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2003년 9월. 장인환(張仁歡)
“영석 씨, 키 받아요.”
오주희의 빌라를 나서자마자, 그가 빌라 앞에 대기해 있던 경호 기사 고영석에게 차 키를 던져주며 명령했다. 보아하니 손수 운전을 해서 달려온 모양이었다. 고영석은 나중에 택시로 와 기다린 모양이고. 가슴에 얹힌 묵직한 돌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직접 운전을 해서 달려왔을 만큼 그의 초조감과 분노(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몹시도 화를 내고 있었다. 다만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었을 뿐)가 꽤나 심각했었다는 의미이리라.
인환을 오주희의 집에 데려다주었던 볼보 S60엔 홍 기사와 경호원 둘이 올라탔고,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인환을 그의 검정색 세단 안으로 이끌었다. 인환에게 경호원들이 붙게 되면서, 그를 상대로도 보디가드 겸용 전용 운전기사인 고영석이 새로 채용되었다. 경호 회사로부터 전문적인 조언을 들은 결과였다. 고영석은 경호전문대학을 졸업한 20대 후반의 청년으로, 176cm의 단신에 차돌처럼 단단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갖가지 무술 유단자에 특공 무술 고수라 그런지 눈빛이 여간 날카로운 청년이 아니었다. 고영석이 그를 호위하며 집과 회사를 오가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그의 승용차도 좀 더 크고 단단한 검정색 메르세데스 벤츠로 바뀌었다. 인환이 현재 그에게 끌려들어가듯 자리를 잡고 앉은 세단이 바로 그것이었다.
“출발합시다.”
시동을 거는 단 몇 초도 못 참고서 그가 고영석을 질책했다. 마치 야반도주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의 다급한 출발이었다.
“……이리 더 가까이 올래?”
오주희의 거실을 벗어날 때부터 그에게 내내 잡혀 있던 왼손을 바짝 끌어당기며 그가 물어왔다. 차가 막 빌라촌을 빠져나갈 무렵이었다. 가타부타 대답을 할 틈도 없이 인환의 몸은 즉시 그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질문을 한 것과 거의 동시였다. 땀내와 코롱이 섞인 그의 강렬하고 알싸한 체취를 설핏 자각했을 땐, 인환의 얼굴은 이미 그의 너른 가슴팍에 푹 파묻힌 후였다. 결국 질문은 그저 입에 발린 가식이었을 뿐이란 얘기다. 당혹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등 뒤로 돌아간 그의 양팔에 더욱 힘을 주는 결과만 낳았다. 그의 허벅지를 깔고 앉은 채 옴짝달싹 못하도록 껴안긴 상태라, 새삼 자세를 바로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귓불까지 달아오른 얼굴만으로도 인환의 당혹감을 이해할 법하건만 그는 도무지 요지부동이었다. 홍 기사도, 파출부 아줌마도, 하다못해 그의 비서들이나 회사 중역들 중 일부에게도 인환은 그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커다란 부담을 느껴야 했다. 그들이 아무리 그와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물며 아직은 생면부지의 타인과 다름없는 고영석임에야 오죽할까. 인환의 온 신경은 운전석에 앉아 부드럽게 차를 몰고 있을 차돌 같은 청년에게 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의도를 거슬러 몸싸움을 하듯 제자리로 돌아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 인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는 원인으로 치자면 고영석은 그에게 잽도 안 되는 쪽이었으니까.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인환과 딱 달라붙어 있는 그의 온몸이 그의 싸늘한 격분을 증거하고 있었다. 그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만 있다면 인환은 고영석 앞에서 발가벗을 수도 있었다.
“……불편한가?”
인환과 달리 동요의 기색이란 일절 찾아보기 힘든 그가 천연덕스럽게 물어온다. 단 한나절 만에 푸릇하게 자라버린 턱 끝의 수염을 인환의 정수리 위에 가만가만 비비적대며. 호색적인 두 손가락은 어느새 점퍼 틈을 비집고 들어가 맨살의 허리와 등줄기를 농염하게 주물럭거리고 있다. 엉덩이 아래쪽으로 어느새 딱딱하게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그의 분신도, 전광석화처럼 빠르고 단호하기만 한 그의 일련의 몸짓들도 모두 그의 분노를 증거해주는 바로미터인 것만 같아서 인환은 당혹한 와중에도 뭐라 항의도 못한 채 마냥 입술만 깨물 따름이었다.
“영석 씨가 불편해?”
“…….”
“영석 씨, 이런 우리가 보기 불편합니까?”
움찔. 느닷없이 운전석에 말을 건네는 그의 무신경함이 무서웠다. 담담하면서도 거침없는 태도여서 더 그러했다.
“하하, 아뇨, 사장님. 별 편견이 없기도 하고 실은 저도 바이입니다. 남자를 사귄 경험이 두어 번 있죠.”
“다행이군요. 면접 때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이 사람은 아직 모르는 일이라 새삼 물어본 겁니다. 앞으로 우리 인환이 잘 부탁합니다. 예민한 사람이니 각별히 더 신경을 써주면 좋겠어요. 내 경호가 주업무겠지만 실은 나보다 더 우선적으로 보호하고 신경을 써줬으면 하는 것이 이 사람입니다.”
“예, 사장님.”
“들었지? 네가 불편해할까 봐 부러 골라낸 사람이다.”
“…….”
“……긴장하지 마. 네게 화내는 거 아니니까.”
“……!”
“설령 내게 거짓말을 하고 몰래 큐레이터와 만난 거라고 해도 네게 화를 내지는 않아.”
“……거, 거짓말 안 했어…….”
“알아. 오주희와 큐레이터가 작당했겠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는 내게 다 읽히니까.”
“…….”
“내가 화가 나는 건 나 자신이야. 그자가 관련되면 난 아직도 몹시 불안하고 초조해. 가능하면 널 그자로부터 떼어놓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더 화가 나는 거지. 그자는 네게 꽤나 소중한 존재니까. 그렇지?”
“……위야…….”
“그림은 모르지만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네게서 그림을 빼앗을 수 없듯이 그자 또한 강제로 빼앗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위야, 그 사람은 내게…….”
“지금처럼 그자의 언행에 일희일비하는 너도 무척 마음에 안 들지만 참을 수는 있어. 아니, 참아야겠지. 널 위해서.”
“!!!”
“왜?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넌 내게 다 읽힌다고 했지?”
“…….”
“……많이 괴롭나?”
“…….”
“……그자가 힘들어하는 게 그렇게 괴로워?”
“…….”
“……불안해.”
“……?”
“네가 불안정해서 불안해. 너는 여전히 마음을 닫고 있고, 날 제대로 보려 하지 않지. 그래서 불안해. 그렇다고 강제로 열어젖힐 수도 없어. 그럼 넌 예전으로 바로 돌아가버릴 테니까. 시체 같았던 예전으로.”
“……위, 위야…….”
“……그 틈을 타고 누군가 널 훔쳐 갈까 봐 겁이 나…… 그게 그자든…… 신애든…… 아니면 운명이든 뭐든, 아무튼…….”
끊임없이 맨살을 쓸고 다니는 그의 다소 거친 손길에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히고 있었다. 인환에게 진심을(아니, 거의 진심으로 느껴지는) 토로한다기보단 스스로를 향한 무의식적인 넋두리 같았다. 인환을 애무하고 있는 손길이 거의 무의식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타인에 불과할 경호 기사가 듣고 있는 것조차 아랑곳 않고, 지극히 내밀한 속내를 거침없이 내뱉고 있는 행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요즘의 그는 그런 면에선 뭔가 한 꺼풀 벗어던진 것 같아 보이긴 했다. 뭇 타인의 이목을 고려하지도, 또 고려할 생각조차 전혀 안 한다는 것. 조심성이 사라졌다보단, 그만큼 더 호전적이고 강한 남자로 변모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지금 그의 다소 공격적인 언행을 대변하는 증거로 보긴 힘들었다.
역시 분노일 것이다. 과묵한 그를 이토록 감정적인 수다쟁이로 만든 주원인이라는 것은. 또한 같은 이유로, 인환 역시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자신의 수호천사가 준 아픔을, 번뇌를 최대한 내색하지 않기 위해. 하긴 그래봤자 이런 자신의 속내 또한 그는 빤히 읽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더 그의 분노를 부추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결국 악순환인 셈이었다. 그 스스로 분노를 가라앉히는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아, 하지만 아까는 통쾌했다. 그자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 것 같았거든.”
힘이 들어가 다소 거칠게 느껴졌던 그의 손길이 느닷없이 부드러워졌다. 어딘가 그르렁거리는 듯 달콤한 중얼거림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내 거니까…… 아무렴, 이젠 내 마누라지…… 그렇지…….”
한층 낮아진 속삭임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혼잣말이었다. 전율처럼 부르르 떠는 손길에서도, 희열이 가득 들어찬 달콤한 어조에서도, 자기만족에 겨운 짐승의 교활함과 비정과 오만이 뚝뚝 떨어졌다.
“……고개 들어봐.”
“…….”
“……말 안 들으면 여기서 해버린다?”
“!!!”
관능이 철철 흘러넘치는 나지막한 바리톤만으로도 협박의 효과는 충분했다. 슬슬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들자,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이 보였다. 심장을 꽉 움켜잡힌 듯 버거운 압박감이 넋을 가득 채웠다. 쫓기듯 시선을 피하기도 전에 입술을 빼앗겼다. 단숨에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든 혀는 민첩하고 농밀하게 입안 구석구석을 빨아 당겼다. 참을 수 없으리만치 느리고 감각적인 터치였다.
쪽쪽 하는 젖은 마찰음이 조용한 엔진 음을 뚫고 귓가에 울려왔다. 거의 동시에 들리기 시작한 것은 잔잔한 뉴에이지풍의 피아노 선율. 고영석이 카오디오를 튼 것이다. 타는 듯한 수치감에 고개를 흔들어보지만, 뒷목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길은 완강하고 비정했다. 몇 번이나 각도를 바꾸고, 때로는 침범하다 때로는 끌어당기고, 깨물기도 했다가 핥기도 했다가 종내는 흡반처럼 매섭게 빨아들였다. 마치 먹히는 것 같았다. 숨이 가득 차올라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마음껏 유린당한 후에야 인환의 입술은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입술이 편안해진 대신 귓불이 깨물리고, 쇄골이 빨리고, 목덜미가 씹히곤 했다. 엉덩이 아래, 잔뜩 부풀어 오른 흉기에 의해 회음부를 자극받는 대신, 페니스며 고환이 거침없이 주물러지고 꼬집히고 긁히기도 했다. 스토익한 피아노 선율 따위로 감춰질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라도 저항은커녕 싫은 내색조차 못 한 채, 인환은 그렇게 분노한 호색한의 추행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20여 분 내내. 뭐가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는 건가. 화풀이 상대가 되는 건 결국 마찬가지인데. 별로 자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기가 막혔다.
“퇴근하세요, 영석 씨. 홍 기사와 승수 씨에게도 그만 퇴근하라고 하십시오. 아직 경호 시간이 좀 더 남아 있지만 내가 있으니 괜찮을 것 같군요. 아, 가기 전에 한 번 더 주변을 살펴보라고도 전해요.”
그가 차고에 벤츠를 주차시키기 위해 보닛을 돌아가던 고영석에게 명령했다. 열린 대문 틈으로 벤츠를 따라오던 홍 기사의 볼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의 바른 목례로 그의 명령을 접수한 고영석이 인환에게도 미소와 함께 머리를 숙여 보였다. 친근감이 듬뿍 담긴 작별 인사였지만 인환은 도저히 그네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온통 시뻘게진 채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 볼 꼴 못 볼 꼴 다 보여준 마당에 근엄하게 인사를 받을 배짱 따윈 없었다. 게다가 뻔뻔함의 극을 달리는 그가 여전히 끌어안듯 인환의 어깨를 감고 있지 않은가?
볼보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몇 십 초조차 채 기다리지 않고서 그가 인환을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뒤로 현관문이 닫히고, 이중 삼중의 보안 도어록을 걸자마자 그가 인환을 마주 안아왔다. 포옹과 동시에 재빨리 내려온 것은 그의 입술. 인환의 뺨이며 이마며 코끝들을 다급하게 오르내리며 주린 듯이 키스를 퍼붓고 있다. 서로의 몸이 빈틈없이 달라붙고 나서야 그의 허벅지 사이 흥분이 여전한 것을 알았다. 트렌치코트가 가려주었기에 망정이지, 경호 기사 앞에서 그야말로 얼굴도 못 들 뻔했다.
“……샤워부터 할까?”
꽤 오랫동안 인환의 입술을 빨고 난 후, 그가 긴 한숨을 토해내듯 묻는다. 역시 입에 발린 가식적 물음일 뿐이다. 금방 폭발을 일으킬 것만 같은 그의 하반신은 전혀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으니까. 그의 말보다는 그의 몸이 훨씬 더 정직한 것 같다.
“……급하잖아……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대꾸가 떨어지기 무섭게 인환의 몸은 번쩍 안아 올려졌다.
“시…… 신발부터 벗고……!”
안자마자 무턱대고 침실로 향하는 그를 제지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안긴 채로 부랴부랴 운동화를 벗어 현관 쪽으로 던져야 했다(제자리에 안착을 했는지는 물론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나마 자기 구두는 벗어둔 모양이니, 오주희의 집에서 만행을 부릴 때보다는 조금 분노를 가라앉혔다고 봐야 하나?
침대 끝에 인환을 내려놓은 그가 서둘러 옷을 벗기 시작한다. 대부분 자신을 먼저 알몸으로 만들어버리곤 하는 그라 의아해서 바라보니 냉큼 시선을 얽어오는 그다. 폭발 직전의 관능으로 붉고 촉촉하게 젖어 있는 눈시울에서 여전한 분노의 흔적을 본다. 설핏 몸서리를 치는 인환을 향해 싱긋 웃음을 짓는데, 그것이 도리어 더 인환의 초조와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자, 눈을 붙잡고 있던 시선이 재빨리 입술로 내려온다. 주린 야수처럼 잡아먹을 듯한 시선이었다.
“시선 피하지 말고 봐줘.”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자, 허스키하게 억누른 비난이 바로 날아온다.
“……날 봐. 너도 내게 욕망을 느끼는 것처럼 바라봐줬으면 좋겠어.”
“…….”
인환으로선 들어주기 힘든 요구였다. 욕망을 느끼는 것처럼 바라보라니. 어떻게? 어떻게 해도 발기가 안 되는 죽은 몸을 하고?
“그냥 봐. 보기라도 해.”
“…….”
마지못해 고개를 드니 기다렸다는 듯 부리나케 시선이 날아온다. 얼굴이 빨개질 만큼 야하고 천박하며 적나라한 주시였다. 알 수 없는 수치심으로 순식간에 빨개진 인환을 향해 그가 또 싱긋 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침실 온도가 몇 도는 더 올라간 듯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뺨과 귓불 근처가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미미하게 호흡 곤란을 일으킬 만큼 숨이 가빠졌다.
사슬처럼 시선을 얽은 채로 그가 옷을 벗는 게 보였다. 코트와 재킷과 넥타이와 셔츠, 이어 팬츠와 속옷과 양말들이 속속 그의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한계에 이른 듯 격렬한 충동은 그의 재빠른 손짓과 붉게 번들거리는 눈시울에서도 읽혔지만, 막상 알몸이 된 그를 보니 상상했던 이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차 안에서 해버릴 수도 있다는 협박은 단순히 협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각처럼 빚어진 아름다운 황금빛 근육들이 흥분으로 제각각 파도치듯 춤을 추고 있는 게 보였다. 특히 치골과 아랫배로 이어지는 복근은 선명한 왕(王)자를 새기며 위아래로 힘차게 불끈거렸다. 한껏 치켜선 페니스는 그의 무성한 체모를 헤치며 거세게 요동치고, 터질 것처럼 도드라진 혈관을 드러내며 고환 역시 팽팽하게 위로 긴장돼 있었다. 귀두 끝 요도에선 이슬 같은 체액이 홍수처럼 흘러내렸다. 곧 사정을 한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미안…… 삽입까지 못 기다릴 것 같다…….”
양어깨를 거세게 움켜쥔 그의 손아귀와 함께 탁하게 가라앉은 속삭임을 들은 것 같았다. 풀썩 하고 침대 위로 밀어붙여진 몸 위로 그의 압도적인 덩치가 겹치듯 내려왔다. 두 사람분의 체중을 머금은 침대 쿠션이 꺼지듯 푹 가라앉았다. 삽입은커녕 옷을 벗길 여유조차 없었던 모양이었다. 탄탄하게 물결치는 그의 어깨 근육이 어느새 입술 근처를 짓누르고 있었다. 폭력처럼 다가든 적나라한 땀 냄새와 코롱 냄새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옷으로 숨겨지지 못한 날것의 자극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머리카락이 한 줌 잡혀 위로 끌어올려졌고, 허겁지겁 입술이 틀어막혔고, 어깨와 허리가 끌어안긴 채로 어마어마하게 조여졌다. 손길은 여전히 몹시도 다급하고 거칠었다. 억제된 교성이 인환의 입술을 흡반처럼 빨아들이고 있던 그의 입술 틈을 타고 흐릿하게 터져 나왔다. 면바지 위, 정확히는 면 티셔츠가 덮고 있는 인환의 아랫배 위로 사정없이 밀어붙여진 그의 성기가 부르르 최후 진동을 시작했다. 몇 번인가 허리를 튕기던 그가 곧 동작을 멈췄고, 순간 배 위로 따뜻한 것이 퍼졌다. 숨 쉴 틈도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야수의 포효는 인환의 목구멍 깊이 아득하게 삼켜졌다.
“……옷 다 버렸네…….”
땀으로 범벅인 채로 강아지처럼 코끝을 깨물고 있는 그에게 투정해본다. 비싼 바지인데 하고 덧붙이기도 전에 다시금 그의 입술이 인환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숨쉬기가 버거워 이리저리 피해보려 해도 끈질긴 추적은 멈추지 않는다. 깨물고 핥고 빠는 농염하고 집요한 공격의 기세는 여전했다. 최초의 토정이 끝나자 1∼2분쯤 인환을 끌어안은 채 숨을 고르던 사냥꾼이었다. 조금쯤은 감정이 가라앉았을까 싶던 기대는 그로써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의 전신은 여전히 바늘 끝처럼 예리하고 난폭한 성적 긴장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구겨진 점퍼와 티셔츠와 바지들이 차례로 벗겨졌다. 그의 정액과 땀으로 더럽혀진 사냥꾼의 전리품이었다. 팬티와 양말과 러닝까지 거침없이 벗겨 침대 아래로 떨어뜨린 그가 흡족한 표정으로 인환의 알몸을 들여다보았다. 한 달 이상 굶주린 시베리아 호랑이가 방금 사냥한 먹잇감을 바라보는 것처럼 지극히 탐욕스러운 시선이었다. 지독한 소유욕을 드러내듯 도취와도 다름없는 즐거운 희열이 그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에서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덮치듯 상반신을 기울인 채로 인환을 굽어볼 뿐, 어쩐지 애무도, 키스도 중단한 상태였다. 당혹감으로 서서히 얼굴을 붉히는 인환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바른 자세로 누워 있어 몸의 어느 하나 그의 시선에 노출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꽤 오랜 주시가 주는 무언의 요구에, 인환 역시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그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시울은 여전히 번들거리고, 뺨과 이마와 목덜미는 흐릿하게 붉어진 채 방사의 흔적이 선연했다. 짙은 암갈색 머리카락은 땀으로 흠뻑 젖어 이마에 가닥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큼직큼직하고 선명한 이국적 이목구비가 창가로부터 비쳐드는 부드러운 햇살을 받아 홀릴 듯 아름답게 보였다. 매끄럽게 빛나는 황금빛 피부 역시 무심코 손을 가져다대고 싶을 만큼 황홀한 빛을 발했다. 밤이나 새벽의 흐릿한 스탠드 불빛과 오후 6시, 막바지 정열을 불태우고 있는 훤한 대낮의 햇빛은 이토록이나 다른 걸까? 그의 땀구멍 하나하나, 미세한 수염 알갱이 하나하나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선명한 매혹으로 눈에 밟혀들었다.
문득 빗방울이 구르는 듯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귓전을 두드렸다. 흠칫해선 멍해졌던 정신을 부랴부랴 챙기자마자 기쁨을 참을 수 없는 듯 어깨를 떨며 웃고 있는 그가 보였다. 어느새 인환의 배 위에 깔고 앉듯 몸을 겹친 그가, 인환의 양손목을 들어 올려 깍지를 끼고 있었다. 듣기 좋은 낭랑한 웃음소리는 입술 끝을 한껏 말아 올린 환한 미소로 변해 있었다. 쌍꺼풀 없는 커다란 눈시울이 반달을 만들며 휘는 모습은 그대로 잡지의 화보가 되었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나?”
“!!!”
“……뭐, 일단은 그렇게 생각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해야겠군.”
“…….”
“……하지만 나는 기다려, 인환아. 아직 간절히 기다리고 있어.”
“…….”
“……알지? 숙제를 풀어…… 하루라도 빨리…… 아니, 한시라도 빨리…….”
“……위야…….”
“……다리 벌려봐.”
“…….”
색향으로 축축하게 젖은 깊은 눈이 인환의 동공에 가만히 들어와 박힌다. 고요하게 잦아든 지배자의 미소에 홀린 듯 다리를 벌렸다.
“더 위로……. 섹스가 다 보이게 더 들어 올려. 옳지…… 가슴에 무릎이 닿을 정도로…… 그래, 그렇게……. 다 보여줘, 인환아…… 다…….”
“…….”
“……귀여운 성기야. 알도 동글동글 참 귀엽지. 발기하면 여기서 얼마나 더 귀여워질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려.”
“…….”
“……날 품어주는 여기도 너무 귀엽지. 내 것이 들어박힐 때마다 움찔움찔 착하게 조여들곤 해. 자긴 느끼지도 못하면서 내겐 마치 천국에 들기라도 한 것 같은 황홀경을 주거든. 품을 때마다 기뻐서, 지독하게 기뻐서, 진짜 하나가 된 듯한 착각이 마냥 꿈만 같아서…… 때론 끔찍하게 두려워지기까지 하지.”
“…….”
“……예쁘다…… 예쁜 내 마누라…….”
“…….”
그가 주문을 걸고 있었다. 담담하면서도 애정이 철철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바리톤으로. 깍지 낀 서로의 손을 아래로 향하게 하더니 그가 벌어진 인환의 허벅지를 스스로 잡게 했다. 수치감을 인식할 자의식 따윈 어느새 홀랑 날아간 상태였다. 다리를 가슴까지 접어 올린 민망한 자세는 그야말로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창녀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인환은 맨 정신이라면 도저히 들어줄 수 없을 그의 변태적인 명령에 완벽하게 순종하고 있었다. 그의 낯 뜨거운 음담패설도, 색향으로 번들거리는 야수의 시선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상냥한 어조로 나지막하게 거듭 속삭여지는 외설은 그저 달콤한 밀어처럼만 들렸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성스러운 찬가였다. 오체투지로 신성한 제단 위에 바쳐진 절대 복종의 번제물이었다. 머릿속이 아득하게 몽롱해지며 전신이 허공에 붕 뜬 듯, 아찔한 부유감이 찾아들었다.
제사장의 입술이 경배하듯 인환의 치부로 다가든 것은 그즈음이었다. 신전의 제기를 닦아내듯 제사장의 경건한 혀가 음경을 핥고, 고환을 빨고, 비부를 닦아냈다. 무성한 치모 한 올 한 올, 빗질하듯 쓸어내린 것도 제사장의 입술이었다. 성기 아래, 비부로 이어지는 회음 또한 놓치지 않았다. 스치듯 더듬고, 격정을 못 이겨 빨아 당겼다. 되돌아온 비부에, 주름 하나하나 각인하듯 오랜 애무를 했다. 긴 호흡에 지치면 제사장은 혀를 뾰족하게 해서 안으로 깊이깊이 쑤셔들었다. 자잘한 주름을 벌리고 문지르고 빨았다. 뜨거운 안쪽 벽을 섬세하게 핥고 더듬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안쪽 깊숙이 들어가 혀로 성교를 했다. 엉덩이의 둔덕을 받쳐 든 제사장의 두 손은 입술과 혀가 바치는 경배만큼이나 맹목적 신앙을 조율했다. 끊임없이 주물러대는 열광에, 신은 괴로운 숨을 헐떡이며 자지러지듯 몸서리를 쳐야 했다.
두 손과 혀와 입술이 못다 한 숭배가, 마침내 제사장의 거대한 분신으로 이어졌다. 단숨에 뿌리까지 파고들어 사나운 포효를 거듭했다. 허리를 흔들고, 내벽을 마찰하고, 미친 듯이 몇 번이나 강하게 찔러 올렸다. 어떻게든 합일을 깊게 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체위를 바꾸었다. 누가 신이고 누가 제사장인지 문득 혼미해질 때면 곧 제사장의 절정이 왔다. 그러면 제사장도, 신도 하얗게 가루로 부서져내려 하나로 합쳐졌다.
붉은 일몰이 어느덧 신전에 찾아들고, 이어 지옥의 흑암이, 태초의 시작을 알리는 파리한 여명이 차례로 신전을 밝히고 지나갔다. 제사는 그 지옥의 흑암 내내 구원에 대한 절절한 열망처럼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제사장은 더는 지쳐 듣지 못하는 신을 깨워 애절한 탄원도 하고, 협박을 하고, 종내는 사탄의 감언이설로 꾀어내기도 했다. 쉭쉭거리는 독사의 신음이 타락한 신전 곳곳에 메아리쳤다.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자비를 주면 제사장은 기고만장 신과 한 몸으로 교미를 했다. 마침내 신은 열광에 지쳐 나가떨어지고야 말았다. 광신이었다. 맹목은 차라리 신성 모독에 가까웠다.
입천장을 긁는 저릿한 감촉에 설핏 진저리를 쳤다. 문득 호흡이 곤란해져 도리질을 해보려 하지만 정수리 위 부분 머리카락이 꼭 틀어잡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힘차고 매끄럽고 뜨거운 열기가 입안 구석구석을 휘젓고 있었다. 혀 안쪽을 쓸고, 깊이 들어가 목젖을 간질이고, 이어 바깥쪽으로 쭉쭉 빨아 당겼다. 쾌락을 닮은 강렬한 자극에 온몸이 뒤채이며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으응…… 읍……! 그…… 만……!”
숨이 한계까지 차올라서야 거침없는 유린이 떨어져나갔다. 쪽쪽. 잠에서는 이미 완전히 깨어난 상태였지만, 눈을 뜨기가 망설여졌다. 어느새 타액 범벅이 된 입술 주변을 빨아 삼키는 음란한 소음은, 아직도 인환에게 달라붙어 있는 존재를 선명하게 상기시켰으므로.
“……정오가 지났는데 더 잘 건가?”
웃음기가 서린 허스키한 중저음이 노곤하게 속삭여왔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열렬히 응시하는 기대에 찬 시선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잔뜩 부은 눈꺼풀을 힘들게 걷어 올리자, 짐작대로 흠 하나 찾기 힘든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보였다. 한쪽 팔로 몸을 지지한 채 상체를 숙이고 있어, 인환과의 거리는 10c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한숨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남자는 인환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다크 그레이의 오소독스한 정장을 말끔히 갖춰 입은 문명인의 모습에선 지난밤의 지독히 외설스러운 야수의 광기라곤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성직자처럼 청결하고 금욕적인 아름다움뿐이어서 인환은 사기라도 당한 듯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새벽까지 자신을 괴롭히고, 한두 시간 잠깐 눈을 붙이곤 바로 출근한 남자였다. 피로해 보이기는커녕, 지금까지 죽은 듯이 자버린 자신과 달리 어째 활력이 넘치는 모습도 분했다. 그나마 어젯밤 내내 그를 야수로 만들었던 분노가 홀연 사라져버린 것 같은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긴 자신에게 그리 화풀이를 해댔는데 여전히 꽁해 있다면 이 남자는 진짜 짐승이리라.
“아주머니가 아침도 안 먹었다고 하던데, 배 안 고파?”
“……별로……. 일찍 들어왔네? 벌써 일 다 끝났어?”
“음, 점심 먹고 잠깐 눈 좀 붙이기 위해서 들어왔어. 3시쯤 다시 나가봐야 해. 확실히 어젯밤엔 무리를 해서 그런지 나른하더군.”
활력과 생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저런 말을 하면 누가 믿을까? 딱 봐도 호색한의 눈을 하고 있건만 무슨 씨알도 안 먹히는 변명을! 진짜로 낮잠을 자기 위해서라면 회사 내 집무실 옆에 얼마든지 편히 쉴 공간이 있다는 걸 인환도 알고 있는데.
“……하하, 겁먹지 마. 진짜 잠만 자고 나갈 거니까. 다만 널 품고 자야 잠이 더 잘 오거든.”
얼굴이 저절로 빨개진다. 어떻게 해석을 한다 해도 간질간질한 밀어였다. 즐거움이 샴페인 거품처럼 보글거리는 그의 눈빛이 또 버거워져서 슬며시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그가 또 하하 하고 듣기 황홀한 웃음소리를 낸다.
“……일어나. 아주머니가 지금 상 차리고 있으니까 같이 밥 먹자. 너 아주머니 번거롭게 하는 거 싫지? 홍 기사와 경호원들은 벌써 먹고 정원에 앉아 있던데, 요즘 그 사람들 때문에 아주머니 꽤나 귀찮을걸?”
교활한 남자다. 사실 배가 좀 고픈 것도 같았지만, 이대로 두어 시간 더 자고픈 욕구가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도 낮잠을 잔다고 했으니 다시 눈을 붙이려 했는데, 그런 인환의 선택을 그가 재빨리 읽어버렸다. 점심상을 세 번이나 차리고 다시 물리는 일은 파출부 아주머니한테 몹시도 미안한 일이다. 그의 말대로 그가 퇴근하는 저녁 7시거나 밤 9시, 10시까지 상주하는 경호원 둘 때문에 파출부 아주머니의 일도 배로 늘어버렸다. 오후 2시의 퇴근 시간이 경호원들의 퇴근 시간과 거의 같아진 것은 물론이었다.
“……지금도 그런데 새집에 이사 가면 아주머니 혼자 감당하기 힘들 거야…… 너무 넓잖아.”
“정원사와 상주 메이드 하나 정도는 더 둬야겠지.”
“……그럼 다행이고…….”
“밥 먹을 거지?”
외면한 얼굴 곳곳에 가벼운 입맞춤을 거듭하던 그가 양손을 쥐고 끌어당겼다. 마지못해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그가 부축하듯 어깨를 감아온다. 잠들고 나서 그가 관장과 샤워까지 시켜준 모양으로, 몸 곳곳에서 호소하는 뻐근한 둔통에 비해 기분은 개운했다. 마지막 정사 후, 서로의 체액 범벅인 시트를 갈고, 자신에게 러닝과 팬티까지 꼼꼼히 챙겨 입혀준 걸 보면 그의 무서운 체력에 새삼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인환과 달리 탑의 역할을 하고 있다지만, 그렇게 해대고 난 후라면 웬만한 탑이라도 죄다 녹다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독 과했던 어젯밤이 굳이 아니더라도, 그는 늘 정사 후의 뒤처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부지런함의 배후엔 인환 자신을 향한 깊은 배려가 있다는 걸 인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깊이 생각해 들어가면 역시 어딘가 가슴이 서늘해지곤 하는 섬뜩한 열정이었다.
“……욕실엔 혼자 들어가는 게 좋겠다. 진짜 이번엔 잠만 잘 생각이니까.”
침대 바닥에 내려선 인환의 어깨에 보드라운 실크 가운을 입혀주며 그가 중얼거렸다. 무심코 시선을 내리니 팬츠 아래, 어느새 슬쩍 부풀어 있는 그의 하반신이 보였다. 이번엔 또 귓불까지 빨개져서, 인환은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갔다. 하하하. 듣기 좋은 낭랑한 웃음소리가 그의 진득한 미련처럼 끈질기게 따라 들어왔다.
거울을 보니 속옷에 가려지지 않은 피부 곳곳이 울긋불긋 장난이 아니었다. 수영장 출입이 잠정 중단되니 그간 간신히 참아주던 그의 색탐은 완전 물 만난 고기였다. 그끄제인 토요일도, 그제인 일요일도, 물론 어젯밤은 두말해 무엇 하랴. 솔직히 이 짓을 마음 놓고 하고 싶어 스포츠클럽에서 그 만행을 저지른 건 아닌가, 살짝 의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수영장 딸린 집의 구입이라는 것도(부동산은 사둘수록 손해 날 것 없다는 그의 속물스러운 변명에도 불구하고) 수십억대가 넘는 부동산 계약이 어떻게 단 하루 만에 성사될 수가 있나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그것도 인환 자신의 명의로 된 계약을. 인환이 수영장 출입을 시작한 직후, 바로 집 구입을 결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볍게 세수와 양치만 하고 욕실을 나가니, 헐렁한 검정색 면 팬츠에 짙은 자주색의 소매 없는 후드 티로 갈아입은 그가 벽장 앞에서 인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쯤밖에 채워지지 않은 지퍼로 인해 그의 아름다운 쇄골 라인이며 불룩 솟은 가슴 근육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지독하게 섹시한 살아 있는 화보였다. 모처럼 옷 밖으로 드러난 황금빛의 강건한 어깨며 팔 근육도 넋을 잃을 지경으로 섹시했다. 인환의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경탄을 읽은 그가 또 싱긋 하고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었다. 두근……. 만족스럽고 자신감에 찬 교만한 수컷의 미소였다. 암컷에 대한 통제권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듯한. 언제나 자신의 기분을 읽어버리는 그가 얄밉다는 생각마저 들지만, 그때마다 심장을 두근거리는 자신은 더 할 말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다스리며 그가 내미는 손을 보니, 인환의 갈아입을 옷이 들려 있다.
“이리 와. 입혀줄게.”
순간 잘못 들었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이내 빨개진 얼굴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이제쯤은 그의 닭살이 돋을 정도로 극진한 배려들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이렇게 느닷없이 또 새로운 테러를 당하고 나면 인환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이 돼버리고 만다.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건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인환의 뇌리를 스치는 유일한 생각은 오로지 ‘그가 진정 그일까’ 하는 두렵고도 전율스러운 회의(懷疑)였다.
“왜 또 이렇게 떨어?”
“…….”
“……의심하지 마…… 아니, 그렇게 의심해보는 것도 좋겠지. 나중에 정답만 찾아낸다고 하면.”
“…….”
“……떨지 마라, 내 고양이…….”
“…….”
어느새 다가온 그가 살며시 인환을 끌어안았다. 한 팔로는 허리를 감고, 나머지 한 손으론 뒷머리를 감아 그의 너른 가슴팍 안에 얼굴을 가두고 있었다. 한동안 계속된 인환의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다정하고도 다정한 몸짓이었다.
“……고개 들어봐. 옷 입혀줄게.”
붉어진 얼굴로 멍하니 고개를 들자, 가라앉은 검은 눈이 보였다. 잠시 시선이 마주치는가 싶더니, 보드라운 살구색 폴로 티셔츠가 머리에 씌워졌다. 어느새 벗겨진 가운이 바닥에 떨어졌고, 이내 두 팔이 꿰이고 옷에 가렸던 눈앞이 다시금 밝아졌다.
“……발도 들어봐.”
차례로 발을 들자 회색 트레이닝팬츠가 입혀졌다.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민망하던 기분은 그의 다정하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한 몸짓 탓에 어느덧 목이 멜 듯 안타까운 기분이 되었다.
“양말은 나중에 신자. 어제 보니 발톱이 많이 자랐어. 점심 먹고 바로 깎아줄게.”
“…….”
“나가자. 배가 무척 고프군.”
“…….”
더 이상 미적거렸다면 인환은 아마 울어버렸을 것이다. 아슬아슬한 조짐을 알아차린 그가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문 쪽으로 이끌었고, 인환은 아프게 조여드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켜야 했다.
거실로 나가니 주방 쪽에서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 냄새가 가득 퍼져 나왔다. 주방에서 식탁을 차리고 있는 아주머니 외엔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니 홍 기사와 고영석을 포함한 두 명의 경호원들은 그의 말대로 모두 정원에 나가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그들과 한참이나 늦은 아침 인사를 나눴다간, 과도한 정사에 지쳐 늦잠을 자버린 민망함이 한층 더했을 것이다.
“일어나셨어요, 선생님? 사장님께서 깨우지 말라고 하셔서 그냥 뒀지만 너무 오래 주무셔서 걱정되던 참이었어요. 어서 앉으세요. 사장님께서도 몹시 시장하시죠? 새로 지은 밥도 뜸이 들었으니 곧 담아드릴게요.”
“예,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막 식탁 위에 차려진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에 새삼 식욕이 몰려들었다. 인환 위주의 가벼운 상차림이 아니라 소고기무국이며 찜닭이 주 메뉴로 올라와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집안의 절대적인 가장이 돌아와 있다는 실감이 났다. 의자를 빼 먼저 인환을 앉혀준 그가 맞은편으로 가 자리를 잡자마자 아주머니가 밥공기를 차례로 가져다주었다. 막 수저를 드는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그가 밥공기에 수저를 꽂은 채로 인환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여전히 온갖 감정이 가득한 열렬한 시선이라, 인환은 모르는 체 시선을 내리고 식사를 시작했다. 계속 서로 바라보고만 있다간 또다시 목이 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곧 그도 식사를 시작했고, 식사하는 동안은 그 버거운 시선을 자제해주어서 그나마 인환도 음식에 몰두할 수가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그가 인환의 손을 잡아끌고 거실로 나왔다.
“차 드릴까요, 사장님?”
식탁을 치우며 아주머니가 물어왔고, 그가 오미자차를 부탁하자 거실로 두 잔이 배달되었다. 먼저 소파에 앉은 그에게 끌려가듯 옆에 앉은 인환은 어깨를 끌어안긴 채 머리카락을 애무당하는 불편한 자세로 차를 마셔야 했다. 잠시 후, 식탁을 치운 아주머니가 장을 보러 나가니 집 안엔 그야말로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의 손길이 점점 더 노골적이 된 것은 물론이었다. 서로의 찻잔을 거실 탁자 위에 내려놓은 그가 인환의 몸을 돌려 마주 안더니 부드럽게 입술을 겹쳐왔다. 그의 입안에선 새콤달콤한 오미자 맛이 났다. 인환 역시 마찬가지일 터이다. 정말 섹스를 할 생각은 없는 모양으로, 키스는 마냥 부드럽고 다정하기만 했다. 그저 서로의 체온과 맛과 향기를 느끼기 위한, 그래서 이 순간 둘이 함께 있고 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느껴졌다. 인환의 등줄기와 엉덩이와 허리를 배회하는 그의 손길도 음란함보다는 상냥한 절제가 느껴졌다.
“……안 자……?”
“아아.”
“……눈 좀 붙인다며…… 안 피곤해?”
“……햇살이 좋군…….”
“…….”
간신히 떨어진 그의 입술에 헐떡이듯 묻자 그가 동문서답을 한다. 역시 낮잠은 핑계였던 모양이다. 마주 본 자세로 인환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어루만지고, 귓불을 주무르고, 이마에 키스하고, 코를 깨물고, 뺨을 핥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로 빨아먹고만 있다. 기분이 무척 좋은 듯, 입가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고 있고, 눈은 게슴츠레하게 반쯤 뜨고 있다. 키스를 멈출 때면 질리지도 않는지 마냥 하염없이 인환의 얼굴만 바라보는데, 절대 잠을 잘 상태로는 안 보여서 인환도 잠자코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몸을 맡기고만 있었다. 십여 분을 그 상태로 인환을 지분거리던 그가 문득 인환을 가만히 밀치곤 소파에서 일어섰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기다리라는 눈짓을 주곤 침실로 사라졌다. 잠시 후에 돌아온 그의 손엔 손톱깎이가 들려 있었다.
“……발톱 깎자.”
잠깐 멍해져서 그의 몸짓만을 좇고 있는 사이, 그가 소파 아래에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른발이 먼저 그의 손안으로 끌려들어갔고, 이내 또각또각 발톱을 깎는 소리가 들려왔다. 맨발을 움켜쥔 그의 손길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해, 간간이 간지러움이 느껴져도 좀처럼 발을 움찔거릴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의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인환은 소파에 앉아 있고 그는 바닥에 앉은 자세라, 고개를 숙인 그의 정수리며 이마, 내리깐 눈꺼풀이 시야에 선명하게 밟혀들었다.
나른한 한낮의 햇빛이 거실 가득 들어와 있었다. 햇빛을 통째로 받고 있는 그의 모습이 순간 부서질 것만 같이 아름다워, 인환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와 섹스로 한 몸이 됐을 때보다도 더 그가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진짜 한 몸인 것만 같았다. 하나의 정신에 하나의 육체를 지닌 그야말로 단 하나의 존재…… 완벽한 합일의 순간이었다.
목이 메었다. 요즘 툭하면 울고 싶어지듯이, 또 그렇게 목이 메고 눈시울이 따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울고 싶지 않았다. 이 완벽한 순간을 자신의 값싼 눈물 따위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띠리링∼띠리링∼띠리링∼띵딩딩∼∼∼.
끝없이 위로 부상했던 넋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난폭한 테러의 주범은 그의 후드 티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휴대전화 벨소리였다. 전자음으로 전환된 「로망스」의 선율이 가증스럽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혼비백산해버린 심장 때문이리라. 어느새 발톱을 다 깎았는지, 그가 고개를 든 채 인환을 응시하고 있었다. 인환의 발 하나씩을 움켜쥔 양쪽 손을 가만히 가운데로 모아 쥐고 있어, 마치 무슨 귀한 선물이라도 받아 든 순례자의 모습이었다. 하늘로 부상했던 넋은 자신만이 아니었는지, 게슴츠레해진 그의 눈동자 역시 어딘가 몽롱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띠리리링∼디링∼디리링∼∼∼띠리리∼디링∼디링∼∼∼.
「로망스」의 가증은 끈질겼다. 그러나 인환처럼 그도 현실로 돌아오기 싫었던 모양인지, 인환의 두 발을 거머쥔 자세 그대로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았다. 꼼짝 않고 인환의 눈만 응시한 채 무언가를 향해 고집스레 저항하고 있었다. 아니, 애원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것이 진정 현실인지, 아니면 전화 통화 자체인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는 인환도 정확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전화…….”
눈앞의 호전적인 투사보다는 훨씬 집요하지 못한 인환이 마침내 그를 재촉했고, 그의 몽롱했던 눈빛에도 비로소 현실감이 들어와 박혔다. 천천히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인환의 발을 바닥에 내려놓은 그가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
“……형?”
[…….]
폴더 너머로 흐릿하게 울리는 전라도 사투리를 통해 상대가 이 의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순간 철렁해서 그를 외면한 채 창 밖만을 응시했다. 그의 혈육이거나 그들과 관련된 어떤 얘기를 듣기만 해도 자동적으로 온몸의 힘이 빠지고 얼굴이 창백해지곤 하는 인환이었다. 순식간에 넋을 혼미하게 만드는 죄책감과 고통과 우울감으로 기분이 곤두박질을 친다. 그런 인환을 살피듯 주시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창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이쪽으로 등을 보인 채 조심스레 통화하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을 향한 지극한 배려를 보지만, 그조차도 자신의 죄책감을 더 가중시킨다는 걸 그는 차마 모르고 있으리라.
“……그렇군요. 잘됐네요.”
[…….]
“……아뇨, 형. 저도 기뻐요. 오랫동안 꿈꿔온 일이니까요. 몰락한 자를 처리하는 일은 더 쉬운 법이죠. 그자를 청부로 죽인다든가…… 아무튼 더 가고도 싶지만 형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멈출 겁니다.”
[…….]
“……진심입니다. 약속할게요. 국회의원의 동생이 불법을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
“……그건…… 예, 그렇겠죠. 동생들도 그렇고 그 사람도…….”
[…….]
“압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앞만 바라볼 겁니다. 약속해요, 형.”
[…….]
“……예, 지금 틀어볼게요. ……예.”
[…….]
“예, 그럼 들어가세요, 형. 며칠 내로 찾아뵙겠습니다.”
[…….]
폴더를 닫은 그가 거실장 앞으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TV 리모컨을 찾는 걸 보니 TV를 틀려는 모양이었다. 고요했던 거실은 잠시 후, 여섯 개의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웅장한 소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그가 마침 특집 뉴스를 방송하던 중인 MBC에 채널을 고정하고는 그 앞에 선 채로 한동안 뉴스를 시청했다. 인환도 바짝 긴장한 채 그의 시선을 따라 화면에 집중했다. 밤 9시에 하는 정규 뉴스만 챙겨볼 뿐 생전 TV와는 담을 쌓고 사는 그가 모처럼 낮에 TV를 켜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것이 방금 전 이 의원과의 심상치 않은 통화 내용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인환으로 하여금 저절로 방송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게끔 했다.
[……검찰은 또 6일 탁 회장으로부터 ‘무진 그룹에 부과된 세금을 감면받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수억 원을 받은 혐의, 즉 특가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현 한나라당 국회의원 주영무 의원에 대해 사전 구속 영장을 청구했습니다. 검찰에 따르면 주 의원은 2001년 서울지방국세청이 무진 그룹에 대해 1500여억 원의 세금을 추징하자 탁 회장으로부터 세금 감면을 위한 로비 자금 명목으로 3억 원을 받은 혐의입니다. 실제로 국세청은 재심사를 거쳐 당초 추징 금액에서 절반 이상 깎인 600여억 원을 새로 부과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최근 서울지방국세청 고위 관계자를 소환해 조사했습니다. 주 의원은 이와 관련해 일체의 혐의를 부인하고 있으며, ‘탁 회장과는 세 차례 만난 바 있으나 모두 다른 후배 기자들이 동석한 자리에서 취재 목적으로 이뤄진 만남이며, 탁 회장으로부터 2001년 모 음식점에서 동료 기자들 서너 명과 함께 만난 자리에서 50만 원을 받은 사실이 있을 뿐’이라고 대변인을 통해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변인은 그러나 어떤 명목으로 돈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탁 회장에게 알아보라’는 말로 대신하고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16일 무진 그룹 기획실 박종무 전 실장의 집을 압수 수색한 검찰은 박 전 실장의 자금 관리인으로 지목된 김두표 씨 계좌에 대한 추적에서 주 의원에게 김 씨 계좌에서 나온 수표가 건네진 것을 확인, 이 같은 내용을 부각시키면서 영장 실질 심사에서 법원으로 하여금 주 의원의 혐의를 입증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지난 대선 비자금 설에 연루돼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무진 그룹 로비 사건까지 터짐으로써 주 의원으로서는 사면초과의 상황에 놓인 셈인데, 한나라당 일각에서도 의원직 사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각오해야만 하지 않는가 하는 조심스러운 추론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검찰 관계자는 ‘당초 10월 초께 수사가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현재로선 길어질 가능성도 있다’며 ‘주 의원이 받은 돈 가운데 실제 로비에 사용된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검찰은 한편, 무진 그룹과 탁 회장이 세금 감면, 공정위 조사 무마와 주택 건설업법 개정, 서해 유전 개발 사업 추진, 탁 회장 특별 사면 등 크게 네 갈래로 나눠 로비를 진행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주 의원을 비롯한 전직 국회의원, 대학 교수, 전 공정위 국장, 언론사 관계자, 시민 단체 대표, 전 국회의원 보좌관, 검찰 수사관 등등 각계 인사들이 로비에 연루된 사실 또한 확인됐으며, 무진 그룹이 로비 대상들에게 5억 원이 넘는 돈을 제공한 사실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TV를 끄자 거실엔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는 여전히 TV 화면을 향한 자세 그대로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얼굴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단순히 기뻐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인환도 알 수 있었다. 20여 년에 가까운 피맺힌 원한이 단지 한 인간의 직업과 명예를 박탈하는 것으로 풀릴 수는 없으리라. 말 그대로 청부업자를 고용해 원수를 처형한다고 해도 그의 마음엔 차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조금의 만족감조차 없지는 않을 터, 어쩌면 그는 이 순간을 위해 지난 20년간 그토록 치열하게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달려왔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뭉클한 감동과 함께 가슴 저린 회한이 인환의 넋을 흔들었다.
그의 저 피 맺힌 20여 년 중에 과연 자신이 준 고통과 원한의 시간은 또한 얼마인 것일까? 결과적으로, 인환 또한 그에게 있어 형을 죽인 원수와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이래도 되는가? 정말 이리 뻔뻔스러워도 되는 걸까? 천국의 꿈을 꾸며, 그 꿈이 영영 끝나지 않기를 소원할 자격이 과연 자신에게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 순간에도 그의 영혼 깊숙이에서는 인환 자신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의식하지 않건 혹은 의식하고 있건 간에. 형을 죽인 원수를 향해 청부 살인까지도 꿈꿔볼 만큼, 그는 피붙이에게 해코지를 한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일절 용서가 없다. 그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는 아마도 저 피맺힌 원한과 증오를 영원히 잊지 않을 터이다. 아니, 어쩌면 죽어서까지 그를 등에 지고 갈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오한이 돌아 인환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석상처럼 우두커니 선 채 말이 없는 그가 무서웠다. 무서운 이상으로 간절하고 또 간절해졌다. 그는 상기해냈을까? 새삼 인환이 저지른 죄악들도 다시금 기억의 편린 속에서 건져 올려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확인하고 싶은 양심과 그 이상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은 공포가 공존했다. 도대체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인환은 상상하기조차 겁이 났다.
도저히 더는 그의 등만을 해바라기할 수가 없어 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실 가득 들어와 있는 풍성한 햇빛이 눈부셨다. 걸음이 몹시 흔들렸다. 눈이 부셔 시야가 흔들린 때문은 아닐 터이다. 단 몇 걸음 만에 그에게 닿을 수 있는 거리가 고마웠다. 더 멀었다면 그를 만질 용기 같은 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위…… 야……!”
흠칫. 그의 등에 살며시 손바닥을 대자 그가 회초리를 맞은 듯 움찔 몸을 떨었다. 곧 등을 돌려 시선을 보내오려는 그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결사적으로 그의 허리를 부여안은 채 늠름하게 뻗어 내린 등줄기에 얼굴을 묻었다. 앞으로 돌린 양손을 그의 아랫배 위에서 겹치듯 움켜쥔 채 맹렬하게 힘을 주었다. 혹여 뿌리쳐질까 겁을 먹은 때문이었다.
“……또 내가 무서워……?”
한숨 같은 다정한 울림.
“……후우……. 그만 떨어, 인환아…… 제발…….”
그의 손이 그의 아랫배 위에 겹쳐진 인환의 손등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이윤열의 전화를 받기 전, 말하지 않아도 몸속 깊이 스며들던 다디단 다정(多情)이 여전했다. 목소리에서도, 몸짓에서도. 그제야 극도로 긴장했던 신경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목멘 뇌까림을 몇 번이나 거듭 토해내며, 인환은 그의 등에 얼굴을 비벼댔다. 아직은 괜찮아. 그래, 괜찮아…….
“……그저 좀 허탈해졌달까…… 아무런 느낌이 없어. 해묵은 원한을 갚았다는 후련함도, 그렇다고 여전히 절절한 원한도 더 이상 느껴지지가 않더군. 이상하지? 그래서 좀 멍해 있었던 거다.”
“…….”
“……형한텐 청부 살해까지도 하고 싶은 기분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아니, 정직하게 말해서 그러고 싶기는 한데, 그렇다고 그게 절실하다는 생각도 안 드는 거야. 절실했다면 형을 핑계 삼지도 않았겠지. 어차피 형과 나는 다른 길을 걷고 있고…… 형이 빛이라면 나는 어둠 쪽이니까 새삼 양심 운운한다는 것도 웃긴 노릇이지.”
“…….”
“……결국 이런 거였나 싶은 게…… 고작 이런 걸 위해서 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나 싶은 게…… 너까지 버리고…… 그렇게 독하게…… 스스로를 몰아댔던 건가…… 아아, 아니야. 아니지. 이미 알고 있어. 허탈한 게 당연하지. 아무렴.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나는.”
“…….”
“……의미가 변했던 거야. 어느 순간부터…… 목표가 달라져버렸으니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 그렇지 않은가?”
“…….”
대답을 기다리듯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인환을 향해 묻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 일종의 스스로를 향한 제의(祭儀)였다. 느닷없이 연달아 피붙이를 잃고 홀로 무거운 생의 멍에를 짊어져야만 했던 어느 소년의,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했던 운명을 향한 애곡(哀哭)이었다.
“……더 이상 증오하지 않아? 형을 죽인 사람인데?”
“……그래.”
“……어…… 어머니까지 죽인 셈이 되는데도?”
“……증오할 마음이 안 생겨.”
“……그…… 그럼 용서하는 거야?”
“…….”
“……요, 용서는 도저히 못 하겠지? 그렇지?”
“……용서할 작정이다. 그러기로 결심했으니까.”
“……결심했다는 건 아직 용서하지 못했다는 거네?”
“용서할 수 있게 되길 원해. ……원하지만…… 물론 그건 내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야. 다른 소원…… 아아, 그러니까 내 유일한 다른 목표가 이루어지면 아마 그땐 그자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될 거다.”
“…….”
질문이 거듭되는 동안 대상이 바뀌었음을 알았다. 그의 형을 살해한 모 국회의원이 아니라, 인환 자신에 대해서 묻고 있다는 것을. 인환 스스로 의식한 것은 아니었지만, 용서할 수 있게 되길 원한다는 그의 답을 듣는 순간 느꼈던 뭉클한 설움이 인환을 자각시켰다. 애매하게 떨어진 그의 대답은 희망이자 절망이었다.
“……다, 다른 목표가 뭐야? 이루어지기 힘든 거야?”
“…….”
대화 내내 인환의 손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던 그가 마침내 인환의 팔을 풀고 천천히 돌아섰다. 마주한 시선은 깊고도 또 깊은 심연이었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않으면?”
“……문득 추락해가겠지. 절정에서…… 더 이상 미련두지 않고 순식간에…… 그렇게 활활 타버리겠지.”
“…….”
구체적인 설명을 피하는 선문답 같은 대꾸였다. 그럼에도 그의 단호하다 못해 한없이 순결한 비장함만은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빨아 당기듯 들여다보는 그의 검은 눈이 몸 깊은 곳에서 치솟던 설움을 막아주었다. 부정적인 가능성을 말하면서도 그는 분명 희망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보고 있는 희망을 인환 또한 그의 눈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마치 서로의 희망을 필사적으로 움켜쥐듯, 그도 인환도 꼼짝 않고 서로의 눈만을 들여다보았다.
똑딱거리는 거실 괘종시계 바늘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창 밖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단풍나무 가지들이 보였다. 단풍잎들을 건드린 바람이 반쯤 열어둔 거실 창문 틈을 지나 묵직한 거실 커튼마저 슬며시 흔들고 스쳐갔다. 분명 시간은 흐르고 있는 것 같은데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찰칵 하고 현관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정지된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던 시간이 갑자기 가속도가 붙은 것마냥 맹렬하게 빨라졌다.
“……침실로 가자.”
잡혀 있던 손을 끌며 그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숨조차 멈춘 채 도망치듯 침실로 뛰어든 건, 난폭해진 시간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저항이었다. 막 침실 문을 닫아거는 순간, 문밖에서 아주머니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그의 입술이 내려왔다. 주린 듯 입술이 겹쳐지는 순간, 덜컹 하고 침실 문에 등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문틀을 양손바닥으로 누른 그가 인환을 문과 그의 몸 사이에 가둔 채 격정을 쏟아붓고 있었다. 숨 쉴 틈 없이 파고드는 혀의 움직임에 입술이 한계까지 벌어졌다. 몇 번이나 각도를 달리해 겹쳐지는 격렬하고 깊은 입맞춤에 머릿속이 녹아내리는 것마냥 어질어질했다. 그의 가슴을 밀어보려던 두 손은 도리어 거칠게 틀어잡힌 채 십자가에 매달리듯 문틀 위에 고정됐다. 고개가 위로 활짝 젖혀진 채 뒤통수가 문 뒤쪽으로 한없이 밀려들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흥건한 타액이 양쪽 입가로부터 턱과 목덜미를 적시며 줄줄 흘러내렸다. 쿵쿵 하고 인환의 머리며 팔꿈치가 침실 문을 치는 소리가 서로의 점막을 빠는 질척한 소리보다도 더 부끄러웠다. 잔뜩 부푼 그의 성기가 사타구니 사이를 마구 비벼대고 있었다. 뻐근한 둔통이 여전한 아누스가 무자비한 공격에 대비하듯 잔뜩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두려움보다 안타까움이 더했다. 함께 발기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섹스도 안타까웠고,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희망’을 움켜쥐지 못하는 겁에 질린 넋도 안타까웠다. 마비가 없는 온전한 다리를 가까스로 들어 그의 종아리를 거쳐 허벅지 쪽으로 힘겹게 감아올렸다. 양손이 머리 위로 매달린 탓에 그를 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으! 윽, 안 돼……!”
순간, 신음 같은 애원이 인환과 맞물린 그의 입술 틈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 단 한 번의 적극적인 몸짓이 그를 더한 광기로 몰아간 모양이었다. 문틀에 못 박혔던 양손이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무지막지한 기세로 몸이 바닥에 밀어붙여졌다. 입술을 붙인 그대로 그가 엉덩방아를 찧듯 방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인환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자세로 인환의 두 다리가 활짝 벌어졌다. 사타구니 사이로 그의 굵고 단단한 허벅지 근육이 꿈틀꿈틀 약동하는 감촉이 선연했다. 금방이라도 인환을 범할 듯 한계까지 발기한 페니스도, 그 바로 아래에서 덜렁거리는 고환의 음란한 감촉도 생생했다. 얇은 면으로 된 옷차림이 외려 벌거벗었을 때보다도 더 민감하게 그의 몸을 느끼게 했다. 자동인형처럼 양쪽 무릎이 저절로 세워지며 삽입을 준비하는 자세가 되었다. 그가 좀 더 쉽게 옷을 벗길 수 있도록 허리 아래쪽으로 힘을 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움직일 때마다 저릿한 항문의 통증은 이미 의식 밖으로 날아간 인환이었다. 그가 원하는 한, 자신은 언제든 몸을 열어줄 용의가 있었다. 욕망을 품진 못해도 욕망을 받아줄 수는 있을 터였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밀어붙여지던 입술이 갑자기 떨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인환의 바지를 벗기는 대신, 그가 몸부림치듯 상반신을 들어 올리는 게 느껴졌다. 살며시 눈을 뜨고 올려다보자 그가 부르르 온몸을 떨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드는 것이 보였다.
“……안 돼……! 가만히 있어, 가만……! 지, 지금 또 안으면 상처가 생길 거다……!”
흐릿해진 시야로 파고든 그의 얼굴이 욕정으로 붉게 달아오른 채 전율하고 있었다. 질끈 내려감은 눈이며 하얗게 탈색된 입술이 그가 얼마만 한 의지로 참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저릿한 통증과 감미로운 기쁨이 동시에 인환의 심장을 찌르고 지나갔다.
한참을 꼼짝도 않은 채 숨을 고르던 그가 비로소 눈을 뜨고 인환을 내려다보았다. 마주친 아름다운 눈동자는 격렬하고 어둡고 새파랬다. 사타구니 사이에서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는 흉흉한 생식기나 발갛게 변한 눈시울이 그의 여전한 흥분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광기에 가까운 격정은 어느 정도 다스려진 모양이었다.
“……양이라도 세어봐.”
억눌린 전율로 살짝 떨리고 있는 중저음이 악물린 잇새로 흘러나왔다.
“……세어봐. 좀 참아보게.”
“……?”
헐떡이듯 재차 떨어지는 불확실한 명령에 멀뚱멀뚱 올려다보니 그가 눈꼬리를 살짝 휘며 웃는다. 쑥스러움이 분명한 자조의 웃음이었다.
“……당장 널 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손장난하러 욕실로 도망치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러니 양이라도 세어봐.”
비로소 무슨 의미인지 감이 왔다.
“……그, 그건 잠이 안 올 때 하는 일 아닌가……?”
“쿡쿡, 아무러면 어때. 해봐.”
한쪽 팔로 체중을 지지한 채 그의 다른 손이 머리카락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만지고 싶은 정열을 견딜 수 없는 듯, 한 움큼 강하게 움켜쥐었다가 이내 살살 쓰다듬고, 다시 와락 움켜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틈틈이 고개를 살짝 숙여 입술이며 얼굴 곳곳에 가벼운 뽀뽀를 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안 참아도 되는데…… 난 괜찮으니까…….”
“안 돼. 어제 널 치료한 건 나야. 네 몸에 대해서라면 내가 더 잘 알지.”
“……그럼…… 그냥 욕실에 가서…….”
“이 몸과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그도 패스. 어떻게 뺀 시간인데…… 3시에 나가지 않으면 윤 실장이 진짜 울 거다.”
“……!”
“어서.”
“……나, 낮잠 자러 들어왔다더니…….”
“그러려고 들어온 건 맞아. 다만 마누라가 하도 섹시해야 말이지…….”
“!!!!”
“해봐. 진짜 잠이라도 올지 누가 알아? 잠 안 올 때 하는 일이라며?”
“…….”
“해보라니까? 남자가 이런 꼴을 하고 얼마나 힘든지는 아무리 너라도 알 수 있을 텐데?”
여전히 팽팽하게 발기해 인환의 사타구니와 아랫배 근처를 찌르고 있는 그만 아니라면 놀리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실제로 놀리고 있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다만, 슬쩍 웃고 있을 뿐 표정만은 그나마 진지해서 인환은 떠밀리듯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해 양을 헤아리기 시작한 인환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변해 있었다. 다 늙은 아저씨 주제에 이게 웬 망신살인가 싶으면서도, 뻔뻔스러울 지경으로 태연한 그의 눈빛에 마냥 의심을 잡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진짜 힘들긴 할 것이다. 모르지 않는다. 자신 역시 한때는 건강한 성욕을 지닌 남자였으므로.
“……양 서른세 마리, 양 서른네 마리, 양 서른다섯 마리…….”
“……음, 좋아…… 좋군…… 그런데, 팔로 꼭 안아주면 더 좋겠군.”
“!!!”
“마누라가 꼭 안고 양까지 세어주는데 잠이 안 오면 것도 심하게 까칠한 놈일 거야. 그렇지?”
인환의 양손은 그의 가슴과 어깨 쪽을 어정쩡하게 잡은 상태였다.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잠깐 눈을 감고 양 세는 소리를 경청하던 그가 다시금 눈을 뜨고 새로운 명령을 던졌다. 속내를 읽기 위해 멀뚱히 그를 바라보는데, 그가 인환을 품에 안은 채로 빙글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자세가 역전되어, 그가 바닥에 눕고 인환이 그를 타고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갑자기 불안정해진 사지에 인환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몸을 뒤채지 않을 수 없었다. 다급하게 두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누르는 것으로 중심을 잡고 시선을 맞추니, 그가 미소를 머금은 채 인환의 당황을 샅샅이 핥고 있었다. 서로의 몸을 뒤집기 위해 인환의 허리를 움켜쥐었던 그의 양손은 어느새 엉덩이 쪽으로 내려가 있었다. 치한의 그것과 다름없는 음탕한 손길이 양쪽 엉덩이 둔덕을 마음껏 주무르고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두 팔로 내 목을 감아.”
“…….”
“얼굴은 내 가슴에 대고…… 옳지, 그렇게 더 꼭 안아줘.”
“…….”
홀리듯 그의 명령에 따르자, 엉덩이를 지분거리던 그의 손이 움푹 팬 등골과 뒤통수로 기어 올라왔다. 머리카락 틈으로 손을 집어넣은 채로 그가 양팔에 은은히 힘을 주었다. 안아달라는 어리광이 무색하게, 인환 쪽이 도리어 그의 품에 빈틈없이 안긴 꼴이었다. 청각이며 시각, 촉각과 후각 등등, 너나할 것 없이 온몸의 감각들이 오로지 그만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양들은 어디로 갔나?”
서로를 품은 채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데 그가 또 불쑥 파문을 일으켰다.
“……몇 마리나 잃어버렸지?”
웃음기 어린 나른한 중저음이었다. 놀리고 있었다. 그게 틀림없었다. 재촉을 모른 체했다간 또 어떤 이상야릇하고 민망한 요구를 할지 몰라 인환은 서둘러 양을 우리로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양 예순네 마리, 양 예순다섯 마리, 양 예순여섯 마리…….”
쿡쿡쿡. 배 속 깊이 울리는 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에 인환의 몸이 따라서 파도를 탔다. 정말로 조각배를 탄 것도 같았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근사한, 매혹적인 조각배였다. 조각배가 숨을 내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평화로운 진동이 모태 중의 양수처럼 포근히 넋을 품어 안았다. 두근두근. 규칙적으로 귓전을 두드리는 조각배의 심장 고동은 그대로 감미로운 자장가가 되었다.
“……이백아흔두 마리, 양 이백아흔세 마리, 양 이백아흔네 마리…… 사백열일곱 마리, 사백열여덟 마리, 사백열아홉 마리…… 양 오백한 마리, 양 오백두 마리…….”
천 마리쯤 불러 모으면 그를 잠재울 수 있을까? 아니, 그는 욕심쟁이니까 3천 마리로도 어림없을 거야…… 의욕만 넘치는 게으른 양치기가 가물가물 멀어지려는 의식의 끝을 열심히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허나 역시 의욕만 과했을 따름이었다. 양치기는 천 마리도 채 다 모으지 못한 채로 그만 잠에 빠지고 말았으니까. 그를 잠재우기는커녕 도리어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잠들기 직전, 조금도 가라앉지 않은 그의 몸을 근심하긴 했었다. 게으른 양심이었다. 그를 잠재우기 전에는 절대 먼저 잠들 수 없다고, 되도 않는 고집을 부렸던 것도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기억은 백지로만 남았다.
인환이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침실엔 그만이 홀로 덩그마니 남겨져 있었다. 어느새 침대로 몸이 옮겨졌는지, 포근한 침대 스프레드가 가슴 언저리까지 꼼꼼하게 덮여 있었다.
거실에서 막 3시를 치는 괘종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직후, 대문을 나서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부드러운 엔진음도 설핏 들은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처리된 바니시까지 바짝 마른 것을 확인하고 박스에 그림을 집어넣었다. 포장 재료가 없어 운송을 부탁한 마인 아트 쪽에 특별 제작한 대형 종이박스까지 부탁을 하는 민폐를 끼쳤는데, 마인 아트의 서 실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런 민폐는 언제든 환영한다는 말로 인환의 기분을 가볍게 해주었다.
‘삼색 코너’ 시리즈는 최근 인환이 몰두하고 있는 새로운 연작이었다. 지난 보름 남짓, 인환으로선 거의 날아갔다고밖엔 표현할 길이 없게끔 홀린 듯 일사천리로 완성한 작품이 방금 포장을 마친 ‘삼색 코너’ 시리즈 1이었다. 닷새 전부터 시리즈 2의 작업에 들어갔고, 원래대로라면 완성된 시리즈 1은 계약에 따라 마인 아트 쪽에 배달돼야 마땅한 것이었지만, 인환은 마지막 붓질과 동시에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의 ‘수호천사’를 떠올렸다.
남자에게 특별히 그림을 헌정하고 싶다고, 요즘엔 그저 그의 눈치만 살피던 간살도 잠시 접어둔 채, 인환은 그에게 담담히 부탁을 했었다. 오늘 아침 식탁 앞에 마주 앉은 자리에서였다. 개인전 건만으로도 남자에겐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은혜를 입었으니 그 정도는 하고 싶다고, 또 요 몇 년간을 통틀어 인환으로선 꽤 많은 변화를 준 첫 작품이니만큼 남자를 최초의 컬렉터로 지명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행히 그는 인환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기기는 했을지언정. 다음부터 남자와 관련된 그런 종류의 부탁을 할 땐 베갯머리송사라도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으름장 또한 달게 받아야 했다.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준 공도 있으니 딱 이번 한 번만 허락해준다고.
오주희의 집에서 인터뷰를 한 날 이래, 생각날 때마다 심장 한구석을 아리게 하는 남자였다. 험하게 상한 저 아름다운 얼굴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충격과 아픔, 그리고 지독한 죄책감은 나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환을 고통스럽게 했다. 마치 위장에 돌 한 무더기를 얹어놓은 것처럼 몸이 천근만근 늘어지는 심정이었다. 다시 한 번 만나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은 절실한 마음이 들다가도, ‘무슨 염치로’ 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일쑤였다. 사과를 하고, 앞으로 같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은 당장에라도 미친 듯이 남자에게로 달려갈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림조차 뒷전이 돼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 저 현란한 ‘천국’의 꿈을 꾸기 시작하고부터일 것이다. 열심히 그리는 것은 여전하지만, 그림이 남은 생의 전부이자 유일한 것이라고 믿었던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저 황홀한 천국의 열락이 어쩌면 자신에게도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탐욕스레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언제나 그러했었다. 언제나. ‘그’가 인환의 생에 관련을 갖기 시작하면, 아니, 정확히 말해 인환이 그를 욕심내기 시작하기만 하면 인환의 모든 레이더망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인환의 자아는 깡그리 사라지고, 그에게 목을 매는 절대 우주만이 오롯이 문을 열게 된다. 그건 진리이자 현실이고, 또한 과학의 법칙이었다. 인환의 의지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뼛속까지 녹아 붙어 더 이상 가망이 없게 된 암 덩어리 같은 관성이었다. 그것이 움직임을 시작하는 순간, 자신은 그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의 자아를 버릴 터였다. 그림도 팽개치고, ‘수호천사’인 남자 따윈 더더욱 까맣게 잊을 것이다. 남자가 자신과 밀착돼 있음을 절절히 자각하는 만큼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애착을 잃어버린 지가 언제인지, 아니, 그런 것이 존재한 적이나 있었는지,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인환이었다. 그런 자신이 자신의 일부로 여겨지는 남자라고 새삼 아껴줄 턱은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를 위해 이렇게 자신의 분신을 포장하는 건, 바로 ‘남자’ 외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장인환이란 자아가 실제로 살아 있다는, 이런저런 변모를 거듭하면서도 그나마 이 우주 한 귀퉁이에서 근근이 목숨줄을 유지하고 있다는, 그런 확인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자아를 잃지 않은 온전한 장인환은 어쩌면 당신만의 것일 게다. 장인환의 우주를 알아볼 수 있는 존재는, 그래서 그 우주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존재는, 또한 당신이 유일할 것이다…… 라고, 알량한 고백을 던지는 것이다.
‘김 선생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몇 번이나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지운 전언은 결국 그렇게 무미건조한 단 한마디로 낙착이 되었다. 역시 마인 아트 쪽에서 가져다준 회사 카드에 그 단 한마디를 정성스레 옮겨 적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의미를 한 자 한 자에 담아.
카드까지 동봉시키자 운송 기사가 집 안으로 들어와 그림을 배달 차량까지 함께 옮겨주었다. 정원을 빠져나가는 배달차를 배웅하고 심란한 마음에 2층 아틀리에로 올라왔다. 몇 번이나 전화기를 바라봤지만 역시 전화를 걸 만한 용기는 없었다. 남자는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선물을 받아줄까? 설마 내치지는 않으리라. 선물에 담긴 인환의 애끓는 진심까지 읽어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언제까지 남자의 일방적인 호의만 살쾡이처럼 빼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띠리리리리∼∼∼.
마음을 다잡고 막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테이블 위에 놓아둔 휴대전화가 울었다. 누군가를 위한 수신 전용(다른 번호는 저장은커녕 거는 일도 삼가라는 엄명이었다!) 휴대전화이니 전화를 건 임자는 받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요즘엔 평균 두어 시간마다 한 번꼴로 매일 전화를 하고 있었다. 용건들이란 그저 지금 무얼 하고 있냐, 밥은 먹었냐, 날씨가 흐리다 등등 별 시답잖은 내용들뿐이었다. 저러면 일에도 꽤 방해가 될 텐데. 잠깐 한숨을 쉬어도 보지만, 실은 인환 역시 저 별 시답지도 않은 통화를 기뻐하고 있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대답할 말을 고르고, 나지막한 매혹의 중저음을 듣고, 시답잖은 내용들 사이사이, 흘리듯 떨어지는 감정의 편린들을 마치 보석이라도 줍듯이 정성껏 주워 올리곤 한다.
“……어, 위야.”
[작업 중이었나?]
“어, 응. 점심 먹고 쉬다가 지금 막 올라왔어. 넌? 밥은 먹었어?”
[음, 사내 식당에서 간단하게 때우고 지금은 운동 중.]
“……주말인데 오늘은 일 늦게까지 해야 하나 봐?”
[……왜, 서방님 늦게 들어갈까 봐 섭섭해?]
일찍 일이 끝나면 오후 운동을 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들어오는 그를 알기에 조심스럽게 묻자, 그의 어조가 순식간에 놀리는 기색으로 변한다. 저절로 붉어지는 얼굴을 자각하며 인환은 살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수록 더 놀린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서방님’이니 ‘마누라’니 하는 표현들을 접할 때마다 순간 당황해 말문이 막히고 얼굴이 빨개지기만 하는 인환이었다. 폴더 너머에서 짓궂게 입술 끝을 말아 올린 채 웃음을 머금고 있을 그의 얼굴이 선했다. 즐거움으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을 아름다운 눈시울도.
“……느, 늦게 들어와?”
[쿡쿡쿡. ……저녁 늦게 뉴욕 본사 쪽과 미팅이 있으니 아마도 많이 늦어지겠지. 게다가 잠시 후엔 두어 시간 정도 땡땡이를 쳐야 하기도 하고.]
“……땡땡이?”
[그래. 너랑 땡땡이. 아직 작업 들어간 게 아니면 잠깐 나올 수 있겠지?]
“……나랑…… 나와? 어, 어디에……?”
[나올래?]
“……어어, 급할 건 없으니깐 뭐…… 근데 무슨 일인데?”
[별일은 아니고…… 홍 기사와 경호원들에게도 얘기해뒀으니까 지금 나와.]
“……근데 무슨 일인지 말해주면…….”
[…….]
“……무슨 옷을 입고 나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저번처럼 조심스러운 장소면…….”
어쩐지 대답을 피하는 것 같은 인상에 인환의 대꾸도 조심스러워졌다. 일주일 전쯤에도 그는 느닷없이 인환을 불러내 격식 있는 프랑스식 레스토랑에 가서 디너를 사주었고, 식사 후엔 상류층 대상의 호텔 사교 클럽에까지 데려가서 실내악 연주회를 들었었다. 이번에도 그런 데이트 신청인가 싶어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어쩐지 저번과는 달리 그는 좀 겸연쩍어하는 듯했다. 이번엔 단순한 데이트가 아닌지도 몰랐다.
[……아무 옷이나 입고 나와도 돼. 아침에 본 그대로 그냥 나와.]
잠시의 침묵 후 그가 담담하게 명령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줄 생각이 없는 거다. 이쯤 되면 인환의 호기심은 직접 그를 만나봐야 채워질 것이다. 하긴 무슨 일이든 그야말로 ‘무슨’ 상관이랴. 어떤 식으로든 그를 볼 수 있고, 또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인 바에야. 남자에게 그림을 보내고 심란한 마음에 좀처럼 작업에 몰입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덕분에 기분 전환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사실 별로 외출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건만, 본의 아니게 외출이 제한되고 집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보니 왠지 더 답답한 기분이 들곤 하는 요즘이었다. 그나마 매일 수영장으로 출퇴근을 했던 지난 2주간은 그런 기분을 못 느꼈었는데 요 일주일간은 답답하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드는 걸 보면 사실 인간이란 게 참 간사하구나 싶다. 그의 전처 양신애란 이름만 나와도 벌벌 떨며 죄책감에 시달리곤 하던 게 바로 엊그제건만. 아무튼 그렇다고 그를 신경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아서, 그저 묵묵히 집 안에서 그림만 그린 일주일이었다. 그의 느닷없는 호출이 특별히 더 반가운 까닭이었다.
최대한 재빨리 몸단장(그는 아무렇게나 하고 나와도 된다고 했지만, 그럴 수야 있나. 가뜩이나 그와 나란히 서면 비교가 되는데, 차림마저 후줄근해서야 더 신경이 쓰일 것이다. 그가 사준 옷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고, 또 튀지도 않는 감색 세미정장으로 갈아입고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젤도 발라 얌전히 정리한 인환이었다)을 끝내고 경호원 둘과 함께 홍 기사의 볼보 S60에 올랐다.
15분 만에 도착한 곳은 홍제동 그의 회사가 아니라, 그랜드힐튼 호텔 정문 앞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인환과 경호원들을 홍 기사가 로비 쪽으로 인도했고, 로비 라운지에 앉아 있던 그의 경호 기사 고영석이 인환 일행을 맞아주었다.
“사장님께선 체력장에서 운동 중이십니다. 샤워 마치고 곧 나오신다며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주로 운동하는 피트니스클럽이 그랜드힐튼 호텔에 있다고 했었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고영석이 의자를 빼주며 앉기를 권했다. 인환이 자리에 앉자, 고영석도 경호원들과 홍 기사가 자리를 잡고 앉은 옆 테이블로 가 앉았다. 고영석도 역시 그의 여타 부하 직원들과 태도가 다르지 않았다. 인환이 상사도 아니건만 철저하게 부하 직원으로서의 거리와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아니, 상사 취급은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상사의 배우자 취급이었다. 맙소사, 배우자라니! 덕분에 ‘서방님’이니 ‘마누라’니 하는 그의 망발들이 또 떠오르는 바람에 자리에 앉는 인환의 얼굴은 또 슬쩍 붉어지고 말았다.
주문을 위해 다가온 아가씨에게 고개를 젓고 물 한 컵만을 달라고 했다. 별로 차를 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리 오래 기다릴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특급 호텔답게 호사스럽게 치장된 라운지며 로비, 그리고 그 안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 예상대로 그가 5분여 만에 라운지 입구에 나타났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그쪽을 향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의 시선마저 압도하는 남자이니 말해 무엇 하랴.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은 일이라 인환은 속으로 실소를 지으며 그의 시선을 찾았다.
라운지에 들어서자마자 인환보다 먼저 인환을 찾은 듯, 그의 얼굴엔 이미 보일 듯 말 듯한 매혹적인 미소가 박혀 있었다. 늠름한 장신을 감싸고 있는 것은 투 버튼의 암청색 슬림 라인 슈트. 눈처럼 하얀 드레스셔츠에 폭이 좁은 와인색 타이가 고급스럽고 우아한 정장 차림에 더한 세련미를 주고 있다. 샤워 직후라서인지, 채 다 마르지 않은 앞 머리카락이 이마를 살풋 덮고 있어 그의 외모를 훨씬 더 어려 보이게 했다. 30대 초반이라기보단 20대 중반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꽤 멋을 부렸네? 아무렇게나 하고 나와도 된다고 했는데.”
엉거주춤 일어선 인환의 왼쪽 손목을 쥐어오며 그가 놀리듯 묻는다.
“예쁘다, 장인환.”
“…….”
“날 위해서인가?”
“…….”
“그렇겠지? 늘 서방님한테 잘 보이고 싶은 애교쟁이니까.”
“……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나가지그래…….”
얼굴은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붉어져, 홍 기사 쪽 테이블은 물론 다른 테이블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 인환이었다. 말로써 반응하면 더 한다는 걸 알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건만, 굳이 대꾸를 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나 보다.
하하 하고 기분 좋게 웃는 그를 잡아끌듯이 해서 인환은 뭇 시선들이 그를 향해 무자비한 포획을 시작한 라운지를 서둘러 빠져나왔다. 그런 인환의 당황조차 즐기는지, 얌전히 끌려오면서도 그는 실실거리는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인환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호텔 로비를 빠져나오고 나서야 인환은 그의 손을 뿌리치듯 놓아주는 것으로 난감해진 심사를 소극적으로나마 표출했다. 하하하 하는 더 큰 웃음소리가 그의 얄미운 대답이었음은 물론이었다. 호텔 주차 요원에게 차 키를 넘긴 홍 기사와 고영석 일행이 멀찍이 떨어진 채 그런 그와 인환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사장님께선 평소엔 정말 무서우신데 장 선생님 앞에서는 늘 소년처럼 해맑게 웃으시더군요. 뵐 때마다 신기해요.’ 며칠 전 저녁, 고영석이 지나가듯 던진 말이었다. 비단 고영석뿐만이 아닐 거다. 윤 실장을 비롯, 그의 비서진들이며 회사 중역들의 얼굴에서도 요즘 종종 읽고 있는 감정이니까. 인환 자신도 이런 그를 신기해하니 말해 무엇 하랴. 아니, 신기해하는 정도를 넘어 다른 인격체가 아닐까 진심으로 의심을 하곤 한다는 걸 아마 저들은 모르겠지.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역시 홍 기사와 경호원들은 볼보에 타고, 인환은 고영석이 운전하는 벤츠에 그와 함께 탄 후 시내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호텔을 벗어난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그는 여간해선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기 곤란한 곳이야?”
“……별로…… 곧 도착하니까…….”
아아, 또다시 겸연쩍은 어조다. 줄곧 인환의 얼굴만을 뚫어지듯 응시하던 그가 인환의 추궁에 처음으로 슬쩍 시선을 피했다. 미간이 약간 찌푸려진 듯도 보이고 관자놀이 근처가 살짝 붉어진 듯도 보여서, 인환의 눈은 도리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가 쑥스러워하는 것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하늘의 별을 따는 게 더 쉬운 일일 텐데, 그런 그가 쑥스러워하면서 얼굴까지 붉히다니. 저 뻔뻔 대마왕이! 더 이상 그를 추궁할 용기는 없었지만 인환의 호기심과 궁금증은 피크로 치솟은 상태였다.
호텔을 출발한 지 20여 분쯤 후에 마침내 차가 멈춰 섰다.
강남이었다. 정확히는 1분 전에 청담동 사거리를 지나쳤으니 청담동일 것이다. 차는 십여 층 높이의 어느 빌딩 지하 주차장으로 접어들었고, 그와 인환을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려준 고영석이 주차를 위해 다시금 지하 2층 쪽으로 차를 몰고 나갔다. 뒤따라 들어온 볼보 S60 역시 경호원들을 토해낸 뒤 고영석의 뒤를 따랐다.
빌딩 로비에서 기다리라고 경호원들에게 묵묵히 눈짓을 준 그가 어리벙벙해 서 있는 인환을 잡아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는 5층에서 멈춰 섰고, 엘리베이터 코너를 돌자 서너 개쯤 사무실 입간판이 달린 출입구들이 보였다. 그가 인환의 손을 놓아준 건 ‘스튜디오 라망’이라는 로고가 붙은 어느 럭셔리한 유리문 앞에서였다.
“……여기가……?”
채 물음을 맺기도 전에 인환의 어깨를 안듯이 잡은 그가 문을 밀고 들어갔다. 유달리 밝은 빛과 화사한 인테리어가 인환의 눈을 가늘게 뜨도록 만들었다.
한눈에 잡히는 실내는 그리 크지 않았다. 30평 남짓이나 될까? 그러나 무슨 미용실 로비처럼 꾸며진 사무실 너머에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문들이 서너 개 보이는 걸 보면, 전체적인 넓이는 꽤 상당할 것 같았다. 창가를 따라 테이블이 두 개 보이고 테이블 중심으로 안락한 1인용 스툴과 소파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게 보였다. 왼편으로 훤히 비치는 유리 칸막이 너머엔 컴퓨터와 각종 사무기기가 죽 놓여 있는 사무용 데스크가 두어 개 마련돼 있는 것도 보였다. 사무용 데스크에 앉아 있는 남녀 직원은 물론, 두 개의 테이블들 중 하나엔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팀이 있었는데, 그들 중 두 사람의 옷차림을 새삼 의식한 인환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커플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입고 있는 것은 웨딩 예복이었다. 여자는 부케에 면사포까지 뒤집어쓴 순백의 드레스 차림이었고, 남자는 감색의 턱시도 차림이었다. 아찔한 충격과 자각이 동시에 인환의 뇌리를 스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무슨 꽃동산마냥 온갖 리본과 조화와 생화들로 장식된 사면 벽 곳곳엔 모델만 달리하는 갖가지 웨딩 사진 액자들이 여봐란듯이 진열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는 인환의 얼굴을 살피던 그가 어깨를 안고 있던 팔을 내리더니 이번엔 인환의 손을 굳세게 움켜쥐어왔다. 당장 뒤돌아 도망치고 싶은 욕구에 떠는 인환의 쇼크를 철저히 인지하고 있는 듯한 몸짓이었다. 사슬로 옥죄듯 손을 잡고 있는 그 탓에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겠지만,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들어와 박힌 참이었다. 특히 그에게. 고객에 불과할 신랑신부의 시선 또한 한가지였다. 맙소사! 어마어마한 수치심과 충격에 아무리 기절할 것 같아도 기왕에 벌어진 판인 셈이었다. 도착할 때까지 그토록 입을 열지 않던 그가 비로소 이해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유는 좀 다르겠지만(뻔뻔하기 짝이 없는 그가 쑥스러워한 상대는 인환뿐이었을 것이다) 인환은 이런 대담하다 못해 남세스러운 퍼포먼스는 죽었다 깨나도 벌이지 못할 테니까. 미리 알았다면, 그가 아무리 갖은 협박과 회유를 한다 한들 절대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
일제히 이쪽을 향한 시선들 중 젊은 아가씨 하나와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 여성 하나가 다가와 그에게 정중한 인사를 하더니 인환에게도 웃으며 목례를 했다.
“조금 늦었습니다. 괜찮을까요?”
그가 좀 전의 겸연쩍은 표정으로는 상상도 못 할 사무적인 어조와 표정으로 여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늦긴요, 사장님. 고작 10분인걸요. 그러잖아도 준비하고 있었답니다. 작가님께서도 촬영장에서 기다리고 계시구요. 이쪽 선생님이 일전에 말씀하신 파트너분이신가요?”
“예, 그렇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라망 스튜디오 사업부 부장 유영인이라고 합니다.”
중년 여자가 싹싹하게 인사를 건넸다. 인환과 눈을 마주치면서 스스럼없이 웃는 모습에선 게이 커플을 향한 거리낌 따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철저하게 직업적인 마인드를 가져서일지도 모르겠지만. 멍청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간신히 여자의 인사를 받자, 그가 소리 없이 웃는 게 느껴졌다.
“말씀드렸다시피, 메이크업까지는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사진으로 충분합니다. 옥상 세트장에서 야외 촬영도 했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부족한 게 아쉽군요.”
“예, 사장님. 작가님께도 충분히 말씀을 드렸으니 원하시는 분위기의 사진들을 찍을 수 있을 겁니다. 사장님께서야 우리 여직원들 가슴을 죄다 설레게 할 정도로 완벽한 용모이시니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이쪽 선생님도 헤어스타일만 약간 정리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으면 되겠네요. 야외 촬영도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이 나실 때 언제든 방문해주시면 성심을 다해 멋진 작품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충분치 않으니 바로 시작했으면 합니다. 보내드린 의상도 준비됐겠지요?”
“예, 물론이지요. 미스 신, 두 분 안내 부탁해요.”
생글생글 웃으며 중년 여자가 대꾸하자 옆에 선 젊은 아가씨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후 왼편으로 나 있던 통로로 두 사람을 인도했다. 통로 끝에 있는 문을 열자 한눈에도 촬영 스튜디오임을 알 수 있는 드넓은 방이 나타났다. 갖가지 조명 장비와 촬영 장비들이 가득한 방 한가운데에서 포토그래퍼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남자와 그 조수로 보이는 청년 둘이 인사를 건네왔다. 이미 서로 안면이 있는지, 간단한 인사말을 시작으로 그와 사진작가는 촬영에 관한 몇 가지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주고받고 있었다. 끼어들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럴 정신도 없던 인환은 그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멍하니 선 채 그런 그들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메이크업은 안 해도 괜찮겠습니다만 신부님께서 몹시 긴장하신 것 같네요. 신랑분께서 좀 진정을 시켜드려야겠는데요? 즐거운 기분으로 찍으셔야 좋은 사진도 나온답니다.”
창백해진 인환의 표정을 읽었는지 사진 작가가 누구에게랄 것 없는 농담을 건넸다. 그제야 인환을 돌아본 그가 잠자코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아픔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두 분 옷부터 갈아입으시지요. 탈의실은 이쪽입니다.”
조수 청년 하나가 스튜디오 오른편의 다른 문을 열어주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 다른 청년 하나는 스튜디오의 한쪽 테이블에 놓여 있던 박스 몇 개를 들고 세 사람을 따라 들어왔다.
말 그대로 조그마한 탈의실을 예상했다가 촬영장 크기의 반 정도나 되는 넓은 드레스 룸에 인환의 눈이 좀 더 커다래졌다. 웨딩 촬영 때 신랑을 위한 파우더 룸으로도 쓰이는 곳인지, 한쪽 벽면은 화장대로 보이는 콘솔과 거울이 줄줄이 붙어 있고, 반대쪽 벽면은 칸막이가 쳐진 채 수많은 남성용 결혼 예복들과 정장들이 스탠딩식 옷걸이에 죽 걸려 있었다. 나중에 따라 들어온 청년이 맨 앞에 걸려 있던 은회색과 크림색 턱시도 두 벌을 꺼내 들더니 그와 인환 곁으로 다가왔다. 옷시중을 들기 위해서인 듯싶었다.
“옷은 우리끼리 갈아입어도 되니까 잠시 단둘만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그가 청년으로부터 턱시도를 받아 들며 부탁을 했고, 정중히 목례를 한 청년들이 드레스 룸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그가 콘솔 위에 턱시도를 내려놓더니 인환을 향해 돌아섰다. 겸연쩍어하며 시선을 피하던 게 사기만 같았다. 마주친 시선은 으스스함이 느껴질 정도로 날카롭고 흔들림이 없었다.
“……미리 말했으면 안 따라왔을 테니까.”
변명도 태연하기만 하다.
“……그렇게 두려워할 것 없어. 크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고. 그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
망연히 올려다보기만 하자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린다. 또다시 손이 잡혔다. 이번엔 양손이었다.
“함께 찍은 사진이 거의 없잖나. 그때 오주희 집에서 큐레이터와 찍는 걸 보니까 새삼 그런 생각이 들더군. 어릴 때 가끔 찍었던 것도 다 잃어버렸고, 다시 만나고 나서도 스냅 사진조차 함께 찍은 일이 없었지. 생각난 김에 전문 사진작가한테 부탁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했어. 괜찮은 게 나오면 크게 인화해서 집에 장식해도 좋고.”
“…….”
“……이런 쪽 사진이래야 가족사진이거나 웨딩 사진이 대부분이잖아. 가족사진보다야 웨딩 사진이 좀 더 우리들 분위기에 맞는 것 같아 할 수 없이 그쪽 콘셉트에 맞춘 것뿐이야. 그리 겁먹지 마, 장인환.”
“…….”
“……응? 괜찮지……?”
“…….”
“……좀 웃어봐. 긴장 풀고…… 많이 창피하진 않지? 어차피 저 사람들이야 일일 뿐이고, 우리 말고도 게이 커플 사진도 많이 찍는다던데.”
“…….”
“……그렇게 계속 굳어 있으면 오히려 더 웃음거리가 될걸?”
“…….”
“장인환.”
“…….”
“인환아.”
“…….”
“마누라.”
“!!”
“흠, 역시 이게 직방이로군. 빨개지지만 말고 웃어봐, 얼른. 긴장도 좀 풀릴 거야.”
“…….”
“후우, 하는 수 없군. 그냥 ‘찡그린 신부’로 가는 수밖에.”
“…….”
무표정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이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다. 말의 내용에서도, 태도에서도 인환을 당혹시켜 두려움과 긴장을 풀어주려는 그의 의지가 선명했다. 그저 함께 사진을 찍는 것뿐이라고, 커다란 의미 부여를 할 필요도 없다고 하지만, 도리어 그 말이 정반대의 고백으로 들린다는 걸 그는 알까?
“……이리 와. 옷 갈아입혀줄게.”
어떻게 해도 표정이 풀릴 것 같지 않은 인환을 그제야 체념했는지, 잠깐 손목시계를 살핀 그가 인환의 재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만 닿으면 전자동으로 순종적이 되는 인환은 굳어 있는 표정과 몸에 비해 대단히 유연하게 그의 손길에 반응했다. 소매를 벗기기 위해 팔을 들라면 들고, 구두와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발을 들라면 들었다. 새하얀 실크 셔츠를 입혀줄 때에도, 같은 색 실크 넥타이를 매줄 때에도, 또 주름 하나 없이 말끔히 다림질한 크림색 조끼와 턱시도 재킷을 걸쳐줄 때에도, 그가 주의를 기울이는 대로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했다. 재킷과 매치된 크림색 팬츠를 입혀줄 땐 바짓가랑이에 행여 얼룩이라도 생길까 잔뜩 겁을 먹었다. 마침내, 인형 옷을 갈아입히듯 신이 나서 인환을 다 갈아입힌 그가 콘솔 앞에 앉으라고 했지만 그 명령만은 듣지 않았다. 옷이 구겨질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한참이나 그런 인환을 굽어보던 그도 그의 몫으로 배당된 은색 턱시도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원래 입고 있던 암청색 슈트도 그와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생각했는데, 은은한 광택이 도는 은색의 턱시도 차림은 당장 파티에 나가도 될 정도로 몹시 화려해 보이기까지 했다. 연보랏빛 실크타이에 걸맞게 톤 다운된 회색의 포켓치프는 말할 수 없이 우아한 턱시도 슈트에 세련된 품위를 더했고, 그에 맞춘 까만 드레스 슈즈에 보석이 박힌 커프스 링크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에게 걸맞을 완벽한 웨딩 슈트 세트였다. 그에게 저 턱시도를 권한 웨딩 플래너야말로 스스로의 안목에 감탄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의 안목을 완벽하게 구현해줄 모델의 등장에 오히려 더 기뻐했을 수도. 다만 그가 공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게이였다는 점은 꽤나 아쉬운 부분이었을 터. 사무실 벽에 줄줄이 붙어 있는 수많은 액자들과 달리 자신들의 사진은 결코 그 벽면을 장식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리 와 손 좀 줘봐.”
“……?”
턱시도 대신 서로가 벗어놓은 옷들을 옷걸이에 걸던 그가 잠깐 인환을 돌아보더니 명령했다. 다시 옷걸이들 쪽으로 몸을 돌린 그가 그의 암청색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이 보였다. 어리둥절해서 잠자코 그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침내 돌아선 그가 몇 걸음을 걸어 인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이리 오라니까…… 후우, 여전히 굳어 있네. 이래서야 사진작가만 고생시키겠군.”
“…….”
“……손 내밀어.”
“……?”
“아니, 그쪽 말고 왼손.”
“……?”
갑자기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힐끗 살피듯 인환의 얼굴을 핥던 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정확히는 인환의 왼손을 잡고 있는 그의 두 손을 향해서. 차갑게 식은 손에 닿아오는 그의 손 역시 꽤나 싸늘했다. 열이 많아 여간해선 손발이 식지 않는 그로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후일 생각해낸 것이지만, 겉으론 태연해도 그 역시 몹시도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傍證)이었다.
어느새 끼워진 반지가 인환의 왼쪽 약지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다이아몬드로 보이는 보석이 섬세하게 세공된 남성용 웨딩 링이었다. 가만 보니 그의 왼손 약지에도 거의 동일한 디자인의 웨딩 링이 끼워져 있었다. 쏘는 듯 강렬한 시선이 인환의 떨림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입술은 굳어 있고, 혈색 또한 약간 창백해진 듯 보였다.
경악으로 굳어진 얼굴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던 것 같다. 몇 번 고개를 가로저은 것도 같았다. 피가 솟아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고, 곧 그의 시선을 피했던 것도 같다. 제대로 된 최후의 기억은 그의 품속에 파묻힌 자신의 얼굴……. 다리의 힘이 완전히 풀려버려 바닥에 고꾸라지려는 몸을 그가 끌어안았다. 참고 참았던 인내의 실이 마침내 뚝 끊어져버린 모양이었다.
“……아…… 안…… 안…… 돼…… 안 돼…… 안…….”
멀리서 누군가의 끊어질 듯 절절한 애원이 들려왔다. 귀가 멍멍해져 있었던 모양인지 그게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도 인환은 좀 더 나중에 가서야 깨달았다.
“……인환아……!”
“……아…… 아아아…… 안…… 안…… 돼…… 안…….”
“장인환……!”
“……싫어……! 싫어! 싫어……! 안 돼……!”
“인환아, 제발……!”
“……안 돼…… 안 돼…… 안…….”
“별거 아니야! 그냥 사진만 찍는 것뿐이야! 인환아, 콘셉트가 웨딩이니까 콘셉트대로 가는 것뿐이라구!”
“……거……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아냐! 아무 의미 없어! 아무 의미 없는 일이야, 인환아!”
“……거짓말…….”
“제발……!”
“……거짓말…… 거짓말…… 거짓…….”
“인환아……! 아아, 인환아, 인환아……! 장인환……!”
“……이러지 마…… 무서워……! 이상해……! 너 이상해…… 진짜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인환아, 제발……!”
“……싫어…… 너 나빠…… 나쁜 놈이야, 아주…… 욕심나게 하지 마…… 나 미치게 하지 마…… 진짜가 아니야…… 꿈이야…… 다 꿈이야, 이건…….”
“……인환아, 날 위해서 한 번만 더 용기를 내봐…… 응? 제발 단 한 번만 더 용기를 내줘봐…….”
“……안……!”
뜨거운 입술이 인환의 입술로 다가왔다. 제 것처럼 익숙하고, 제 것보다 그립고, 제 것 이상으로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뜨겁고 습하고 말캉한 ‘사랑’이 격렬하게 안으로 파고들어왔을 때, 자신은 그보다 더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것 같다. 미친 듯이 빨고 핥고 깨물었다. 타액으로 흥건하게 젖어드는 턱과 목줄기를 설핏 자각했지만 일절 무시했다. 혹시라도 떨어질 것 같아 부드럽게 늘어지는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맹렬하게 움켜쥐었다. 두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누군가의 하반신을 친친 휘감았음은 물론이었다. 훔치러 들어온 도둑이 주인한테 잡혀 얻어맞는 격이었다.
“……인환아…….”
문득 떨어진 입술이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기가 일었다.
……결국 떨어져버리고 말았어…… 결국 사라져버리고 말았어…… 아아, 그래…… 그는 내 사람이 아니니까…… 결코 내 사람은 될 수 없으니까…….
어마어마한 고통과 상실감이 순간 심장을 강타했다. 얼굴 가득 흘러넘치고 있는 눈물을 자각한 것과 동시에 의식이 멀어졌다.
……잊으면 안 돼…… 절대 잊어버리면…… 알았지? 욕심내지 마…… 그럼 영영 사라져버리니까…….
매우, 아주, 진정으로 익숙한…… 캄캄한 암흑이었다.
인환이 다시금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여가 흐른 후였다.
마침 같은 건물 내에 소아과 병원이 있었던 모양으로, 놀란 스튜디오 직원들이 그 의사까지 불렀다고 한다. 그를 통해 인환의 과거 병력(심한 우울증과 불안 장애)을 들은 의사는,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기절했지만 몸 상태는 정상으로, 잠이 든 것뿐이라 했단다.
눈을 뜬 인환의 옆에서 다소는 수다스럽게 실황 중계를 해준 여직원이 그가 눈치를 주자 서둘러 방을 나갔다. 처음 보는 실내 구조였지만 화사한 꽃 장식들이며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조명 장비, 그리고 닭살이 돋을 정도로 로맨틱한 앤틱 가구들을 보니 아직 스튜디오 안인 모양이었다. 인환이 누워 있던 소파도 사방에서 로코코풍 리본이 날아다닐 것만 같은 심히 ‘닭’스러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또 다른 실내 촬영 장소일 것이다.
“……미안…….”
깊고 어두운 심연의 눈이 인환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쪽 무릎을 굽힌 자세로 머리맡에 앉은데다 인환의 한쪽 손마저 꼭 움켜쥐고 있으니 어디로도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물론 피하고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이 그에게 상처를 입혔음을, 그것도 지독하게 깊은 상처를 주었음을, 그의 눈빛을 통해 읽은 까닭이었다.
“……진짜로 미안…… 해, 위야…….”
사과의 말이 저절로 거듭 흘러나왔다. 잡힌 손가락이 좀 더 강하게 조어졌다.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눈시울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는 것도 보였다.
“……괜찮나? 어디 아픈 곳은?”
근심과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다정한 물음이었다. 목이 메었다. 이쯤 되면 고질병인지를 의심해봐야 할 것 같다. 아이, 참. 염치라도 좀 있어라, 장인환.
“불편하게 느껴지는 데라도 있으면 말해. 의사가 괜찮을 거라고는 했는데 그래도 모르는 일이니까.”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자 여전히 애정이 가득 흘러넘치는 대꾸가 덧붙여진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더니 아픔이 느껴졌다. 상처가 난 모양으로 찝찔한 피 맛이 돌았다. 그의 손가락이 더듬듯 부드럽게 상처를 만져왔다. 더 이상 깨물지 말라는 명령이 다감한 접촉에서 선명하게 전달이 되었다.
“……사진…… 아직 찍을 수 있는 거지?”
“…….”
“……괜찮아. 아깐 너무 갑작스러워서 좀 놀랐을 뿐이야. 지금 찍어도 늦지 않은 거면 찍자, 위야. 진짜 그냥 사진 한 방 찍는 것뿐인데 되게 유난을 떤 거 같네…….”
“…….”
“일어나게 이 손 좀 놔줄래?”
깊은 시선이 인환의 시선을 얽은 채로 한참을 더듬었다. 상처와 고통과 인내와 애정과 회한이 공존하는, 뼈아픈 시선이었다.
“……사과 안 할 거다, 나는.”
“……?!”
“물론 사진도 찍을 거야. 네가 아무리 힘들어한다고 해도.”
“…….”
“자꾸 도망치게 놔둘 수만은 없으니까.”
“…….”
“콘셉트대로 끝까지 가야겠어. 원랜 아무것도 아닌 척, 의미 따윈 없는 척 요령부릴 생각이었는데 결국 다 들통 난 모양이니 하고 싶은 짓은 모두 할 거야. 결혼반지도 끼워주고, 웨딩 사진도 찍고, 밤엔 허니문도 즐겨야겠다.”
“……위야…….”
“……상처를 덧내기까지 해놓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면 것도 억울하지 않겠나. 그렇지? 난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는 놈이니까.”
“위위…….”
“꿈이라고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어. 내가 연기하는 것뿐이라고 세뇌시키는 중이면 마음껏 그렇게 해. 실컷 갖고 놀다 언젠가 또 버려질 거라고 기를 쓰고 믿어봐. 그렇게…….”
“…….”
“……그렇게 열심히 도망 다니다가 제 길만 찾아서 돌아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으니까.”
“…….”
“……내가 진실을 건드릴 때마다 이렇게 심각하게 반응하는 건 도망치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너도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마음 깊은 곳에선…… 그래, 실은 나를 믿고 싶어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
“……일어나, 인환아. 예약해둔 시간 다 가버리기 전에 몇 장이라도 찍어보자.”
그가 자유로웠던 나머지 한 손마저 쥐더니 가만가만 인환을 끌어당겼다. 깨어질까 두려운 듯, 섬세한 유리 세공품을 다루는 것만 같은 무척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일으켜진 상반신은 잠시 동안 그의 품 안에 안겼다가 곧 똑바로 세워졌다. 어느새 주름투성이가 된 턱시도의 이곳저곳을 다정한 손길이 조심조심 털어준다. 바라보니 그의 은빛 턱시도 역시 사정은 한가지였다. 가슴이 아팠다. 잔뜩 구겨진 서로의 결혼 예복이 마치 구겨지고 모난 자신들의 슬픈 역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주름은 펴면 되는 거다.”
인환의 생각을 읽었던 걸까? 위로하듯 중얼거린 한마디에 기어코 참았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버렸다.
“……펼 수 있어. 언젠가는…….”
뼈아픈 시선이 길게 이어진 인환의 눈물길을 좇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어루만져지고 입술로 핥아지는 사이, 눈물은 그저 붉어진 눈시울의 흔적으로만 남았다. 몇 번이나 각도를 달리해 깊은 입맞춤을 받는 사이, 넋을 가득 채웠던 습기마저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다.
예상외로 그는 애초에 원했던 만큼의 사진을 충분히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스튜디오 측에서 잃어버린 한 시간을 마저 보충해주는 배려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보다 더 거침이 없어진 그는 지극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시종일관 단호하게 인환의 감정을 유도해나갔다. 카메라 앞에서 긴장을 풀게 하고, 어설프게나마 웃게도 만들고, 닭살스러운 포즈를 잡을 때의 지독한 수치심도 어느 정도는 잊게 만들었다. 어르고 협박하고 놀리고 달래고 농담을 하고…… 사진작가와 한통속이 돼서는 그가 그렇게 능구렁이 연기를 하는 동안 수도 없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수백 장은 족히 찍은 것만 같았다. 그중에 몇 장이나 쓸모 있는 것이 건져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스튜디오를 나와서는 곧바로 그의 홍제동 사옥으로 끌려갔다. ‘오늘 안에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다 뉴욕 본사 중역들과의 9시 미팅(원격 화상 회의)이 잡혀 있어 곧바로 허니문을 즐기러 갈 수는 없다’는 해괴한 변명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갓 결혼한 신부를 혼자 방치할 수도 없으니 회사로라도 데리고 갈 수밖에 없다고. 막장까지 가기로 작정했는지, ‘허니문’이니 ‘신부’니 하는 망발이 서슴없이 쏟아졌다. 애초의 계획대로 인환이 그의 의도를 가벼이 여겼다면 일정은 촬영 직후 바로 집에 돌아가는 것으로 끝났을 터였다. 순간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망발을 들을 필요는 더더욱 없었겠고. 결국 매를 더 번 셈이 되었다.
그의 사무실 소파에 앉아 난생처음으로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끔 상상해본 그대로, 그는 일을 할 때 역시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먼 옛날, 인환의 성북동 아틀리에에서 틈틈이 고3 수험 교재나 토익 교재, 그리고 대학 전공 서적을 펴고 공부하던 그가 연상되기도 하는 대목이었다. 인환의 존재는 철저히 무시한 채 난해한 미적분 문제들을 순식간에 해치우거나, 인체 모형도가 가득 그려진 두꺼운 의학 원서를 중얼중얼 외우던 무정한 그의 모습이. 다행히 현재의 그는 일에 집중하는 틈틈이 인환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곤 해서, 문득문득 온몸이 두려움으로 서늘하게 굳어지려 하는 인환을 그나마 안정시켜주었다.
저녁 7시가 되자 비서실의 막내 아가씨가 호텔 도시락을 사 왔고, 그가 휴식을 취하는 용도로 쓰인다는 30평 원룸 형태의 방으로 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는 30분 넘게 그의 품에 안긴 채 추행에 가까운 애무와 키스들을 받아야 했다. 회사에서 안으니 몰래 사내 연애라도 즐기는 기분이라는 망발 역시 빼놓지 않고 들어줘야만 했던 것은 물론이었다. 다행히 9시 미팅을 대비해 비서진들과 중역들이 프레젠테이션 룸으로 속속 모여들었고, 짓궂은 ‘변태 상사’도 윤 실장에게 붙잡혀 프레젠테이션 룸으로 끌려갔다. 그가 다시금 인환에게 되돌아온 것은 밤 10시가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그동안 인환이 벌인 일 아닌 일이래야 그의 사무실(일명 사장실)과 휴게실을 번갈아 오가며 그의 책상 서랍이나 노트북 컴퓨터를 열어본다든지, 책장의 책들을 들쳐본다든지, 사보에 나와 있는 그에 관한 기사들을 모조리 뒤져 읽는다든지, 혹은 냉장고와 싱크대를 뒤져본다든지 하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스토킹 짓거리뿐이었다. 그 한심한 짓들이 전혀 한심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까지 두근거리는 흥분과 기대감을 안겨주었다는 점이 더더욱 한심한 노릇이긴 했지만.
그날 일을 모두 정리한 그가 비서진들과 함께 사옥을 나선 시각은 정확히 10시 45분이었다. 사옥 주차장에서 비서진들과도 헤어진 그와 인환을 맞은 것은 경호 기사 고영석이었다. 홍 기사와 경호원들은 이미 퇴근시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튜디오 주차장에서 그와 인환의 웨딩 예복들을 받아 챙긴 홍 기사에게 그가 집에다 가져다두라는 명령을 내리던 것을 들은 기억이 났다.
고영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20여 분쯤 이동해 간 것 같았다. 밤이라 길이 그닥 막히지 않는데도 꽤 오래 이동하나 싶더니, 도착한 곳은 연희동 집이 아닌 다시 강남이었다.
차가 선 곳은 딱 봐도 30층이 넘어 보이는 초대형 빌딩 앞. 반포동의 JW매리어트 호텔이었다.
고영석이 이미 체크인까지 마쳤는지, 호텔 현관문 앞에서 고영석에게서 룸 넘버가 적힌 카드키를 받아 든 그가 퇴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연해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다시 벤츠에 올라탄 고영석이 쏜살같이 호텔 앞 광장을 빠져나가버렸다.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듯 바로 인환의 손목을 잡아끄는 그와 제복 차림의 도어맨에게 쫓기듯 로비 안으로 들어서자 특급 호텔다운 호화찬란한 로비가 눈을 찌를 듯 밟혀들었다. 결혼반지도 끼워주고, 웨딩 사진도 찍고, 밤엔 허니문도 즐겨야겠다더니 결국 이런 의미였던가? 특급 호텔에서의 허니문 1박?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웨딩 링이 갑자기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촬영 스튜디오에서 좀 더 침착하게 대처했더라면 지금 이런 꼴은 피했을 거라는 후회도 새삼 절실해졌다.
“……위야, 이건 좀…….”
“피곤하지? 일단 올라가서 쉬자.”
뭐라고 말을 붙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바로 로비 데스크로 간 그가 카드키를 건네자, 포터로 보이는 제복 차림의 청년이 정중한 태도로 카드키와 그가 들고 있던 아타셰케이스를 받아들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포터가 마지막까지 안내한 곳은 34층 프레지덴셜 스위트. 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호사의 극치를 달리는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과 드넓은 크기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고가구로 꾸며진 대형 거실이며 각자 욕실이 딸린 두 개의 침실, 화려하고 모던한 객실은 물론, 파우더 룸과 드레스 룸, 편리한 다이닝 룸에 칵테일 바까지 두루 갖춰져 있어 무슨 초대형 고급 빌라를 통째로 옮겨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급 대리석으로 마감된 화려한 욕실엔 커다란 자쿠지 풀이 마련돼 있고, 거실 한구석에는 그랜드 피아노까지 한 대 떡하니 놓여 있었다.
돈지랄이로구나, 또. 포터가 객실 곳곳을 안내하는 것을 마지못해 따라다니며 일별한 후 최초로 든 감상이었다. 이젠 진짜 당황하기보다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멀쩡한 집 놔두고 대체 이게 무슨 낭비란 말인가. 여기서 하룻밤을 묵는 대가는 저 카센터 동료 재식이가 그토록 마련하길 원하는 전세 보증금보다도 더 많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재식이를 만난 지도 참 오래되었구나. 조만간 만나 아직 전세금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은행에 넣어둔 자신의 전세 보증금이라도 안겨줘야겠다고 새삼 결심하는 인환이었다. 재벌 사생아로서 세상 물정 모르던 젊은 시절이라면 모를까, 밑바닥까지 떨어져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거친 현재의 인환으로선 그의 돈잔치들이 마냥 불편하게만 다가왔다. 만 원 한 장을 허는 데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옛 자린고비 영웅이 새삼 그리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의미 부여를 하고 싶지 않은 넌 돈 낭비라고 생각하겠지만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나는 낭비가 아닌 ‘의미’ 값이라고 여기지.”
포터가 나가고 단둘만이 남게 되자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다소 공격적으로까지 들리는 선언이어서 그를 돌아보니 의외로 그는 웃고 있었다. 치아가 살짝 보일 정도의 크고 화사한 미소가 뚜렷하고 핸섬한 이목구비 가득 퍼져 있었다. 뭐라 반박할 말을 잃고 멍하니 시선을 마주치는데, 그가 인환의 두 손을 그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 모아 쥐는 게 보였다. 두 손은 이내 그의 입술로 끌려올라갔다.
“……남들이 하는 것들은 다 해봐야지…… 다 해보고 나면 이 지독한 허기조차 조금쯤은 진정이 될지 모르니까.”
손가락 하나하나마다 정성껏 키스하며 그가 한숨처럼 뱉은 말이었다. 웨딩 링이 끼워진 약지엔 몇 번이나 거듭해서 그의 촉촉하고 따스한 입술이 눌러졌다. 살며시 내려앉은 아름다운 속눈썹이 파르륵 떨리는 게 보였다. 어쩐지 또 목이 메는 고질병이 도질 것 같아, 인환은 그를 바라보기를 중단하고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한동안 인환의 약지에 입술을 누른 채 가만히 있던 그가 스위트룸 안쪽 침실로 인환을 데려갔다. 더블 킹사이즈의 침대 옆에 놓인 화사한 테이블엔 서비스인 듯 얼음 버킷에 담긴 샴페인 병과 글라스 두 개, 그리고 핑크 장미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그야말로 노골적인 허니문 분위기라 저절로 얼굴이 붉어지는 동시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뭐라도 마실래?”
마치 의식을 행하듯 인환의 옷을 찬찬히 벗기는 와중에 속삭여진 유일한 한마디였다. 술이라면 일절 마시지 않는 그로선 입에 발린 배려라는 걸 안다. 알코올 기가 더해지면 인환이 그를 받아들이는 데 더 힘들어한다는 사실도 훤히 꿰고 있는 그가 아닌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자 싱긋 하고 만족스러운 웃음이 퍼진다.
속옷과 양말까지 벗겨 인환을 완전한 알몸으로 만든 그는 스스로의 옷을 벗을 때에도 평소와 달리 유달리 뜸을 들였다. 그가 이 모든 일련의 과정에 심각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더 깊어지려는 생각은, 그러나 인환의 치열한 자기 보호 본능 탓에 그대로 중단되었다.
드러난 그의 나신은 예상대로 이미 완벽하게 흥분한 상태였는데, 그는 이 역시 놀라운 자제력으로 참고 있었다. 평소라면 전희도 거의 생략한 채 바로 삽입을 요구했을 테지만, 그가 인환을 공주님 안기로 데려간 곳은 침대 위가 아닌 욕실이었다. 먼저 샤워기로 거품을 내 인환의 몸 구석구석을 닦아주더니 인환에게도 스스로를 닦아줄 것을 요구했다. 인환의 손이 스칠 때마다 신음 같은 교성을 흘리며 그의 페니스가 더 솟아오르는 통에, 허리 아래쪽은 결국 그 스스로 해결해야 했지만 말이다. 샤워가 끝나자 그가 말로만 듣던 자쿠지 욕조 속으로 인환을 이끌었고,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거세게 보글거리는 물살에 시달리며 인환은 30분 가까이 그의 숨 막힐 듯한 키스와 포옹과 애무 세례를 받아야 했다. 결국 한계까지 도달한 그는 욕조 안에서 마주 안은 자세그대로 삽입을 시도했고, 몇 번의 거센 추삽질 끝에 인환의 안에 토정했다. 평소보다 빨랐던 만큼 평소 이상으로 재빨리 회복한 것은 물론이었다. 헐떡이듯 숨을 고르며 키스의 비를 뿌리는 사이 내벽 깊숙이 박혀 있던 그의 페니스가 다시금 굵게 팽창했고, 그는 사방에서 부글거리는 물거품 못지않게 격렬히 허리를 쳐대기 시작했다. 좀처럼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사나운 정열이었다. 처음처럼 한동안 마주 앉아 박다가는 인환이 심하게 헐떡이며 힘들어하자 후배위로 엎드리게 하고서 더 거세게 몰아쳐왔다. 한계까지 발기한 기둥이 내벽을 긁고, 입구를 둥글게 휘젓고, 내장 끝까지 파고든 귀두 끝은 부서질 듯 점막을 찔러들었다. 쾌락 대신 고통을 인지한 섹스는 심하게 요동치며 흉기와 다름없는 페니스를 내장 깊숙이 쭉쭉 빨아 당겼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저 통증과 부담감뿐인데도 창부와 다름없는 조임에 창부와 다름없는 흡입이었다. 그의 성기는 전율로 몸서리를 치며 기뻐했다. 얼굴과 목덜미는 물론 가슴 아래까지 붉게 상기된 그는 흥분과 쾌락이 과하다 못해 반쯤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추삽질이 맹렬해질수록 사방으로 거칠게 튀어대는 물보라에 맞아 그의 젖은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흔들리며 파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온몸의 근육이란 근육들이 유연하면서도 강렬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물에 젖은 아름다운 얼굴은 쾌락으로 잔뜩 일그러진 채 야수처럼 사나운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20분이 넘어가도 토정하지 않는 야수에 완전 항복해버린 쪽은 아직은 인간 편인 인환이었다. 가까스로 욕조 벽을 지지하고 있던 두 팔에 힘이 풀리며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지자, 교접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그의 페니스가 내벽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덕분에 약간의 이성을 되찾은 야수는 그대로 인환을 안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젖은 몸 그대로 침대에 떠밀린 후 한계까지 다리가 들린 채 그의 공격을 되받아야 했음은 물론이었다. 정상 체위로 시작한 지 몇 분, 막 토정하려던 그가 돌연 결합을 풀고 인환의 상반신을 맹렬하게 끌어안았다. 목덜미 근처에서 토해지는 사나운 호흡을 통해 그가 사정을 늦추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장 안쪽이 편해진 대신 목덜미가 씹히고, 뺨이 깨물리고, 입술이 짓뭉개졌다. 갈비뼈가 으스러진다고 착각이 일 만큼, 야수의 양팔에 상반신이 옥죄었다.
“……아파…… 흡……!”
교성을 닮은 신음소리는 야수의 입안으로 철저하게 삼켜졌다. 몸이 옆으로 눕혀졌다. 오른쪽 다리가 들리고, 야수가 반쯤 상체를 굽힌 자세로 옆에서 찔러들었다. 결합은 후배위나 정상 체위보다 깊지 않아 힘은 훨씬 덜 들었다. 야수 역시 한결 누그러진 속도로 찌르고 돌리고 비벼댔다. 야수가 느리면서도 힘차게 허리를 튕길 때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탄탄한 엉덩이 근육이 불끈불끈 요동을 쳐댔다. 치골과 왼쪽 허벅지 사이로 야수의 탐스럽게 부푼 고환이 동시에 탁탁 부딪치며 음란한 교성을 냈다. 하반신의 전진과 후퇴가 리드미컬하게 이루어지는 동안 함께 리듬을 타며 인환의 입술과 목덜미와 겨드랑이와 젖꼭지가 수시로 빨렸다. 쾌락의 밀도는 높이면서도 사정을 늦추려는 의도로선 최적의 체위인 셈이었다.
“……그…… 만……! 후윽……! 흡……! 그…….”
눈물인지 땀인지 타액인지 알 수 없는 체액의 홍수 속에서 끊임없이 애원을 했다. 물론 반쯤 미쳐버린 야수는 여간해선 들어주지 않았다. 옆에서 공격하고, 후배위로 다시 오고, 막 극점이 오면 인환을 배에 올라타게 해선 위로 쳐올렸다. 속도가 떨어지는 대신 결합이 한계까지 깊어지고, 인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 색에 미친 야수는 그제야 다시 정상 체위로 돌리며 알량한 자비를 베풀었다. 자비도 질리면 도로 후배위로 밀어젖혀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하도 빠르고 거칠게 흔들리는 통에 뇌수가 터지는 게 아닐까 질겁한 의식이 까마득해졌다. 마침내 현실인지 꿈속인지, 경계가 아리송해진 상태에서 내장 깊숙이 야수의 토정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계(異界)로 꼴깍 넘어간 넋은 마냥 그대로 암흑이었다.
아주 잠시 정신을 차린 것은 새벽녘이었다. 온몸을 핥고 빠는 누군가의 격렬한 움직임 때문이었다. 속수무책 쏟아지는 잠기운에 저항을 할 기력도 없어, 위로 타고 올라온 거대한 근육질의 몸을 몇 번 하릴없이 때리다간 이내 곧 잠속으로 추락했다. 허벅지가 활짝 열린 채 단숨에 꿰뚫린 것은, 물론 미처 깨닫기도 전이었다.
빗방울 소리처럼 경쾌한 피아노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왔다. 현실로부터의 부름 소리였다. 마지못해 눈을 뜨자, 아침 햇살을 받아 부서질 듯 번쩍이는 럭셔리한 침실 풍경이 인환의 시야를 가득 점령했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것마냥 온몸의 근육과 관절이 욱신거렸다. 짐승. 저절로 욕이 나왔다. 거의 사나흘에 한 번꼴인 것 같다. 야수가 인환을 완전 초주검으로 만드는 빈도라는 것은.
침대 옆 콘솔에 놓여 있던 알람시계를 보니 9시였다. 도저히 일어나기 힘들어도, 일어나야만 할 시간임에는 분명했다. 더구나 이곳은 게으름을 부리기엔 턱없이 사치스러운 호텔 스위트룸이었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체크아웃을 하는 것이 무의미한 돈 낭비를 줄이는 길이리라. 더구나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그가 언제 하루를 더 연장하자고 들이댈지 모른다.
자꾸만 풀리려는 다리를 애써 다독이며 일어나 세수와 양치를 하고 옷을 입었다. 기가 막혀 웃고 만 것은, 침실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청바지와 셔츠 때문이었다. 어젯밤 고영석이 체크인을 해두면서 허니문 트래블 백까지 챙겨다놓았을 줄이야. 허니문 놀이에 푹 빠진 야수에 의해 벗겨진 슈트들은 보이지 않았다. 부지런한 야수가 아마도 일찌감치 세탁 서비스를 의뢰했을 것이다.
잠에서 깰 때부터 줄곧 들리던 음악 소리를 따라 거실로 나왔다. 오디오 시스템이라도 켠 줄 알고 무심코 그를 찾았는데, 놀랍게도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음악 소리는 다름 아닌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였다.
밤에 볼 땐 커튼에 가려 몰랐는데, 한쪽 벽면을 거의 꽉 채운 거실 유리창으로 한강과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피아노는 창문으로부터 2미터쯤 떨어진 거실 한편에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인환 쪽에서 보면 피아노 앞에 마주 앉은 그의 왼쪽 프로필과 거실 창문이 한눈에 들어오는 각도였다.
침실과 마찬가지로 거실에도 이른 아침 가을 햇살이 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풍요로운 햇빛은 크림색 면바지와 옅은 초콜릿색의 브이넥 니트 차림을 하고 있는 그에게도 아낌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듯, 거의 반쯤은 눈을 감은 채로 연주에 몰입해 있는 그가 선명하게 시야로 밟혀들었다. 입가에 보일 듯 말듯 부드럽게 머금고 있는 것 역시 미소였다. 니트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붙였고, 페달을 밟고 있는 발은 양말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었으며, 신다가 벗어둔 것으로 보이는 새하얀 스니커즈가 피아노 다리 근처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의 현재 기분이 얼마나 밝고 자유스러운지를 대변해주는 풍경이었다. 그가 연주하는 곡은 꽤나 오래된 어느 영화 주제곡이었는데, 통통 튀듯 경쾌한 멜로디는 인환의 귀에도 매우 익숙했다. 비교적 정교한 솜씨임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음이 틀리는 것을 보니 그가 얼마나 오랜만에 피아노를 치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당장은 그의 모습에 놀란 나머지 아주 나중에 가서야 곡명을 기억해낼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영화 「스팅」의 주제곡인 「The Entertainer」였다.)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연습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가 그것을 만회할 심산인지 같은 곡만 네다섯 번 이상을 반복해서 친 것 같았고, 인환 또한 그동안 내내 피아니스트만 홀린 듯 바라본 것 같았다. 거듭된 수련에도 불구하고 실력 꽝인 피아니스트는 자꾸 틀리는 음에서 거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문득 아득해졌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뭉클한 감정의 파고가 넋을 가득 사로잡았다. 그가 피아노를 치는 게 놀라운 건지, 피아노를 치면서 저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놀라운 건지, 그도 아니면 그의 존재 자체에 감동을 하고 있는 건지, 인환 자신도 자신의 감정을 잘 알 수가 없었다.
사랑은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했다. 사랑하면 안 되는 남자였다. 절대로 다시는 저 남자에게 빠져선 안 되는 것은, 인환에게 있어 절체절명의 생존 법칙이었다. 그가 현재 자신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적 존재라 해서 다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사랑하면 소유하고 싶고, 소유에 대한 지독한 갈망은 곧 손쓸 수 없는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그렇다. 소유한 듯 꿈을 꾸는 것까지도 허락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 되면, 아니, 현실이라고 단정을 내리게 되면 그때야말로 아주, 매우매우 곤란해진다. 꿈은 대등한 연인의 관계 내에선 성립되지 않는다. 인환이 꿈을 꿀 수 있는 권리는 오로지 그의 노예로서만, 온 넋과 정신과 육체가 그라는 절대 군주에게 사로잡힌 노예로서만 온전히 주어지게 된다. 그러니 이 감정은, 이 온 넋이 뒤흔들릴 정도로 전율스러운 감정은, 그저 한 뛰어난 인간에 대한 감동에 불과한 것이라고 치부해두자. 그저 경탄한 것뿐이라고. 워낙에 아름다운데다가 재주 또한 많은 주인님이니 경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위트룸 안을 가득 메우던 경쾌한 피아노 소리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소스라치듯 인환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핸섬한 피아니스트가 벌써 연주를 멈춘 채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수컷의 웃음을 얼굴 가득 피워 올린 채.
“……잘 잤어, 내 마누라?”
채 꿈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멍청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하는 사이, 냉큼 코앞으로 다가든 피아니스트였다. 달콤하기 짝이 없는 노곤한 바리톤이 귓가를 핥듯이 속살거렸다. 상큼한 코롱 냄새와 샴푸 냄새가 은은한 체취와 더불어 코끝 가득 밟혀들었다. 허리가 틀어잡혔다. 대범한 손길은 이내 옆구리로, 궁둥이로, 또 등줄기로 스멀스멀 이동했다.
“……어어…… 훕……!”
또다시 한 템포 늦은 인환의 인사는 서툰 피아니스트의 입안으로 홀딱 먹혀들고 말았다. 홍차를 마신 모양인지, 뜨겁게 물결치는 혓바닥과 함께 향긋한 홍차 향이 인환의 입안으로 가득 넘어왔다. 허리가 뒤로 활처럼 휘어졌다. 쪽쪽. 쪼옥. 모닝 키스치고는 지독하게 야한 접촉음에 가뜩이나 힘을 잃은 하반신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배고프다. 많이 기다린 거 알아?”
간신히 키스를 멈추고 나서도 여전히 입술을 붙인 채 그가 노곤하게 중얼거렸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이 길고 긴 속눈썹 그늘을 만들어내며 인환의 눈동자를 굽어보고 있었다. 힘을 잃고 비틀거리는 인환의 몸은 그의 단단한 양팔에 의해 완벽히 끌어안긴 상태였다.
“……머…… 먼저 내려가서 먹지…….”
헐떡이듯 토해진 대꾸는 다시 한 번 길고 긴 열정적인 키스로 틀어막혔다.
“……서방님 때문에 힘들어하는 착한 마누라를 두고 어떻게 먼저 밥을 먹나.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몇 분이나 입안 곳곳을 샅샅이 빨리고 핥아 먹힌 후에 겨우 토해진 짓궂은 대꾸였다. 놀리는 어조도 마음에 안 들고 간밤에 한계까지 괴롭힌 작태도 여전히 얄밉긴 하지만, 몇 분 전 그를 향해 품었던 두려움과 그에 따른 부정적인 다짐을 생각하면 그런 가벼운 기분은 차라리 구원이었다. 미처 감정을 수습하지도 못했는데,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한 듯 밝기만 한 그의 생기도 마냥 고맙기만 했다.
“……나, 나도 많이 배고파. 빨리 밥 먹으러 가자.”
눈꼬리를 휘며 내내 실실 웃는 그를 끌고 스위트룸을 빠져나왔다. 배가 고프기는커녕 지친 몸은 그저 자고만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언제 어느 때 잠이 들든 기상 시간만은 거의 늘 일정한 그를 생각하면 인환 쪽에서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벌써 몇 시간 전에 깨어났을 테니 그는 꽤나 배가 고플 것이다.
두 사람이 식사를 위해 도착한 곳은 30층에 있는 VIP 전용 라운지였다. 이미 9시가 넘어서인지 식사를 위해 모여든 손님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네다섯 개의 테이블만 차 있을 뿐,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는 고급스러운 라운지는 적요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식단이 완벽한 서구식이어선지 인환의 입맛엔 맞는 편이었지만 그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무리 아침 식사라도 밥이나 국이 빠지지 않아야 하는 식성이니 오죽할까 싶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꽤나 먹성 좋게 크루아상과 베이컨 에그를 잔뜩 먹어치우는 그였다. 오히려 인환보다 배 이상의 양을 해치운 결과를 놓고 보자면 저 까다로운 식성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만큼 허기가 심각했다하기보단 그의 밝은 기분 상태가 원인일 것이다. 가만히 관찰해보면 현재의 그는 쇠를 씹어 먹으라고 한대도 기꺼이 씹어 먹을 기세였다. 툭하면 웃음을 머금고, 별별 사소한 기회를 다 잡아채 인환을 놀리고, 조금 진중해졌나 싶으면 내내 인환의 얼굴과 몸으로만 시선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러다 문득 왼손 약지에 시선이 머물면 눈엔 별이라도 뜬 것처럼 번쩍번쩍 빛이 더해지고, 양쪽 입술 끝은 옆으로 크게 휘어 올라갔다. 그런 그를 새삼 인지할 때마다 순간 목이 메는 고질병이 발병하는 동시에 손가락을 죄는 반지의 압력 또한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는 아득한 심정이 되곤 하는 인환이었다. 생각이 깊어지는 것은 좋지 않았다. 아주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들뜬 그를 보는 것도,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특급 호텔의 호사스러운 풍경을 보는 것도, 모두 인환으로 하여금 수시로 깊은 생각을 일으키게끔 하는 치명적인 독약이었다. 고요해 보이는 백조가 실은 필사적으로 발을 놀려 호수 위를 헤엄치듯, 인환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진심과 직면하지 않기 위해 처절한 내면의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얼마만큼이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 자신이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무의식 깊이 감춰둔 채 외면하고 있을 정도이니 말해 무엇 하랴. 그를 바라봐야만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이 일상적이지 않은 공간만이라도 빨리 벗어나는 게 최선일 것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현재 인환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터였다.
“……여기도 12시면 체크아웃이지? 먹고 슬슬 준비하면 여유 있게 나갈 수 있겠다.”
스위트룸 못지않게 호사스러운 라운지를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마침내 넌지시 말을 꺼내보았다. 흐리게 내린 원두커피를 후식으로 마시고 있던 그의 눈썹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는 게 보였다. 배부른 사자처럼 느긋하던 분위기가 일순 날카로워진 것도 같았다.
“……체크아웃은 3시까지도 연장이 가능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오늘 밤까지 예약해둔 상태니까.”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인환을 그의 신중해진 눈길이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지금 예약 취소를 해봤자 객실 요금을 돌려받지도 못해. 포기해, 마누라.”
아찔한 낭패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나 보다. 굳어든 표정이며 심술궂은 어조며, 그는 기분 나쁜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순간 가슴이 철렁해서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서 빨리 집으로 가고픈 기분도 간절했으나, 그에게 진심을 들켜 그의 기분마저 상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었다. 식사 내내 싱글벙글이던 아름다운 얼굴이 금세 뻣뻣하게 굳어드는 것을 봐야 하는 기분도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안절부절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그를 다시금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없을까 궁리해보지만, 마음만 급하니 머릿속은 더더욱 백지가 되었다. 쿡쿡쿡.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터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멍하니 시선을 가져가자 팔짱을 낀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그가 보였다. 번쩍번쩍 별이 들어앉은 눈이 살짝 눈꼬리를 휜 채 인환을 굽어보고 있었다. 자신의 당황을 고스란히 핥는 그 시선에서 인환은 비로소 그에게 또 놀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빠…….”
“음?”
“……너…… 너, 너, 진짜 못됐다…….”
안심한 만큼 화가 난 것은 물론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그가 보기 싫어져서 인환은 테이블 위에 냅킨을 팽개치듯 하곤 라운지를 빠져나왔다. 뒤따라 달려오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그러나 한쪽 다리를 저는 자신이 아니라도 그의 집요한 기세를 당해낼 인간이 세상에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금세 따라잡히는 것도 시간문제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먼저 한쪽 팔이 잡히고, 이어 어깨가 사로잡혀 돌려세워지고, 마침내 그의 두 팔에 의해 허리가 완전히 장악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스위트룸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앞에서였다. 미리 상향 버튼을 눌러둔 바람에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가 끌어안듯 인환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복도 끝에서 무슨 일인가 싶어 이쪽을 힐끔거리는 메이드 제복을 얼핏 본 것도 같았다.
분명 인간답게 화를 내며 도망쳐 왔는데 어째서 결론은 그런 쪽으로 내려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속은 것 같기도 하고, 어리바리하다 그만 완벽하게 당한 것 같기도 했다. 영리하다 못해 진짜 교활한 변태 색정광이었으니 알 게 무어람.
그대로 침대로 끌려가 옷이 벗겨졌다.
그나마 인환을 배려해 항문 쪽 삽입만 없었다 뿐, 가능한 한 모든 섹스는 다 시도해본 것 같았다. 장장 다섯 시간여에 걸쳐서였다. 하다 지치면 기절하듯 자고, 배고프면 룸서비스를 시키고, 기운이 모이면 또 달라붙었다.
욕망을 품지 못한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줄 수조차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야수와 달라붙어 체온을 나누다 보니 야수가 자신인지, 자신이 야수인지 아리송해질 때가 있었다. 그만이 야수가 아니라 인환 또한 짐승으로 완벽하게 타락해버린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섹스에 환장한 광란의 허니문이었다.
물론……. 그저 단순한 섹스가 아니라 일종의 의식(儀式)이라고, 그래서 이리도 절박하게 끊임없이 제(祭)를 올리는 중이라고, 그 누군가의 진심을 설핏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는 체를 할 수는 없었다. 알아버리면…… 아니, 조금이라도 알아먹은 척 인정하고 나면 곧 지옥이 열리리라는 걸 짐작한 때문이었다. 지옥의 욕망이, 탐욕이 자신을 완벽하게 삼켜버리고 말리라는 것을.
마침내 천벌이 떨어진 것도 그날이었다. 아무렴. 광신은 늘 언제나 무신론보다도 더 그악한 폐해를 남기곤 하는 법이었다.
허니문의 하루가 채 다 가기도 전, 늦은 오후였다.
한동안 잠들었다가 막 다시 시작된 야수의 삽입에 폭풍처럼 휘말린 참이었다. 침실 테이블 위에서 야수의 휴대전화가 끝없이 울어댔다. 인간 세상으로부터의 애끓는 신호였다. 그나마도 야수의 토정이 있기 전까진 말짱 무시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인환의 내장 깊숙이 실컷 쏟아낸 야수는, 십여 분에 걸친 후희마저 철저히 만끽한 후 겨우겨우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띠리리링∼디링∼디리링∼∼∼띠리리∼디링∼디링∼∼∼.
끈질기게 울려대던 ‘로망스’의 선율이 야수의 청각에 가까스로 가 닿은 것도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너무나 지쳐서 거의 정신을 놓고 있던 인환은 그조차도 자각하지 못했다. 얼핏 전화를 받는 ‘인간’의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고, 잠시 숨을 삼키는 기색을 읽은 것도 같았다. 그러나 제대로 의식한 사정도 그저 그것뿐이었고, 인환은 이내 짧지만 깊은 숙면에 들고 말았다. 다시 한 번 야수가 자신을 깨운다면, 그때야말로 엉엉 울며 애원을 하리라고. 그래서 어떻게든 야수를 반드시 인간으로 되돌리고 말리라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면서.
인환이 제대로 의식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남짓이 더 흐른 후였다. 의외로 야수의 끈질긴 재촉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선 어느 낯선 기척 덕분이었다.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거실로부터 들려왔다. 잘 아는 목소리들이었다. 한 사람은 겨우 인간으로 되돌아온 듯한 그였고, 다른 두 사람은 홍 기사와 고영석이었다. 눈을 뜨고도 여전히 뇌 속을 혼탁하게 물들이고 있던 졸음기가 순식간에 달아났다. 해가 지려는지 주홍빛으로 변한 해그늘이 침실 안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콘솔 위, 앙증맞은 알람시계 바늘은 정확히 5시 5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뒤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걸칠 만한 옷을 찾았다. 정액 냄새와 땀 냄새로 가득한 야만의 침실이며 붉은 얼룩 범벅인 자신의 알몸이 부끄러운 것도 뒷전이었다. 그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떻게든 인간다운 모습으로 저들과 귀향할 수 있길 간절히 비는 자신이 있었다.
다행히 몇 시간 전에 벗어둔 청바지와 셔츠들이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서둘러 옷을 걸쳐 입고 확인하듯 거울을 살폈다. 목덜미 군데군데 찍힌 키스 마크나 하도 시달려 창백하게 핏기를 잃은 얼굴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야수인 주제에 뒤처리만은 철저히 문명인다운 누구 씨 덕분에 몸은 꽤나 말끔한 상태였다. 아마도 또 잠든 사이 씻겨주었나 보다.
침실 문을 열고 나서자 세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인환의 얼굴로 다가들었다. 그중 상대적으로 덜 친밀한 고용인들의 시선에 슬쩍 붉어지려던 인환의 얼굴은, 그 직후 그의 모습을 정확히 인지한 순간 서늘하게 굳어들고 말았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것은 검은 상복이었다. 검정색 넥타이에 검정색 슈트가 그러했고, 무엇보다도 왼팔에 두른 삼베 완장이며 가슴에 달린 새하얀 상장(喪章)들이 의심할 여지조차 없게 만들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호되게 뺨을 후려쳤다 해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장이 내려앉기라도 한 것처럼 하도 놀라니 현실감조차 제대로 들지 않았다. 그저 까마득한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듯, 인환은 아득한 어지럼증만 자각했을 따름이었다.
“……위…… 위야……?”
“마침 일어났군. 곧 체크아웃 할 테니 일단 집에 가서 푹 쉬도록 해. 홍 기사가 데려다줄 거다.”
시선을 휘어잡은 채로 그가 명령했다. 침통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비하면 꽤나 단호하면서도 담담한 어조였다.
“……누…… 누가…… 어 어떤…….”
무얼 확인하려는 걸까, 새삼 자신은? 삼베 완장과 상장만으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저건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가족이다. 그의 가족 중 누군가가 운명을 달리했다는 의미였다.
“……보성 아버님께서 별세하셨다는군. 별다른 증상도 없이 낮잠을 주무시다가 갑자기 가신 모양이야.”
“……!”
“……기억하나? 윤열이 형 아버님 말야. 언젠가 보성에서 뵌 일이 있지, 너도?”
“!!!”
“……아아, 정말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당신으로선 홍복이신지도 모르지. 고통 없이 평화롭게 가셨으니.”
“…….”
인간의 기억이란 것은 참으로 신기한 작용을 하는 것 같다. 단 몇 분 전만 해도 까맣게 잊어버렸던 어떤 장면이, 그리고 그 장면 속의 누군가가 어떤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단숨에 선명하게 되살아나곤 하니 말이다. 청춘…… 그 여름, 그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던 여름의 보성! 눈부신 햇빛, 번쩍이는 물비늘, 신이 난 붕어 사냥, 밥과 김치와 풋고추와 된장이 전부였던 소박한 도시락…… 그리고, 그리고…… 등이 굽은 어느 소박한 촌로의 무상의 호의와 애정……!
“……장인환…….”
어느새 뿌옇게 변한 시야 속에서 문득 그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것이 보였다. 깨물린 아랫입술도, 파르스름하게 면도가 된 턱 끝도 미세하게 떨리는 것은 물론, 그의 눈시울 근처가 벌겋게 변한 것 역시 시야로 선연히 밟혀들었다.
무심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슬쩍 몸을 빼는 것으로 인환의 손길을 피했다. 감정이 폭주하려는 스스로를 결사적으로 참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벌겋게 변한 눈시울에도 불구하고 그는 울지 않았다. 미세하게 몸을 전율시키고 있으면서도, 절대 설움을 토해내지 않는다. 목 끝까지 차오른 울음은 사내다운 매서운 의지로 인해 도로 단전 아래까지 끌려 내려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래서 인환이 대신 눈물을 쏟고 말았을 것이다. 소리 없이 주룩주룩. 어린애처럼 마냥 주룩주룩. 그가 냉랭한 어조로 가차 없이 내치지 않았더라면, 속절없이 닥친 설움에 대성통곡이라도 하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울지 마라. 널 위로해줄 시간도 없으니까. 나는 곧바로 빈소로 달려가야 해. 장례가 끝날 때까지는 집에 들어가지 못할 거야. 정신 단단히 챙기고 집 안에만 꼭 붙어 있어. 알았지?”
잔뜩 억눌려 탁해진 중저음이 재차 단호한 명령을 던졌다. 유난히 냉담해진 딱딱한 어조에 가슴이 시릴 정도였다.
“……나…… 나도…… 나도 갈 거야…… 나도……!”
“안 돼. 어제 오늘 험히 다뤄서 몸 상태가 나빠. 3일 내내 날밤을 새워야 할 텐데 견디기 힘들 거다.”
“……그…… 그래도 갈 거야! 갈 거야! 가게 해줘, 위야……!”
“…….”
“……마, 마누라라며! 내가 네 마누라라며! 그, 근데 마누라가 시댁 어르신 부음에도 모른 척하는 게 어딨어! 그런 마누라가 어디 있어!”
“…….”
옆에서 듣고 있을 홍 기사도, 젊은 경호 기사 청년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턱없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자괴감 또한 들지 않았다. 듣기만 해도 얼굴이 시뻘게졌던 ‘마누라’ 소리가 뻔뻔스러울 지경으로 태연하게 흘러나오는 것은, 더구나 스스로도 좀처럼 믿기 힘든 노릇이었다.
“……그래,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좋아.”
잠자코 인환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그가 겨우 허락의 답을 입에 담았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절박한 마음이 드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 여기면서도, 인환은 순간 안도하고 있었다. 간신히 참아냈던 눈물이 또다시 핑 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 밤은 안 돼. 오늘 밤만은 집에 가서 쉰다고 약속해라. 그럼 장지까지 따라가는 것도 허락해줄 테니까. 충분히 체력을 보충한 후에 내일 빈소로 오도록 해.”
“그, 그건……!”
“더 이상 양보는 없어, 장인환. 오늘 부득부득 같이 가겠다고 우기면 경호원들한테 집에다 3일 내내 가둬두라고 할 테니까.”
“그……!”
흉흉할 정도로 차고 단호한 눈빛에선 타협의 여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심이었다. 오늘만 집에 가서 쉬든지, 아니면 장례식까지의 3일 내내 집 안에 갇히든지 하는 양자택일만 있을 뿐이라는. 할 수 없었다. 장례식에만이라도 제대로 참석하려면 그의 뜻을 따르는 수밖에는.
“그럼 홍 기사님, 인환이 부탁합니다. 여기 아타셰케이스는 내일 윤 실장이 집에 들를 테니 그때 전해주시면 됩니다. 트렁크는 오른편 손님용 객실에 두었습니다. 나머지 짐들도 빠짐없이 챙겨주십시오.”
“예, 사장님.”
“……위, 위야……!”
고영석의 뒤를 따라 막 스위트룸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그를 저도 모르게 불러 세웠다. 당연한 것처럼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을 뿐이었다. 무슨 말이든 단 한 마디라도 더 듣고 싶었지만, 아니, 실은 자신 쪽에서 뭐든 그럴싸한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와 자신 사이에 있는 것은 그저 황망한 침묵뿐이었다. 갑작스러웠다.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웠다. 이해할 수 없는 불길함이었다.
“……위야…….”
문이 열리고, 고영석의 어깨 너머로 그의 늠름한 장신이 걸어 나가는 게 보였다. 시커먼 상복조차 그의 압도적인 남성다움을 조금도 훼손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도리어 어딘가 조폭 같은 강력한 존재감을 더욱더 부각시킨다고 해야 옳았다. 그러나 그도 인환의 눈에 직접 보일 경우의 얘기였다. 늠름한 장신에 차돌처럼 단단한 근육질의 몸을 지닌 남자는 순식간에 플로어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서너 걸음 뒤에서 그를 따르던 고영석의 뒷모습이 사라진 것 또한 순간이었다.
달칵 하고 문이 닫혔다. 매정하게 닫힌 호사스러운 출입문이 마냥 서럽고 안타까웠다.
“……위야…….”
가족이 사라졌다. 그에게 속한 또 한 사람의 가족이. 그 사실이 인환에게 안겨주는 부담감과 고뇌란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원죄였다. 지독한 원죄였다.
수천수만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린대도 절대 대속되지 못할 터였다. 망할. 예수쟁이들만큼 지독한 거짓말쟁이도 따로 없는 것 같았다.
그와 붕어빵일 ‘청년’을 처음 발견한 곳은 이윤철 옹의 빈소가 마련된 일도병원 장례식장 안에서였다.
그의 금제가 풀린 다음 날, 아침 일찍 준비를 마치고 홍 기사가 운전하는 볼보 S60을 타고 빈소로 왔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현역 여당 국회의원이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이 붙은데다 그 넉넉한 도량으로 수많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이 의원이라서인지, 부친 이윤철 옹의 빈소가 차려진 장례식장 안은 수많은 조화와 문상객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정치는 물론 TV에도 무심한 인환이라지만 그런 인환에게조차 낯이 익은 유명 인사들의 얼굴이 수시로 눈에 띄곤 했다. 정관계는 물론 재계, 하물며 탤런트며 스포츠 스타들에 이르기까지 출신 배경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다양했다. 문상객들의 면면을 주시하는 동안 새삼 저 작고 까맣고 마른 남자가 얼마만큼 커다란 거목인지를 인환은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문상객들의 면모와는 달리 소박하게 차려진 빈소엔 현재는 별거 중이라는 이 의원의 부인과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딸 둘, 그리고 김성준과 그가 유가족으로서 상주(喪主)인 이 의원 옆에 나란히 선 채 조문객을 맞고 있었다. 그 옛날 보성에서 뵈었던 어머님도 벌써 5년 전에 타계하셨다고 들었다. 역시 이윤철 옹처럼 주무시다 조용히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의원은 붉어진 눈시울과 수척해진 낯빛으로 인환의 조문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따뜻한 시선과 마주 잡아주는 손끝에서 그네가 인환을 한 사람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선연히 느낄 수가 있었다. 목이 메는 절박한 느낌에, 인환은 입술을 힘껏 깨물고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애를 썼다. 상주조차 의연하게 견디는데 염치없는 죄인 주제에 눈물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영위(靈位)에 두 번 절하고 이어 이 의원에게 다시 돌아서서 맞절을 한 뒤 잘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조의를 표했다. 이 의원 옆에 여전히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하며 서 있던 그는 그런 인환을 내내 눈으로 좇고 있었다. 빈소 안으로 들어선 직후부터였다. 어쩐지 마주 바라볼 용기는 나지 않아, 이 의원의 부인과 김성준에게도 조용히 맞절을 하곤 서둘러 빈소를 빠져나왔다. 이 의원 옆에서, 아니, 실은 그의 옆에서 진짜 가족처럼, 아니, 가족의 자격으로 문상객을 맞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그럴 염치도 없고 그럴 입장도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좀 쉬었나?”
상주가 일체의 부의금을 받지 않는다고 선언해서, 빈소 입구에 마련된 데스크로 가 방명록에 서명만 하고 있는데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가 두어 발자국 떨어져 선 채 조용히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순간, 진중한 가운데에도 수많은 인파들이 몰리는 장소의 특성상 웅성거리는 소음들로 가득 들어차 있는 장례식장이 마치 진공 상태로 접어든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가 오롯이 선명하게 눈에 밟혀들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검정 일색인 조문객들 틈에서도 그의 주변만 푸르스름한 후광이 비쳐드는 것 같았다. 흰 눈자위가 조금 충혈이 돼 있고 얼굴빛도 창백한 걸 보니, 역시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한 모양이었다.
자신을 걱정할 게 아니라 그가 더 걱정이라는 대꾸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물론 차마 뱉어내지는 못했다. 쉬란다고 쉴 그가 아니었으니까. 갑자기 타계하신 만큼, 남겨진 유족들의 애통함은 더욱 심각할 터이다. 그 또한 마찬가지일 테지. 더 나아가, 가장 애통해할 이 의원을 지키고 위로하는 일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너는? 조금이라도 눈 좀 붙였어? 식사는?”
“아아…….”
그는 대꾸를 얼버무리는 그 특유의 감탄사로, 인환의 어떤 물음에도 답은 부정적이란 사실을 우회적으로 알려주었다.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는지 그가 희미하게 웃는다.
“괜찮아, 이 정도는. 형이 많이 아파해서 좀처럼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어. 이젠 꽤 진정된 것 같으니 짬짬이 쉴 수도 있겠지. 성준이도 있고.”
“으응…….”
“경호원들은 동행했지?”
“응, 물론이지.”
“어딜 가든 항상 함께 데리고 있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 어떤 인간들이 섞여들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 휴대전화도 잘 챙기고.”
“응.”
“이 건물 2층에 제법 큰 휴게실이 있고, 지하엔 식당도 있더군. 문상객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시키긴 했는데, 그보다는 식당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게 나을 거다.”
“……응.”
“……틈틈이 나와볼게. 잠깐씩이지만 쉬는 동안은 함께 있을 수 있겠지. 형의 먼 친척들 틈에서 이상한 눈총 받으며 불편하게 앉아 있는 것보단 밖이 그래도 나을 거야. 그래서 안에는 들이지 않는 거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
“……거짓말 아냐. 형한텐 너와의 관계 허락받은 지 이미 오래야. 형에겐 너도 이제 한 가족인 셈이다.”
“…….”
“……내 문제로는 아파하지 마.”
“…….”
“이상한 데다 신경 쏟지도 말고. 지금은 정말 너 달래주기 힘들어서 그래. 나도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응…….”
“……들어간다.”
“…….”
그의 따스한 손가락 끝이 슬쩍 뺨과 입술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달라붙은 이물질을 떼어주듯 자연스러운 제스처였지만 잠깐 닿은 온기에도 인환은 전율했다. 그 역시 같은 것을 느꼈는지, 잠시 활활 타는 듯 음습한 시선을 주다가는 순식간에 다시 몸을 긴장시키며 빈소 쪽으로 돌아섰다. 미처 눈에 실컷 담기도 전에, 새까만 상복으로 감싸인 늠름한 몸은 금세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상냥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련이 남아 빈소 쪽을 자꾸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리 질척하게 들러붙는 애착이라니……. 그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가족’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10시쯤 도착해, 인환이 장례식장 주변을 배회하며 시간을 보낸 지 다섯 시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틈틈이 나와보겠다던 그의 약속은 잘 지켜지지 못했다. 그럴 것이, 워낙에 많은 유명 인사들이 쉴 새 없이 들이닥쳤다간 돌아가고, 또다시 들이닥치길 반복하고 있었다. 상주인 이 의원은 물론, 실제적인 상주 역할을 거의 도맡다시피 하고 있는 그 역시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딱 한 번, 건물 지하 식당에서 홍 기사와 경호원들과 더불어 점심을 먹고 있는데 그가 식당으로 내려왔다.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그저 인환이 식사를 거르지 않나 감시하기 위해 온 듯했다. 밥을 권했더니, 전이니 떡이니 이것저것 집어 먹어 별로 배가 고프지 않다며 거절했다. 그저 잠시 인환의 앞에 마주 앉아 인환이 밥을 먹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나마도 채 5분을 넘기지 못한 채로 그는 빈소로 되돌아갔다. 얼굴빛도 그리 나쁜 것 같지 않고 아직 기운도 넘치는 것으로 보여, 그나마 가슴을 쓸어내린 인환이었다.
빈소로 돌아가는 그를 몰래 뒤따라가, 다시 한 번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보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도울 일은 없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이 의원의 보좌관들은 물론 그의 비서진들까지 일꾼들은 차고 넘칠 정도인데다, 병원 측에서도 충실한 장례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는 터라 인환이 할 만한 일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내심 실망한 얼굴로 도로 쫓겨나다시피 빈소를 나와야 했다.
저 ‘청년’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아마도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막 별관 현관을 나서려 할 때였다. 마침 헐레벌떡 현관 안으로 뛰어든 검은 가죽 재킷 차림의 청년을 스쳐가려던 인환의 눈이 문득 휘둥그레졌다. 낯익다 못해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는 익숙한 이목구비가 인환의 곁을 스쳐 빈소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막 공항에서 바로 온 듯, 청년은 항공사 태그가 붙은 커다란 보스턴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인환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서 발을 멈췄지만, 청년은 그런 인환을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벌벌 떨리는 몸을 애써 추스르며 돌아보니, 청년은 데스크 앞에서 방명록을 정리하고 있는 이들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방명록에 서둘러 사인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혹시라도 인환 쪽을 돌아볼까 싶어 잔뜩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청년은 곧 빈소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선생님? 선생님, 괜찮으세요?!”
언제 어떻게 장례식장 밖으로 걸어 나온 건지 알지 못했다.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홍 기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인환을 굽어보고 있었다. 재차 전해지는 부름에다 팔까지 휘어 잡힌 덕분에, 인환의 방기되었던 현실감이 비로소 돌아왔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다면서 홍 기사가 재차 안위를 물어왔다. 경호원 두 사람도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선 채 주의 깊게 인환을 지켜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잠깐 어지러워서…… 어디 앉아서 좀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힘겹게 토해지는 대꾸에, 홍 기사가 부축하듯이 팔을 잡고 별관 앞 정원 잔디밭으로 안내했다. 정원 잔디밭은 솜씨 좋은 정원사가 관리 중인지 나무며 화단 등 식물들의 생육 상태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곳곳에 벤치가 놓여 있어 쉬기엔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인환 말고도 상복 차림의 사람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홍 기사는 그중에서도 커다란 단풍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벤치에 인환을 데려다주었다.
도망가버릴까?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가장 쉬운 선택이면서도 가장 후유증이 클 선택이었다. 기각. 그럼 만나러 가?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지만, 인환 자신보다 장례식에 더 큰 피해를 줄지도 모를 선택이었다. 직접적으로 대면한 것은 지난 14년을 통틀어 손가락에 꼽을 정도지만, 그것만으로도 청년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흥분한 나머지 또 인환에게 폭행이라도 행사한다면 여러 의미로 문제가 커질 것이다. 그러니 역시 이도 기각.
결국 남은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즉 만나게 되든, 아니든 운에 맡겨버리는 것. 정말 만날 운이라면, 만나서 청년에게 진지한 사죄의 말이라도 완성할 수만 있게 된다면 그땐 사죄를 하자고. 들어주든 안 들어주든 인환이 할 일은 다 해보자고. 좀 전처럼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라면 아직은 만날 시점이 아니니 사과도 다음 기회로 미루면 된다고.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새삼 다짐도 한다. 아직 만나지지 않은 청년에게. 그의 피붙이에게. 그의 또 다른 피붙이가 유명을 달리하는 길목에 서서. 욕심을 내진 않아. 이제 다신 내 욕심으로 당신들에게서 그를 빼앗지는 않을 거야. 내 자리는 언제나 그가 원하는 만큼의 딱 그 자리. 그가 성노예를 원하면 성노예가 돼주고, 그가 속죄하는 죄인이 돼주길 원하면 죄인이 돼주고, 그가 연인 역을 해줄 순종적인 노예를 필요로 하면 기꺼이 연인이 돼주고, 그가 마누라 역을 해줄 육감적인 호모를 필요로 하면 기꺼이 호모 마누라가 돼주는 거지. 소유하지 않아. 소유하겠다고 원하는 마음 또한 갖지 않아. 나를 소유할 수 있는 이는 차라리 그, 당신들의 형이고 동생이고 오빠고 또한 자식인 그이뿐이지. 내가 그의 것이 될 수는 있어도 그가 내 것이 되는 일은 없어. 절대 내 것이 아니야. 언제나 당신들만의 것이지…….
바람이 불어왔다. 비로소 가을을 실감할 수 있는 서늘한 북서풍이었다. 바람 때문인지 머리 위로부터 단풍잎 몇 개가 팔랑이며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낙엽이 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듯 단풍잎엔 푸릇한 기가 아직도 선연히 남아 있었다. 그중 벤치 위에 내려앉은 하나를 주워 재킷 왼쪽 가슴 주머니에 조심조심 집어넣었다. 주머니 안쪽 깊은 곳에서 부디 바스러지지 않기를. 부디 장례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그렇게 간절한 기원도 했다.
“……드런 호모 새끼! 뭐, 용서?! 용서?! 용서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우리 불쌍한 혜윤인 아직도 죽어 있고, 형은 미치고, 형수는 울고, 진짜 개똥같아서, 씨팍!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은 짓거리들을 저질렀는데, 아직도 저지르고 있는데, 뭐, 용서?!”
“……휘…… 군…….”
“그러고도 뻔뻔스럽게 집안 장례식에까지 나타나?! 이런 개 빌어먹을 잡놈의 새끼! 니가 뭔데 우리 집 장례식에 나타나?! 돌아가신 저분마저 욕보이고 싶어진 거냐?! 저승 가시는 당신 얼굴에 똥칠이라도 하고 싶어졌어?! 이런, 썅! 양심이라곤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는 개 호로새끼!”
“……휘…….”
“그래, 형이 뒤에 있으니 겁나는 게 없다 이거지?! 진드기같이 형한테 들러붙어서는…… 하, 아주 신수가 훤해졌군, 그새?! 형이 잘해주나 보지?! 그래, 드런 똥구멍으로 멀쩡했던 우리 형까지 유혹해 미치게 하니 좋냐?! 좋아?! 멀쩡한 우리 형을 원수 호모 놈 똥구멍에 미쳐서 동생들까지 다 팽개치고 나 몰라라 하게 만드니 좋냐구, 이 개새야?! 너 같은 새끼 때문에 아까도 형수님이 울었다! 우리 형수…… 불쌍한 혜윤이까지 망가뜨리더니 이젠 착한 우리 형수 신세까지 망쳐버리는구나! 개씹, 호모 새끼! 바퀴벌레보다 질긴 새끼! 징그런 새끼!”
“……휘…… 휘 군…… 부디…….”
“그, 그만하시지요, 도련님……!”
오늘 사과를 하라는 운명이었나 보다.
담배를 피우러 잠깐 빈소에서 나온 ‘청년’과 그야말로 정면에서 마주쳐버린 것이 바로 몇 분 전의 일이었다. 운명처럼, 아니, 저주처럼 청년은 인환이 앉아 있던 벤치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었다. 무심히 다가온 것치고는 정말로 정확한 방향 선택이었던 셈이다. 운명의 힘이 작용한다는 건 이럴 때를 대비해 있는 표현일 게다. 한 시간 전쯤 현관 앞에서 무심코 스쳤을 때가 오히려 잠시의 자비로운 기적이었던 거겠지.
“용서를 바라?! 진짜 용서를 바라냐, 씨발?! 그럼 죽어! 죽어서라도 우리 형한테서 떠나! 우리 식구들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란 말이다! 그럼 나도 니 새끼를 용서하도록 노력은 해보마!”
그와 붕어빵인 잘생긴 얼굴이 판결을 내린다. 사천왕상처럼 무시무시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서. 어쩌면 그의 숨겨진 본심일지도 모를 현실이 청년을 통해 대신 전해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죄인에게 주어 마땅한 표정이고, 마땅한 판결 또한 정의롭다. 매우 정의롭다. 근데. 그런데. 매우 정의로운데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이 기분은 무얼까? 이리 구질구질하고, 염치없고, 비굴하기까지 한 미련은 무엇인 걸까?
“……휘…… 군…… 제…… 제발…….”
“씨발 놈이 어딜 만지고 지랄이야!!!”
“도련님!!!”
무심코 잡은 팔이 사납게 내쳐졌고, 굳은 다리로 순간적으로 체중이 실렸다. 꽤나 비틀거리게 된 나머지 무심코 다시 청년에게로 손을 뻗었던 것 같았다.
짜악……!
“선생님!!!”
왼쪽 뺨에 갑자기 불이 번쩍 일었다. 얼굴 생김도 형과 붕어빵이더니 기운도 형과 막상막하인 모양이었다. 따귀가 아니라 무슨 주먹으로 맞은 것 같은 통증이었다. 잠시 눈앞이 까매지더니 애초에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그만하십시오, 도련님!!!”
“장 선생님!”
“이런……! 승수 씨, 광렬 씨, 뭐하는 겁니까!!! 어서 선생님 좀!!!”
홍 기사의 다급한 외침도 들리고, 좀 떨어져 있어달라 부탁했던 경호원들도 순식간에 다가온 것을 알았다. 뺨을 맞은 얼떨떨한 느낌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경호원 둘의 손이 겨드랑이 틈으로 들어왔다. 넘어졌을 때만큼 그들에게 양쪽 팔과 옆구리를 잡혀 도로 일어난 것도 순간이었다.
빠악!!!
“큭!!!”
우당탕탕……!
경호원들의 어깨 너머로 심각한 타격음을 들은 것 같았다. 이어 뭔가 무거운 것이 바닥에 나동그라지듯 땅이 울리는 소리 역시 얼핏 들은 것 같았다. 제대로 시야가 잡히고, 보호하듯 인환을 막아선 거구의 덩치 둘이, 움찔 몸을 긴장시키더니 잠시 옆으로 비켜서는 게 보였다. 양쪽 팔을 옥죄고 있던 경호원들의 손도 떨어져 나갔다.
“……이 씨…… 이 새끼……! 씨팔, 이 새낀 또 뭐야?!!!”
퍼억!!!
“컥!!”
“도, 도련님!!!”
“이…… 이 새끼가?!!! 큭!!!”
빠악!!!
상황을 제대로 인식했을 때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인환은 잠시 자신이 환영을 보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너무 놀라면 온몸이 굳어버리는 버릇은 여전해서, 당장 ‘막아야 하는데’ 하고 멍하니 생각을 흘렸을 뿐, 인환은 다른 어떤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청년이 맞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남자였다. 남자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청년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더니 정확한 라이트 훅을 얼굴에 명중시켰다. 거구의 청년이 요란한 진동음을 내며 다시금 바닥에 고꾸라졌다. 남자의 발길질이 쓰러진 청년의 허벅지 근처에 명중했다. 신음 섞인 욕설이 청년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고, 그것이 또 남자의 격분을 일으켰는지 남자의 발길질이 이번엔 청년의 명치끝에 명중했다. 청년은 잠시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어째서 저 남자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하는 쓸모없는 생각이 잠시 인환의 뇌리를 스쳐갔다. 반가움과 아픔과 고뇌가 동시에 심장을 옥죄며 지나가기도 했다. 재킷 자락을 휘날리며 크게 흔들리고 있는 뒷모습뿐이었지만 인환은 단숨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형편없이 말랐어도 강건한 사내다움이 흘러넘치는 남자의 수려한 뒤태는 보통 사람들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으니까.
불시에 연달아 카운터를 맞아서인지 청년은 바닥에 고꾸라진 채 좀처럼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무자비하게 떨어지는 공격을 피해 몸을 둥그렇게 만 위로, 남자의 무차별한 발길질이 이어지고 있었다. 몹시도 고통스러운 듯, 청년은 가격이 떨어질 때마다 신음 소리만 몇 번 흘릴 뿐 더 이상 욕설조차 내뱉지 못했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 같더니, 몇 걸음 떨어져 있던 홍 기사가 다가와 부축을 했다. “장 선생님!!!” 하고 외치는 홍 기사의 목소리도 아득하게 들렸다. 막아야 하는데……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너무나 절실하니 오히려 목소리가 좀처럼 흘러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하느님, 그만두게 해야 하는데……. 부들부들 손이 떨리며 시린 한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안 돼……! 안 된다구!!! 기절할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마침내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짜려는데, 시커먼 물체 둘이 남자와 청년 사이에 끼어들었다. 경호원들이었다. 하느님……!
“그만하십시오!!!”
“김강원 씨!!! 당장 그만두시지 않으면 저희들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그만 진정들 하세요……!”
“……씨…… 씨팔…… 이…… 큭……! 너…… 너 죽었어…….”
“닥쳐.”
헐떡이는 짐승들의 포효가 바늘 끝처럼 인환의 심장을 찔러댔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일어서는 청년이 보였다. 한쪽 뺨은 벌써 부풀어오기 시작해 맞은 흔적이 선연하고, 입술 끝은 찢어지기까지 했는지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의 상처 또한 만만치 않을 터였다. 움츠리듯 상체를 굽힌 채 비틀거리는 몸 역시 청년이 입은 대미지를 드러내주고 있었다. 홍 기사가 그런 청년의 팔을 잡아 부축하려 했지만 청년은 다가온 손길을 암팡지게 뿌리쳤다. 무시무시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청년은 퍼런 살기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경호원 두 사람에게 가까스로 몸을 제압당하고 있는 남자 또한 한가지였다. 잔뜩 억눌린 수컷의 폭력이 일촉즉발 상태로 남자의 표정에서 꿈틀거렸다.
“……씨, 씨발…… 퉷……! 저 새낀 뭐야…… 이런 씹, 황당한……! 형 말고 따로 기둥서방이라도 둔 거였어? 야, 이 씨발 호모 새꺄……!”
“닥쳐!!!”
“김강원 씨!”
“왜, 네놈도 저 호모 놈 똥구멍에 반한 거냐?! 응?! 첩년 좀 건드리니까 열받아 돌아가시겠디?! 하, 이거 진짜로 웃기는 코미디일세! 가지가지 하는구나, 호모 새끼들……!”
“닥치지 못해?!!! 이……! 놔! 이거 놓으시오!!! 놔!!!”
“김강원 씨!!!”
“닥쳐?! 닥치지 않으면 어쩔 건데?! 어따 대고 주둥일 씨불여, 드러운 호모 새끼들이!!!”
“휘 도련님, 그만두세요! 그만들 진정하시고……!”
“김강원 씨!!!”
“도련님!!!”
“……제발……!”
간발의 차이였다. 굳었던 몸이 풀려 인환이 간신히 다가가 남자의 허리를 움켜쥔 것은. 들끓던 용암이 마침내 폭발해 남자가 경호원들의 팔을 뿌리치고 막 청년에게 내달리려던 참이었다. 격분으로 물결치는 남자의 단단한 근육이 손바닥 아래서 생생하게 감촉되었다. 탱크처럼 휘몰아치고 있는 남자의 호흡이며 부들부들 떠는 양팔과 손가락들, 필사적으로 힘을 주고 있는데도 곧 남자의 의지대로 끌려들어가버릴 것만 같은 엄청난 힘 등등, 도저히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단 1분은커녕 몇 십 초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 스스로 순식간에 힘을 빼지 않았더라면.
“……제…… 발…….”
“……선생님……?”
“……제…… 발…… 그만하세요…… 제발…….”
“…….”
흥분으로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신음처럼 인환을 불렀다. 뒤에서 남자를 안은 손이 인환임을 확연히 알아챈 것이다. 자각과 동시에 남자는 극점까지 분출시켰던 치명적인 살기를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폭발 직전의 사납던 에네르기가 물처럼 잔잔해지며 남자의 근육에서 긴장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귀청을 때리는 거친 숨소리는 여전했지만, 전율하듯 떨리고 있던 사지는 차츰 평온을 찾고 있었다. 흐릿하게 떠도는 알코올 냄새며 담배 냄새, 그리고 코롱 냄새가 더해진 남자의 체취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눈물이 왈칵 치솟을 만큼 그립고 쓰라린 향취이기도 했다. 도대체 이 남자는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어째서 매번 자신은 이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추한 치부만을 낱낱이 드러내 보여줘야만 하는 걸까?
“……떨어져, 김강원.”
흠칫.
“내 사람한테서 떨어져라.”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지배자의 목소리였다. 일말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아 인환의 넋을 더더욱 혼비백산하게 만들어버리는 절대자의 그것이 뒤에서 들려왔다. 한계가 보였다. 또다시 정신을 잃고 도망쳐버릴 것만 같은 위기감에 머릿속이 갑자기 아득해졌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떨어져.”
일거에 모든 사고와 몸짓이 굳어버린 인환 대신 남자가 움직였다. 남자를 잡고 있는 것은 인환 자신이건만, 남자에게 떨어지라는 명령을 내리는 모순조차 인환은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허리춤을 부여잡고 있던 인환의 팔을 풀더니 천천히 돌아서서 인환을 마주 보았다. 형편없이 초췌한 아름다운 얼굴이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복잡하게 일렁이는 젖은 눈시울이 사슬처럼 인환의 눈동자를 잡고 있었다. 뭉클한 아픔이 가슴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자의 얼굴은 며칠 전에 보았을 때 이상으로 상해 있었다. 쩍쩍 갈라져 핏자국마저 비치는 메마른 입술은 중병이라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조차도 공포였다. 남자의 고통도, 청년의 증오도,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절대자의 존재가, 아니, 그 반응이 상상하기조차 두려웠다.
“……인환아, 괜찮으니까 천천히 돌아서. 숨 제대로 쉬고…….”
절대자가 다시 한 번 명령했다. 가슴 저린 사슬은 그 단 한마디에 맥없이 끊겼다. 후들거리는 몸이 천천히 돌아서자 새카만 상복 차림의 지배자가 고요하게 시선을 얽어왔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눈길이었다. 다소 창백한 낯빛은 여전히 피로한 기색이었지만, 주변을 압도하는 흉흉한 냉기는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돌로 새긴 듯 무표정했고, 심연처럼 깊은 동공은 어둡고 불투명했다. 지배자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이 상복이 아니라 저승사자의 제복이라 해도 믿어질 터였다.
누구도 좀처럼 소리를 내지 못했다. 사색이 된 홍 기사도, 당혹한 표정의 경호원 둘도, 지배자의 뒤에 서 있던 고영석도, 남자가 나타나 청년과 싸움판이 벌어지고부터 아예 노골적으로 이쪽을 주시하던 뭇 인파들까지, 모두들 숨을 삼킨 채 지배자만을 훔쳐보고 있었다. 1분 전까지만 해도 펄펄 뛰며 인환을 향해 악의에 찬 저주를 서슴지 않던 청년조차 석상처럼 몸을 굳힌 채 지배자만을 응시했다.
“그래, 옳지. 진정하고 이리 와라.”
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배자가 웃었다. 너무나 부드러워 더더욱 한기가 도는 웃음이었다. 정말 자신은 옳게 행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진정해야만 하는 것도 같았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 아찔하게 덮쳐들던 공포감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당연했다. 진정하라 명령했으니 진정해야만 했다. 지배자의 언령(言靈)은 인환에겐 늘 언제나 절대적이었다.
홀린 듯 몇 걸음을 걸어 남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자, 지배자는 그제야 오만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코앞에 다가든 지배자가 후들거리는 인환의 몸을 받쳐 안듯 인환의 양팔을 움켜쥐었다. 숨을 들이켜자마자 익숙한 체취가 폐부 가득 파고들었다. 코롱과 땀내에 섞인 그 특유의 알싸한 체취에 짙은 향냄새가 더해져 있었다. 날카롭게 벼린 시선이 인환의 눈동자를, 이어 왼쪽 뺨 언저리를 주의 깊게 살폈다. 청년에게 따귀를 맞아 조금씩 부풀기 시작한 곳이라는 걸 인환은 나중에 가서야 깨달았다. 양팔을 잡고 있던 손이 어깨로, 가슴으로, 이어 옆구리로 차례로 옮겨 다녔다. 꽤나 압력이 느껴지는 주무름이었다. 그것이 다친 곳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라는 것 역시 인환은 아주 나중에 가서야 깨달았다.
“홍 기사님.”
나지막한 부름이 떨어지자 홍 기사가 단번에 가까이 왔다. 지배자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인환을 홍 기사에게 양도했고, 홍 기사는 한쪽 어깨를 인환의 겨드랑이 틈에 집어넣은 자세로 인환을 완벽하게 부축해냈다.
지배자의 시선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피붙이인 청년의 얼굴이었다. 멍들고 찢어지고, 한눈에도 인환이 입은 상처엔 비할 바가 못 되는 선연한 흔적들이었다. 지배자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흉흉한 냉기가 좀 더 짙어지는 것도 같았는데, 표정 없는 얼굴에서 감정을 읽어내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내 동생에게 손을 댄 게 당신인가?”
물음이 아닌 단정이었다. 지배자의 눈길이 남자를 향하진 않았지만 남자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순식간에 되살아난 살기가 도로 남자의 온몸을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그자가 먼저 장 선생님을 모욕하고 폭행했기 때문이다.”
“내가 없을 때 막아준 것은 고맙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언제든 내 일에 당신이 개입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집안 단속도 내 몫이고, 내 사람을 지키는 것도 내 몫이니까.”
“집안 단속을 잘 못 하는 것 같은데? 형편없는 개망나니더군. 이렇게 늘 뒷구멍으로 상처 주는 걸 알면서 방치한 게 아닌가?”
시릴 듯 냉기가 도는 지배자의 눈길이 그제야 힐끗 남자를 일별했다. ‘개망나니’라는 피붙이에 대한 모욕이라거나 피붙이에 대한 일방적인 폭행에 대해 지배자의 응징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인환은 한순간 긴장했지만 그뿐이었다. 지배자의 시선은 피붙이인 청년에게로 곧 되돌아갔다. 형과 느닷없이 마주친 낭패감에서 겨우 빠져나온 모양인지, 마침 청년이 남자를 상대로 고함과 욕설을 쏟아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 씹! 뭐? 개망나니?! 뭔 구멍?! 저 씨발 호모 새끼가 뭔 개소리를 주절거리고 있어?! 가만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가만있을 줄 알아?! 씹새꺄! 호모들 기둥서방 새꺄! 폭행이야, 이거! 알아?! 폭행죄라고! 너 오늘 진짜 실수한 거 알지?! 진단서 끊어다 당장 콩밥 먹여줄 테니…….”
“닥쳐.”
“형!!!”
“닥쳐.”
“다, 닥치긴 뭘 닥쳐!!! 형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 이 새끼가 갑자기 뛰어들더니 날 두들겨 팼단 말야!!! 나, 난 그냥 얘기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카운터를 먹였다구! 무술 하는 놈이야!!! 무술 하는 주제에 가만있는 일반인을 패는 게 말이 돼?!!! 여, 여긴 뼈가 부러진 것도 같다구!!! 뼈가 부러졌단 말야!!!”
“문휘.”
“형! 내 말 좀……!”
“닥쳐라.”
“……혀, 형…….”
재차 흔들림 없이 던져지는 나지막한 일갈에 사납게 얼굴을 구겼어도 청년은 그에 복종하고 있었다. 아니, 복종이라기보단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도 보였다. 남자를 향한 혐오 섞인 공격성은 물론, 한참은 더 쏟아졌음직한 과격한 욕설들이 그대로 막혀버렸다. 살피는 듯 조심스러운 시선이 지배자의 표정이며 몸짓들을 내내 좇고 있었다.
“……다신 허락하지 않는댔지?”
“……혀, 형……?”
“이 사람을 상처 입히는 짓, 더 이상은 용납 않겠다고 했다. 기억나나?”
“…….”
“기억나지?”
“나, 날 만졌단 말야!!! 그 더러운 손으로 날 만지는데 어떡해?!!! 징그럽고 소름이 끼치는데 어떡하냐구?!!! 형은 호모 새끼가 좋을지 몰라도 난…….”
빠악!!!
우당탕탕……!
“윽! 큭…… 무…….”
퍼억!!!
“훕!!!”
“사…… 사장님……!”
퍽! 퍼억! 빠악! 퍽, 퍽, 퍽……!
지배자의 무차별적인 폭력이 피붙이 청년에게로 떨어지고 있었다. 표정은 고요하고, 몸짓은 일고의 망설임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깨끗했다. 비명과 헐떡임과 거친 언어들이 청년의 입안에서 맴돌다간 새로운 비명으로 틀어막혔다. 애초에 남자로부터 입은 타격이 컸던데다 청년에게 있어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발휘하는 형의 폭력에 청년은 저항할 엄두조차 못 내는 것 같았다. 처음엔 뭐라고 형에게 항의를 하는 것도 같았지만, 그조차 들어줄 생각이 없는지 지배자는 연달아 양쪽 뺨에 따귀를 올려붙이는 것으로 청년의 입을 막았다. 종내는 바닥에 쓰러져 둥글게 몸을 만 채 그저 지배자의 폭력이 멈추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물론 냉혹한 지배자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어딘가 자로 잰 듯 냉정하게 계산된 몸짓이어서 더 잔인하고 처참하게 느껴지는 폭력이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것 같았다. 머릿속은 멍해지고, 가슴은 찢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어 눈을 감으니 세상은 암흑이 되었다.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귀를 틀어막으니 웅웅거리는 이명만 가득한 연옥이 입을 벌렸다. 발을 디딘 땅이 빙빙 도는 건지, 머릿속이 빙빙 도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홍 기사의 부축이 느슨해지자마자 지지력이 사라진 다리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행히 홍 기사의 팔에 힘이 더해졌고, 도로 끌어올려진 상반신 덕분에 바닥에 주저앉는 추태는 면하게 되었다. 대신 홍 기사의 손에 의해 양쪽 팔이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금 끔찍한 소음들이 귀청을 때리기 시작했다. 귀를 막고 있던 손바닥이 떨어져버린 때문이었다.
“……위, 위야!!! 문 일이냐, 이거시?!! 그만혀! 그만두지 못혀?!!!”
“사장님!!! 사장님!!!”
“위야!!!”
“워따, 이 또 무신 일이당가, 시방!!! 위야!!! 이 써글 놈아 자석!!! 휘 잡을 껴?!!! 꼬라지가 드러워도 성인 니가 참어사써야제!!! 위야!!! 위야아!!! 잉, 지발 좀 그만혀랑께!!! 이 무신 직거리여?!!!”
“사, 사장님…….”
“사장님……!”
“그만해! 그만하라니까!”
“눈 떠, 문휘.”
가파른 숨길을 고르는 듯, 다소 헐떡이는 중저음이 나지막하게 명령했다. 순간 귀청을 찔러대던 끔찍한 소음들이 일거에 자취를 감췄다. 느닷없이 진공 상태의 공간에라도 들어온 듯한 멍한 위화감이 전신을 감쌌다. 최면에 걸린 것처럼 번쩍 눈을 떴다. 청년을 향한 명령이건만 인환 자신을 향한 언령(言靈)으로 들린 때문이었다. 다시금 돌아가는 현실의 영상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지배자의 강력한 주술이 아니었다면 인환은 도로 눈을 감았을지도 몰랐다.
청년의 얼굴은 코피까지 터졌는지 온통 피투성이였다. 힘없이 축 늘어진 몸이 지배자의 우악스러운 손에 멱살이 잡힌 채 상반신만 끌어올려지고 있었다. 다행히 기절까진 하지 않았는지, 신음인지 호소인지 웅얼웅얼 알아듣기 힘든 소리가 청년의 입술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지배자의 표정 없는 시선이 그런 피붙이의 고통을 뚫어질 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찌나 격렬한 열기를 뿜어내는지, 마치 뇌리 속에 각인이라도 시키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 양손에 피붙이의 멱살을 움켜쥔 탓에, 지배자의 얼굴은 마치 키스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피붙이의 얼굴과 가까이 밀착돼 있었다.
“눈 떠봐.”
음습하고 냉랭한 언령(言靈)이 다시 한 번 떨어졌다. 찢어지고 부어오른 청년의 눈꺼풀이 슬며시 들려 올라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앙다물고 있지만, 눈시울 안쪽에 꽉 들어찬 물기만은 채 숨겨지지가 않았다.
“형은 빈말은 안 해. 알지?”
“…….”
“이미 내 사람이야. 네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
“……너나 혜윤이를 위해 형 목숨을 줄 수도 있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 현재도 그래. 하지만 네가 저 사람을 해친다면 나는 그런 너라도 가만두지 않을 거다. 너부터 죽이고 나도 죽는 거지. 이해되니?”
“…….”
“너는 형을 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형은 널 버릴 수 없어. 그렇다고 저 사람을 놓을 수도 없지. 저 사람은 이미 형의 일부니까.”
“…….”
“……울지 마라…….”
“…….”
“울지 마, 계집애처럼.”
“……때…… 렸어…… 혀…… 형이 날 때렸어…….”
“…….”
“……미…… 믿을 수가 없어…… 저…… 저딴 호…… 사, 사람 때문에 나를 패다니…… 어…… 어떻게 형이 날…… 나를…….”
“잘못했으니 때린 거야. 아무리 머리가 커져도 넌 내 소중한 동생이니까. 잘못하면 얼마든지 때릴 수 있어.”
“으…… 씹…….”
청년의 멱살을 쥐고 있던 지배자의 두 손이 청년의 등으로 돌아갔다. 강하고, 다정한 포옹이었다. 엄청난 악력이 가해지는 듯, 울먹이던 청년의 입술에서 거듭 약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부서지고 깨진 어딘가가 꽤나 아플 텐데도 청년은 무자비한 제 피붙이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문 채 쉴 새 없이 터지는 울음을 참고 있을 뿐. 참담한 표정이며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청년이 받은 충격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사춘기 때라면 모를까, 다 큰 성인으로서 제 형에게 맞은 적은 거의 없었던 모양이었다. 기왕에 찢어져버린 인환의 가슴은 더 이상의 통증을 느낄 수 없으리만큼 아팠다. 차라리 청년 대신 만신창이로 얻어맞았던들 이토록 가슴이 쓰라리진 않았으리라.
한동안 어미 새처럼 청년을 품고 있던 지배자가 천천히 몸을 떼더니 청년의 얼굴을 살폈다.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주기도 하고, 고영석이 다급히 건넨 손수건으로 피투성이가 된 코와 뺨 언저리를 조심스레 닦아주기도 했다. 소름 끼치는 냉기는 고뇌가 가득 들어찬 음울한 시선과 어우러져 여전히 범접 못 할 묵직한 아우라를 지배자에게 선사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좀처럼 두 형제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그 누구도 좀처럼 그들에게 말을 보태지 못했다.
“성준아, 이리 와서 녀석 좀 살펴봐줘. 위험한 곳은 피하긴 했는데 부러진 데가 있을진 모르겠다.”
마침내 지배자로부터 나지막한 일갈이 떨어졌고, 진공 상태로 멈춰 있던 시간이 새삼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 의원은 물론 김성준까지 나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굳은 얼굴의 김성준이 다가가자 지배자가 청년에게서 손을 거두곤 몇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청년은 뚫어지게 응시하는 피붙이의 눈길을 외면한 채 상처를 살피는 김성준에게 마지못해 몸을 맡기고 있었다.
“……뼈가 부러지진 않은 것 같아. 그래도 모르니 일단 병원으로 데려가는 게 좋겠다. 나보단 외과 쪽이 더 정확하겠지.”
이리저리 청년의 몸을 진찰하던 김성준이 지배자를 일별했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꾸를 준 지배자가 만신창이의 동생을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잠잠히 가라앉은 것 같던 청년의 분노가 다시금 폭발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뻗어온 피붙이의 손길을 가차 없이 쳐내는 청년이 보였다.
“……놔!!! 혼자 갈 수 있어!!!”
내지른 일성은 상처 입은 짐승의 으르렁거림이었다. 분노가 번들거리는 빨갛게 충혈된 눈이 여전히 소름 끼치는 냉기를 흘리고 있는 피붙이 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형이 다시금 손을 뻗었지만 아우는 진저리를 치며 피했다. 심하게 비틀거리면서도 혼자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운 청년은 본관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겨진 형은 한동안 묵묵히 선 채로 아우의 뒤태를 응시했다. 또다시 내쳐질 걸 각오하고 따라가 부축을 시도할지, 아니면 다른 이를 보낼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다행히 형의 고뇌에 찬 망설임은 뒤에 남은 다른 피붙이들의 개입으로 금세 끝이 나게 되었다.
“저거저거 느자구 없능거! 짜내서 우짜가이……! 나가 야그럴 월매나 했간디 문 넘의 오기럴 고로크름 부린디야! 성준아, 니라도 얼른 빙원에 딛고 가부러야. 치료허고 심 닿는 대로 살살 달게 가꼬 여그로 오락하그라이.”
“……그래. 지금은 내가 따라가는 게 더 나을 거야. 넌 윤열이 형 데리고 어서 빈소로 돌아가라.”
“아녀. 장 선생님 상호도 허연디 급하니 허지 말고 찬찬히 해야. 나가 인자 들어가볼 텡께 빈소 걱정은 허덜 말고. 상주 한나만 욕보먼 돼얏지 머땀새 모다 나와봐야 쓸간디.”
“저희들까지 심란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형. 이 사람 보내고 저도 곧 들어갈게요.”
“응, 갠찮혀. 찬찬히 허랑께…….”
“성준아, 부탁한다.”
“그래. 심각하진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김성준은 앞서간 청년을 쫓아 병원 본관 쪽으로 사라지고, 이 의원과 일단의 보좌관들은 서둘러 장례식장 안으로 사라졌다. 남아 있던 서너 명의 이 의원 경호원들이 싸움 구경을 위해 모여들었던 뭇 인파들까지 쫓아주어, 단풍나무 주변 잔디밭은 순식간에 몇 사람만을 남긴 채 텅 비게 되었다.
“……집에 가 있어. 지금은 그게 좋겠다.”
피붙이가 사라진 본관 쪽을 하염없이 건너다보던 지배자가 문득 중얼거렸다. 기운이 모조리 소진된 듯 피로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던 인환은 돌아본 지배자와 겨우 시선을 마주할 수가 있었다. 눈앞의 지친 인간에게선 그토록 살벌하던 냉기도, 흉흉한 위압감도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낯빛은 창백하고, 눈시울은 붉게 충혈되었으며, 입술은 메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때리는 것 역시 맞는 것 이상으로 에너지를 소모시키는지, 콧잔등과 이마엔 구슬 같은 땀방울이 가득 맺혀 있었다. 깊고 깊은 시선은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새 지배자의 권위를 모두 잃어버린 상처 입은 ‘그’만이 오도카니 남아 있었던 것이다.
“휘가 계속 버릇없이 굴진 않겠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네겐 스트레스가 될 거야. 아직은 무리인 것 같다. 이번엔 그냥 집에 가 있어. 형도 이해할 거야. 내일 발인 마치고 상황 봐서 되도록 일찍 집에 들어갈게.”
인환의 눈에서 애원을 읽었나 보았다. 어린애 같은 미련과 집착 또한 읽었을지도 몰랐다. ‘나도 가족이니까, 네 마누라라고 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장례식에 참석할 거야’라는. 느릿하게 중얼거리듯 전해지는 명령은 어린애를 타이르는 것마냥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그가 옳았다. 본의든 아니든 인환은 그로 하여금 아우에게 상처를 입히게끔 만들었다. 아니, 피를 흘리고 다친 아우보다도 더 그는 속으로 피를 흘리고 있을 터였다. 자신도 가족이라며 뻔뻔스레 머리를 들이댈 계제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무리한 일이었다. 원한다고 진짜 가족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지 않는가. 그의 진짜 피붙이인 청년이 새삼 절절하게 인식시켜준 사실이다. 자신은 그저 그를 유혹한 더러운 호모 새끼일 뿐이라고. 그래서 그는 물론 그의 진짜 가족들을 더럽히고 상처를 입히게 될 거라고. 청년의 판단은 옳았다. 결국 또 그의 가족을 해치게 되지 않았나. 또 그를 상처 입히게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제 몫이 아닌 걸 탐하려고 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거다. 저들로부터 그를 빼앗지 않는다는 다짐만으론 안 되었던 거다. 성노예든 연인 역을 연기하는 창부든, 그 어떤 저급한 자격으로든 그저 슬쩍 저들 틈에 끼어들 수는 없을까, 욕심을 품는 것조차 죄악이었다.
“……그런 게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란 말이다, 장인환.”
“…….”
“후우…… 아무튼 지금은 널 위로할 경황이 없어. 일단 집에 가라. 장례 끝나곤 바로 네게 날아갈 테니까…….”
“…….”
귀신인 그답게 귀신처럼 인환의 속내를 읽어 내린 그가 피로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든다. 촉촉하게 젖은 깊은 눈시울이 호소하듯 인환의 눈동자를 애무했다. 안타깝다 못해 애절한 원망(願望)이었다. 뻔뻔스러운 집착은 물론 죄책감조차 원치 않는 그에게 속 시원한 답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자신은 그나마 아직 인간다운 양심에 떨 줄 아는 죄인이었으니, 그저 떠밀리듯 절대자의 시선을 피할밖에.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얼룩 한 점 없이 새까만 상복이 시야 가득 밟혀들었다. 아우의 핏방울을 묻힌 채 불그스름하게 부어 있는 그의 오른손이며 웨딩 링이 끼워진 왼쪽 손가락도 눈에 들어왔다. 초조한 듯 몇 번이나 쥐었다 펴지곤 하는 양쪽 손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오른손은 폭력의 도구로 쓰인 몇 분 전의 지옥을 생생히 증거했고, 티 없이 깨끗한 왼손은 눈부신 아침 햇살 속에서 「The Entertainer」를 연주하던 어제 아침의 천국을 증거해주었다. 기가 막힌 아이러니에 히스테릭한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니, 웃음을 가장한 울음이 터지려 잔뜩 기회를 엿보고 있을 터였다.
입술을 깨물며 가까스로 감정을 삭이는 사이, 정수리 위에서 다시 한 번 그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떨어진 명령엔 지배자 특유의 냉혹하고 완강한 의지가 고스란히 되살아나 있었다.
“……홍 기사님, 인환이 집까지 부탁합니다. 그리고 승수 씨, 장소는 집으로 바뀌었지만 24시간 밀착 경호는 유효합니다. 내일 밤 제가 돌아갈 때까지 각별히 더 신경을 써주십시오.”
“예, 사장님.”
“예, 사장님.”
인환의 왼쪽 팔꿈치를 단단히 움켜쥔 채 부축하고 있던 홍 기사와, 나머지 오른쪽 팔마저 잡아챈 경호원 하나가 동시에 대답을 했다. 그는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강제적이진 않았으나, 장정 둘에게 양쪽 팔을 잡힌 인환은 마치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로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풀려버린 다리의 힘이 채 돌아오지 못한 까닭이었다.
“……선생님…….”
아이러니하게도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준 것은 누군가의 억눌린 목소리였다. 알코올과 담배 냄새가 어우러진 누군가의 흐릿한 체취였다. 그 누군가의 앞에서 저절로 걸음을 멈춘 채 인환은 죄인처럼 수그러들었던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잔뜩 구겨진 슈트와 셔츠가 보였다. 늘 한숨이 나올 정도로 세련되고 정돈된 옷차림을 하고 있던 남자답지 않은 모양새였다. 초췌할 대로 초췌해진 아름다운 얼굴도 보였다. 며칠 동안 수염조차 깎지 않은 건지 남자의 인중과 뺨, 그리고 턱 언저리는 푸릇푸릇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고뇌에 찬 젖은 눈시울도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한쪽 볼우물이 깊게 패며 매혹적인 미소가 만들어졌다. 주변을 온통 환하게 밝히는 빛의 아우라였다. 남자의 내적인 고통 따윈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따스하고 다감하기만 한 그것이 인환을 향해 기운을 북돋워주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돌아온 것이 당연했다. 아아, 뭐라 해도 남자는 자신의 수호천사임엔 틀림이 없었다.
“……세상에 욕망을 품기 시작한 선생님은 더 마음에 들어요.”
약간 허스키해진 남자의 목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키며 다가왔다.
“선물 기쁘게 잘 받았습니다.”
덧붙은 말을 통해 그것이 며칠 전 보낸 그림에 관한 감상이라는 것을 겨우 깨달았다. 또한 그 이상의 격려이자 선언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인환 자신이 어떻게 변해간다 한들 남자는 늘 같은 자리에 서서 굳건히 자신을 지지하리라는 것을. 자신이 남자를 향해 어떤 배반을 던진다 해도, 그 어떤 추한 꼴을 드러낸다 해도 남자는 무한의 신뢰를 견지하리라는 것을.
심장을 찌르는 뭉클한 아픔과 감동이 순식간에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고개를 다시 아래로 떨어뜨렸다. 더 이상 남자와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차마 읽히고 싶지 않았다. 좋아서, 기뻐 광란하는 뻔뻔스러운 죄인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내 사람을 놓으라고 했다!!!”
흠칫.
천둥처럼 울리는 일갈이 뒤로부터 전해졌다. 소스라친 나머지 고개를 들기도 전에 인환의 양쪽 팔을 움켜쥔 장정 둘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끌려가는 형국이었지만, 차마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남자를 돌아볼 수도, 절대자를 살필 수도 없었다. 기뻐한들, 혹은 아파한들 그 어느 쪽에도 자신은 죄인이었다. 고개를 들어 마주 보기조차 힘든 죄인이었다. 용서될 수 없었다. 설령 죽어 넘어진다 해도 용서될 수는 없으리라.
절망을 씹듯 입술을 꼭 깨문 채 땅바닥만을 응시하며 걸었다. 부지런히 죄인의 몸을 호송해 가주는 장정들이 고마웠다. 부질없는 욕망을 자꾸만 일깨우는 소중한 존재들로부터 자신을 한사코 멀어지게끔 해주었으므로. 당연하지. 혼자 힘으로는 자신은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미적미적 망설이고, 소중한 존재들을 탐내며 손가락이나 빨려고 들었을 터였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잠시나마 품었던 욕망이 그토록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장 선생님. 곧 차를 빼 오겠습니다.”
조심스러운 홍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축하고 있던 인환의 한쪽 팔은 어느새 다른 경호원에게 넘어가 있었다. 망연히 고개를 끄덕이자 “금방 돌아오겠습니다”라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보태졌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지하 주차장 쪽으로 내려가는 홍 기사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고작 본관 앞 주차장이라니 그만 아득해졌다. 더 멀리 떨어져야만 했다. 욕망이 새로 자라기 전에, 주제도 모르고 또 뻔뻔스러워지기 전에, 한시라도 더 빨리, 한 걸음이라도 더 멀리 떨어져야만 했다. 햇빛이 너무나 밝았다. 어딘가 시커먼 그늘이라도 보인다면 추하디추한 존재를 숨길 수도 있으련만, 사방이 온통 청명한 가을빛뿐이었다.
전조였을까? 갑자기 온몸의 잔털이 비쭉 곤두서며 오소소 소름이 달려 나갔다. 무심히 움직이는 시야 틈으로 야릇한 ‘어둠’이 살풋 숨어들었다.
상대 쪽에서 스스로를 숨길 의도를 전혀 보이지도 않았지만, 설령 그랬다 해도 인환이 저 ‘어둠’을 못 보고 지나칠 까닭은 없었다. 아낌없이 퍼부어지는 빛의 홍수 속이라 그것은 더더욱 인환의 주의를 끌었다. 확실히 바라 마지않던 ‘시커먼 그늘’임엔 틀림이 없었으니까. 다만 그 ‘그늘’조차 인환의 죄악을 더더욱 부각시키는 ‘어둠’이었다는 점에서 진실로 원했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둠’이 서린 곳은 일도병원 본관 현관 앞이었다. 일거에 인환의 기력을 앗아갈 것만 같은 시커먼 ‘어둠’은 어떤 존재로부터 뿜어 나오고 있었다.
여자였다.
여자의 육감적이면서도 늘씬한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검정색 새틴 원피스에 검정색 스타킹, 들고 있는 샤넬의 페이턴트 백 역시 검정색이었다. 뱅 스타일로 틀어 올린 머리는 가느다란 목을 강조하며 우아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상복조차도 무슨 시상식장의 이브닝드레스처럼 아름답구나 하고 인환은 문득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환이 여자를 발견했을 무렵 여자는 인환 쪽을 보진 않고 있었다. 그럴 것이, 여자는 이쪽으로 등을 보이고 선 청년의 두 손을 잡은 채 청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년 옆에 선 장신의 사내 또한 여자를 바라보며 뭐라 말을 건넸고, 여자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사내의 말에 동의를 표하고 있었다. 마치 인환의 존재는 전혀 자각하지 못한 듯 눈앞에 마주한 두 명의 남성에게만 온 신경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남자가 전 시동생이고 또 전남편의 친구이니 여자가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비록 이혼은 했어도 여자는 전남편과 밀접하게 관련된 저 두 남자들에게 분명한 호감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러나 대화 상대인 두 남자가 본관 안으로 막 사라지고 난 직후, 곧바로 인환의 시선을 잡아채는 것으로써 여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환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인환이 본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인환을 알아보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여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시체처럼 굳은 얼굴이 인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각처럼 단아한 얼굴엔 그 흔했던 혐오감도, 증오도, 혹은 비웃음조차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저 새까맣다는 느낌뿐이었다. 뿌리 깊은 죄의식이 가져다주는 착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자의 넋에 깃든 저것이 무엇인지 자신은 알고 있었다. 아니, 기억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먼먼 과거의 어느 한때, 기억의 어두운 심연 속에 꼭꼭 숨겨놓았던 무시무시한 지옥이었다. 절망에 빠진 나머지 뛰쳐나온 내면의 악마가 송두리째 자신을 할퀴고 지나갔던 그것과, 여자가 품고 있는 ‘어둠’은 지독히도 닮은꼴을 하고 있었다.
서리를 맞은 것처럼 꽁꽁 얼어붙은 채 한참 동안 여자의 시선에 붙잡혀 있었던 것 같았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던 건지도 몰랐다. 인환의 양편에 서서 부축하고 있던 경호원 둘이 문득 이상을 감지했을 때는 여자 또한 장례식장 쪽으로 사라지고 난 후였다.
지옥을 품고 온 여자였다. 늘 죽음이 감도는 장소와 그토록 잘 어울리는 조합도 없을 터이지만, 여자는 생명의 편에 서서 그와 그의 가족들을 위로할 모양이었다. 인환이 쫓겨난 장소에서 당당히 인환을 대신할 터였다. 까마득한 아픔이 인환의 온몸을 할퀴며 지나갔다.
“……장 선생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왼쪽 팔을 잡고 있던 청년이 문득 걱정스레 부르자, 오른쪽 팔을 잡고 있던 청년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불편한 건가, 자신은? 문득 청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멍하니 웃었던 것 같다. 청년 둘의 얼굴이 좀 더 근심스러운 것으로 변했다.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아니면 그만큼 자신의 얼굴이 형편없는 꼴을 하고 있단 뜻이겠지. 커다란 덩치에, 온갖 무술을 섭렵한 유단자에, 그에 못지않을 전문적 경호 감각으로 요즘 인환을 물 샐 틈 없이 보호하고 있는 중인 청년들이었다. 낯선 타인들에 의해 하루 종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불편함에 괴로워하던 처음 며칠이 아득하기만 했다. 어느새 인환은 이들의 존재를 가족처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처가 걱정스럽다며 그가 이들을 자신에게 붙인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의 과민 반응이라고만 여기고 귀찮아했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는 과민한 것도, 신경증인 것도 아니었다. 여자의 상태는 애초 인환이 상상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어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가 염려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일 것이다. 인환은 안다. 지금의 여자와 한가지로 나락에 떨어졌던 시간이 있었으므로. 할 수만 있다면 망각의 심연 속에 영원히 봉인하고픈 끔찍한 기억들. 지옥의 순간들. 아니, 어쩌면 심각한 일부의 기억은 이미 봉인돼 있을지도 모르지. 아마도 틀림없이 그러할 것이다. 봉인하지 않곤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으므로. 지금도 그렇지 아니한가? 여자와 직면하고 나서야 인환은 여자의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당시의 자신을 온전히 기억해낸 것이다.
“선생님……?”
조심스러운 부름에 멍하니 고개를 돌리자 홍 기사의 얼굴이 보였다. 자상하고 과묵한 장년의 남자는 1미터쯤 앞에 세워진 볼보 S60의 뒷좌석 문을 연 채 인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호원 둘이 끌다시피 인환을 차 안으로 부축했다.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무기력하게 차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청년 하나는 조수석에, 다른 하나는 인환의 옆 좌석에 올라타자 차가 출발했다. 차가 별관을 돌아 병원 입구 쪽으로 직진할 무렵, 인환의 시선이 자연스레 장례식장 입구인 별관 현관을 향했다. 상복 차림의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지만 그 속에 여자가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알아봤다 해도 너무 순간이라 그대로 스쳐갔을 것이다. 위험하지 않을까 하고 당연한 근심이 뇌리를 스쳤지만 사람들이 저리 많으니 여자도 섣불리 무슨 짓을 벌이진 못하리란 판단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여자의 공격 목표는 장례식장 안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는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궁극적으로 전남편인 그를 목표로 삼았을지는 모르나, 여자는 그를 원할지언정 해칠 의도까지는 아직 없는 것 같았다. 여자의 어두운 악의는 온통 다른 이를 향해 있었으므로. 그랬다. 여자는 쩍 벌어진 악어 입속처럼 호시탐탐 인환을 원하고 있었다. 마주친 새까만 시선 속에서, 돌처럼 무감각한 얼굴 표정에서 인환은 확실하게 여자의 욕망을 읽고 있었다. 인환 자신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는 것. 한편 안심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한편 너무나 과거의 자신을 연상시키는 부분이기도 해서 까마득해졌다. 섭리, 아니, 운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운명이 원귀가 돼서 입가에 칼을 문 채 다가들고 있었다. 서걱서걱, 푸릇한 치맛자락이 묘지를 쓸고 오는 소리가 선연했다. 서늘한 냉기가 칼처럼 날카롭게 몸을 파고들었다. 설핏 진저리를 치며 태아처럼 둥글게 몸을 웅크렸다.
“……장 선생님?”
옆 좌석의 경호원이 확인하듯 말을 건넸다. 다리를 접어 올려 웅크린 자세가 그네의 근심을 산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그네가 지금 인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광활하고 막막한 원귀들의 세상에서 인환은 단 혼자였다.
두렵지는 않은 것 같았다. 우주의 섭리는 너무나 거대하고 지고해서 인간다운 두려움을 느낄 기회조차 주지 않는 법이었다. 미물인 인간은 그저 망연히 입을 벌린 채 닥쳐오는 해일을 눈이 휘둥그레져서 응시할 뿐.
그가…… 자신의 절대자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리움이 뼛속 깊이 사무쳤다.
“……님……? 선생님…… 선생님, 그만 일어나보세요…….”
설핏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누군가의 손길이 어깨를 흔들었다. 움찔, 몸이 떨리며 망망한 심연 속을 떠돌던 의식이 위로 떠올랐다. 눈이 부셨다.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로부터 흘러나오는 불빛이었다.
“……아…… 주머니……?”
흐릿한 시야 끝으로 파출부 아주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억지로 깨워 죄송해요, 선생님. 사장님께서 저녁 식사 꼭 드시게 하라고 말씀하셔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머리가 멍했다. 창 밖이 캄캄한 걸 보니 밤인 모양이었다.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도, 억지로 깨우라 명령한 그도 이해가 갔다. 아마도 대여섯 시간은 족히 잠이 들었으리라.
“……여기 전화부터 받으시구요. 사장님이세요.”
상반신만을 겨우 일으킨 채로 휴대전화를 넘겨받았다.
“……응…….”
잔뜩 허스키하게 잠긴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오랜 낮잠의 여파로 머릿속은 여전히 멍하고 현실감 또한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아주 잠깐, 왜 그가 퇴근하기 전에 전화를 한 걸까 의문을 세웠을 정도였다.
[내내 잤다고?]
나지막한 중저음이 부드럽게 귓가를 안아왔다. 근심과 애정이 선연히 드러나 있는 그것에 비로소 의식이 완전히 깨어났다. 잠들기 직전까지 사무치는 그리움에 몸을 떨었던 기억도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순식간에 목이 메어 금방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와 한 공간에 있는 이는 전처라는 무시무시한 여자일 테지만, 그럼에도 그는 인환을 잊지 않고 있었다. 여자가 등장하기 전 그대로, 여전히 다정하고 상냥한 배려를 자신에게 쏟아주고 있었다.
[아직 저녁도 안 먹었다면서?]
“…….”
[……후우, 인환아. 대답 좀 해봐.]
“……으응…….”
[…….]
“……좀 피곤했나 봐. 이제 일어났으니까 곧 먹을게.”
[그래. 이따가 아주머니한테 다시 확인할 테니까 절대 거르지 마.]
“……응.”
[……힘들다고 자꾸 잠으로 도피하지도 말고.]
“…….”
[알지? 자꾸 이상한 생각들에 빠지니까 힘이 드는 거야. 아까 일은 정말 네 잘못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
[대답 안 해?]
“…….”
[인환아.]
“……어…….”
[내일 발인은 10시지만 보성 장지까지 갔다가 서울 올라가려면 좀 늦을 거야. 그래도 내일 중으론 반드시 들어갈 테니까…… 내가 갈 때까지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평소대로 움직여. 밥 꼬박꼬박 챙겨 먹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시간마다 전화해서 확인할 거다.]
“……그, 그러지 마…… 그쪽도 정신없을 텐데…… 네 말대로 다 할 거니깐 걱정하지 말구…….”
[약속할 텐가?]
“……응.”
[그래. 착하다, 내 마누라…….]
“…….”
[……안고 싶어. 품에 꼭 안고…… 실컷 네 냄새나 맡으면서 잤으면 좋겠군.]
“……피…… 피로하지? 많이…….”
[아아, 조금…….]
“……문상객들 뜸할 때 잠깐씩이라도 눈을 붙이지.”
[견딜 만해. 잠이 오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너만 괜찮으면 나는 언제든 강철 인간이 되니까.]
“…….”
[쿡쿡…… 얼굴 또 빨개졌지, 지금?]
“…….”
[아아, 진짜로 안고 싶다! 키스도 하고 싶고…… 젠장.]
“……저, 저기…… 동생은 괜찮아? 마, 많이 다친 건…….”
[괜찮아. 부러진 데도 없고 그만하면 깨끗한 편이야.]
“……다행…….”
[괜찮은 데로만 골라 때렸으니 당연하지. 눈에 보이던 것만큼 심한 게 아니니까 진짜 신경 쓸 거 없어. 알지?]
“…….”
[……단순한 놈이라 고집이 꽤 세. 오래 걸리겠지만 언젠간 녀석도 이해해줄 거다. 기다려줘, 인환아.]
“…….”
[……내려가서 밥 먹어. 이따 밤이든, 내일 오전 중이든 틈 내서 또 전화할게.]
“…….”
[(……음? 아아, 알겠네. 곧 가지.) ……빈소로 돌아가봐야겠다. 또 장관급 귀빈이 행차한 모양이야.]
전화기 너머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얼핏 들렸고, 대꾸하는 그의 목소리도 멀어진 감으로 들려왔다. 잠시 후 다시 분명해진 중저음이 달콤한 이별의 변명을 했다. 멍하니 듣고 있다가 무심코 끊지 말라는 애원을 던질 뻔했다. 목소리를 더 들려달라고. 집에 돌아와 얼굴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목소리라도 들려달라고. 그래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기가 막혔다. 문득 깨닫고는 소스라쳐서 입술을 틀어막았는데 그사이 진짜로 작별 인사가 떨어졌다.
[……끊는다.]
다정한 한 마디가 귓전을 울리는가 싶더니 단 몇 초의 여유도 없이 신호 대기음이 들려왔다. 기다린다고, 그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간절하게 약속을 주워섬기기도 전에 끊어져버렸다.
“……선생님, 식사 차려놨으니 어서 나오셔서…….”
휴대전화를 든 채 한동안 멍하니 있었던가 보았다. 아주머니의 채근에 홀연 현실로 돌아온 인환은 반쯤 열린 문 앞에 서 있던 아주머니를 따라 기계적으로 침실을 나갔다. 주방으로 가며 벽시계를 살피니 벌써 10시가 넘어 있었다. 홍 기사는 이미 퇴근을 했고,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던 경호원 둘만이 인환을 향해 목례를 했다. 아주머니 역시 퇴근 준비를 하지 않는 걸 보니 경호원들처럼 어제에 이어 오늘도 퇴근하지 말도록 부탁을 받은 모양이었다.
식탁에 차려진 밥 한 공기를 남기지 않고 부지런히 먹어치웠다. 식후엔 경호원들 옆에 끼어 앉아 차를 마시며 TV를 봤다. 주말 10시 타임 드라마를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송해주고 있었다. 설거지를 마친 아주머니까지 드라마 시청 대열에 합류하니 거실은 졸지에 영화관 분위기가 되었다. 파리에 간 여주인공이 재벌 2세 사장님과 만나 연애하는 내용이었다. 앞 내용을 잘 몰라, 기왕에 열혈 시청자였던 아주머니에게서 줄거리 요약까지 들어가며 꽤나 재미나게 시청을 했다. 사장님 역의 박신양인가 하는 남자 주인공보다 우리 사장님이 백배는 더 멋있고 잘생겼다는 아주머니의 강력한 촌평에 경호원 둘은 물론 인환까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하기도 했다. 여주인공 김정은이 아깝다고 덧붙이는 청년들의 촌평은 다분히 사감이 개입된 의견으로 보였지만 내색하진 않았다(여주인공이 등장할 때마다 ‘귀엽다’를 연발하는 천상 마초인 젊은 청년들이니 말해 무엇 하랴). 드라마가 끝나고는 좀 더 TV를 시청하려는 세 사람을 남겨두고 2층 아틀리에로 올라왔다. 요즘 작업 중인 ‘삼색 코너’ 시리즈 2의 진행을 위해서였다. 자연광 속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 훨씬 좋긴 하지만, 다른 어떤 것을 떠나 작업 의욕이 생길 때가 실은 가장 작업하기 좋은 환경인 셈이었다. 그리고 밤 11시가 넘은 지금 현재, 인환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긴긴 낮잠까지 자버린데다, 절대자가 부여해준 무형의 기운이 인환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주고 있었다. 더 이상 잠 속으로 도피하지 않아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견뎌야만 했다. 절대자가 명령을 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자꾸 잠으로 도피하지도 말라고. 평소대로 밥 꼬박꼬박 챙겨 먹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라고. 그러면 내일 밤 무사히 자신의 곁으로 돌아와준다고. 그러니까 이건 명령 이행인 셈이었다. 절대 인환 스스로가 원해서, 뻔뻔스레 욕망을 품어서 하는 짓이 아니었다. 그가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명령을 이행해야만 그가 곁으로 돌아와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자동인형처럼 움직일 뿐이었다. 두려움에 사무쳐 가부러지지도 않을 터였다. 이상한 생각들은 그가 돌아와준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지옥의 기억을 연상시키는 그 누군가가 두려워 몸서리를 치는 것도 그가 돌아온 다음에 시작해도 괜찮을 것이다.
아틀리에 문을 노크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의식을 일깨웠을 때는 M150호 크기의 캔버스가 3분의 2쯤 채워진 상태였다. 어느새 아침이 되었는지, 아틀리에 안으로 햇빛이 가득 들어와 있었다. 시계를 보니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여덟 시간이 넘는 강행군이었건만 마비가 있는 다리가 약간 뻐근한 것을 제외하면 몸 상태는 괜찮은 편이었다. 졸음은커녕 약간의 피로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 오후의 기나긴 낮잠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절대자가 부여해준 명령의 힘이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밤을 새운 게 아니냐며 놀라는 아주머니에게 중간에 몇 시간 잤다는 거짓말로 안심시켜준 뒤 샤워를 했다. 홍 기사가 출근해 있었고, 경호원 청년 둘도 일어나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아주머니가 차려준 밥을 한 숟갈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운 후, 이슬이 가득 내려앉은 정원으로 나와 맨손체조를 했다. 동네를 한 바퀴 도는 산책을 하고 싶었지만 경호원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당분간은 더 주의를 기울이라는 사장님의 명령이 있었다고 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해하는 거구의 청년들에게 괜찮다고 웃어주었다. 아쉽기는 했지만 실제로 별 상관이 없었다. 그의 명령이니 지키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여자’의 어둠을 샅샅이 읽어버린 마당에 객기를 부릴 만큼 인환은 강심장이 아니었다. 결국 맨손체조를 30분쯤 더 하는 것으로 운동을 마감하고 다시 2층 아틀리에로 왔다. 막 작업에 들어가려는데 휴대전화가 울었다. 그였다. 이틀 밤을 내리 새운 것 같은 목소리엔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조는 밝은 편이었고 인환을 툭하면 놀리는 짓궂음도 여전했다. 걱정으로 가슴이 죄어든 인환을 배려하려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여실해서 또 목이 메었다. ‘아침밥은 먹었냐.’ ‘잠은 잘 잤냐.’ ‘이제 작업 들어갈 거냐.’ 어젯밤과 별 차이 없는 안부를 확인하곤 전화를 끊었다.
다시금 그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오후 3시 무렵이었다. 비행기로 광주광역시까지 간 후 나머지 거리를 버스로 이동 중이라 했다. 장지인 보성 선산엔 4시쯤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침에 물었던 소소한 안부 대신 ‘꽤 피로하니 기력 회복 차원에서 마누라랑 폰 섹스라도 할까?’ 하며 또 짓궂은 희롱을 던졌다. 화를 내야 할지, 웃어넘겨야 할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이내 침통한 목소리가 본심을 토해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잘해드릴걸. 이렇게 가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찾아뵐걸. 형이 너무나 애통해해. 문상객들 없으니까 내내 통곡을 해서 견디기가 힘들어. 우리가 어떡해도 위로가 잘 안 되나 봐……. 그렇게 연달아 고해처럼 토해지는 나지막한 바리톤은 너무나 미숙하고 연약하게만 들렸다. 인환 또한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목메는 연민을 억누른 채 가만히 그의 숨소리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의 숨결만을 음미하다 다시금 그의 폰 섹스 타령이 시작되었고, 인환은 어린애 같은 투정을 견디다 못해 전화상으로 스트립쇼를 벌여야만 했다. 뻣뻣한 목소리로 입고 있던 옷을 차례차례 벗고 있다는 가당찮은 구라를 치는 것뿐이었는데, 그는 그조차도 진심으로 기뻐했다. 전화를 끊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망언은 ‘지금 막 네 안으로 들어갔어. 따뜻하고 축축해서 정말 기분 좋아’였다! 피로와 슬픔의 기색이 역력한 가라앉은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믿어주었을지도 몰랐다.
그 마지막 통화 후, 시간은 연옥처럼 길게 늘어져야 했다. 저녁 식사 직전까지 미친 듯 작업에 몰두하고, 저녁을 먹고,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어쩐지 더는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에 초조해져서 작품에의 몰입이 여간 힘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결국 채 두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인환은 붓을 놓아야 했다. 경호원들과 아주머니 틈에 섞여 다시금 TV 드라마에 빠져보려고도 했지만, 어젯밤만큼은 재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오른쪽 주먹에 꼭 쥔 휴대전화만 연신 내려다보며 절박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거실 괘종시계가 밤 10시를 치자 이젠 휴대전화 대신 대문 쪽으로 온 신경이 곤두섰다. 시간이 늦었으니 전화 대신 바로 집에 들어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정원에 나가 기다리면 경호원들에게까지 폐를 끼치는 것이 되기에, 그저 2층 아틀리에 창문에 납작 붙어 서서 골목 어귀만 열심히 넘겨다보았다. 그러나 그 초조한 기대조차 시곗바늘이 12시를 넘겼을 때에는 절망적인 불안으로 바뀌고 있었다. ……오늘 안엔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하고서 왜 이렇게 늦는 거야…… 늦으면 전화라도 하든가…… 뇌리 속에서 무수히 많은 원망들이 곱씹히기도 했다. 두 시간 남짓, 그렇게 연옥의 시간을 견디다 못해 인환은 결국 그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차라리 안 거느니만 못한 것이 돼버렸지만. 전원이 꺼져 있었던 것이다!
3일 이상 쓰고 있었으니 배터리가 다된 것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고, 방전된 배터리에 생각이 미칠 만큼 그에게 정신적인 여유가 없다는 것 역시 뻔히 짐작하면서도, 인환의 넋은 그야말로 공포로 자지러지고 있었다. 더 이상 생각을 한다거나 추측을 하는 것조차 무서워졌다. 새벽 2시가 넘었다. 그런데도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의 전화기는 꺼져 있다. 이 의원이라거나 김성준, 혹은 고영석의 휴대전화에라도 걸어보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인환이 알고 있는 번호는 그중 단 한 개도 없었다. 경호원들이라거나 아주머니가 혹 알고 있을진 모르겠으나 그들 모두 지금쯤 완전히 꿈나라에 들었을 터였다. 자신의 불안한 신경증을 그들의 단잠에까지 전염시킬 배짱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저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따두는 건데. 물론 때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와줘, 와줘, 와줘, 어서 빨리 와줘, 제발 와, 내게 돌아와줘……. 태아처럼 몸을 말고 오로지 같은 기도만 몇 천 번을 되풀이했는지 몰랐다. 무사히 돌아와만 준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노라고, 저 무시무시한 지옥의 악어 입속에 기꺼이 머리를 디밀어줄 수도 있다고, 여자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속죄하고 또 속죄할 거라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온통 눈물범벅이 돼서 기도와 통곡을 거듭하고 있는데 멀리서 아련하게 차 소리가 들려왔다. 몹시도 중후하고 부드러운 메르세데스 벤츠의 엔진음 같았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을 굳히고 좀 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당장은 숨조차 멈춰버렸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던 넋이 쩔겅 하고 열리는 대문 소리와 함께 환희의 도가니에 빠졌다.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오는 소리, 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집주인을 맞아들이는 경호원들과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천상의 아리아가 이보다 더 황홀하게 들릴 수가 있을까 의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환희의 소음은 나지막하게 뭐라 대꾸를 하는 그리운 중저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태아처럼 말려 있던 몸뚱이가 구겨진 종이가 펴지듯 부스스 제자리로 돌아왔다. 일어서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쪼그리고 있었기 때문인지 금방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리가 저린 것도 같았다. 2층으로 올라오는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저린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사이에 아틀리에 문이 활짝 열렸다. 어린애처럼 철퍼덕 주저앉은 자세로 시선만 다급하게 움직였다.
“아직도 자지 않고 있었나? 4시가 다 되…….”
아름다운 얼굴에 서려 있던 흐릿한 미소가 금세 굳어지는 게 보였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피로에 지친 얼굴이었다. 눈시울은 깊었고 하루 이상 수염을 깎지 않았는지 뺨과 턱 언저리엔 푸릇푸릇한 자국이 선명했다. 상복은 잔뜩 구겨진 채였으며 검정색 타이도 반쯤 풀어진 채였다. 그나마 안에 받쳐 입은 흰 셔츠는 매일 갈아입었는지 제법 깨끗한 편이었다.
“……왜 또 우는 거냐?”
반쯤 노기가 서린 근심 어린 목소리였다. 그제야 그의 미소가 굳어진 이유를 이해했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눈이 아릴 정도인데 보는 쪽에서야 오죽할까. 흰자위는 빨갛고 눈꺼풀은 개구리처럼 퉁퉁 부어 있겠지. 얼굴 또한 눈물콧물 범벅이었다.
“……느…… 늦었잖아…….”
자신의 신경증이 문제란 것을 알면서도 뻔뻔한 투정이 절로 쏟아졌다. 그가 방에 들어서기 전에 세수라도 해둘 것을 하고 뒤늦은 후회가 달렸지만, 이토록 자신을 불안하게 만든 그를 배려해줄까 보냐 하는 억하심정도 함께 들었다.
“……어…… 어젯밤 안으론 들어올 거라고 했잖아…….”
재차 퉁명스레 일갈하자 굳어들었던 그의 얼굴이 금세 풀어진다. 그저 그를 기다리다 울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안심이 되는지 또다시 슬슬 퍼지는 매혹의 웃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가 힐끗 벽시계를 확인한다. 시곗바늘은 3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불안과 죄책감의 지옥에 갇힌 채 한 시간 17분을 보냈던 것이다.
“미안.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나서 형이 탈진해 쓰러지는 바람에 병원 응급실부터 갔었어. 검사 결과 나올 때까지 움직일 수가 없어서…… 형은 생각 이상으로 약골인 편이지. 고문 후유증도 아직까지 남아 있고…… 정말 걱정됐거든. 다행히 별 이상은 없다고 해서 성준이 남겨두고 오는 길이야. 많이 기다렸나?”
천천히 다가온 그가 인환이 주저앉아 있던 곳에 무릎을 굽히고 마주 앉았다. 동시에 뻗어온 양손이 눈물투성이 얼굴을 어루만지듯 닦아주고 있었다. 축축해진 손바닥을 상복 재킷 자락에 닦고는 다시금 뺨으로 돌아와 애무하듯 문질렀다. 짙은 향냄새와 더불어 코롱과 땀 냄새가 섞인 그리운 체취에 멈췄던 눈물이 새삼 더 쏟아져 내렸다. 울음을 참느라 잔뜩 구겨진 인환의 얼굴을 잠시 안타까운 듯 응시하던 그가 이내 팔을 둘러 품 안에 안아 들었다. 얼굴은 물론 반팔 면 티셔츠 차림의 상반신이 그의 늠름한 가슴팍에 완전히 잠겨들었다. 커다란 손바닥에 눌린 뒤통수 덕분에 인환의 얼굴은 코가 짜부라질 정도로 그의 품 안에 파묻히게 되었다. 그의 재킷과 셔츠는 물론 넥타이까지 온통 인환의 눈물콧물 범벅이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등줄기를 강하게 쓰다듬는 그의 왼손도, 머리카락을 헤집듯 열렬하게 어루만지는 오른손도 눈물을 더 부추기면 부추겼지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몸에 닿아오는 그의 늠름한 근육들이 너무나 기뻐서, 코 안으로 쉴 새 없이 파고드는 그리운 체취가 기적 같기만 해서, 혹은 그의 포옹이 너무나 다정해서…… 멈추지 않는 눈물을 변명할 수 있는 핑계거리는 그것 말고도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은총 같은 몸을 마주 끌어안고서 어리광과 다름없을 투정을 거듭거듭 토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저…… 전화도 안 되고…….”
“미안. 전원이 꺼진 것도 집에 거의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어.”
“……무…… 무,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난…… 나는…….”
“미안. 이렇게 걱정하면서 기다릴 줄 알았으면 늦게라도 전화하는 건데…… 잠들었을까 봐 자정 넘어선 전화하려다가 말았어. 곧 들어갈 거기도 해서.”
“……아…… 안 들어오는데 어떻게 자…….”
“미안. 미안, 미안, 미안해…… 용서해줘…….”
“…….”
뭐라고 더 투정을 부리려던 입술의 어물거림은 이내 다른 것으로 틀어막혀졌다. 정수리 위쪽을 더듬던 그의 입술이 원망스러운 투정에 떠밀려 계속 기회만 엿보고 있다가 마침내 원하던 목적지에 도달했다. 단숨에 깊숙이 들어온 뜨거운 침입에 그의 머리카락 틈을 헤치고 있던 인환의 손가락에 파르르 떨림이 일었다. 이어 맹렬하게 핥아 올리는 율동에 발끝에서 시작된 전율이 척추를 타고 정수리 꼭대기까지 뻗쳐올라왔다. 부비고 찌르고 휘감는 깊은 입맞춤은 이미 섹스와 한가지였다. 숨이 턱에 받치도록 길게 이어진 격렬한 정열에, 어느덧 만신창이가 돼서 몸이 늘어지자 겨우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입가에 가득 흘러넘친 두 사람의 타액이 쪽쪽거리는 야한 소음과 함께 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싸늘히 식어 있던 체온은 그와의 키스 덕분인지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올라가 있었다. 이미 이마와 콧잔등에 땀방울이 비치고 있는 그는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쪽쪽거리며 한동안 인환의 온 얼굴을 물고 빨던 그가 이윽고 인환을 품에 안은 채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치 블루스를 추듯 인환을 품은 자세 그대로 그는 아틀리에 바로 옆방인 손님용 침실로 걸어갔다. 언제부턴가 딱딱하게 발기한 그의 성기가 인환의 아랫배 근처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평소와 달리 그의 모든 동작이 느릿한 건 한계에 이를 만큼 피곤에 지쳐 있다는 뜻이리라(나중에 고영석을 통해 들으니, 사흘 내내 그가 눈을 붙인 시간이래야 장지로 가는 도중 비행기와 버스 안에서 선잠을 잔 두서너 시간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침대에 눕혀진 채 바로 옷이 벗겨졌다. 인환도 그의 옷을 벗겨주려 했지만 그가 더 빨라, 재킷과 넥타이를 풀어준 다음엔 알몸이 된 채로 그가 스스로 나머지 옷을 벗는 것을 기다려야만 했다.
“……땀 냄새가 좀 날지도 몰라. 사흘 동안 제대로 씻지 못했거든.”
그가 행복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은 채 인환의 몸을 타고 올라오며 속삭인 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평소보다 훨씬 짙어진 체취는 느릿해서 기왕에 음란한 색기를 흘리고 있는 그의 몸짓에 더한 성적 매력을 부여해주고 있었다. 확연한 수염 자국과 더불어 지독히 퇴폐적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참아주라. 일단 한숨이라도 자야 씻을 기운이 날 거 같아.”
절대로 참고 있는 게 아니라는 항변은 다시 시작된 그의 깊은 입맞춤으로 묻혀버렸다. 비교적 오래 전희를 끄는 그답지 않게 키스와 더불어 바로 내벽 안쪽에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어왔다. 어느새 발려 있었는지 그의 손은 온통 러브 젤 범벅으로 미끈거리고 있었다. 차가운 젤의 감촉에 잠시 흠칫 몸을 긴장시켰다가, 어루만지듯 감미로운 손가락의 애무에 곧 섹스를 열었다. 그의 손이 인환의 한쪽 허벅지를 조금 들어 올렸고, 곧이어 그의 하반신이 안정적으로 삽입 자세를 취했다. 젤로 번들거리는 회음부와 입구 근처를 그의 잘 벗겨진 거대한 귀두가 몇 번 비벼대는가 싶더니 이내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느리고 부드러운 삽입이었다. 한계까지 주름이 펴지고, 가장 두꺼운 귀두가 삽입되자 나머지는 일순간이었다. 단숨에 뿌리 끝까지 들어온 감촉에 내장 안쪽이 뿌듯하게 부풀어 올랐다. 회음부는 그의 길고 무성한 음모로 뒤덮이고, 항문 뒤쪽은 그의 탱탱한 음경으로 지긋이 눌렸다. 결합을 음미하듯 그의 혀 또한 인환의 입안 깊숙이 파고들어 물결치듯 점막을 감싸 안았다. 인환의 등을 움켜 안은 그의 한 팔에 힘이 가해지고 인환의 두 다리마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자 두 사람의 몸은 단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달라붙게 되었다. 그도, 인환도 완전한 한 몸이 된 그 상태 그대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내벽 안쪽에 깊숙이 파묻힌 채 부르르 기쁨의 전율을 흘리고 있는 그의 페니스와 인환의 입안에서 떨리듯 부드럽게 부벼지고 있는 서로의 혀만이 움직임의 전부였다. 가쁘게 헐떡이는 서로의 숨소리와 방울져 흘러 떨어지는 땀, 그리고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흐르고 있는 시간의 전부였다. 순간이자 영원인 초월이었다.
“……아아, 하느님! 너무 좋아……!”
마침내 인환의 것을 안고 있던 혀가 빠져나가고, 거의 달라붙어 있는 입술 틈으로 황홀한 기쁨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크게 웃고 있는 듯, 옆으로 길게 벌어진 그의 입술 움직임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언제나 이러고 있으면 좋겠어…… 오르가슴을 빼앗겨도 괜찮으니까 그냥 이렇게 영원히 달라붙어 있는 거면 좋겠다…….”
극치의 환희를 만끽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눈을 뜨고 그의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코도, 입도 거의 달라붙어 있는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시야가 확보될 턱이 없었다. 그저 아래로 휜 눈꼬리가 거의 감겨 있고, 한계까지 옆으로 치켜 올라간 입술의 형태를 통해 그가 크게 웃음을 짓고 있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격정이 사무치는 듯, 인환의 입술을 강아지처럼 부비고 있는 그의 입술이며 등줄기를 어루만지고 있는 손바닥, 하다못해 겹쳐진 인환의 다리를 짓누르듯 비벼대며 애무하고 있는 허벅지 근육까지 부르르 전율하고 있었다.
“……아니면 마음대로 줄였다 늘였다 해서 항상 팬티 안쪽에 품고 다니는 것도 괜찮고.”
“……벼…… 변태잖아. 패, 팬티라니…….”
“하하, 그런가? 그건 너무 심한가?”
음악처럼 아름다운 중저음의 웃음소리가 침실 가득 메아리쳤다. 그의 숨 막히는 환희가 인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가슴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울음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그처럼 커다란 웃음보가 터질 것 같기도 했다.
웃음이 잦아드는 것과 동시에 그의 허리가 율동을 시작했다. 느리지만 관능의 극치를 달리는 선정적인 몸짓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하게 내벽을 할퀴고, 그 어느 때보다 깊숙이 파고들어왔다. 체위를 전혀 바꾸지 않은 채 느리고 집요하게 안쪽이 비벼졌다. 철저하게 짓이기고 부서져서 서로의 점막이 흐물흐물 한데 녹아드는 듯 까마득한 착각마저 일었다. 달라붙은 채 끊임없이 자극받는 섹스뿐만 아니라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이 다 그의 페니스로 꿰뚫리는 것만 같았다. 화답하듯, 인환의 양팔과 다리가 문어처럼 친친 그의 전신을 휘감고 빨아들였다. 마치 온몸이 성기가 된 듯 끈끈하고 음탕한 기분이 들었다. 진심으로 발기하고 싶어 몸부림쳤다. 인환 또한 그의 사랑스러운 구멍이란 구멍 모두에 파고들려 발악을 했다. 숨결이 섞이고, 틀어막혀 멈추고, 다시 헐떡이듯 서로를 빨았다. 저 앞에서 유혹하듯 허리를 흔들고 있는 오르가슴에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잠시 화살처럼 반짝 스치며 틈새를 열어주었던 존재는 다음 순간 허망하게 양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한계까지 차오른 숨에 눈을 부릅뜨며 허리를 뒤튼 순간 그가 안쪽에서 격렬하게 폭발했다.
사방에 빛이 가득했다. 한동안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
하반신을 묵직하게 채워오는 부피감에, 몽롱하게 부유하던 의식이 비로소 또렷해졌다. 퉁퉁 부어 있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니 푸릇푸릇한 수염으로 가득 덮인 턱 끝이 보였다. 좀 더 시선을 올리자 눈부신 햇살이 후광처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남자의 이목구비가 온전히 시야에 들어왔다.
“……쉿…… 빼면 안 돼…… 움…… 직이…… 지…….”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움직였던가 보았다. 허리와 한쪽 허벅지를 휘감고 있던 그의 팔에 힘이 더해지며 중얼중얼 잠꼬대 같은 명령이 흘러나왔다. 신음처럼 지독하게 낮고 허스키한 음성이었다. 옆으로 누운 채 인환을 감고 있는 팔이며 어느새 인환의 하반신을 가득 메우고 있는 페니스를 보면 잠꼬대만은 아닌 것 같은데, 얼굴은 완연히 잠에 침몰해 있는 형상이었다. 눈꺼풀은 꼭 감겨 있고, 입술은 무방비하게 살짝 벌어져 있었으며,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연약하고 순해 보였다. 아마도 새벽이면 늘 생리적으로 발기하는 페니스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인환의 안에 삽입한 모양이었다. 곧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은 물론이었고.
오늘 새벽, 단 한 번의 절정과 함께 단숨에 곯아떨어진 그였다. 인환 역시 24시간 넘게 깨어 있었던 탓에 그를 따르듯 곧바로 잠들어 몰랐는데, 그는 지금까지 내내 한 번도 깨지 않고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9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한번 정사가 시작되면 대부분 인환이 먼저 기절하듯 잠에 빠지는데다, 아무리 늦게 잠들어도 반드시 아침 일찍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곤 하는 평소의 그를 생각하니, 정말로 피곤했구나 하고 새삼 자각하게 된다. 눈부신 아침 햇살조차 아랑곳없이 비몽사몽인 그라니. 가만 눈치를 살피니 정오까지도 자버릴 기세였다. 다행이었다. 긴 숙면 후엔 한계에 이른 피로도, 피붙이를 떠나보낸 허망한 슬픔도 어느 정도 치료가 돼 있을 것이다.
손가락으로 윤곽을 그리듯 그의 이목구비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커튼조차 쳐 있지 않아, 손님용 침실로 숨어든 아침은 밝아도 너무 밝았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남자의 형상이 눈부신 빛 속에서 환영처럼 녹아들고 있었다. 빛을 받아 밝은 갈색으로 보이는 부드러운 머리카락도, 긍지 높은 귀족의 콧날도, 깊숙이 잠긴 눈꺼풀과 긴 속눈썹도, 메마른 섹시한 입술도, 뺨 위로 꺼칠하게 만져지는 부랑자의 수염까지, 모두 너무나 아름다워서 손가락으로 확인하기조차 겁이 났다. 기적처럼 완벽하기만 해서 뭉클 가슴이 저렸다.
결합이 풀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그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토록 피곤에 지쳐 있으면서도 무심코 자신을 안는 그가 눈물겨웠다. 근육으로 뭉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소리 없는 울음을 흘렸다. 제물을 바치듯 간절하고 간절하게 무언가를 빌었다. 욕망을 품어도 되냐고. 이 남자를, 이 기적 같은 남자를 감히 다시 탐해도 되냐고. 속죄를 하면, 무시무시한 복수의 여신에게 죄 갚음을 하고 나면 다시 이 남자를 원해도 되냐고, 감히 그래도 괜찮은 거냐고.
사방에 빛이 넘쳐났다. 빛 속에 녹아 있는 아름다운 존재는 감히 ‘어둠’으로 훼손할 수 없는 지고의 존재였다. 어둠의 신분으로선 감히 원한다고 손가락조차 빨아선 안 되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 헛꿈을 꾸지 않는지, 뻔뻔스러운 어둠이 슬며시 빛 속으로 파고들진 않는지, 무시무시한 심판의 여신이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고 있었다.
파리해진 어둠이 가만가만 천사의 입술에 키스했다. 어쩐지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처럼. 혹은 오랫동안 마주하지 못할 것처럼. 낙인을 찍듯, 그리 간절하고 간절하게 천사를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