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1993년 7월. 장인환(張仁歡)
“바쁘실 텐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 선생님. 잡지 나오면 꼭 보내드릴게요.”
여기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작별 인사를 전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하고 의례적인 답례와 함께 청해진 악수를 해주는 것으로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월간 미술 잡지 「Art & Joy」와의 인터뷰가 모두 끝이 났다. 인터뷰 내내 옆에 앉아 있던 기하 선배가 여기자와 사진기자에게 함께 저녁 식사를 하지 않겠느냐고 권했지만, 둘 다 남은 일이 있어 바로 잡지사에 들어가봐야 한다며 거절했다. 두 명의 기자가 총총히 사무실을 나서자 기하 선배가 수고했다며 인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요즘은 인터뷰할 기운도 없다고 자꾸만 거절하는 인환을 향해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을 동원해 승낙하게끔 만들었던 기하 선배였다. 밀어붙여 끝내긴 했는데 내내 어두운 표정이기만 했던 자신이 신경이 쓰였으리라.
기분이 안 좋을수록 작품 활동을 더 열심히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는 형의 조언은 반쯤만 맞아떨어졌다. 지난 5월에 있었던 개인전까지 합해 데뷔 이래 도합 세 차례의 개인전과 다섯 번의 그룹전을 치러낸 번듯한 화가가 되었다. 마니악하지 않은 반추상 계열의 달콤한 소품들은 제법 인기가 있어서 컬렉터들이나 일반 소장자들에게 종종 팔려나가고도 있었다. 적어도 햇병아리 화가란 소리는 면했다는 뜻이었다.
그래선지, 요즘 인환의 매니저격인 기하 선배를 통해 미술 전문 잡지나 신문사로부터 심심찮게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고 있었다. 비평도 비교적 호의적인 편이었다. 화가로서의 자부심과 경력을 쌓기엔 좋은 시점이었다. 자부심 면에선, 부지런한 작업이 정신 건강에 좋다는 건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낮은 물론, 잠이 잘 오지 않는 불면의 밤까지 작업으로 때우려고 하니 우울감은 어째 더 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몰입이 필요한 작업이니만큼, 일단 시작하게 되면 밤을 그대로 홀딱 새워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작업을 안 하면 억지로라도 잠을 청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이 질기게도 안 떨어지는 미열처럼 신경이 쓰이는 우울증도 쉬이 극복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긴, 그저 희망 사항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과연 잠을 좀 더 잘 자는 것으로 해결이 될 문제일까? 아니, 아니…… 그 어떤 자기조절로도 이 둔중한 슬픔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무언가가 사라져버렸다. 이 깊은 우울과 먹먹한 슬픔은 그 때문이다. 어찌 보면 원래부터 없었던 것도 같은데, 또 곰곰 생각해보면,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존재하며, 자신을 지탱해주던 전부였던 것도 같은 생각이 든다. 그 실체조차 모호한데, 잃어버린 것 같다는 자각과 안타까움만은 걷잡을 수가 없다. 저 이상야릇한 상실감이 너무나 커서, 솔직히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는 요즘이었다. 기하 선배 말대로 다 잊고 그저 죽어라 그림이나 그리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상실감을 일으키는 그 무엇과 정면으로 부딪쳐서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것이 옳은지를 말이다.
“그냥 가게? 이따 석주랑 주희 들르기로 했는데 같이 저녁 먹고 가지? 술 한잔해도 좋고.”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크로스백을 둘러메고 나갈 준비를 하니, 접대했던 다구 세트를 치우던 중인 기하 선배가 물어왔다. 잠시, 그럴까 싶은 강렬한 유혹에 시달렸다가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두렵다 한들 만나고픈 욕구마저 누를 수는 없었다. 자주도 아닌, 고작해야 일주일에 두어 번이었다. 그것도 여름방학이 시작된 7월에 들어서야 보너스로 가능해진 주기였다. 방학 전이었던 지난 두 달간은 2주에 한 번 보기도 힘이 들었었다. 인환에게 있어선 그 무엇으로도 방해받을 수 없는 가장 귀한 시간이었다.
“……오늘 약속 있거든요. 위야랑…….”
대꾸를 하자마자 대번에 표정이 안 좋아지는 기하 선배였다. 기하 선배는 물론, 선 화랑을 들락거리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다들 눈치를 채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요즘 자신이 독하게 마른 것이나 거의 정신을 놓고 있는 것, 혹은 웃음을 완전히 잃어버린 어두운 표정 등등 그 모든 원인이 연인에게 있다는 것을 말이다. 고맙게도 모르는 척 내색조차 않아주는 것이 다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연인에 관한 말만 하면 다들 언짢은 기색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았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 이상 연인과의 일로 기하 선배를 비롯한 동료들에게 근심을 주기 싫었다. 연인의 생일 이벤트로 본의 아닌 아웃팅을 당하긴 했지만 선 화랑의 동료들은 동성애자로서의 인환을 다들 따뜻하게 품어주었었다. 고맙고도 또 고마운 동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억지로 살을 찌우거나 밝은 척을 할 순 없다 쳐도, 적어도 우는 모습이나 푸념하는 모습만은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표면적으로 푸념할 일이 있나 하면 그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자신은 연인과 아주 헤어진 것도 아니었고, 섹스를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말로는 ‘연인’이라 칭하고 있지만, 애초부터 연인 사이가 아니었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오히려 매춘이라는 껄끄러운 전제가 사라진 요즘의 관계 맺음이 훨씬 더 도덕적인 것이 사실이었다. 연인은 무려 친구로서 더할 나위 없는 배려를 해주고 있었다. 더 이상 몸을 팔 필요가 없는데도, 자신이 연인에게 품고 있는 애정을 존중해 그네의 몸을 기꺼이 빌려주고 있었다. 그것도 연인에겐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윤열의 뜻을 거역해가면서까지 말이다. 그러니 만나는 횟수가 적어졌다는 점만 빼면 표면적으로 불만을 가질 만한 사항은 전혀 없다. 이렇게 독한 상실감에 휘청거릴 필요도, 연인을 만나는 것을 도리어 겁낼 필요도 전혀 없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기운이 없는지, 왜 이렇게도 연인을 만나는 게 겁이 나는지, 도무지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안 만나는 날은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꼬치꼬치 마르면서도, 막상 오늘처럼 약속이 잡힌 날은 어떻게든 약속을 미루고 싶어 안달이 나곤 한다.
아니, 아니…… 이제 그만 솔직해지자. 물론 까닭은 있다. 자신은 그 까닭을 절절히 자각하고 있다. 몸뚱이로도 자각하고 있고, 가슴으로는 더더욱 절실하게 자각하고 있다. 안 그런가? 바로 그 ‘자각’이 문제였다. 자신이 이렇게 겁을 내는 까닭은. 그리워 미치면서도, 만나고 싶어 이를 악물고 몸서리를 치면서도, 막상 만나게 될 땐 어딘가 땅 밑으로라도 숨어버리고픈 까닭을, 자신은 이미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가볼게요, 선배. 경자네 그룹전 시작하는 날에 한 번 들를게요.”
붙잡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 기하 선배의 떨떠름한 표정을 모르는 척, 간단히 작별 인사를 던지고 선 화랑을 나섰다.
시계를 살피니 오후 5시 15분. 7월도 막바지로 접어든 한여름이라, 아직 사위는 햇빛으로 가득했다. 유달리 긴 장마철이 계속되고 있는 요즘이었다. 잠시 남부 지방으로 전선이 내려간 덕분에 반짝 맑은 날이 계속되고 있는 요 며칠간은 마치 초가을 날씨처럼 아침저녁은 시원하고 낮에도 햇빛만 약간 따가울 뿐이었다. 유달리 서늘한, 기이한 여름이었다. 마치 인환 자신이 처한 상황처럼 기이하면서도 서늘한 세상…….
연인과의 약속 시간은 아직 한참 멀기도 해서, 선 화랑을 나선 인환은 일단 이태원의 미메시스로 차를 몰았다.
역시 알코올기가 보태져야 그나마 용기가 좀 날 것 같았다. 연인이 술 냄새를 질색하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맨 정신으론, 날이 갈수록 짙어지기만 하는 두려움이 어떻게 해도 다스려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약간의 취기가 올라야만, 두려움이 가시고 연인을 향한 본래의 미칠 듯한 그리움만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연인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생긴 나쁜 습관이었다.
미메시스로선 아직 이른 시간대라 그런지 주인인 마해영은 보이지 않았다. 외려 잘됐다 싶었다. 선 화랑의 동료들 못지않게 자신의 이런 꼬락서니는 마해영에게도 꽤나 근심거리였다. 여간해선 타인의 연애사에 일절 관여를 안 하는 쿨한 남자지만, 인환의 한심한 꼬라지는 연인과 관계했던 지난 4년 내내 남자의 혀를 차게끔 만들었었다. 요 2년 남짓은 그나마 평온한 것 같더니 요새 또 왜 그러냐며 남자는 그 특유의 나른한 표정으로 인환을 찔러대곤 했었다. 물론 선 화랑 동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인환은 함구했다. 남자를 걱정시키기도 싫었고, 또 딱히 걱정할 일이 확실히 생겼느냐 하면 그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괜찮았다. 아니, 괜찮다고 매번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아직은 연인과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으며, 가끔씩이지만 섹스도 한다. 연인은 언제나 예의 바르고 또 친절하게 대해준다. 꽤나 마음에 들었던 옛 친구를 대하듯, 혹은 사이좋았던 옛 섹스 파트너를 대하듯. 단 문제는, 그게 그저 ‘옛’이라는 단서를 반드시 달아야만 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과일을 안주 삼아 칵테일 서너 잔을 연거푸 비워내자 원하던 취기가 몸을 감싸왔다. 기분이 달뜨고 뺨 언저리만 살짝 붉어지는 미미한 취기였지만, 맑은 정신은 유지하면서도 두려움을 가라앉히기엔 최적인 수준이었다. 그만 일어날까 싶어 시계를 살피니 아직 7시도 채 안 된 시각이었다. 더 이상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가벼운 식사류를 주문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연인도 식사를 마치고 올 터였다. 빈속에 가면 가뜩이나 몸 상태가 바닥인 요즘이라 연인과의 메마른 정사를 제대로 견디기 힘들 것이다. 오믈렛과 버섯스프를 위장에 억지로 구겨 넣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칠 때까지도 마해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또한 섭섭하기도 했다. 친밀하고 정감 가는 친구의 얼굴만이라도 잠깐 보고 나면 이 뼛속까지 아픈 외로움이 덜어질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그리웠다. 친구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추웠다. 사람의 체온이 그리운, 너무나 추운 여름이었다.
미메시스를 나서며 다시 한 번 확인하듯 시계를 살폈다. 7시 20분이었다. 연인과의 정확한 약속 시각은 저녁 9시. 약속 장소까지 차로 20분이면 충분한 거리였으니, 아직도 시간은 꽤 남아 있는 셈이었다. 그래도 혹여 늦기라도 할까 불안해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술기운이 제법 올라 운전은 불가능했기에, 대리운전 기사를 불러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약속 장소는 어느 고2 남학생의 집 근처인 아현동이었다. 7월로 접어들면서 새로 과외를 가르치게 된 남학생들 중 한 명이라고 했다. 정확히는 아현동의 한구석에 위치한 작은 비즈니스호텔이었는데, 지난 석 달여, 연인과의 몇 번 안 되는 만남 때 이용한 대여섯 군데의 호텔과 여관(모텔)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검소하면서도 깔끔한 그런 곳이었다. 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해 있기도 해서, 아현동 근처에서 연인을 만날 때면 항상 그곳으로 장소를 잡곤 했었다. 물론, ‘항상’이래봤자 세 번이 고작이긴 했지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시 시간 예약을 하겠느냐고 묻는 운전기사에게 아니라고 대꾸해준 뒤 돌려보냈다. 어차피 자신은 호텔에서 자고 갈 터였기에 기사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호텔 로비로 들어가 키를 받고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난 세 번 왔을 때와 동일한 방인 608호를 예약해 오전에 체크인까지 해두었기 때문에, 나중에 연인이 방을 찾아오기 위해 로비에서 묻는 껄끄러움조차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이도 두어 번 호텔에서의 만남 후에 터득할 수 있었던 슬픈 노하우 중 하나였다. 특A급 호텔이 아니라 그런지, 특정 룸을 지정해 예약할 수 없는 호텔이나 여관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비즈니스호텔이나 여관에 남자 둘이 묵는다고 무조건 의심을 살 리도 없지만, 아무래도 연인의 남다른 용모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는 만큼, 언제 어느 때 의심의 시선을 받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인환 자신이야 이미 그런 부분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지만 연인은 달랐다. 오로지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연인은 게이로 소문날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연인을 어찌 필사적으로 보호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지난해 1월, 양평에서의 끔찍한 기억조차 생생히 뇌리에 남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두어 시간 남짓한 만남을 위해 그날 오전에 예약된 호텔이나 여관에 들러 미리 체크인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전화로 방 번호를 알려주는 번거로움쯤이야 인환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연인만 세상의 무시무시한 시선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면 말이다.
룸 안으로 들어서서 키를 꽂자 방 안이 불빛으로 환해졌다. 이번까지 총 네 번째 방문이건만 흐릿하게 나는 호텔방 특유의 방향제 냄새는 여전히 낯설었다. 퀸사이즈 침대 하나와 TV, 그리고 오디오와 화장대와 냉장고, 마지막으로 커플 테이블 세트가 가구의 전부인 열 평 크기의 검소한 방 안도 낯설고 을씨년스럽기는 한가지였다. 입고 있던 여름용 재킷을 벗어 테이블 위에 놓은 뒤 방 안의 후덥지근하게 달아오른 공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날씨가 제법 서늘해서 에어컨을 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한껏 달아올랐던 취기조차 가라앉고 나니,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설핏 소름마저 돋을 정도였다.
창문까지 열고 보니 낯설고 좁은 방 안에서 더 이상 할 일이라곤 없었다. 그렇다고 음악을 듣고 싶지도, TV는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시선은 자연스레 TV 장식장에 붙어 있는 전자시계로 갔다. 7시 55분. 아직 한 시간 하고도 5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아무리 귀찮은 약속일지언정 연인이 약속 시간을 어기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처럼 멍청하게 미리 몇 십 분이나 먼저 와 기다리는 법도 없었다. 시계추처럼 정확한 연인이었다. 연인의 오차 범위는 5분 내외. 거의 약속 시간 3∼4분 전에 도착하곤 한다. 몇 년 전이었던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연인과의 약속에 7∼8분 정도 늦은 적이 있었다. 그때 5분 이상은 절대로 기다려주지 않는 연인의 철저함을 알고부턴 인환은 연인과 약속이 있는 날은 기본적으로 30분쯤은 먼저 나가 연인을 기다리는 일이 버릇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쳐도 이렇게 매번 한 시간 이상을 미리 와서 기다리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짓거리임에 틀림없었다. 더구나, 그 시간이 기쁨이나 기대감과는 거리가 먼, 그저 이유 없이 불안하고, 슬프며, 또 간신히 억제된 두려움으로 점철돼 있는 바에야. 그럼에도 그만둘 수 없는 건, 그것 또한 자신에겐 매우 익숙한 감정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 아득한 불안감도, 가슴 저린 슬픔도, 전신의 신경줄이 팽팽하게 조여지는 것 같은 두려움도, 모두 전혀 낯설지 않았다. 낯설기는커녕, 이것이야말로 지난 몇 해, 연인과 관계를 맺으며 알게 된 감정 중에서도 가장 익숙한 것이라고 해야 마땅했다. 자신은 지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렇게 불안해하고, 슬퍼하고, 또 두려워하며 연인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그렇게 연인을 기다리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이미 이골이 나 있는 자신이었다. 그랬다. 어느덧 5년이었다. 햇수로만 벌써 5년째. 89년 봄, 촌스러운 고딩 교복 차림의 어린 연인과 조우한 이래, 자신은 대부분 늘 이렇게 사시나무 떨듯 떨며 연인을 기다리고만 있다. 언젠가는 자신의 곁을 떠나갈 연인을, 그 언젠가는 떠나간 후 다신 돌아오지 않을 연인을, 그렇게 그 ‘언젠가’를 두려워하며, 떨며, 기다리고만 있다. 그리고 그 언젠가 이별이 찾아오게 되면 자신은 그야말로 끝이 없는 기다림의 시간만 보내게 되겠지. 영원히 돌아와주지 않을 연인을 그리며, 연인 없는 무간지옥의 시간을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어쩐지 이제 그 ‘언젠가’마저 바로 코앞에까지 바싹 다가와 있는 것만 같은 예감이 들고 있었다.
멀리 있었다. 연인의 마음은, 지난 5년 가운데 그 어느 때보다 더 인환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도무지 연인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질 않았다. 자신의 꽤나 민감했던 ‘사랑 더듬이’조차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질 정도로. 이대로 자꾸만 멀어져, 더 이상 연인의 마음이 보이지 않게 되면, 그때야말로 그 ‘언젠가’가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닥 먼 얘기는 아닐 터였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런 사정이었다.
―……동해∼물과 백두우산이∼ 마르고 닳도록∼∼∼.
연인이 노래하고 있었다. 아름답기 짝이 없는 나지막한 중저음이 들쭉날쭉한 음정과 박자로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에∼∼∼∼ 무궁화 사암천리 화려가앙산∼∼∼.
사상 최악의 애국가를 부르면서도 무표정한 아름다운 얼굴은 따스하게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제 자랑 하나 해도 돼요……? 연인이 상냥한 어조로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자신의 정수리에 코와 입술을 파묻은 채 애무하듯 흐릿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평가해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근사한 친구로 남고 싶어요…….
연인의 품 안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 연인이 말을 할 때마다 기분 좋은 울림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행복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만큼 행복한 순간이었다. 연인의 코트 날개 속에 폭 파묻힌 채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며 얼굴을 부벼댔다. 연인은 그런 자신을 소중하고 소중하게 안아주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짙은 땀 냄새와 알싸한 호르몬 냄새, 그리고 비누 냄새가 뒤섞인 연인의 달콤한 체취가 폐부 가득 들어차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냄새였다.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딩동…….
멀리서 차임벨 소리가 들려왔다. 전기를 맞은 것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다른 때보다 좀 더 마신 술기운 탓이었을까, 엉덩이만 침대에 슬쩍 걸친 자세로 잠시 졸았던가 보았다. 시선을 방문 쪽에 둔 채 인환은 모로 누워 있었다. 딩동, 딩동, 딩동……. 연달아 울린 차임벨은 이번엔 좀 더 확실하게 의식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그제야 혼곤하게 꿈속을 떠돌던 넋이 제자리로 내려앉았다. 낯선 호텔방이 시야 가득 밟혀들었다. 그리고 다시금 울린 차임벨 소리. 기절초풍하듯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웠다. 큰 걸음으로 열 걸음도 채 되지 않는 방문까지의 거리를 단숨에 내달려 문을 열었다.
감색 민소매 티에 낡은 하늘빛 청바지 차림의 연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익숙한 검정색 책 배낭의 어깨끈도, 낡은 흰색 농구화도 보였다. 꿈의 여파 때문이었을까. 서둘러 문을 열긴 했어도 아직까지 좀 멍해 있는 시선이 연인의 모습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신없이 쫓아다녔다. ……동해∼물과 백두우산이∼ 마르고 닳도록∼∼∼. 불쑥 현실까지 쫓아온 행복한 장면이 연인의 얼굴과 겹쳐졌다. 저도 모르게 ‘벙싯’ 하고 바보 같은 웃음이 터졌다. 도무지 현실감을 상실한 어이없는 짓거리였지만, 부지불식간에 터져버린 웃음을 도무지 도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표정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 그런 인환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로감이 역력한 눈시울엔 희미하게나마 짜증 같은 것도 어려 있었다.
“……주무시고 계셨나 봅니다.”
극히 예의 바른 어조로 던져진 물음이었지만, 그 속을 흐릿하게 떠돌고 있는 것도 역시 불쾌감이었다. 맙소사. 그제야 인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연인은 아마도 그네를 약 올리는 웃음이라 여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벨소리도 꽤 오랫동안 울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도 안 나오셔서 로비로 다시 내려갈까 했거든요. 이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멍청하니 굳어진 채 연인만 멀뚱멀뚱 보고 있는데, 다시금 냉담한 일갈이 떨어졌다. 맙소사! 기겁을 해선 옆으로 비켜섰다. 방문 한가운데 서서 진입을 막고 있다는 사실도 그제야 자각한했.
“또 술을 드셨군요. 그러니 벨 소리도 못 듣고 정신없이 주무시죠. 입가도 닦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침 자국이 보기 그러네요.”
자신을 스쳐 곧바로 룸 안에 들어선 연인이 다시 한 번 일갈했다. 이번엔 예의로도 걸러지지 않은 원색적인 질책이었다. 입술 끝에 비죽 걸린 실소는 비웃음처럼도 보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동요를 애써 삭이며, 운동화를 벗고 먼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연인을 뒤따랐다. 부랴부랴 입 주변을 닦았음은 물론이었다. 과연, 턱 아래로 길게 이어진 축축한 감촉으로 보아 침의 흔적이 역력했다. 침뿐만이 아니었다. 입가를 닦으면서 보니, 양쪽 뺨과 눈가 역시 흥건한 습기로 가득했다. 맙소사. 자면서 울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양손바닥을 활짝 펴서 잽싸게 닦아낸 것은 물론이었다. 이 몰골을 하고 웃었다니. 딱 ‘영구’였다. 영구 짓거리. ……영구 어없다∼∼.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얼굴도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만큼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일단 하고 나서 씻겠습니다. 조금 피곤해서요.”
침대 발치에 책 배낭을 던져놓으며 그렇게 덧붙인 연인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피곤하다더니 정말 평소보다 나른한 몸놀림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연인의 팔뚝에 걸쳐진 민소매 티가 겨드랑이까지 단숨에 벗겨져 올라가며 조각 같은 가슴과 복부가 드러났다. 티셔츠가 바닥에 떨어지고, 이어 청바지와 팬티도 벗어 던진 연인은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다.
낡은 손목시계마저 풀어 테이블 위에 던지곤, 그대로 무너지듯 침대에 드러눕는 연인을 꼼짝도 않고 바라보았다. 똑바로 누운 채 한쪽 팔뚝으로 눈가를 가린 연인은 마치 그대로 잠든 것처럼도 보였다. 지난 석 달여 동안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연인은 여전히 수척한 얼굴이었다. 체중도 많이 빠져서, 가뜩이나 지방이라곤 거의 없는 조각 같은 몸은 흡사 전문 모델처럼 호리호리해 보이기까지 했다. 4월 말에 처음 보고 가슴이 찢어졌을 때보단 그나마 조금 살이 오르긴 했으나, 애초의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완벽한 몸을 아는 인환의 눈엔 연인의 현재 모습은 여전히 애처롭고 가슴 아린 불안정함이었다. 피로한 것이 당연했다. 몸 상태도 그리 안 좋은데다, 단 하루도 제대로 쉬지 않는 연인이었다.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학기 중에 했던 것의 몇 배나 더 늘려 과외를 뛰고 있는 사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 본과 수업이 워낙 빡빡해서 학기 중엔 그리 시간을 많이 못 낸다고 했다. 결국 방학 때만이 그나마 여유 있게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였는데, 그러다 보니 학기 중의 그것보다도 더 빠듯하게 시간을 쪼개 쓰고 있는 연인이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하루 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아이들을 가르쳤을 터였다. 좀처럼 살이 오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피로하지 않다고 하면 오히려 그게 더 거짓말일 터였다. 욱신. 생각의 흐름이 거기에 이르자, 이젠 완전히 익숙해진 죄책감과 수치감이 심한 가슴의 통증으로 왔다. 몸은 얼음땡이 됐는데 심장 쪽은 감당하기 힘들 지경으로 빠르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연인과 함께 있고픈 이기적인 욕망과, 당장 바닥으로 꺼져서라도 사라지고픈 이타적인 소망이 서로 저울질을 하며 넋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이리 안쓰러운 연인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안 오십니까?”
눈을 가린 자세 그대로 연인이 물어왔다. 예의 바르기 그지없는 어조였지만 피로감이 역력한 목소리엔 역시 흐릿한 짜증이 배어 있었다. 멍하니 선 채 꽤 오랫동안 연인만 응시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술기운은 거의 가신 것 같은데도 생각이든 행동이든 유달리 한 템포 늦게 반응이 나가고 있었다. 연인의 흐릿한 짜증엔 그런 답답한 자신에 대한 질책이 내포돼 있는 것 같았다.
“……많이 피곤하지? 그, 그냥 잠깐 눈이라도 붙이지 그러니?”
간신히 감정을 억누른 다정한 목소리로 대꾸를 주었다. 마음의 아픔과 죄책감과 두려움들로 바짝 굳어버린 주제에 목소리만은 그럭저럭 태연히 나와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잠은 집에 가서 자는 쪽이 더 편합니다. 빨리 하고 가는 게 더 빨리 쉴 수 있단 얘기죠. 이리 오세요. 피로해도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을 겁니다.”
느릿하게 뱉어내는 어조엔 조금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상냥하게까지 느껴져서, 말뜻에 내포된 시니컬함 같은 건 그저 착각이 아닐까 싶기까지 했다. 반드시 섹스를 하고픈 건 아니라고, 그리 피로에 지친 너를 괴롭게 하고 싶은 것도 물론 절대 아니라고, 가득 차오른 진심이 입술 끝에서 맴돌았다. 그저 얼굴만 봐도 그걸로 족하다고, 그저 서로의 손을 다정히 잡고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함께 있다는 자각만 가질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물론, 언제나 그렇듯 차마 입 밖으로 토해지진 않는다. 그럴 염치조차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정말로 연인을 배려한다면 약속 자체를 잡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리 할 수 없을 바에야, 섹스를 하던 안 하든 연인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한가지다. 그리고 기왕 연인의 피로감을 가중시키는 바에야, 차라리 섹스를 하는 편이 그나마 연인의 성적 욕구 불만을 해소하는 데는 더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늘은 별로 내키지 않으신 겁니까? 어디 몸이 안 좋으신가요?”
연인의 얼굴을 반 이상 가리고 있던 팔뚝이 내려가는 게 보였다. 이쪽을 향해 고개를 약간 기울인 연인이 빤히 시선을 마주 보내오고 있었다. 무언가 관찰을 하듯 예리한 시선이었다. 일체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담담해서 더 서늘하게 느껴지는 그것에, 피부 위로 설핏 소름이 달려 나갔다. 무서웠다. 정말로 타인처럼 낯선 이의 눈빛이어서 연인의 모습을 한 타인이 연인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조차 들었다. 그런 연인도, 또 그렇게 느끼는 스스로도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프신 건 아니죠?”
연인이 재차 물어왔다. 포획된 사냥감마냥 미세하게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은 괜찮았다. 많이 마른데다 체력도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그건 연인도 똑같은 상황이니 문제라 할 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연인 쪽이 더 문제라면 문제였다. 적어도 인환 자신은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필사적으로 돈을 벌어야만 하는 일은 없다.
“……또 떨고 계시네요. 좀 긴장하셨나 봅니다. 이리 오세요. 몸은 괜찮다고 하시니 한 번 하면 기분도 나아질 겁니다.”
연인이 웃으며 명령했다. 여전히 상냥한 말투였다. 두려움은, 그러나 차라리 더해지면 더해졌지 결코 가시는 일은 없었다. 차라리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웃으며 상냥하게 대해주는 것보단 차라리 그게 더 나으리라고. 그럼 적어도 연인이 이다지도 타인처럼 느껴지지는 않을 터였다.
침대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채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인환을 보기 답답했는지, 연인이 마침내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여위어서 한층 더 조각 같아진 나신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모르는 사람의 나신을 직시한 것마냥, 설핏 소름이 일고 수치심이 들었다. 발기할 기미조차 안 보이는 연인의 성기 쪽으로는 되도록 시선을 보내지 않기 위해 기를 썼다.
“……벗겨도 되죠?”
장난처럼 가벼운 일별을 던지며 빤히 반응을 살피는 시선도 무섭기 짝이 없었다.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쿡 하고 터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역시 실소 같기도 하고 비웃음 같기도 한, 이상야릇한 그것이었다. 단아한 손가락이 몸에 꼭 붙는 반팔 셔츠 단추를 단숨에 풀어헤쳤다. 벗어두었던 재킷과 같은 옷감인 여름용 팬츠도 연인의 재빠른 손길에 속옷과 함께 금세 바닥에 떨어졌다. 양말과 시계와 펜던트도 차례로 벗겨져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였다. 서늘한 한기가 또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자 연인이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고 장난처럼 말했다. ‘다른 남자 앞에서도 이러신다면 처녀라고 오해도 받겠는데요?’ 덧붙인 놀림은 그대로 비수가 되었다. 요즘 늘 그렇듯 상냥하게 웃으며 던져준 농담이니 마주 웃어주면 그뿐인데, 도저히 연인처럼 웃음이 나오지를 않았다. 연인이 기대할 만한 반응을 못 하는 이런 딱딱한 자신조차 두려움의 한 원인이라고, 연인은 차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더더욱 뻣뻣하게 굳은 채 떨기만 할 뿐이라고. 가증스럽게도 처녀 같은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만져주시겠습니까? 피곤해서 그런지 발기가 잘 안 되네요.”
마침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자 덤덤하게 내뱉어진 명령이었다. 연인의 손이 자신의 오른손을 쥐더니 바로 연인의 사타구니 틈으로 가져갔다. 빳빳하고 무성한 음모의 숲과, 보통 이상의 크기를 자랑하는 훌륭한 물건이 손안 가득 들어왔다. 잔뜩 굳어 있으면서도, 그간의 경험은 능숙하게 수음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화답하듯 연인의 손도 인환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왔다.
“……흐응…….”
따뜻한 손바닥의 감촉을 느끼자마자 성기는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두려움은 도리어 성적인 긴장을 더더욱 증폭시킨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머리도, 가슴도 그저 벌벌 떨고 있는 주제에, 생식기만이 다른 개체인 것마냥 잘도 활기를 띠고 있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다. 이토록 쉬이 반응하는 화냥년 주제에 어떻게 반드시 섹스를 하고픈 건 아니라고 연인에게 항변할 수가 있겠는가. 그저 얼굴만 봐도 족하다고, 그저 서로의 손을 다정히 잡고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함께 있다는 자각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변명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차라리 연인이 그런 플라토닉한 발언을 한다면 그대로 믿어질 터였다. 자신이 기왕 발딱 일어서서 액을 뚝뚝 흘릴 때까지 연인은 그저 마지못해 겨우 일어섰을 뿐이었으므로. 그것도 삽입을 하기엔 각도나 파워 모두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기억하고 있던 연인의 성감대를 아무리 열심히 자극해도 소용이 없었다. 다른 몸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기억 자체가 완벽하게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빠…… 빠, 빠, 빨아보면 좀 될 거 같은데…… 빨아보면 안 돼……?”
“싫습니다. 오럴은 더럽고 비위생적이라 싫습니다. 기분도 나쁘고요.”
어떻게 해도 잘 발기가 안 되는 연인에게 초조해진 나머지 혹시나 해서 물어보지만 역시나의 대꾸가 떨어진다.
‘그건 더럽지 않습니까?’
최초의 결합 때 연인의 불쾌한 듯 내쏘던 일갈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게 화인처럼 박혀서, 서로 사이좋은 섹스 파트너로서 즐기던 시절에도 되도록 오럴 섹스는 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간간이 자신이 빨고 싶다고 애원하면 가끔씩이나마 빨게 해주었던 연인인데, 이젠 그 가끔조차 질색이 된 모양이었다.
“……이상하군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죠? 정말 피곤해서 그런가?”
꽤 오랫동안 자신의 필사적인 시도를 참아주고 있던 연인이 마침내 일갈했다. 짜증이 선연한 목소리였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치솟았다. ‘잠시만요’ 하고 무성의하게 덧붙인 연인이 인환을 밀치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스스로 수음질을 하기 위해서였다. 창문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연인이 거칠게 손목을 흔들기 시작했다. 인환은 이미 완벽하게 연인의 시야 밖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발가벗은 채 페니스를 완벽하게 곧추세운 바보스러운 몰골로 멍하니 연인만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리 필사적으로 움직인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연인이 수음질을 시작한 지 채 1분이 지나지 않아 연인의 성기는 훌륭하게 일어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듯 바짝 일어선 그것은 인환에겐 새로운 공포였다. 잦아들었던 떨림이 또다시 전신을 휩쓸었다. 연인의 발기가 인환에겐 발기 부전의 신호탄이라도 된 듯싶었다. 아랫도리로 저릿하게 몰려들었던 혈액이 얼굴로 역행을 한 것도 같았다. 이유도 채 자각하지 못한 채 인환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고, 대신 페니스가 아래로 축 처지고 있었다.
연인이 흥분한 성기를 출렁거리며 테이블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청바지 뒷주머니를 뒤지는가 싶더니 꺼낸 것은 콘돔 서너 봉이었다. 그중 하나를 이로 물어 포장을 뜯곤 바로 발기한 페니스에 뒤집어씌웠다. 인환이 처녀였다는 것을 안 이래로, 그리고 8천만 원의 빚으로 연인을 다시 산 이래로, 여간해선 콘돔을 쓰지 않던 연인이었다. 감도가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던 연인이 어느 순간부터 다시금 콘돔을 꼬박꼬박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지난 4월, 두 사람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직후부터였다. 5년 전 처음, 어린 연인을 사서 일반 포르노테이프를 통해 억지로 발기를 유도할 때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연인은 그때처럼 좀체 발기하지 못했고, 그때처럼 바기나 대용인 사내들의 항문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돌아선 연인의 시선이 곧장 인환에게로 꽂혀들었다. 빨개진 얼굴이며 또다시 떨기 시작한 몸, 그리고 도로 축 늘어져버린 성기들을 하나하나 핥듯이 살피더니, 재미있다는 듯 피식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여전히 의미 불명인 이상야릇한 웃음이었다. 빨개졌던 얼굴은 연인의 실소가 터진 순간부터 이내 하얗게 핏기를 잃어갔다. 떨림도 거의 경련 수준으로 극심해졌다. 그런 인환의 반응을 샅샅이 훑으면서도 연인의 태도는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의미 불명의 서늘한 웃음이 문득 상냥한 것으로 변했다. 다정하면서도 정감 어린 그것으로.
마침내 두어 걸음을 걸어 인환의 코앞으로 되돌아온 연인이 손을 뻗어왔다. 양쪽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싼, 연인의 웃음처럼 서늘한 포옹이었다. 입술도 내려왔다. 연인이 호텔방에 들어선 이래 최초의 키스였다. 입가를 혀끝으로 더듬고, 슬쩍 입술을 깨물어 진입을 시도하는 연인에게 멍하니 입술을 벌려주는 것으로 무장 해제를 했다. 뜨겁게 밟혀든 혀는, 그러나 역시 연인의 포옹만큼 혹은 웃음만큼 낯설고 서늘했다. 예의 바르고, 기본에 충실한 테크닉은 남창의 전적을 그대로 보여주듯 노련했지만 그 키스엔 무언가가 결여돼 있었다. 그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설명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인환의 넋은 더더욱 가부러졌다.
마주 안으면 그 서늘함이 혹여 사라질까 조심조심 연인의 등으로 팔을 둘렀다. 마주 키스를 하면 이 까마득한 두려움이 스러질까, 연인의 혓바닥 끝을 포개 안았다. 물론 아무리 다정히 껴안은들, 아무리 열렬하게 입을 맞춘들 도저히 몰아낼 수 없는 냉기였다. 공포였다. 지난 석 달 남짓,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경험하고 인지해낸 냉혹한 현실이었다.
“……또 우세요……?”
놀리듯 묻는 연인에, 반사적으로 눈가에 손을 가져갔다. 그저 푸석하게 메마른 감촉만이 느껴져서 고개를 갸웃하자, 연인은 또 그런 이상야릇한 실소를 머금었다. 연인의 한 손이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어왔다. 능숙하게 움켜쥐며 주무르자, 마음을 배반한 생물은 다시 한 번 발딱 일어섰다. 키득거리는 연인의 실소 또한 짙어졌음은 물론이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화냥년 주제에 내숭 떨지 말라는 듯. 농담처럼 가벼운 비웃음이 귓가에 선연히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게 연인의 목소리였는지, 아니면 스스로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청인지조차 불분명했다.
만지고 싶은데 만질 수가 없었다. 키스하고 싶은데 키스할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분명히 만지고 있고 키스도 하고 있는데, 그게 연인인지 아니면 낯선 타인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그런 의심을 하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어 더더욱 무서웠다.
예의 바른 애무와 키스의 끝에 몸이 침대로 밀어붙여졌다. 개처럼 엎드린 후배위 자세였다. 진짜 연인이 가장 선호하는 자세라는 걸 알기에 완벽하게 복종하며 엎드렸다. 윤활제를 듬뿍 바른 손가락이 항문 안으로 거칠게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 급해서요.’ 잔뜩 흥분한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 급한 게 맞았다. 미적거렸다간 도로 쪼그라드는 연인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바쁘게 고개를 끄덕이자, 연인이 다급하게 귀두를 쑤시고 들어왔다. 흥건하게 발라진 윤활제가 아니었다면 상처가 났을 만큼 거친 삽입이었다. 단숨에 끝까지 삽입된 흉기는 단도직입적으로 전립선부터 찔러왔다. 기교고 뭐고 없었다. 연인도 급했고, 그런 연인이 초조하고 두려울 뿐인 자신은 더욱 급했다. 무턱대고 거칠게 찔러드는 전립선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기계적인 자극이었지만 사정까지 가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게 사내라는 짐승의 몸이었다. 마음이 얼어붙든, 가슴이 서럽게 울든, 짐승은 일절 아랑곳하지 않았다. 후배위로 시작한 추삽질이 교차위를 거쳐 요고위로 마무리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15분. 난폭한 전립선의 자극에 5분이 약간 지난 시점에 인환이 먼저 사정했고, 연인은 딱 그 배의 시간만큼 거친 추삽질을 거듭한 끝에 꼭대기에 올랐다. 워낙 몸 상태가 바닥이라, 그저 단 한 번의 오르가슴만으로도 인환은 기진해서 넘어갔다. 사정 후 연인의 마지막 격렬한 스피드를 채 따라가지 못해 반쯤은 혼절해 있던 인환의 몸이 갑자기 와락 죄어들었다. 느리게 힘껏 튕겨지는 연인의 허리를 통해 연인이 사정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흐릿한 신음성과 함께, 빠르게 사정을 마친 페니스가 내벽을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연인의 양팔에 의해 조여졌던 상반신의 결합도 동시에 풀렸다. 기진맥진한 인환의 몸을 옆으로 민 연인이 권태로운 몸짓으로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한 번 사정을 한 후에도 두어 시간은 끄떡 없이 발기 상태를 유지하며 피스톤 운동을 거듭하던 연인은 이제 그저 기억 속에서만 아스라할 뿐이었다. 그 원인이 무엇일지 추측하는 일은, 역시 그만둔 지 오래였다.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 역시 가부러지는 공포였다. 그저 연인이 자신의 몸에 더 이상 쾌락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만은 확연히 자각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랑은 아니라 해도, 몸만은 그럭저럭 궁합이 좋았다고 여겼던 순간도 있었더랬다. 연인이 한창때의 성욕에 미쳤을 때에는 도착적일 정도로 자신의 몸을 탐하기도 하지 않았었던가. 그러나 이제쯤 생각해보니 그도 그저 자신의 형편 좋을 착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나 의심이 들었다. 남창으로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쾌락에 맞춰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 말이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괴로워져서 눈을 꼭 감은 채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는 데만 열중했다. 가슴 근처에 똬리를 틀고 앉은 것 같은 울음보가 자꾸만 미진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것까진 어쩔 수 없다 쳐도, 의식적으로는 절대로 울고 싶지 않았다. 연인 앞에서는 더더욱.
10센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서 연인의 깊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달콤한 후희는커녕 가벼운 립 키스조차 없었다. 그도 그저 아스라한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린 그리운 어떤 것에 불과했다. 콘돔을 빼서 휴지통에 던진 연인은 만사가 귀찮은 듯 인환의 옆에 반듯이 누운 채, 담담히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었다. 고개만 살짝 돌려 보니, 처음 방 안에 들어서서 침대에 드러누웠을 때처럼 한쪽 팔로 눈가를 가린 자세였다. 뿌연 전등불 아래 자신이 내뿜는 거친 호흡 소리만이 요란했다. 절정의 여운에 떨며 허덕이는 이는 인환 자신뿐인 것 같았다. 숨소리조차 서로가 너무나 다른, 선뜩하게 둘로 나뉜 ‘타인’이었다. 섹스로 한 몸이 됐던 순간 또한 너무나 짧아서,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마냥 꿈처럼 아스라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연인만큼 호흡이 부드러워졌을 때 다시 한 번 연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눈가를 가렸던 연인의 한 팔은 아랫배 근처로 내려가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연인의 프로필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눈꺼풀은 편안히 감겨 있고, 입술마저 살짝 벌어져 있는 걸 보니 선잠이라도 든 것 같았다. 언제나 피곤에 지친 모습의 연인이었지만 정사가 끝나면 욕실로 들어가기 바빴고, 또 샤워 후엔 자신보다 먼저 도망치듯 호텔을 빠져나가곤 하는 연인이었다. 이리 선잠이 든 걸 보니 오늘은 정말 평소 이상으로 지친 모양이었다. 피로에 지친 연인에 대한 걱정과, 덕분에 좀 더 연인과 함께 있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동시에 마음을 어지럽혔다. 일단 잠이 들면 좀처럼 깨지 않는 연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의심이 숨소리조차 죽이게끔 만들었다. 불을 끄면 좀 더 오래 자줄까 하는 음험한 욕심도 생겼다. 물론 실천할 용기는 없었다. 불을 끄러 침대를 빠져나가다 매트리스에 진동이 일면 도리어 연인이 깰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연인이 깨지 않도록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며 모로 돌아누웠다. 살짝 훔쳐볼 때보다 연인의 얼굴이며 몸이 좀 더 잘 눈에 들어왔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두드러지는 프로필도, 여윈 나신의 몸도 여전히 예쁘기만 해서 가슴이 설레었다. 이렇게 잠든 연인은 전혀 낯설지도, 또 무섭지도 않아서 더욱 좋았다. 기억에 있는 그대로, 여전히 자기 자신보다도 더 친숙하고 그립기만 한 연인일 뿐이었다. 비로소 진짜 연인과 만나 함께인 듯 실감이 들었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리고 목이 메었다. 행복했다. 너무나 행복한 충만감 속에서 그저 멍하니 잠든 연인만 바라보았다. 만지고 싶고, 키스도 하고 싶고, 품 안 가득 껴안고도 싶었지만, 역시 연인을 깨울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포기했다. 마냥 바라보고, 함께하는 실감만으로도 너무나 기뻐서 그리 욕심이 강렬한 것도 아니었다.
깊은 눈시울과 촘촘하고 긴 속눈썹, 크고 잘생긴 귀며 땀에 젖은 채 아무렇게나 늘어진 머리칼, 도톰하게 벌어진 섹시한 입술들을, 자신의 굶주린 시선이 정처 없이 헤매 다녔다. 발길 닿는 대로의 만족한 여행길에 어느덧 까무룩 시간이 사라졌다. 공간도 사라졌다. 지금이 과거 추억 속의 어느 한때인지, 아니면 어느 낯선 비즈니스호텔 안의 현재인지 아리송해졌다. 현재가 과거이고 과거가 현재였으면 하고, 몽롱해진 비현실감 속에서 가만히 기도했다.
거칠게 밀리는 것 같은 어깨에 문득 소스라쳤다. 번쩍 눈을 뜬 시야로 연인의 놀란 얼굴이 가득 들어차왔다. 맙소사. 비몽사몽 졸았던 게 문제였다. 졸다가 자기도 모르게 연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 연인이 깨어나 버렸고, 놀란 연인도 무심코 자신을 밀쳐냈다는 것을, 인환은 눈을 뜬 그 즉시 전부 알아차렸다.
당장은 아쉬움보다 당혹감이 너무나 커서, 그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인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얼떨떨한 것은 연인도 한가지였던 모양이었다. 20센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서 연인도 한동안 멍하니 자신의 얼굴만 들여다보았으니까. 그러나 역시 연인은 자신보단 훨씬 기민했다. 어느새 표정을 푼 연인이 자연스레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게 보였다. 대형 고양잇과 짐승처럼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는 것도 보였다.
“……잠깐 잠이 들었나 보네요.”
탁해진 목소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시선은 TV 장식장 옆 전자 시계를 향해 있었다. 인환의 시선도 연인을 따라 시계로 갔다. 10시 7분. 연인이 30분쯤 잠이 들었다면 자신은 채 5분도 졸지 않았을 시각이었다. 그까짓 5분의 졸음을 참지 못하다니. 억울해할 자격조차 없었다. 채 수습되지 못한 안타까움과 당혹감을 그대로 드러낸 시선이 연인의 얼굴로 되돌아갔다. 하품으로 젖은 눈시울을 가늘게 접은 채 연인은 웃고 있었다. 역시 인환으로선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타인’의 웃음이었다.
“……먼저 씻겠습니다.”
의례적인 말과 함께 연인이 욕실로 들어갔다. 곧바로 흐릿한 물소리가 났고, 변기 물 내리는 소리도 났다. 빳빳하게 굳어든 몸이 좀처럼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채 10분이 넘지 않는 짧은 샤워를 마친 연인이 도로 욕실에서 나올 동안, 인환은 고작해야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을 뿐이었다.
“……다음 주엔 그냥 제낄까?”
젖은 머리칼을 대충 턴 연인이 옷을 주워 입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무심코 말이 나왔다. 물론, 뱉어낸 즉시 후회했다. 낯빛까지 후회로 창백해지는 것 같았다.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기에 더더욱 후회스러웠다. 아랫배까지 다 아파올 지경이었다. 연인이 청바지의 벨트를 채우다 말고서 빤히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네…… 네가…… 너, 너무 피곤해하는 거 같아서…… 미안해서 그래…… 네가 너무 바쁜 거 같으니까…… 다음 주는 그냥 만나지 말자, 위야. 응?”
마음은 후회와 미련이 철철 넘치는 주제에 입바른 소리는 잘도 이어졌다. 진심이 아닌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연인은 한동안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저 표정 없는 서늘한 시선으로 인환을 관찰하듯 바라보았을 따름이었다.
“……괜찮습니다. 피곤해도 그럭저럭 견딜 만은 합니다. 배려해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저도 이번 달 정도는 약속한 대로 지키고 싶어요.”
마침내 담담히 토해진 대꾸였다. 순간 안도하는 마음과, 반대로 괴로운 마음이 동시에 시소를 탔다. 기왕에 익숙한 이율배반이었다. 웃어야 할지 찡그려야 할지, 표정조차 갈팡질팡이었다. 결국은 이도저도 아닌 어리벙벙한 무표정으로 연인을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오래 함께 있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동생들이 걱정돼서요. 휘 녀석이 눈치채고 또 윤열이 형에게 고자질이라도 하면 곤란하거든요. 다음 주 화요일에 전화 드릴게요.”
옷을 다 챙겨 입고, 책 배낭까지 둘러멘 연인이 마침내 작별 인사를 던졌다. 더러워진 알몸으로 침대에 눌어붙은 자신을 향해 적선하듯 예의 바른 목례까지 던져주고 있었다. 그에 더해 역시 적선하듯 던져진 미소가 소름 끼쳤다. 모두 다 적선이었다. 목례도, 미소도, 만남 자체도…… 전부 다 그저 연인의 적선일 뿐이었다. ‘옛’ 고객이자 ‘옛’ 게이 친구를 향한.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생님.”
‘벌써?’ 하고 그리움이 투정했다. ‘그래, 피곤할 테니 어서 가봐’ 하고 양심이 납득했다.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그냥 조금만 더…… 30분만…… 아니, 그냥 10분만이라도 나랑 수다 떨다 가면 안 돼? 그러다 정 피곤하면 그냥 여기서 나랑 자고 가도 되잖아. 섹스는 안 해도 돼. 진짜야. 그냥 나랑 함께만 있어주면 돼. 그러면 돼. 그래주면 난 정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놈이 될 거야’ 하고 욕심이 탄원했다. ‘아냐, 아냐. 빨리 가. 빨리 사라져버려. 그래야 내가 욕심 안 부리지. 빨리 가버리지 않으면 잡을 거야. 가지 말라고 억지로 떼를 쓸 거야. 왜 이렇게 이상한 거냐고, 네가 아닌 것 같아 너무 무섭다며 화내고 울지도 몰라. 내 연인을 돌려달라고, 내 진짜 연인은 어디로 사라진 거냐고, 막 울고불고 히스테리를 부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빨리 가. 빨리 사라져버려’ 하고 양심이 비명을 질렀다. 채 몇 초도 되지 않을 찰나 동안 벌어진 내면의 격렬한 사투였다. 물론 승패는 가려지지 않았다. 그 어느 쪽의 원망도 들어줄 수 없는 넋은 그저 바싹 굳은 채 대꾸의 말조차 뱉지 못했다.
출입문 앞에 앉아 운동화를 신고 있는 연인의 등이 보였다. 현관 앞 배웅에 습관이 된 몸이 그제야 겨우 연인 쪽으로 움직였다.
……조심해서 가…….
작별의 말도 가까스로 뱉은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았다. 등을 보인 그대로 연인이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들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연인은 침대 가에서 던져진 예의 바른 목례와 작별 인사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을 것이다.
출입문이 열리고 연인이 문밖으로 한 발 떼는 게 보였다. 무심코 뻗어나가려던 손을 소스라쳐선 도로 거둬들였다. 제 주인도 모르게 멋대로 연인의 옷자락을 잡으려던 발칙한 손길이었다. 연인의 옷자락을 잡아끌고, 연인을 돌려세우고, 목을 힘껏 끌어안고, 마침내는 필사적으로 매달리려 음모를 꾸몄을 터였다. 연인의 입술에 미친놈처럼 키스를 퍼부어대며 함께 있어달라고, 제발 버리지 말아달라고 울부짖으려 작정을 했을 터였다. 이제 곧 버릴 생각이 아니냐고, 이제 친구로서 적선해주는 것조차 질린 거냐고, 악에 받쳐 따지려 들었을 터였다. 그야말로 발칙하고 발칙한 손모가지가 아닐 수 없었다. 교활하고 뻔뻔스럽기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주먹을 마주 쥔 채 벌벌 떠는 사이 출입문이 닫히는 것이 보였다. 닫힌 문 너머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마주 쥔 양손의 떨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연인이 돌아보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라고. 혹은 지금 이 순간, 미친 듯이 염원하고 있는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 다행이라고. 만약 연인이 돌아보았다면, 만약 소원대로 연인이 되돌아와주었다면, 땀과 정액 냄새를 풀풀 풍기는 더러운 알몸을 한 채 출입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이고 말았을 터였다. 붙잡지도, 그렇다고 흔쾌히 보내주지도 못해서 어쩔 줄 모르는, 진득한 미련만 덕지덕지 달라붙은 괴상망측한 얼굴을 보이고 말았을 터였다. 그랬다. 정말 다행이었다. 팽팽하게 접전을 벌이던 승패의 추가 비로소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빨리 가…… 빨리 사라져버려…….
방바닥에 주저앉으며 그제야 진심으로 연인을 배웅했다. 기어코 울음보가 터져 흐앙흐앙 울부짖는 걸 연인이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밉상인 꼬락서니만은 죽어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진심으로 연인과의 헤어짐을 기뻐했다.
“……비가 또 내리기 시작하네…… 장마 전선이 다시 북상하고 있다더니 며칠 또 내리 퍼붓겠는걸?”
적당한 세기로 쏟아지기 시작한 빗소리가 제법 듣기 좋아서 무심코 연인에게 말을 붙였다.
호텔방 창문을 최대한 열어둔 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중이었다. 며칠 전부터 다시 피우기 시작한 담배는 금연했던 기간만큼 더한 기갈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하루 두 갑이 넘는 줄담배를 피워대고 있는 요즘이었다. 연인이 담배 냄새를 질색한다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연인과 어딘가 서늘하고 메마른 섹스를 하고 난 후면 더더욱 흡연 욕구를 참기가 힘들었다. 후덥지근한 장마철 습기 때문에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켠 채 섹스를 했지만, 결국 채 한 시간을 참다못해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인환이었다.
연인이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담배 연기가 안 가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며 창 밖을 굽어보고 있는데 아침에 조금 내리다 만 비가 다시금 내리기 시작했다. 게릴라성 폭우처럼 무시무시한 세기도 아니었고, 아침처럼 감질나게 부슬거리는 것도 아니어서 마음에 들었다. 호텔이 남산 자락을 끼고 있어 창 밖 아래로 펼쳐지는 운무도 보기 좋았고, 주말이라 그런지 색색의 우산을 받쳐 든 인파로 북적이는 명동 거리도 꽤 운치가 있었다. 일정한 세기로 콘크리트 벽과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울림이 은근하게 마음을 들뜨게 했던 모양이었다. 조심성을 넘어 순간순간 두려움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는 연인에게 스스럼없이 말까지 붙이게끔 했으니 말이다.
“……빗소리 참 듣기 좋다. 거의 한 달 가까이나 장마가 계속되는데도 빗소리는 이상하게 질리지가 않아. 자연의 소리라 그런가? 너도 그러니, 위야?”
예상대로 대꾸가 없는 연인을 의식하며 별 영양가 없는 수다를 덧붙였다. 연인을 돌아보진 않았다. 선뜩한 소름이 돋게끔 하는 무감정한 관찰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시선을 마주쳐봐야 빗방울 소리 덕에 겨우 느슨해진 신경이 다시금 팽팽하게 긴장할 터였다.
“……후후, 하긴 이 동네 저 동네 부지런히 과외나 뛰어야 하는 바쁜 너한텐 그저 팔자 좋은 소리에 불과할지도 모르겠구나. 빨리 장마철 끝났으면 싶지? 진짜 올해는 왜 이렇게 장마가 긴가 몰라. 내일이면 8월인데 아직까지 계속 비 소식뿐이라니…….”
“그러고 보니 ‘마지막’이네요.”
불쑥 던져진 연인의 대꾸였다.
대꾸를 주리라고도 거의 예상치 못했지만, ‘마지막’이란 단어에서 묘한 강조점이 느껴져 더 이상 연인을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필터 거의 끝부분까지 피워댄 담배를 들고 있던 재떨이에 비벼 끄곤 침대를 향해 돌아섰다. 연인은 어느새 상반신만 일으킨 자세로 쿠션 위에 등을 비스듬히 기댄 채 인환을 굽어보고 있었다.
“오늘 말입니다. 7월 31일…… 7월의 ‘마지막’ 날이죠.”
여전히 관찰을 하는 것 같은 선뜩한 시선이었다. 가라앉았던 심장 고동이 도로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전신에 힘이 빠졌다. 창틀에 기대듯 체중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았을 터였다. 불면증과 더불어 요 두어 달 내리 거듭되고 있는 이상 증상 가운데 하나였다. 살이 빠지면서 체력 또한 바닥으로 치닫고 있는 터라 으레 그러려니 하는데, 확실히 육체의 문제라기보단 정신의 문제지 싶었다. 연인이 어떤 말을 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특정 표정을 보일 경우 증세가 더 심해지는 걸 보면 말이다.
“……어…… 어어, 응. ……마, 마지막 날이지. ……그…… 그러고 보니 그러네…….”
마음의 동요를 여실히 드러내듯 또 더듬기 시작한 말투가 괴로웠다. 바뀐 말투만으로도 연인은 자신의 불안정한 심사를 고스란히 읽어낼 터였다. 연인을 낯설어하고, 또 두려워하곤 하는 자신만은 절대로 알게 하고 싶지가 않은데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예. 뭐든 말끔히 정리를 해야만 하는 날이죠. 가계부도, 기업의 회계 장부도, 보험사나 은행의 결산도…… 새로운 달을 맞아들이기 위해서 반드시 처리해야만 할 일이지요.”
무언가 아리송한 덧붙임 끝에 연인이 피식 웃음을 물었다. 역시 의미 불명인 이상야릇한 웃음이었다.
“샤워하셨죠?”
탄력 있는 동작으로 상반신을 완전히 일으켜 세운 연인이 침대 아래로 내려서며 물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또 피식 하고 입가에 웃음을 무는 연인이었다.
“나가서 바람 좀 쐴까요? 모처럼 명동까지 나왔는데 시내 구경도 하고요.”
“……비 오는데……?”
자연스레 미심쩍은 되물음이 흘러나왔다. 들어올 때에도 따로, 나갈 때에도 따로여야만 하는 호텔에서의 비밀스러운 정사에 함께 외출을 하자는 연인이 이상했다. 게다가 밖에는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눈은 물론 비 역시 연인의 혐오 대상이었다. 물론, 다니는 데 불편하다는 게 이유였다. 사고 또한 많이 나고. 눈비가 올 땐 가능한 한 움직이지 말자가 연인의 모토 아니었던가. 그러니 비 오는 거리에 산책을 나가자는 제의는 충분히 되물을 만한 이상한 것이었다. 하긴 오늘 만남부터가 좀 이상했다. 화요일과 금요일의 만남이라는 원래 예정대로라면 어제 약속을 잡아야 했지만, 연인은 오늘로 늦출 수 없겠냐고 물어왔다. 연인의 부름이라면 언제라도 대기 상태인 자신이 불가능할 리는 없었다. 괜찮다고 하자 만남의 시간조차 오후 3시로 잡자고 했다. 이번엔 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연인의 아르바이트가 끝난 늦은 밤에나 잠깐 보는 게 다였으므로. 채 놀람을 수습하기도 전에 이번엔 장소까지 지정하는 게 아닌가. 명동으로, 그것도 퍼시픽호텔의 더블 룸으로 예약까지 마쳤다는 연인이었다. 예약은 물론, 숙박비나 식비 등 둘의 만남에 필요한 경비는 의당 전부 인환 자신의 몫이라고만 여겼었다. 연인의 몸을 산 89년 여름 이래 내내 그래왔다. 석 달 전 이윤열에 의해 서로의 관계가 변했을 때에도 그런 암묵의 룰은 다르지 않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연인이 장소를 예약했고, 시간도 주말 오후로 느슨하게 잡았으며, 숙박비까지 연인이 지불할 거라는 말을 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으랴. 입을 멍하니 벌린 채 할 말을 잊은 인환의 귀에 들려온 연인의 해명은 참으로 단순했다.
―……한 번쯤은 그러고 싶었습니다. 제가 떳떳하게 번 돈으로 친구와의 데이트 비용을 지불하고 싶었죠.
그렇게 약속 장소인 퍼시픽호텔 7층 트윈 룸에 나타난 연인은 다시 한 번 자신을 기함시키기에 충분했었다. 언젠가 자신이 사준 스카이 블루의 디올 옴므 슈트에 새하얀 드레스셔츠, 그리고 새파란 프레스코 넥타이에 에나멜 구두까지 차림을 갖춘 완벽한 모델이 서 있었다.
“우산 가져오셨죠?”
욕실 안으로 들어가며 아무렇지 않게 던져진 대꾸였다.
한동안 멍하니 선 채 연인의 속내를 추측해보기 위해 기를 썼다가 이내 포기했다. 어차피 알 수 없었다. 기왕에도 읽을 수 없는 연인의 마음이었지만, 요즘의 연인은 그를 넘어 거의 완벽한 ‘타인’이었다. 표정도, 태도도, 불쑥불쑥 토해지는 말들도 자신에겐 모두 수수께끼 그 자체였다. 하다못해 섹스 하는 방식까지도. 아무리 인정하기 괴로워도 그것이 현실이었다.
고민을 끝내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기다리는 걸 질색하는 연인이니, 언제나 한 템포는 더 빠른 연인보다 먼저 준비를 마쳐두는 게 좋을 것이다. 바스 가운을 벗고 테이블 위에 벗어두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부스스한 채 말라가던 머리도 손으로 여러 번 빗질을 해서 정리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휴대용 헤어 젤이라도 가져올 걸 하고 뒤늦은 후회가 일었다. 그나마 연인을 만날 때면 온갖 멋은 다 부리고 나오는 터라 느슨한 쥐색 베스트에 리바이스 진, 그리고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실크 셔츠는 연인의 완벽한 모양새에 견주어 그리 뒤떨어지지 않은 차림새일 것이다. 물론 기본 바탕에 있어선 도저히 비교조차 되지 않겠지만. 창백한 낯빛에 혈색을 보태기 위해 손바닥으로 몇 번 두드려주고 있는데 바스 가운 차림의 연인이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머리카락은 수건에 덮여 있고, 손에 들린 것은 헤어드라이어였다.
크로스백까지 어깨에 둘러멘 완벽한 대기 상태의 인환을 연인의 시선이 힐끗 스쳐갔다. 그대로 거울 앞으로 걸어간 연인은 제법 공을 들여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샤워 후엔 그저 수건으로 대강 머리를 터는 것이 다인 평소의 연인과도 꽤나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도저히 믿기 힘들지만, 객관적으로 지금 연인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연인과의 데이트를 앞두고 멋을 부릴 때의 인환과 판박이였던 것이다. 부러 멋을 부리지 않아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온통 잡아끄는 연인이었다. 그런 타인의 시선을 오히려 귀찮아하고 짜증스러워했던 연인이었다. 멋을 부리기는커녕 타인의 시선 자체를 무시하는 것 같던 연인이 헤어드라이어로 열심히 머리 스타일을 정돈하고 있었다. 그런 연인의 모습을 멍하니 좇고 있던 인환의 표정에도 다시금 기묘한 불안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정말 이상하잖아…… 많이 이상하잖아……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어쩐지 나가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느긋하게 연인과 시간을 보낼 수도 있는데 뭐하러 밖으로 나가야 하는가. 게다가 비까지 퍼붓는데. 연인이 했음직한 그런 불평을 도리어 자신이 거듭 뇌까리고 있었다. 물론 입 밖으론 차마 토해질 수 없는 불평이었다.
“그럼 나갈까요, 선생님?”
어느새 옷까지 다 갈아입은 완벽한 모델 모습의 연인이 재촉했다. 아무리 봐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연인은 출입문 앞에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출입문 쪽으로 다가가는 것으로 연인의 명령에 복종했다. 자동인형이었다. 문 앞에 놓아둔 우산을 든 채 키를 뽑고 룸을 나서는 연인을 따라 인환도 걸음을 재촉했다. 연인보다 느리기만 한 자신의 보폭에 늘 그렇듯 버릇처럼 맞춰주는 연인이었지만, 어쩐지 꽤나 서두르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모습도 두 번이나 보여주었다. 제법 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땐 조금 숨이 찼을 정도였다. 바닥난 체력이라 더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랬다. 그저 그런 것뿐이라고 자기 암시를 했다. 아니라면 룸으로 되돌아가자고 억지로 연인의 소매 깃을 잡아끌었을 터였다. 그야말로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엘리베이터로 호텔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 우산을 꺼낸 뒤 다시 1층으로 올라왔다. 호텔 현관을 나서기 위해 로비 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아니나 다를까, 무수한 시선들이 두 사람을 쫓아왔다. 아니, 정확히는 연인을.
연인으로부터 몇 걸음이나 뒤처져 걸어야 했음은 물론이었다. 퍼시픽호텔의 주 용도가 비즈니스용이고 시각도 이제 겨우 4시를 넘어선 차였다. 저 무수한 시선들 중 게이 커플의 정사를 상상할 이가 몇이나 되겠냐만, 이미 그쪽으론 트라우마가 생긴 인환이었다. 아마도 그 방면으론 연인보다 훨씬 더 근심하고 또 주의를 기울이는 쪽일 것이다.
호텔 현관을 나서니 짙은 물비린내가 콧속 가득 파고들었다. 빗줄기의 기세는 몇 분 전보다 꽤 주춤해져 있었다. 이슬비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경쾌한 빗방울 소리를 연주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금세 바짓가랑이를 적실 정도도 아니어서 산책에는 오히려 안성맞춤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워낙 변덕스러운 날씨라, 언제 또 폭우로 돌변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커다란 검정 우산을 받쳐 든 연인은 평소보다 약간 빠른 보폭으로 몇 걸음 앞서 걸어 나갔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따라가야 했는데 뛸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느긋한 산책 또한 절대로 될 수 없는, 제법 빠른 속도였다. 연인의 걸음걸이엔 분명 일정한 방향성이 있었다. 바람을 쐴 목적도, 모처럼의 시내 구경도 연인의 진짜 목적은 아닌 것 같았다. 마음속에 똬리처럼 틀고 앉은 불안감이 더해갈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은 초조감을 부르고, 종내는 절망감마저 부추겼다.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은 짐작조차 못 할 무시무시한 어떤 것이 분명 저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본능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따라가지 말라고. 더 이상 따라가면 안 된다고. 그럼 진짜로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고.
연인은 명동역을 지나 명동성당을 거쳐 백병원 쪽으로 꺾어들었다. 연인의 빠른 보폭이라면 15분이면 충분했겠지만 인환의 더딘 걸음이 보태지니 거의 30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 시간만으로 치면 그야말로 ‘산책’이란 지칭이 알맞았겠지만, 걷는 동안 완전히 겁에 질려버린 인환에겐 더 이상 ‘산책’일 수가 없었다. 명동성당 근처까지 왔을 땐 자기도 모르게 연인의 팔꿈치를 붙잡았을 정도였다. 성당 맞은편 상점가에 작은 서점이 하나 눈에 띄었고, 쇼윈도에 전시된 잡지들이 그럴듯한 빌미가 되었다. 아니, 구원이었다. 구원이 되길 필사적으로 빌었다. ‘나, 인터뷰한 잡지야, 위야!’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 소리를 뚫고 울려 퍼진 목소리는 거의 비명처럼 들렸다. 연인이 뒤돌아보았다. 처음엔 억지로 웃고 있는 자신의 창백한 얼굴로, 곧이어 자신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쇼윈도 쪽으로 시선이 이어졌다. ‘아…… 아, 아트앤조이야. 저, 저기 보이지? 탈 이데올로그의 전방위 주자, 화가 장인환 인터뷰라고…… 표지에 크게 인쇄돼 있잖아. 파…… 8월호가 벌써 나왔나 보다…….’ 쇼윈도에 진열된 20∼30권에 가까운 잡지들 속에서 연인의 눈이 목적한 「Art & Joy」를 분간해낼 것 같진 않았다. 그지없이 초조한 마음에 붙잡고 있던 연인의 팔꿈치를 좀 더 쇼윈도 쪽으로 끌어당기며 덧붙인 것은 물론이었다. ‘……자, 잠깐 들어가서 사 갖고 나올까? 그…… 그, 그, 그래도 되지?’ 끄는 대로 두어 걸음 쇼윈도 가까이 다가갔던 연인은 이내 인환에게 시선을 돌리곤 빤히 바라보았다. 장마로 기온이 비교적 서늘하다지만 더위를 타는 연인에겐 역시나의 무더위였을까? 연인의 이마며 콧등엔 어느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름다운 모델의 이목구비가 무색하게 일체의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딱딱한 표정이었다. 굳이 대꾸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연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려는 인환의 의도는 이미 연인에게 간파당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를 기꺼이 들어줄 연인도 아니었다. 연인의 서늘한 눈빛에 잠시 고민의 기색이 읽혔다. 그러나 말 그대로 ‘잠시’일 뿐이었다. 연인의 시선이 손목시계를 힐끗 내려다본 것을 끝으로, 그 잠깐의 자비심도 말짱 스러져버렸다.
“……약속이 있습니다. 선생님께도 소개시켜드리려는 사람이죠. 그전에 따로 사정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벌써 많이 지체했습니다. 잡지 정도는 나중에 사도 괜찮겠죠?”
일체의 흔들림 없이 담담하게 떨어진 선언이었다. 바람을 쐰다는 둥, 시내 구경을 한다는 둥, 더 이상 입에 발린 변명조차 없었다.
갑자기 시야가 하얗게 변하며 전신에서 힘이 풀렸다. 들고 있던 우산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연인의 한쪽 팔이 번개처럼 뻗어왔다. 바닥으로 고꾸라지려던 몸은 다행히 연인의 단단한 품에 무사히 안착되었다. 그야말로 비호처럼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얼굴 전체가 연인의 재킷 위로 푹 잠겨들며 비누 냄새가 섞인 그리운 체취가 폐부 가득 파고들었다.
“……정신 차리세요. 자꾸 이러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싸늘한 일갈이 정수리 위에서 떨어졌다. 자꾸 이런다는 게 뭘까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아, 자꾸 연인의 발걸음을 가로막는다는 뜻이구나. 곧이어 답이 생각났다. 몇 템포쯤은 느리게 사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막으면 안 될 터였다. 한층 냉담해진 연인의 목소리가 경고하고 있었다. 더 이상 떼를 쓰거나 어리광을 부리면 버리고 갈 거라고. 뭔가 ‘그나마’의 배려일 게 분명한 어떤 것도 파투 내버리고 말 거라고.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연인이 오늘 준비한 것은 무언가 무서운 것임에 분명하지만, 당장 피한다 해서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보장이 없었다. 아니, 피하면 피할수록 궁극엔 더한 공포로 다가오리란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돼…… 됐어, 위야. 미안…… 잠깐 어지러워서…….”
이명처럼 멀리서 누군가 대꾸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인데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얼추 기운이 돌아왔기에 연인의 품으로부터 두어 걸음 떨어졌다.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주었던 연인의 한쪽 팔도 풀렸다.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졌던 우산을 주울 동안 연인은 묵묵히 우산을 기울여주었다. 안쪽까지 젖어든 우산을 털어 도로 머리 위에 썼을 땐, 연인의 어깨며 등은 이미 거무스름한 빗방울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헤어드라이어로 맵시 있게 말렸던 머리카락도 빗물에 젖어 조금 숨이 죽은 상태였다. 미안하다는 감정은 어째 조금도 들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연인이 헤어드라이어로 공들여 머리를 말린 것은. 연인을 알게 된 지난 5년 이래 거의 처음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용모에 신경 쓰는 모습조차도. 약속이 있다고 했다. 이제 자신에게도 소개를 시켜줄 요량이라고 했다. 자신은 모르는 누군가였다. 그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절대로,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연인의 멋들어진 슈트가 비에 젖고, 연인의 그린 것 같은 머리카락이 숨이 죽은 것 정도는. 하긴 그래봤자 여전히 꿈처럼 아름다운 연인이었다.
“부축해드리지 않아도 걸으실 수 있겠죠?”
엄한 눈길로 연인이 물어왔다. 우산을 힘 있게 고쳐 쥐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바라는 답을 주었다.
“……그럼 갈까요?”
냉담하게 대할수록 인환도 독해진다는 것을 알아서일까, 연인은 기절 직전까지 갔던 인환의 동요 따윈 벌써 까맣게 잊은 듯했다. 살피듯 일별한 후엔 다시금 몇 걸음 앞서 걸음을 재촉했으므로. 연인의 예상은 맞았다. 인환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쓰러질 지경으로 전신의 힘이 빠지지도 않았고, 공포에 질린 나머지 연인의 발목을 잡고 떼를 쓰는 일도 더 이상 벌이지 않았다. 연인이 명령하면 즉각 복종하곤 하는 자동인형 그대로 묵묵히 연인만 따라갔다.
그렇게 5분쯤을 더 걸었다. 백병원을 지나 명보극장 방면으로 300여 미터쯤을 걸었을 때였다. 대로변에서 골목 안쪽으로 접어든 연인은 9층쯤 될 어느 고층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정확히는, 빌딩의 상층부에 위치한 어느 프랑스식 레스토랑이었다. 실내 장식이며 종업원들의 모양새며 꽤나 분위기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물론 평소의 연인이라면 절대 걸음하지 않을 그런 고급스러움이요, 그런 사치이기도 했다. 인환도 더 이상은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라지 않기로 했다. 무서워하지도 않기로 했다. 물론, 순간순간이 가부러지는 놀라움이요 공포였지만, 아니라고 끝도 없는 자기세뇌를 거듭했다. 안 그러면 또 연인 앞에서 쓰러지는 꼴불견이나 연출할 터였다.
카운터 앞에서 연인이 예약했다고 말하자, 두 사람이 내미는 젖은 우산을 받아 든 깔끔한 제복 차림의 종업원이 자리로 안내를 해주었다. 100여 평 규모의 드넓은 실내는 3분의 1 정도만 테이블이 차 있었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이제 겨우 오후 4시 35분이라는 애매한 시간대 때문이리라. 주말인데다 꽤 괜찮은 식당이니 아마도 6시쯤이면 빈 테이블이 거의 없을 것이다.
종업원이 안내해준 예약석은 칸막이가 쳐진 실내 안쪽의 VIP 룸이었다. 메뉴판을 내려놓고 주문을 기다리는 종업원에게 연인이 오렌지 주스와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묻지 않아도 인환의 입맛 정도는 손바닥에 꿰고 있는 연인이기에 가능한 선택이라고 무심코 감탄했다. 무언가를 먹어줘야 한다면 아이스티라고 생각하던 참이었으니까.
종업원이 옷과 머리에 튄 빗물을 닦으라는 용도로 준 타월로 서로가 용도에 맞게 옷차림새를 가다듬는 동안 주문한 음료가 나왔고, 연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계를 살폈다. 인환도 연인을 따라서 자신의 손목시계로 시선을 가져갔다. 바늘은 4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을 가늠하는 듯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연인의 눈매는 조금 가늘어져 있었다.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와 약속된 시간은 정확히 5시라는 것을.
느닷없이 닥친 강렬한 갈증에 인환은 아이스티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자꾸만 시간을 확인하는 연인도 끔찍했고, 옷에 튄 빗물조차 신경 쓰는 연인은 더더욱 끔찍했다. 아니, 그런 낯설기 짝이 없는 행동을 통해 어렴풋이 예감되는 무언가가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맞는 게 나을 것이란 판단이 든 것도 그 순간이었다. 어쩐지 미적거리는 것 같은 연인은 더욱 무시무시한 공포였다.
“……얘…… 얘기한다며…… 아…… 아, 아, 안 해……?”
또 더듬거리며 나오는 말투는 절망이었다. 어떻게든 태연을 가장하고 싶은데 도무지 주인의 뜻에는 아랑곳 않는 목소리요, 어조였다. 손목시계에서 테이블 한쪽 끝으로 이동해 있던 연인의 시선이 인환의 얼굴로 돌아왔다. 역시나 일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냉담한 타인의 눈길이었다.
“……제가 ‘마지막’ 날이라고 했던가요, 오늘이?”
이윽고 토해진 나지막한 중저음에서도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 저렇게 품위 있고 묵직한 사내다운 목소리는 흔치 않으리라는 판단만은 여전해서 목이 메었다. 냉담하고 우아한 클래식 음악처럼, 연인의 목소리는 더 이상의 미적거림도 없이 차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뭐든 말끔히 정리를 해야만 하는 날이라고 했죠. 가계부도, 기업의 회계 장부도, 보험사나 은행의 결산도…… 새로운 달을 맞아들이기 위해서 반드시 처리해야만 할 일이라고요.”
“…….”
“……그래서 오늘로 잡았습니다. 어차피 마지막일 테니, 차라리 7월의 마지막 날로 하자고요.”
“…….”
“짐작하셨죠? 이제 함께 섹스를 하는 일도 그만둬야 할 시점이라는 것을요.”
“…….”
“……선생님이나 저나 더 이상 섹스가 즐겁지 않죠. 물론 전부 제 잘못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제대로 된 서비스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래도 지난 몇 년 동안은 그럭저럭 맞출 수 있었는데, 더 이상은 노력하고픈 생각이 들지가 않더군요.”
“…….”
“윤열이 형에게 야단을 듣고, 그래도 선생님과 한 약속이 먼저이니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는데 잘 안 되더군요. 선생님껜 무척 죄송했지만 일단 예전처럼 마음이 가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몸이 고되니 점점 더 그쪽으론 신경을 안 쓰게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그 사람을 만나게 됐습니다.”
“…….”
“……예쁜 사람이죠. 착하기도 하고요. 오래전부터 절 사랑해왔다고 하더군요.”
“…….”
“제 빡빡하고 불안정한 생활을 많이 안쓰러워했습니다. 선생님 이상으로 절 아껴주고 염려해주더군요. 제 동생들에 대해서도요. 처음엔 몰랐는데 몇 번 만나다 보니 정이 생기더군요. 아마 그래서였을 겁니다. 점점 더 그 사람에게 정이 가니 선생님과의 섹스가 더욱더 힘들어졌지요. 물론 그 사람과 육체관계까지 간 건 아닙니다. 그건 선생님과의 약속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지켜주고 싶다는 기분이 강했기 때문이지요. 결혼할 상대가 아닌 한 깊은 관계까지 맺고 싶진 않았거든요. 동생들을 부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직업을 갖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지금 제 상황상 연애는 논외였죠.”
“…….”
“한데 얼마 전에 그 사람이 제게 청혼을 했습니다. 불안정한 현재의 저도 좋고, 확실치 않은 제 장래도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부양해야 할 동생들이 둘이나 있는 가난한 환경도 개의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한테 돈은 넘쳐나니 오히려 제 힘이 돼줄 수도 있다고 했죠. 제 잠재력만 보면 오히려 그 사람의 재산을 불려주면 불려줬지 축낼 리는 없다면서, 제 자존심까지 지켜주더군요.”
“…….”
“……솔직히 흔들렸습니다. 요 몇 달, 꽤 지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좋으니까요. 며칠 고민을 했습니다만 결국 그 사람을 놓치기 싫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더군요.”
“…….”
“물론 그렇다고 당장 결혼을 하게 될지는 불투명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야 그렇다 쳐도, 그쪽 부모님이나 집안의 반대도 꽤 있는 것으로 아니까요. 하지만 제게 그 사람에 대한 욕심이 생긴 이상 더는 선생님과의 관계를 끌고 갈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서더군요.”
“…….”
“애초의 약속도 제게 결혼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였습니다만, 솔직히 이렇게 빨리 그런 상대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저도 예상하지 못했죠. 물론 제가 마음을 먹는다고 결혼이 쉬이 성사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쪽 집안에서 반대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러나 노력은 해볼 작정입니다. 그만큼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지요. 몹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몸도 마음도…… 타고난 재능까지 여러모로 그런 사람이지요.”
“…….”
“……그래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굳이 약속이 아니라도 선생님이시라면 분명히 축복해주실 것 같았거든요. 누가 뭐라 해도 선생님께서 절 지극히 사랑해주셨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제가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그런 분이시니까 제가 그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또한 충분히 납득하고 절 이해해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
“물론 갑작스러운 일이란 건 압니다. 충격이 크시기도 할 거고요. 아무리 빨라도 4∼5년 안엔 일어나지 않으리라 예상하셨을 테지요. 하지만 부디 이해하고 받아들여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섹스 파트너십도 지속하기 힘들다는 걸 서로 잘 아는 마당에, 이런 부자연스러운 관계를 계속 이어나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
“……그 사람은 선생님과 저와의 관계를 모릅니다. 앞으로도 되도록 모르게 하고 싶습니다. 상처를 주긴 싫으니까요. 제가 어쩔 수 없이 남창 일을 했다는 것은 알지만 남자하고까지 관계를 가진 것은 모르거든요. 어째선지 게이라는 것에 격렬할 정도로 혐오감을 가지고 있죠. 어떻게든 선생님과의 관계를 매듭짓고 싶은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과거는 어쩔 수 없다 쳐도 현재나 미래에까지 그 사람에게 죄를 짓고 싶진 않거든요.”
“…….”
연인의 고백이 거듭될수록 기절하지 않는 자신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별것 아닌 일에도 픽픽 쓰러지며 연인의 속을 썩이던 지난날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이상했다. 단 한 마디도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한 마디 한 마디 거듭 풀어헤쳐질 때마다 연인의 눈빛, 연인의 입모양, 연인의 표정, 연인의 목소리, 연인의 어조 등등 그 모두가 마치 사진이라도 찍히는 양 뇌리 속에 강렬하게 박혀들고 있었다. 막상 닥치고 보니 그다지 무섭다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아, 이거였구나…… 하고 조용히 납득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그렇게나 무서웠던 거구나. 그래서 그렇게나 가부러졌던 거구나. 장인환이란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할 일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기에, 그 비참한 전조를 차마 외면하지 못한 영혼이 미리 대비하라고 준비를 시켜준 거였구나 하고.
“……사랑…… 하니?”
이것 보라지. 떨리지도, 더듬지도 않는다. 막상 닥치고 보니 그토록 애를 태우던 말투까지 제대로 터져 나오지 않는가. 피식피식 실소까지 터질 지경이었다.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해?”
가만히 연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속내를 전혀 읽을 수 없는 연인이지만, 어쩐지 이것만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인환이 기억하기로 연인은 지금까지 첫사랑의 경험조차 해본 적이 없다. 연인의 말대로라면 지금 연인이 저 의문의 상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명백히 첫사랑이다.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볼 때마다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자각하지 않았던가. 지독한 첫사랑에 빠진 장인환이란 인간을. 그 인간의 병든 눈동자를. 그랬다. 열병이었다. 도저히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지독한 열병. 그것이 첫사랑이었다.
문득 연인의 얼굴이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며 마치 별이 들어앉은 것처럼 눈동자가 번쩍번쩍 빛나기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듯 어딘가 먼 곳을 향한 시선은 기쁨, 흥분, 쾌락, 만족, 설렘 등등, 다채로운 감정의 폭풍 속을 헤매고 있었다. 온통 핑크빛 아우라 일색이었다. 달콤하기가 닭살이 일 지경으로 민망스러웠다. 들들들들. 어디서 누군가의 몸뚱이를 갈아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의 심장으로부터 시작한 동통은 이내 섬세하게 퍼진 신경줄을 따라 사지 끝으로, 마침내는 머리 꼭대기까지 알알이 파고들었다. 그저 착각일 뿐일 텐데 자각되는 고통은 끔찍할 정도로 생생했다.
“……이런 기분이 사랑인 건가요?”
어린애처럼 맑은 웃음을 머금은 채 연인은 그렇게 되물은 것이 다였다. 생전 처음 보는, 희열로 가득 찬 연인의 웃음이었다.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연인에게 환장해서 어쩔 줄 모르던 자신을. 더 이상의 질문은 할 필요조차 없었다. 하느님…… 오, 하느님, 하느님……. 그리고 마침내 지독한 절망이 왔다.
째깍째깍. 멀리서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초침 소리는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더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멈춘 시계 위로 누군가의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니, 이미 떨어진 지 오래인 듯, 거무스름한 피 얼룩을 묻히고 있는 시계는 오래된 먼지투성이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미 한참 전에 종말이 왔다는 것을. 정확히는 석 달 전쯤이었을 것이다. 인환의 시계가 멈춰버린 것은 그때부터였다. 연인이 낯설게 느껴진 것이 당연했다. ‘타인’처럼 섬뜩해진 것도 당연했다. 오래전에 멈춘 시간 속에 갇혀버린 인환으로선 홀로 저 시간 밖으로 달려 나가버린 연인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타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을 만나주시겠습니까?”
연인이 재차 물어왔다. 살피는 듯한 시선에 약간 당혹이 어리는 걸 보니 자신의 얼굴빛이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 충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럭저럭 잘 견디고 있다 여겼는데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낯빛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그래서 조금 웃어주는 것으로 연인을 안심시켰다.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눈꼬리도 가늘게 접었다. 크게 고개를 끄덕여준 것은 물론이었다. ……그럼. 만나고말고, 위야. 만나야지.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데 만나서 확인을 해야지. 네게 정말 도움이 되어줄 사람인지, 나보다도 더 널 사랑해줄 사람인지, 정확히 확인하고 축복을 해줘야지……. 제대로 다 끝내야만 했다. 연인이 자신을 위해 마련한 이벤트였다. 제대로 끝내주지 않으면, 사이좋은 ‘옛 친구’이자 ‘옛 섹스 파트너’라는 그나마의 끈조차도 영영 끊어내버릴 연인이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역시 이해해주실 줄 믿었어요.”
화사하게 퍼지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뒤늦게 첫사랑의 열병에 빠지고 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젊은 청년의 그것이었다.
“……아시죠?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만 그녀는 선생님과 제 관계를 모릅니다. 그저 제 고등학교 선배로만 알고 있죠. 선생님께서 제게 연애 감정을 품고 계시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선 안 됩니다. 모쪼록 그 점만 주의해주셨으면 해요.”
또 한 번 손목시계를 살피며 연인이 초조한 듯 재차 다짐을 주었다. 재빨리 시각을 확인한 시선은 이번엔 레스토랑 현관 쪽을 향하고 있었다. 몹시 사랑하는 애인의 등장을 설레며 기다리는 전형적인 청년의 모습이었다.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고 있는 심장이 거듭거듭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찢긴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건만 인환의 겉은 거짓말처럼 멀쩡했다. 기분도 그닥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셨죠? 부탁드릴게요, 선생님.”
연인이 초조한 기색으로 확답을 요구했고, 인환도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맞장구를 쳐준다거나 농담을 던져 연인의 기분을 더 가볍게 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도저히 거기까지는 기력이 나지 않았다. 섣불리 말을 했다간 애써 유지하고 있는 자기세뇌 상태마저 깨질 위험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께서도 기억하실 만한 사람이네요. 저 1학년 때 학교에서 한 번 보신 적도 있는데, 기억나시는가 모르겠어요. 그 봄 축제 때…….”
연인이 말을 하다 말고 환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게 보였다. 오른손을 살짝 들어 누군가에게 신호를 하는 것도 보였다. 연인의 시선은 여전히 칸막이 너머 레스토랑 입구 쪽을 향해 있었다. 인환의 시선도 자연스레 연인을 따라갔다.
오렌지색 슬리브리스 원피스 차림의 굉장한 미인이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저 1학년 때 학교에서 한 번 보신 적도 있는데, 기억나시는가 모르겠어요. 그 봄 축제 때……. 부메랑처럼 연인의 말이 의식 속으로 되돌아온 것도 그 시점이었다. ……저 1학년 때 학교에서 한 번 보신 적도 있는데…… 한 번 보신 적도 있는데…… 한 번 보신 적도 있는데…… 한 번 보신 적도 있는데……. 되돌아온 목소리는 이번엔 고장 난 레코드판이 되어 자꾸만 튀고 있었다.
레스토랑 안에 모인 뭇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여왕이 들어서고 있었다. 아니, 여신이라고 해도 별로 과장된 지칭은 아니었다. 오렌지색 원피스도, 손에 든 은빛 클러치백도, 역시 은색의 샌들도, 여신의 경탄할 만한 외모를 받쳐주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연인과 시선이 마주쳤는지 행복한 듯 환하게 펴지는 웃음이 꿈처럼 아름다웠다.
……기억나시는가 모르겠어요……. 기억하냐고? 물론. 양신애라고 했던가? 2년도 훨씬 넘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이름도 기억하고 있는걸.
역시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그다지 무섭다는 기분도, 역시 들지 않았다. 놀라기는커녕, 무섭기는커녕, 어쩐지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당연한 기분마저 들었다. 막상 닥치고 나니 그저 아, 이거였구나…… 하고 역시 조용히 납득했을 따름이었다. 아아, 그래서 그렇게나 무서웠던 거구나. 그래서 그렇게나 가부러졌던 거구나. 장인환이란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할 일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기에, 그 비참한 전조를 차마 외면하지 못한 영혼이 미리 대비하라고 신호를 준 거였구나 하고…….
“선배님.”
“위야……!”
연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여신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수줍은 듯 살짝 뻗은 여신의 손을 연인의 크고 아름다운 손이 덥석 움켜쥐는 게 보였다. 마주 보고 선 채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그야말로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줄곧 연인에게 꽂혀 있던 여신의 시선이 비로소 인환을 향했다. 여신은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저 기억하시죠?”
기억하다마다. 당신은 내가 이때까지 본 여자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자인걸. 멍하니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준 인환이었다.
어떻게 그 두어 시간이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별로 무섭지도 않았고, 별로 놀라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도통 제대로 기억나는 장면이 없었다. 그저 셋이서 제법 많이 웃고 떠들었다는 것만,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어슴푸레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별로 끊기는 일 없이 화제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드물지 않게 웃음소리도 터져 나왔으며, 차례로 나오는 프랑스식 정찬 코스도 세 사람의 열렬한 칭찬을 받으며 입안으로 사라져간 것 같았다. 후식으로 나온 달콤한 무스케이크와 커피까지 알뜰히 비워낸 세 사람은 한동안 더 수다를 떨다가 레스토랑을 나왔다. 계산은 예상대로 연인이 했다.
―……한 번쯤은 그러고 싶었습니다. 제가 떳떳하게 번 돈으로 친구와의 데이트 비용을 지불하고 싶었죠.
얼핏 연인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스쳐간 것도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친구와의 데이트 비용이 아니라 진짜 애인과의 데이트 비용을 지불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속으로 조용히 정정해준 것은 물론이었다. 아픈 데를 더 아프게 찔러대는 깨달음에 피식 실소를 흘렸던 것도 같았다. 비가 그친 눅눅한 거리를 잠시 함께 걷던 세 사람은 마침내 명동성당 앞에서 헤어졌다. 물론 혼자 떨려나온 쪽은 인환이었다. 남은 데이트를 마저 즐기기 위해 두 젊은 연인은 명보극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인환은 자신의 차가 주차돼 있는 퍼시픽호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7시가 꽤 넘은 것 같았는데도 아직 해거름은 남아 있었다. 물론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상점과 빌딩의 불빛들로 명동 거리는 온통 불야성을 이룬 지도 오래였다. 채 덜 마른 빗물이 거리 곳곳에 고인 채 불빛을 받아 영롱한 물비늘을 만들고 있었다.
멍하니 퍼시픽호텔을 향해 걷기 시작한 지 30여 분 만에 호텔의 정문이 보였다. 아직 체크아웃이 안 돼 있다는 사실에 얼핏 생각이 미쳤지만 어차피 룸 키도 연인이 가진 채였고, 계산도 연인이 하겠다고 미리 못 박았으니 인환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혹시 아는가. 자신과의 ‘마지막’을 축하하는 의미로 진짜 ‘연인’을 데리고 같은 방에 다시 묵을지. 아니, 아니. 그건 아닐 거다. 지켜주고 싶다지 않은가. 함부로 몸을 취하지 않을 정도로 사랑한다지 않는가. 인환과의 정사로 더럽혀진 침대 위에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또 몸을 섞지는 않을 터였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다시금 심장이 바늘로 찔리는 것 같은 끔찍한 통증이 닥쳤다.
“……어디 불편하세요?”
낯선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채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흔드는 것으로 이름 모를 이의 친절을 사양했다. 머리 위에서 어룽거리던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채 고통이 줄어들길 기다렸다. 물론 그네가 완벽히 사라지리란 터무니없는 욕심은 부리지 않았다. 그저 움직일 수 있을 정도만큼의 통증이고 기력이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터였다. 몇 분인지 몇 십 분인지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기대하던 것이 모였다. 다시 걸을 수는 있었지만, 운전을 할 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다. 퍼시픽호텔로 향했던 발걸음은 근처의 택시 정류장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채 2분을 기다리지 않아 택시가 왔고, 인환은 이태원으로 가자고 기사에게 부탁했다. 편하고 안전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떠오르는 데라곤 미메시스뿐이었다. 언젠가처럼 마해영이 절실히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정신을 놓아버릴 만큼의 술만 마실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단 생각을 했다.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소스라쳐서 눈을 뜨니 열린 문틈으로 택시기사가 쳐다보고 있었다.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기에 어디 편찮으신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무뚝뚝하게 말하는 기사의 얼굴엔 짜증이 배어 있었다. 딱히 아픈 건 아닌데 기절한 건 맞는 것 같았다. 두어 시간 전, 연인의 앞에서나 기절을 했어야 마땅한데, 뒤늦게 뭔 추태인가 싶었다. 자율 신경조차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할 정도로 경악했던 게 틀림없었다. 미안하다고 중언부언 사과를 하고, 계산을 한 다음 택시에서 내렸다. 이태원이었다.
아직 마해영이 출몰할 시각은 아니었는지, 주인 없는 미메시스는 딱 주말 저녁만큼의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바텐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조용히 술을 푸기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마시는 거 아니냐며 몇 번 말을 붙이던 바텐더도,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대꾸조차 않는 인환을 알아차렸는지 곧 포기하곤 얌전히 물러섰다.
술이 들어가니 그만큼 마음의 고통은 무뎌졌다. 물론 그 반대로 몸이 맛이 가기 시작한 것은 정당한 대가일 것이다. 기분이 붕붕 뜨고 발걸음이 휘청거릴 무렵, 극심한 토기가 느껴져서 화장실로 가 몽땅 게워냈다. 값비싼 프랑스식 정찬이 살로 갈 기회는 말짱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뭐, 그다지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연인도 자신을 위해 돈을 쓴 것이 아니었으니까.
―……한 번쯤은 그러고 싶었습니다. 제가 떳떳하게 번 돈으로 친구와의 데이트 비용을 지불하고 싶었죠.
몽롱하게 떠오른 연인의 목소리에, ‘좆까!’ 하고 욕을 싸질러주었다. ‘좆까라 그래, 씨발. 나쁜 새끼’는 물론 덤이었다.
지저분해진 얼굴에 세수를 하고 다시 바텐더 앞으로 가 앉았다. 주말 저녁답게 북적이는 게이들을 위해 칵테일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바텐더가 슬쩍 시선을 보내고는 ‘그만 드시는 게 좋을 텐데요. 계속 그러시면 사장님께 저 혼납니다, 인환 씨’ 하고 또 걱정을 보내왔다. 그저 배시시 웃는 얼굴로 바텐더의 친절에 보답을 주었다. 물론 앞으로 더 한참은 마실 예정인 인환은 그네의 충고 따윈 단칼에 차버렸지만.
몇 분인지 몇 십 분인지가 더 흘러간 것 같았다. 의식은 거의 흐려져서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사방이 온통 소음으로 붕붕대고 있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고, 빙글빙글 시야도 도는데 그저 무지개색으로 빛날 뿐 어디가 어딘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 굉장히 아팠던 것 같은데 그게 도대체 뭐였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났다.
“……인환 씨! 인환 씨, 일어나봐! 이거 좀 마셔요! 인환 씨!”
누군가가 마구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강제로 들려진 상반신에 불평을 하려고 하는데 목 안으로 뭔가가 넘어왔다. 시원하고 달콤한 맛에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맛있게 받아 마셨다. 그 덕분인지 온몸이 불타는 것 같던 열기가 조금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기호 씨! 이렇게 마실 때까지 내버려둔 거야?!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바에서 누구 초상 치를 일 있어요?! 가뜩이나 요즘 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죄, 죄송합니다, 사장님! 계속 만류를 드리긴 했는데…….”
“인환 씨? 인환 씨, 일어나봐! 정신 좀 차려봐요! 괜찮겠어? 나랑 병원 갈래요?”
“……위야아…….”
“인환 씨?”
“……너무우 빠라아…… 빨…… 라아…….”
“인환 씨…….”
“……위야아…… 위야아 부러줘…… 빨라아…… 너무우우…… 형…… 혀엉…… 그니까안 부러죠요오오…… 마사자아앙…… 형아야아…… 응? 우리 위야아…… 저나…… 전하아…… 이륙일구으에에 칠파삼사암…… 위야아…… 우리 위야아아…… 부러죠오…… 혀엉, 부러죠오오…….”
“…….”
누군가 고래고래 술주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차마 들어주기 끔찍한 지독한 주정이었다. 곤혹스러워하는 마해영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바텐더나 다른 종업원들의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재밌는 구경거리라는 듯, 휘파람을 불며 좋아하는 게이들의 야유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고,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기분이 좋아지니 당연히 연인이 보고 싶었다. 당장 보고 싶었다. 그래서 오라고 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못 듣는 것 같으니 마해영 더러 불러오라고 부탁했다.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고 간절히, 간절히 부탁했다. 연인이 와야 한다고, 연인을 봐야만 살 수 있다고 울부짖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마해영은 몇 번 욕설을 하다간 곧 불러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제야 헤헤거리는 웃음이 나왔다. 너무 기쁜 나머지 주룩주룩 쏟아지는 눈물은 부록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리는데도 연인은 오지 않았다. 좀 더 기다려야 하는가 보다 여기며, 졸다가 웃다가 울다가 하며 기다렸다. 여전히 연인은 오지 않았다. 그제야 왜 연인이 안 오냐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여기가 어디야?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며 마해영이 나타났다. 연인에게 와달라고 전화해봤는데 연인이 거절했다고 했다. 더 이상 그런 사이 아니니 다른 친구한테 연락하라고 했단다. 자긴 지금 새로 사귀는 애인이 있으니 다신 이런 전화 하지 말라고도 했단다. 말끝에 마해영은 연인더러 죽일 놈이라고 욕을 했다. 씩씩거리면서도 여전히 나른하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끝도 없이 다양한 욕이 쏟아졌다. 그런 마해영이 슬퍼서 자신은 더 울었다. 엉엉 울부짖을 기운도 없어서 그냥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왜 우리 위야 욕하냐고, 우리 위야 욕하지 말라고 울며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싶었지만 역시 그럴 기운은 없었다. 그냥 웅얼웅얼 중얼거리듯 마해영을 혼내며 울고 있는데, 문득 머릿속이 텅 비며 졸음이 왔다. 그렇게 한참을 잠든 것 같았다. 깨어나보니, 바 위층에 있는 사무실 소파 위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
찌르는 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엄청난 갈증에 옆에 있던 물주전자의 반을 비워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드문드문 재생되는 필름이 몇 시간 전의 추태를 어렴풋이 전해주고 있었다. 별로 충격은 일지 않았다. 마해영에게나 바텐더에게나 죽을죄를 지었구나 하고 피식 웃음을 물었을 따름이었다. 감각이 마비된 듯 그저 멍하기만 했다. 연인의 충격적인 고백도, 연인의 아름다운 여신과의 대면도 모두 기억이 났지만 새삼스레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도 몸 안에 술기운이 많이 남아서인 것 같았다. 소파에서 일으켜 세워진 몸은 조금씩 비틀거리며 중심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그럭저럭 걸을 만은 했다. 마해영이 무언가 몸에 조처를 취해둔 듯했다. 안 그랬다면 심장마비라도 일으켰을 만큼의 폭음이었다. 알코올에 전 정신으로도 마해영의 배려를 인지할 정도의 분별력은 돌아와 있었다. 물론 그도 전적으로 마해영 덕분이리라.
사무실을 벗어나 바로 들어서니 안쪽의 손님 테이블에 앉아 있던 마해영이 부리나케 다가왔다. ‘어딜 가게요?’ 뾰족한 질책이 떨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죽고 싶어 발악이에요?’ 덧붙여진 건 더 날카로웠다. ‘아뇨. 살고 싶어서요, 형. 술 깨게 바람 좀 쐬려고 그래요. 잠깐만 나가 있을게요.’ 어눌하긴 했으나 비교적 제대로 토해진 자신의 대꾸였다. ‘또 비 올지 모르니 우산 갖고 가요. 어디 멀리 가진 말고요. 술 깨면 바로 들어와요. 좀 있으면 문 닫을 시간이니까 집까지 바래다줄게요.’ 한참을 나른한 시선으로 노려보던 마해영이 마침내 긴 한숨을 쉬며 허락해줬다. 대충 자신에게 이성이 돌아온 것을 말투며 눈빛을 통해 알아챈 때문이리라. 헤실거리는 웃음으로 마해영의 은혜에 박한 답례를 주곤 미메시스를 빠져나왔다. 입구에서 종업원 하나가 건네주는 우산도 받아 챙겼다. 퇴근길에 바래다주겠다고는 했지만, 여기서 더 마해영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좀 걷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돌아갈 요량이었다.
바를 나서자마자 후덥지근한 습기와 더불어 물비린내가 확 끼쳐들었다. 그래도 담배 냄새와 술 냄새가 가득이었던 미메시스보단 훨씬 상쾌해서 깊게 들이쉰 호흡으로 습기를 반겨 맞았다.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는 새벽녘의 이태원은 그다지 인적이 없었다. 조금 지나면 전철이 다닐 시간이기도 해서, 막바지까지 즐긴 취객들은 대부분 술집에 남아 있을 터였다.
걸을수록 맑아오는 정신에 반대급부일 고통도 따라서 선연해지고 있었다. 수시로 바늘에 찔리는 것 같은 심장의 통증도 여전해서, 어디든 다시 술집으로 들어가 마셔볼까 싶은 욕망도 간절해졌다. 물론, 더 이상 배 속에 알코올을 들이붓는다는 건 자살 행위와 다름없었다. 연인과 영영 이별할 요량도 아니면서 아프다고 무턱대고 객기만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견뎌야만 했다.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될 고통이었다. 지난 몇 년간, 지긋지긋할 정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언젠가는 반드시 오리라고 각오해오지 않았던가. 생각보다 몹시 빠르긴 했지만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다가올 고통이라면 빨리 닥치는 편이 고통은 훨씬 덜할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더할수록 깊어지는 사랑이었다. 추억이 더할수록 단념하기 힘들어지는 사랑이었다. 시한이 연장되는 만큼 이별의 고통은 더욱 감당하기 힘들어질 터였다. 게다가 아주 이별한다고 결정이 난 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친구처럼 가끔 보는 관계로 자연스레 고착이 된다면, 자신으로선 남는 장사였다. 어차피 연인의 사랑은 기대조차 하지 않지 않았는가. 변화라고 한대야 그저 연인과 더 이상 섹스를 할 수 없는 것뿐이다. 지난 석 달간의 경험을 통해, 섹스조차 도리어 괴로울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않았나. 새삼 잃을 게 없다. 연인을 영영 볼 수 없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저 가끔, 그리워 사무칠 지경이 되면 잠시 곁을 내줄 연인의 배려에 감지덕지하며 기뻐할 자신이다.
퍽!!!
갑자기 뒤통수로 엄청난 통증이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온몸의 힘이 빠지며 땅바닥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쿵!!! 자신의 몸이 보도블록 바닥에 맥없이 고꾸라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인지되었다.
“……어어? 엇?! 이봐, 너!!! 썅, 저 새끼들이?!!!!!”
멀리서 거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까무룩 흐려지는 의식의 틈을 비집고 주먹깨나 쓰는 양아치일 거라는 뜬금없는 생각이 스쳤다. 잔뜩 힘이 들어간 느끼한 목소리가 그랬다. 상반신이 거칠게 들리는 게 느껴졌다. 어깨에 둘러멨던 크로스백이 낚아채지는 것도 느껴졌다. 다급하고 무도한 손길이었다. 가방만으로도 만족 못 했는지 무뢰한의 손길은 재킷 앞섶을 벌린 채 주머니까지 뒤지고 있었다. 다급한 움직임 탓인지 술 냄새가 뒤섞인 상대의 지독한 구취가 코끝으로 훅 끼쳐들었다.
“야! 저그 저 새끼들 쫓아온다!!! 그만하고 튀자구!!!”
들려졌던 상반신이 도로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뺨에 둔중하게 느껴지는 동통을 통해 그제야 퍽치기들에게 당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마음의 고통에만 몰두하느라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선 게 잘못이었다. 명품 옷으로 휘감은 채 휘청거리며 걸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먹잇감도 없었으리라.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온몸에 기운이 없었다.
바닥에 면한 한쪽 뺨으로 질척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빗물 같기도 하고, 핏물 같기도 했다. 아마도 그 양쪽 다일 것이다. 물비린내에 뒤섞인 피 냄새가 선연했다. 의식이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다시 토하고 싶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