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1993년 9월. 장인환(張仁歡) (80/129)

47. 1993년 9월. 장인환(張仁歡)

갤러리 카페 ‘사하라’는 신촌역에서 연대 쪽으로 20여 미터쯤 올라간 곳에 위치한, 말 그대로 갤러리 겸용 카페였다. 운치 있는 카페를 운영하면서 작품 전시 병행은 물론, 카페 손님들을 대상으로 작품 판매도 이루어지고 있는 꽤나 매력적인 다문화 공간이었다. 카페에서 매월 새롭게 펼쳐지는 기획 전시들은 평소 미술 작품을 접할 기회가 적은 일반인들에게 양질의 예술 작품을 소개하여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카페의 취지에 부합하는 것들이었다. 전시 작품들로는 인환의 영역인 회화도 있었고 조형, 사진, 혹은 비디오아트까지 꽤 다양한 편이었다. 

기하 선배의 소개로 알게 된 카페 주인장의 초대로, 인환도 다른 젊은 작가 세 명과 함께 보름간 소품 위주로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오늘은 전시를 시작한 지 열이틀째가 되는 날로, 연인이 저녁때쯤에 잠시 들른다고 해서 아침부터 나와 죽치고 있는 중이었다. 연인을 모델로 한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꽤 마음에 드는 중간 크기 초상화 몇 점도 함께 전시를 하기에, 혹시 와서 구경하지 않겠냐고 전화로 운을 뗐던 게 의외로 적중한 것이다.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초대의 말은 해보겠지만, 늘 그렇듯이 자신의 데이트 요청을 연인이 여간해선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요즘이었으니까. 의외로 연인이 흔쾌히 구경을 오겠다고 대답을 주었을 땐, 자신의 귀청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의심마저 들 정도였었다.

섹스 파트너로서 완전한 결별 선언을 들은 지 오늘로 54일째였다. 연인에게 그야말로 ‘진짜 연인’인 약혼녀가 생긴 걸 알게 된 지도 또한 오늘로써 54일째……. 그 54일이 어떻게, 어떤 일들을 거치며 흘러간 건지, 인환은 제대로 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단 한 가지, 그동안 연인의 얼굴을 본 몇몇 시간들만 확실히 기억할 뿐이었다.

그간 연인의 얼굴을 본 것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로, 퍽치기를 당해 일주일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을 하던 날에 잠시 본 것과, 그녀와의 데이트를 위해 모처럼 이태원으로 나온 연인을 30분 정도 새치기한 것, 그리고 열흘 전쯤, 연인이 과외를 하는 아현동 근처까지 찾아가서 연인에게 저녁을 사준 것이 만남의 전부였다. 그랬다. 도합 세 번이었다. 54일 동안 채 한 시간도 이어지지 않았던 그 단 세 번의 만남. 실제로 담백한 친구 관계라면, 혹은 그저 데면데면한 지인 정도의 관계라면, 그 몇 번의 만남조차 과분한 것일지도 몰랐다. 시간과의 전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살인적인 연인의 스케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럼에도 인환은 잘 납득을 할 수가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렇게 연인을 가끔씩밖에 볼 수가 없는 건지,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슬퍼서 견딜 수가 없는 건지, 하나도 제대로 이해가 가는 것이 없었다. 자신은 고작해야 이틀이 한계인데, 연인 없이는 단 이틀도 버티질 못하는 의지박약 인간인데, 어느 날 깨어나보니 20여 일에 한 번꼴로 보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라고 하니,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요구였다. 갑자기 아이큐 두 자릿수도 못 되는 저능아가 돼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특히 연인에게 이해 못 하겠다고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다. 뇌리 한구석엔 그게 옳은 거니까 무조건 알아먹으라고 자꾸만 호되게 야단을 치는 영리한 존재도 분명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모든 게 마냥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아프기만 했다. 가슴 부근이 가장 아프고, 온몸의 관절과 근육들과 피부들이 따끔따끔 욱신욱신 아프고, 머리는 수시로 지끈지끈 쑤셔댔다. 자신도 모르게 한순간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일단은 연인이 하라는 대로 다 해야만 했다. 아무리 이해할 수가 없고 아무리 온몸이 아파도, 연인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였다. 연인이 하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만 했다. 만약 따르지 않으면 그나마도 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저능아가 돼버린 머리로도 그 단 하나의 구명줄만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따지면 안 된다. 반항하면 안 된다. 이해 못 하겠다고 투정부려서도 안 된다. 그러면 정말로 완전히 버려진다. 다신 연인을 볼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그냥 이리 숨죽이고 있는 중이었다. 뭐든 연인이 요구하는 대로 얌전히 받아들이고 복종했다. 섹스 파트너 관계를 그만두자면 그만두었고, 만남을 줄이자면 줄였고, 전화 통화도 귀찮아하는 것 같으면 그도 몇 번이나 벼르고 벼른 끝에 일주일에 한 번씩 걸곤 했다. 그나마도 짜증이 느껴지면 서둘러 끊어주었다. 오늘 초대의 흔쾌한 수락은 아마 그 덕분일 것이다. 그간 연인의 명령과 요구들에 얌전하게 복종한 데 대한 칭찬의 의미. 잘 참아주었으니 이제쯤 상을 내려주마. 연인의 연민에 찬 속내가 어렴풋이 짐작되는 지점이었다.

“인환아, 사인!”

옆에서 팔꿈치를 쿡쿡 찌르며 재촉이 들어왔다. 멍하니 돌아보니 오주희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인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인 요청하시잖아. 또 백일몽이니?”

오주희의 시선을 따라 맞은편으로 도로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오주희의 질책을 이해했다. 맞은편 의자엔 자신의 p4호 크기 정물화를 구입한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는데, 자신에게 사인을 부탁한 모양이었다. 여성은 자신의 기사가 나간 잡지의 기사 부분을 펼쳐 보이며 사인펜을 내민 채 담담하게 웃고 있었다. 그제야 부랴부랴 여자의 손에 들린 펜과 잡지를 받아 들고 정성껏 사인을 해주었다. ‘작품 세계 많이 좋아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활동 기대하겠습니다. 장 선생님.’ 여자가 빙긋 웃으며 격려의 인사말을 했다. 인환보다 2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로부터 듣는 선생님이란 호칭도 쑥스럽고, 자신의 작품에 애정을 가진 듯한 낯선 여자의 호의도 역시 쑥스럽기는 한가지여서, 그저 수줍은 웃음을 지어준 게 답례의 전부였다. 여자가 일행이 가다리고 있는 다른 테이블로 가버리자 그제야 안심하는 인환이었다.

자신의 작품이 누군가에게 팔렸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화가라는 자의식을 실감하곤 하지만, 확실히 아직 이렇게 고객과 직접 대면하는 일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누군가 다른 이가 받아야 할 관심과 칭찬을 자신이 대신 받아 챙기는 듯한 이상야릇한 이질감과도 비슷했다. 특히 사생활적으로 제정신조차 챙기지 못하는 요즘의 자신을 생각해볼 때 더더욱 그러했다. 불특정 다수의 고객들이 기대한다는 ‘작품 세계’는 이미 인환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작품 세계고 뭐고, 인환에게 있어 그림은 이미 뒷전이 된 지 오래였다. 완전히 붓을 놓은 지도 꽤 됐고, 열의는커녕 그림엔 아예 관심조차도 없었다. 그랬다. 이미 자신은 화가도 뭣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연인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고, 동시에 결별 선언을 듣게 된 바로 그 무렵부터. 실제의 자신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조차 못 하는 어리둥절한 저능아가 돼버렸다면, 화가로서의 자신은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죽어버린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게 자신에게 유해한 일인지, 혹은 무해한 일인지, 판단할 수조차 없는 요즘이었다.

연인과 그림이 부재하는 시간은 마냥 무의미하게 흘러만 갔다.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고, 잠시 깨어 일어나면 텔레비전을 보거나 무협지와 만화책을 빌려다 보고,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한 끼 정도 폭식을 하고, 다시 졸리면 잠이 드는 매일이 계속되었다. 퍽치기한테 당한 후론 엄마로부터 금주령이 내려져서 술도 마실 수가 없었다. 김천댁 아줌마는 매일매일 아틀리에로 출퇴근을 하며 엄마의 충직한 감시자가 되었다. 외출 자체를 거의 안 하니 마실 일도 없긴 했는데, 그래도 감시의 눈길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모성의 육감이었을까? 확실히 엄마는 여느 때와는 많이 달랐다. 평소보다 세 배는 전화가 늘었고, 사나흘에 한 번꼴로 아틀리에에 들러 아들의 퀭한 얼굴을 보고 잔소리를 한 보따리쯤 늘어놓은 후 집에 돌아가곤 했다. 입원 첫날 연인과 조우한 이래, 무언가 미심쩍게 여긴 건지 연인에 관해선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그 알랭 들롱 총각은 요새 어떻게 지낸다니?’ 하고 틈틈이 장난 삼아 물었을 텐데,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어렴풋이 눈치를 챈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뭐, 설령 아시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막연히 체념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엄마에게만은 죽어도 커밍아웃을 할 수 없다는 그 독한 결심조차 점점 흐물흐물해지고 있는 요즘이었다. 만사가 다 귀찮았다. 그 어떤 심각한 사건이 터진다 해도, 여기서 더 아플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이미 막장이었다. 지옥이었다. 더 이상 겁날 게 있을 까닭이 없었다.

집 안에만 틀어박혀 반송장이 돼가는 인환을 보다 못해 선 화랑 동료들이 나섰고, 갤러리 카페 사하라에서의 전시는 그런 동료들의 근심에 찬 배려에서 나온 고육책이었다. 동료들의 걱정이 미안하기도 하고 또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리 고맙다는 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귀찮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림이고 전시고 다 귀찮기만 한데, 자신을 자꾸만 밖으로 끌어내고 또 무언가 일을 시키려는 동료들이 마냥 고마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 그대로 ‘배은망덕도 유분수지’였다. 그것이 그들 나름대로의 애정과 염려 때문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고마움보다는 짜증이 더 앞선 자신이었었다. 그만큼 자신에게 현실감이 결여돼 있다는 반증일 터였다. 그리고 그 배은망덕한 심사는 오늘의 외출로써 절정을 이루었는데, 막상 작품 전시를 하면서도 카페엔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연인이 들러준다는 한마디에 혹해서는 아침부터 나와 죽치고 있는 작태가 그러했다. 자신이 카페에 나와 있다는 소리를 전해 들은 오주희가 한 시간 전쯤에 들이닥쳐서는 뒷목을 잡고 울화통을 터트린 것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카페 방문 목적이 초대 화가로서의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연인 때문이라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또 죽어가네? 도대체 그렇게 멍하니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거니? 그 답답한 속이나 좀 파보자.”

갑자기 뺨이 꼬집히더니 옆으로 고개가 홱 돌아갔다. 가까이 얼굴을 들이댄 오주희의 폭거였다. 붉으락푸르락하는 표정이 우스워서 해죽 웃었더니, 또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나중엔 가슴을 사납게 탕탕 치기까지 했다. ‘하지 마. 아프겠다’ 하고 중얼거렸더니, 이번엔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노려보질 않는가. 완전 마녀였다. 미인이기에 망정이지, 평범한 외모였다면 정말 꿈에 나타날까 봐 무서울 표정이었다.

“잊어라. 응? 제발 잊어. 너, 그래야 살아.”

무시무시한 마녀의 어조는 절절했다.

“그냥 독하게 마음먹고 버려. 너도 그럴 수 있어. 여기 선배가 있잖아. 그 새끼 아니라도 세상은 살아져. 사랑이 전부가 아니란 말이다. 응?”

“…….”

“버릴 생각을 못 해서 그래. 너, 그래서 이렇게 힘든 거야. 일단 버릴 생각부터 해. 그 조그만 머리통에서 그 새끼를 아예 청소해버리란 말야. 그게 도저히 안 되면 우선 그런 상상부터 품어봐. 그 새끼 얼굴을 쓰레받기로 싹싹 주워 담는 상상. 그게 시작이야.”

“…….”

“그리고 딴 놈들도 만나봐. 일단 만나봐. 만나서 뭘 어쩌라는 게 아니라, 그냥 수다라도 떨고 그래. 그러다 동하면 자버리는 것도 괜찮고.”

“…….”

“독사 부를까?”

“…….”

“너 자꾸 이러면 나 진짜 독사 부른다? 그 인간도 불쌍하긴 하지만 우선 너부터 살려야 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뭐, 그 인간도 뱉은 말이 있으니 이용하려고 부른대도 억울하다곤 말 못 하지.”

“……?”

“그래. 작년에 뉴욕으로 뜨면서 나한테 그랬어. 너한테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달라고. 그놈이 너 차버리면 당장 달려올 거랬지. 그 인간도 니네들 새중간에 끼어서 힘들어 했던 거 아니까 그간 나도 차마 사정은 못 전했는데, 너 자꾸 이렇게 찌질하게 굴면 것도 모른다? 양심이고 뭐고, 당장 독사 콜 하고 말 거야.”

“……그러면 나 진짜로 미쳐, 선배.”

“!!”

“……세혁 선배까지 끌어들이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거야. 그러지 마. 절대로 그러지 마. 그냥…….”

“…….”

“……그냥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이야. 선배 말대로 머릿속을 청소할 생각도 하고 있어. 하지만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아. 아직은 좀 더 사랑하고 싶거든. 내쳐졌다고 바로 사랑을 그만두는 것도 어쩐지 얍삽하잖아. 그런 ‘내 사랑’이 불쌍하잖아. 나마저도 재빨리 정리해버리면…… 나조차도 인정해주지 않으면, 진짜로 갈 곳 잃은 ‘내 사랑’이 불쌍해져버리잖아.”

“…….”

“……채근하지 마, 선배. 난 보통 사람보다도 걸음이 좀 느리니까, 사랑을 정리하는 데도 느린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해줘. 느리긴 해도 확실히 따라가긴 하잖아? 조만간 선배처럼 말끔히 정리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답답하더라도 당분간은 조용히 지켜봐줘. 부탁이야, 선배.”

“…….”

한참이나 인환의 눈을 들여다보던 여자의 눈에 물기가 보였다. 이내 고개를 돌린 여자는 그대로 소리 없이 한참을 울었다. 그런 여자가 어쩐지 가여워서 어깨를 감싸 안아 토닥여주었다. 여자의 슬픔에 공명한 넋이 물기를 부추기고 있었다. 함께 울면 여자를 더 진정시키기 힘들 것 같아서 애써 참아야만 했다. 이상했다. 인환 자신의 아픔이나 슬픔은 좀처럼 눈물을 부르지 않는데, 타인의 아픔이나 슬픔엔 이상할 정도로 예민해진 요즘이었다. 퍽치기 강도를 당하고 입원한 날, 갑자기 연인의 방문을 받고 놀라 울어버린 이래, 인환은 그간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생애 중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는 걸 얼핏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그토록 흔했던 눈물이 완전히 메말라버린 것 같은 증세를 보이는 것도 좀 이상한 일이었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조차 못 하는 어리둥절한 저능아가 되면, 제 감정은 남의 것이 되고 남의 감정은 제 것이 되는 건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잘난 면상 한번 보고 가겠다’며 강짜를 부리던 오주희를 간신히 설득해 돌려보낸 게 3시 반쯤. 그로부터 다시 서너 시간이 흐른 6시 50분이 되어도 연인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때쯤’이라는, 평소에 시간 개념이 철저한 연인치곤 흐릿한 약속이었지만, 본과 수업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도 스터디까지 마쳐야만 겨우 귀가할 수 있는 연인의 평일 스케줄을 알고 있기에 그러려니 했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잠깐 시간을 내서 보러 오겠다는 정성과 배려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도 학기가 시작되고 나니 거의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과외 알바를 뛰던 방학 때보다는 한결 여유가 생긴 것처럼 보이던 연인이었다. 과외를 봐주는 학생들의 숫자를 단 두 명으로 줄였기 때문이라 했다. 그 이상의 숫자는 학기 중 수업과 병행시키기 힘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고 연인은 말해주었었다. 열흘 전, 아현동에서 잠깐 만나 저녁을 사줄 때였었다. 여전히 피로한 안색에 마른 몸 그대로여서 가슴이 짠했지만, 그나마 좀 여유를 찾은 것 같아 도리어 안심했던 자신이었다.

약혼녀네 집안이 대단한 글로벌 기업의 수장이고, 또 그녀 본인이 소유한 재산만 해도 엄청나다는 걸 인환도 들어 알고 있다. 사립탐정을 고용해 그녀에 대해 알아보았었고, 꼼꼼히 작성된 보고서를 통해서 인환은 다시 한 번 아득한 절망을 느껴야만 했으니까. 두 사람의 결혼 계획이 어느 정도까지 진척이 돼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만약 그 결혼이 성사만 된다면 연인의 빡빡한 생활에도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연인의 결혼을 액면 그대로 축하해줄 수 있을지는 도저히 자신이 없는 인환이었다. 아니, 축하는커녕 아예 현실감 자체가 들지 않았다. 연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배우자가 된다는 사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돌리고픈 공포 영화 속 스토리라인처럼 지극히 비현실적이면서도 무시무시한 어떤 것에 불과했다. 실감을 못 하니 축하도 못 하겠고, 그렇다고 저주도 못 하는 형편이었다. 역시 그저 마냥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마냥 이상하기만 할 뿐이었다. 자신의 온 넋과, 육체와, 영혼을 좀먹고 있는 이 끔찍한 고통과 슬픔처럼.

“……식사 안 하세요?”

비어버린 커피 잔 대신 토마토주스가 가득 채워진 크리스털 잔을 내려놓으며 누군가가 말했다. 고개를 들어서 보니, 카페의 바리스타라고 소개받았던 30대 중반의 사내였다.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해서 카페의 주인장과 의기투합해 카페를 여는 데도 한몫을 했다고 오전 중에 들은 기억이 났다.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어주며 고개를 가로젓자, ‘저희들도 식사하려고 주방장이 간단히 준비했는데, 정말 같이 안 드시겠어요? 점심도 드시지 않은 것 같던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과묵한 성품으로 보였는데 의외로 오지랖이 넓은 상냥한 사람이었나 보다. 역시 그저 웃어주는 것으로 확실한 거절을 표했다. 연인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랐다. 식욕도 없었지만, 이렇게 온 신경이 칼끝처럼 긴장하고 있는 시점에서 무언가를 먹었다간 그대로 체하고 말리라. 온화한 웃음 속에 담긴 진심을 읽었는지, 사내도 ‘배고프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하고 덧붙인 뒤 카운터 쪽으로 되돌아갔다. 카운터 옆 테이블엔 무언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 접시들이 있고, 그 주위로 검정 앞치마를 두른 점원 둘과 주방장, 그리고 방금 되돌아간 사내가 죽 모여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인 모양이었다. 열댓 개쯤 될 카페 테이블은 서너 개 정도만 차 있어, 손님은 그다지 없는 편이었다. 식사 시간인 저녁때보다는 낮 시간대나 아예 늦은 밤에 더 손님이 몰린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았다. 손목시계를 보니 8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창 밖은 이미 어둠이었다. 너무나 오래 기다리고만 있으니 시간관념조차 마냥 흐릿해졌다. 끝없이 길게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고문의 시간 같기도 하고, 한번 눈을 감았다 뜨니 몇 년이 훌쩍 가버린 것을 그제야 깨닫고 소스라치는 무릉도원의 찰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감각조차 잃어버린 배 속에 바리스타가 가져다준 토마토주스를 막 몇 모금 들이켠 시점이었다. 딸랑 하고 출입구 문이 열리며 장신의 늠름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출입구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앉아 있었기에 막 들어선 이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언제 어디에 있든 뭇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 남자였다.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존재감을 자연스럽게 발산하곤 해서, 주변에 있는 누구라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게끔 만드는, 그런 놀라운 남자였다. 학교에서 바로 오는 중이었는지 남자는 낡은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그 위에 체크무늬 남방을 대충 걸친 차림이었다. 어깨에 둘러멘 것도 커다란 검정색 책 배낭. 세련된 디자인과 고급스러운 재질을 보니 저것도 약혼녀에게서 선물받은 것인가 보았다. 몇 번 안 되는 만남 때마다 남자는 저렇게 한두 가지쯤 자신이 처음 보는 소지품이나 옷가지를 몸에 두르고 나타나곤 했다. 물어보면 어김없이 약혼녀로부터의 선물이라는 대답이 되돌아오곤 해서 그때마다 가슴을 저미곤 한 인환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자신의 연인이었다. 아직은, 도저히 자신의 연인이 아니라고 납득할 수 없는 그리운 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담담한 얼굴에 슬며시 예의 바른 미소가 퍼지는 게 보였다. 여전히 인환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타인’의 미소였다. 연인이 남창의 자격으로 자신의 곁을 지킬 때에는 여간해선 보여주지도 않던 그런 미소였다. 너무나 상냥하고 예의가 발라서 더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그런 거였다.

마주 환하게 웃어주고 싶었는데 어쩐지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반가우면 그렇기도 한 모양이었다. 연인은 웃음을 머금은 채로 테이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립고 그리운 연인의 체취가 꿈처럼 주변을 떠돌았다. 엉거주춤 일어서서 손을 흔들었다. 멍하니 있다가 다가오는 연인을 안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채찍질하듯 단숨에 넋을 가다듬은 것은 물론이었다.

“……와, 왔어……?”

잔뜩 쉰 목소리가 가까스로 토해졌다. 반가운 웃음도 어찌어찌 만들어졌다. 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맞은편 의자에 몸을 부리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래 기다리신 건 아니죠? 죄송해요. 스터디가 생각보다 길어져서요. 오늘은 해부학 실습까지 있어서 동기들이 유난히 더 물고 늘어지더라고요.”

카페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탓에 시선은 마주치지 않은 채 연인은 몇 마디를 더 부연하며 가볍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가 밝았다. 창백한 낯빛은 여전히 피로해 보이고, 해쓱하게 마른 것도 여전한데 그나마 밝아 보여 다행이라고 안심하는 인환이었다.

“오, 오래 기다리긴…… 내 작품 전시하는 건데 호스트로 지키는 거지. 나도 느지막이 나왔는데, 그림 보러 오는 관객들도 만나볼 수 있고 카페 분위기도 좋고 해서 전혀 심심하지 않았어.”

연인의 등장과 함께 무채색이던 시야가 총천연색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자각하며 덧붙인 말이었다. 역시 좋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연인을 볼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은 그저 꿈같은 기적이었다. 때론 심장이 저미는 것처럼 아프고, 때론 연인의 서늘한 이질감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며 기절할 것 같아도, 만남 자체가 주는 이 생생한 열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저 입술도, 저 콧날도, 저 광대뼈도, 저 깊은 눈시울도, 저 부드러운 머리카락도, 저 조각 같은 몸도…… 모두 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겐 기쁨이었다. 에너지였다. 살아갈 수 있는 생기였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우선 뭐 시켜줄까? 여기 카페긴 한데 간단한 안주나 경양식도 만들어주거든. 상그리아라고 와인으로 만든 과일주도 인기 있는 주 메뉴지. 친구들이 그러는데 상그리아랑 곁들인 안심스테이크가 아주 일품이래. 하긴 넌 술도 안 좋아하고 양식도 잘 안 먹으니까 모르겠다. 김치볶음밥이랑 계란찜도 있어. 그거 시켜줄까?”

“아뇨. 저녁은 이따 그 사람 오면 함께 먹을 예정입니다. 배는 좀 고픈데 기다려야죠.”

쑥스러운 듯 싱긋 웃는 연인에, 다시금 머릿속이 하얗게 빈다. 입가에 걸었던 미소가 그대로 굳어드는 게 느껴졌다. 누가 와? 누구와 함께 저녁을 먹는다고?

“……그…… 그…… 사람……?”

어쩌자고 확인 사살을 자처하는지 모르겠다. 후회했을 땐 저도 모르게 되묻는 말이 흘러나간 후였다.

“예. 오늘 세종문화회관에서 정기 연주회가 있다고 했거든요. 공연 끝나고 바로 오겠다고 했으니 9시쯤엔 도착할 거예요. 30분 정도만 더 기다리면 되겠네요, 뭐.”

굳어든 입가를 어떻게든 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웃어야만 한다. 웃어주어야만 한다. 아무렇지도 않는 척 태연하게. 그랬구나 하고 가볍게 대꾸해주어야만 한다. 저녁밥까지 기다렸다 먹겠다니 진짜로 팔불출이 따로 없네 하고 농담이라도 던져야만 한다. 웃어. 웃어라, 장인환. 웃으라구…….

“요즘 제대로 먹지도 못해요. 그럴 일이 있거든요. 걱정돼 죽겠어요. 저러다 몸이라도 상할까 봐서요. 모처럼 얼굴 보는 건데 혼자 식사하게 둘 수야 없죠. 그럼 더 안 먹으려 들 테니까요.”

미간을 살짝 접은 채 연인이 덧붙였다. 정말로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약혼녀를 위해서라면 한 끼는커녕 한 달이라도 굶어줄 기세였다. 그럼 그렇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그 바쁜 연인이 시간을 냈을 턱이 없었다. 애초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저녁 내내 연인을 독차지할 거라고 김칫국부터 마신 벌이었다. 그러니 침착하자. 침착해야만 한다.

“……지, 진짜로 애처가 다 됐네, 우리 위야……. 후후, 알았어. 그럼 간단하게 과일 카나페 같은 거라도 만들어달라고 할게. 그걸로라도 일단 요기하고, 식사는 신애 씨 온 다음에 같이 하렴.”

다행히 목소리는 많이 떨리지 않았다. 굳어들었던 얼굴도 다시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조금 어설퍼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럭저럭 만들어 쓸 수 있었던 ‘친구’의 가면이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 지속할 순 없을 것 같았다. 마음부터 다시 단단히 추스르는 게 급선무였다.

“……주, 주방에 들러 부탁하고 올게. 넌 작품들 구경하고 있어. 네 초상화들은 저쪽 복도를 넘어가면 맞은편 벽에 죽 걸려 있거든. 아마 알아볼 수 있을 거야. 네가 모델 해주었을 때 작품들이니까. 내 작품들 말고도 다른 화가들 것도 있는데 꽤 재미있는 소품들이 많아. 신애 씨도 들를 줄 알았으면 따로 좋아할 만한 걸 몇 골라보는 건데 그랬다. 이번에 고른 것들은 아무래도 좀 거친 작품들이 많아서…… 아 참, 그리고 네가 모델이었단 건 비밀로 해두는 게 좋을 거야, 위야. 네 초상화들이 좀 많이 야하잖아. 헤헤, 신애 씨가 수상쩍게 여기면 곤란하니까…….”

속사포처럼 정신없이 수다를 던져주곤 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연인의 시선이 힐끔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게 느껴졌지만 마주칠 용기는 없었다. 어설프게 뒤집어쓴 가면을 연인이 행여 눈치라도 챌까 몹시도 두려웠다. 그저 무턱대고 주방 쪽으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장 선생님?”

허겁지겁 주방문을 밀고 들어서자 새하얀 요리사 제복 차림의 주방장이 돌아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어디 안 좋으세요?! 얼굴이 창백하세요!”

망할. 자율 신경까지는 조절이 안 되는 게 항상 문제였다. 시야가 하얗게 변하며 또 기절할 것 같아서 그대로 바닥에 쪼그리고 앉는 수밖에 없었다. 주방장이 뭐라고 외치며 다가왔지만 당장은 대꾸해줄 기력이 없었다. 기절하면 안 돼.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제발 기절하지 않게 해주세요, 하느님!

“……장 선생님?! 괜찮으세요?! 장 선생님!”

“……어…… 아아, 예……. 그, 그냥 좀 어지러워서…… 요즘 빈혈기가 있거든요…….”

말갛게 웃으며 대꾸를 주자 주방장이 ‘휘유’ 하고 한숨을 쉬는 게 느껴졌다. 뭐라고 또 걱정스레 덧붙이는 소리를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도록 아예 신경이 차단된 것 같았다. 괜찮아. 쪼그리고 앉은 그대로 스스로를 격려했다. 여태까지도 잘 견뎌왔잖아. 괜찮아. 무에 새삼스러운 일이라고 그래. 어차피 연인에게 1순위는 그녀잖아. 오히려 잘된 거지. 그녀와의 데이트 약속이 없었다면 여기 들르겠다는 소리도 안 했을 거 아냐. 덕분에 잠깐이라도 보고 좋지 뭘 그래. 아무렴, 좋고말고. 덕분에 볼 수 있었잖아. 앞으로도 몇 십 분간은 더 볼 수가 있잖아. 그러니까 빨리 진정하고 나가. 빨리 연인에게로 가. 1분 1초가 아까운 마당에 뭘 미적거리고 있는 거니.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거 좀 준비해주시겠어요? 과일 카나페가 맛있다던데, 될까요?”

다행이었다. 기절할 것만 같던 아득한 위기감은 얼추 사라지고 없었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주방장을 향해 진심으로 웃어줄 수도 있었다. 미심쩍은 기색의 주방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다행이었다. 그냥 모든 게 다 다행이었다.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는 정말로 딱 9시에 왔다. 단 1분도 더는 아량을 보여주지 않았다. 덕분에 인환이 연인을 독차지할 수 있었던 시간은 고작 30∼40분이 다였다. 물론 세상 무엇보다도 아쉽고 아깝고 귀한 30∼40분이었다. 연인이 자기 초상화를 구경하며 실소하는 모습도 보고, 허겁지겁 과일 카나페를 집어먹는 모습도 보고, 반드시 고인에게 짤막하게 제사를 지내곤 실습에 들어간다는 해부학 실습 얘기랑 그에 적응 못 해서 기절하는 동기 얘기도 듣고, 동생들 안부도 듣고, 무엇보다도 그녀에 관한 얘기를 가장 많이 전해 듣기도 했다. 눈앞의 연인이 마냥 꿈같기만 해서 그저 정신없이 연인만 바라보며 열심히 들어주었다. 변함없이 기쁘고, 황홀하고, 또 그 이상으로 가슴을 저미는 30∼40분이었다.

그녀는 조금 지친 듯 해사한 얼굴로 나타났다. 연주회가 있었다더니 파란 새틴 드레스에 미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차림이었다. 바이올린 케이스와 더불어 관객에게서 선물받았는지 화려한 꽃다발까지 한 아름 안고 있었다. 여전히 여신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운 등장이었다. 연인이 카페 안의 여자 손님들 눈을 즐겁게 만들어줬다면, 여신은 남자 손님들은 물론 덤으로 카페 종업원들의 눈길까지 사로잡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니 역시 무슨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서로 마주 보고 웃고, 공연은 잘 끝냈냐는 안부 인사가 오가고, 선배님 오랜만에 뵙네요 하는 예의 바른 멘트도 듣고 하는 사이, 연인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당연했다. 뭇 타인들이라도 한 번쯤은 감탄으로 돌아보는 천하절색의 미녀에, 열렬한 첫사랑에 빠지기까지 했으니 오죽하랴.

인환은 배고프시겠다는 호들갑으로 서로를 바라보기에만 급급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고, 덕분에 제정신을 차린 듯한 아름다운 커플은 메뉴판을 보고 음식을 주문했다. 그저 예의상의 관심에 불과할 ‘작품들은 어디 있느냐’는 그녀의 질문이 날아왔고, 인환은 직접 일어서서 그녀를 칸막이 안쪽의 갤러리로 안내했다. 5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림들을 구경하며 그녀는 연신 멋지다는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녀가 인환에게 품고 있을(아마도 연인은 차마 의심조차 하지 못할) 특정 혐오감을 알고 있는 인환으로선 그저 예의상의 멘트에 불과하다는 걸 납득하면서도 그녀처럼 연신 별거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겸손을 떨어댔다. 테이블로 음식이 날라져 온 건 그즈음이었다. 주방장의 추천에 따라 그녀를 위해서는 안심 스테이크가, 연인을 위해서는 먹음직스러운 김치볶음밥이 테이블 위에 진열되었다. 그림 감상엔 그저 건성인 그녀를 이끌고 도로 연인 혼자 음식들을 맞고 있는 테이블 쪽으로 안내할 무렵이었다.

“……우웁!! 욱!!!”

갑자기 사색이 된 그녀가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인환이 그녀 쪽으로 손을 뻗었고, 순간적으로 놀란 그녀가 다가가던 인환의 손을 내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짝 하고 피부가 마찰하는 소리가 실내를 날카롭게 진동시켰다. 은은하게 감돌고 있는 클래식 음악 소리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수많은 시선들이 두 사람이 서 있는 통로 쪽으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내쳐진 손 대신 연인의 팔이 뻗어온 것은 그 직후였다. 아마도 몇 초의 시간조차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휘둥그레져서 충격을 삭일 틈도 없었다.

“신애 씨……!”

새파래진 채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있는 그녀와, 그런 그녀를 보호하듯 팔 안으로 감아 들이는 연인이 보였다.

“여기 화장실이 어딥니까?”

표정을 굳힌 연인이 날카롭게 물어왔다. 반사적으로 화장실이 있는 방향으로 눈짓을 하자 연인은 그녀를 품에 안듯이 부축해서 화장실로 데려갔다. 두 사람이 화장실 안쪽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인환은 그저 어리둥절해 있을 따름이었다. 이쪽을 향해 있던 뭇 시선들은 다행히 사라졌지만 음식 접시를 나르던 종업원은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인환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녀는 어디가 아픈 걸까? 즉각적인 의문보다도 인환에게 충격을 준 것은 늘 그렇듯이 연인의 태도였을 것이다. 그녀가 지독한 혐오감을 숨길 생각도 않은 채 마치 더러운 것이 자신을 만졌다는 듯 몸서리를 치며 자신의 손을 뿌리친 것도, 물론 그다지 놀라진 않았다. 갑자기 사색이 돼서 헛구역질을 하는 그녀도, 애초부터 연적의 안위를 걱정할 만큼 부처님 가운데 토막도 아니었기에 역시 논외의 대상이었다. 그랬다. 지금 자신이 놀란 것은, 아니, 놀랐다기보다 알면서도 다시금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연인 때문이었다. 번개처럼 재빨리 다가와 그녀를 부축한 행동도, 잔뜩 인상을 굳힌 채 화장실의 위치를 묻던 것도, 마치 깨어질까 두려운 섬세한 세공품이라도 대하듯 애지중지하며 화장실로 데려가던 장면도, 모두 인환에겐 끔찍한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를 향한 연인의 극진한 애정과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증명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 당연한 거잖아 하고 이성은 놀라 울부짖는 심장을 향해 납득하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알았다고, 납득하겠다고 심장은 벌벌 떨며 마지못해 대꾸를 줄 수밖에 없었다. 어쩌겠는가. 납득하지 못하면 심장은 또다시 뇌리로 가는 혈액의 공급을 제멋대로 중단시키고 말 테니 말이다. 연인 혼자라도 그 앞에서 기절하면 죽음인데, 연인의 약혼녀까지 함께 있었다. 두 사람 앞에서 등신처럼 적나라하게 속내를 드러내며 기절을 할 수야 없지 않는가. 물론, 인환은 이때만 해도 잘 견디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렇게 순간순간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은데도, 잘만 웃고 잘만 태연스레 사랑에 빠진 두 커플을 지켜보고 있다고. 미처 깨닫지 못한 자신의 인내심에 경탄을 보내고, 천연덕스러운 변죽엔 자축의 건배를 했었다.

그러나 마침내, 인환으로서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한계 또한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야말로 상상조차도 못 한 속수무책의 폭거였다. 너무나 기습적이고 강력해서, 그 무엇으로도 대미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인환이 아니라도, 세상의 모든 사랑에 빠진 인간이라면 자신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라 후일 자평할 만큼, 그것은 지독하게 무자비하고도 가혹한 카운터펀치였던 거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거의 다름없는 포즈로 두 사람이 통로를 빠져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당황하는 종업원을 괜찮다고 하고 물린 뒤, 정작 인환은 테이블에 앉지도 못하고서 초조하게 두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괜찮냐’고 물으며 웃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냥 걱정스레 굳은 표정을 짓는 게 나을까 망설이고 있는 사이, 시선을 마주한 연인이 먼저 두 사람의 가방과 짐을 챙겨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두 사람의 가방은 그녀의 꽃다발과 바이올린 케이스와 더불어 테이블 소파에 놓여 있었다. 연인의 부탁을 얼른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서 있기만 하자, 연인이 좀 더 굳어진 얼굴로 덧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모처럼 얼굴 뵈었는데 별로 말씀도 못 나누고 헤어지겠네요. 신애 씨 상태가 안 좋아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음식 값은 제가 그냥 계산할게요.”

늘어진 테이프처럼 연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징징 울리는 것으로 변했다.

“우선 신애 씨부터 차로 데려다주고 올게요. 공연도 있었고, 빈속에 갑자기 음식 냄새를 맡으니 입덧이 도졌나 봅니다. 안 그래도 요새 입덧이 심해서 잘 먹질 못하거든요. 그럼 부탁할게요, 선생님.”

징징, 느릿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연인이 그녀를 부축해 카페를 나가는 게 보였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이번에야말로 소파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앉아 있는데 연인의 마지막 말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그럼 부탁할게요, 선생님.’ 부탁한다고 했으니 반드시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뭐든 연인이 요구하는 대로 얌전히 받아들이고 복종하곤 하는 요즘의 관성이 이번엔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주춤거리고 일어나 연인과 그녀가 앉아 있던 맞은편 소파로 갔다. 연인의 책 배낭과 그녀의 사파이어 빛깔 클러치백, 그리고 꽃다발 세 개와 바이올린 케이스를 양손에 모아 들고 카페 입구인 카운터 쪽으로 갔다. 손도 안 댄 음식 값을 연인이 계산한다고 했지만, 손님을 초대한 호스트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계산을 하고 있는데 마침 딸랑 하고 문소리가 나며 연인이 들어왔다. 계산을 끝내고 카드까지 집어넣은 마당에 연인이 할 일이라곤 카운터 위에 놓인 짐을 챙겨 가는 것뿐이었다.

“제가 계산해야 하는데…… 죄송해서 어쩌죠?”

나지막한 말이었다. 정말로 난처한 듯, 연인은 싱긋 매혹적인 웃음을 물고 있었다. 역시 예의 바른 ‘타인’의 웃음이어서 또 목이 메었다.

“……죄송하긴…… 괜히 초대해서 신애 씨만 고생시킨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인환도 싱긋 웃어주며 입에 발린 인사를 했다. ‘임신 초기엔 여러 가지로 조심해야 한다는데.’ 덧붙이려던 또 다른 한마디는 차마 토해지지 못했다. 무서웠다. 말로 토해지면 그야말로 현실이 될 것 같았다. 이미 현실이라는 자각은 무시했다. 자각하면 끝장이다. 적어도 연인을 무사히 보내기까진 그 무엇도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될 터였다.

“……너도 얼른 들어가서 쉬렴. 어째 얼굴이 자꾸만 더 마르는 거 같다. 걱정 많이 돼, 위야.”

이건 진심이었다. 징징, 느리게 울려 퍼지는 진심. 자신의 목소리도 어딘가 늘어진 테이프 같았다. 배경으로 깔리는 클래식 선율도 징징 늘어지긴 한가지였다. 그조차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몇 겹의 막을 통과해야만 겨우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미미한 울림들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일간 전화 드릴게요.”

한 보따리의 짐을 양손에 들고 연인이 돌아섰다. 양손에 짐이라 문을 열기 불편할까 봐 화들짝 놀라 먼저 뛰어가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연인은 또 싱긋 하고 낯선 웃음을 부록으로 던져주었다.

딸랑 하고 마침내 현관문이 닫혔다. 연인을 완벽하게 삼켜버린 문이었다. 인환 자신은 이쪽 편에 홀로 남겨지고, 연인은 문 너머 저쪽 편에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였다. 아니, 이젠 셋인가? 슬쩍 자문했다가 단숨에 가슴이 산산조각이 났다.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장 선생님?!!!”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머리인지 얼굴인지가 둔탁하게 부딪치는 게 느껴졌다. 퍽치기를 당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머리냐. 피식 터진 실소와 더불어 스친 생각이었다. 가뜩이나 요즘도 종종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래도 뭐, 상관은 없었다. 연인도 가버렸으니 이제 언제든 마음껏 기절해도 좋은 시점이었다. 누군가가 상체를 일으키며 마구 흔들고 있었다. 그럼 더 어지러운데……. 까무룩 흐려지는 의식의 틈으로 힘겹게 노(No)를 중얼거린 자신이었다.

카페에서 기절한 직후 응급실로 실려가 영양 실조 진단을 받았다. 체중이 거식증 환자처럼 심각할 정도로 모자란다고 문제라 했다. 포도당과 영양제를 한 발이나 투약받고, 우울증과 신경 쇠약 증세도 보이니 정신과로 가 상담을 받아보라는 충고도 들었다. 다행히 엄마에게 연락이 가 닿기 직전에 깨어나는 바람에, 이번엔 아무에게도 걱정을 끼치지 않고 다음 날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다. 엄마도 그렇지만, 선 화랑 동료들은 물론 친구인 마해영에게도 더 이상은 근심을 끼칠 수 없었다. 차라리 이참에 기절하면 이 번호로 연락해주세요 하는 알림표라도 걸고 다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물론, 알림표에 적힐 이름은 연락한 지 1∼2년쯤은 족히 넘을 과 동기 정도로 하면 되겠다. ‘당분간 좀 호출이 오더라도 참아다오. 나중에 단단히 한턱 내마’ 하고 미리 전화로 자진 납세를 넣어두는 것도 괜찮겠지.

퇴원한 날엔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저녁때 김천댁 아줌마가 들렀다 가는 소리를 얼핏 들었지만, 아줌마도 자는 인환을 깨우지 않았고 인환도 모르는 체해버렸다. 어제 오늘 일도 아니었다. 만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는 한은, 그리고 말도 없이 외박을 하지 않는 한은, 김천댁 아줌마의 감시망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다음 날은 주말이었는데, 아침부터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로 시달려야만 했다. 카페에서 쓰러진 게 뒤늦게 선 화랑 동료들에게 알려진 덕분이었다. 오전 내내 열 통이 넘게 전화를 받고 보니 더 이상 잠을 자는 건 불가능해졌다. 거의 24시간 가까이 침대에 누워 있느라 허리도 장난 아니게 아파서 일어나긴 해야 할 시점이기도 했다.

완전히 깨어난 머리는 그제야 생살을 저미는 듯한 고통을 전해주었다. 그녀의 임신. 연인의 아이를 임신한 그녀……. 일단 현실로 자각하자마자 연인으로 해서 이때까지 받은 그 어떤 상처보다도 더 끔찍한 대미지가 덮쳐들었다. 깊이 생각했다간 정말로 미쳐버릴 것만 같은 고통과 공포가 엄습했다.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끝없이 환청으로 들려왔다. 듣기 싫어서 미친 듯이 그 아기의 얼굴을 때리고 있는 누군가의 잔혹한 손길도 보였다. 물감 범벅인 어느 화가의 손이었다. 환청 못지않게 끔찍스러운 환영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손이 덜덜 떨리고, 전신이 힘없이 가부러졌다. 눈을 뜨기 힘들 지경으로 전신이 쑤시고 아팠다. 그래서였다.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마주 앉은 것은. 미치지 않고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연인에게서 결별 선언을 들은 지 56일째, 인환은 다시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천만다행으로 작업은 더할 나위 없는 구원이었다. 미친 듯이 물감을 뿌리고, 캔버스를 찢어발기다시피 나이프를 짓이기고, 붓으로도 모자라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찍고 하는 사이, 고뇌는 서서히 둔탁하게 잊혀갔다. 몰입의 힘이었다. 적어도 그림은, 연인처럼 자신을 쉽게 내버리진 않을 모양이었다.

연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렇게 붓을 든 지 네다섯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림이 주는 평화와 구원을 통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심신이 전화를 받게끔 만들었었다. 물론, 인환은 아주 나중에 가서야 받지 말 걸 하고 미치도록 후회를 해야 했지만, 아쉽게도 인환에겐 예언의 힘은 존재하지 않았다.

[……선생님?]

상상조차도 못 한 상대였기에, 처음엔 수화기를 떨어트릴 뻔하기도 했다. 자신이 거는 경우는 있어도 연인이 자신에게 거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서로의 관계가 변한 시점부터였다.

“……위…… 위야……?”

다시금 사시나무 떨리듯 온몸이 떨려왔다. 어디선가 또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필사적인 인내로 감각을 차단했다. 절대로, 연인 앞에선 완벽해야만 했다. 그 ‘완벽’이란 것이 어떤 ‘완벽함’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좌우지간 무조건 완벽하게 처신을 해야만 했다. 이상야릇한 환청에 시달린다든지, 혹은 고통을 견디지 못해 미쳐간다는 따위, 절대로 연인에겐 알릴 수 없는 문제였다. 수도 없이 진정해, 진정해를 거듭 뇌까리고 나서야 겨우 통화가 가능할 정도의 정신을 챙길 수 있었다.

[예. 접니다. 혹시 지금 잠시 통화할 수 있을까요? 바쁘신가요?]

담담하고 진중한 어조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목소리.

“……아…… 아, 아, 아니! 아, 안 바빠. 왜…… 왜? 무, 무슨 일 있니?”

[…….]

“……위…… 위야……?”

[…….]

“……무…… 무슨 일인데 그래……? 무, 무슨 일 있니? 말하기 곤란한 일이야? 혹시 동생들한테 또 무슨…….”

[아뇨. 그런 일 없어요. 동생들은 괜찮습니다.]

“……그, 그래? 그, 그, 그럼 무슨 일인데? 윤열 씨 문제? 아님…… 시, 신애 씨 일이니?”

[……죄송합니다.]

“……?”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껜 정말 죄송하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더 이상 선생님과 만남을 계속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

[그 사람이 알아버렸습니다. 제가 선생님께도 매춘을 한 사실을 알게 됐죠. 또 선생님께서 절 짝사랑하셨다는 것도 눈치채고 있더군요. 그젯밤 갤러리 카페에서 나와 돌아가는 길에 그 사람한테 추궁을 당했죠. 선생님께서 절 바라보시는 눈길이 불쾌하다고요. 솔직하게 다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속이고 싶지가 않았어요.]

“…….”

[이젠 그런 관계도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해주었고, 그 사람도 그건 납득해주었습니다만, 그래도 몹시 불안해합니다. 선생님과 제 관계를 의심하고 싶지 않다고 해요. 하지만 불안감이 드는 것까진 자기도 어쩔 수가 없다네요. 임신을 해서 그런지 더 예민해진 것도 같고요. 자궁이 약하다고 진단을 받은 터라 아기한테까지 영향이 갈까 봐 무척 걱정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더 이상 불안하게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적어도 제 과거 문제로는 더 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가 않아요.]

“…….”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확실히 마음 정리를 하실 때까지 저도 기다려드리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네요. 조만간 결혼도 할 예정이고, 아기까지 생긴 마당이라 아무래도 자꾸만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

[오늘도 찾아뵙고 말씀을 드려야 하지만, 어차피 좋은 말씀도 아니고 한편으론 서로 얼굴을 보지 않는 편이 정리를 하는 데 더 좋겠다 싶더군요.]

“…….”

[일단은 제 뜻을 말씀드린 거니까 선생님께서도 생각해보시고 제게 확답을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선생님과는 정말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으니 앞으로도 서로 좋게 매듭을 지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부디 도와주세요, 선생님.]

“…….”

[선생님?]

“…….”

[…….]

“…….”

[……아무래도 많이 놀라신 것 같습니다. 일단 끊을게요. 선생님도 생각하실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조만간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간 선생님께 선물받은 물건들도 돌려드려야 하니 한 번쯤은 봬야겠지요. 그럼 들어가십시오.]

“…….”

찰칵. 멀리서 수화기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뚜뚜거리는 수화기를 손에 든 채로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김천댁 아줌마의 손으로 말끔하게 정돈된 아틀리에가 보였다. 창문으로부턴 부드러운 주홍빛 일몰이 밀려들고 있었다. 현란한 색채의 윤무로 물들어 있는 캔버스도 보였다. 연인의 전화를 받기 직전까지 한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어딘가 병적이지만 꽤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창 밖엔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정원수들이 서로 앞 다투어 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9월이었다. 며칠만 있으면 추석이었다. 이별하기엔 너무나 예쁜 계절이었다.

“……아유, 이게 다 무슨 냄새야?!!! 홀아비 냄새 아냐?!!! 아줌마, 이 녀석 침실은 청소 안 하시는 게야?”

“……아이구, 도련님께 여쭤보세요, 사모님! 제가 들를 때마다 계속 주무시기만 하니, 어디 청소를 할 틈이 있어야죠! 밤새워서 그림 그리시는 거 같은데다 하냥 피곤해하시는 거도 같어서 함부로 깨워드릴 수도 없지 뭡니까요. 식사도 통 안 드시는 거 같고, 저두요, 요 며칠 무자게 답답했다니깐요. 제가 오죽하면 바쁘신 사모님께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오자고 졸랐겠어요.”

“후유, 진짜 지독하네! 아줌마, 창문부터 좀 열어주세요. 이봐, 아들! 아들, 일어나봐! 어서! 엄마 왔어! 아들?! 아니, 무슨 낮잠을 이렇게나 자는 거야?! 어휴, 이 식은땀 좀 봐! 얼굴은 또 왜 이리 허옇게 떴어?! 술 냄새는 안 나는데? 아들! 아들?! 일어나보라니까?!”

징징 늘어지는 이명들이 멀리서 들려왔다. 어깨를 쥐고 사정없이 흔드는 손길도 느껴졌다. 청각과 촉각의 무차별한 합동 공격에다 서늘하고 상쾌한 초가을 공기까지 얇은 파자마 깃을 뚫고 설핏 다가드는 바람에, 인환은 억지로 잠으로부터 끌려 올라왔다.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미간을 근심으로 잔뜩 찡그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눈가와 입가에 선연한 잔주름은 곱게 한 화장으로도 채 가려지지 않은 안쓰러운 것이었다. 엄마였다. 한때 인환의 모든 것이었던 불쌍한 울 엄마의 얼굴이었다.

“……밤새 그림 그렸어, 엄마. 그냥 자게 둬요…….”

도로 눈을 감으며 마지못해 중얼거렸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밤을 새운 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린 건 더더욱 아니었다. 사흘 밤이나 제대로 못 자는 불면증이 계속되는 바람에 수면제를 몇 알 주워 먹은 뒤 억지로 붙잡은 잠이었다. 얼마나 잤는지 당장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머릿속은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하고, 사지는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나른했다. 배 속은 허전하다 못해 감각조차 없고, 허리 또한 끊어질 것처럼 아픈 걸 보니 적어도 하루 이상은 잔 것 같았다.

“언제 잠든 건데? 지금 몇 시인 줄이나 알어? 3시잖아! 오후 3시! 아무리 밤을 새워도 그렇지, 완전 거꾸로 아냐! 이러고 맨날 뒤죽박죽 밤낮을 바꿔 사니 몸이 괜찮을 리가 있어? 예술도 우선 몸이 건강해야 좋은 예술이 나오는 게 아니야?! 밥은 먹고 자는 거야? 아들, 일단 일어나봐, 응? 일단 일어나서 뭐라도 먹고 다시 자자. 아들? 우리 천재 아들, 눈 좀 떠봐! 얘가 왜 이래? 너 어디 아픈 거지? 왜 이렇게 늘어져, 너?! 아줌마?! 아줌마, 이리 오셔서 얘 좀 같이 부축해줘요!”

“왜요, 사모님? 도련님 또 어디 편찮으셔요?”

“글쎄, 나도 모르겠네…… 일단 얘 좀 일으켜줘봐요. 이쪽은 내가 붙들게요.”

“에그머니, 이 식은땀 좀 봐! 완전 푹 젖었네그랴?!”

도롱이처럼 한껏 몸을 만 채 도로 이불 속으로 기어들려 했건만, 엄마의 소리도, 손길도 도무지 막무가내였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어깨가 잠잠해지나 했더니, 이번엔 억센 아줌마의 손길까지 합쳐져 상반신이 그대로 들어 올려졌다. 등에 받친 쿠션 덕분에 비스듬히 기댄 자세로 일어나 앉게 되었지만, 정신은 여전히 비몽사몽 현실과 꿈속을 오가고 있었다. 눈을 뜨면 엄마와 아줌마의 얼굴이 번갈아 나타났고, 눈을 감으면 뒤죽박죽 줄거리가 모호한 악몽 속 장면이 보였다.

“아들! 우리 아들, 정신 좀 차려봐! 응?! 얘가 진짜?!!! 아들, 수면제 먹었어? 응? 눈 좀 제대로 떠보라니까?!!! 인환아?!!!”

채근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문득 절박해졌다. 인환의 양쪽 팔을 움켜쥐고 있는 엄마의 손아귀 힘도 점차 강해지는 게 느껴졌다. 엄마가 긴장했다는 반증이었다. 또 걱정을 끼쳐선 안 된다는 엄한 질책이 어딘가에서 떨어졌고, 인환은 그제야 천근같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위해 기를 썼다.

“……에이, 씨…… 수면제는 무슨 수면제야…… 밤새워서 그렇다니깐…… 차라리 날 죽여라, 아줌마…….”

엄마의 얼굴에 간신히 시선을 맞추며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양팔을 옭죄던 악력이 슬며시 빠져나갔다. 코앞까지 다가든 주름진 얼굴에도 설핏 미소가 어리는 게 보였다.

“진짜야? 우리 아들, 진짜 수면제 같은 거 먹는 거 아니지?”

“이 아줌마가 속고만 살았나아∼∼. 수면제 먹으면 나중에 더 잠 안 온다고 했잖아……. 후아암∼∼ 암튼 나 더 잘 거야요. 귀찮게 하지 말고 빨랑 집에나 가요.”

“기왕 일어난 거 평창동에나 가자. 잠은 평창동에 가서 자도 되잖아. 내일 추석인데 울 아들 요 게으른 작태를 보니까 또 아버지 차례 지내는 데도 지각할 거 같어. 그치?”

“……쫌만 더 잔다니까…… 아버지 차례엔 시간 맞춰 갈게…….”

“매번 약속은 잘하지! 그러고 지각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

긴 한숨 소리와 함께 팔을 움켜쥐고 있던 엄마의 손이 얼굴로 올라와 볼을 살짝 꼬집는 게 느껴졌다. 또다시 내려간 눈꺼풀 탓에 엄마와 김천댁 아줌마가 교환한 눈짓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후, 얼굴에 닿아온 찬물수건으로 잔인하게 세수를 당하고 나서야 엄마와 아줌마의 만행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진저리를 치며 신음했지만 얼굴 곳곳은 물론, 목덜미까지 닦아내고 있는 엄마의 손길은 가차 없었다.

“윽!!! 그만해요!!! 아이 씨, 진짜아∼∼∼ 엄마!!!”

“핫핫, 울 도련님 삐지셨나 보네. 그러게 빨리 일어나셨어야죠. 이미 늦었으니 사모님이 하시게 기냥 냅두셔요. 여기 더운물도 대야 가득 떠 왔다우. 세수 끝내고 잠 좀 깨시면 따뜻한 수건으로 바꿔드릴게요, 도련님.”

아줌마까지 껄껄 웃으며 인환의 파자마 소매를 걷어붙이는 것으로 엄마의 만행에 가세하고 있었다.

소아마비를 앓은 이후로 엄마는 자신이 조금만 아파도 이렇게 물수건으로 온몸 구석구석을 닦아주곤 했다. 사춘기로 접어들고선 다행히도 그게 얼굴과 목, 그리고 팔다리로 범위가 줄어들었는데, 그도 인환이 울며불며 쪽 팔린다고 고집을 부린 끝에 간신히 보게 된 타협안 덕분이었었다. 부끄러운 부분은 놔두는 대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아프면 엄마가 하는 대로 두겠다는 타협이었었다. 그 타협안이 이제 서른이 코앞인 다 큰 청년에게까지도 언제까지나 적용될 줄이야, 그땐 미처 예상 못 한 일이긴 했지만. 물론 완전히 어른이 되고 나서도 인환은 남들이 보기에 비정상적일 정도의 이런 애정 어린 과보호조차 차마 내치지 못했다. 엄마에겐 인환이 전부였듯, 인환에게도 엄마가 전부였었다. 대기업 오너의 비서로 들어갔다가 오너의 눈에 들어 정부가 되고, 세상에 할 게 없어 첩질 하는 젊은 년이라는 세상의 온갖 손가락질은 다 받고, 그럼에도 사랑 하나 믿고 인환을 낳은 여자였다. 평생 단 한 번도 떳떳하게 남편의 배우자로 나설 수 없었던 한을, 인환을 낳고 사랑하고 온전히 키우는 것으로만 삭인 욕심 없는 여자였다. 맹목적인 모정은 인환으로 하여금 첩의 자식이라는 수치스러운 신분조차 거듭 좌절하거나 분노할 수 없게끔 만들어준 거대한 긍정의 힘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일 수밖에 없는 두 모자간이었다. 엄마가 그러했듯, 인환도 남의 이목이나 평가보다는 자신의 전부인 엄마가 기뻐하고, 엄마가 편안해하는 쪽이 훨씬 더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이라 여겼었다. 그런 엄마였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일생 엄마 가슴에 못 박는 짓만은 절대 안 하리라 맹세하고 또 맹세했었는데, 자신은 그 순진했던 나날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와버린 것일까. 지금의 자신에게 있어 엄마는 어느 만큼의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머릿속을 가득 잠식하고 있던 몽롱한 수면기는 엄마의 가차 없는 손길 아래 서서히 스러지고 있었다. 차가운 물수건 세례로 소스라친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를 통해 엄마의 절절한 모정을 새삼 자각한 때문이리라. 당장 죽고 싶어도 쉬이 죽을 수는 없으리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 때문이리라.

“자, 울 천재 아들! 잠 다 달아났지? 잘생긴 얼굴이 뽀득뽀득한 게 속이 다 시원하네. 너도 그렇지? 이제 좀 홀아비 냄새가 덜 나는 거 같다. 아줌마랑 난 나가 있을 테니까 어서 옷 갈아입어. 평창동 가자. 가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아줌마랑 오 기사 아저씨네랑 다 같이 고스톱도 치고 밤엔 추석 특선 영화도 보자, 응?”

양쪽 뺨을 가볍게 탁탁 쳐대는 엄마의 손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대야를 들고 먼저 방을 나간 아줌마의 뒤를 따라 막 떨어져 나가려던 엄마가 의아한 듯 시선을 맞춰왔다. ‘왜? 뭐 또 필요해?’ 달이라도 따달라고 하면 정말 따다줄 것 같은, 엄마의 맹목적인 애정이 철철 흘러넘치는 평소 그대로의 눈길이었다.

“……엄마…….”

까칠하게 잠긴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온다. 목이 멘 때문이리라. 눈물샘이 메말라 있는 게 천만다행이지 싶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어쩐지 그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자제력이 홀연 사라져버릴 것 같아 무섭지만, 그 무엇보다도 엄마가 놀랄 것이다. 엄마가 슬퍼할 것이다.

“……아들?”

“……엄…… 마…….”

“……?”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왜 그래, 우리 아들? 응? 엄마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아니, 그냥…… 울 엄마가 너무 좋아서…… 세상에서 젤 좋은 울 엄마…….”

그래, 울 엄마……. 세상에서 젤 좋은 울 엄마.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우리 엄마. 그러니까 무너지면 안 된다. 미치면 안 된다. 죽어버리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그럼 불쌍한 울 엄마도 죽는다. 엄마까지 죽이게 된다…….

“……아이구, 우리 천재 아들이 오랜만에 어리광을 다 부리네? 쪽 팔려서 이젠 안 한다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을꼬?”

엄마의 손바닥을 뺨에다 대고 문질문질, 부비부비를 거듭하자 엄마가 깔깔 웃음을 터트린다. 좋아서 자지러지는 웃음이다. 남은 한 팔이 등 뒤로 돌아와 엄마의 손바닥을 찰싹 붙인 얼굴이 그대로 엄마 품에 푹 파묻혔다. 흐릿한 향수 냄새가 섞인 엄마의 달큰한 체취가 코 안 가득 들이닥쳤다. 여전히 가슴 아프고 그리운 냄새여서 목이 메었다. 이젠 자신의 반밖에 안 될 가녀린 몸집이지만, 어린 시절과 다름없이 여전히 포근하고 아늑하기만 한 품 안이어서 가슴이 미어졌다. 다 자란 시꺼먼 사내자식인데도 그저 어리광과 애교 한 방이면 늘 껌뻑 죽는 울 엄마. 세상의 전부였었던 울 엄마. 그래. 그러니까 무너지면 안 돼. 미치면 안 되지. 죽어버리는 것은 더더욱 안 되고말고. 그럼 불쌍한 울 엄마도 죽는다. 엄마까지 죽이게 된다…….

“울 천재 아들 몸이 왜 이렇게 자꾸 마르나 몰라. 완전히 뼈만 걸리네. 아들, 알어? 엄만 요새 진짜 걱정돼서 죽겠어. 울 귀한 아들이 꼬치꼬치 말라만 가니까. 잘 웃지도 않고. 무슨 고민이 있는 건 알겠는데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거 같아서 속상해. 무지.”

웃음기가 감돌던 목소리는 어느새 근심으로 잔뜩 흐려져 있었다. 이리저리 등줄기를 쓸고 있는 엄마의 손바닥 감촉은 부드러우면서도 애잔했다.

“……고민은 무슨. 원래 예술가들은 다 이래. 고뇌를 먹고 크는 게 예술이랬어. 있지, 엄마. 독사 선배가 그러는데 부서져야 진짜를 그릴 수 있대. 부서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한다나? 그래서 나도 고뇌 좀 하기로 했어. 좀 더 근사한 예술가가 되려구 말이지.”

“우리 천재 아들은 그런 거 안 해도 돼. 벌써 근사한 예술가야. 울 아들 그림이 얼마나 인기가 좋은데.”

“체, 사무실 손님들한테 강매나 하는 주제에 무슨.”

“얘가 엄마를 조폭 사채업자로 모네?! 손님들이 자발적으로 사주는 거야! 김 사장은 저번에 우리 아들이 신문에까지 났다면서 자기가 사준 그림 값도 오를 거라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흥, 턱도 없을 거라 그래. 그 아저씬 투기하려고 그림 사나? 작가가 죽지도 않는데 무슨 그림 값이 올라. 올라봤자지.”

“흠흠, 김 사장이 좀 속물이긴 하지.”

“……아우, 졸린다아. 평창동 가면 나 더 자게 해줄 거지……?”

엄마의 근심이 좀 진정된 거 같아서 마지막으로 필살 애교가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등을 감싸 안은 엄마의 팔 힘이 더 단단해졌다. 깔깔거리는 기분 좋은 웃음도 또 터졌다. 에구구, 이쁜 내 새끼. 잠충이 천재 화가. 어리광쟁이 천재. 이놘이. 놩이. 뚱이. 환발이. 이놘투완 발투완. 괴상망측한 고릿짝 애칭들까지 줄줄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정말로 기분이 좋은가 보았다.

“그래. 가서 실컷 자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자. 엄마랑 아줌마가 너 좋아하는 거 잔뜩 해놨어. 수산 시장에 가서 싱싱한 대게도 사다 쪄놨거든? 그러니까 얼른 옷 입어. 집에 가자, 울 천재 아들.”

다정하게 등을 다독이는 것을 끝으로 엄마가 멀어졌다. 잠시 후에 눈에 들어온 건 침대 위로 줄줄이 떨어진 자신의 옷가지들이었다. 편한 베이지색 면바지에 하얀색 목 폴라, 그리고 갈색의 코르덴 재킷…… 엄마 취향인 얌전하고 고지식한 코디에 설핏 웃음을 흘리곤 순순히 옷을 갈아입었다. 엄마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런 자신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김천댁 아줌마가 침실 정리를 하는 10여 분 정도를 기다렸다가, 세 식구는 바로 오 기사 아저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평창동으로 왔다. 머리는 몽롱했지만 막상 집에 도착하고 보니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잠 대신 식사부터 하자는 엄마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식탁에 이것저것 진수성찬을 늘어놓는 엄마를 말리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지만, 확실히 음식이 좀 들어가니 자꾸만 까라지려는 몸에 기운이 좀 도는 듯했다. 몇 끼를 굶었는지 감각조차 없는 위장이라, 그저 감주 한 컵과 토란국에 밥 몇 숟갈을 말아 천천히 씹어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는 거실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스톱 판을 구경했다. 명절이나 휴일이면 엄마와 김천댁 아줌마와 오 기사 아저씨 부부가 모여앉아 고스톱을 치는 건 이미 평창동 집의 정기 행사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도박에 영 취미가 없는 인환만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피박 쓴 몇 천 원에 게거품을 물며 흥분하곤 하는 식구들을 구경하는 것도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이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역시 한 꺼풀 막이 씌워진 것처럼 인환에겐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평소처럼 흥분해서 서로에게 막말을 하는 식구들을 보며 박장대소할 수도, 이리저리 눈치를 봐가며 훈수를 두는 일도, 시끄러워서 TV를 볼 수가 없다고 징징거리는 일도 할 수가 없었다. 현실감 없는 훈훈한 가족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그 모든 정겨운 풍경은 인환과는 멀리 동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저 가슴 시린 고독과 뼈를 깎는 슬픔과 고통만이 생생한 현실이었다. 순간순간 전신을 가부러지게끔 만드는 까마득한 절망을 대신할 그 어떤 현실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들이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시간 넘게 계속된 고스톱 판을 지켜봐주는 일에도 지쳐갈 무렵이었다. 2층 자신의 방에 올라가 다시 잠이나 자볼까 하고 있는데, 거실 한구석에 줄줄이 쌓인 선물 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틈바구니에서 한우 갈비 세트와 굴비 세트들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실물은 벌써 냉장고로 직행했을 것이지만, 모인 빈 상자만으로도 만만치 않을 양을 짐작케 했다. 갈비세트는 당연히 그를 좋아할 이들을 떠올리게 했고, 이미 심각하게 현실감을 상실해버린 넋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아줌마, 갈비 세트 남은 거 아직 많죠?”

엄마와 고할지 스톱할지, 신경전 중이던 아줌마를 채근해 냉동실에 들어간 갈비 세트를 도로 상자에 포장해줄 것을 요구했다. ‘어딜 가니?’ 하고 묻는 엄마에게 ‘이거 친구네 집에 갖다주려구요. 고기 진짜로 좋아하는 애들이거든요. 엄마 차 좀 빌릴게요’ 하고 간단히 대꾸하곤 갈비 상자를 엄마의 승용차로 옮겼다. ‘옷은 제대로 입고 가야지!’ 막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엄마가 벗어두었던 코르덴 재킷을 들고 나왔다. ‘언제 올 건데?’ 하고 미심쩍은 눈으로 묻는 것 같아서 ‘별로 시간 안 걸려요. 전해주기만 하고 금방 돌아올게요’ 하고 대꾸를 주며 재킷을 주워 입었다. 마음이 급했다. 머뭇거렸다간 아예 출발조차 못 하게 될 것 같아서, 어딘가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 엄마도 본 체 만 체 차를 출발시켰다.

10분쯤을 달려 성산대교를 건널 무렵이 돼서야 겨우 이성이 되돌아왔다. 다신 만날 수 없다고 이별 선언까지 들은 마당에 무턱대고 연인의 집에 들이닥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동생들, 정확히는 혜윤이에겐 절대 접근 불가 명령까지 내린 연인이 아니던가. 그럭저럭 사이가 좋았던 2년 남짓한 기간 중에도 그 명령만은 철저하게 지켰던 인환이었다. 그동안 만나기는커녕 전화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우선 전화부터 해봐야겠다는 판단이 든 것도 겨우 되돌아온 이성 덕분이었다. 연인이 받으면 그냥 포기하고, 혹시라도 혜윤이가 받으면 혜윤이만 살짝 만나 전해주기로. 연인의 명령이 신경이 안 쓰였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한편으로 이제 와 무엇이 겁날까 싶었다. 고작 혜윤이를 한 번 더 만난다고 연인에게 얼마나 더 미운털이 박힐 것이며, 반대로 그 명령을 끝까지 이행한다고 해서 연인이 얼마나 더 자신을 예쁘게 봐줄 것이겠는가 말이다.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패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다리를 건너고 나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공중전화 박스 근처에 차를 세웠다. 시계를 보니 저녁 6시가 거의 다 돼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막 해가 지려는 시점이었다. 긴 추석 연휴의 첫날이라 그런지 거리는 평소에 비해 무척 한산한 편이었다. 자동차 수가 3분의 2정도는 준 것 같았다.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 외우다 못해 각인이 된 번호를 눌렀다. 생각만큼 떨리지도,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않았다. 그렇지. 마음이 흔들릴 턱이 없지 않은가. 자신은 그저 혜윤이를 보고플 뿐이었다. 연인만큼 고기를 좋아하는 혜윤이에게 갈비 세트를 선물로 전해주고플 뿐이었다. 연인이 우려하는 것처럼, 이 한 번 만남에 혜윤이가 자신에게 새삼 정을 줄 까닭도 없었다. 안 본 사이 2년도 넘게 흘렀으니, 어쩜 이미 자신 따윈 까맣게 잊고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여보세요?]

서너 번의 신호가 간 후에 앳된 여자애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전해져왔다. 익숙하다 못해 그리운 목소리였다. 지난 2년 남짓, 직접 통화를 해본 적은 없어도 연인과 통화를 하기 위해 걸었을 때 종종 혜윤이가 받는 일이 빈번하곤 해서 목소리만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한창 성장기이니 그간 외모는 많이 자랐을지 몰라도, 목소리만은 2년 전이나 지금 현재나 거의 다를 바 없이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여…… 여보세요?”

[어?! 어어?! 선생님? 혹시 선생님이세요?!]

단박에 친근한 어투로 바뀐 목소리가 채근하듯 외쳤다. 설마 단 한 마디에 알아들을까 싶었다가, 이내 목이 멘 인환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기억해준 혜윤이가 너무나 고맙고 또 고마워서, 수화기를 든 손마저 벌벌 떨릴 지경이었다. 번호를 누를 때만 해도 조금치의 동요도 없던 시체 같던 몸이 그제야 산 사람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간 갈 곳을 잃었던 가슴 뭉클한 애정이 수화기 너머의 소녀에게로 물밀듯이 밀려가고 있었다.

“……응, 나야. 내 목소리 기억하고 있었네? 그간 잘 지냈니?”

복받친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담담하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속내를 정직하게 드러낸다면 이 어리고 순진한 소녀는 몹시도 당황할 것이다.

[우아, 정말 선생님이시다!!! 그럼요, 선생님!!! 기억하고말고요!!! 저 그동안 얼마나 선생님 보고 싶었는데요!!! 오빠가 선생님이 멀리 외국에 공부하러 가시니까 앞으론 전화도 하지 말라고 해서 얼마나 섭섭했다구요! 인제 아주 한국에 돌아오신 거예요? 또 만나 뵐 수 있는 거죠?!]

“……그…… 글쎄…… 아, 아마 그리 자주는 못 보겠지만…… 그래도 이젠 한국에 있으니까…….”

[에이, 진짜 선생님 많이 보고 싶은데…… 그럼 전화는 자주 해도 되는 거죠?]

“……응…… 응, 글쎄…….”

차마 전화도 자주 하면 안 된다는 말까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쩜 영영 전화조차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해줄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한 상처는 혜윤이보다 자신이 더 크게 입을 것이 분명하므로. 혜윤이에겐 그저 잘 따르던 어른에 대한 섭섭함에 불과할 테지만, 인환에겐 친혈육을 떼어놓는 듯한 절망감이었다.

“……혜윤아, 지금 큰오빠 있니?”

수다를 더 했다간 가까스로 억제하고 있는 감정이 폭발할 것만 같아서 서둘러 용건으로 말을 돌렸다. 기대했던 대로 과외 아르바이트를 가서 없다는 대꾸가 돌아왔다. ‘휘는?’ 하고 또 한 사람 두려운 상대에 관해 묻자, ‘휘야 오빠도 도서관에 갔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고3이라 연휴도 아랑곳없이 열공 모드라 했다. 혜윤이와 만나게 해주기 위해 하늘도 돕는 모양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린 인환이었다.

“……그, 그럼 혜윤이만 잠깐 보고 가야겠네? 혜윤이 고기 좋아하지? 선생님 집에 갈비 세트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좀 나눠주려고 하거든. 잠깐 들러도 될까?”

말을 마치는 즉시 열렬한 기쁨의 환호성이 들려온 것은 물론이었다. 갈비 선물보다 인환을 만나는 게 몇 백 배는 더 기뻐서 그런다고 했지만, 실은 반반일 것이다. 그만큼 제 오빠들처럼 고기를 좋아하는 혜윤이였다. 곧 도착하겠다고 말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제한 속도가 아슬아슬할 지경으로 서둘러 차를 몰아댄 것은 물론이었다. 곧 저녁 식사 시간대라 두 형제가 언제 집으로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명절은 물론 공휴일에도 저녁 늦게까지 알바로 바쁜 연인이니 마주칠 확률은 극히 적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정직한 혜윤이가 자신이 집으로 찾아간 것이며 갈비를 선물한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칠 테지만, 연인과 직접 부딪치지 않는 한 그는 이제 관심 밖의 일이었다. 어차피 완벽하게 내쳐진 마당에 조금의 미운털이 더 박힌들 신경 쓰일 턱이 없었다. 그보다는 당장 혜윤이와의 만남이 주는 기쁨이 더 소중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암흑뿐인 요 며칠이었다. 현실이 아니라고, 이게 진정 끝은 아니리라고 끝없이 회피를 거듭하다가도, 그만 단숨에 들이닥치곤 하는 속수무책의 절망감에 가부러지곤 하던 며칠이었었다.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수시로 심장이 미친 듯이 세동을 거듭하다가 종내는 그대로 멈출 것만 같은 이상야릇한 공포에 떨고,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고, 수천 개의 바늘로 온몸이 찔리는 것 같은 끔찍한 질투심에 몸서리를 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살아 있는 사람다운 생각이란 것은 도통 할 수조차 없었다. ‘혜윤이에게 갈비를 가져다줘야지’ 하는 충동적인 결심은 그 시꺼먼 암흑 속에 그나마 설핏 비쳐든 한 줄기 빛줄기이자 생기였다.

15분쯤을 더 달려 고척동에 도착했다.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내리고 있는 달동네는 사랑하는 이들이 거주하는 곳이라 그런지, 지저분하고 우중충한 풍경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따스하고 정겨워 보였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살 수만 있다면 이곳만 한 천국 또한 달리 없을 것이라고 새삼 뇌까리는 인환이었다. 오류중학교 앞 공터에 주차를 하고, 2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기억에 생생한 골목길을 한참이나 걸어 올라가 연인의 집 앞에 섰다. 양손에 무거운 갈비 상자를 든 탓에, 숨은 턱까지 차올랐고 얼굴에도 어느새 땀이 흠씬 솟아 있었다. 체력이 바닥이라 더한 것 같았다.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집이라 그런지 언제나처럼 대문은 열려 있었다. 마당 안까지 들어가 현관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서둘러 달려 나오는 듯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단숨에 문이 열렸고, 주황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몹시도 예쁘장한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인환을 맞고 있었다. 역시 한창때의 성장기는 무서웠다. 2년 전에 봤을 땐 아직도 국민학생 같기만 했는데 이제 보니 어느새 숙녀 티가 나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니 그럴 만한 나이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꽃처럼 피어날 시기다. 그랬다. 정말로 꽃 같은 혜윤이였다. 그립고 또 그리웠던 소중한 누이였다.

처음부터 집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연인의 미운털을 각오한 만용이라지만, 그 정도까지의 용기는 없던 인환이었다. 선물 상자를 내려놓고, 간단히 안부 인사만을 나눈 뒤 집을 나설 작정이었었다. 물론,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혜윤이는 막무가내였다. 평소 온순하기 짝이 없는 소녀였지만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을 하니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기력이 떨어진 몸은 혜윤이의 두 손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집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어영부영하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좁은 거실 겸 주방에 앉아 혜윤이가 타주는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만 마시곤 바로 일어나야 한다고, 누이를 향해 몇 번이나 다짐을 주면서. 어영부영이라……. 아니, 솔직히 인정하자. 실은 혜윤이의 사랑스러운 고집을 빌미 삼아 좀 더 생기를 취하고자 하는 욕심이었으리라. 좀 더 살아보고픈 본능의 욕구 때문이었으리라. 아직은 끝이 아니라고, 이대로 끝일 수는 없다고, 혜윤이도 여전히 이리 사랑스러운데, 이리 사랑스러운 자신의 누이인 것만 같은데 끝일 리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주고픈 필사적인 격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만용의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지독한 것이었다. 2년 동안의 안부를 허겁지겁 수다로 풀어놓는 혜윤이를 정신없이 바라보며 막 커피를 다 마셨을 즈음이었다. 찰칵 하고 현관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는 혜윤이의 종달새 같은 목소리에 파묻혀 처음에는 자각조차 못 한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내 활짝 열린 문소리까지는 차마 감춰질 수가 없는 확실한 것이었다. 문소리와 더불어 안으로 들어서는 인기척까지 들려왔다.

“……어? 오빠 왔네?!!!”

바로 고개만 들면 현관문이 보이는 자리에 앉은 혜윤이가 먼저 반색하며 일어섰고,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인환은 그대로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인환을 스쳐 현관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혜윤이가 확인 사살을 할 필요까지도 없었다. 이미 달라진 공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니, 설핏 떠도는 그리운 체취만으로도 당장 기절할 것처럼 겁에 질린 인환이었다.

“어어어?!!! 신애 언니도 왔네?!!! 그쵸?!!! 신애 언니 맞죠?!!!”

거듭 토해진 누이의 환성은 즉시로 지옥을 불러왔다.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표현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하느님. 정말로 한순간, 눈앞이 새까매지는 바람에 기절하지 아닐까 착각이 일 정도였다.

“……무슨…… 선생님?”

싸늘한 냉기가 뚝뚝 흘러넘치는 부름이 등 뒤로부터 건너왔다. 하느님, 하느님. 제발 기절하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 연인을 마주 볼 용기를 주세요. 제발, 제발…… 부디 일어서서 걸어 나갈 수 있을 만큼의 기운을 주세요……!

“어, 오빠. 선생님도 오셨어! 무지 반갑지? 갈비 선물 가지고 오셨다? 이제부터 한국에 죽 계실 거래. 이제 자주 전화도 할 수 있고, 가끔 얼굴도 볼 수 있을 거래.”

아니야, 혜윤아.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그럼 오빠가 엄청 화를 낼 거야. 나를 엄청 미워하게 될 거야. 나 안 그랬잖아. 자주 전화를 할 수 있다고도, 가끔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도 정확히 말하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그러지 마, 혜윤아…….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일어서며 필사적으로 되뇐 말이었다.

“……연락도 없이 오셨네요. 죄송하지만 일단 돌아가주셨으면 합니다. 모처럼 가족 모임이 있어서요.”

“……오빠……?”

담담하면서도 냉랭한 일갈이 차라리 돌아볼 용기를 주었다. 아마도 지금 연인의 속내 그대로일, 치솟는 화를 어조에도 숨기지 않았다면 아무리 궁지에 몰린 인환이라도 차마 마주 볼 용기 같은 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천천히 돌아보자, 현관 문설주를 등진 채로 나란히 서 있는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그린 것처럼 완전무결하고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그녀는 연한 살구색 투피스 차림, 연인은 눈에 익숙한 낡은 청바지에 옅은 커피색 면 재킷 차림이었다. 누가 커플 아니랄까 봐, 둘 다 쌍둥이처럼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채 인환을 굽어보고 있었다.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예의상의 미소조차 일절 없다는 게, 그간의 만남과도 180도 달라진 관계의 증명처럼 느껴졌다.

며칠 전 봤을 때 그대로 연인은 여윈 몸에 피로감이 역력한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마음부터 드는 건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연인에의 극진한 애정 때문이리라. ……어째서 자꾸 마르기만 하는 걸까. 건강 하나만은 끝내주는 연인이었는데. 공부에 알바에, 제발 무리는 하지 말지. 그녀도 그래. 내가 그녀라면 연인을 저렇게 초췌하게 만들지는 않을 텐데. 왜 그녀는 연인을 저렇게 두고만 보는 걸까……. 근심은 그녀에 대한 자연스러운 원망의 감정으로 이어졌다. 입덧이 심하다더니 그녀의 안색 역시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자신은 연적까지 배려해줄 만큼 속 깊은 오지랖은 아니었다.

“……오…… 오빠, 왜 그래……? 선생님 곤란해하시잖아…… 모처럼 선물까지 들고 와주신 건데…….”

“넌 참견하지 말고 가만있어.”

인환과 제 오빠 사이를 연신 오가며 눈치를 살피던 혜윤이가 곤란한 기색으로 겨우 말을 꺼내자, 즉시로 냉담한 일갈이 떨어졌다. 여리고 순종적인 혜윤이로선 감히 말대꾸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차고 단호한 어조였으리라. 정말로 용기를 쥐어짤 시점이었다. 어리석은 만용이 아니라. 순진한 혜윤이까지 세 사람의 복잡한 감정의 희생양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 그, 그래, 혜윤아. 오빠 말이 맞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내가 먼저 실례를 한 거야. 미, 미안해, 위야. 평창동 집에 갔다가 갈비 상자가 눈에 띄지 뭐겠니. 고, 고기 좋아하는 혜윤이 생각이 나길래 무턱대고 찾아온 건데…… 네 말이 맞아, 위야.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러잖아도 일어날 작정이었는데 얼른 가봐야겠다. 신애 씨한테도 사과를 드려야겠네요. 모처럼 가족 모임인 줄도 모르고 끼어들어서 불쾌하지나 않으셨을지 걱정이 되는군요.”

탁하게 가라앉긴 했지만 그럭저럭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나와주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커플로부터의 대꾸는 없었다. 혜윤이가 울상이 되는 게 보여서 괜찮다는 의미로 밝게 웃어주자 오히려 역효과였던 것 같았다. 눈가까지 빨갛게 상기되더니 정말로 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왕에 갈가리 찢긴 가슴에 소금이 뿌려진 격이었지만 그도 못 본 척할 수밖에 없었다. 부러 소란스럽게 현관 앞으로 다가가자 두 커플이 뒤로 물러서며 인환이 신발을 신을 수 있게끔 자리를 터주었다. 현관문은 기왕에도 활짝 열린 채여서 입구에 선 두 사람을 스쳐 집 밖으로 나오는 데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완전히 집 밖으로 빠져나와 잠시 돌아보니 자신을 따라 나온 것 같은 혜윤이는 물론, 굳은 표정의 두 사람 또한 현관 밖에 그대로 선 채 들어갈 생각을 않고 있었다. 배웅의 예의 정도는 그나마 지켜줄 모양이었다. 물론 인환의 입장에선 절대로 반가울 수 없는 예의였다. 세 사람의 시선이 똑같이 인환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지만 역시 인환이 최후로 직시한 것은 연인의 눈시울이었다. 아무리 현실이 아니라 완강히 부정하고 있다지만, 이제 고작해야 한두 번 보는 게 다일지도 모르는 연인이었다. 그럴 가능성조차 실감하지 못한다면 이리 고통스러울 까닭도 없었다. 매 순간, 이리 가슴이 갈가리 찢길 까닭도 없었다.

“……그, 그럼…… 갈게, 위야…… 오, 오늘은 진짜 미안…….”

기계적으로 입술을 말아 올리며 작별의 말을 던졌다. 눈물조차 메마른 요즈음의 자신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흉내나마 얼굴에 웃음을 걸 수는 있었으니까. 늘 그랬듯이 참지 못하고 줄줄 눈물이라도 흘렸다면 연인이 어찌 나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또 그런 연인에게 상처받은 나머지 자신 또한 어찌 될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매 순간순간 스스로가 무서운 요즘이었다. 제정신인 건지, 미친 건지도 확실치가 않은 요즘이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지옥 같은 현실을 현실로서 제대로 자각하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뇨. 저야말로 이렇게 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조만간 곧 전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연인이 담담하게 대꾸를 주었다. 잠시 그녀를 향했던 시선이 다시금 인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심연처럼 깊은 눈시울이 살피듯 빤히 인환을 굽어보고 있었다. 심하게 여위어서 그런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깊게 느껴지는 눈시울이었다.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타인의 눈동자는 이제쯤은 익숙해질 법한데도 마주할 때마다 매번 가슴을 헤집는 지독한 상처였다. 그럼에도 바라보는 것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자신은 이미 완벽하게 미친 것인지도 몰랐다.

“……응, 위야. 신애 씨도 건강하세요. 혜윤이도 안녕.”

악착같이 바라보고자 하는 시선의 욕망을 가까스로 잘라내고 돌아섰다. 등으로 세 사람의 시선이 여전히 느껴졌기에, 가능한 한 태연스레 비치도록, 또 한쪽 다리를 끌지 않고 걸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나마 대문이 가까이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대문만 나서면 이토록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시선의 폭격만은 피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고작 10여 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가 100미터도 더 넘게 느껴진다는 점은 계산 미스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멀게 느껴지는 거리라도 끝은 오게 마련이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길과 온몸을 적시는 축축한 식은땀을 새삼 자각하며 문득 걸음을 멈췄을 때, 인환은 온통 낯선 거리 한가운데 서 있는 스스로를 자각할 수 있었다.

처음엔 어디가 어딘지 도통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달동네를 내려온 지점 어디서부턴가 익숙한 도로를 벗어난 듯싶었다. 완전히 땅거미가 내린 주변은 상가마저도 거의 문을 닫아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간간이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막바지까지 고객을 기다리고 있을 몇몇 상점만이 드문드문 불을 밝혀줄 따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지나가던 어린 학생 하나를 붙들어, 오류중학교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학생 아이는 지금까지 무턱대고 걷던 곳과는 정반대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것도 30여 분이나 더 걸어야 하는 지점이었다. 그나마 일찍 물어봤기에 망정이지, 계속 걸었다간 꽤나 낭패를 볼 뻔했다.

방향을 바꿔 걸은 지 30여 분 만에 자동차를 세워둔 지점에 간신히 도착했을 무렵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제대로 운전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기진맥진했다. 헐떡이며 차 안으로 기어들어가 잠시 쉬고 있으니, 그럭저럭 운전을 할 기운이 모였다. 그저 사고를 내진 말아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채운 뒤 차를 출발시켰다. 거리가 한산한 덕분이었는지, 차는 30분이 채 안 되어 평창동에 무사히 도착해주었다. 금방 온다더니 왜 이리 늦었냐는 엄마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왔다. 대학에 입학한 것을 계기로(그도 삼수 끝에 간신히!) 독립해 나온 이래, 어느 정도 낯설어진 방이었지만 현재로선 그 무엇보다도 안전한 자신만의 둥지였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침대 위에 몸을 부렸다. 옷도 재킷만 간신히 벗었을 뿐이었다. 계단참에서 엄마가 거듭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는 게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뭐라 해도 일단 잠부터 자야 했다. 잠이 안 온다면 그저 누워 있기만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손목을 긋고 싶은 끔찍한 충동이 순간순간 넋을 유혹하고 있었다. 무서웠다. 극심한 쇼크를 받은 것처럼 전신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렸다. 아니, 쇼크를 받은 게 틀림없었다. 피로감이 극에 다다르면 자살 충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았다. 절박한 기도 덕분이었을까, 눕자마자 다행히 트럭 같은 잠이 밀려들었다. 두어 시간 후에 엄마가 저녁 먹고 자라며 깨웠다는데, 그조차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죽음 같은 숙면이었다.

인환이 간신히 눈을 뜬 것은 다음 날 아침 8시 무렵이었다. 역시 엄마의 손길 덕분이었다. 더 자고 싶었지만, 아무리 불효자인 자신이라도 아버지에게 드릴 차례 인사만큼은 차마 보이콧 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손에 등을 떠밀려 욕실로 가 샤워를 하고, 엄마가 새로 지어준 감색 계열의 예쁜 공단 한복으로 갈아입은 뒤 차례 상에 절을 올렸다. 잠은 완벽히 달아나고 없었다. 동시에 저 무시무시한 충동 역시 고스란히 되살아난 것은 물론이었다.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곧바로 오 기사 아저씨에게 부탁해 아틀리에로 데려다달라고 했다. 추석인데 하루쯤 더 머물다 가라는 엄마의 간곡한 하소연은 눈물을 머금고 물리쳤다. 한계라는 것을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었다. 이 이상 더 평창동에 머물렀다간 자신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가 엄마에게 고스란히 들통 날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오 기사 아저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성북동 아틀리에에 도착한 시각이 아침 9시 반쯤. 도착하자마자 다시 침대에 달라붙어 잠을 청한 것은 물론이었다. 굳이 잠이 와서라기보다는 반드시 잠이라도 들어야만 한다는, 쫓기는 듯한 절박감 때문이었다. 자살 충동에 대한 일종의 강박적인 두려움이었다. 자살할 것만 같은 두려움은, 인환으로서도 생전 처음 겪어보는 몹시도 생소했다. 유혹이 너무나 커서 더더욱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불안정한 정신 상태 역시 집요하게 다가드는 자살 충동 못지않게 지독한 공포였음은 물론이었다. 제정신으로는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쇼크의 연속이었다. 그 모든 공포와 쇼크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잠뿐인 것만 같았다. 그 외 다른 어떤 출구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연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건 그로부터 여덟 시간쯤 후인 오후 5시 52분 무렵이었다.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던 며칠 전의 전화처럼, 인환으로선 미처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웠다. 어젯저녁 고척동 집에서 쫓겨나올 때만 해도, 조만간 전화로 연락하겠다는 연인의 말이 채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지켜질 약속일 줄은 차마 몰랐는데. 무시하려 해도 끝도 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억지로 일어나 수화기를 집어 들었었다. 십중팔구 엄마의 전화거나 선 화랑 동료들 전화일 것이라 확신하곤 코드만 뽑아버리기를 주저했었는데, 그 역시 받은 것을 지독히 후회하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을까.

[접니다, 선생님.]

자신의 것보다도 친숙하고 그리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부터 들려왔다. 비몽사몽, 몽롱했던 의식은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마냥 순식간에 깨어났다. 동시에, 온몸을 벌벌 떨게 만드는 두려움도 다시금 왈칵 밀려든 것은 물론이었다. 심장이 무서운 속도로 뛰고, 전신이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몹시도 숨이 찼다.

[……오늘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얼굴을 뵙고 확실히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어쩐지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쐐기를 박으려는 거겠지. 어제의 방문처럼 더는 구질구질하게 굴지 못하도록. 확실히 얼굴을 보고 결별을 선언하려는 거겠지.

숨이 턱턱 막히고, 사지는 열병 환자마냥 벌벌 떨리고,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것처럼 일체의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만남을 거절해야만 한다는 판단이 스쳤지만, 무슨 변명으로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얼굴을 보고 싶고, 체향을 맡고 싶고, 그 품에 안기고 싶은 절절한 욕망에 절망했다.

[……선생님? 듣고 계십니까?]

“……어……? 어, 아…… 어어, 위야…….”

[오늘 바쁘지 않으시면 좀 뵀으면 합니다. 괜찮을까요?]

“……어…… 어…… 어어…… 그, 글쎄…….”

[바쁘신가요?]

“……아, 아니! 그, 그냥 좀…… 조금…….”

[잠깐이면 됩니다. 30분 정도도 안 될까요?]

“……사, 30분 정도? 그, 그, 그 정도야 뭐…….”

[고맙습니다.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요? 바쁘시다 하니 제가 선생님 쪽에 맞추겠습니다.]

“……자, 장소?”

[예. 댁까지 찾아뵙는 건 제가 좀 곤란하고요, 대학로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어, 어어…… 괘, 괜찮은 거 같애, 나도…… 거, 거, 거, 거기면 그, 금방이니깐…….”

[예, 그럼 마로니에공원 입구에서 저녁 7시에 뵙는 걸로 하죠.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고맙습니다. 명절날 여러 가지로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요. 그럼 조금 이따 뵙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응. 조, 조금…… 이따…….”

이따 보자 하고 채 작별의 말을 맺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연인의 모든 행동거지처럼 일체의 군더더기도 없는 맺음이었다. 호되게 뺨이라도 맞은 것 같은 얼얼한 아픔에, 끊긴 전화의 기계음을 한참이나 멍하니 듣고 있어야 했다.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빈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이 비어버리니 몸 역시도 움직임을 정지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린 것은 거실 괘종시계가 6시를 칠 무렵이었다. 집에서 대학로까지면 차로 10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였기에 절대로 서두를 필요가 없는데도 마음은 이미 허둥거리고 있었다. 1분 1초라도 늦으면 마치 연인이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초조해하는 평소의 습관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론, 어떡하면 이 약속을 무를 수 있을까 절망적인 궁리를 거듭하는 자신도 존재하고 있었다. 궁리해봤자 절대로 연인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할 자신이 분명함에도.

여덟 시간이나 긴 낮잠을 자버려 새로 샤워도 해야 할 것 같았고, 또 여기저기 구겨진 공단 한복도 갈아입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설핏 들었지만 마음만 허둥댈 뿐 몸은 천근처럼 늘어질 뿐이었다. 지금 자신에겐 손톱만큼의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자살 충동이라는 낯선 공포와의 싸움은 어마어마한 체력과 기력의 소모를 요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그냥 세수나 하고 나가자고 결론을 내리고 욕실로 가 거울을 보니 얼굴이 정말 가관이었다. 창백한 낯빛은 이미 시체와 다름없고, 눈시울은 퉁퉁 부어 있고, 입술은 갈라지고 트다 못해 곳곳에서 피까지 새어나오고 있었다. 별로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이제 와 자신의 용모를 그럴듯하게 가꾼들 연인의 결심이 바뀔 리도 없고, 어차피 마지막, 자신의 상태나 감정을 연인에게 일일이 숨기는 일도 무의미한 짓거리일 터였다. 지금은 그저 연인의 최종 선고를 얌전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최선이리라.

흐늘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누며 욕실을 나왔다. 기력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 건지, 고작 세수하고 이를 닦은 것뿐인데도 몸엔 타격이 왔다. 안 되겠다 싶어, 냉장고를 뒤져 식혜 한 컵을 마신 뒤 잠시 식탁 앞에 앉아 기운을 모았다. 배 속을 좀 더 채워둬야 기절이라도 안 할 것 같아서, 다시 냉장고에서 포도 한 송이를 꺼내 천천히 까서 먹었다. 그나마라도 음식이 들어가니 싸늘했던 몸에 열이 나며 기운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시계를 살폈다. 바늘이 6시 20분을 지나고 있었다. 거실로 가 차 키와 지갑을 챙긴 뒤 바로 집을 나섰다.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제한 속도를 아슬아슬하게 넘겨 주파하고 있는 BMW였다. 역시 평소의 습관은 무섭다고 설핏 웃어버린 인환이었다.

10분이 채 안 돼 대학로에 도착한 인환은 서울대병원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뒤 마로니에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로에 승용차는 드물어도 확실히 추석 연휴의 대학로는 제법 많은 수의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10대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주로 눈에 띄고, 어린애들의 손을 잡고 나들이를 나온 젊은 부부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상점가도 거의 대부분 문을 닫은 동네와는 달리 곳곳이 문을 연 채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었다. 마로니에공원에 도착하니 여기저기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10대 애들은 물론 어린애들까지 공원 곳곳에서 폭죽을 터트리고 있는 게 보였다. 무슨 민속 축제라도 열리는지 야외무대 쪽에는 커다란 현수막도 달려 있고 커다란 은행나무 주변 광장에는 널뛰기, 윷놀이, 팽이치기, 제기차기 등의 놀이 기구들이 줄줄이 설치돼 있었다. 놀이 기구들마다 꽤 많은 수의 인파가 모여 웃고 떠드는 게 보였다. 해는 완전히 졌지만 곳곳의 가로등이며 주변 상가 건물들에서 뿜어 나온 조명 불빛으로 조금도 어둑하단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한동안 멍하니 인파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기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져서 공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벤치에라도 앉으면 좀 나을 것 같아서였다. 은행나무를 빙 둘러싼 원형 벤치에서 마침 일어서는 커플이 보여서 즉시 빈자리에 몸을 부렸다. 연인은 공원 입구에서 보자 했지만, 공원 입구에서 그닥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데다, 어차피 연인이 나타나면 주변의 공기부터 달라지기 때문에 연인을 못 알아볼 염려는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부턴 익숙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더 이상 시계를 살피지는 않았다. 일찍 와도 그만, 늦게 와도 그만이었다. 어차피 ‘마지막’이었다. 아직도 도저히 실감할 순 없지만, 연인은 ‘마지막’이라 했었다. 그러니 ‘마지막’일 것이다. 시간 길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 ‘마지막’ 기다림의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구경했다. 불꽃놀이를 하는 이들도 구경하고, 널뛰는 이들도 구경하고, 윷놀이를 하는 이들도 구경하고, 인환처럼 한복을 입고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대는 벽안의 외국인들도 구경했다. 그러고 보니 남녀노소 불문, 한복 차림의 사람들도 꽤 많이 눈에 띄었다. 역시 명절은 명절이었다. 한 번은 꺅꺅거리는 여자들의 비명 소리도 들었는데, 그건 마로니에공원에선 이미 유명 인사라는 어느 미친 예술가 변태 때문이었다. 봉두난발 수염을 리본으로 묶고 검은 쫄쫄이 옷에 거시기엔 하얀 붕대를 친친 감은 뒤 여자들 앞에 나가 슈퍼맨 짓을 일삼는다는 사내였다. 누군가 신고를 했는지, 사내는 경찰관 두 명에게 끌려가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런 사내를 킬킬거리며 구경하는 남자들도 있고, 쌍욕을 섞어가며 노려보는 여자들도 있고, 세상 별 놈이 다 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이들의 부모도 있었다. 인환은 그저 슬펐다.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하고 끌려가는 초라한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친다는 건 정말 슬픈 거구나 하고 뇌까렸을 따름이었다. 저렇게 미치면 안 되는데 하고 자신에 대해 조금 걱정을 하기도 했다.

연인은 그 와중에 홀연 눈앞에 나타났다. 미친 변태 사내를 생각하느라 이미 주변 공기가 변해 있었다는 사실도 미처 눈치를 채지 못했다. 드물게 늠름한 장신의 그림자가 벤치 앞에 길게 드리웠고, 인환의 고개도 장신의 그림자를 따라 정면을 향했다.

이쪽을 향하는 많은 시선들이 느껴졌다. 어딜 가나 주변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연인 탓이었다. 연인은 어제 마주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낡은 청바지에 갈색 면 티, 그리고 그 위에 커피색 면 재킷을 걸친 차림이었다. 신발은 벌써 몇 년째 봐서 익숙한 밤색 랜드로버였다.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청년의 옷차림인데도 연인이 걸치니 그 이상 세련돼 보일 수가 없었다. 여느 웬만한 모델이나 배우라도 저만큼 대단한 포스와 매력은 뿜어내지 못하리라.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매혹적인 중저음이 나지막하게 물어온다. 깊고 깊은 시선이 인환을 찬찬히 굽어보고 있었다. 인환의 한복 차림이 조금은 낯선 듯, 어둡고 깊은 시선이 저고리와 바지, 그리고 조끼 위에 걸친 마고자들을 차례로 살피고 지나갔다. 발목에 매어진 대님이며, 호박으로 만든 마고자 단추, 엄마가 광을 내 닦아준 검정 에나멜 구두까지, 파헤치듯 꼼꼼하게 살펴서 인환으로 하여금 잠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기도 했다. 옷차림 살피기를 마친 눈길은 곧 인환의 얼굴로 되돌아와 역시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무슨 사진이라도 찍는 것처럼 집요하고 단단한 인상을 주는 눈길이었다. 그런 연인을 인환도 덕분에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전히 보기만 해도 설레고, 그립고, 애정이 넘치기만 해서 슬펐다. 손을 뻗기만 하면 바로 만질 수 있는 거리인데도 절대로 뻗어선 안 되는 금제도 슬펐다. 더는 떨리지도, 겁이 나지도 않는 게 이상했다. 막상 연인을 만나 자포자기한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연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생기에 넘치곤 하는 기존의 습성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니…… 나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연인이 같은 질문을 할 때마다 매번 전해준 거짓말이었다. 마지막까지 같은 질문에 같은 거짓말을 주고받게 되는 것도 참 웃기는 노릇이지 싶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기만 한 관계였었다. 늘 자신이 먼저 와 기다리고, 그랬으면서도 별로 기다리지 않았다고 입에 발린 말을 하고, 늘 자신이 먼저 사랑하고, 아니, 자신만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그럼에도 결코 사랑해주지 않는 연인을 끊임없이 갈망하며 그리워하고.

“우선 좀 걸을까요?”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연인이 다시 물어왔다. 걸을 기운이 남아 있을까 싶었지만, 여기서 그대로 대화를 나누기엔 다가드는 호기심의 시선들이 너무나 많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인환을 확인하고 먼저 돌아서는 연인을 따라 공원 밖으로 걸어 나왔다. 차라리 걸음을 옮기니 공원 안에서보단 연인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덜 느껴졌다. 그저 흘끔거리기만 할 뿐, 대놓고 쳐다보는 이들은 없었다. 느린 인환의 보폭을 배려해선지 연인의 걸음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워낙 기력이 떨어져선지 인환은 채 5분도 걷지 않아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헐떡이며 따라오는 인환을 흘낏 확인한 연인이 걸음을 멈추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이 서 있는 위치는 문예회관 소극장 안쪽으로 30여 미터쯤 들어간 골목으로, 인파는 공원에 비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연인은 바로 앞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겠냐고 물어왔고, 인환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길게 이어질 대화도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저기서 얘기하자고 카페 맞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카페 맞은편에 있는 건물은 무슨 갤러리거나 소극장 건물인 것 같았는데, 건물 현관까지 여러 개의 계단이 이어져 있어 여차하면 앉을 수도 있었다. 그저 지나가는 행인 한둘만 눈에 띌 뿐 주변도 고요했다. 얘기를 나누는 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연인은 잠시 인환이 가리킨 건물과 인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맞은편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따라간 인환도 계단 앞에 멈추어 선 연인을 스쳐 계단 중간쯤에 올라가 쪼그리고 앉았다. 서 있는 연인과 눈높이는 달랐지만 몇 계단 올라앉은 덕분에 시선을 마주하는 데 그리 무리는 없었다. ‘먼지가 꽤 많은 것 같은데요’ 하고 연인이 맨바닥에 주저앉은 것을 지적하는 의례적인 말을 했고, 인환은 어차피 세탁할 거니 상관없다고 하며 웃었다. 정성껏 지어준 엄마가 보면 기함할 일이겠지만, 연인에게 결국 버려지는 지금 이 마당에 옷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

“……너무 예쁜 거 같아…….”

잠시 뜸을 들이는 것 같은 연인보다도 먼저 뜬금없는 말이 나갔다. 더위를 느끼는지, 막 재킷을 벗어 한쪽 팔에 걸치던 연인이 시선을 자신의 얼굴에 고정하는 것이 보였다.

“계절이 말야. 이별하기엔 계절이 너무 예뻐. 마로니에공원에 은행나무들 봤어? 막 노랗게 단풍이 들기 시작했어. 물론 아직은 파란 부분이 더 많이 남아 있지만 곧 완전히 샛노랗게 되겠지.”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미처 자각도 못 하고서 줄줄이 수다를 풀어헤치는 인환이었다. 연인 앞에만 서면 열에 아홉은 더듬거리는 말투도 어째 제대로 나와주시고, 수다를 위한 멍석 또한 사뿐하게 깔려 있지 않은가. 인환에게 고정돼 있는 연인의 시선은 공원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처럼 어딘가 단단하고 집요하게 느껴졌다. 계속 그 시선을 마주하는 건 버거워서 이내 고개를 바닥으로 내린 인환이었다.

“……아니, 사실은 그저 핑계일 거야. 언제 어느 때든 계절은 아름답겠지. 혹은 처참하거나. 이별하는 계절은 다 그렇게 느껴질 거야.”

“…….”

“생각해봤어. 네가 며칠 전에 주문한 대로. 생각해보긴 했는데…….”

“…….”

“……그냥 겨울까지만 더 기다려주면 안 되겠니? 단풍이 예쁘게 들고, 그리고 마지막 잎새까지 다 떨어지고 난 다음에…… 하얗게 눈이 오는 계절에 이별하면 안 될까?”

“…….”

연인의 밤색 랜드로버가 보였다. 연인이 대학에 입학하며 새로 산 신발이었다. 몇 년을 신는 사이 군데군데 난 흠집도 보이고, 굽도 많이 닳아 있는 것도 보였다. 군함처럼 커다란 연인의 발만 변함없었다. 신발 안에 자리하고 있을 연인의 잘생긴 발가락들과 발톱, 드러난 뼈들과 힘줄들, 그리고 발등을 군데군데 덮고 있는 빳빳하고 검은 체모까지도 눈에 선했다. 연인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수없이 물고 빤 전적이 있는 사랑스러운 발이었다.

“……응? 그때까지만 좀 더 나 만나주면 안 될까? 그냥 지금처럼 가끔…… 아주 잠깐씩만이라도 네 얼굴을 보여주면 안 되겠니?”

“……그래서 뭐가 달라집니까?”

담담한 대꾸였다. 역시 감정이라곤 단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나지막하고 냉담한 어조.

“눈이 내릴 때까지라…… 우리 신애 씨를 그토록 불안하게 만들면서까지 몇 달 더 만남을 지속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요? 흰 눈이 내리고 나면 선생님의 제게 대한 마음까지 하얗게 비워지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그때가 되면 절 깨끗이 단념하실 수 있나요? 어제처럼 남의 집에 불쑥 찾아오지도 않으리라 장담하실 수 있어요?”

“…….”

“감상적인 애원으로 선생님의 억지를 포장하지 마십시오. 어제 그렇게 집에서 선생님과 마주치고 우리 신애 씨가 정말 많이 놀랐습니다. 몸도 약한데다 입덧으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을 꼭 그렇게 놀라게 하셨어야만 하나요? 물론 의도하지 않으신 거겠죠.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지 않으리라 장담하실 수 있나요? 없지 않습니까.”

“…….”

“며칠 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더 이상은 선생님과 만남을 지속할 수가 없다고요. 그건 당연히 저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요구였습니다. 좋은 말로 부탁을 드렸던 건데 선생님은 단 며칠도 안 가 그런 제 부탁을 묵살하셨죠. 그런 선생님을 제가 왜 더 배려해드려야만 합니까. 그것도 제 아내 될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면서까지요.”

“…….”

“관계를 질질 끄는 건 좋지 않습니다. 저나 제 가족에게도 그렇고, 선생님께도 물론 그렇지요. 빨리 끝내는 것이 선생님도 마음 정리를 하시는 데 더 좋으리라 판단됩니다. 그러니 여기서 완전히 끝내는 걸 납득해주세요. 다시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위야…….”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비수처럼 연달아 심장에 내리꽂히는 무참한 말들이었지만, 그래도 연인의 진의를 확인하려면 얼굴을 봐야만 했다. 눈빛을 읽어야만 했다. 최후의 최후까지 용기를 내야만 했다. 마주친 시선에선 일체의 흔들림도 없었다. 목소리에 깃든 서늘한 냉기와 단호함 또한, 꿈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에도 여지없이 떠올라와 있었다.

“……결혼하니?”

“…….”

“……그녀와 진짜로 결혼하게 돼?”

“예, 당연합니다. 이미 그쪽 부모님께도 찾아뵙고 말씀을 드렸고, 이미 제 아이까지 임신한 마당이라 허락도 쉽게 떨어진 편이었죠. 배가 불러오기 전에 식을 올릴 생각입니다. 이번 11월 중이 되겠죠.”

“…….”

“결혼 스케줄 때문에라도 더욱 선생님을 배려해드릴 순 없습니다. 제발 절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도 선생님께 이리 모질게 굴고 싶진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건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이렇게 거듭 선생님께서 제게 무리한 요구를 해오신다면 저도 참지만은 않을 겁니다. 제겐 다른 누구보다도 소중히 지켜줘야만 할 사람이 있으니까요.”

“…….”

“제겐 다시없을 완벽한 사람입니다. 아름답고, 상냥하고, 착하고, 순결하죠. 제가 원하고 꿈꿔왔던 모든 것을 갖춘 여자입니다. 핏줄에 목매는 절 어찌 알았는지 기꺼이 임신까지 해주었죠. 그야말로 제 아내가 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전혀 기대치도 않았는데 집안까지도 무척 좋더군요. 뉴욕에 거점을 두고 있는 거대 글로벌 기업의 손녀딸이라 제가 그토록 꿈꾸는 성공에도 탄탄한 발판이 돼줄 겁니다. 물론 형의 복수를 이루는 데는 두말할 필요도 없겠죠.”

“…….”

“사랑합니다! 너무나 사랑하고 있어요! 너무나……!”

담담하던 눈빛에 일순 격정적인 섬광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시선은 여전히 인환의 눈동자에 고정돼 있었지만, 지금 연인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는 그녀이리라. 찰나지만 용광로처럼 시뻘겋게 일렁이는 격정의 에너지는 숨이 턱턱 막힐 지경으로 압도적이었다. 그대로 바라보다가는 순식간에 소금기둥이라도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처럼 연인의 주변을 기웃거리는 볼품없는 짝사랑 게이 따윈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고 활활 태워버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열기였다.

“……그래요. 그러니 선생님을 더는 기다려드릴 수 없습니다. 부디 오늘이 선생님을 뵙는 마지막 날이 되길 바랍니다. 간절히요. 선생님께서 납득을 하시든 안 하시든, 절 정리하시든 못 하시든, 이제 전 그따위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선생님께 한때 품었던 우정의 감정조차 지금은 그저 흐릿할 따름입니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도 제게 그 어떤 미련도 더는 품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가 선생님께 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찰나를 태웠던 엄청난 격정의 열기가 순식간에 스러지는 것이 보였다. 한 번 눈꺼풀을 감았다 뜨니, 눈앞의 연인은 지독한 피로감에 어쩔 줄 모르는 노동자처럼 여위고 창백한 낯빛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환영을 본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긴 했으되, 절대 그 존재를 의심할 수 없으리만큼 격렬한 사랑임엔 틀림이 없었다.

“……너무 빨라…….”

하고픈 말을 다 했는지, 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린 연인을 향해 인환은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었다. 구구절절 반박할 수 없는 논리였기에, 자신의 입을 통해 쏟아질 대꾸야 뻔했다. 연인의 결정을 번복시키기엔 아무런 힘도 없는, 그저 하릴없는 사족이 다일 터였다.

“……하지만 너무 빠른걸…… 왜 그렇게 빠른 건지 모르겠다…… 너무 빨라, 위야…… 너무…….”

연인에게 너무 빠르다는 건지, 자신에게 너무 빠르다는 건지, 명확하게 주체를 정의내리지도 못한 채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대상조차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고장 난 레코드였다. 요즘엔 거의 취급되지도 않는 골동품다운 종말이었다.

“아뇨. 조금도 빠르지 않습니다. 전 내달 중에라도 해치우고 싶은데, 신애 씨 쪽에서 준비해야 할 게 많다더군요. 하긴 새신부니, 남자들과는 결혼을 바라보는 관점도 많이 다르겠지요. 여자라는 생물은 정말 신기하고 귀여워요.”

“…….”

그녀를 생각하는지 거리 쪽을 향한 연인의 프로필에 빙긋 하고 달콤한 웃음이 맺히는 게 보였다. 그간 그리 몇 번이나 생생하게 겪었으면서도, 즉시로 가슴이 찢어발겨지는 인환이었다.

“……그럼 제 뜻을 받아들여주신 것이라 믿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척동 집에 전화도 더는 걸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선생님 일로 혜윤이가 마음 아파하는 게 거슬려서요. 어차피 결혼하면 집도 옮길 예정이라 곧 전화번호도 바뀌겠지만요. 죄송합니다. 이런 부탁까지 드려야 하는 저도 몹시 마음이 언짢네요.”

거리를 향했던 시선이 인환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살피는 듯, 냉담한 눈길이었다.

“……그간 선생님께 받은 선물들은 연휴 끝나는 대로 택배를 통해 보내드리겠습니다. 명절 잘 보내시고요, 앞으로도 모쪼록 건강하시고 작품 활동도 잘되시길 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냉담한 눈길 못지않게 냉담한 결별의 인사가 떨어졌다. 90도 가까이 허리를 굽힌 정중한 인사도 떨어졌다. 계단에 쪼그리고 앉은 자세 그대로였지만 일어서서 연인의 인사를 받지는 않았다. 그럴 마음을 품었다 해도 그럴 기운이 났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멍하니 연인의 마지막을 응시하며, 기절하고픈 느낌을 다스리는 것만 해도 필사적인 인내를 요했다. 그냥 들어주는 일일 뿐인데도 역시 에너지 소모가 장난이 아니라고, 슬쩍 조소를 날린 인환이었다.

몸을 일으킨 연인의 시선이 잠시 인환의 얼굴에 머물다간 이내 돌아서는 게 보였다. 연인의 단정하고 아름다운 뒤태가 시야 가득 밟혀들었다.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은. 눈꺼풀조차 제대로 뜨기 힘들 지경으로 전신이 가부러지며 아파왔는데도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아났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끝까지 저 아름다운 뒤태를 봐주어야만 할 것 같아서일 수도, 아니면 쪼그리고 앉은 채 연인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을 게다.

똑바로 선 채 점차 멀어지는 연인의 뒤태에만 뚫어져라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반듯한 걸음걸이가 보였다. 걸을 때마다 부드럽게 앞뒤로 흔들리는 양팔도 보이고, 길고 늘씬해서 모델처럼 보이는 두 다리도 보였다. 곧게 뻗은 목덜미며 유려한 어깨 선, 낡은 티셔츠 아래 슬쩍슬쩍 비치는 견갑골, 빵빵하게 위로 올라붙은 섹시하고 예쁜 궁둥이도 보였다. 언제까지나 오래도록 바라봐도 절대로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뒷모습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는커녕 채 1분도 더는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천상의 아름다움이 유혹하는 대로, 하염없이 바라만 보려던 최후의 유희는 막 전신을 엄습한 고통엔 속수무책이었다. 저절로 눈이 감기며 순식간에 다리에 힘이 풀렸고, 인환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원인도 이유도 알 수 없는 끔찍한 통증이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지독하게 아프다는 감각뿐이었다. 날카로운 회칼로 전신의 살점이 저며진들 이리 아플까 싶었다. 헐떡이듯 고통을 삭이며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연인의 모습은 이미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좁고 어둑한 소극장 골목길에는 군데군데 밝혀진 상점가의 불빛들과 알록달록 번쩍거리는 간판들, 그리고 드문드문 눈에 들어오는 뭇 타인들뿐이었다.

공허한 상실감과 아릿한 슬픔이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그조차도 곧 안개처럼 스러졌다. 다시금 엄습한 압도적인 고통이 일체의 다른 감정들을 쓰나미처럼 휩쓸고 지나가버린 때문이었다. 원인도 이유도 알지 못한 인환만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채 자신을 담금질하고 있는 고통을 어리둥절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경련처럼 부들부들 사지가 떨리고 있었다. 이리저리 진동할 때마다 속에서 악악거리는 비명이 뛰쳐나올 만큼 아프고 또 아팠다. 영영 끝나지 않을 고통 같았다. 아니, 고통 속에 갇힌 채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멈춘 채 다신 움직이지 않을 시간이었다.

뭐, 별로…… 그러든지 말든지…….

이젠 아무래도 좋다고, 막 터져 나온 비명을 사리물며 설핏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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