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 1993년 10월. 장인환(張仁歡) (82/129)

49. 1993년 10월. 장인환(張仁歡)

화산처럼 온 넋을 분출시키던 광기가 가라앉자 제일 먼저 실감된 것은 지독한 추위와 온몸의 통증이었다. 취조 비슷한 것을 하던 순경이 담요를 던져주었는데, 젖은 몸으로 차가운 유치장 안에서 버티기엔 담요 한 장으론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딱딱딱 하고 이상한 소리가 나기에 고개를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더니, 그건 자신이 이를 부딪는 소리였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푹 젖은 몸이 회색 트레이닝복 아래서 시체처럼 희끄무레 불어 있었다. 메마른 시멘트 바닥 위에서 제법 시간을 보낸 터라, 그나마 맨발인 발바닥은 말라 있었지만 희끄무레한 시체 빛깔은 한가지였다. 굳어버린 시체와 다른 점이 있다면 추위를 못 견뎌 와들와들 떨고 있다는 점이랄까. 아, 한 가지 더. 몸 여기저기, 이지러지고 찢어진 살가죽에서 피가 조금씩 새고 있다는 점도. 추위도 추위였지만 몸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손가락 끝과 머리 곳곳이 유달리 더 아팠는데, 만져보니 하나같이 피가 새고 있는 곳들이었다. 

“……저치는 뭐야? 상처가 꽤 심한 거 같은데 저대로 둬도 되나?”

“……미친 스토커 변태 새끼야. 보호자 불렀으니 곧 데려가겠지. 저 새끼 발광하는 거 끌고 오느라 조 순경이랑 나랑 사방에 멍이라구. 우리 지영이도 감히 못 건드리는 얼굴에 손톱자국까지 내놨으니, 퇴근하면 마누라한테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니까.”

“킬킬킬, 그럼 지금 김 순경 얼굴이 저치 작품이야?”

“그렇다니까! 끌고 오느라고 아주 골 때렸다고. 짝사랑하는 남자가 안 만나준다고 집에 찾아가서 진상을 떤 거지. 좀 전까지도 지 애인한테 돌려보내달라고 싹싹 빌고 자해하고 몸부림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 유치장 벽에다 박치기를 해대질 않나, 가슴을 쥐어뜯지를 않나…… 미친놈이니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아주 환장을 하겠더라니까. 우리까지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구.”

“오늘은 미친 변태가 많이 뜨는 날인가 보지? 탁 의경이 소방서 근처에서도 한 놈 잡아왔는데 진짜 엽기야. 관운장처럼 수염을 길게 길러갖고 가닥가닥 땋아서 리본까지 매달았더라고. 옷차림은 위아래 다 쫄쫄이 빨간 내복이고 거시기엔 붕대까지 친친 감았더라니까.”

“크하하하, 거시기에 붕대까지?!”

“그렇다니까. 여자들 지나가면 붕대 감은 그거 까놓고 주물주물하는 거지. 강적이야. 사람들이 떼거지로 달려들어 욕하고 위협해도 도망가지도 않더래. 조 순경이 지금 조서 쓰고 있는데, 웃긴 거 참느라고 땀 뻘뻘 흘리고 있어. 보호자한테 연락하니 유치장에 그냥 가둬두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했다네? 상습범인 거지, 뭐.”

“비가 죄지, 비가 죄야. 원래 비만 오면 변태들이 허벌나게 많이 뜨잖아. 빗방울 속에 변태들 회가 동하게 만드는 무슨 특별한 화학 물질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화학 물질? 푸하하하, 하긴 그럴지도…….”

“그나저나 자네도 저녁 먹어야지? 날도 썰렁한데 순대국밥 시킬까?”

“추어탕이 낫지 않아? 할머니네 국밥은 하도 시켜먹었더니 질리네?”

“그럴까? 그럼 조 순경한테도 물어보고…….”

유치장 벽 너머에서 두런거리는 경찰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조립식 건물이라 그런가 본데, 광기가 스러지며 두 번째로 자각한 현실감이었다.

인환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분명한 저들의 적나라한 비웃음에 전염이라도 된 듯, 비실비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미친 변태 호모 새끼네. 속으로 맞장구까지 치고 있었다. 맞아, 비가 문제야. 비가. 비가 오면 더 감상적이 되거든. 맞아, 맞아. 순대국은 정말 느끼하지. 사람들은 그런 걸 어떻게 먹나 몰라. 차라리 얼큰하고 구수한 게 추어탕이 낫지. 미꾸라지 모습을 상상하면 좀 비위가 상하기도 하지만, 뭐, 다 부서져서 잘 모르니까 먹을 만은 해…….

비 맞은 중처럼 그렇게 중얼중얼 맞장구를 치고 있는데, 유치장과 연결된 보호실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몇 들어왔다. 의경 제복 차림의 의경 하나와 순경 제복 차림의 순경 하나, 그리고 괴상망측한 모양새를 한 사내였다. 사내 쪽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길게 기른 수염을 가닥가닥 땋아서 리본까지 매달고 있고, 옷차림은 위아래 다 쫄쫄이 빨간 내복이었으며, 반쯤 내려간 허리춤 틈으로 흰 붕대를 친친 감은 치부가 보였다. 어디서 봤을까? 멍하니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그저 뿌옇게 흐릿하기만 한 머릿속에선 아무런 단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의경과 순경이 양쪽에서 사내의 팔을 잡은 채 유치장 가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멍하게 초점이 없는 사내를 제외한 맨 정신의 시선들이 인환 자신에게도 쏟아졌다. 순경의 시선은 좀 더 험악했는데, 아무래도 자신을 끌어 오다 몸싸움을 했던 자 중 하나인 듯싶었다.

순경이 자물쇠를 따자 철컹 하고 유치장 문이 열렸다. 사내가 들어가지 않으려는 듯 약간의 몸싸움이 있다가 의경이 험악한 욕설로 겁을 주었고, 곧 체념한 듯 사내가 얌전히 유치장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가 들어서자마자 노숙자들에게서나 남직한 역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심심하셨을 텐데 같은 변태끼리 사이좋게 지내보쇼.”

사감이 가득 들어간 말이 순경의 입에서 떨어졌다. 그에 화답하듯 의경이 킥킥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철컹 하고 철문이 잠기는 소리가 나며 유치장 문이 닫혔다.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점차 멀어지다가 맞은편 보호실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딱딱딱딱. 부스럭부스럭. 미세하고 기묘한 소음만은 여전했다. ‘딱딱딱딱’은 자신의 이 부딪는 소리고, ‘부스럭부스럭’은……. 소리를 따라가 왼쪽 옆을 보니, 괴상한 사내가 엉덩이를 까내놓은 채 치부를 가렸던 붕대를 풀어 새로 감고 있었다. 페니스 주변을 둘둘 마는 손길이 몹시도 세심하면서도 정성스러웠다. 어딘가 경건함마저 느껴져서 실소했다. 흡사 캔버스를 대할 때의 자신 같지 않은가. 아! 예술가 변태! 마로니에공원! 그제야 잠자고 있던 기억 창고에 팟 하고 불이 들어왔다.

“……마로니에공원…….”

“어? 자네 나 알어?”

무심코 뇌리 속의 말이 흘러나왔던가 보았다. 사내의 고개가 반짝 추켜올려지더니 인환 쪽을 향했다. 사내의 입술이 헤벌쭉 벌어지며 거무튀튀한 사내의 얼굴이 바보 영구처럼 변했다. 너무나 기쁜 것 같아 보이는 그 표정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

“껄걸, 그럼 그렇지. 나 같은 유명한 예술가를 모르면 말이 안 되지. 울 나라 짭새 새끼들은 참 무식해서 탈이야. 대단한 퍼포먼스도 몰라본다니깐. 풍기문란이 뭐고 성추행은 또 뭐야. 천박한 것들이 예술을 몰라요. 그래도 젊은이는 뭘 좀 아는 거 같네. 그쟈?”

이가 군데군데 빠져 발음이 새긴 했지만 완전히 미친 인간이라고 치부하기엔 비교적 논리 정연한 항변이었다. 이번에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의해준 게 기뻤는지, 사내는 보다 더 환한 영구 웃음을 지어 보이곤 곧 다시 그네의 예술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페니스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가 다시 감고, 다시 풀었다간 또 감기를 반복하는 모양새가 거듭거듭 예배를 드리는 독실한 성직자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온몸이 악취와 땟국투성이에, 희멀겋게 드러나 있는 엉덩이는 피멍 자국이 완연했지만, 그따위는 그야말로 속된 시선인 것처럼 자괴감이 일 지경이었다. 꽤 오랫동안 바라보는 사이 세뇌라도 든 걸까? 사내를 유치장에 가둔 경찰들은 정말 예술을 모르는 무식하고 천박한 속물이고, 페니스에 붕대를 감은 채 여자들 앞에서 수음을 하는 사내는 희대의 예술가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모두들 사내를 오해하고 있다고, 이것이야말로 예술가를 박해하는 공권력의 횡포라고, 문득 억울하고 서러운 한까지 생겨날 지경이었다. 그때였을 것이다. 다시금 보호실 문이 열린 것은. 멍하니 문 쪽으로 시선을 가져갔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좀 전에 사내를 데리고 들어왔던 순경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새하얗게 질린 잔주름투성이의 얼굴이 보였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한창때의 처녀처럼 가녀리고 화사한 몸집은 눈에 익은 것이었다. 사무실에서 바로 오는 길인지, 소라색 바지 정장 차림에 그네가 유난히 좋아하는 브랜드인 발리의 숄더백을 어깨에 둘러멘 모습도 너무나 익숙했다. 다만, 어딘가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만은 매우 낯설었다. 존재감조차 흐릿하기만 해서 쇠창살 틈으로 드러난 얼굴을 보자니 흡사 유령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였다.

유치장 안을 멍하니 휘둘러보던 엄마의 시선이 자신의 것과 부딪쳤고, 곧이어 극심한 고통으로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파르륵하니 경련하는 눈꺼풀을 보자니, 순간 엄마가 기절을 하는 게 아닐까 싶어 겁이 났다. 다행히 이내 감정을 수습한 듯, 부릅뜬 눈길이 허겁지겁 자신의 얼굴과 몸 이곳저곳을 헤매 다녔다. 핏자국과 피멍 자국이 낭자할 머리며 얼굴은 차마 오래 바라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내 시선을 돌리더니 부들거리는 입술을 힘껏 깨무는 게 보였다. 맞잡은 두 손 역시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창백하니 흐늘거리는 몸짓이 정말로 유령 같아 보였다.

부스럭부스럭. 옆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엄마의 시선도, 또 자신의 것도 소리의 근원을 따라 옆으로 움직였다. 마로니에공원의 변태 예술가였다. 드문드문 빠지고 깨진 이를 훤히 드러낸 채 사내가 영구 웃음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움칫움칫, 엄마를 향해 허리를 치고 있는 것도 보였다. 앙상하게 마른 허벅지가 보일 때까지 쫄쫄이 내복의 허리춤을 내린 채 사내가 수음을 하고 있었다. 몇 분 전, 그토록 경건하게 경배를 드리던 붕대 입은 페니스를 두 손으로 말아 쥔 채 막무가내로 흔들고 있었다. ‘저, 저, 저 미친 새끼가?!!! 그만두지 못해?!!!’ 함께 따라 들어온 순경이 삿대질까지 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황망한 시선을 다시 엄마에게로 돌렸다. 정말로 경악한 얼굴이었다. 휘둥그레졌던 눈시울이 제 모습을 찾기도 전에 엄마의 고개가 옆을 향했다. 붉어졌다 파래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낯빛과 표정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그때였을 것이다. 엄청난 부끄러움과 환멸이 온 넋과 몸뚱이로 노도처럼 들이닥친 것은.

끔찍했다. 사내를 통해 자신의 실체가 엄마 앞에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뭐가 예술이냐. 뭐가 성스러운 경배냐. 예술가를 박해하는 공권력의 횡포라고? 나가 죽어라, 장인환……!

와들와들 떨고 있던 몸을 공처럼 아래로, 아래로 웅크렸다. 죽어버렸으면! 지금 당장 죽어버렸으면……! 추락이었다. 바닥조차 알 수 없는, 도저히 헤쳐 나올 수 없을 심연으로의 추락이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어떤 타박도 없었다. 오로지 유치장에 갇힌 자식을 빼내는 데만 온 정신이 다 쏠린 것처럼도 보였다. 고압적인 자세로 연신 푸념을 해대는 경찰들에게서 온갖 추악한 전말을 다 전해 들었을 텐데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경찰들이 내민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자식뻘인 저들에게 죄송하다며 연신 허리 굽혀 절을 하고, 마침내 방면된 ‘미친 변태 스토커 호모 새끼’의 팔을 붙들고 병원으로 직행했을 따름이었다. 병원에서 타박상과 찰과상을 입은 몸 곳곳을 치료하고,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정신과 상담 신청까지 마친 다음에야 엄마는 다시 자신을 끌고 병원을 나와 평창동 집으로 향했다.

물론, 집에 도착해서도 엄마는 여전히 일절 말이 없었다. 그저 김천댁 아줌마에게 자신의 간호를 부탁한 후 안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침대로 직행했을 따름이었다. 다음 날이 돼도 엄마는 안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운 때문이었다. 그날부터 평창동 집엔 마음과 몸 양쪽이 다 아픈 중환자를 둘이나 두게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엄마는 설계 사무실 일조차도 부소장인 황 씨 아저씨에게 완전히 일임한 듯했다. 며칠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난 후에도 더 이상은 사무실로 외출하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로 해서 늘어난 여가 시간은 인환 자신을 돌보고 통제하는 일에 전부를 투자했다. 얼굴은 깊은 수심으로 창백하게 그늘이 졌으되, 눈빛만은 퍼렇게 서슬이 형형했다. 마치 어린 시절 자신이 소아마비를 앓던 그때로 되돌아간 듯했다.

엄마는 아마도 거의 추측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에 관해서라면 예전부터 유달리 지극정성인 엄마였다. 과연 ‘치맛바람’이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 엄마가 작금의 극심한 혼란을 가끔 있을 수 있는 예술가다운 고뇌 정도로 언제까지 속아줄 수는 없었으리라. 지난 추석 이래, 자신은 완전히 미친놈이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틈만 나면 흐느끼다 못해 집 안이 떠나가라 엉엉 울부짖고, 전신이 아파 죽는다고 끙끙거리며 비명과 신음을 번갈아 흘려대고, 며칠 동안이나 잠을 못 자 기진한 나머지 응급실에 실려가 정신을 못 차리고……. 차마 실연의 고통이라기엔 창피할 지경의 광기였다. 그래. 광기였다. 그 발광한 사달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본 엄마였다. 비록 자신이 게이란 사실만은 끝까지 확신하지 못했겠지만, 아니, 인정하지 않으려 몸부림을 쳤겠지만,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으로 바닥까지 망가져가고 있는 자식을 바라보며 엄마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어느 정도는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충격이 덜했던 걸까? 아니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말 그대로 절망해 무너지기엔 자식 사랑이 너무나 극진한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자식의 독한 배신을 상상 이상으로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고척동파출소 유치장에서 자신을 끌어낸 나흘 후, 그때까지 안방에서 두문불출하던 엄마가 방에서 나와 가장 먼저 한 일도 자신을 정신병원으로 끌고 간 것이었다. 그다음부터 사흘에 한 번꼴인 병원 치료에도 매번 동행해 함께 상담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었다. 집 안 곳곳에 우울증과 동성애 관련 책자가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고 있었던 것은 그 우습고도 서글픈 부록이었다.

병원에선 극심한 우울증과 강박증, 그리고 신경 쇠약 진단을 받았다. 약물이나 상담 치료 따위로 절대 나을 병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인환은 차마 병원 치료를 거부할 배짱은 없었다. 엄마의 실망이 워낙 커서 그것마저 마다할 수는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함께 의사의 상담 치료를 받는 덕분에 엄마의 동성애에 관한 겁에 질린 편견이 그나마 수그러들었다는 점이었다. 동성애라면 그저 ‘미국 같은 서양의 이상한 남자들이나 걸리는 질병’ 정도로만 여기던 엄마가 그도 일종의 사랑의 한 변형일 수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트이게 된 것이다. 아니, 가만. 생각이 트여? 하, 솔직히 말하자, 장인환. 환갑이 가까울 나이까지 쌓여온 사회적 편견이 정신과 의사의 동정에 찬 몇 마디에 그리 쉬이 허물어질 수 있다고? 천지가 개벽하고 세상이 뒤집히는 의식의 전환이 그리도 쉽게 말인가? 물론, 그렇지. 원인은 아마도 다른 데 있을 터였다. 십중팔구 그 역시 엄마의 맹목적인 모정 덕분이었을 테지. 끔찍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상한 변태 호모로 단죄하느니보다는 그저 남과는 조금 다른 사랑을 하는 성적 소수자로 인정을 해주는 편이 엄마의 맹목적 모정엔 훨씬 더 부합할 달콤한 결론이었으리라. 게다가 역사상 수많은 천재 예술가들이나 철학자들 역시 암암리에 호모라는 설이 파다하다지 않은가(며칠 전 안방 욕실 선반에서 발견한 책 내용 중 하나였다). 아들은 예술가였다. 그리고 엄마가 믿어 의심치 않건대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러니 그네의 아들도 충분히 그런 호모일 수 있는 문제였다……. 과연 순진한 울 엄마였다! 과연, 끔찍하게 눈물겨운 모정이었다!

연인의 고척동 집으로 찾아가 난동을 부린 지 2주가 지났다.

10월 30일. 토요일 오후였다. 날은 매우 맑고 청명했다. 맑고 푸르른 창공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 이제야말로 진짜 가을 같았다. 그간 가을장마라도 있는 건가 싶게 사나흘에 한 번꼴로 질금거리기만 하던 비가 간신히 멈춰줬다. 인환은 편한 갈색 면바지에 크림색 스웨터와 재킷, 그리고 야구 모자까지 눌러쓴 무난한 차림으로 집을 나서는 중이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애마인 BMW는 차고에 내버려둔 채 20여 분을 걸어 내려와 택시를 탔다. 목적지까지는 차로 두 시간 남짓. 단번에 가지 않고 택시만 세 번, 그리고 시외버스와 택시 두 대를 또다시 번갈아 탄 끝에 목적지에 도착할 요량을 하고 있었다.

지난 2주간 열심히 정신과를 넘나들며 치료에 전념한 결과 자신의 상태는 극히 양호해졌다. 아니, 양호한 것처럼 보였다. 처방받은 약물 덕분이었는지 전보다는 잠도 제법 자는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순간순간 전신을 가부러지게끔 만들던 강박적인 통증과 환청, 환각 증상도 홀연 사라졌다. 매일 저녁 무렵이면 통곡을 거듭하며 머리를 벽에 부딪고 미친 듯이 가슴을 쳐대야만 간신히 잠재울 수 있었던 이별의 고통도 그저 둔중한 슬픔으로만 남아 가슴을 찢고 있을 뿐이었다. 지독한 우울증이 가라앉은 대신 조증이라도 오는지 느닷없이 킬킬거리는 웃음이 터져서 난감하기도 했다. 밥도 조금씩 먹기 시작해서 더 이상 포도당 주사로 연명하지 않아도 되는 게 가장 두드러진 호전 반응이었다.

변화를 가장 반긴 이는 물론 엄마였다. 엄마 뒤로는 김천댁 아줌마를 위시한 평창동 식구들, 그리고 선 화랑 동료들이었다. 평창동으로 끌려 들어와 엄마의 감시하에 놓인 이래 그들과도 일절 연락을 끊고 있었는데, 엄마를 통해 자신의 사정은 낱낱이 생중계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엄마의 표정이 밝아질수록 자신을 감시하는 감시망도 점차 느슨해졌고, 물론 인환 자신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병원에도 다니고, 약도 열심히 주워 먹고, 안 넘어가는 밥도 꾸역꾸역 삼키려 노력을 했다.

양호해지든지 말든지. 미쳐 죽든지 말든지. 엄마를 더더욱 궁지로 몰든지 말든지. 그래, 그따위 건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다. 자신에겐 ‘양호해 보여야’만 하는 다른 중대한 목적이 있었다. ‘마지막’ 구명줄이 남아 있었다. 최후의 보루였다. 그거라도 잡아보고 싶었다. 자신에게 아직 조금이라도 움직일 기력이 남아 있다면, 자신은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할 터였다. 그랬다. 정말로 양호해진 건지, 아니면 더더욱 미쳐가는 건지 이 지점이야말로 진짜 아리송해지는 대목일 터였다.

담당 정신과 의사는 말했다. 실연하면 크든 작든 누구나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법이라고. 그러나 누구나 다 그걸로 죽지는 않는다고. 처음엔 괴로워도 점차 극복이 가능해진다고. 자신 안의 정신적 힘을 믿으라 했다. 그러니 연인에 대한 집착을 점차 놓아가라고, 포기를 연습하라고 했다. 틀림없이 극복할 수가 있을 거라며. 맞는 말일지 모른다. 아니,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은 더 자신이 노력해봐야만 할 뭔가가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의사 말을 열심히 들어주는 척했다. 열심히 치료를 받으며 착한 환자가 되었다. 엄마 앞에서도 돌아온 탕아처럼 얌전하게 굴었다. 그 ‘미련이 남는 무언가’를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2주를 흘려보냈다. 물밑 작업으로 거금을 들여 건달들을 고용하고, 인적 드문 평택 시골에 급매로 나온 빈집을 사들였다. ‘그녀’에게 마지막 할 말이 있으니 만나달라고 낚싯밥도 띄웠다. 오만한 여신의 성품에 걸맞게, 자존심을 긁는 수법으로 교활하게 바늘을 드리웠다. 여신은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설마 훤한 대낮 도심에서 무슨 일이야 당할까 싶었을 게다. 대단한 갑부집 영양이라면서도 경호원 하나 없이 다니는 그녀의 오만이 죄였다. 자신은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바람맞은 그녀가 붉으락푸르락해서는 약속 장소를 나와 차를 몰고 떠나는 것이 낚싯밥의 마지막이었다. 달리는 그녀의 차를 자신이 고용한 건달들로 하여금 접촉 사고를 일으키게끔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짓이었을 게다.

그녀를 픽업했다는 연락이 오기까지 별로 초조하게 기다리진 않았다. 시나리오도 완벽했고 미끼도 완벽했기에. 그렇게 30분 전쯤 연락을 받았고, 연락을 받은 즉시 엄마에게 선 화랑 동료들을 만나러 간다고 공갈을 치고 나왔다. 물론 마지막까지 완벽을 기하기 위해 선 화랑에 전화를 넣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 약속은 피곤해서 깬다고.

하늘이 파랬다. 햇빛도 눈부셨다. 완연히 단풍이 든 포플러 가로수들이 고즈넉하면서도 운치가 있었다. 10월 30일. 토요일 오후였다. 날은 매우 맑고 청명했다. 맑고 푸르른 창공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 이제야말로 진짜 가을 같았다. 그간 가을장마라도 지는 건가 싶게 사나흘에 한 번꼴로 질금거리기만 하던 비가 간신히 멈춰줬다. 어쩐지 인환의 가슴에 내리는 빗줄기도 곧 멈춰줄 것만 같았다. 빠진 손톱들도 다시 자라기 시작했고, 찢어진 이마며 머리통을 땜빵 했던 새까만 실밥들도 이틀 전 모두 뽑아냈다. 조금만 걸어도 종잇장처럼 흐늘거리던 다리에도 제법 힘이 느껴졌고, 툭하면 호흡 곤란을 일으키던 숨길도 가벼웠으며, 두어 시간 전, 엄마가 끓여준 잣죽 한 사발을 고대로 들이켠 배 속 또한 매우 든든했다. 다 잘될 것 같았다. 거만하고 도도한 여신이니 잘만 부탁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들어줄 것 같았다. 자신이라면 불쌍해서라도 당장 들어줄 만큼 하찮은 부탁이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보다 훨씬 더 까다롭다면 들어줄 때까지 물고 늘어질 자신도 있었다. 자비심이 부족하다면 귀찮아서라도 들어줄 터였다. 무언가에 열렬히 동의를 표하듯 연신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랬다. 그건 ‘희망’이라고 하는 달콤한 영약이었다.

여섯 번이나 차를 갈아탄 끝에 평택의 담판 장소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6시가 거의 가까워지고 있었다. 날도 저물고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야 하는 형편엔 오히려 더 잘됐지 싶었다. 담판 장소로 정한 집은, 누군가 급매로 내놓은 것을 자신이 가상 인물의 명의로 사들인 지 이제 일주일째인 아담한 별장형 2층집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택시를 세우고는 집까지 20여 분의 거리를 걸어갔다. 날은 그사이 완전히 캄캄해져 있었다. 외진 산속이라 그런지 사방이 가로등도 없이 캄캄했다. 단 한 번이었을지언정, 미리 답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집 앞에 도착하니 고용한 건달 둘이 현관 앞을 어슬렁거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말없이 다가와 열쇠 꾸러미를 넘겼다. 잠자코 받아들자 사내들은 이내 집 앞에 주차돼 있던 검정색 승용차를 타곤 쏜살같이 사라져버렸다. 사내들의 승용차가 사라진 옆에는 자신을 위해 저들이 준비해둔 허름한 흰색 소나타 중고차 한 대가 주차돼 있었다. 마해영의 애인인 손 사장을 통해서 구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조폭치곤 눈치도 빠르고 일처리도 깔끔했으며 꽤나 예의도 바른 것 같았다. 뭐, 그래봤자 다신 만나볼 수도 없을 유령 같은 치들이긴 했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칠흑 같은 어둠이 반겨들었다. 현관에 켜진 불빛에 의지해 전등 스위치를 찾아 거실 불을 밝혔다. 10여 평 크기의 아담한 거실이었다. 가구가 전혀 없어 실제보다 훨씬 더 넓게 보이는 것 같았다. 거실과 연결된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사내들에게 미리 시킨 대로, 각종 일회용 음식들이며 음료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중 오렌지 주스 병을 꺼내 머그컵 두 개에 따라 담고, 쟁반에 받친 채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가둬둔 곳은 2층 맨 안쪽의 첫 번째 방이었다. 현관문과 마찬가지로 자물쇠를 거꾸로 달아 자물쇠를 풀지 않는 한 밖에서는 열 수 있지만 안에서는 열 수가 없었다.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가다듬고 노크를 했다. 별로 떨리거나 하진 않았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그녀의 질책이 두려운 나머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었을 테지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연인에게 버림받으면서 간댕이가 단단히 부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 간댕이라는 것이 아예 사라져버렸거나. 간댕이와 더불어 사라진 것이 있다면 염치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인간다운 양심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마음이 평화로울 까닭이 없었다. 다만, 몸 쪽은 여전히 약간의 불편을 호소했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지쳤는지 그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극히 양호해졌다고는 해도, 자신의 몸은 아직 정상에서 한참은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만약 그 흔한 멜로드라마의 그것처럼 그녀와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싸움이라도 하게 된다면 남자인 자신이 오히려 밀리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리얼한 상상에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실소가 흘렀다. 그녀나 자신이나 그 정도로까지 적나라하게 속내를 드러낼 턱이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기에 터져 나온 실소였다. 현실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풍경이기에, 그건 상상만으로도 괴상망측한 코미디나 다름이 없었다.

똑똑. 한참을 기다려도 대꾸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똑똑. 여전히 대꾸는 없었다. 인기척도 없었다.

화가 많이 났구나. 즉각 그녀의 마음이 읽혔다. 하긴, 읽히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겁에 질리기엔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긍지가 높은 종류였다.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 여기고 있겠지.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밀어 넣고 돌린 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침대 하나와 벽장 하나, 그리고 1인용 소파 하나뿐인 휑한 공간이 시야로 밟혀들었다. 그녀는 침대 옆 소파에 앉아 있었다. 침대 헤드 프레임과 긴 쇠사슬로 연결된 수갑이 그녀의 가느다란 왼쪽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거리는 꽃무늬 면 원피스에 살구색 니트 카디건 차림이었다. 앙증맞은 발을 감싸고 있는 것도 흰색 스니커로, 이제까지 봐온 그녀의 차림 중 가장 소박하다 할 수 있었다. 물론, 아무리 소박하다 한들, 여신처럼 아름다운 미모에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힐 턱은 없었다. 그녀도 연인처럼 그저 걸치는 것만으로도 무엇이든 명품으로 둔갑시켜버리는 대단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자신이 들어선 것을 알 텐데도 그녀는 문 쪽으론 시선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방 한쪽에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저녁때라 배가 고플 겁니다, 신애 씨. 우선 이 주스부터 드셔보세요.”

마음이 평온해서 그런지 더듬지 않고 말도 잘 나와주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포스부터 남다른 연적 앞이니, 그저 말이라도 더듬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하느님일 터였다. 쟁반을 그녀 앞으로 내밀자 그녀의 자유로운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와장창. 쟁반째 날아간 주스 잔이 맞은편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뺨으로 쓰린 아픔이 지나가는 걸 보니 파편 하나가 스치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본능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머리까지 놀란 것은 아니었다. 당연한 반응 같기도 했다.

잠시 그녀와 사방에 널린 잔의 파편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방에서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든 생각은 그저 청소 도구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우려가 다였다. 다행히 주방 옆 다용도실로 가니 빗자루와 쓰레받기는 물론 대걸레와 세제가 종류별로 구비돼 있었다. 빗자루를 들고 다시 그녀에게로 갔다. 그녀는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계단을 두 번이나 오르내리느라 가팔라진 숨길을 가누며 파편들을 치우고 쏟아진 주스를 걸레로 닦아났다. 쓰레기들은 방 옆에 붙어 있는 욕실로 들어가 처리했다.

다시 방으로 나와선 바로 그녀 앞에 무릎부터 꿇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바닥에 이마를 완전히 붙인 죄인의 자세였다. 그제야 힐끗 이쪽을 향한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용서해달란 말은 안 하겠어요…….”

자꾸만 헐떡이는 숨길이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연달아 말을 하는 것은 자제해야만 할 것 같았다. 무얼 쓸고 닦는다든지 하는 중노동 또한. 역시 이 정도의 스트레스를 견디기엔 몸 상태가 아직은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이해해달란 말도 안 해요. 짝사랑에 환장하긴 했지만…… 용서해줄 수도, 이해해줄 수도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자각 정도는 하고 있어요.”

“…….”

“……신애 씨를 강제로 여기까지 모셔온 건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예요. 아까 약속 장소에 나가서 드릴 수도 있는 말이긴 하지만, 여간해선 신애 씨가 받아들여줄 것 같지 않아서 말이죠.”

“…….”

“……그래요. 그래서 어린애처럼 떼라도 써보려구요. 그래서 편법을 썼어요. 아니, 불법인가요? 이에 대한 죗값은 나중에 다 갚을게요. 약속해요. 그저 지금은 제 부탁에 조금만 귀를 기울여주세요.”

“…….”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가끔…… 그저 가끔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돼요. 그저 두 달에 한 번…… 아니, 세 달에 한 번이라도 좋아요. 6개월에 한 번 잠시 본다고 해도 괜찮아요. 단지 그것만이라도 전 살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저 영영 못 보는 것만 아니면 돼요. 그러니까…….”

“…….”

“……아주 잠시, 1년에 몇 시간 정도만이라도 좋으니까 그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

“……무슨 다른 흑심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를 새삼 유혹하려는 것도 절대 아니죠. 아시다시피 그가 사랑하는 이는 신애 씨 당신입니다. 제가 무슨 유혹을 한다 한들 흔들릴 그도 아니지만, 제 쪽에서도 다른 흑심 따윈 언감생심 품지도 않아요. 그래요. 그냥 그의 얼굴을 잠시 볼 수 있게만 해주세요. 부디 허락해주세요. 부디…… 부디 제발 부탁드립니다, 신애 씨…….”

“…….”

“……그는 뼛속까지 스트레이트인 진짜 남자입니다. 걱정하시는 것처럼 소돔의 씨에 감염된다거나…… 그래요. 게이 따윈 절대 되질 않아요. 그건 신애 씨도 잘 아실 겁니다. 만약 그에게 게이가 될 가능성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지난 몇 년 동안 그와 관계를 가지는 중에 이미 되고도 남았겠지요. 그는 신애 씨의 오빠와는 전혀 다릅니다. 자신할 수 있어요.”

“닥쳐!”

줄곧 듣고만 있던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대꾸가 떨어졌다. 얼음장처럼 서늘한 일갈이었다. 물론, 지독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는 명령조의 말투를 대꾸라 부를 수 있다고 한다면 말이지만.

“닥쳐요! 관계라고요? 감히 그따위 걸 관계라 표현하나요?”

“…….”

“그런 걸 지칭하는 다른 정확한 표현이 있죠. 아마도 ‘유린’이라고 하죠? 아니, ‘강간’이던가?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강제로 약자의 몸을 성욕의 도구로 취급하는 것을 말하죠. 그러니 닥쳐요. 지난 몇 년 동안 당신이 위야의 몸을 ‘유린’한 걸 상상하기만 해도 더러워서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으니까.”

“…….”

“그게 당신의 그 징글징글한 사랑법인가요? 정말로 같잖네요.”

“…….”

“만약 나였다면, 당신과 같은 입장에서 위야를 처음 만났다면 당신처럼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가난에 허덕이는 미성년자를 돈으로 유혹해서 강제로 그의 몸을 갖지는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아니, 만약 그러기로 기왕에 타락해버렸다면 그걸 사랑이라고 미화시키는 뻔뻔스러운 주장까지는 절대 하질 않았겠죠. 못 했겠죠. 양심이라도 살아 있는 진짜 ‘인간’이라면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

“……짐승이 인간 행세를 하는 경우를 간혹 보죠. 제 오빠 얘기를 해드린 적이 있죠? 오빠를 타락시킨 그 짐승도 역겹기 그지없었지만, 짐승 짓을 하고도 애절한 사랑이라 우기는 당신은 거기서 한 발을 더 나가시네요.”

“…….”

“결국 짐승답게 마지막까지 화려한 짐승의 행태를 보이고 계시죠. 납치라…… 납치에 건달들에 쇠사슬에 수갑에, 아이템들까지 아주 딱이지 않습니까? 과연 짐승다운 발상이에요. 자, 그래서 이다음은 뭔가요? 강간인가요? 내가 당신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날 강간이라도 시키겠다는 건가요? 그도 멋진 결말이겠네요. 역시 짐승다워요. 아니면 죽일 건가요? 날 죽이고 싶어요, 짐승 씨?”

“…….”

“어디 죽여보시죠? 그런다고 위야가 당신을 사랑해줄 것 같아요? 당신 소원대로 가끔씩이나마 만나줄 것 같나요? 그럼 어디 날 강간하고 죽여봐요. 미안하지만, 당신 예상과는 아주 다를걸요? 100원 걸도록 하죠. 당신은 그저 강간 살인죄로 평생을 감옥에서 썩게 될 테니까. 절대로 당신을 바라봐주지 않을 위야를 평생 그리워하면서 말이죠. 그러고 보니 감옥엔 동성애자들이 득실거린다죠? 짐승에겐 딱 좋을 지옥이로군요. 역시 아주 잘 어울려요. 더할 나위 없이 짐승다운 결말이로군요.”

“…….”

온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가뜩이나 가쁜 호흡은 금방이라도 숨통을 틀어막을 기세였다. 더 이상은 바닥에 엎드려 있을 수가 없어서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서슬 퍼런 동공이 형형하게 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여신이 웃으니 아름다움을 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위압적이었다. 시시각각 심장을 찔러댄 말의 비수만큼이나 무시무시한 독기였다. 떨리는 것이 당연했다. 숨을 쉬기 힘든 것도 당연했다. 정면에서 고스란히 그 독기를 맞고 있자니 가뜩이나 만신창이인 몸이 제대로 견뎌낼 턱이 없었다. 마음의 평화라고? 더 이상 그녀가 두렵지 않다고? 스스로의 안일함에 코웃음이 일 지경이었다.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세운 뒤 도망치듯 그녀의 방을 빠져나왔다. 작전상 후퇴였다. 아니, 완벽한 참패였다. 만신창이로 상처 입은 넋이 빈사의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우선 도망쳐야 했다. 부탁이고 뭐고, 그냥 그 자리에서 죽을 것 같았다. 아니, 그녀도 죽이고 자신도 죽일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게 그녀의 바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죽어 연인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 테지만, 자신은 그야말로 짐승다운 개죽음이었으므로 그녀로선 별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으리라. 아니, 아니. 실은 죽음조차도 각오한 격렬한 증오의 철퇴였으리라. 죽어도 자신의 부탁 따윈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그녀 나름대로의 대답이었으리라.

가까스로 아래층까지 내려와 휑하니 빈 거실 바닥에 몸을 부렸다. 엎드리듯 주저앉았다가 이내 완전히 드러누웠다. 경기라도 들린 듯 심하게 떨리는 몸을 내팽개친 채 그저 숨을 쉬는 일에만 몰두했다. 안 그러면 당장이라도 호흡이 멈출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문득 눈앞이 까매졌다. 두어 시간이 흐른 후 깨어나고 나서야 자신이 기절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몸은 여전히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이번엔 추위 때문이었다. 집 안의 보일러는 켜진 상태였지만, 늦가을로 접어든 산중의 밤은 이불 없이 잠들기엔 무리가 있었다. 자각이 들자 그녀가 걱정되었다. 그녀 또한 얇은 원피스에 카디건 한 장으로 산중의 밤을 견디고 있을 터였다. 시계를 살피니 9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나마 마음이 조금이라도 진정된 것이 다행이었다. 그녀의 독기로 심장이 입은 상처는 여전했지만, 그녀를 대하기 힘들 만큼의 동요는 더 이상 일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운 뒤 다시 2층으로 갔다. 다시 던져버릴 걸 대비해서 싱크대를 뒤져 일회용 접시들로만 쟁반을 채웠다. 그녀는 두어 시간 전과 다름없이 침대 옆 소파에 여왕처럼 앉아 있었다. 차라리 침대에 누워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절로 걱정스러운 한숨이 나왔다. 표정 또한 여전한 독기로 시퍼랬지만 그래봤자 그녀도 가녀린 여인의 몸이었다. 게다가 임신까지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저녁 드시고 일단 오늘 밤은 주무시도록 하세요.”

그녀의 앞에 쟁반을 부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되돌아온 대꾸는 그저 싸늘한 비웃음이었다. 다시금 떨리기 시작하려는 사지를 간신히 억누르며 방을 나섰다. 꼬락서니 하곤. 여전히 도망치는 개였다.

산중의 밤은 길었다.

악몽과 혼절과 비몽사몽을 교대로 오가며 열 시간을 버틴 끝에 간신히 날이 밝았다. 아침 6시 50분이었다. 희뿌연 박명에 의지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여전히 의자에 앉은 자세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의 충혈된 눈이 잠시 이쪽을 노려보았다. 아예 잠을 자지 않은 것처럼도 느껴졌고, 아니면 잠시 눈을 붙인 것처럼도 보였다. 물론 제대로 잠이 올 턱은 없으니 분명 자신만큼 악몽 속을 오가며 잠을 설쳤을 것 같았다. 아니, 세상 누구보다도 강철 같은 의지력을 자랑할 것 같은 사람이니 악몽 따윈 전혀 꾸지 않았을지도. 자신을 있는 힘껏 짓밟고 때리는 길몽이라도 꾸었을지 그 누가 알랴.

그녀 앞에 놓아둔 쟁반은 놓고 내려올 때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음식엔 손도 안 댄 것이다. 별로 놀라진 않았다. 어제의(아니, 오늘까지도인가?) 서슬 퍼런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신 거였으면 합니다. 어디 힘들진 않아요?”

조심스레 묻자 되돌아온 대꾸는 냉랭한 무표정이었다. 처음 들어섰을 때의 독기 어린 주시가 무색하게, 자신 쪽으로는 일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잠자코 쟁반을 거둬들인 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냉장고를 뒤져 가벼운 유동식 종류로 메뉴를 달리해 레인지에 데웠다. 배에서 꾸르륵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점심때 엄마가 준 죽 한 그릇 이래로 목으로 넘긴 음식이라곤 주스 한 잔이 다였다. 속이 쓰리다는 느낌뿐, 식욕은 일지 않았다. 지난 4월 이래 거의 늘 변함없는 증상이었기에 대수롭지도 않았다. 싱크대 위에 데운 음식을 늘어놓고 억지로 몇 모금 주워 먹었다. 무슨 죽인지는 알 수도, 알 생각도 없었다. 맛을 구별하는 능력조차 사라져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그저 먹어야 움직일 기운을 낼 수 있으니 먹는 것뿐이었다. 몸도, 정신도 강건할 그녀는 음식으로도 시위를 할 수 있는 모양이지만, 이미 만신창이인 몸의 입장에서 그건 사치일 따름이었다.

남은 유동식을 다른 그릇에 담고 다른 몇 가지 반찬도 함께 데워 쟁반에 담았다. 2층 계단을 오르며 부디 이번만은 제발 먹어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원했다.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무시하는 그녀의 발치에 쟁반을 내려놓고 방을 나왔다. 거실로 내려와 바닥에 누워 다시 비몽사몽인 현실과 악몽 속을 오갔다.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어제 오후 집을 나설 무렵 품었던 ‘희망’의 불씨가 서서히 꺼져가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쉬이 단념할 생각은 없었다. 점심때쯤 다시 한 번 빌어볼 요량이었다. 상상했던 이상으로 그녀는 자신을 끔찍하게 증오하고 있었다. 조금쯤은 자신을 동정해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야말로 동상이몽이었구나 하고 실소만 흘러나왔다. 휘요오오오. 휘요오오. 산허리에서 불어대는 바람 소리가 창문 틈을 비집고 요란스레 전해졌다. 흡사 귀곡성처럼 섬뜩하고 을씨년스럽게 들렸다. 거실 안으로 비쳐드는 햇빛은 그저 따사롭기만 한데, 일단 문 밖을 나서면 바싹 다가든 겨울의 자취가 느껴질 것만 같았다. 그녀 같다는 야박한 평가도 흘렸다. 겉은 햇빛처럼 따사롭고 아름다운데, 속은 귀신처럼 서늘하고 혹독하기 그지없다고.

시계를 봤다. 1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이번엔 제법 건더기가 보이는 즉석 봉지를 하나 꺼내 레인지에 데웠다. 쟁반에 담고 물과 수저도 꼼꼼히 챙긴 뒤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였다. 설마 내내 저 소파에만 앉아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무리 여신 같은 그녀지만 화장실이라도 갈 게 아닌가. 속으로 철렁했으면서도 이내 스스로를 위로하는 인환이었다. 역시 시위가 분명했다. 볼 때마다 소파에 여왕처럼 꼿꼿하게 앉아 있는 것도 그렇고, 음식에 절대 손을 안 대는 것도 그러했다. 물조차도 마시지 않는 걸까 싶어 조마조마해서 확인하니 다행히 물 컵은 반쯤 비어 있었다.

쟁반을 새로 가져온 쟁반과 자리바꿈을 해서 그녀 앞에 놓은 뒤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시 한 번 이마를 바닥에 대고 두 손을 모았다. 그녀에게 주눅 들기에도 지쳤는지 방에만 들어서면 떨리곤 하던 몸은 어째 잠잠했다. 제대로 잘 빌어보라는 신의 계시인 것만 같아, 다시금 빈사의 ‘희망’이 고개를 불쑥 치켜들었다. 하느님. 하느님, 부디, 제발……. 그녀의 노예가 돼도 좋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녀가 허락만 해준다면. 연인에게, 가끔씩 자신을 만나도 더 이상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주기만 한다면. 그래서 다시금 연인의 얼굴을 볼 수 있게만 해준다면. 자신이 제대로 숨 쉴 수 있게만 해준다면. 노예뿐인가. 생명의 은인으로 평생을 받들리라고, 정말로 여신처럼 그녀를 위해 헌신하리라고, 진심을 다해 기원했다.

줄기차게 외면만 하던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확실히 오체투지를 하는 절실한 자세만큼은 그녀의 호기심을 끄는 듯싶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허락해주세요, 신애 씨.”

“…….”

“……석 달에 한 번도 좋고, 6개월에 한 번도 좋아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그에게 무언가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얼굴만 보고 약간의 대화만 할 수 있으면 돼요. 약속할게요. 다른 수작 따윈 절대 부리지 않아요. 그저 가끔 그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전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사람 하나…… 아니, 신애 씨 말대로 그저 불쌍한 짐승 하나 살린다 생각하시고 제발 허락해주세요. 제발 허락해주세요, 신애 씨.”

“포기해요.”

흠칫. 머리 위에서 여신의 담담한 일갈이 떨어졌다. 어제처럼 독기와 증오가 형형한 시퍼런 어조가 아니었다. 많이 누그러진, 아니, 뭔가 여유까지 느껴지는 평온한 목소리였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가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은 없어요. 절대로. 그러니 당신이 포기하세요.”

“……신애 씨…….”

고개를 들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제처럼 웃고 있었다. 어제 같은 독기는 사라졌으되, 그 이상으로 철벽처럼 단단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 표정만큼이나 단단한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까맣게 변하며 현기증이 일었다. 또다시 숨이 막히는 듯한 호흡 곤란 증세가 느껴졌다. 더는 그녀를 직시할 수가 없어 다시금 바닥에 얼굴을 들이댔다. 몸까지 한없이 까라지는 통에 제대로 엎드린 자세를 유지할 수조차 없었다. 주르륵 허물어진 몸이 옆으로 드러눕듯이 가까스로 엎드린 자세 비슷한 것을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온몸이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솟아올랐다. 입가가 축축해졌다. 옆으로 기울어진 고개 탓에 침이 흘러나온 때문이었다. 숨이 막혔다. 죽을 것 같았다. 당장 죽을 것 같았다. 아니, 당장 그녀를 죽이고픈 것인지도 몰랐다.

“죽어도 안 돼요. 절대로 허락 안 합니다. 위야는 내 거예요. 아직도 몰라요? 여기 배 속에는 우리의 아이까지 들어 있어요. 더러운 소돔의 짐승 따윈 절대로 품을 수 없는 성스러운 생명체죠. 그래요.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위야가 송두리째 내 것이라는 증거이기도 하죠. 그러니 당신이 포기하세요. 난 우리 위야의 털끝 하나도 양보 못 해요. 당신의 더러운 시선이 우리 위야를 훑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거든요. 당신의 더러운 목소리와 말을 섞는 위야를 상상하기만 해도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 같거든요. 이해하시겠어요?”

“…….”

“……포기해!! 그만 포기하시지, 이 추악하고 더러운 소돔의 짐승아!!!”

“…….”

딱딱딱딱. 어디서 이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자신이 내는 소리라는 것을 설핏 자각하며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휘요오오오. 휘요오오.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귀곡성처럼 음산한 바람 소리였다.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막연한 짐작대로 방 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살피니 수갑 열쇠를 포함한 집 열쇠 꾸러미가 없었다. 여신이 범인이리라. 별로 놀랍지도, 절망스럽지도 않았다. 기절하기 직전, 절망 또한 이미 예감한 바였다. 절망이 준 충격을 감당 못 해 기절한 것이니 말해 무엇 하랴.

사시나무 떨듯 부들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웠다. 얼마 동안 기절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창문으로 비쳐드는 햇빛을 통해 그리 오랜 시간 기절하지는 않은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뭐, 그녀도 사라진 마당에 이제 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제대로 설 기력도 없어서 엉금엉금 기다시피 아래층으로 향했다. 휑하니 빈 거실 또한 그저 햇빛과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십여 미터쯤 떨어진 마당 정면으로 차가 보였다. 허름한 모양새의 흰색 소나타였다. 그 바로 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인영은 그저 환각이려니 했다. 하늘거리는 꽃무늬 원피스도, 살구색 니트 카디건도 마냥 환영이려니 싶었다. 아니, 환영이어야만 했다. 왜냐면, 그 모든 환영들의 옆엔 새빨간 핏자국의 환영 또한 낭자했기 때문이었다. 불길한 붉은색이었다. 불길함은 꽃무늬 원피스 자락을 흠씬 적시고도 그 바로 아래 쌓인 낙엽 더미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휘요오오오오. 휘요오오. 산등성이로부터 굽이치는 칼바람이 사방으로 귀곡성을 흘려대고 있었다. 순간순간 숨을 틀어막는 무시무시한 칼바람이었다. 하늘이 소름 끼치도록 맑고 푸르렀다. 햇빛 또한 마냥 호사스럽고 찬란하기만 했다. 너무나 눈이 부셔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가을이었다. 이별하기엔 여전히 너무나 예쁜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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