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 2003년 9월. 김강원(金鋼圓) (86/129)

36. 2003년 9월. 김강원(金鋼圓)

“……미친 새끼! 미친놈! 어우, 내가 미쳐, 증말! 환장하겠네! 무슨 저런 자식이 다 있어! 어릴 땐 예의 바른 척 가식이라도 떨더니, 늙으니까 완전 인간 말종 막장 호로 새끼가 돼버리네! 드런 발을 어디다 디밀어, 디밀길!” 

여자가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가슴을 팡팡 치는 게 보였다. 여자는 무도한 불청객이 거실 바닥에 남기고 간 선명한 구둣발 자국을 노려보며 치를 떨고 있다. 그자가 연인을 품어 사라지고 나서도 한동안 얼이 빠져 있던 여자였다. 강원 자신에게도 현실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몇 분이었다. 여자 역시 불청객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있었던 모양으로, 느닷없이 뒤통수를 후려 맞은 쇼크를 다스릴 몇 분은 필요했던 모양이다. 작별 인사를 나눌 틈도 주지 않고 그자가 연인을 강탈해 간 지 2∼3분 남짓이 흐른 후, 여자는 화통한 기질답게 그제야 열화와도 같은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어우, 증말! 열 받아 돌아가시겠네! 귀신 스토커 자식! 눈 까뒤집으면 다야?! 아주 패 죽일 기세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구?! 내가 지 마누라를 유괴했어, 아님 지 마누라랑 바람을 피웠어?! 아니지, 아냐, 내가 무슨 뚜쟁이야?! 지 마누라 매춘 알선해주는 뚜쟁이냐구?! 일이잖아, 일! 미친 새끼가 완전 중증 의처증에 걸려서는, 집 안에만 꽁꽁 가둬둘 궁리만 하니까 나도 할 수 없이 그런 거잖아?! 저 새끼 저러다 인환이 그림도 못 그리게 하는 거 아냐?!”

고통이 지나치면 감각은 무뎌진다. 아니, 무뎌진다는 사실을 강원은 비로소 생생하게 절감한다. 여간해선 분이 안 풀린다는 듯, 그자를 향한 원색적인 욕설을 멈추지 않는 여자의 하이 톤도 마냥 아득하고, 옆에서 난처하게 웃고 있는 친우 제이슨의 모습도 그저 물속처럼 뿌옇게 보인다.

여자가 비로소 남아 있는 두 손님의 존재를 자각하곤 돌아보더니 미간을 찡그린 채로 웃는다. 남은 손님, 아니, 사실은 자신에 대한 곤혹스러움과 사과의 의미일 것이다. 그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무례했다고 여겨지는 연인의 도발적인 발언들에 대해서. 그러나 여자는 틀렸다. 연인의 과장된 위악은 자신에게 아무런 상처조차 되지 못한다.

여자는 알 수가 없으리라. 연인과 자신 사이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를. 아니, 어떤 곳에 함께 도달해 있는지를. 비록 그것이 찰나의 것이고, 물질 차원에서 증명될 수 있는 현상도 아니지만, 그것이 인간의 영혼에, 존재에,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단 한 번만이라도 타 존재와 그 울림을 공명한 자는 어떤 세속적인 타락과 훼손이 와도 이미 거듭나버린 스스로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지 못한다는 것을.

고통은,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이 극심한 고통과 상처는, 그러니까 다른 것에 원인이 있다. 초월의 순간이 주는 지복(至福)은 지독하다 못해 끔찍한 중독성이 있다. 그것이 저급한 차원의 마약이나 술, 게임이든, 아니면 좀 더 고급한 종교적, 예술적 초월이든 다 마찬가지다. 지복의 체험이 완벽에 가까울수록 그것이 제거되었을 때의 금단 증상이 주는 고통은 그만큼 더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이 현재 강원 자신의 비극이다. 자신은 현재 금단 증상을 겪는 중이다. 지복을 주는 존재가 사라졌기 때문에. 아니, 사라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아니, 아니, 사실은 잠깐 숨바꼭질을 하는 중이기 때문이라고, 애써 고쳐 생각하기로 한다. 숨바꼭질이 끝나면 ‘나 여기 숨어 있었는데!’ 하고 다시금 짠 나타날 테니까. 그래야 산다. 영영 이런 고통 속에 방치되리라 믿는다면 자신은 살 수 없다. 살 수 없을 것 같다.

며칠 전에 이렌느와 통화를 했다. 아들 폴의 학교 문제 때문에 걸었다고 하는데, 딱 들어도 핑계지 싶었다. 폴의 양육에 관한 한, 결혼 생활 당시에도 전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또한 현재 그녀 곁에는 동거 중인 연인이 있다. 애초부터 그닥 좋은 아버지상이 아닌 강원은 폴에 대한 의논 상대로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단 몇 마디 대화를 통해 그녀의 통화 목적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이 걱정돼서 전화를 한 것이다(그녀에게 자신의 현재 상황을 시시콜콜 까발린 범인은 분도 놈이었고, 다음 날 출근한 강원은 분도 놈 명치에 한 방을 먹이는 것으로 놈을 자비롭게 응징했다).

첫사랑인 것 같다고 했다. 자신에게 현재의 연인은 첫사랑인 것 같다고. 그녀의 단정에 강원은 코웃음을 치는 것으로 부정했지만 그녀는 안다고 했다. 그녀와 연애하던 시절에도 강원은 예술을 더 사랑했다고. 만약 강원이 당시 그녀를 사랑했다고 생각했다면, 또 그녀 전에 불특정 다수 중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여겼다면 그건 다 가짜 사랑이었을 거라고 했다. 그녀에 대한 강원의 사랑 역시 가짜였듯이.

―당신은 예술을 연인으로 삼았었어. 아마도 아주 오래전부터. 아니, 아예 결혼까지 했다고 봐야 정확할 거야. 나는 정부 같은 거였지.

그녀가 조심스럽게 주장했다. 예술과 결혼한 남자, 아니, 예술을 연인으로 둔 남자는 일생 인간을 상대로는 사랑을 할 수 없으리라고 여겼단다. 그런데 이번에 그녀의 판단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나. 강원 자신은 단지 여태껏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을 뿐이라고. 이제야말로 호되게 첫사랑을 앓는 것 같다고. 힘들겠지만 사랑이란 게 그렇다고, 사랑하는 이에게서 받는 상처가 그런 거라고, 유별날 것은 없다고 그녀는 냉정하게 덧붙였다. 사랑이 마약이라 여겨진다면, 그래서 금단 증상이 그토록 아프고 괴롭다면 그냥 끊으면 된다고. 끊기 힘들지만 끊고자 독하게 의지를 세운다면 결국 끊어진다고, 그녀 식대로 냉담하지만 애정 깊은 어조로 자신을 위로했다.

이렌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만약 연인이 그저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또한 연인과 자신의 관계가 예술이 배제된 평범한 이들의 그것과 똑같았다면. 아마 그랬다면 문제는 훨씬 단순했을 것이다. 금단 증상도 이리 심각하지 않을 것이고, 고통의 과정을 거쳐 마약을 완전히 끊어내기도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렌느 또한 모른다. 알 수가 없으리라. 연인과 자신 사이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를. 아니, 어떤 곳에 함께 도달해 있는지를. 도달해 갔었는지를.

기왕에 예술과 결혼한 사내였다. 예술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신이 예술 자체인 특별한 인간을 만났다.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숙명 같은 거였다. 그런데 그저 마약을 끊으면 된다고? 사랑을 잘라내면 그만이라고? 등이 붙은 샴쌍둥이다. 머리가 둘인 그들은 같은 심장과 같은 허파와 같은 위장을 공유한다. 심장의 반을, 허파의 반을, 위장의 반을 잘라내고도 그들이 온전히 살아갈 수가 있을까? 과연 그런 인간이 존재할 수가 있을까? 만약 존재한다면, 강원 또한 살아갈 수 있다. 심장 반쪽과 허파 반쪽과 위장 반쪽만을 가진 채로.

여자의 집에서 나와 제이슨을 데리고 갤러리 현대로 돌아왔다. 남은 일거리를 처리하고, 퇴근하는 길에 제이슨을 10월 기획전 팀 회식 자리에 참석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제이슨은 르네나 다른 몇몇 큐레이터들과는 안면을 텄지만, 아직 소개가 필요한 작가들과 현대 직원들은 많이 남아 있었다. 제이슨 초청의 제일 목적은 연인의 소개지만, 실제 공식적인 목적은 ‘한국 및 아시아 미술계의 전반적인 동향’이라는 뉴욕 타임스의 기획 기사였다.

돌아오는 내내 침묵을 지켜주는 친우가 고마웠다. 직접적으로 언질을 준 것은 아니지만, 제이슨은 자신이 연인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또한 현재 자신이 얼마나 참담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그에 대해 걱정은 많지만, 그래서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긴 하지만, 강원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한 먼저 들이댈 만큼 무신경한 친구가 아니었다. 그도 고마웠다. 물론, 고맙긴 해도 모레면 뉴욕으로 출국하는 친우의 사정이 반가운 것도 사실이었다. 현재 자신에겐 일체의 인간관계가 버거운 짐에 불과했다.

10월 기획전이 코앞이라 갤러리는 건물 안팎으로 차들과 인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시장 통을 방불케 하는 난리굿에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그러나 이제 이것도 며칠만 있으면 끝이다. 강원이 하는 일은 대개 기획 단계 업무가 주라, 막상 일정이 가까워지면 말단들이 고된 대신 강원은 외려 한숨 돌릴 수 있다. 기획전을 끝내고는 사나흘 휴가라도 내서 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정말 몸이 완전히 망가질 것이다. 아직은 절망하고 싶지 않다. 연인을 완전히 강탈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향기는 여전하다. 강원의 주위에서, 그저 약간 숨을 들이켜는 것만으로도 연인이 남긴 자취는 금세 찾아낼 수가 있다. 그렇지. 저기 걸려 있는 저 ‘붉은 미인’만 해도 그렇지. 2층 전시관으로 이어지는 로비 정면 벽에는 연인의 F150호짜리 「레드」가 위풍당당하게 걸려 있다. 현대 법인 쪽 이사진들이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부랴부랴 구입한 작품들 중 한 점이었다. 연인의 개인전이 끝나고, 판매가 덜 된 작품은 현재 대부분 마인 아트 쪽으로 되돌아갔지만, 갤러리 현대 사옥에서도 연인의 작품은 쉬이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네 점의 작품을 구입해 숨겨둔 강원의 집에선 말할 것도 없었다. 언제 어느 때든 마음만 먹으면 연인의 작품을, 아니, 혼을 대면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이 요즘 강원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님…… 선생…… 님…… 선생님!”

문득 날카로운 부름이 강원을 현실로 일깨웠다. 막 꿈에서 깬 듯한 얼떨떨함을 느끼며 강원은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침울한 낯빛의 분도 놈이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왜?”

스스로도 좀 멍청하게 들린다는 자각을 하며 건성으로 대꾸를 주자 놈이 잔뜩 이맛살을 찌푸린다.

“……또 5분이나 거기 서 계셨어요. 제가 발견한 것만 5분이니까 제가 발견 못 한 시간까지 합산하면 진짜 얼마일지 저도 장담 못 해요.”

놈의 대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저절로 ’붉은 미인’을 향하려던 시선이 도로 놈에게 고정됐다. 문젠가? 아, 그래. 문제라고 했지, 놈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좀 병적이니까. 르네도 심각하게 걱정하며 충고를 주었었다. 한 달 만에 9kg이 내렸다. 지방이 거의 없는 자신의 몸에서 9kg의 부재란 아무래도 사람들 눈에 뜨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내리게 된 것도 당연했다. 전시 상황에 준하는 대규모 기획전 준비를 앞두고 수많은 작가들과 관람객들과 딜러들, 덤으로 현대 직원들까지 수도 없이 오가고 있는 로비나 복도에서 넋을 잃은 채 특정 그림만을 바라본다는 건, 스스로가 생각해도 많이 심각한 문제였다. 구설수의 수준이 아직까지는 강원 개인사에 맞춰져 있지만(이를테면 강원이 어떤 특정 여자에게 실연을 당했다든가, 혹은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든가, 아니면 중병설 등등), 이러다간 자신이 틈만 나면 홀린 듯이 바라보곤 하는 작품의 작가까지 구설수에 포함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문제를 인식하는 것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서로 별개의 영역인 모양이었다. 르네나 분도 놈이 몹시 걱정하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도 충분히 위험성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의지가 다스려지지 않는다. 특히 오늘처럼 완벽하게 카운터펀치를 맞게 된 날엔 그야말로 반쯤은 넋이 나가버리고 만다.

“……아아, 그래. 알았네.”

‘붉은 미인’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픈 욕망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A전시관으로 들어서려는데 분도 놈이 팔을 잡는다.

“A전시관 세팅 제가 다 확인했어요. 르네 감독님 오케이 사인까지 떨어졌으니까 선생님은 그만 댁에 돌아가서 쉬세요. 그레이디 기자님도 제가 클럽으로 모실게요.”

잠시 멍하니 놈의 얼굴을 굽어보다가 피식 웃음이 터졌다. 곰처럼 커다란 덩치를 하고서 사탕을 뺏긴 어린애처럼 울 것 같은 얼굴이라니. 잔뜩 구겨진 슈트며 땀에 푹 절어버린 얼굴만 봐도 놈이 오늘 얼마나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지난 두어 달 동안 내내 그러했듯이.

“……까분다, 노분도.”

“에이, 씨! 제가 다 처리했다니까요!”

“요즘 제법 기특하게 해낸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그간 자네가 일으킨 트러블이 얼만데 나더러 자넬 믿으라는 건가, 분도군? 응? 언제 또 까다로운 작가들이며 후원자들 쫓아가 머리 조아리게 만들지 누가 알아? 내 신용을 받아먹으려면 자넨 아직 한참을 멀었다구.”

“댁에 가서 쉬시라니까요! 감독님도 그러라고 하셨단 말예요!”

“어쭈, 벌써부터 윗전에 손 비빌 줄도 알고 말야∼∼∼.”

“선생님!!!”

뭐라고 더 악악거리는 분도 놈을 뒤로하고 A전시실로 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일은 구원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은 맛 좋고 영양가 높은 양식이었다. 생각을 끊어내야 했다. 절망할 여유 따윈 주지 말아야 했다. 끝이 아니라고,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바빠서 시작조차 못 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달랠 믿음이 필요했다.

‘삼색 코너’ 시리즈 1이 강원 앞으로 배달되어 온 것은 인터뷰가 있던 날로부터 나흘 뒤였다. 마인 아트 쪽의 미술품 운송 전용 차량까지 동원해 배달될 만큼 크기도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도 정성껏 포장이 된 모양새가 마치 무슨 헌정품처럼 보이게 했다. 짐작대로, 겹겹이 공들여 포장된 상자를 풀자 카드가 나왔다. 연인이 쓴 것이었다.

‘김 선생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카드에 적혀 있는 것은 그 단 한 문장뿐이었다.

수전증 환자처럼 부들부들 손이 떨렸다. 눈앞이 핑그르르 돌며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기대감과 공포감이라는 양극단의 감정이 동시에 넋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가빠진 호흡을 간신히 고르며 마지막 보루인 광목 보자기를 풀자 캔버스가 나왔다. 완성된 지 얼마 안 된 듯, 바니시(그림 완성 후 화면을 보호하거나 수정 또는 광택, 무광 처리 등의 효과를 위해 사용하는 처리제. 먼지나 습기, 온도 등으로 인한 작품의 손상으로부터 보호되도록 투명 코팅하는 역할을 함) 냄새가 흐릿하게 떠도는 M150호 크기였다. 직시하는 순간, 강원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님……! 선…… 님…… 선생님……! 선생님!!!”

아득히 멀리서 누군가가 부르고 있었다. 갑자기 뒷덜미를 잡아채인 것 같은 불쾌감에 강원은 의도적으로 그를 무시했다.

“선생님!!! 선생님, 제발요!!! 선생님, 저 좀 보세요!!! 선생니임!!!!!”

제기랄, 어떤 놈이야. 황홀한 열락이 순식간에 검푸른 안개로 오염되고 있었다. 이가 갈렸다. 총이든 칼이든 손에 있었다면 당장 저 무도한 존재를 박살 냈을 것이다. 악착같이 무시하는데도 상대 또한 질기도록 달라붙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술술 빠져나가버리고 마는 도취경에, 강원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짜악!

상반신이 한쪽으로 휘청, 돌아가며 뺨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크나큰 고통과 상실감이 순간 온 넋을 가득 채웠다. 차라리 숨을 멈추고 싶으리만치 끔찍한 통증이었다.

“……이게 뭐야…… 젠장, 이게 뭐야, 도대체…… 제발 정신 좀 차려줘요!!! 제발요, 선생님!!!”

솥뚜껑처럼 우악스러운 손이 강원의 양어깨를 움켜쥔 채 마구 흔들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뇌가 흔들리는 통에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아니,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도 같았다. 온몸이 연체동물처럼 흐늘거리는 이 느낌이 친숙하다. 하, 친숙한 게 당연하지. 지난 한 달 내내 계속된 끔찍한 불면의 밤들을 버티게 해준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사방에서 알코올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일단 취해버리면 술 냄새 따윈 자각을 못 한다는데 강원은 그렇지 않았다. 몸은 침몰해도 정신만은 줄곧 멀쩡했으니까. 지친 정신을 잠재우기 위해 그리 떡이 되도록 총애를 주었건만, 별 쓸모없는 정부처럼 허접한 액체는 단 한 번도 강원의 바람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건방지게…… 어딜 갈기는 거야, 요 꼬맹이가…….”

실실 터지는 웃음을 입에 물며 눈앞의 곰탱이를 응시했다. 분도 놈이었다. 어라? 이놈이 왜 여기에 있지? 여긴 내 집인데? 내 성전엔 허락 없인 아무도 못 들어온다구. 중언부언 중얼거리며 자꾸만 흔들리는 놈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를 썼다. 잔뜩 구겨진 채 눈물 콧물 범벅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가관이었다. 추해도 저렇게까지 추해지면 마음이 아무리 예뻐도 좀 그렇지 않은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귀여운 놈. 참 귀여운 녀석. 이쁜 새끼.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정말 망가지시려고 작정하신 거예요?!!! 죽을 거냐고요?!!! 어제 오전에 무단으로 댁에 돌아가신 건 그랬다 쳐요!!! 오늘 지각하시는 것까지도 워낙 몸이 안 좋으시니까 그럴 거다 했어요!!! 이참에 좀 쉬시나 싶어서 늦게라도 나오시겠지 했는데, 도대체 이 꼴이 뭐냐구요!!! 술이 떡이 돼선…… 어제 양복 그대로에…… 하루 종일 아무 연락도 없고…… 휴대전화도 안 받고…… 도대체 지금이 몇 신줄 알고나 계시는 거예요?!!! 오후 4시라구요, 4시!!! 감독님이나 저나…… 전시팀 다른 녀석들까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 줄 아시느냐구요?!!!”

귀청이 터지는 것 같다. 바로 코앞에다 얼굴을 들이밀곤 울고불고 소리를 질러대니 이거야 정말 환장하겠다. 놈을 밀어내려고 손을 댔는데, 이럴 수가. 곰탱이 놈의 추한 얼굴이 도통 꼼짝을 안 한다. 취하긴 좀 심하게 취한 모양이다. 이리 온몸에 힘이 없다니.

“……출근해야지, 이제…….”

자꾸만 비실비실 터지는 웃음을 힘겹게 갈무리하며 대꾸했다. 솔직히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연인의 선물을 받고, 한동안 정신을 놓았다가, 미친 듯이 차를 몰아 집으로 온 기억이 난다. 햇빛이 잘 드는 2층 갤러리 한가운데에 연인의 선물을 세워놓고 하염없이 바라보기 시작했었지.

속수무책 들이닥친 절망감으로 온 넋이 박살이 났다. 허세에 가까운 희망은 빈사 직전이었다. 연인의 ‘방’ 안으로 무작정 도피한 건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아니, 목숨을 담보로 한 치열한 전투였다. 풍비박산 난 희망의 면류관을 다시금 손에 넣기 위해서.

“……그전에 술 좀 깨야 할 텐데…… 이런…… 일어설 수가 없네…….”

“출근은 무슨 출근이에요, 완전 주정뱅이 꼴을 하고!!!”

“……일…… 충주에 내려가봐야…… 최성우 작가…… 약속도 있는데…….”

“벌써 선생님 일정 다 취소시켰어요!!! 무단결근에 연락 두절이신데 감독님이 가만 놔뒀을 거 같아요?!!!”

“……젠장, 누구 맘대로……? 비켜라, 꼬맹아…….”

“……돌아버리겠네…… 진짜로 돌아버리겠다, 정말…….”

“……시끄러…… 울지 마…… 뭐냐, 노분도…….”

여전히 눈물콧물 범벅인 놈의 얼굴이 우스워 픽픽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입가에 무언가가 다가왔다.

“찬물이에요. 드시고 속 차리시라구요.”

“……짜식…… 점점 시건방져진단 말이야…….”

투덜거리면서도 놈이 입가에 대준 물을 달게 받아 마셨다. 서늘한 기운이 목구멍으로부터 내장 저 아래까지 순식간에 퍼져갔다. 내내 흐릿하게 초점이 잡히지 않던 시선이 조금 또렷해졌다. 양손이며 다리에도 차츰 기운이 잡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멀쩡한 정신이라, 몸만 제대로 추슬러진다면 곧 출근도 가능하겠지.

“……어딜 보시는 겁니까?”

“…….”

“또 어딜 보고 계시냐구요?!!! 그렇게 오래 바라보셨으면 됐지, 질리지도 않으세요?!!! 또 정신 놓고 싶으신 거냐구요?!!!”

“…….”

“선생님!!!”

“…….”

“선생님!!!”

“…….”

“그만해요!!! 제발 그만하시라구요!!! 제발 좀!!!!!”

“……?!”

갑자기 온몸을 죄어드는 엄청난 악력에 홀연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또 연인의 ‘삼색 코너’에 시선을 사로잡혔던 모양이었다. 얼떨떨한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챙기려는데 컹컹거리는 듯한 짐승의 괴성이 귀청을 때려댄다. 자신의 상반신을 엄청난 힘으로 죄어 안은 채 분도 놈이 울부짖는 소리였다. 맙소사. 이제 아예 대성통곡을 하는구나. 그나저나 아파 죽겠네. 이러다 곰탱이에 눌려 압사당하는 거 아냐?

“……아름답잖아……?”

“……으흐…… 어어엉…… 크엉…… 흑…….”

“……잘 봐, 노분도. 너도 자세히 보라구. 그 사람 새 작품이야. 스타일이 조금 변했지?”

“……흐어어어…… 헝…… 어어, 안…… 안 볼 거예요…… 다신 안 봐, 그따위 괴물…….”

“……생명이 깃들고 있어…… 개벽의 징조야…… 압도적이지, 여태까지의 그 어느 작품보다 더…… 상상해본 적은 있지만 그 이상이야.”

“……엉엉엉…… 흐허어어엉…… 흑흑…… 윽…… 보지 마……! 보지 마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선생님 이러시는 거…… 괴로워서…… 괴로워서…… 더 이상 못 보겠어요…….”

“……변하기 시작했어…… 앞으로 더 변해가겠지…… 더 높이, 더 멀리, 더 완전하게…… 더…… 더 더 아름답게…….”

“……선생님…… 제발……! 흐어엉……! 흑, 흑, 윽…… 엉엉…… 흐어엉…….”

“……내가 하고 싶었어.”

“흐윽, 흑, 흐어엉…….”

“……그래. 사실은 내가 저렇게 만들어주고 싶었어. 저렇게 변하게 만들어주고 싶었어. 내 손으로, 내 넋으로, 내 온 영혼을 다 바쳐서 저렇게 꽃피게 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내가 아니야.”

“……서…… 선생님……!”

“저 아름다운 최초의 파문을 시작한 건 내가 아니라 그자야. 그자의 손길에서, 그자의 품에서, 그자의 영역에서 변형이 이루어지고 있어. 그 사실이 날 절망시켜. 절망한 나머지 날 산산조각 나게 만들지. 놈을 죽이고 싶어.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다, 노분도. 할 수만 있다면, 그자를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싶어. 아아, 그래. 그래. 환장할 정도로 그자를 증오해서 혈관이 다 터져버리는 것 같아.”

“선……!”

“……하지만 아름답지 않은가?”

“……선생님……!”

“……이렇게 증오하는데…… 저주하는데…… 놈이 시작한 변형은 이다지도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아름답지 않은가 말이야…….”

“…….”

“……그 사람은…… 연인은 말을 해……. 그래도 여전히…… 저것이 나라고 말을 해. 저 ‘방’에는 역시 오로지 우리 둘뿐이라고 말을 건네고 있어.”

“…….”

“……그자는 ‘방’을 바꿔 색칠만 할 뿐,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오로지 연인과 나, 우리 둘뿐이지.”

“…….”

“……그러니 그만둘 수 없어. 괴로워서…… 지독하게 고통스러워서 환장할 것 같지만…… 질투와 증오로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지만 그러니까……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만둘 수가 없어. 저 ‘방’을 바라보기를…… 절대로 멈출 수가 없는 거다…….”

“…….”

문득 뺨으로 간지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분도 놈의 혀가 이리저리 오가며 탐욕스레 자신을 핥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강원은 비로소 깨달았다. 시야는 도저히 사물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뿌옇게 흐려 있었다. 계속 직면하고 있다고 착각한 연인의 ‘삼색 코너’는 그저 뇌리에 박혀든 각인이었던 모양이다.

곰탱이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어깨를 누르고, 재킷을 벗기고, 셔츠 틈으로 손을 집어넣는 게 느껴진다. 뿌리치려고 온몸을 긴장시켜봐도, 알코올에 찌든 몸은 좀처럼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육중한 덩치가 힘으로 내리누르자 강원의 몸은 쉬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비켜라, 노분도. ……꼬맹아, 좋게 말할 때…… 웁…….”

거칠기만 한 감촉이 입술을 짓눌렀다. 놈을 제지하기 위해 마침 입을 벌린 틈을 놈은 놓치지 않았다. 강제로 밀려들어온 놈의 혀가 난폭하게 입안을 휘젓기 시작했다. 여전히 테크닉의 테 자도 찾아볼 수 없는 무지막지한 힘만의 키스. 그러나 민감한 부분을 자극당하는 것만으로 강원의 몸은 반응했다. 욕망도, 애정도 아니었다. 그저 수컷의 자연적인 화학 반응일 뿐이었다. 꽤 오랫동안 자위조차 없었고, 자제력을 발휘하기엔 강원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술기운이 아니라도 체력은 이미 한계 상황에 치달아 있었다. 소리 없는 통곡을 흘리며 강원의 몸을 미친 듯이 탐하는 분도 놈의 손길은 그야말로 야수의 그것이라, 옴짝달싹하기는커녕 그저 호흡을 가누는 것만 해도 힘에 부쳤다. 각도를 달리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놈의 키스에 좀 멍해질 법도 한데, 정신은 여전히 지독할 정도로 맑아 익숙한 고통을 순간순간 각인시켰다. 셔츠 단추가 떨어져나가고, 유두가 빨리고, 바지 앞섶이 풀어졌다.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만큼 입술을 빨아대던 놈의 키스가 성기에도 이어졌다. 반쯤 발기해 있던 페니스는 놈의 입안에서 금세 삽입하기에 완전한 형태와 각도를 찾았다. 하반신만을 드러낸 곰탱이의 엉덩이가 강원의 몸을 타고 천천히 내려앉았다. 딴에는 배려랍시고 강원의 가슴팍이나 어깨가 아닌 카펫 바닥에 그놈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을 지지한 채. 뿌리 부분을 쥐고 잠시 놈의 회음부를 더듬는가 싶더니, 강원의 페니스는 이내 놈의 안쪽 깊은 곳으로 길을 뚫었다. 처녀다운 끊어질 듯한 조임에 저절로 나지막한 신음이 터졌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자 뿌옇던 시야가 순식간에 선명해졌다.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진 놈의 얼굴은 여전히 땀과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눈동자만은 부리부리 빛나는 게 여간 독을 품은 게 아니었다. 강간마다운 얼굴이로구나, 짜식. 순둥이 주제에 많이 발전했네? 뿌듯한 하반신의 자극에도 불구하고 비죽비죽 솟는 실소는 여전했다.

“……큭……! 또 어딜 보시는 겁니까……?”

“…….”

“여길 봐요! 그쪽이 아니라 날 보시란 말입니다!!!”

“…….”

“날 보란 말야, 제길!!!!!”

미친 곰탱이가 포효했다. 숨 쉴 틈도 없이 격하게 허리를 놀려대는 통에 차츰 놈이 걱정되었다. 놈의 입구가 찢어진 건지, 뜨뜻한 액체가 강원의 페니스를 거쳐 고환에, 그리고 체모에 이르기까지 끈끈하게 적시고 있었다. 교성에 가까운 놈의 신음성은 쾌락이 아니라 단지 참기 힘든 통증만을 증거할 뿐이었다.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상처를 주기엔 너무나 아끼고 귀여워했던 사랑스러운 후배였다. 농담과 무시로 일관하며 그토록 조심해왔는데, 결국 이렇게 돼버리다니. 씁쓸한 자괴감이 절박한 사정감과 함께 뇌리를 스쳤다. 눈앞이 흐릿해지며 아래쪽으로 뻐근한 쾌감이 몰아닥쳤다.

“……큭…….”

본능적으로 놈의 안쪽 깊숙이 쳐올린 순간 엄청난 양의 정액이 몸 밖으로 뿜어 나왔다. 가누기 힘들 지경으로 온몸이 커다랗게 전율했다. 헐떡이는 호흡은 금세라도 끊어질 것처럼 거칠었다. 한계 상황에 부닥친 모양인지, 절정의 후폭풍은 잠시 온전한 정신을 앗아갔다. 암흑처럼 내려앉은 어둠의 끝에 눈을 떠보니, 눈물범벅인 입술이 매달리듯 강원의 입술을 빨고 있었다. 측은한 연민과 가슴 저린 애정이 북받쳤다. 자꾸만 힘없이 떨어지려는 팔을 가까스로 들어 올려 놈의 젖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곰탱이의 그것답지 않게 손끝에 닿는 촉감은 의외로 몹시 부드러웠다. 입안을 미친 듯이 휘젓고 있는 혀뿌리에도 가만가만 터치를 주며 다정하게 품어주었다. 멧돼지처럼 꽥꽥거리는 귀여운 울음소리는, 그러나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참기 힘든 통증이 어렴풋이 느껴진 건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이상야릇한 감각. 하도 통증이 심해서 잠깐 그렇게 비현실적인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어렴풋이 내장 쪽이라고 자각한 순간, 강원은 정신을 잃었다. 그 직전, 괴로운 신음성과 함께 온몸을 잔뜩 뒤튼 것도 같았다.

정신이 든 것은 이튿날 오후, 일도병원 입원실 침대 위에서였다. 거의 24시간을 기절(이 아니라 잠을 잔)해 있었다나.

우릿한 통증을 배에 느끼며 겨우 눈을 떴을 때, 옆에는 도저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눈꺼풀이 부어 있는 분도 놈이 앉아 있었다. 그렇게 울고도 모자라는지, 여전히 축축해진 시선으로 강원을 내려다보며. 기억에 남아 있는 놈의 구겨진 양복을 보니, 어제부터 내내 병실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구급차를 부르고, 입원 수속을 하고, 보호자란에 사인을 한 것도 다 놈일 테니…….

위궤양이 원인인 급성 위경련이라고 했다. 결국 술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하긴 마셔도 과하게 마셔댔었지. 쓸모없다 못해 분탕질까지 서슴지 않는 요부였나 보다. 덕분에 무단결근 이틀째라……. 르네가 날 죽이려 들겠군. 피식 실소를 뱉으며 몸을 일으키자, 분도 놈이 후다닥 달려들어 부축을 한다.

“아야……!”

짤막한 신음 소리와 함께 어깨를 감싸 안은 놈의 팔이 움찔 굳어드는 게 느껴졌다. 곧 감이 왔다. 사실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쪽은 외려 놈일 것이다.

“……엉덩이 괜찮나? 치료는 했어?”

사심 없이 물은 건데 놈의 얼굴이 온통 시뻘게진다. 가슴 아픈 연민과 회한이 양심을 쿡쿡 찔렀다. 불가항력이었다는 걸 알지만, 자신이 놈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놈과 함께 섹스를 한 실감조차 들지 않으니, 이 또한 놈에겐 지독한 상처이리라.

“괘, 괜찮을 리가 있어요?! 걸을 때마나 욱신거려서 죽을 맛이라구요! 여자들 생리대까지 차고 있다구요, 지금! 도대체 무슨 물건이 그렇게나 큰 거야?! 완전 흉기야, 흉기! 우씨, 느끼기라도 했음 억울하지나 않지! 선생님만 좋아라 가고 난 이게 뭐냐구!”

“강간범 주제에 어따 대고 화풀이야? 그러게 누가 발광을 하래?!”

“걱정이 되니까 그렇죠!!!”

“…….”

“……선생님이 걱정 돼서 미치겠으니까……! 우씨, 결국 이 꼴이잖아…… 잠도 못 자고…… 툭하면 술독에 빠지고…… 위에 구멍이나 내서 쓰러지고…….”

“……별거 아니야. 덕분에 잠이라도 실컷 잤더니 오히려 살 만하군.”

“그게 잠든 거예요?!!! 기절한 거지?!!!”

“어쨌든.”

“어딜 일어나시는 거예요?! 감독님이 이틀 더 쉬시랬는데. 몸 다 추스르고 나서 출근하시래요.”

“밀린 일이 산더미야. 더 이상 시간 낭비할 수 없어.”

“급한 건 다 끝났잖아요!”

“끝까지 감시해야 돼. 막판에 실수하는 놈 나오면 더 골치 아파져.”

“으씨, 참! 그럼 오늘 하루만이라도 쉬세요! 의사들도 일주일은 더 입원해야 한다고 했단 말예요!”

“일주일 좋아하네.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당장 마라톤을 뛴대도 별 지장 없겠어. 진통제 덕분인지 진짜 오랜만에 푹 잘 잤군. 통증도 많이 가라앉았고. 비켜봐, 옷 갈아입게.”

약간 과장은 했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 하루 동안의 숙면은 한계에 달했던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준 듯했다. 손등에 꽂혀 있던 링거 바늘을 뽑은 후 바닥에 내려서는데, 잔뜩 구겨진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던 분도 놈이 옷장 문을 가로막고 서는 게 보였다.

“노분도.”

“……아, 안 돼요……!”

“노분도.”

“……안 돼요, 안 돼!”

“노분도.”

“……그, 그럼 조금만 있다가 나가요. 며…… 몇 시간만이라도 괜찮으니깐…… 아, 아무튼 지, 지금은 안 돼요!”

“……?”

“지금은 안 돼…… 절대 안 돼…….”

“무슨 수작이야? 자네, 뭔가 숨기고 있지?”

“!!!”

“불어.”

“…….”

“불어, 어서. 불어도 나갈 거고, 불지 않아도 나가. 어젠 술김에 당했지만, 알지? 자네 정돈 한 큐에 보내버릴 수 있다는 거.”

“…….”

“노분도.”

“젠장, 밖에 그분이 와 있어서 그래요!!! 그렇다구요!!!”

두근…….

“좋아 마세요!!! 그 사람이 선생님 보러 온 줄 알아요?!!! 선생님 쓰러졌다니까 걱정 돼서 맨발로 달려온 줄 아시냐고요?!!!”

“……제…… 대로 설명해…….”

두근…… 두근…… 두근…….

“……문상하러 온 거 같았어요. 상복 차림이고, 장례식장 앞 잔디밭에 사람들이랑 서 계시더라고요. 어느 국회의원의 부친인가가 별세했는데 빈소가 이 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나 봐요. 화환도 많고, TV에서 많이 본 유명 인사들이 우글우글했어요. 가까이 가서 인사 드리려다가 말았어요. 선생님 때문에 하도 속상하…… 앗! 선생님, 잠깐! 잠깐만요! 그 꼴로 나가시면 어떡해요?! 환자복은 갈아입고 나가셔야죠!!!”

막 문을 빠져나가려는데 분도 놈이 뒤에서 허리를 끌어당겼다. 허리를 죄는 놈의 악력에 숨쉬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하여간 힘 하나는 무식하게 센 놈이었다. 단숨에 날아가버렸던 이성이 덕분에 조금이나마 되돌아오긴 했지만, 놈이 고맙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내가 미쳐! 미치겠어…… 선생님이 자꾸만 이러시니까 나가지 말라고 그런 건데……!”

“……노…… 놔…… 알았으니까 놔라…….”

“…….”

긴장으로 잔뜩 조여든 근육의 힘을 빼고 가빠진 호흡을 천천히 고르자, 분도 놈의 손에서도 겨우 힘이 빠져나갔다. 돌아본 놈의 얼굴은 또 눈물범벅이었다. 놈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그러나 그저 찰나의 적선일 뿐이었다. 강원의 온 신경은 병실 밖, 그 어디엔가에 있을 연인의 존재였다. 아니, 이렇게 늑장을 부리는 사이에 혹여 사라져버릴까, 숨이 막힐 정도로 두렵기까지 한 맹목의 열정이었다. 그만둘 수 없다. 이렇게 확실하고 또 확실한데, 어떻게 그만둔단 말인가. 부르고 있었다. 연인이 부르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을. 세속의 세상에서 연인이 그 어떤 가면을 쓰고 서로를 기만하려 들든, 대낮처럼 훤하고 선명한 진실을 감출 수는 없었다. 지복의 ‘방’ 안으로 초대된 자는 오로지 자신과 연인 단둘뿐이라는 것을. 아니, 애초에 자신과 연인이 함께 있어야만 비로소 저 ‘방’이 완성된다는 것을…….

그런 강원의 속내를 읽었는지, 놈이 보일 듯 말 듯 흐릿하게 웃었다. 옷장 쪽으로 돌아서는 놈의 어깨는 확연하게 축 처져 있었다. 잔뜩 구겨진 채 알코올 냄새를 풀풀 풍기며 걸려 있던 슈트와 셔츠들을 놈이 강원의 손에 쥐여주었다.

후들거리는 몸을 간신히 다스리며 옷을 갈아입고, 따라 나오려는 분도 놈을 단호하게 물리친 후 병실을 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제법 서늘한 한기가 벌어진 셔츠 틈을 파고들었다. 어느새 가을이었다. 추석이 지나고 나니 하루가 다르게 낮이 짧아지고, 거리의 가로수들도 점점 총천연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쇠약해진 육체 때문인지 냉기에도, 온기에도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요즘이었다.

연인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병원 본관의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온통 검은색의 상복 물결이 가장 먼저 강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약간 경사가 져 있는 본관 정문 앞에서부터 멀리 주차장까지 상복들의 행렬로 넘쳐났다. 장례식장이 있는 별관 쪽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주차장 역시 온갖 고급차와 승용차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것 같았다.

연인과 관련 있는 국회의원이라면 이윤열일 것이다. 그자의 피붙이 아닌 피붙이인 남자. 이 의원의 부친이 별세했다면 그자도 상주나 유가족으로서 빈소를 지키고 있을 터, 물론 그랬기에 연인 역시 이곳에 올 수 있었겠지. 연인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자이니 연인을 홀로 집 안에 방치해두진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빠른 시일 내론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거라 절망하고 있던 그리운 얼굴을 잠시나마 볼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연인과 자신 사이의 끈질긴 운명의 끈을 그자가 이어주고 있는 셈이니, 그도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표지판을 따라 본관 뒤쪽의 별관을 향해 내달린 지 단 몇 십 초 만에 강원의 눈이 크게 부릅뜨였다. 장례식장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왼편 정원 잔디밭 안에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검은 상복의 행렬은 차라리 본관 쪽보다는 덜해 보였다. 별관에 도착하는 족족 서둘러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때문이리라. 그만큼 더 쉬이 찾아냈기도 하지만, 설령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다 한들 자신이 연인을 힘들게 찾아낼 리는 없었다.

연인 말고도 잔디밭 곳곳에 놓인 벤치들이며 나무 그늘 사이로 상복 차림의 남녀가 많이 눈에 띄었다. 연인이 그들 모두와 안면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연인을 중심으로 둥글게 포진해 있던 네 명의 사내들은 무척 신경이 쓰였다. 그들 모두 낯익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인 뒤쪽에 배후령처럼 서 있는 세 명은 연인과의 인터뷰가 있던 날, 오주희의 빌라 앞에서 강원을 호전적으로 막아섰던 자들이었다. 목적과 신원을 말해주자 어딘가로 전화를 건 후(틀림없이 그자한테 걸었겠지) 곧 들여보내주었지만, 당시의 불쾌했던 기분은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연인의 운전기사와 경호원들이었다. 그러나 그 셋보다 더 강원의 신경을 긁는 자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연인과 정면으로 마주 서 있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였다.

처음엔 ‘그자’인 줄 착각을 했었다. 워낙 붕어빵처럼 비슷하게 닮은 이목구비인데다 덩치 또한 그자와 거의 비슷한 근육질의 거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눈여겨보니 그자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표정은 좀 더 경박했고, 눈길은 다혈질의 조급한 성격을 드러내듯 몹시도 호전적이었다. 옷차림 또한 거의 늘 빈틈없는 정장 스타일을 고수하는 남자와는 많이 달랐다. 사내는 짧은 가죽 라이더 재킷에 검정색 카고 바지를 입고 있었다. 속에 받쳐 입은 티셔츠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예의를 차린 것 같긴 했지만 상복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피부는 그자보다 하얀 편이었고, 입술은 좀 더 붉었다. 존재감 역시 여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자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십중팔구 그자의 진짜 피붙이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자의 남동생과 여동생 하나가 함께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사내는 연인을 향해 무언가를 사납게 외쳐대고 있었는데, 내용을 알아들을 순 없어도 거기에 욕설이 섞여 있다는 것만은 짐작이 가능했다. 시시각각 핏기를 잃어가는 연인의 낯빛만으로도 그 저열한 언질의 강도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연인의 방문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파도처럼 설레던 심장이 싸늘히 가라앉았다. 대신, 약으로 간신히 진정시킨 위가 다시금 맹렬하게 요동을 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열기 같기도 하고 냉기 같기도 한 시퍼런 살기가 명치끝에 스멀스멀 뭉쳐들고 있었다.

말려야 하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시뻘건 분노가 잠시 뇌리를 점령했지만, 차갑게 식어든 이성이 그를 밀어내주었다. 천지분간 못 하고 연인의 영역에 흙발을 들이밀 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었다. 무엇보다, 연인과 저 불쾌한 사내놈 사이에 어떤 고약한 사정이 있는지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강원은 속에서 쉭쉭 피어오르는 살기를 애써 달랬다.

몇 분인지, 몇 초인지 따발총처럼 쏘아대던 사내놈이 마침내 등을 돌렸다. 연인이 다급하게 놈의 소맷자락을 쥐는 게 보였고…… 이어지는 다음 장면들은 강원의 피를 단숨에 거꾸로 치솟게 만들었다.

놈이 더러운 오물을 털어내듯 연인의 손을 뿌리쳤다. 욕설이 토해졌고,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던 연인이 다시 한 번 놈의 소맷부리를 움켜쥐었다. 순간이었다. 연인의 얼굴로 놈의 매서운 손찌검이 날아든 것은.

갑자기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속에서 친친 똬리를 틀고 있던 독사가 단숨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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