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2003년 10월. 장인환(張仁歡) (88/129)

38. 2003년 10월. 장인환(張仁歡)

포장이사 업체가 들이닥친 시각은 아침 8시 30분이었다. 전날에도 밤늦게까지 그에게 시달리느라 늦잠으로 비몽사몽이던 중에 맞은 날벼락이었다. 출근하는 그를 배웅도 못 하고 잔 늦잠이건만 보람도 없이 침대에서 쫓겨 일어난 것은 물론이었다. 개천절 휴일인데다 손 없는 날이라고 해서 특별히 그날로 이사 날짜가 잡혔다. 물론, 이사라고 해야 인환의 화구들과 그림들, 그리고 그의 책들 몇 십 권 정도밖에 옮길 게 없는 소규모 이사였지만, 짐의 거의 대부분이 인환의 것이었기에 거의 자신의 이사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비게 되는 연희동 집은 현재 이 의원의 집에서 지내고 있는 그의 동생 휘가 앞으로 한국에 완전히 들어오고 나서 쓰게 될 예정이라고 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흔적이 남으면 까다로운 청년은 불쾌해할 것이다. 아무리 몸이 고단한들, 나 몰라라 침대에 늘어질 수는 없는 이유였다. 

그는 공휴일에도 아랑곳없는 뉴욕 본사 일 때문에 이미 회사로 출근한 지 오래였다. 이번 달 말경 뉴욕에서 주주 총회가 있는데, 그의 말로는 본사 CEO를 새로 선출할 예정이라고 했다. 대주주인데다 실질적인 명예 회장이랄 수 있는 그이기에 이모저모 바쁜 모양이었다. 그는 뉴욕 본사 일에 관해선 이번 신임 CEO 영입을 계기로 완전히 손을 뗀다고 했다. 자세한 속내를 알려주진 않지만, 몇 년 전부터 맡고 있다고 하는 한국 지사장 업무에 보다 전념하는 것을 계기로 한국에 완전히 정착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일어나 씻고 늦은 아침 식사를 하는 중에도 2층 아틀리에에선 소소한 짐 꾸리기를 하고 있었다. 고가의 그림들이라고 그가 미리 언질을 준 탓인지, 그림 운반 전문 기사까지 와 있는 모양이었다.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2층으로 올라가 그저 구경하고 거치적거리는 게 전부인 일을 한 시간 남짓 한 끝에 짐 포장이 모두 끝이 났다. 금세 포장용 트럭에 옮겨진 짐이 연희동을 떠난 시각은 9시 50분 무렵이었다. 파출부 아주머니는 홍 기사가 운전하는 볼보에 타고, 인환 자신은 일찌감치 출근해 있던 경호원 둘과 함께 경호원의 차인 SUV에 올라탄 뒤 그를 제외한 온 연희동 식구가 새집으로 향했다.

도착하기까지 그리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새집이 있는 삼청동까진 차로 20분 이내 거리로, 매우 가까운 편이었기 때문이다. 연희동 집을 팔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며 다 쓰겠다고 하더니, 과연 시간상으로만 친다면 그도 가능할 터였다. 물론 앞으로는 동생이 사용할 집이니 더 가까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동생에게 연희동 집을 쓰게 할 요량을 하고 가까운 삼청동에 새 집을 마련한 것인지도 모른다. 동생들 일이라면 늘 제 1순위인 그가 아니던가.

새집은 감사원 뒤쪽에서 삼청공원 방면으로 한참을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원래는 모 대기업 창업주의 소유였다는데, 딱 봐도 압도적인 넓이며 호사스러운 모양새가 그럴 만하다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서울 도심과 인접한 곳에 이만큼 넓은 토지를 확보한 호화 저택을 꾸미려면 웬만한 재력 가지곤 어림도 없었을 터였다. 대지가 850여 평에 건평만 별채 포함 270평에 이르는 대저택은 수영장과 테니스코트까지 딸린 정원까지도 매우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무슨 외국 인테리어 잡지를 보는 기분이 들게 했다. 저택 뒤로는 야산이 있고 이 야산은 북악 스카이웨이까지 이어지고 있었는데, 원래부터 부촌으로 소문난 성북동은 물론, 북악산과도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해서 한눈에 서울 시가가 내려다보이는 주변 경관까지,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작고한 인환의 아버지가 살던 이태원 본가도 거의 이와 비슷한 규모를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어릴 때 몇 번 본 게 다였지만, 흡사 집이 아니라 무슨 서양 중세 시대 성곽 같다고, 볼 때마다 압도되곤 했던 인환이었다. 그가 처음 이 집을 보여주었을 때, 마치 어릴 때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까지 받지 않았나. 새삼 그의 엄청난 성공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었다. 십여 년 전 나락에 떨어진 이래, 거의 고향과도 같았던 이 주변에 다시금 걸음을 하게 되리라곤, 아니, 비록 임시일지언정 다시금 살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자신이었는데. 참으로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절로 뇌까려지기도 했었다.

SUV 차가 활짝 열린 거대한 철제 대문을 지나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 본채 현관 앞에 홍 기사의 볼보와 이삿짐 트럭이 주차돼 있는 게 보였다. 사람 그림자도 몇 눈에 띄었다. 현관 앞에 차려 자세로 나란히 늘어서 있던 사람들이 인환이 차에서 내려서자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90도 가까이 굽혀 절을 했다.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는데, 별채에 기거하며 저택을 돌보아줄 이들이라는 건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옆에 함께 서 있던 홍 기사와 파출부 아주머니와는 먼저 안면을 튼 모양으로, 홍 기사가 새 식구들을 소개해주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부부 한 쌍은 소박하게 생긴 정원사 내외였고, 그 옆의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아가씨 둘은 메이드들이었다. 정원사의 부인인 중년 아주머니는 파출부 아줌마를 도와 안살림을 맡아줄 거라고 했다. 정원사는 성이 최 씨라 최 선생이라 부르기로 했고, 그네의 부인은 파출부 아줌마처럼 그냥 아주머니, 나머지 메이드 둘은 미스 정과 미스 원이라 부르기로 했다. 가뜩이나 이름 외우기 꽝인데다 붙임성 제로인 자신이니 이들 새 식구들의 호칭을 헤매지 않고 부르려면 적어도 한 달은 지나야 하리라.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운 그가 골라 뽑은 이들이니 어련할까 싶었는데, 확실히 네 사람 모두 과묵해 보이면서도 하나같이 성실한 인상이었다.

새 식구들과의 대면식이 끝나자마자 한창 짐이 옮겨지고 있는 본채로 들어갔다.

실내 리모델링 공사가 있기 전 집 안이 텅 빈 상태로 보곤 처음이라, 온갖 호사스러운 가구들로 꽉 들어찬 나머지 흡사 궁궐처럼 변한 광경에 또 한 번 입이 딱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건평이 270평이 넘으니 외관부터가 압도적인 4층 석조 건물이었는데, 실내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크고 화려한 거실과 주방, 그리고 커다란 다이닝 룸 이외에도 1층에만 방이 다섯이라, 일상적인 인환의 짐은 주침실 바로 옆에 붙은 큰방으로 옮겨졌다. 나머지 아틀리에용 짐들은 4층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와 단둘이 쓸 용도로는 1층만으로도 이미 운동장처럼 차고 넘쳤지만, 물감 냄새가 날 것을 고려해 작업실은 4층으로 해줄 것을 그에게 부탁했었다. 오르내리는 데 불편하다고, 아예 1층으로 꾸미려는 그를 말리기 위해 진땀을 뺀 인환이었다. 손님들도 드나들 텐데 집 안을 물감 냄새로 진동시킬 일 있냐며 간신히 뜯어말릴 수 있었다. 다음으로 고려된 게 2층이었지만 어차피 엘리베이터가 있으니 2층보단 4층이 더 나으리라고 결론을 보았다. 2층으로 하면 도리어 엘리베이터를 쓰지 않으리란 판단을 했는지, 그도 선선히 허락해주었다. 결국 인환의 아틀리에는 4층 그의 서재와 체력 단련실 사이에 있는 25평 크기 중간 방으로 낙착되었다. 2∼3층은 그가 손님 접대를 하는 용도로 쓰지 않는 한 완전히 비워두게 될 터였다. 2층은 1층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따로 다이닝 룸과 바, 그리고 주방이 딸린 또 하나의 독립된 공간이었다. 빈방들은 대부분 손님방으로 비워둘 예정이었으므로, 그야말로 손님들을 위한 작은 방 십여 개와 욕실들로만 꾸며져 있는 3층과 마찬가지로 사용하지 않은 채 비워두게 될 터였다. 물론 당장 사용하게 될 1층, 4층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인테리어가 돼 있어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틀리에의 짐정리까지 모두 끝난 시각은 점심 무렵이었다. 물론 그걸로 이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사 업자들이 돌아가고도 나머지 식구들에 의해 집 안 정리와 대청소가 몇 시간은 더 계속되었다. 파출부 아주머니와 정원사 아주머니 둘이서 준비한 점심 식사를 1층 다이닝 룸에 모두 모여 해치운 뒤, 홍 기사 아저씨는 물론 경호원 둘까지 포함된 구 식구와 새 식구 모두가 집 안 대청소와 정리에 달라붙었다. 경호원들은 그들 임무에 걸맞게 저택의 보안에 관련된 일들을 했고, 홍 기사와 정원사 최 씨는 청소 일을, 아주머니 두 분과 메이드들은 세간 정리와 수납 일을 맡았다. 그동안 인환 자신이 한 일이라곤 역시 연희동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새 집을 눈에 익힌 것이 다였지만 말이다(도와준다고 말했다가 다들 얼굴이 굳어지는 바람에 머쓱해진 인환이었었다! 그가 뭐라고 엄포를 놓았는지, 다들 자신을 무슨 중병 환자처럼 취급을 하는 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 안 어디를 둘러봐도 두 사람만 쓰기엔 너무나 궁궐 같기만 해서 어리둥절할 정도로 위화감이 들었다. 그는 곧 익숙해진다고 하는데, 글쎄, 익숙해질 때까지 자신이 이곳에 머물게 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 생신 때 마지못해 몇 번 보는 것이 고작이었던 옛 아버지 집과 마찬가지로, 가까이하기엔 너무 압도적인 당신일지도. 다만, 서울 시내가 한눈에 펼쳐지는 조망과 조그만 야외 풀이 있는 정원만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4층 쪽문과도 직접 연결되는 공중 정원은 풀이 있는 1층 앞마당에 면한 본정원과 달리 아담한 인공 폭포와 파고라도 있고 잘 가꿔진 한국산 전통 소나무들이 곳곳에 정원수로 심어져 있어, 저택을 빙 둘러싼 야산의 숲길과도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파고라에 앉아 조그만 인공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뒤편의 야산 숲에서는 온갖 새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만큼 도심의 소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의미이리라. 가을 하늘답게 청명한 하늘도 예쁘고 하늘과 이어진 북악산 능선도, 그 아래 아스라이 펼쳐져 있는 서울 도심의 풍광도 예쁘기 짝이 없었다. 나중에 여기서 보이는 풍경을 수채로 스케치해보는 것도 꽤나 즐거운 작업이 될 것 같았다.

약간 으슬으슬해진 몸이 의식돼 도로 집 안으로 들어가려니 대문이 열리며 그의 검정색 세단이 정원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절로 심장이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벌써 그가 돌아올 시간이 되었나? 반가운 마음에 시계부터 살피니 어느새 4시 20분이었다. 홍 기사 말로는 저녁때쯤 들어올 거라 했다는데,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난 모양이었다. 4층 쪽문으로 향하려던 방향을 돌려 아래층 본정원으로 이어진 돌계단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긴 것은 물론이었다.

계단 중간쯤까지 내려갔을 때 인기척이 들렸는지 막 차에서 내리던 그가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경호 기사 고영석도 차 문을 잡은 채 이쪽을 향해 특유의 정중한 목례를 했다.

정원에서 먼저 부딪친 게 의외인지, 그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가 이내 햇살 같은 웃음이 퍼졌다. 두근……. 죽는 날까지도 절대로 면역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미소에 또다시 심장이 크게 울었다. 그는 은색에 가까운 그레이의 비즈니스 슈트에 검정색의 드레스 셔츠, 그리고 그 위에 짙은 보랏빛 넥타이를 맨 차림이었다. 언제나처럼 흠 하나 잡을 수 없는, 너무나 아름답고 세련돼서 오히려 위험스러워 보이는 남자였다.

“……제법 가파르니까 조심해서 내려와.”

잰 걸음으로 마주 걸어오며 그가 외치듯 염려를 주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하긴 하지만 마주 달려와줄 정도로 경사가 급한 것은 아니었는데, 온몸으로 걱정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그를 보자니 무심코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에 두세 개의 계단을 뛰어 그가 인환의 코앞까지 다가서는 데는 고작 십여 초도 걸리지 않았다.

“왔어?” 하고 심장에 안 좋은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리는데 얼굴이 단숨에 그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코롱 냄새와 섞인 그의 강렬한 체취를 자각했을 땐, 얼굴이 그의 가슴팍에 닿아 뭉개질 정도로 그의 품에 상반신이 끌어안긴 후였다. 등으로 힘껏 조여지는 팔 근육에 비해 뒤통수를 감싸듯 쓰다듬는 커다란 손바닥의 감촉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기왕에 수런거리고 있던 심장 고동이 배는 더 빨리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영석이 지켜보고 있을 텐데 하는 자각에다 집 안에서 또 누군가가 훔쳐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더해져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응. 다녀왔어, 마누라…….”

놀림의 기색이 역력한 인사말에도 그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려 뭐라 대꾸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만면에 기쁨의 웃음이 가득한 얼굴 표정에서도, 자신을 어미닭이 알을 품듯 소중히 끌어안고 있는 우악스러운 팔 힘에서도, 도저히 믿기 힘든 그의 감정은 손에 잡힐 듯 전해졌다. 만약 이게 그저 다 연기의 일환이라면 그는 그야말로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적인 배우인 셈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야말로 만 분의 일, 아니, 천만 분의 일 확률로 이 모든 게 그의 진심이라면…… 하느님!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

……지독한 기쁨은 지독한 공포와 늘 맞닿아 있었다. 먼먼 과거의 그 언젠가 꾸었던 천국의 꿈이 뒤늦게 현실처럼 다가서 있었다. 이미 늦어버렸지만, 아니, 늦어버렸다고 매번 독하게 스스로를 다그치긴 하지만, 그럼에도 생생하게 전달되는 벅찬 희열의 감정엔 언제나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벅찬 희열을 느끼는 순간, 쌍둥이처럼 뒤따라오는 끔찍한 공포심 또한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음은 물론이었다. 극단의 양가 감정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넋이 무엇인들 제대로 할 수 있으랴. 대꾸는커녕 평범한 생각조차 불가능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집 구경하고 있었어? 어때? 인테리어는 마음에 드나?”

매혹적인 중저음이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뒤통수를 이리저리 쓰다듬던 그의 손이 등을 감싸고 있던 다른 손과 만나 깍지를 낀 덕분에 포옹이 좀 느슨해졌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과 시선을 쳐다볼 수도 있게 되었다.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급박하게 요동치는 심장과 심한 감정의 동요 덕분에 숨길까지 가파르기 그지없던 참이었다. 조금만 더 그의 품에 얼굴이 틀어박혀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산소 부족을 일으켰을 것이다.

“……궁궐 같애…….”

뜨거운 열기를 담아 번쩍거리는 시선이 버거워 도로 슬쩍 시선을 피한 채 애매한 답을 주었다. 잠시 틈을 두었다가 “……정원이 참 보기 좋아. 전망도 좋고” 하고 덧붙였다.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든다는 뉘앙스로 들렸을까 봐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의 열렬한 눈빛에서 자신의 마음에 들기를 무척이나 바라는 속내가 얼핏 읽힌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정원은 무척이나 마음에 든 게 사실이니 거짓말도 아니었다. 명의는 인환 앞으로 돼 있다고 하나, 엄밀히 말해 자신의 집도 아니니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가릴 형편도 아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아틀리에는? 그쪽 전문가를 불러다 상의해서 개조하긴 했는데 사용하는 데 불편하지는 않겠어?”

재차 물어오는 그다.

“……불편하긴. 어쩐지 너무 딱이더라. 환기창까지 따로 설치하다니 놀랐어. 창가 한쪽엔 꼭 무슨 온실 같던걸. 화분들이 참 이뻐.”

“창문만으론 겨울에 추울 테니까. 유화 물감 냄새들이 몸엔 별로 안 좋다고 해서 공기 정화 화분들 위주로 설치하라고 했지.”

“……응. 고마워.”

“…….”

잠시 꿈처럼 아득한 표정으로 시선을 주던 그가 문득 춥냐고 물어왔다. 아까부터 설핏 한기가 느껴졌는데 자신도 모르게 조금 떨었던 모양이었다. 연희동에선 몰랐는데 야산을 끼고 있어선지, 확실히 공기가 좀 더 서늘한 것 같았다. 얇은 티셔츠 한 장과 트레이닝팬츠가 걸친 옷의 전부였으니 공기 탓만 하기에도 무리가 있긴 했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재빨리 재킷을 벗더니 인환의 어깨 위로 걸쳐주었다. 그의 따스한 체온과 체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재킷에 더해, 거의 감싸 안다시피 어깨가 껴안긴 것은 물론이었다. 여전히 소중히 알을 품는 어미닭마냥 극진한 손길이어서 목이 메었다. 다시금 순간적으로 하얗게 비어버리는 인환의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인환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로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고영석은 차를 주차장에 넣고 이미 집 안으로 들어갔는지 계단 아래 본정원엔 아무도 없었다. 대낮부터 민망한 포옹 신을 연출한 입장에선 무엇보다도 다행일 일이었다.

“……‘우리 집’이야, 인환아.”

막 현관문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무언가 감정이 잔뜩 억눌린 듯한 목소리였다.

“……이제부터 여기가 ‘우리 집’이야. 너와 나, 단둘이서 죽을 때까지 함께하게 될 공간이지. 이곳에서만큼은 연희동 집처럼 뼈아픈 한이 서리게 하지는 않을 거다. 절대로.”

덧붙여진 한마디는 처음과는 달리 잘 벼린 칼처럼 단호한 의지가 읽혔다. 설핏 소름이 일 정도로 날카롭기까지 했다. 인환에게가 아니라 마치 그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피기도 전에 현관문이 열렸다.

“……환영한다, 장인환. 내 ……하는 마누라…….”

“안녕히 돌아오셨습니까, 사장님?!”

재차 덧붙여진 한마디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일제히 쏟아진 식구들의 우렁찬 인사말에 묻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물론 별상관은 없을 터였다. 그 역시 인환이 아닌 그 스스로를 향한 다짐처럼 느껴졌기에.

“모두들 수고가 많으십니다.”

연달아 쏟아진 저택 식구들의 환영 인사에 단 한마디의 매혹적인 중저음으로 답례를 하는 그의 얼굴은 환히 빛나고 있었다. 최고급 영화배우보다도 더 빼어날 용모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매력으로 철철 넘치고 있고, 흐릿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는 표정은 기쁨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히 인생 최고의 절정기를 맞은 성공한 남자의 표본으로도 손색이 없으리라. 수십억을 호가하는 이 화려한 대저택조차도 그가 지금 현재 사방에 뿌려대고 있는 압도적인 빛 앞에서는 그 존재감을 잃고 있었다. 궁궐처럼 너무나 호사스럽기만 해서 위화감을 느꼈던 지난 몇 시간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그랬다. 호사스럽기는커녕 도리어 부족했던 거다. 물론, 그 어디서도 찾을 수는 없었으리라. 이토록 완전무결한 남자를 빛내줄 만큼 똑같이 완전무결한 공간 따위란.

‘그것’들이 새집으로 배달된 시각은 대청소와 집 안 정리도 완전히 끝난 저녁 6시 무렵이었다.

어렴풋이 기억에 있는 얼굴의 남자가 메이드의 안내로 현관 안으로 들어섰고, 마침 거실에 앉아 고영석까지 포함된 경호원들로부터 집의 경비와 보안 문제에 대해 보고를 받던 중인 그가 일어서며 남자에게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네는 게 보였다. 남자도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남자의 양팔엔 180이 가까운 남자의 키로도 몹시 버거워 보이는 커다란 상자들이 몇 개 들려 있었다. 그로도 모자랐는지, 뒤따라 들어온 홍 기사가 남자의 나머지 짐 상자들을 거실 한가운데에 부려놓고 나갔다. 거실에 있던 경호원들에게 들고 있던 상자들을 모두 떠넘긴 남자는 차라도 들고 가라는 그의 인사치레를 역시 예의 바른 인사로 거절하곤 다시 메이드를 따라 거실을 나갔다. 남자가 사라질 때까지도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고 있던 인환은 남자가 놓고 간 상자들이 줄줄이 개봉되고 나서야 비로소 남자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남자는 얼마 전 청담동 웨딩 업체에서 만난 사진작가의 조수라는 사람이었다. 그랬다. 남자가 배달해준 ‘그것’들은 그 존재조차도 거의 잊고 있던 ‘웨딩 사진’의 액자들과 앨범들이었다!

크기가 캔버스 150호쯤 될 가장 큰 사진이 번지르르한 액자까지 입은 채 첫 번째로 개봉되었다. 실제 자신의 얼굴보다도 더 크게 확대가 된 엄청난 크기의 사진을 앞에 두고 인환은 당혹한 나머지 그저 입만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게 다도 아니었다. 크고 작은 탁상용 액자에 담긴 사진들은 그 수만 해도 무려 200여 개에 달했다. 반쯤은 넋이 나가 찍었던 사진들이었는데, 이렇게나 많았었던가?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많은 걸 뭐에 쓰려고 액자까지 만들라고 했는지 도무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실에 단둘만 있는 게 아니라 당장은 따질 수도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저 그의 얼굴과 민망한 사진 액자들만을 번갈아 들여다볼 뿐……. 물론 그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민망해서 얼굴이 빨개진 채 어쩔 줄 모르는 인환의 사정은 아랑곳 않고, 경호원들과 초대형 사진 액자를 걸 위치까지 천연덕스레 의논하고 있으니 말 다 했지. 현관에서 마주 보이는 거실 정중앙에 걸까, 아니면 측면 벽의 벽난로 위에 걸까, 한참을 티격태격하던 남자들은 풍수 공부를 한 적이 있다는 한 경호원의 의견에 따라 거실 정중앙에 거는 것으로 낙착을 보았다. 현관에서 들어서자마자 마주 보이는 곳에 가족사진이나 웨딩 사진을 걸면 운이 트인다나 어쩐다나. 나머지 200여 개 액자들의 운명도 민망스럽긴 한가지인 결론이 도출되었음은 물론이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액자들은 거실 사이드테이블 위와 주침실, 그리고 4층 그의 서재 등등, 곳곳으로 옮겨져 집 안을 장식하는 심히 매우 민망한 인테리어 소품이 돼버리고 말았다.

“……다 보는 앞에서 늘어놓았으니 이제 와 치울 수도 없잖아. 창피해하는 것까지 다 들킬 테니, 원…….”

저녁 9시 무렵이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그는 몇 권이나 되는 두꺼운 웨딩 앨범들을 하나하나 열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었다. 무슨 재미난 코미디라도 보는 것처럼 무척이나 밝은 표정이었다. 때론 흐뭇하게 미소 짓고, 때론 박장대소를 하고, 때론 마주 앉은 인환을 향해 이리 가까이 와서 함께 보자며 은근히 권하기까지 했다. 이쪽의 민망한 심경 따윈 개의치도 않은 채 앨범 삼매경에 빠진 그가 곱게 보일 턱은 없어서 당장 심통을 날린 인환이었다.

“……게이인 게 뭐가 자랑이라고 사방에 사진까지…… 하긴 지는 게이도 아니지만…… 그래도 하여간 이상해졌어. 정말 게이 바이러스 같은 거에 감염된 걸지도 모르지…… 예전엔 혹시라도 남한테서 오해받을까 봐 그렇게나 질색을 하더니…… 나는 그것도 알고 있지. 게이로 소문날까 봐 무서워서 여자애들이랑 일부러 줄줄이 미팅도 한 거…… 소문도 자자했다지, 아마? 서울대 최고의 바람둥이라고…… 흥……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도 찍을 수 있다, 뭐…….”

거듭 보태다 보니 또 조금 눈치가 보여서 혼잣말로 구시렁거리듯 점점 말꼬리가 늘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고영석을 포함한 경호원들과 홍 기사, 그리고 파출부 아주머니도 모두 퇴근하고, 정원사 최 씨 내외와 메이드 아가씨들까지 별채로 퇴근해버려, 궁궐처럼 드넓은 본채 집 안에는 그와 인환 단둘뿐이었다. 비로소 주변 눈치 볼 필요 없이 대놓고 푸념을 할 시간을 잡은 것이다. 틀어놓은 TV 소리까지 적당히 잡음이 돼준 덕분에 간 큰 잔소리를 하는데도 그다지 심장의 부담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차하면 TV를 보는 척 시치미를 뗄 수도 있으니.

“……기억이 나나?”

문득 조용한 물음이 던져져서 고개를 돌리니 살피는 듯한 그의 시선이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또 심장이 덜컹 요동을 쳤다. 앨범들을 들여다보는 내내 짓고 있던 음흉한 한량의 웃음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익히 알고 있는 깊고 진지한 눈길에 새삼 자신의 온몸이 긴장을 하는 것이 자각되었다. 그가 진지해지는 것은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그의 진지한 분노도 두렵고, ‘진지한 것처럼 보이는’ 깊은 애정은 그보다도 몇 십 배는 더할 공포였다.

“……?”

뭐가? 하는 눈빛을 겨우 만들어 보이자, 그의 눈꼬리가 살짝 접히며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자신의 속마음을 읽는 덴 늘 귀신인 그가 자신이 겁을 내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대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다.

“……네가 옛날의 내 얘기를 하니까.”

“……!”

“……그때 얘긴 잘 꺼내지도 않지만 기억해내려고도 안 하잖아, 너.”

“…….”

“봉인해둔 채 떠올리려고조차 하지 않는 건 그만큼 괴로운 기억이기 때문이겠지. 무심코라도 일단 입 밖으로 토해질 수 있는 거라면 그만큼 상처도 치유되고 있다는 뜻이 되니까…… 그래, 단 한 가지라도 자연스레 떠올려주었다는 게 그래서 고마워. 나로서는…….”

“…….”

“좀 더 많은 것을 떠올려주면 좋겠지만…… 뭐 서둘 생각도 결코 없으니까. 천천히 자연스럽게 치유된다면 좋겠지. 무엇보다도 네가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

“……이리 와, 인환아. 안아보게.”

“…….”

“후후. 앨범들 치울 테니까 와봐. 어서…….”

“…….”

누구 명령이라고 버티겠는가. 최면을 걸듯 뚫어져라 바라보는 부드러운 눈길에 혹해선 주춤주춤 다가가는 자신이었다. 누가 지 멋지지 않달까 봐, 검정색 일색의 니트와 트레이닝팬츠를 입고 있으니 외모까지 간지 작렬이었다. 바로 앞에 섰더니 앉으라는 듯 단단한 근육으로 뭉친 허벅지 위를 툭툭 치는 그다. 물론,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에 아름다운 눈길로 요구를 한다 해도 차마 그의 무릎 위에 앉을 수는 없었다. 도대체 자신의 나이가 몇 갠데, 그런 10대 여자애들이나 할 법한 닭살 애교를 부린단 말인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그의 옆자리에 낑겨 앉으려는데 난데없이 다가온 두 손이 냉큼 허리를 낚아채지 않는가.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버둥거리던 몸은 곧 그의 무릎 위로 안전하게 착지했다. 당근, 자신의 허리를 와락 움켜쥔 그의 단단한 두 팔 덕분이었다. 그가 교차하듯 자신의 상반신을 안은 팔에 힘을 주자, 등에 그의 단단한 가슴 근육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잡아채인 물고기처럼 퍼득거리던 심장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껴안긴 몸은 이번엔 소파 위로 길게 눕게 되었다. 그가 자신을 품은 채로 모로 길게 몸을 누인 때문이었다. 워낙에 커다랗게 제작된 10인용 맞춤 소파라 그런지, 190에 가까운 그와 자신이 함께 드러누워도 길이로든 폭으로든 별로 부족한 공간이 없었다. 완전히 자리가 잡히자, 그가 포옹을 느슨하게 하더니 조금씩 몸을 움직여 그의 팔을 벨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물론 다른 한 팔은 여전히 자신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어서 다른 행동의 자유는 일체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따스한 숨결이 정수리와 얼굴로 고스란히 쏟아지고 있었다. 친친 감긴 사지로는 그의 뜨거운 체온이 인정사정없이 달려들고, 숨을 쉴 때마다 폐부로 파고드는 알싸한 체취와 코롱 냄새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팔베개를 해주고 있는 손가락이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얼굴 곳곳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뺨을 어루만지고, 코를 주무르고, 입술과 턱 끝을 오가며 문질문질 비벼대고는 했다. 부드럽게 눌리곤 하는 정수리와 뒤통수의 촉감을 통해 쉼 없이 립 키스를 뿌리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허리를 꽉 죄고 있던 다른 손은 이미 티셔츠 안쪽을 파고들어 한창 맨살을 쓰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숨 막혀?” 몇 번 거칠게 호흡을 토하자 그가 놀리듯 개구진 어조로 물어왔다. “아니면 두근거리는 건가? 서방님이 다정하게 안아주니까?” 덧붙여진 망발은 한층 더 개구졌다. 반항의 의미로 얼굴 추행 중인 늑대의 손등을 힘껏 꼬집자 그가 껄껄껄 하고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근…….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매혹적인 중저음에 또다시 심장이 요동을 쳤다. 집 안이 운동장처럼 넓어 그런지 소리가 유달리 깊게 공명하는 듯했다.

“……너무 큰 거 같애…….”

무심코 중얼거리자, 그가 잠시 추행을 멈춘다. 보지 않아도 쫑긋하고 귀를 기울이는 모양새가 느껴져서 저절로 얼굴에 웃음이 몰렸다.

“……집이 너무 커서 좀 무서워. 둘은커녕 스무 명이 살아도 공간이 남을 거 같애. 음, 물론 아주 예쁘긴 하지만.”

그가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는지 그의 부드러운 앞머리가 목덜미 근처를 간질이는 게 느껴졌다. 이어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목덜미 위로 따스하고 촉촉한 감촉이 와 닿았다. 이어진 뜨겁고 축축하며 간질거리는 감촉의 원흉은 그의 혀끝이리라. 키스로 눌린 자리를 중심으로 조심조심 핥아지고 있는 목덜미였다.

“……네가 오니까 좀 덜하긴 한데, 처음엔 진짜로 많이 압도됐었어. 꼭 헤매다가 미아가 될 것만 같더라.”

“곧 익숙해질 거야. 나도 미국에 처음 갔을 땐 한국하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모든 게 크기만 해서 꽤나 압도당했었지. 도로도 두세 배는 넓고, 집들도 그만큼 크고, 나무들도 크고, 산과 강과 도시들은 더더욱 크고, 하다못해 맥도날드 햄버거 크기까지 두 배더군. 하지만 그도 별게 아니던걸? 일주일도 안 돼서 오히려 답답함을 느꼈지. 물리적인 크기란 정신력이나 지력의 크기엔 못 당하거든.”

쪽. 상냥하고 나지막한 대꾸와 함께 이번엔 입술 언저리로 찐한 립 키스가 지나갔다.

“……개라도 키울까?”

쪽쪽. 이번엔 뺨으로.

“네가 정 허전하다면 말야. 정원도 넓으니까 두세 마리 정돈 키울 수 있을 거야. 적적하지도 않고…… 보안상으로도 나쁠 것은 없을 테고.”

쪽쪽. 쪼오옥. 다시 목덜미로 되돌아온 입맞춤은 처음보다 한결 농염하게 변해 있었다. 엉덩이 근처로 생생하게 전달되는 딱딱한 감촉을 통해 이미 그의 변화를 감지한 터라 그리 당황하진 않았다.

“……개라니…… 그건 좀…….”

모로 틀어졌던 몸이 똑바로 눕혀지는 게 느껴졌다. 그가 인환과 소파 등받이 사이에서 나른하게 빠져나오는 것도 보였다. 바로 일어나는 듯했던 그의 몸은, 물론 순식간에 인환의 위로 겹쳐지고 있었다. 밀착하듯 겹쳐진 몸뚱이를 통해 전신으로 그의 묵직한 체중이 느껴졌다. 열기로 번들거리는 눈이 인환의 얼굴을 핥듯이 굽어보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오래 마주하기엔 심장에 너무나 버거운 시선이었다.

“왜? 너 개 싫어하진 않잖아?”

쪽쪽. 시선을 꽉 틀어쥔 채 정확히 아랫입술로 떨어진 정열적인 립 키스에 슬며시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시선을 피해버린 인환이었다.

“……개, 개는 정들면 너무 괴로워지니까…… 어릴 때 한번 기르다가 잃어버린 후론 단 한 번도 키운 적 없었거든. 그때 너무 상처를 받아서…… 아무튼 만약…… 혹시라도 내가 이 집에서 나가게 되는 일이 생기거나 한다면 개들도 슬플 거고 나도…….”

물론 ‘만약’도 아니고 ‘혹시’도 아니었다. 성노예로 1년 계약을 할 때만 해도 그는 애초부터 질리면 버린다고 했었다. 게다가 ‘그녀’라는 막강한 존재도 새삼 나타난 마당이었다. 현재 그가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준다고 해서 그의 진심을 액면 그대로 믿어줄 수도 없었다. 아니, 진심 자체를 판별할 수 있는 시각이 아예 마비돼버린 자신이었다. 믿고 싶은, 그래서 다시 또 그를 원해보고 싶은 지독한 욕망과, 그래선 안 된다는 필사적인 이성 사이에서 옴짝달싹도 못 한 채 굳어버린 자신이었다. 자신이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그저 앞으로 다가올 최종 판결뿐이었다. 언젠가 결국 또 버려지고 말 거라는 건, ‘만약’도 ‘혹시’도 아닌 거의 100%에 가까울 예측이었다. 그나마 ‘만약’과 ‘혹시’라는 전제를 단 까닭은 어쩐지 속내 그대로를 내보인다면 그가 불처럼 화를 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소심한 답변만으로도 그는 몹시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단숨에 굳어진 그의 표정과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던 립 키스가 멈춘 것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슬쩍 곁눈질로 훔쳐보니…… 아이고, 정말 찢어 죽일 기세로구나! 절로 탄식이 나올 만큼 무시무시한 표정이었다. 물론 겁은 그닥 나지 않았다. 그가 진심으로 다정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쪽이 훨씬 훨씬 더 무서운 자신이었기에.

“……두 마리로 정하지. 품종과 성별은 좀 더 알아봐서 결정하는 걸로 하고.”

잠시 뜸을 들이는 것 같더니 냉큼 토해진 그의 치졸한 복수였다. 어조가 얄밉도록 냉정했다. 쪽쪽. 쪼오옥. 다시금 시작된 열정적인 키스의 비. 별로 반대할 용기도 없었건만, 혹시라도 반대의 말이 나올까 봐 걱정이라도 된 모양이었다. 입술만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도 모자라 거의 숨 쉴 틈도 주지 않았다. 입가를 적신 두 사람의 타액이 턱 끝과 목덜미로도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쳇, 기르든지 말든지. 나만 정 안 주면 된다, 뭐…….

역시 차마 밖으로 토해지지 못한 소심한 반항이었다.

“……춥지 않나?”

정말로 숨이 막힐 지경이 돼서야 겨우 멈춘 키스의 끝에 그가 물어왔다. 색기가 줄줄 흐르는 허스키한 중저음만으로도 그의 의도가 읽혔다. ‘춥지 않냐’는 건 ‘여기가 춥지 않은가’의 준말이고, 해석하자면 여기서 바로 하고 싶은데 괜찮겠냐’의 의미 되시겠다. 하긴 아랫배 위로, 허벅지 사이로 딱딱한 감촉이 느껴지기 시작한 지도 벌써 한참이나 지났다. 호색한으로 변태한 요즘의 그로선 제법 오래 참은 거였다.

“……아직 이틀 안 지났으니깐…….”

삽입 섹스는 피해주면 좋겠다는 진심을 담아 그를 마주 보자 그가 웃는다. 섹시하고 아름다운 입술 끝만 슬쩍 끌어올린, 매혹적인 호색한의 미소였다.

“알아. 오늘은 오럴과 페팅으로만 끝내주지.”

천연덕스러운 답변에 얼굴이 또 새빨개졌다. 역시 호색한 버전의 그는 아무리 해도 적응이 안 되는 자신이었다. 오럴 섹스 자체에 치를 떨다 못 해 ‘오럴’이란 단어조차 여간해선 입에 담지 않던 과거의 결벽증 영웅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그가 TV 리모컨을 찾아 들더니 제 혼자 놀고 있던 TV마저 완전히 끄는 게 보였다. 그나마의 소음마저 사라지고 나자 궁궐 같은 광활한 공간엔 오로지 두 사람의 숨소리와 옷자락 스치는 소리뿐이었다. 빨개진 얼굴로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는 사이 단숨에 옷이 벗겨졌다. 러닝과 팬티, 그리고 티셔츠와 트레이닝팬츠가 전부이니 옷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다. 그 또한 자신만큼 가벼운 차림새였기에 태초의 짐승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벌거벗은 피부 위로 느껴지는 선뜩한 공기에 위화감을 느끼기도 전에 그의 뜨겁게 달궈진 몸이 겹쳐들었다. 그의 품 안에 끌어안기고, 다시금 그대로 소파 위로 눕혀졌다. 등에 소파 쿠션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안정적으로 인환의 사이에 자리를 잡은 그의 치부가 인환의 것과 겹쳐졌다. 그의 페니스는 한껏 발기한 채 이미 쿠퍼 액으로 흠뻑 젖은 채였다. 꼭 맞닿아 선정적으로 꿈틀거리는 그 감촉에 인환의 얼굴이 또다시 새빨개졌다. 대답처럼 그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놀리는 것이 아닌, 정말로 기분이 좋아서 웃는 그런 웃음이었다. 한쪽 팔꿈치로 상체의 체중을 지지한 그가 인환의 머리카락 틈으로 양손을 미끄러트렸다.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헤아리듯 천천히 어루만지는 손길은 가슴이 에일 지경으로 다정했다. 소중하고 소중해서 견딜 수 없는 것 같은, 그런 절절하고 애틋한 손길이었다.

“……이건 기억이 나나……?”

열렬한 눈길이 인환의 시선을 악착같이 물어오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천천히 밀고 있는 피스톤 운동 또한 눈길 이상으로 악착같고 집요하기만 했다.

“……왜 우리는 이틀에 한 번일까?”

심장에 버거운 시선의 집요함을 어쩌지 못해, 그가 밀어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질문의 의미는 이미 뒷전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선정적으로 변한 그의 표정이 부끄럽기만 해서 그저 할딱이며 얼굴을 붉히는 것이 다였다. 어째서 직접적인 삽입 섹스보다 이게 더 지독하게 부끄러운 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극한의 욕망에 침윤된 채 시시각각 돌변하는 그의 얼굴을 맨 정신으로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이렇게 부끄러워 죽느니, 차라리 삽입당할 때처럼 아픈 게 더 나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째서 ‘이틀’이라는 시한에 필사적으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걸까, 나는?”

“……?”

“……그리고 너는 왜 그때 고작 이틀이 한계였었을까?”

“……?”

“……기억 안 나?”

“……?”

“……이틀에 한 번꼴로 우린 이걸 했었지. 지금처럼…… 이틀에 한 번꼴로 삽입 섹스를 하는 게 아니라.”

“!!”

“……기억나지, 인환아?”

“…….”

“아니. 널 다그치려는 게 아니야. 안 나면 안 나는 데로 덮어둬도 돼. 아까도 말했지? 그 무엇보다도 네가 고통받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

“하지만 기억날 거야, 언젠간…… 전부 기억해내겠지. 전부…… 아픈 기억들 모두 다…… 하나도 빠짐없이…….”

“…….”

기억이 아예 안 나는 건 아니었다. 이틀에 한 번 그를 보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해서 견디기 힘들어 했던 기억이 분명 있었다. 다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마치 본 건지 안 본 건지 확신하기 힘든 흐릿한 옛 영화처럼. 과거와 관련된 자신의 기억이란 다 이따위니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의 판단은 옳은 셈이었다. 남의 일인 양 방관자로서 기억을 반추하는 것과, 당시의 감정을 생생히 재생시키면서 기억을 해내는 것은 분명 180도 다른 일일 터였다.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지독한 방어기제 때문이라는 걸. 과거의 기억을 현실로 떠올리게 되는 순간, 깊숙이 봉인해두고 있는 지옥의 시간 또한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리라.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가부러질 정도로 공포를 느끼며 필사적으로 과거를 묻어두려는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전부 기억해내면…… 내가 준 숙제도 풀 수 있겠지…….”

마지막으로 토해진 한 마디는 거의 혼잣말이었으리라. 그의 눈빛이 좀 더 격렬하고 좀 더 음습해졌다. 위험할 정도로 어두워져서 흡사 광기마저도 느껴졌다. 머릿속을 쓰다듬는 손길도 거칠어졌으며, 허리를 뒤채는 움직임 또한 점점 더 난폭해지고 있었다. 서로 비벼지고 있는 성기는 간지러운 것을 넘어 아픔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순간이나마 겁을 집어먹은 자신의 표정을 읽은 것일까? 미친 야수처럼 번들거리던 그의 눈시울이 문득 울 것처럼 괴롭게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장막을 치듯 단숨에 내려앉는 눈꺼풀도 보였다. 머릿속을 이리처리 헤치고 다니던 그의 양손이 어깨와 등 쪽으로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그의 상반신이 좀 더 내려오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것은 위로 번쩍 들어 올려졌다. 숨이 턱 틀어막힐 만큼 격렬한 포옹이었다. 오른쪽 목덜미와 어깨 사이로 들어와 박힌 그의 얼굴이 느껴졌다. 뜨거웠다.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로 흥건한 얼굴이었다. 하반신을 치대는 피스톤질은 거의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흐윽!!!”

단말마의 신음성과 함께 하반신으로 뜨거운 액체가 왈칵 끼쳐들었다. 상반신을 옥죄고 있던 포옹이 쇠사슬처럼 억세고 강해졌다. 오르가슴의 흥분을 삭이지 못해 목덜미 근처를 깨무는 짐승의 이빨도 느껴졌다. 허리 아래로 부들부들 경련하는 묵직한 체중의 감촉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전신을 태울 듯이 덮쳐들던 부끄러움은 더 이상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메마른 슬픔을 얼핏 자각했을 따름이었다. 그가 흥분하는 동안 자신 혼자 맨 정신으로 수치심을 느껴야만 하는 현실도 그저 슬플 뿐이었다. 시체처럼 죽어버린 자신의 몸도 슬프고, 어떡해도 대속하지 못할 끔찍한 죄악의 무게도 그저 마냥 슬플 뿐이었다. 더 이상 욕심낼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하지도 못하는 그는, 물론 슬픔 그 자체일 터였다. 그래서였다. 헐떡이는 그의 입맞춤에 더욱 열렬히 응하고, 격렬하게 안아오는 그의 포옹에 더더욱 격렬하게 팔로 감싸 안아준 것은. 기쁨이 슬픔에게 주는 눈물겨운 위로였다.

가만가만 손가락을 어루만지는 감촉에 설핏 의식이 깨어났다. 간지럽기도 하고, 어딘가 간절한 느낌마저 들어서 비몽사몽 중에도 겨우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둠 속이었다. 창문으로부터 비쳐들고 있는지, 흐릿한 불빛 덕분에 사면 벽과 가구의 윤곽들이 그나마 거무스름한 그림자로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낯설긴 했지만 기억에 있는 풍경이었다. 연희동에 비해 두 배는 더 클 드넓은 공간에도 불구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덕분에 위화감이 덜했던 곳. 새집의 주침실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웅크리듯 앉아 있는 거구의 그림자 또한 한가지였다. 형태만 간신히 드러내는 그림자에 불과했어도 자신이 그네의 정체를 못 알아챌 리는 절대 없었다. 거실 소파 위에서 정사를 나누고, 그대로 그의 품에 안긴 채 침실로 옮겨진 기억이 스쳐갔다. 잠들기 직전까지 따스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정성껏 닦아주던 감촉도 얼핏 기억이 났다.

“……위야……?”

어루만지고 있었던 것 같은 자신의 손가락으로부터 자신의 얼굴 쪽으로 그의 시선이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비몽사몽 중에도 범상치 않은 감정이 절절히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뭐 해…… 안 자? ……지금 몇 신데…….”

무심코 시계가 걸린 벽 쪽으로 시선을 옮겨갔다가 시곗바늘까지는 잘 보이지 않아 도로 그에게 시선을 돌린 인환이었다. 몽롱하기만 한 머릿속이나 한없이 내려앉으려는 눈꺼풀만으로도 날이 밝으려면 아직 한참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악착같이 만져오는 손길을 역으로 더듬어 그의 팔을 잡았다가 의외로 차가운 감촉에 소스라쳤다. 얼마나 오랫동안 저 상태로 있었던 건지, 그의 체온은 꽤나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수면기도 말끔히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어나지 마.”

나지막한 명령조와 더불어 막 일으켜 세우려던 상반신이 도로 침대에 밀어붙여졌다. 물론 그가 가볍게 어깨를 잡고 민 때문이었다.

“……위…… 위야……?”

대답 대신 침대 사이드 테이블로 팔을 뻗은 그가 스탠드를 켰다. 빛보단 어둠에 더 가까울, 부드럽게 퍼지는 최소한의 밝기였다. 물론 그의 표정을 살피는 데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밝기이기도 했다. 다시금 마주 시선을 보내오는 그의 표정은 불안해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부드럽고 안정돼 있었다. 어딘가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하게도 보였다.

“……괜찮아. 옛날 꿈을 꿔서 잠깐 일어났던 것뿐이야. 더 자, 인환아.”

그의 입가가 부드럽게 허물어지며 행복한 미소가 고였다. 흐릿한 불빛 속에서 보니 음영이 진 때문인지 안 그래도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서양인이라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악몽?”

이렇게 묻자,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는 그다. 인환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그의 다른 손이 다가와 뺨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다른 손처럼 역시 꽤나 차가웠다. 걱정이 되었다. 폐렴이 나은 지도 고작해야 두어 달 남짓이었다. 그것도 그냥 폐렴인가. 생명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심하게 앓고 난 다음이다. 그에게 잡혀 있던 손을 자신도 모르게 끌어당겼음은 물론이었다.

“악몽을 꾼 것도 아닌데 왜 그러고 있어? 얼른 침대 안으로 들어와. 몸이 너무 차가워서 걱정돼.”

힘껏 잡아당겨보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묻는 듯한 눈길로 올려다보자 그가 다시금 말갛게 웃었다.

“괜찮아. 조금만 더 지켜보고 잘 테니까.”

“……?”

“불을 켜니까 자잘한 잡티까지 잘 보여서 좋은걸. 별로 눈이 부시진 않지?”

깜깜한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말대로 숙면에 지장이 일 정도의 밝기도 아니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또 말간 웃음을 물었다.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기쁨이 느껴지는 웃음이어서, 인환도 저절로 따라 웃었다. 흡사 지복의 경지에라도 오른 수도사의 미소를 연상시켰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꾼 건가? 내일은 복권이라도 사보라고 할까? 아니, 돈은 이미 넘치도록 많은 것 같으니까 복권은 필요 없나? 속으로 멍청한 생각들을 흘리고 있는데, 그가 잡고 있던 인환의 손가락 끝에 일일이 키스를 하는 게 보였다. 심장도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났는지 평소처럼 덜컹 내려앉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신은 더 이상 맑아질 수 없으리만큼 맑아질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 끝에 키스를 끝낸 입술은 이번엔 웨딩 링이 끼어진 약지 위에서 한참 동안 머물고 있었다.

“……위, 위야……?”

별로…… 길몽도 아닌가 봐……. 또 멍하니 스쳐간 멍청한 생각이었다. 아니, 그에겐 길몽일지 몰라도 인환 자신에겐 흉몽일 것 같았다. 자, 봐라. 또 이렇게 스멀스멀 무서운 기분이 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자다가 또 그 꿈을 꾸었어. 지난 10년 내내 꾸어오던 꿈이었지. 꾸는 동안엔 정말 행복해지는 꿈이거든. 절대로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약지에 여전히 입술을 붙인 채로 그가 속삭였다. 심하게 잠긴 목소리는 꿈의 연장선처럼 지극히 몽환적으로 들렸다. 대화라기보단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일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깨어나고 싶지 않아도 결국엔 깨게 되지. 꿈은 꿈일 뿐이니까. 그 짓을 10년이나 되풀이하다 보니 이골이 났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깨어나는 순간에 바로 알아채는 거야. 아, 행복한 천국이 사라져버렸네, 이제 곧 또 지옥이 시작되겠구나 하고.”

“…….”

“……그래서 아까도 그런 줄 알았어. 깨어나자마자…… 아, 또 지옥이 시작되는구나, 오늘은 또 어떻게 견디지? 무얼 하고 견뎌야 덜 고통스러울까? 하고 잔뜩 굳어졌었지. 그런데 품 안에 네가 있는 거야. 흡사 꿈의 연속인 것처럼.”

“…….”

“……너도 경험한 적 있나? 꿈인지 현실인지 도저히 분간이 안 가서 얼간이처럼 멍청하게 굳어지는 거 말이다.”

“…….”

“행복한 꿈도 마치 가위처럼 거듭 깨어나는 것 같아도 실은 단 한 번도 깨어나지 않은 채 영원히 되풀이되는 게 아닐까…… 하고 순간적으로 의심이 든 적은?”

“…….”

“내가 그랬다.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는 것조차 무서웠지. 너무 기뻐서…… 행복해서…….”

“…….”

“……이도 다 꿈은 아닐까…… 지난 10년 동안 꾼 그 수많은 꿈들 중 하나는 아닐까…… 그렇게 끔찍하게 무서우면서도 또 끔찍할 정도로 행복해졌지. 아까.”

“…….”

“……가만가만 품 안의 것을 더듬어보고 나서야 겨우 현실이란 걸 깨달았거든.”

“…….”

“꿈속의 내 강아지는 이렇게 똥배가 나오진 않았어. 하긴 그땐 이리 늙지도 않았었지. 사귀던 내내 20대 초반으로만 보이던 내 귀여운 강아지였거든. 똥배는커녕, 이렇게 거뭇거뭇한 기미도 없었고 이렇게 가슴 아린 눈가의 잔주름도 없었지. 일곱 살이나 연상이라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나보다도 더 어려 보이는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어. 그래. 10년 동안 내 꿈속을 부지런히 쫓아다니던 얼굴은 바로 그 젊은 사랑스러움일 뿐이었지.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무시무시한 천국이자 생지옥이었다.”

“…….”

“비로소 처음, 늙어버린 내 강아지의 몸뚱이에 진심으로 감사할 수가 있었지. 이게 꿈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였으니까.”

“…….”

영영 왼손 약지에 머물 것만 같던 그의 입술이 얼굴로 내려왔다. 부드럽게 핥아지는 뺨의 감촉을 통해 비로소 눈물범벅인 얼굴을 자각할 수 있었다.

좋지 않았다. 매우매우 좋지 않았다. 이건 반칙이었다. 그는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이리 현실감을 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래. 꿈은 꿈일 뿐이었다. 그는 영원히 꿈속의 왕자님이어야만 했다. 영영 꿈속의 지배자일 뿐이어야 했다. 현실로 욕심내선 절대로 안 되는 남자였다. 욕심을 내기 시작하는 그 순간 즉시 파멸이었다. 종말이었다. 그러니 이건 좋지 않았다. 매우매우 좋지 않은 징조였다. 악몽이 맞았다. 그에겐 길몽일지언정, 자신에겐 확실히 끔찍한 악몽임에 분명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언제부터 자신의 악몽을 훔쳐가기 시작한 걸까……?

“……나빠…….”

물기를 따라 뺨 위를 샅샅이 더듬던 입술이 자신의 것과 겹쳐졌다. 짭짭한 소금기가 역력한 물컹한 덩어리가 입안으로 힘차게 파고들었다. 거침없이 들이대면서도 동시에 유혹하듯 살살 꼬여내는 모양새가 치사했다. 악몽의 도둑놈 주제에 뻔뻔하기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나빠…… 나빠…… 너무 나쁘잖아…….”

의미 불명의 비탄이 토해지다 말고 그대로 그의 입안으로 삼켜들었다. 내장까지 뽑아낼 것만 같은 무자비한 키스였다. 가슴 위로 얌전하게 덮여 있던 양모 블랭킷이 슬쩍 들쳐지는 게 느껴졌다. 차갑게 식은 거구의 알몸이 비로소 침대 속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걱정해줄 땐 나 몰라라 제 할 말만 다 토해내더니, 이제야 추위를 느끼는가 보았다.

요철이 맞붙듯 완벽하게 겹쳐진 두 몸뚱이 위로 보드라운 블랭킷이 머리 위까지 덮어씌워졌다. 무슨 신호 같았다. 블랭킷이 일종의 보호막이라도 된 양, 가슴을 난도질하던 현실감 또한 즉시로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성을 아득하게 앗아가는 키스에 더해, 달콤한 꿈이 욕망을 부추기고 있었다. 물론, 가져서는 절대 안 되는 욕망이었다.

……하지만 뭐. 어차피 꿈에 불과하지 않은가…….

비굴한 자기변명이 불쑥 떠올랐다가는 그조차도 이내 아득하게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오로지 그의 체온과 체취와 무게와, 또한 마주 비벼질 때마다 기뻐 몸서리쳐지는 감촉뿐이었다. 욕망을 품어도 된다고, 이제쯤 부디 손을 뻗어달라고, 열심히 부추기고 있는 뻔뻔스러운 천사였다.

새집에 이사를 온 지 이틀이 지났다. 10월 5일 일요일. 이사한 이래 최초로 손님다운 손님이 찾아온 날이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저 ‘청년’이 ‘손님’이라고? 하. 가당치도 않았다. 이 호사스러운 궁궐에서 도리어 손님이라 경원시당할 자가 누구던가. 바로 인환 자신이 아니던가. 더 까놓고 말하자면, 손님 주제도 못 될 극악한 죄인이었다. 원수였다. ‘성노예’ 신분으로 제법 주인으로부터 극진히 다뤄지고 있는 요즘이지만, 그야 언제 다시 바닥으로 좌천될지 모르는 사정이니 논외로 치고. 그래, 그러니 정정하자. 10월 5일 일요일. 이사한 이래 최초로 가족다운 가족이 찾아든 날이었다!

“……휘…… 휘, 휘, 휘 군……?”

오후 무렵이었다. 풀에서 한 시간 남짓한 수영을 막 끝내고 거실 소파에 앉아 파출부 아주머니가 갈아준 토마토주스를 마시던 참이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경호원들을 앞세운 채 현관 안으로 들어선 청년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을 때, 인환은 들고 있던 주스 잔을 그대로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잔이 깨지진 않았지만 탁자며 카펫이 깔린 거실 바닥은 금세 붉은 토마토 얼룩 범벅이 되었다. 물론 더럽혀진 카펫들을 제대로 의식조차 못 한 인환이었다. 당혹한 메이드 하나와 아주머니가 달려와 잽싸게 뒤처리를 한 것도 또한 아주 나중에 가서야 어렴풋이 기억해냈을 따름이었다.

얼핏 보면 그와 복사판일 잘생긴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인환을 굽어보고 있었다. 옷차림도 넥타이까지 갖춘 말쑥한 감색의 슈트 차림이라 더더욱 그와 닮아 보였다. 그에게서 맞은 상처는 거의 아문 것 같았다. 얼굴만으로 봐선 전혀 상처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자신에게 복수를 하는 건 아닐까 저절로 긴장을 했지만 그는 기우였던가 보았다. 청년은 마치 인환의 허락이라도 구하는 듯한 몸짓으로 현관 앞에 얌전히 정지해 있었다.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차분한 음성이었다. 아마도 최초일 터였다. 이토록 차분하게 가라앉은 상태의 청년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는 것은. 물론, 위화감이 일 정도로 감정을 복받치게끔 만드는 일대 사건과 다름없었다. 청년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은 그 단 한마디 물음으로 말짱 날아가버렸다.

“그쪽과 단둘이 하고픈 얘기가 있어서 왔어. 형은 지금 윤열이 형과 함께 있다는 것도 알지. 윤열이 형한테 부탁했거든. 단둘이 얘기하고 싶으니까 형 좀 불러내달라고.”

역시 계획적이었나 보다. 청년의 말 그대로, 그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외출 중이었다. 아직도 부친상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 이 의원의 위로차, 친구인 김성준과 함께 여의도에 있는 이 의원 사무실로 불려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다 청년의 포석일 뿐이었다니.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어. 그간 윤열이 형한테서 그쪽 변호도 들을 만큼 들었고, 형이 무서워서라도 더 이상 그쪽을 어쩌진 못해. 혜윤이를 생각하면 물론 여전히 당장이라도 그쪽을 찢어발기고 싶지만, 어쩌겠어. 형이 그렇게나 좋다는데. 식구들 다 팽개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쪽과 살 맞비비며 살고 싶다는데. 오늘은 말 그대로 그쪽에 전해줄 말이 있어서 온 거야.”

차분한 시선에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령 거짓이 읽혔다 해도 청년의 요구를 거절할 순 없었을 게다. 욕설과 비웃음이 배제된 대화다운 대화에, 인환의 심장은 이미 완벽하게 무장 해제된 지 오래였다.

“……괜찮으니까 나가서 기다려주세요, 승수 씨. 부탁할 일이 생기면 부르겠습니다.”

마뜩잖은 기색이 역력한 두 경호원들에게 말했다. 자신과는 달리 그에게서 뭔가 강력한 언질을 받기라도 했는지, 경호원들의 얼굴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장례식장에서 청년이 자신에게 가한 난폭한 언행들을 생생히 목도하기까지 했으니, 경계심은 가뜩이나 더할 터였다.

“……정말 괜찮습니다. 저도 휘 군과 하고픈 얘기가 있어요. 잠시만 자리를 비켜주세요.”

좀 더 단호한 어조로 덧붙이자,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한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남자들이 마지못해 방을 나갔다. 청년의 얌전한 태도도 경호원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데 조금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현관 밖으로 나가는 경호원들을 스쳐 청년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청년이 인환이 서 있던 소파 앞까지 다가서자, 경호원들 이상으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던 파출부 아주머니와 메이드들도 잽싸게 다이닝 룸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아, 아, 아, 앉으세요, 휘 군…….”

우두커니 선 채 빤히 바라보는 청년의 어두운 눈길에, 다시금 더듬거리는 말투가 토해졌다. 역시, 청년 앞에서는 뭐라 해도 끔찍한 죄인일 수밖에 없는 빈천한 자의 자격지심일 것이다. 생김새까지 그와 닮은꼴이다 보니 도저히 긴장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마주 앉을 필요까진 없을 거야. 서로 원수지간인 건 세상이 다 아는데, 함께 손 부여잡고 쎄쎄쎄를 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솔직히 원한을 털어내 그쪽 가슴을 찢어발길 수도 없고……. 형들과 서로 피를 보면서까지 약속했는데 나도 더 이상은 못 해.”

“……?”

한동안 빤히 고통스러운 주시만 거듭하던 청년이 긴 한숨과 함께 내뱉은 대꾸였다.

“아까 말했다시피 난 그쪽에 전해줄 말이 있어서 온 거야. 내 말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말이지.”

“……?”

“이제 내게 빚을 갚아요, 선배님.”

“?”

“형수야.”

두근…….

자신도 모르게 몸을 휘청거렸던가 보았다. 낯빛 또한 시체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졌을 터였다. 동요가 역력할 자신의 행태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청년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훑어 올리는 게 보였다. 나머지 한 손은 재킷 안주머니를 더듬고 있었다. 이윽고 내민 손바닥 위에는 자그마한 은색 휴대전화가 하나 놓여 있었다.

“받아. 형수가 그쪽에 전해주라는 물건이야. 단축 번호로 7번. 누르면 형수와 직통으로 연결될 거야.”

“…….”

“그쪽이 받지 않겠다고 하면 그걸로 좋다고도 했어. 강요하진 않을 거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

“어릴 때라 나도 사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쪽은 형수 아기까지 잃게 했다지? 빚을 갚으라는 건 아마 그 얘기일 테고.”

“…….”

“솔직히 말할까? 내 본심은 여전히 그쪽이 물러나줬으면 하는 쪽이야. 악연도 이런 악연이 있을까 싶어. 윤열이 형이 그동안 그쪽이 당해왔던 고통들을 충분히 얘기해주기도 했고, 그쪽도 나름대로 피해자라는 윤열이 형의 의견에 일정 정도는 동의도 해. 하지만 그렇다고 그간의 끔찍한 비극이 다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나? 결코 좋게 끝날 순 없단 얘기지. 그쪽이 우리 가족 주변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한은 말이야.”

“…….”

“형수는 아직도 형을 사랑해. 성스러울 정도로 지극한 애정이지. 아마도 그쪽 못지않을걸? 혜윤이 때문에라도 그쪽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형수 일 역시 그쪽을 증오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지. 그렇게나 잘 어울렸던 형과 형수 사이를 갈라놓은 이도 그쪽이니까. 아무 문제도 없던 우리 잘난 형까지 결국엔 호모 소리를 듣게 만들고 말야. 가히 점입가경이라 할 수 있겠지.”

“…….”

“뭐, 어차피 세 사람 문제이니 나도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지만 말야. 그냥 내 진심은 그렇다는 얘기야. 그쪽만 물러나면 나머지는 모조리 해피 엔딩. 그만하면 매우 작은 희생 아닐까?”

“…….”

“받아. 받아서 어떻게든 형수와 쇼부를 봐. 이쯤에서 물러나든지, 아니면 불쌍한 우리 형수 한이라도 풀어주든지.”

“…….”

청년이 좀 더 팔을 뻗자 휴대전화가 코앞까지 들이밀어졌다. 시야가 온통 은색으로만 번쩍거리는 것 같았다. 비수처럼 형형한 심판의 색이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은 정신을 가까스로 가다듬으며 마주 손을 내뻗었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금속의 감촉은 서늘하면서도 매끄러웠다. 좀 더 힘주어 움켜쥐자, 코앞의 청년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 게 보였다. 유전자의 기적…… 시니컬한 실소까지 닮은꼴이라니. 역시 형제로구나. 망연한 감탄이 스쳐갔다.

“잘 생각했어. 생각보단 강단 있네. 제법 양심도 바르고.”

정말로 전달자의 임무일 뿐이었나 보았다. 냉소적인 일갈을 끝으로 뒤돌아선 청년은 더 이상 미적거리지 않았다. 현관 쪽으로 멀어지는 늠름한 장신의 뒤태를 눈으로 좇으며 보물단지나 되는 것처럼 여신의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

청년이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바통 터치를 하듯 총알처럼 다가드는 경호원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벙 찐 표정이 되는 사내들이 우스운 나머지 웃음은 더욱 진하고 강렬해졌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사지의 경련 또한 한가지였다. “괜찮으십니까, 장 선생님?!” 경호원 1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괜찮으세요?” 하고 덧붙인 이는 경호원 2. 안 괜찮을 건 또 무어람. “괜찮아요. 그냥 너무 기뻐서 그래요. 휘 군과 방금 화해를 했거든요.” 잘도 술술 흘러나오는 거짓말이었다.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단 채 감동을 연기했다. 미심쩍은 기색은 여전했지만, 그래봤자 인환보다 한참은 어린 연배의 사내들이었다. 산전수전 공중전, 별(감옥)까지 매단 닳고 닳은 늙은 여우를 지들이 당할까 보냐.

속으로 키들키들 어린 사내들을 비웃어주며 4층 작업실로 향했다. 가정집에 엘리베이터라니, 그 어떤 임금님도 부럽지 않을 궁궐이라고 감탄하며 공손히 4층 버튼도 눌러주었다. 아직은 낯설기만 한 아틀리에로 숨어들고 나서야 겨우 몸의 떨림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익숙한 물감 냄새만큼은 웬만한 마음의 동요쯤은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다정하고도 너그러운 친구였기에.

7번. 사라진 전달자처럼 인환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직통이라는 단축 번호를 누르자, 즉시 신호가 가는 소리가 들렸다. 시그널은 바이올린 연주곡이었다. 곡명은 「사랑의 인사」. 과연 그녀다운 ‘인사’ 같았다.

[여보세요.]

“…….”

[…….]

“…….”

[……빚을 갚을 요량을 하고 계신가요, 선배님?]

“…….”

[후후. 여전히 뻔뻔스럽고 욕심이 많으시네요.]

“…….”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되도록 빠른 시일 내로 연락 부탁드릴게요.]

뚜…….

그녀 또한 그녀의 심부름꾼과 한가지였다. 담담한 일갈과 냉랭한 비웃음, 그리고 단 1초도 망설임 없는 의지였다. 어쩐지 자신 또한 그녀들을 본받아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떠오른 즉시 멍하니 풀려 있던 넋을 챙겨들었다. 그의 눈에 띄는 일 없게 휴대전화부터 감춰둬야 할 터였다. 갖가지 화구들과 캔버스와 이젤과 물감 통들, 또 그것들이 줄줄이 수납돼 있는 선반들로 가득 찬 아틀리에를 조급한 시선이 이리저리 헤매 다녔다. 적절하면서도 안전한 금고를 마침내 찾아낼 때까지. 스무 개 넘게 나란히 세워져 있는 캔버스들 틈새로 비쭉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게 보였다. 살짝 밀어 넣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계를 살폈다. 5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청년이 볼일을 마쳤으니 그도 곧 돌아올 터였다. 어떡하면 대수롭지 않게 그의 주의력을 풀어헤쳐놓을 수 있을까. 역시 청년과 나름대로 화해했다는 쪽으로 밀고 나가? 궁리도 ‘그녀들’을 본받았는지 잽싸게 떠올랐다. 푸들거리는 마른 웃음이 좀체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 욕망을 품어도 되나요……?

공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무언가를 빌었다.

―……감히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제물을 바치듯 간절하고 간절한 기원이었다.

―……여전히 뻔뻔스럽고 욕심이 많으시네요…….

돌아온 답은 간결하면서도 단호했다. 음산한 심연의 소리였다. 표정 없는 새까만 어둠도 눈에 선했다. 과연 심판의 여신다웠다.

“……생일 파티요?”

[음, 파티씩이나 이름 붙일 만큼 거창한 건 아니에요. 그냥 인환 씨 친구들이랑 친한 단골들 몇만 불러서 겸사겸사 오순도순 밥 먹고 노는 거지, 뭘. 친목 모임에 더 가까울까나?]

마해영으로부터 초대 전화가 걸려온 건 인환의 생일 전날인 10월 23일 오후 무렵이었다.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는 미메시스의 주인장답게 막 잠에서 깨어났는지 졸음기가 역력한 나른한 목소리였다. 옆에 손 사장까지 있는지, 점막이 부딪치는 것 같은 질척하니 젖은 소리까지 얼핏 들려와서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 인환이었다.

생일 따위 잊고 산 지가 언젠데 느닷없는 생일 파티란 말인가. 마해영의 입에서 생일 파티란 말이 떨어지자마자, 엄마 잡아먹은 개 호로새끼 주제에 생일은 무슨 하고 시니컬한 대꾸가 흘러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야만 했다. 딴에는 지옥에서 생환한 친구가 애틋해 나름대로 이벤트를 치러주겠다는 건데 그 순순한 호의까지 조소할 위험이 있었던 거다. 그렇다고 선뜻 가겠다고 하기도 뭐해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마해영은 더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근데 아직 파트너한테서 못 들었어요? 전해주겠다고 했는데? 생일날 파티 열어줄 생각인데 어떻겠냐고 먼저 물어봤지. 원래 그런 건 파트너가 우선권이 있잖아. 근데 어째 흔쾌히 허락해주더라고. 자긴 따로 계획이 있다면서.]

그건 또 금시초문이었다.

“……그…… 위야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뭐야, 정말 못 들은 모양이네? 내가 괜히 파트너 씨의 서프라이즈한 뭔가를 미리 산통 깨는 건 아닌가 몰라?]

잠깐 당황한 듯하더니 이내 사내가 킥킥 웃음을 터트린다. ‘고거 쌤통이다’의 심술궂은 뉘앙스가 절절해서 인환도 따라 웃음을 물지 않을 수 없었다.

[파트너 씨가 뭐라 그러면 나한테서 미움 단단히 받고 있으니 앞으로도 조심하라고 그래요. 함부로 비밀 같은 거 터놓지도 말고. 언더스탠?]

“……후후후, 서프라이즈는 무슨 서프라이즈겠어요, 형. 위야는 그런 거 안 좋아해요. 딱 봐도 무뚝뚝하게 생겼잖아요. 아무튼 꼭 가긴 할게요. 고마워요, 형. 지지리 못난 동생 이렇게나 신경 써줘서.”

[신경 쓰는 거 아니라니깐 그러네. 그저 빌미야, 빌미. 나도 이참에 하루 땡땡이치는 거지 뭘. 그럼 이쁘게 하고 와요. 다들 인환 씨 보고 싶다고 난리야. 어떻게 변했는지 잔뜩 기대하고 있어요. 하긴 무리도 아니지. 거의 10년 만이잖아?]

10년. 이쁘게. 변했는지…… 몇 가지 단어들이 뇌리 속에서 복잡하게 뭉뚱그려지며 우울감을 부추겼지만, 모른 체했다. 새삼 거죽을 꾸민다고 썩을 대로 썩은 속내가 감춰지는 건 아닐 게다. 옛 친구들이 잔뜩 실망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 하긴 여기서 더 이상 실망시킬 일이 또 뭐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만.

“……형은 다 봤잖아. 다들 충격받지 않게 미리 주의 좀 시켜줘요. 형보다도 훨씬 늙어버린 아저씨라고.”

[이거 왜 이러시나, 우리 귀여운 인환 씨? 아저씨라고 누가 그래? 진짜 아저씨를 앞에 두고 누가.]

“하하하하, 그거 고대로 반사할게요, 형.”

‘아저씨’의 정의에 대해 이견을 보이며 졸린 목소리로 계속 구시렁거리는 마해영을 가까스로 달래 전화를 끊었다. 눈은 자연스럽게 시계를 향했다가, 작업대 한쪽 구석에 세워진 탁상용 달력으로 이동했다.

10월 24일. 정말로 자신의 생일이었다. 챙겨주는 이도 없었고, 그 주인조차도 챙기길 팽개친 덕분에 10년 동안 완전히 잊고 산 날짜였다. 저 나락으로 떨어진 해가 93년이니, 그야말로 딱 10년 만이었다. 이리 생일임을 자각하며 달력을 보게 되는 것도.

1993년 10월 24일. 아마도 그해 생일이 마지막이었을 게다. 역시 옛 영화처럼 흐릿하게 남아 있는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의 그날도 자신은 제대로 된 인간은 아니었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로 다친 엄마가 그래도 정성껏 마련해준 생일상을 앞에 놓고서도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자신이었다. 어떡하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만 미친 듯이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엄마 잡아먹은 호로새끼가, 그게 엄마가 선물해준 최후의 생일상이라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선…….

가슴이 답답해졌다. 긴 한숨조차 응어리진 가슴 언저리 어딘가에 걸려 좀처럼 속 시원히 빠져나오지 않았다. 떠올려봤자 우울증만 가중시키는 기억들을 다시금 저 지하 금고 속에 잠그고 현실을 직시했다.

마주한 300호 크기 대형 캔버스가 보였다. 캔버스를 지지할 만큼 맞는 이젤이 없어 벽에 세워둔 채 작업하는 중이었다.

과연 자신의 수호천사라고, 화면을 메워나갈수록 김강원에겐 감사하는 마음만 일었다. 확실히 그네의 조언대로 작품 크기를 키우니, 작품에 대한 만족도도 훨씬 커지고 있었다. 크다고 다 화면 장악력이 좋은 건 아니지만, 확실히 자신의 작품은 큰 쪽이 더 매력을 주고, 또 주제를 드러내는 데도 훨씬 유효한 것 같았다. 진즉에 크기를 키워볼걸 하고 뒤늦은 후회도 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심판의 여신으로부터 어떤 징벌이 떨어질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생애 마지막으로 완성하는 작품이 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능한 한 더 많이, 더 열심히 그려두고 가고픈 절실한 이유였다.

세정해둔 붓을 들고 시계부터 살폈다. 어느새 4시가 지나 있었다. 저녁 식사 전까지 계획했던 만큼 끝내놓자면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그가 퇴근하길 기다려 늦은 저녁을 먹고 나면 그 이후엔 작업을 할 시간은 더 이상 없다고 봐야 옳았다.

퇴근해서 다음 날 출근할 때까지 함께 있는 시간엔 거의 단 한순간도 인환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남자였다. 한 번은 정말로 화장실에 볼일을 보는 데까지 따라 들어오려고 해서 인환을 질리게 한 적도 있었다. 거의 병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집착이라, 인환으로서도 두 손을 바짝 든 상태였다. 가끔, 좀 더 그림에 몰두하고픈데 방해를 받으면 답답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의 그 절절한 무언가가 싫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니, 싫기는커녕 그런 그를 생생히 자각할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으로 울고 싶은 기분이 되곤 하는 인환이었다. 그것은 기쁨 같기도 하고, 혹은 슬픔 같기도 했다. 가슴이 조여들 정도로 안타까운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서였다. 그냥 뭐든 다 받아주고 싶었다. 그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거라면 그냥 다 해주고 싶었다. 그를 욕심내도 되는 건지, 아니면 여전히 그는 자신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건지, 혹은 그의 진심은 무엇인지, 그가 자신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그 모든 수수께끼를 캐는 일에도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현재를 살고플 뿐이었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이 이상야릇한 시공간을 소중히 품고 싶을 뿐이었다. 마치, 곧 꺼져버릴 손안의 촛불을 응시하는 것처럼 안타까운 기분으로. 그랬다. 시간은 그리 썩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리기에도 부족했고, 그의 충실한 성노예 역할을 수행하기엔 더더욱 부족한 것 같았다. 그저 안타깝고 또 안타깝기만 한 시간들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한눈에도 다 들어오지 않을 벽화 수준의 캔버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긴 심호흡과 함께 단전에 기운을 모으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눈을 감은 채 가고자 하는 곳만 일직선으로 의식을 집중했다. 한동안 호흡을 고르는 사이, 감은 좀 더 분명해졌다. 비로소 눈을 뜨고 붓에 물감을 입혔다. 충분히 붓이 젖어들었다 판단되는 순간, 캔버스 위로 크게 팔을 휘둘렀다. 저 멀리,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리는 게 설핏 보였다.

더 이상 붓질을 계속할 수 없으리만큼 작업실이 어두워졌다. 해가 넘어간 때문이었다. 마지못해 몰입 상태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엔 이미 땅거미가 한가득이었다.

얼떨떨해진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뻐근해진 오른팔을 주물렀다. 어둑한 일몰의 정도며, 고소하게 풍기는 음식 냄새들이며, 대충 식사 시간일 듯싶은데 부르러 오지 않는 메이드 아가씨들이 이상했다. 그가 퇴근하지 않는 한 저녁밥은 먼저 먹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집 식구들은 일단 정해진 시간만 되면 무조건 작업실 문을 노크하곤 했다. 그가 단단히 언질을 준 때문이리라. 인환 또한 그럴 필요 없다고 매번 간곡하게 부탁하는데도, 다들 막무가내였다. 확실히 ‘군식구’보다는 집주인의 명령이 우선하는가 보다고, 인환도 곧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광도 사라진 마당에 더 작업할 생각도 없어서 도구들을 정리한 뒤 아틀리에를 나왔다. 그가 올 때까지 쉬기도 할 겸, 다이닝 룸으로 내려가보기 위해서였다. 헛걸음임을 알면서도 매번 아틀리에 문을 노크하던 아가씨들이 안 오니 그도 조금 신경이 쓰였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택해 걸어 내려왔다. 올라올 때에야 조금 부담스럽지만, 내려갈 때에는 운동 삼아 늘 걸어서 내려가는 인환이었다. 작업으로 뻐근해진 몸에도 그게 한결 더 좋은 듯했다. 여러모로 4층에 작업실을 두길 잘했다고 새삼 자신의 결정에 뿌듯한 만족감이 일었다.

4층에서 내리 이어진 계단을 느긋이 주파한 뒤 막 1층 복도로 접어들려는데 계단참에서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알록달록 어른거리는 그것에 위화감이 느껴져서 계속 시선을 모으고 다가가보니, 분홍색과 노란색이 대여섯 개나 어우러진 풍선들이었다. 색색의 리본까지 함께 묶여 있어 제법 경쾌하고 화사한 분위기를 주고 있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집 안 인테리어엔 결코 안 어울리는 아이템이긴 했지만 말이다. 처음엔 놀랐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하게 되었다. 이게 왜 여기 매달려 있는 거지? 하고 되뇌며 복도를 따라 걸어 나오는데, 예의 집 안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저 아이템들이 집 안 곳곳에서 인환의 시선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벽난로 위에도, 맞은편 웨딩 사진 가에도, 코너마다 놓여 있는 커다란 화분들에도, 프로젝터 스피커들에도 몇 개씩, 중후한 대리석 소파 테이블과 코너마다 놓여 있는 앤틱한 콘솔들에도, 무슨 호텔 연회장처럼 넓은 거실 천장에서부터 화려하게 매달려 있는 커다란 샹들리에까지…… 온통 알록달록 울긋불긋, 화사한 파스텔 톤 풍선들과 리본들 천지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앙증맞은 새하얀 데이지 꽃이 드문드문 걸린 풍선들을 보좌하듯 여기저기 빈 틈새에서 한층 풍성한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거실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대리석 소파 테이블 위엔…… 아마도 이 모든 특별 인테리어들의 주인공 격일 커다란 장미 꽃바구니와 생일 케이크가 보무도 당당하게 놓여 있었다. 케이크는 눈처럼 흰 생크림으로 가득 덮여 있고, 꽃바구니는 붉은 장미만큼 노골적으로 화려한 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호사스러운 존재감을 주는 예쁜 핑크색이었다. ‘해피 버스데이 투 장인환’이라고 써 붙인 작은 현수막도, 샹들리에에 매달린 풍선들과 함께 거실 중앙을 가르듯 가로로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새겨진 글씨체조차도 자신의 비뚤비뚤한 악필체를 그대로 닮아 있었다.

더 이상 놀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인환의 눈은 이미 휘둥그레질 대로 크게 휘둥그레져 있었으므로.

저 풍경들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아니, 낯이 익다기보다 자신의 기억 속에 깊숙이 파묻혀 있던 그 ‘무언가’였다. 아주 오래된 일기장을 우연찮게 찾아내 새삼 읽어볼 때의 심정이라고나 해야 할까? 놀라우면서도 우습고, 그리우면서도 창피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그 몇 배는 더 애잔한 슬픔이 느껴지기도 했다. 얼굴이 몹시 달아오르고, 흥분으로 손가락 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두근두근, 봄바람처럼 가슴이 몹시 설렌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릿하게 목이 메었다. 눈시울도 금세 뿌옇게 차올라서 입술을 자꾸만 깨물어대며 감정을 삭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소동의 중심에 바로 그가 있었다!

언제 돌아왔는지, 그는 크림색 면바지에 짙은 밤색의 니트 티 차림이었다. 샤워까지 마친 건지, 수염 자국 하나 없는 개운한 얼굴에 머리카락은 조금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를 덮고 있는 것은 역시 어딘가 낯익은 파란색 반짝이 고깔모자였다. 무슨 잡지 화보 모델처럼 극상으로 아름다운 용모의 남자가 쓰니, 그 우습고도 부자연스러운 아이템조차 그리 멋들어져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손바닥보다도 작을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아마도 그의 작품임에 분명할) 새롭게 단장된 집 안 곳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열심히 찍어대고 있었다. 먼, 먼 과거 시간의 어느 한 지점에서 자신이 했던 일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저 놀랍기만 했다. 아니,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시공을 뛰어넘어 완벽하게 재현된 장면 자체보다도, 그 세세한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몽땅 다 기억하는 그가 몇 만 배는 더 놀라웠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아니, 경악스럽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한 것은, 그 배후에 존재하고 있을 그 누군가의 ‘감정’이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철저하면서도 은밀하게 숨겨왔을지도 모를 어느 ‘특별한 감정’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입술을 깨물어도 기왕에 넘쳐나기 시작해버린 것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흐느낌까지 새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역시 좋지 않았다. 매우매우 좋지 않았다. 이건 반칙이었다. 그는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이리 현실감을 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래. 꿈은 꿈일 뿐이었다. 그는 영원히 꿈속의 왕자님이어야만 했다. 영영 꿈속의 지배자일 뿐이어야 했다. 현실로 욕심내선 절대로 안 되는 남자였다. 욕심을 내기 시작하는 그 순간 즉시 파멸이었다. 종말이었다. 그러니 이건 좋지 않았다. 매우매우 좋지 않은 징조였다.

디카를 들고 주침실까지 들어갔던 그가 도로 걸어 나오다 말고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제야 인환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숨소리조차 죽이고 계단참으로 이어지는 복도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으니 그가 쉬이 눈치를 채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햇살처럼 환한 웃음이 물렸다가, 곧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마침내는 선명하게 고통을 새긴 얼굴이 되었다. 시선만은 내내 눈물범벅인 인환의 것을 줄기차게 물고 있었다. 억지로 말려 올라간 입술 덕에 웃음조차 뼈아픈 것이 되고 말았음은 물론이었다.

“……나빠…… 나빠…… 나빠…… 정말 너무 나빠, 너…….”

진심이 고스란히 담긴 원망이었다. 온통 뿌옇기만 해서 잘 알아볼 수도 없건만, 최대한 심통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시선을 포갠 채 한동안 아프게 웃기만 하던 그가 이윽고 천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서자 상큼한 샤워코롱에 섞인 그의 체취가 폐부 가득 밀려들었다. 한 걸음의 틈만을 남겨두었을 때 그의 팔이 뻗어왔고, 이내 상반신이 그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이 니트 티를 사이에 두고 늠름한 가슴팍에 상냥하게 문질러졌다. 포옹은 몹시도 조심스러웠다. 등줄기와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고 있는 손길을 통해 인환 자신만큼 그도 몹시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진짜 축하 인사는 이따 자정 넘으면 할게. 땡 하고 종 치면 가장 먼저 축하해줘야지. 10여 년 전의 누구랑은 달리 미적거리다 후회하긴 싫으니까. 케이크에 촛불도 켜고…… 축하 선물도 주고…… 해피 버스데이 노래도 멋지게 불러줘야겠다…….”

무언가 잔뜩 억눌린 듯한 나지막한 중저음도 역시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게 또 슬프고 안타까워서, 원망과 미움과 두려움은 저만치로 물러갔다. 조심조심 팔을 들어 그의 등을 마주 끌어안아주자, 그가 설핏 몸서리를 치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거의 동시에 쪽 하고 정수리 위에 떨어진 키스는 그대로 한참을 인환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었다.

“……어…… 어, 어, 언제 왔어?”

등줄기를 지나 머리카락 틈을 헤집고 들어온 그의 손가락들에 아늑함을 느끼며 겨우 목소리를 이끌어냈다. 훌쩍이는 코맹맹이 소리가 자신이 듣기에도 우스꽝스러웠다. 대답처럼 상반신을 감은 그의 팔 힘이 좀 더 단단해졌다.

“……차 소리도 못 들은 거 같은데…….”

더 이상 원망하기 싫었다. 무섭대도 어쩔 수가 없었다. 뭐든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싶다고 작정하지 않았나. 그의 진심을 읽지 못해 전전긍긍하지도 않기로 하지 않았나. 그러니 그만두자. 무서워하지도 말자. 그냥 이 순간을 살자. 꿈이어도 좋고, 현실이면 또 어떤가. 헤아리지 말자. 분별하지도 말자. 그저 그냥 이 눈물겹도록 소중한 남자만 생각하기로 하자.

“……4시 좀 넘어서. 그림 그리면 넌 딴 세상이잖나. 차 소리가 들릴 리 없지. 준비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아니까 서둘렀다.”

“…….”

“10여 년 전에 내 강아지가 하는 걸 안 보는 척하면서 열심히 훔쳐봤었거든.”

“…….”

“리본 만들어 묶고, 걸고…… 풍선들은 이미 며칠 전부터 열심히 불어두었지.”

“……다 네가 준비한 거라구?”

“물론.”

“……쪽 팔리지도 않나…… 아주머니들이랑 메이드 아가씨들 다 훔쳐보고 있었을 텐데…….”

“뭐가 어때서. 내 마누라 내가 직접 축하해주겠다는데.”

시시콜콜한 수다가 이어지는 사이 그의 목소리도 점차 안정적인 것으로 변했다. 쓰다듬는 손길도 더는 떨리지 않아서 안심한 만큼 다시 또 목이 메었다. 긴장했었던 걸까? 아니면 겁을 먹었던 걸까? 자신만큼이나? 뭐가 무서웠을까? 과거를 떠올리고 내가 두려워하거나 아파할까 봐? 아니면 이렇게 감정이 복받쳐 울까 봐?

“……그, 그래도…… 내 나이가 몇 갠데 고깔모자야, 고깔모자가……. 그땐 좀 유치해도 젊을 때였으니깐…… 밑으로 사원들 수만 명 거느리는 글로벌 오너가 체통이 있지…… 메이드 아가씨들이 너 얼마나 숭배하는지나 알어? 고깔모자 쓰고 풍선 불어대며 설치는 꼴 보고 오늘 무지 많이 실망했을걸……?”

“무슨 소리. 다들 애처가 서방님 둔 네가 부러워서 죽겠다던데?”

“……지, 진짜? 진짜로 그 쪽 팔리는 짓을 다 보고 있었다고?”

“그럼. 여기저기 풍선 걸 만한 데 조언도 해주기까지 했는데? 볼수록 성실하고 싹싹한 처녀들이더군. 월급도 좀 더 올려줄까 봐.”

“……그, 그런 예쁜 처녀들 앞에서…… 진짜 뻔뻔스럽다, 너…….”

하하하 하고 터진 웃음은 싱그러우면서도 애잔했다. 자신이 진정하니 그도 따라서 급격하게 안정을 찾는 모양새가 슬프면서도 기뻤다. 절대 읽고 싶지 않아도, 피부 깊숙이까지 선명하게 전해지기만 하는 그의 진심이었다. 며칠 동안 기백 개가 넘는 풍선을 불어대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기대를 했을 것이며, 또한 동시에 얼마나 겁에 질리곤 했을 것인가? 오, 하느님……!

“……밥 먹자. 아주머니가 저녁 차려놓고 퇴근하셨어. 메이드들도, 최 씨 내외도 오늘은 더 이상 본채 걸음 안 하게 말해두었으니까 신경 쓰지 않고 둘이서만 즐길 수 있어.”

다정하게 뱉어지는 권유와 함께 상반신을 죄던 포옹이 풀렸다. 머리를 쓸던 손이 턱으로 내려와 인환의 고개를 들게 했다. 시선이 마주쳤다. 눈물겹도록 다정한 눈길이었다. 웃음을 머금은 뚜렷한 이목구비의 얼굴은 마냥 기적처럼 아름다웠다. 비스듬히 눌러 쓴 유치한 고깔모자조차 무슨 후광처럼 보였다. 턱 끝에 머물던 손길이 얼굴로 올라와 눈가와 뺨 언저리를 차례로 어루만져댔다. 그것이 그의 품 안에 닦이고도 아직 좀 더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몰래 지우는 애틋한 몸짓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은 인환이었다.

“……밥 먹고, 신 프로 DVD도 사 왔으니까 영화도 보고, 음악 크게 틀어놓고 춤도 추고…… 아, 그게 좋겠다. 보일러 온도 최고로 해놓고 내일 아침까지 내내 발가벗고 노는 거야. 안 쓰는 방들까지 다 돌아다니면서 동영상도 찍고 하자. 디카로 좀 찍어두긴 했지만, 그래도 며칠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꾸민 건데 사진 몇 장만 남기는 걸로는 좀 아쉽잖나. 나중에 심심할 때마다 틀어보면 정말 재미있을 거야. 물론 널 주인공으로 해서 찍어야지. 인테리어만 찍는 거면 아무 의미도 없잖나. 맨 마지막엔 풍선들 다 한데 모아서 거기다 발가벗은 널 쏙 밀어 넣고 찍을 거야. 괜찮지? 젠장, 그건 또 얼마나 귀여울까?! 크게 인화해서 침대 밑에 숨겨두고 매일매일 들여다보는 것도 정말 즐겁겠다.”

뭘 하고 논다고? 뭘 찍어? 한 템포씩 느리게 전해지는 의미들에 멍하니 그의 입술만 바라보는데, 눈가로 쪽 하고 립 키스가 떨어졌다.

“자꾸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밥이고 노는 거고 뭐고 당장 침대로 끌고 가고 싶어진단 말이다.”

쪽쪽쪽. 쪽쪽. 연달아 얼굴 곳곳에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는 키스였다. 미처 숨을 가다듬기도 전에 다시 한 번 힘차게 끌어안기고, 껴안긴 채 발끝까지 들어 올려져서는 서너 바퀴를 빙글빙글 돌고, 다시 조금 떨어져 연거푸 짙은 입맞춤을 당했다. 과하다 싶을 만큼 격정에 찬 행동에 인환은 그저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집 안을 꾸미는 내내 긴장했던 것이 일시에 풀리는 바람에,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덕분에 그가 속사포처럼 주워섬긴 수다의 의미를 채 다 이해하기도 전에 인환은 별 반항도 못 하고서 완전히 휩쓸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던 게 아닐까…… 하고, 이 역시 아주 나중에 가서야 미심쩍어했던 인환이었다.

그 밤, 뻔뻔스러울 지경으로 터무니없던 그의 ‘공약’들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생일(몇 시간 이르긴 했지만)이라고 평소보다 더 정성껏 마련된 듯한 저녁 식사를 마치곤 그의 품에 안겨 영화를 봤다. 「엑스맨」 2와 반지의 제왕 2편인 「두 개의 탑」이었다. 「엑스맨」 2는 보다 지루해져서 20여 분 만에 반지의 제왕에 자리를 내주었고, 그마저도 끝까지 지켜볼 수는 없었다. 영화 상영 내내 추행을 거듭하다가 결국 완전히 흥분해버린 그에게 거실 바닥에서 알몸이 돼버린 때문이었다. 삽입 섹스까진 가지 않았지만 그보다 몇 배는 더 야할 69 체위로 오럴 섹스와 페팅 섹스를 했다. 그는 한 시간이 넘게 발정을 계속했고, 그사이 세 번이나 오르가슴에 올랐다. 흑마법사 사루만의 성채가 초토화되는 소리를 백뮤직 삼아 그는 야수처럼 교성을 질러대며 인환의 온몸에 사정을 했다. 두어 시간에 걸친 마라톤 섹스 후에도 기진맥진한 인환의 알몸을 구석구석 물고 빨아대며 지분거리길 계속한 것은 물론이었다. 통사정을 한 끝에 겨우 욕실로 갈 수 있었고, 욕실에선 페팅인지 샤워인지 모를 음란한 애무를 주고받은 끝에 기어코 삽입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쏟아지는 샤워 비를 맞으며 미친 듯이 한계까지 찔러대는 그의 흉기에 그저 가쁜 숨만 할딱일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지쳐버린 몸은 결국 그의 팔에 안겨서야 욕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실로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자정을 십여 분 정도 남겨둔 시점이었다.

바스 가운 차림의 인환을 소파에 앉힌 그는 즉시로 생일 케이크를 세팅했다. 섹스를 하느라 벗어 던졌던 고깔모자를 다시 고쳐 쓰고, 눈처럼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 위에 39개의 촛불을 켜고, 막 자정을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가 울리자마자 인환이 앉아 있는 곳까지 케이크를 들고 와 소원을 빌게 했다. 소원 빌기를 마치고 촛불을 끌 땐 함께 불어주기도 했다. 생일 축하 노래는, 물론 지독한 음치인 그답게 인환의 배꼽을 빠지게 만들었다. 케이크를 양손에 받쳐 든 채로 음을 따라잡기 위해 애쓰는 무표정한 얼굴은 오히려 잘생겨서 더 웃겨 죽는 그런 아이러니였다. 노래 선물 뒤엔 진짜 선물 증정식도 있었다. 장미 꽃다발에 곁들여진 옅은 핑크색의 상자에선 가죽 재킷이 나왔다. 재킷 역시 흐릿하게 핑크빛이 감도는 곱디고운 아이보리색이었다. 늙은 몸엔 절대 안 어울릴 색깔이건만 그는 극구 입어보라 성화를 부렸다. 마지못해 입고 거울을 보니 의외로 잘 어울려서 놀라야 했다. 그는 흡족하게 웃으며, 지금처럼 발가벗은 채 재킷만 입고 있으면 하루 종일 발정할 수도 있다고 외설스러운 망발을 덧붙였다. 끈끈해진 호색한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재킷 아래, 움직일 때마다 보일 듯 말 듯 드러나곤 하는 자신의 치부였다. 뜨끔해선, 서둘러 재킷을 벗고 도로 바스 가운을 걸쳤음은 물론이었다.

샴페인도 터트리고, 조각낸 케이크도 샴페인과 함께 나누어 먹고, 마침내는 그의 소원대로 다시 알몸이 돼서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숨바꼭질과 베개 싸움을 했다. 어린애처럼 울고 웃고 노는 내내 그는 줄곧 손에서 놓지 않고 있던 캠코더로 틈틈이 도둑 촬영을 했음은 물론이었다. 실감나게 늑대 울음소리를 내며 다가오곤 하는 그의 개구진 도발에 혼비백산, 이 방 저 방 쫓겨 다니느라 반항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모든 수라장이 끝난 새벽 3시 무렵, 인환은 너무나 지쳐서 3층으로 향하는 층계참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그대로 곯아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나타난 그에게 소중히 품에 안겨 1층으로 옮겨진 것까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는데, 풍선 더미 속에 푹 잠긴 채 알몸 그대로 캠코더에 녹화된 것만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촬영 시간만 해도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가 뉴욕으로 출장을 떠나고 난 며칠 후, 그의 서재에서 캠코더를 발견하고 나서야 겨우 알아챌 수 있었다. 운동장처럼 넓은 집 안을 장식했던 기백여 개의 풍선들을 그 야밤에 혼자 전부 다 떼어낸 그의 체력과 집요함엔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촬영 시간까지 합친다면 그는 틀림없이 거의 날밤을 새웠을 터였다. 물론……. 그 집요함의 배후에 존재하고 있을 누군가의 절절한 ‘감정’은 그냥 모른 체하기로 했다. 어차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철저하면서도 은밀하게 숨겨져왔을 ‘특별한 감정’일 거였다. 이제 와 시비를 가린들 큰 의미는 없을 터였다. 그랬다.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그래야만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방금 일어났다고? 좀 자긴 했나?]

폴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쩐지 기운이 넘쳤다. 흥겨운 웃음기마저 역력해서, 그저 듣기만 하는 인환조차 무심코 미소가 고일 정도였다. 자신이 잠들고 바로 따라 잠이 들었다고 해도 고작해야 두세 시간 자고 출근했을 게 분명한데, 피로한 기색이란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어, 일곱 시간이나 잤는걸. 너 나가는 것도 까맣게 몰랐잖아. 넌 별로 잠도 못 잤을 텐데 안 피곤해?”

[피곤하긴. 귀여운 마누라랑 실컷 놀았더니 외려 기운이 넘치는구만. 날밤 새우고 사나흘 동안 한대도 절대 피곤할 리는 없지.]

“…………………….”

[그렇게 얼굴 붉히지 마. 또 안고 싶어지니까.]

“……귀, 귀신!!! 호색한!!!”

[아하하하하…….]

두근……. 나지막하면서도 호쾌하게 퍼지는 중저음의 파안대소였다. 저 깊은 내장 안쪽까지 간질간질할 지경으로 매혹적인 웃음소리였다.

[미메시스엔 언제 나갈 건가?]

웃음소리가 잦아지자 그가 불쑥 물어왔다. 그제야 마해영과의 약속을 떠올린 자신도 한심스러웠지만, 그보다는 전해진 의미에 새삼 다시 놀라버린 인환이었다. 마해영과 허심탄회하게 사담을 나누는 모습의 그가 아무리 해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까닭이었다. ‘……근데 아직 파트너한테서 못 들었어요? 전해주겠다고 했는데? 생일날 파티 열어줄 생각인데 어떻겠냐고 먼저 물어봤지. 원래 그런 건 파트너가 우선권이 있잖아. 근데 어째 흔쾌히 허락해주더라고. 자긴 따로 계획이 있다면서…….’ 어제 오후 마해영과의 통화 내용이 줄줄이 리플레이 되며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어, 글쎄…… 아, 아마도 저녁때쯤? 모여서 밥 먹는다고 했으니까…….”

‘해영이 형이랑 통화했었다며? 어땠어? 해영이 형이 툴툴거리진 않았어?’ 하는 물음들은 그냥 속으로 삼켜졌다. 물어볼 시기가 이미 지나버린 죽은 질문이었기에.

[그래. 예쁘게 하고 나가. 아, 내가 어제 선물해준 재킷이 좋겠다. 저번에 사준 까만 카고 바지와 꽤 잘 어울릴 거야.]

“……어? 어어…….”

[내 말대로 해. 잘 어울릴 테니까.]

“……어…… 어어…….”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는 거니까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즐겁게 놀도록 하고.]

“……어…….”

[……나도…… 곧…….]

“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출장 준비 때문에 나도 좀 늦을 테니까, 괜히 일찍 들어오려고 무리하지는 마.]

“……어, 언제 퇴근하는데?”

출장이라는 한 마디에 금세 풀이 죽는 스스로를 느꼈다. 그랬다. 그는 열흘이 넘는 장기 출장을 위해 내일 미국으로 출국할 예정이었다. 뉴욕에서 열리는 본사 주주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반드시 그가 참석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행사였지만, 그는 며칠 전만 해도 절대 한국을 뜨려 하지 않았었다. 그건 물론 전처인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가 한국에 있는 한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달초에 집을 방문한 동생 휘와 화해도 했고, 또 동생을 통해 그녀가 별로 딴마음을 품지 않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하는데도, 그의 의심과 경계는 스러질 줄을 몰랐다. 다행히 며칠 전, 그녀가 미국으로 출국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녀도 없는데 굳이 출장을 미뤄야 하겠냐고 인환이 간곡히 얘기하자, 한동안 망설이는 것 같던 그도 마침내 마음을 바꾼 것이다.

[음, 아무래도 10시는 넘어야 하겠지.]

“……그렇구나…… 그래도 가능하면 빨리 들어와, 위야. 어제 잠도 별로 못 잔 거 같은데…… 장시간 비행기 타려면 조금이라도 더 피로를 풀어둬야 하잖아…….”

물론 비행기 어쩌고저쩌고는 핑계였다. 얼마 안 남은 시간이나마 되도록 함께 있고픈 욕심의 발로였을 뿐이다. 막상 그가 떠난다고 하니 가슴속이 뻥 뚫리는 듯한 상실감을 어쩔 수가 없었다. 실은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거의 유일무이한 기회라는 것도 알고, 고통스럽지만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이라는 것도 안다. 먼저 매듭을 만든 쪽이 자신이니 풀어줄 의무 또한 자신에게 있다는 것도 안다. 물론 한 가지, 그녀를 통해 반드시 확인하고픈 것 또한 있다. 그를 통해서는 차마 더 이상 캘 수 없었던 것. 현실로 확인하기가 무서워 순간순간 자신을 공포로 가부러지게끔 했던 그 전율스러운 진실 하나.

꼭 묻고 싶었다. 아마도 그녀는 진실을 대답해줄 수 있을 터이다.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것과 진배없을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진실일지언정 자신은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를 알려주는 가장 적절할 전령사라면 바로 그녀일 터였다. 그녀야말로 자신이 진실과 직면하고도 미치지 않도록 힘이 돼줄 터였다. 그랬다. 원수는, 한편으로는 가장 강력한 생의 동력일 수도 있는 거였다. 그러니 미룰 수 없었다. 회피할 수 없었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 독배가 확실하긴 하나, 그 이상으로 부활의 생명수가 될 가능성 또한 확실히 열려 있었기에.

물론, 그렇다고 그와 마지막이 될지 모를 이별에 마음이 마냥 평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죽이기까지야 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것은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됐건 인환 자신은 그녀에겐 자식을 죽인 원수였다. 비록 3개월짜리 태아였을망정, 목숨 값은 오로지 목숨으로만 갚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도 할 말은 없을 터였다. 뿐이냐, 자신은 끔찍이도 사랑하는 남편을 가로챈 교활한 살쾡이이기도 했다. 10년 전엔 그가 곁에 있어 자신에의 징벌을 유예했을지 모르지만, 그와 이혼한 마당이니 그녀를 제어해줄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도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지 않은가. 원수 주제에 그의 곁에 정부(라기보다는 성노예겠지만)로 달라붙어 수도 없이 섹스를 나누고 있는 자신이 곱게 보일 리는 결코 없을 터였다. 질투와 그리움이 극에 달하면 어떤 상태가 되는지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옥의 심연을 품어본 자는 같이 심연을 품은 자를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는 법이었다. 지난번 이윤철 옹의 장례식에서 마주친 그녀는 이미 심연이었다. 지옥이었다. 지옥으로 화한 그녀가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요리할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응? 아주 늦지만 않으면 피로 잘 풀리는 마사지도 해줄게…….”

[그래. 뭐, 그거야…… 마사지라…… 후후, 노력은 해보지.]

절실하게 덧붙여보지만, 기대와는 달리 무심한 답변이 떨어졌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 흥겨운 웃음소리에서 읽히는 것은 개구진 한량의 장난기였다.

“……응…… 그, 그럼 마저 일해. 이따 보자.”

자꾸만 목이 메는 것 같아서 뭐라고 더 놀리고 싶어하는 그를 모르는 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한동안은 휴대전화만 든 채로 멍하니 앉아 있어야 했다. 상실감이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반쯤 나간 넋은 곧 울리기 시작한 거실 괘종시계 소리가 되찾아주었다. 11시를 치고 있었다. 어영부영하다 보면 또 저녁일 터였다. 그랬다. 넋 놓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찰싹 하고 가볍게 뺨을 때리는 것으로 파이팅을 주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섯 시간 정도는 작업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남은 한 시간 정도는 그의 명령대로 잔뜩 멋을 부리고 미메시스로 직행할 다짐도 했다. 옅은 핑크빛이 감도는 우윳빛 양가죽 재킷에 까만 카고 바지라니. 킥킥 하고 애잔한 실소도 터졌다. 언감생심 10년 전의 자신이라면 모를까, 제대로 소화할 수나 있을까 싶지만, 그가 모처럼 코디까지 해준 옷이니 최대한 어울리도록 노력해보고 싶었다. 아무렴. 다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모조리 다. 시간이 없었다. 너무나 부족한 것만 같았다.

“……별로 마시지도 않는 것 같던데 많이 힘들어요?”

마해영이 등을 탁탁 두드리며 걱정스레 물어왔다. 두드림이 일으킨 진동 덕분에 한 번 더 시원스레 토해내자 그제야 속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변기 물을 내리고, 세면대로 가 몇 번 가글을 하자 정신까지 맑아지는 상쾌함이 전신으로 파고들었다. “괜찮아요?” 하고 마해영이 다시 한 번 물어와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배시시, 기분 좋은 웃음까지 만들어주자 그제야 안심한 표정이 되는 남자였다.

정말로 괜찮았다. 오랜만에 제법 마신 덕분에 쉬이 소화시키지 못해서 그렇지, 컨디션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나쁘기는커녕 외려 평소보다 한층 업 돼 있는 쪽이었다. 확실히 그리운 옛 친구들과 동료들을 보니 꿈 많고 순수했던 젊은 시절로 고스란히 되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 생각 말고 즐기고 오라는 그의 언질도 있었지만, 그의 언질이 아니더라도 인환은 지금 충분히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샴페인처럼 보글보글 흘러넘치는 행복감에 모처럼 흠뻑 취해 있는 중이었다.

저녁 7시쯤 미메시스에 도착해서 그야말로 서프라이즈한 축하 인사를 받고 놀라 감격한 것이 시작이었다. 겸사겸사 핑계 김에 노는 거라던 마해영의 말은 말짱 구라였다. 완전 가게를 세놓은 것처럼 화려한 생일 파티장으로 꾸민 것도 모자라, 다들 고깔모자까지 뒤집어쓰고 본격적인 판을 만들어준 것이다. 각자 파리와 뉴욕으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오주희와 한세혁이 빠지긴 했지만, 그 외 선 화랑의 친구들과 동료들이 전부 몰려와 있었다. 미메시스에서 얼핏 안면을 튼 단골들도 거의 대부분 초대돼 있었고, 하다못해 손 사장까지 조직의 간부들 몇을 끌고 와서 축하 선물을 안겨주었을 땐 조폭 보스다운 무시무시한 카리스마에 속으로 으스스 떨기까지 한 인환이었다.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정이 복받친 나머지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선 화랑의 모두도 함께 울었다. 정말로 엉엉, 땅을 치며 우는 동료들도 있었다. 마해영은 다들 왜 이리 꿀꿀하냐며, 너무 촌스럽다고, 환쟁이들은 다 이러냐며 우아하게 심술을 부려댔다. 케이크에 촛불이 켜지고, 생일 축가가 합창되고, 다시 촛불을 끄고, 폭죽도 터졌다. 선물이 오가고, 꽃다발이 오가고, 정겨운 포옹들이 바쁘게 오고 갔다. 미메시스의 일급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저녁 식사가 각 테이블마다 주어지고, 다들 배가 터지게 저녁을 먹곤 노래방 타임이 시작되었다. 모여든 객들의 다양함을 대변하듯 레퍼토리 또한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로큰롤에서부터 힙합, R&B에 트로트까지, 가수 뺨치는 열창도 나왔고, 도저히 참고 들어주기 힘든 음치들도 속출했다. 노랫가락에 맞춰 게이들과 화가들이 어깨동무를 하곤 파도타기를 하고, 우락부락한 조폭들과 미메시스의 핸섬한 웨이터들은 함께 엉겨 붙어 블루스를 추어댔다. 광란의 노래방 타임에 뒤이은 건 ‘부어라 마셔라’ 혹은 ‘마시고 죽자’의 술판이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따라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신 건 아니지만, 기분 따라 몇 잔 순배가 이어지는 사이 오바이트를 해댈 만큼 급하게 마셔버렸다. 차라리 그게 더 나았던 건지도 모른다. 토하고 나니 몽롱하게 흐려졌던 머리도 다시 맑아졌고, 휘청거리며 흔들리던 몸놀림도 한결 반듯해졌다. 육체의 불편감이 사라지니 기왕 즐거웠던 기분은 한층 더 업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몇 시죠, 형?”

한쪽 팔을 잡아 부축해주는 마해영을 따라 화장실을 나서며 가만히 물음을 던졌다. 한참 논 것 같은데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는 확실치가 않았다. 시간이 궁금해진 건 한동안 의식적으로 잊고 있던 그가 생각난 때문이었다. 10시는 넘어야 집에 올 거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자신 또한 적어도 11시 전엔 집에 가 기다리고 싶었다. 자신이 주인공인 파티이니 끝까지 호스트 역할 정도는 하고도 싶었지만, 역시 내일 비행기를 타게 될 그가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10시 좀 넘었네? 왜? 벌써 가게요?”

맞은편에 앉은 마해영이 나른하게 대꾸했다. 술이 들어가고 나니 한결 더 난장판이 된 중앙 홀로부터 조금 떨어진 빈 테이블에다 인환을 부린 남자였다. 마해영 역시 제법 마신 듯 눈가에 약간 붉은 기가 어려 있었는데, 그것이 남자 특유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에 더한 매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저 외모를 보고 누가 40대 후반의 아저씨라 믿을 것이냐.

“……위야 내일부터 출장이거든요. 열흘이나 걸리는 긴 출장이라 아무래도 준비도 하고 그러려면…….”

슬쩍 눈치를 보고 하는 대꾸인데도, 아니나 다를까, 고양이 눈이 돼선 대놓고 째려보는 남자였다.

“……하여간 변하질 않아요, 변하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인환 씬 어째 그래? 그저 오로지 애인뿐이야?”

“……애, 애인뿐이라뇨…… 형도 참…… 출장이라 그렇다니깐…….”

“출장 좋아하셔요? 귀신을 속이라 그래요, 귀신을. 그저 애인 일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전전긍긍. 그것도 어디 이쁜 애인이냐? 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인환 씨 애인한테 한 맺힌 걸로 치자면…….”

“스톱! 스톱, 스톱, 스톱! ……형, 말 안 해도 아니깐 그건 스톱해줘요! 안 가요! 안 갈게요! 형이 집에 가라고 할 때까지 죽치고 있을 거니깐……!”

“흐응, 당근 그래야죠. 모처럼 얼굴 본 건데 벌써 집으로 내빼겠다는 게 말이 돼? 콱 깨물어줄까 보다, 씨…… 아, 맞다! 오랜만에 깨물어봐도 되죠? 우리 인환 씨 촉감 어떻게 변했나 되게 궁금해.”

“……어어…… 어? 아야……! 그, 그렇게 쎄게 무는 게 어딨어요, 형?! 아프잖아요!”

언제나 그렇듯 나른하고 우아하기만 한 몸짓의 남자였지만 깨물 때만큼은 비호처럼 잽싸기 짝이 없었다. 어느새 재킷 소매가 걷어붙여진 건지, 팔꿈치와 손목의 중간쯤에 알싸한 아픔이 느껴졌을 땐 이미 남자의 날카로운 이가 힘껏 살 속을 파고든 후였다. 그가 밉고 미워 한까지 맺혔다더니, 그에 대한 사감이 들어가서인지 유난히 더 아픔이 느껴지는 일격이었다.

“뭐냐, 넌?!”

음산한 일갈과 함께 갑자기 몸이 뒤로 확 밀쳐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의 손에 의해 뒤로 끌어당겨졌다고 하는 게 옳다.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몸이 단숨에 번쩍 들리다시피 누군가의 품 안으로 끌어안긴 것이다. 덕분에 남자에게 물렸던 오른손도 단숨에 떨어지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두근……. 등에 밀착되는 익숙한 근육의 움직임에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했다. 익숙한 모양새의 팔이 앞으로 뻗어와 인환의 어깨를 감싸는 게 보였다. 허리를 꽉 움켜 안는 단단한 근육질의 팔뚝도 보였다. 검은색에 가까운 다크 블루의 슈트 소맷부리는 매우 낯익은 것이었다. 폐부 가득 파고들어오는 강렬한 체취 또한 한가지였다. 어디 소맷부리와 체취뿐이랴. 잔뜩 경계를 품은 채 으르렁거리는 듯한 야수의 숨길도 익숙했고 목덜미 근처로 바짝 다가든 윤곽이 뚜렷한 턱 끝도, 부드럽게 뒷덜미를 간질이는 암갈색 머리카락은 물론 더더욱 익숙했다. 등에 밀착한 늠름한 가슴팍이며, 왕자가 아로새겨진 철벽같은 복근들, 그 아래 은밀하게 드리운 묵직한 성기에서 탄탄한 허벅지의 감촉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감히 누굴 희롱하는 거냐. 어디 박살이라도 내줄까……?”

전혀 갈무리되지 않은 생생한 야수의 으르렁거림 또한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위…… 위, 위야! 그, 그런 게…….”

몹시 나른한 표정이 된 마해영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의 시선은 인환의 어깨 너머 무도한 침입자를 향해 있었다. 곤란한 상황임이 분명한데도 어쩐지 걱정은 되지 않았다. 걱정이 되기는커녕 그저 몸서리가 쳐질 지경으로 반갑기만 했다. 몸을 조이는 두 팔의 악력이 거세질수록 심장의 수런거림 또한 점점 더해만 갔다.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숨길도 따라서 거칠어졌다. 하느님…… ‘그’였다!

“해영 씨, 무슨 문제 있습니까? 저 새낀 뭔데 우리 해영 씨한테 눈깔을 부라립니까?”

누군가의 서늘한 일갈이 뒤에서 날아왔다. 울리는 목소리로 판단컨대 테이블에서 대여섯 걸음 떨어져 있는 듯 보였다. 서리가 내리듯 순식간에 주변을 얼리는 범상치 않은 포스는 인환이 익히 아는 자의 그것이었다.

“내 생각에 개좆같은 간댕인가 봅니다만? 감히 우리 해영 씨한테 눈깔을 부라리다뇨? 안 그렇습니까, 해영 씨?”

사내가 시니컬하게 덧붙이며 인환과 그를 스쳐 마해영에게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장난스레 뱉어내는 천박한 상소리가 이처럼 살벌하게 들리기도 쉽지 않으리라. 언뜻 둔해 보이는 엄청난 장신에 거구이건만(197센티의 키에 91킬로의 체중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압도였다!) 사내의 몸놀림은 지극히 유연하면서도 날렵하기 그지없었다. 낯빛은 거무스름하고, 옆으로 가늘게 찢어진 눈에 꼬리가 살짝 처진 냉소적인 입술은 흡사 살모사를 연상시킬 만큼 차고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이목구비 자체만으로 보자면 옛 고서화의 우아한 선비처럼 단아한 풍모였지만, 어찌해도 가려지지 않는 섬뜩한 살기는 1년 내내 피를 묻히고 살아가는 맹금류 특유의 그것이었다. 모란꽃 무늬가 화려하게 프린트된 붉은색 실크 셔츠와, 허벅지와 정강이의 우락부락한 근육들이 슬며시 감춰질 정도로 느슨한 검정색의 아저씨 팬츠가 사내의 엄청난 거구를 감싸고 있었는데, 목에 건 사슬 목걸이며 손목에 찬 금장 롤렉스 시계와 화려한 악어가죽 신발, 게다가 명치까지 셔츠 단추를 풀어헤친 와일드한 코디법까지, 전형적인 ‘형님 패션’이었지만 조금도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 사내가 풍기고 있는 섬뜩하고 살벌한 기운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뭘까요, 저 좆탱이는? 내가 버릇 좀 갈쳐줘도 되겠습니까, 해영 씨?”

사내가 마해영의 손등에 정중히 입을 맞추며 간살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인환이 종종 익히 봐왔던, 느끼하면서도 살벌한 조폭식 애교였다.

상반신을 감싸고 있던 그의 양팔을 마주 꼭 움켜쥔 건 동물적인 본능이었으리라. 그가 인환 자신의 사람이라는, 그러니 함부로 해를 끼치지 말아달라는 일종의 애원이자 경고의 의사 표시였다. 자칫 사내의 기분을 거스르기라도 한다면 그에게 어떤 불길한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었다. 한 다리 건너 친구라지만, 아니, 실은 ‘친구의 애인’이라지만, 상대의 정체는 조폭이었다. 그것도 대한민국 공권력의 핵심부에까지 파고들어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거대 조직의 고위 간부가 아닌가. 수틀리면 살인과 폭력을 밥 먹듯 일삼는 치가 아닌가 말이다. 상식이나 법이 통하는 상대가 결코 아니다.

“당신은 나서지 마요, 손 사장. 내가 저이를 오해하게 했어. 그리고 우리 가게에선 천박한 욕들 쓰지 말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죠? 어디서 양아치 냄새를 풍기고 있어. 또 각방 쓰고 싶어요?”

마해영의 손을 기분 좋게 쓰다듬고 있던 사내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들었다. 살기를 풀풀 날리던 서늘한 분위기도 일거에 사라진 것은 물론이었다. 이 역시 인환이 익히 봐왔던, 마해영의 조폭 파트너 조련하기의 이름을 빌린 괴롭히기의 일환이었다.

“……해, 해영 씨! 그, 그게 말이죠, 난…….”

“변명도 하지 마요. 양아치 짓이 뭐 자랑이라고 툭하면 선량한 시민들 앞에서 으스대는 거야? 폼 나기는커녕 꼴사납다고 내가 누누이 그랬어, 안 그랬어? 게다가 여기가 어디야? 내 미메시스 아니야?”

“……그…… 허, 참…… 알았어요. 미안해요, 해영 씨. 내가 또 실수했어요. 용서해줘요.”

“흠, 이 문제는 이따 집에 가서 계속 의논하도록 합시다. 손님들 앞에서 부부싸움 하는 것도 영 꼴불견일 테니.”

“하하하! 그, 그래요, 해영 씨! 물론 그래야지요! 언감생심 우리 해영 씨 가게인데 손님들에게 추태를 보여주면 절대 안 되지! 아무렴! 하하…….”

추태 이상일 엽기를 연출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마해영을 뒤에서 감싸 안곤 양쪽 팔과 어깨를 살살 문지르며 연신 애교를 피워대고 있었다. 흡사 거대한 개꼬리가 사내의 꼬리뼈 부근에서 맹렬하게 흔들리는 듯한 착각까지 일 지경이었다. 그런 사내의 손을 거만스러운 자세로 토닥이며 어르는 마해영의 쿨하고 나른한 표정은 가히 엘리자베스 여왕 저리 가라의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조폭 간부를 그렇게 똥개처럼 다스리는 것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을 정리한 마해영의 시선이 다시금 이쪽을 향했다. 정확히는 뒤에서 인환을 품에 안고 있는 그에게로.

“하도 오랜만이라 다 잊어버린 모양이네? 내가 인환 씰 깨무는 건 무슨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친구들에게만 하는 나름대로의 인사법입니다. 기억 안 나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에도 나 인환 씨 깨물었는데?”

나른하고 상냥한 말투며,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담담하게 굽어보는 눈길에서 남자가 말한 예의 그 ‘한’이 연상되었다. 남자 딴에는 으레 손님에게 대하듯 정중한 태도였지만, 오랜 사귐을 통해 인환만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결코 호의적이랄 수는 없는 냉담한 시선이라는 걸. 하긴 자신의 친구인 마해영의 입장에서야 그가 좋게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는 자신의 인생을 망친 나쁜 남자였다. 그러나 정확히 사정을 들여다보자면, 나쁜 남자는 그가 아닌 도리어 자신이었다. 자신의 과도한 집착과 광기야말로 자신은 물론 그의 인생까지 망가뜨린 가장 일차적인 원흉이었다. 그러니 마해영의 그에 대한 냉랭한 반감이 한편 가슴 아프면서도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저야말로 오해를 했네요. 마 사장님이시라는 걸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뒤에서 정중하면서도 나지막한 말이 떨어졌다. 조폭 파트너와 마해영 사이에서 티격태격하는 말싸움이 시작될 무렵부터 이미 담담하게 바뀐 그의 분위기를 통해 그가 마해영을 뒤늦게 알아보았다는 것을 얼추 알 수 있었다. 하긴 14년 전에 단 한 번 얼핏 스쳐간 얼굴을 이제 와 다시 보는 셈이니 못 알아봤대도 이상할 것은 없다. 게다가 마해영의 기벽스러운 인사법을 모르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오해할 만한 장면이 아닌가. 그가 흥분을 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노릇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흥분’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을 저 특별한 감정은, 물론 인환으로선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둬야 할 금단의 영역일 터였다.

“사과는 나중에 받아들이겠습니다.”

입술 끝만 말아 올려 미소의 흉내만 낸 나른한 표정으로 마해영이 새침하게 대꾸했다.

“언젠가 그대를 진심으로 용서하게 되는 날까지 유보한단 뜻이죠. 무슨 뜻인지는 짐작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야 그대도 사람이겠죠.”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 갸우뚱하는 인환을 흘낏 주시하더니 이내 덧붙이는 마해영이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피식 하는 실소가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보지 않아도 씁쓸하게 웃고 있을 그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이해합니다. 그때까지 제 남은 평생이 걸리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겁니다.”

담담하지만 짙은 회한이 채 걸러지지 못한 우울한 어조였다. 곤란한 기색으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한 인환을 깨달았는지, 몸을 감싼 그의 팔 힘이 좀 더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앉으세요. 내일 미국으로 출장을 떠나신다고 하던데…… 혹시 벌써 우리 인환 씨를 빼돌리려고 오신 건 아니겠죠? 인환 씨 컨디션이 허락하는 한 오늘 밤은 통째로 빌려주실 수도 있다는 약속은 여전히 유효한가요?”

마해영이 능숙한 호스트답게 그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며 물었다. 말투며 표정은 여전히 냉담하고 새침했지만 마해영 특유의 허물없는 태도는 그가 어느 정도는 마해영의 영역에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10여 년 전에는 물론이고 지난 7월, 하동의 어느 폐교에서 재회한 이래 줄곧 그에 대해서만큼은 냉랭한 뒷담화를 일삼던 마해영으로서는 꽤나 이례적인 대우였다.

“물론 유효합니다. 저는 그저 제 사람이 파티를 잘 즐기고 편히 돌아갈 수 있게 호위 기사로서 마중 온 것뿐입니다.”

담담히 대꾸를 던진 그가 인환을 안은 팔을 풀더니 마해영이 권해준 의자에 앉도록 의자 등받이를 빼주었다. 말 그대로 기사처럼 깍듯한 배려에 문득 얼굴이 빨개진 인환이었다. 마해영의 나른하면서도 주의 깊은 시선이 그런 그의 행동은 물론 인환의 반응까지 샅샅이 훑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정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인환을 의자에 앉힌 뒤 그도 바로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홀 안쪽의 초대 손님들에게 옮겨 갈 줄 알았던 마해영도 어쩐 일인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의 맞은편에 앉고 있었다. 뒤에서 연신 느물거리는 추행을 거듭하고 있던 조폭 애인에게 잠시 눈길을 주니, 연신 보이지 않는 꼬리를 흔들던 손 사장도 희희낙락해선 마해영의 옆에 거구를 부렸다.

“식사는 하고 오셨나요? 안 하셨다면 우리 미메의 일급 주방장 솜씨를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술은 안 드시는 걸로 기억하는데, 혹시 취향이 바뀌셨다면 칵테일을 권해드립니다. 미메 바텐더의 칵테일 솜씨도 꽤 괜찮죠.”

“했습니다. 술도 됐고요. 전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말씀드렸다시피 제 사람 호위 기사로 쫓아온 것뿐이니까요.”

마해영이 호스트다운 배려를 던지자 그가 담담히 일축했다. 그제야 그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 인환이었다. 슬금슬금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로 그의 시선이 날아왔다. 마주친 시선 속의 그는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약간 피로한 기색이었지만 표정은 몹시도 밝았다. 다크 블루의 슈트도 약간 구겨져 있고 넥타이는 거의 반쯤 풀린 채 매듭이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옷차림만으로도 그가 꽤나 분주하게 일을 하다 온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선 통성명이나 할까? 해영 씨, 소개 안 해주십니까?”

피곤하지 않느냐는 물음을 막 토해내려는 찰나, 맞은편에서 묵직한 베이스의 음성이 날아왔다. 손 사장이었다. 사내의 한쪽 팔은 마해영의 허리 뒤로 돌아가 있었는데 재킷 안자락이 슬쩍슬쩍 움직이는 걸 보니 또 ‘손장난’ 중인 것 같았다. 마해영은 손 사장의 애정 어린 잦은 스킨십을 손장난이라 폄하하며 귀찮아하면서도 단 한 번도 그를 거절하는 일은 없었다. 보는 이들이 있건 없건. 사이좋은 연인들의 나름대로의 묵계인 듯도 싶었지만 그보다는 애초부터 주변 시선을 의식 않는 두 사람의 쿨한 태도 때문일 것이다.

“여긴 손정혁 사장, 제 배우자예요. 14년 전이던가, 그쪽 형님 일로 도움을 드린 적도 있죠. 기억하시죠?”

“기억합니다. 인사가 많이 늦었습니다, 손 사장님. 문위라고 합니다. 그땐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제야 직접 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게 되네요.”

그가 정중하게 목례를 하며 인사를 하자 손 사장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답을 했다. 예의 살모사 같은 냉철한 눈길이 부드러운 미소 속에서 그를 예리하게 가늠하고 있었다. ‘손장난’으로부터 자유로운 왼손이 사내의 바지 뒷주머니로 가더니 자그마한 명함집을 꺼내는 게 보였다.

“그쪽인가? 10년 동안 우리 해영 씨한테서 줄창 미움받던 친구가?”

그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며 사내가 개구지게 묻는다. 얼굴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표정이지만 눈빛만은 조금도 웃지 않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함께 어울리는 사이에 사내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누그러져 그렇지, 확실히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지는 무시무시한 사내였다.

“예. 아마도 그럴 겁니다.”

피식 하는 실소와 함께 그 역시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손 사장에게 내밀었다.

“사업하신다고?”

“예.”

“별문제 없길 바라지만, 혹 자금 쪽으로 딸리게 되는 일이 있으문 그 번호로 연락하쇼. 내 웬만하면 친구들에겐 내 돈 끌어다 쓰라 권하지 않는데, 문 사장은 좀 다른 것 같구만. 우리 해영 씨가 미워할 만해. 눈빛이 아주 쓸 만하거든? 얌전한 사업보단 우리 쪽 일이 더 맞을 것 같단 말이지.”

“…….”

“껄껄, 칭찬이야, 칭찬. 일반인들 속에 묻혀 살기엔 재주가 아깝단 말이지. 문 사장 본성대로 좀 더 스릴 있는 일에 뛰어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소?”

“무슨 망발을 하는 거야, 손 사장? 문 사장을 당신들 양아치 세계로 들어오라고 꼬시는 거예요, 지금?”

“이크! 우리 해영 씨 또 고양이 눈이네! 험험…… 그냥 문 사장 배포가 마음에 들어서 하는 소리요. 내 눈빛에도 쫄지 않는 치들은 드물지. 우리네 뒷골목 건달들 중에서도 몇 없거든? 휴먼메디시스템이라면 제법 탄탄한 재무 구조를 갖춘 글로벌 기업이라 들었군. 몇 년 전에 새로 취임한 젊은 사장 덕분이라더만. 역시 눈빛대로 보통이 아닌 친구야. 내 도움 따위야 불필요하겠지만, 사업 일이란 게 한 치 앞을 모르는 거라 놔서.”

마해영의 눈치를 살피며 껄껄 하고 커다란 웃음소리를 덧붙이는 사내였다. 말 그대로 그를 조폭 세계로 끌어들일 생각이야 없겠지만, 다행히 그가 마음에 든 눈치여서 인환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이후엔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까지 연출하면서 그와 손 사장 간에 여러 가지 주제의 대화들이 오고 갔다. 대부분은 국내는 물론 국제 경제의 동향과 금융권 문제, 그리고 그를 위축시키는 한국의 여러 정치적 규제들에 대한 것이었는데, 몸담고 있는 분야는 달라도 문제 의식을 느끼는 부분은 서로 대동소이한 모양이었다. 낯선 이들과의 사교성이라면 거의 제로에 가까웠던 과거의 그가 무색하게도 그는 손 사장과 썩 잘 어울리고 있었다. 안 보는 사이 그의 사교술이 변한 건지, 아니면 피붙이인 이 의원의 은인인 손 사장이라 특별히 예의를 갖추어 대하는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간간이 웃음까지 섞는 걸 보면 놀라울 정도였다. 손 사장도 어느새 의기투합한 듯 호들갑을 떨어대더니(이 부분은 정말 마해영의 말마따나 좀 채신머리가 없어 보였다)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껄껄거리는 호탕한 웃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마도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중앙 홀 쪽에서 술판 삼매경에 빠져 있던 기하 선배와 선 화랑 동료들로부터 호출이 들어온 것은.

워낙에 시선을 잡아끄는 두 사람인데다 천지라도 진동시킬 듯한 손 사장의 요란한 웃음소리까지 연신 터지니, 점차 인환과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뭇 시선들이 몰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훈아의 「잡초」를 열창한 끝에 노래방 기기가 멈추고 잠시 실내가 조용해졌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손 사장의 커다란 박장대소가 터졌는데, 다들 반쯤은 취해서 부어라 마셔라 하는 통에 미처 그가 와 있다는 사실을 못 알아차렸던 동료들의 고개가 일제히 이쪽을 향한 것은 물론이었다. 기하 선배가 반쯤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그를 향한 일성을 날린 것도 그 직후였다.

“문 군? 문 군이 왔다구? 왔으면 어서 신고를 해야지! 이리 와봐, 문 군! 내 자네에게 할 말 아주 많거든∼∼∼?”

기하 선배의 뒤를 이어 이구동성으로 그를 불러댄 것은 물론 다른 선 화랑 동료들이었다. 인환이 미처 제지하기도 전에 그가 손 사장과 마해영에게 양해의 눈짓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 일어서려는 인환을 마해영이 손을 뻗어 인환의 손목을 잡는 것으로 조용히 제지시켰다. 놀라 마해영을 돌아보는 사이 그는 벌써 뒤태를 보이며 홀 가운데로 걸어가고 있었다.

“내버려둬요, 인환 씨. 권 사장도 나처럼 문 사장에게 맺힌 게 많은가 봐. 마침 기회니 풀어야지. 저번 하동에서 봤을 때 권 사장이란 사람 참 순둥이던데, 그런 순둥이를 화나게 하다니 문 사장도 참 대단한 친구야.”

눈빛에 물음표를 단 인환을 향해 조곤조곤 떨어진 마해영의 대꾸였다.

“……기하 선배가…… 뭐라 그래요?”

“꼭 구구절절 사연을 들어야 아나? 그저 한 마디씩 툭툭 내뱉는 게 다 나처럼 한 서린 가락이더라 이 말이지.”

“……위야가 잘못한 게 아닌데…….”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

퍽!!! 우당탕탕!!!

묻는 듯한 눈길로 마해영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홀 쪽으로부터 엄청난 소음이 들려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 말았다.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진 마냥 경악한 것은 물론이었다. 통로 한구석에 기하 선배가 주먹을 움켜쥔 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몇 미터 전방 바닥엔 익숙한 다크 블루의 슈트 차림인 장신의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모양으로, 한 손으론 바닥을 짚은 채 막 일어나려 중심을 잡는 게 보였다. 다른 한 손으로는 턱 끝을 어루만지는 걸로 보아 기하 선배가 날린 주먹에 된통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기…… 위야!!!”

본능적으로 총알처럼 튀어나가려던 몸은 잽싸게 따라온 마해영의 제지로 다시 한 번 무산되었다. 마해영의 손이 인환의 팔꿈치를 단단히 틀어쥔 채 뒤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냥 둬요. 풀어야 한다고 했잖아. 나름대로 환영 인사고만 뭘.”

남자의 쿨한 어조 덕분이었을까, 무섭게 세동하던 심장의 울림이 차츰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여기서 자신이 끼어든다면 모양만 우습게 될 것 같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를 향해 기하 선배가 손을 뻗어 부축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곧 몸을 일으켜 세운 그가 기하 선배를 향해 허리를 90도 가까이 정중히 숙이는 것도 보였다. 그렇게 숙여진 그의 허리는 몸처럼 펴지질 않았는데 마치 기하 선배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기하 선배는 슬픈 표정으로 꽤나 오래도록 굽어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보다 못했는지 나경자와 우은표가 달려들어 그의 허리를 일으켜 세우는 게 보였다. “나쁜 자식이야, 네놈은…… 진짜로 나쁜 자식이야…… 알어……?” 나경자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그의 중저음이 힘겹게 대꾸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다시금 누군가 노래방 기계를 작동시킨 탓에 더 이상의 대화 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입 모양들을 통해 나경자와 우은표, 그리고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있던 다른 선 화랑 동료들이 뭐라뭐라 일제히 그를 성토하고 있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많이 취한 것 같은 남상욱과 한상희는 알코올기가 가득 올라온 시뻘건 얼굴로 그를 향해 삿대질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쥐잡이식 성토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막상 한 대 갈기고 나니 그게 또 마음이 쓰였는지, 기하 선배가 그에게 잠자코 맥주잔을 넘긴 것이다. 축 처진 것 같은 그의 어깨까지 툭툭 두드려주지 않는가. 역시 남을 오랫동안 원망하지 못하는 사람 좋은 기하 선배다웠다. 그가 맥주잔을 받아들어 원샷을 하자, 옆에 붙어서 있던 나경자와 우은표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자리에 앉히는 것을 끝으로 제법 떠들썩했던 신경전이 막을 내렸다. 솔직히 신경전이랄 것도 없었다. 애초부터 무언가에 오래도록 원한을 쌓아두거나 집착을 하는 치들이 아니었다. 물론 현재 인환이 파트너로서 그와 동거를 하고 있으니, 이제 와 또 뭐라고 참견을 할 명분도 없었으리라.

“……술 안 마시는데…….”

원샷을 한 맥주 때문인지 금세 벌게지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걱정이 된 나머지 멍하니 중얼거리자, 옆에서 마해영이 찰싹 하고 인환의 손등을 때리는 것으로 타박을 주었다.

“어린애예요? 고작 맥주 한 잔 갖고 뭘. 보아하니 말술도 가능할 체력 같고만. 몸 관리가 저리 철저하니 성깔도 그런 독종이 되지. 하여간 탑으로 못된 종자들 보면 꼭 술 담배도 잘 안 하더라. 알아요, 인환 씨? 손 사장도 접대할 때 말고 평소엔 술 한 모금도 안 마시는 거?”

“아유, 우리 해영 씨 왜 또 그래요? 술 잘 마시는 사내가 좋은 거예요? 응? 그렇담 당장 오늘부터 말술도 들이켜줄 수 있어요오∼∼.”

“채신머리없이 달라붙지 좀 마요. 옷 꼴도 그게 뭐야. 인환 씨 생일이니까 오늘만이라도 좀 평범하게 입고 나오랬더니…….”

“흠흠, 박 차장이 특별히 골라준 건데…… 이상한가요?”

“이상하기만 해요?”

“허허, 흠흠, 큼…… 내 이 박 차장 씨방새낄 그냥…….”

“씨방 뭐라고요?”

“앗! 아, 아뇨, 해영 씨! 그게, 그 저…… 크하하하하…….”

마해영과 손 사장이 뭐라뭐라 닭살을 연출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인환의 뇌리엔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다. 온 신경은 그저 그와 동료들이 앉아 있는 홀 가운데 테이블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하 선배가 넘겨준 술잔 이외에도 다른 동료들이 가득 채워주는 술잔들을 족족 비워내고 있었다. 연거푸 다섯 잔째가 되었을 땐 다들 술로써 복수를 하는 게 아닐까 정말로 걱정이 되었다. 아마도 다들 작정을 하고 온 모양이라고 확실히 판단이 들 정도였다. 어떤 자리에서든 술이라면 냉담하게 거절만 하는 그를 기억하고 있는데, 단 한 잔도 거절 못 하고 얌전히 마셔대는 모습을 보니 인환도 점점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술이 자꾸 들어가니 처음에 빨개졌던 그의 얼굴은 이번엔 오히려 점점 하얗게 탈색돼가고 있었다. 내일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이 계획돼 있는 그가 아닌가. 가뜩이나 어젯밤엔 제대로 잠도 못 잔 것 같은데, 혹여 무리가 가면 어떡한단 말인가!

“……푹 빠진 모양이네…….”

마해영이 옆에서 시니컬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혼잣말 같기도 하고, 인환에게 던지는 말 같기도 했다.

“……인환 씨한테 푹 빠진 모양이야. 이제사…… 아까 인환 씨 깨물 때에도 날 찢어 죽일 기세로 노려보더니, 저건 완전 처갓집에 불려 와서 무릎 꿇고 석고대죄 하는 모양새잖아?”

“…….”

“완전…… 죽으라면 죽는 흉내라도 낼 기세네? 뭐야, 정말…… 이제야…….”

“…….”

“아아, 아닌가? 실은 처음부터였나?”

“…….”

“결국 저렇게 될 거였으면서 그런 수라장을 만드나? ……참 딱한 친구로구나, 문 사장도.”

“…….”

“……인환 씨도 알았어?”

“…….”

“그때도 알고서 그런 거야?”

“…….”

“말해봐. 저 친구, 처음부터 저런 마음인 거 알았어?”

“…….”

“뭐야? 왜 이렇게 떨어, 인환 씨? 내가 뭐 못 할 말 한 거야?”

“…….”

“인환 씨……?”

“……몰…… 라요…….”

보지 않아도 잔뜩 걱정스러운 기색이 된 마해영의 얼굴이 느껴졌다.

‘못 할 말’이었다, 물론! 마해영이 던진 물음은 현재의 자신에겐 절대 금지의 영역이었다!

사지의 힘이 탁 풀리며 전신으로 오한이 달려든 것도 당연했다. 그나마 목소리만이라도 평온하게 나와주니 얼마나 다행한 노릇인가.

“……그…… 그런 거 알 게 뭐야…… 모, 모르는 일이야…… 그럴 리가 없어요…….”

“인환 씨…….”

“……아…… 아무래도 가서 말려야겠어요, 형. 내일 비행기 타는데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서둘러 대꾸를 주곤 도망치듯 앞으로 걸음을 옮기자 마해영도 더는 인환을 잡지 않았다. 눈치 빠른 남자이니 그쪽 화제는 계속 꺼내고 싶지 않다는 인환의 속내를 읽었을 수도 있었다.

무서웠다. 마해영의 물음도 무섭고, 연거푸 독주를 원샷 하는 그의 자학적인 행동도 무서웠다. 말려야 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무서운 그 둘 다를 말릴 수 있을 터였다.

마해영을 슬쩍 살피곤 다시 홀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경자가 그의 뺨을 거침없이 꼬집어 뜯고 있었다. 옆에서 우은표가 맥주와 양주가 적절히 배합된 폭탄주로 가득 찬 술잔을 건네는 것도 보였다. 그가 실소를 흘리며 잔을 받아 드는 모습도 보였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막 입으로 술잔을 가져가는 그를 향해 절박하게 외쳤다. 마시지 마! 물론 물리적인 소리로 토해진 것은 아니었다.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겁에 질린 외침 따위로 분위기를 깰 수 없다는 정도는 인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뇌리로는 그 어떤 절박한 소원을 빌 때보다도 더 절박하게 소원했겠지. 외쳤겠지. 그러고는…….

기적이 일어났다! 막 잔을 세워 마시려던 그가 이쪽으로 홀연 시선을 돌린 것이다. 그와의 거리는 걸음걸이로는 열댓 걸음 정도. 사이엔 테이블 세트 두 개가 더 가로놓여 있었다. 심하게 절름거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의 눈시울이 잠깐 휘둥그레지는 것이 보였다. 필사적인 자신의 눈빛을 읽었을까? 그가 들고 있던 잔을 팽개치듯 탁자에 내던지곤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게 보였다.

후우. 숨 가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절로 입술이 벌어지며 활짝 웃음이 퍼졌다. 그가 커다란 보폭으로 뛰다시피 다가오고 있었다. 마주 팔을 뻗는 것도 보였다. 전신을 내던지다시피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와락. 반사적으로 등을 끌어안는 그의 어마어마한 팔 힘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폐부로 알알이 파고드는 익숙한 코롱 냄새와 익숙한 체취에 심장은 빠르게 안정을 찾고 있었다. 다만, 익숙하지 않은 술 냄새만은 몹시도 가슴이 아팠다. 누가 석고대죄를 하래! 속으로 절절한 원망도 뇌까렸다. 삑, 삐익. 삑. 사방에서 휘파람 소리와 야유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개의치 않았다.

“……인환아……?”

약간 들뜬 듯한 매혹의 중저음이 귓가를 촉촉하게 적셔주고 있었다. 그는 꽤나 당황한 것 같았다. 자신의 마음이라면 늘 귀신처럼 읽는 주제에, 사람 피가 마르는 줄도 모르고 폭탄주 따위를 넙죽넙죽 받아 마시는 그가 야속했다.

“……집에 가자, 그만. 나 피곤해…….”

나 피곤해. 결계를 깨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그는 단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인환을 품에 안은 그대로 그가 단숨에 미메시스를 빠져나왔다. 작별 인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홀 안으로부터 원성과 야유가 긴 꼬리를 물고 따라왔지만 더 이상은 신경 쓰지 않았다.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서늘한 북서풍이 알코올에 달아오른 얼굴로 상쾌하게 다가들었다. 늦가을로 접어든 계절을 반영하듯 찬 기운이 여실했다. 설핏 몸서리를 치자 그가 껴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추워?” 하고 물어왔음은 물론이었다. 추위보단 상쾌함이 더 컸기에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미더운지, 등 뒤에서 교차하듯 안고 있던 양손으로 이리저리 쓰다듬기 시작한 그였다. 워낙에도 자신보다 높은 체온이지만, 술을 마셔서인지 그의 피부는 평소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현관 앞에서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서 있자, 고영석이 운전하는 세단과 경호원들이 운전하는 볼보가 연달아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그와 인환은 세단 뒷좌석에 타고, 경호원들의 볼보는 호위하듯 그 뒤를 따랐다.

별로 길이 막히지 않아 집에 도착하기가지 그리 긴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30여 분 만에 도착해 현관에 들어서니 막 12시를 치는 괘종시계 소리가 들렸다. 현관 앞에서 마중을 해준 최 씨 내외와 메이드들도 별채로 들어가고, 보안을 점검한 고영석과 경호원 둘도 퇴근을 해버리자 성채처럼 크고 고요한 집 안에 다시 단둘만 남게 되었다.

“……많이 피곤한가?”

그가 거실 소파에 인환을 앉히고 자신도 옆에 앉으며 물어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품에 껴안거나 손을 잡거나 하는 것으로 인환에게서 단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그였다. 그래도 생리적 욕구는 어쩔 수 없었는지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욕실로 직행해서 인환으로 하여금 실소를 짓게 만들었었다. 맥주에 칵테일까지 섞어 그리 마셔댔으니 요의가 오죽했을까 싶었다. 한결 편안한 표정이 된 그가 다시 거실로 걸어 나왔을 때에는 재킷과 넥타이를 벗어 던졌는지 옅은 블루의 스트라이프 셔츠에 팬츠만 걸친 차림이었다. 단추도 몇 개나 풀어져 있어 쇄골은 물론 도톰하게 융기한 가슴 근육이 반이나 들여다보였다. 술을 마실 때부터 창백해져 있던 낯빛은 집으로 오는 동안 원래의 황금빛 안색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마해영의 관측으론 말술도 가능할 것 같다더니, 확실히 걱정했던 것보다는 빠르게 알코올을 분해하는 듯싶었다. 인환이 세어본 것만 해도 맥주만 일곱 잔이었었다. 거기다 칵테일도 두어 잔 들어간 걸로 안다. 웬만한 남자라면 벌써 말이 새거나 걸음걸이 또한 흐트러지고도 남음이 있었을 텐데, 그는 몸에서 풍기는 강한 술 냄새만 아니라면 술을 마셨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를 동료들의 원한에 찬 복수로부터 일찌감치 빼내온 건 백번 잘한 일이지 싶었다. 마지막의 양주가 더해진 폭탄주까지 마셨다면 어찌 되었을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늘 무쇠처럼 튼튼해 보이곤 하는 그이지만, 너무나 손쉽게 부서질 위험에 처하기도 하는 그라는 걸 자신은 절절히 자각하지 않았나. 그도 고작 석 달 전 일이었다. 뭐가 석고대죄란 말인가. 누가 그딴 걸 하라고 했냐 말이다. 여전한 원망의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흘겨보듯 빤히 주시하는 인환을 끌고 소파로 데려간 그였다.

“……피곤한 건 너잖아. 어젯밤도 거의 못 잤을 텐데 무슨 술을 그렇게나 마시는 거야.”

많이 피곤하면 마사지 좀 해줄까? 하고 걱정스레 덧붙이는 그에게 그리 퉁명스레 대꾸한 인환이었다.

“내일 출장 가는 거 잊었어? 가뜩이나 평소엔 입에도 대지 않으면서 따라준다고 다 마시는 게 어딨어? 바보야? 전엔 그런 거 잘만 거절하더니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내 친구들한테 그렇게 저자세야? 기하 선배가 때린다고 그냥 맞는 건 또 뭔데? 안 맞겠다고 그러면 맘 약한 기하 선배가 억지로 그랬겠어?”

간댕이가 부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틀림없이 부었다. 자신 또한 제법 마시지 않았나. 간댕이가 부을 정도로는 마셨나 보다. 그러니 이리 거침없이 원망이 터져 나오는 거겠지. 고작해야 잠시 주인의 총애를 받는 중인 성노예 주제에.

“……뭐야…… 지금 바가지라도 긁는 건가, 마누라?”

다다다다 쉬지 않고 퍼부을 동안 비실비실 웃으며 자신의 얼굴만 핥듯이 바라보더니 떡하니 내뱉는 게 저 망발이다. 기가 막혀서 멍하니 바라보는데, 인환의 양손을 움켜쥔 채 조몰락거리던 중인 그의 두 손이 뺨으로 올라왔다. 혹시라도 피할까 걱정이라도 됐는지, 힘주어 양쪽 뺨을 거머쥐더니 쪽 하는 소리와 함께 힘찬 립 키스가 떨어졌다.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 탓에 이상야릇한 위화감마저 주는 키스였다. 농담조로 일관하는 그가 또 원망스러워서 뭐라 항변하려니 그조차도 거듭거듭 입술을 눌러대는 통에 도저히 더는 계속할 수가 없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흐물흐물 늘어지자 그제야 입술을 떼곤 지그시 시선을 물어오는 그다.

“……더 해봐. 바가지 긁는 소리 너무 좋아, 인환아.”

뒤늦게 멍석을 깔아주는 중저음에 샐쭉해선 노려보자, 여전히 히죽거리는 한량의 웃음만 입에 물고 있을 따름이다. 입술 끝은 한껏 말려 올라가고 눈꼬리는 비스듬히 처진 걸 보니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술 탓인지 평소보다 물기 어린 아름다운 눈시울은 가슴 뭉클한 애수를 느끼게 했다. 왼편 턱 끝에 불그스름하게 변한 흔적은 기하 선배에게 맞은 자국인 것 같았다. 저렇게 흔적이 남을 정도이니 꽤나 아팠을 것이다. 내일이면 파랗게 멍 자국이 올라올 터였다. 그것도 조금 걱정이 되었다. 사업 하는 사람인데 얼굴에 멍 자국을 달고 출장길에 올라야 한다니.

“……더 안 해주나? 서방님이 마누라 바가지 좀 더 듣고 싶다는데…….”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멍 자국을 더듬고 있자 그가 또 킥킥거리며 망발을 했다. 얄미워서 손가락으로 꾹 눌렀더니 그제야 “아야!” 하는 신음이 터진다. 다시 두어 번 더 꾹꾹 누르자, 오만상을 찌푸리며 “아야, 아야!” 하고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러댄다. 두말할 필요도 없는 오버액션이었다. 째려보자 곧 터지는 푸하하하. 결국은 박장대소로 마무리하곤 상처를 찔러댔던 손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손바닥에 키스를 시작하는 그였다.

뜨겁고 축축한 감촉이 너무나 부드럽게 손바닥을 어르고 있었다. 입술로 부비고 혀로 핥고, 누른 채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도 질리면 손가락 끝 하나하나마다 쪽쪽 하며 립 키스를 퍼부어대기도 했다. 찌릿하고 가슴이 전율했다. 울컥하고 치받치는 무언가에 목까지 꽉 메어들었다. 키스를 받는 모든 곳이 소중하고 소중하게 취급되다 못해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 안 졸려? 어제도 잘 못 잤는데 얼른 샤워하고 자야지…….”

최대한 담담히 채근을 주자 그가 여전히 손바닥에 입술을 댄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음, 그래야지……. 좀 피곤하고 졸리긴 한데 아까워서 못 자겠어. 내일 가면 앞으로 열흘이나 못 보게 될 텐데…….”

“…….”

“……고작 이틀이 한계일 텐데 어떻게 견딜까 모르겠군.”

“…….”

“너는 잘 견딜 수 있을까? 나 없이도?”

“…….”

“못 참고 그리워서 미칠까? 나처럼?”

“…….”

“……이제 와 나와 같길 바라는 건 정말로 뻔뻔스러운 소원인 걸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

고개를 숙인 탓에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잘생긴 정수리로 나머지 손을 뻗었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듯이 감겨들었다. 빗질하듯 부드럽게 쓰다듬자, 기분이 좋은지 손바닥의 키스가 좀 더 나른해졌다. 상반신도 점점 내려오더니 인환의 무릎에 완전히 얼굴을 파묻은 채로 허리에 부드럽게 양팔을 감아오는 그였다. 팔에 별로 힘이 안 들어가서인지 포옹조차도 키스만큼이나 나른했다. 그대로 2∼3분이 흘렀을까? 그의 고개가 점차 무릎 아래 소파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두 손을 모두 그의 뺨에 댄 채로 조심스럽게 받쳐 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뚝 떨어지는 머리였다. 인환의 허리에 감겼던 그의 양팔도 동시에 소파 위로 힘없이 떨어졌음은 물론이었다.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위야……?”

확인하듯 가만히 불러보지만 예상대로 대꾸는 없었다. 이토록 쉬이 나가떨어지는 그를 보니 새삼 미메시스에서 그를 빼돌린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겉은 멀쩡해 보였으되, 실은 거의 한계 상황이었던 것이다. 당연했다. 날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회사로 출근해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그도 모자라 평소 마시지 않는 술까지 진탕 마셔댔으니 상태가 온전할 리 없었다. 아무리 무쇠처럼 보인들 그도 인간이었다.

거구인 그의 체중은 자신으로선 도저히 감당이 안 되었기에, 그냥 이대로 소파에서 재우는 것으로 낙착을 보았다. 다행히 싱글 침대만큼의 넓이를 확보하고 있는 소파는 하룻밤 정도 잔대도 그리 불편할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깰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를 소파에 바로 눕힌 후, 양말과 바지를 벗겨주었다. 샤워를 하지 않아 좀 더 짙어진 체취를 풍기고 있는 그의 몸을 따스한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제법 간지러운 자극이 느껴질 텐데도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워낙에 한번 잠들면 깊은 숙면을 취하곤 하는 그이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그야말로 옆에서 폭탄이 터진대도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군함처럼 커다란 발까지 말끔히 닦아준 후, 물수건과 대야를 욕실로 가져다 놓곤 침실에서 블랭킷 두 장과 베개 두 개를 꺼내왔다. 한 세트는 그를 위해, 나머지 한 세트는 자신을 위해서였다. 단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비행기는 내일 정오에 뜬다고 했다. 회사 전용기이니 수속에 별로 시간은 걸리지 않겠지만, 적어도 10시 반에는 집을 나서야 할 것이다. 반사적으로 시계로 시선이 갔다. 12시 50분이었다. 고작 열 시간도 안 남았다. 자신 또한 샤워를 해야 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역시 시간이 아까워서였다.

그의 머리에 베개를 괴어주고 블랭킷도 가슴 언저리까지 덮어주었다. 늦가을 밤 기온에 맞춰 보일러도 은은히 돌고 있어 블랭킷 한 장만으로도 새벽에 춥지는 않을 것이다. 소파 아래 카펫 위에 자신이 누울 자리까지 마련했지만, 좀처럼 눕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미메 화장실에서 토한 것으로 술기운도 다 달아났는지 정신은 마냥 말똥말똥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냥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잠이 올 때까지 그를 바라보자고 마음을 정했다. 가능하다면 날밤을 새우는 것도 괜찮다 싶었다.

거실 불을 끄고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정원 가로등의 불빛은 적당히 흐릿해서 그를 바라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다. 소파 바닥에 늘어져 있던 그의 손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살짝 깍지도 끼어봤다가 조심조심 어루만지기도 했다. 얼굴은 손보다도 더 많이 어루만졌다. 뭉툭한 코를 살짝 쥐어보기도 하고, 도톰하게 융기한 섹시한 입술 선을 더듬기도 했다. 깊은 음영이 진 눈시울은 좀 더 안타까이 쓰다듬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너무나 예뻐서 한참을 그것만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다 좀 미안해지면 그가 숙면을 취하도록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그 모든 추행들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색색거리는 깊은 숨소리만 은은했다.

열 시간이 채 안 될 시간은 쏜살같았다. 아니, 영원처럼 긴 것 같기도 했다. 앉아서도 바라보고, 소파에 엎드려서도 바라보고, 기운이 달리면 거실 바닥에 모로 누워 바라보기도 했다. 바라보기가 안타까우면 또다시 가만가만 추행을 했다. 그는 고작 서너 번 뒤척였을 뿐, 내내 반듯이 누워 시체처럼 잤다.

피로를 더는 이기지 못해 자신도 꾸벅거리며 졸기 시작한 건 어슴푸레한 여명이 창문으로 비쳐들 무렵이었다. 아마도 새벽 6시쯤이었을 게다. 그 이후는 그대로 암흑이었다. 문득 소스라쳐서 깨어날 때까지 일체의 기억이 없었다.

어슴푸레한 빛이 커튼 틈으로부터 비쳐들고 있었다. 자신이 깨어 일어난 곳은 주침실 안, 침대 위였다. 갑자기 심장이 맹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시각도 확인하기 겁나 그대로 총알처럼 침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거실 청소 중이던 메이드 미스 원이 자신의 혼비백산한 기척에 놀랐는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인사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럴 것이, 자신은 눈곱도 안 뗀 부스스한 얼굴도 모자라 파자마 차림이었다. 그가 침실로 옮겨주며 갈아입힌 모양이었다.

“……그…… 그는……! 사장님은요? 떠, 떠나셨나요?!”

목소리에 실린 절박함이 읽혔는지, 미스 원의 참한 표정에도 급박한 당혹감이 실리는 게 보였다.

“그…… 글쎄요, 방금 나가시긴 했는데…… 아직 차 소리는 안 나니깐…….”

채 다 듣지 않고 바로 현관문 밖으로 튀어나갔다. 느닷없는 필사적인 질주 탓에 마비가 있는 다리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진입로에 세워진 차들이 보였다. 경호원들의 SUV 두 대와 언젠가 본 듯한 금색 아우디(비서실장인 윤 실장의 차였다), 그리고 그의 검정색 세단이었다. 차만 보이고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즉시 가슴을 쓸어내린 인환이었다. 심장은 여전히 맹렬하게 뛰고 있었다. 손도 벌벌 떨리고 다리는 더 떨렸다.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배웅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배웅만은 해줘야지. 아무렴. 꼭 반드시 해줘야지. 감정이 복받친 바람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며 숨길을 가다듬어야 했다.

“……인환아……? 무슨……!”

위에서 놀란 부름이 내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자, 언덕 위 2층 정원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서둘러 달려 내려오고 있는 그가 보였다. 그의 뒤로도 일단의 사람들이 따라 내려오고 있었지만,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알고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시야엔 오로지 낯빛이 변해 달려오는 ‘그’뿐이었다. 연갈색 콤비 슈트에 적갈색 미소니 머플러, 그리고 화려한 은색 버버리 코트까지, 완벽한 비즈니스 정장 차림인 그는 막 출발을 하려던 중인 모양이었다.

“쌀쌀한데 그런 차림으로 왜 나와!!!”

벽력같은 외침엔 걱정이 절절해서 가슴이 아렸다. 양팔을 활짝 벌린 그가 코앞까지 다가든 순간, 무턱대고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두 팔로는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양쪽 다리는 그의 허벅지 위까지 끌어올려 친친 휘감았다. 필사적이었다. 대답하듯 마주 감겨드는 그의 팔 힘도 자신의 것 못지않았다. 목이 메어 터지는 것처럼 아팠다. 감정이 격해져서인지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인환아……?”

매혹적인 중저음엔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래……? 왜 이렇게 떨어…… 응……?”

자신이 몸을 떨고 있다면, 그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니, 감겨든 그의 팔도 자신처럼 몹시 떨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또 코트라도 벗어주려는지, 그가 자신을 조금 밀어내려는 기색이 읽혔다. 안 될 말이었다. 설령 그게 옷을 벗는 찰나의 순간이라 할지라도 떨어지기 싫었다. 죽어도 싫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는 곧 뉴욕으로 떠날 터였다. 뉴욕이라니, 너무나 먼 곳이었다.

자신이 더더욱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리자 그도 곧 포기한 듯 안은 팔에 다시금 힘을 주었다.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격렬한 포옹이었다. 상관없었다. 으스러지라면 으스러지라지.

“……어쩌지……?”

여전히 떨고 있는 중저음이 울듯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정수리 위로 연신 입을 맞추는 탓에 발음조차 불분명했다.

“……이틀이 한계인데 어떻게 견딜까…… 보고 싶어 미칠 텐데…… 환장할 텐데…… 어쩌지……? 어떻게 하나…….”

“…….”

악착같이 그의 목덜미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자, 그의 어깨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멀리 단풍이 들기 시작한 북악산 능선도 보였다. 하늘이 소름 끼치도록 맑고 푸르렀다. 햇빛 또한 마냥 호사스럽고 찬란하기만 했다. 너무나 눈이 부셔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가을이었다.

이별하기엔 차마 너무나 예쁜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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