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2003년 9월. 문위(文偉)
왜 하필 지금인가? 원망이 골수염처럼 뼛속 깊이 사무쳤다. 몸속 깊은 곳에서 시퍼런 살기가 잉크 얼룩처럼 창백하게 번져간다. 죽이고 싶다. 찢어발기고 싶다, 저 여자를. 뚝뚝. 증오가 피처럼 떨어진다. 어불성설이다. 이 순간, 증오를 흘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저 여자다. 양신애. 6년이란 제법 긴 시간 동안 자신의 호적에 들어 있던 여자. 자신의 아내, 아니, 아내였던 여자. 그러나 단 한순간도 자신의 사랑인 적이 없었던 여자. 저 여자야말로 증오할 권리가 있다. 혐오감과 공포로 치를 떨 자격이 있다. 교활한 거짓말쟁이이자 사랑 사기꾼이었던 자신이 아니라.
“……오랜만이야.”
등 뒤로 숨긴 자신의 소중한 것이 와들와들 온몸을 떨고 있다. 손목을 꽉 틀어쥔 손바닥의 살갗을 타고 덫에 걸린 사냥감처럼 질겁한 동요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공포와 죄책감과 충격으로 소중한 내 것은 지금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채 견디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 잠시 품었던 양심은 이내 독기와 경계심으로 되돌아온다. 안 되지. 이제 와 양심을 떠올려봤자 뭐 어쩌라고. 이미 짐승이 되기로 한 마당에. 시체를 파먹고 사는 송장벌레 주제에 무슨. 지켜야 할 단 한 존재만을 뇌리에 새긴다. 오로지 단 한곳, 필사적으로 집중을 해야만 간신히 지켜낼 수 있을 자신의 소중한 숨구멍에만 오체투지를 한다. 아무렴. 양심 따윈 사치가 된 지 오래가 아니냐.
“국내에 머물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 뉴욕엔 언제 돌아가지?”
들끓는 속내라곤 단 한 치도 드러나지 않는, 평온하게 떨어지는 어조가 썩 마음에 든다. 달갑지 않으니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그렇게, 눈으로는 진심을 얘기한다. 서슬이 형형하던 여자의 눈빛에서 힘이 사라지고 일순 나약한 고통이 일렁이는 걸 보니 확실히 적절한 대응이었던 것 같다.
“……얘……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이미 끝난 사이에 더 할 얘기가 남기라도 했나?”
“…….”
“그간 서로간의 안부라면 관심 없어. 당신도 알잖나. 난 보수적인 남자라 이혼한 전처와 살갑게 지낼 만큼 화통한 주변머린 갖지 못했거든.”
“……얘기해. 저…… 저 사람…… 저 사람에 대해서…… 해, 해명을 들어야겠어, 난.”
“다시 한 번 말해줘야 하나? 우린 깨끗이 끝난 사이야. 확실히 알아둬. 당신에게 할 말도 없지만 해명해야 할 말은 더더욱 없어.”
“…….”
기가 막힌가? 화가 나? 근 8년 동안이나 감쪽같이 널 속여왔던 내가 끔찍해? 그래서 뭘 어쩌라고? 이제 와 뭘 어쩔 건데? 싸움이라도 걸어볼 요량인가? 설마. 네가 날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담담하고 무심한 시선으로 태연히 쐐기를 박는다. 자신이 찌른 비수에 심장을 정통으로 꿰뚫린 채 피를 철철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여자가 보인다. 어쩌면 이 달갑잖은 재회의 순간, 내 소중한 존재 못지않게 깊은 상처를 받았을 가여운 여자. 가엾다고? 천만에. 느끼지 못해. 느낄 수가 없어. 타인의 아픔 따위. 상처 따위가 뭐 그리 대수라고. 내 것이 위험해. 내 소중한 것에 치명적인 발톱을 들이댈지 몰라. 타인에게 동정심 따윌 들이댈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나?
인생을 망친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연인과 자신의 인생 못지않게 여자의 젊음을 황폐화시킨 이는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이었다. 아니, 눈앞의 여자야말로 세 사람 중 최고의 피해자일 터였다. 거짓 사랑에 속아 넘어갔다는 점 외엔 죄는커녕 아무런 잘못조차 찾아낼 수 없이 무구한 피해자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원망할 수도 있는가? 죄책감을 떠올리게 왜 나타났느냐고, 이제 서로 간에 부채는 없지 않느냐고, 왜 또 우리의 인생에 끼어들어 방해를 하려 하느냐고, 뻔뻔스레 원망을 물을 수가 있을까? 물론, 어불성설이다. 벼룩이도 낯짝이 있지. 그럼에도, 여자를 향한 피 같은 살심을 누르기가 힘겹다. 혹여 자신의 것에 손을 댈까, 둥지를 침범당한 상처 입은 맹수처럼 잔뜩 털을 곧추세운다. 간신히 다시 찾은 평화 같은데, 어슴푸레하게나마 희망이 보이고 있는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이제 와 또 나타나나. 상처 주지 마. 더 이상 상처를 주면 가만두지 않아. 이미 끝난 사이야. 지옥이야. 지옥에서 6년을 살았어, 나도.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니? 그만하면 충분히 벌을 받은 게 아닌가? 아니, 충분하지 않아도 좋아. 죽을 때까지 속죄해도 용서될 수 없는 죄라면, 그래, 좋다. 죽어서라도 가져가마. 네게 범한 죄는 내가 죽어서 갚을게. 그러니 더 이상은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우리 사이에 끼어들려 하지 마. 그를 괴롭히지 마. 상처 주지 마. 가만두지 않아. 손가락 하나라도 다치게 하면 가만 안 둬. 그게 누구라도 상관없어. 너라도 용서하지 않아. 부숴버릴 거야. 속죄는커녕 완전히 부숴버릴 거야, 이제야말로.
“……아니, 넌 내게 해명해야 해. 이대로…… 이, 이대로 그냥 넘어가지는 않아. 겁 안 나. 이제 난 네가 조금도 무섭지 않아. 거짓말쟁이 사기꾼 호모 자식한테 거리낄 게 뭐가 있겠니? 사람을 사랑한 줄 알았더니 짐승이라는데? 발광한 호모 스토커랑 똑같은 짐승이라는데?”
“…….”
“……어, 언제부터니? 언제부터 짐승이 됐니? 설마 처음부턴 아니겠지? 날 사랑하긴 한 거니? 사랑했었다던 게 정말이긴 해?”
“…….”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 설마 지난 6년간의 실체가 이런 지랄 같은 거였으리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어. 망했어. 다 망했어. 이게 뭐야. 대체 이게 다 뭐야. 끔찍해. 더러워. 더러운 자식들. 니들이…… 아니, 네가 지금 내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나 있니? 응? 그래, 이 더러운 사기꾼아……?”
“…….”
“……너야말로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다 잃어버린 여자가 얼마나 그악스러워질 수 있는지 말야. 괜찮다면 지금 당장 증명해 보일 수도 있어. 어때, 허니? 여기서 증명해 보일까?”
“…….”
“……그…… 래? 그, 그렇단 말이지……? 과연! 과연 대단해! 역시 대단한 배짱의 전 남편 씨야. 아니, 배짱은커녕 짐승 새끼의 뻔뻔함이라고 해야겠지.”
“…….”
“기가 막혀…… 정말 웃기네……. 하지만 저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까? 네 뒤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는 저 사람 말이야. 그도 너만큼 뻔뻔함이 하늘을 찌를까? 맙소사, 가증스럽군. 상처 입은 척, 연약한 피해자인 척, 눈치를 살피며 울먹이는 품새가 웬만한 청승 가련 여자는 저리가라야. 구역질나는 위선자. 소돔의 짐승!”
“닥쳐.”
“……위…… 위야……!”
나지막한 일갈과 함께 여자에게 한 발 다가섰을 뿐인데 신음처럼 가느다란 애원이 발길을 잡는다. 살기를 느꼈는지, 여자 옆에 서 있던 마른 몸집의 해사한 사내가 여자의 앞을 막아서며 시선을 가로챘다. 사내의 콧등과 이마를 수북이 덮은 땀방울들이 보였다.
“……두, 두 사람 다 그만 진정들 하시지요. 신애 씨, 시선이 많아요. 목소리를 낮추는 게 좋겠어요. 맙소사, 저기 아는 기자 얼굴도 보이네요! 그리고…… 신애 씨 전남편 되신다고요? 제가 끼어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두 분 모두를 위해서도 자리를 옮겨 말씀 나누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남자의 어깨 너머로 시퍼런 독기를 날리며 벌벌 떨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여자 너머로는 기왕에 자신들을 향했던 무수한 익명의 시선들이 촘촘히 들어와 박히고 있었다. 창백하다 못해 백짓장처럼 변한 여자의 낯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 여자는 이미 /증명/을 시작하고 있었다. 수라장이었다. 쓴웃음이 일었다. 내 것을 향한 여자의 모욕적 언사에 순간적으로 치솟았던 격분을 쩔쩔매는 사내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겨우 누그러뜨렸다. 사내의 얼빠진 표정은 애먼 수라장 한가운데에 휘말린 당혹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기억에 없는 사내지만, 여자처럼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여자의 오케스트라 동료 같았다.
“……위…… 야…… 위…… 위야…….”
가부러지는 신음 소리가 다시 한 번 일체의 동작을 정지시켰다. 거칠기만 한 중년 남자의 손가락이 필사적으로 자신의 셔츠 허리춤을 움켜쥔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마치 구명줄이라도 된다는 듯이. 공명하듯, 자신의 명치께로 서늘한 한기가 스쳐갔다. 여자의 완강한 저항은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고 새삼 수라장을 수치스러워할 체면 따위도 없었지만, 가장 두려워하는 일에 대한 불안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분노를 넘어 광기마저 드러내 보이는 여자였다. 말 그대로 다 잃어버린 막다른 여자의 광기가, 자신의 소중한 것에게 얼마만큼의 폐해를 입힐지 가늠은 전혀 불가능했다. 당장 기싸움을 벌일 계제가 아니었다. 아킬레스건을 함께 품은 채 적과의 전투에 돌입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거리도 없을 것이다.
“……차에 가 기다리고 있어.”
한쪽 어깨 위에 걸쳐두었던 재킷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소중한 것에게 건넸다. 받아 쥘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그의 재킷 안주머니에 키를 집어넣고 시선을 맞췄다. 최대한 살기를 누그러뜨린 평온한 눈빛을 가장했지만,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전해진 것 같지는 않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순간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멍해 보였다.
“차에 가 있어. 나도 금방 갈 테니까.”
“…….”
“쓸데없이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차로 가.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저쪽에 있어. 어서 가.”
“…….”
“인환아.”
“…….”
“장인환!”
자신의 손에 잡혀 있던 오른 손목과 자신의 허리춤을 움켜쥐고 있던 나머지 왼손을 한꺼번에 모아 쥔 채, 자신이 들고 있던 공연 팸플릿까지 쥐여주는데도 넋 나간 표정은 여전했다. 양쪽 어깨를 강하게 움켜쥔 채 거듭거듭 사나운 일갈을 던지자, 자신의 소중한 것은 그제야 휘청거리듯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자의 독기 어린 시선이 내내 그 뒤를 따랐지만, 다행히 여자는 그마저 자신의 거미줄 안에 붙잡아두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적어도 지금 현재는 그래 보였다. 여자의 옆에서 패기 없는 기사처럼 눈치를 보고 있던 사내에게 힐끗 따라오란 눈길을 던지고 먼저 건물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다리라고는 했지만 기분 좋은 데이트는 이미 물 건너간 게 틀림없었다. 주저 않고 홍 기사에게 전화를 넣자, 마침 집 방향 전철을 기다리고 있노라 대답이 왔다.
“죄송하지만 다시 주차장으로 와주시겠습니까? 차 안에 그 사람이 있을 거예요. 좀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뇨. 별로 심각한 건 아닙니다. 그래도 상태가 괜찮은지 눈여겨 살펴주시고,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자신의 어두운 기색을 금세 알아차린 홍 기사는 연이은 질문 대신 짧게 대답했고, 무슨 일이 있으면 지체 없이 연락을 드리겠다는 다짐도 주었다.
폴더를 닫고 뒤를 확인하니 여자가 부축하듯 따라오던 사내를 건물 안으로 되돌려 보내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지만 그리 절실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확실히 핑크빛 관계는 아닌 듯했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전투 장소를 가늠했다. 고만고만한 고층 건물들 사이로 카페나 레스토랑, 혹은 호프집 비슷한 간판들 서넛이 시야를 스쳐갔다. 개중 가장 조용할 것 같은 퓨전 레스토랑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다시금 여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때, 사내는 이미 아트센터 건물 안으로 사라진 후였다.
빤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의 창백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처음의 흥분 상태에선 어지간히 벗어났는지 여자의 떨림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눈짓을 주자 여자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여자가 가까이 다가설수록 낯선 무덤으로부터 걸어 나오고 있는 좀비를 마중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지독한 혐오감이 일었다. 여자의 옷차림은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익숙했다. 여자가 주로 선호하는 스타일은 우아하고 단아한 투피스, 혹은 요정처럼 하늘거리는 원피스. 색상은 밝은 크림색이거나 순백의 화이트. 가끔씩은 연둣빛. 늘 아름답고 날씬했으며 고혹적이었던 여자 그대로였다. 연약하고 새치름한 공주처럼 여성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는 여자의 자태는 수컷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꿈꿔봄직한 이상적인 여자 그 자체였다. 화려한 외모와 달리 수줍어하는 듯한 내성적인 눈빛에서 감지되는 것은 웬만한 사내 못지않을 만만치 않은 강단과 고집스러운 성정이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도 그리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손안에 쥐면 혹여 자국이라도 남을까 싶은 투명한 피부도 익숙했고, 그를 감싼 정숙하면서도 육감적인 이중적 분위기도 익숙했다. 그렇게 여자의 모든 것이 익숙하기만 한데, 익숙한 그만큼 내장을 들쑤시는 혐오의 감정은 낯설기만 하다. 목울대에 걸러진 채 번번이 아래로 되삼켜지는 것은 지릿한 토기였다.
이상했다. 지난 6년간, 그토록 정분이 생기게 되길 원하던 여자였다. 그저 가족 같은 애정만이라도 쌓이게 된다면, 지옥의 나날에 그나마 조금은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아서.
결혼 초기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는 쉬이 몸을 섞기도 했었다. 그것이 한 달에 두어 번꼴로 뜸해지는 데는 채 6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마침내 3년째로 접어들었을 무렵엔 아무리 기를 써도 아내라는 여자를 상대로는 발기가 되지 않았다. 아내를 품을 수 없게 된 백색의 결혼 생활은 그 후로도 3년을 더 끌며 자신을 담금질하게 되지만, 이별의 순간만큼은 저 생지옥의 6년을 고스란히 상쇄시켜주고도 남을, 홀가분한 자유이자 푸릇한 희망의 싹이 돼주었었다. 고마웠었다. 자신 못지않게 그토록 고통스러워했음에도, 모든 집착을 끊고 마침내 사슬을 풀어준 아내가 너무나 고마웠었다……. 이상도 하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던 순간엔 마치 구원의 여신처럼 보이던 존재가 이토록이나 끔찍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니. 철저하게 이기적인 짐승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 파렴치한이나 품을 법한 배은망덕이리라.
시선이 마주쳤다. 여자의 바늘 끝처럼 날선 눈빛이 물기를 품은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초가을, 맑고 눈부신 오후의 햇살조차 저 눈에 담긴 음험한 살기를 누그러뜨리진 못하고 있었다. 풀어야 할 매듭이었다. 역시 공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꽁꽁 숨겨두었던 속내를 평생 들키지 않은 채 자연스레 남남으로 멀어졌다면 물론 그 이상의 행운은 없었겠지만, 자신이 누군가. 평생 운이라곤 단 1퍼센트도 따라주지 않는 지독히도 박복한 인간이 바로 자신이 아닌가. 기왕에 풀어야 할 매듭이고 기왕에 대적해야만할 적이라면, 서로 원 없이 물어뜯는 것도 좋은 전투 방법이리라. 여자가 발톱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적어도 죄책감이라는 일말의 양심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은 없게 될 테니까. 아무렴. 일단 전투에 임하게 되면 질 생각이란 손톱만큼도 없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게 되더라도 다시 찾은 자신의 목숨줄만은 기를 쓰고 지켜낼 요량이었다. 설령 여자의 자아와 자존심을 송두리째 끝장내버릴 만큼 여자에게 심각한 대미지를 입히게 되더라도, 정당방위라는 알리바이를 내 소중한 것에게 들이댈 수가 있게 될 테니까. 물론. 스스로를 향해서는 그따위 알량한 자기변명조차도 필요가 없게 될 테지만.
여자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넘기며 시계를 살폈다. 3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연인과 함께 관람하기로 했던 발레 공연은 잠시 후면 막이 오른다. 아쉬웠다. 꿈같을 첫 데이트를 결국 망쳐버리고 말다니. 젠장.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왜 하필이면. 구더기처럼 들끓는 시커먼 원망을 망설임 없이 풀어헤쳤다.
레스토랑 문을 밀치고 들어서며 무심코 건너다본 하늘은 시리도록 맑고 파랬다. 배 속을 징징 울리는 살기를 가까스로 갈무리한 후, 막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는 여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위해서였다.
가면의 시간이었다.
어차피 여자도 조만간 눈치를 채긴 할 테지만, 최대한 시간을 끈 그럴싸한 연기는 그만큼 더한 치욕으로 여자를 난도질하게 되리라.
난도질하고 싶었다.
거리낄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