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1994년 1월. 문위(文偉)
“……그 자식 모친이라는 사람이 병실에 계속 찾아오나 봐. 휘야 녀석은 그 자식 나오기만 하면 죽인다고 여전히 거품을 물고 있고, 그나마 윤열이 형이 돌지 않게 간신히 붙들고 있어.”
병실 창 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새 제법 쌓였는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건물들의 지붕은 온통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2∼3센티는 쌓인 것 같았다. 사고가 나던 날에도 한파가 기승을 부리더니, 입원 열이틀째인 지금도 며칠째 영하 10도를 오르내리고 있는 한파는 여전했다. 그나마 오늘은 눈이 내리고 있어서 그런지 조금은 풀린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여기도 찾아오지? 안 만나주고 있다며?”
병원에 매일 출퇴근을 하다시피 하는 성준이 녀석이었다. 오면 두세 시간은 기본으로 죽치고 앉아 계속 말을 붙이는 통에, 솔직히 요 며칠은 계속 귀찮다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이틀 후면 퇴원할 수 있다고 하니 새삼 이제 와 오지 말라고 하기도 그랬다. 하긴 무슨 상관이 있을까. 피붙이와 다름없는 녀석이니 상대를 안 해줘도 혼자서 잘만 노닥거리다 가는 것을. 녀석도 이번 일로 많이 놀란 모양이니(깨어났을 때 퉁퉁 부은 눈두덩에 눈물콧물 범벅인 녀석의 얼굴을 보고 웃음까지 터질 뻔하지 않았나), 이렇게라도 놀란 마음을 추슬러준다면 그도 다행인 거겠지.
“……한 번은 만나야잖아. 네 기분이 어떤지는 아는데 자꾸 찾아와서 휘야 녀석 돌게 만드는 것도 그렇고, 어떻든 정리는 해야잖냐. 혜윤이 병원비 문제도 그렇고 말야. 합의를 해주든 안 해주든 그쪽에선 혜윤이 병원비나 위자료는 확실히 처리해줄 모양이던데.”
“…….”
“……알아. 나도 생각 같아선 위자료고 뭐고 다 뒤집어엎고 싶다. 그 개자식, 지금 감옥에 있지 않았음 휘야가 아니라 내 손에 먼저 묵사발 됐을 거야. 윤열이 형도 용서해줘야 하네 마네 하면서 잘난 척을 해대곤 해서 영 재수지만, 그래도 심정은 우리랑 똑같을 거다. 너도 너지만 혜윤이 그런 꼴로 누워 있는 걸 생각하면 정말 천불이 나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난다, 나 요즘.”
“…….”
“……신애 씬 어때? 놀라서 노이로제 증세까지 생겼다며?”
“…….”
“……나, 전공을 신경정신과로 할 생각인데 나중에 네 마누라 주치의 되는 거 아니냐? 한번 맘이 다치면 육체와 달리 재발이 졸라 쉬운 거 알지? 암보다 재발률이 높은 게 정신과 질환일걸?”
“…….”
“……너도 정신과 전공할 생각 없냐? 찝찝한 피 같은 거 자주 안 보고 쌈박하잖냐. 안 그래? 신경외과 그거는 진짜 머리 빠개지는 3D 아니냐? 중노동에, 죽을 때까지 박 터지게 공부도 해야 하고…… 이제라도 생각 고쳐먹는 게 어때? 신경정신과로 바꿈 네 마누라 네가 주치의도 하고 좋잖아. 아, 참! 가족은 주치의가 될 수 없지!”
“…….”
“……미안. 농담할 상황 아니라는 거 아는데, 나도 하도 심란해서 그런다. 혜윤이만 생각하면 정말 우울해져서…… 그래도 아주 실망할 단계는 아니라잖아. 오늘이라도 깨어나려면 깨어날 수도 있다고. 어디 터지고 잘리고 한 거에 비하면 그나마 얼마나 다행이냐. 뇌도 멀쩡히 살아 있잖아. 그러니까 미리 실망하지 말자, 짜샤. 응? 혜윤이 그 착한 게 우리 속 그렇게 많이 썩일 거 같진 않다, 난. 걔가 얼마나 말을 잘 듣는 애냐. 좀 놀려먹으려고 해도 하도 순딩이에 둔탱이니 뭐 놀리는 맛이 있어야지. 안 그냐? 그런 애니까 곧 깨어날 거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짠 하고 깨어나서 예전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아줌마 잔소리나 해댈 거야. ‘성준 오빠, 우리 집에 오려면 커피믹스 같은 건 알아서 사 오도록 해. 성준 오빠 부자라매? 쩨쩨하게 커피믹스 사 오랬다고 진짜 달랑 커피믹스 하나만 사 오냐? 나 아이스크림 좋아한다는 거 알아, 몰라?’……. 어떠냐? 성대모사 좀 해봤다. 혜윤이 비슷하냐?”
“…….”
“……아, 씨! 뭐라고 말 좀 해라, 새꺄! 아님 사람다운 표정이라도 지어보든가! 이건 뭐 꼭 살벌한 사천왕상을 앞에 둔 거 같잖아! 진짜 무섭다, 인마!”
“…….”
“야, 문위!”
“……그만 가. 신애 씨 올 거야.”
어떻게든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쓰는 성준이라는 걸 아는데도 좀처럼 대꾸는 떨어지지 않는다. 녀석의 속도 말이 아니라는 걸 절절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녀석의 속까지 헤아려줄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거다. 아니, 여유고 뭐고 아예 감정 기능 자체가 마비된 것 같으니, 더 이상 타인의 마음을 읽고 그것을 배려한다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오올! 애인 땜에 계속 찬밥 취급이었냐?”
입술을 삐죽이며 팩 고개를 돌려버리는 녀석에게 처음으로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어쩌면 이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똑같을까. 연희동 코흘리개 시절에도 녀석은 툭하면 자길 따돌린다고 저렇게 입을 삐죽이며 심통을 부렸었다. 하다못해 여자애들까지 낀 소꿉장난에선 여자애가 더 주인공인 걸 못 참겠는지, 지가 자신의 색시를 한다고까지 박박 우기지 않았던가.
“……헤, 겨우 웃네?! 애인 앞에선 그래도 좀 웃나 보지?”
슬쩍 눈치를 살피며 표정이 풀어지는 녀석에, 자신의 마음은 다시금 무감각해지고 있다. 입을 삐죽이는 녀석의 소싯적 버릇으로 촉발된 행복한 시절의 추억이, 곧바로 우스울 정도로 재수 없는 가족사의 기억으로 이어진 까닭이었다. 아아, 그래. 코흘리개 시절로부터 13여 년 남짓, 사랑하는 이들은 차례차례 자신을 떠나갔다. 그리고 이제 가장 최근의 상실로서 누이 혜윤이가 있었다. 하도 기가 막히면 인간은 슬퍼하거나 화를 낼 기력조차 상실한다고 했던가. 지금의 자신이 그러했다. 아버지, 강이 형, 엄마, 그리고 혜윤이. 아아, 부러 잃어‘버린’ 그도 있구나. 모두 다섯. 가만, 그럼 이제 자신에게 누가 남아 있는 거지? 휘야, 윤열이 형, 그리고 성준이뿐인가……? 과반수에도 채 못 미치는 야박한 뺄셈에 문득 가슴이 사무쳤다.
“……위야?! 왜 그래?!!! 가슴은 왜 쥐어?!!! 아픈 거냐?!!!”
겁에 질린 것 같은 성준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팔과 어깨를 와락 움켜쥐는 강한 악력도 느껴졌다.
관자놀이와 등줄기로 식은땀이 비죽 솟았다. 심장을 무언가 날카로운 것으로 후비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강한 악력으로 꽉 조이는 것도 같았다. 요 며칠 사이 익숙해져버린 ‘낯선’ 통증이었다. 꼭 협심증 증상과 비슷하지만 실제 심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니 분명히 정신적인 문제일 것이다. 한동안 숨을 쉬기도 힘이 들어서 자신의 팔을 쥐고 있는 성준이의 손목을 으스러져라 움켜쥔 채 숨을 골라야 했다.
“……왜, 왜 그래……?! 가슴이 아픈 거냐?! 의사 불러와?!”
당황이 역력한 성준이의 외침에 묵묵히 고개만 가로로 흔들었다. 성준이를 앞에 두고는 최초의 발작이라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아예 울음기까지 밴 목소리에 입원 첫날(정확히는 사흘째) 보았던 눈물콧물이 겹쳐서 속으로 실소가 흘렀다.
“……전공 잘 선택했다, 김성준. 넌 앞으로 내 주치의까지 해야 할 모양이니까…….”
“에?”
“……심장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가끔씩 가슴이 쑤시곤 하는데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스트레스라고?”
“혜윤이가 그렇게 됐는데 몸뚱이라고 맨 정신일 수는 없겠지. 비싼 고객 둘이나 확보됐으니 공부 열심히 해둬라. 돌팔이 같으면 네게 안 맡긴다.”
“어어? 야, 이 자식……!”
가벼운 어조로 덧붙이니 그제야 얼굴의 울상이 풀리는 게 보였다. 선 채로 휠체어에 앉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헤드록까지 거는 녀석의 거친 몸짓에 등의 상처가 울리며 통증이 느껴졌다. 이번엔 확실한 육체적 통증이었다. 나지막하게 신음을 토하자 그제야 기겁해선 목을 놓아주는 성준이다.
제법 심한 상처였던가 보았다. 등도, 아랫배도. 출혈도 심해서 조금만 늦었으면 출혈 과다로도 죽었을 거라고 의사들은 말했다. 아득하게 침몰해가는 의식의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구급차를 부르라고 명령했는데 덕분에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이 경우 그를 살인 미수범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그래. 좋게 봐줘서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두자. 자신에게 있어서만큼은 그는 무죄다. 무죄로 만들어주고 싶다. 그러나 역시 혜윤이의 경우 이미 빼도 박도 못 할 살인죄였다. 자신은 알았다. 혜윤이가 깨어날 확률은 지극히 희박하다는 것을. 이미 혜윤이의 몸뚱이에 혜윤이의 영혼은 없다는 것을. 그건 그저 혜윤이의 모습을 한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그 또한 설명하기 불가능한 어떤 초월적인 각성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놈만이 알 수 있는 비상한 능력이었다. 그랬다. 혜윤이는 이미 자신들의 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죽어버린 것이다. 엄마나 강이 형이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혜윤아, 거기 가서 엄마 아버지랑 형이랑 다 만나고 있니? 뭐라고 하시니? 멍청한 위야 오빠가 멍청한 짓을 하다가 너마저 잃어버렸다고 한탄하시지는 않던……?
새삼스러운 각성과 함께 또 한 번 가슴이 사무쳤다.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가슴을 움켜쥐자 성준이의 겁에 질린 호들갑이 시작된다. 생각의 끝은 언제나 이렇게 익숙한 고통으로 귀결된다. 아마도 그래서일 거다. 감정 기능이 아예 마비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감정이 살아나는 즉시 자각될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지금의 심장 통증 정도는 그저 껌 딱지에 불과할 테지. 아마도 진짜 발광을 해서 성준이의 미래 주치의 관리 대상 1호가 될지도 모른다. 자기 보호 본능이란 이토록이나 영악한 것이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사흘 만에 깨어났을 때 세계는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피붙이 혜윤이가 사라지고 없었고,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아니, 갇힌 것은 몸뿐이었으되 정신은 그보다 더한 나락에 떨어져 있을 것이다. 어쩌면 혜윤이 못지않을 비참한 죽음을 맞고 있을지도 모른다. ‘동성애자인 신인 화가 장 모 씨, 짝사랑하던 남자에 심야의 칼부림.’ 한동안 신문 사회면을 조그맣게 장식했던 기사 제목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상대 남자에 대한 개인 정보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이미 사건이 일어난 고척동에선 소문이 파다한 것 같았고, 동기들이며 선배들이며 교수들 등등 학교에서도 심심찮게 연락이 오는 걸 보면 자신 주변의 소문은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그나마 남창으로서의 전력까지 퍼진 것은 아닌 모양이었지만, 그도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 물론 신애의 집안에서 얼마나 잘 사건을 조용히 덮어두느냐 하는 능력에 달린 문제겠지만.
신애는 노이로제 증세까지 보이면서도 자신의 곁을 떠나라는 말은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뒤집힌 세상에 적응하기도 전, 결혼식 준비마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아예 결혼을 시켜야 신애의 상태가 안정이 될 거라 여겼는지, 아니면 ‘아이도 못 낳을지 모르는 결함투성이 여자’라는 신애의 자기 비하가 먹혔는지, 저간의 사정이 백일하에 드러난 마당에도 신애의 집안에서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신애 쪽에서 자신을 차버리지 않는 한 자신이 그녀를 버릴 명분은 없었다. 그녀가 결혼을 서두르고 싶다고 한다면, 또한 그를 말릴 구실도 없었다. 앞으로 자신의 남은 삶은 양신애라는 공주님의 철저한 노예가 되는 길만 남은 것이다.
죄였다. 그 대가였다. 어리석은 선택을 한 대가였다. 그제야 알았다. 거꾸로 뒤집힌 세상을 통해서, 그를 버리고 신애를 택한 자신의 지난 선택이야말로 일생일대의 최악의 실수였다는 것을. 자신은 그의 사랑을 쉬 잘라낼 수 있다고 자만했으며 자신의 사랑 또한 제대로 억누를 수 있으리라 자만했었다. 신애를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장래는 물론, 몰락한 문 씨 집안을 일으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아니, 어쩌면 그 자체는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그녀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장래나 문 씨 집안의 영화는 보증수표를 하사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를 위해 실은 어마어마한 희생이 담보돼 있었다는 것을.
그저 자신의 마음만 희생하면 되는 줄 알았다. 사랑하는 마음만 억누르면, ‘게이’가 아니라, 여자를 사랑하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남자만 되면 충분한 것으로 알았다. 그도 당장은 힘들겠지만 머잖아 지독한 이기주의자였던 어린 남창 따윈 잊고 새 사랑을 하리라 여겼었다. 그런데 아니었던 거다. 그따윈 희생이라고 할 수도 없는, 희생 축에도 못 드는 ‘병아리 눈물’에 불과했다.
어리석은 자신은 몰랐다.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을 놈의 인생이 이 모양으로 굴러가게 될 줄은. 설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보물인 혜윤이를 희생해야 하는 것이리라곤, 차마 상상하지 못했다. 생애 유일한 사랑일 그의 인생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리라곤, 또한 상상하지 못했다. 귀하디귀한 두 영혼을 박살 내고서야 획득할 수 있는 ‘장래’였다는 것을, 그토록 값비싼 대가가 필요했다는 것을, 한 미련하고 어리석은 전직 남창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몇 달 동안의 발광이 왜 그토록 힘들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를 잊기가, 그의 사랑을 죽여 없애버리기가 왜 그토록 힘이 들었는지. 아니, 그리 기를 쓰고도 결국엔 끝끝내 잘라내버릴 수조차 없었는지. 그건 자신의 영혼이 바라지 않는 미련한 길로 어리석은 몸뚱이가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랑과 자유를 저당 잡히는 노예의 길로 목을 들이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진해서 올가미에 걸려주려고 발버둥을 치는 몸뚱이를 영혼은 안타까워하며, 슬퍼하며, 내내 경고를 주고 있었다.
……그 길이 아니야. 저 길로 가야 해. 그래야 후회가 없어. 그래야 모두가 살아. 그래야 네 소중한 이들을 온전히 지켜낼 수가 있어. 정신 차려, 문위. 정신을 차려…….
영혼은 그렇게 뒤에서 끊임없이 외치고 또 외치고 있었던 거였다. 후회는 너무나 늦었고, 세상은 통째로 뒤집혔다. 그토록 경계했던 ‘게이’라는 세상의 딱지조차 별게 아니었고, 막상 손에 넣은 (아니, 넣을 것으로 예상되는) 권력도 별게 아니었다. 아닌 것 같았다. 이미 잃어버린 빛나는 두 존재에 비하면, 어쩌면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귀할 소중하고 소중했던 두 영혼에 비하면 참으로 하찮고 초라한 전리품이었다.
……어떻게 하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 어떻게 해야 할 다른 선택지란 게 과연 자신에게 남아 있기는 한 건가…….
“……위야……?!”
성준이의 기겁한 호들갑이 침통한 어조로 변해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 올려다보니 섬세하면서도 날렵한 손가락이 뺨으로 다가와 쓱쓱 문질러대고 있다. 해사하게 잘생긴 얼굴도 참혹하게 구겨져 있었다. 그제야 얼굴을 온통 적시고 있는 뜨뜻하고 축축한 액체를 자각한다. 감정은 꽁꽁 마비돼 있건만 여전히 눈물이 흐른다는 게 신기하다. 혜윤이의 반시체를 보고도 그저 멍하니 무감각한 눈물만 흘러나오더니 요즘 내내 이런 꼬락서니다. 고요해진 마음 대신 몸뚱이만이 통한의 눈물을 흘려대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간 많이도 혹사당한 마음이었다. 이제쯤은 쉬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일 터, 아예 죽여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아니, 이미 죽어버렸나? 죽은 건가? 알 수 없지. 누가 알겠나. 아무래도 좋았다. 영혼조차 꽁꽁 묶여버린 마당에, 살아 있어봤자 노예의 삶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될 물건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눈물은 오래도록 멈추질 않았다.
성준이가 기어이 따라 울고 있는 게 보였다.
퇴원을 했다. 입원한 지 2주일 만이었다.
걸을 때마다 아랫배가 쑤시고, 등의 상처도 아직 제대로 눕기엔 부담이 됐지만 수월하게 아물고 있는 편이었다. 죽음에 근접할 정도까지 갔다 왔다는데도 고작 2주 만에 정상을 찾는 몸뚱이의 질긴 생명력이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퇴원 직후, 혜윤이의 병실에 들러 잠깐 들여다보았다가 역시 무감각한 눈물만 줄줄 흘려 지켜보고 있던 윤열이 형과 휘야를 통곡하게 만들었다. 우스웠다. 이미 비통한 감정 따윈 조금도 느낄 수조차 없는데, 가증스러운 눈물로 가족들을 기만하고 있는 몸뚱이였다. 그런 스스로를 저주하고 증오할 마음조차도 안 드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영혼이 저당 잡힌 죄인의 말로답다고 생각했다.
오후엔 성준이가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고척동 집으로 왔다. 따라오겠다는 신애를 지독한 장소이니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입에 발린 소리로 거절하고 서초동 아파트로 돌려보냈다.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있기도 했고, 더 이상 외가의 눈치를 보기 싫다며 요즘 계속 서초동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는 신애였다. 자신 또한 이사와 혜윤이 문제가 일단락되는 대로 서초동 집으로 옮길 예정이었다. 우선 휘야와 윤열이 형이 함께 지낼 아파트를 알아보는 게 급선무였다. 자신의 피로 난장판이 된 집 안을 목격한 휘야 녀석도 나름대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됐는지 고척동 집으로는 아예 발걸음도 하질 않으려 했다. 옷가지들만을 대충 싸서 녀석은 혜윤이의 병실과 윤열이 형과 성준이의 집을 부나방처럼 전전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이사를 서둘러야만 할 직접적인 이유였다. 위치는 아무래도 자신의 서초동 아파트와 인접한 곳이 좋으리라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윤열이 형과 성준이가 말끔히 청소를 해둔 집 안은 그날의 흔적이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공격을 받은 직후에 정신을 잃은 덕분에 휘야처럼 자신의 집에 몸서리가 쳐지지도 않았다. 설령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해도 감정 자체가 무감각해진 터라 후유증을 앓을 까닭도 없었다. 윤열이 형과 성준이 말로는 경찰들이 그를 데리고 와서 현장 검증까지 했다는데 그런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혜윤이의 옷가지나 책들, 그리고 혜윤이가 자주 듣던 낡은 카세트 라디오처럼 혜윤이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만큼은 보는 즉시 눈물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흡사 전자동 모터라도 달린 것 같았다. 역시 가증스러운 악어의 눈물이 아닐 수 없었다.
상처도 덜 아물었는데 정말 혼자서 괜찮겠냐고 거듭거듭 걱정스러운 물음을 던지는 성준이를 서둘러 돌려보내고 두 시간쯤 잠이 들었다. 확실히 덜 아문 상처가 몸 컨디션에 꽤 영향을 주고 있었다. 운동이라고도 할 수 없는, 걷고 말하고 차를 타는 등 일상적인 움직임이었을 뿐인데도 심한 피로를 느꼈다.
자면서는 꿈을 꾸었다. 그의 꿈이었다. 언젠가 함께 보성에 놀러 갔을 때의 꿈인 것 같았다. 아니, 조금 다르게 윤색이 되긴 했다. 붕어잡이를 했던 그 냇가에서 둘은 멱을 감고 햇빛 아래로 나와 사랑을 나누었다. 실제로는 친구 흉내를 내며 욕망을 참던 시기였음에도, 무의식은 역시나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붕어잡이에 열중한 채 얼굴을 찡그리는 그가 귀여웠고, 온통 모기에 뜯긴 새까만 몸이 사랑스러웠고, 자신을 바라보며 해사하게 웃는 사랑스러운 눈매에 발정했다. 현실에선 무감각한 감정이 꿈속에선 몹시도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깨어 일어나보니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멍하니 욕설을 내뱉으며 속옷과 바지를 갈아입었다. 욕설은 그저 습관적인 반응이었을 뿐이었다. 감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미래의 내 자식은 물론, 누이의 영혼을 살해한 존재에게 여전히 발정을 하는, 그런 후레자식을 향한 모멸과 증오의 감정도 더 이상은 없었다. 그저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이젠 인정하고 있었다. 아마도 평생을 떠안고 가야 할 천형이 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까닭이었다.
해가 지려는지 어둑해져가는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신애의 전화를 받았다. 괜찮으냐며 울먹이는 안부와, 가서 밥이라도 차려주겠노라는 나름대로 절절하고 안타까운 애정을 담담히 거절했다. 파출부 아줌마라도 불러주겠다는 배려 역시 거절했다. 누이를 병실에 두고 파출부가 차려주는 밥 따윈 안 넘어갈 것 같다고 하니 그녀도 납득했다. 잠시 미적미적 눈치를 보는 것 같더니 과연, 서초동 집엔 언제쯤 올 수 있을 것 같냐는 지겨운 재촉이 또 떨어졌다. 기운이 차려지는 일주일 내로 새집도 알아보고 하면 2주일 내로는 완전히 옮길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돌아온 답은 기나긴 한숨이었다. 자신에겐 ‘2주밖에’건만, 모셔야 할 공주님에겐 ‘2주나!’였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떼를 쓸 정도의 머리 나쁜 여자는 아니라, 하루빨리 함께 있고 싶다는 수줍은 고백으로 마무리를 했다. 약 기운 탓에 졸음이 온다는 핑계로 끝도 없이 이어지려는 수다를 겨우 물리칠 수 있었다.
전화를 끊고는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냉장고를 뒤져 김치찌개를 했다. 식욕을 잃은 지도 오래지만 몸의 빠른 회복을 위해선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야만 했다. 참치 통조림을 하나 따고, 김도 찾아내 구운 다음, 밥 한 공기를 깨끗이 비워냈다. 병원에서 처방해준 한 무더기의 약도 털어 넣었다. 30분쯤 지나니 약기운 탓인지 또 잠이 쏟아졌다. 속이 더부룩한 바람에 바로 잠이 들면 안 될 것 같아 TV를 켜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가며 지켜보았다. 아무리 집중을 하려 해도 그저 화면만 건성으로 훑을 뿐 뇌리 속으로는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잠이 든 것 같았다. 또 그의 꿈을 꾸었다. 처음 만나던 날의 꿈이었다. 역시 대폭적인 윤색이 가해졌다. ……너, 남자와도 거래해보지 않을래……? 해사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분홍 재킷의 절름발이 남자에게 문득 가슴을 두근거린 자신이었다. 또 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순간엔 이미 안고 있었다. 온갖 물감 냄새와 흐릿한 담배 냄새, 그리고 그의 달콤한 체취가 흠뻑 배어 있는 성북동 아틀리에의 침실이었다. 서로 연결된 채 맹렬하게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위야…… 위위…… 위야……. 그가 애절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교성을 흘리고 있었다. ……사랑…… 해…… 사랑해…… 위야……. 엄청난 희열을 불러일으키는 절대적인 고백도 이어졌다. ……나도…… 나도 널 사랑해, 인환아…… 영원히 너만 사랑할 거야…… 오로지 너만을……. 자신도 맹세를 주었다. 실제로는 결코 이루어진 적 없는, 이루어질 가능성조차 없는 맹세였다. 역시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득하게 전화벨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등과 아랫배의 아픔을 자각하며 눈을 떴다. 역시 또 축축하게 젖어 있는 아랫도리에 그저 실소만 흘렸다. 상처가 아픈 것은 자면서도 허리를 흔든 때문이리라. 사정한 때문이리라. 띠리리리리. 전화벨 소리가 끈질기게 울리고 있었다. 멍하니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마지못해 일어나 전화기 앞으로 걸어갔다. 옷은 더 이상 갈아입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잠들면 또 그의 꿈을 꿀 터였다. 무심코 시계를 살피니 저녁 8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
괜히 받은 건가 싶었다. 사적인 전화에서 두 번의 재촉에도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하는 상대란 자신이 알고 있는 한 단 두 명이 유일했다. 여린 마음까지도 복사판인 모전자전의 모자(母子). 그와 그의 어머님이셨다. 그는 지금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을 테니 남은 상대는 빤했다.
잠시 받지 말 걸 하는 후회를 했다가, 어차피 이제쯤은 결론을 내려야겠다 싶은 마음이 다시 올라왔다. 언제까지 마음 약한 귀부인을 담금질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 못지않게 당신 또한 풍비박산이 나지 않았나.
“……말씀하십시오, 어머님.”
[……흡……!]
‘어머님’이라는 정중한 호칭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예의 바른 어조 때문이었을까. 당신은 꽤 오랫동안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용건이나 말하라고 윽박지르지 않았다. 재촉하지도 않았다. 당신 역시 피해자라는 걸 절절하게 자각하고 있는 바였다. 죄인은 그였다. 아니, 자신이었다. 아니, 아니, 그와 자신 양쪽 모두였다. 이 지독하게 우스꽝스러운 비극의 제작자이자 감독이자 주연 배우는 그와 자신 모두였다. 어느 한쪽이 죄인이라고 매도할 수 없었다.
[……고…… 고마워요. 고마워요, 문위 군……. 이렇게 전화라도 받아줘서 정말이지…….]
“……용건을 말씀해주세요.”
[……하, 한 번 만나줄 수는…….]
“안 됩니다.”
무리한 요구였다. 만나봤자 서로의 상처만 헤집어질 터였다. 당신의 부탁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자신이 합의를 해줘서 어떻게든 그의 형량을 줄여보겠다는 것. 물론 절대 들어줄 수가 없는 부탁이었다.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쯤은 얼마든지 무죄로 변명해줄 용의가 있었다. 신(神) 앞에서라도 변호를 할 자신이었다. 그러나 혜윤이가 있었다. 이제 열여덟 살이었다. 채 피어보지도 못한 꽃다운 나이였다. 그 애의 삶을 앗아간 것만은 자신이 변호해줄 사정이 아니었다. 당사자인 혜윤이였다. 혜윤이만이 그를 용서할 수 있었다. 변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혜윤이는 사고 보름째인 오늘도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마도 영원히 말이 없을 터였다. 그러니 안 된다. 합의는 절대 해줄 수 없는 문제였다.
[……아…… 알겠어요…… 이, 이해해요…… 그 맘…… 다 이해해요…… 누가…… 나도 참 염치가 없지…… 염치가 없어요, 문위 군…… 흑……!]
당신께서 또다시 한참을 흐느끼시는 통에 따라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감정은 단 1밀리도 움직이지 않는데 여전히 몸뚱이만 가증이었다. 만나지 않겠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한 게 새삼 다행이다 싶었다. 흐느끼는 가해자의 모친 앞에서 따라 우는 피해자라니, 그런 우스꽝스러울 그림도 없었다.
[……치료비랑 위자료만은 제발 거절하지 말아줘요. 어린 아가씨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놨는데, 만약 치료비라도 못 드리게 되면 나도 더 이상 못 견딜 거예요. 부디 날 봐서라도 제발 받아줘요…….]
“동생 병실에 가시면 윤열이 형이든 휘야든 있을 겁니다. 말해둘 테니 전해주십시오. 받겠습니다.”
[고마워요!!! 너무 고마워요, 문위 군!!! 진짜 고마워요!!!]
“하지만 윤열이 형을 통해서 말씀 드렸다시피 합의는 절대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법정에 선처를 호소하지도 않을 겁니다. 누이동생이 가여워서라도 그건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응당 죗값을 치르셔야 합니다.”
[……아…… 알아요…… 이해해요…… 다 이해해요…… 나도 더 이상은 염치가 없어 그건 부탁을 할 수가 없어요. 다만…….]
“……?”
[……다, 다만 꼭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문위 군. 정말 들어주기 힘든 부탁이라는 건 잘 아는데…… 정말 힘들다는 걸 아는데…… 그런데도 그만…… 윽…… 흡, 흑! 웃…….]
“말씀하십시오.”
[……우…… 우리 애가…… 인환이가 제정신이 아니에요…….]
“…….”
[……호, 혹시 이미 전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미,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절대 과장이 아니고 사실이에요, 문위 군. 지, 진짜로…… 윽……! 흑흑…….]
“…….”
[……숟가락 손잡이로 배를 찔러 자해를 해서…… 경찰병원에 입원했는데…… 거…… 거기서 또 손목을 긋고…… 윽! 흐윽! 윽, 웃…… 흑흑…… 미,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듣기 싫은 소릴 테죠…… 그런데 제겐 그래도 정말 소중한 자식이라…… 제 생명이라…… 일생…… 일생 그 애 하나만 보고 살아왔는데…… 인환이…… 내 새끼…… 불쌍한 새끼…… 인환이…… 우리 애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에요……. 울고불고…… 소리 지르고…… 벽에다가 머리를 쳐대기도 하고…… 죽겠다고 놔달라고…… 윽, 흑흑…… 자해가 너무 심해서 구속구로 꽁꽁 묶어놓고 치료를 하고 있어요……. 정말이지 어째야 좋을지…….]
“…….”
[……문위 군 말은 들을 것도 같아서…… 그래서 염치가 없다는 거 아는데도 이렇게 부탁을 해요…… 합의를 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죗값은 당연히 제대로 치러야죠…… 물론 아무리 죗값을 치른대도 어린 아가씨가 당한 일은 도저히 보상이 안 되겠지만…… 그나마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의 징벌이라도 당연히 받아야겠지요…… 하지만…… 하, 하지만 저대로 두면 죗값을 치르는 게 아니라 아예 애를 잡을 거 같은 거예요…… 물론 문위 군을 죽일 뻔한 것도 모자라 창창한 어린 아가씨를 그리 만들었으니 백번 죽는다고 해도 그 죗값을 다 치르진 못하겠죠…… 그럴 거예요…… 나도 알죠…… 알아요……. 문위 군 약혼녀분에게 저지른 짓도…… 정말 사람 새끼가 제정신 갖고 할 짓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짐승 새끼라지만…… 그래도 그 아인 제 생명이랍니다, 문위 군. 그 아이가 잘못되면 저도 아마 더는 살아갈 수가 없을 거예요…….]
“…….”
[……그 아이를 한 번만 만나줄 수 없나요? 제발 나를 봐서라도…… 자식 농사 잘 못 지은 어느 불쌍한 여자 한번 살려준다 셈 치고 딱 한 번만 만나줄 수 없겠어요?]
“…….”
[……알아요, 알아요…… 참 염치가 없지요…… 염치가 없어요…….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요, 요새……. 근데도 부탁할게요. 제발 부탁할게요, 문위 군. 우리 애를 한 번만 만나줘요. 다른 건 안 바라요. 그저 그 애가 살아서 죗값을 치르게만 해줘요. 무슨 말이든…… 어떤 말이든 해도 좋으니까 그 앨 살게만 해줘요…… 네? 그래주겠어요, 문위 군……?]
“…….”
[……부탁해요…… 제발 부탁해요…… 제발 나를 봐서…… 제발…… 읏…….]
“…….”
당신께선 또 한참을 숨죽여 흐느끼셨다. 전화기를 붙드신 채 무릎을 꿇고 있을 가슴 저린 모양새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정말이지 모전자전이었다. 이래저래 또 가슴이 사무쳤는지 당신을 따라 멍하니 눈물만 줄줄 흘리기 시작한 자신이었다.
“다음 주 내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무…… 문위 군……?]
“한 번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기대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아……! 아아…… 흑……! 으흐흐흐흑…… 고, 고마…… 흑흐으으…….]
차마 고맙다는 소리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당신이셨다. 자신이 좀 더 영리한 선택을 했더라면 ‘장모’가 되셨을 분이었다. 피해자 가족에게 연신 굽실거리며 아들의 용서를 빌어야 하는 비참한 가해자의 어미가 아니라. 사무치는 회한이 또 불쑥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오열로 변한 당신의 소리를 뒤로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전화기 너머에서 한동안 통곡을 거듭할 어느 여린 노부인의 얼굴을 뇌리에 떠올리며 자신도 내내 고요히 눈물을 흘렸다. 노부인에 대한 연민도, 애절함도 일절 사라진, 어느 냉담한 피해자의 가증이었다.
어머님께서 어떤 식으로 그에게 자신의 면회 사실을 알렸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단지 그 소식 하나만으로 그의 발광 증세는 거짓말처럼 딱 멈추었다고 했다. 치료를 열심히 받고 경찰병원을 나와 다시 구치소에 수감됐다고. 어머님은 쏟아내는 90퍼센트의 멘트가 눈물과 고맙다는 한 마디가 전부인 또 한 번의 전화로 그런 기막힐 소식을 전해왔다.
그는 자신의 면회 사실에서 어떤 희망을 보고 마음을 돌린 걸까? 그저 자식을 구해달라는 어머님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 때문에 만나보기로 했다거나, 아니면 그를 용서할 마음이 있어 만나줄 작정을 했다거나, 아니면 자해를 하는 그를 막아보기 위해서, 즉 그에 대한 동정 때문에 만나줄 결심을 한 것 같다고, 얼토당토않은 억측을 했을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모두는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일체의 감정이 죽어버린 것 같은 판에 어머님에 대한 연민이 살아 있을 턱은 없다. 또한 그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다. 자신이 죄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의 죄를 사해줘야만 할 누이는 현재 식물인간 상태였다. 언제 깨어날지, 그대로 영영 저세상으로 떠나버릴지 기약조차도 없는. 그가 수많은 자해 시도 끝에 결국 죽어버리든 말든 그것 역시 이미 자신의 관심 밖이었다. 어차피 그는 이미 영혼이 죽어버린 상태였다. 죽인 당사자가 자신이니 아마도 거의 틀림이 없는 추측이리라. 그건 어느 한 부분이 죽은 채 ‘공주님’에게 저당 잡힌 자신의 영혼 상태와도 흡사했다.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를 마지막으로 만나보려고 한 까닭은. 자신의 관심사는 그의 죽어버린 영혼이었다. 만약 자신의 마지막 도발로 그의 죽어버린 영혼 일부분이나마 되살려낼 수 있다면, 그의 몸뚱이도 따라서 어느 정도는 삶을 지속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완전히 그를 되살리는 길은 자신의 선택지를 180도로 되돌리는 것이나, 그건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서로에게 있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일 터이다. 자신에겐 그를 구하는 대가로 떠넘겨진, ‘양신애’라고 하는 일생 봉사해야만 할 공주님이 버티고 있었고, 그에겐 미래의 내 아이와 혜윤이를 죽인, 또한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살인자의 죄의식이 자리해 있을 터였다. 영영 평행선뿐일 서로가 정면으로 다시금 마주 서게 될 기회는 다신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서로의 영혼을 죽이는 길이었다는 것을,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자신은 비로소 깨달았다. 어차피 기왕에 서로 죽어버린 영혼들에 몸뚱이가 어떻게 되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가 죽음을 택해 몸뚱이의 안식에 들든, 자신이 신애라는 또 다른 관 속에 드러눕든, 결과는 한가지다. 이제야 비로소 서로는 완벽히 타인이 돼버린 것이다. 서로의 영혼을 죽여 없애버림으로써.
열 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영등포구치소 접견실이었다. 방 한가운데가 쇠창살과 구멍 뚫린 플라스틱 칸막이로 가로막혀 있지만 않다면 적당히 사무적이고 적당히 깔끔한, 평범한 사무 공간이었다. 면회 신청 접수를 하고 20여 분이 지나 접견실로 안내되었고, 창살을 마주하고 앉아 기다리고 있자니 10여 분쯤 후에 그가 들어왔다. 정복 차림의 교도관 한 명의 인도를 받으며 나타난 그는 황토색의 미결수 죄수복을 걸치고 있었다. 지독하게 마른 탓인지, 초라한 죄수복이 마치 그를 덜 자란 소년처럼 보이게끔 할 정도로 헐렁했다.
23일 만인가? 멍하니 숫자를 헤아리는 자신이 있었다. 반드시 마지막 만남이 되게끔 만들겠다고 독하게 이를 사리물었던 그 비극의 날로부터.
그의 이성이 버틸 수 있는 한계 이상 몰아붙였던 게 화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배려해줄 수 없었다. 배려해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보자마자 또다시 안고 싶어 발정하는 스스로에게 패닉을 일으켰었다. 뜻밖의 갑작스러운 만남에 이성과 달리 노곤하게 전신을 휩싸고 드는 기쁨의 쾌락에 전율했었다. 그래서였다. 죽여버려야 했다. 그런 자신의 발칙하고도 발칙한 욕망을. 그리고 그런 욕망을 끝도 없이 부추기기만 하는 그를. 그리고 마침내 활활 타버리고 말았다. 불길처럼 치고 올라오는 증오에. 대상이 한참이나 잘못 선정된 증오에. 아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자신은 똑같이 행동할 터였다. 그다지도 어리석었다. 그다지도 미련하고 모자란 최악의 얼간이이자 등신이 바로 자신이었다.
반대편 접견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잠시 이쪽을 힐끔 건너다본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극히 찰나의 마주침이었다. 그가 곧바로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린 때문이었다. 교도관이 옆에서 부축해주지 않았더라면 주저앉았을 지경으로 그의 사지는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카락이 흡사 임꺽정의 봉두난발 같았다. 며칠 동안이나 깎지 않았는지 수염 자국마저 흐릿하게 올라와 있었다. 워낙 잘 자라지 않는 수염이라 저만큼이라도 흔적이 보이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방치했단 의미이리라. 낯설었다. 늘 자신 앞에선 최고의 멋쟁이로만 존재하던 핑크 재킷의 예쁜이는 순식간에 재투성이 개구리 왕자로 전락해버렸다. 폭삭 부서져버렸을 그의 내면을 그대로 증거하는 또 다른 참담함이었다. 입가에 떠오른 흐릿한 미소가 기묘했다. 낯빛은 시체처럼 창백하고, 눈 밑의 푸릇한 다크 서클은 곧 임종을 앞둔 암환자의 그것처럼 황량한데, 입술만은 웃고 있었다. 바닥을 향한 시선 탓에 눈빛을 읽을 수 없는 것이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을 얼핏 했다. 눈동자를 볼 수 있다면 저 기묘한 미소의 정체도 알 수 있을 텐데 하는.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를 그나마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목숨처럼 소중했던 영혼이 얼마만큼이나 부서진 것인가를……. 그러나 그도 그저 순간의 일이었을 뿐, 감정은 도로 심연 깊숙이 가라앉았다.
교도관의 부축을 받으며 맞은편 의자에 앉은 그는 여전히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채 사지를 떨고 있었다. 추운가? 그럴지도 모른다. 직접적인 난방 시설이 없어 실내는 꽤나 차가운 편이었다. 내쉬는 입김이 보일 지경이었다. 홑겹의 죄수복 한 벌로는 견디기 힘든 기온일 것이다. 게다가 그는 유난히도 추위를 타지 않는가.
교도관이 몇 미터쯤 떨어진 감시자 위치로 돌아가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다지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심하게 떨고 있고 시선도 피하고 있지만 파리한 입가에 내내 머물고 있는 것은 여전히 흐릿한 미소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게 그저 단순히 기쁨의 미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다시 가슴이 지끈 하고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반사적으로 심장에 손을 가져다대자, 또 한 번 힐끗 시선이 훑고 지나갔다. 두어 번 재치기를 하는 것도 보였다. 역시 추운 게 문제였나? 감기 기운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니, 이미 앓고 있는지도 몰랐다. 앓고 낫는 중이거나. 아무러면 무슨 상관인가. 이미 죽어버린 내 강아지인걸. 콧물이 조금 흘러나왔는지 손을 들어 올리더니 잽싸게 코끝을 훔치고 있었다. 여전히 바들바들 떨리는 두 개의 손목을 번쩍거리는 수갑이 이어주고 있었다. 새삼 죄인의 신분을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내 강아지가 눈에 보이는 죄인이었다면 자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죄인이었다. 내 강아지의 몸뚱이가 눈에 보이는 곳에 갇혔다면, 자신의 몸뚱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갇힌 수인(囚人)이었다. 다만 영혼이 죽어버렸다는 사실만이 오롯이 한가지였다. 둘 다 죽어버린 영혼을 하고서 무심히 서로를 살피고 있었다.
익숙한 가면을 쓰기 위해 두어 번 심호흡을 했다. 이제 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래도 한 번 시도는 해봐야지 않나 싶었다. 일부만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그나마 업보가 줄어들지 누가 알겠는가. 이미 빛을 잃어버린 둘이지만, 아주 먼 훗날 이 마지막 시도가 커다란 의미로 되돌아올지 누가 알겠는가. 절망해서 영원히 사라져버리기 전에, 극단의 죄책감으로 질식해 완전히 부서져버리기 전에, 속죄의 가능성 또한 희미하게나마 열려 있다는 것을.
“……힘이 드십니까?”
서늘한 일갈을 던지자 움찔 하고 어깨가 떨리는 게 보인다.
“수인(囚人) 생활이 많이 힘드십니까?”
재차 찌르자 내내 입가를 살풋 물들이고 있던 미소마저 사라진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그 정도도 힘들지 않다면 범죄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 당신의 숨통을 끊어놓았을 겁니다.”
미소는 그걸로 완전히 사라졌다. 바닥을 향했던 고개가 더더욱 아래로 기울어지는 게 보였다. 칸막이 아래, 테이블 비슷한 좁은 공간 위에 놓인 그의 두 손이 초조한 듯 꼼지락거리는 것도 보였다.
“……고…… 곧…… 네 뜻대로 될 거야, 위야…….”
감기가 걸린 게 맞았다. 팍 쉬어버린 여린 목소리가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시 입가에 흐릿하게 배는 미소. 잠시 후에야 그의 말뜻이 제대로 전해졌다. 또 한 번 욱신 하고 심장이 후벼졌다.
“제 뜻이라뇨? 제 뜻이 뭔데요? 정확히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최대한 싸늘하고, 증오마저 펄펄 끓는 목소리를 만들어내 일갈했다. 어렵진 않았다. 몇 달 동안의 어리석은 질주는 자신에게 아카데미상 수상자만큼이나 뛰어난 연기력을 부여해주었으니까.
“……수…… 숨통을 끊어놓고 싶다며…… 곧 그대로 될 거야…….”
“하! 그렇게 쉽게요? 하긴 계속 자해를 일삼으신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끝까지 지리멸렬한 게임을 지속하신다고요. 하지만 아십니까? 당신은 이대로 쉽게 안식에 들어선 안 됩니다. 양심이 있다면 말이죠.”
“……?”
“내 불쌍한 혜윤이는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장 깨어날지, 아니면 평생 그대로 깨어나지 못한 채 죽어버릴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런 끔찍한 고통 속에 내 혜윤이를 몰아넣고 혼자만 편해지시겠다고요?”
“…….”
그제야 자신을 향하는 시선이 보였다. 어딘가 멍한, 그간 자신이 너무나 귀여워해 마지않던 방심한 순둥이의 눈빛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사십시오. 죽도록 괴로워하시며 사세요. 그것이 혜윤이를 그렇게 만든 당신에게 내리는 벌이라 여기시고 무사히 살아가세요.”
“…….”
“혜윤이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편안한 안식에 드실 생각일랑 꿈에도 하지 마세요. 아무리 괴로워도, 아니,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내 혜윤이가 깨어나는 데 일조한다 여기십시오. 그것이 제 뜻입니다. 법원에서 얼마만큼의 형량을 선고할진 모르겠습니다만, 설령 그것을 다 치러내신다고 해도 당신이 대속해야만 할 죄악은 앞으로 평생을 다 투자해 갚아도 모자랄 겁니다. 평생 괴로워하며 사세요. 평생 어둠만을 좇으며 죄인답게 버러지처럼 살아가세요.”
“…….”
“자살이요? 자해라고요? 하, 정말 뻔뻔스럽기가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뭘 잘했다고 순교자 흉내를 내시는 겁니까? 끝까지 이기적으로 당신 혼자만 편해지면 다입니까? 남은 사람들은요? 나는요? 당신 어머님은요? 나한테 ‘그깟 게이가 좋다고 찝쩍대는 거 좀 봐주지 기어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오명을 씌워주고 싶으십니까? ‘더럽다 못해 모질기까지 한 남창’으로 소문이 나기를 바라십니까? 요즘 신문에 난 기사들 보셨습니까? 당신과 저에 대해서죠. 아주 가관이더군요. 아직까진 그저 타락한 호모 화가가 짝사랑에 빠져 칼부림을 했다 수준이지만 머잖아 그 짝사랑의 상대가 ‘게이 화가를 농락하고 버린 남창’이라는 사실도 까발려지겠죠. 여기에 당신이 끝내 자살해버린다 치죠. 살아남은 전 어떨 것 같습니까? ‘불쌍한 게이 화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남창’이란 달갑잖은 훈장을 평생 달고 다녀야 하겠죠?”
사납고 모진 독설이 거듭될수록 휘둥그레졌다가 찡그렸다가 아득해졌다가를 반복하던 순한 눈시울이 곧 고요해졌다. 극한의 자극이 가해지면 외려 차분해지는 그의 습성이 드러난 것이리라. 역시 계산 따위 할 줄 모르는 즉흥적인 순둥이였다. 자신의 악의적인 상황 전개에 꽤나 쇼크를 받은 모양이었다. 자살조차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일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얼이 빠진 넋은 그저 충격을 수습하기만도 바쁠 것이다.
“편해지고 싶으세요? 네, 편해지십시오. 다만 지은 죄는 다 갚아주고 편해지시란 말입니다. 혜윤이가 깨어나 이제 됐다 싶으면 그때 편해지세요. 다 갚으신 후엔 당신이 죽어 자빠지든 말든 저도 더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그전에 혼자만 편해지신다면 제가 나중에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라도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다 갚으셨다 혼자 착각하고 언젠가 다시 제 앞에 나타나지는 말아주십시오. 만약 구질구질한 집착을 여전히 끌고 다시 한 번 제 앞에 나타나신다면 그때야말로 당신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릴 겁니다.”
“…….”
“제 뜻은 이게 다입니다. 어떤가요? 이제 정확히 알아들으셨겠죠?”
“…….”
“달리 제게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없으시면 이만 가보도록 하죠. 모쪼록 힘겨운 수감 생활이 되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
가증스러운 몸뚱이가 또 무감각한 액체를 줄줄 쏟아낼 것 같았다. 위기감이 들었다. 아까부터 시작된 심장의 쑤심도 시시각각 더해만 가서 도저히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막 몸을 일으켜 세우는 찰나, 미동도 않고 빤히 건너다보기만 하던 그의 입술에서 조그맣게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위야…….”
시선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저 애초 의도대로 당장 돌아서서 접견실을 빠져나왔어야만 했다. 한참을 후회할 실수였다. 아니, 평생 갈 실수였다.
“……왜 자꾸 그렇게 말라…… 밥은 꼬박꼬박 먹고 다니는 거니……?”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죽이려고 칼부림을 한 사실조차 의식에 없는 것 같았다. 흐릿하게 입가에 떠오른 것은 역시 미소였다. 기쁜 듯한, 혹은 안타까운 듯한, 사랑의 설렘으로 가득한 수줍은 미소였다. 연인의 미소였다. 행복했던 과거의 어느 한때, 찬란하게 빛나던 청춘의 한때가 고스란히 인화돼 있는, 문신과도 같은 미소였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가누며 접견실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힐 때까지 뒤통수에 내내 따라붙던 문신 같은 미소에 간담이 다 서늘해졌다. 지독한 공포감이 삐죽 치솟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이라는 이름의 공포였다. ‘영원’한 미소. ‘영원’한 연인. ‘영원’한 사랑…….
부지불식간의 공포는 죽어버린 것 같았던 감정을 고스란히 되살려내고 있었다. 아니, 실제 그것이 공포인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해졌다. 그것은 기쁨이기도 했고 동시에 슬픔이기도 했으며 노여움이기도 했고 애정이기도 했다. 연민이기도 했고 까마득한 절망이기도 했다. 그래. ‘영원’이었다. ‘영원’히 함께 품고 갈 낙인이었다.
빵빵거리는 차 소리가 났다. 영등포의 거리 한복판인 것 같았다. 정확히 어딘지는, 아니,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등이 아팠다. 그가 찌른 상처였다. 배도 뻐근하게 쑤셨다. 역시 그가 찌른 낙인이었다. 심장 또한 수많은 날카로운 칼날로 저미는 것처럼 고통으로 사무쳤다. 미움, 증오, 고통, 사랑, 연민, 슬픔, 기쁨, 고뇌, 희열, 감사, 숭배, 헌신, 혐오, 환멸 등등…… 그가 가르쳐준 온갖 감정들이 일거에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흡사 해일 같았다. 죽어버렸다고? 죽은 마음이라고? 하! 개가 다 비웃을 일이었다. 그의 꺼져가는 미소 한 자락에 이다지도 속수무책 무너진 주제에? 생생하게 피를 토해내는 주제에?!
휘청거리는 사지를 어쩌지 못하고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종종걸음으로 곁을 스쳐가는 뭇 사람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쏠리고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땅바닥에 양손을 댄 채 필사적으로 숨을 헐떡였다. 사방이 참기 힘든 고통뿐이었다. 육체도 아프고, 정신은 부서지고, 올가미에 걸린 영혼은 짜부라들 대로 짜부라들고 있었다.
드디어 끝이라는 걸 알았다. 이제 서로가 완벽히 돌아섰다는 걸. 그를 완벽히 잃어버렸다는 걸. 동시에 ‘영원’이 시작됐다는 것도 알았다. ‘영원’히 계속될 허기라는 걸. 그리움이라는 걸. 사랑이라는 걸. 그는 영원히 자신 안에서 살아갈 터였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온갖 감정과 감각의 파편들로 점철된 피눈물이었다.
서슬 퍼런 추위가 사방에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