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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2003년 9월. 장인환(張仁歡) (85/129)

35. 2003년 9월. 장인환(張仁歡)

샤워실로 들어가기 직전, 인환은 무슨 예식을 치르기라도 하는 양 엄숙한 태도로 체중계 위에 올라섰다. 

잠시 무의미한 숫자들이 일렁이더니 이윽고 저울의 액정엔 63.4kg이라는 숫자가 정확히 떠올랐다. 어제와 별다를 바 없었다. 처음 며칠간은 무섭게 빠지더니, 어느새 정체기로 접어든 모양이었다. 20대 때의 평균 몸무게인 57∼58kg대로 돌아가려면 아직도 5∼6kg은 더 빼야만 한다. 식사량을 좀 더 줄여볼까? ‘빠지면 좋지만 안 되면 말고’의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일단 시작하고 보니 점점 더 욕심이 생기는 것 같다.

잘 보이고 싶었다. 형편없이 망가진 몸이 아니라, 그럭저럭 봐줄 만한 몸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아, 물론 이건 매우 위험한 욕망일 것이다. 인환은 알고 있었다. 욕망을 품기 시작한다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위험하지. 아무렴. 위험하고말고. 모르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꿈꿔보고 싶어. 어차피 아직 꿈속이니까, 거기에 한 가지 더 황당한 꿈을 추가해본들 뭐 어때서? 너무나 현실 같으니, 정말 현실인지 조금 의심을 해보겠다는데 뭐가? 더 위험하다고? 현실처럼 믿는 만큼 더 처참해질 거라고? 젠장, 뭐가 달라. 더 처참할 게 무어야. 어차피 깨고 나면 속수무책이 돼버릴 건 다 마찬가지인데……. 액정을 노려보며 오기에 가까운 불퉁한 언사를 연달아 퍼부어본다. 잔뜩 움츠러들려는 스스로를 향해.

……그냥, 그저 뱃살을 좀 빼보고 싶은 것뿐이야. 나이 먹어서 배만 나오는 아저씨들이 얼마나 추하냐. 안 그래? 너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주위엔 시각 공해라구. 뿐이냐? 복부 비만이 얼마나 심각한 사회 문제인데? 너라도 사회에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 하지 않겠어? 아무렴. 이건 그저 공익사업의 일환일 뿐이야. 일일이 그와 연관 지으며 예민해질 필요는 없단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 변명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나서야 인환은 비로소 샤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전신으로 훅 끼쳐드는 습기와 더불어 수영장 특유의 락스 냄새가 코끝으로 가득 밀려들었다. 오늘쯤은 한 시간을 제대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지구력이 늘었으려나……. 샤워실의 열기마냥 따끈따끈한 기대감이 폐부 가득 부풀어 올랐다.

지구력은 개뿔. 오늘도 역시 30분이 한계였다.

자유형과 평형을 번갈아가며 열심히 레인을 돌던 인환은 시작한 지 40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풀을 빠져나왔다. 체력은 거의 다 고갈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의 미련은 여전했다. 인환은 풀을 한가운데에 두고 수영장 양쪽 벽을 따라 빙 둘러싼 채 놓여 있는 벤치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쁜 호흡을 골랐다. 쉬다가 체력이 좀 모이면 20분쯤 더 레인을 왕복할 생각이었다.

열흘 넘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있건만, 30분 이상 레인을 왕복하려면 인환은 그야말로 온몸을 허우적거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현저하게 체력이 떨어지곤 했다. 운동을 끝낸 후엔 파김치처럼 지친 채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여전했고, 온종일 몸 이곳저곳이 뻐근한 근육통도 여전했다. 밤이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감겨드는 그의 욕망에 비몽사몽 졸며 응하기 일쑤였다(자신이 운동을 시작한 게 마음에 드는지, 일단 시작하면 두세 판은 기본인 저 절륜한 욕구를 한 번 정도에서 자제해주는 그에게 그나마 감지덕지하고 있는 인환이었다. 공중에 알몸이 드러나는 운동의 특성상, 그간 자신의 온몸에 수도 없이 새기곤 했던 키스 마크를 자제해주는 배려도 꽤나 놀라운 것이었다. 못 말리는 색정광 주제에!). 팔이며 어깨가 생각만큼 움직여주지 않아 아예 물까지 마셨던 첫날에 비하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수영 실력 하나만큼은 물찬 제비였다고 자부했던 젊은 시절의 자신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절름발이 신세로 할 줄 아는 유일한 운동이었기에 그만큼 더 공을 들여 폼을 익히고 스피드를 키웠었는데. 그야말로 과거의 영광이지 싶었다. 하긴, 근 10년 넘게 운동다운 운동이란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인환이었다. 그간 방치해뒀던 근육이며 운동 신경들이 젊은 시절 그대로일 리는 만무했다. 게다가 마흔 줄이 바로 코앞이 아닌가. 몇 달 전 그와 재회한 직후, 그의 명령대로 성실하게 운동을 시작했더라면(지난 몇 달을 통틀어 수영장에 들른 날은 채 열흘도 안 될 터였다) 혹 예전의 영광 비슷한 것을 되찾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만큼 몸이 익숙해지려면 꽤 오랫동안 고생을 감수해야 할 듯싶었다.

어느새 가라앉은 호흡과 점점 식어드는 몸의 열기를 자각하며, 인환은 멍하니 실내를 굽어보았다. 수영장 네 벽을 따라 죽 늘어서 있는 벤치들엔 인환 말고도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몇 앉아 있었다. 물론 쉬고 있는 쪽보단 부지런히 운동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지만. 도합 열 개의 레인마다 대여섯 명 정도가 달라붙어 총장 25미터의 너른 풀을 부지런히 왕복하고 있는 게 보였다. 반대쪽 다섯 레인을 점령하고 있는 연수반엔 전문 트레이너들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들 몇이 풀 밖에 선 채 가끔씩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회원들을 단속하고 있었다. 연수반 레인이나 자유반 레인이나 다 남자 회원들보단 나이 든 중장년 주부들과 젊은 여성들이 훨씬 더 많았다. 주말이긴 해도 어중간한 오후 시간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몇 달 전에 회원권을 끊어준 스포츠센터에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한 지 오늘로써 2주째였다. 장소가 신촌역 근처라 집에서도 꽤 가까운 덕분에 그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는 부지런함을 실천할 수 있었다. 주말까지 포함해 도합 5일간이나 됐던 추석 연휴에도, 그의 제주도 여행 제의를 운동 핑계 삼아 거절했을 정도이니, 스스로 생각해도 좀처럼 믿기 힘든 성실함이었다.

스포츠센터는 문을 연 지 2년이 채 안 되는 곳이라 시설도 최신식이었고 서비스도 꽤나 호사스러운 편이었다. 기존의 데면데면한 실내 수영장만을 상상하고 처음 센터 문을 들어섰다가 개인 트레이너라며 살갑게 달라붙는 건장한 청년을 마주하곤 인환은 아연실색을 했었다. 트레이너까지는 필요 없다고, 몸을 만들거나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건강관리 차원으로 가볍게 운동이나 할 목적이라며 극구 거절한 끝에, 너무나 활달하고 친절해서 더 거북하게 느껴지는 젊은 트레이너를 간신히 물리칠 수 있었다.

“자유형을 하실 땐 자꾸 왼쪽 팔이 가라앉으시네요, 사장님. 체력이 떨어질 때면 더 그러시던데…… 정말 폼 교정을 받아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5분쯤 쉬었을까, 다시 풀로 들어갈 요량으로 몸을 일으키는데 시커먼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양반 되긴 그른, 저 인환 담당 트레이너 씨였다. 친절 봉사가 생명인지, 아니면 붙임성이 좋은 건지, 귀찮다는 뉘앙스까지 풀풀 풍기며 거절을 했건만 이렇게 잊을 만하면 인환에게 아는 체를 해오곤 한다. 어쩌면 두둑한 팁이 탐이 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벤처기업 CEO의 명함을 지닌 그가(실은 그의 비서 중 하나가) 회원권을 구입해준데다,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덩치의 경호원 둘이 센터 건물 안까지 따라 들어와 밀착 경호를 하고 있으니 인환이 무슨 굉장한 거물급 인사인 줄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짜 거물급이라면 별 다섯 개짜리 일류 호텔의 피트니스클럽 멤버십을 이용하지, 이런 대중 시설엔 일절 걸음을 안 할 텐데 말이지(그만 해도, 홍제동 사옥에서 가까운 그랜드힐튼 호텔과 그의 공식적 주소지인 방배동 집 근처 매리어트 호텔의 피트니스클럽 회원권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 힐튼 호텔 회원권은 일하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그가 실제 운동을 하는 용도로 쓰이고, 매리어트 호텔 회원권은 바이어들 접대 같은 사업적 용도로 쓰이고 있다고, 홍 기사를 통해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기본 체형도 아주 좋으세요. 체련장에서 근력 운동을 병행하시면 불필요한 지방 대신 금세 보기 좋은 근육이 붙으실 텐데 안타깝네요.”

“…….”

체력만 예전 수준으로 회복하면 폼도 그럭저럭 나올 거라고, 틀이 잡히면 두어 달 안에 근력 운동도 시작해볼 생각이라고, 완곡한 변명들을 하는 대신 그저 가만히 웃어주는 것으로 대꾸를 주었다. 일일이 대답을 해봤자 그게 더 청년의 수다를 부른다는 걸 지난 2주간의 경험으로 확인한 때문이었다.

뭔가 더 말을 붙이고 싶어하는 청년을 지나쳐 가장 가까이 있던 자유반 레인으로 입수했다. 그새 몸이 완전히 식었는지, 선뜩한 물의 냉기가 예민하게 느껴졌다. 비교적 수월하게 느껴지는 평형으로 천천히 풀을 가르기 시작했다. 두어 바퀴를 왕복했을 뿐인데 금세 숨이 가빠졌다. 역시 몇 분 쉰다고 바닥난 체력이 바로 회복될 턱은 없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물속을 유영하는 기분으로 속도를 현저히 늦춰 레인을 돌아야 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주자들이 속속 인환을 추월하는 게 보였다. 남자 둘은 그렇다 치고, 한눈에도 50∼60대 중년 아줌마로 보이는 여자 세 명까지 인환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땐 자괴감마저 일었다. 레인 폭이 일반 수영장보다 좀 더 넓은 게 다행이지 싶었다. 안 그랬으면 굼벵이처럼 느린 인환의 속도에 다들 속으로 짜증을 냈을 게 분명했다. 실력 좋은 다른 회원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계속 풀에서 허우적거리는 까닭은 그래도 기본 한 시간은 채워야 하지 않겠나 하는 의무감 때문이다. 기왕에 똥뱃살 빼기가 목적인만큼, 매일의 한계 이상은 움직여줘야 목표 근처에라도 접근할 수 있지 않겠나 말이지.

5분쯤 더 레인을 왕복했을까, 수경에 서린 김을 닦는다는 핑계로 풀 가장자리에 서서 숨을 고를 때였다. 문득 얼굴로 떨어지는 누군가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의 피부처럼 익숙한, 잘 알고 있는 시선이었다. 설마…… 하는 의심을 비웃듯, 눈에 띄게 달라진 실내 분위기에 인환은 화들짝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의 주인공을 찾는 덴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무슨 자동인형처럼 인환의 시선이 저절로 주인공을 향했으므로. 수영장 안의 공기가 확연히 다르게 느껴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딜 가든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자가 나타났으니……. 벤치에서 쉬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물론, 인환처럼 풀 가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던 이들의 시선도, 하물며 트레이너들의 시선 역시 죄다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접영으로 전력 질주라도 한 것마냥 갑자기 호흡이 거칠어졌다. 가슴 언저리에 느껴진 저릿한 통감은 느닷없이 빨라진 심장 고동 때문일 것이다. 얼빠진 바보처럼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인환은 단 한 지점을 향해 휘둥그레진 시선을 고정했다.

남성용 출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청동 조각처럼 아름답게 빚어낸 장신의 남자가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잠시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상대는 이내 인환의 반대쪽으로 몸을 튼 채 준비 체조를 시작하고 있었다. 치부만을 간신히 가린 네이비색 삼각 수영복에 하얀색 수영 모자 차림이 생경해도, 인환은 저 아름다운 근육질의 육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풀 밖에 위풍당당 서 있던 다섯 명 몸짱 트레이너들의 자존심을 단숨에 무너뜨린 드문 완벽함이었으니, 저 압도적인 존재감을 모를 까닭이 없었다.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도 자신과 한 몸으로 얽혀들었던 남자였다. 자신의 온몸에 키스의 비를 뿌리고, 빨아보고 싶어 미치겠다는 둥, 피부도 까만 편이니 살짝 빨면 눈에 띄지 않을 거라는 둥, 사타구니 안쪽 같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만드는 건 괜찮지 않겠냐는 둥, 차라리 이 김에 수영장이 딸린 저택으로 이사를 가는 게 낫겠다는 둥, 온갖 음란하고 낯 뜨거운 밀어들을 귓가에 토해대던 색정광이었다. 자신의 주인이자 지배자인 남자, 또한 심판자인 남자였다. 아니, 아마도 자신의 전부일 남자……. ‘그’였다.

“……위…… 야……?”

속삭이는 듯한 부름이 찰나동안 입안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급발진을 하듯 울렁거리던 심장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3분 가까이 꼼꼼하게 준비 체조를 마친 그가 인환이 꼼짝 않고 기대 있던 네 번째 레인 앞으로 천천히 다가올 때까지도.

인환의 코앞에서 멈춰 선 그는 한쪽 무릎을 굽힌 채로 풀 가장자리에 걸터앉더니 날카로운 시선으로 수영장 내부를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풀의 규모며 동선 구조, 늘어선 벤치들, 트레이너들은 물론 그를 힐끔거리는 회원들 한 명 한 명을 놓치지 않고서. 경호원들의 보고를 매일 예리하게 체크하면서도 일말의 의심과 불안감을 거두지 않고 있는 요즘의 그답다고 해야 할까. 눈빛은 차갑고, 우수 어린 표정은 냉담하게 굳어 있다. 일체의 타인을 그어둔 선 밖으로 밀어내는 차디차고 견고한 벽. 솜사탕처럼 달콤한 연인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 요즘의 그에게선 좀처럼 보기 드문 표정이지만, 인환에게도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다. 바로 두어 달 전까지의 그는 거의 늘 저런 표정이었으니까. 낙원 밖 현실을 순식간에 일깨워주곤 하는 저 증거를 발견할 때마다 자신의 간담이 얼마나 오그라들곤 하는지 그는 꿈에도 모르겠지. 비록 저것이 현재의 자신을 대상으로 하고 있진 않다 하더라도.

그의 시선이 마침내 인환을 향해 내려온 것은, 그가 만족할 만한 관찰을 끝낸 1∼2분쯤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표정 없이 굳어 있던 아름다운 얼굴에 환한 빛이 드리웠다. 오른쪽 입술 끝만 살짝 올라가는 미소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불러일으킨 효과는 대단했다. 막 턴을 하고 되돌아온 같은 레인 아줌마들은 물론, 아마도 그가 수영장 문을 밀고 들어온 때부터 줄곧 따라다니던 이들의(특히 대부분의 여성들!) 시선이 감탄과 놀라움을 숨기지 않으며 일제히 휘둥그레졌으니까. 죽어 있는 마네킹이거나 청동 조각의 그것이라 착각해도 무리가 없을 완벽하지만 싸늘한 어떤 존재가, 느닷없이 따스한 피가 도는 화려한 미남으로 급변신을 하는 순간과 다름없었다.

옆 레인 주자들이 접영을 시작하는지 수면이 요동치며 제법 커다란 물보라가 인환의 얼굴로 튀었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인환의 심장이 따라서 격하게 일렁였다. 물론, 얼굴에 튄 물보라 때문이 아니라 저 위험천만한 웃음 때문에. 익숙해지려면 아직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볼 때마다 적잖은 동요로 넋이 휘청거리곤 하니, 참으로 심장에 나쁜 웃음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껏 자신이 알아온 그가 아닌 것도 같고, 반대로 자신이 이제껏 모르고 있었던 그의 실체인 듯도 싶어, 그저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는 외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진다.

“……일찍 일이 끝나서 와봤어. 함께 운동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집에서 저녁에나 볼 줄 알았는데, 이건 반칙이야…….

불평 비슷한 숨 가쁜 투정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쁜 건지, 불안한 건지, 혹은 조금은 화가 난 건지, 인환은 이 순간 자신을 크게 동요시킨 기분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모습으로 느닷없이 그를 마주하자니 동요가 생각 이상으로 큰 것 같았다. 구석구석 모르는 부분이라곤 단 한곳도 없는 몸인데도, 내외하는 조선시대 사대부 아낙이라도 된 듯 야릇한 수치감에 차마 그의 몸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에게 시선을 사로잡힌 수영장 안의 뭇 사람들에게 마치 그와의 관계가 적나라하게 들통이 나버린 것 같은 두려움마저 일었다. 물론 착각에 불과했다. 연희동 집 침실이 아닌 훤한 공중의 장소에서, 그의 알몸(에 거의 가까운)과 부닥친 당혹감 때문일 것이다.

“시작한 지 40분이 넘었다면서? 뺨은 빨간데 입술이 파래. 많이 지쳐 보이는데 계속 할 텐가?”

풀의 물을 퍼 올려 팔다리와 가슴을 차례로 적시며 그가 재차 물어왔다. 준비 체조도 꼼꼼하게 하더니 안전 매뉴얼도 잊지 않는 그다. 무엇을 해도 모범생 완벽주의자다운 그의 몸짓에 문득 실소가 터졌다. 온몸을 얼음땡화시켰던 심한 당혹감이 그나마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한 시간은 채워야 운동이 되지…….”

화살처럼 내리꽂히는 그의 강렬한 시선이 버거워, 인환은 슬쩍 고개를 떨어뜨리며 대꾸했다. 열렬하고, 즐겁고, 몽롱하고, 달콤하고…… 그래서 어쩌면 애절하기까지 한 그 어떤 격렬한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눈빛이었다. 퉁명스러운 자신의 어조는, 놀라게 한 데 대한 무의식적인 항의가 아니라 순식간에 그의 열락에 동화되려는 스스로를 향한 일침 같은 것이었다.

그의 강건한 종아리와 발목, 그리고 군함처럼 커다란 두 발이 물에 흠뻑 젖은 채 바로 눈앞에 있었다. 결합을 이룰 때마다 끊임없이 어루만지곤 하는 아름다운 육체의 일부였다. 인환 자신의 것인지 때론 혼란을 일으킬 만큼 몹시도 친숙하면서도 애틋한 몸뚱이였다. 그것에 무심코 손을 뻗지 않기 위해 인환은 풀 가장자리를 움켜쥐고 있던 양손에 좀 더 힘을 넣어야 했다. 착각하면 큰일이었다. 여긴 음란한 열락이 밤마다 뿜어 나오는 단둘만의 침실이 아니었다. 맙소사. 점점 얼굴로 열기가 몰려드는 건 도둑이 제 발 저린 때문이겠지. 연예인 뺨칠 희대의 미남을 휘둥그레져 쳐다보는 뭇 공중의 시선만 없다면 그나마 이리 당혹스럽진 않을 텐데…….

“좋은 자세야. 그렇게 잔소리했어도 그동안 이 핑계 저 핑계 게으름만 피우던 네가 웬일인가 싶긴 한데…… 앞으로도 죽 요즘만큼만 부지런해주었으면 좋겠군.”

확실히 놀리는 기색의 대꾸였다. 슬쩍 시선을 올리니 기분 좋은 웃음이 좀 더 짙어진 채로 줄곧 그의 입가에 머물러 있는 게 보였다.

“서로 시간을 맞추면 앞으로도 주말 운동은 함께 할 수 있겠어. 보니 시설도 깔끔한 것 같고 제법 괜찮군, 여기.”

“……그건…… 어쩐지 스토커 짓 같아…….”

갈비뼈 안쪽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프라이버시가 완벽하게 보장되는 최고급 피트니스클럽을 마다하고 그저 그런 동네 수영장에 발도장을 찍겠다니, 연인과 함께일 수 있는 기회는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스토커적인 열정과 다름없었다. 맙소사, ‘연인’이라니. 정말로 ‘연인’이라니……. 하긴…… 뜨거운 눈빛도, 행복에 겨운 웃음도, 격정을 힘겹게 갈무리하고 있는 듯한 어색한 몸짓도, 열렬한 사랑에 빠진 연인의 그것이 아닌 증거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위험해……. 머리 한구석에서 일촉즉발 폭주하려는 감정에 급히 제동을 건다. 그렇게 너무 몰입하지 마. 어쩌자는 거냐. 너 요즘 진짜 위험해, 장인환!

“스토커 짓이라니. 금슬 좋은 ‘부부 동반’ 운동을 가지고.”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단숨에 시뻘게진 얼굴로 인환은 재빨리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부부 동반’이라는 단어를 쓸 땐 한 톤 다운된 목소리였지만, 새가슴인 인환을 기겁하게 만들기엔 충분히 도발적인 어휘 선택이었다. 정말 못 말리겠다, 이 남자! 어째 갈수록 더 뻔뻔스럽고 노골적이 돼가는 거냐! 너 진짜 이상해! 정말 위야가 맞긴 맞는 거냐, 응……?! 맙소사. 인환도 작금의 비현실적인 낙원에 푹 빠져 있긴 하지만, ‘연인 역할놀이’에 미쳐 있기는 그 역시 한가지인 모양이었다. 다행히, 그를 향한 감탄과 호기심의 기색은 여전했지만, 그와 자신 사이를 수상쩍게 의심하는 듯한 시선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아래로 철렁 떨어졌던 심장의 떨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슬쩍 그를 살피니, 입술 양끝이 한껏 말려 올라간데다 눈빛이 번쩍번쩍 야하게 번들거리는 게 인환의 당황을 즐기는 듯한 빛이 역력했다. 정말 얄미운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전혀 적응되지 않는 그의 낯 뜨거운 뻔뻔스러움에 쫓기듯 고개를 내리깔고 다시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이번엔 풀 가 바닥을 움켜쥐고 있던 인환의 열 손가락들을 마치 기타를 치듯 살살 긁어대는 만행을 시작하는 게 아닌가! 기겁해선 두 손을 잽싸게 물속으로 집어넣었고, 그의 하하하 하고 커다랗게 터지는 웃음소리를 연달아 곤혹스레 들어줘야만 했다. 얼굴만 제외하고 온몸이 물속에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온통 시뻘겋게 물든 전신을 수영장 안 낯선 타인들에게 적나라하게 광고해야 했을 판이니까. 그의 유치하고 짓궂은 도발들도 문제지만, 그에 일일이 동요해선 어른스레 대응하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이리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야, 자신의 불안정한 태도 때문에라도 그와의 관계가 순식간에 들통 나 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맙소사, 그는 이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그와 자신의 남색 관계가 세간에 적나라하게 까발려진대도? 나이가 들어 변죽이 좋아진 건지, 아니면 아예 일반 상식과는 담을 쌓기로 작정을 해버린 건지, 당장 그의 뇌 속을 스캔이라도 해보고픈 억하심정이 거듭 울컥거렸다. 정도를 걷는 게 아니면 그리도 스스로를 못 견뎌하던 자신의 영웅이었는데. 옛 영웅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는가 보다.

“……저, 정말 못됐어…… 두고 보자…….”

“하하하하…….”

“그, 그만 웃어! 사람들이 저렇게 쳐다보는데 쪼, 쪽 팔리지도 않냐?!”

“무얼, 새삼스럽게.”

“……그, 그래. 넌 잘나고 뻔뻔해서 좋겠다, 씨이…….”

“하하, 네가 더 대단하다니까. 아저씨 주제에 ‘씨이’가 뭐냐, ‘씨이’가. 귀여운 말본새 하곤…… 너 그럴 때마다…… 음, ……하고 싶어 미치겠다고……. 빨리 물속으로 다이빙 하지 않으면 금세 다 알아차리고 말걸? 이럴 줄 알았으면 트렁크 수영복을 입고 들어오는 건데 말이지?”

“……!!!”

“하하하하하…….”

“야!!!”

“괜찮아. 물소리 때문에 전혀 안 들리니까, 그렇게 눈치 보지 않아도 돼, 인환아. 뭐, 알려진대도 나야 별 상관은 없지만.”

“…….”

“귓불까지 완전 홍당무네. 진짜 귀여워…….”

“!!!!”

“물 너무 튄다. 복수냐, 장인환?”

“더워서 세수하는 거야!”

“하하하하하…….”

“……어, 어차피 수영할 거면서 물이 튀면 어때, 씨…….”

“시선은 왜 자꾸 피하나? 얼굴 좀 제대로 보여주지그래?”

“……수, 수영 안 해?!”

“얼굴 좀 보자니까. 여기 온 주목적이 그건데 운동이 대수인가, 무얼.”

“……!”

“큭큭큭…….”

“………….”

“고집쟁이.”

“………….”

“겁쟁이.”

“………….”

“……그래서, 싫어? 주말과 휴일에 여기서 나와 이렇게 노는 게?”

“…….”

“난 무척 즐거운데…….”

“……나 당황시키는 게 즐거운 거지 뭘…… 그, 그리고 운동하러 왔으면 운동을 해야지, 수다 떨고 빈둥거리려고 스포츠센터엘 오냐?”

“운동도 한다니까. 그 방면에 있어선 적어도 너보단 내가 더 부지런할걸?”

“…….”

그나마 좀 진지해진 듯한 그의 어조에 겨우 마음이 놓였다. 어느 순간 또 뒤통수를 칠지 모르지만, 유치한 놀림은 당분간 그만둘 모양이었다.

“……호, 호텔 피트니스클럽에선 끼리끼리 모여 사업 얘기도 한다면서? 정재계 상류층들 사이에 발도 넓히고…… 사업가들은 운동보다 그럴 목적으로 클럽에 다닌다고 홍 기사가 그러던데…… 그런 모임들이 제일 많을 주말에 여길 온다는 건 좀…….”

“그래서 싫다고?”

“……싫다는 게 아니라…….”

“매우 곤란한 표정인데? 이거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군. 늘 이쪽만 절박하고 애절해.”

“……스, 스토커 짓이라니깐, 글쎄……. 매일 보는데 운동까지 같이 할 필요가…….”

“스토커 짓이라…… 아직 모르고 있었나? 내가 언제부터 네 스토커였는지?”

“……무슨…….”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힐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막 수경을 뒤집어써 눈빛이 보이지 않는데다, 웃는 것도 굳어진 것도 아닌 담담한 무표정이라 그의 진의는 조금도 읽히지 않았다.

“숙제 잊지 않고 있지?”

“……숙…… 제?”

“이런, 벌써 잊어버린 거야?”

“…….”

“그래. 그 숙제 말이야. ‘그녀’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숙제.”

“…….”

“스토커 문제도 같아. 방배동 집 안 어느 곳에는 그것과 관련된 아주 많은 자료철들이 숨어 있지. 숙제가 풀고 싶어 견딜 수 없어지면 나 몰래 가서 뒤져봐도 괜찮아. 답을 찾는 데 아주 도움이 될 테니.”

“…….”

어딘가 서늘해져서 멍하니 그의 시선을 무는 순간, 어느새 오른쪽으로 몇 걸음 이동한 그가 옆 레인으로 입수했다. 조금 전 접영을 시작한 그룹이었다. 단 네 명의 남자들로만 구성된 상급 레벨. 현재의 허접한 실력으로 인환이 끼어들었다간 거치적거리며 민폐나 끼치기 십상인, 상급 중에서도 최상급 그룹이었다. 엄청난 스피드와 힘으로 버터플라이를 만들어내는 실력들을 보자니, 풀 밖의 트레이너들도 무색할 정도였다.

“운동하자. 몇 바퀴 돌아볼까, 그럼?”

싱긋,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그가 돌아보았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데, 자연스레 주자들 틈에 섞여 든 그가 순식간에 저 앞에서 물살을 헤치고 있었다. 폼도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했고, 스피드도 굉장했다. 몸이 거구라 그런지 양팔이 물살을 헤치며 날아오를 때의 박력 또한 압도적이었다. 인환은 벌린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하고서 멍하니 그를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수영의 꽃이라는 버터플라이를 그야말로 화려하고 완벽하게 재현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레인을 왕복하는 수려한 자태가 가히 호사스럽기 짝이 없었다. 인환뿐만이 아니었다. 기왕에도 수영장 스타로 급부상한 남자였으니, 쏟아지는 탄성의 시선이 오죽할까. 게으름을 피우며 멈춰 서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휘둥그레진 눈초리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수영 실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는데, 이건 뭐 자신은 쨉도 안 되는 거였구나. 뇌리 어디선가 당연한 듯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10년도 더 아주 오래전 어느 여름날, 보성 깡촌의 개울가에서 그가 수영하는 모습을 본 이래 처음일 것이다. 그때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긴 본격적인 수영보단 물놀이에나 적합할 개울이었으니 저런 근사한 장면은 보여줄 수가 없었겠지. 도대체 못 하는 게 무어냐, 저 무시무시한 자신의 주인님은! 민망하다, 민망해! 똥뱃살을 빼보겠다고? 그래서 그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형편없이 망가진 몸이 아니라, 한창 무렵의 그럭저럭 봐줄 만한 몸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싶다고? 장인환, 그런다고 네가 저 완벽한 남자에게 조금이나마 어울릴 거 같으냐? 정신 차려. 괜한 욕심인 거 알지? 위험한 거 알지? 주제에 가당찮은 욕심 부리다가 또 삐딱선 타기 시작하면 어쩌려고? 다시 또 그때처럼 확 돌아버리면? 미쳐서, 환장해서, 그를 가지려고 온갖 지랄발광을 다 떨기 시작하면……?

15분쯤 정신없이 그만을 지켜보았던 것 같다. 풀 가에 멍하니 선 채로. 환상적인 접영은 어느새 파워풀한 자유형으로 종목이 바뀌었고, 그는 논스톱으로 턴을 반복하며 축적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40일 전쯤엔 다 죽어가더니 언제 저렇게 원기왕성해진 걸까. 하긴 체중도 거의 원래대로 돌아오긴 했지, 참.

어쩐지 더 이상 물을 가를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완벽하게 흥이 깨져버린 인환은 패잔병처럼 축 처진 몸을 끌고 풀에서 빠져나왔다. 적어도 한 시간은 물속에서 버텨야지 싶던 얄팍한 미련조차 그나마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샤워실로 직행을 할까, 아니면 그의 운동이 끝날 때까지 안에서 기다려줄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가 왕복 중인 레인에서 가장 가까운 벤치에 몸을 걸쳤다. 바로 나가버리면, 요즘 자신을 놀리는 데 맛이 들린 것 같은 그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한 시간은 채워야 운동이 된다더니?’ 그의 짓궂은 비아냥이 안 들어도 오디오였다(물론, 그가 수영하는 모습을 좀 더 훔쳐보고 싶다는 본심은 가슴 깊이 살짝 숨겨두기로 했다).

그가 풀에 들어간 지 25분쯤 되었을까, 막 풀 가에 도착한 그가 턴을 하는 대신 옆의 바를 붙잡고 멈추는 게 보였다. 수경을 벗으며 가쁘게 호흡을 고르던 그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자신이 있던 옆 레인이었다. 단숨에 반대편 끝까지 레인을 살핀 그의 시선이 조급하게 전면을 향하더니 마침내 인환의 것과 부딪쳤다. 싱긋. 무슨 전자동 센서라도 달렸나. 헤프다, 헤퍼. 보자마자 화사하게 퍼지는 웃음이라니. 두근……. 아아, 역시 심장엔 너무 안 좋아…….

“……다 했어?”

팔짱을 끼듯 양팔꿈치로 풀 가의 바닥을 지지한 채 그가 상반신을 들어 올린다. 자연스레 하반신이 따라 올라오나 싶더니, 어느새 그가 바로 코앞에 서 있다. 흥건한 물줄기가 뚝뚝 흐르고 있는 압도적인 나신이 버거워, 인환은 또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고 만다.

“집에 갈까?”

시선을 내린 자신이 못마땅했는지, 바로 벤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집요하게 눈을 맞추려 하는 그다. 인환의 발가락과 발등을 주물럭거리는 손장난과 함께. 기겁해서 발을 접어들였건만, 변태적인 손놀림은 구겨진 무릎 관절까지 따라왔다. 어쩐지 무의식적인 행동만 같아서 인환은 최대한 동요를 감춘 채 얼음땡이 돼야만 했다.

“……너, 넌 더 운동해야 하잖아. 이제 막 불이 붙은 거 같은데 집에 가?”

“하긴 좀 근질거리는군. 딱 20분만 더 줄래?”

“……30분도 괜찮은걸 뭐.”

“20분이면 돼.”

“어어, 그럼…….”

“몸이 많이 식었네? 풀에서 언제 나온 거냐?”

조마조마한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변태 손길이 인환의 몸 구석구석을 조물조물 추행하고 있었다. 하느님, 부디 남들 눈엔 친구들끼리의 가벼운 스킨십으로 비치기를!

“……시…… 10분쯤……. 어어, 야, 이 손 좀 치워…….”

“꽤 됐네? 몸이 식을 만도 하군. 자칫하다간 감기 걸리겠다. 나가서 기다려. 사우나실에 가서 몸 좀 녹이고 바로 샤워해.”

“……손 치우라니까……! 그, 그리고 이깟 걸로 감기는 무슨…….”

“2층에 휴게실이 있던데 거기서 경호원들 데리고 기다려.”

쇠귀에 경 읽기다. 손장난도 그대로고, 호들갑스러운 염려도 절대 거두지 않는 그다.

“……여기서 기다려도 괜찮은데…….”

“금세 추위를 느끼게 될 거다. 에너지를 쓴 뒤라 더 그렇게 느껴질 거야. 많이 지쳤고 살까지 빠졌으니 저항력이 많이 약해져 있겠지. 말 들어.”

“괘, 괜찮다니깐, 글쎄. 무슨 내가 연약한 공주님도 아니고…….”

“…….”

가벼운 한숨 소리가 그의 입술 끝으로 새어나왔다. 인환의 고집이 꽤나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왜 몰라주지? 네 아름다운 몸짓을 더 보고 싶은 거란 말이다. 뱃살과의 전쟁이라는 남의 거창한 의지를 일거에 부숴놓구선! 얄밉지만 그만큼 매혹돼버렸다는 거 왜 몰라! 저, 저 음탕한 손가락들 좀 봐라! 뻔뻔한 에로 변태 색마 주제에! 늦바람이 무섭지, 바보……?! 마침 오른쪽 허벅지 끝으로 기어 올라온 그의 손을 노려보며 속으로 맹렬하게 삐죽거렸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 키스해버린다?”

“!!!!!”

자기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자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실내 가득 메아리쳤다. 온통 시뻘게진 몸으로 도망치듯 수영장을 빠져나와야 했다. 하여간, 뭐든 제멋대로인 남자다. 감히 누가 이기겠냐고. 애초부터 저 남자를 상대로 고집싸움을 시작한 게 병신이지. 독하기가 살모사 맹독만큼은 할걸? 아니, 어쩜 청산가리 수준일지도…….

[인환이니?]

옷을 주워 입고 막 탈의실을 나서려는데 휴대전화가 울었다. 입구 쪽에서 이쪽 눈치를 살피고 있던 경호원 둘에게 휴게실에서 기다리라는 언질을 준 후 폴더를 열자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어어, 주희 선배.”

[소리가 많이 울리는데 지금 밖이니?]

“응. 운동하러 나왔어. 여기 수영장이야.”

[흐응, 부지런하네? 저번에 전화할 때도 수영장 간다고 끊자더니?]

“선배도 맹렬 다이어트 하는 중이면서 뭘. 나도 이참에 뱃살 좀 빼보려구. 잘난 젊은 애인 상대하려니 자꾸만 위기감이 느껴져서리.”

[으하하하, 뭐가 어쩌고 어째? 으하하하…… 하하……. 장인환 너 그새 진짜 많이 발전했다, 응? 젊은 애인 소리가 천연덕스럽게 잘도 나오는구나, 응? 응, 응응?]

“불안하다니깐. 위기감이 장난 아냐, 선배. 몸이 이렇게 볼품없어서야 소박맞기 딱 좋지, 뭐.”

[깔깔, 점점……? 위기감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야야, 막 애새끼 뽑아낸 늙은 아줌마랑 네 신세가 같어? 젊은 애인 좋아한다. 그게 미치광이 스토커지 애인이냐? 아니지, 그건 완전 귀신이지, 귀신. 지박령처럼 네게 찰싹 들러붙어 있는 끔찍한 귀신. 질 나쁜 스토커 귀신이니 절대 널 소박 놓을 일은 없을 거다. 뭔가 또 확 돌아버릴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한. 아무튼 귀신 달라붙은 늙은 호모랑 평범한 아줌마랑은 위기감의 차원부터가 다른 거야. 아줌마야말로 긴장해야지. 일편단심 순둥잇과(科) 앙드레가 바람나면 그게 진짜 또 못 말리는 거거든.]

“하하, 그런가……?”

[당근. 꺼진 불도 다시 보자지. 자고로 수컷들이란 경계하고 또 경계해도 모자라지 않지, 암.]

“하하하하……. 선배 위험해. 그러다가 의부증으로 가는 거 아냐?”

[어? 너 몰랐니? 나 이미 의부증인 거? 이렇게 지혜롭고 알흠다운 아줌마들은 태생부터가 의부증을 달고 살아야 하는 박복한 팔자라는 것을! 에헴, 뭐냐 하면! 보통의 여자들은 모를, 수컷들의 아랫도리 습성을 이미 훤하게 꿰차고 있는 지식인의 비애랄까, 뭐랄까……. 대오각성을 한 큰스님들의 고뇌가 이러할까, 어떨까…….]

“아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 들으니까 좋네.]

“……?”

[진짜 기분 좋다, 네 시원스러운 웃음소리…… 도대체 얼마 만이냐…….]

“……선배…….”

[그래. 그렇게 웃어.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알겠니? 웃으면 복이 온다는 거 만고의 진리니깐.]

“…….”

[참! 수다 떨다 보니 중요한 용건을 까먹었네. 그래서 그 인간 금족령은 풀렸니? 이혼한 마누란 아직도 니네 근처를 맴돈대? 울 금쪽같은 아들은 도대체 언제 보러 올 거야? 나 10월 초엔 서울 뜰 텐데 설마 그때까지 못 빠져나오는 건 아니겠지?]

“아, 그러잖아도 내가 전화하려고 했어, 선배. 다음 주 중이면 아무 때나 괜찮을 것 같다고 허락 떨어졌어. 언제 갈까? 수요일쯤 갈까?”

[뭘 수요일까지 기다려. 그냥 내일 모레 와.]

“그럴까? 이맘때쯤 가면 돼?”

[응. 백화점 가면 오가닉 면 기저귀 팔아. 그거 될수록 많이 사 갖고 와.]

“진짜 뻔뻔하다. 선물 고를 기회도 안 주고…… 아줌마들은 다 그래?”

[비싼 거니까 사 오라는 거야. 니 부자 애인 뒀다가 뭐에 쓰게. 미워 죽겠는데 바가지라도 씌워야지.]

“……위야 너무 미워하지 마, 선배…….”

[…….]

“……다 내가 어리석어서지, 그 애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어쭈? 잘난 애인이라고 감싸주는 거냐?]

“……감싸는 게 아니라…….”

[감싸고 있네, 뭘. 어우, 재수 없어. 끊어, 요 팔불출 호모 놈아.]

“선배애∼∼∼.”

[윽, 닭살! 야, 니 나이를 생각해라. 시꺼먼 아저씨 주제에 어디서 애교부리고 지랄이야?]

“하하하하…….”

[어쿠, 울 장군 우네! 똥 쌌나 봐! 끊는다? 모레 보자, 장인환!]

“어, 어! 그래, 선배! 출발하기 전에 전화할……!”

[뚜…….]

채 인사말을 맺기도 전에 날카로운 기계음이 귀청을 때렸다. 어쩐지 섭섭하고 아쉬워서 인환은 폴더를 연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하여간 회오리바람 같은 여자다. 언제 봐도 그립고 그리운 여자. 언제 들어도 유쾌하고 유쾌한 생기를 주는 여자. 눈물 나게 애틋한 청춘의 흔적……. 다시금 자신의 손에 쥐이리라곤 꿈에도 못 꾼 인연이었다. 전부 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자신에게 소중한 무엇이 남아 있었다는 자각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자각과 함께 익숙한 불안감이 고개를 든다. ……위험해. 손에 쥐려는 욕심이 생기는 건 위험해. 그 무엇이든. 넌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에도 욕심을 내선 안 돼. 알지? 알지, 장인환? 그녀도 마찬가지야. 그녀가 원해서 네 손안에 잡혀줄 때까지만이지.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고, 애정을 주고, 그리워할 수 있는 권리조차도. 만약 그녀가 떠나려 한다면, 상종 못 할 인간 말종이라고, 그녀 역시 세상처럼 네게서 등을 돌려버린다면, 너는 언제든 그 손을 놓아줘야만 해. 쿨하고 쿨하게. 이번에야말로 멋있게. 네 모든 것일 그는 더 말할 것도 없지. 꿈을 꾸는 건 좋아.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믿고 싶은 기분도 모르는 바는 아니야. 하지만 넌 알고 있어. 아무렴, 잘 알고 있지. 그 끝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뭘 하고 있나, 멍하니? 휴게실에 안 갔어? 경호원들은?”

느닷없는 그리운 목소리에 황망히 고개를 들었다. 하반신에 타월을 두른 나신의 그가 눈앞에 서 있었다. 막 샤워를 했는지, 발간 열기가 두 눈꺼풀과 뺨에 아련히 남아 있었다. 채 덜 닦인 머리카락 끝에선 구슬 같은 물방울들이 이마와 목 언저리께로 후둑후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멍하니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 틈에 30여 분이 훌쩍 지나버린 모양이었다.

“……어어, 전화 좀 받다가 그냥…… 경호원들은 휴게실로 올라가라 그랬고…….”

자신의 목소리가 어딘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깊게 빠져든 상념 때문일 수도 있고, 마치 자신의 생각 속에서 그대로 빠져나오기라도 한 양 그가 불쑥 나타나버린 때문일 수도 있을 거다. 여전히 불안감을 끌어안아야 할지, 그가 나타나준 기쁨에 온전히 몰입해야 할지, 넋이 갈팡질팡 흔들렸다. 그 어느 쪽에도 명확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피곤해? 많이 지친 건가?”

인환의 우울한 표정을 읽은 건지, 살피는 듯한 그의 시선엔 흐릿한 근심이 서려 있었다. 기쁨 쪽을 택해버린 것은 그를 감지한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에게까지 자신의 우울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 아니. 별로…… 괜찮아. 옷 입어.”

“…….”

여전한 근심의 눈길이 잠자코 인환을 굽어보았다. 역시 무의식적인 행동인 듯, 그의 오른손이 얼굴로 다가와 이마 위에 흩어져 있던 머리카락들을 빗질하듯 옆으로 쓸고 있다. 가슴이 저릴 만큼 다정한 손길이었다. 오버해서 씨익 웃어주기까지 했건만 좀처럼 속지 않는 그다. 하여간 귀신처럼 예민하다니깐. 그러고 보니 주희 선배가 인간 비평 하난 잘했지. 진짜 귀신은 귀신이로구만.

순식간에 자신의 기분을 읽어버리는 그도, 또 그러한 그를 알아차릴 수 있는 자신도 눈물겹다. 눈물겹다 못해 무서워서 소름이 다 끼친다.

공명한다. 절대적으로 공명하고 있는 거다. 이 순간 그와 자신은. 죽을 만큼 믿어버리고 싶은 벅찬 현실감이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 좋아서, 너무 좋아서, 치가 떨리도록 두려워지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왜 울어……?”

“…….”

“……또 왜…….”

“…….”

“전화 왔다더니 그것 때문인가? 누구야? 휴대전화 줘봐.”

“…….”

“오주희로군. 그 여자가 쉰 소리라도 지껄인 거냐?”

“……아, 아니야! 선배가 무슨…….”

“그럼 뭣 때문인데? 왜 그래, 장인환…… 응……?”

“……벼, 별일 아니니까 옷 입어, 빨리. 쪽 팔려서 죽을 거 같단 말야…….”

“…….”

“……소, 손 치우지 못해……? 호, 호모들이라고 아예 광고를 찍어라, 바보…… 나 여기 다신 못 오게 만들 속셈이지……?”

“……수영장 있는 집 매물로 나와 있나 알아볼게.”

“……미쳤어? 연희동 집은 어쩌고? 방배동은? 졸부 되더니 돈지랄에 재미 붙였구나…….”

“……울지 말랬지? 괴로워……. 여기가 찢어진다고 했다, 장인환…… 갈기갈기…… 너덜해진다고…….”

“…….”

“……울지 말라니까…… 봐주라…… 나 좀…….”

“너나 이 망할 손들 좀 치워! 환장하겠네, 정말! 저 남자들 다 힐끔거리고 있는 거 안 보여?! 왜 그래, 진짜…….”

“좀 보면 어때? 게이라고 시비 걸 배짱도 없는 치들인데. 그리고 진짜 수영장 있는 집 살 거니까 됐어. 새 집 사더라도 연희동 집은 팔지 않아.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하지 뭐.”

“미친…… 어어……?어……?! 야, 무슨!!!”

우악스러운 힘이 허리를 와락 움켜쥐는 게 느껴졌다. 그의 양손이었다. 등에 사슬처럼 조여드는 단단한 팔 근육마저 느껴진다 싶더니 인환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벌거벗은 가슴팍 위에 깊이 박혀 있었다. 막다른 곳에 몰린 듯한 아찔한 낭패감이 순간 뇌리를 스쳤지만, 그래봤자 속수무책이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기왕에 작정을 해버린 고집 센 남자를 자신이 어떻게 말릴 수 있단 말인가. 젠장, 똥뱃살 빼기라고? 내 복에 무슨. 결코 다신 이 수영장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고개가 위로 들려지고, 입술이 틀어막혀졌다. 양쪽 뺨으로 따갑게 내리꽂히는 뭇 사내들의 망연자실한 시선이 선연했다. 신촌역 한쪽 구석탱이에 자리한 실내수영장, 남부럽지 않을 최신식 설비가 갖춰진 남자 탈의실 안에서 이 무슨 어이없고 황당한 퍼포먼스란 말이냐. 그것도 벌건 대낮에.

익숙한 몸뚱이의 체취에 몸서리가 쳐졌다. 물결치듯 입안을 헤집는 익숙한 감촉에 넋을 잃고 허우적거렸다. 옴짝달싹할 수 없게 전신을 죄어드는 난폭한 포옹이 미친 피를 들끓게 했다. 그의 존재를 온전히 다 소유한 것만 같은 가공할 포만감. 환장할 정도로 지독스레 달라붙는 탐욕…… 폭군의 유린……. 무서워서,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다. 좋아서, 너무 좋아서 당장 숨을 멈추고만 싶었다. 죽어도 좋아……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대로 그냥, 콱……! 발칙한 욕심이 봄 날 메마른 들불처럼 삽시간에 세포 구석구석까지 번져갔다.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었다. 게이 망신은 반쯤 돌아버린 둘이서 다 시키고 있구나. 활활 타오르는 미친 불길 속으로 수치와 자괴감이 잠시 비죽 솟아 반항을 한다. 물론 그래봤자 순간이었다. 새빨갰다. 새빨갛게,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 자신의 본심이었다. 뻔뻔스럽기가 낯 뜨거워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좀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미친놈. 성공하려고 갖은 패악을 떨더니 결국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모양이로군.”

잔뜩 이맛살을 찌푸린 여장부의 일갈이었다. 막 목 안쪽으로 넘어간 녹차 맛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물론 아닐 거다. 지난 한 달여의 일들은 물론, 그제부터 오늘 오전까지, 만 이틀간 벌어졌던 그의 만행(왜 아니겠는가. 돈지랄 멜로극 수준을 넘어 그건 진짜 만행이었다)을 시시콜콜 다 캐고 나선, 결국 몹시 불편해져버린 그녀 나름대로의 소회(所懷)일 것이다.

“차 맛이 왜 이래? 귀가 썩을 것 같은 부르주아 호모들의 닭살 애정 행각을 물리도록 들었더니 차 맛까지 뚝 떨어지누만 그려.”

“……차 맛이 어때서? 향도 좋고 괜찮은 것 같은데.”

“당신이야 그렇겠지, 호모 양반! 졸부 마누라가 돼서 공주님처럼 떠받들리고 있는데 소태인들 쓰게 느껴질까 보냐.”

뭐가 그리도 못마땅한지, 입이 댓 발이나 나온 산모는 심술기가 그득한 표정을 좀처럼 지우지 않았다. 조마조마해서 바라보고 있는 인환의 사정은 아랑곳 않은 채 한 손엔 녹차 잔을 들고 반대편 손과 팔엔 신생아를 품고서 산모는 아기 입에 젖을 물리고 있는 중이었다. 쯧쯧. 수유를 끝낸 다음에나 찻잔을 들 것이지. 저러다 아기한테 찻물 흘리면 어쩌려고. 간절한 잔소리는,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까지 토해지지는 못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괜히 참견을 했다가 무슨 험한 핀잔을 들으려고. 인환의 새가슴 따위론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여장부가 아니냐 말이다.

오주희는 하동의 어느 오지 폐교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현저하게 살이 빠져 있었다. 차마 20대 때의 그것과 똑같다곤 말할 수 없어도, 살이 빠져가면서 그 시절 그때의 미모가 고스란히 되살아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순산이기도 했고, 모유 수유까지 하고 있어서 그런지 쉬이 부기가 빠지는 모양이었다. 하긴, 지독한 외모지상주의자인 여자이니 본인의 다이어트 또한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겠지. 뜨뜻미지근한 누군가와는 달리.

산모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옅은 살구색의 원피스형 임부복이 포실한 피부색과 어울려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아늑한 거실 창 안으로 부서지듯 쏟아져드는 가을 햇살마저 산모와 그 품에 안긴 아기 모두를 그림처럼 뽀얗게 돋보이게끔 만들고 있었다.

처음 와본 오주희의 본가는 청담동에 위치한 180평형대 초호화 단독 빌라였다. 그녀가 재력가 집안 출신이란 사실을 알고 있긴 했지만, 두어 시간 전, 도심 한복판에 웅장하게 버티고 선 초대형 빌라 앞에 도착했을 때에야 인환은 비로소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돈만 아는 속물 집안이라며 스스로의 출신 성분에 대해 신랄한 조소를 서슴지 않았던 젊은 시절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지독한 속물 늙은이라는 그녀의 부친이라도 마주하는 게 아닐까 내심 쫀 상태로 안으로 들어섰는데, 그런 인환을 반긴 것은 오주희와 아기, 그리고 신랑인 지로드(Laurent Andre Girod) 씨뿐이었다. 오주희의 양친은 분가한 둘째 아들 집에 가 있다고 했다. 한눈에도 부드럽고 자상한 성격임을 알 수 있는 지로드 씨는, 그간 오주희를 통해 얘기를 들었는지, 몹시도 친근하고 따스하게 인환을 환영해주었다. 40대 후반의 나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동안인 금발 미남이어서 새삼 오주희의 미남 밝힘증을 재확인한 순간이기도 했다. 30분 전에 지로드 씨가 약속이 있다며 외출을 했고, 비로소 인환은 한결 편해진 기분으로 오주희의 신랄한 추궁을 견디는 중이었다.

“그래서 정말 수영장 딸린 집을 샀다고? 어제 당장?”

“그렇다니까. 센터에서 그렇게 생쇼를 하곤 집에 돌아와선 바로 비서들한테 전화 넣더라. 어제 아침만 해도 일찍 나가길래, 난 무슨 급한 일이 터진 줄 알았지 뭐야. 설마 바로 계약하고 돌아올 줄이야 알았겠어?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구.”

“어이상실이다. 진짜 늦바람이 무섭네, 무서워.”

“얘기 듣고 놀라서 입이 딱 벌어지는데, 나도 봐야 한다면서 새 집으로 끌고 가더라니까.”

“커허……!”

“크긴 진짜 크더라. 옛날 울 아버지 집처럼.”

“그리고?”

“삼청동이라 조용하고 분위기 있고…… 공기도 좋고.”

“하아?”

“야외 풀이지만 물을 데울 수 있으니까 한겨울 며칠만 빼곤 1년 내내 수영할 수 있대. 연료비 장난 아니게 나오겠지. 돈지랄이 따로 없어.”

“얼씨구.”

“실내 리모델링 공사 끝나는 대로 이사할 거래. 선배 파리 들어가는 것보다 우리 이사하는 게 더 빠를걸?”

“지화자!”

“……걔가 미친 걸까, 아니면 내가 미친 걸까?”

“…….”

“……아마도 둘 다 미친 거 같지?”

“새삼스럽다? 니들은 원래부터 미쳤었어.”

“선배…….”

“그럼 뭐 내 입에서 좋은 소리 나올 줄 알았냐? 꿈 깨셔, 이 양반아. 그간 니들이 끼친 민폐가 이루 헤아릴 수 없거늘! 보통 사람답게 행복해지지 않으면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을걸? 미운 인간이지만, 그 인간한테 바라는 것도 마찬가지야. 그 인간도 이제 편해져야지. 보통 사람들마냥 지지고 볶고 행복하게 살아봐야 제정신 챙길 힘도 생기는 거겠지. 세상에 대한 그 지독한 적대감도 쫌 수그러들 테고.”

“……우리 위야 너무 미워하지 말라니까…….”

“암튼 잘됐지, 뭘. 구원 아니겠냐? 집 안에서 편하게 운동할 수 있게 된 호모 마나님이 아니라, 닭살 떨고 싶어 발광한 어느 호모 커플의 썩은 애정 행각을 지켜봐야만 할지 모를 불특정 다수 솔로들에게 말이야. 암, 구원이지. 구원이고말고. 그저께 광란 사건만 해도 그래. 너, 잘 운동하고 나오다가 느닷없이 호모들의 충격적인 키스 신을 목격해야 했을 노말 남정네들의 심정을 생각해본 적 있냐? 차마 말은 못 하고…… 그렇지. 그 인간 덩치가 보통 덩치야? 얼굴은 조낸 잘나서, 가다 잡는 건 또 어떻구? 살벌하기가 조폭 저리 가라 아니냐고? 차마 싫은 내색이나 할 수 있었겠어? 그 순진한 사내들이 받았을 마음의 스크래치를 상상하니 이내 가슴까지 연민으로 처연해진다, 야.”

“솔직하게 말해. 선배 호모포비아지?”

“애먼 남의 정체성은 매도하지 마시고.”

“자꾸 호모, 호모, 그럴 거야, 선배? 아가 듣는데 찔리지도 않아? 엄마가 돼가지고 말이야…….”

“호모가 어때서? 뽀송뽀송 산 교육이고만. 울 장군이, 나중에 혹시 호모 되더라도 절대 니들처럼 민폐는 끼치지 말란 소린데.”

“선배, 정말…….”

“하여간 니네 호모들은 너무 민감해서 탈이야. 자격지심은 하늘을 찌르고, 겁도 지지리는 많지. 뭐, 아직은 세상이 가혹하게 구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아직이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야. 인간 문명이 멸망하지 않는 한은. 그러니까 장군이는 절대 게이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흥, 난 호모라도 개의치 않게 강한 사내놈으로 키울 거다, 뭐. 세상보다 강하면 세상이 주는 상처쯤은 가볍게 떨쳐버릴 테니까. 날 닮았으면 키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긴 하지만.”

“하하, 하긴 선배 성격만 같으면 게이라도 별 걱정 없긴 하겠네.”

“미심쩍긴 해. 이놈 봐. 젖만 물려주면 마냥 얌전하거든? 잠도 엄마 자는 시간에 같이 딱딱 자주니 완전 천사야, 천사. 잘 울지도 않고. 엄마 속 안 썩이려는 거 보면 영락없는 앙드레 복사판이지.”

“……예뻐…… 정말 인형 같아…….”

“이목구비도 완전 앙드레판이지? 나 닮은 데라곤 입술이랑 머리카락 색깔뿐인 거 같아. 그지?”

“……어어. 선배 닮은 데는 잘 모르겠다. 그냥 백인 애기 같아. 선배 닮았어도 무척 예뻤을 텐데.”

“크크크, 그야 물론 오주희 여사도 한미모 하시긴 하지.”

“앙드레 씨 진짜 사람 좋더라…… 선배는 정말 결혼 잘한 거야…….”

“숙맥이지. 착해. 바보스러울 정도로.”

“어째 자랑으로 들리네?”

“자랑 맞아. 장군이도 강하게 크면 좋겠지만, 앙드레 복사판으로 자란대도 별 불만은 없어.”

“팔불출.”

“어쭈구리? 팔불출은 누가 팔불출인데? 웬 질 나쁜 스토커 귀신한테 홀려서는 간도 쓸개도 다 빼준 등신이 어디 누구였더라?”

“…….”

당장 찌그러져 입을 다물 수밖에. 조금 반격을 해볼라치면 이리 일거에 철퇴를 날려버리는 여자를 어찌 당할쏘냐.

디링, 디링∼∼디리리리링∼∼∼∼.

머쓱해진 심사를 찻물을 홀짝이는 것으로 다스리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 벨이 울렸다.

“누구 올 사람 있었어? 지로드 씨는 아직 오실 때 안 됐잖아?”

무의식적으로 앉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여자를 일별했다. 혹시 아들 집에 갔다는 어르신들이 돌아오신 건가 싶어 말투도 조심스러워졌다. 여자는 잠자코 품 안의 아가를 소파 위에 내려놓더니 젖을 물리기 위해 풀었던 원피스 단추를 단정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목 근처에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도 슬쩍 가다듬곤 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인환도 덩달아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서야만 했다.

“……중요한 손님인가 보지?”

여자치곤 꽤 진중해진 분위기에 거듭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중요한 손님이지. 네게 미리 말 안 한 건 손님 쪽에서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서야. 워낙 기사도 정신이 철저한 분이라야 말이지. 소중한 사람을 곤란에 빠트릴 수는 없다나?”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여자가 적선하듯 던져준 대꾸였다. 심장 부근이 이상하게 옥죄어들었다. 여자로부터 즉답은 못 들었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얼굴로 흐르던 혈류가 갑자기 더 많아진 듯, 미미한 열기가 느껴졌다. 무심코 마주 쥔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도 같았다. 지난 2주 내내, 자신은 어쩌면 이런 예상치 못한 행운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죄책감에 가득 차서는, 저 ‘전화벨’ 소리를 이를 악물고 보이콧 하는 동안 내내.

인환의 시선이 빨려들듯 여자의 동선만을 따라갔다. 여자가 아니라 자신이 손님을 맞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벅차오르는 기대감과 기쁨에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나마 여자가 현관 복도와 이어지는 사각 지대로 들어서자, 인환은 그조차 따를 수 없게 되었다. 잔뜩 곤두선 신경은 이젠 온통 청각으로만 몰려들었다.

희미하게 도어록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집주인과 손님 사이에 인사말이 오가는지 두런거리는 말소리들도 이어졌지만,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40평이 넘는 너른 거실이었다. 현관까지 제법 거리가 있는데다, 현관과 거실을 가르는 이중문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이제라도 현관 쪽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어차피 거실로 들어올 이들이니 그냥 이대로 서서 기다려야 할지, 소파 근처에서 얼음땡이 된 인환은 여전히 갈등하고 있었다. 몹시 긴 듯도 하고 빠른 것도 같은 초조한 몇 분이 그렇게 흘러갔다. 이윽고, 현관 복도와 이어지는 거실 끝에 좀 더 명확해진 말소리와 더불어 세 사람의 인영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살구색 임부복을 걸친 자그마한 여자를 따라 훤칠한 덩치의 남자 둘이 거실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한쪽은 자신의 소중하고 소중한 수호천사인 ‘남자’였고, 다른 한쪽은 처음 보는 벽안의 외국인 사내였다. 사내의 어깨에 매달린 커다란 수동 카메라 가방을 보니 기자 같았다. 인환의 게걸들린 시선은 여자의 어깨 너머, 그리운 얼굴을 향해 단숨에 달려들었다. 굳어버린 다리완 달리 제 기능을 해주는 눈동자가 얼마나 다행인지!

“……김 선생님…….”

시선이 마주쳤다.

활처럼 휘는 아름다운 눈꼬리와 움푹 볼우물이 패며 퍼지는 남자의 살인미소를 따라, 인환 역시 웃으려고 했던 것 같다. 따스한 온기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나지막한 바리톤의 부름을 따라 인환 역시 입술을 벙긋거리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는 남자가 몇 걸음 더 거실 안쪽으로 다가선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아가와 산모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과도한 빛의 공간은, 반대로 남자에게 깃든 어두운 심연을 잔인할 정도로 낱낱이 까발려주었다.

남자는 아이보리색 세미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노타이의 흰색 마오 칼라 셔츠를 슈트 안에 걸침으로써 남자 특유의 완벽하게 댄디하면서도 러프한 매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도회적인 세련미가 풀풀 풍기는 울프 컷의 매혹적인 헤어스타일도, 보기 드문 장신에, 보기 드문 화려하고 아름다운 존재감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모든 ‘그대로’인 것들은 남자를 할퀴고 간 어떤 심각한 훼손을 완벽하게 커버해주기엔 도저히 무리였다.

“……아아……!”

신음 같은 한숨이 인환의 입술 틈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누군가로부터 호되게 뺨을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우릿한 아픔이 심장 근처를 사납게 할퀴며 지나갔다.

한 달 보름 만에 마주한 남자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퀭하게 들어간 두 눈두덩이며 빨갛게 충혈이 된 눈시울, 중병 환자처럼 핏기 잃은 창백한 낯빛이며 심하게 홀쭉해진 양쪽 뺨들은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게 균형이 잡혀 있던 남자의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형편없이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살이 빠지면 저 지경으로 보이는 걸까? 아니, 저건 단순히 몇 킬로그램의 살이 빠지거나 혹은 빠지지 않거나의 의미가 아니었다. 인환이 모르는 호된 무언가가 남자에게 심각한 대미지를 입힌 것이다. 어떤 중한 질병 때문일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외양은 형편없었지만 남자 특유의 강렬한 생기와 활력은 여전했다. 중병에 걸렸다면 아무리 남자라도 저런 넘치는 에너지는 뿜어낼 수 없을 것이다. 일이 매우 바쁘다고 했었다. 2주 전의 통화에서. 그렇다면 그 바쁜 일 때문에? 아니, 그도 아닌 것 같다. 한 달 보름 내내 잠도 거의 안 재우고 음식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죽어라 직원을 혹사시키는 악덕 기업주가 존재한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답은 뻔했다. 훼손의 원인은 어떤 정신적인 것. 지독한 정신적 상처이거나, 소중한 무언가의 상실!

맙소사, 도대체 지난 한 달 보름 동안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남자가 저리 혹독하게 담금질을 당할 동안 자신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아아, 그렇지. 그랬구나. 남자의 전화나 피하는 지독히 이기적이고 가증스러운 짓을 저지르고 있었구나. 자기 혼자만 편하자고 별것도 아닌 일로 남자의 전화를 모른 체했지. 그것도 오로지 자신의 일과 관련된 용건이었을 전화를!

그랬다. 지난 2주간, 몇 번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지만 인환은 받지 않았다. 오래도록 이어지는 벨소리와 함께 발신자 표시 액정에 떠오른 ‘김강원’이라는 이름은 볼 때마다 창처럼 인환의 심장을 찌르곤 했었다. 그러나 경호원이 고용되고, 스포츠센터 출입 이외에는 소소한 외출마저 제한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서 차마 남자의 전화를 받을 수는 없었다. 전처 문제로 잔뜩 예민해져 있는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지난번 통화로 남자의 용건을 대충 짐작한 탓도 있었다. 뉴욕 타임스 기자와의 인터뷰 건.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 같은 것은 애초부터 인환의 관심 밖인 영역이었으니까. 그래도 남자와 통화를 하게 되면 분명 마음이 약해져 약속을 잡을 것이고,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외출 허락을 받아야 하는 난감한 일도 생길 터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처한 묘한 상황을 남자에게 시시콜콜 알리는 건 또 죽기보다 싫었다. TV 드라마 「사랑과 전쟁」을 그대로 리메이크한 것 같은 흉악한 치정극을, 게다가 개중 가장 추한 역할을 맡은 자신의 처지를 남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같잖은 자존심, 아니, 이기심이었다. 저열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기심. 그런 자신을 위해 남자는 받지 않는 전화를 지극정성으로 며칠째 걸고, 그도 모자라 오주희를 통해 이런 자리까지 마련했다. 그에게 인터뷰 사실을 숨기거나 혹은 거짓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인환의 곤란한 상황까지를 배려해, 오주희에게 비밀을 지켜달라는 부탁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책임을 남자 혼자 뒤집어쓸 요량으로.

“……선생님, 그간 잘 지내셨죠? 오 선생님 통해서 대충 사정 얘긴 들었습니다. 인터뷰는 힘들겠구나 낙심하고 있었는데 어제 오 선생님 전화를 받았어요. 오늘 댁으로 선생님을 초대하셨다고요. 저도 꼭 뵙고 싶다고, 실례인 줄 알면서 무리하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친구도 함께 왔어요. 한 시간 이상은 빼앗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인터뷰라 생각지 마시고 그저 편한 친구처럼 대해주시면 됩니다.”

담배 냄새와 스킨 냄새가 어우러진 강렬한 수컷의 체취가 폐부 깊이 흠씬 파고들었다. 어느새 인환의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활처럼 휘어진 눈시울과, 오른쪽 볼우물이 움푹 패는 매혹적인 살인미소를 만들어내며. 남자의 내면 깊이 침윤해버린 어두운 심연 따윈 일절 드러내지 않는 그것은, 형편없이 초췌해진 남자의 얼굴만큼이나 인환에겐 커다란 상처였다. 남자는 홀로 의연하게 견디고 있었다. 인환의 개입 따윈 철저히 차단한 채.

‘자각’은 순간이었다. 자신은 남자의 고통에 대해 알지 못하며, 또한 알 자격도 없다는 것을. 함께 아파할 권리조차 상실했다는 것을.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은 남자를 배신했다는 것을. 아니, 앞으로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거듭 배신하리라는 것을…….

소중하고 소중한 수호천사라고? 서로의 등이 붙은 쌍둥이? 같은 ‘방’을 목격한 그림 형제? 가증도 이런 치 떨리는 가증이라니!

“선생님?!”

뻣뻣하게 굳어 있던 두 다리로부터 슬그머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 눈앞이 새하얘진 것도 같았다. 잠시 몸이 휘청거린다 싶더니, 양쪽 어깨로 저릿한 아픔이 파고들었다. 남자의 커다란 두 손아귀에 어깨가 틀어잡힌 때문이었다. 아프게 죄어드는 강한 악력에서 남자의 깊은 우정과 염려가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아팠다.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발겨지는 것처럼 아팠다. 한 주먹의 모래알이 굴러다니기라도 하는 걸까? 눈꺼풀 안쪽이 몹시도 뻑뻑해졌다. 다행히 눈물은 단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하신 겁니까?! 어지러우세요?!”

“……인환아?”

“일단 여기 앉아보세요! 빈혈인지도 모르니까 일단 앉으신 다음에…… 선생님?”

“걱정 마세요, 김 선생님. 김 선생님 모습 보고 많이 놀라서 그럴 거예요. 저도 놀랐는데 인환인 오죽하겠어요. 원래 디따 겁 많은 종자랍니다, 얘가.”

“아……!”

“지금까지 저랑 잘만 놀고 있었는걸요. 진정되면 얼굴에 핏기도 돌아올 테니 잠시 두 분이서 말씀 나누세요. 그동안 전 옆방에서 그레이디 기자님과 수다 떨고 있을게요.”

“……고맙습니다, 오 선생님. 여러 가지로 폐를 끼치게 되네요.”

“폐라뇨. 저 아직 김 선생님 쪽을 응원하고 있습니다만?”

“하하, 그러셨던가요? 요즘 좀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갑자기 천군만마라도 얻은 기분이네요.”

“자포자기하신 건 아니죠? 나약한 남자 따윈 취미 없답니다.”

“하하, 제 사전에도 자폭은 없습니다.”

“자세는 따봉이신데 그런 얼굴로 나타나시면 아무래도 의심을 하게 되죠.”

“진짜 별일 아닙니다, 오 선생님. 일이 바쁘기도 했고 좀 별나게 가을을 앓는 것뿐이랍니다. 가을엔 입맛 대신 술맛이 당기는 체질이죠.”

“가을남자?”

“요컨대 바로 그겁니다, 하하.”

“흠, 그렇게까지 속보이는 변명을 던져주신다면야…… 일단은 믿어보도록 할까요?”

오주희가 소파 위의 아가를 품에 안는 게 보였다. 오주희 뒤에 서 있던 벽안의 사내를 향해 남자가 눈짓을 주자, 사내는 막 서재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오주희를 따라나섰다.

“……아니…….”

움찔.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남자의 손아귀에서 설핏 전율이 흘렀다. 오주희 쪽을 향해 있던 남자의 시선도 거의 동시에 인환에게로 되돌아왔다. 한숨처럼 낮은 속삭임이었건만 남자는 정확히 알아들은 것이다. 썩은 양심을 헤집는 남자의 거울 같은 시선이 가만히 인환의 것을 물어왔다. 남자의 일렁이는 동공이 절절하게 말해주는 자신에 대한 염려와 헌신, 그리고 그 이상의 조심스러운 거리감에 왈칵 목이 메었다. 남자의 손이 닿아 있는 양어깨가 불이라도 붙은 것마냥 뜨겁게 느껴졌다. 더는 견딜 수 없어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선생님?”

“……지금 당장 인터뷰부터 하고 싶습니다만…….”

“인환아, 너 지금 얼굴 시퍼래. 김 선생님 얼굴도 완전 호러지만 너도 못지않아. 물 한 잔이라도 마시고 진정한 다음에 시작해도 늦지 않아.”

“그래요, 선생님. 오 선생님 말씀대로 급할 건 없으니…….”

“아뇨. 저 때문에 멀리서 오신 기자님께 폐를 끼치긴 싫습니다. 저도 가능한 한 빨리 집에 돌아가봐야 하구요.”

“…….”

“……경호원들 퇴근 시간 전까지는 끝내야 하니까요.”

아, 자신도 할 수 있구나. 독하고 쌀쌀맞게, 한 대 갈기고 싶을 만큼 밉살스럽게 말할 수 있구나. 그것도 이리 소중하고 소중한 남자를 상대로.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일찍 오는 건데요, 김 선생님. 이번엔 좀 경솔하셨네요.”

“…….”

“야, 장인환! 너 왜 그래?!!!”

“선배도 너무하네? 내가 그렇게 변변찮은 놈이었나? 이게 뭐 큰일이라고 깜짝 쇼야, 깜짝 쇼가. 그냥 우리 위야한테 한 마디만 더 하고 오면 되는걸. 오늘 인터뷰 있다고.”

“야, 당장 싸가지 닥치지 못해?!”

“솔직히 인터뷰 따윈 질색이지만, 김 선생님께서 저를 위해 애써주시는 거라 거절하기 힘들었어요. 앞으론 웬만하면 이런 직접 인터뷰는 지양했으면 합니다. 보도 자료만으로 장사가 안 된다면 그게 제 그림의 한계겠지요. 무슨 상품도 아니고, 재능은 쥐뿔도 없는 주제에 언론에다 대고 떠벌떠벌 과장 광고나 날려대는 화가들, 진짜 밥맛 아닙니까?”

“장인환!!! 너 환장했니?!!! 이게 무슨 무례야!!!”

“선배나 목소리 낮춰. 기자님 한국말 모르시는 거 같은데 선배 땜에 산통 다 깨지겠어.”

“야!!!!”

“장군이도 놀라 칭얼거리잖아. 무슨 산모 목소리가 저렇게 크담. 그리고 무례는 뭐가 무례야. 김 선생님은 한 식구나 마찬가진데 솔직한 말 한 마디도 못 하나?”

남자의 악력에 무의식적인 힘이 가해지는 게 느껴졌다. 양쪽 어깨뼈가 부서지는 것만 같은 통증이 일었지만 무시했다. 정말 부서지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표독하게 뇌까렸다. 정수리 근처로 쏟아져 내리는 남자의 호흡이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단추가 두 개쯤 풀린 남자의 셔츠 깃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틈으로 살짝 엿보이는 남자의 쇄골 선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어째서 이 남자는 모든 게 다 아름답기만 한 거냐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파.”

“…….”

“어깨 아파요.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놔주시죠, 김 선생님.”

“아아……!”

나지막한 신음성과 함께 남자가 채찍을 맞은 것마냥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즉시로 양어깨를 죄던 어마어마한 악력이 사라졌다. 약간 더 시선을 올리니 남자의 턱 끝이 보였다. 푸릇푸릇한 수염 자국이 선명한, 예쁘기 짝이 없는 턱선이었다. 예쁜 턱도, 그 조금 더 위,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잘생긴 입술도 안개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러고 보니 제가 경솔했네요. 많이 당황하실 줄은 알았는데…… 생각이 짧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

“……말씀하신 뜻 다 이해합니다, 선생님. 앞으로 이런 심층 인터뷰 같은 건 자제하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그림은 그런 게 아니에요. 사실은 보도 자료조차 필요 없는 절대적인 힘이 거기 있지만 제가 세상에다 좀 더 빨리 알리고 싶은 욕심에 자꾸 무리를 하게 되나 봅니다. 그간 많이 불편하셨다면 이김에 사과드릴게요. 부디 용서해주세요, 선생님.”

“사과는 무슨 사괍니까! 저 새끼 지금 제정신 아니라니까요!”

“절대적인 힘이라…… 그것도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는 얘기겠죠. 김 선생님 평가는 늘 칭찬 일색이라 제 귀엔 달콤하기만 합니다만, 천재병 든 얼간이도 아니고 세상눈이 다 김 선생님 같다고는 절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우, 내가 미쳐!!! 저게, 저게, 저게……! 야아!!!”

“예, 맞습니다. 세상눈이 다 저 같으면 그것도 무서운 일이죠. 그럼 저 밥줄 떨어지게요, 하하…….”

“장인환, 너……! 너 증말!!!”

역시 대단한 남자였다. 남자의 안목을 깔아뭉개는, 프라이드 강한 큐레이터라면 도저히 참기 힘들 지독한 모욕을 주고 있는데도 남자는 의연했다. 인환의 작품 세계를 향한 절대적인 애정 때문인지, 아니면 한두 마디 신랄한 언사로는 쉬이 깰 수 없는, 지난 몇 달 동안 다져온 둘 사이의 끈끈한 신뢰와 유대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런 패악을 통한 사과 방법밖에 모르는 인환의 우둔함과 나약함을 남자가 사려 깊게 이해해서일 수도 있지만, 더 이상은 무엇도 알 수가 없었다. 한때는 그저 한 공간에서 함께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속속들이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서로를 향해 필사적으로 벽을 쌓기로 작정을 한 지금, 인환이 기댈 발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 선생님, 지금 인터뷰 시작하니까 자리 좀 피해주시겠습니까? 오래 폐를 끼치진 않겠습니다.”

“……이거 참…… 김 선생님…….”

“가만있자…… 지금이 3시 20분이니까 4시 반까지는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끝나면 저희들은 바로 돌아갈 테니 장 선생님과는 천천히 더 말씀 나누세요.”

“김 선생님과 그레이디 씨를 위해 근사한 가정식 디너를 준비했는데 저 등신이 찬물을 끼얹어버리네요. 죄송합니다. 저 미친 새끼를 대신해 제가 사과드릴게요. 저래서야 인터뷰인들 제대로 마칠 수 있을까 싶지만, 김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하하, 저녁은 다음에 또 초대해주십시오. Hey, Jason……!”

남자가 기자를 소파로 불렀고, 오주희는 아기를 안고 서재로 사라졌다. 남자의 통역으로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받는 사이 잠시 사라졌던 여자가 다시 나와 거실 협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세 사람을 위해 차를 내왔다. 몇 분 전에 다디달게 목으로 넘어가던 작설차였다. 두 잔째의 녹차는 그러나 더 이상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가 다시 서재로 사라지고 나서야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우려를 가장한 여자의 저주와는 달리 인터뷰는 꽤나 성공적이었던 것 같았다. 벽안의 기자는 생각 이상으로 섬세했고 또한 예리했으며 지성적이었다. 몇 안 되는 질문은 핵심을 꿰뚫었고, 서로 간에 오간 토론에 가까운 공방들 사이에서 기자는 인환의 작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고도 세심하게 건져 올리고 있었다. 역시 남자의 친구답다고, 인환은 인터뷰 내내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날 밤에도, 또 그다음 날 밤에도, 또또 그다음다음 날 밤에도, 그 한 시간 남짓 동안 정확히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는, 인환은 도무지 제대로 기억을 해낼 수가 없었다.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불길이었다. 활활 타는 강렬한 시선의 불길.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나지막한 바리톤으로 어미닭처럼 인환을 감싸듯 통역을 해준 남자. 인환의 얼굴로 내내 절절한 시선을 보내고 있던 자신의 수호천사뿐이었다. 그네의 몸짓, 그네가 내쉰 나지막한 한숨 소리, 그네가 입고 있던 슈트 자락에 잡힌 자잘한 주름들, 담배 냄새와 섞인 코롱 냄새, 때때로 숱 많은 머리카락을 긁어 올리던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들 같은, 지극히 사소한 것들뿐이었다. 사소해서 더 애틋하고 소중한 그런 것이었다.

물론 끝끝내 기억해낼 수 없다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인터뷰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전 세계적으로 자신의 헛소리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포장돼 까발려지는지는 일말의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 다만 아쉬운 건 남자의 눈빛뿐. 차마 마주 바라볼 수가 없어, 끝까지 확인할 수 없었던 남자의 마음뿐. 남자가 자신을 용서했는지, 남자의 절대적 선의만을 기생충처럼 빨아먹는 에고덩어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포용해주었었는지, 끝까지 확인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인환은 가장 가슴 아팠다. 자신의 그림을 매개로 남자와 한 넋으로 공명했던, 그 벅찬 희열의 순간을 또다시 체험하게 되는 날이 올지, 다만 그것만이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디링, 디링∼∼디리리리링∼∼∼∼.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던 것 같다.

공식적인 인터뷰가 끝나고 기자의 요청으로 몇 방의 사진 찍기마저 거의 마쳤을 무렵이었다. 현관 벨이 울렸고, 거실의 세 남자가 현관 쪽을 주시하며 엉거주춤 일어서는 사이, 여자가 서재에서 나왔다.

“다 끝나셨나 봐요?”

현관 쪽으로 걸어가며 여자가 혼잣말을 하듯 가볍게 물어왔다. 맞은편의 남자가 자세를 바로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막 뱉어진 숨소리 하나만으로도 남자의 입가에 머문 미소를 알 수 있었다. 보자마자 인환의 가슴을 찢어놓을, 가슴 시린 살인미소였을 것이다. 잠시 여자와 현관 쪽으로 향했던 남자의 시선이 여자가 사각 지대로 사라지자마자 다시금 인환에게로 되돌아왔다. 뜨겁고 습한 열기였다.

“……이 친구가 저랑 함께 있는 모습도 몇 방 찍자고 하네요. 괜찮을까요, 선생님?”

“…….”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한 시간 넘게 위악을 떨던 인환이었다. 더 이상은 단 한 마디의 말도 내뱉을 기력이 없어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남자의 강렬한 체취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든다 싶더니 양쪽 어깨 위로 불길이 느껴졌다. 흠칫. 파김치처럼 흐물흐물 늘어지려던 몸이 순식간에 바짝 긴장을 했다. 남자의 팔이 인환의 한쪽 어깨를 끌어안듯 어깨동무를 해온 때문이었다.

“%%#…… &&****#[email protected]@***……!”

2∼3미터쯤 떨어진 정면에서 기자가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기자의 단답형 요청이 연달아 쏟아졌다. 웃으라거나 이런저런 포즈를 잡으라는 요청임을, 남자의 통역이 아니라도 대충 알 수 있었다. 팡팡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가뜩이나 퍽퍽해진 눈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남자의 부드러운 숨결과 뜨거운 체온, 그리고 거의 끌어안다시피 상반신을 죄고 있는 남자의 악력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남자의 입술 끝이 스치듯 인환의 관자놀이 근처를 머물다 지나갔다. 너무나 찰나의 순간이라 그저 착각을 일으킨 것뿐일지도 몰랐다. 핏기 잃은 메마른 입술이었던 것 같은데 감촉은 깃털처럼 부드럽고 따스했다. 착각으로 치부될 만큼 찰나였을 뿐인데 남아 있는 감각은 낙인처럼 영원했다.

한계였다. 한계까지 날선 신경이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엉엉 울음을 터트리며 남자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싶은 욕망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다 끝난 건가?”

흠칫, 한쪽 어깨를 움켜쥔 남자의 손아귀에 다시금 엄청난 악력이 가해졌다. 회초리처럼 긴장하는 남자의 근육질 몸이 서로 밀착돼 있던 피부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다 끝난 거면 그만 떨어져주시지, 김 선생.”

인환은 홀린 듯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부신 플래시의 명멸 끝으로 온통 거무스름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상복처럼 새까만 색의 트렌치코트가 보였다. 오늘 아침 집에서 본 바로 그 트렌치코트였다.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실크타이, 폭군처럼 무도하게 거실 안까지 신고 들어온 검정색 양가죽 구두 또한 아침에 본 그대로였다. 잔뜩 절제되고 응축된 힘이라서 더 무시무시한, 근육질의 커다란 덩치도 마냥 그대로 조폭스러웠다. 흉흉하고 불길한 죽음의 아우라였다. 인환에겐 피부처럼 익숙하고 친밀한 그런 것이었다. 어째 덫에 걸린 듯한 막다른 심정으로 마주한 시선은, 그럼에도 지극히 평화로웠다. 큼직큼직 뚜렷한 이목구비가 표정 없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인환을 감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 와. 집에 가자, 장인환.”

담담한 명령은 자연스러웠다.

한동안 남자와 팽팽하게 시선을 얽고 있던 그가 비로소 인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싱긋. 시선이 마주치는 즉시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화사한 웃음이 퍼졌다. 아아, 역시 전자동이었다. 영원히 고장 한 번 안 날 초고밀도 센서였다. 열렬하고 기쁘고 설레는, 첫사랑에 빠진 자의 달콤한 열기가 춤을 추듯 일렁거렸다. 진짜 연인 같았다. 아니, 이미 연인이었다.

“인환아.”

착 가라앉은 바리톤이 유혹하듯 재차 명령했다. 침대 속에서나 흘러넘칠 듯한, 노곤하게 색기 어린 음색이었다. ‘연인’이 팔을 뻗자 저절로 몸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부서질 듯 어깨를 죄어오던 악력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휘청휘청 비틀대며 단 몇 걸음 만에 ‘집’에 안착을 했다. 힘없이 무너지려는 상반신을 단단한 근육질의 팔이 힘차게 품어 안았다. 순간, 그르렁거리는 듯한 짐승의 오만한 웃음소리를 설핏 들은 것 같았다. 낙인처럼 이마 위로 뜨거운 입술이 내리 꽂혔다. 축축하게 젖은 입술 틈으로 달큰한 피 냄새가 났다.

“다녀왔어, 마누라.”

즐거워서, 즐거워서 참을 수가 없는 듯, 문득 전율처럼 온몸을 떨며 ‘연인’이 가만히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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