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2003년 9월. 장인환(張仁歡) (84/129)

34. 2003년 9월. 장인환(張仁歡)

피를 말리는 듯한 두 시간에 가까운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차로 되돌아와준 것은 그가 아닌 휴대전화 벨소리였다. 그것도, 인환의 것이 아닌 홍 기사의 휴대전화 벨소리. 

“……저, 사장님께서 댁으로 모시랍니다, 선생님.”

뻣뻣하게 굳어버린 듯한 고개를 가까스로 들어 백미러 속 홍 기사와 시선을 맞췄다. 말을 하지 않아도 불온한 기운을 읽어버린 홍 기사는 한 시간쯤은 차 밖에서, 나머지 10분쯤은 담배를 피우느라 1층 주차장 입구 앞에서, 나머지 30∼40분은 차 안 운전석에 앉아 인환과 함께 조용히 시간을 흘려주었었다. 사막처럼 버석하게 타들어가는 시간 고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금방 돌아오겠다던 그의 서늘한 일갈을 반신반의하긴 했어도, 막상 홍 기사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전언은 그나마 빈사 상태로 비척거리던 중인 인환의 기력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말았다.

“……아무래도 많이 늦어지겠다고 하시네요. 더 기다리지 말고 댁으로 모시라고요.”

“…….”

“……저…… 좀 이르긴 하지만 어디서 식사라도 하시고 들어가시겠습니까? 아주머니도 벌써 퇴근하셨을 텐데…….”

“…….”

“……선생님?”

“…….”

“……장 선생님, 괜찮으세요?”

“…….”

대꾸할 기력이 없어 가만히 고개를 흔들기만 하자, 조심스레 인환을 살피던 홍 기사의 표정에 걱정스러운 그늘이 비쳤다.

“……얼굴빛이 무척 안 좋으세요. 정말 괜찮으십니까?”

“…….”

“……버려져…….”

“예?”

“……그가 그녀를 만나기만 하면 나는 버려져…… 항상…….”

“……?”

“……항…… 상…… 늘 그랬어…… 그렇게 되곤 했어…….”

“……선생님?”

“……집…… 으로 가요…….”

“……선…….”

“……괜찮으니까 그냥 집에 데려다주세요, 홍 기사.”

흐릿하게 웃음을 보이자, 홍 기사가 연신 백미러를 살피며 차를 출발시켰다. 입술만 겨우 말아 올린 불길한 미소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홍 기사의 시선이 전방을 향하는 즉시 얼어붙더니, 이내 우는 것처럼 잔뜩 일그러졌다. 자신의 얼굴인데도 마주 보기가 힘들 지경으로 끔찍한 몰골이었다. 도망치듯 차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왈칵 밀어닥친 어지럼증에 인환은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적어도 기절하는 꼬락서니만은 면했으니, 그만하면 자축할 일이었다. 이제쯤 꿈에서 깨어나라는 자비로운 신의 계시인지도 모르니 그 역시 감사할 일이었다. 아무렴, 아직은 견딜 수 있다. 어차피 깰 꿈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깨어나는 게 완전한 몰락을 방지하는 유일한 길일 터이다. 그러니 기운을 내자. 다시 기운을 내자. 아직은 견딜 수 있다. 꿈에서 깨어나는 즉시 온몸이 부서져 가루가 돼버릴 거라고 상상했는데, 막상 닥치고 나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않은가? 자신은 여전히 평온한 숨을 내쉬고 있고, 몸뚱이 어딘가 부러지거나 뜯겨나간 곳도 없고, 지랄 발광하지도 않는다. 에라이, 이놈의 질긴 목숨줄이라니.

감은 눈꺼풀 사이로 파고드는 햇빛이 인정사정없이 밝기만 하다. 일몰이 오려면 두서너 시간은 족히 지나야 하리라. 해가 떨어지면 고대하던 밤이 찾아오겠지. 부끄러움을 잊을 수 있는 밤. 어두운 죄악을 아늑하게 숨겨주는 망각의 축축하고 우아한 그늘. 밤은 죄인의 시간이었다. 빨리 밤이 됐으면 좋겠는데. 아아, 물론 밤이 돼도 그를 기다리진 않겠다. /않아야만/ 한다. 꿈은 깨라고 꾸는 거니깐. 언제부터였던가. 다시금 그를 기다리기 시작했던 게. 다시금 심장이 뛰곤 했던 순간이. 글쎄, 꿈을 꾼 것뿐이라니깐…….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를 내오겠다는 둥 식사를 준비하겠다는 둥, 분주하게 곁을 맴도는 홍 기사를 혼자 있고 싶다고 간신히 달래 퇴근시켰다. 애초의 쇼크는 가라앉았고, 조금쯤 핏기가 살아난 낯빛이 그럭저럭 괜찮게 보인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늦게라도 식사 꼭 챙기셔야 합니다’를 연발하던 홍 기사의 기척이 마침내 사라지자, 잔뜩 멋을 부린 차림새를 해제하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는 동안 갈급해진 허기와 갈증은 우유 한 잔으로 대신했다. 새하얀 우유를 닮은 여신의 우아한 투피스가 잠시 떠올랐으나 이내 의식 밖으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지게끔 했을 것이다. 늘 교활하고 이기적이기만 한 자기보호 본능이란 것이.

샤워를 마치고 나니 7시 반. 그토록 기다리던 일몰이 마침내 집 안으로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바스 가운 차림 그대로 빈 우유팩이 놓인 식탁 옆에 우두커니 선 채 한참 동안 창 밖의 일몰을 반겨주었다. 언젠간 그도 돌아올 테지만, 불조차 켜고 싶지 않았다. TV 리모컨을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는다. 잠이라도 오면 참 좋을 텐데. 버석거리는 피로가 온몸의 수분을 바짝 말리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신경은 칼끝처럼 살아 있다.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하릴 없이 거실 안을 어슬렁거린다. 거무스름한 땅거미 속으로 천천히 함몰돼가는 거실의 인테리어는 아직도 많이 낯설다. 마이웨딩 특집호 커버 사진처럼 화사하게 꾸며진 방. 꿈인지 현실인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자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곤 하는 이상야릇한 풍경. 보기 싫어. 꿈꾸고 싶지 않아. 더 이상 꿈꾸지 않아. 아니, 아니. 사실은 꾸고 싶어. 아직 충분히 꿈을 꾸지 못했어. 아직. 아직 조금만 더. 더 꾸게 해줬으면 좋겠어. 솔직히 말하면 그래.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아. 지금 내가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담? 다 거짓말이야. 꿈이고 뭐고 다 피곤해. 피곤해 죽겠어. 꿈은 단 한 개도 꾸지 않고 마냥 죽은 것처럼 잠이나 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역시 잠은 조금도 오지 않는다.

망각의 술책으로는 잠 다음으로 직방인 그림 작업을 해볼까 2층 아틀리에로 발걸음을 했다가 그도 몇 분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침을 떼봐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는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이었다. 스스로에게 더 정직해져야 하겠다. 안 그랬다간 계단을 걷다가 깜빡 정신을 놓는 나머지 크게 다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정말로 다칠 뻔했다. 좀 전에도.

던져버린 TV 리모컨을 찾아들고 다시 TV를 켰다. TV 화면에서 방출되는 창백한 빛에 거실의 어둠이 파도처럼 깊게 출렁거렸다. 앤틱한 모양새의 커다란 소파에 몸을 묻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리저리 채널을 바꾸는 단순한 동작도 힘에 부쳐, 마지막 기착지인 어느 오락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한 채 하염없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신경을 집중하려 애를 쓴 것 같긴 한데 홀연 정신을 차리고 보면 MC며 리포터들이 하는 말들은 전후 맥락이 끊겨 있었다. 일몰이 깊어지고, 사위가 점점 더 축축하고 음험해질수록 TV 화면 역시 홀로 아득해졌다.

꿈인지 현실인지, 아련하게 멀어진 세상 속에서 홀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꿈속인 걸까? 유영하듯 천천히 상반신을 틀고서 현관 쪽으로 시선을 모아본다. 훤칠하게 큰 실루엣이 어둠보다 더 어둡게 시야를 어룽거렸다. 그가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실은 돌아온 꿈을 꾸고 있는 중일 것이다…….

“……뭐하고 있어. 불도 안 켜고……?”

감미롭고 다정한 울림.

축축한 어둠 한가운데, 타르처럼 형형하게 반짝이는 검은 눈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인환의 시선을 정확히 잡아내고 있었다. 열렬한 시선과, 이젠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그의 반토막 말이 밀어처럼 가슴을 간질거리게 했다.

아, 다행이다……. 아직은 더 꿈을 꿔도 되는 건가 보다. 그를 기다려도 괜찮은 모양이야……. 황송한 나머지 순식간에 목이 메고 눈가가 뜨거워진다. 무심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 폭주하려는 감정을 가까스로 갈무리하며 조금 웃는다. 좋아서, 너무 좋아서 울다가 죽고도 싶겠지만 좀 참아봐. 너무 많이 좋아하면 깨어날 땐 그만큼 더 아플지 몰라. 몇 시간 전보다도 더, 훨씬 아플 거야. 어쩌면 그때야말로 정말 부서져버리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TV 보고 있었어? 홍 기사는 왜 벌써 쫓아 보냈어? 혼자 있고 싶다고 했다며? 또 혼자 영양가 없는 망상이나 하려고 그랬지? 내 다 안다.”

어딘가 놀리는 기색의 나지막한 바리톤은 요즘 늘 그러하듯 마치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는 것처럼 밝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리운 기척을 일거수일투족 예민하게 감지해낸다. 구두를 벗는 중인지 잠시 아래로 굽어졌던 늠름한 몸이 금세 원래의 훤칠한 실루엣을 되찾고 있다. 현관 옆 콘솔 위로 대충 던져지는 재킷. 느슨하게 풀려 있는 넥타이도 그대로,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셔츠 소매도 몇 시간 전 본 그대로다. 마지막으로 꾸었던 꿈 그대로다. 하느님, 몽땅 다 그대로다.

“……TV에서 뭐 재미있는 거라도 하나? 저녁은 먹었어?”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커다래지던 검은 실루엣은 푸르스름한 화면 빛을 비껴 받으며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안 먹었구나. 미안. 얘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어.”

“…….”

“잠깐 일어서봐. 좀 안아보고 식탁 차려줄게. 함께 먹자. 배고파.”

“…….”

“식욕이 없어서 먹는 시늉만 했어. 너도 안 먹었다니 이제 둘이서 기분 좋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네? 왜 굳어 있어? 일어서봐. 좀 안아본다고 했잖아.”

“…….”

“……그래, 착하지……. 아아, 기분 좋다…… 좋아…… 네 몸에서 나는 냄새…… 따스한 체온도…… 아주…… 많이 좋아…… 좋아해…….”

“…….”

조금 안아보겠다는 말은 그의 요즘 출퇴근 인사법이다. 처음의 가벼운 포옹은, 그러나 곧 부서질 것처럼 강렬해지기 일쑤였고 입술을 스치듯 가볍게 시작했던 뽀뽀도 곧 해일처럼 격렬해지곤 했다. 늘, 꿈을 꾸기 시작하던 이래로 내내. 그래, 언제나 늘 지금처럼. 갈비뼈에 우릿한 통증이 느껴지고, 거의 숨이 턱에 차오를 무렵이 되어서야 그의 /좀 안아보겠다/던 격렬한 압박이 가까스로 느슨해졌다. 코로 입으로 짧고 격하게 쏟아져 내리는 키스를 받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다디단 타액은 조금도 질리지 않고, 감각을 얼얼하게끔 하는 강렬한 수컷의 체취는 가슴이 아릴만큼 그립고 슬프다. 자신이 따스하다고 하지만, 그의 몸은 도리어 화덕처럼 뜨겁다. 해가 떨어져 기온이 많이 낮아졌을 텐데도 아직 더위를 느끼는가 보았다. 손바닥에 맞닿아오는 그의 견갑골 아래쪽으로부터 늘씬한 등줄기까지 땀에 푹 젖은 셔츠의 감촉이 반갑다. 더위를 심하게 타는 그. 그래서 땀도 유달리 많이 흘린다. 사경을 넘나들며 심하게 마른 탓인지 요 한 달 남짓 동안은 더워도 땀을 잘 흘리지 않는 것 같았는데, 비로소 몸이 완전히 회복된 모양이다. 여윈 등을 어루만지다가 손을 좀 더 위로 가져가 역시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부드러움이 마치 솜사탕이다. 아아, 정말 꿈인 모양이다.

“……이뻐…… 좋아…….”

서로의 입술과 코를 거의 붙인 채로 그가 중얼거린다. 착 가라앉은 그르렁거림은 순수하고 정직한 짐승의 그것이다. 정말로 기분이 좋은 듯, 잔뜩 억눌려 갈무리된 환희가 선연히 전해진다. ……좋아…… 좋아해…… 너무 좋아……. 밤의 장막처럼 검고 깊은 눈이 격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코앞에서 심하게 일렁거린다. 통째로 그것에 붙잡혀서 부서져버릴 것처럼 아득해진다.

“……하고 싶어…… 너무…… 너무 귀여워…… 미안…… 지금 당장…….”

“…….”

“……네가 나빠…… 이렇게 다 벗고 있으니까…….”

“…….”

다 벗기는커녕 바스 가운만 단정하게 입고 있건만 자신이 자초한 때문이라 괜한 핑계를 댄다. 비겁한 입장은 아는지 투정은 그저 간절한 애원처럼만 들린다. 허락해줘. 지금 당장 하게 해줘, 제발…… 하고는……. 다시 깊어진 키스에 조금 헐떡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가 환희에 찬 짐승의 신음을 흘린다. 그의 다리 사이, 기왕에 딱딱해진 감촉을 느끼고 있던 터라 그리 당황하지는 않는다. 엉덩이 골을 오가며 힘차게 더듬거리고 있던 그의 손길을 따라 그대로 순종하며 양쪽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품 안에 납작 안긴 몸은 그대로 주침실로 옮겨졌다. 다급한 격정은 그러나, 폭력처럼 거칠어지지는 않았다. 인환을 조심조심 침대 위에 내려놓고, 인환의 바스 가운을 벗기고, 그도 옷을 벗어 알몸이 되고, 협탁 서랍 안에서 젤을 꺼내 팽팽하게 일어선 그의 성기에 흠뻑 바르는 일련의 동작들을, 그는 다정하게 억눌린 절제로 풀어냈다. 다급하긴 다급했던 모양인지, 애무는 거의 생략한 채 바로 들어왔지만 아래가 다치지 않도록 충분히 어루만지며 이완시켜주는 것도 절대 잊지 않았다. 가장 무리가 없기도 하고, 그가 선호하는 체위이기도 한 후배위로 들어와 몇 분 만에 끝머리에 오른 그는 곧 마주 안은 자세로 한 번 더 삽입해왔다.

“……미안…… 힘들지……? 곧…… 조금만 더…… 흡……!”

온통 땀으로 미끈거리는 그의 등을 꼭 껴안은 채 그의 빠르고 사나운 격정에 몸을 맡겼다. 처음의 단발을 만회하듯 두 번째는 꽤나 끈질겨서 금방 녹초가 되고 말았다. 뒤로 가부러지는 인환의 몸을 움켜 안은 채 그가 오랫동안 포효하며 토정했다. 아주 오랫동안. 안으로 깊이 깊이, 흘러넘칠 지경으로 다량의 정액을 뿌려대는 통에 정말 임신이라도 될 것만 같았다. 낙원의 꿈을 꾸게 된 이후로 그는 콘돔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치러지는 격정의 끝은 늘 지금처럼 인환의 아랫배를 가득 채울 만큼 뿌려지는 정액의 홍수였다.

―……널 임신시키면 좋겠어…… 내 것으로 가득 들어찬 네 부른 배를 보게 되면 정말 좋을 것 같아…….

어느 날 밤, 열락의 끄트머리에서 그가 그렇게 속삭였었다. 혹시 그가 그의 아이를 원하는 게 아닌가 해서 순간 철렁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말 그대로 그는 그저 그의 정액으로 가득 찬 인환의 부른 배를 보고 싶은 것뿐이었다. 광기에 가까운 열정이었다. 어딘가 병적인 데가 있었다. 덕분에 샤워 끝의 극진하고 정성스러운 관장 시중 역시 매일 밤 그의 우스꽝스러운 의무가 되었다. 미안해. 미안해. 다음엔 반드시 밖에다 하도록 할게. 주룩, 주루룩. 격정의 흔적을 거침없이 아래로 배설해내며 괴로운 나머지 가득 고인 수치의 눈물을 떨구면, 그는 한숨이라도 내쉬듯 그렇게 중언부언 사과를 입에 걸었다. 입에 발린 소리라는 걸 아는데도 정말 미안해하는 것처럼 들렸다.

“……배고프지? 미안…… 빨리 샤워하고 밥 먹자.”

거실 괘종시계가 11시 종을 치고 있었다. 귓불을 씹듯이 입을 맞추며 그가 마침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절정에서 떠밀려 내려온 후에도 그는 여전히 미련이 남는 듯 꽤 오랫동안 인환의 안에 머물렀다. 여전히 반쯤은 뻣뻣해져 있는 귀두 끝으로 내벽을 문지르기도 하고, 습관처럼 느릿하고 만족스럽게 허리를 흔들기도 하고, 입술 끝에 와 닿는 인환의 온몸 곳곳에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때론 가볍고 경쾌하게, 때론 무겁고 진득하게. 11시 종소리가 그의 꽤나 질긴 육욕의 미련을 간신히 끊어주었다.

관장이 주가 되는 샤워를 마치고 둘 모두 바스 가운 차림으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부지런한데다 손맛 훌륭한 파출부 아주머니 덕에 그저 데우고 차리기만 해도 되는 밥과 반찬들이 고마웠다. 야식임을 고려해 서로 과식은 하지 않았다. 기왕에 입맛을 잃은 인환은 그가 신경을 쓰지 않을 딱 그만큼만 먹는 척을 하고 수저를 놓아버렸지만, 그는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식욕이 왕성해서 수북하게 푼 밥 두 공기를 순식간에 비워냈다. 소화를 시킬 겸 그에게 어깨를 감싸 안긴 채 한동안 정원을 서성였고, 나란히 소파에 앉아 심야 TV 프로를 시청하기도 했다. 내내 꼭 붙잡고 있던 손은 서로의 팔과 어깨를 어루만지는 애무가 되었고, 이내 마주 앉아 서로의 팔다리를 깊게 얽는 격렬한 포옹과 키스가 되었다. TV를 껐는지, 아니면 그대로 켜둔 채 침실로 들어왔는지는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서로의 바스 가운을 벗어 던진 곳이 거실인지 침실인지도 가물가물했다. 자연스레 키스하고, 애무하고, 또 안았다. 부연 안개 속을 떠돌고 있는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슬픔과 불안 끝에 그가 다시 인환의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까보다 더 격렬해진 것만 같았다. 하도 빠르고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통에 인환은 행위 도중 깜빡깜빡 정신을 놓았다. 문득 정신이 들면 그가 인환의 온 얼굴을 다디단 그의 타액으로 범벅을 만들며 게걸스레 입술을 빨아들이고 있었고, 또 문득 눈을 뜨면 그의 거대하고 딱딱한 흉기가 부서지도록 내벽을 찔러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안쪽 깊이 뜨겁게 퍼지는 체액을 어렴풋이 자각하며 놓아버린 정신은 마침내 죽음보다 깊은 숙면으로 이어졌다.

온몸을 달리는 시퍼런 오한에 문득 잠에서 깨어난 것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짧은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눈을 크게 부릅뜨고서는 한동안 숨을 골라야 했다. 심장이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요란스레 뛰었다. 오한이 심했고 식은땀이 축축하게 시트를 적시고 있었다. 악몽을 꾼 모양이었다. 혹은 가위에라도 눌렸거나. 뭔가 무서운 것을 본 것도 같고 무언가 무서운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지만, 정확히 그게 무엇이고 어떤 내용인지는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시야가 검었다. 보일 듯 말듯 푸릇한 기가 커튼 틈 사이로 비치는 걸 보니 새벽 무렵인 것 같았다. 죽음 같은 숙면에 비해 잠든 시간은 고작 두어 시간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왜 그래……?”

잠에 취해 잔뜩 허스키해진 그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들려왔다. 아랫배 근처를 감고 있던 그의 양손에 버릇처럼 힘이 더해지며 등 뒤로 뜨겁고 축축한 그의 피부가 빈틈없이 밀착했다. 반쯤 일어서 있던 그의 성기가 밀착된 엉덩이 골 사이에서 자연스레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인환의 하반신을 통째로 얽어매고 있던 탄탄한 두 허벅지에마저 힘이 더해져, 까칠한 그의 다리털이 피부 곳곳을 근질거리게 했다. 정수리 근처에 있던 입술이 그가 고개를 약간 아래로 더 기울이자 오른쪽 뺨 언저리로 내려왔다. 거의 무의식에 가까울 그의 다정한 키스가 곧이어 뺨을 어루만졌다. 약간 메말라 있던 입술은 금세 습기를 머금더니 뺨에서 관자놀이로, 이어 턱으로, 혹은 귓불 근처들을 배회하며 키스인지 위로인지 애매모호한 깊은 애정을 끊임없이 뿌려댔다.

“……악몽 꿨어? 왜 이렇게 떨어…….”

“…….”

“……괜찮아, 인환아…… 내가 곁에 있으니까 괜찮아…… 그냥 꿈일 뿐인걸…….”

“…….”

“……쉬…… 그만 떨라니까…….”

“……나…… 위…….”

“……응, 그래…….”

“……나…… 나…… 그때가 돼도 이렇게 상냥하게 끝내줄래……?”

“……아아…… 응…….”

“……나 질려서 버리게 되면…… 응? 그렇게 해줄래, 위야?”

“……아, 음…… 응, 뭐?”

“……이렇게 상냥하게 버려주면 그래도 조금 덜 괴로울 것 같아. 그래주면 정말 좋을 거야, 위위. 부탁할 염치는 없지만 그래도…… 소원인 건가……?”

“…………??!!!”

“……애초에 소원은 그런 거가 많잖니…… 로또처럼 좀 허무맹랑한 거. 터무니없고…… 인생을 날로 먹어보자는 집요하고 뻔뻔스러운 그런 거…….”

“…….”

“……정말 그럼 좋겠다. 버려질 때에도…… 네가 상냥하게…… 지금처럼 다정하게 대해준다면 정말 많이 아프지 않을 것 같은데…….”

“…….”

울컥한 심사를 억누르듯이 거칠어진 숨결과 아프게 죄어드는 그의 양팔을 통해 그가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것을 알았다. 오한이 더 심해졌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이젠 더 이상 속수무책일 지경으로 그의 온기에 푹 젖어들어서일 것이다. 칙칙하고 뻔뻔스러운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아도 어쩐지 그가 화를 터트리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소원이야. 그게 요즘 내 유일한 소원인 것 같은…… 어…… 어?”

“왜 내가 널 버릴 거라고 생각하지?”

다행이었다.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담담한 목소리는 어딘가 서늘했지만 귓불 근처를 애무하고 있는 입술은 그대로였다. 다정한 키스를 계속하며 그가 진지한 대꾸를 해주고 있었다.

“……우린 이제 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처음 1년 동안 날 만족스럽게 해달라니 뭐니 운운했던 걸 아직 염두에 두고 있나?”

“……그, 그건…….”

“……하지만 달라졌잖아. 달라진 걸 알지, 너도?”

“…….”

“……말해줄 순 없지만…… 아아, 그건 그러니까 우리 사이엔 금기지. 알고 있어. 서로 말로써 드러낼 순 없지. 아무렴. 하지만 알아. 나도 알고, 너도 알아. 우린 서로 아주 잘 알고 있어. 모호하다면 좀 더 자세하게, 정확히 알게 해줄 수도 있지.”

“……위…… 위야…….”

“……왜 말로써 드러낼 수 없는지도 넌 알고 있고. 모른다고 하지만, 아니, 모른다고 믿고 있지만, 네가 왜 그래야 하는지도 알아. 내가 말을 할 수 없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니까.”

“…….”

“……젠장, 더 떠네. 이봐, 제발 그만 좀 떨어. 가슴이 아파, 인환아…….”

“…….”

“……밀어붙이라면 더 밀어붙일 수도 있어. 원 없이, 하루에 골백번도 더 드는 망상…… 질릴 때까지 들이댈 수 있어. 그럼 너도 내게 이런 지랄 같은 헛소리는 다신 안 하겠지. 하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 아직…… 아직은 네가 그걸 온전히 감당해내지 못할 테니까.”

“…….”

“……욕심나…… 사실은 다…… 완전히 송두리째 다 발가벗고 싶어서 몸서리가 쳐져. 하고 싶은 말…… 네게 하루 종일 쉬지 않고 토해냈으면 좋겠는 그 말…… 당장이라도 토해내고 싶어서…… 진짜 욕심이 나. 모두 다 말하고…… 고해하고…… 안고…… 그래서 네가 발기하는 것도 보고…… 내게 욕망을 품는 것도 보고…… 하느님, 네가 다시 흥분하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좋아서 미쳐버릴지도 몰라. 그래. 내가 그래. 그게 내 요즘 소원이야. 진짜 욕심나는…… 그래, 로또처럼 좀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고 인생을 날로 먹어보자며 집요하고 뻔뻔스럽게 희구하게 되는 그런 소원.”

“…….”

“……안 버려. 절대 안 버려, 이젠. 죽어도 못 버려.”

“거짓말.”

“거짓말이라 믿고 싶겠지, 멍청이.”

“……거…… 짓말이야…… 넌 버릴 거야…… 곧…… 얼마 안 남았어. 곧 그날이 올 거야.”

“그만해. 화낸다?”

“……그녀가 돌아왔잖아…….”

“……?”

“……사랑하잖아…… 사랑한다고 했어, 네가…….”

“?!!!”

그의 몸이 회초리를 맞은 것처럼 크게 경련했다. 부드럽게 토해지던 그의 숨결은 순식간에 펄펄 끓는 디젤 엔진처럼 변했다. 등 뒤로 끌어안긴 몸이 그야말로 바스러질 것만 같이 조여들었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화를 돋운 게 아닐까 더럭 겁이 났지만 한번 쏟아놓기 시작한 고해는 도무지 멈춰지지가 않았다. 무슨 정직의 화신이라도 강림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건 고해도, 정직도 아니었다. 그저 다짐이었다. 자기보호를 겨냥한, 스스로를 향한 가냘픈 다짐이었다.

“……사랑하니까 넌 언젠가 그녀 곁으로 돌아가겠지. 늘 그랬어, 넌. 난 그녀를 당해낸 적이 없어…… 당해내지 못해.”

“…….”

“……그녀가 네 앞에 나타나면 난 늘 혼자 버려지곤 했지. 언젠가 서울대 캠퍼스에서도…… 그날 명동에서도…… 신촌…… 이태원…… 고척동 달동네의 니네 집…… 아아, 그날은 혜윤이만 보고 몰래 도망치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부딪친 건 나도 충격이었지. 네가 그녀를 동생들한테 소개시켜주겠다며 데려온 날이야. 기억나니? 난 그날도 그렇게 네게 쫓겨나야 했지. 네가 그녀를 만나기만 하면 항상 그렇게 도망치듯 쫓겨 숨어버려야 했어. 늘 그렇게 버려졌었지. 늘 언제나…… 그녀의 승리로 끝나게 돼…….”

“…….”

“……그녀는 여자라서 사귀어도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당하지 않고…… 네 아이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임신을 해…… 아주 아주 큰 부자라서, 우리 집은 댈 것도 아닌 뉴욕의 거대 재벌 집안 딸이라서 널 성공으로 이끌어주고…… 그뿐인가? 오래도록 꿈꿔왔던 형 복수의 발판이 돼줄 거라고도 했어…… 네가 그랬어…… 그녀는 그래서 완벽하다고…… 아름답고, 상냥하고, 착하고, 순결한데다…… 네가 원하고 꿈꾸는 모든 것을 갖춘 여자라고 했지…… 사랑한댔어…… 사랑한다고…… 그…… 그녀만이 네 아내가 될 자격이 있다고…… 그래, 그날…… 그때…… 이미 네 아기도 가졌으니까 곧 둘이 결혼할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가버렸지…… 가…… 가버렸어…….”

“……그만……!”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극심한 고통에 호흡을 계속해서 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가냘픈 자기다짐의 푸념은 어느덧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몽롱한 환상 속을 가파르게 떠돌고 있었다. 아니, 과거의 어느 한 지점을 더듬고 있었다.

손톱이 몇 개 떨어져 나간 듯 손가락 끝으로부터 얼얼한 통증이 올라왔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그의 집 앞, 녹이 시퍼렇게 올라온 철제 현관문이 비에 흠뻑 젖은 채 짙은 피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자신의 양손과 머리는 온통 빗물에 젖은 피투성이였다. 손가락이 아픈 건, 하도 오래 그의 낡은 집 현관문을 긁어대느라 손톱 몇 개가 떨어져 나간 때문이었다. 머리가 아프고 눈이 쓰라린 건, 하도 오래 그의 낡은 집 현관문에 박치기를 하느라 찢어진 이마에서 눈으로 핏물이 흘러든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고통은 심장의 그것이었다. 그가 꽂은 이별의 비수는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다른 그 어떤 참혹한 고통도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신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가 경찰을 불렀고, 경찰이 왔고, 죽어도 못 간다고 발광하자 경찰봉으로 몇 대 얻어맞았고, 곧이어 버둥거리다, 걷어차이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별 환장한 호모 새끼 다 보네 하고 욕설을 듣다가, 그렇게 온갖 생쇼를 다 하곤 경찰서 유치장으로 질질 끌려갔다. 예쁜 혜윤이, 멋있고 잘생긴 휘…… 그의 사랑하는 동생들과…… 고척동 달동네 사람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죽 늘어선 낡고 비좁은 골목길을, 피와 진흙과 멍과 땀투성이가 돼서 버러지처럼 질질 끌려갔었다. 그래, 그랬지. 경찰서 유치장 안은 꽤나 추웠어. 추운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부끄러움이었지. 발광이 가라앉으니 그제야 부끄러움이 닥쳤거든. 쇠창살 틈으로 유령처럼 나타난 엄마의 마르고 창백한 얼굴이 잊히지가 않아…… 하느님! 아파…… 너무 아프잖아, 너무…… 어떻게 이리 아플 수가 있지? 이 고통은 뭐야…… 이 기억들은 뭐야…… 오래전에 까맣게 잊혔던 고통이, 아니,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끔찍한 지옥의 통증들이 해일처럼 온몸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부서져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렇구나. 나는 이미 부서진 거였구나. 망가진 거구나, 그때. 다신 고쳐질 수 없을 만큼. 완전히 폭삭……. 맙소사, 도대체 뭘 그렇게 겁을 냈던 거지? 다 끝난 거였잖아…… 이미 다 끝나버린 거였잖아…….

“……돌아보지 않았어…… 단 한 번도…… 넌 그랬어…… 돌아서서……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그렇게 그녀에게 달려가버렸지…… 단정하고 아름다운 뒤태였어…… 나는 언제나 네 반듯한 걸음걸이가 참 좋았지…… 걸을 때마다 부드럽게 앞뒤로 흔들리는 양팔도 좋았고…… 길고 늘씬해서 모델처럼 보이는 다리도 너무 멋있어서 참 좋았어. ……곧게 뻗은 목덜미랑…… 어깨 선…… 낡은 티셔츠 아래로 슬쩍슬쩍 비치는 견갑골이랑…… 아아, 빵빵하게 위로 올라붙은 궁둥이는 또 얼마나 예쁘던지……! 언제까지나 오래도록 바라봐도 절대로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뒷모습이었지. 그런데 그땐 별로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어. 온몸이 너무 아파와서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거든…….”

“그만해, 장인환! 그만!!! 죽여버린다!!!”

어디선가 멀리 소름 끼지는 절규가 들려온다.

악몽이었다. 아니, 차라리 악몽이길 빌었다. 눈앞의 이것이 정말로 자신의 과거라면, 과거의 기억이 재생돼 보여주는 환영이라면 더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잔뜩 비굴해진 머리로 애걸을 거듭하다 보니, 정말 기억의 재생이 아니라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아니, 악몽이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마치 진짜로 손톱이 부서진 것처럼 이토록 손가락 끝마디마다 끊어질 듯 쑤실 리는 없는 노릇일 거다. 머리도 아프고 눈도 아프고, 심장은 그 몇 십 배가 넘을 정도로 찢어질 리가 없다. 기억은 단지 기억일 뿐, 어떻게 이리 철저하고 선명하게 고통까지 재생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큰일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들이닥친 고통이 너무나 크고 생생해서인지 판단력이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었다. 재빨리 낙원의 꿈속으로 텔레포트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은 또다시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다정해.”

사납게 자신을 죄고 있는 그의 단단한 팔을 마주 움켜쥐었다.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웅크리며 뜨겁고 강건한 그의 근육 속에 피가 나도록 손톱을 박아 넣었다. 아픈 것은 그일 것이다, 자신의 손가락 끝이 아니라. 물론 극약 처방이었다. 그를 상처 입히는 것으로 정신의 균형 감각을 찾기 위한.

“……지금은 너무 다정해…… 너무 다정해서 정말 다신 버려지지 않을 것만 같아…….”

“장인환!”

“……절대로, 죽어도 안 버려질 것만 같은 착각이 생겨, 위위.”

“그만하랬지?!!!”

“……괜찮아. 이미 한번 버려져봤으니까 이번엔 괜찮을 거야. 별로 겁날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설마 또 그때처럼 아프기야 할라구…….”

“이!!!”

사나운 기세로 고개가 뒤로 돌려지고 그가 으스러져라 몸을 짓눌러왔다. 삼켜버리는 듯한 키스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게끔 만들었다. 키스는 짐승처럼 사납고 거칠었지만, 그러나 상냥했다.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하게 느껴졌다. 주린 듯 깨물리고 빨려지는 입술의 통증은, 또 다른 악몽 속 혹독한 통증을 무디게 만드는 다디단 마약과 다름없었다.

뜨거운 것이 후드득 얼굴 위로 떨어진다. 그가 울고 있는 모양이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독한 한이 선명하게 묻어나는 서러운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그냥 눈물만 쉴 새 없이 뚝뚝 떨구고 있다. 그래, 당연하지. 내가 그를 아프게 했는걸. 그를 상처 입히는 대신 훌쩍 텔레포트에 성공했지. 그러니 여긴 더 이상 악몽 속이 아니야. 여긴 꿈속의 낙원. 오래전에 부서져버린 어느 늙은 게이의 꿈속의 낙원. 아아, 그래. 됐어. 이제 된 거야. 그냥 이렇게 또 낙원의 꿈을 계속 꾸면 되는 거야. 조금 더 꿀 수 있게 그가 허락해주었으니까, 나는 그저 황송하게 그가 주는 마약에 취해 잊어버리면 그만이야. 그녀가 다시 나타났지만…… 언젠가 그는 또 나를 버리고 그녀에게로 소환되겠지만, 이제 더는 부서지는 일은 없겠지. 왜냐하면 난 이미 오래전에 부서져버렸으므로. 그래. 그러니까 이건 마지막으로 소원을 조금 빌어보는 것뿐이야. 그저 조금. 조금 허무맹랑한 거. 터무니없고, 인생을 날로 먹어보자는, 조금쯤은 집요하고 뻔뻔스러운 그런 거. 아아, 정말 그럼 좋겠다. 그렇게 버려질 수 있다면. 버려질 때…… 네가 지금 이 순간처럼 그렇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것. 다정하게 미안하다고 말해주는 것. 아프게 해서 미안해.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해. 버리게 돼서 미안했어…… 하고 위로를 주는 것…….

“……그래요, 윤 실장. 정말로 믿고 신임할 수 있는 팀이면 좋겠습니다…….”

혼곤한 의식의 틈을 비집고 그리운 목소리가 파고든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어딘가 흐릿한 근심이 담긴 심각한 어조였다.

“……그건 어찌 될지 가늠할 수 없으니 당분간 기간은 정하지 않겠다고 하십시오. 네. 제가 그만둬도 된다고 말씀드릴 때까지 24시간 밀착 경호입니다. 일단 방문해서 정확히 집 주변 상태가 어떤지 판단을 내리고, 집의 보안 프로그램도 새로 점검해달라고 하십시오. 팀원들이 함께 지낼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도 아니고, 프라이버시가 심하게 침해되는 상황도 곤란해하는 사람입니다. 24시간 밀착 경호이긴 하되 대부분 집 외부에서 보호해야만 할 거라고 말씀해주세요. 물론, 외출 시 차로 함께 동행하는 일은 가능합니다. 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집 안에 있을 때보다는 집 밖으로 외출했을 때가 더 문제라는 것. 별로 외출이 잦은 사람은 아니니까, 주로 외부 경계가 많을 거라고도 말씀해주시고요. 아무튼 일단 배정된 팀원들은 제가 모두 면담을 해본 후 최종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네. 지급이니까 오늘 중으로 약속 잡아두세요. 네, 그럼. 회사에서 만나죠, 윤 실장.”

폴더를 닫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은 말끔히 달아나버렸다. 화사한 꽃무늬의 앤틱풍 커튼으로는 채 막기에 역부족일 초가을 아침 햇살이 침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침이라곤 하지만 거의 정오에 가까운 시각 같았다. 공기 중으론 흐릿하게 음식 냄새가 떠돌고 있고, 아주머니와 홍 기사의 익숙한 기척 이외에도, 인환이 본 적 없는 낯선 손속들의 기척이 침실 밖으로부터 예민하게 감지되고 있었다.

부스스하게 퉁퉁 부어버린 눈두덩을 이리저리 굴리며 서둘러 그를 찾았다. 얼핏 훔쳐 듣게 된 통화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인환을 더 소스라치게 만든 것은 그의 심상찮은 어조였다. 고요하고 군더더기 없는 어조엔 그러나, 그럼에도 숨기기 힘든 음습한 살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드레스 룸으로 연결된 욕실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고, 마침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는 중인 그와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잠깐 당혹스러운 빛이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 머물렀다간 쏜살같이 사라졌다. 인환으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게끔 한 시퍼런 살기와 함께.

“……일어났어?”

이미 출근 준비를 완벽하게 끝낸 핸섬한 신사가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싱긋 웃음을 터트리는 게 보였다. 환상이라도 본 것처럼 살기는 온데간데없고 화사한 열기만이 가득 들어찬 미소. 간밤에 오래도록 눈물을 흘린 탓인지 그 역시 인환처럼 눈꺼풀이 약간 부어 있었지만, 크고 깊은 눈매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젠 거의 예전의 몸매로 돌아간 늘씬한 근육질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밝은 은회색의 비즈니스 슈트. 셔츠는 은색, 넥타이는 황금빛의 크고 화려한 윈저노트였다. 선 굵은 뚜렷한 이목구비가 매끄러운 황금빛 피부와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잘됐네. 작별 인사하고 출근할 수 있어서. 피곤하면 더 자. 어제 심하게 괴롭혀서 허리가 작살일 테니.”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허리를 굽히더니 양손가락에 깍지를 끼며 인환의 이마와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지금 몇 시인데……?”

“10시 40분쯤. 일어날 거면 아주머니더러 식사 준비하라고 전하지.”

쪽쪽 소리까지 내며 입가와 턱 끝을 오가던 입술은 최후로 입술 위에 머물며 깊은 키스를 했다. 가벼운 모닝 키스이자 작별 키스라기엔 입안을 속속들이 휘젓고 사라지는 혀놀림이 심히 음험했다.

“……그만 일어나야지…… 약속도 있고…….”

키스가 끝나도 한참 동안이나 입술 끝으로 인환의 얼굴 곳곳을 문지르며 희롱을 거듭하던 그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검고 깊은 흑요석의 눈이 빤히 인환의 눈을 주시했다. 종종 숨을 막히게끔 하는, 핥는 것도 같고, 파고들어오는 것도 같고, 막무가내로 휘젓는 것도 같은 무도한 눈길이었다.

“……약속? 무슨 약속? 외출하나? 어디에? 나가서 누구를 만날 건데?”

다정한 어조는 그대로인데 연달아 토해지는 질문은 어딘가 초조하고 다급하게 들린다.

“큐레이터는 안 돼. 아직 안 돼. 절대로.”

“……그…… 김 선생님 아냐. 주희 선배야. 순산한 지 한 달 거의 다 된다고…… 아기 보러 오라고…….”

“…….”

“……아기가 정말 예쁘다고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남자앤데 여자애들보다도 더 예쁘다네? 솔직히 딸이었으면 한동안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라고 되게 거들먹거리더라. 꽃미남들을 그렇게나 밝히더니 남아 선호 사상까지 있는 줄은 나도 미처 몰랐지. 하하, 게다가 그렇게 최악의 팔불출 엄마로 망가질 줄도 정말 몰랐어.”

“…….”

“……가면 끝내주는 매운탕 수제비 끓여준대. 산모가 조신하게 미역국이나 챙겨 먹을 일이지 무슨 매운탕이람, 매운탕이. 애 엄마가 돼서도 그 괄괄하고 황당한 성미는 어쩔 수가 없나 봐. 그래도 요리라면 그저 라면 끓이는 재주밖에 내세울 게 없던 선배가 매운탕이라니, 장족의 발전이긴 하지?”

“…….”

“……뭐, 뭐라고 말 좀 해봐. 며칠 전에 전화로 약속한 거야. 미리 말 안 해줘서 화났어?”

“……그 여자는 나를 싫어하지. 나도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네가 아끼는 인간이니까 내 쪽에서 참아줘야 하겠지.”

“……그, 그런 거 아니야. 너 싫어하지 않아…….”

“너를 많이 좋아하긴 하지. 그것도 어쩐지 찜찜해. 유부녀만 아니었으면 친구고 뭐고 다 갈아 엎어버렸을 거야.”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포효에 휘둥그레져서 그를 보는데, 그가 소리 없이 빙그레 웃음을 터트린다. ……두근……. 아아, 하느님. 심장 떨리게시리. 소년처럼 해맑게 퍼지는 미소에 천지가 다 아득해진다.

“그 여자 언제 파리로 들어가지?”

“……글쎄…… 아마 곧 가게 되지 않을까? 신랑 휴가 끝나면 함께 돌아간다고 했는데…….”

“앙드레?”

“엇?!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분 별명이 앙드레인 거?”

“파리에서 꽤나 바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그 앙드레까지 들어와 있는 줄은 몰랐네. 하긴 아기 아빠가 됐으니 일보단 아내와 자식이 우선이겠지.”

“……어…… 응, 그렇지, 뭐…….”

어떻게 그가 주희 선배 신랑의 별명까지 꿰고 있는 걸까? 새삼 신기해서 여전히 물음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초리로 그의 표정을 살피지만, 여전히 빙그레 미소만 흘리고 있을 뿐 쉬이 대답을 줄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며칠 내로 바로 뜨는 건 아니겠지?”

“어, 아마 그렇지 않을까? 산모도 산모지만 아기 때문에라도…… 아직 장시간 비행기 여행은 무리일 테니까…….”

“……그럼 약속 며칠 미뤄도 괜찮겠네?”

“어어…… 어, 응? 미뤄? 연기…… 하라고?”

“한 일주일쯤…… 아니, 2∼3일만이라도 좋아. 미룰 수 있지?”

“……그야…… 미뤄도 되긴 하지만…… 왜, 오늘 나 어디 나가면 안 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

잠시 입을 다문 그가 깍지 낀 손가락에 악력을 더한다. 소년 같은 해맑은 웃음이 서서히 진중한 무표정과 자리를 맞바꾸는 게 보였다.

“……별로 심각한 건 아니야. 아까 통화하는 소리 들었지? 네게 당분간 경호원을 붙일 거야. 오늘 그 사람들 와서 집도 살필 거고, 일단 그 사람들이 네 행동 반경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때까지 되도록 외출은 삼가는 게 좋아.”

“…….”

“지금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두 사람은 아침에 내가 급하게 경비 회사에 출동을 요청한 사람들이라, 이따 오후에 좀 더 믿을 수 있는 전문가들이 올 거야. 그 사람들이 오면 밖의 두 사람은 돌려보내도록 해.”

“…….”

“……겁먹지 마. 별일은 아니니까. 그냥 예방 차원일 뿐이지. 네가 경호원들 붙이는 걸 싫어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당분간만 참아줬으면 해. 그래야 나도 안심하고 회사에 출근할 수 있을 테니까.”

“……어, 언…… 제까지……?”

“당분간.”

“……그…… 다…… 당분간이 언제까지인데? 그냥 대충이라도…….”

“신애가 뉴욕으로 돌아갈 때까지.”

“…….”

“…….”

“…….”

“……장하다. 이젠 그렇게 떨지 않네……?”

“……자업자득이니까.”

“…….”

“……그녀…… 그러니까 용서 못 한다는 뜻이겠지? 하긴 쉽게 용서가 될 짓은 아니지.”

“그게 아니야. 네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 때문이 아니야. 이제 와 무슨…… 그녀가 화를 내는 건 나에 대해서야. 내게 대한 복수심이 엄한 네게로 떨어질까 봐 그래.”

“…….”

“……안 돼. 그런 귀여운 눈초리로 아무리 애원해도 그건 말해줄 수가 없어. 적어도 아직은…….”

“…….”

“……많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그야 아주 신경을 쓰지 말라는 말은 못 하지만…… 시커먼 경호원 두셋은 항상 달고 다녀야 할 테니까. 그래도 그리 심각하진 않아. 강단이 센 여자이긴 하지만 그리 험한 꿍꿍이는 세우지 못할 거야.”

“……이해할 수 없어…… 나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나는…… 난…… 뭐가 뭔지 도통…… 그녀는 널 사랑했잖아. 그리고 너도 아직 그녀를…….”

“……내가 그녀를 사랑하나?”

“……?!”

“정말 그렇게 생각해?”

“…………?!!!!!”

“아아,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그녀를 사랑하나 보군, 아직도 여전히.”

“…….”

“……숙제야. 지금부터 곰곰이 생각해봐. 내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물론 무서워지면 생각을 중단하고 도망쳐도 돼. 언제나처럼.”

“…….”

“……나는 괜찮아. 얼마든지 상처 입혀도 돼. 네 대신이라면 얼마든지 상처 입어줄 수 있으니까.”

“…….”

“……맘껏 토해내봐. 어젯밤처럼…… 그동안 속에 꽁꽁 숨겨두느라 곪아 터진 것들……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다 토해내서 날 울게 만들어봐. 대신 엉엉 울어줄 테니. 대신 내가 피를 철철 흘려주지, 언제든. 그래도 괜찮아.”

“…….”

“……알았지? 숙제니까 반드시 답을 생각해내야 해. 그렇다고 서두르지는 말고. 기한은 없어. 궁금해지면 생각하고, 참을 수 없이 무서워지면 중단해. 생각했다 중단하고, 또다시 생각하고 중단하고…… 얼마든지 반복해도 좋아. 그래서 언젠가 마침내 하나도 무섭지 않게 되면, 그때야말로 내게 답을 말해줘. 내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혹은 사랑해왔는지.”

“…….”

마치 언제든 리셋이 가능한 온라인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도 제안하는 악동 같았다. 망설이지 않고 거듭 떨어지는 경쾌한 어조는 노랫소리 같았고, 한쪽 눈이 찡긋 감기며 던져지는 윙크는 어느 플레이보이의 그것처럼 경박하고 장난스럽기만 했다. 마지막, 담담한 표정 끝에 서린 것은 그래도 주의 깊은 다정함이었지만.

“……너는 이상해…….”

“……입 벌려봐. 키스 한 번 더 하고 출근해야지. 너무 늦었군. 요즘 같기만 해서야…… 계속 이따위로 행진했다간 언제 불량 사장으로 퇴출돼도 억울하단 항변 한번 못 하겠는걸?”

“……진짜 이상해…… 이상해졌어……. 네가 아닌 거 같아…….”

“맹세하지만…….”

그의 입술이 가까이 내려왔다. 흑요석 같은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시야 가득 들어차는 순간, 얼굴 위로 그의 다디단 숨결과 체취가 따스하게 쏟아졌다.

“……이게 진짜 나야, 인환아…….”

“…….”

눈물겨울 만큼 부드럽고, 또한 부드러운 키스였다. 살짝 아랫입술을 핥던 그의 혀가 이윽고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왔을 때, 뭉클한 아픔이 심장 근처를 찌르고 지나갔다.

슬픔이었다.

너무 행복해서 슬픈…… 좀처럼 달래기 힘든 이상야릇한 습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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