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 1993년 12월. 장인환(張仁歡) (93/129)

51. 1993년 12월. 장인환(張仁歡)

정신병동 중환자실에 격리된 지 49일 만의 퇴원이었다. 

대로한 엄마의 특단의 조치였던 셈이었다. 정신병은 아니라고, 우울증조차 굳이 입원을 할 정도의 중증도 아니라는 의사의 만류가 있었지만 엄마는 그 객관적인 조언조차 듣지 않았다. 여자를 납치해 협박하는 놈이 미친 게 아니면 세상에 어느 누가 미친 거냐며 울부짖는 엄마에게, 인환은 자진해서 입원하겠노라는 말로 엄마를 더 울렸었다.

벌을 받을 필요는 충분히 있었다. 납치는 물론 태아 살인만으로도 감옥에 가고 남을 일이었으니, 엄마의 입원 요구가 원망스러울 까닭이 없었다. 솔직히 연인의 만류가 없었더라면 연인과 재회한 그다음 날로 경찰에 가 자수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이 도리어 연인에게 피해를 줄 뿐이란 사실을 깨닫고 방향을 수정하긴 했지만, 스스로를 처벌해야만 한다는 강박은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강제로 입원을 시키겠다는 엄마의 말이 내심 반가웠다고 하면 위선일까? 그러나 진심이었다. 그렇게라도 속죄를 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연인에게…….

연인과 그녀의 묵인으로 감옥 갈 일은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용서를 받았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설령 용서를 받은 게 사실이라고 해도 인환 자신이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임산부에겐 말 한 마디 하는 것조차도 조심해야 한다는 상식을 인환은 미처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런 커다란 죄업으로 되돌아올 것도 또한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예상치 못하고 의도하지 않은 일이라 해서 면죄부가 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벌은 받아야 한다. 그게 어떤 형태가 됐든. 그래야 연인에게 다시 다가갈 수 있을 터였다. 다가갈 염치라도 생길 터였다.

자수도 못 하고, 감옥에도 갈 수 없고, 그렇다고 그녀에게 석고대죄도 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엄마의 명령이야말로 그 좋은 수단이 돼주었음은 물론이었다. 엄마가 있으라고 할 때까지 얌전히 갇혀 있을 작정이었다. 그게 한 달이 됐든 6개월이 됐든, 혹은 1년이 됐든. 그러나 엄마의 인내심은(아니, 아들에 대한 끔찍한 모성은) 단 두 달도 채 가지 못했다. 중증의 정신분열증과 망상증, 그리고 온갖 환시와 환청, 강박, 히스테리 등등에 시달리는 중증 정신병 환자들과 같은 방 안에서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시점이었다. 우울증 치료약을 복용하고 있어 몸은 나날이 더 말라갔고, 치매성 정신분열 환자가 자신의 몸에 물감을 바르고 있는 걸 그저 멍하니 들여다보며 방치하고 있던 장면을 면회 온 엄마가 발견한 것이다. 더 미치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가 엄마를 사로잡았음은 물론이었다. 어쩌면 엄마는 정확히 자신을 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한 달이 넘게 미친 인간들과 생활하다 보니 점차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었다. 그 상태로 더 시간이 지나갔다면 자신은 정말로 그들과 똑같아졌을 수도 있었다. 아니, 이미 똑같아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게 아득하고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세피아 톤으로 뿌옇게 막이 씌워진 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을 현실과 이어주고 있는 유일한 존재라면 당연히 연인뿐이었다. 어릿광대처럼 슬프고 가련하기만 한 환자들의 모습을 멍하니 들여다보면서 자신은 머릿속으로 늘 연인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건 노력을 해서도 아니었고, 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고 해서 막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연인의 얼굴, 연인의 몸, 연인의 웃음, 연인의 눈물, 연인의 분노, 그리고 연인과의 수많은 추억들……. 햇수로 5년이나 되는 연인과의 기나긴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는 늘 언제나 마지막 만남의 장면이 있었다. 지방 소도시의 산부인과 병원 한구석, 형태조차 잘 분간이 안 가는 어둠 가운데 나누었던 믿기 힘든 교감. 불처럼 열정적인 키스와 애무와 페팅 섹스의 장면이었다. 심장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며 급기야는 (우울증 약이 아니었다면) 발기마저 하고 말았을, 급격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기억이었다. 온몸을 전율시킬 정도로 행복한 기억의 끝은 또한 이상야릇한 의심이었다. ……왜 그랬을까? 연인은 왜 그때 자신에게 키스를 했던 걸까? 왜 그때 섹스까지 해야만 했던 걸까? 자위에 불과했다고?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 그건 분명히 섹스였다. 의심의 여지조차 없는, 욕망과 흥분과 열기로 가득 차 있던 쾌락의 섹스. 지난 몇 달 동안 완전히 단절돼버렸다고 여긴, 과거의 한때 다정했던 친구이자 남창으로서의 연인이 다시금 오롯이 되살아났다.

단지 욕구 불만이었나?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성욕이 발동한 것뿐인가? 아니면 혹시, 혹시라도 자신을 조금쯤은 좋아하는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으니 패스. 혹시라도 자신에게 여전히 조금쯤은 욕망을 느끼는 게 아닐까? 5년이나 몸을 섞은 사이이니 습관상 약간의 정욕은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리고 정말로 자신에게 정욕이 남아 있다면, 가끔씩이라도 좋으니 만나달라는 부탁도 들어줄지 모르지 않는가. 남자는 허리하학적인 동물이기도 하니까, 사랑은 그녀에게 몽땅 다 주었더라도 섹스만큼은 원나잇 스탠드도 가능한 게 아닌가? 희망적인 망상 또한 꼬리를 물었다. 섹스에 있어서만큼은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까다로운 이가 연인이었다. 남창 일을 할 때도 위생 관념이라든가 관계할 고객 선정이라든가, 관계의 주기까지도 꽤나 철저하게 통제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연인이 무턱대고 섹스까지 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희망을 가져도 될까?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자문을 던졌다. 그녀에게 부탁했던 대로 석 달에 한 번, 혹은 6개월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만나달라고 하면 만나주지 않을까? 그리고 정말로 만약이지만, 원나잇을 해달라고 하면 혹시 받아주지 않을까? 한 번을 했는데 두 번이라고 못 하란 법도 없지 않은가? 삽입 섹스가 그녀에 대한 죄책감이나 기타 등등의 문제로 찝찝하다면, 그날 밤처럼 페팅 섹스만 해도 자신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을 텐데! 아아, 그래. 그럼 자신은 다시 살아갈 수가 있다.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그녀를 발견한 순간부터 진심으로 콱 죽어버릴 생각이었는데, 다시 살아갈 만한 용기가 생긴다.

그녀에겐 다른 엉큼한 속내 따윈 없다고, 연인으로서 욕심 부릴 생각 따위 절대 없다고 했지만, 그저 플라토닉하게 만나게만 해달라고 빌었지만, 사람 욕심이란 게 어디 그런가. 참으로 이기적이고 치사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연인의 딸을 죽여버린 짐승이면 어떤가. 그러고도 연인을 여전히 탐내는 파렴치한 괴물인들 어떤가. 그를 다시 가질 수만 있다면 자신은 얼마든지 짐승이 될 수 있었다. 괴물이 될 수 있었다. 어차피 콱 죽어버리려 작정한 미친놈이 아닌가. 더 이상 떨어질 나락도 없었다. 전혀 상상조차 못 했던 기적이 일어났는데, ‘양심 따위 맘씨 좋은 천사들이나 가져라!’인 배짱일 터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저 사랑에 미친 놈의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실은 거의 그럴 확률이 높다는 걸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었다. 연인이 그날 밤 어째서 자신과 섹스를 했는지 그 정확한 이유까지야 짐작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연인과 자신의 사이에 어떤 종류의 희망이 남아 있으리라 기대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놈의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눈앞에 보이는 중증의 정신병자들처럼 자신도 거의 미쳐가는 게 맞다는 것을. 그럼에도 자신은 그 미친 희망을 끝끝내 저버릴 수가 없었다.

연옥 같은 폐쇄 공간에서 49일 내내 고통스러운 수감 생활을 하며 늘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었다. 연인을 생각하고, 연인과의 섹스를 떠올리고, 결코 오지 않을 연인과의 미래를 떠올렸다. 하루는 희망을 세우고, 다음 하루는 희망을 부쉈다. 그리고 그다음 하루엔 또 근사한 희망을 지어 올리길 반복했다. 그렇게 미쳐가고 있었다.

“뭐해, 어서 옷 갈아입지 않고!!!”

히스테릭한 엄마의 고성이 미친놈의 의식을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눈물범벅인 엄마가 침대 위로 자신의 코트를 내팽개치는 게 보였다. 원무과로 가 퇴원 수속을 마치고 온 엄마는 눈물만 철철 흘리다간, 모른 척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만 있는 자신을 향해 옷까지 집어 던진 것이다. 인환을 향해선 생전 험한 말 한 번 않던 새색시 같은 엄마였는데, 요즘은 진짜 시장바닥에서 드잡이를 하는 아낙네가 따로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 두어 달 사이 갑자기 늙은 것처럼도 보였다. 하긴…… 엄마의 유일한 사랑이자 꿈이었던 아들이 호모인데다 짝사랑에 미쳐 스토커 짓에 납치 범죄까지 저지르고 다니니, 엄마로선 늙을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일 것이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엄마의 관자놀이에 늘어난 흰머리라든가 눈가의 잔주름 하나에도 가슴이 아렸겠지만, 지금은 그저 ‘늙었구나’ 하는 무심한 판단만 뇌리를 스쳐갈 뿐이었다. 창백한 안색이나 말라서 초췌한 이목구비에도 아무런 동요가 일지 않았다. 후레자식이 되어가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미 후레자식일 거였다. 아무렴. 저 불쌍한 엄마를 두고 죽을 생각까지 했고, 또 여전히 하고 있는데 말 다 했지.

치매성 분열증 환자가 더럽힌 환자복을 벗고 엄마가 던져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막상 옷을 갈아입고 나니 그저 막연하기만 했던 퇴원에의 실감이 났다. 49일이 실제로는 490일인지, 혹은 4900일이었는지조차 잘 모르겠는 연옥의 시간이었다. 좀 더 수감 생활을 해야 떳떳해질 텐데 하는 마음이 반, 그래도 이렇게 나가게 돼서 기쁜 것 같은 마음이 반이었다. 물론, 기쁜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연인을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것. 그동안 끊임없이 키워온 미친 희망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철없이 설레는 심장에 비로소 퇴원을 한다는 실감이 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엄마를 따라 나가니 낯선 얼굴의 사내 하나가 입원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건장한 덩치 하며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보아하니 경호원인 모양이었다. 아니, 감시인이다. 미친 아들이 더 이상 미친 짓을 못 하게끔 엄마는 또 다른 족쇄를 준비해둔 것이다. 혹시라도 연인을 만나는 데 제동이 걸릴까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엄마가 현재의 자신을 아는 것은 자신이 엄마의 현재를 아는 것에 훨씬 못 미쳤기 때문이었다. 미쳐버린 호모 후레자식이 순진한 엄마를 요리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병원 현관문을 나서자 매서운 칼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달려들었다. 영하 10도나 된다고 하니 엄청난 추위였다. 한 달이 넘게 실내에만 갇혀 있다 나온 터라 추위조차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닷새 앞둔 날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연인을 만날 수 있다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브로 하자. 혼자 연인과의 데이트 계획도 세웠다. 그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계획인가는 역시 의식에 없었다. 반드시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야 했다. 그를 방해하는 거라면 뭐든 다 부숴버릴 거였다. 그랬다. 중환자 병동에서 난동을 부리던 전직 교수라는 김 씨 아저씨처럼 해버릴 요량도 있었다. 김 씨 아저씨가 난동을 부리면 아무도 못 말렸다. 머리 좋은 김 씨 아저씨는 어디서 났는지 흉기를 잘도 감춰두곤 했었다. 평소엔 너무나 얌전하고 천사처럼 해맑다가도 마귀가 들리면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대며 자해를 하곤 했었다. 그러면 다들 꼼짝을 못 했다. 유능한 간호사들도, 영리한 의사들도 그저 허둥거리기 바빴다. 그때의 김 씨 아저씨야말로 병동의 지배자였다. 왕이었다. 자신도 할 수 있었다. 벤치마킹 하나는 철저히 했으니 못 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콱 죽어버릴 거였다. 정성껏 씨줄과 날줄을 엮어 짠 희망이 역시 그저 희망에 불과했다고 판명이 나버린다면 자신은 그길로 깨끗이 죽어버릴 거였다. 연인 없인 살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겨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연인이 없으면 자신은 그저 짐승으로 전락하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를 납치해 태아를 살해한 걸로 확실히 자각을 했다. 연인이 사라진 자신은 그저 짐승이자 괴물에 불과하다는 걸.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연인을 사랑한 ‘사람’인 채로 깨끗이 사라지고 싶었다. 하긴 이미 손에 피를 묻힌 괴물이니, 완전히 깨끗한 채로 사라질 수도 없어졌지만.

“어서 차에 타지 않고 뭘 하니!!!”

엄마의 악다구니가 또 들렸다. 엄마까지 괴물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설핏 의심이 스쳐갔다.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바람에 몇 번 크게 눈꺼풀을 깜빡여야만 했다. 엄마라도 온전한 사람으로 보호하려면 역시 미친 후레자식은 하루속히 사라져야 할 것 같았다.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버린 손으로 차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들어가 앉으니 운전석에 앉아 있던 오 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로 눈인사를 하는 게 보였다. 동정이 가득 담긴, 그러나 괴물을 보는 시선이었다. 한 가족처럼 지낸 오 기사 아저씨조차 자신을 괴물로 보는 걸 보니, 확실히 자신은 이미 가망이 없다 싶은 판단이 더해졌다. 옆자리에 낯선 덩치의 감시인 사내까지 올라타고 나자 차가 출발했다. 목적지는 평창동이었다.

“성북동 화실은 내놨다.”

앞에서 불쑥 날아온 엄마의 냉기였다.

“사겠다는 사람 나오면 헐값에라도 넘길 생각이야. 터가 안 좋다는 소리도 들었다. 재수 없는 집이래.”

그새 점까지 본 모양이었다. 하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엄마일 거였다. 불쌍한 울 엄마.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울 엄마……. 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미친 병 고치기 전엔 그림도 제대로 못 그릴 테니 일단 내놓기로 했어. 병 고치더라도 엄마가 허락할 때까진 평창동에서 지낼 생각 해. 카드도 다 막아놓았으니 그리 알고. 앞으로 돈 쓸 일 있으면 사용처 말하고 그때그때 엄마한테 용돈 타서 쓰도록. 옆에 앉은 최 군하고 인사해. 앞으로 네가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다닐 친구니까. 필요한 돈도 최 군에게나 줄 거야. 미친병 낫기 전까진 남의 집 귀한 아가씨 납치하는 데나 쓸 테니 다 자업자득이라 생각해, 아들.”

대답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림에도 더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다만 안타까울 뿐이었다. 연인과의 5년이 깃든 공간이었다. 먼지 하나에도 연인과의 추억이 서린 그곳을 낯선 타인에게 넘겨줘야만 한다는 현실이 슬펐다. 하긴, 자신이 사라져버리면 어차피 남의 손에 넘어갈 공간이었다. 이 안타까움조차 부질없는 미련일 것이다. 아프고 시리기만 한 겨울이었다.

“……위야…… 니……?”

숨소리조차 전해지지 않는 전화기임에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 너머, 전화를 받고 있는 이는 분명 연인이었다. 대여섯 번인가의 신호가 간 끝에 마지못해 들렸을 수화기 너머로부턴 ‘여보세요?’라는 습관적인 확인조차 없었다. 받자마자 인환 자신이라는 걸 알았을까? 아니, 벨이 울리자마자 안 걸까? 신기했다. 연인은 가끔 이렇게 자신이 건 걸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었다. 마치 지금 연인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도 연인인 것을 아는 자신처럼.

평창동 집에 도착한 첫날엔 정상인처럼 얌전히 굴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한바탕 쏟아진 엄마의 하소연 겸 잔소리도 함께 눈물을 흘려주며 경청하고, 김천댁 아줌마가 정성껏 준비한 점심밥도 제법 맛있는 것처럼 먹어치웠다. 독립하기 전 화실로 쓰던 손님방으로 와서 화구를 손에 잡고 그림을 그리는 흉내도 냈다. 집 안 곳곳이 감시의 눈길 천지여서 단 한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척한 지 두어 시간쯤이 지나고 나서야 엄마는 그럭저럭 감시의 눈길을 거두고 있었다. 저녁 식사 전까지도 내내 그림을 그렸다. 전혀 의미 없는 붓질이었지만 어차피 엄마는 알 수도 없었다. 3분의 1쯤 열어둔 문틈을 통해 엄마가 수시로 훔쳐본다는 걸 알기에, 최대한 열정적으로 그리는 척을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엔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었다. 오주희에게도 걸고, 기하 선배에게도 걸고, 선 화랑 동료들은 물론, 안면이 있는 미술 잡지 기자에게도 걸었다. 지난번 인터뷰 기사 잘 봤다는 소리를 필두로 엄마가 잘 알아듣지도 못할 전문 용어를 써가며 제법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신진 화가를 연기했다. 그런 자신들을 안 보는 척하면서 훔쳐보는 엄마의 표정은 점점 더 편안하게 변하고 있었다. 다음 날 점심때까지 돌아온 탕아 역을 훌륭히 연기한 덕분이었을까, 엄마가 드디어 외출을 했다. 정확히는 엄마의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김천댁 아줌마와 낯선 감시자 사내에게 잘 감시하라는 언질을 주었겠지만 화실 방에서 작업 끝에 이루어지는 한가로운 전화 통화들까지는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지극히 정상인처럼 연기했기에 간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미심쩍은 감시의 눈길을 보내는 김천댁 아줌마나 자신에 대해선 피상적인 지식밖에 없을 경호원 사내 또한 감시는 하면서도 애초의 긴장과 경계심은 어느 정도 느긋하게 풀어졌을 것이다. 화실도 팔려고 내놓은데다 카드까지 막히고, 설상가상 애마인 BMW조차 엄마 사무실로 납치가 돼 있었다. 그야말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을 저들도 모를 턱이 없었다. 결국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연인을 알고 있는 김천댁 아줌마가 잠깐 장을 본다며 나갔고, 심심했는지 낯선 사내마저 거실에서 TV를 보기 시작했다.

오래된 고등학교 동창과 통화를 하다가 서둘러 끊고, 완전히 뇌리에 각인돼 있던 전화번호를 눌렀다.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긴 했으되 무섭진 않았다. 50일 만에 찾아온 너무나 귀한 기회라 무서워할 여유조차 없었다. 간절함이 극에 달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걸까? 하긴 어쩐지 연인이 받을 것 같은 선명한 예감이 들긴 했었다. 방학 때면 더 바쁜 연인이 집에 없을 수도 있고, 설령 있다고 한들 혜윤이나 휘야가 받을 확률도 매우 높았으니 근거 없는 예감임엔 분명했지만, 연인의 목소리를 들으리라는 믿음 또한 신호음이 거듭될수록 확고해지기만 했다. 결국 통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나고, 수화기 저 너머에선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위야지……?”

[…….]

“……위야…….”

[…….]

“……위야…….”

[…….]

“……위야, 제발…… 제발 말을 해줘…… 모…… 목소리 좀…… 네 목소리…….”

[…….]

“……제…… 제발…… 오래 통화 못 해, 위야…… 나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안 돼서…… 엄마 감시가 무척 심하거든…… 그니깐…… 다, 단 한 마디만이라도 좋으니깐…….”

[…….]

“…….”

[…….]

“……안 돼? 저…… 정말 안 되겠니……?”

[…….]

“……그, 그렇구나…… 하긴 아직 화 안 풀렸을 거야……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쉽게 용서가 안 될 테지, 뭐…… 나도 잘 알아, 위야…….”

[…….]

“……그래서 나두 벌 받으려고 병원에 들어간 거거든…… 네가 경찰에 고발을 못 하니깐 달리 날 벌할 방법이 안 떠올라서…… 마침 엄마가 강제로라도 집어넣을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냥 제 발로 들어갔어. 엄마가 나오랄 때까지 몇 달이든 계속 있으려구 했는데, 어제 엄마가 또 강제로 끌어내는 바람에…… 더 오래 있으려고 했는데 그냥 나오게 됐어…… 미안…….”

[…….]

“……그…… 그래도 나오니까, 좋다…… 더 오래 있었으면 진짜 미쳐버렸을지도 몰라. 거기 사람들…… 불쌍하긴 해도 참 자유로워 보였거든…… 나도 그렇게 자유로워지고 싶은 생각이 종종 들 정도로…… 근데 그럼 진짜 미치는 거잖니…… 그럼 너도 다신 못 만나게 되는 거잖아. 그건 싫더라…… 그래서…… 미치고 싶단 생각은 안 하게 됐는데…… 계속 그 사람들이랑 놀다간 싫어도 미칠 것 같더라구…… 암튼 나오니까 진짜 좋다…… 진짜…… 너한테 이렇게 전화도 할 수 있고…… 목소리까지 들음 정말 더 신이 나겠지만…… 아, 아직 나도 염치가 없으니깐…….”

[…….]

“……어제 나오다 보니깐 길거리에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이 많이 보이더라. 캐럴도 많이 들리고…… 크리스마스가 코앞인 것도 첨 알았어……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아니, 상상해봤거든……? 너랑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서 데이트 하는 거…….”

[…….]

“……헤헤, 알아. 진짜 얼토당토않은 소리지? 언감…… 감히…… 감히…… 넌 신애 씨 건데…… 잘 아는데…….”

목소리를 듣는 것은 이미 완전히 포기한 자신이었다. 그저 끊지 않고 들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거실에서 TV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는 낯선 사내의 음성과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김천댁 아줌마의 기척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스스로가 새삼 비참해졌던 건지도 몰랐다. 아니, 실은 점점 더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것만 같은 헛된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49일 내내, 중증 미치광이들의 기상천외하고 서글픈 발광들을 지켜보면서도, 자신도 그들 따라 반쯤은 미쳐가면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못한 채 짜고 또 짠 희망의 실타래였다. 그것이 맥없이 풀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저 헛된 희망에 불과했노라고, 거듭거듭 속살거리고 있는 내면의 악마 때문이었다. 이렇게 목이 메는 건. 눈물을 참을 수 없는 까닭은.

“……왜…… 왜 그때…… 그…… 그때 나한테 키스 했어……?”

[…….]

“……왜 섹스 한 거니…… 그때…….”

[…….]

“……하, 한 마디만 해줄 수 없니? 네 목소리…… 너무너무 그리운 네 목소리…… 나한테 키스했잖아…… 섹스 한 거잖아…… 응? 위야…… 그니깐 나 많이 미워하는 거는 아니지? 그치……?”

[…….]

“……내 걱정도 해줬잖아…… 그치? 죽지 말라고 말해줬잖아…… 키스…… 키스도 하고…… 안아주고…… 그니깐…… 알아, 나 미친 거 같지? 정신병원에 갇히더니 따라서 미친 거 같지 않니?”

[…….]

“……나도 정말 헷갈려…… 그래서 그래, 위야……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왜 네가 내 것이 아닌지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 이상하지? 참 이상하지……? 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것인 적이 없었는데, 참 이상하지? ……자꾸만 맘이 이리저리 널을 뛰는 거야…… 네가 자꾸만 내 거 같애…… 신애 씨가 아니라 내 건 거 같애…… 나 미쳤지……? 진짜 미친 거 같지, 위야……?”

[…….]

“……미친 소리 하나만 더 할까? 있지, 위야…… 나 병원에서 그런 상상도 했다? 너한테 가끔 만나서 원나잇 같은 거 하자고 하면 네가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그날 밤에도 했으니까 다른 날에도 또 못 할 건 없지 않나 하고…….”

[…….]

“……진짜야…… 49일 동안 낮이나 밤이나 네 생각만 했거든? 그날 밤에 키스 한 거랑, 섹스 한 거랑, 모두 다 계속 되돌리고, 되돌리고 그랬거든……? 근데 그러다 보니까 네가 꼭 나랑 하는 걸 아직도 괜찮아하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꼭 네가 내 거였었던 거 같은 착각이 드는 거야…… 나랑 하는 것도 참 좋아하고…… 나도 많이 좋아해주고…… 꼭 그랬던 것만 같은 거야…… 진짜 제정신이 아니지? 고작 키스 한 번 했다고…… 섹스 비슷한 거 한 번 했다고…… 너무 화가 나서 잠깐 흥분했던 건지도 모르는데…… 막 이런저런 과대망상이 막…… 막…….”

[…….]

“……이상하지, 위야? 어떻게 이런 얼토당토않은 상상이 되는 걸까? ……나도 내가 이상해…… 이상해서 진짜 머리가 돌아버리는 거 같애…… 병원의 그 사람들을 따라서 진짜로 미쳐버린 걸까……? 하하, 아니지…… 그전에 벌써 미친 걸지도 모르겠구나…… 사람을 납치하고 죄 없는 아가까지 죽였는데 온전한 정신일 리가 없지…… 그 사람들이나 나나 막…… 막…….”

[…….]

“……한 마디…… 하…… 한 마디만 해줄래, 위야? ……응? 딱 한 마디만…… 한 마디만 해주면 그대로 믿을게…… 나 진짜로 미친 거 같니……? 그래……?”

[…….]

“……위야…….”

[…….]

“……제발…… 위위……!”

[…….]

“……위야…… 아…….”

찰칵……! 뚜, 뚜, 뚜, 뚜, 뚜…….

커튼이 쳐지듯 새까만 단절이 떨어졌다. 거듭 되풀이되는 수화기의 전자음 소리가 뇌신경을 부수는 망치 소리처럼 들렸다. 단 한 마디만 해달라고? 그러면 믿겠다고? 헛소리. 그건 도박이었다. 스스로에게 건 필사적이면서도 간절한 주문이기도 했다. 연인이 단 한 마디만이라도 해준다면, 고통스러워도 버티며 자신의 ‘희망’을 끝까지 붙잡아보겠노라는. 만약 그대로 무시한다면 역시 헛된 도로(徒勞)에 불과하리라는 걸 깨끗이 인정하겠노라고. 물론, 끝끝내 숨소리 한 번 들려주지 않은 채 전화는 끊기고 말았다. ‘희망’의 패배였다. 미치광이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역시 미치광이 병이 전염된 것뿐이었구나. 비로소 인정한 어느 얼간이였다. 사랑병에 환장한 미치광이였다.

현관문 소리가 났다. 김천댁 아줌마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고 비칠비칠 이젤 앞으로 갔다. 새카만 콘테를 하나 들고 와트만지 위에 의미 없는 선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숨죽인 시선이 느껴졌다. 김천댁 아줌마였다. 이리저리 팔을 휘두르며 화면 위에 콘테를 덧칠했다. 작업에 열중한 것처럼 보였는지 김천댁 아줌마의 소리 죽인 발소리가 주방 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뒷모습만 보인 것이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조용히 흐르고 있는 두 줄기 눈물을 들켰을 테니까. 무심코 이젤 위에 걸린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무슨 잭슨 폴락 유(類)의 흉내인지, 이리저리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지고 있는 어떤 ‘방’이 보였다. 저 ‘방’으로 들어가면 더는 고통스럽지 않을까? 홀연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즉시 떨어진 답은 ‘예스’였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무아지경 속에서 손가락을 놀렸다. 의식적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이상한 ‘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아니, 전화를 끊은 지 단 한순간도 더는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도 같았다. 뻐근하게 느껴지는 오른팔을 내리고 화면을 굽어보았다. 기묘한 ‘방’이 완성되어 있었다. 바라보고 있으면 마냥 빨려들어가버리는 것 같은 신비로우면서도 공(空)한 방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김천댁 아줌마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시작한 의미 없는 손길이 꽤나 멋들어진 결과물로 나타난 셈이었다. 재능도 뭣도 없는, 그저 그림이 좋았을 뿐인 어느 절름발이 무명 화가의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는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모르지. 자살한 것만으로도 상품성이 생기는 미술 시장에 자신의 죽음은 프리미엄급 거품을 만들어낼지도. 이젤에서 종이를 빼내 테이블 위에 펼쳐두며 뇌까린 비아냥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마지막 데이트를 위해선 아무래도 공을 좀 들여야 했다. 연인과 통화를 했던 21일엔 경호원 사내를 대동하고 선 화랑엘 갔다. 걱정과 근심을 가득 매달고 있는 기하 선배의 순한 얼굴을 보며 씩 웃어주었다. 기하 선배와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경자와 석주가 들이닥쳤다. 역시 ‘미친놈, 환장한 놈’ 하고 욕을 욕을 해대며 지랄을 하는 경자와 석주를 달래, 마저 술판을 벌였다. 몸이 많이 상한 터라 많이 마실 순 없었다. 엄마를 방심시키기 위해서도 폭주는 금물이라, 그저 한두 잔 마시는 시늉만 하며 친구들과 조용히 작별을 고했다. 22일엔 엄마와 함께 외식을 했다. 제정신 돌아온 아들 흉내를 그럭저럭 연기한 끝에 엄마가 끝내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끔 만들어주었다. 내내 냉담한 태도로 자신을 노려보며 시장바닥 아낙네처럼 드센 악다구니를 내지르는 울 엄마면 좋으련만, 역시 순진한 울 엄마답게 오래도록 자식을 미워하진 못하겠는 모양이었다. 그런 엄마가 불쌍하고 가여워서 엄마 따라 대성통곡을 하고 만 자신이었다. 자신 홀로 가버리면 울 엄마는 어떡하나. 어떻게 사나. 오로지 자신 하나만 바라보고 산 울 엄마의 가련한 인생은 어떡하나. 부모 복은 물론 남편 복도 없더니 자식 복마저 지지리 없는 엄마가 한스럽고 또 한스럽기만 해서 도통 울음이 멈추질 않았었다. 지금까지보다 더한 대못을 엄마 가슴에 박을 요량을 하고 있는 주제에 악어의 눈물일 터였다. 물론, 끝까지 악질적인 후레자식다운 짓거리였다.

23일엔 오주희의 양평 화실에도 다녀왔다. 화실 입구까지 꼬리표처럼 졸졸 따라왔던 경호원 사내는 꽃미남 아니면 출입 금지라는 오주희의 황당한 독설과 카리스마에 떠밀려 입구에서 그대로 쫓겨나고 말았다. 물론 자신이 나올 때까지 사냥개처럼 입구를 지키고 있기는 했지만. 엄동설한에 차 안에서 다섯 시간이나 기다린 원한 때문이었는지 인환의 얼굴을 힐끔거리는 시선엔 희미한 경멸과 더불어 짜증까지 서려 있었다. 인기 있는 경호원이 되지는 못하겠다고 사내의 장래를 향해 명복을 빌어주었다. 자신 탓에 경력에도 금이 가는 게 아닐까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자신을 경멸하는 사내이니 그야말로 아주 ‘조금’만 걱정해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24일인 오늘, 크리스마스이브를 맞게 되었다. 금요일이었다.

집을 빠져나온 시각은 점심 무렵이었다. 엄마는 오전에 사무실로 출근을 하고, 김천댁 아줌마도 경호원 사내를 신용한 모양인지 의정부에 산다는 조카네 집을 방문하기 위해 외출 중이었다. 엄마한텐 친구들끼리 모여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다고 했고 이미 허락까지 받아둔 상태였다. 의심의 기색은 여전했으되, 경호원 사내의 능력만은 신용하고 있었기에 쉽사리 허락이 떨어졌다. 정상적인 사람들인 친구들과 일상생활을 많이 교류할수록 자신의 미친병도 쉽게 치료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깊은 우려와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이야말로 엄마가 자신의 연이은 외출을 묵인하는 가장 큰 이유일 터였다. 물론, 차와 신용카드와 지갑까지 완벽하게 몰수가 된 상태니 달리 또 무슨 큰 사고를 칠까 싶은, 안이하고 순진한 발상도 한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경호원 사내가 운전해주는 경호업체 소유의 미니 밴을 타고 미메시스로 왔다. 크리스마스 대목을 맞은 미메시스는 갖가지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한껏 호사스럽게 꾸며진 채 파티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만 되면 늘 오래된 단골들과 지인들만을 불러 파티를 벌이곤 하는 미메시스였다. 그때마다 단골 게스트였던 자신은 이날만은 영 찬밥 취급을 면치 못했는데, 당연히 오너인 마해영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마해영은 화가 꼭지까지 올랐는지 자신을 상대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았고, 자신이 미메시스를 빠져나올 때인 5시 무렵까지, 무려 네 시간 가까이나 대화는커녕 일절 알아보는 척조차 하질 않았다. 손 사장마저 마해영의 눈치를 보며 인환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납치 소식이 마해영에게까지 흘러들어간 모양이었다. 하긴, 연인이 자신과 그녀를 찾기 위해 이곳까지 전화를 했다고 하니, 애인인 손 사장을 통해 은밀히 알아보았을 것이다. 전모를 파악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을 터, 괴물 짓거리의 속사정을 자신보다도 더 속속들이 알고 있을 사내였다. 사랑을 빙자한 집착으로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족속들을 가장 혐오하는 마해영이니 완전히 절교 선언을 듣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싶었다. 그래도 미메시스를 빠져나오는 마지막까지 눈길 한 번 안 주었을 때에는 조금은 섭섭해서 목이 메기도 했다. 마지막인데……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예쁘고 섹시한 사내의 모습을 보고 갈 수 있었음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씁쓸하게 뇌까린 인환이었다.

경호원 사내가 게이를 끔찍해한다는 건 순간순간 마주치게 되는 경멸의 시선을 통해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사내와의 격전지를 게이 바로 한 것은. 미메시스에도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다가 그곳이 게이 바인 줄 눈치채자마자 얼굴을 사정없이 구긴 채 마지못해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내였다. 그나마 미메시스는 점잖은 케이스였고, 자신이 두 번째로 택한 게이 바 ‘미향’은 유난히 더 퇴폐적인 곳으로 이름을 날리는 곳이었다. 홀 안에서 태연하게 오럴 섹스가 행해지기도 하는 곳이었으니 말해 무엇 하랴. 미메시스에서 나와 5분 거리쯤 떨어진 ‘미향’으로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것도 입구 계단에서 적나라한 딥 키스를 하고 있던 어느 게이 커플이었다. 처음부터 기절초풍을 했던 사내는 바 안에서 노골적으로 행해지는 음란한 짝짓기 분위기에 완전 사색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10분쯤은 어떻게든 참고 견디던 사내였으나, 웬 덩치 큰 30대 남자가 사내에게 접근해 슬쩍 얼굴을 쓰다듬자 그것으로 사내의 인내심은 완전히 바닥이 난 모양이었다. 나가서 기다리겠다는 신경질적인 외침과 함께 바 밖으로 도망치듯 달려 나가버렸다.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는 거구의 뒤태에 입장도 잊은 채 한참이나 박장대소를 했던 인환이었다. 싫으면 NO를 선언하는 것으로 상대는 깨끗이 물러났을 것을, 게이들이란 으레 강제로 같은 사내를 덮치는 괴물 같은 족속이라는 선입견이 사내의 건강한 의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참을 웃다가 바의 안쪽에 위치한 주방 쪽으로 갔다. 손님용 정식 출입구 외에도 직원 전용 출구가 따로 있다는 것을 사내가 모를 턱은 없었으나, 당장은 게이 바가 사내에게 내려준 충격을 수습하기에도 바쁠 것이다. 사내의 눈앞에서 전형적인 짝짓기의 모션으로 다른 사내 몇몇과 시시덕거리는 모습까지 보여주었으니, 사내는 완전히 방심하고 있을 터였다. 마음에 드는 섹스 파트너를 하나 꼬신 뒤 바 곳곳에서 벌어지는 행태와 마찬가지로 온갖 음란한 짓거리를 벌일 것이라 추축하고 있을 터,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빠져나가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물론 여유를 부리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무엇보다도 행운이 따라줘야 할 일들이 홍해처럼 압도적으로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1분 1초가 초조한 인환이었다.

치근덕거리는 옛 애인을 피해 달아나야 한다는 핑계로 술값을 계산한 뒤 직원용 출구를 통해 몰래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입구에서 치를 떨며 서성대고 있을 경호원 사내는 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대로변으로 뛰었다. 아직 6시가 채 안 된 시각이라 빈 택시를 잡기는 쉬웠다. 곧바로 잡히는 택시에 고척동으로 가자고 했다.

화사한 크리스마스 장식물들과 경쾌한 캐럴들이 흘러나오는 상점들 일색인 차창 밖 거리를 멍하니 내다보며 코트 주머니 안에 든 돈을 만지작거렸다. 기하 선배의 선 화랑에서 훔친 돈은 총 8만 원이었다. 연인을 마지막으로 만나러 가는 데 쓸 교통비였다. 2만 원이면 충분할 것 같았지만 혹시 몰라 좀 더 넉넉하게 훔쳐두었었다. 돈을 꾸어달라고 하면 더 수상쩍어할 친구들을 알기에 훔치는 방법을 택했다. 평소 털털한 기하 선배가 어디다 지갑을 두는지도 알고 있었고, 그 정도의 소액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설령 돈이 없어진 것을 알아도 자신의 짓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문득 주머니 속 8만 원이 자신의 실제 전 재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훔친 돈이고 보면 실제 자신의 재산이라고도 보기 힘들었다. 참 편하게 살아온 인생이지 싶었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제 땀으로 벌어들인 돈 한 푼 없이 아버지가 물려준 돈과 엄마의 지극한 사랑만을 받아먹으며 생계에 대한 근심 걱정이라곤 일절 않고 살아왔다. 그야, 정신병 진단을 받고 금치산자가 되어, 친구의 돈을 훔치지 않을 수 없는 처량 맞은 신세로 순식간에 전락하긴 했지만 말이다. 생의 막바지에 이런 식으로 저주가 내린 것은 어쩜 그렇게나 나태하고 평온하게 살아온 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연인이 치열하게 세상과 투쟁하며 살아온 삶에 비해 자신의 삶의 모습이란 것은 어쩌면 이다지도 초라하고 빈곤한 것일까. 자업자득인 것 같았다. 사랑받을 만한 예쁜 구석이라곤 도무지 찾아보기도 힘들지 않은가. 그야말로 하류 인생이지 않은가 말이다. 죽어 마땅했다. 이따위 저질 인생으로, 세상에 민폐나 끼치는 괴물로 산다는 것은 연인은 물론 다른 모두에게도 끔찍한 저주일 터였다. 엄마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그러니 일찍 끝내버리려는 자신의 시도는 대단히 옳은 선택일 거였다.

고척동 연인의 집 근처에 도착했을 무렵엔 사위는 이미 까만 어둠에 잠겨 있었다. 시각은 6시 17분이었다. 택시가 올라갈 수 없는 산동네라, 진입로 입구에서 내려 집까지 10여 분의 거리를 걸어서 올라갔다. 두 달 전쯤, 순경들에게 두드려 맞으며 끌려 내려온 길이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온 동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기억이 떠올라 잠깐 익숙한 고통을 느꼈다. 머리와 손톱 끝이 저릿저릿 아파왔다. 그때의 기억만 떠올리면 나타나는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당시 다쳤던 몸의 일부분이 정신적인 외상과 맞물려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었다.

욱신거리는 손톱 끝을 어루만지며 허름한 다세대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어둑한 골목길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날씨가 워낙 추워 그런지 인적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사람들이 별로 안 보이는 것도, 또 어두운 것도 모두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혹시라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연인을 만나기도 전에 파출소에 신고부터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설마 싶기도 하지만 ‘저질 인생’의 앞일을 누가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겠는가. 신이 자신의 마지막 소원조차도 들어줄 생각이 없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는 가능성이었다.

고맙게도 익숙한 철제 대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신의 간섭은 일어나지 않았다. 숨이 몹시 가빴다.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동안 멈춰 서서 숨을 골라야 했다. 마음이 흔들렸다거나 새삼 겁을 집어먹어서는 아니었다. 혹여 연인을 못 만날까 불안한 것도 아니었다. 마음은 이태원 게이 바에서 택시를 탔을 때부터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숨이 찬 것은 오로지 체력 문제였다. 나름대로 가파른 산동네를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10여 분이나 올라왔으니 숨이 찰 만도 했다. 게다가 자신의 현재 체력 또한 여전히 바닥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으니 말해 무엇 하랴. 정신병원에서 49일을 보내는 동안의 체계적인 관리와 규칙적이고 강제적인 식사는 그 이전에 극도로 쇠약해졌던 체력을 어느 정도 보충해주는 계기가 되었었다. 그러나 역시 그저 ‘어느 정도’에 불과했을 뿐이라, 자신의 육체는 여전히 정상적인 건강체와는 거리가 멀었다. 영양실조로 툭하면 픽픽 쓰러지기까지 했는데 쉬이 회복될 리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미친병 또한 회복되기는커녕 시시각각 더 심해지는 모양새였으니, 만약 엄마가 정신과 육체 모두를 치료하기 위해 자신을 병원에 가둔 것이라면 그 결정은 득보단 실이 훨씬 더 많은 결정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겨우 숨길이 평온해지자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은 열려 있었다. 올 때마다 열려 있었던 걸 보면 다세대 주택의 성격상 각자의 현관문만 단속을 하는 모양이었다. 몇 걸음 만에 현관문 앞에 도착해 벨을 누르려고 하다가 그냥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불청객인 주제에 태연히 벨을 누르는 것도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불투명 유리가 끼워진 새시 문 안쪽에서 뽀얀 불빛과 음식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김치찌개 냄새였다. 두드리려다 말고 도로 손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뻔뻔스럽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어서였다. 소박한 저녁상을 준비하고 있을 연인의 가족들에게 자신의 존재는 그저 최악의 불청객과 다름없을 터였다.

차가운 새시 문틀에 가만히 손바닥을 댄 채 눈을 감고 기도했다. 마지막이니깐. 부디 마지막이니깐…… 이번 한 번만 더 용서해주세요. 이번 한 번만 더 괴물 짓을 하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그럼 그 대가는 제 목숨으로 바칠게요. 부디 하느님,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그리운 연인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쿵, 쿵, 쿵. 세 번을 두드리고 기다렸다. 대꾸가 없었다. 흐릿하게 TV 소리가 나고 있었다. 못 들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 다시 한 번 크게 두드렸다. 쿵, 쿵, 쿵, 쿵.

“네, 누구세요?!!!”

서둘러 뛰어나오는 발소리가 현관문 앞까지 가까워지더니, 곧 이어 어린 소녀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혜윤이였다.

“……누구세요……?”

말문이 막힌 바람에 머뭇거리자 잠시 후 재차 전해진 목소리엔 의혹이 가득 비치고 있었다. 연인이 훈련 하나는 철저하게 시킨 모양이었다. 함부로 현관문 열어주지 마. 연인의 담담하면서도 무뚝뚝하게 떨어지는 매혹의 중저음이 귀에 선했다.

“……혜…… 혜윤아, 나야…… 선생님……. 오빠 있니……?”

“!!!!!”

“…….”

“…….”

숨마저 삼킨 소녀의 충격이 닫힌 현관문 안쪽으로부터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혜윤아…… 오, 오빠 없어? 이…… 있으면 나 좀 잠깐 만나달라고 전해줄래?”

“…….”

“……혜윤아, 그냥 잠깐만 만나보고 갈 거야…… 저번처럼 시끄럽게 난동 안 부려…… 문 좀…… 열어줄 수 없니……?”

“…….”

알알이 전해지는 소녀의 경계와 두려움이 가슴 아팠다. 자업자득이란 것을 알면서도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누이였다. 진짜 누이보다도 더 사랑을 줬던 소녀였다. 그런 소중한 누이에게서 백안시당한다는 실감은 연인에게서 미움받는 것 못지않을 아픔을 주었다. 그래도 문전박대를 당할 것 같은 절망은 들지 않았다. 만날 수 있을 터였다. 마지막이 아닌가. 물론 자신만 아는 마지막 작별 인사지만, 그래도 그 마지막만큼은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인환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찰칵. 덜컹. 빗장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대답만을 기대했다가 갑자기 문이 열리는 바람에 순간 당황한 나머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야 했다.

문 안쪽엔 163센티쯤 되는 아담한 키를 한, 몹시도 예쁘장한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역시 예쁜 아이였다. 낡은 주황색 트레이닝복 바지에 두꺼운 핑크색 스웨터라는 촌스럽고 초라한 차림새조차 소녀의 사랑스러움을 조금도 훼손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달 만인가? 아니, 석 달 만? 추석 때 갈비를 가져다주며 보았을 때보다도 더 자란 것 같았다. 더 예쁘고 더 숙녀 티가 났다. 따라다니는 남학생들도 꽤나 많을 법한. 하긴 무시무시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잘난 오빠가 둘이나 있으니 다들 감히 접근할 생각조차 못 하겠지만. 약간의 경계가 서린 아름다운 눈동자가 인환을 빤히 건너다보고 있었다. 어딘가 난처하고 슬픈 것 같은 기색이기도 했다.

“……위야 오빠는 지금 집에 없어요, 선생님. 신혼집으로 얻은 서초동 아파트에 신애 언니랑 같이 있을 거예요. 요즘 신애 언니가 건강이 안 좋아서 거의 그쪽에서 지내고 있거든요.”

갑자기 발밑이 갈라지는 것 같은 어지럼증이 닥치는 바람에 심하게 휘청거리다가 결국 땅바닥에 주저앉아야만 했다.

“……선생님?!!!”

속이 메스꺼웠다. 시야에 들어온 땅바닥이 빙빙 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와 칵테일 두 잔 외엔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었다는 게 기억났다. 분명 그 때문이다. 절대 절망해선 아니다. 아무렴. 아직은 하루가 다 간 게 아니었다. 만날 수 있었다. 반드시 만나고 말 터였다.

“선생님!!! 선생님, 괜찮으세요?!!! 선생님!!!”

놀란 혜윤이의 목소리가 자꾸만 아득해지려는 의식을 일깨웠다. 부축을 하려는지,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뻗어오는 혜윤이가 고마워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무렴. 아직은 하루가 다 간 게 아니었다. 지금 당장 멀리 있다고 영영 못 보고 떠나는 일도 없을 거다.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한 위대한 영혼의 탄생으로 모든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은 날. 구원을 받은 날. 그러니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얼굴이 창백하세요, 선생님. 진짜 괜찮으세요?”

울상이 된 혜윤이에게 흐릿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냥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야, 혜윤아. 부러 가벼운 어조로 대꾸했지만 부축해준 가녀린 팔은 거절하지 않았다. 두 오빠들로부터 단단히 주의를 받았을 텐데도 여전히 자신에게 순수한 애정을 선사해주는 누이가 너무나 고맙고 애틋한 까닭이었다.

“……저기, 우선 안으로 들어오세요, 선생님…… 시원한 냉수라도 한 컵 드시면 좀 나아지실 거예요.”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연인을 만나야 했다. 반드시 만나고 갈 터였다. 혜윤이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니, 주방 겸 거실인 좁은 공간에 차려진 밥상이 보였다. 막 식사를 하려던 중인지, 찌개 냄비와 소박한 반찬 몇 가지, 그리고 가득 채워진 밥 한 공기와 수저 한 벌이 보였다.

“아, 휘야 오빠도 친구들과 속초로 놀러갔거든요. 1박2일로요. 대학 합격했다고 위야 오빠가 특별히 허락해줘서요. 그러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내내 자신의 안색을 살피던 혜윤이가 재빨리 덧붙였다. 연인 외에 또 다른 한 명의 가족을 찾는 자신의 눈빛을 그새 읽은 모양이었다. 역시 영리한 아이였다. 두 달 전 자신이 벌인 추악한 해프닝을 통해 자신이 제 오라비를 향해 품고 있는 감정은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연인은 물론 휘야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도. 자신이 휘야를 겁내고 있는 것 또한 눈치를 챈 모양이니, 더 이상 이 영리한 누이 앞에서 무언가를 감춘다거나 위선을 떤다거나 하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 될 것 같았다.

“……막 식사하려던 중이었나 보네…… 내가 방해를 했구나.”

“……금방 먹으면 되죠, 뭘. 여기 물부터 드세요, 선생님…….”

주방 겸 거실인 손바닥만 한 공간에 앉아 혜윤이가 건네주는 물을 남김없이 다 받아 마셨다. 정말로 기운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자신을 향한 혜윤이의 여전한 애정 때문이리라. 호모라고 경멸하거나 제 오라비에게 그만 치덕대라거나 하는 막말을 할 아이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마음의 완강한 단절 정도는 각오했던 인환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면하고 보니, 누이의 얼굴에 내내 떠오른 표정은 예상 밖의 여전한 애정과 깊은 연민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눈물겹도록 고맙고도 아픈 구원이었다. 그리고 그 맹목적일 정도의 순수한 애정과 연민을 이용할 생각밖에 못 하는 스스로가, 자신의 절박한 상황이 또한 비참한 인환이었다.

“……서초동 집…… 위야한테 지금 전화 좀 해줄 수 있을까?”

힘겹게 말을 꺼내자, 역시 당혹감이 서린 슬픈 눈이 불쌍한 호모를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괜히 집 안에 들였다 후회하는 건 아닐까? 눈치를 살피고도 싶었지만 더는 누이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설령 다시 한 번 누이를 실망시켰다 해도 여기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벼랑 끝에 몰린 인간이 얼마나 비겁하고 치졸하며, 또한 인간적인 신뢰마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배신할 수 있는가를 이 착하고 순수한 누이도 알아야 할지 모른다.

“……내가 걸어볼 수도 있지만…… 그럼 위야는 아마 절대 와주지 않을 거야. 나랑은 말도 하지 않으려 하니까…….”

“…….”

“……그날도 봤잖니…… 경찰 부르라고 한 거 위야지?”

“…….”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혜윤아. 나 마지막으로 위야를 만나려고 왔어.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인데 못 만나고 돌아가게 되면 정말 많이 가슴 아플 거야…….”

“……선생님, 하…… 하지만 그건…….”

“알아, 들어주기 힘든 부탁이라는 거. 근데 꼭 들어줬으면 좋겠다. 나, 이제 너도 다신 만나러 오지 못할 거야. 오빠들이 그러지 않던? 내게서 혹 전화가 오더라도 그냥 끊어버리라고.”

“…….”

“……내 마지막 부탁이라 생각하고…… 아니,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다고 생각하고 전화 한 통만 걸어줄 수 없을까? 응? 혜윤아.”

“……선…… 생님…….”

“……그냥 딱 한 번만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럼 다 정리하고 떠날 수 있을 거 같거든.”

“……떠나…… 세요? 어딜요?”

“그림 공부하러 외국에.”

“…….”

“……나 있지, 혜윤아…… 네 오빠 진짜 참 많이 사랑했거든…… 아주 많이…… 이런 내가 기분 나쁘니?”

“……아…… 뇨…….”

“왜? 다들 호모라고 욕하고 그러는데? 경멸스럽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건 어떤 경우라도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그랬대요, 죽은 강이 오빠가요. 윤열이 오빠가 그랬어요. 휘야 오빠가 너무 화를 내고 선생님을 욕하고 그래서 나중에 윤열이 오빠한테 물어봤거든요. 정말 선생님이 더러운 호모인 거냐구요. 윤열이 오빠는…… 외려 휘야 오빠를 많이 나무랐어요. 강이 오빠 얘기도 해주시면서…… 그래서 많이 울었어요. 선생님을 억지로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싶어서요.”

기어이 참지 못하고 눈물이 흘렀다. 고맙고 착한 누이에게 보이기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울었다. 마주 앉은 혜윤이로부터도 콧물 훌쩍이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혜윤이도 우는 것 같았다. 한 손을 앞으로 뻗어 더듬더듬 혜윤이를 찾았다. 이심전심의 소녀가 마주 손을 뻗어왔고, 중간에서 만난 두 손을 서로 꼭 맞잡은 채 한참을 운 것 같았다. 나이만 먹었지 누이와는 그렇게도 통하는 게 많더니 눈물이 많은 것도 서로 닮은 모양이었다.

“……제가 아프다고 하면 총알같이 달려올 거예요.”

코맹맹이 소리가 훌쩍이며 불쑥 말했다. 휴지 드릴게요 하고 이어지지 않는 한마디를 마저 뱉은 누이가 안방으로 가 휴지 몇 장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두 걸음 앞에서 코를 푸는 누이의 팽, 소리가 났다. 긴장을 해선지, 아니면 기대 때문인지 눈물을 훔치는 자신의 손이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

“……위야 오빠랑 꼭 화해하시길 바랄게요, 선생님. 떠나시기 전에 화해하시면 나중에 돌아오셨을 때 또 만나실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럼 저랑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거구요. 그쵸?”

코맹맹이 소리가 재차 음악처럼 재잘거렸다. 용기를 쥐어짜 건너다본 혜윤이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빨개진 코며 눈시울조차 너무나 사랑스러운, 천사가 따로 없었다. 예정된 배신이 새삼 사무쳐 다시 한 번 왈칵 눈물이 쏟아졌음은 물론이었다. 내세라는 게 있다면 정말로 이 소녀의 상냥한 오빠로 태어나게 되길 빌었다. 그래서 자신의 이 못나고 추한 배신들을 몽땅 다 되갚을 수 있게 되길.

뿌옇게 변한 시야로 안방으로 잽싸게 달려간 혜윤이가 전화 수화기를 집어 드는 게 보였다. 번호를 누르는 가냘픈 손가락도, 슬쩍 이쪽을 바라보며 윙크를 하는 웃는 얼굴도 보였다. 도저히 마주 웃어줄 수가 없어서 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사랑해주고 싶었었다. 연인 못지않게 평생을 사랑해주고팠던, 모든 게 다 예쁘기만 한 누이였었다. 그런 누이에게 끝내는 쓰디쓴 실망과 배신밖에 돌려줄 것이 없는 것 같아 슬펐다. 역시 하류 인생이었다.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민폐나 끼치는 하류 괴물이었다, 자신은.

“……위야 오빠? 응, 난데 있지…… 지금 나 쫌…….”

숨죽인 울음 끝에, 혜윤이의 애교가 섞인 코맹맹이 소리가 설핏 들려왔다.

총알처럼 달려온다더니 정확한 비유였다. 연인은 혜윤이가 전화를 건 지 딱 37분 만에 왔다. 그녀의 집안에서 차를 뽑아주었는지, 단순한 모양새의 검정색 그랜저를 몰고 나타났다(혜윤이는 차가 생겨서 서초동과 고척동 집을 편하게 왕래할 수 있게 돼 오빠가 좋아한다고 했다).

거실 바닥에 앉아 설거지를 하던 중인 혜윤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방심한 시선이 현관 쪽으로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에 열쇠꾸러미를 짤랑거리며 문 안으로 들어서던 연인의 시선과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기억에도 선명한 검정색 모직 코트가 보였다. 1년 전 겨울에도, 또 2년 전 겨울에도 자주 입고 다니던 정겨운 코트였다. 코트에 짙게 밴 연인의 체취가 너무 좋아서 몰래몰래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곤 했던, 낡았지만 사랑스러운 연인의 코트였다. 단단한 목덜미를 감고 있는 네이비 체크의 짝퉁 버버리 머플러도 보이고, 코트 아래 한참 낡은 블루진 바지도 보였다. 군함처럼 거대한 발을 감싸고 있는 밤색 랜드로버도 보였다. 그것이 연인이 서울대에 입학하던 해에 새로 산 신발이라는 걸 자신은 알고 있었다. 연인을 감싸고 있는 어느 것 하나 낯선 것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흡사 1년 전으로, 아니, 2년 전 이맘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다정하고 다정한 자신만의 남창이었던 그때로.

잠시 아련하게 풀어지는 것 같던 연인의 눈시울이 이내 휘둥그레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서서히 핏기를 잃어가는 얼굴도. 막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서려던 몸짓은 석상처럼 굳어졌다.

“……오…… 오빠……!”

개수대로 쏟아지던 물줄기 소리가 멎었다. 대신 혜윤이의 자그마한 외침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일어서서 연인을 맞아야 하는데 좀처럼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너무나 그리워서 미치는 게 아닐까 싶었던, 아니, 이미 미쳐버린 것 같은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니 온몸의 기운이 일거에 쑥 빠져나갈 지경으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것이 감당하기 힘든 희열 때문인지, 혹은 고통 때문인지도 잘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인환에게 있어 연인은 그저 단순히 만나서 기쁘다 하는 정도의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다. 기쁨과 고통, 희열과 상처, 만족과 번민 등등 그 온갖 양가적 가치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삶의 총체적 의미였다. 아득하게 일렁이는 시야에 갑자기 또 기절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다리는 내내 평정을 유지했건만, 막상 닥치고 나니 넋은 완벽하게 패닉 상태였다. 우선 생각이 날아갔다. 다음으론 언어가 날아갔다. 연인을 알아볼 수 있는 시각이나 청각, 혹은 촉각의 감각 중추마저 뻥 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는데, 다행히 연인의 일거수일투족은 시야를 거쳐 뇌리를 지나 가슴속에까지 알알이 새겨지고 있었다.

열쇠꾸러미를 움켜쥐고 있는 커다란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한순간 피크까지 거칠어진 호흡을 되풀이해 토해내는 것도 보였다. 깊고 깊은 먹빛 동공 속에서 속내를 전혀 알 길 없는 새빨간 격정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분노이리라. 곧 차디차게 가라앉는 빙벽의 시퍼런 냉기엔 자신도 모르게 설핏 몸서리를 쳐야 했다. 불길의 뜨거움은 붉게 일렁이는 상태보다 푸르게 피어날 때 더 무시무시한 법이 아니던가.

“……문혜윤, 방에 들어가서 코트 입고 나와.”

칼날 같은 중저음이 떨어졌다. 뼛속까지 냉기가 철철 스며들 것 같은 서늘한 목소리였다.

“……오, 오빠…… 저…… 저기…….”

“닥치고 들어가서 입고 나와. 감기 들지 않게 모자 쓰고 목도리도 따뜻하게 두르고.”

시퍼런 분노의 불길이 누이를 향했다. 완전 사색이 된 혜윤이가 쫓기듯 제 방으로 들어갔음은 물론이었다. 누이의 혼비백산을 여전히 서늘하게 노려보며 연인이 신발을 벗고 있었다. 몇 초도 안 되는 사이 하늘색 더플코트에 검정색 털모자와 털목도리로 중무장을 한 혜윤이가 도로 튀어나왔다. 거실 턱으로 올라선 연인이 들고 있던 열쇠꾸러미를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재차 일갈했다.

“선생님과 얘기해야 하니까 어디든 30분만 나가 있어. 빵집도 좋고 게임방도 좋다.”

역시 혼비백산 튀어나가는 혜윤이였다. 현관문을 닫고 나간 혜윤이 대신 연인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단 몇 걸음 만에 코앞으로 다가선 연인이 자신을 향해 팔을 뻗는 게 보였다. 왼팔을 움켜쥐더니 단숨에 앞으로 끌어당겨 일으켜 세웠다. 당장이라도 부서트릴 것처럼 시퍼런 서슬에 비해 동작은 너무나 유연하고 매끄러웠다. 단숨에 안방으로 끌려들어간 몸뚱이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방바닥에 부딪친 무릎과 팔꿈치, 그리고 손바닥으로 심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제대로 인지조차 되지 못했다. 어지러웠다. 시야도 몹시 흔들렸다. 또 기절할 것 같아서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나는지 금세 입안으로 찝찔한 쇠 맛이 퍼졌다. 내팽개쳐진 그대로 잠시 엎드려 있었더니 극심한 어지럼증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엉금엉금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데 뭔가 시커먼 것이 시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연인이 벗어 던진 코트와 머플러였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리고 연인을 바라보았다. 검정색 양말과 낡은 블루진과 크림색 터틀넥 스웨터가 차례로 보였다. 좀 더 위로 시선을 들어 올리니 새파랗게 타고 있는 아름다운 눈시울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두어 걸음 떨어져 있던 연인이 성큼 다가들었다. 오른쪽 어깨가 우악스레 휘어 잡혔다. 다른 한 손이 사타구니 사이로 다가들더니 바지째로 성기를 와락 움켜쥐었다.

“아악!!!”

비명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독한 통증에 순간 눈물이 왈칵 비어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연인을 뿌리치려 기를 썼지만 허사였다. 연인의 굳건한 상체는 아무리 힘주어 밀어도 요지부동이었다. 설령 밀어붙인다 해도 최대의 약점일 치부가 통째로 휘어잡혀 있으니 옴짝달싹할 수 없는 건 한가지였으리라.

“……아, 아파……! 아파…… 아앗……! 아, 아파…… 위야……! 악!!!”

킬킬거리는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름 끼치는 살벌한 악의는 귓가에 바짝 다가든 연인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프다고요? 기분이 좋으신 게 아니고요?”

웃음기가 배인 서늘한 일갈이 나지막하게 떨어졌다. 동시에 힘을 줄인 조임이 부드러운 애무로 변했다. 뭐가 뭔지 채 정신을 차릴 수도 없는 상태에서 찌르르한 전율이 사타구니로부터 올라왔다. 양모 바지와 팬티라는 두 겹의 옷감을 사이에 두고도 연인의 손길은 노련하면서도 날카로웠다. 귀두를 긁고, 기둥을 조이고, 그 밑의 불알을 연달아 부드럽게 굴리는 통에 몇 초 전의 지독한 아픔은 말짱 잊혔다. 아니, 도리어 그 아픔이 더한 쾌락을 불러일으킨 것도 같았다. 축 늘어져 있던 팔이 저도 모르게 연인의 허리춤을 붙들고 있었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울 스웨터의 부드러운 감촉에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가파르게 상승하는 감각에 취해들었다. ‘왜?’라는 의문조차 미처 뇌리에 새겨질 여유조차 없었다.

“……응…… 흐응, 앗……! 하앗……! 으앙…… 하아앗……!”

저절로 허리를 튕겨대며 연인에게 달라붙는 몸뚱이는 천박한 창녀의 교태 그 자체였다. 비몽사몽 정신이 아득했다. 오랜만에 흠뻑 맡아지는 그리운 체취도 피를 들끓게 했고, 그리운 손가락들이 해주는 성기의 직접적인 애무는 말 그대로 이성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채 2분도 안 된 것 같았다. 자지러지는 교성과 함께 바지에 그대로 싸버리고 말았다.

오르가슴으로 버르적거리며 경련하는 몸뚱이가 바닥으로 밀어붙여졌다. 축 늘어진 사지가 하릴없이 흔들리며 본능적으로 연인을 붙잡으려 기를 썼지만, 날렵한 동작으로 빠져나가는 연인 탓에 그저 허공만 움켜쥐어질 뿐이었다. 바지 벨트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심하게 숨을 헐떡이며 축 늘어진 몸뚱이는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퍼가 내려지고 팬티째로 바지가 끌려 내려갔다. 벗기기 쉽도록 허리를 살짝 틀어 올린 것은 의식조차 못 한 자연스러운 습관이었다. 그러나 바지와 팬티는 허벅지 중간이라는 딱 그만큼에서 걸린 채 더 이상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비릿한 정액 냄새가 났다. 자신의 것이었다. 차츰 가라앉는 숨길을 따라 깨끗이 증발해버렸던 생각의 흐름도 되살아났다. 드러난 아랫도리로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시선도 느껴졌다. 시퍼렇게 날이 선 형형한 불길이었다.

멍하니 눈꺼풀만 껌뻑거리며 지금 뭐가 일어난 건가를 곱씹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 연인의 표정만 살핀다면 그 즉시로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되리란 자각도 했다. 그러나 차마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굳이 돌리지 않아도, 따끔거리는 경멸의 화살을 짐작할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채 축 늘어져 있는 볼품없는 성기로 연인의 살피는 시선이 사정없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킬킬거리는 비웃음도 가끔씩 곁들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치부를 가리려 하자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중간에서 두 손목을 잡아챘다. 동시에, 킬킬거리던 나지막한 비웃음은 커다란 박장대소로 변했다. 아하하하하. 하하하. 하하. 천둥소리처럼 아픈 질타가 귓전을 뚫고 심장에 들어와 박혔다. 무언가를 가리려던 비굴한 시도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팠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모든 게 다 아픈 것 같다는 자각만은 선연했다. 너무나 아파서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다 부서지고 있었다. 몸뚱이도, 마음도, 자아도, 꿈도, 희망도, 영혼도…… 모두 다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눈을 감고 가늘게 숨을 헐떡이며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부서지는 고통을 어떻게든 누그러뜨려보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왜냐고 물으셨습니까?”

박장대소의 여운을 고스란히 간직한 중저음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자못 유쾌한 것 같은 어조에 설핏 몸서리가 쳐졌다. 더 이상 아플 것 같지 않은데도, 분수를 모르는 몸뚱이는 여전히 움찔거리며 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벗겨진 살가죽에 소금이 뿌려지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그날 밤 왜 섹스 한 거냐고 물으셨죠?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턱 끝이 잡히더니 정면으로 홱 돌아갔다. 연인의 손가락 끝이 아프도록 살점을 파고들고 있었다.

“눈 뜨고 여길 보세요! 당신, 그렇게 둔탱이였던 겁니까? 그걸 몰라요? 지금도 모르시겠습니까?”

화살처럼 파고드는 시퍼런 시선에 가까스로 고개만 가로흔들었다. 역시 너무 아파서 감히 눈을 떠 연인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세요? 정말 아신다고요? 설마……! 아시면서도 절 다시 찾아오실 생각을 했군요? 그것도 우리 순진한 혜윤이를 꼬드겨서 거짓 전화까지 하게 만드시고요? 눈 뜨고 날 봐요!!! 안 그럼 진짜 박살을 내버릴 테니까!!!”

벽력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틀어잡힌 턱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기절할 것 같은 어지럼증이 더욱 심해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눈을 뜨고 연인을 올려다보았다. 숨길을 따라 여리여리하게 흔들리는 깃털이 보였다. 연인이 입고 있는 크림색 터틀넥 스웨터였다. 얼룩 하나 없이 뽀얀 그것은 흡사 천사의 날개처럼 보였다. 날개가 감싸고 있는 남자의 이목구비가 이 세상의 인간 같지 않게 너무나 아름다운 때문이었다. 의외로 연인은 빙긋 웃고 있었다. 시퍼렇게 일렁이고 있는 눈빛만 아니라면 상냥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 확인해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천사가 다시 한 번 빙긋 웃었다. 눈꼬리까지 가늘게 접혀서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아야만 했다.

“여길 만족시켜드리면 얌전히 돌아가주실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따스한 손길이 맨살의 축축한 성기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기둥을 주무르고, 불알을 굴리고, 귀두 끝을 엄지손톱으로 꾹꾹 눌러댔다. 역시 이미 부서져버렸는지,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달콤한 자극임에도 불구하고 페니스는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예전부터도 참 가볍기 짝이 없는 창녀의 몸뚱이를 가지고 있었죠, 당신은. 조루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는데 알고 보니 그저 지나치게 밝히기 때문이셨더라고요. 그러니 별수 있나요? 그런 싸구려 몸뚱이에 취할 수 있는 수단이란 제가 가진 남창의 기술밖에 없는 것을요. 달리 당신에게 먹힐 설득의 기술이 있을 턱이 없었죠.”

“…….”

“……내 아이를 죽인 것도 모자라 자수한다 콱 죽어버린다 어쩐다저쩐다 하며 동네방네 내 옛 남창질을 광고하겠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저로서도 역겹기 그지없었지만 제정신이 아닌 선생님을 어떻게든 달래서 얌전히 댁으로 돌려보내야만 할 필요가 있었죠. 이런 추악하고 지저분한 스캔들이 알려지는 즉시 사랑하는 신애 씨는 제 품에서 영영 날아가버릴 판이었으니까요. 그땐 그 방법밖에 없었거든요.”

“…….”

“이런. 더는 재미가 없으십니까? 영 반응을 안 하시네요? 좀 더 부드럽게 주물러드릴까요? 아, 그렇군요! 이번엔 뒤까지 뚫어드려야 만족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어쩌죠? 한 몸이 되는 건 영원히 우리 신애 씨 하고만 하기로 맹세를 해서요. 괜찮으시면 무언가 다른 기구로라도 뚫어드릴 용의는 있습니다. 냉장고의 먹다 남은 소시지로라도 해드릴까요? 어차피 내 냄새를 맡으시면서 내 손에 뚫리는 거니까 진짜 내 물건이 아니라도 제법 즐거우실 텐데요?”

“…….”

“이런, 울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거하게 봉사해드리겠다는데 왜 이러십니까? 사양하지 마시고 이번 한 번으로 끝내자고요. 더 이상 혜윤이나 우리들 앞에서 얼쩡거리지 않겠다고 약속만 해주시면, 다시 한 번 끝장나는 천국으로 보내드리죠.”

“……위…… 위…….”

자신의 사타구니에서 손을 뗀 연인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손을 뻗어 막으려 했지만 전광석화보다 재빠르고 단호한 몸짓엔 속수무책이었다. 안방을 빠져나가 냉장고 문을 여는 연인이 보였다. 어질어질 휘청대는 몸을 필사적으로 일으켜 세운 뒤 허벅지 중간에 걸린 팬티와 바지를 끌어올렸다. 손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바람에 좀처럼 빠르게 지퍼를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지퍼는 포기하고 벨트를 채우려는데 연인이 다시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힐끗 시선을 가져갔다가 한 손에 들린 프랑크 소시지에 전율했다. 즉시로 사지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도로 방바닥에 고꾸라져야만 했다. 푸하하하하. 하하하. 또 한 번 연인의 박장대소가 쏟아졌다. 새까맸다. 눈앞이 그저 새까맣게 변해서 잠시 동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바지춤을 꽉 움켜쥐는 것만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온몸의 뼈마디가 갈리는 것 같은 고통이 전신을 엄습하고 있었다. 어질어질한 머리는 금방이라도 이지를 상실할 것처럼 수천수만 가지의 상념들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연인과 처음 만났던 그 찬란한 봄날, 촌스러운 초록색 교복, 폐렴으로 사경을 헤매던 연인, 연희동 옛집 앞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상처 입은 어린 소년, 애국가를 열창하던…… 지독한 음치에 피아니스트 신동이던 소년, 친구를 포기했다고 길길이 화를 내던 결벽증 청년, 도로 상냥해진 남창으로서의 연인, 공부하는 연인, 농구하는 연인, 축제의 헤로인이 된 연인, 서울대 최고의 킹카, 의예과의 폐하, 햇빛 쏟아지는 아틀리에에서 음란하고 아름답게 모델을 서주던 섹시한 청년, 다정한 입맞춤, 상냥한 애무, 열기 띤 끈끈한 페팅, 숨 막히는 섹스, 천국의 섹스들……. 그런데 이게 뭐지? 뭐지? 왜 이렇게 됐지? 그냥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었을 뿐인데…… 상냥하게 웃어주고……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고…… 그간 정말 고맙고 미안했다고도 해주고…… 많이…… 아주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니 용서해주길 바란다고…… 마지막으로 예쁘게 이별하고 싶었는데…… 정말 그랬었는데…….

우악스러운 손길이 바지춤을 움켜쥔 손을 거칠게 잡아채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막아보려던 손길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 앞에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이번엔 무릎 아래까지 단숨에 발가벗겨진 아랫도리에 끙끙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눈물만 줄줄 흘리며 하릴없이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뻗은 뒤 비벼보았다. 연인이 부디 마음을 돌리도록 싹싹 빌고 싶었건만, 그럴 기운조차 나지 않아 잠시 비는 흉내만 내던 두 손은 도로 바닥에 툭 떨어졌다.

몸이 번쩍 들리더니 연인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은 자세가 되었다. 한 팔로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고정한 연인의 손가락이 활짝 열린 항문 주름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몸부림을 치며 반항했지만 단숨에 불쑥 파고든 손가락에 그조차도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뻑뻑한 입구 주름이 손가락의 거친 움직임에 슬쩍 찢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아 하고 힘없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문득 입술이 틀어막혔다. 뜨겁고도 깊은 흡입이었다. 목구멍 깊숙이까지 삽입된 축축하고 뜨거운 혀에 자지러지는 사이 깊게 삽입된 손가락이 전립선을 사납게 할퀴고 지나갔다. 축 늘어졌던 사지가 전격을 맞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들었다. 채 밖으로 토해지지 못한 교성과 함께 힘을 잃은 혀뿌리가 뽑혀나갈 것처럼 연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인의 중지 끝이 내벽 안에서 거칠게 피스톤질을 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전립선만을 긁어대는 자극에 온 넋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쾌락은 정직하게 발기했다. 어느새 바짝 일어선 음경 끝에서 쿠퍼 액이 줄줄 새고 있었다. 연인의 까끌한 혓바닥이 입안 이곳저곳을 핥고 물고 빨고 긁어대며 아래쪽 피스톤질과 리듬을 같이하고 있었다. 끙끙거리며 헐떡이며 신음하며 비굴한 창녀의 욕망은 따라서 열심히 허리를 흔들었다. 어느새 중지가 빠져나가고 다른 딱딱한 게 뚫고 들어왔다. 연인의 가운뎃손가락보다는 크고 페니스보다는 작을 그것이 무엇이라는 자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것이 부여해주는 짐승의 쾌락은 연인의 페니스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 순간엔 연인의 몸 자체였다. 연인의 체취와 키스, 사정없이 전립선을 찔러대는 짐승의 쾌락만이 새까맣게 변한 절망 한가운데에서 오롯이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기분 좋아요? 이렇게 격렬하게 찔러주니 기분이 좋은가요, 선생님? 이제 다신 나타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요?”

숨이 턱에 닿을 무렵에야 간신히 키스를 멈춰준 연인이 입가에 그대로 입술을 붙인 채로 허스키하게 속삭였다. 웃음기를 머금은, 지독하게 냉정하고 야비한 난봉꾼의 목소리였다.

“……더 해요? 어디요? 어딜 찔러드릴까요? 여기요? 여긴가요? 여길 뚫고 찔러드리면 최고로 기분이 좋으신가 보죠?”

“……하앙…… 앙…… 흐아앗……! 아앗……! 하앙, 앙…… 아앙…….”

“이런, 그렇게 좋아요? 정말 음탕한 화냥년이 따로 없군요. 우리 순진한 혜윤이가 혹시라도 밖에서 듣고 있으면 어쩌죠? 할 수 없군요. 제 입술로라도 틀어막아드리는 수밖에.”

“……아앙…… 읍……! 웅…… 윽, 웁……!”

어깨와 등 사이 예민한 부분을 농염하게 애무하며 연인이 다시 입술을 겹쳤다. 넋을 완전히 앗아가버리는, 온몸의 신경이 녹아버릴 것 같은 격렬한 입맞춤이었다. 마침 사납게 전립선을 긁으며 파고든 그것이 내벽 가장 깊은 곳을 뚫었고, 지진 같은 오르가슴이 아랫배를 강타했다. 연인의 입속에 틀어막힌 짐승의 교성이 소리 없이 사방으로 내질러졌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자각하며 뒤틀리는 몸뚱이를 연인의 양팔이 사슬처럼 죄고 있었다. 빈틈없이 꼭 달라붙은 연인의 몸뚱이가 자신이 움찔움찔 경련할 때마다 똑같이 따라서 거세게 진동하고 있었다. 쪽, 쪽, 쪽, 쪼옥, 츄웁, 쪽, 쪽, 쪼오옥……. 수없이 각도를 달리하며 연인의 격렬한 입맞춤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파정 직후, 잠깐 의식을 잃어버린 탓에 조금도 자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숨은 진실이었다.

“꼴사나우니까 이제 그만 치우시죠.”

머리 위에서 비웃음이 선연한 명령이 내려왔다. 흐릿하게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눈을 뜨자 연인의 군함처럼 커다란 발이 보였다. 더 이상 시야가 새까맣지는 않았다. 서 있는 것 같은 연인의 다리 너머로 거꾸로 뒤집힌 방 안 풍경이 보였다. 모로 누워 있는 자세 때문이었다.

“일어나시란 말입니다. 혜윤이 들어오기 전에 더러운 흔적은 치워야죠.”

담담해서 오히려 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명령이 재차 귓전을 두드렸다. 여전히 가쁘게 토해지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을 짚고 간신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몸뚱이는 자동인형이었다. 연인의 목소리에 무심코 반응하는 데 있어 떨어진 체력이라든가 건강 상태 같은 것은 고려의 대상조차 못 되는 것 같았다.

바닥을 짚은 두 손은 물론, 연결된 두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더 이상 두려움이나 공포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최악의 고통을 정면으로 헤치고 나오니 더는 두려울 게 없다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전히 좀처럼 일어설 수 없을 지경으로 사지에 힘이 없는 것도 그저 단지 현저히 떨어진 체력 문제일 것이다. 기왕에도 수시로 기절할 것만 같았는데, 반강제적인 파정까지 했으니 컨디션은 한계치 이상 떨어져 있을 것이다.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자신이 일어나 앉는 사이, 연인이 안방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방 안에 가득 차 있던 자신의 정액 냄새 때문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싸늘한 칼바람이 열이 올라 있던 전신에 확 끼쳐드는 게 느껴졌다. 가차 없는 한기에 설핏 몸서리를 치긴 했으나 덕분에 정신은 좀 더 맑아지는 것 같았다. 떨리는 손가락을 애써 가누며 무릎 아래까지 내려가 있던 팬티와 바지를 간신히 끌어올렸다. 지퍼를 올리고 벨트도 채웠다. 축축하게 젖은 채라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어차피 곧 축객령이 떨어질 터였다. 그전에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는 기운을 비축해둬야 했다.

“치우라는 말 안 들리십니까?”

도로 가까이 다가온 연인의 늘씬한 다리가 보였다. 무릎 언저리가 해질 대로 해진 낡은 블루진이 코앞에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 위야. 기운 좀 나면 갈게. 곧 갈게.

“뭐라고요?”

대꾸를 한 것 같은데 목소리로는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보았다. 재차 부탁을 해보려고 입술을 벙끗거리는데 무언가가 앞으로 툭 던져졌다. 표면이 번들거리는 어떤 액체로 흥건하게 뒤덮여 있는 소시지 하나와 자신의 정액으로 얼룩진 휴지 뭉치였다.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다시금 눈앞이 새까맣게 변하는 아득한 충격이 닥쳤다. 대신 새하얗게 탈색되는 낯빛도 얼핏 느껴졌다.

“주방 싱크대 옆에 휴지통이 있습니다. 나가시는 길에 버려주세요.”

참 무신경한 명령 같았다. 여전히 서늘하긴 했으나 그래도 더 이상 펄펄 끓는 시퍼런 불길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마음껏 분노를 발산했으니 더 이상 화를 내고픈 마음도 없을지 모른다. 아니, 이젠 화를 낼 만한 가치조차 없는 존재라 여길지도. 안 그런가. 수치와 모멸을 줄 의도일 뿐인 능욕에서조차 창녀처럼 허리를 흔들며 앙앙거린 몸뚱이였다. 기가 막히다 못해 허탈한 비웃음만 나올 것이다.

한동안 숨을 고르고 있자니 다시 시야가 밝아졌다. 소시지와 휴지 뭉치를 집어 든 후 바닥을 짚고 일어나보았다. 약간 비틀거리긴 했지만 제대로 중심을 잡고 서주는 다리가 고마웠다.

“……이번에야말로 약속 지키시길 바랍니다. 만약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을 땐 나도 더 이상은 참지 않겠습니다. 소문이 나든 말든 당신을 법정에 세울 겁니다. 신애 씨를 납치하고 내 아이를 살해한 죄 몫으로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릴까요? 당신의 그 범죄 덕분에 신애 씨와 나는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더욱 돈독해졌죠. 소문이 돌아 신애 씨 집안의 반대가 이어져도 우린 꿋꿋이 견뎌낼 겁니다. 미리 알았다면 그날 밤 당신에게 그 역겨운 짓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 당신 때문에 행여 우리가 헤어지지 않을까 헛물일랑 켜지 마시고 조용히 당신의 세상으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다신 볼 일이 없도록 하죠.”

확인 사살이었을까? 옆에서 차분하게 떨어지는 연인의 독설이었다. 도망치듯 안방을 벗어난 건, 연인의 그 시린 독설이 괴로워서는 아닐 것이다.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은 맞았다. 극단의 고통에 노출된 다음엔 그보다 못한 고통쯤은 어느 정도 생성된 내성 탓에 자각이 한결 무뎌지는 법이었다. 지금이 딱 그런 것 같았다. 평소라면 정말로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을 연인의 치명적인 독설이었지만, 그저 약간의 어지럼증과 나른함만 느껴질 뿐 더 이상의 아픔은 자각할 수 없었다. 아니, 아예 감각 중추의 어디쯤인가가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고통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체의 감정조차 전혀 자각되지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비틀거리며 안방 밖으로 나오니 연인이 말해준 장소에 정확히 휴지통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연인이 던져준 흉물들을 다시 쳐다보는 것도 아득하기만 해서, 끝까지 외면한 채 입구를 더듬어 ‘그것’을 버렸다. ‘그것’에서 묻어난 미끈거리는 감촉이 손끝에 만져졌다. 식용유에 자신의 체액이 섞인 것 같았다. 연인이 ‘더러운 흔적’이라고 표현한 게 이해가 갔다.

더러운 소시지. 더러운 체액. 더러운 욕망. 더러운 몸뚱이…….

순간, 심장이 창에 꿰뚫리는 것 같은 격심한 통증이 닥쳤다. 다리가 심하게 휘청거리며 또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아서, 개수대 위에 몸을 기대야만 했다. 한 손으로 개수대 선반을 잡고 상체를 크게 앞으로 기울인 다음 다른 한 손으로 가슴 부근을 꼭 움켜쥐었다. 숨을 헐떡이며 참아보는데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통증이었다. 이마와 콧등으로 식은땀이 비죽 솟아나는 게 느껴졌다. 흡사 심장에 마비가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협심증 증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자신은 아주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발작인 셈이었다. 숨 막히는 고통 중에도 나쁘지 않다고 수용하는 비밀스러운 ‘악마’가 있었다. 정말로 심장이 이대로 기능을 멈추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가버릴 건데, 여기서 더는 아프지 말고 그냥 가버리면 진짜 좋을 텐데 하고.

……그래…… 그냥 여기서 끝내버릴까……?

홀연 진심의 유혹이 올라왔다.

어차피 자신은 더러운 몸뚱이에 불과하다고 판명이 났는데 더 이상 잃을 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서 더 바닥으로 떨어질 일은 결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여기서 그만 끝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어차피 집에 돌아가봤자 다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틀리에 욕실에서 손목을 긋는 거나, 지금 당장 아픈 심장에 칼을 찔러 넣는 거나 뭐가 다를까. 아니지. 다르긴 다르구나. 지금 당장 고통이 멈추는 게 다르지. 그래. 집에 돌아갈 기력을 짜내는 것도 무척 힘들 거 같은데 그냥 여기서 해버려……?

시간이 갈수록 마음속의 악마가 점점 더 구체적인 형태를 띠어가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심장도 점점 더 마비되고 굳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을 움켜쥔 손이 벌벌 떨고 있었다. ‘더러운 흔적’이 묻어 있던 손이었다. 문득 진저리를 치며 가슴에서 손을 떼어냈다. 개수대의 물을 틀었다. 쏴아 하고 물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양손바닥을 가져다대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촉이 바늘로 피부 표면을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흐릿하게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안방으로부터였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연인의 목소리도 곧이어 들려왔다. 눈으로 싱크대 주변을 살폈다. 나무로 된 칼꽂이 위에 주방용 칼 두 개와 식(食) 가위, 그리고 과도 한 개가 꽂혀 있는 게 보였다.

“……신애 씨…….”

어깨가 움찔 하고 떨렸다. 밀어처럼 달콤하게 떨어진 연인의 부름 때문이었다. 손을 뻗어 25센티쯤 될 식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니, 그냥 꾀병일 뿐이었어. 걱정할 거 없어, 신애 씨.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만 뒀다고 외로웠나 봐.”

오른손으론 칼을 들고 왼손으론 코트 깃을 열어 찔러 넣을 부위를 가늠했다. 많이 아플까? 조용히 자문도 해보았다. 아프겠지. 조용히 대꾸했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도 아픈 심장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이상야릇한 통증에 속이 메스꺼울 정도였다.

“후후, 그럴까? 크리스마스 파티라…… 하긴 녀석도 이벤트라면 사족을 못 쓰긴 하지. ……그래? 하지만 괜찮겠어? 당신 오늘만큼은 단둘이서 로맨틱하게 보내자고 했지 않나.”

다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연인의 목소리는 흡사 다른 사람의 그것 같았다. 너무나 낯설어서 이상야릇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디쯤을 찌르면 단번에 죽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는 주제에 온 신경이 안방의 연인에게로 가 있는 자신 또한 이상야릇하긴 한가지였다.

“……음, 글쎄……. 나야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하는 거지만…… 솔직히 혜윤이가 신경이 쓰이긴 했지. 하필 휘야 녀석까지 여행을 가는 바람에…… 그래도 되겠어? ……음, 그래. 그럼 혜윤이도 데리고 가지…… 아니, 집 안에 김치찌개 냄새가 진동을 하는 걸 보니 저녁은 먹은 모양이야. 케이크 좋아하니까 따로 준비할 건 없을걸. 음, 그래. 그럼 아이스크림이나 한 통 더 사 가지고 가도록 하지.”

돌아가? 그녀에게 돌아간다고? 혜윤이도 데리고? 그 착하고 예쁜 내 누이를? 가서 파티를 한다고? 크리스마스 파티? 이벤트라면 질색을 하더니 내 누이까지 데리고 가서 그녀와 파티를 해? 나를 빼놓고?

“……트리? 이 시간에 트리를 어디서 사……? 양재동에? 꽃시장? 서초동에서 한걸음이라고? 이런, 이런! 당신 어리광이 너무 느는 거 아닌가?”

멍하니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내주기 싫어…….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로 증식한 악마가 속삭이고 있었다.

―……함께 가는 거야, 장인환. 함께 데리고 가자. 연인도 데리고 가면 더 이상 이렇게 아프지는 않을 거야. 외롭지도 않을 거야…….

되풀이, 되풀이해 꼬드기고 있었다.

―……그렇지? 사실은 그녀에게 주기 싫은 거지? 응, 맞아. 사실은 주기 싫어. 화가 나. 아주아주 많이 화가 나. 연인은 내 건데. 내 거 같은데……. 누가 뺏어간다는 거야. 혜윤이도 내 거야. 내 누이야. 신애 씨가 뭐가 어쩌고 어째? 그녀 따위가 다 뭐야. 줄 수 없어. 빼앗길 수 없어. 다 내 거야. 다 내가 가져갈 거야. 가져가서 영원히 내 걸로 만들 거야…….

“……음, 글쎄…… 곧 출발할 테니 한 9시쯤이면 도착하지 않을까? 러시아워도 장담을 못 하겠고……. 아니, 올 땐 그리 막히지 않았어……. 응…… 응, 그래…… 응…… 나도 사랑해, 신애 씨…….”

새하얀 날개가 보였다. 아니, 연인의 몸을 감싸고 있는 크림색 터틀넥 스웨터였다. 물소리가 났다. 개수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였다. 폭포수 소리처럼 커다랗게 들려서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심장이 여전히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메스꺼움도 여전했다. 그래도 더는 떨리지 않았다. 데려갈 거였다. 도로 빼앗을 거였다. ……응, 나도 사랑해, 신애 씨……. 연인의 달콤한 고백은 마지막까지 가느다랗게 남아 있던 마음속의 이성을 완벽히 앗아갔다.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리고 등 한가운데를 겨냥했다. 내리치는 데 그리 힘을 기울일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았다. 철벽같은 체력과 강인한 육체를 가진 연인이지만 흉기 앞에서는 연인도 그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일 뿐이었다. 막 목표 지점을 찌르고 들려는 찰나, 살기를 느끼기라도 한 건지 연인이 전광석화처럼 돌아서는 게 보였다.

퍽……!

무언가에 부딪치는 감촉이 칼끝을 통해 손과 팔에까지 확연히 전달되었다. 반동으로 비틀거리던 몸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는 바람에 5센티쯤 박혀들었던 칼끝이 도로 빠졌다. 새하얀 날개 위에 순식간에 피가 스미는 게 보였다. 미처 내리치기도 전에 연인이 돌아선 바람에 들고 있던 칼끝은 애초의 목표 지점에서 약간 빗나가 틀어박힌 것 같았다. 연인의 오른쪽 어깨와 겨드랑이 사이에서 등 쪽으로 몇 센티쯤 들어간 지점이었다.

크고 늠름한 몸이 심하게 비틀거리며 정면으로 돌아서는 게 보였다. 연인의 손에서 수화기가 떨어졌다. 피가 묻어난 식칼과 연인의 피 묻은 스웨터를 번갈아 들여다보느라 다가오는 연인의 얼굴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었다. 이상했다. 다 이상야릇했다. ……이게 뭐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연인의 얼굴이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시체처럼 새하얗게 질린 낯빛이 섬뜩했다.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칼끝을 세워 한 번 더 찔렀다. 코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연인의 눈시울이 휘둥그레지는 게 느껴졌다. 심하게 일그러졌던 표정이 문득 힘을 잃고 풀리는 게 보였다. 연인의 두 손이 아랫배에 꽂힌 식칼을 잡아 빼는 것도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식칼 손잡이를 쥐고 있던 자신의 오른손이었다. 칼이 빠지며 부드럽게 살을 가르는 감촉이 섬뜩하게 전달되었다. 마치 지도가 그려지듯 크림색 스웨터를 선명하게 적시며 재빠르게 퍼져가는 피 얼룩이 보였다. 연인이 이리저리 팔을 허우적거리며 심하게 몸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선 채 그런 연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장의 통증이 차츰차츰 스러지고 있었다. 눈꺼풀을 떴다 감았다 하며 자신을 향해 시선을 맞추기 위해 필사적인 것 같던 연인이 마침내 바닥으로 쓰러지는 게 보였다.

쿵……!

쓰러지면서 머리를 심하게 부딪친 것 같아서 놀라 무릎을 꿇고 연인을 살폈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은 새파랗고, 낯빛은 스웨터만큼이나 창백했다. 너무나 아파 보여서 심장이 또 지끈 하고 울었다. 이번엔 아까와는 좀 다른 통증이었다. 조심조심 연인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뺨을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덜 아플 것 같아서였다. 손에 묻은 연인의 피가 쓰다듬고 있는 뺨과 머리카락에도 끈적하게 달라붙고 있었다. 새빨간 그것이 문득 무서워졌지만, 쓰다듬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위야……?”

가만히 부르자 심하게 떨리는 눈꺼풀이 힘겹게 치켜 올라갔다. 초점을 잃은 눈이 자신의 눈동자를 찾고 있었다.

“……이…… 인환…… 구…….”

“……어……?”

“……구급…… 차…… 불러, 인환아…….”

“……?”

꿈인지 생시인지 정말로 모호해졌다. 연인이 너무나 상냥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정감 넘치는 반말로. 초점을 잃긴 했지만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는 시선도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구급차……?”

고개를 갸우뚱하고 되묻자 흐릿하게 입가에 웃음까지 매단 연인이었다.

“……너…… 무 귀여워…… 하느님…… 왜 이런…… 이…… 이렇…… 게…….”

“……?”

“……안…… 위험…… 인환아…… 안 돼…… 이러면 네가…… 네…… 가…… 위험…… 인…… 환…… 구급…… 차…….”

“……구급차……?”

“……그…… 그래…… 구급차…… 얼른…… 얼…… 인환아…… 좀…… 조금…… 아프다…….”

다시 눈꺼풀이 감겼다. 연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이젠 목덜미며 손까지 온통 창백해지고 있었다. 다리에 닿아 있는 연인의 등 쪽에서 축축하고 뜨거운 감촉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아랫배로부터는 더 많은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응, 구급차…….”

연인의 머리를 도로 방바닥에 내려놓고 바닥에 늘어져 있던 전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아까부터 모기가 앵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그건 전화 수화기로부터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위야, 위야,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야. 말을 해. 위야. 위야아……. 앵앵대는 하이소프라노가 너무나 시끄러웠다. 구급차를 부르려 해도 그녀가 전화를 끊지 않는 한 힘들지 않은가.

“내가 위야를 칼로 찔렀어요, 신애 씨. 구급차 불러야 하니까 빨리 전화 끊어요.”

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무언가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덤으로 들리더니 간신히 전화가 끊겼다. 곧바로 119를 눌렀다. 차근차근 사정을 설명하고 주소와 위치까지 알려준 다음 전화를 끊었다.

도로 연인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연인의 옷이며 주변 방바닥, 그리고 자신의 옷 또한 온통 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역시 좀 무서웠지만 신경 쓰지 않도록 노력했다. 무서워도 연인의 피이니 괜찮을 거였다. 괜찮은 거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아까처럼 연인의 머리와 가슴을 끌어올려 품에 꼭 안은 채 양쪽 뺨을 손바닥으로 열심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달리 명령이 없어 이번엔 자신 쪽에서 말을 걸었다.

“……구급차 불렀어, 위야. 금방 온대.”

“…….”

“……안 아프게 해줄 거야. 조금만 기다려.”

“…….”

“……이상해…… 이상한 꿈이야…….”

“…….”

“……정말 안 무서운 걸까? 아닌데…… 무서운 거 같애, 좀…… 피가 너무 많이 나…… 어떡하지……? 이상해, 위야…… 나, 좀 많이 이상해…….”

“…….”

“……왜 대답 안 해? 응? 아까처럼 말해줘봐, 위야. 다정하게 인환아 하고 불러봐. 응?”

“…….”

“……너무 아파서 기절한 거구나…… 괜찮아, 나도 금방 따라갈 거니깐…… 함께 가면 아프지 않을 거야, 위야…… 내가 꼭 안아서 아프지 않게 해줄게…….”

문득 빨리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급차가 금방 온다고 했으니 그 금방이 5분 안쪽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연인을 안고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지금이 너무나 좋았다. 좀처럼 포기가 쉽지 않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래서 한 팔로는 여전히 연인을 꼭 껴안고 다른 손으로는 옆에 내팽개쳐져 있던 식칼을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자신의 심장에 찔러 넣을 작정이었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벌써 왔나? 아차 싶어 연인의 상반신을 도로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칼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자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어라? 선생님 아직도 안 가셨네……? 저기……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그냥 나 들어가도 되지, 오빠? 선생님이랑 화해한 거지……?”

얼이 빠진 덕분에 한동안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있는데, 활짝 열려 있던 안방 문틀을 배경으로 고개만 빼꼼 내민 혜윤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자신의 멍한 시선이 티 없이 아름다운 소녀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눈치를 보듯, 생글거리는 웃음이 물려 있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문틀 뒤에 숨어 있던 하늘색 더플코트와 검정 털모자와 털목도리, 그리고 주황색 트레이닝복 바지도 차례로 보였다. 바짓가랑이 아래, 핑크색의 앙증맞은 곰돌이 양말은 너무나 귀여워 만져보고 싶기까지 했다.

몇 초? 혹은 몇 십 초였을까? 서로의 눈만을 빤히 들여다본 채 자신도, 혜윤이도 한동안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내내 인환을 사로잡고 있던 이상야릇한 악마의 비현실감은 그 무구한 눈동자의 직시를 받는 동안 빙산이 녹아내리듯 조금씩 부서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온몸이 다시금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바닥끝으로부터 시커먼 어둠이 몰려들고 있었다. 스멀스멀 스며드는 검은 안개는 흡사 시체를 태우는 죽음의 연기 같았다.

“……죽였어…… 요?”

이윽고, 누이의 조용한 물음이 떨어졌다.

“……오…… 오빠…… 우…… 우…… 울 위야 오빨 죽인 거예요……?”

하얗게 질린 어린 천사 혜윤이가 멍하니 묻고 있었다. 제 오빠의 피투성이 몸뚱이에 이어 혜윤이의 휘둥그레진 시선이 들어가 박힌 곳은 인환 자신이 들고 있던 식칼이었다. 새빨간 액체로 범벅이 돼 있는 식칼이었다. 아직도 자신의 손가락을 뜨뜻하게 적시고 있는, 연인의 선홍색 피였다.

미심쩍어하며 휘둥그레졌던 눈이 경악으로, 이어 끔찍한 공포로 변하는 데는 그닥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한 가녀린 몸이 보였다. 얼굴이 너무나 창백해서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은 걱정에 문득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게 더 공포였는지 움찔 몸을 떠는 혜윤이였다. 자신이 앞선 딱 그만큼 뒷걸음질을 친 혜윤이였다.

“……혜윤아…….”

애틋한 부름이 입술 틈으로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히이익. 폐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기묘한 신음성이 혜윤이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자신이 다시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가자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혜윤이가 총알처럼 뛰쳐나갔다. 안방 문틀을 배경으로 잔상처럼 흔들리는 하늘색 더플코트 자락을 얼핏 본 것 같았다. 새빨간 피가 뚝뚝 듣는, 날카로운 칼날을 통해서였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점점 더 시야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리 천사, 우리 사랑스러운 누이 혜윤이가 화를 내고 나가버리니 도통 저 시커먼 것들을 물리칠 도리가 없었다. 따라가야만 했다. 아니, 데려와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해주어야만 했다. 연인을 죽이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어야 했다. 그저 함께 데려가고 싶어서였다고 전해야 했다. 모두 함께 있고 싶어서라고. 아, 그렇지. 혜윤이도 데려와야 하는 까닭이 거기 있었다. 자신의 누이였다. ‘그녀’의 누이가 아니라, 자신과 연인의 누이였다. 그 말을 자세히 해주어야 했다. 혜윤이는 지금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모두 함께 있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꼭 말을 해주어야 했다. 함께 있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라고. 다 차근차근 설명해주면, 혜윤이는 영리하고 착하니까 자신의 마음을 다 이해해줄 거라고. 그러면 여전히 착하고 예쁜 자신의 누이로 되돌아와 언제나처럼 자신에게 따뜻한 애정을 듬뿍듬뿍 줄 거였다.

힘이 풀린 사지를 질질 끌다시피 안방을 빠져나왔다. 바로 누운 채 미동조차 않는 연인을 잠깐 돌아보았다가, 곧 혜윤이를 데려올 것이기 때문에 짧은 양해만 구했다. ‘금방 갔다 올게, 위야’ 하고. 현관문을 열다가 문틀에 부딪치는 바람에 오른손에 움켜쥐고 있던 식칼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손도 다리 못지않게 벌벌 떨리고 있어 좀처럼 악력이 생기지 않는 것 같았다. 서로를 완벽하게 묶어줄 도구이니 소중하게 챙겨 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얼핏 스쳐갔지만, 마음이 너무 급한 나머지 일단 현관 바닥에 두고 가기로 결정했다.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송곳처럼 찔러대는 칼바람이 사방에서 불어닥쳤다. 코트 깃을 꼭 여미고서 길 끝을 쭉 더듬어보았다. 벌써 한참을 달려 내려갔는지, 혜윤이의 모습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을씨년스러운 달동네의 초라한 길거리만 어둑하게 눈에 밟혀들 뿐이었다. 다른 동네 사람들의 모습도 전혀 눈에 띄지 않아서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유령 마을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간간이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문들도 보였지만 그것이 진짜 불빛들인지는 매우 의심이 들었다. 어둑어둑하게 흔들리는 것이 꼭 무덤가를 떠도는 도깨비불들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시시각각 이상야릇하게 어두워지기만 하는 시야도 그런 착각을 주는 데 일조를 하고 있을 터였다. 얼른 찾아내야 해. 마음속 악마가 조바심을 쳤다. 알았어, 그만 재촉해. 얼른 찾아서 집으로 데려올 거니깐. 자신만만하게 뇌까리긴 했는데 사지엔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절름거리며 비틀거리다가, 마침내 주저앉았다가, 얼마쯤은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기어도 가다가, 힘이 좀 나는 것 같으면 잠깐 동안 맹렬한 스퍼트를 하기도 했다. 분명 올라올 땐 10분 정도가 걸린 것 같은데, 어째 내려가는 게 더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뛰다 기다 하고 있다지만 더뎌도 너무 더뎠다. 너무 초조해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날다람쥐처럼 재빠른 혜윤이는 이렇게 자신이 굼벵이처럼 기는 와중에도 한참을 멀어지고 있을 터였다. 이상했다. 숨을 가쁘게 헐떡이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넋을 사로잡았다. 꼭 악몽 속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열심히 달리고 또 달리는데, 실은 사지가 꽁꽁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지독한 악몽 속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지독한 공포감이 피크로 치솟기도 하고, 그다음 순간엔 무한히 평화로운 방심 상태가 되기도 했다. 시커먼 나락에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는 듯한 까마득한 기분이 들다가도, ‘연인은 이제 내 거야!’ 하고 사방에 외치며 희희낙락 낄낄대는 물밀듯한 희열이 있었다. 축축하고 춥고 더럽고 근질거리는, 좁고 어두운 동굴 속에 갇힌 것 같다가는, 또 잠시 후엔 보이지 않는 날개가 등에 달린 덕분에 훨훨 날고 있는 것만 같은 엄청난 자유와 해방감을 느꼈다. 도무지 스스로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오른쪽 발바닥에서 꽤 아픈 통증이 올라왔다. 내려다보니 주변이 온통 깨진 유리조각 천지였다. 그제야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라는 게 자각되었다. 통증이 느껴지는 발바닥은 벌써 양말 위로 흥건하게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아픔 따위보다 걸음이 더 더뎌질 것 같아 근심이 되었다. 가능한 한 눈에 띄는 유리를 피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오른쪽 발바닥은 욱신욱신 쑤시며 제가 입은 대미지를 매순간 철저히 각인시키고 있었다. 덕분인지 이상야릇하면서도 공포가 느껴지는 초현실적인 악몽의 감각이 조금은 엷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몇 분쯤을 더 내려갔을까? 드디어 진입로 입구가 보였다. 어둑어둑한 무덤가의 도깨비불 대신, 훨씬 선명한 도시의 불빛들이 사방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길 넘어서면 바로 대로변일 터였다. 나중에 추측해보건대 한 20여 분쯤을 뛰다 기다 하며 걸어 내려온 것 같았다. 진짜 사람다운 사람들도 꽤 많이 눈에 띄었다. 간간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듯 힐끔거리는 시선을 주는 게 느껴졌다. 맨발도 맨발이지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캐멀색의 알파카 코트 자락이며 갈색의 양모 팬츠 바짓단을 선연하게 물들이고 있는 핏자국이 새삼 자각되었다. 연인의 피였다. 자각과 동시에 또 까마득히 추락하는 것 같은 아득한 어지러움이 닥쳤지만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금방 갈게, 위야……. 벌써 뻑뻑하게 굳어드는 핏자국에 살며시 손바닥을 가져다대곤 조용히 뇌까렸다. ……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

앵앵앵앵……. 멀리서 앰뷸런스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소리를 따라 무심코 도로변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꽤 많은 수의 인파가 한데 모여 있는 커다란 검은 덩어리를 발견했다. 사람들 사이로 널브러져 있는 오토바이가 한 대 보였다. 오토바이는 한눈에도 반쯤은 부서져 있었다. 위치를 보니 오토바이가 횡단보도 앞에서 인도(人道) 쪽으로 뛰어든 것 같았다. 사람들은 오토바이에서 10여 미터쯤 떨어져 있는 인도 쪽에 더 많이 몰려 있었는데, 오토바이 운전자로 보이는 헬멧을 쓴 남자가 보도 위에 길게 누워 있는 게 보였다. 부상을 당한 건지, 아니면 아예 사망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전면의 상가에서 불빛이 훤히 쏟아지고 있어 잿빛의 보도블록 위를 낭자하게 물들이고 있는 핏자국만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상야릇한 기분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핏자국 때문인지도 몰랐다. 마치 연인이 저 위에 드러누워 있는 것만 같아서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걸음을 빨리하는 자신이었다. 비현실적인 생각이라는 걸 어렴풋이 인지하면서도 무턱대고 옮겨지는 걸음을 좀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5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을 때 사람들 틈으로 반쯤만 드러나 보이던 시체의 전모가 전부 드러났다. 검은색 파카와 역시 검은색 반바지를 걸친 작달막한 키의 남자였다. 역시 검은색 헬멧을 쓰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체구만 보더라도 절대 연인일 수가 없는데도, 전신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충격이 느껴졌다. 역시 핏자국 때문일 것이다. 이상해……. 문득 뇌까렸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왜 여기 서 있는 거지? 여기가 어디야? 아니, 이건 진짜 전부 현실인 건가……? 되풀이해 중얼거리고 있는데, 검은색 시체 너머로 또 한 구의 시체가 땅바닥에 가로놓여 있는 게 보였다. 오토바이 운전자보다 7∼8미터쯤 더 떨어져 있는 곳에 누워 있는 형체의 주변 또한 수많은 인파들로 바글바글했다.

“저 애를 피하려다 인도로 뛰어든 거래요. 저 애가 빨간불인데도 무턱대고 횡단보도로 달려들었다네요. 정면으로 치인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 저 애도 심하게 다친 건 맞나 봐요. 아직 어린 학생인 것 같던데 안됐어요. 빨리 앰뷸런스가 와야 할 텐데, 참…….”

“그래도 저 앤 아직 죽지는 않았잖아. 저 친구는 즉사라구. 신호도 무시하고 무단횡단을 한 계집애 하나 때문에 멀쩡한 사람 인생 조졌잖아. 계집애야 자업자득이지.”

“당신은! 무슨 말을 그렇게 야박하게 해요! 철이 없어서 그런 거지, 저 애라고 사고를 내고 싶었겠어요?!”

벌 떼처럼 웅성거리는 소음들 속에서 사정이 어찌 돌아간 건지 대충 추측이 잡히고 있었다. 다행히 또 한 구의 검은 덩어리는 아직 시체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상했다. 다 이상야릇했다. ……이게 뭐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암담한 상념이 홀연 마음속에서 떠올라왔다. ……미치는 건가? 자신은 지금 미치는 건가? 아니, 이미 미쳐버린 채 너무 멀리 달려와버린 건 아닐까……?

음습하면서도 신비롭고, 몽환적이면서도 악마적인, 이상야릇한 전조에 떠밀리듯 또 다른 반시체 덩어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유리에 찔린 발바닥이 몹시 아팠다. ……칼에 찔린 연인은 더 아프겠지……? 불쑥 치켜든 자문에 또 까마득한 충격이 왔다. 숨이 몹시 헐떡거렸다. 알 수 없는 공포감 또한 피크로 치솟았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가늘게 시작했던 그것은 곧 경련처럼 극심한 진동으로 바뀌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땐 그저 시커먼 덩어리로만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선명해지는 반시체의 ‘형태’ 때문이었다. ‘색깔’ 때문이었다. 익숙한 형태였다. 키는 163센티쯤? 몸집은 상당히 가냘팠다. 머리카락은 늘 어깨 정도까지 길렀는데, 지금은 양갈래로 묶여 있었다. 익숙한 색깔이었다. 주황색 트레이닝복과 하늘색 더플코트였다. 핑크색의 앙증맞은 곰돌이 양말은 여전히 만져보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자신만 맨발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누이의 발도 온갖 먼지와 진흙과 핏자국으로 점철돼 있었다. 자신처럼 유리에 찔린 채 필사적으로 달려 내려온 모양이었다. ……무얼 피해서……? 또 한 번 불쑥 치솟은 자문은 벼락처럼 의식을 일깨웠다. ……뭐긴 뭐야, 바로 너지. 하류 인생, 쓸모없는 민폐덩어리 스토커 괴물이지, 장인환…….

누이와 2미터쯤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우뚝 멈춰 섰다. 발밑이 통째로 붕괴하고 있었다. 개미지옥 같은 끝없는 나락이었다. 이번엔 어지럼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손바닥을 살며시 코트 자락에 가져다댔다. 뻑뻑하게 굳어든 연인의 핏자국이 만져졌다. 눈꺼풀을 수십 번이나 부릅뜨며 필사적으로 매달리는데도 더 이상 악마의 주문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갈 수 없을 거 같애, 위야…….

체념하듯 멍하니 뇌까렸다.

……영영 되돌아갈 수 없을 거야…… 미안…… 나 진짜 이상한 거 같지……? 이상해…… 정말 이상한 꿈이야…….

스멀스멀 퍼지던 어둠은 이젠 사위를 온통 검게 물들인 채였다. 캄캄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의 형상이라곤 단 일점(一占)도 찾을 수 없었다. 공포감이 극에 달하니 아예 공포스럽다는 감각조차 무뎌지고 있었다. 일종의 방심 상태에 가까운 고요와 정적이 찾아왔다.

……정말 안 무서운 걸까? 아닌데…… 사실은 무서운 거 같애, 위야……. 좀…… 피가 너무 많이 나…… 어떡하지……? 이상해, 위야…… 나, 좀 많이 이상해…… 이상해서…… 네게 갈 수가 없나 봐…….

그것이, 그날 마지막으로 기억한 뇌까림이었다.

……네게 갈 수가 없어, 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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