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2003년 11월. 문위(文偉)
“작업하고 있었나?”
[……어, 응. 너는? 거긴 지금 아침이지? 몇 시야?]
정말로 작업 중이었는지 내 것의 목소리가 어딘가 나른하다. 그림을 그리다 몰입 상태에서 갑자기 불려나오면 반드시 이렇게 귀여운 목소리가 나오곤 한다. 하긴 어떤 목소리인들 귀엽지 않을까마는.
“7시가 좀 넘었군. 8시에 본사 중역들과 조찬 모임이 있어서 막 회사에 도착한 참이야.”
[……그럼 아직 아침밥 안 먹었겠네?]
“음, 회의하면서 간단하게 토스트 같은 거나 씹어야겠지. 너는? 저녁은 먹었나?”
[……어어, 아주머니가 굴밥 해주셨어. 오랜만에 먹는 거라 그런지 맛있더라. 큰 양푼에 두 공기나 넣고 양념장에 비벼 먹었어. 넌 양식은 질색인데 고작 토스트라니 어떡해? 거기 비서들더러 메뉴 좀 신경 써달래지 그랬어?]
“후후, 말이 조찬이지 신경 쓸 일 천지인데 다들 제대로 밥이 넘어가겠나? 그저 먹는 흉내나 내는 거지. 중역들 없이 따로 식사할 땐 매일 한식으로 먹어주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입에 안 맞는 음식에조차 걱정을 드러내는 연인의 애정이 기뻐서 심장이 수런거린다. 출장이 예정보다 길어져 얼굴을 못 본 지 벌써 열이틀째지만, 수시로 하는 연인과의 통화는 참기 괴로운 그리움과 초조감을 달래주는 그나마의 감로수였다. 이렇게 연인의 목소리는 물론, 그 속에 숨겨진 자신에 대한 극진한 애정과 배려를 접하고 나면 복받치는 기쁨과 충만감에 몸서리를 치곤 하는 자신이다. 그로써 충전된 에너지는 또한 멀고도 긴 이별을 견디는 가장 큰 조력자가 돼주었다. 물론 당장 한국으로 날아가고픈 욕망도 함께 피크로 치솟긴 하지만 그 이상의 자제력을 추스를 힘을 주기도 하니, 의처증 환자처럼 수시로 해대는 전화질만큼은 절대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다.
“아아, 그리고 오늘 아침에 한 약속은 잊지 않았지? 생일날 캠코더에 녹화해놓은 것 지우면 진짜로 가만 안 둔다?”
[……벼…… 변태…….]
“……그건 엄연히 내 예술 작품이야. 네가 함부로 훼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구, 마누라.”
[……그……! 씨이…… 그, 그게 무슨 예술 작품이라는 거야! 어따 대고 그딴 게 예술이래…… 보는데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 뭐! 순 변태 사이비 아냐…….]
“이거 왜 이러시나? 아무리 천재 화가라고 남의 작품을 그리 모욕해도 되시나?”
[……천……! 무, 무슨 모욕을 했다고, 내가……!]
“……정말 거만하시군, 천재 화가 나리. 남이 날밤을 새우면서 심혈을 기울여 창작한 멋진 작품인데…… 모델의 프라이버시 탓에 대중에 공개 못 해 그렇지, 웬만큼 눈 밝은 치들이라면 대번에 알아볼 수 있을걸? 꽤나 전위적인 작품이라고.”
[전위는 무슨 얼어 죽을!!! 그림 까막눈인 주제에 어디서 주워 읽은 건 많아가지고! 호, 혹시라도 공개했단 봐라! 다 부숴버릴 테니까!]
“큭큭큭. 그러니 약속 지키시죠, 마누라. 서방님 돌아가실 때까지 캠코더가 무사치 못하면 디카에 담긴 작품들의 프라이버시도 보장 못 할 테니.”
[……!!!!!]
푸하하하하……. 시시각각 터지려는 행복한 박장대소를 참기 위해 힘껏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속웃음을 웃느라 폴더를 귀에서 멀리 떨어뜨린 채 한동안 배를 움켜쥐고 식은땀을 흘려야 했음은 물론이었다. 새빨개져선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강아지의 사랑스러운 모양새가 눈에 선했다. 어젯밤 서재를 들락거리다 자신이 출장길에 미처 챙기지 못한 캠코더를 발견한 연인이었다. 연인의 생일 파티 기록이 담겨 있으니 확인해보는 것도 당연했고, 끝 무렵에는 좀 민망한 부분까지 촬영이 돼 있는 것도 다 살펴보았을 터였다. 전화를 걸자마자 당장 지울 거라고 만만찮게 따지고 드는 연인을 말리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던 자신이었다. 수시로 틀어보며 은밀하게 혼자 즐길 기왕의 작정은 애석하게도 무위로 끝나버린 셈이다. 별수 없이 디카에도 수십 장 찍어뒀다는 엄포로 협박을 한 끝에 간신히 캠코더 동영상을 사수할 수가 있었는데, 그래도 언제 마음이 변해 영상물을 폐기 처분할지 여전히 조마조마했다. 참말이지, 어젯밤의 통화만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아슬아슬한 스릴을 느끼는 자신이었다. 물론 유쾌한 행복감으로 충만한, 더할 나위 없는 천국의 스릴이었다.
“아 참, 내일 낮엔 외출할 거라면서? 전에 일하던 카센터에 간다고 했다던데?”
겨우겨우 수습한 폭소를 담담한 목소리로 180도 바꿔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어어…… 사장님이랑…… 재식이도 보고 싶어서…….]
빙고. 어눌하지만 진지한 대꾸가 즉시 떨어진다.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붉으락푸르락해졌을 얼굴이 한순간 허를 찔린 듯 어리둥절해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진지함을 가장하면 금세 자신의 분위기에 동화돼 빠르게 반응하곤 하는 연인의 섬세함이자 순수함이었다. 이런 사랑스러운 기질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늘 기쁘면서도 가슴이 아릿해졌다. 또다시 물밀듯이 밀려드는 절절한 그리움에, 귀에 바짝 붙인 휴대전화 폴더를 양손으로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직접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연인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나마 고스란히 전해주는 사물조차도 소중하고 또 소중하게만 생각되었다.
“……나 귀국하면 함께 가지?”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보고를 들은 즉시 떠올랐던 제안을 던져보았다. 그 여자가 한국에 없다고는 하나 일말의 불안감은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이 귀국할 때까지 되도록 외출은 자제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자신의 솔직한 욕심이었다.
[……걱정돼서 그래? 경호원들도 데리고 가는데 뭘…… 며칠 전 화방에 갔을 때에도 아무 일 없었단 거 알잖아.]
“……아니, 별로 걱정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잠깐 얼굴만 보고 오는 거야…… 나중에 너 오면 또 함께 가면 되지 뭘…….]
“그래, 그러자. 그동안 네게 잘해주셨다니, 나도 찾아뵙고 인사 드리고 싶거든.”
[……어어, 응.]
“젠장,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미치겠군. 뭐 이리 정리해야 할 게 많은지…….”
[……여전히 일이 바쁜가 봐…… 모레 귀국하는 거…… 또 연기되는 거 아냐?]
목소리가 꽤나 조심스럽게 들린다. 빨리 돌아와주길 바라는데 자꾸만 일정이 늦어져 초조한가 보다고, 제 좋을 대로 해석하곤 그게 또 못 견디게 기뻐서 흡족하게 웃음을 깨물고 있다.
“왜? 또 연기될까 봐 겁나? 서방님 보고파 미치겠는데 자꾸만 늦어지니 속상해?”
[…….]
역시 찔끔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슬쩍 얼굴이 붉어져선 안절부절 자신을 흘겨볼 연인이 눈에 선하다. 무슨 이런 뻔뻔스러운 인간이 다 있나 싶겠지. 자신만큼 그리워 미치지도, 자신만큼 불안해하지도 않을 연인이라는 걸 안다. 10여 년 전의 그토록 절박했던 집착을 두려워하는 연인이라는 것도 신물이 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자신의 진심을 믿지 않으려 들고, 두려워하며, 또한 필사적으로 밀어내려 한다는 것도.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짓궂은 농을 빌어 여봐란 듯 드러낼 수 없는 진심을 전하는 것 또한 멈출 수 없는 자신이다. 부디 믿어주기를…… 아니, 믿어볼 용기를 세워주기를, 그래서 자신을 두려워하지도, 또 밀어내려 하지도 말아주기를.
“……더 늦어지진 않아. 할 일도 다 처리했고, 만날 사람들도 다 만났으니 모레는 돌아갈 수 있어. 보고 싶어 환장할 것 같았는데 그럭저럭 잘 견뎌냈으니 돌아가면 상을 줘야 해, 마누라.”
[…….]
“……이번 출장을 기점으로 본사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했으니까 너와 이번처럼 오래 떨어지는 일도 없을 거야. 잘됐지?”
[…….]
“왜 말을 안 해?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
“인환아……?”
[……아…… 아프지 마…….]
“……?”
들릴 듯 말듯 힘겹게 토해진 대꾸였다. 전화기를 귓구멍 속으로 밀어 넣을 기세로 열심히 듣고 있었기 망정이지, 의미조차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뜬금없이 아프지 말라니? 잔뜩 억제된 물기마저 느껴져서, 애송이처럼 한껏 들떴던 자신의 기분도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아프면 안 돼…… 무슨 일이든…… 아프거나 하면 절대 안 돼, 위야…… 응?]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그, 그냥 타지에서 너무 고생하는 거 같으니까 그러지…… 바, 밥도 잘 못 먹는 거 같고…… 응? 약속해, 위야. 절대 아프지 마? 응? 응? 무슨 힘든 일이 일어나더라도 절대 아프면 안 된다?]
“……내가 아프지 않으면 너도 아프지 않나?”
문득 초조해져서 날카롭게 나가려던 톤을 급히 부드럽게 바꾸곤 되묻는다. 자신을 기쁨으로 전율시키는 연인의 극진한 애정이고 배려라는 것을 아는데도 어째 기분이 찜찜했다. 입에 맞지 않는 식사에 대한 걱정을 들었을 때만큼의 반도 즐겁지 않았다. 아마도 목소리에서 흐릿하게 감지되는 연인의 물기 때문일 것이다. 얼굴을 볼 수 없어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틀림없이 그 사랑스럽고 순한 눈시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할 터였다.
[……응…… 응, 물론이지…….]
다행히 떨어지는 대꾸는 명랑했다. 물기는 여전히 느껴졌으되, 자신의 짓궂은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내고 있어 그나마 안도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럼 아프지 않을게. 내가 아픈 걸로 널 아프게 하긴 싫으니까.”
[……응…… 응, 응…… 응, 위야…….]
수화기를 꼭 붙든 채 마구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가슴이 저렸다. 너무나 그리웠다.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물릴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고도 싶었다. 가장 참기 힘든 그리움은 역시 연인의 체취였다. 알몸의 귀여운 몸뚱이를 품에 꼭 껴안았을 때 나곤 하는 땀에 젖은 달큼한 체취였다. 한꺼번에 몰아닥친 그리움이 어찌나 독한지, 자신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리며 수화기를 코에 딱 붙이는 비이성적인 짓까지 저지르고 있었다. 혹시라도 수화기를 통해 연인의 체취가 맡아질까 기대한 때문이리라.
“……이틀만 더 기다려. 이틀 후엔 다시 볼 수 있어, 인환아.”
연인이 아닌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였다.
[……응…….]
“……오늘 밤에도 너무 오래 작업하지 말고 일찍 자도록 하고.”
[……응…….]
“……끊을게.”
[…….]
“인환아?”
[…….]
윤 실장이 창문 너머에서 눈짓을 계속 주고 있었다. 중역들이 모두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였다. 당장 끊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끊기가 싫었다. 그것이 수화기 너머의 애잔한 침묵 때문이라 변명하는 자신이었다. 보지 않아도 또 물기가 가득해졌을 연인의 눈망울이 선했다. 가슴이 아렸다. 보고 있어도 아린 사람이니, 보지 못하는 지금은 그 얼마나 아릴 것인가. 자신 또한 눈가로 물기가 몰리는 느낌이어서 서둘러 헛기침을 해댔다.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간, 남은 일정이고 뭐고 또 공항으로 직행하고 싶어 몸살이 날 터였다.
“……중역들 도착했나 봐. 프레젠테이션 룸으로 가봐야 해.”
[……어……? 어어, 얼른 가봐! 이만 끊을게!]
“……후후, 네가 가나? 왜 그리 서둘러…….”
[…….]
“……진짜 끊는다……? 내일 아침 무렵에 또 전화할게. 잘 자, 마누라…….”
[……응…….]
“…….”
[…….]
“……왜 안 끊어? 빨리 끊어야 나도 끊지.”
[…….]
“……인환아……?”
[…….]
뚜우우우우…….
마침내 수화기를 놓았는지 비정한 기계음만 귀청을 간질였다. 순식간에 속이 텅 비는 듯 공허한 감각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막상 전화를 끊기를 종용한 것은 자신이면서도 한동안 멍하니 수화기를 든 채 입술을 깨물며 감정을 삭여야만 했다.
아마도 평생이 될 터였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듣고 있어도 듣고 싶은, 이 독하고 독한 그리움이란 것은. 이 모질고 모진 집착이란 것은. 병이었다. 병이 들어버렸다, 자신은. 10년 전, 마음을 저버린 벌이었다. 진정을 살해한 벌이었다. 그러니 이 벌도 달개 안고 가리라. 일평생 불안하고 초조해하라, 저주해주리라. 일평생 그리워하다 죽어라, 통렬하게 비웃어주리라.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윤 실장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신호를 한 모양이었다. 마침내 폴더를 내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게으름을 피울 틈은 없었다.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예전엔 가족이었다면 이젠 연인이었다. 아니, 가족과 연인 둘 다였다. 둘 다를 지키기 위해선 여전히 힘은 필요했다. 그 힘을 손에 거머쥐고 놓지 않기 위해 맹렬히 뛰어야 할 시간이었다. 날아야 할 시간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승수 씨?”
경호원 차승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다음 날 새벽 3시 무렵이었다. 잠이 든 지 두어 시간이 지난 시점이라 침대 머리맡에서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를 확실히 인지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숙면 중에 강제로 깨어난 데 대한 희미한 짜증은 휴대전화 액정에 뜬 경호원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으로 단숨에 날아갔다. 심장이 세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대꾸를 기다리는 몇 초가 몇 시간보다도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서울과 뉴욕 간 시차를 꿰고 있는 경호원이 새벽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했다는 사실 자체부터가 불길했다.
[……죄…… 죄송합니다, 사장님…… 장 선생님께서…….]
눈앞에 번쩍 하고 빛줄기가 지나간 듯한 착각이 일었다. 폴더를 쥔 손이 무섭게 떨리기 시작했다. 진정하라고, 숨을 제대로 쉬라고, 누군가가 뇌리 속에서 거듭 명령하고 있었다. 따라야 했다. 그래야만 한다. 정신을 차려야만 뭐든 정확히 대처를 할 테니. 아아, 역시 뉴욕으로 와선 안 되었다. 혼자 두는 게 아니었다, 절대. 미친놈. 미친놈. 등신 같은 놈. 그 사달을 겪고도 방심해버리다니!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미적거리는 경호원의 대꾸가 거듭되는 동안 수만 가지의 통렬한 자책과 후회가 뇌리를 스쳐가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확실히 말씀하십시오.”
자신이 듣기에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마음속에서는 제아무리 폭풍이 불어도 일단 목숨을 건 전투가 시작되면 태도가 냉랭하게 변하곤 하는 스스로의 기질이 이때만큼 고맙게 느껴진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 머리맡의 스탠드를 켜고, 남은 한 손으로 부지런히 옷을 찾아 입는 일련의 침착한 행동들조차도 본능이 명하는 무의식의 발로였다. 팬티밖에 걸치지 않은 알몸으론 그 어떤 대응도 제대로 할 수 없을 터였다.
[……자, 장 선생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저희들 불찰입니다!]
각오한 답변인데도 한순간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폴더를 쥔 손을 내린 채로 몇 번이나 숨길을 가다듬고 나서야 극심한 공포감을 찍어 누를 수 있었다. 두려워할 때가 아니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었다.
“설명하십시오.”
사라졌다라……. 연인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건 다섯 시간 전인 밤 10시 무렵이니, 서울 시간으론 정오쯤일 터였다. 정오에서 오후 5시 사이에 사라졌다면…….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 제발!!! 머릿속으로 시간부터 가늠해보려 하지만, 시시각각 밀려드는 불안감과 공포감에 저절로 비명 같은 기원만 터져 나왔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간, 필사적으로 의지를 세우는 덕분에 도로 기운이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섯 시간 전에 그 사람과 마지막으로 통화했습니다. 고작 다섯 시간인데, 그사이 언제, 어떻게 사라진 겁니까? 납치입니까? 휴대전화로도 물론 연락이 안 되는 거겠죠?”
[그…… 그게…… 자의로 사라지신 것 같습니다.]
두근…….
[……오늘 부천의 카센터로 외출하실 계획이신 건 이미 보고 드렸었죠? 오후 2시쯤에 카센터로 모셔다드리고 저희는 카센터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카센터 안쪽에 사무실이 있는데, 그곳에서 센터분들과 한 시간여 동안 환담을 나누시곤 뒷문으로 저희 몰래 빠져나가신 것 같습니다. 센터분들에겐 저희들이 경호원이 아닌 감시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더군요. 그래서 그분들이 장 선생님이 몰래 빠져나가시는 데 도움을 주신 모양입니다. 저희가 눈치챘을 땐 이미 대기 중이던 다른 차를 타고 사라지신 후였습니다. 카센터 분들 말로는 3시 10분쯤이었다고 합니다.]
“…….”
[……사장님……?]
“계속해요, 듣고 있으니까.”
[휴대전화도 두 개나 카센터에 두고 가셨는데 하나는 장 선생님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알아보니 양신애 씨의 것이었습니다.]
“!!!”
각오를 하긴 했지만 역시 쇼크는 지독했다. 한동안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가 다음 순간 헐떡이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어야만 했다. 시야가 새빨간 막이 낀 것마냥 붉게 물들었다. 휴대전화를 박살 내고픈 격렬한 욕구를 참기 위해 기를 써야만 했다.
[현재는 저희 나름대로 휴대전화 통화 내역들을 조회 신청한 상태고, 장 선생님을 태운 운전사를 찾기 위해 여러 택시 회사들에 조회를 해보곤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사장님께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뜨겠습니다. 최대한 사람들을 많이 모아주세요.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대비해뒀던 매뉴얼대로 움직여주십시오. 제가 도착할 때까지 일단 윤열이 형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형에겐 제가 전화를 넣어두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저희들 불찰…….]
“사과는 나중에 그 사람을 찾은 후에 듣겠습니다. 속히 움직이세요.”
[예, 사장님! 아, 그리고 잠시만…… 잠시만요, 사장님……! 이것도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뭡니까?”
[재식 씨라고…… 센터 종업원이 하나 있는데, 장 선생님께서 사장님께 전해드리라며 전언을 남기셨답니다.]
기왕에 세동하던 심장이 극심하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사나운 폭풍에 휘말려들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심장에 무리가 가지는 않을 터였다. 심장이 아픈 건지 아니면 심장에 마비가 오는 건지, 제대로 분간조차 할 수가 없었다. 제주도에서 연인에게 한 번 버려지고 나서 그 이상의 고통은 없으리라 여겼는데 그때와 한가지인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한 것도 같았다. 연인의 넋 속에 깊이 봉인돼 있는 자신에의 사랑을 확연히 인지한 후라, 쇼크는 더더욱 큰 것인지도 몰랐다. 또다시 버려지리라곤 차마 예상치 못했기에. 고통과 상처가 너무나 극심해 셔츠를 걸치다 말고 기어이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말해보세요.”
[……그게…… 저…… 아프지 마시라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아프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
[……사, 사장님께서 아프시면 장 선생님은 더 아프실 거라고…….]
“…….”
[……그렇게 전하라고 했다는군요. 재식 씨에겐 전세 자금으로 3000만 원이나 빌려주셨다고 합니다. 통장이랑 도장째요. 나중에 벌면 갚으라고 하셨다네요. 기분이 이상해서 안 받겠다고 하는데도 억지로 놓고 가셨답니다.]
“…….”
[……마치 그게 꼭…… 아, 아뇨! 이런 말씀은 안 드리는 게 낫겠네요! 못 들은 걸로 하십시오, 사장님!]
“단 하나도 빼지 말고 말씀해주세요. 찾아내려면 모든 가능성과 단서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 그게…… 그건 그렇지만…… 죄, 죄송합니다, 사장님…….]
“말씀하세요.”
[……그게…… 꼭 유언처럼 들렸다고…….]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
[……사, 사장님……?]
“…….”
[……사장님…….]
“……움직여주세요. 윤열이 형에게 전화해서 형의 명령대로 따르세요.”
[……예…….]
“그리고 휴대전화로 계속 상황을 보고해주십시오. 최대한 빨리 도착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사장님!]
폴더를 내리고 한동안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수하에겐 서둘러 움직일 것을 종용했지만, 정작 자신은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은 때문이었다. 사지에 흐물흐물 힘이 풀린 지 오래였다. ‘유언’이란 단어를 들은 직후부터였다. 머릿속도 마냥 하얗게 비어버려 무엇부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도통 떠오르지가 않았다. 쇼크가 가라앉고 나니 고통은 그 이상으로 생생해지고 있었다. 심장 근처로 오른손을 가져가 눌러보았다. 조금이나마 고통이 줄어들 것 같아서였다. 과호흡 증세를 보이고 있는 숨길도 부러 천천히 내쉬려고 노력했다. 어떻게든 일단은 움직여야만 했다. 그것도 당장. 아파할 틈이 없었다. 절망할 계제가 아니었다. 무조건 움직여야만 했다. 아픈 것은 뒤로 미뤄야 할 터였다. 아니, 아주 아프지 말아야 했다. 연인도 부탁했다지 않은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아프지 말라고.
―……아…… 아프지 마…….
흐릿하게 재생되는 연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스무 시간 전쯤에 나눈 통화 내용이었다. 잔뜩 억제된 물기마저 느껴져 자신 역시 듣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지지 않았나.
―……아프면 안 돼…… 무슨 일이든…… 아프거나 하면 절대 안 돼, 위야…… 응……?
들릴 듯 말듯 힘겹게 토해진 대꾸였었다. 전화기를 귓구멍 속으로 밀어 넣을 기세로 열심히 듣고 있었기 망정이지, 의미조차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었다. 뜬금없다 여겼지만 절대로 뜬금없는 말이 아니었다.
―……응? 약속해, 위야. 절대 아프지 마? 응? 응? 무슨 힘든 일이 일어나더라도 절대 아프면 안 된다……?
“……내가 아프지 않으면 너도 아프지 않나?”
뇌리 속에서 재생되는 애절한 물음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스무 시간 전에 되물었던 것과 한가지였다. 대꾸는 바로 돌아왔다.
―……응…… 응, 물론이지…….
자신의 짓궂은 말투를 그대로 모방한 명랑한 대꾸였다. 물기는 여전했으나, 밝고 귀여운 말투가 사랑스러워 그만 안심해버린 대꾸였었다. 등신같이, 그게 유언처럼 절박하고 간절한 부탁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래……. 그럼…… 그러면 아프지 않겠다. 내가…… 내가 아픈 걸로 널 아프게 하긴 싫거든…….”
목이 메어서 발음이 샌다.
―……응…… 응, 응…… 응, 위야…….
수화기를 꼭 붙든 채 마구 고개를 끄덕일 연인의 모습이 흐릿하다.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
……가슴이 찢어발겨졌다. 또다시 버려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까 두려워 미칠 것만 같았다. 하느님, 하느님, 제발……!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오열을 참았다. 울 수 없었다. 아직은 아픈 티를 내면 안 되었다. 아플 수도 없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절대 일어나지도 않게 할 터였다. ‘아무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는데, 미리 아플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렴. 그런 등신 같은 부화뇌동이라니. 그러니 울 수 없었다. 절대, 울지 않을 터였다.
입다 만 셔츠에 팔을 꿰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손에 움켜쥐고 있던 휴대전화 폴더는 땀으로 흥건했다. 좀처럼 떨림이 멎지 않는 손아귀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호흡을 골랐다.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뜨길 되풀이하며 천천히 감정도 잘라냈다. 아니, 감정을 얼려버렸다. 마치 생명이 없는 기계처럼. 아프지 않으려면 기계가 돼야만 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기계로 폴리모프 하는 덴 기왕에 이골이 나 있는 자신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됐다 싶었을 때 손안에서 삶아지고 있던 휴대전화 폴더를 열었다. 단축 번호 15번을 눌렀다. 자신만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녹초가 돼 있을 윤 실장의 휴대전화 번호였다. 윤 실장과 윤열이 형을 시작으로 전화를 해야 할 인물들의 기다란 리스트가 뇌리 속에 일목요연하게 떠올랐다. 네 번째인가의 신호 끝에 잠에 취한 윤 실장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부터 들려왔다.
[……사장님……?]
“지급입니다. 한국으로 당장 돌아가야 하니 비행기 대기시켜주세요. 일정 조정은 본사 머레이 실장에게 맡기고 윤 실장은 최대한 빨리 출발할 수 있도록 서둘러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준비되는 대로 객실로 찾아뵙겠습니다!]
총명하고 눈치 빠른 사내라 다행이었다. 목소리만으로도 무언가 위급함을 감지한 사내는 일체의 토를 달지 않은 채 재빨리 전화를 끊어주었다. 자신 또한 종료 버튼을 누르는 즉시 윤열이 형 번호를 눌렀다. 이미 경호원들을 통해 연락이 가 닿았을 것이다. 불과 넉 달 전, 죽을 뻔한 것으로 형에게 걱정이란 걱정은 죄다 시킨 주제에 또 심각한 근심거리를 안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죄책감과 염려도 그저 찰나에 불과했다. 다른 절박한 목표가 여타의 소소한 감정적 동요들을 쓰나미처럼 휩쓸고 지나가버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위야?!!! 이거이 다 무신 소리여?!!! 안 그라도 시방 경호원이람서 전화 받었는디!!!]
근심이 가득한 사투리의 억양이 다급하게 귓전을 파고들었다. 왈칵 치민 응어리에 또다시 목이 메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유일하게 의지하는 웃어른의 목소리를 듣고 보니 일순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물론 안 될 일이었다. 목표를 이룰 때까지 자신은 철저하게 기계로 머물러야만 했다. 몇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폴더를 꽉 움켜쥐었다. 다행히 응어리는 곧 가라앉았고, 형의 근심과 마주할 힘도 되돌아왔다.
“……다 사실입니다, 형. 형 도움이 필요해요.”
자신의 귀에도 흔들림 없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정말로 기계 같다고, 만족한 생각이 얼핏 스쳐갔다.
“검찰이든 경찰이든 사설탐정이든, 다 필요해요. 신애가 그 사람을 납치한 것 같습니다.”
흠칫 숨을 삼키는 형의 기척이 들렸다. 까마득한 충격 속에 빠졌을 형의 심사가 생생히 전해졌다. 그에 공명하듯 자신도 저절로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화…… 확실한 겨? 제수씨 짓이 확실허단 말이여?]
‘제수’라는 단어에 문득 치가 떨려와 감겼던 눈이 커다랗게 부릅뜨였다.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전방을 주시했다. 발 아래로 펼쳐지는 마천루들의 불빛이 휘황했다. 최상층 펜트하우스답게 사방 벽이 화려한 통유리로 둘러싸여 있어 전망 또한 나무랄 데가 없는 방이었다. 과연 Marriott Financial 그룹에서 경영하는 VIP 호텔답다고 이를 갈았다. 마치 그 여자처럼 화려하고, 그 여자처럼 견고했다. 치가 떨렸다. 그 여자를 형이 제수씨라고 부르게끔 만든 것은 자신이니, 원망할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리라.
“……예. 제가 갈 때까지 우선 그 여자의 행방부터 수배토록 지시해주세요. 자세한 사항은 경호원들에게서 들으시구요. 저도 바로 돌아가 합류하겠습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다가 이내 긴 한숨으로 마무리하는 형의 기척을 마지막으로 폴더를 내렸다. 넥타이에 양말, 그리고 재킷과 코트를 차례로 주워 입고 있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윤 실장이었다. 문을 열자, 수면 부족의 부스스한 얼굴에 머리까지 사방으로 뻗친 사내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목례를 했다. 사내의 한 손엔 사내의 목숨줄과도 같을 노트북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승무원들 수배를 마쳤습니다. 일단 헬기로 JFK 공항까지 이동해야 하니 옥상으로 모시겠습니다. 뒤처리는 말씀 주신 대로 머레이 실장에게 일임했습니다. 중요 서류는 노트북에 입력해두었고 나머지 거래 파일들도 빠짐없이 챙겼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대한 빠르게 비행하면 서울에 도착하는 데 몇 시간쯤 걸리겠습니까?”
부지런히 보고를 하는 윤 실장을 따라 옥상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물었다. 일처리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도착하는 것만이 뇌리 속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기장과 상의해봐야겠지만, 아무리 빠르게 이동한대도 열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은 각오해야 합니다, 사장님.”
열 시간. 피를 말리는 열 시간일 터였다. 아니, 피를 말리는 며칠, 혹은 몇 달이 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또 힘이 풀린 다리 탓에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윤 실장이 이크 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한쪽 팔을 부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장님……?!”
―……아…… 아프지 마…….
“…….”
―……아프면 안 돼…… 무슨 일이든…… 아프거나 하면 절대 안 돼, 위야…… 응……?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아프지 않겠다.”
“……사장님……?”
“……절대 내 멋대로 아프지 않을게…….”
윤 실장의 부축을 가볍게 밀치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늦가을 밤의 찬 공기가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겨울이 빨리 오는 뉴욕답게 매서운 칼바람이었다. 몇 년 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살을 에는 추위도, 뼈를 저리게 하는 공허감도. 역시 싫기만 한 도시라고 멍하니 뇌까렸다. 현재의 성공을 손안에 움켜쥐게끔 해준 기회의 도시였지만 결코 자신이 안주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너무나 늦어 있었다. 아니, 늦은 것 같았다.
타타타타…….
멀리서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코트 자락을 한껏 여미며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검고 뿌연 도시의 어둠이 시야 가득 밟혀들었다. 자신을 삼키려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절망과도 닮아 있는 지저분한 어둠이었다.
타타타타타타…….
맹렬히 돌고 있는 프로펠러 날개가 보였다. 빌딩 숲 사이로 마침내 드러낸 헬기의 몸통은 거대한 식인 사마귀처럼 보였다. 칼바람은 사나워지다 못해 토네이도처럼 시커먼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저것에 질 수는 없었다. 아무렴. 이를 악물고 다시금 의지를 곱씹었다. 아직은 두려워할 때가 아니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었다.
연인이 사라진 지 닷새가 지났다.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 백방으로 뒤지는데도 흔적은 묘연했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납치극이라는 것을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던 경찰도 납치 다음 날, 휘가 나타나 일련의 고백을 하는 것으로 ‘가출’에서 ‘약취 유인’ 쪽으로 수사 방향을 급선회했다. 여자의 휴대전화 통화 내역에 따른 위치 추적도 별 소득이 없었고, 연인이 카센터에서 불러 타고 갔다던 택시도 대포 택시로, 대전인터체인지에서 한밭대로로 접어드는 20킬로 지점 갓길에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차에서도 별다른 단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은 이구동성으로 치밀한 전문가의 솜씨라고 했다. 연인을 추적하는 것보다는 그 여자를 추적하는 편이 더 빠를 것 같다는 쪽으로도 의견이 모였다. 여자의 모든 연고지와 친지 및 친척들은 물론, 옛 은사들에서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관련 있는 자들은 전부 경찰의 감시망 하에 놓이고 여자에 대한 수배령도 이미 떨어진 상태였지만, 좀처럼 뾰족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지난달 초 출국했던 여자는 기록상으론 현재까지 뉴욕 본가에서 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지난달 말경 한국에 은밀히 돌아와 친구 집에서 기거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여자를 집에 묵게 해준 대학 동기도 여자가 며칠 동안 부단히 외출을 하긴 했는데 그런 일을 꾸미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며 몹시 놀라고 안타까워했다. 여자의 행적은 지난달 27일 전후로 완전히 묘연해졌음은 물론이었다. 여자가 마지막으로 목격됐다는 남부터미널에 사람을 풀어 탐문 수사를 벌이고 있지만, 새로운 목격자가 나타날 가능성은 그닥 보이지 않았다.
닷새째가 돼도 별 단서가 잡히지 않자 경찰들은 공개 수사를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다. 방송을 동원해 불특정 다수의 목격자를 찾는다는 의미였다. 여자가 빼어난 미인이니 어딘가 숨어서 잠적하지만 않는다면 쉬이 사람들의 눈에 띌 거라고도 했다. 설령 잠적했다 하더라도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거라며 공개 수사만이 빠른 해결의 유일한 열쇠라 강조하고 있었다.
윤열이 형은 공개 수사에는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일단 이만큼 치밀하게 준비했다면, 이미 연인이 사라지기 전부터 한 장소에 은신해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턴 철저히 단절돼 있을 거라 했다. 또 연인을 무사히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연인이나 위 자신의 명예에도 신경을 써야만 한다는 조언이었다. 일단 공개 수사를 하게 되면 자신이나 연인, 그리고 그 여자의 사생활이 하나의 센세이셔널한 가십 거리로 만천하에 공개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얘기였다.
처음엔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사안처럼 들렸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그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자신이나 그 여자야 지킬 명예고 사생활이고 관심조차 없지만, 연인은 달랐다. 이제 막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한 화가가 아닌가. 이제 막 세인들의 관심을 받고 재평가되기 시작한 천재가 아닌가. 그림 이외의 문제로 다시금 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연인은 재기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림이야 그릴 수는 있겠지. 그러나 화가라는 자의식과 자존감은 완전히 박탈당하게 된다. 연인에게서 화가라는 정체성마저 빼앗는다면, 그림마저 빼앗는다면 그 대미지는 상상을 초월할는지도 모른다. 죽음 같은 10년을 오로지 그림 하나로 버틴 연인이 아니던가. 어떻게든 연인에게서 그림만은 지켜주어야 했다.
게다가, 형은 여자가 연인에게 상해는 입힐 수 있을지언정 살해할 리는 없다고 부연했다. 복수하고픈 마음 이상으로 자신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기에 최악의 선택만은 하지 않으리라고. 형이 말을 마치자마자, 하도 기가 막히다 못해 우스워서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형을 바라보았었다. 그녀의 집착과 원한이 이 사달을 불렀는데, 역으로 연인을 무사히 살리려면 도리어 여자에게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를 자신에 대한 미련과 애정을 기대해야만 하다니.
조만간 연락이 올 거라고 형은 예언 아닌 예언을 했다. 그 여자로부터 반드시 연락이 올 거라고. 연인을 통해 상처를 입히고픈 상대는 오히려 위 자신이니,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연락을 해올 것이라고, 그때 잘 다독여서 연인을 구해내야만 한다고 형은 강하게 말을 맺었다.
삼청동 집 거실 안, 모여 앉은 스무 명 가까운 남자들의 시선이 죄다 자신에게로 떨어졌다. 전현직 경찰 관계자들이며 심리 분석가, 윤열이 형과 그 휘하의 비서관들, 그리고 경호업체 직원들은 물론 자신의 비서진들까지 죄다 동원돼 있었다. 하다못해 휘까지도 잔뜩 풀 죽은 기색으로 성준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집은 이미 집이 아니었다. 연인의 납치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임시 수사 본부이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출동 대기실로 화한 지 이미 닷새째였다.
“……그 여자에게서 언젠가 연락이 올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쯤엔 이미 그 사람은 충분히 상처를 입고 난 후겠죠.”
좀체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으로 마지못해 한마디 하며 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만큼 걱정과 근심으로 초췌해져 있는 얼굴이었다. 형의 통찰력과 지혜를 믿고 싶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그야말로 자신에 대한 여자의 집착이 연인을 해한다는 최후의 보루만은 지켜주는 최선의 방패가 돼주기를.
눈으로 묻자, 형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했다. 여자의 감정을 좀 더 믿어보라고, 형은 간절히 호소하고 있었다. 일단 대중에 공개적으로 노출되면 평생을 지저분한 가십과 싸워야만 한다고, 그건 이번 일로 해서 받게 되는 대미지 이상일 것이라고.
“……이틀만 더 기다려보고 다른 진전이 없으면 공개 수사를 하는 쪽으로 결정을 보겠습니다. 그간 모두들 최선을 다해주셨겠지만, 모두들 좀 더 힘을 쏟아주십시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정을 던졌다. 잠시 묵직한 침묵이 거실 안으로 내려앉았다. 처음부터 일관되게 공개 수사를 주장하던 경찰들도 더 이상 반대 의견을 내지는 못했다. 대중의 저열한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치정 사건이니 그들 또한 윤열이 형의 우려를 무시할 수는 없었으리라.
이윽고, 각자의 책임자들로부터 당장 처리해야 할 임무들이 떨어졌고, 거실 안을 가득 채웠던 사내들의 무리도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남아 있는 이들은 윤열이 형과 성준이, 휘, 그리고 여자로부터의 연락에 대비한 심리 분석가 한 사람과 경찰 한 명이었다.
“……늦었네요, 형. 식당으로 가셔서 저녁부터 드세요. 성준이 너도 휘 데리고 가서 뭐 좀 먹이도록 하고. 손님방의 형 비서관들과 윤 실장에게도 식사하라고 전해. 조 선생님과 이 경사님도 먼저 식사하십시오.”
자꾸만 절망으로 허물어지려는 얼굴을 필사적인 인내로 견디며 담담하게 말했다.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흐릿하게 웃음까지 물었다. 웃으면 아프지 않다는 증거였다. 자신이 아프지 않으면 자신의 소중한 가족들도 아프지 않을 터였다. 물론 연인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형은?”
성준의 뒤에서 풀 죽은 얼굴로 내내 눈치만 살피고 있던 휘가 불쑥 되물었다.
윤열이 형과 마찬가지로 녀석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이며 수면 부족으로 부석한 얼굴은 녀석 또한 맘고생이 만만치 않음을 증거했다. 그 여자의 실체를 꿈에도 모른 채 연인을 사자 아가리에 들이밀어준 전령사 노릇을 했으니 맘고생을 한대도 자업자득일 터였다. 원망의 마음이 왜 없겠냐만, 10년 전부터 우리 형수, 우리 형수 하며 그리도 따르던 녀석이니 경솔하고 고집만 센 녀석으로선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저 연인에게 물러나달라고 사정이나 해볼 요량이라는 여자의 사탕발림을 고스란히 믿었을 게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믿게끔 만든 것은 역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혜안이 부족하고 고집만 센 단순한 녀석에게 그녀를 형수로 소개하고, 가족이라 믿도록 완벽한 인큐베이터를 만들어준 것이다. 다 자신이 뿌린 죄의 씨앗이었다. 이제 와 어리석은 동생을 단죄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오히려 단죄해야 할 쪽이라면, 애초부터 잘못된 인연을 억지로 매듭지었던 자신일 터였다. 또한 자신이 아니더라도 녀석 본인이 충분히 스스로를 벌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녀는 겉보기와 다르게 천사도 아니었고 형인 자신에게 품고 있는 마음도 그저 복수심뿐이었다는 사실은, 녀석에겐 천지가 개벽하는 것보다 더한 쇼크였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원망을 할 수 있을까. 어찌 자신 몰래 그런 짓을 했냐고 진심으로 사나운 추궁을 할 수 있을까. 녀석이 그 어떤 실수를 저지른대도 그건 그저 고스란히 형인 자신의 책임일 뿐이었다. 제대로 새 가족의 인연을 만들어주지 못한, 연인이야말로 진짜 자신의 배우자라고, 녀석이 납득할 때까지 제대로 진지하게 설득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었다.
“……형은 또 안 먹을 거잖아. 형이 자꾸 굶는데 어떻게 맨날 나만 먹어…….”
어리광이 포함된 투정엔 자신에 대한 절절한 근심이 담겨 있었다. 의사인 성준이까지 전전긍긍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으니 녀석은 더할 것이다.
“소화가 안 돼서 그래. 먹고 체하는 것보단 훨씬 나아. 그리고 미음 정도는 틈틈이 먹어주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식사하고 와.”
“뭐가 미음 정도는 먹어준다는 거야. 닷새 내내 거의 굶다시피 했잖아. 잠도 안 자고…… 거울 좀 봐, 형 얼굴이 어떤지. 형이 멀쩡해야 그 사람도 제대로 찾을 수 있을 텐데, 왜 자꾸 그러는 거야?”
부러 웃음까지 깨무는데도 녀석의 어두운 얼굴은 좀체 펴질 줄 모른다. 걱정과 죄책감도 모자라 원망의 빛까지 담기니 표정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스물아홉이나 나이를 먹고도 자신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여전한 어린아이가, 멀대마냥 덩치만 커다란 청년의 거죽 속에 들어앉아 있었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쓸모없는 아집에 사로잡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 과거의 자신과 어찌 이다지도 닮았단 말인가.
“며칠 굶는다고 죽지 않아. 그리고 진짜 먹으면 바로 체하니 도리가 없어. 네 말대로 체해서 나가떨어지면 그 사람을 찾는 데 더더욱 힘을 쏟을 수 없게 될 테지. 그러니 난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식당으로 가.”
“잠도 안 자니깐 체하는 거잖아! 전화기는 우리가 지킨다니깐, 꼭…….”
“스트레스 상태가 심할 땐 차라리 굶어주는 게 나을 때도 있어, 문휘. 정 위태로워 보일 것 같으면 내가 안정제랑 포도당 주사라도 놓아줄 테니까, 형 말대로 너도 식사부터 해라. 그러고 좀 씻어. 머리며 몸에서 쉰 냄새가 지독해. 죄지었으니 씻지도 말라고 누가 그러디?”
“그려. 무담시 성 맴만 산란케 허덜 말고 어여 싸게 일어나드라고.”
좀 더 참견을 하려던 녀석을 다행히 성준이가 말려주었다. 윤열이 형까지 가세하자 녀석도 마지못해 성준이와 형을 따라 식당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심리 분석가와 경찰 한 명도 그들의 뒤를 이어 거실을 나가자 비로소 얼굴에 쓴 평정의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소파까지 간신히 걸어갔다. 기력이 딸리니 조금만 움직여도 사지가 떨렸다. 호흡마저 정상이 아닌 듯, 전력 질주를 벌인 마냥 숨이 가빴다. 소파가 발치에 걸리는 것을 자각한 즉시 무너지듯 전신을 부렸다.
1분 1초, 한 시간 한 시간은 물론,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역시 대단한 여자였다. 자신을 향한 가장 효과적인 복수가 무엇인가를 여자는 명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연인을 반드시 찾아내리라는 의지와 일말의 희망조차 없었다면 자신은 애저녁에 무너졌을 것이다.
여자는 교묘하게 연인의 죄책감을 파고들어 연인을 꾀어내는 데 성공을 했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여자가 잃어버린 아이에 대해 일말의 아쉬움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자 스스로도 인정한 바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이혼을 거론할 만큼 결혼 생활에 위기가 닥쳤을 때, 여자는 잃어버린 아이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노라 고백했었다. 거기에 더해, 불임이라는 최종 진단 결과조차 일생을 걸고 자신을 묶을 수 있는 대단한 전리품이라 여겼노라고 했다. 그런 스스로에 대해 치욕감과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자신을 일생 완벽하게 소유할 수 있는 데 대한 대가라면 기꺼이 감수하기로 서원까지 했단다. 자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여자는 그렇게까지 바닥에 떨어졌는데, 고작 돌아온 것이라곤 이름뿐인 남편의 차디찬 무관심과 냉대뿐이었다며 여자는 서럽게 오열했었다. 그 순간만큼은 여자에 대해 진심으로 죄책감을 느낀 자신이었었다. 여자로서의 본능적인 모성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큼 자신에게 사랑을 준 여자였으니, 연민과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이 준 환멸과는 또 다른 별개의 감정이었다.
그렇게 가차 없이 스스로의 모성을 부정한 여자가 뒤늦게 잃어버린 모성을 빌미로 연인을 상처 입히고 꼬여냈다는 게 한편 기가 막히고 한편으론 치가 떨렸다.
10년 전의 그 끔찍했던 밤, 경기도 평택의 한 허름한 산부인과 병실에서 자신은 그녀와 거래를 했었다. 위로니, 관용이니, 용서니, 뭐라고 그럴듯하게 윤색을 한대도 분명 그것은 거래일 뿐이었다. 잃어버린 아이를 빌미로 연인에게 더 이상의 보복을 가하지 않겠노라는, 연인의 죄를 영원히 묻어두겠노라는 약속을 그녀에게서 받아내는 대신, 자신은 자신의 핏줄에 대한 욕망을 영원히 접겠노라는 약속을 그녀에게 내주었었다. 불임이라 해도 상관없다고, 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노라고, 뭣하면 나중에 입양을 할 수도 있다고, 그조차 내키지 않는다면 애완동물이라도 기르자고 서로 흡족하게 거래를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 아이라니! 잃어버린 아이에 대해 책임을 지라니! 여자의 교활함과 야비함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어찌 보면 이중으로 모성을 부정하는 끔찍한 짓거리나 다름없었다. 과거, 자신을 완벽히 소유하는 수단으로서 아이를 이용했다면, 지금은 복수의 도구로서 잃어버린 아이를 재활용하고 있는 셈이었다.
―……나도 짐승이 될 거야!!!
여자의 악에 받친 절규가 뇌리 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지난 9월, LG 아트센터에서의 저 불운한 재회 장면이었다.
―……사람을 사랑한 줄 알았더니 짐승이었어!!! 발광한 호모 스토커랑 똑같은 짐승이었더라구!!!
―……망했어!!! 다 망했어!!! 이게 뭐야!!! 대체 이게 다 뭐야!!! 끔찍해!!! 더러워!!! 더러운 자식들!!! 니들이…… 아니, 네가 지금 내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나 있니?!!! 응?!!! 그래, 이 더러운 사기꾼아?!!!
―……사람을 사랑한 게 아니라면, 그래, 좋아!!! 나도 짐승이 돼주지!!! 사랑하는 전남편이 짐승이라는데 어떡해!!! 제대로 사랑하려면 나도 니들이랑 똑같은 수준의 짐승이 돼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진짜 사랑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짐승과 인간이란 애초부터 결합할 수 없는 관계니까!!! 그래!!! 바로 이게 내 사랑이야, 허니!!! 남편이 짐승이라면 기꺼이 함께 짐승으로 떨어져주는 지고지순한 아내!!!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네 아내가 돼보고 싶어!!! 기대해도 좋아, 여보!!!
……잔뜩 붉어진 눈시울에 시퍼런 살기를 드리우는 것을 마다 않던 여자였다. 거기서 읽힌 것은 오로지 광기 어린 증오뿐이었지만, 그 광기며 증오조차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면 희망은 아직 남아 있는 셈이었다. 윤열이 형의 말처럼 복수하고픈 마음 이상으로 자신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면 최악의 선택만은 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빌 수밖에 없었다. 부디 제발 미련을 가져주기를, 모성을 부정하면서까지 차지하고파 했던 격렬한 애정을 조금이라도 기억해내주기를, 그래서 그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짓만은 제발 저지르지 말아주기를.
물론 그리 많은 기대를 해선 안 된다는 것도 안다. 6년의 결혼 생활이 자신뿐만 아니라 그녀에게도 생지옥이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새삼 그 지옥의 수라장을 다시 원할 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은 스스로의 운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이란 얄팍한 사회적 성공이 고작이었다. 별 충족감도 주지 못한 허망한 복수가 다였다. 그것도, 절대 놓쳐선 안 되었을 최고의 행운과 맞바꿔서야만 겨우 손안에 움켜쥘 수 있었던, 가장 초라하고 빈약한 가치였었다. 복은커녕 지지리도 운 없는 놈이 바로 자신이었다. 이번이라고 일생 저주처럼 따라다니는 불운이 자신을 완벽히 피해 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이것은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최후이자 최대의 도박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전부를 잃거나, 혹은 전부를 얻거나 하는 일생일대의 도박 게임.
눈을 감은 채 소파에 누워 잠시 쉬고 있자니 호흡이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왼쪽 허리 밑으로 딱딱한 이물감이 자각돼 만져보니 재킷 주머니에 든 디지털 카메라였다.
출장길에 나설 때부터 한시도 품 안에서 놓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소식을 듣고 귀국해선 그를 찾는 데만 온 신경이 가 있어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물건이기도 했다. 귀국 첫날 서재에다 정신없이 벗어둔 재킷을, 수사관들이 가져다준 기록들을 밤을 새우며 분석하다 오늘 아침에야 다시 주워 입었는데, 덕분에 새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야만 했다. 드물게 찍은 연인의 사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생 다시는 찍을 수도 없을 39세의 생일 파티 사진이었다. 자각하지도 못한 채 재킷을 험히 다루다 망가뜨리기라도 했다면 자신은 그것만으로도 아득한 절망감을 맛봐야 했을 것이다.
전원을 켜고 파일을 열었다. 가장 마지막에 찍어뒀던 프레임이 손바닥 반만 한 모니터 화면에 가득 찼다. 색색의 풍선들이 구름처럼 둥실거리는 가운데 사랑스러운 나신이 누워 있었다. 반듯하게 누운 채 아랫배 위에 한 손을 올리고, 다른 한 손은 옆구리 근처에 느슨하게 늘어뜨린 채였다. 깊은 단잠에 든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다. 손가락을 가져가 모니터 화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얼굴을 쓰다듬고, 입술을 눌러보고, 가슴과 아랫배의 살집도 주물러보았다. 물론 만져지는 것은 자신의 체온으로 덥혀진 미지근한 금속의 감촉뿐, 연인의 따스함도 부드러움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질 턱이 없었다. 감촉을 기억해내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기억 창고를 뒤집었다. 품에 안았을 때의 감촉과 체온과 냄새를 떠올렸다. 며칠을 거의 굶다시피 한 덕분인지, 빈혈기를 동반한 환각이 뇌리 속에 흐릿하게 재생되었다. 연인의 몸뚱이가 보였다. 만져졌다. 부드러운 감촉과 상냥하고 온순하게 감겨드는 몸짓들이 황홀감을 부추겼다. 히죽히죽, 좋아서 미치는 바보 웃음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잠시 후 환각은 사라졌고, 눈을 뜬 채 자그마한 사각 프레임을 바라보았다. 풍선 더미 속의 나신은 엄지공주처럼 조그마했다. 전신을 찍은 프레임이라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프레임을 넘겼다. 각도와 크기를 약간씩 달리한 사진들이 십여 장 정도 이어졌다. 얼굴과 눈매, 그리고 손가락과 쇄골 등등을 확대한 사진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일단 리듬을 탄 즐거운 환각은 프레임의 화면을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더 뒤로 가보니 옷을 입은 것도 있었다. 리본과 풍선과 데이지 꽃들과 플래카드로 장식된 집 안 곳곳에서 연인이 쑥스러운 듯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얼굴을 붉힌 사진도 있고, 이쪽을 째려보는 사진도 있었다. 물기가 그렁그렁한 애틋한 사진도 보였다. 고개를 갸우뚱한 채 이쪽을 말똥말똥 응시하는 귀여운 얼굴도 있었다. 어딜 봐도 39세 아저씨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눈에만 그리 보이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연인에게 중독되다 못해 미쳐 있는 자신이니 객관적인 판단이란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미치다 못해 자신의 생명줄과 다르지 않으니 객관적이 되라고 하는 자체가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자신의 목숨이었다. 심장이었다. 그러니 이것이 숨쉬기를 멈춘다면 자신 또한 살기를 멈출 것이다. 그래. 그러니 실은 그리 두려워할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지지리도 운이 없는 놈이 아니더냐. 삶이 끝끝내 자신에게 엿을 먹인다면, 그냥 되받아 엿을 먹여주면 그뿐이리라. 연인이 저 너머로 사라지면 자신도 따라 부서지면 될 일이다. 연인이 상처 입는다면 자신 또한 죽을 때까지 피를 흘리지 무얼. 그래. 그러니 겁내지 말자. 두려워하지도 말자. 운명이 자신을 어디까지 희롱하나 그저 지켜나 보자…….
문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밤인지 주변이 이상스레 어둑어둑했다. 누군가에게 불을 켜라고 명령한 것 같은데 아무도 불을 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칙칙한 어둠이 싫어 중얼중얼 불평을 토로하고 있자 현관으로 통하는 복도 쪽에서 누군가가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무심코 시선을 주었다가 심장이 뚝 하고 내려앉았다.
연인이었다.
연인은 새하얀 셔츠에 역시 새하얀 정장 팬츠를 입고 있었다. 얄팍한 아사 천으로 된 하늘거리는 셔츠며,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이 너무나 추워 보여서 가슴이 아팠다. 양손에는 알록달록한 물감을 잔뜩 묻히고 있었는데, 자신을 향해 가만히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니 떨고 있는 것도 같았다. 추워? 하고 안타까이 묻자 연인이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그런 꼴로 나다니는 거냐. 근심에 차서 타박을 주려는데 이번엔 어째선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주변의 어둠도 더 짙어진 것 같았다. 다행히 연인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무게가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우면서도 차분한 걸음걸이였다.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온 연인이 자신의 품에 가만히 얼굴을 파묻었다. 가슴에 맞닿아 있는 연인의 얼굴이며 기대오는 양어깨에서 얼음장처럼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기분 나쁜 서늘함이었다. 양팔을 뻗어 마주 안아주려는데 사지가 무엇인가에 묶인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처음엔 안타깝다가 점점 초조한 기분에 사로잡힐 무렵, 연인의 얼굴이 살며시 떨어져 나갔다. 고개를 들고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얼굴은 어딘가 어리둥절해 보였다. 인환아? 가슴이 몹시 뛰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쾌하고 불안한 기분이 온 넋을 사로잡고 있었다. 자신과 눈을 맞추던 연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연인이 어리둥절하게 응시하고 있는 것은 연인의 물감투성이 손이었다. 자신도 연인의 시선을 따라 연인의 양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알록달록 팔색조처럼 물든 손가락을 한동안 이상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연인이 이윽고 걸치고 있던 셔츠 자락에 양손을 문지르는 게 보였다. 눈이 부실 지경으로 새하얗던 셔츠는 순식간에 지저분한 얼룩투성이가 되었다.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팠다. 어느 순간부터 맹렬히 뛰기 시작하던 심장은 이젠 거의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전까지 거실 안에 있었던 것 같은데, 익숙한 가구들 대신 그저 휑한 들판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멀리 시커먼 어둠에 잠긴 산등성이도 보이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왜 이렇게 사방이 어두운지 알 수가 없었다. 젠장. 제기랄. 불쾌한 욕설을 뇌까리며 연인에게 다시금 시선을 가져갔다. 연인의 더럽혀진 셔츠가 보였다. 수십 가지 색깔의 물감 얼룩이라 여겼던 부분은 온통 새빨간 피투성이였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연인의 어리둥절한 눈이 스스로의 피투성이 몰골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연인은 묻고 있는 듯했다. 이상해…… 이상해, 위야…… 이상해……. 괜찮다고, 안심하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역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안심하도록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은데, 사지 역시 쇠사슬에 꽁꽁 묶인 듯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가위 같았다. 어디선가 희미한 이성이 속살거렸다. 이건 가위라고. 가위라 그래 하고 연인에게 변명을 하자 연인의 어리둥절한 얼굴이 슬프게 변했다. 우는 것도 같고 웃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인이 천천히 뒷걸음질 치는 게 보였다. 안 돼!!! 무심코 소리쳤다. 물론, 채 소리로 뱉어지지 않는 마음속 절규였다. 안 돼, 안 돼, 안 돼!!! 재차 필사적으로 외치는 동안 연인은 성큼 멀어져 있었다. 슬픈 얼굴에 흐릿하게 퍼지는 미소가 보였다. 안 돼!!! 가지 마!!! 가지 마!!! 대답인 듯,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는 연인이었다. 어깨 높이까지 들어 올린 오른손마저 바람개비처럼 팔랑거리고 있었다. 작별 인사였다. 점점 멀어지는 연인의 새하얀 옷자락이 살랑살랑 팔락이는 게 보였다. 물감 같기도 하고 핏자국 같기도 한 고통으로 범벅이 돼 있는 옷자락이었다.
“……위야! 문위! 일어나, 어서! 꿈이니까 일어나!!! 위야!!!”
누군가의 손길이 양쪽 어깨를 거칠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휘청 앞으로 몸이 쏠리며 그제야 마비됐던 목청이 터졌다.
“으아아아아악!!!!!”
끔찍한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그 속에 알알이 깃든 비통함과 분노와 공포감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그만!!! 그만, 꿈이야!!! 진정해!!! 진정해, 위야!!! 문위!!!”
눈이 번쩍 뜨였다. 눈이 부실 만큼 밝은 빛이 시야 가득 파고들었다. 사슬로 꽁꽁 묶인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몸도 그제야 겨우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뻗어나간 팔을 누군가의 손이 와락 움켜쥐고 있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흰 피부와 단정한 이목구비가 시야에 밟혀들었다. 성준이었다.
“……무슨……?”
처연한 표정을 한 친구가 뺨으로 손을 가져왔다. 가만가만 쓰다듬는 손길을 통해 온 얼굴이 눈물범벅인 것을 깨달았다. 몸뚱이도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친구의 손길을 떨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치며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시선은 반사적으로 시계를 향했다. 8시 47분. 고작 두어 시간도 채 안 되는 동안 영원 같은 지옥을 헤매다 온 기분이었다. 악몽 속에서라도 연인의 얼굴을 보았으니 기뻐해야 마땅했지만 꿈이 주는 메시지는 불길함 그 자체였다.
“……가위에 눌렸나 보다. 사지가 뒤틀리는 것처럼 심하게 떨어대서 깜짝 놀랐어.”
한숨과 함께 성준이 힘없이 덧붙였다. 과연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뻐근했다. 가위에서 빠져나오려 필사적이었던 모양이다. 피범벅인 새하얀 아사 옷을 입고 멀어져가는 연인의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떠올리자마자 즉시로 몸서리가 쳐졌다. 꿈일 뿐이었다. 깊은 숨을 몰아쉬며 간절하게 뇌까렸다. 반드시 허황된 개꿈이어야만 했다.
“……어디서 연락 온 건 없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며칠 사이 버릇이 돼버린 물음을 던졌다. 잠이 들어버리면 혹여 그 틈에 연인에 대한 소식을 놓칠까, 지난 닷새 내리 제대로 눈을 붙인 적이 없었다. 피로에 지쳐 기절하듯 토막잠이 드는 것이 다였고, 그러다 깨어난 다음 순간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다급히 던지는 질문의 요지는 늘 한결같았다. 연인을 찾을 단서가 발견되었는가, 혹은 아닌가의 문제.
“……달게 자는 것 같아서 좀 더 자게 두려 했는데, 역시 깨우라는 계시였나?”
대답 대신 되돌아온 건 동문서답의 괴로운 목소리였다. 문득 다가든 서늘한 전조에 얼굴을 들고 친구를 바라보았다. 친구라기보단 이젠 거의 친형제와 다름없을 잘생긴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친구의 저 표정이 어떤 의미라는 걸 자신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괴로움이 한계에 달한, 잘 벼린 이성으로서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그런 막다른 위기에 몰렸을 때 짓곤 하던 표정이었다.
……아아, 그래. 올 것이 왔구나……. 무심코 뇌까린 한마디였다.
꿈을 통해 자각한 전조 때문이었을까? 자신은 예상만큼 그리 놀라진 않은 것 같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마침내 패가 드러났구나 하는 멍한 자각이 다였다. 운명에 이기면 살 것이고, 지면 곧 죽음일 터였다. 그래, 지지리도 운이 없는 놈이 아니더냐. 삶이 끝끝내 자신에게 엿을 먹인다면 그냥 그대로 따르면 그뿐이리라. 연인이 가면 자신도 따라 부서지면 될 일이다. 연인이 상처 입는다면 자신 또한 죽을 때까지 피를 흘리지 무얼. 그래. 그러니 겁내지 말자. 두려워하지도 말자. 운명이 자신을 어디까지 희롱하나 그저 지켜나 보자…….
“……뭔가 단서를 찾은 건가……?”
담담히 중얼거리자 친구의 얼굴은 더더욱 고통스레 일그러졌다. 친구의 한 팔이 자신의 어깨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 파묻은 채 친구는 한동안 대꾸가 없었다. 맞닿은 얼굴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등 뒤로 돌아간 친구의 손이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반대쪽 어깨를 거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친구의 손은 얼굴 이상으로 떨리고 있었다. 신뢰받는 정신과 의사답게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에서 과묵하고 차분한 사내로 그럴듯하게 성숙한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떨 정도라면 어쩐지 더 이상 희망을 갖는 것도 부질없는 짓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얘기해봐, 성준아. 각오하고 있으니까.”
친구의 등을 위로하듯 다독이며 재촉했다.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대꾸였다. 자신의 의연한 태도에 그나마 용기를 낸 모양으로, 억세게 파고들던 친구의 포옹이 조금 느슨해졌다.
“……서재에 손님이 와 있어. 김강원이라고, 큐레이터라더군. 그 사람 전시 기획을 담당한 적도 있다던데 너도 알 거라더라.”
“…….”
“……그치가 단서를 가져왔는데 상황이 많이 안 좋아. 윤열 형 일행들이랑 다른 경찰들도 전부 불러들여서 지금 대책을 세우고 있어. 일단 확실한 단서이기는 해서 잘만 하면 신애 씨가 있는 곳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
“미술 협회와 유명 갤러리들 홈페이지에 그 사람의 동영상 파일이 익명으로 올라왔어. ‘어느 유명 화가의 타락상을 고발한다’는 제목까지 붙어서.”
“…….”
“……저질 포르노지. 딱 봐도 그저 그런 삼류 변태 포르노야. 그런 쪽만 찍는 치들을 불러다가 촬영한 것 같아.”
“…….”
“……다, 다행히 그 김강원이라는 사람의 눈에 재빨리 띄어서 현재는 모든 사이트들에서 관련 동영상이 완전히 삭제된 상태야. 물론 안심할 순 없지. 그런 건 일단 인터넷에 한번 뜨면 순식간에 기하급수적으로 퍼져나가니까. 그나마 동영상이 올라온 웹사이트들이 전부 일반인들의 출입이 별로 없는 미술 전문 사이트들이라 파급력은 그리 크지 않으리라 보고 있어. 각 사이트들마다 협조 요청을 구한 상태이기도 하고, 다시 올라올 시엔 즉각 삭제토록 운영진들과도 협의를 거쳤지. 여타 언론 기관들이나 포털 게시판들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도록 인력을 대거 풀고 있어. 사이버수사대에도 지급으로 협조 요청을 했으니 그게 어디서 누가 올린 건지 내일이면 대충 윤곽이 잡힐 거래. 우리 쪽 경찰과 공조해서 범인들을 추적하게 될 거야. 조만간 잡히겠지. 어쨌든 그 사람도 조만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
“……심각해 보이는 건 그저 연기일 뿐이야, 위야. 포르노란 게 원래 그렇잖아. 뭐든지 엄청나게 부풀려지는 거…… 일단 화면상으로도 그다지 대미지를 입고 있는 것 같진 않았어. 정신을 놓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냥 신애 씨가 시키는 대로 기계처럼 움직여준 것 같아. 마약을 하고, 아동들을 때리고 강간하거나 소년들과 동성 섹스를 즐기는 사디스트에 변태로 그려졌더군.”
“…….”
“……‘명예 살인’이란 거지. 그 사람을 그나마 제정신으로 유지시켜준 게 그림 같았는데 그것마저 빼앗으려 들다니…… 나도 신애 씨가 이렇게까지 할 거라곤 차마 생각 못 했다…… 지독한 여자야…… 정말 지독한 여자야…….”
“…….”
“하지만 막을 수 있어, 위야. 너 그럴 능력 되잖아. 그 정도의 추문 정도는 돈이나 권력으로 충분히 수습할 수 있는 문제 아니냐? 그러니 절망하진 마. 상황이 안 좋긴 하지만…… 그렇지만…….”
“…….”
“……어, 어딜 가게?! 서재로 가려고? 우선 정신부터 추스르고 나서…… 위야……?! 위, 위야!!!”
자신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자 필사적인 손길이 팔을 잡아당겼다. 완력으로 밀치면 밀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면 형제 같은 친구는 더더욱 절망할 터였다. 친구가 이끄는 대로 잠시 기다려주었다가 친구의 손아귀를 부드럽게 떼어냈다. 거의 사색이 된 얼굴이 자신의 표정을 정신없이 살피고 있었다. 혹시라도 발광할까 봐, 혹은 혹시라도 절망할까 봐. 우스운 노릇이었다. 자신더런 절망하지 말라고 애원하면서, 도리어 친구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시커먼 절망이었다. 가족이, 혹은 사랑하는 이들이 상처 입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하는 피 끓는 원한이었다.
“……김강원이 가져온 건 올라온 파일의 복사본인가?”
어딘가 낯설게 들리는 음산한 목소리였다. 자신의 것 같지가 않았다. 하긴 바닥까지 가라앉아 무겁게 찰랑거리는 이 감정 역시 자신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역시 자신은 예상만큼 놀라진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친구의 걱정은 같잖은 노파심일 뿐이었다. 기왕에 바닥에 떨어진 자에겐 절망이란 단어조차도 사치였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 보려구, 그걸?! 안 돼! 그걸 왜 봐?!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건 경찰들이 이미 다 뽑아냈다구! 괜히 상처만 심해질 텐데 그따위 걸 봐야 할 필요가 뭐가 있어!”
“……봐야 해…… 전부…… 전부 지켜봐야지…… 혼자 버려둘 수 없으니…….”
멍하니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카펫 바닥에서 익숙한 물건이 눈에 띄었다. 자그마한 은색의 디카였다. 하긴 연인의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나가떨어졌으니 소파 아래 팽개쳐진 것도 몰랐을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주워 들곤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이상은 없어 보였다. 하릴없이 몇 번이나 쓰다듬다간 재킷 안주머니에 소중히 품었다.
“……그래…… 인생이 얼마나 엿을 먹이는지도 지켜봐줘야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친구로선 이해하기 힘들 대꾸에 피식거리는 실소마저 터트리자, 안 그래도 창백한 안색의 친구는 정말로 당장 기절할 것처럼 사색이 되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김성준. 난 미치진 않아. 입가에 실소가 물린 그대로 친구를 향해 말했다.
“……그래야 되받아 엿을 먹여주지…… 아무렴, 괜찮아……. 내 것이 부서지면 나도 부서져……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면 돼…… 그러니까 많이 외롭진 않을 거야…… 전처럼…… 혼자만 아니면 뭐든 견딜 수 있어…… 그래, 우린 그거면 돼…….”
“문위!!!”
친구가 울부짖는 것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휘청거리며 안으로 들어서자 완전히 넋이 나간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던 친구도 황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가 상승을 시작하니 문득 눈앞이 핑 돌며 어지럼증이 일었다. 손잡이를 재빨리 잡지 않았다면 엘리베이터 바닥에 굴렀을 것이다. 한쪽 팔을 와락 움켜쥐는 친구의 손길이 느껴졌다. 확실히 녀석도 의사인지라 비정상적인 몸 상태에 대해선 예민하게 알아채는 모양이었다. 이번엔 밀어내지 않고 기꺼이 부축을 받아들였다. 허세를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닷새를 못 먹고 못 잔 극심한 피로감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모양이었다.
“……혀, 형!!!”
성준의 팔에 가까스로 몸을 의지한 채 서재 문을 밀고 들어서자, 몇 시간 전에 일별했던 사내들의 얼굴이 일제히 시야를 점령했다. 하나같이 무섭도록 굳어져 있는 얼굴들을 굽어보자니 희미하게 토기가 치미는 것이 느껴졌다.
“형!!! 혀엉!!!”
연달아 터지는 비명 같은 울부짖음의 주인공은 휘야 놈이었다. 열댓 명 가까운 덩치들의 틈바구니에서 얼핏 휘야의 얼굴이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돌진하듯 다가든 철부지는 자신을 와락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지더니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까지 처박았다. 자신의 정강이까지 결사적으로 부여잡곤 사과인지 뭔지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쳐댔다.
“……미…… 미안해, 형!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진짜 내가 잘 못했어…… 잘못했어!!! 나…… 난 진짜 형수가…… 형수가 그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진짜 몰랐어…… 몰랐…… 윽……! 큭…… 흐어어어어…….”
이어진 건 지축을 울리는 듯한 괴성의 통곡이었다. 말 그대로 꺼이꺼이 황소개구리처럼 울어댔다. 맙소사, 스물아홉 살이나 처먹은 놈이 이게 대체 뭐하자는 수작인지.
“……윤 실장, 휘야를 좀 내보내 진정시켜주세요.”
침통한 표정으로 휘야의 발광을 지켜보고 있던 사내들 틈에서 윤 실장을 발견하고 조용히 말했다. 황소개구리의 거대한 울음 속에서도 윤 실장은 자신의 명령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곤 옆에 있던 김 대리와 함께 달려들어 자신의 다리를 놓지 않으려는 휘야를 가까스로 떼어냈다. 격앙된 감정을 대변하듯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동생의 얼굴은 눈물콧물 범벅이었다.
“……흐어어…… 엉……! 미…… 미안해애애…… 큭, 끅, 윽……! 미…… 안…… 형…… 미안해, 진짜…… 진짜……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형…… 혀어엉…… 어어어헝허어어…….”
윤 실장과 김 대리에게 양팔을 잡혀 질질 끌려 나가면서도 녀석은 발악을 하듯 되풀이, 되풀이해 사과를 입에 걸고 있었다. 필사적인 기세인 녀석을 지켜보며, 혜윤이에 이어 자신으로 해서 또 녀석에게 상처를 주게 된 사실을 깨달았지만, 별다른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발기발기 찢겨버려 더 이상 찢어질 마음은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녀석이 끌려 나가자 서재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것처럼 조용해졌다. 처음 들어섰을 때와는 달리 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없었다. 뭔가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큰 사달이라도 날까, 다들 겁을 내는 것도 같아 피식 실소가 터졌다. 자신이 인생에서 바라는 부분은 지극히 작다는 걸 방 안에 모여든 이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삶이 주는 쓰디쓴 잔이란 죄다 마셔본 자신이 아닌가. 이젠 이골이 났다 해도 좋았다. 늘어지고 늘어지다 보면 고무줄은 되돌아가는 탄성을 멈춘다. 기대를 멈춘다. 기대를 멈춘 마모된 고무줄이 인생에 더 이상 무얼 바랄 것인가. 그저 끊어지지 않는 것에만도 감사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랬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작고도 또 작았다. 모기 뒷다리만큼만이었다. 그러니 미치지 않는다. 절망하지도 않는다. 아니, 이게 절망 상태와 그닥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그래, 절망했다고 치자. 그러니 괜찮다. 내 것이 부서지면 나도 부서진다.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면 되지. 그러면 많이 외롭진 않을 게야. 전처럼…… 혼자만 아니라면 뭐든 견딜 수 있는 게지. 그래, 우린 그거면 충분하지 않겠니, 인환아……?
“……녹화한 게 있다죠……?”
자신이 시작하지 않으면 다들 얼음땡의 주술에서 풀릴 것 같지 않아 담담히 물음을 던졌다. 팔을 부축하고 선 성준도 옆으로 밀어냈다. 다들 사기가 바닥일 테니 책임자로서 기운 찬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좀 봅시다. 컴퓨터 안에 들어 있나요?”
데스크톱 컴퓨터 쪽으로 걸어가려 하자 오른쪽 옆에서 낯익은 기척이 불쑥 다가들었다. 감색 공장 점퍼가 눈에 들어왔다. 윤열이 형이었다. 국회의원인 주제에 여전히 사석에선 공장 노동자 차림을 고수하는 형의 고집이 애틋해 잠시 웃었다. 외모만 봐선 노동자 그대로이니 어울리지 않는다며 타박을 줄 수도 없었다.
“……꼭 그 숭물얼 봐야 쓰간디……?”
시선이 마주쳤다. 참혹하게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흉물이라……. 괜찮아. 함께 가니 괜찮아, 인환아…….
“……괜찮아요, 형. 괜찮으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잘 견딜 겁니다, 그 사람…….”
왜냐면 제가 잘 견디고 있으니까요. 속으로 덧붙인 한마디였다.
“……많이 힘드실 겁니다. 제 생각에도 이 의원님 말씀을 따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경찰들 뒤에 서 있던 크고 늠름한 덩치의 사내가 앞으로 나서는 것이 보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아니, 귀에 익고 눈에 익다 뿐인가. 단 한순간인들 어찌 잊을까. 연인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내였다. 자신은 모르는 세계를 연인과 공유하고 있는 사내였다. 그래서 매번 볼 때마다 바닥 모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자이기도 했다.
사내는 물 빠진 청바지에 적동색 티셔츠, 그리고 그 위에 낡은 갈색의 가죽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영화배우 뺨치게 화려한 외모이다 보니 그런 수수한 차림새조차 대단히 스타일리시해 보였다. 보성 아버님의 장례식장에서 봤을 때 그대로 사내는 여전히 심하게 여윈 모습이었다. 표정에 깃든 심연 같은 어둠은 자신의 그것과 그닥 다르지 않아 보였다. 고뇌의 흔적이 역력한 파리한 얼굴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김강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