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부|the winter 5 - 50. 1993년 11월. 문위(文偉) (92/129)

50. 1993년 11월. 문위(文偉)

저녁 무렵에 잠시 깨어났던 신애는 다시 혼절하듯 잠이 들었다. 

진정제를 처방받기도 했지만, 정신적인 충격과 유산의 후유증이 크기 때문일 거라고 당직 중이던 응급 레지던트가 말해주었다. 유산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이냐고 묻자, 각종 검사 결과가 나와봐야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있을 테지만 일단 자궁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애매한 말로 즉답을 피했다. 가장 두려워했던 사실인 폭행 의혹에 관련해서는 아무런 흔적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해주어서 그나마 위를 안심시켰다.

절대 폭행 따위를 행사할 인격도 아니고, 만약 그런 사고가 발생했다면 그건 그가 완전히 미쳤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설마 그 정도로까지 그가 이성을 잃을 리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정확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계 이상으로 몰린 정신이 인간을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트리는가는 자신도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극단적인 자기 파괴거나 적대적이라 여기는 타인에 대한 파괴일 터였다.

어쨌든 원인은 결국 자연 유산인 셈이었다. 물론 직접적인 계기야 따로 있으니, 무조건 자연 유산이라고 치부하는 것엔 분명 어폐가 있으리라. 만 하루를 가둬두었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일종의 지독한 폭력인 셈이었다. 어쩌면 물리적인 폭력보다도 더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정신적인 폭력. 자신만큼 강하면서도 질긴 사람이니 스트레스 따위에 굴복해 아기를 잃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도 누가 정확히 추측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다만 신애의 몸에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행의 흔적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는 뇌리를 완전히 장악한 새까만 어둠이 그나마 약간 걷히는 것만 같은 안도를 느꼈다. 그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최악은 벗어난 셈이었다. 나머지는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을 터였다. 아니, 반드시 수습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차트를 들춰보던 응급 레지던트가 입원실을 나갔다. 시계를 살폈다. 자정이 약간 넘어 있었다. 신애가 잠들어 있는 침대 옆 의자에 다시 지친 몸을 부렸다. 폐렴에서 회복된 지 얼마 안 된 탓인지, 상상조차 못 한 끔찍한 스트레스에 몸은 다시금 속수무책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수시로 치미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며 숨을 가다듬었다.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하고 명료하게 제반 사정들을 분석해내야만 했다. 컨디션을 핑계대거나 약해진 마음에 자기연민에 빠져서도 안 될 일이었다. 아마도 생애 가장 위험할 줄타기를 시도해야만 하는 ‘하루’의 시작을 앞두고, 위는 필사적으로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스스로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를 만나러 간다는(정확히는 그와 담판을 지으러 간다는) 신애의 자동 응답 메시지를 확인한 어제 오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것만 같은 공포를 맛봐야만 했었다. 불길했다. 예감이었다. 이런 불길한 예감이 빗나간 적은 그간 단 한 번도 없었던, 지독한 불운을 타고난 놈이 아니던가, 자신은. 이제쯤은 다 끝났을 거라고, 경찰서 유치장에 처넣어버리는 무자비한 짓까지 저질렀으니 이제쯤은 그도 단념을 했으리라 생각했었다. 아니, 기대를 했었다. 그의 집에 아웃팅까지 해버린 셈이니, 그에게 설령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다고 한들 그의 어머님이 막아줄 터라 믿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그는 꽤나 효심이 깊은 아들이었으니까. 커밍아웃이 그리 하고 싶어도 어머님 때문에 하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러니 이번 일을 계기로 그가 끔찍이도 여기는 어머님이 좋은 제동 장치가 되어줄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그 어머님의 철통같은 감시망마저 뚫고 나와, 감히 신애를 납치하는 도착적인 짓까지 감행한 것이다.

도서관 스터디 모임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뒤늦게 응답 메시지를 확인한 시각이 저녁 6시쯤. 사색이 돼선 즉시 그의 아틀리에로 전화를 걸었다. 다신 연락조차 않겠다고 맹세한 그의 아틀리에 전화번호는 기가 막힐 지경으로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돼 있었다. 아틀리에 전화번호뿐인가, 그가 자주 가는 선 화랑은 물론, 클럽 미메시스, 하다못해 그의 어머님 집 전화번호까지 줄줄이 다 기억이 나는 데는 차라리 울고 싶기까지 했다.

예상대로 전화는 받지 않았다. 선 화랑과 미메시스, 그리고 그의 어머님 집에까지 차례로 확인을 하곤 절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억에 있는, 연세답지 않게 여린 목소리의 어머님은 그에게 약혼녀가 납치된 것 같다고 하자 충격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이후에 이어진 어머님의 울음 섞인 필사적인 사과는 위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고 말았다.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내고 말 테니 염려 말라고, 그가 절대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았을 거라고, 당신 속에서 난 자식이라 심성 하나는 자신한다고, 우시며 웃으시며 빌고 또 비셨다. 제발 자신에게 사과하거나 비시지 말라고, 도리어 빌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지 않으면 안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어머님의 죄가 아니었다. 물론 그의 죄도 아니었다. 다 자신의 죄였다. 자신의 끔찍한 이기심이 문제였다. 아는 연줄을 동원해 한시라도 빨리 찾아낼 테니 제발 경찰에만은 연락하지 말아달라는 절절한 모성에 속으로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경찰이라니, 농담이 아니었다. 그날도 가슴이 찢어졌는데, 또 그를 죄인처럼 경찰서 유치장에 가둬버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그저 단순히 훈방 조치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납치였다. 더구나 그녀가 누군가. 세계적인 글로벌 그룹의 영양(令孃)이었다. 만약 이것이 세간에 알려진다면 그는 실형까지 언도받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물론 자신의 인생에도 또 하나의 아킬레스건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도 보장할 수 없었다. 이미 결혼 허락까지 다 받아놓은 상태였지만, 이번 일이 신애의 친가에도 알려진다면 두 사람의 결혼 역시 물 건너가버리고 말 것이다. 물론 후자의 두 가지 대미지는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자신이 입을 타격은 물론, 설령 신애와의 결혼이 무산된다고 해도 어차피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여자였다. 현재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상대라 그녀를 골랐을 뿐이지, 따로 찾으려 들면 언제든 적당한 여자는 또 나타날 터였다. 자신이 입을 대미지 역시 그리 수습이 불가능할 것은 없었다. 불미스러운 스캔들이니 설령 그녀의 친가에 알려진들 그를 떠벌리기보단 도리어 소문이라도 돌까 쉬쉬할 사람들이었다. 그랬다. 가장 위험스러운 문제는, 두려운 일은 그의 안전, 곧 그의 장래였다. 위 자신이야 신애 덕분에 덩달아 보호받을 수 있을 테지만 그는 달랐다. 신애의 집안에서 작정하고 그를 향해 칼을 빼들 시엔 아무리 준재벌 집 사생아인 그라도 속수무책일 터였다. 더구나 실정법까지 위반했으니 빠져나갈 구멍 자체가 없는 셈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미치도록 두려움이 일었다. 기왕에 자신이 준 상처와 고통만으로도 돌아버릴 지경인데, 여기서 더 그를 망칠 수는 없었다. 막아야 했다. 어떻게든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야 했다.

어머님께 일단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을 생각이니 최대한 조용히 마무리를 짓자고 뜻을 전했다. 세상에 알려져봤자 양쪽 모두에게 지저분한 스캔들거리밖엔 안 되니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는 것을 자신도 바라고 있다고, 그의 위치를 찾는 것은 자신의 능력 밖이니 어머님 쪽에서 그 일은 알아서 처리해달라고, 나머지 뒷수습은 자신이 하겠노라고 최대한 안심을 시켜드린 후 전화를 끊었다. 그다음은 그저 피를 말리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밤 9시쯤 그녀의 서교동 외삼촌 집으로 전화를 넣었다. 신혼 살림을 꾸릴 서초동 아파트에 들렀노라고, 친구들을 초대해 놀았는데 그녀가 너무 지친 것 같아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게 하고 내일 돌려보내겠노라고 했다. 예상대로 서교동 외숙모는 탐탁지 않아했다. 아직 식도 치르지 않았는데 드러내놓고 외박은 가능한 한 자제해달라는 떨떠름한 답변과 함께 마지못한 허락이 떨어졌을 때에는 무릎을 꿇은 채 서교동 쪽으로 감사의 절이라도 올리고 싶어졌었다. 적어도 하루는 번 셈이었다. 내일 안에 그와 신애를 찾게 되면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이후 만 하루를 그야말로 생지옥에서 보냈던 것 같았다. 수시로 그의 어머님 집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체크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을 사서 지금 백방으로 찾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어머님이셨다. 자신도 입에 침이 마를 지경으로 초조했지만 어머님의 목소리에 깃든 고뇌와 근심이 지독해 무어라 다그칠 수도 없었다. 윤열이 형에게라도 알릴까, 아니면 성준이에게 알려 따로 찾아볼 방법을 강구해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었다. 물론 그 어느 쪽도 별 뾰족한 방법은 되지 못했다. 그저 어머님께서 고용한 이들이 부디 능력 있는 사람들이기만을 간절히 비는 도리밖에 없었다. 전화기 옆에서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일이 그토록 고문일 줄은 미처 예상조차 못 한 자신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생지옥의 시간을 어떻게 흘려보냈는지 도통 기억에 없었다. 그렇게 스무 시간쯤이 지났을까? 기다림의 끝은 어머님 쪽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부터 왔다.

[……위…… 위…… 위…… 위야아…….]

수화기 너머에서 전해지는 익숙한 부름에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눈앞이 순간 하얗게 변해서 어쩔 수 없이 수화기만 꽉 움켜쥔 채 방바닥에 주저앉아야만 했다.

[……여…… 여…… 여기 벼, 병원…… 벼, 병원인데…… 시, 시, 신애 씨가…….]

오후 3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흐느껴 우는지, 아니면 겁에 질린 건지, 심하게 떨고 있어 도무지 알아듣기 힘든 언어를 어떻게든 꿰어 맞춰야 했다. 병원, 유산, 피 등등의 단어가 뇌리 속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날것의 공포는 좀처럼 통제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저 머릿속이 텅 비며 무얼 어째야 좋을지 당장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나 수십 번을 그저 미안하다, 미안하다만 반복 재생하고 있는 그의 울부짖음이 서서히 이성을 되찾아주고 있었다. 그랬다. 더 이상 흔들려선 안 될 일이었다. 그가 망가진다. 완전히 망가져버릴지도 모른다. 최악의 가능성은 다시금 빈사 상태의 용기를 꼭대기까지 끌어올려주었다.

“……우선 침착하시고 제 말씀부터 들어주세요.”

속내가 드러나지 않는 담담하면서도 냉정한 어조가 만들어졌다. 직접 얼굴을 보지 않으니 자신 또한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다는 건 그도 모를 것이다.

[……으…… 흑…… 허엉…… 어…… 어어…….]

“……신애 씨가 위독한 상태입니까?”

[……아, 아니! 아니, 아니야! 그건 아니야! 저, 절대 안 돼! 그건 안 돼애…… 흐어엉…….]

“그럼 됐습니다. 일단 제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위치 알려주세요. 어느 병원입니까?”

[……펴, 평택시…… 황문평 산부인과 병원…… 이라고 간판…… 쓰여 있어…… 여, 여기서 제일 큰 산부인과 병원이라고 했어, 사, 사람들이…….]

“그래요. 그 정도면 찾아갈 수 있겠네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여쭤봅니다. 설마 경찰에 연락하신 건 아니겠죠?”

[흐읍!!!]

크게 숨을 삼키는 소리를 끝으로 수화기 너머에선 한동안 대꾸가 없었다. 똑같이 숨을 멈춘 채로 초조하게 대꾸를 기다렸다. 바보가 아니라면 자진해서 신고를 하거나 하진 않았겠지. 아무리 착해 빠진 순둥이라 한들 그 정도 머리는 있겠지. 서로를 망치는 지름길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이를 갈아붙이며 나이만 연상인 철없는 순둥이에게 빌고 또 빌었다.

[……버…… 버, 버, 벌을 바, 받으라고 하면 받을게……. 자, 자수하라고 하면 하…… 할게…… 흑…… 윽, 욱…….]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대꾸가 떨어지자마자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딸꾹질 소리 비슷한 신음과 함께 숨죽인 흐느낌 소리가 가느다랗게 전해졌다.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으로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나친 흥분 때문이리라. 안 되지. 이러면 안 되지. 정신 차려, 문위. 제발 정신을 차려. 흥분하지 마. 흥분하지 말고 차근차근 구슬려. 넌 저 사람을 알아. 너무나 잘 알아. 네 뜻대로 충분히 조종할 수 있어.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어……!

“섣불리 경찰에 가서 까발리신다면 저나 신애 씨나 선생님 모두 끔찍한 매스컴의 주목을 받게 될 겁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고 제가 갈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릿발 같은 냉랭함이 서린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게 더 자신의 지배력을 높이는 방식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죽어가는 초식 동물처럼 간간이 흘러나오는 흐느낌 소리에 심장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고 우선 그의 어머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가 있는 곳을 알려드리자 연신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울음을 터트린 어머님이셨다. 상황을 대충 설명해드리자 고맙다는 말은 곧 미안하다는 통한의 사과로 돌변했다. 끊임없이 ‘미안하다, 제발 아들을 용서해달라’는 요지의 사과만 되풀이하는 숨죽인 흐느낌에 또다시 가슴이 미어지기만 해서, 자신은 약혼녀를 돌봐야 하니 오셔서 그를 데려가시라는 말을 끝으로 서둘러 전화를 끊어야 했다. 부전자전이 아니라 모전자전이 아닌가. 목멘 실소마저 흘러 나왔다.

언제든 나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린 덕분에, 점퍼 안주머니에 지갑만을 챙긴 후 즉시 택시를 잡아타고 평택으로 날아갔다. 두 시간여에 가까운 이동 시간 내내, 역시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번민과 애정의 상대는 그뿐이었다.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 ‘옛 연인’뿐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유산하고 침대에 누워 있을 가련한 여자 따윈 의식의 표면에조차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잃어버린 자식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슬픔은커녕 실감조차도 없었다. 문득 자각한 그런 야비한 짐승의 속내는 더더욱 자신의 양심을 참담하게 만들었다.

병원 접수처에서 입원실을 확인하고 곧바로 F층으로 올라가니, 정면으로 그가 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맞은편에 보이는 병실이 신애가 입원한 병실이었고, 그는 병실 문 옆 복도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직 어머님께서 내려오지 않으신 모양이었다. 물론 그도 간발의 차이에 불과할 터였다.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역시 한 달 전보다도 더 훨씬 여윈 것 같았다. 얼굴 윤곽은 갸름해지다 못해 뾰족해 보이기까지 했고, 핏기 없는 안색은 언뜻 보면 흡사 여자처럼 고혹적으로까지 보였다. 눈길이 마주치자마자 울컥 치밀고 올라오는 사랑스러움은 지긋지긋할 지경이었다.

간간이 복도를 지나다니는 간호사들이며 환자들, 그리고 보호자들까지 그를 힐끔거리며 지나갈 만했다. 마치 커다란 상처라도 입은 것처럼 입고 있는 옷 곳곳이 피투성이였으니까. 그것이 신애가 흘린 핏자국이란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음은 물론이었다. 혹시라도 다친 것은 아닐까, 본능처럼 질겁한 공포가 심장을 훑고 지나갔다. 물론 천만다행으로 그는 상처 하나 없었다. 비록 충격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을지언정, 얼마나 울었는지 눈시울이 퉁퉁 부어올라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는 것 같을지언정, 겁에 질리다 못해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복도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이마까지 바닥에 들이대고 미친 듯이 두 손을 싹싹 비비기 시작했을지언정, 저 사랑스러운 몸뚱이만큼은 무사했다. 차라리 상황이 이만하길 다행이다, 아무 상처 입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줘서, 자신이 ‘무사히’ 수습할 여지를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하는 자신의 숨겨진 속내를 이 가련한 ‘옛 연인’이 알까?

바닥에 오체투지한 채 벌벌 떨며 정신없이 빌기만 하는 것이, 흡사 파리 한 마리가 앞발을 비비고 있는 것만 같은 처참하고 서글픈 모양새였다. 하긴 지금 그가 스스로 느끼고 있을 그네의 처지가 파리보다 나을 것 같지도 않았다. 자신과 시선조차 마주치치도 못하는 그가 안쓰러워서 뼛속까지 사무쳤다. 자신의 새끼를 죽인 천하의 죽일 놈이 돼버린 그가, 파리 신세보다도 못하게끔 바닥까지 전락해버린 그가 여전히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서 목이 메었다. 핏자국이 말라비틀어진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들이 보였다. 파리의 손이었다. 한입에 삼키고 싶어지는 예쁘고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파리의 정수리였다. 실은 절대로 파리가 될 수는 없을, 자신의 넋에 문신처럼 새겨진 영원한 공주님이었다. 생(生)에 유일할 연인이었다.

간신히 묻어두었다고 여긴 절절한 감정이 노도처럼 북받쳐 올랐다. 차라리 전화로 그의 흐느낌 소리를 들었을 때가 더 견딜 만한 것이었다고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했다. 차라리 그리도 그리워했던 목소리나마 더 들어볼 걸 하고 바보처럼 서둘러 전화를 끊었던 스스로에게 이를 갈았다. 그럼 이리도 지독하게 아픈 것은 좀 더 나중에 직면해도 됐을 것을 하고 소리 없이 절규하고 또 절규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처참한 심사만 꼭 붙든 채로 병실 문을 열었다. 더 이상 그를 지켜볼 수가 없었다.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간 스스로를 참기 힘들 것 같았다. 마주 무릎을 꿇고, 도리어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그에게 빌기 시작할 것 같았다. 제발 그렇게 빌지 말라고, 벌벌 떠는 가련한 몸뚱이를 품 안에 끌어안고서 미친 듯이 입을 맞추기 시작할 것 같았다. 저 소중한 몸뚱이처럼 똑같이 가련한 파리 한 마리가 돼서, 스스로를 부서트리고 싶은 파괴 욕구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하세요. 선생님 변명은 나중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를 스쳐 병실 안으로 들어서며 가까스로 토해낸 단 한마디였다.

“……저기…… 문밖에 앉아 계신 다른 보호자분 말인데요…….”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문득 소스라쳤다. 침대 위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보니 신애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들어선 담당 간호사였다.

응급 레지던트가 나간 후, 만 하루 동안의 초조하고 절박했던 기억을 반추하다 그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최악의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긴장이 풀린 탓일까? 하긴 간밤을 불안과 긴장 속에서 꼬박 새우고 다시 밤을 맞았으니 더는 몸이 버티질 못했을 것이다. 시각을 살피니 새벽 2시 무렵이었다. 두어 시간쯤 눈을 붙인 모양이었다. 신애가 잠든 침대 옆에 고꾸라지듯 엎어진 탓에 목과 어깨 관절이 뻐근하게 아프기까지 했다.

“……문밖에 앉아 계신 분이요…….”

두근……. 목뼈를 주무르며 하품을 하다가 재차 떨어진 간호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간호사를 바라보자 여자가 슬그머니 얼굴을 붉히며 무언으로 요구한 설명을 덧붙였다.

“……처음에 양신애 환자분을 모시고 오신 분이 자정 무렵부터 계속 문밖에 앉아 계서서요. 저기, 좀…… 다른 환자분들이나 보호자분들께서 복도를 지나실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고들 하셔서요. 옷이 피투성이라…… 아예 입원실로 들어오셔서 기다리시든가, 아니면 옷이라도 갈아입고 오셨으면 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들은 체도 안 하시네요.”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또 나타났다고?

자신과 15분쯤의 차이를 두고 그의 어머님이 당도하신 소리를 들었었다. 저녁 6시를 약간 넘긴 시각이었을 것이다. 병실 문밖에서 벌어지는 가슴 아픈 실랑이는 흐릿하긴 했으나 자신의 귀에도 정확히 전해지고 있었다. 어머님의 흐느낌 소리와 강제로 끌려가는 것 같은 그의 외침 소리들이었다. ‘사과해야 해! 엄마, 그에게 사과해야 해! 신애 씨한테 사과해야 해! 신애 씨가 깨어날 때까지만 있을게! 엄마, 제발 부탁이야! 응?! 엄마! 엄마! ……놔……! 이…… 이거 놔요!!……! 우아아악!!! 이거 놓지 못해?!!!’ 힘센 남자들의 발자국 소리와 몸싸움 소리도 보태졌다. 그러나 그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1∼2분? 곧 다시금 조용해진 병실 복도로부터 더 이상 가슴 아픈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몸싸움과는 절대 인연이 없는 약골이 그였다. 강제로 끌려가 차에 태워지고 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해 또다시 가슴이 찢어진 자신이었었다. 한 달 전, 경찰에 끌려가던 그를 바라봐야만 했을 때와 중첩된 그 상황에 치를 떨면서 속울음을 삼켜야만 했었다. 그런데 다시 나타났다고? 서울로 끌려 올라간 게 아니었단 말인가? 또 그 치 떨리는 상황을 되풀이해야 한다고?

“……오늘 낮에도 좀 그랬었는데, 그땐 다른 보호자분이 안 계셔서 저희도 뭐라 말씀을 못 드렸었어요. 다행히 약혼자분께서 오시고, 그분은 검은 양복 입은 경호원 같은 분들께 끌려가시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11시 반쯤이었나요? 다시 병실 앞에 와 계시더라고요.”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의 울림은 시시각각 더욱 격해지고 있었다. 침대 위에 무심히 놓여 있던 손까지 흐릿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진실로 끔찍함의 감정 반응인지, 아니면 기대인지, 혹은 기쁨인지,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치가 떨리는 염증 가운데서도, 다신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얼굴을 어쩔 수 없이 대면해야만 하는 상황에 일말의 기쁨조차 없다고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건 이성이라든가 양심이라든가 혹은 지혜라든가 하는 판단 지침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래, 흡사 본능과 같은 거였다. 공기를 찾아 숨을 쉬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본능. 빛을 찾아 자연스레 머리가 돌아가는 굴광성의 본능. 살고자 하는 본능.

“……솔직히 밤에 보면 환자분들이나 산모분들이 놀라실 만한 모습이거든요. 병원 현관엔 경호원들까지 지키고 서 있고요. 웬만하면 병실 안에 들어가게 하시든가, 아니면 잘 설득하셔서 돌려보내주셨으면 좋겠네요. 다른 산모분들이나 보호자분들도 배려해드려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저희들도 무척 난처하네요.”

간호사가 곤란한 어조로 말을 맺고 있었다. 제법 연륜이 있어 보이는 20대 후반의 여자는 자신의 얼굴을 수줍은 듯 힐끔거리면서도 제 할 말은 또박또박 잘도 챙겼다. 자신만 보면 얼굴을 붉히며 부자연스러워지거나 유혹적인 태도를 취하는 여자들이 대부분인 데 비해 여자는 지금의 자신에겐 잔인할 정도로 확실한 입장을 취했다. 일에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제대로 겪어낸 베테랑인가 보았다.

“……알겠습니다. 곧 처리하도록 하죠.”

힘겹게 대꾸를 흘리자 여자가 미안한 기색을 담은 목례와 함께 병실을 나갔다.

혹시 신애가 깨어 간호사의 말을 들었을까 싶어 침대부터 살폈다. 다행히 자정 직후에 봤을 때 그대로, 창백한 얼굴의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연분홍 환자복 소매 아래, 새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손목을 확인하듯 어루만져보았다. 그저 경계심에 따른 확인이었을 뿐이었다. IV 바늘이 꽂혀 있는 가냘픈 손등이며 약혼반지가 끼어진 손가락들이 분명 안쓰러우면서도, 의식이 없는 한 그녀를 만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자신이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한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자동적으로 뻗어나간 자신의 손에 문득 실소가 터졌다.

역시 괴물이었다, 자신은. 괴물의 사랑이었다. 자신의 자식을 잃은 약혼녀가 아닌가. 가족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리도 쉽다니. 이리도 쉽게 그저 경계해야만 하는 타인으로 단숨에 선 밖으로 밀어낼 수가 있다니. 정작 밀어내야만 하는 상대에 대해선 보자마자 품에 안고 싶어 숨이 막혔던 것을. 손이 뻗어나가려는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을.

―웬만하면 병실 안에 들어가게 하시든가, 아니면 잘 설득하셔서 돌려보내주셨으면 좋겠네요.

간호사의 냉담한 지상 명령이 다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떨리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러 마른세수를 하며 극심하게 동요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기를 썼다.

현재 상황에 대한 지긋지긋한 염증, 그에 대한 여전한 그리움과 초조감, 그를 지켜내야만 한다는 독한 의지들이 한데 뒤섞여 마음이 순간순간 널을 뛰었다. 여간해선 다시 볼 용기가 생기지 않는 마음과, 그럼에도 보고픈 마음이 서로 주도권을 잡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리도 힘겹게 떼어냈건만 상황을 이 지경으로까지 몰아넣으며 서로를 극단으로 몰아가는 그의 집착이 증오스러운 마음과, 그리도 독하게 잘라냈건만 여전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양쪽에서 심장을 두들겼다. 혐오감과 애정 사이에서 무얼 선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실은 무엇을 버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문제는 그 어느 것도 버려지지가 않는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완벽하게 혐오하고 증오하고 염증을 느낀다면 문제는 더 간단할 터였다. 증오와 혐오는 물론, 염증을 일으키고도 남음직한 상황인데도, 자신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보면 여전히 애틋하고, 가슴은 찢어지고, 독한 말을 끄집어내기 위해선 여전히 극한의 의지를 끌어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끔찍했다. 실은 다른 무엇을 떠나, 안고 어루만지고 입을 맞추고픈 상대에게 본능이 요구하는 그 모든 애정 표현 대신 그 반대의 독기를 내뿜어야 하는 것이 끔찍했다. 그래, 그랬다. 상황이 끔찍한 것도 아니고, 그가 증오스러운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끔찍한 것은, 증오스러운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줘야만 하는 ‘문위’라고 하는 이기적인 괴물이었다.

몇 번 긴 심호흡을 하고, 하릴없이 시계를 살피고, 그러고도 한참을 더 이를 악물어보다간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더 이상 망설일 순 없었다. 병원 측의 요구도 문제지만, 신애를 온전히 설득하기 위해서도 그의 존재는 여기서 당장 사라져줘야만 했다.

문을 열고 나가니 출입문 왼편 벽에 기대앉은 그가 보였다. 어린애처럼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안은 채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그가 자신의 시선이 가 닿자마자 움찔, 몸을 떨었다. 동시에 번개처럼 치켜드는 고개. 시선이 마주쳤다. 두근……. 심장 언저리로부터 시작한 달콤한 전율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갔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 꿈틀꿈틀 용틀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해쓱하게 여윈 이목구비와 창백한 안색 가운데서도 늘 자신을 매혹시키던 사려 깊고 애잔한 순둥이의 눈매가 거기 있었다. 시선이 부딪치자마자 촉촉하게 물기가 어리는 예쁜 눈시울이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어머님을 통해서 처벌 의사가 없음을 확인했는지, 더 이상 파리 새끼처럼 두 손을 싹싹 비비는 비참하고 비굴한 겁쟁이의 몸짓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이상의 절망과 비애가 여린 순둥이의 눈빛에 가득 떠올라 있었다. 넋을 잃은 듯 자신만을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는 눈과, 본능의 요구를 짓누르기 위해 기를 쓰는 괴물의 눈이 만나 한동안 하염없이 서로만 바라보았다. 자신이 순간 시간을 잊은 것처럼 그 또한 시간을 잊어버린, 영원이자 찰나의 해후였다. 오직 그 순간 속에서만 그와 자신은 연인일 수 있었다. 영원한 연인이었다. 물론 그는 추호도 모를 테지만.

“……따라오세요. 잠든 신애 씨를 깨우고 싶지 않다면.”

그를 향해 무턱대고 뻗어나가려는 손에 가까스로 제동을 걸고 몸을 돌렸다. ‘신애’라는 이름에 홀연 정신을 차렸는지, 뒤를 따르기 시작한 발자국 소리가 났다. 한쪽 다리가 살짝 끌리는, 익숙하면서도 눈물겹도록 그리운 소리였다. 심장의 설렘을 따라 사지도 떨려오는 나머지 앞서 걷는 자신의 걸음 또한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가 눈치채지 않기만을 빌 뿐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가는 동안엔 거의 보이질 않던 사람들의 모습이 응급실이 붙어 있는 현관 근처까지 가자 대낮과도 다름없이 어수선했다. 흐릿하게 여자들의 신음 소리와 비명 소리도 들리는 걸 보면 역시 밤낮이 따로 없는 산부인과 병원다운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모 탓에 시선을 끄는 자신은 물론, 뒤따라오는 그를 향했던 사람들의 놀란 시선이 일제히 돌아가는 게 보였다. 간호사가 지적한 대로 확실히 그를 서둘러 돌려보내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그를 발견한 사내들 서넛이 일제히 자신과 그를 에워쌌다. 모두 거대한 덩치에 단단해 보이는 몸집이었다. 어머님이 고용하신 사설 경호원(이라기보단 감시인)들일 터였다. 뒤에서 질겁한 한숨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 몇 시간 전 그가 저들에게 얼마나 난폭하게 끌려갔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쓰라린 비애가 목울대를 치고 올라온 나머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애먼 경호원들만 노려보았다. 제 할 일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객관성도 본능이 이끄는 감정은 역시 어쩌지 못했다.

“……잠시 둘만 있게 해주십시오. 저기 건물 뒤쪽 보이십니까? 저기서 얘기를 마치곤 돌려보내드릴 테니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한 사내들이 두어 걸음 물러서는 것으로 같잖은 허락이 떨어졌다. 흡사 미친 범죄인을 보듯 그를 경계하는 기가 막힌 모양새에 실소마저 터졌다. 눈길에서 감지되는 흐릿한 경멸에 절로 이가 앙다물어졌다. 온 신경을 자신에게만 집중시킨 채 뒤에서 벌벌 떨고 있을 순둥이인 그조차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겠지. 하긴, 호모들 치정 싸움에 상대남의 애먼 약혼녀를 납치하고 유산까지 시킨 그이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게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왜 이렇게까지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냔 말이다. 새삼스러운 원망이 머리꼭대기까지 치미는 순간이었다.

입술을 사리물며 병원 현관으로부터 20여 미터쯤 떨어진 건물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원의 휴게 공간으로 아담하게 꾸며진 것 같은 뒤편 정원엔 불빛은 물론,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새벽 3시가 가까운 시각인데다 싸늘한 늦가을 밤 기온까지 더해졌으니 절대 인기가 있을 공간은 아니었으리라. 을씨년스러움만 감돌고 있는 초록색 철제 벤치에 여전히 희미하게 떨고만 있는 자신의 짜증스러운 몸뚱이부터 부렸다.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그는 그 몇 걸음만큼 떨어져서 멈춰 선 채 멍하니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병원 창문으로부터 흐릿하게 비치는 불빛 외엔 사방이 워낙 어두워 대강의 얼굴 윤곽은 보였으나 표정까지 정확히 읽긴 힘이 들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그저 형태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본능에 제동을 걸긴 훨씬 쉬울 터였다. 지난 몇 달 동안 꾸준히 훈련한 그대로, 그에게 상처를 주게 될 독설을 토해내는 데도 물론 안성맞춤이었다. 그리 여겼다. 그나마 막판에 도움을 주는 운명이라고.

“……뭘 원하시는 겁니까?”

최대한 냉기를 뿌려둔 어조를 불쑥 끄집어냈다. 가는 몸뚱이가 또 움찔 어깨를 떠는 게 보였다.

“……딸이었다고 하더군요.”

이번엔 더 크게 어깨가 흔들린다. 깊게 심호흡을 했다. 총알의 장전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 피식 웃었다.

“벌써 형태까지 다 만들어졌었다고요. 신애 씨를 닮았으면 참 예쁜 아기였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역시 경련 같은 전율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신음 같기도 하고 짧은 비명 같기도 한 헐떡임 소리도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원래부터 우리 딸을 죽일 생각이셨던 겁니까?”

더는 어깨를 움찔거리지 않는다. 몇 배는 더 효과가 클 일격이었음에도 이미 쓰러트린 다음이라서일까? 아니면 기왕에 너무 아파 이미 고통 따위 더 이상 느낄 수 없어서일까? 아무러면 어떤가? 쓰러졌든 나자빠졌든 자신 안의 괴물은 작정한 대로 계속 움직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이것도 사랑 때문입니까? 사랑 때문에 그 핏덩이를 죽이셔야만 했다고요? 그 애를 죽이면 제가 다시 선생님과 남창질을 하던 때로 돌아가리라 여기신 겁니까? 아니면 신애 씨와 제 결혼이 깨질지도 모른다고 여기신 건가요?”

흐릿하게 고개를 흔드는 게 보였다. 보일 듯 안 보일 듯 떨고 있는 자신에 비해 그는 석상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처음 병실 앞에서 마주쳤을 때의 파리 새끼 같았던 비참한 모양새에 비해선 대단한 진화였다. 그랬다. 그게 그의 놀라운 점이었다. 상처를 받을수록, 절망에 더 근접할수록 그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더 무심해졌다. 아니, 무심해 보였다.

“……말랐네…….”

이윽고 살그머니 속삭이듯 떨어진 어조도 고요함 그 자체였다.

“……너무 말랐어……. 네 얼굴…… 몸도…… 너무…… 한 달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왜 자꾸 마르지? 어딘가 많이 아픈 것처럼 보여…….”

“…….”

벽돌 한 개가 슬쩍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단단히 쌓아올렸던 위악의 성벽을 채우고 있던 무수한 벽돌 가운데 하나였다.

“……가슴이 아파…… 나도…… 너 마르는 거 보는 건 진짜 아파…….”

“악어의 눈물입니까?”

빠져나간 벽돌을 허겁지겁 채워 넣으며 일갈했다.

벤치 위에 늘어뜨린 손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두운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순간순간 손을 뻗어 끌어안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예상보다 더 힘이 드는 것 같았다. 오랜만이어서일 것이다.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그것도 전혀 기대조차 안 하다가 느닷없이 만나게 돼서 더 흔들리는 것일 게다. 고작 한 달뿐이 아니냐고 누군가 객관적인 사실을 들이댄들, 그동안의 심리적인 지옥을 ‘고작 한 달’이란 말로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있어 그 한 달이란, 언젠가는 끝난다는 믿음조차 의심이 될 만큼 길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제가 마르고 있다면 그에 누구보다도 일등공신이실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로군요.”

“…….”

“다시 한 번 묻죠. 제게서 더 이상 무얼 원하시는 겁니까? 여기서 더 얼마나 우릴 괴롭히셔야 직성이 풀리실 겁니까?”

“…….”

“정말로 일을 크게 벌이실 생각이십니까? 우리 딸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제 과거를 빌미 삼아 협박이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헛물켜지 마십시오. 선생님이 어떤 더러운 수단을 쓰시든 우리 사랑은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설령 남창질을 한 과거가 들통이 나더라도 신애 씨와 전 결혼을 강행할 생각이니까요.”

“…….”

“그러니까 오해하시지 말란 말입니다. 선생님을 고발하지 않는 건 선생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어차피 곧 결혼할 우리…… 더 이상의 추문을 만들기가 싫어서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더 이상 상대할 가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

떨림이 목소리에 섞일까 봐 더더욱 싸늘하고 냉담한 어조를 고수했다. 뇌리 속으로는 최대한 잔인하고 무정한 단어들만 고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응, 알아, 위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자그마한 머리통이 보였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지금,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지도 않고 목소리마저 담담하기 그지없어, 자신의 무자비한 일격들은 그저 무위로 그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끝내 용서 못 받으면 그냥 죽으려고…….”

두근…….

“……석 달에 한 번도 좋고, 6개월에 한 번도 좋다고 했어…….”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널 볼 수만 있게 허락해달라고 했어…… 그냥 얼굴만 잠시 보고 약간의 대화만 할 수 있으면 된다고…… 그저 가끔 네 얼굴을 보고 목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난 살아갈 수 있다고…… 사람 하나…… 짐승 새끼 하나 살린다 생각하고 허락해달라고 빌었었어…… 그런 부탁을 하려고 신애 씨를 강제로 데려갔던 거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맹세코 네 아기를 해치려는 생각은 없었어. 그건 정말이야, 위야. 믿어줬으면 좋겠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숨길도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이젠 눈에 드러날 정도로 사지가 딸리는 통에 그로부터 완전히 시선을 돌려야 했다. 벤치 코앞, 누런 낙엽들만 수북이 쌓여 있는 흙더미 위만 죽어라 하고 노려보았다.

―용서 못 받으면 그냥 죽으려고…….

―죽으려고…… 죽으려고…… 죽으려고…… 죽으려고…….

질겁한 뇌리로 단 한마디의 폭탄선언만 끊임없이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뒤이은 나지막한 고백들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근데 결국 이렇게 돼버렸네. 더 이상 부탁할 여지도 없어졌어. 나도 참 재수 없는 놈인가 봐. 매번 이런 식으로 끝나니…… 하긴 애초부터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지. 스토커처럼 들러붙는 약혼자의 옛 고객 주제에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나라도 들어주기 힘들었을 거야. 아니, 들어주기는커녕 화만 잔뜩 내며 뛰쳐나가거나 소금이라도 뿌리며 쫓아내버렸겠지.”

“…….”

“……그래서 그랬을 거야. 내가 생각하기에도 반미치광이 짓인 줄 뻔히 아니까 그녀가 거절하기 힘들도록 일단 가둬두기부터 한 거지.”

“…….”

“……이런 내가 끔찍하지, 위야? 알아. 나도 내가 끔찍해. 괴물 같아. 가끔씩 제정신이 들 때마다 나도 이런 내가 참 이상해. 너무 징그럽고 혐오스러워서 잘 실감도 안 나. 나 정말 미쳐가는 걸까, 위야?”

“…….”

“……근데 있잖아…… 지금도 사과를 해야 하는데 있지…… 네가 용서 안 해주면 진짜 콱 죽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데도 있지…….”

“…….”

“……그러는데도…… 널 바라보면 여전히 가슴이 설레…… 다가가 만지고 싶고…… 안고 싶어서 손이 덜덜 떨려…… 이미 다른 사람 게 분명하다는 걸 아는데도 마치 아직도 내 위야인 것만 같은 이상한 착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손을 뻗으면 네가 마주 잡아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거야. 마주 손을 잡아주고…… 상냥하게 안아주고…… 머릿속이 아득해질 정도로 정열적으로 입을 맞춰줄 것만 같은 거야…… 나 진짜 이상하지……?”

“…….”

“……너무너무 원해서 진짜로 돌아버린 건가? 더 이상 돌아올 수도 없는 길을 지나버린 걸까?”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시다니 다행이로군요. 노리개로 사용하던 옛 남창의 약혼녀를 납치해 협박하는 자가 제정신일 순 없겠죠.”

“…….”

턱턱 막히는 숨길을 가까스로 가다듬으며 말을 잘랐다. 걷잡을 수 없는 몸의 떨림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채 두 손바닥 안에 얼굴을 파묻어버리는 것으로 어떻게든 티를 내보지 않으려 기를 썼다. 최면 같았다. 그가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그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지금 이 순간, 만약 그가 자신에게 손을 뻗기만 하면 자신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의 손을 마주 잡을 터였다. 안아주고, 입을 맞춰줄 터였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기대하는 신사의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 터였다. 미친 야수가 돼서 정신없이 그를 먹어치우려 들 것이다. 최면이었다. 아니, 미쳐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도 미쳐가고 자신도 미쳐가고 있었다.

“용서 안 해드리면 콱 죽어버린다라…… 하, 지금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

“진심으로 우리들 용서를 바라신다면 이렇게 나오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지금 신애 씨는 저 안에서 상상도 못 할 고통 속에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전 그 소중한 사람을 팽개쳐두고 가증스러운 가해자인 당신에게 불려 나와서 강제로 용서를 해드려야 할 판이로군요. ‘원하는 대로 안 되면 죽어버리겠다’니, 정말 상대 못 할 분이시로군요, 선생님은. 정말 최악이에요. 한때나마 이런 선생님을 친구로서 좋아하고 우정을 드렸었다는 게 치욕스러울 뿐입니다.”

“……혀…… 협박 아닌데…….”

처음으로 더듬거리는 말투가 꺼질듯 전해졌다.

“협박이 아니라고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내 아이의 피로 범벅이 돼 있는 옷을 보란 듯이 입고 나타나서 용서해주지 않으면 콱 죽어버리겠다고 하는데 협박이 아니라고요?!!! 당신 어린아이입니까?!!!”

고개를 도로 치켜들자마자 벽력같은 고함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겁을 집어 먹은 나머지 내내 벌벌 떨기만 하던 감정이 결국 폭발하고 만 걸까? 흐릿하게 형태만 보이는 창백한 얼굴을 찢어발길 기세로 노려보았다. 이 철부지 순둥이는 지금 위 자신이 얼마나 겁을 집어먹었는지 모르는 걸까? 그래, 물론 모르겠지. 알 턱이 있나. 그저 평소처럼 솔직하게 제 심정을 말한 것뿐일 게다. 안다. 협박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런 술수 따윈 부릴 줄 모르는 위인이다. 그러니 그 말은 거의 90퍼센트쯤은 진심일 게다. 진심으로 죽어버릴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 그걸 아는 자신이니 이리 겁을 집어먹은 거겠지.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 되는 거겠지.

“……어, 어, 엄마…….”

“엄마? 무슨 엄마요? 엄마가 뭡니까, 그 나이에?!!! 그래서 엄마가 뭐요? 거기서 엄마라는 호칭이 왜 튀어나오는 겁니까?!!!”

“……어, 엄…… 어머니…… 서, 설득하느라…… 네, 네게 사과해야 한다고…… 그전엔 서울로 못 올라간다고…… 오, 옷 갈아입을 정신이 어, 없어서…….”

“‘엄마’를 설득해요?!!! 마마보이입니까? 하긴 당신이 마마보이란 건 애저녁에 눈치채긴 했었죠. 정말 가관이로군요! 그래, 어머님께서 허락해주시던가요? 저한테서 용서받지 못하면 콱 죽어버리라고?! 아니면 어머님 앞에서도 협박을 하신 겁니까?! 절 만나게 해주지 않으면 또 콱 죽어버리겠다고요?!!!”

“…….”

“어디 죽어보시죠! 제가 눈 하나 깜짝이나 하나! 어차피 내 아이도 죽여버리셨으니 천국 가시면 부디 안부나 전해주시죠! 엄마 아빠가 무척 슬퍼하고 있다고요!”

“…….”

“…….”

대견할 정도로 고요하게 미동도 않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 건 처음으로 말을 더듬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이젠 어둠 가운데서도 훤히 눈에 들어올 지경으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 애처롭고 가련한 꼬락서니를 이를 갈아붙이며 사납게 노려보기만 했다. 정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기세였다. 속내야 질겁해서 절절매든 말든, 겉으로는 절대 티를 내선 안 될 일이었다.

한동안 사지만 덜덜 떨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문득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바싹 마른 낙엽들이 밟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저 제자리에서 무게 중심만 옮기는 것이라 여겼던 그것은 곧 규칙적인 발자국 소리로 변했고, 어쩐 일인지 그는 뒷걸음질을 치며 자신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거리로 멀어진 그를 멍하니 굽어보다가 문득 벼락처럼 자각이 닥쳤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경고조로 터진 고함 소리에도 그의 뒷걸음질은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아예 몸을 돌리더니 뛰어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심장이 무섭도록 뛰기 시작했다. 장난이 아니었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다! 10여 미터쯤 앞서 달리고 있는 그가 향한 곳은 병원 뒤편을 가로지르고 있는 찻길이었다. 러시아워도 풀린 시각, 거의 고속도로를 방불케 하는 자동자의 엔진음들이 간간이 굉음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 빛의 사각 지대였다.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 얼마 만에 그의 팔을 움켜쥐었는지는 의식에 없었다. 고작 몇 초? 몇 십 초? 어떻게 붙잡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막 병원의 후문을 벗어나 찻길로 접어들려는 그를 잡아챌 때까지도 눈앞은 그저 새까만 암흑이었다. 지독한 공포로 심장은 통제 불능의 탱크처럼 요란스레 뛰고,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더 이상 억제가 불가능할 지경으로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아니, 필사적으로 손안에 움켜쥔 그의 손이 떨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누가 더 떨고 있는지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떨며, 헐떡이며, 이를 갈며, 무조건 찻길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 뛰었다. 부아앙 하고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죽음의 사신이기라도 한 양,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다. 불편한 한쪽 다리로 힘겹게 따라오는 그를 짐짝처럼 질질 끌다시피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역시 어떻게 되돌아왔는지 도무지 기억에 없었다. 병원 건물의 어둑한 그늘과, 을씨년스러운 초록색 철제 벤치와, 노랗게 변하기 시작한 잔디밭과,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포석들이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온 것 같았다. 사위를 묵직하게 채우고 있는 어둠조차 참을 수 없어 무조건 빛을 찾아 빠르게 움직였다.

분별력을 일체 상실할 만큼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워낙에 겁에 질려 걸음걸이가 불안정해서였을까? 막 병원 현관이 마주 보이는 모퉁이를 돌려는 찰나, 포도(鋪道)와 정원 잔디밭을 가르는 10센티 높이의 경계석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발이 정통으로 걸려버렸다.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찰나, 붙잡고 있던 그의 팔을 전광석화보다 빠르게 끌어당겼다. 품에 완전히 감싸 안은 채 몸을 틀었던 것은 역시 본능이었을 것이다. 공기를 찾아 숨을 쉬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본능. 빛을 찾아 자연스레 머리가 돌아가는 굴광성의 본능. 살고자 하는 본능. 이 몸뚱이를 다치게 해선 절대 안 된다! 오직 그 한 가지 의지만이 횃불처럼 뇌리에 새겨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등과 왼쪽 어깨로 극심한 통증이 치고 올라왔다. 잠깐 동안은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나마 보도블록이 깔린 포도(鋪道)가 아닌 정원 잔디밭으로 넘어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두 사람분의 체중을 지지한 충격으로 어깨뼈 어딘가에 금이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풀냄새가 났다. 낙엽 냄새일 수도 있었다. 흙냄새일지도 몰랐다. 그 모든 가을 냄새에 뒤섞여 그의 냄새가 났다. 온 피부에, 세포에, 감각에 문신처럼 알알이 새겨져 있던 사무치는 그리움이었다. 굴광성의 애정이었다.

최악이었다. 공포는 단숨에 금기를 절단내버린 최악의 기폭제였다. 이 사랑스러운 몸뚱이에 치명적인 위험이 닥칠 뻔했다는 끔찍한 가정은 다른 일체의 이기적인 계산이나 의도를 앗아갔다. 신경이 끊어지는 것만 같은 두려움과 그 뒤를 잇는 안도감, 감사, 기쁨, 애정, 물밀듯이 넋을 치고 들어오는 그에의 사랑에 괴물로서의 이성 따윈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허리를 끊어버릴 기세로 옥죄고 있던 손이 더듬더듬 등줄기를 쓸며 위로 올라왔다. 여전히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는 손길이었다. 손바닥 아래 만져지는 몸뚱이도 자신의 손만큼 벌벌 떨고 있었다. 끓어질 듯 가쁘게 토해내는 그의 숨결이 자신의 목덜미 근처에 따스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립고 그리운 단내였다. 하염없이 들이마시고픈 체취였다. 자각의 순간, 찌르르하게 아랫도리로 혈액이 몰리며 불쑥 일어서는 물건이 느껴졌다. 기가 막혔다. 발기라니! 이런 지랄 같은 몸뚱이라니! 두어 달이 넘게 금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따윈 변명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신애가 코앞에서 그리 애교를 떨어도, 은근한 색정을 피워도 무감각하기만 하던 몸뚱이였었다. 그런데 고작 품에 한 번 안았다고, 체취 한 번 맡았다고 짐승처럼 순식간에 본색을 드러내다니! 그조차도 의도하지 않은 불상사 때문에!

이성이 부르짖는 자아비판은 그의 헐떡이는 가쁜 숨결과 가늘게 전율하는 몸짓 한 번에 다시금 뇌리 속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냄새만으로도 참기 힘들 지경인데 품 안에 쏙 들어온 가는 몸뚱이는 그대로 미칠 것 같은 유혹이었다. 어깨와 등으로 달리는 지독한 아픔은 어느새 뒷전이고, 온 감각이 품 안의 몸뚱이에 집중돼 있었다. 현미경으로 단 일점에 빛을 모으듯, 자신 안의 모든 열기가 단 한곳으로만 뻗어나가고 있었다. 자신도 그도 한동안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의 몸이 불러일으킨 반응에 충격을 받았다면, 그는 자신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에 쇼크를 받은 것 같았다.

서로 숨을 멈춘 채 얼마나 오래 얼음땡이 돼 있었던 걸까? 허벅지 안쪽과 사타구니 틈 예민한 부분에 닿아 있던 그의 성기가 문득 딱딱해진 것이 자각되었다. 하, 설상가상, 첩첩산중이었다. 그의 치골 부위에 닿아 있는 자신의 것 또한 점점 더 단단하게 부풀고 있었으니, 그 역시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벌벌 떨고 있는 무언가가 슬금슬금 자신의 얼굴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두 손이었다. 푸릇하게 수염이 올라온 턱 언저리를 더듬다가, 입술과 그 주변을 손가락으로 애틋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흡사 의사가 진찰을 하는 것도 같고, 도예가가 진흙을 주무르는 것도 같았다.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 실은 막지 않았다. 그를 뿌리치는 대신, 자신의 두 손은 그의 허리를 더 꼭 끌어안은 채 가만가만 그의 등줄기를 애무하고 있었으므로.

오른편 목덜미 쪽에 살짝 비킨 채 묻혀 있던 그의 얼굴이 전율하며 굼벵이처럼 자신의 얼굴 위로 겹쳐지는 게 보였다. 눈을 완전히 감고 있는지, 눈동자에 반사되는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차갑게 식은 입술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차가운 입술이 꿈처럼 몽롱하고 느리게 자신의 턱 끝을 스치고 있었다. 이어 턱 주변을 더듬고, 뺨을 지나 마침내 입술에 다다른 그 사랑스러운 것이 살그머니 자신의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손가락들이 그랬던 것처럼 진찰을 하듯, 흙을 빚듯, 너무나 조심스럽고 애정이 흘러넘치는 경배였다. 순식간에 전신이 노곤해지는 감미로움에 의식마저 점점 아득해지고 있었다. 이래선 안 된다는 의지 따윈 의식의 표면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차가운 입술이 주는 황홀한 감촉에 전신이 사슬에 묶인 양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별력 또한 완전히 사라졌다. 왜 아니겠는가. 이별 후 내내 늘 이런 꿈만 꾸지 않았던가, 자신은. 이렇게 그를 품에 안고, 이렇게 그의 체취를 들이마시고, 이렇게 그와 입을 맞추는 꿈. 달콤하고 슬픈, 잃어버린 낙원에의 꿈…….

젖먹이 아기가 젖을 빨듯 오물거리며 빨아 당겨지는 입술의 감촉이 한동안 짐승의 사지를 꽁꽁 묶는 순수함의 극치였다면, 문득 대담해진 혀가 입술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기 위해 앞니와 잇몸을 더듬기 시작한 것은 짐승의 족쇄를 완전히 파괴시켜버리는 교태 서린 애교의 극치였다.

짐승은 어느덧 입을 활짝 벌린 채 사랑스러운 침입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뜨겁고 축축하고 말캉한 감촉이 혓바닥 표면을 음란하게 스치며 목구멍 깊숙이 파고들었다. 흡사 성기가 삽입되는 것 같은 황홀한 충격이자 전율이 오감을 찢어발기며 페니스를 직격했다. 가까스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이성이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순간이었다.

안고 있던 허리를 와락 움켜쥔 채 몸을 돌려 체위를 바꿨다. 입안으로 들어온 그의 혀를 잡아먹을 기세로 자신의 혀뿌리에 휘감은 것과 거의 동시였다. 허리를 감싸 안았던 두 팔을 들어 올려 그의 양쪽 뺨을 옴짝달싹 못 하게끔 움켜쥐었다. 뽑아버릴 기세로 그의 혀뿌리를 빨아 당기고, 입천장을 긁고, 잇몸을 핥았다. 이를 하나하나 헤아리듯 문지르고, 혀 안쪽 돌기와 뒤쪽 혈관 부위를 샅샅이 애무했다. 목구멍 안쪽까지 혀끝을 깊이 박아 쿡쿡 쑤시고, 달콤한 타액을 기갈 들린 아사자마냥 죽죽 빨아 삼켰다. 느닷없는 자신의 난폭한 기세에 기겁한 몸뚱이가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개의치 않았다. 미쳐 날뛰는 욕망 그대로 전신의 에너지를 완전히 개방했다. 충분했다. 짐승은 충분히 참고 참았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쪽, 쪽 쪽, 츄웁, 츕, 쪼옥, 쪽, 츄릅, 츕, 쪽, 쪽, 쪼오옥……. 하아, 학, 음, 흐응, 흐윽, 읍, 쪼옥, 쪽, 쪽, 쪽, 츄릅, 하앙, 하아앗, 쪽, 쪽…….

바람 소리가 났다. 바싹 마른 낙엽들이 우수수 휘날리는 소리도 설핏 들려왔다. 그러나 그 모든 은근한 소리들을 무색하게끔 하는 질척한 접촉음과 가쁘게 헐떡이는 숨소리, 그리고 서로의 옷가지들이 스치며 비벼지는 교합의 소리들이 깊은 밤, 단 한 줄기의 빛도 드리우지 않은 음습한 짐승의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짐승이 몰아가는 대로, 잔뜩 굳어 있던 몸뚱이가 같이 짐승이 되는 데는 물론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절망하고, 울고, 떨고, 죽음의 길목까지 슬며시 엿보았던 넋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여겼을 것이다. 짐승 또한 한가지. 사무치도록 증오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마침낸 완전히 잃을까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혔던 넋이었다. 시커먼 심연으로부터 되찾아온 소중한 몸뚱이에 대한 깊은 안도와 기쁨과 극도의 희열은 더 이상 금기를 지킬 의지를 완전히 앗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랬다. 미쳐버린 짐승 두 마리의 광휘를 제어할 그 어떤 제동 장치도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를 미친 듯이 어루만지고, 입을 맞추고, 쓰다듬고, 빨고, 비비고, 물어뜯고, 키스하고, 키스하고, 또 키스했다. 서로의 옷깃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미친 듯이 서로의 몸뚱이를 어루만지고 꼬집고 쓰다듬고 비벼댔다. 늦가을 한기에 질린 서로의 차가운 감촉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너무나 좋아서 도저히 참아내지 못하는 교성을 연달아 흘려댔다. 한계까지 팽창한 서로의 성기를 바지 지퍼만 내린 채 부랴부랴 꺼내 들고 마주 쥐었다. 단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두 개의 성기를 꼭 부여안은 채 정신없이 부벼댔다. 끙끙대는 음란한 쾌락의 신음성을 서로의 입술로 틀어막고서, 서로의 손바닥 사이로 스미는 서로의 질척하고 뜨끈한 쿠퍼 액에 몸서리를 치며 황홀해했다. 서로의 무성한 음모를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빗질하듯 쓰다듬고, 고환을 굴리고, 음경 기둥을 꾹꾹 조여주고, 귀두 끝 구멍을 손톱 끝으로 긁어대며 서로의 쾌락을 극치로 이끌었다. 방아를 찧듯, 서로의 허리가 미친 듯이 서로를 향해 피스톤질을 하고 있었다.

“……흥, 읍, 윽, 흐앙…… 앗…… 흐앗…… 흡…… 쪼옥…… 춥…… 흑…….”

“……윽…… 으읍…… 큭…… 쪽, 쪽, 츕…… 흐앗……!”

“……응, 훕……! 아앙…… 흐악……! 쪼옥…… 웁……! 으흡!!!!!”

“……큭…… 읏, 웃, 크윽…… 흐아아훕!!!!!”

번쩍거리는 빛이 전신을 잘게 부수고 있었다. 하반신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경련을 시작하고 있었다. 오르가슴이었다. 숨을 멈춘 채 서로의 입술을 빨판처럼 빨아 당겼다. 서로의 교성도, 숨결도, 체액도, 일체 남김없이 몽땅 다 집어삼키는 진공 흡입기였음은 물론이었다. 감당하기 불가능할 지경인 극치의 희열이 서로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움찔움찔 사지가 몇 번 뒤틀리더니 마주 쥔 서로의 귀두 끝에서 거의 동시에 분수처럼 새하얀 포말이 뿜어 나왔다. 전격에 사로잡힌 몸뚱이가 뻣뻣하게 굳어들었다. 총알에 관통된 것마냥 뇌리 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풀냄새가 났다. 낙엽 냄새도, 흙냄새도 짙었다. 맡아도 맡아도 늘 그립고 허기가 지는 그의 체취와 더불어 서로가 뿜어낸 정액 냄새가 시린 갈바람 결에 꿈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제정신이 든 지도 한참이 지난 것을 알고 있었다. 되돌아온 인성이 낭패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과는 별개로, 본능은 여전히 굶주려 있었다. 모자랐다. 수도 없이 안아도 이 지독한 허기는 결코 줄어들지 못하리라. 어차피 영영 채워지지 못할 허기라면 거듭 품에 안고 미련을 부리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리라. 씁쓸한 자각이 겨우 움직일 용기를 마련해주었다.

겹쳐진 몸뚱이를 휘감고 있던 사지를 풀고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가쁘게 숨을 할딱이며 땅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몸뚱이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몇 배는 기진맥진해 있는 모양새가 안쓰러우면서도 여전히 사랑스러워서 눈시울이 아리고 손끝이 떨렸다. 차츰차츰 뇌리를 점령해오는 후회와 자책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여전히 손을 뻗고 싶고 안고 싶은 몸뚱이였다. 입 맞추고 싶은 얼굴이었다. 숨이 멈출 때까지 사랑을 나누고 싶은 존재였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찾아냈다. 활짝 벌어진 채인 그의 사타구니 사이를 닦고, 자신의 젖어든 성기와 손바닥도 대충 닦아냈다. 자신의 바지 지퍼도 채우고, 흐트러진 그의 옷차림도 바로 해주었다. 차분하지 못한 손길은 그것이 애무인지 마지못한 배려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고서 여전히 만지고 싶어 설레기만 했다. 지긋지긋했다. 정말로 지긋지긋한 집착이었다. 그만이 집착을 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은 그보다 몇 술은 더 뜨고 있었다.

두 팔을 뻗어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끼운 다음 자꾸만 늘어지려는 몸뚱이를 바로 일으켜주었다. 미적거리는 사이 그의 두 팔이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품 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워낙에 기진맥진해 있어 조금도 강하지 않은 포옹이었지만, 도저히 뿌리쳐지지가 않았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감정의 동요 때문인지, 가늘게 떨고 있는 몸뚱이는 그저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역시 저 질기디질긴 집착이 문제였다. 다행히 마주 안지 않을 만큼의 이성만은 되돌아와줘서 그저 가만히 팔을 늘어뜨린 채 깊은 심호흡을 거듭했다. 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다시 손안에 움켜쥔다면, 또 어떤 짐승이 눈을 뜰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어머님께 돌아가세요. 죽어버린다느니 어쩐다느니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셨다간 정말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

“……댁으로 돌아가셔서 전부 잊어버리세요. 이번 일도, 그리고 저도요. 조용히 뒷수습을 하자면 선생님께선 그저 얌전히 댁에 계셔주시는 편이 절 도와주는 겁니다.”

“…….”

“……진심으로 절 사랑하셨다면 이 이상 더 벼랑 끝으로 몰지 말아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요…… 용서해주는 거야……?”

“…….”

“……나 용서해주는 거야……?”

“…….”

“……위야…….”

“…….”

“……위…… 위야…… 위위…….”

애절한 부름과 함께 자꾸만 품 안으로 파고드는 사랑스러운 어리광에 머릿속은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단 한 번의 일탈이 지난 몇 달 동안의 고통스러운 인내를 완전히 수포로 만들고 있었다. 아마도 무의식적인 몸짓이겠지만 그는 정확히 자신의 변화를 읽고 있었다. 속속들이 무너져버린 성벽을 과감하게 치고 들어오는 중인 그의 순수한 기대가 훤히 읽혔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새삼 독기를 끄집어낸다 한들 그저 부자연스러운 어릿광대짓처럼 보일 테지만, 당장은 그러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아니, 그럴 의지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너무나 오랜만에 빛과 자양분을 취한 수컷의 본능은 조용히 희열에 떨고 있었다. 그런 기쁨과 충족감을 선사해준 존재에게 새삼 어떻게 위악을 떨 수 있을 것인가. 그저 만지고 싶고, 껴안고 싶고, 다시 한 번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픈 절실한 욕망을 참는 데만도 필사적인 의지를 끌어내야 하는 것을. 속수무책이라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용서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용서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조만간…… 신애 씨도 최선을 다해 설득해볼 생각입니다. 그러니 일단은 댁으로 돌아가주세요. 나중에 제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튀어나가려던 마지막 한마디에 문득 소스라쳤다. 막 목울대를 친 그것을 허겁지겁 도로 주워 삼켰음은 물론이었다. 나중에 또? ‘나중에 또’라니? 나중에 또 그를 만나겠다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말로 미쳐버린 건가? 정말 홱 돌다 못해 환장을 해버린 건가, 자신은? 양편으로 축 늘어져 있던 손이 이번엔 다른 이유로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두려웠다. 딛고 있는 땅바닥이 쩍 갈라져 그 밑으로 하염없이 추락해버리는 것 같은 어지럼증과 공포. 턱 끝에서 살랑살랑 부딪쳐오는 그의 정수리에서 샴푸 냄새가 흐릿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더불어 아련하게 풍겨드는 그의 체취에 두근 하고 철모르는 심장이 크게 들썩였다. 간만의 지독한 쾌락을 맛본 채 축 늘어져 있던 페니스가 다시금 불쑥 고개를 치켜드는 것도 설핏 자각되었다. 맙소사! 그제야 좀 전에 벌어진 어리석기 짝이 없는 불상사의 의미가 칼처럼 심장에 박혀들었다. 맙소사! 하느님, 맙소사! 맙소사!!!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틀어쥔 뒤 거칠게 밀어내버린 건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위험해……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경고를 주고 있었다. 더 이상은 위험해! 더 이상 함께 있어선 안 돼!

“……위야……?”

몇 걸음쯤 뒤로 밀쳐져 비틀거리는 그의 애처로운 부름이 들렸다. 질겁한 주제에 여전히 절절한 애틋함이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끔찍했다. 끔찍한 유혹이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윤곽만 드러나 보이는 몸뚱이를 바라보는 것조차 겁이 났다. 아니, 실은 보고 싶어서 환장할 것 같은 스스로의 욕망이 겁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시…… 신애 씨가 깨어났을지 모릅니다. 제 뜻은 알아들으신 것으로 알고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자신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정확히 인지가 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돌아선 그 즉시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결별의 아픔이 들이닥쳤지만 무시했다. 이 아픔조차 끔찍한 유혹일 터였다. 도망쳐. 어서 도망쳐. 저 사람으로부터 얼른 도망을 쳐……. 북소리처럼 울려대는 경고의 소리만 곱씹고 곱씹었다.

“……위야…….”

끈질기게 뒤따라오는 애달픈 부름을 듣지 않기 위해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개의 꼬락서니였을 것이다. 하하, 정말이지 개도 안 웃을 일이었다. 한주먹에 부서트릴 수도 있을 저 가늘고 여린 몸뚱이 어디가 무서워 이다지도 혼비백산을 한단 말인가.

빛이 보였다. 병원 현관문이 코앞에 있었다. 그의 경호원들일 덩치 큰 사내들이 얼핏 시야를 스쳐갔지만 더 이상 의식 깊이까지 들어가지도 않았다. 부리나케 실내로 뛰어들어 화장실부터 찾았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거울을 살폈다. 창백하게 질려 있는 어린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마음의 동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혼란스러운 눈시울도 보였다. 쏟아지는 물줄기 위에 들이댄 양손은 여전히 벌벌 떨고 있었다. 몇 분 전에 그의 성기를 수음한 손이었다. 아니, 서로를 함께 움켜쥐고 섹스를 한 손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뜨겁고 격렬했던 오르가슴의 기억이 뇌리를 스쳐가자 전신으로 경련 같은 전율이 치달았다. 순간 얼굴로 뜨거운 열기가 끼쳐든 건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살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몇 번이나 세게 비누칠을 해가며 손을 씻었다. 쏟아지는 찬물은 금세 표피가 떨어질 것 같은 시린 자극으로 변했다. 개의치 않았다. 거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씻고 또 씻었다. 손안에 각인된 섹스의 감촉을 지우듯, 아니,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지워버릴 기세로. 그럴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 달콤한 기억에 절망한 것은 물론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아서였다. 그의 목소리, 그의 체취, 그의 감촉, 그의 욕망, 그의 키스…… 그 어느 것 하나 도무지 지워지지가 않았다. 지울 수가 없었다. 계집애처럼 울음이 터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손도 마음도 넋도, 너무나 차갑고 외로웠다. 사방이 싸늘한 냉기와 짙은 어두움뿐이었다. 그를 따스하게 밝힐 유일한 존재는 제 스스로 지워버리려 용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쯤이나 돼야 이 지긋지긋한 사랑을 멈출 수가 있을까. 도대체 언제쯤이나 돼야…….

줄줄 새는 눈물을 어쩌지 못한 채 무턱대고 세수를 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시린 냉기가 손가락 너머 얼굴에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마음의 열기를 가져가줄 수 없다면 눈가의 열기만이라도 가져가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래야 계집애처럼 숨죽여 흐느끼고 있는 한심스러운 작태를 멈출 수 있을 터였다.

“……이 환자분의 경우엔 원래부터 자궁의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자궁 발육 부전이라고 하는데, 자궁이 정상 성인 여성보다 발육 상태가 매우 미진한 경우지요. 보통 이런 증세를 가진 환자분들은 임신하기도 어렵고 설령 임신을 하신다고 하더라도 유산을 하기가 쉽습니다. 임신 진단을 받으셨을 병원에서도 이 점에 대해선 주의를 주었을 텐데요?”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산부인과 전문의의 얼굴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환자의 좋지 않은 상태를 보호자에게 전달해야만 하는 일에 적잖이 부담을 느끼는지, 사내의 시선이나 어조는 진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택시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제법 큰 산부인과 병원의 원장치곤 젊은 편이었다.

주의를 주었다라……. 유산하기 쉬운 걸 알면서 왜 조심하지 않았냐는 추궁인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신애와 함께 집안 식구 소유의 병원이라는 강남의 한 유명 산부인과에 들렀을 때, 그 비슷한 얘기를 들은 기억이 얼핏 스쳐가는 것도 같다. 그와의 이별이 주는 고통에 온 넋이 나가 있던 상태라, 정작 신애에 관해선 일말의 신경조차 쓰지 못했던 자신이었다. 그런 기억이 난다는 사실만 해도 자신으로선 기적이라는 걸 눈앞의 이 사내는 알까? 아니, 실은 지금 현재도 유산한 약혼녀의 상태보다는 약혼녀의 피를 뒤집어쓴 몰골로 파리하게 질려 있던 그의 얼굴만 뇌리에 가득하다는 것을? 경호원들의 거친 드잡이로 짐짝처럼 끌려가던 그만을? 밤중에 다시 자신 앞에 나타나 기어이 욕망을 참지 못하고 페팅 섹스까지 해버린 그만을?

“……자궁이 많이 약하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임신한 것 자체가 어찌 보면 기적이라고 했지요.”

“……예. 그만큼 앞으로도 자연 임신을 하실 가능성이 낮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유산까지 하신 상태이니 그것이 미친 악영향도 다른 분들보다는 심각한 상태고요. 자주 내원하셔서 정기적인 검진과 치료를 받으시라고 조언을 드리고 싶네요. 그래도 너무 실망하실 일은 아닙니다. 자궁 발육 부전의 경우 호르몬 요법과 같은 효과적인 치료 방법들이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치료와 노력을 병행하시면, 다시 임신을 하고 또 무사히 출산을 하실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니까요. 애초에 치료도 받지 않으신 상태에서 임신하신 것만도 기적적인 일이었으니 앞으로도 기적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지요.”

기적이라. 애초에도 운 따위와는 거리가 먼 자신에게 ‘기적’이라. 의사의 입에 발린 동적적인 멘트에 속으로 코웃음이 나왔다.

홀연 깨닫고 있었다. 어쩌면 이건 그를 구할 절호의 기회이자 그 대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자신의 인생에 더 이상 자식은 없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자각이었다. 마치 처음 신애를 안았을 때, 그녀의 임신 사실을 깨달았던 것처럼. 그를 구해줄 테니 대신 앞으로 생길 네 자식들을 제물로 내놓아라. 그야말로 지독하게 운 없는 놈의 운명다운 전개가 아니더냐.

아침 일찍 회진차 들른 사내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며 따로 면담을 요청했었다. 새벽 5시 무렵에 잠깐 깨어났던 신애는 잠에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또다시 잠에 빠졌고, 자신 역시 두서너 시간쯤 불안한 선잠이 들었었다. 서교동 그녀의 외가나 아니면 뉴욕의 친가 쪽에서 의심을 품기 전에 그녀와 입을 맞춰둬야만 할 터였다.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할 때까지 신애가 속히 회복되기만을 간절히 빌고 있는 형편이었는데, 느닷없는 최악의 소식이 떨어진 셈이었다. 아니, 어쩌면 최고의 소식인 건가? 자신 못지않게 적에 대해선 일말의 동정도 없는 신애의 성격상, 그가 그녀로부터 쉬이 용서받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해 설득하겠지만, 그녀라면 여전히 자신을 소유하면서도 그를 단죄할 수 있는 방법까지도 충분히 생각해낼 수 있는 머리가 있었다. 그런 그녀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복수를 포기케 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두뇌 싸움이 필요할 것이라 각오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런 최악의 희소식이 떨어진 것이다. 영구적인 불임 가능성. 그리고 독실한 예수쟁이인 그녀……. 뇌리 속에서 수많은 경우의 수들이 굴러가고 있었다.

진료실을 뒤로하고 입원실로 되돌아오니 신애는 마침 깨어나 있었다. 주사를 놓아주며 회복이 생각보다 빠르다는 위로를 넣고 있는 간호사의 얼굴을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출입문에 기대 선 채, 핏기 없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만히 굽어보았다. 완전한 결별까지 각오했으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확실히 그녀는 일생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특별한 여자’임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불만은 없었다. 자식에 대해 그리 애틋한 쪽도 아니었다. 막연히 완벽한 가족의 표상으로서 자식도 인생 설계의 한 부분으로 여기긴 했으나, 반드시 자식을 가져야만 한다는 집착은 없었다. 오히려 가족이라는 굴레가 주는 책임감과 그에 따른 고통을 절절히 알고 있는 자신에게 있어, 가족은 적으면 적을수록 자신에겐 더 평화를 주는 존재인지도 몰랐다. 그랬다. 그러니 이 상황을 그저 운 없는 놈의 또 다른 저주라고만 한탄할 계제는 아닐 터였다. 오히려 그를 완벽하게 구해주고 정해진 운명을 따르라는 계시일 수도 있었다.

“……위야…….”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의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간밤에 두 번 깨어났을 때보다 훨씬 맑고 또렷해진 눈빛에 안도했다. 이제쯤은 ‘거래’가 가능할 시점 같았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순식간에 젖어드는 눈시울에 그저 드라이한 피로만을 느끼는 자신은 역시 괴물임에 틀림이 없었다. 입가에 흐릿하게 미소를 만들며 서글픈 표정을 짓는 가증 또한 자신이 괴물임을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이리라. IV 바늘이 꽂힌 손을 들어 올리며 자신을 찾는 그녀에게 속으론 지긋지긋해하면서도 단걸음에 달려가 품에 안아주는 가증 또한. 얼굴을 붉히며 방을 나가는 간호사가 부러운 시선을 줄 정도로, 애정이 넘치는 약혼자를 훌륭하게 연기하고 있는 가증은 또한 두말할 필요조차 없겠지.

“……괜찮아? 몸은 어때? 아직도 많이 아픈가?”

품 안에서 조용히 눈물만 뚝뚝 흘리던 그녀가 문득 몸을 굳히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허리를 껴안은 팔에도 힘이 더해지고 있었다. 까닭은 물론 알고 있었다. 이 또한 철저한 계산이었으므로.

“……처…… 처음이네…… 네가 내게 반말을 해주는 거…….”

“…….”

“……이제야 겨우 네가 진짜 내 거가 된 거 같은 기분이 들어. 웃기지?”

“처음부터 당신 거였어. 살갑지 못한 내 성격은 당신도 잘 알잖아. 결혼할 때까진 예의를 지키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이번에 알았지. 사랑이든 애정 표현이든 참으면 후회한다고.”

“……위야……!”

“……무서웠어, 신애 씨. 당신을 잃는 줄 알고 무서워서 미치는 줄 알았어.”

“……응…… 응, 위야. 미안…… 걱정시켜서 미안해…… 그리고 우리 샛별이…… 샛별이도…… 흑……!”

“쉬…… 그만…… 샛별이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자, 신애 씨…… 처음부터 우리 아가가 될 운명이 아니었던 게지. 샛별이도 하늘에서 제 엄마가 너무 슬퍼하는 건 바라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윽, 흑…… 웃, 위야…… 내가 바보였어…… 정말 바보였어……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우리 샛별이를 생각해서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어. 잘난 자존심만 챙기느라…… 그 사람이 만나자고 했을 때 그냥 거절했어야 하는 건데도…….”

“……신애 씨, 제발…… 이러면 안 돼. 회복이 더뎌질 거야. 내 속이 당신 걱정으로 시꺼멓게 타들어가는 걸 바라나?”

“위야…….”

입에 발린 가증스러운 언어들은 잘도 술술 흘러나왔다. 샛별이란 잃어버린 아이의 태명조차 그제야 기억에 떠올린 자신이었으니, 말해 무엇 할까. 뇌리 속으론 ‘언제 어느 때 거래를 시작해야 유리할까’로 주판알만 연신 튕겨대고 있는 주제에, 이미 경계 대상으로 치부된 그녀의 등을 열심히 쓰다듬으며 뺨과 정수리에는 거듭 다정한 립 키스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당신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신애 씨.”

“……부탁……?”

“……어젯밤에 서교동 외숙모님께 다시 전화를 드렸어. 아이 잃은 것도, 그 사람에게 납치됐던 것도 알리지 않았어. 지금 외삼촌댁에선 당신과 나, 여행 온 줄로만 아실거야.”

“…….”

예상대로 품 안의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더욱 상냥하게 보듬어 안으며 의지를 다졌다. 기왕에 저버린 양심에 몇 가지의 가증을 제한들 죄가 탕감되는 것도 아니리라. 품 안에 파묻혔던 신애의 고개가 들리며 시선이 마주쳤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름다운 눈시울엔 의문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선생님을 용서하기 힘들겠지?”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몸서리를 치는 여린 몸뚱이에 마음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끔찍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내 아이를 잃게 만들었는데 용서가 다 뭐야. 절대 용서 못 해. 대가를 치르게 만들 거야, 반드시.”

“…….”

“……사실은 무서웠어…… 수갑에 묶인 채 갇혔을 땐 정말 그대로 죽는 줄 알았어. 너도 다신 못 보는 줄 알았지. 근데 나중엔 화가 나더라? 내 앞에서 벌벌 떨며 널 가끔씩이라도 만나게 해달라고 비는 그 사람을 보니깐 겁낼 가치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우습기도 했어. 진짜 우습고 기가 다 막히더라니까. 1년에 몇 시간 정도만이라도 좋으니까 널 볼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거야. 불쌍한 짐승 하나 살린다 생각하고 그렇게 해달래.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니?”

“…….”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이 사람. 제정신이라면 이런 기가 막힌 부탁 같은 건 하지도 못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빠 생각도 났어. 그래, 이 사람도 우리 오빠처럼 미친 거지. 미쳤으니까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싶더라. 불쌍한 생각도 들었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샛별이를 잃게 만든 것까지 용서할 마음은 추호도 없어.”

“…….”

처음으로 가증이 쉽지 않다는 걸 절감하고 있었다. 가증은커녕 자신의 품 안에서 태연히 그를 비웃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를 진심으로 떠밀고 싶은 욕구로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인다면 그 이상의 카타르시스도 없을 것 같았다. 끔찍한 혐오감이었다.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다른 뜻으로 오해한 듯, 여자는 더욱더 자신의 품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때렸어…….”

쉰 목소리로 연기를 재개했다. 몇 번이나 긴 심호흡을 한 끝에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아무렴. 인내심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신이 아닌가.

“……참지 못하고 선생님을 몇 대 때리고 말았어. 만약 우리가 고소한다면 폭행죄로 맞고소가 들어올지도 몰라.”

신애의 몸이 움찔 하고 전율했다. 어차피 확인까진 못할 테니 상관없었다.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렸다고 좀 더 과장을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자신이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여자는 흡족해하리라. 그녀에 대한 자신의 애정이 증명되었다 여기면서.

“……어, 어쩌다가……! 좀 참지 그랬어, 위야. 법으로 해도 충분할 텐데…….”

“아니. 법으로 처리할 생각은 없어. 그래서 당신한테 부탁하는 거야. 선생님을 고발하는 건 날 생각해서 그만둬줬으면 해.”

“……그, 그건…….”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여기서 더 시끄러워지면 당신을 영영 잃게 될 거야. 그것만은 안 돼. 우리 샛별이를 잃게 만든 선생님이 죽이고 싶도록 밉지만, 당신마저 잃게 되면 난 정말 미치고 말 거야.”

“위야……!”

“좀 전에 담당 의사를 만났어.”

“……?”

“불임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 자궁 발육 부전이 꽤 심각한 상태라고 해. 다시 임신을 하고 무사히 출산을 하려면 지속적인 치료와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더군.”

“!!!!!”

“……진정해, 신애 씨. 울지 말고 내 말 더 들어봐. ……아무튼 이번에 유산한 직접적인 원인도 그 때문이라고 했어. 앞으로 임신하기도 힘들 테지만 임신을 하더라도 이번 같은 일들이 또 벌어질 수 있다는 거야.”

“……그…… 그런……!”

“……나는 말야, 적어도 두셋쯤은 내 아이를 원하고 있었어. 아마도 형제가 많은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더 그럴 거야. 강이 형이 죽었을 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당신한테도 얘기한 적 있지? 아무튼 부모님도 일찍 그렇게 되시고 해서 나는 가족에 대한 집착이 남다른 편이었지.”

“…….”

“……그런데 이번 일로 깨닫게 됐어. 내 아이에 대한 욕심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너라고.”

“…….”

“……당신만 온전히 내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난 앞으로 가지게 되리라 기대했던 내 아이들까지 기꺼이 포기할 용의가 있다고.”

“……위…… 위야……! 흑…… 윽…….”

“쉬…… 그만…… 제발 울지 말아줘, 신애 씨…… 당신이 계속 이러면 내 가슴도 찢어진다구…….”

“……웃, 윽…… 흐읍…… 위…….”

“……신애 씨, 그래서 부탁을 하는 거야. 선생님을 경찰에 넘기면 어떤 식으로든 이번 추문은 세상에 알려지게 돼 있어. 장인 장모님께서 아시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당신 곁에 머무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해질 거야. 남창질을 한 것도 끔찍하실 텐데 그 옛 고객에게 당신이 납치돼서 유산까지 했다고 그래봐. 세상에 어떤 부모가 그따위 사윗감을 용서해주시겠나. 가뜩이나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가난뱅이 청년 가장 주제에 말이지. 결혼하기도 전에 임신부터 시킨 후레자식이기까지 하니 그런 나를 받아들이시기로 한 건 그만큼 딸인 당신을 믿어서기도 하신 거겠지만…… 호모에게 남창질을 한 것만은 아무리 그분들이라도 절대 용서 못 하실 거야.”

“……위야…….”

“……선생님을 용서해줘, 신애 씨. 선생님을 위해서가 아니야.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줘. 아니, 우리를 위해서.”

“…….”

“……의사가 그러더군. 애초부터 임신한 게 기적 같은 일이었다나. 그러니 앞으로도 또 기적이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 거라고.”

“…….”

“……난 당신처럼 독실한 신앙은 없어. 하지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에게 간절히 기도해볼 생각이야. 죽어도 용서 못 할 것 같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선생님을 용서하도록 노력해볼 생각이라고. 그러니 부디 자비를 내려달라고. 혹시 알아? 신이 이런 나를 대견하게 여겨서 우리한테 또 예쁜 아가를 선물해주실지?”

“……욱……! 흑…… 위야…… 흑…… 윽…… 아아…….”

“……그래도 도저히 용서 못 할 것 같으면 달리 방법을 알아볼게. 당신을 지키면서도 샛별이 복수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하느님이 용서할 줄 모르는 나를 벌하신다면 그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말했다시피 미래의 내 아이쯤은 당신을 위해선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으니까.”

“……위야…….”

“……혼자 겁에 질려 떨었을 당신을 생각하면 정말 치가 떨려. 샛별이 잃으면서 고통을 당할 때에도 당신 혼자 있게 해서 정말 미안해, 신애 씨. 아니, 실은 이런 일이 일어나게끔 한 내 과거가…… 남창 짓을 한 추악한 과거가 너무나 미안해.”

“……그…… 런 가슴 아픈 말 하지 마, 위야…… 추악하지 않아…… 넌 절대로 추악하지 않아…… 동생들을 위해서였잖아…… 그건 숭고한 희생이지, 추악한 짓이 절대 아니야…….”

“…….”

“……노력해볼게, 위야. 아깐 너무 화가 나서 용서 못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신실한 크리스천으로서 도리가 아니란 것도 알아. 내게 영구 불임의 가능성까지 있다는 게 하나님께서 주신 시련이고 시험인 거면 이번 일도 그런 거겠지. 예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라’까진 흉내 낼 재목은 못 되지만 ‘용서’를 하려는 노력조차 안 한다면 크리스천으로선 실격일 거야. 해볼게, 위야. 진짜로 혹시 알아? 주님께서 이런 우리를 예쁘게 봐주시고 또 기적을 내려주실지.”

막 신과 거래를 튼 신애를 무심히 내려다보며 웃었다. 부러 눈시울을 적셔 감동에 겨운 척했다. 아니, 실은 감동에 겨운 웃음이기도 했다(종류가 다른 감동이긴 했지만). 과연 대단한 여자였다. 대단한 위선이었다.

“……사랑해…….”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자신 또한 위선을 보탰다.

“……사랑해, 신애 씨. 당신을 사랑하게 돼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었다.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면, 만약 신애가 자신의 소중한 연인처럼 천하의 순둥이에 위선 따위를 부릴 줄 모르는 여자였다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양심의 가책에 괴로웠을 것이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닌가. 자신과 이리도 똑같은 바탕을 타고났다니. 역시 운명이었다. 생을 함께할 운명의 반려다웠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름다운 눈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키스를 기대하는 눈길이었다. 기꺼이 입술을 내렸다. 여느 때 같으면 떨떠름함을 감추며 마지못해 입을 맞췄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여자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고마웠다. 대견했다. 어찌 고맙고 대견하지 않으랴. 자신의 계산 그대로 술술 따라와주니 고맙고, 신과도 거래를 틀 수 있는 이 배짱과 이기심은 또 어떤가. 양심 따위 애저녁에 말아먹은 괴물의 아내로서 이 여자보다 나은 상대가 있으면 어디 나와보란 말이지.

“……우리 정말로 여행 가자, 위야.”

입술을 떼자 숨을 헐떡이며 신애가 중얼거렸다. 남창의 테크닉을 현란하게 발휘한 키스 덕분에 그녀의 눈엔 나른한 쾌락이 들어차 있었다. 아이를 잃은 예비 엄마의 슬픔이란 더 이상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역시 자신과 한가지일 여자였다. 오로지 사랑하는 상대밖에 의식에 없는 전일하고도 맹목적인 애정.

“……여행?”

“응, 외숙모님께 그랬다며? 우리 여행 중이라고. 그 말 들으니까 생각이 났어. 진짜 그동안 우리 단둘이서 여행해본 적 한 번도 없잖아. 결혼 전에 꼭 한 번쯤은 어디든 가보고 싶었거든. 가서 사진도 많이 찍고 예쁜 추억도 만들고 싶었는데 샛별이 때문에 포기했었잖아. 너도 공부하느라 바쁘고…….”

그녀의 눈에 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재빨리 혀로 눈물을 핥아주며 악마의 유혹을 펼쳤다.

“어디 가고 싶은데? 말만 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결혼식도 내년으로 연기하고 천천히 여유를 갖자. 데이트도 실컷 하고.”

“……응, 진짜 데이트도 별로 못 했네, 그러고 보니…….”

쪽 하고 이마에 립 키스를 떨어뜨린 후 그녀가 좋아해 마지않는 미소까지 만들어주었다. 끝이 보였다. 칼끝처럼 긴장해 있던 정신이 느슨하게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모자란 잠까지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 됐어. 이제 됐어. 이제 그는 안전해…….

“……일단은 당신 몸부터 추스르는 게 우선이니까, 건강해지면 떠나는 걸로 하자. 나도 곧 겨울방학이니 시간은 충분히 낼 수 있을 거야. 어디든 당신 가고 싶은 대로 말해. 데려가줄게.”

“……바다…… 바다 가자, 우리…….”

“바다?”

“응, 따뜻한 바다. 카리브해나 몰디브도 좋고…….”

“해외로?”

“응, 싫어?”

“싫긴. 나야 더 좋지. 당신 덕분에 처음으로 해외여행도 해보는 건데.”

“…….”

“……왜? 왜 그렇게 보는 거지?”

“……또 반해서.”

“?”

“……있잖아, 위야. 내가 널 사랑하는 이유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너무너무 많지만 말이지, 지금처럼 자신만만한 네가 내 눈엔 다른 어떤 네 모습보다도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 아니?”

“자신만만해?”

“응. 다른 남자애들은 다 하나같이 내 앞에서 쩔쩔매기만 했거든. 처음엔 안 그러던 애들도 시간이 지나서 우리 집안에 대해 알게 되면 하나같이 그렇게 변하더라구. 근데 넌 아니었어. 비굴해지기는커녕 나나 우리 집안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었지. 그게 처음엔 얼마나 자존심 상하던지…….”

“……그…… 랬나……?”

점점 더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하품도 참기가 힘들어서 슬며시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지독한 가난뱅이라면서 뭐가 저렇게 도도한가 싶었구…… 자격지심 때문에 그런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더라? 사실은 본인 자체가 너무 잘나고 잘나서 그저 세상사에 무심한 것뿐이란 걸 알았지. 진짜 ‘폐하’라는 별명이 딱이구나 싶었어. 황제 폐하의 세상에 걸리는 게 있을 턱이 없지.”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더는 무리하면 안 되니 그만 누워, 신애 씨.”

눈을 붙이려면 그녀부터 재워야 했기에 품 안의 그녀를 슬쩍 침대로 밀어붙였다. 서운해하는 눈치가 보였지만 더 이상은 자신이 무리였다. 졸음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고, 그녀의 체취도 너무 오래 맡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마지못해 침대에 누운 그녀는 잡은 자신의 오른손만은 놓지 않았다. 짜증스러웠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침대 가에 엉덩이만 걸친 자세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마무리 서비스에 최선을 다했다.

“……왕자님이 요즘 세상에도 진짜 있긴 있구나 싶었어. 아니, 왕인가?”

“영국에도 있지 않나? 일본에도 있고. 또 달리 몇 나라쯤…….”

“후후, 그런 왕자님들 말고, 진짜 왕자님 말야. 진짜 강하고 영리하고 오만하고 카리스마 짱인 왕자님. 바로 내 위야 같은 왕자님이지.”

“나는 시종이나 하고픈데, 거참 안됐군.”

“……?”

“신애 씨 같은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수발을 드는 충직한 시종 말야. 결혼하게 되면 꽤나 실망할지도 모르겠어, 신애 씨. 그간의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고 말 테니.”

“…….”

감격했는지 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드는 게 보였다. 별이 잔뜩 들어앉은 눈동자가 황홀한 기색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좀 이제 그만 자라. 목울대까지 치밀고 있는 짜증을 슬며시 찍어 누르며 다시 그녀에게 입술을 내렸다. 촉촉하고 따스한 감촉을 마지못해 빨아들이자 다른 입술의 감촉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싸늘하게 식은 채 바들바들 떨리고 있던 입술이었다. 지끈 하고 심장이 울었다. 트럭처럼 밀려들던 졸음이 순식간에 날아가고 있었다. 형식적인 립 키스가 잡아먹을 것 같은 딥 키스로 변한 것도 순간이었다. 동시에 불쑥 발기한 성기 역시 까마득한 추락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녀의 입술을 난폭하게 유린했다. 기꺼이 마주 열기를 보내오는 여자를 마음껏 희롱한 뒤 입술을 뗐다. 처참한 심사와는 달리 그녀에게 쑥스러운 웃음을 싱긋 보여주었다. 연기는 계속돼야만 했다. 괴물과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이니 이 정도쯤의 고뇌는 가뿐히 무시해줄 필요가 있었다. 손가락으로 잔뜩 발기한 사타구니를 가리키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기적거리는 꼴사나운 걸음으로 침대 가를 벗어나 입원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섰다. 몇 번이나 욕실 벽을 세차게 때리며 스스로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무너지고 있었다. 와르르, 와르르, 지난 몇 달간 공들여 쌓아온 성벽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도무지 막을 방도가 없는 것 같아 더 절망스러웠다.

바지 지퍼를 내리고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메우는 사랑스러운 이목구비에 피식 실소를 물었다. 우스웠다.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유산한 약혼녀는 문 밖에서 약혼자의 발정에 수줍어하고 있고, 발정한 약혼자는 다른 남자를 떠올리며 수음하고 있었다. 개 같은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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