 일상을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인 자신이다. 그에게 전화를 한다는 것은 그 관성조차 깨버릴 위험이 있었다. 보나 마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분명 엄청나게 흔들릴 테지. 그렇다면 자신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어질 거다. 최소한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밥 먹자, 형. 혜윤이가 돼지고기 넣은 비지찌개 끓였다? 형 좋아하는 거잖아.”

조심스러운 휘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보니 방 안에 음식 냄새가 진동을 한다. 혜윤이의 야무진 손맛이 가미된 비지찌개며 계란말이, 그리고 총각김치가 소담스레 담긴 밥상이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동생들이 걱정할 것을 생각하면 밥상 앞에 마주 앉아야 하건만 도무지 식욕이 생기질 않는다.

“학교에서 주전부리 좀 하고 왔더니 아직 배 안 고파. 형은 공부 좀 더 하고 배고파지면 이따 차려 먹을 테니까 니들 먼저 먹어라.”

정말 공부로 바쁜 듯, 읽고 있던 해부학 원서 쪽으로 도로 시선을 가져가며 대꾸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빠져나온 시각이 저녁 7시. 동생들만큼이나 요즘 자신에게 뭘 먹이지 못해 안달하는 것 같은 동기들에게 끌려가 포장마차에서 순대와 어묵을 얻어먹었다. 동기들의 오지랖을 매정하게 떨치지 못해, 그저 마지못해 시늉만 했을 뿐이긴 하지만.

“어서들 먹어. 배 안 고파? 그러게 형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으랬잖아. 스터디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밥상 위에 수저를 놓던 중인 혜윤이도, 눈치 보듯 빤히 자신을 응시하던 휘의 표정도 좀 더 어두워졌지만 모르는 체했다. 특히나 철없는 다혈질에 어리광쟁이인 휘 녀석. 윤열이 형에게 고자질을 한데다, 그날 바로 심하게 얻어맞은 얼굴로 제 형이 돌아왔으니 휘 녀석이 속으로 얼마나 쫄아 있을지는 안다. 그날 이후로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지, 잠도 제대로 못 이루는 것 같지, 자신의 위태로운 꼬락서니가 많이 불안할 것이다. 임박한 중간고사가 좋은 핑계거리가 돼주긴 해서, 공부 때문이라고 둘러대곤 있지만, 완벽하게 동생들을 안심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긴 해도 지금 이것이 자신의 최선이었다. 동생들만을 배려하기엔 자신의 상태는 거의 최악이었다.

차라리 미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매일이 이어지고 있었다. 순간순간 지독하게 달려드는 심장의 통증은 자신을 더 이상 참기 힘들 것 같은 한계 상황으로까지 몰아넣곤 했지만, 달리 그를 떨칠 만한 방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반쯤 넋을 놓은 채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는 치명적인 공격을 견디는 수밖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랬다. 그저 조용히 견디는 것. 어느 날,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감각이 완전히 둔해지는 것. 자신은 그저 그때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벌어진 상처 위에 두툼한 딱지가 생겨, 더 이상 생살이 쓸리는 지독한 아픔만은 면할 수 있게 되는 때를.

띠리리리리∼∼∼∼.

멀리서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기를 쓰고 몰입한 효과가 있어, 서너 시간 남짓 계속한 끝에 해부학 족보의 거의 대부분을 소화하던 중이었다. 전화벨은 거듭 울리고 있었다. 벽시계 쪽으로 멍하니 시선을 가져갔다가 문득 심장이 바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새벽 1시 46분. 띠리리리리∼∼∼∼.

수화기 너머 상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띠리리리리∼∼∼∼.

전화벨의 날카로운 울림을 따라 자신을 향해 간절히 내뻗고 있는 그리운 손이 보였다. 곱고 갸름한 화가의 손가락이었다. 그리운 그것은 경련이라도 인 것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정말로 만져질 것만 같은 생생한 환영이었다. 끔찍한 유혹이었다. 유혹은 단숨에 가슴을 내려치고, 아래 내장까지 샅샅이 후비고 지나갔다. 정말로 지독한 아픔이 느껴져서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웅크린 채 배 부분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심장이고 내장이고 할 것 없이 무언가 거대한 톱니바퀴에 낀 채 배배 쥐어짜이는 것만 같았다.

띠리리리리∼∼∼∼.

한참 전에 잠자리에 들었을 휘가 뭐라고 잠꼬대를 하며 뒤척이는 게 보였다. 거듭 울리는 벨소리가 잠결에도 거슬린 때문이리라. 한번 잠들면 좀처럼 깨지 않는 동생의 무신경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다리를 펴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책상 앞에서 TV 장식장 옆에 놓인 전화기까진 단 세 걸음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자신이 겪어본 그 어떤 거리보다도 더 고되고 먼 거리였다. 벨소리가 잠시 멈추는 것 같다가 곧 다시 이어지려는 전화 수화기를 간신히 움켜쥐었다.

“…….”

[…….]

“…….”

[…….]

“…….”

[…….]

“…….”

[…….]

자신이 말이 없듯, 상대편도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말은 필요치 않았다. 그저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왜 말을 못 하는지, 혹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전화 수화기를 들고 있는지, 그리고 그 모든 원인일 상대의 절절한 애정까지도. 아마 저쪽도 알고 있을 터였다. 지금 그네의 전화를 받아주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를. 다만 다른 것은, 자신이 상대의 마음을 손바닥 보듯 훤히 읽고 있는 데 반해, 상대는 자신의 마음을 일절 모른다는 점이었다.

[……흐읍……!]

오랜 침묵의 끝. 마침내 수화기 너머에서 숨을 참는 듯한 억눌린 신음 소리가 건너왔다. 또 환영이 보였다. 자신을 향해 간절히 내뻗고 있는 그리운 손이 보였다. 곱고 갸름한 화가의 손가락은 바들바들 떨며 간절히 자신을 찾고 있었다. 내장을 후비는 극심한 통증이 다시 한 번 몸뚱이를 훑고 지나갔다. 나머지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쥔 채 공처럼 상반신을 웅크렸다.

“……듣기만 하세요.”

[!!!]

간신히 트인 자신의 목소리는 다행스럽게도 지극히 담담하게 들렸다.

“……일찍 전화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걱정하실 건 알았는데 마음에 여유가 없었어요. 형 일도 그렇고 공부 때문에도 바빴습니다. 게다가 다음 주가 중간고사 기간이라 바로 찾아뵐 수도 없겠네요. 다다음 주 초에 칠 두 과목은 비교적 학점이 가벼운 과목이니까 말일까지만 치면 조금이라도 틈을 낼 수 있을 겁니다. 30일 오후에 잠깐 들를게요.”

[…….]

“……괜찮습니다. 윤열이 형은 이해하도록 잘 얘기를 끝냈습니다. 자세한 건 찾아뵙고 말씀드릴게요.”

[…….]

“별일 없습니다. 아픈 데도 없고요. 진짜 괜찮아요. 선생님도 별일 없으실 줄 믿겠습니다.”

[…….]

“그럼 들어가세요. 휘가 깰까 봐 이만 끊겠습니다.”

[?!!! ……!! ……! …….]

“그렇게 울지 마시구요. 아무리 그러셔도 오래 통화 못 합니다. 늦었어요. 그만 주무십시오.”

[!!!]

“주무세요. 끊겠습니다.”

찰칵. 간신히 수화기를 내려놓고 엉금엉금 기듯 바닥을 굴렀다. 이마에 식은땀이 흠뻑 솟구쳤다. 기분 탓만은 아니었던가 보았다. 까맣게 변한 시야며 경련하듯 떨리는 손가락, 명치가 끊어지는 것 같은 독한 통증 등으로 미루어 위경련 같았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뎠다. 2∼3분쯤 비명을 지르고플 정도로 극심한 통증이 닥쳤다가 겨우 참을 만한 것으로 변했다. 물론 곧 또 참기 힘든 통증이 닥칠 것이다. 재빨리 재킷을 주워 입고 지갑도 챙겼다. 서둘러야 했다. 밤중에 구급차에 실려 가는 몰골까지 보여주면 동생들은 정말로 걱정을 할 것이다. 119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부른 후 조심스레 현관을 빠져나왔다. 대문을 빠져나오기 직전까지의 몇 분, 다행히 처음의 지독한 통증은 찾아오지 않았다. 뭐, 곧 다시 통증이 닥치겠지만, 일단 구급차만 도착하면 별로 문제 될 건 없었다. 치료를 받고 아침에 슬쩍 집에 들어가면 동생들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막 골목 끝까지 나가 구급차를 기다리려는데 다시 한 번 통증이 왔다. 처음보다도 더 한층 극심해서 그야말로 땅바닥에 데굴데굴 구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마와 콧등에 흥건한 식은땀은 물론, 쉴 새 없이 뺨을 가르는 눈물 줄기와 땅바닥의 먼지구덩이가 합쳐져 얼굴이 진흙탕 범벅이 되었다. 차가운 땅바닥에 이마를 기댄 채 메슥거리는 구토감과도 싸워야만 했다.

새까맣게 변한 시야 속에서 또 그것이 보였다.

갸름하고 고운 화가의 손…… 필사적으로 자신을 향해 내뻗고 있는 사랑스러운 손가락이었다. 잔혹했다. 잔혹하기 짝이 없는 환영이었다. 마주 손을 내뻗은들 도저히 만질 수가 없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사라져. 이를 악문 채 필사적으로 뇌까렸다. 제발 사라져. 더 이상 나타나지 마. 결코 이루어지길 원치 않는 일갈을 던져보았다. 그리운 그것을 향해. 사라지라 말할 수밖에 없지만, 실은 사라지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마주 잡아줄 수 없다고 일갈했지만, 실은 마주 잡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선…… 생님…… 서…… 선…… 선생님…… 선생님…….”

누군가 신음하며 울부짖었다.

“……선생님…… 인…… 환아…… 인환아…… 장인환…….”

간절히 부르면 혹시 나타나줄까? 채 갈무리되지 못한 감정이 언어로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째서 환영은 손가락뿐인 걸까?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장인환…… 장인환…… 장인환…… 인환아…….

대로변 언저리에서 번쩍거리는 구급차의 불빛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가까스로 들어 올려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구급차의 환한 헤드라이트가 쏘는 것처럼 전신을 비추었다. 잠시 잦아들었는가 싶던 통증이 또 한 번 명치끝을 가격했다. 아아악. 이번엔 비명 소리를 참지 못했다. 지독했다. 통증이 지독한 건지, 끝내 사라지지 않는 환영이 지독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를 갈면서 손을 내뻗었다. 차에서 바삐 내리는 구급 요원들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그리운 저것을 향한 것인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물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설핏 생각했다.

“상처 거의 아문 거 같네?”

맞은편에 앉아 부지런히 밥을 퍼먹고 있던 전창일이 슬쩍 말을 붙인다. 깨작거리며 수저질만 하다 채 반도 비우지 못하고 수저를 놓는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피던 동기였다. 다음에 이어질 말은 듣지 않아도 오디오였다.

“……또 그거 먹고 관두냐? 좀만 더 먹지? 네가 뺄 살이 어디 있다고 자꾸 다이어트냐, 다이어트가. 근육이야 좀 줄여도 상관은 없겠다만.”

대꾸하는 것도 귀찮아서, 그저 눈빛만으로 ‘다이어트는 무슨’의 의미에 가까울 실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주 시선을 보내는 전창일의 얼굴엔 그 흔한 사람 좋은 미소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시험 기간 일주일 동안은 수업이 없었고, 동기들은 대부분 학교에 나와 도서관이나 동아리실 등에서 시험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위 자신도 다르지 않아서, 요 일주일 내내 새벽같이 집을 나와 도서관이나 동아리실에서 공부하곤 저녁 늦게 돌아가는 매일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은 점심시간, 요즘 자신에게 꼬박꼬박 밥을 먹이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전창일에게 학생관 식당까지 끌려와 점심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며칠 전, 위경련으로 병원 응급실 신세까지 진 게 탄로 나고부턴 참견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공부로 신경이 온통 가 있을 텐데도 자신까지 챙기는 전창일의 드넓은 오지랖에 새삼 감탄을 하곤 있지만, 솔직히 귀찮고 성가신 마음이 더 드는 요즘이었다. 물론 다른 쪽 고통이 너무나 극심해 그 성가신 기분조차 다른 사소한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깊숙이까지 전달이 안 되고는 있지만.

“……아무리 이유를 물어도 대답 안 해줄 건 아는데, 제발 밥이라도 좀 제대로 챙겨 먹어라. 먹는 게 그러니까 스트레스성 위경련까지 생기지. 요새 얼굴이 귀신 꼬라지란 건 아냐? 그나마 상처라도 대충 아물어서 참아줄 만은 하다만…… 알지? 요새 네가 동아리실에다 계속 공포 분위기 조성하고 있는 거? 가뜩이나 본과 올라가고 나서 첫 번째 중간고사라고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잔뜩 쫄아서 눈치나 보며 네 족보에 목맬 수밖에 없는 우리가 불쌍하지도 않냐?”

“…….”

“뭐, 족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매정하기만 한 놈이 뭐가 이쁘다고 신경을 쓰나 몰라, 다들……. 흠흠, 다들 말은 안 해도 너 많이 걱정하고 있어. 저러다 사달 나는 거 아니냐고. 원체 괴물 같은 놈으로 소문나서 설마 그럴 리야 하고도 있지만, 만에 하나란 것도 있는 일이니까. 원래 사람 쓰러뜨리는 대미지란 게 몸보단 정신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더 심각한 법이지.”

“…….”

“그니까 좀만 더 먹어봐라. 배 속이 든든해야 생각할 여력도 생기고, 그만큼 고민거리도 빨리 해결되지 않겠냐? 여자친구랑 깨졌을 때만 해도 너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그야, 나도 정확한 사정을 모르니 얼마나 심각한 문젠지는 모르겠다만…… 에휴, 하긴 이것도 열받네. 무정한 새끼가 혼자만 비밀 싸안고서 끙끙대고 있으니…… 고거 쌤통이다 하고 냅두면 그만인 건데…….”

“……전창일.”

“누굴 원망하겠어. 그저 내 넓디넓은 오지랖이나 탓해야…….”

“전창일.”

“인간성 좋은 내가 참아야…… 어…… 어엉? 불렀냐? 왜?”

중언부언 푸념을 늘어놓으며 밥을 퍼먹느라 미처 부름을 못 들었던 모양인지, 재차 목소리를 높여서야 동기의 시선이 겨우 자신의 얼굴로 되돌아온다. 심각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동기의 얼굴이 금세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학생 때 결혼하려는 여자애들은 별로 없겠지?”

“……?”

“미팅은 많이들 하지만 그렇게 일찍 결혼하려고 하는 여자앤 별로 없을 거야. 그렇지? 선을 보려는 여자애들도 별로 없을 거고.”

“?!!!”

처음엔 무슨 말인가 제대로 이해를 못 한 듯 담담했던 전창일의 눈이 그야말로 휘둥그레졌다. 놀라긴 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무슨 뜻인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 자체가 그만큼 뜬금없게 느껴졌으리라. 왜 아니겠는가. 사회에 나가 제대로 된 성인 취급을 받으려면 아직도 한참의 시간을 더 캠퍼스에서 보내야만 하는 동기에게 그것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정도로 먼 얘기일 것이다. 전창일을 비롯한 남자 동기들에겐 결혼보다는 군대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한 당면 문제일 것이다. 의대 특성상 본과 졸업은 물론 레지던트 과정까지 대부분 마친 후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로 대체돼 가는 게 통례라고는 해도 말이다.

“별로 없을 거라는 건 아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혹시 그런 여자애들 알면 소개팅 좀 시켜줄래?”

“?!!!!!!!!! ……! …….”

이번엔 입까지 딱 벌어졌다. 밥을 떠먹던 수저도 테이블에 널브러진 것은 물론이었다. 그래.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싶겠지.

“미팅 같은 가벼운 거 말고. 소개팅도 좋고 선이면 더 좋아. 결혼을 전제로 진지한 교제를 할 생각이 있는 여자애들과 만나보고 싶어. 아, 연하나 동갑보다는 연상이면 더 좋겠다. 4학년 선배도 좋고, 재수나 삼수해서 들어온 애들도 괜찮아. 좀 알아봐줄래?”

“……서…… 설마 너도 그런 목적으로 사귀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런 목적?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 말인가?”

“……그, 그래. ……윽! 교, 교제라니 단어부터가 징그럽다! 교제가 뭐야, 교제가! 무슨 넥타이부대 늙은이들처럼!”

“소개팅 말고도 결혼 상대를 전문적으로 알선해주는 곳도 있다면서? 적당히 형편이 맞는 짝을 골라서 중매를 서준다는 곳 말야. 그런 데는 믿을 만하긴 한 건가? 네 주변에 그런 데를 통해서 결혼했다는 사람들 얘기 들어본 적은 없나?”

“야, 문위!!! 너 점점…….”

“믿을 만한 곳이기만 하다면 소개팅보다도 그쪽이 더 확실할 것 같긴 한데, 내 이력이 기준에 한참을 못 미치는 형편이라 그런 데서 환영해줄지 모르겠어. 가난한 집안 환경도 문제지만, 아직 나이가 턱없이 어린 것도 문제겠지, 그쪽 입장에서 본다면. 청년 가장에 고아라는 사실도 걸리겠고.”

“야…… 너…… 지, 진짜……?”

“음, 그래. ‘진짜’. 진짜로 결혼할 생각이야. 가능한 한 빨리.”

“미…… 미, 미, 미, 미쳤냐?!!! 노, 농담이지?”

“진담이야. 미치지도 않았고.”

지극히 진지하고 담담한 자신의 눈빛 때문이었을까? 처음엔 무슨 낯선 외국어를 듣는 듯 어리둥절해하다가 다음엔 어이가 없다는 듯 반신반의하던 전창일의 시선이 결국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듯 경악한 기색으로 변했다.

“내세울 거라곤 학벌밖에 없지만…… 내 장래성을 믿어주는 여자들이 있다면 아주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그 면으론 오히려 괜찮은 여자를 만날 확률도 높겠지. 나 같은 놈을 배우자로 선택한다는 건 적어도 속물은 아니라는 뜻일 테니.”

“…….”

“농담도 아니고 미치지도 않았으니까 부탁한다. 넌 나보다는 발 넓잖아. 좀 알아봐줘. 소문내도 상관없어. 의대 본과 1학년 문위가 결혼을 전제로 사귈 만한 여자를 찾고 있다고 말야. 가벼운 만남은 질려서 그런다고 대충 둘러대도 좋고, 일찍 안정을 찾고 싶어서 그런다고 해도 좋아. 어차피 미친놈 소리나 듣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현모양처 감인 괜찮은 여자만 만날 수 있다면 말이지.”

“……진…… 담이로구나…….”

기왕에 테이블 위에 팽개치다시피 했던 수저를 먹던 식판 위에 던져놓으며 전창일이 대꾸했다. 한숨 같은 어조였다. 경악은 얼추 수습한 모양으로, 휘둥그레졌던 눈이 본래의 크기로 되돌아와 있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자신을 보았다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했다. 식욕도 떨어진 건지, 아직 4분의 1쯤 남은 카레밥이 식판 위에서 무시당하고 있었다.

전창일의 시선을 따라 위도 주변으로 시선을 가져가보았다. 점심시간이 한창 피크를 달리고 있어 식당 안은 빈 테이블을 찾기가 힘들 정도의 인파로 북적대고 있었다. 소음 또한 딱 그만큼의 크기로 시끄러웠다. 자신이 움직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따라오곤 하는 뭇 시선들의 힐끔거림도 여전해서, 위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랬다. 자신을 둘러싼 일상은 지난 보름 전쯤과 비교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너무나 달라지지 않아서 오히려 위화감을 느끼는 자신이었다. 자신은 이렇게 변했는데. 세상이 암흑천지로 변했는데, 그건 오로지 자신의 세상에 한해서일 뿐이라니.

“……다들 서울대 최고의 바람둥이가 여자들 후리고 다니는 데 질려서 잠시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여길 거다. 아니면 질 나쁜 장난이거나.”

한동안 묵묵히 자신을 굽어보고 있던 전창일이 불쑥 내뱉었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약간 숙인 자세로 자신을 보고 있어 흡사 노려본다고 해도 믿어질 분위기였다. 아니, 실제로 노려보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내린 자세는 전창일이 기분 나쁜 때 취하곤 하는 대표적인 리액션 가운데 하나였다. 성격 좋은 동기라 여간해선 화를 내는 모습을 보기 힘든데, 드물게 기분이 언짢을 때 취하곤 하는 자세를 보니 자신의 부탁이 동기에겐 확실히 기분 나쁜 충격이긴 했나 보았다.

“……사정 모르는 치들이 뭐라고 떠들든 신경 안 써. 그런 여자만 만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니까. 우리 학교 여자애면 더 좋고, 아니라도 상관없어. 너나, 아니면 다른 동아리 친구들의 한 다리 건너 연줄이라도 상관없지. 성우랑 재철이가 이대랑 연대 애들 사귄다고 했던가? 그쪽 출신도 괜찮아. 아무튼 출신 학교에 상관없이 괜찮은 여자애면 돼. 아, 물론 너무 머리가 딸리는 거면 곤란하겠지. 말귀도 못 알아먹으면 답답하잖아. 둔한 여자보다야 차라리 못생긴 여자가 훨씬 더 낫지.”

“……너, 머리가 이상해진 건 맞는 거 같다, 문위.”

“아냐, 일단 먼저 모두 다 만나보는 게 더 나으려나? 일단 선입견 없이 무조건 다 만나보고 그중에서 진짜다 싶은 여자를 택하는 게 더 나을까?”

“그만해. 진담인 거 알아들었으니까.”

전창일답지 않구나……. 굳은 얼굴로 말을 가로채는 전창일을 보고 멍하니 든 생각이었다. 사람 좋은 오지랖의 제왕인 동기는 여전히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 우린 솔직히 네 문제에 깊이 개입하는 거 꺼려했었다. 다들 널 좋아하긴 하지만, 정말로 친구라 여기냐 하면 그건 아니었거든. 알고 있지?”

“…….”

“그건 네 쪽에서 일정 선을 그어두고 대하니까 우리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지.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이건 매번 무슨 거대한 벽을 치는 기분이니……. 어쩌겠어. 그냥 포기해야지. 근데…… 근데 말이다, 문위. 그래도 진짜 너 많이 좋아들 해. 걱정도 많이 하고 있고. 세상과 단단히 벽을 친 채 그 안에 들어앉아 혼자 끙끙 앓는 것 같은 너니까 더 그런 건지도 몰라. 저 자식은 얼마나 외로울까. 저렇게 아무도 믿지 못하고, 아무도 마음 안에 들이지 않으려 하고, 그러자면 그 속은 얼마나 황폐할까. 아니, 얼마나 황폐했기에 저러는 걸까.”

“…….”

“……그래. 동정이다, 인마. 그걸 이제 알았냐?”

“…….”

“어쭈? 별로 기분 나쁘지도 않다는 표정이네? 젠장. 이래서 계속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정말 얄미운데…… 어떤 땐 진짜 야속해서 주먹으로 몇 대 치고 싶은 기분이 불쑥불쑥 치솟기까지 하는데…… 그런데도 또 막상 미워하려고 하면 그게 잘 안 되거든. 지독하게 방어적이면서도 또 어느 한순간 들여다보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있는 대로 자기 스스로를 방치하곤 한다니까. 늘이고 늘이다 한계에 봉착해 완전히 탄성을 잃어버린 고무줄 짝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 마치 인생 다 산 노인네처럼 말이지.”

“…….”

“너 지금도 그래 보여. 절망해서 다 포기하려는 것처럼.”

“…….”

“보름 전쯤인가? 네가 얼굴이 완전 프랑켄슈타인이 돼서 학교에 나타났을 때부터 다들 내색은 안 했지만 얼추 눈치는 채고 있었다. 너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야. 뭔가 진짜 심각한 일이 터졌구나. 뭔가 철저하게 절망했구나 하는 그런 암담한 느낌이랄까……. 당장 차에 치여 죽어도 억울해하지 않을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절망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 젠장. 그간 열심히 쌓고 있는 것 같던 방어벽조차 더 이상 느껴지지 않더라. 그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니, 나도 그랬지만, 우리 중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어. 차라리 철저한 마이페이스에 싸가지가 바가지던 그전이 훨씬 나았다고 다들 한탄했지. 그렇게 절망스러워하는 널 보느니 말야. 지금은 좀 나아진 건가 하면 아니야. 마음 정리는 얼추 된 것 같은데 상태는 더 나빠 보여. 그래서 나도 그렇고 애들도 그렇고 살얼음판을 딛는 것처럼 조마조마해하며 널 지켜보고 있지.”

“…….”

“……넌 아무것도 얘기 안 해주니까 나도 더 이상은 참견 안 할 거야. 하지만 이 말만은 꼭 해야겠다.”

“…….”

“……결혼을 하겠다는 건 도피하겠다는 뜻이냐?”

“…….”

“자포자기야?”

“…….”

“지금 네 상황이 힘드니까 무조건 도망치고 보자는 거 아니냐구?”

“…….”

“만약 그렇다면 소개팅이고 선이고 얄짤 없다. 그딴 식으로 결혼해서 좋은 꼴 날 턱이 없다는 건 머리 좀 있는 놈이면 누구라도 알 거다. 그러니 난 적어도 내가 친구라고 정한 놈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데 일조할 순 없단 얘기지.”

“……도피가 아니라 이주야.”

잠깐 동안은 정말 ‘도피’의 의미인 건가, 의심을 했지만 곧 아니라는 확고한 판단이 왔다. 도피란 되돌아올 것을 전제로 한다. 되돌아올 곳이 사라졌는데, 아니, 자신 스스로 말살해버렸는데 도대체 어디로 도피를 한단 말인가. 도피했다가 어디로 돌아가란 말인가. 그랬다. 도피가 아니라 이주였다. 정착을 위한 이주.

“지금 사는 곳은 폭삭 망가졌거든. 살려면 이주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 이주처가 바로 결혼이지. 결혼만이 날 구조할 수가 있어.”

“…….”

“……일단 이주하고 나면 그곳에서 완전히 뿌리내리고 살 거야.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완전히 정착해서. 이게 내 길이었구나,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그렇게 조용히 살 거야.”

“……위야…….”

“……그럴 거야. 그냥 조용히…… 평온하게 살 거야. 가족들만…… 동생들이랑, 형이랑, 성준이랑, 새로 생길 아내 혹은 내 자식들이랑…… 그렇게 가족들만 열심히 부양하면서.”

“……사랑은?”

“……?”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랑 살겠다는 거야? 정말 아무 여자라도 상관없어? 그냥 정착할 수만 있다면 그게 다냐구?”

“…….”

“그래. 정착하는 거 좋지.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평온하게 살고 싶다는 거, 그거. 어쩌면 우리들 사내새끼들의 최종 목표긴 할 거다. 하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신중해야 하는 거 아니냐? 좀 더 경험을 쌓고, 지혜도 넓힌 다음 진짜 사랑하는 여자를 택해야 하는 게 아냐? 그렇게 쫓기듯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만나 대충하는 결혼이 네게 진짜로 평화를 주긴 할까?”

“……사랑 따윈 필요 없어.”

“……?!”

“그래, 필요 없어. 그런 사랑은 일생에 단 한 번으로 족해. 이렇게 폭삭 망가지게끔 만드는 사랑 따윈 말이다.”

“……문위…….”

“할 수도 없을 거다, 이제 다신 사랑이란 건.”

“……위야……!”

“그럴 거야. 확실히 알고 있지. 난 이제 더 이상 사랑이란 건 못 할 거야. 그럴 기운이 없어. 다 망했거든. 다 망해버렸지. 그러니까 미래의 아내에겐 그냥 정이나 붙이고 살 거다.”

“…….”

“잘해줄 거야. 평생 충실하고 헌신적인 남편이 될 거야. 사랑은 줄 수 없지만 주는 척할 수는 있지. 나는 어떨지 몰라도 내 아내는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야. 아이들에게도 좋은 아빠가 돼줄 거고. 뭐, 살다가 운 좋으면 약간이나마라도 애정이 생길지 모르지. 어차피 영원한 사랑으로 사는 부부는 별로 없다지 않나?”

“…….”

“전창일.”

“…….”

“진지하게 부탁하는 거야. 나 빈말 안 하는 건 알지? 괜찮은 여자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냐. 그냥 서로 대화가 통할 정도로만 똑똑하고, 평균치 정도의 엄마가 될 수 있을 정도면 돼. 용모도 그냥저냥 보기 흉할 정도만 아니면 괜찮고, 성격도 그냥 평범 수준만큼만 착하면 좋겠어.”

“……차라리 울어라, 지독한 자식…….”

“…….”

“……우선 울기나 해. 그 지랄 같은 표정이 다 뭐냐. 그 꼴로 결혼을 하겠다고? 사랑은 줄 수 없지만 주는 척할 수는 있다구? 그 꼴을 하고 있는데 잘도 속아줄 여자가 있겠구나.”

“……정리하는 중이니까 괜찮아. 다 부서져버렸으니 일단 남은 폐허는 치워내야겠지. 쓰레기들 다 치우면 말짱해져.”

“흥. 다 죽어가는 주제에 개폼만 잡지!”

“……밥 마저 먹고 나와라. 먼저 동아리실로 가 있을게.”

“씨발! 다 먹었다, 새꺄! 입맛 떨어지는 소리 잔뜩 토해놓고 지금 나더러 밥 먹으라는 소리가 나오냐?! 폭탄주 마시고 변소 안에 게워놓은 부침개도 이렇게 심하게 밥맛을 떨어뜨리진 않을 거다, 새꺄!”

전창일을 조용히 일별한 후 자리에서 일어서자 녀석이 황급히 따라 일어서며 외쳤다. 꽤나 커진 목소리에 주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뭇 인파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따라붙었다. 자신에게 감정 이입이라도 한 건지, 몹시도 괴로운 표정이 된 전창일은 그도 못마땅하다는 듯 부릅뜬 눈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이들을 노려보았다. 늘 웃는 얼굴만 보여주는 전창일로선 꽤나 의외인 모습이었다. 정말로 사람이 좋구나. 또 새삼 실감하는 자신이었다. 놈의 말마따나 기를 쓰고 벽이나 쌓아올리는 자신이 뭐가 예쁘다고 저리 걱정을 해주는 걸까? 동정? 동정이라고 했던가? 하. 동정조차 받을 주제나 될까, 자신이? 그토록 이기적이었던 괴물이?

“같이 가자니까, 새꺄?!!!”

반납대에 식판을 밀어두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씩씩거리는 전창일의 외침이 따라왔다. 기왕에 쫓아오곤 하는 뭇 시선들에 더해 한층 더 눈길을 끌게끔 만드는 짓거리였다. 전엔 자신과 같이 다니면 쪽 팔려서 싫다더니, 요즘은 그런 뭇 시선들조차 즐기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거리낌이 없었다.

“아씨, 진짜 이 새끼가! 같이 가자니깐!!!”

컴퍼스가 짧아서 그런가, 아니면 운동 신경이 딸려 그런가, 열심히 따라오는 것 같은데도 늘 5미터쯤 뒤처지곤 하는 동기였다. 아니, ‘친구’였다. 이제쯤은…… 도저히 친구가 아니라고 더 이상 부정할 수도 없는 녀석이었다. 부정할 기력조차 없었다.

오전에 치러진 세 시간의 전공 시험을 마치자마자 바로 전철을 탔다. 한성대입구역에 내렸을 즈음, 시계는 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전철역에서 내려 바로 성북동 방향 마을버스를 타려다가 그냥 걸어가기로 고쳐 생각했다. 그의 빌라까지 가려면 20분 넘게 걸어야 하지만, 저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거리를 가능한 한 전부 눈에 각인해두고 싶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보게 될 풍경이니, 그 정도의 경의는 표해줄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겼다.

기온도 비교적 선선한 편이어서 걷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내일부터가 5월의 시작인 걸 감안하면 평년에 비해 더위가 좀 늦게 오려는 모양이었다. 이 무렵쯤이면 더위를 타는 자신은 대개 반팔을 걸쳤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올해에는 어쩐지 아침저녁으로 꽤 서늘해서 반팔을 걸치기엔 무리가 있었다. 오늘도 그랬다. 자신의 반팔 T셔츠 위에 걸친 것은 올봄 내내 입었던 푸른색 후드 재킷이었다. 날이 흐린 것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제도 비가 오더니 오늘도 아침부터 잔뜩 흐린 것이 기어코 비를 뿌릴 모양이었다. 바람까지 꽤 부는 것을 보니 어쩌면 그의 집을 나서기도 전에 비가 내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막 불어온 바람에 거칠게 휘날리는 재킷 자락을 서둘러 여며들였다. 보드라운 천의 감촉이 손바닥을 따스하게 감싸왔다.

3월 초, 개강할 무렵이었던가? 그가 동대문시장에서 사 왔다며 입어보라고 건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후드 재킷이었다. 고가의 옷을 선물받는 걸 질색하는 자신을 알고 있는 그는 그렇게 가끔씩 그와는 전혀 맞지 않을 재래시장을 돌며 자신에게 어울릴 만한 옷가지나 신발, 가방 같은 것들을 사서 선물해주곤 했었다. 자신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 딱 그만큼의 마음을, 정성을 다해 발품을 판 끝에 전해주곤 했다.

코가 매웠다. 간신히 덮어둔 상처가 또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거리 쪽으로 서둘러 시선을 옮기는 것으로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조심해야 했다. 아직은…… 아니, 아마 앞으로도 한참은 더 조심해줘야만 한다. 고무처럼 질긴 무언가로 마음을 단단히 동여매긴 했으나, 언제 어느 때 빈틈을 노리고서 추억이 통째로 덤벼들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와 관련된 추억은, 그게 어떤 사소한 것이든 감아둔 매듭을 풀고 단숨에 상처를 헤집어들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을 갖고 있었다. 추억에 관하여 생각은 하되, 그 수준은 그저 ‘기억’을 하거나 ‘관조’하는 수준에서 멈춰야만 했다. 깊이 빠져들어, 거기서 무언가 새로운 감정을 이끌어내선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렇지. 바로 저 앞에 보이는 카페 ‘느티나무’는 그와 저녁 산책을 하다 가끔 들어가본 적이 있는 카페였다. 그 건너건너에 있는 감자탕 집도 여러 번 들어가 사 먹었던 곳. 느끼하지 않고 담백해선지, 육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그도 제법 잘 먹었었지. 아, 저 비디오 대여점도 기억난다. 만화책과 비디오를 꽤나 많이 빌려다 본 곳이었다. 아르바이트생만 해도 지난 4년간 꽤 여러 명이 바뀌었었다. 그래. 딱 이 정도가 적당했다. 그저 담담히 ‘관조’하고 ‘기억’해내는 것. 그래서 저 깊은 추억의 벽장 속에 차곡차곡 쌓아 집어넣어버리는 것. 무언가 미련이 남아 다시는 꺼내서 보는 일이 없도록, 어설픈 박음질로 억지로 꿰매버린 상처를 더 이상 헤집지 않도록, 철통같은 자물쇠로 꼭꼭 채워버리는 것……. 그렇지. 딱 그만큼만 허락해주는 것이 안전할 터였다.

평소보다 느려진 걸음 탓인지 빌라에 도착했을 땐 1시 반이 훌쩍 넘어 있었다. 익숙한 건물의 외관이 눈에 들어온 순간 또 코가 매워지는 바람에 다시 한 번 숨을 고르며 한동안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젠장.

그를 보곤 절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럴 자신이 없었다면 자신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그와의 만남을 좀 더 연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입고 있는 옷이라든가, 자주 들어갔던 가게의 쇼윈도, 그리고 빌라 건물 같은 사소한 사물들에 이토록 마음이 흔들릴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꽤나 심각한 위력을 지닌 복병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감아둔 고무 매듭의 위력 또한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수시로 허를 찔리긴 했으나, 그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마냥 휘청거리며 그로기 상태에 빠져들게끔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일단 그를 보게 되면 그 위력은 더욱더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증명될 터였다.

판단이 거기에 이르자 더 이상 지체하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대문과 정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을 닫고 돌아서자 로비의 경비원이 인사를 하는 게 보였다. 그와 더불어 자신을 완전히 빌라의 주인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내였다. 항상 하던 간단한 목례 대신 잠시 동안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4년간의 추억에 대한 예우였다. 다신 볼 일 없을 타인이지만, 지난 4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사내 역시 추억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제법 주시가 길었는지, 마주 시선을 보내오던 사내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상체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자 사내는 더욱더 당혹한 표정으로 변했다. 의자에서 잽싸게 일어나더니 자신이 한 것처럼 허리를 깊숙이 숙인 인사로 답을 보내왔다. 그에 더해 뭐라고 말을 보태는 것 같았지만 의미는 흘려버렸다. 조금 웃어주고, 또 늘 그랬던 것처럼 간단한 목례를 더한 다음, 아틀리에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720119. 자신의 생일인지, 혹은 그의 집 현관 비밀번호인지, 긴 시간 속에서 앞으로도 영원히 헷갈릴 넘버를 입력한다. 삐빅. 여전히 거침없이 열리는 도어록에 흐릿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이 비밀번호가 바뀌는 때는 과연 언제쯤일까? 자신이 마침내 그를 완전히 버리겠다고 이별을 선언하는 날? 아니면 그가 자신을 잊고 새 출발을 하게 되는 날? 혹은 마침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날일까? 그는 새로운 사랑을 위해서도 현관의 비밀번호를 바꾸게 될까? 새로운 연인의 생일로? 그자는 과연 어떤 달에 태어났을까? 자신처럼 빠른 1월생일까……? 욱신. 느닷없이 닥친 심장이 조여드는 아픔에 ‘스톱’ 하고 구령을 붙였다. 손잡이를 쥐려던 손가락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마와 콧등에 어느새 축축하게 밴 것은 식은땀이었다. 젠장. 규칙을 무시하니 또 이런 사달이 생기지 않는가. ‘기억’과 ‘관조’, 단 두 마디만을 새삼 뇌까리며 스스로를 조소했다.

몇 번 심호흡을 거듭한 후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너무나 그리운 그의 냄새가 코끝으로 확 끼쳐들었다. 달큰한 살 냄새, 물감 냄새, 코롱 냄새……. 울컥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고 한 걸음 더 안으로 내디뎠다.

거실 안쪽으로부터 밝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날이 흐려서일 것이다. 흐린 날이면 그는 그림 작업을 위해 자연광에 가까운 전등을 집 안에 환하게 켜놓곤 했었다.

현관 앞 통로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가 보였다. 예쁘장한 크림색의 카고 바지에 사랑스러운 연둣빛 스웨터를 걸친 걸 보니 또 거울 앞에서 잔뜩 멋을 부린 게 틀림없다. 자신 때문일 것이다. 오랜만이니 특별히 더 예쁘게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아틀리에에 불을 밝혀두긴 했지만 작업 중이었던 것 같진 않았다. 물감투성이 앞치마를 걸치지도, 손가락에 물감이 묻어 있지도 않았으므로. 여전히 안 봐도 비디오였다.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하며 자신만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

20일 만이었다. 긴, 긴…… 세상에서 가장 길 것 같던 20일이었다. 영겁이라도 지나온 것처럼 끔찍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자신만큼 길고 긴 지옥을 헤매고 있었던 탓일까?

얼굴이 무척이나 상했다.

얼굴도 해쓱하게 말랐고, 눈매는 퀭하다. 고왔던 피부도 많이 푸석해 보이고, 연둣빛 스웨터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몸의 라인도 기억에 있던 모습보다 많이 가늘어졌다. 예상했던 것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몰골에 실소가 터진다. 그래. 그 언젠가, 친구 연습을 하자며 그를 버려두었을 때도 저랬고, 제 감정을 어쩌지 못해 그를 상대로 질기게 화풀이를 해댈 때도 저랬었다. 자신의 심술이 극에 달해 원형 탈모증까지 걸리게 한 적도 있었지. 그래, 그랬다. 자신은 괴물이었었다.

지독하게 여위었어도 자신의 눈엔 여전히 예쁜 어느 청년 화가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 서로 만났다는 실감을 못 하기라도 하는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다. 자신 또한 좀처럼 인사말조차 건넬 수가 없는 걸보면 실감을 못 하기는 마찬가지인 걸까? 예상대로 동요는 그다지 일지 않는다. 여윈 그도 익히 예상한 바였고, 지옥 같았던 고통과 더불어 일체의 감정을 봉합해둔 상처 속 깊이 묻어두었었다. 새삼 그의 모습이나 만남에 감정이 풍파를 일으킬 까닭은 없다. 그간의 지옥 같았던 고통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를 보기만 하면 걷잡을 수 없이 치솟곤 하던 기갈 들린 성욕조차 조금도 일지 않는다. 마치 거세당한 짐승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 담담한 고요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자신도 장담할 수가 없다. 자신도 모르는 한계를 넘어선 순간 마침내 폭발을 하겠지. 그전에 끝내야 한다. 모든 것을 깔끔하게.

“……어…… 얼굴이 왜 그래……?”

마침내 너무나 그리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다. 정감이 풍부한 상냥한 목소리. 적당히 나지막해서 전혀 여자 같은 목소리가 아닌데도 여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부드럽게 감겨드는 온화한 목소리.

“……지, 진짜 많이 상했다…… 괜찮아? 저, 정말 어디 아팠던 거 아니니?”

촉촉하게 젖어드는 눈시울이 보인다. 힘껏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니 열심히 눈물을 참는 것 같다. 이제야 서로 만났다는 실감이 나는 걸까? 다행히 뺨으로 굴러 떨어지지는 않을 정도로 잘 참아준다. 다행이고 고맙다. 그가 울어버리면 자신 또한 견디기 힘들어진다.

“……시험도 있고 윤열이 형 일도 있었으니까요. 신경 좀 썼더니 살이 내렸나 봐요.”

역시 다행이다. 목소리도 감정만큼 담담하게 흘러나온다. 좀처럼 말을 시작하지 못해 걱정스러웠는데 기우였나 보다. 그래도 ‘선생님 얼굴도 많이 상했네요’ 같은 안부 인사류는 역시 나와 주지 않는다.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열렬하고 깊은 애정이 담긴 눈엔 자신에 대한 근심도 가득 들어앉았다. 이렇게 마른 자신을 거의 본 적이 없는 그이니 더할 것이다. 그나마 윤열이 형에게서 맞은 자국은 완전히 사라졌다. 맞은 직후엔 동기들의 표현대로 프랑켄슈타인이 따로 없었다. 피멍과 부기가 빠지기까지 열흘이나 걸렸으니까. 그걸 봤다면 그도 더 이상 눈물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 정리를 위해 이때까지 만남을 미뤘던 것이 새삼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바, 밥은? 밥 아직 안 먹었지? 지금 차릴까? 김천댁 아줌마 아침에 특별히 불렀었거든. 너 좋아하는 반찬 많아. 떡갈비도 있고 잡채도 있어. 시원한 해물탕도 있고.”

얘기부터 시작하기 위해 소파에 앉는 자신을 향해 그가 부산스럽게 물어온다. 집 안에 들어서면 그저 허겁지겁 옷부터 벗고 그에게 달려들었었다. 인사도, 음식도 모두 뒷전. 성급하게 몸을 겹치고 주린 듯 서로를 탐하고 난 뒤에야 다른 무엇이든 가능했었다. 그랬던 자신이어서일까? 지극히 침착하고 정제돼 있는 자신의 행동에 위화감을 넘어 불안감마저 느끼는 모양이었다. 불안감을 준대도 어쩔 수 없다. 오늘만은 몸을 겹쳐선 안 된다. 하다못해 키스조차도.

“버섯전이랑 식혜도 있어. 너 식혜 좋아하지? 김천댁 아줌마가 식혜는 진짜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음식이라고 너 아니었으면 안 해줬을 거래. 진짜 생색 많이 내시더라?”

불안한 듯, 마주 앉지도 못한 채 그가 덧붙인다. 깊은 애정이 담긴 간절한 시선은 여전히 자신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그 간절함에 얼굴이 다 파먹히는 것만 같다.

밥까지 먹으면 그만큼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게 된다. 빨리 끝낼수록 감정의 폭발을 억제할 수 있고 그만큼 안전하다는 판단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이었다. 이 집에서 그와 함께 밥을 먹는 마지막일 터였다. 자신을 좋아해주고, 관심을 가져주었던 김천댁 아줌마의 음식이다. 실은 자신 역시 무척이나 정을 주고 싶었던 아줌마였다. 만나기 불편해 부러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젠가 먼 옛날 엄마와 그랬던 것처럼, 김치 담그는 옆에 앉아 배추속도 훔쳐 먹으며 방해 같은 것도 하고 싶었더랬다. 엄마의 그것처럼 무척이나 맛깔스러운 손맛에, 마치 진짜 엄마처럼 다정히 품어줄 것도 같은 아줌마라고 여겼었더랬다.

“……예, 배고프네요. 선생님도 식사 안 하셨죠? 같이 먹어요.”

그가 원하는 답을 내주자 젖은 눈이 커다랗게 일렁인다. 휘둥그레졌다가, 옆으로 길게 접혔다가, 이내 함빡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마구 고개를 끄덕인다.

“응! 으응, 응! 금방 차릴게!”

뺨에 살풋 홍조까지 머금고서 그가 주방 쪽으로 두다다다 달려간다. 한쪽 다리를 살짝 끄는 저 정겨운 발소리도 조만간 영영 들을 수 없게 될 게다. 물론, 이 집에서 울리고 있는 저것은 다신 결코 들을 수 없겠지.

식사 시간은 줄곧 고요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자신은 그저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기계적으로 수저를 놀리기 바빴고, 자신의 눈치를 보기 바쁜 그도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했을 거다. 그가 시험과 공부에 대해 물었고, 자신은 힘들지만 할 만하다는 대답을 주었다. 그것이 식탁 위에서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식사를 끝내고는 역시 ‘마지막’ 설거지를 했다. 고척동 집의 그것 이상으로 익숙하고 정겨워진 세간붙이에도 다정하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애정을 줘서 고마워. 허기를 채워주고, 기분을 달래주고, 무엇보다도 그와 함께하는 소중한 추억을 선물해줘서 고마워.

식탁에 앉은 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만을 좇는 그에게 그의 입맛에 꼭 맞는 원두커피를 내려주고 자신을 위해서도 녹차를 탔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안주 삼아 정신없이 커피를 마시고, 자신은 되도록 그의 시선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애쓰며 녹차를 마셨다. 자꾸만 보고 싶어하는 눈동자의 요구가 느껴졌기에 더더욱 그를 눈에 담지 않으려 했다. 무언가 감정의 동요가 느껴질 만한 것은 철저히 피할수록 좋았다.

식사 시간만큼이나 고요한 티타임이 끝나고, 마침내 그를 이끌어 소파로 되돌아왔다. 무언가를 각오한 듯, 그의 얼굴도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주 앉는 대신 그를 4인용 소파의 옆에 앉게 했다. 되도록 그를 눈에 담지 않으려는 발로였다. 물론, 서로의 체온이 섞이지 않도록 간격을 유지하는 데도 주의를 잊지 않았다.

“……마…… 만지면 안 돼?”

흠칫.

“……키…… 스도 하고 싶은데…… 안 되니……?”

제기랄. 잔잔하던 심장이 무섭도록 뛰기 시작한다. 언제나처럼 직선적이고 솔직한 그라는 걸 간과한 게 문제였다. 제기랄. 젠장. 젠장. 젠장……. 그가 앉아 있는 오른편으로부터 핥는 듯 열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숨통이 턱턱 막힐 정도다. 그의 욕망이 문제가 아니다. 그로 해서 촉발될 자신의 욕망이 ‘젠장할’인 거다.

“안 됩니다.”

최대한 담담한 기색을 유지한 채로 단칼에 잘랐다. 그의 시선도 자르고, 더불어 흔들리려는 마음의 동요도 잘라냈다. 지난 20여 일의 지옥을 다시금 되풀이할 수는 없다. 겨우 진정이 됐는데, 그걸 또 고스란히 되밟을 수는 없는 거다. 어리석다 못해 진짜로 환장한 놈이 아니라면.

“말씀드렸다시피 월요일에도 전공 시험이 있습니다. 부담은 적지만 남은 시간 내내 족보라도 봐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도 윤열이 형 문제로 말씀드릴 일이 있고, 또 짐도 정리해야 해서 아주 잠깐 시간을 낸 것뿐입니다. 섹스 하고 노닥거릴 시간은 없어요.”

긴장을 하고 보니 또 말투가 차가워졌나 보았다. 흘낏 보니 그의 얼굴은 이미 백짓장이다. 젠장. 젠장, 젠장, 제기랄.

“……지…… 지, 지, 짐……? 지, 짐을 정리해……?”

힘없이 흘러나온 되물음을 통해 그가 창백해진 진짜 이유를 감지했다. 가슴이 아렸다. 침착해야 한다. 이 정도 아픔은 이미 각오했다. 자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제 짐이 꽤 남아 있지요. 옷이랑 책들이요. 그거 정리해서 택배로 보내고 제 전화도 해지하려고 왔습니다. 더 이상은 필요가 없으니까요. 선생님과 만나더라도 앞으론 호텔이나 여관을 이용할 생각이거든요.”

무릎 위에 놓인 화가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얼굴과 마찬가지로 움켜쥔 마디 끝부터 하얗게 질려간다. 아아, 역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물론 각오한 아픔이니 괜찮다.

“……윤열이 형과 약속했습니다. 다신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요. 선생님께 몸을 팔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물론 남창질도 더 이상은 못 하게 됐죠. 안 그럼 형이 절 패 죽이고 말 테니까요. 계속한다면 형에게 더 끔찍하게 상처를 주는 꼴이 될 테죠. 저도 형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이 짓을 계속할 생각은 없거든요.”

“…….”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동안 저축해둔 돈도 꽤 되고, 과외도 몇 탕 뛰면 생활비는 빠듯하게나마 마련할 수 있습니다. 휘도 고3이니, 내년에 대학 들어가고 나면 아르바이트를 시킬 수도 있고요. 그래서 더 이상 선생님께 몸을 팔지는 않습니다. 물론 더 이상 돈도 받지 않을 거예요.”

“…….”

“하지만 그 이전에 선생님과의 계약이 있죠. 휘 합의금을 빌리면서 한 말씀을 기억하시죠? 계약은 제가 결혼하게 될 때까지라고요. 제가 결혼하게 될 때까지는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제 몸을 달라고요.”

“…….”

“물론 그 계약은 유효합니다. 더 이상 돈을 매개로 선생님께 섹스를 파는 짓은 안 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선생님과 맺은 계약도 일단은 약속이니까 지켜야겠죠. 그를 지키는 건 고객에 대한 남창의 입장으로서가 아닙니다. 선생님을 친구로서나마 무척 좋아했던 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지금도 친구로서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본과 공부도 만만치 않고, 과외도 몇 탕 뛰다 보면 시간이 더욱 부족해질 거예요. 일주일에 한번은 아무래도 몹시 부담이 될 것 같습니다. 방학 때라면 또 모르지만요. 선생님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뺀다고 해도 2주에 한 번 만나 뵙는 정도가 고작일 겁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

윤열이 형에겐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두서너 달 안에 완전히 정리하겠다고. 물론 그 기한 안에 결혼 상대자를 고를 생각이다. 일단 결혼을 전제로 한 상대와 사귀게 되면 더 이상 그와 섹스를 할 필요도 없어진다. 두서너 달의 기한을 두고 드물게 이어질 섹스는 그를 이별에 적응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자신과의 섹스가 이젠 별로 재미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줄 생각이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의 몸에 중독된 그가 쉽게 그 중독을 끊어낼 것 같진 않지만, 최대한 노력은 해볼 생각이다. 억지로 최면을 걸어서라도. 이별 후에 죽을 만큼 괴로워할 그를 알고 있다. 자신이 겪어낸, 그리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이 지독한 고통 이상으로 그는 견디기 힘들어할 것이다. 두서너 달의 유예를 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으로부터 서서히 정을 떼게끔 해서 그 고통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하는, 알량한 악어의 눈물이었다.

이별할 거라고 최종 결정을 말하자 윤열이 형은 그랬다. 그렇게까지 사랑한다면 그냥 자신의 배우자로 삼으라고. 게이라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대단한 핸디캡으로 작용하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행복을 억지로 희생하면서까지 그 불합리한 편견에 굴복할 필요는 없는 거라고.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지도 알 수 없는 결정이라 했다. 만에 하나 그가 자신의 생애 유일한 반려일지도 모르지 않냐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그래서 답해주었다.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 아마도 평생 후회할 거라고. 그래도 자신의 선택은 이것이 유일하다고 고집했다. 만약 자신이 평범한 남자였다면, 강이 형의 일을 복수할 필요가 없는, 그저 약간의 성공만을 꿈꾸는 평범한 남자였다면 자신도 그를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나 자신에겐 늘 화인처럼 마음에 각인돼 있는 게 있었다. 형의 시체를 찾아 눈 쌓인 전방 부대로 향하던 질척한 길모퉁이. 피투성이 군복과 철모. 그리고 창백한 채 빳빳이 굳어 있던 형의 시체. 만져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턱 밑을 지나 정수리 뒤쪽을 관통한 총상 자국을. 자신은 손가락까지 밀어 넣어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던가. 절대로 잊지 않도록. 이 서늘함과, 이 비참함을 죽어서까지도 가져가자고. 다른 그 무엇도 이 통렬한 원한과는 바꾸지 않겠노라고.

강이 형에 관해선 자신 못지않은 한을 품고 있는 형은 그대로 입을 닫았다. 그저 한탄처럼, 신음처럼, ‘후회헐 낀데…… 후회헐 낀데…… 고러크름 모지락시럽게 띠어불먼 참말이제 후회헐 낀데……’라는 말만 되풀이했었다. 어쩌면 형은 자신이 그를 쉬이 잊을 것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게이도 아니니, 광기와도 같은 첫사랑의 감정에서 빠져나오고 나면 쉬이 다른 사랑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그래서 끝까지 강력하게 만류를 하지 않았을지도. 물론 차라리 형이 그렇게라도 믿어주는 편이 자신도 홀가분했다. 자신이 자연스레 깨닫고 있는 것처럼, 이 사랑이 아마도 평생 동안 자신을 붙잡을 것이라는 것을, 낙인처럼 문신처럼, 완벽하게 영혼에 찍혀버렸다는 것을 만일 형이 알았더라면, 형은 그때 이상으로 무척이나 걱정하고 가슴 아파했으리라. 그리고 형의 올곧은 기질상 무슨 말을 해서라도 자신의 결정을 재고해보라 종용했을 것이다.

“……정 아쉬우시면 방학 때 보충해도 괜찮고요. 방학 때라면 아무리 아르바이트에 매이더라도 좀 더 시간을 낼 수는 있을 겁니다. ……안 될까요?”

“…….”

물론 여름방학이 시작될 즈음엔 자신은 여자를 사귀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결혼 상대자와. 그러니 이건 그저 입에 발린 소리일 뿐이다.

하얗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떨고만 있을 뿐 그는 좀처럼 대꾸가 없다. 충격 때문이리라. 대충 무언가 둘 사이에 변화가 있으리라곤 예상했겠지만, 자신이 완벽하게 남창질을 그만두고, 또 그와의 만남 또한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음을 하게 되리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충격을 받는 것도 당연하고, 그 이상으로 겁에 질리기도 했겠지. 이것은 그저 시작일 뿐이라는 걸, 어쩌면 그도 본능으로 알아채고 있는지도 모른다. 완전한 이별을 향한 최초의 단 한 걸음. 구체적인 시한이 그저 두서너 달에 불과하다는 사실까진 꿈에도 모를 테지만.

그는 꽤 오랫동안 말이 없다. 물론 자신도 그가 충격을 소화시키고 대꾸를 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보내주었다. 먹먹한 둔통으로 변한 가슴의 상처에서 또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지만 참을 만했다. 그의 이런 반응 또한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므로.

“……바…… 바, 바, 바…… 방학 때도 바쁘겠는걸, 뭐…….”

마침내 그의 입술에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웃음기까지 배어 있었다. 슬쩍 곁눈으로 보니 그는 정말 웃고 있었다. 살짝 입술 끝을 올린 채 눈꼬리를 접은 애처로운 웃음. 조금 웃는가 싶더니 이내 무릎 위에 놓여 있던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상체를 공처럼 웅크린다. 우는 건가 싶어 입술을 질끈 깨물고 그를 살폈다. 어깨며 손이며 다리며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데, 얼굴이 가려진 터라 정말로 울고 있는지는 잘 판단이 안 선다. 하긴 무슨 상관이 있으랴. 직접적으로 눈물을 보이는 거나, 저렇게 태연하게 속울음을 삼키는 거나 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보냐.

“……아아, 만지고 싶어라…… 키스하고 싶어라…….”

웃음기가 섞인 한탄이었다. 흐느끼는 것 같진 않았다. 어쩐지 표정을 알 것 같았다. 부드럽게 웃음을 머금고 있을 그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상냥하고,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한 애틋한 애정으로 충만한 천사의 웃음.

“……빨리 시험도 끝나고 또 빨리 2주가 지나갔으면 좋겠다…….”

“…….”

“……그럼 너 만져도 되니까…… 키스도 괜찮은 거겠지……?”

“…….”

“……괜찮아……. 다 괜찮아…… 괜찮아……. 더 이상 못 만나게 될 줄 알았어. 윤열 씨가 너 호되게 야단쳐서 나 다신 못 만나게 하실 줄 알았어. 최악이 되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거라고.”

“…….”

“……그러니까 괜찮아. 2주에 한 번이라고? 3주에 한 번이라고 해도 좋아. 한 달에 한 번 본다고 해도 감지덕지 만족할걸. 그냥 만나기만 하면 돼. 아주 못 만나는 거만 아니면 돼. 그러면 돼, 위야.”

곧 아주 못 만나게 돼, 내 사랑……. 가슴이 찢어지는 대꾸를 속으로 건네주었다.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돼. 그렇게 만들 거야. 널 버릴 거야, 내 사랑…… 내 어여쁜 연인…… 소중한 나의 아내여…….

웅크렸던 상체가 도로 올라온다. 고개를 활짝 틀어 자신을 응시하는 얼굴엔 눈물이라곤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게 다행이라는 생각은, 어쩐지 별로 들지 않았다. 마주친 영롱한 시선 속엔 결연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짐 챙기자. 시간 별로 없다고 했지? 도와줄게.”

고운 눈꼬리가 아래로 휜다. 하얗게 질려 있던 입술이 크게 벌어지며 고른 치아가 보인다. 꽃이 피듯, 활짝 퍼지는 예쁜 웃음이었다.

4년간의 추억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증거로 남겼다.

재킷이나 청바지를 비롯한 옷뿐 아니라 파자마나 팬티류의 속옷, 혹은 바스 가운과 양말, 목도리, 운동복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챙기고 보니 옷가지만으로도 라면 박스로 무려 일곱 개가 넘었다. 책들도 전공 서적은 물론 운전 면허 교본과 토익 교재, 갖가지 교양 소설은 물론 노트 십수 권과 각 과목 족보들에 이르기까지, 모아놓고 보니 열다섯 박스가 넘어갔다. 고3 때나 썼음직한 다 푼 수학 문제집까지 나왔을 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신발장 안에선 운동화 두 켤레와 구두 한 켤레, 그리고 스포츠샌들은 물론 슬리퍼도 나왔다. 살이 부러진 낡은 우산도 두 개나 나왔다. 손님방에선 농구공이 나왔고, 색이 하나 나왔고, 색 속에 담긴 수영복과 물안경도 찾아냈다. 낡아서 거의 안 쓰게 된 책 배낭도 하나 보였고, 야구 모자 두 개와 비니 하나, 혜윤이가 준 털모자 하나, 까만 귀마개도 하나 보였다. 그가 선물해준 시계와 넥타이, 명품 슈트들은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한 채 침실 벽장 속에서 얌전히 잠자고 있었다. 욕실에서 전용 면도기와 전동 칫솔까지 찾아낸 그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는 이내 박스 속에 집어넣었다. 결국 다 챙기고 보니 스무 박스가 넘는 엄청난 양이었다. 커다란 가구만 없다 뿐이지 완벽한 이삿짐이나 다름이 없었다. 택배를 불러서 짐을 맡기고, 전화국에 전화를 걸어 전용 번호를 해지했다. 모두 다 정리를 끝냈을 때는 5시가 거의 넘어가고 있었다.

짐정리를 하는 내내 그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바지런히 자신을 도왔다. 참담할 속내가 훤히 읽히는데도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는 줄 아는지, 내색하지 않으려 기를 썼다. 앞으로의 만남에 왜 굳이 호텔이나 여관을 이용해야만 하는가. 왜 이렇게까지 짐을 다 정리해 가야만 하는가. 한 번쯤은 그리 되물어올 법한데도 그는 일절 말이 없었다. 감정이 격해질까 두려워서인 것도 같았고, 그러지 말라고 애원이라도 할까 봐 부러 참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자신은 물론 그도 온몸이 땀과 묵은 먼지 범벅이었다. 욕실에 들어가 먼저 샤워할 것을 종용한 그는 샤워를 하고 나오자 주방으로 가 오렌지 주스를 한 잔 짜서 내 왔다. 이곳저곳 들쑤셔진 먼지구덩이 속에서 그와 함께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가슴까지 싸해지는 시원달콤한 맛이었다. 바쁜데 그만 집에 가라고 하는 그를 일축하고 지저분해진 실내도 청소를 했다. 역시 ‘마지막’이기에 최대한 정성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모든 가구와 문설주들에 작별의 말을 되뇌며 청소기를 밀고 걸레질을 했다. 그런 자신을, 그는 주스 잔을 든 채로 오랫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샤워로 말끔해진 자신과 달리 그의 얼굴이며 예쁘장한 옷은 여전히 땀과 먼지투성이였다.

그렇게 집 안 청소까지 마쳤을 땐 더 이상 미적거릴 빌미도 없었다. 미리 바쁘다고 온갖 애처로운 부탁을 다 거절한 바에야 더욱 그러했다. 흘낏 시계를 살피니, 바늘이 5시 3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험 끝나고 전화 드릴게요.”

폭발의 조짐이 느껴지는 바람에 가능한 한 그로부터 시선을 비낀 채 작별을 고했다. 현관 앞까지 따라 나와 자신을 배웅하는 그는 어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식상한 작별 인사에도 딸려오는 답례가 없었다. 그저 약간 고개를 갸웃한 채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았을 따름이었다.

현관 앞에 놓아둔 책 배낭을 메고, 운동화를 신고,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나 그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여전히 어딘가 어리둥절한 눈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뺨과 콧등에 시커멓게 묻어 있는 먼지조차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울컥 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치미는 바람에 그조차 더는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재빨리 뒤돌아서선 현관문을 열었다. 역시 그랬다. 얼굴에 묻어 있는 저 ‘먼지’가 문제였다. 무엇이든, 설령 그게 하찮은 먼지쪼가리라 할지라도, 새로운 추억거리가 되는 것은 곤란했다. 새로운 무언가는 기존의 숨겨놓은 방을 들쑤시고 들어가 간신히 정리해둔 무언가를 엉망진창으로 흐트러트려놓곤 한다.

“……안녕히 계십시오.”

마음을 짓누르느라 잔뜩 퉁명스러워진 인사말을 끝으로 손을 뒤로 돌려 현관문을 닫았다. 찰칵. 자동으로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뛰듯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폭발 수위가 저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렸다. 몹시도 초조해졌다. 복도를 지나고, 로비를 지나고, 빌라 현관을 지나고, 또 정원을 지나 마침내 빌라를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재게 걸었던 것 같았다. 빌라가 있는 골목을 완벽하게 벗어나고 나서야 겨우 걸음이 느긋해졌다. 턱까지 차올랐던 호흡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제야 온통 새까맣게만 보이던 시야가 간신히 트였다. 트인 시야로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거리가 보였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고척동과는 극과 극처럼 다른, 세련되고 호사스러운 건물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거리였다. 어쩌면 거리조차도 이리 사랑스러운 걸까……?

왠지 웃음이 나왔다. 실없는 웃음이 한 번 터지더니 그도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키들키들 웃음을 흘리며 장차 몹시도 그리워질 거리를 한참 동안 걸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 어리둥절해졌다. 무언가 이게 아닌데 하는 이상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마지막의 그네 얼굴이 그리도 어리둥절해 보였는지, 까닭을 알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아름다운 거리에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울려왔다. 비가 올 모양이었다. 조금 낭패스러운 짜증이 스쳐갔다. 꽤 오랫동안 거리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작별 인사를 던질 작정을 굳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차, 우산!’ 하고 멍하니 혀를 찼다. 그러나 자신의 낡은 우산은 현재 짐 박스 속에 갇힌 채 택배 트럭으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리라. 할 수 없지. 포기는 빨랐다. 날씨는 아직 좀 서늘하고, 비를 맞는다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겠지만, 한편으로 감기쯤이야 하고 코웃음을 치는 자신이 있었다. 차라리 그 언젠가처럼 지독한 폐렴에라도 결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육체가 아픈 만큼, 마음의 고통은 조금쯤 무뎌질지도 모르니까.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여전히 어딘가 어리둥절해진 눈으로 시야에 잡힌 모든 것을 기억 창고 속에 주워 담기 시작했다. 기어이 눈이 시리고 코가 매워왔다.

‘마지막’이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조용히 뇌까렸다. 당신을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라고.

툭툭. 점점이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아스팔트 보도 위를 거무스름하게 물들이는 게 보였다. 하늘도 울기 시작한 모양이라고,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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