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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ingtime - 1. 2004년 4월. 장인환(張仁歡) (96/129)

1. 2004년 4월. 장인환(張仁歡)

눈물범벅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 위로 차가운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옆 좌석에 앉은 이 의원이 손수건에 생수병 물을 적셔 자신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황송한 마음 반, 민망한 마음 반의 심정으로 손수건을 건네받고 싶었지만, 그대로 가만히 이 의원의 송구한 친절을 받아들였다. 혜윤이의 두 다리(정확히는 무릎 담요가 덮여 있는 다리)를 끌어안고 있는 양팔 중 어느 것도 빼고 싶지 않았다. 담요의 부드러운 천 너머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산 사람의 체온을 여전히 믿을 수 없어하기도 하고, 수시로 환희에 찬 전율을 흘리기도 하면서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끊임없이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온몸의 기력이 송두리째 빠져나간 터라 혜윤이를 안거나 만지는 이외의 어떤 것에도 에너지를 기울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넋이 제대로 감당하기 힘든 지나친 기쁨은 그 반대의 지나친 슬픔만큼이나 사람의 생기를 고갈시키는 모양이라고 새삼 자각한 인환이었다. 자신 이상으로 흥분했을 혜윤이도 그만 지쳤는지, 봉고차에 올라타고 얼마 안 돼 잠에 빠졌으니 말해 무엇 하랴. 

“……그만 의자 위에 올라와 앉으세요, 제수씨. 성준이가 운전 하나는 기똥차게 잘하지만 그래도 안전벨트도 없이 이렇게 가시니 좀 걱정스럽습니다.”

혜윤이의 휠체어 앞바닥에 앉아, 차가 흔들리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보다 못해 이 의원이 역시 송구한 잔소리를 주었다. 휠체어를 싣고 내리기 좋게 개조가 된 차라 뒷좌석은 한쪽은 일반 좌석, 그리고 다른 한쪽은 휠체어가 차지할 만큼의 커다란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은 바로 그 넓은 공간, 즉 혜윤이의 휠체어 바로 앞 맨바닥이었다. 그 공간이 없었다면 이렇게 혜윤이의 얼굴을 마주 올려다보지도 못할 거고, 또 혜윤이의 종아리를 끌어안고 있지도 못할 터였다. 말을 할 기력도 없어 그저 가만히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 아니, 이대로 혜윤이를 안고 있게 해주세요 하는 고집스러운 부탁이었다. 잠시 떼쟁이 같은 자신의 모양새를 지켜보던 ‘작은 거인’의 얼굴에 이내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깨어난 지 여드레째예요. 우리도 아직 잘 믿어지지가 않는답니다, 제수씨.”

“…….”

“여드레 전 아침에 그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꺼풀을 깜빡이더니 하품까지 하더라고요. 하하, 습관적으로 들여다보러 갔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다…… 다…… 다리…… 왜 휠체어에…….”

전율할 것 같은 기쁨 가운데서도 미미하게 근심이 들었던 물음을 주었다.

“아, 다리가 혹 못쓰게 됐을까 걱정하셨군요. 괜찮습니다. 근육이 많이 소실돼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지속적인 영양 공급을 해주고 물리 치료를 병행하면 곧 걸을 수 있답니다. 하긴 10년을 누워만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겠지요. 아무튼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병원에서도 매우 놀라더군요. 깨어나고 나서 이런저런 검사들도 진행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다 양호하게 나왔다대요. 물론 떨어진 신체 기능이라든가 정신적으로도 잃어버린 10년의 공백을 채우려면 열심히 달려줘야겠죠. 사랑스러운 혜윤이나 치료해줘야 할 우리들이나 말입니다.”

“……어, 어, 얼굴은…… 예, 예쁜 예전의 얼굴은…….”

“하하하하…… 제수씨께선 우리들보다도 더 욕심이 많으시군요. 저는 그저 혜윤이가 예전처럼 건강하게만 회복돼도 그야말로 하느님, 부처님께 오체투지라도 하고픈 심정인데 말입니다.”

“저도 형수 의견에 동감이에요, 형. 우리 혜윤이, 꼭 예전처럼 예뻐져야 해요.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주고 말 거예요. 그쵸, 형수?”

앞자리의 조수석에서 휘야가 고개를 뒤로 쭉 뽑으며 동의를 구해왔다. 워낙 연인과 이목구비가 흡사해서 언뜻 보면 연인처럼도 착각하게 만드는 얼굴이 갑자기 불쑥 시야 안으로 다가드니, 불현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오래도록 얼어붙어 있던 심장이 다시금 불쑥 태동을 시작한 것만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청년의 눈꼬리가 아래로 휘며 싱그러운 웃음을 만들어냈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 더불어 인환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호의를 감추려고도 않는, 사심 없는 미소였다. 전염이 된 듯 따라서 멍하니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는. 과거, 만날 때마다 자신을 향해 수시로 욕설을 퍼붓거나 두들겨 패기까지 했던, 인환에겐 그저 저승사자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존재였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물론 연인과 결혼을 한 것을 인정해주고 사과까지 해주어 나름대로 처음의 두려움은 많이 가셨으나 그래도 기왕의 두려움이 워낙 뿌리 깊었던 터라 청년 앞에선 늘 주눅이 들곤 했던 자신이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청년에게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거리낌은커녕 애정 어린 친밀감까지 물씬물씬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혜윤이 효과인 걸까? 멍하니 자문도 해보았다. 자신의 마돈나이자 구세주인 존재가 부활해서 완벽한 구원을 펼치고 있는 덕분인 걸까? 그럴지도 몰랐다. 아니, 1백 프로 그게 확실했다. 진정한 속죄와 구원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터였다. 더 이상 마음속에 품은 애정을 억누르지 않아도 된다. 그게 연인이 됐든, 아니면 눈앞의 이 청년이 됐든. 아아, 그래. 이젠 진짜로 이 청년도 내 가족이로구나. 혜윤이가 보내준 또 하나의 선물이로구나. 은총이로구나…….

겨우 멈춘 것 같던 눈물이 금세 차오르더니 또다시 양쪽 뺨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예 이쪽으로 상체를 거의 돌려 앉다시피 한 청년의 웃는 얼굴이 크게 당황하는 게 보였다. 시선을 위아래로 굴리며 슬쩍 붉어지는 얼굴도 보였다.

“……그, 그만 우세요, 형수. 그러다 눈이 아예 짓무르겠어요.”

다정하고 상냥한 말을 던지더니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여 손수건까지 꺼내 건네주는 게 아닌가. 이번에는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어, 혜윤이의 다리를 감싸 안고 있던 한 팔을 뻗어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상큼한 코롱 냄새가 묻어 있는 청년의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쳤고, 그제야 청년이 다시 씨익 웃음을 머금었다. 옆에 앉은 이 의원의 얼굴에도 하회탈 같은 특유의 미소가 올라와 있었다.

“……몸 상태가 수술을 견딜 수 있을 만큼 회복되면 욕창 흉터도 성형해줄 거고, 얼굴 주름은 일단 영양 공급이 잘되면 자연스럽게 좋아질 거라네요. 그래도 안 되면 극성스러운 휘 녀석이나 위야가 어디 잘하는 성형외과라도 알아보겠죠. 너무 걱정 마세요, 제수씨. 천만다행인 건 당사자인 우리 혜윤이가 그리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거지요. 한창 외모에 관심이 있을 나이인데도……. 세상에, 보살, 보살 해도 이런 보살이 따로 없지요? 예전부터도 영혼이 너무 맑은 아이라 어디서 저런 선녀가 우리들 인연으로 왔나 싶었는데, 이번 기적을 겪고 보니 진짜 보통 아이는 아니다 싶어요. 어디 뛰어난 영적인 스승이 있다면 그 방면 공부를 시키고 싶을 정도로요. 하하, 물론 혜윤이는 만화가를 하겠다고 지금 잔뜩 들떠 있지요. 제수씨가 과외로 우리 혜윤이 그림부터 가르쳐주셔야 할 겝니다.”

가르쳐주다 뿐인가, 자신의 그림을 버리고 하루 종일 혜윤이만 가르쳐주라고 해도 자신은 그리 할 터였다.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바라보며 이 의원이 너털웃음과 함께 더욱 화사한 하회탈을 만들어 보였다.

“맞다! 형수가 화가지, 참! 그림 공부 하난 걱정 없겠네, 우리 혜윤이! 이래저래 위야 형과 형수는 정말 천생연분인가 봐요! 나도 참, 왜 그걸 요즘에서야 깨닫게 된 건지, 원…….”

휘야가 도로 상체를 바로하고 앉으며 희희낙락한 어조로 덧붙인 한마디에 또다시 눈시울에 물기가 모여들었다. 눈이 짓무를지도 모르겠다며 또 가족들의 걱정을 들을 거 같아서, 혜윤이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곤 한참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려야 했다. 까짓 짓물러도 상관없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그저 가슴이 터질 지경으로 벅차고 벅찬 이 영혼의 기쁨과 환희를 삭일 수만 있다면. 슬픔만이 뼈와 살을 노글노글하게 만드는 줄 알았더니, 기쁨은 그 몇 배는 더 엄청난 타격이었다. 아마도 앞으로 한동안은 이 극치의 황홀경에 빠진 넋이 시도 때도 없이 몸 안의 수분을 밖으로 밀어낼 터였다.

“……장 선생님, 이제 그만 진정하세요. 여전히 몸 상태도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위야 녀석, 지금 안절부절 눈이 빠져라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눈이며 얼굴이며 퉁퉁 부으신 모습 보면 그것만으로도 몹시 마음 아파할 거예요.”

운전 중인 김성준까지 한마디 거들었는데, 도리어 안 듣느니만 못한 염려였다. 그칠 듯했던 눈물이 더욱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말았다. 보다 못했는지 이 의원이 혜윤이의 무릎 위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어 올렸고, 다시 찬 물수건을 눈두덩에 대주었다. 혜윤이의 다리를 감싸고 있던 두 팔도 반강제적으로 거둬 얼굴에 댄 수건을 누르게 했다. 상냥한 손끝에서 전해지는 이 의원의 염려와 배려가 절실해서 역시 설움은 더해만 갈 뿐이었다. 손수건을 꼭 누른 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입술만 깨물었다. 그래도 홍수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은 여전했고, 흘러나오던 콧물까지 거듭거듭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어주는 이 의원의 투박하면서도 따스한 손길에서는 흡사 엄마가 어릴 때 자신이 울면 달래주던 그런 기운마저 뿜어 나와서, 절로 히죽거리는 웃음이 샜다. 입술 끝이 위로 올라가는 걸 봤는지, 이 의원의 “아따, 울다가 웃어불먼 똥구녕에 털 난다 안 허요? 그랑께 인자 그만허시요, 제수씨. 심 파허게(힘 빠지게) 그란 설움 모다 풀어낼라믄 당아 멀었을끄나요잉……?” 하고 구성지게 떨어지는 사투리엔 킬킬대는 웃음마저 터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울다가 웃다가 XXX에 털이 나고도 남았다. 아무러면 어떤가. 그네의 가족들에게만 자연스레 사투리가 터지는 이 의원이 아니던가. 정말로 빼도 박도 못 할 한 가족이 돼버렸다는 걸 절감하고 있는데, XXX가 털로 도배가 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렇게 울며 웃으며 전율하며 30∼40분쯤을 이동한 것 같았다. 문득 차가 차츰 속도를 줄이더니 이윽고 완전히 멈춰 서는 게 느껴졌다. 눈가의 손수건을 떼고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열리고 있는 익숙한 철제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삼청동 ‘우리 집’이었다!

도대체 얼마 만인 걸까? 실제로는 두 달이 조금 넘는 기간에 불과했지만, 마음이 느끼는 시간은 영원과도 맞먹었다. 그다지도 절망적이었으며 고통스러운 한으로 점철된 시간이었었다. 영영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라고, 가슴을 찢으며 단념했었던 ‘우리 집’이었다. 고향이었다. 천국이었다.

차가 활짝 열린 대문을 지나 다시 안으로 움직였다. 잠시 가라앉는 듯했던 가슴이 다시금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복받치는 감정에 수시로 목이 메고, 사지는 기쁨의 전율을 주체하지 못해 쑤시는 듯 노곤해졌다.

온갖 봄꽃들과 푸릇푸릇 돋아난 잔디밭, 그리고 연둣빛 새 옷들로 화려하게 갈아입은 정원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원사 최 씨 아저씨의 능숙하고 세심한 손길에 의해 정성껏 가꿔지던 우리 집 정원이었다. 가을과 겨울의 모습만 기억에 있던 정원의 봄은 친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설었다. 넋이 환희에 차서 그런가, 시야 안에 담기는 구석구석이 모두 너무나 아름다워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마침내 현관 앞에 도착한 차가 멈춰 섰다. 차창 밖으로 현관 진입로 앞에 죽 늘어서 있는 집 식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최 씨 내외와 파출부 아주머니, 고영석과 홍 기사, 그리고 두 명의 메이드 아가씨들이었다. 그들 모두 웃음기와 기대감이 그득한 눈빛으로 봉고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집 식구들 외에도 두 달 전까지 자신을 경호했던 경호원 사내 둘 대신 다른 낯선 사내들 셋이 보였는데, 그들은 이 의원의 비서와 보좌관들이었다.

앞좌석에서 내린 휘야와 김성준이 뒤로 돌아와 차 문을 열어주었다. 먼저 이 의원이 내렸고, 아직도 꿈나라에서 헤어 나올 줄 모르는 혜윤이의 휠체어가 김성준과 휘야의 손길에 의해 조심스레 내려졌다. 혜윤이의 뒤를 이어 인환도 바닥에 내려섰지만 사지의 기운이 풀려 있는 나머지 심하게 비틀거려야 했다.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아 있어선지 다리는 아예 감각이 없을 지경으로 몹시 저리고 있었다. 상체를 아래로 기울여 중심을 잡으려는 순간, 이 의원과 김성준이 재빨리 양쪽에서 팔을 잡아주었다. 그 사려 깊은 부축이 없었다면 엉덩방아를 찧었거나 앞으로 고꾸라졌을지도 몰랐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서서 집 식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며 눈인사를 전했다. 식물인간 상태의 혜윤이를 목격한 직후부터 연인의 팔에 안겨 집을 떠날 때까지, 집 식구들에게 끼친 이런저런 민폐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손끝까지 떨릴 지경으로 반가우면서도,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그저 눈물만 글썽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메이드 미스 원이 자그마한 경탄 같은 부름을 던졌다가 휘야의 “쉬잇!” 하는 제지에 놀라 재빨리 손바닥으로 입을 막는 게 보였다. 얼굴이 빨갛게 변한 메이드 아가씨의 당황한 눈길이 휠체어를 조심조심 집 안으로 밀고 들어가고 있던 휘야를 거쳐 휠체어 위, 곤히 잠들어 있는 혜윤이에게로 향했다. 다른 집 식구들도 흥분이 역력한 눈길로 인환을 바라보다가 혜윤이를 바라보다가 하며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인환에게 반가움을 전하고 싶은 동시에, 어린 천사의 잠을 지켜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그들이 택한 방법은 직접적인 말로 전하는 대신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히거나 소리 없는 입술의 움직임으로 반가운 인사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두 메이드 아가씨들은 어린 아가씨들답게 얼굴이 빨개져선 저희들끼리 손바닥으로 서로를 때리며 소리 없는 ‘선생님, 선생님!’만 연호했고, 파출부 아주머니의 순박한 눈시울엔 눈물마저 그렁그렁했다. 최 씨 아저씨는 몇 번이나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폈다 하는 열렬한 인사 끝에 쑥스러운지 큼큼거리는 헛기침을 했고, 최 씨 아주머니의 후덕한 얼굴에선 밝은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고영석은 진중한 미소로 반가움을 전했고, 홍 기사 또한 얼굴 만면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랬다. 햇빛이 완연한 4월의 봄, 우리 집 정원엔 그렇게 숨죽인 환희만이 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역시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 엄청난 은총이자 축복이자 희열이었다. 그만 안으로 들어가자는 이 의원의 자그마한 구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그 소리 없는 기쁨의 축제는 막을 내렸다. 휘야와 잠든 혜윤이가 가장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고, 다음은 자신을 부축해주고 있는 김성준과 이 의원, 그리고 나머지 식구들이 차례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 의원의 수족 3인방 포함, 도합 열다섯 명에 달하는 대식구의 이동이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코끝에 닿아온 것은 엄청난 음식 냄새였다. 명절날에나 맡아볼 수 있음직한 복합적인 진수성찬의 냄새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니, 이 의원이 예의 하회탈 웃음보를 만들어내며 설명해주었다.

“제수씨만 오시면 무려 10년 만에 우리 가족이 모두 모이는 셈이 되니까요. 제가 잔치를 하자고 했습니다. 새가슴이 다 돼버린 위야 녀석은 안 올지도 모른다며 말렸지만 말입니다.”

과연, 집안 잔치가 맞는가 보았다. 거실 한가운데까지 걸어 들어갔을 때, 손님방으로 쓰던 한쪽 침실 문이 열리며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어린 여자애들 둘이 “아빠!” 하는 자그마한 외침과 함께 튀어나왔다. 여자애들 뒤로 웬 젊은 여자 하나도 따라 나와 이 의원을 향해 목례를 하는 게 보였다(나중에 알고 보니 여자는 혜윤이의 물리 치료를 맡고 있는 상주 물리 치료사라고 했다). 한눈에도 이 의원의 핏줄임을 알 수 있는 여자애들은 하나는 초등학교 4학년, 다른 하나는 3학년이라고 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뱁새눈을 한 첫째는 그야말로 이 의원의 붕어빵이었고, 외탁인지 커다란 쌍꺼풀이 있는 둘째조차 이목구비는 영락없이 이 의원과 닮았다. 인환의 한쪽 팔을 부축하고 있던 이 의원이 두어 걸음 앞서 나가더니 양팔을 활짝 벌리며 달려든 두 딸을 품에 안아 들었다.

“아빠, 아빠! 오랜만!!!”

“와따, 와따, 이뿐 내 새끼덜! 울 퇴깽이들! 시방 왔어야?! 핵교는 잘 댕겨왔고?”

“네, 아빠. 발레 학원은 빼먹었지만요. 요번엔 진짜 아빠 많이 보고 싶었어요. 저저번주에 엄마랑 미국 갔다 온 거 아시죠? 들려드리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요.”

“아빠, 아빠, 또 사투리! 아빠 따라 나도 모르게 사투리 쓰면 엄마가 잔소리한단 말야! 나중에 억양 고치기 힘들다구!”

“너나 아빠께 존댓말 해, 이민선. 반말도 버릇 되는 거 몰라?”

“언니는! 엄마가 아직 반말은 해도 된다고 했단 말야!”

“쉬잇, 쉬잇! 혜윤이 고모 주무시니까 다들 목소리 깔아라, 엉?”

정열적인 세 부녀 상봉에 또 다른 손님방에서 걸어 나오던 휘야가 여지없이 제지를 주었다. 어느새 혜윤이를 침대에 눕혀놓고 나온 모양이었다. 서슬 퍼런 휘야의 기세에 눌린 이 의원과 여자애들이 동시에 펄쩍 뛰며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대는 모습은 그야말로 붕어빵 그 자체였다. 자신의 한쪽 팔을 부축하고 있던 김성준이 그 모습을 쿡쿡 웃음을 터트리며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드물게 잘생긴 얼굴임에도 늘 날카롭고 서늘한 이지적인 표정 탓에 김성준을 떠올리면 그저 얼음장만을 연상했던 인환으로선 난생처음 느껴보는 따스함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김성준의 고개가 인환 쪽으로 돌아왔다. 살피는 듯한 시선이 인환의 안색이며 눈빛을 차분히 헤아리고 있었다.

“……녀석은 아직도 4층 서재에서 웅크리고 있나 봅니다.”

두근…….

“……차 소리를 들었을 텐데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걸 보니 여전히 겁에 질려 있나 봐요. 내려와서 장 선생님이 안 계신 걸 확인할까 봐 무서운 겁니다. 저나 윤열이 형이 모셔올 수 있다고 그렇게 장담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내내 자신 없어 하더라고요.”

두근, 두근, 두근…….

김성준의 조용한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은 겨우 연인의 부재를 실감한 모양이었다. 그랬다. ‘우리 집’이니 당연히 연인이 있어야 할 터였다. ‘우리 집’의 의미는 연인 자체이기도 했으니까. 지금 아무리 많은 식구들로 집 안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한들, 연인이 없는 ‘우리 집’은 진짜 ‘우리 집’이 아닐 터였다. 그럼에도 연인의 부재를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 자각하지 못했다 자기 최면을 걸고 있었던 것은 워낙에 넋이 나가 있던 탓도 크지만, 실은 자신 또한 연인과 마찬가지로 겁에 질려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연인을 다시 만난다는 게 너무나 겁이 났다. 온전히 감당하기 힘들 지경으로 행복한 딱 그만큼 질겁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혜윤이의 부활로 단숨에 주박이 풀린 넋은 현재의 자신을 시시각각 극단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정신이며 감각이며 영혼 등등, 자신의 모든 것이 연인을 처음 만나던 때로 완전히 되돌아가버린 것만 같았다. 연인의 일거수일투족에 일희일비하며 심장을 두근거리던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 그 자체로 말이다. 흡사 시간이 역행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으니 오죽할까. 현관 앞에 죽 늘어서 있던 식구들 가운데서 연인의 부재를 확인했을 때부터 이미 자신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연인은 어디 있냐고 물어볼 용기조차 없을 정도로.

“……지금 얼굴이 창백해지셨어요. 제가 가서 내려오라고 할까요? 장 선생님께서 오셨으니 겁내지 말고 내려와 확인하라고요.”

“…….”

김성준의 눈을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질겁해 있다 한들,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다가가야 했다. 연인을 단죄하고 내친 쪽은 자신이니, 설령 연인이 반대로 자신을 내친다고 해도 자신은 그조차 감내해야만 할 터였다. 물론 이성적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이미 물정 모르던 철부지 20대 때로 퇴행해버린 것 같은 자신이었다. 기쁨과 기대만큼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용기를 내 다가가야 했다. 김성준의 말대로 연인 또한 자신처럼 겁에 질려 있다면 그런 서로의 주박을 풀어주는 이도 연인이 아닌 자신이어야만 했다.

“……제…… 제가 올라가볼게요…….”

잔뜩 쉰 목소리를 겨우 끄집어내 대꾸를 주자 잘생긴 이목구비가 빙긋 웃음을 머금는 게 보였다.

“그러시겠어요?”

김성준 역시 자신이 내린 결론과 같은 뜻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그네의 선선히 떨어진 대꾸와 기분 좋은 웃음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연인과 자신 이상으로 서로의 정신적인 문제들에 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가 바로 눈앞의 이 남자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연인과 자신보다도 더 정확하게 알고 있을 터였다. 지난 1년 가까이, 바로 옆에서 자신들의 그 모든 고통과 혼란과 방황들을 속속들이 지켜봐온 정신과 주치의가 바로 이 남자였으므로.

“하긴 1층은 지금 거의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군요. 조용히 말씀 나누실 것도 많을 테니 장 선생님 쪽에서 올라가보시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

김성준의 시선이 거실 이곳저곳을 차례로 옮겨 다니며 덧붙였다. 김성준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과연 말 그대로 1층은 도떼기시장 그 자체였다. 주방과 식당 쪽에선 아주머니 두 분과 메이드 아가씨들이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거실 한가운데 소파에선 이 의원과 어린 두 딸이 레슬링을 펼치고 있었으며, 그 바로 앞 소파엔 이 의원 보좌관들이 앉아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선 휘야와 혜윤이의 물리 치료사가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주방 근처 한구석에선 홍 기사와 고영석, 그리고 정원사 최 씨까지 가담해 교자상 네 개를 이어붙인 커다란 상차림을 돕고 있었다(식당이 충분히 넓긴 했지만, 잔칫상은 잔칫상다워야 한다는 이 의원의 촌스러운 고집 때문이었다고 한다).

“……부축해드리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한쪽 팔을 잡고 부축해주던 김성준을 살짝 밀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도로 급히 팔을 뻗으며 물어오는 남자였다. 역시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김성준의 배려를 사양했다. 여전히 사지에 힘은 없었지만, 부활 후 연인에게로 가는 첫 걸음만은 혼자 내딛고 싶었다. 자신의 뜻이 통했는지 김성준도 더 이상은 따라오지 않았다. 물론,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때까지 내내 우려의 눈길이 느껴지긴 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도떼기시장 같은 거실의 북적거림이 희미해졌다. 4층 복도에 내려섰을 땐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정적뿐이었다. 아틀리에를 지나 5미터쯤 앞에 서재 문이 보였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한숨, 한숨 토해내는 숨결의 리듬에 따라 보폭을 맞추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막판에 용기를 잃고 물러서거나 미적대고 싶지 않아서였다. 몇 걸음 만에 문 앞에 도착했다. 심장은 가슴 안쪽에서 북을 치는 것처럼 요란스레 울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만큼 다리엔 여전히 힘이 없었다. 기대인지 두려움인지 그리움인지, 이젠 구분조차 모호한 가슴의 복받침만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짙은 마호가니빛 문에 잠시 손을 가져다대고 눈을 감았다. 길게 토해낸 한숨은 도로 짜부라든 용기를 이끌어내기 위한 주문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한 호흡 만에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30평 남짓한 고즈넉한 공간으로 따사로운 오후의 봄볕이 가득 퍼져들고 있었다. 남쪽으로 난 전면 창을 제외하곤 사방이 책장들로 빼곡한 방 안 한가운데, 커다란 직사각형의 회의용 탁자가 보였다. 그 둘레를 빙 둘러싸고 있는 소파 세트도 보였다. 연인은 그 너머 창가에 면한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상체를 기울인 자세로 얼굴은 두 손바닥에 깊이 파묻고 있었다. 퇴근한 그대로의 차림에서 재킷만 벗어둔 모양인지, 연회색의 비즈니스 슈트 조끼에 짙은 보랏빛 드레스셔츠, 그리고 거의 핏빛에 가까운 와인색의 넥타이가 연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베를린 쿤스트할레 부스에서 마주쳤을 때 그대로, 여전히 너무나 마른 근육질의 몸이 헐렁해진 옷매무새에서 그대로 드러나 마음을 아리게 했다.

자신이 들어서자마자 움찔 어깨를 떤 거나 얼굴이 파묻혀 있는 두 손이 거듭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걸 보면 서재로 들어선 이가 자신이란 것을 아는 것 같은데도, 연인은 좀처럼 고개를 들어 시선을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지난가을처럼 또 벙어리가 된 건지 잘 왔냐는 인사조차 없었다. 하긴, 자신 또한 말문이 막혀버린 터에 연인만 나무랄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연인을 보자마자 결국은 더 버티지 못하고 방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으니, 또한 미동조차 않는 연인을 나무랄 일도 아니었다.

사무치도록 그리웠던 연인의 코롱 냄새가 서재 안에 흐릿하게 떠돌고 있었다. 그보다 더 그리웠던 연인의 체취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야만 실감할 터였다. 정말로 눈이 짓무르려는지 또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싫어, 무심코 뇌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만은 울고 싶지 않았다. 시야가 뿌옇게 가려져 사무치도록 그리웠던 존재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없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왜 말 안 해?”

잔뜩 쉰 자신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울려 퍼졌다.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들렸을까 싶었는데 또 움찔 어깨를 떠는 연인이다. 그러나 여전히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무서워서.”

그립고 그리운 중저음이 비로소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자신만큼 떨고 있고, 자신만큼 잔뜩 긴장해 있는 목소리였다. 순식간에 목이 메고, 눈물이 펑펑 솟구칠 것 같아서 한참 동안 이를 악물어야 했다.

“……왜 안 쳐다봐?”

자신이 뜸을 들인 딱 그만큼쯤 억눌려 있던 대답이 재차 떨어졌다.

“……무서워서.”

이젠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몸을 떨고 있는 연인이었다. 얼굴을 받치고 있는 아름다운 피아니스트 신동의 손가락이 사시나무 떨듯 전율하고 있었다. 자신보다도 더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보다 더 겁쟁이인 것 같았다.

“……뭐가?”

대꾸처럼 길게 이어진 한숨 또한 떨림이 가늘게 묻어나왔다.

“……내가.”

“…….”

“…….”

“……네가 왜 무서워?”

“……다시 보고 나면 이젠 네가 뭐라고 해도 안 보내줄 나라는 걸 아니까.”

“…….”

“또 날 버리겠다고 하면 그땐 진짜 널 죽이고 말 테니까.”

“…….”

기어이 참지 못하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봇물 같았다. 홍수였다. 태풍이었다.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 전율하며 눈물의 태풍에 휩쓸리고 있건만, 다행히 흐느낌 소리만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기도 하거니와, 두 손바닥으로 철벽처럼 틀어막고 있는 까닭이었다.

“……너도 죽이고 나도 죽을 테니까.”

“…….”

“……옛날에 네가 날 찌를 때처럼 난 즉흥적이지 않아. 왜냐면 난 너와 달리 진짜 악당이거든.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지. 지금 책상 서랍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 아나?”

“…….”

“……사시미 칼이지. 일본 야쿠자들이 항시 상비하고 다니는 칼이라고 해. 여차하면 널 찌르려고 특별히 구입해뒀지.”

“…….”

“……너처럼 단 두 번으로 끝내는 일도 없을 거야. 수십 수백 번이라도 찌를 수 있어. 나는 그래. 그 정도로 널 사랑하지.”

“…….”

“……그래서 네 피와 뼛조각과 살점으로 범벅이 된 몸뚱이에 내 물건을 박은 다음, 내 목도 찌를 요량을 하고 있지. 아직은 휠체어에 의존하는 혜윤이라 그때처럼 보고 놀랄 일도 없으니 더욱 안심이지. 그냥 너와 나 단둘만 가는 거야. 어때? 멋지지 않나?”

“…….”

“……아니. 이번엔 사기가 아냐. 정말 갈 거야. 그럴 생각이야.”

“…….”

“……그러니 대답해봐, 마누라. 지금 내가 널 봐도 될까?”

“……으…… 웁…… 응…… 윽……!”

“……서랍에서 칼을 안 꺼내도 되는 건가?”

“……읏…… 흑…… 응…… 응…… 웁……!”

“……나에게 온 건가? 영원히?”

“윽, 흑……! 응, 응…… 웃…… 우앗……! 응……!”

“……다신…… 앞으로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날 안 떠나는 건가? 날 버리지 않아?”

“응……! 윽, 웃……! 응, 응……! 응……!”

“……영원히 내 것인가?”

“응……! 으앗……! 윽……! 흑! 웃…….”

“…….”

“……읏…… 흑…… 흡……!”

“…….”

“……위…… 위위…….”

“……이리 가까이 와.”

“……흑, 웃…… 위…….”

“……너무 떨려서 다가갈 수가 없어. 네가 와.”

“……다…… 리…… 다리가…… 웃, 흑…….”

“……다리를 못 움직이겠나? 그럼 기어서라도 와.”

“……웃…… 으…… 아아…….”

“얼른 와…… 얼른…….”

“…….”

여전히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절대 명령을 내린 연인이었다. 기어서라도 오라 하지만 기어갈 기력조차 짜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야말로 온몸의 뼈와 살이 다 녹아서 흐물흐물해진 것 같았다. 기쁨과 희열과 행복과 희망의 황홀경이 온몸과 온 넋을 사로잡아 사지를 꽁꽁 묶고 있는 것만 같았다. 틀림없이 연인 또한 한가지일 것이다. 그래 기어서라도 오라 명령을 내렸을 터였다. 얼른 와. 얼른.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연인의 어깨가 걷잡을 수 없이 전율하고 있었다. 자신과 한가지일 압도적인 희열에, 그리고 그 희열이 동시에 떠안겨주는 까마득한 공포에 완벽히 침몰당한 모양새였다.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가야 했다. 처음부터 자신이 먼저 시작했었다. 그러니 마무리도 자신이 해야만 했다. 설령 살과 뼈가 몽땅 다 녹아 흐물흐물 흐트러지든 말든. 온 넋이 타다 못해 파삭 먼지로 부서지든 말든.

부들부들 떨리는 사지를 바닥으로 기울여 한 발 한 발 기어갔다. 부드러운 카펫 바닥이 두 손바닥과 두 무릎에 접착제처럼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끌고 가야 할 몸뚱이는 쇳덩이보다도 더 무거웠다. 그래도 어떻게든 가야만 했다.

처음부터 자신이 먼저였다. ‘……너, 남자와도 거래해보지 않을래?’ 속으로 벌벌 떨며, 그러나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이 연인에게 대담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연인은 도무지 미적 감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흰 바탕에 연초록 줄무늬가 들어간 반팔 포플린 셔츠에 암녹색 교복 팬츠를 걸치고 있었다. 일체의 표정이 거의 없는, 숨이 막힐 지경으로 아름다운 이목구비에 아직도 소년티가 조금 남아 있던 열여덟 어린 청년이었었다.

고작 십여 미터를 기어가는 데 몇 십 초가 걸렸는지 몰랐다. 어쩌면 몇 분은 흘러갔을지도 몰랐다. 마음이 느끼고 있는 상대적인 시간은, 물론 그 훨씬 이상이었으리라. 세계 최고의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일도 이만큼 아프고 고되지는 않았을 터이다.

연인의 코롱 냄새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눈물겹도록 그리웠던 연인의 알싸한 체취도 한가지였다. 마침내 바닥에 연인의 발이 보였다. 검정색 양말에 감싸인 군함처럼 거대한 발이었다. 발등으로 손을 뻗었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는 손가락이었다. 손바닥과 손가락이 살며시 가 닿자 움찔 전율하는 사랑스러운 군함이었다. 마주 닿아 있는 발등으로부터 엄청난 전율이 그 위로, 위로 퍼져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연인이 떨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떨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연인의 전율을 따라 자신의 고개도 위로, 위로 올라갔다. 칼처럼 주름이 잡혀 있는 슈트 팬츠 자락으로, 탄탄한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섹시한 허벅지로, 슬림한 조끼가 감싸고 있는 허리로, 가슴팍으로, 짙은 보랏빛 드레스셔츠로, 단정하게 조여진 핏빛 넥타이로, 도톰하게 튀어나와 있는 섹시한 목울대로, 피아니스트 신동의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그리고 그 손가락들 틈에 푹 감싸여 있는 이목구비로. 따사로운 오후의 봄볕을 받아 부드럽게 빛나고 있는 암갈색 머리카락으로.

“……와…… 왔어…….”

헐떡이듯 선언했다. 여전히 겁에 질려 자신을 보려고도 않는 세상 최고의 겁쟁이에게. 세상 최고의 악당에게. 내 괴물에게.

“……지금…… 돌아왔어…… 영원히…….”

대꾸처럼 물결치듯 출렁이는 탄탄한 허벅지 근육을 와락 움켜쥐고 재차 선언했다.

“……영…… 원히 내가 가지려고 왔어, 서방님…….”

정복의 선언이었다. 얼음의 주박을 깨는 주문이었다.

석상처럼 웅크린 자세를 고수하며 경련하듯 와들와들 떨기만 하던 몸뚱이가 비로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얼굴을 가렸던 두 손이 내려가고, 책상을 향해 웅크려 있던 상반신이 들려 올라갔다. 초췌하게 마른 아름다운 프로필이 천천히 자신을 향하는 게 보였다. 혈색을 잃어 창백한 낯빛이며 푸릇하게 수염 자국이 올라와 있는 턱 언저리, 파르르 떨리고 있는 도톰하고 섹시한 입술도 보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칠흑처럼 새까만 심연의 눈이 엄청난 기세로 자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블랙홀처럼 옴짝달싹 못 하고 끌려들어갈 압도적인 서슬이 새파랬다. 흡사 연쇄 살인마의 살기와도 흡사했다. 물론 그닥 다르지도 않을 것이다. 지독한 사랑은 지독한 광기였다. 서로를 산산조각 내는 지독한 파괴욕과도 한가지였다. 연인의 허리께쯤에서 꼭 닫혀 있는 책상 서랍 안엔 새파란 날을 빛내며 사시미 칼이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예뻐…….”

핏기 잃은 입술로부터 조용히 흘러나온 신음성이었다.

“……분홍색 재킷…….”

“…….”

“……남자와도 거래해보지 않을래…….”

“…….”

“……하고 말했지, 너는. ……처음의 그때…… 그때도 지금처럼 분홍색 재킷을 입고 있었어. 무척 값비싸 보이는 새하얀 명품 진 팬츠 아이템도 있었지. 몹시 부드러워서 만지면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은 새하얀 가죽 스니커즈도.”

“…….”

“……너무나 예쁘고 순수한 왕자님이었지…… 아니, 공주님인가? 젠장, 아무러면 어때…… 아무튼 몸을 굴릴 대로 굴린 더럽고 가난한 남창은 그저 자격지심밖에 느낄 수가 없었지.”

“…….”

그제야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자각되었다. 옅은 핑크색의 스웨터에 크림색 면바지. 15년 전, 처음 연인에게 말을 걸었을 때의 옷차림이 어땠는지는 도무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연인의 말이 맞는다면 공교롭게도 색상 대비만은 일치하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그날 연인이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는 자신도 눈에 선했다. 도무지 미적 감각이라곤 찾아볼 수조차 없는, 우신고등학교의 여름 교복이었다. 흰 바탕에 연초록 줄무늬가 들어간 반팔 포플린 셔츠에 암녹색 팬츠. 잘생긴 이마와 콧등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이며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던 깊은 눈시울, 굳게 다물려 있던 섹시한 입매까지, 모든 것이 선명하게 각인된 채 오롯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번엔 다른 거래를 제안해봐.”

“…….”

“……영원히 내 것이 되어줄래…… 하고 물어봐.”

“…….”

“……영원히 날 가져줄래…… 라고 해도 좋고.”

“…….”

“……말해봐, 마누라. 그렇게 울지만 말고.”

“…….”

“……얼른…… 얼른 물어봐.”

“……여…… 영…… 영원…… 히 내 것이 되어줄래……? 흑……!”

“음, 그래. 난 영원히 네 거야. 아주 오래전부터.”

“……윽, 웃! 흑…… 영원히 날 가져줄래……? 위위……?”

“음, 그래. 너도 영원히 내 거야. 아주 오래전부터.”

“흑……!!!”

쌍꺼풀 없이 부리부리한 커다란 눈매가 반달 모양을 그리는 게 보였다. 그 속, 머루알처럼 새까만 동공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는 것도 보였다. 휘어지는 눈매를 따라 연인의 입술 끝도 비죽 위로 치켜 올라갔다. 흡족하게 퍼지고 있는 연쇄 살인마의 미소였다.

서슬 퍼런 광기와는 달리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연인의 두 팔이 아래로 뻗어왔다. 자신의 양쪽 겨드랑이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두 손이 번쩍 힘을 주는 것 같더니, 어느새 자신의 몸은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친 채 앉아 있었다. 겨드랑이 속으로 파고들어왔던 연인의 두 손은 이번엔 자신의 허리를 부서트릴 듯 움켜쥐고 있었다.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연인 탓에 20도쯤 고개를 아래로 기울여야만 연인의 눈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예뻐…….”

한숨처럼, 탄식처럼 연인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무 예뻐…… 예뻐…… 내 강아지…….”

눈시울은 야수처럼 번들거리고, 웃음이 가득 물린 입가엔 숨길 수 없는 약탈자의 탐욕이 적나라했다. 정복자였다. 자신이 정복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연인이었다. 도도한 에베레스트를 악착같이 기어 올라온 건 연인인 모양이었다.

“……내 거란 말이지, 이제……. 진짜로 내가 가져도 된다는 말이지…….”

“…….”

“……아무도 방해하지 못한다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재수 더러운 운명조차도 이젠…… 내 걸 내가 가지는 데 아무도 흙발을 디밀지 못한다는 거지…….”

“…….”

“……그래, 영원히 내 거란 얘기야…….”

“…….”

허리를 틀어쥐고 있던 손이 몸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점점 더 위로 올라왔다.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목울대를 건드리고, 턱을 더듬고, 뺨을 살살 문질렀다. 입술을 훑고,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강아지를 쓰다듬듯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마침내 정수리 꼭대기까지 꾹꾹 눌러보더니 다시금 거꾸로 내려오기 시작한 손가락이었다. 확인이 거듭될수록 떨림은 줄어드는 것 같았다. 대신, 접촉하는 손바닥이나 손가락의 움직임은 처음보다 훨씬 거칠어지고 있었다. 어깨를 주무르고, 팔뚝을 꽉꽉 움켜쥐고, 두 손바닥으로 대흉근을 부비기도 하고, 등으로 돌아가 빗장뼈와 등뼈의 돌기를 하나하나 헤아리기도 했다. 허리를 만지작거렸다가 꽉 움켜쥐어보기도 하고, 아랫배를 더듬기도 하고, 허리 벨트를 풀어 바지춤 사이로 손을 집어넣곤 성기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울창한 음모를 쓰다듬기도 하고, 손을 더 내려 회음부를 더듬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페니스가 발기하자 손바닥 사이에 넣고 죽죽 피스톤질을 시키기도 했다. 그저 확인 차원의 피스톤질일 뿐이었는지, 숨죽인 흐느낌 소리에 섞여 교성을 흘리자 흠칫 어깨를 떨곤 손을 떼는 연인이었다. 가랑이 사이 탐색이 끝난 뒤엔 허벅지와 엉덩이와 꼬리뼈와 무릎, 그리고 정강이로 다시 차례로 내려왔다. 발목을 몇 번이나 손바닥 안에 넣고 만지작거리다가는 양말을 벗기고 발등과 발뒤꿈치, 발가락까지 하나하나 세심한 진찰을 거듭했다. 발톱 하나하나까지 만지작거리기를 마친 손길이 마침내 다시 겨드랑이로 올라왔다. 또 한 번 번쩍 들린 몸은 이번엔 연인의 허벅지 위에 사뿐히 앉혀졌다. 활짝 벌어진 두 다리가 의자의 양쪽 팔걸이 틈으로 흘러내려갔다.

시선을 마주칠 틈도 없이 연인의 품 안으로 상반신이 끌어안겼다. 등 위에서 교차되어 휘감겨 있는 연인의 양팔이 무섭도록 자신의 상반신을 죄고 있었다. 연인의 얼굴이 왼쪽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오목하게 파인 굴곡을 파고들 듯 짓누르고 있었다. 어찌나 힘을 주는지 경련하듯 심하게 떨고 있는 연인의 떨림조차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연인과 다름없이 부들거리기만 하는 양팔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굵고 단단한 목줄기를 친친 휘어 감고 맹렬하게 힘을 주었다. 입가에 닿아온 연인의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파묻고 접착제에라도 붙어버린 것처럼 단단한 두피에 입술을 눌렀다. 짙은 샴푸 냄새와 코롱 냄새에 섞인 연인의 알싸한 체취가 폐부 가득 들어차왔다. 폐를 풍선처럼 부풀려 한계까지 들이마셨다. 온몸의 피부 표면으로 닿아오는 연인의 뜨거운 체온과 딱딱한 근육의 감촉에 몸서리를 쳤다. 그리워서 미칠 것 같았던 냄새였다. 감촉이었다. 차라리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다면 그나마 견딜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리워하는 대신 증오를 택했다. 그래서 더 발광했었다. 사랑해야만 숨을 쉬는데 사랑할 수 없는 생지옥. 그리고 그 이율배반의 고통을 잊기 위해 걸귀가 됐다. 걸귀가 돼 미친 듯 그 남자의 몸뚱이만을 탐했다. 스스로를 타락시키고, 소중한 친구도 타락시켰다. 그리운 몸뚱이 대신 타락한 짐승의 욕망에 안기고 또 안겼다. 이 그리운 품에 다시는 안길 수 없을 줄 알고 더 발광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안길 수 있다니. 다시 냄새 맡을 수 있다니. 만질 수 있다니…….

“……맞아…….”

연인이 목덜미 사이에서 중얼중얼 으르렁거렸다. 그때마다 뜨거운 입김이 확확 퍼져 나왔다.

“……역시 내 것이 맞군…….”

웃음기가 서린 으르렁거림이 재차 토해졌다. 연쇄 살인범의 흥겨운 포효였다.

“……잘 돌아왔어, 마누라.”

핏빛 오르가슴이었다.

마주 안은 연인의 몸뚱이가 흡사 불덩어리 같았다.

잔칫상을 앞에 두고 연인의 어깨에 기대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고작 양주 한 잔일 뿐이었는데 그게 치명적이었던 모양이었다. 워낙 체력이 바닥이라 더했을 것이다.

깨어나 보니 주침실 침대 위, 정확히는 연인의 품속이었다. 정원 가로등에서 비쳐드는 불빛이 흐릿하게 침실 안을 비추고 있었다. 벽시계 바늘을 보니 새벽 3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저녁 9시 무렵까지 스무 명에서 딱 한 사람이 모자라는 대가족의 잔치 마당에 끼어 여전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흥분과 기쁨과 행복감의 홍수 속에 침몰해 있었다. 7시쯤 다시 깨어나 잔칫상 앞 상좌에 앉아 천진한 수다에 열을 올리는 혜윤이를 보고 또 보며 수시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고, 그 모습에 가족들의 애정 어린 놀림을 받기도 했고, 줄곧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연인의 한 팔에 안겨 있는 탓에(물론 이건 전적으로 연인의 탓이었다) 그 또한 ‘애들 보기 민망하니 좀 떨어지라는’ 이 의원의 눈총과 ‘부부금슬 좋은 건 애들에게 교육 효과가 외려 높다는’ 김성준의 농인지 진심인지 아리송한 반론을 듣기도 했었다. 내내 프로필이 따가울 정도로 쏟아지고 있는 연인의 열기 어린 시선 탓에 가슴은 수시로 두근거리고 손끝이 아련히 떨릴 지경으로 달콤한 긴장을 해야 했다. 두 아주머니들과 메이드 아가씨들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든 음식들이건만 도무지 그 맛을 느낄 수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전신이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혹은 무언가 마약이라도 주사받은 것 같은 비현실적인 황홀경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연인이 완벽하게 커버해주는 바람에 돌고 도는 술잔의 퍼레이드는 전부 자신을 비켜갔으나, 휘야가 따라준 양주만큼은 연인이 전화를 받느라 잠깐 발코니로 나간 사이 원샷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술을 마신 지 꽤나 오래되었고 거식증의 후유증으로 몸뚱이가 많이 망가졌다고는 하지만, 설마 양주 한 잔에 뻗을 줄은 몰랐다.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가 이내 창백하게 질린 채 연인의 품 안으로 스르륵 무너지자, 당황한 연인이 팔을 뻗어 안아 드는 것을 느꼈던 게 간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러게 내가 그렇게 먹이지 말라고 했는데 대체 누가 먹인 거냐?’ 정색을 한 어조로 으르렁거리는 연인의 살벌한 목소리를 얼핏 들은 것도 같았다. 그때가 얼추 9시 무렵이었으니 적어도 여섯 시간을 잠든 셈이었다. 지난 12월 말일, 식물인간 상태의 혜윤이를 대면한 이래 최고로 많이 잔 기록일 것이다. 그때로부터 시작된 극심한 불면증은 그 남자의 집으로 보내졌던 지난 두 달 동안 많이 좋아지긴 했으나 그래봤자 가장 많이 잤던 것도 세 시간 정도가 고작이었다. 신의 구원이 떨어지고, 그토록 꿈꾸었던 천국인 우리 집에 비로소 온전히 돌아오고 보니 몸에도 기적이 온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여섯 시간이나 늘어지게 숙면을 취한 것도 그렇고, 집 식구들 모두가 잠들어 있을 이 신새벽에 자신은 심하게 공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또한 지난 12월 말일 이래 처음 자각하는 식욕이었다.

모로 누운 연인은 완전히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을 품에 안고는 있었으나, 애초 자신의 등을 감싸 안고 있었을 왼팔은 힘없이 연인의 허리 아래 옆으로 늘어져 있었고, 팔베개를 해주었을 것 같은 오른팔도 침대 쿠션 바로 밑에 무방비하게 놓여 있었다. 짙은 청색의 실크 파자마 단추가 거의 다 풀려 있어, 늠름한 가슴 근육은 물론 섹시하게 도드라진 유두가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옷차림이 슬림해 보일 지경으로 험하게 살이 내렸음에도, 여전히 섬세하고 아름다운 근육의 흐름에 경탄의 한숨이 샜다. 얼굴 또한 정원에서 흘러드는 흐릿한 불빛 탓에 더욱 뚜렷하게 음영이 져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신비롭게만 보였다. 이 소중하고 소중한 존재가 바로 자신의 코앞에 있다는 현실이 여전히 꿈만 같아, 손을 뻗어 확인하듯 가만가만 어루만져본 자신이었다. 익숙하고 그리운 감촉에 가슴은 저릿저릿 전율하고, 물밀 듯이 와락 솟구친 기쁨으로 폐는 잔뜩 부풀어 올랐다. 이마와 코와 턱 끝과 뺨과 귓불과 입술들을 나비처럼 옮겨 다니며 하염없이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음은 물론이었다. 저절로 뇌까려지는 “사랑해”란 고백은 흡사 강박증 환자의 주문처럼 뇌리 속에서 수도 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천만다행인 것은 이리 마음속 고백이 절실해도, 이리 어루만지고 어루만지길 계속해도 연인이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점점 대담해진 손길이 얼굴을 떠나 목울대와 목덜미와 파자마 속 어깨와 가슴팍과 아랫배까지 더듬고 내려가도 연인은 요지부동이었다. 여전히 자신의 따라쟁이인 모양이었다. 그간 그토록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면서 지금은 이다지도 시체처럼 잠이 들어 있다니.

김성준의 얘기론 자신이 집을 나간 두 달 남짓, 연인은 미친 듯이 일만 했다고 한다. 불면증도 무척 심해져서 수면제를 처방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하는데, 그나마 혜윤이가 깨어난 여드레 전부턴 수면제 없이도 잠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뭐가 자신이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는 거냐. 속으로 애틋한 원망도 퍼부어보았다. 그러면 자기도 행복할 거라고? 이렇게 잠도 못 자며 괴로워할 거면서 행복할 거라고? 허세도 그런 허세가 없었다.

두 달 전, 그 남자의 집에서 연인을 내쫓았던(연인이 자신을 버린 게 아니었다. 자신이 연인을 버렸었다.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복수의 쾌락에 전율하며 가차 없이 연인을 내팽개쳤다) 밤의 기억이 뇌리를 스치며 다시금 목이 메었다.

유난히도 질투가 심한 연인이었다. 특히나 그 남자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더했었다. 연인의 사랑을 자각하고 나서, 그것은 또한 자신에게 ‘정말로 사랑을 받는다’는 전율 같은 황홀감을 선사해준 산 증거이기도 했다. 그런 연인이니 연적에게 자신을 떠넘기고 돌아섰을 때의 참담한 상처가 오죽했을까. 그런 극심한 질투심을 극복할 만큼의 자신에 대한 연인의 사랑이란 또한 얼마만큼이나 깊었던 것일까.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나 싶더니 어느새 뺨으로 눈물방울이 줄기를 이루며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이미 거의 하루 종일 눈물을 흘린 탓에 아프다 못해 쓰라린 눈시울이었다. 눈꺼풀이 퉁퉁 부어올라 있음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 정도로 울어댔는데도, 내장 깊숙이 서리서리 똬리를 틀고 앉은 설움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하긴 어쩜 평생을 울기만 해도 이 문신처럼 아로새겨진 깊은 설움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거의 그럴 확률이 높았다. 연인 말대로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함께 행복하게 살다가 한 날 한시에 죽는다면 그제야 설움 또한 깨끗이 마를지도 모를 터였다.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심해졌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연인으로부터 마지못해 손을 떼어냈다. 식욕이 동하면 동하는 대로 먹어줄 요량이었다. 건강해질 거였다. 튼튼해질 거였다. 몸도 마음도 모두. 그래서 자신의 전 존재를 빛으로만 가득 채울 거였다. 그래야 연인에게, 또한 연인의 소중한 가족과 집 식구들에게 도로 빛을 내어줄 수 있을 터였다. 일생 그렇게 살아갈 터였다. 연인만을 사랑하고, 연인에게만 헌신하고, 연인에게만 숭배를 주고, 연인을 위해서만 그림을 그리고, 또한 살아갈 터였다.

살며시 연인의 품 안에서 빠져나와 드러난 연인의 상반신에 허리께까지 내려가 있던 시트와 블랭킷을 덮어주었다. 연인이 갈아입혀주었음직한 파자마 위에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욕실부터 들어갔다. 눈시울이 너무나 아팠고, 세수라도 하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새는 눈물도 그칠 듯해서였다.

세면대에 찬물을 틀어 세수를 하니 역시 눈가가 조금은 시원해진 기분이 들었다. 거듭거듭 찬물 충격 요법을 쓰니, 차츰 눈물도 멎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배 속에선 연신 꼬르륵 소리만 나고 있는데, 눈물까지 줄줄 흘리는 꼬락서니가 새삼 민망하게 여겨진 탓도 있으리라. 세수를 하고, 말라붙은 타액이 느껴지는 목덜미도 닦아냈다. 자느라 몰랐는데 그새 연인이 애무를 한 모양인지 목덜미는 물론, 몸 이곳저곳에 타액이 마른 것 같은 뻑뻑함이 느껴졌다. 옷을 갈아입혀주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핥아 먹었을 연인이 눈에 선해서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진 동시에 가슴이 몹시도 설레었다. 어디 얼마나 흔적을 남겼나 싶어 파자마 앞섶을 슬쩍 엿보았다가 그만 ‘그것들’을 보고 말았다.

깨물리고 빨리고 물어뜯긴 격렬한 마킹의 자국이었다. 푸릇푸릇한 멍에, 피딱지가 선명하게 앉은 잇자국에, 막 만들어진 것 같은 붉은색이거나 이미 나아가는 중인 듯 핑크빛으로 변한 빨림의 흔적들도 부지기수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수십 군데가 넘었다. 멍하니 욕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전면 거울을 향해 섰다. 파자마를 단숨에 벗고 보이지 않던 곳까지 눈을 크게 뜨고 확인했다. 앞쪽만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던 등줄기는 더욱 적나라했다. 석상이 된 채 한참 동안 거울만 들여다보았던 것 같았다.

연인이 아니었다. 그랬다. 이 흔적들은 그 남자의 것이었다. 연인이 이 자국들 위에 단 한 군데도 빠짐없이 키스를 했다는 것은 메마른 타액의 흔적을 통해 확연히 알 수 있긴 했지만, 명백히 원래의 주인은 그 남자였다.

하늘하늘 휘날리는 벚꽃의 낙화를 배경으로 자신을 건너다보던 그 남자의 슬픈 눈이 오롯이 떠올랐다.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마치 몇 십 년은 지나버린 것마냥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기억이었다. 오수(午睡) 중에 꾼 나비의 꿈처럼 현실인지 환상인지조차 아리송하게 느껴지는 기억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엄연한 현실이었다. 자신은 두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 남자에게 안겼다. 어젯밤만 해도 자신은 그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친친 감은 채 ‘더, 더’라는 창녀의 교태로 남자를 조르지 않았던가. 자신의 몸뚱이에 새겨진 이 격렬한 마킹들이 그 증거였다.

자각의 순간, 심장이 칼끝으로 찔리는 것 같은 아픔이 지나갔다. 동시에 뇌리 속에 비집고 든 ‘죄책감’이란 단어를, 그러나 맹렬하게 고개를 흔들며 단숨에 지워버렸다.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 남자에 대한 모욕이었다. 스스로를 타락시키는 희생을 감수함으로써 끝끝내 자신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베풀어준 남자였다. 넋을 구해준 남자였다. 지금 현재, 온전히 살아서 연인에게 되돌아올 수 있게끔 해준, 혜윤이와 더불어 연인과 자신의 또 다른 구원자였다. 평생 갚아도 모자랄 사랑을 입은 것이다. 두 목숨을 빚진 은인이다. 같잖은 죄책감 따위로 남자의 그 깊은 사랑을 매도할 수 없었다. 가차 없이 남자의 사랑과 생기를 파먹었던 괴물이었을지언정 차마 그 정도의 양심은 있었다.

아마도 연인 또한 같은 것을 느꼈을 터였다. 그래서 자신을 안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연인이라면 만나자마자 자신의 몸부터 미친 듯이 탐했을 터였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고 내내 집 식구들의 눈을 피해 시종 껴안고 입을 맞추고 애무를 할지언정 좀처럼 안을 생각을 않던 연인이었다. 충분히 그럴 기회도, 시간도 주어졌건만.

그건 역시 배려였을 것이다. 정중한 예우였을 것이다. 그 남자의 사랑에 대한. 연인을 포함한 자신까지, 두 목숨을 살려준 은인으로서 남자의 사랑을 받았던 자신의 몸뚱이에 대한 예우.

한동안 멍하니 거울 속 남자의 자취를 좇다가 다시 파자마를 걸쳐 입었다. 미안해하지 않겠다. 죄책감을 갖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남자와 그 남자가 자신에게 베풀었던 절대적인 애정을 모욕하지 않을 것이다. 단연코 그리하겠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몇 년이 걸릴지, 혹은 몇 십 년이 걸릴지, 그도 아니면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생일지(물론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고 한다면), 정확히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언젠가는 자신과 연인 두 사람이 남자에게서 용서받을 날이 올 것이다. 그땐 남자에게 약속한 대로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들로만 선물을 주리라. 자신의 존경과 자신의 그림과 자신의 예술과 자신의 헌신과 자신의 우정을…….

또다시 꼬르륵거리는 배 속 신호를 따라 욕실을 나왔다. 침대 쪽을 살펴보니 연인은 여전히 깊은 숙면에 빠져 있는 듯했다. 자연스레 입가에 맺힌 미소와 함께 뇌리 속으로 엄마의 「섬 집 아기」 자장가가 흥얼거려졌다. 가까이 다가가 다시 한 번 그 예쁜 얼굴을 어루만져 연인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이번엔 어쩐지 연인을 깨울 것 같은 불안감이 들어 포기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거듭 뇌리로 자장가를 흥얼거리며 주침실을 빠져나와 주방으로 갔다.

간밤의 흥청거림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으로 사위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거실 한가운데에 마련됐던 거대한 진수성찬의 상차림도 흔적이 없음은 물론이었다. 아마도 두 딸을 포함한 이 의원 일행과 김성준, 휘야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집 식구들도 별채로 퇴근했을 것이고, 본채에 남아 있는 이는 혜윤이와 전담 물리 치료사뿐일 것이다. 혜윤이는 건강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여기 우리 집에서 지내다가 더 이상 재활 훈련이 필요하지 않게 됐을 때 연희동 집으로 다시 옮긴다고 했었다. 잔칫상 앞에서 오고 간 가족회의 내용 중 혜윤이 부활 계획의 일부 결정이었다.

주방으로 향하는 도중, 혜윤이가 잠들어 있을 두 번째 손님방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돌아갔다. 역시 연인이 누워 있는 침대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당장이라도 방 안으로 들어가 자신에게 나린 은총과 기적의 증거를 재확인하고픈 욕망이 치밀었다. 물론 어림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허물이 없다 한들, 과년한 처녀의 방을 무턱대고 드나들 순 없는 노릇이었다.

두 명의 아주머니와 역시 두 명의 메이드 아가씨들이 열심히 수고를 해주었는지 주방엔 그리도 질펀했던 잔치 마당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기 하나 안 보이는 싱크대와 조리대들을 감탄하며 들여다보다가 냉장고를 열었다. 역시 남은 음식들이 밀폐 용기에 제법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그중 가장 먹음직해 보이는 연어스테이크와 과일 샐러드, 그리고 잡채와 식혜 그릇을 꺼냈다. 문을 닫으려다가 플레인 요구르트 한 개와 사과 한 개도 꺼내 들었다.

주방 간이 식탁 위에 그 모든 음식 접시들을 늘어놓고 보니 엄청난 양이었다. 식탐도 이런 식탐이 없겠다 싶으면서도 그중 단 한 가지도 도로 냉장고에 집어넣고 싶지 않았다.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던 것은 물론이었다. 샐러드와 연어스테이크를 우선 해치우고, 식혜를 한 모금씩 마시며 전자레인지에 데운 잡채 한 접시도 눈 깜빡할 사이에 해치웠다. 이미 먹어치운 요리만도 평소 자신이 먹었던 양의 세 배쯤은 될 양이건만 후식 몫으로 남겨둔 플레인 요구르트 뚜껑까지 개봉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한계까지 빵빵하게 차오른 위를 자각하면서도 도무지 먹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었다. 잔칫상을 앞에 두곤 그저 마냥 흥분해 있어 이다지도 과하게 항진된 식욕을 미처 자각하지 못한 것이 천만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안 그랬다면 가족들 앞에서 반쯤 정신이 나간 폭식증 환자로 찍혔을 터였다. 하긴 두 달 전만 해도 극심한 거식증을 앓았으니 오십보백보인 것도 같았다. 어쩌면 이리 과도한 식욕 또한 그 후유증일 터였다. 아직도 자신의 체중은 원래의 정상 체중에서 10킬로그램이나 모자랐다. 연인의 근사한 몸매에 황홀해하는 대신 자신의 망가진 육체에 자격지심을 느끼던 때조차도 절대 빠지지 않던 똥배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면 거식증의 후유증은 나름대로 지대했다고 볼 수 있었다.

“……배가 고팠나?”

흠칫.

나지막한 중저음이 귓전을 두드린 것은 막 요구르트 한 스푼을 입안에 털어 넣고 있던 때였다. 스푼까지 입안 가득 밀어 넣은 미욱한 얼굴로 기절초풍을 한 것은 물론이었다.

반쯤 열어두었던 주방 미닫이 문 너머에서 연인이 고요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암청색의 파자마 위에 연보라색 나이트가운만 대충 걸치고 있는 연인의 눈꺼풀은 약간 부어 있었다. 자신만큼 제법 오랫동안 숙면을 취한 흔적이었다. 이마를 거의 덮을 만큼 더부룩하게 흘러내려와 있는 부드러운 머리카락 탓에 막 잠에서 깬 어린 청년 같아 보였다. 채 끈으로 여미지도 않은 나이트가운이며 파자마 바짓단 아래로 드러나 있는 군함처럼 커다란 맨발을 보니, 깨자마자 자신부터 찾았을 연인의 다급한 심사가 읽혔다.

입안 가득한 걸 서둘러 삼키느라 고개만 끄덕이다가 기어이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캑캑거리며 기침을 시작하자, 연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리더니 비호처럼 다가와 등을 쓸어주기 시작했다. 딱 적당할 만큼의 자극이었건만 도리어 몹시 흥분해버린 탓에 기침은 한참이 지나서야 잡혔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훔치고 있는데 입가에 물 컵이 다가들었다.

“마셔.”

빨개진 얼굴로 얌전히 받아 마시는 동안 등줄기로 연인의 부드러운 쓸어내림이 느껴졌다.

“……이 많은 걸 지금 다 먹어치운 건가?”

연인의 물음엔 흐릿한 웃음기와 더불어 여전한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배, 배…… 가 고파서…….”

기침 발작으로 인한 기왕의 열기에다 더한 열기가 보태져 얼굴은 보지 않아도 홍당무가 되었을 터였다. 연인을 처음 만나던 시절로 시간이 역행해버린 것 같은 넋은 연인 앞에서 지나칠 정도로 긴장하던 옛 버릇까지 고스란히 되돌려준 모양이었다. 연인의 시선 한 번에도 손끝이 떨리고, 연인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렸다. 연인 앞에서 사소한 실수 하나만 해도 엄청나게 마음의 동요를 느끼는 것도 한가지였다. 좋은 모습만, 혹은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유치한 허영심마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이 나이에 이 무슨 추태인가 싶어 속으로 기가 막혀하면서도 도저히 마음속 혼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왕성한 식욕을 보여주는 건 눈물겹도록 고맙고 기쁜 일이지만, 마누라, 그렇게 갑자기 먹다가 탈이라도 날까 그게 더 걱정돼. 거식증 때문에 위 기능도 많이 떨어져 있을 거고, 당분간은 항진된 식욕을 억누르고 보식 기간을 갖는 게 더 좋을 거야. 더구나 넌 위 자체가 약하잖나.”

전직 의사 출신이라 그런가, 그저 과식하고 있는 장면을 슬쩍 본 것뿐인데도 자신의 상태를 일목요연하게 짚어내는 연인이었다.

“일단 더는 먹지 마. 상태 봐서 소화제라도 먹어두도록 하고.”

옆에 서서 등을 살살 쓸어주고 있는 연인의 손길과 강렬하게 퍼지고 있는 달콤한 체취에 정신은 마냥 혼미해져서 이젠 더 먹으라고 해도 못 먹을 터였다.

“……한 달 전쯤에 뉴질랜드산 마누카 꿀이 위염에 좋다는 의료 관련 기사를 봤어. 네 생각이 나서 무턱대고 주문을 하고 말았지. 메이드들이 받아서 어딘가에 뒀을 거야. 내일부턴 공복에 한 스푼씩 먹어보도록 해.”

이어진 덧붙임에 가만히 말뜻을 음미하다가 또 불쑥 목이 메었다. 한 달 전이라면 그 남자의 집에 있을 때였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기약조차 없던 그 절망의 시간에도 연인은 자신을 위해 건강식품 따위를 챙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연인이 옆에 서 있어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또 눈가가 붉어진 걸 눈치채이고 싶지 않았다.

“……응…….”

“……이건 이제 다 치워도 되겠지?”

초토화된 식탁을 굽어본 것 같은 연인이 물었다. 다시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인의 재빠른 손길에 의해 빈 접시들은 개수대로, 남은 밀폐 용기들과 먹다 남은 요구르트, 그리고 사과 하나는 도로 냉장고로 들어갔다.

“언제 일어났지?”

2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뒤처리를 끝낸 연인이 옆의 식탁 의자를 바짝 끌어다 앉으며 물었다. 자연스레 등 뒤로 돌아온 한 팔이 자신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연인의 겨드랑이 부근과 맞닿은 어깨에선 금세 연인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반대편 어깨에 닿아 있는 연인의 손에서도 열기는 화덕 같았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는 터라 더 뜨겁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워낙 자신보다도 훨씬 체온이 높은 연인이긴 했지만 말이다.

“……20분……? 아, 아니…… 30분쯤 됐나……?”

“여섯 시간은 잔 셈이군. 바로 침대로 데려갈 필요는 없겠어. 소화도 시켜야 할 거고…… 피로는 좀 풀렸나?”

“……어어…….”

“하긴 피로감이 아니라 충격 때문일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혜윤이가 깨어난 첫날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었다.”

“……응…….”

“며칠이 지나도 믿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미리 알리지 않은 거다.”

“……응…….”

이해할 수 있었다. 겁도 났을 것이다. 자신이 현재 겁을 내고 있는 것처럼. 이 모든 현실이 진짜 현실인지, 아니면 그저 너무나 원하고 원한 끝에 꾸게 된 꿈인지, 혹시라도 혜윤이가 잘못되는 건 아닌지 수시로, 때때로 의심이 들었을 터였다.

“……너무 늦은 건 아닌가 싶기도 했지.”

“……?”

“김강원.”

“…….”

“나보다는 좋은 것을 많이 지닌 남자가 아닌가. 네 마음이 어느 정도는 기울지 않았을까 두려웠지. 네가 조금이라도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됐다면 넌 내게 돌아오는 걸 망설였을 테니까. 평생 운이라는 것하곤 담을 쌓은 놈이 나니까, 막판에 이런 대박이 떨어질 거라고는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네가 돌아오지 않겠다고 거절했을 때의 내가 두려웠다.”

“…….”

“……돌아오긴 왔는데 도로 그 남자에게 확실히 되돌아가기 위해 잠시 들르는 절망도 가정해야 했지. 그래서 한밤중에 청계천 시장까지 달려가서 사시미 칼을 사는 정신 나간 짓도 벌인 거지.”

“…….”

“……이직도 100프로는 실감을 못 해. 그래서 두려워. 내내 미친놈처럼 환성을 지르고픈 심정으로 있다가도 수시로 두려움과 절망으로 곤두박질을 치곤 해. 네가 도로 우리 집 현관문을 나서는 상상을 하곤 하지. 날 간단하게 내버리는 상상…….”

“……그…… 그…… 그,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바보…….”

“……그래. 넌 이제 내 거지. 완벽하게 나만의 것이지. 그야말로 ‘영원’이라는 거야…….”

연인의 어조가 다시금 노곤하게 변했다. 흡족하게 살인을 마친 연쇄 살인마의 그것처럼. 섬뜩한 한기가 느껴지면서도 전율스러울 지경으로 달콤한 감각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연인의 저 병적이리만치 지독한 독점욕은 곧 인환 자신의 병적인 독점욕과 한가지였으므로. 자신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병든’ 만큼 연인 또한 병들어 있었다. 알고 있었다. 자신들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도저히 치료법을 찾을 수 없는 치명적인 사랑병에 감염돼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세상 무엇보다도 자신의 넋을 자지러지게끔 만드는 희열의 원인이었다.

“……그만해. 적어도 기쁨 때문에 울지는 말자, 우리.”

연인의 반대쪽 손이 뻗어와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어느새 또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였다. 손바닥이 가만가만 뺨을 스칠 때마다 코롱 냄새와 섞인 연인의 살 냄새가 미치도록 좋았다. 따뜻한 체온은 더더욱 좋아 사무쳤다.

“……너무나 많이 울렸어, 널. 지난 14년간 네가 흘린 눈물의 양이 얼마일까 가끔씩 헤아려볼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아득해지곤 한다.”

“…….”

“……그걸 다 어떻게 갚나…… 어떻게 해야 보상을 해줄까…… 암만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와…….”

“…….”

“……그런 지독한 시간들을 다 겪어내고도 날 선택해준 네가 어떤 땐 경이롭기까지 해…… 세상 제일가는 바보에 천치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 나처럼 이기적인 놈이었다면 애저녁에 내치고도 남았을 텐데…….”

어깨를 움켜쥔 팔에 힘이 더해지더니 상반신이 연인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정수리 위로 가볍게 눌리듯 밀어붙여지는 건 연인의 입맞춤이었다.

“……사랑하는데 보상이란 게 어딨어…….”

연인의 가운 깃 틈에 젖은 얼굴을 부비며 간신히 대꾸를 끌어냈다. 두 팔을 연인의 허리에 감고 실크 파자마 너머로 뺨에 닿아오는 가슴 근육에 무턱대고 입술을 누르는 건, 자신의 정수리 위에 쉴 새 없이 립 키스를 떨구고 있는 연인과 한가지였다.

“……사랑할 수 있는 걸로 충분한걸…… 사랑하고 싶은데 그 사랑이 허락 안 될 때의 비참함만 아니면 다 괜찮아, 나는…… 너만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으면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아.”

“…….”

“……더구나 네게서 이미 보상은 넘치도록 받았는걸. 지금 네 사랑이 그 보답이지. 사랑해도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세상에 널려 있고, 보답받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사랑하는 일 자체가 허락이 안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로 많지. 어제까지의 나도 그랬는걸. 그래서 잘 알아. 지금 이 순간이 내게 얼마만큼의 커다란 보상인지…… 축복인지, 기적인지…….”

말을 맺자마자 고개가 위로 홱 들려졌다. 연인의 격렬한 입맞춤이 소나기처럼 떨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연인의 양팔에 의해 용수철처럼 꽉 조여지고 있는 상반신이 아팠다. 입술은 물론 혀뿌리가 얼얼할 지경으로 사납게 빨리고 있는 입맞춤도 숨이 막혔다. 물론 개의치 않았다. 양팔로 연인의 목을 휘감은 채 마주 열렬히 키스를 돌려주었다. 부드럽게 만져지는 연인의 머리카락을 정신없이 흐트러트리며 무아경에 빠져들었다. 연인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입술의 각도를 바꿔가며 빨고 또 빨아 당겼다. 통째로 삼켜버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어느새 자신의 엉덩이는 연인의 허벅지 위에 앉혀져 있었다. 한 팔로는 자신의 두 허벅지를 모아 안고, 다른 한 팔로는 등줄기를 조여 안은 연인의 상반신이 점점 아래로 기울고 있었다. 입맞춤의 기세가 너무나 광포해져서 연인 또한 그런 스스로를 미처 의식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오른편 허벅지 중간쯤에 닿아 있던 연인의 페니스가 팽팽하게 부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사내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지점까지 발기해 있다는 게 생생하게 자각되는 순간, 연인의 불길처럼 타오르던 입맞춤이 겨우 떨어져나갔다. 막혔던 호흡이 간신히 재개되자 거칠게 숨을 할딱이며 흥분을 삭히려 기를 썼다. 연인의 단단해진 변화를 자각하는 동시에 자신 또한 완전히 발기해버린 때문이었다. 연인이 원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당분간은 안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 당분간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 남자의 마킹을 잔뜩 매단 채로 연인에게 갈 순 없었다. 그건 그 남자에게도, 연인에게도 또한 자신에게도 경우가 아닐 터였다.

30도쯤은 거의 눕혀지다시피 연인의 팔에 안긴 채 바로 코앞에 달라붙어 있는 연인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는 야수의 눈시울이 보였다. 서로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과 입가 주변은 야수의 선정성을 더더욱 극단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표정 또한 한가지일 것이다. 연인을 통째로 먹어치우기 위해 잔뜩 입맛을 다시고 있는 음탕한 창녀가 내면에서 요동을 치고 있었으니까.

“……괜찮아. 지금은 안지 않아, 마누라.”

자신의 마음을 읽은 연인과 그런 연인의 의지를 읽은 자신의 시선이 부딪친 채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언어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온몸을 전율할 정도로 서로 절박하게 같은 것을 원하면서도, 또한 해선 안 된다는 자각 또한 같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굳이 몸을 잇지 않아도 이 순간 서로는 완벽한 하나였다. 더 이상 부족한 게 있을 턱이 없었다.

영원과도 같은 주시 후에 연인이 비로소 자세를 바로 하는 게 느껴졌다. 의자 옆에 잠깐 자신을 놓아주었다가 바로 따라 일어서며 손을 잡아왔다.

“……침대로 데려다줄까? 좀 더 잘래?”

부드럽게 물어오는 어조에선 더 이상 몸의 흥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어조만 그러했다 뿐이지, 가운 자락 틈으로 확연히 드러나 있는 부풂은 여전한 발기의 자취였다.

“……너…… 는……?”

차마 연인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어 반대편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채 되물어보았다. 줄곧 연인의 몸을 괴롭힐 것 같다는 근심에도 불구하고 될수록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허기진 집착 때문이었다.

“많이 잔걸. 더 이상 잠도 안 올 것 같으니 샤워하고 컴퓨터나 좀 들여다보려고.”

역시나 함께 자자는 소리가 아니었다.

“벌써 일 시작하려고?”

“음, 너 없는 사이 이리저리 벌여놓은 게 많아. 괜한 곳에 화풀이를 한 셈이랄까.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은 휴일도 없이 일을 해야 할 거야. 괜찮을까?”

“……이, 일인걸…… 일에 질투를 할 순 없잖아…….”

어쩔 수 없이 서운해지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누르면서도 괜찮다는 대꾸만은 떨어지지 않았다. 단 몇 시간 만에 14년 전으로 퇴행하더니, 아예 철부지 떼쟁이로까지 전락을 해버린 모양이었다. 일로 바쁜 남편에게 소홀해졌다며 바가지를 긁는 아내의 형상이었다. 속내를 읽은 연인의 웃음소리가 나지막하게 떨어졌음은 물론이었다.

“질투해주면 외려 더 황송하지.”

“……나, 나도 많이 잤으니깐 너 일하는 거 구경하면 안 돼?”

“그럴래?”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엔 역시 기쁨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제야 연인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모여 고개를 드니 햇살 같은 미소가 자신의 시선을 맞고 있었다. 두근…….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을 정도로 연인의 아름다운 얼굴에 홀린 자신이었다.

“……조금 곤란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 이상 좋으니까 어쩔 수 없지.”

“……?”

“네가 그런 눈초리로 날 쳐다보면 서방님 심장이 몹시 두근거리거든. 얼굴도 빨개지고 손도 심하게 떨게 되지. 일에 꽤 지장을 초래하게 될 건 명약관화야. 14년 전에 내게 홀딱 반한 어느 핑크 재킷 왕자님의 눈동자와 똑같은 눈빛이지. 난 그것엔 매우 약해져. 정신없이 휘둘린다고나 할까. 하긴 네게서 안 휘둘릴 만한 요소를 찾아내는 게 더 빠를 테지만.”

“…….”

실망과 근심이 교차하는 눈빛을 읽었는지 연인의 손가락이 다가와 코끝을 움켜쥐더니 가볍게 비틀었다.

“……그렇다고 구경하지 말란 소린 아니야. 아니, 가능하기만 하다면 앞으로도 널 일터든 거래처든 어디든 데리고 다니고 싶어. 물론 그건 불가능한 일일 테지만. 언젠가도 말했듯이 널 손가락 크기만큼 축소시킨 다음 주머니에 넣어 갖고 다녔으면 소원이 없을 거야. 아, 물론 안기 위해선 도로 키워놔야겠지만.”

황당하고 낯 뜨겁지만, 그 이상 정열적일 수 없는 고백과 함께 연인이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주 꽉 움켜쥔 손가락이 자신을 서재까지 달고 갈 요량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분명 방해된다는 얘기를 들었음에도 ‘좋아라!’ 쫄래쫄래 따라가는 철부지 또한 자신이었다.

“……샤워 하고 나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소파에 자신을 앉히곤 이마에 쪽 하는 립 키스까지 떨어뜨리고 나서야 도로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는 연인이었다. 거의 동시에 연인의 가운 자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본능적인 몸짓이었다. 돌아서려던 연인의 묻는 듯한 눈길이 되돌아왔다.

“……나도…… 요, 욕실에 나도 들어갈 거야…….”

“왜? 너도 샤워하려고?”

“……아, 아니…….”

“그럼?”

“……너…… 너 샤워하는 거 보려고…….”

“…….”

대담하게 선언하긴 했지만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흡사 춤을 추듯 점점 더 기쁜 웃음기가 서리는 연인의 눈동자를 차마 더는 지켜보지 못하고 외면해야 했다.

“부끄러운 짓까지 다 보게 될 텐데?”

“……?”

무슨 소린가 싶어 힐끔 연인의 얼굴을 살피자 연인의 시선이 따라오라는 듯 연인의 사타구니 쪽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불룩하게 솟아 있는 파자마가 화살처럼 시야에 박혀들었고, 그제야 연인의 대꾸를 이해했다. 온통 시뻘게졌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자신이 아니었다. 고프고 또 고팠다. 확인하고 또 확인을 한다 해도 부족했다. 연인이 자신의 곁에 있다는 꿈같은 기적을.

“……그…… 그래도 보고 싶어…… 하…… 함께 있고 싶어…… 가, 가능한 한 많이…… 오래오래…….”

떨리는 심장을 주체 못 하면서도 단호하게 선언했다. 나지막하게 떨어진 희열에 찬 웃음소리는, 물론 연인의 허락의 신호였다. 겨드랑이 틈으로 연인의 손이 파고들어왔다. 소파에서 번쩍 들어 올려진 몸은 그대로 연인의 품 안으로 가 안착했다. 단단한 두 팔이 힘 있게 자신의 상반신을 죄곤, 허겁지겁 입술이 내려왔다. 열기를 숨기지 못한 격정적인 입맞춤이 꽤나 오랫동안 되풀이되었다.

“음, 나도…… 나도 늘 함께 있고 싶어, 마누라. 언제나 늘 함께 있고 싶어, 언제나……. 정말 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어디든 데리고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겨우 떨어진 입술 틈으로 탄식처럼 토해진 중저음이었다. 이마를 마주 댄 채 살짝 부비부비를 하며 황홀한 웃음을 물고 있는 연인이었다. 눈시울 아래로 긴 그늘을 만들어내는 속눈썹이 파르륵 떨리는 게 보였다.

이윽고 포옹을 푼 연인이 쑥스러운 것 같은 소년의 웃음을 물곤 자신의 손을 다시 잡아왔다. 거실에 면한 욕실로 일단 걷기 시작했지만 키스로 노곤해진 자신의 다리가 비틀거리자 아예 공주님 안기로 번쩍 안아 들곤 단걸음에 욕실로 들어선 연인이었다. 화장대 앞 스툴에 자신을 앉힌 즉시 연인이 가운과 파자마를 단숨에 벗어젖히고는 욕조가 있는 부스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더 마른 몸뚱이가 안쓰러워 가슴이 죈 게 무색할 지경으로, 돌아설 때 살짝 보인 연인의 성기는 거의 아랫배에 닿을 기세로 꼿꼿하게 발기해 있었다. 야성 그 자체의 상징처럼 엄청난 위용이었다. 꽤나 다급한 것 같았던 연인의 몸짓이 그제야 이해가 되는 자신이었다. 역시 반쯤 일어서 있었으나, 그닥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던 자신과는 180도는 차이가 있었다.

벽에 고정된 샤워기에서 욕조 아래로 물이 쏟아지며 샤워부스 안이 금세 뿌연 김으로 가득 들어차왔다. 그렇다고 연인의 형태까지 완전히 지워진 건 아니어서, 차라리 더 선정적으로 보이는 장면을 고스란히 목격하게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물이 쏟아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자위를 시작한 연인이었다. 한 팔로 벽을 짚어 중심을 잡은 후 연인은 샤워기 아래 서서 한 손으로 성기를 쥐고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등을 보인 자세라 물결치는 등 근육이며 단단한 허벅지, 그리고 엉덩이 근육이 연인이 허리를 치댈 때마다 불끈불끈 움직이는 게 흐릿하게 들여다보였다. 샤워 물줄기까지 고스란히 맞고 있는 터라 흔들릴 때마다 사방으로 튀어대는 물방울들이 연인의 넘치는 생명력을 대변하는 것 같아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대단히 야한 이상으로 아름다워서 그저 멍하니 연인의 뒷모습만 지켜본 인환이었다.

그리 오래 끌 생각은 없었는지, 연인은 5분도 안 돼 허리가 뒤로 확 휘어지며 나지막한 교성을 토해냈다. 오르가슴에 오르고도 몇 십 초쯤 전율하듯 허리를 튕기다가 숨을 헐떡이며 돌아선 연인이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똑바로 시선을 맞춰오는 연인의 눈시울엔 나른한 쾌락의 여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입술 끝이 비죽 올라가 있는 것은 쑥스러운 것 같은 소년의 미소 때문이었다. 눈꼬리까지 아래로 한참을 휜 걸 보면 정말로 많이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막 오르가슴을 겪은 몸을 대변하듯, 어깨와 가슴은 물론 목덜미와 귓불, 얼굴까지 온통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흡사 쑥스러워 얼굴을 붉히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아니,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았다. 홀려서 바라보는 자신의 눈동자를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응시하면서도 섹시하게 부푼 입술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것은 미숙하면서도 수줍어하는 듯한 소년의 미소였다.

“……그런 눈으로 보면 대단히 위험하다고 했는데, 마누라…….”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헐떡이듯 떨어진 연인의 탄식이었다. 과연, 다시금 불쑥 각을 더하는 연인의 페니스가 보였다. 동시에 시선을 거두고 도로 반대편 벽을 향해 돌아선 연인이었다. 또 자위를 하려나 싶었지만, 연인은 퍼프에 샤워젤을 묻히더니 몸을 닦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역시 꽤나 쑥스러웠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인환 자신만 14년 전으로 퇴행한 건 아닌 모양이라고, 심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래 애쓰며 뇌까린 자신이었다.

7∼8분쯤 만에 샤워를 끝내고 부스 밖으로 나온 연인이 마른 타월 두 장으로 머리와 가슴을 문지르며 인환이 앉아 있는 스툴 가까이 다가왔다.

“……생각보다 꽤 창피하군…….”

웃음기를 머금은 자조였다. 허리에 대형 타월을 감은 채 중간 타월로 부지런히 머리의 물기를 털면서도 뜨겁고 달콤한 시선만은 내내 인환을 핥고 있는 연인이었다.

“……이상하지? 마치 처음 자위한 10대 애송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야. 되게 부끄러워.”

“…….”

“……아무튼 이제 다신 마누라 앞에서 이 짓은 못 하겠다. 온갖 변태 짓은 다 해치운 주제에 새삼 왜 이러나 몰라.”

“…….”

자신 또한 한가지란 얘기는 덧붙일 필요조차 없으리라.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것을 연인 또한 자각하고 있을 테니까. 서로는 잃어버린 회한투성이 14년을 다시 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그대로 연인은 열여덟 소년이었고, 자신은 첫사랑의 열병에 제대로 낚인 미숙하기 짝이 없는 어린 청년이었다.

“나가자.”

타월 대신 바스 가운만 걸친 연인이 다시 손을 잡아왔다. 욕실 문을 여는 연인의 아름다운 프로필엔 여전히 쑥스러운 소년의 웃음이 머물고 있었다.

욕실 다음엔 침실 드레스 룸으로 가서 새하얀 브이넥 티셔츠와 검정색 트레이닝팬츠로 갈아입는 연인을 지켜봤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한 연인에게서 떼를 쓰다시피 드라이어를 뺏어서 연인 대신 자신이 말려주었다. 그건 마누라를 위한 서방님만의 일거리라며 처음엔 고개를 가로젓던 연인도 나중엔 화장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황홀한 표정으로 자신의 서비스를 받아들였음은 물론이었다. 기분이 좋은 듯, 드라이어의 따뜻한 바람을 따라 점점 더 뒤로 넘어가는 연인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더 뒤로, 뒤로 드라이어를 빼는 장난까지 쳐본 자신이었다. 결국 눈치챘는지 완전히 뒤로 넘어간 상태 그대로 눈을 뜨더니 거꾸로 시선을 맞춰오는 연인이었다.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해, 마누라.

입술만 움직인 명령이 웃음기가 가득 밴 연인의 표정으로부터 전해졌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드라이어를 내려놓고 연인의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춘 자신이었다. 시작은 자신이었으되, 끝내는 연인이 단단한 손바닥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감싸 안듯 누르며 몇 배는 강렬한 입맞춤으로 바꾸고 말았다. 연인은 의자에 앉은 채 뒤로 완전히 상반신이 넘어간 자세였고, 자신은 그 위를 덮치는 유리한 자세였음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숨이 차오를 때까지 악착까지 물고 늘어진 연인 탓에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자신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순간도 주도권을 뺏어올 수 없었던 것은 물론, 키스를 하다 흐물흐물 늘어져 나가떨어졌으니 겁 없이 도발한 자신만 탓할밖에.

미처 일어설 틈도 없이, 의자에서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운 연인이 뒤로 돌아 주저앉은 자신을 덮쳐들었다. 완전히 바닥에 깔아버릴 기세로 키스의 폭풍이 몰아쳤다. 아아, 역시 괜히 도발했다고 후회한 자신이었다.

거짓말 안 보태고 20여 분 가까이 서로의 입술만 빨아댄 것 같았다. 수십 번을 각도를 바꿨고, 등을 대고 누워 빨고, 반대로 연인의 위에 올라타고 앉아 빨았다. 마주 앉아 입술만 대고 빨기도 했고, 완전히 겹치고 누워 단 1밀리의 틈 하나 없이 서로를 꽁꽁 끌어안은 채 빨기도 했다. 나중엔 혀와 입술이 얼얼하다 못해 마비가 올 지경이었다. 마라톤을 뛴 것마냥 지쳐버린 것은 물론이었다. 결국 연인도 지쳤는지 마지못해 입술을 떼고 빙글 등을 돌려 누워버렸다. 자신을 품에 꼭 껴안은 채였던 것도 물론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많은 옷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드레스 룸에서 결코 계획하지 않았던 러브신을 연출하게 된 셈이었다. 연인도, 자신도 완전히 발기해선, 마주 댄 사타구니를 더 이상 자극하지 않기 위해 서로 숨을 죽인 채 흥분이 가라앉길 빌었다. 그저 서로 꼭 껴안고만 있는, 말없는 완벽의 황홀경 상태가 10여 분쯤 계속되었다. 연인이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자신의 머리를 황홀하게 자각하며 눈을 감았다 떴다 했다. 멀리서 괘종시계 종소리가 났다. 5시였다. 깨어난 게 3시경이건만,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버린 걸까? 속으로 키득키득 웃으며 자문한 자신이었다. 물론 시간 도둑은 연인이리라. 고작해야 한 시간이 채 흘러갔을까 말까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다. 방해꾼이 맞았다. 연인이 자신의 시간 도둑이라면 자신은 연인의 방해꾼이었다. 서재로 일을 하러 가겠다던 연인도 좀처럼 일어설 생각을 않고 있으니 말이다.

“……괜찮아. 일요일이니까 일은 아침까지 충분히 시간을 들여 할 수 있어. 오후에 사업 파트너와 오찬 약속이 잡혀 있는데 그전까지만 검토를 끝내면 돼.”

완벽한 합일 상태 때문일까? 귀신처럼 속내를 읽는 연인이었다. 그저 연인의 가슴팍을 감싸 안고 있던 팔과 손가락을 약간 꼼지락거린 것뿐인데.

“……현관문 소리가 났어. 아주머니들이 식사 준비하러 오셨나 봐.”

“음.”

“……혜윤이도 일어날지 모르고…….”

“음.”

“……혜윤이가 깨어나서 너무 좋아…….”

“음, 나도.”

“……다 꿈일까 봐 무서워…….”

“그래…….”

“……만약 다 꿈이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래…….”

“……그래, 내 강아지…….”

“……너도 약속해…… 꿈이면 나랑 같이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게.”

“……맹세도 해.”

“맹세한다.”

“……도장 찍고 복사도…….”

“……복사.”

“……나 살리려고 그런 거지?”

“?”

“……그때…… 안양교도소에서…… 죽도록 괴로워하시며 사세요. 그것이 혜윤이를 그렇게 만든 당신에게 내리는 벌이라 여기시고 무사히 살아가세요…….”

“…….”

“……평생 괴로워하며 사세요. 평생 어둠만을 좇으며 죄인답게 버러지처럼 살아가세요…… 하고 말했던 거…….”

“…….”

“……날 살리려고 필사적이었던 거지……?”

“…….”

“……다 기억이 나, 위야…… 이젠 전부 다 기억이 나…… 그때 미쳐서 너 찔렀던 일이랑…… 혜윤이 핑크색 곰돌이 양말이랑…… 감옥에서의 일들도 전부 자세하게 다…… 자세하게 기억이 나는데도 이제 하나도 안 아파…….”

“…….”

“……구급차 부르라고 했지……? 상냥하고 다정하게 웃어도 줬어…… 귀엽다고도 했어…… 내가 위험하니까 얼른 구급차 불러야 한댔어…… 다 기억이 나…….”

“…….”

“……날 살리려고 그랬던 건데, 난 그땐 몰랐었어…… 꿈에도 몰랐었어…… 그래서 오기만 부리고 네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하지만 덕분에 이렇게 살았어, 위야…… 살아서 널 가질 수 있게 됐어…… 살아서…… 네게 날 전부 내줄 수도 있게 됐어…… 영원히…….”

“…….”

“……정말 다행이야…… 너무너무 기뻐…… 네가 그때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 진짜 확실히 죽었을 거거든…… 그땐 정말 많이 아팠지만, 덕분에 여기까지 참고 걸어올 수 있었던 거야…….”

“…….”

“……고마워…….”

“…….”

“……나 그토록 많이 사랑해줘서 고마워, 위야…….”

“…….”

“……날 살아 있게 만들어줘서 고마워…….”

“…….”

“……널 사랑하게 만들어줘서 고마워…… 사랑할 수 있도록 내 삶 앞에 나타나줘서 고마워…… 날 사랑해줘서 고마워…….”

“…….”

“……그리고 미안해…… 아직 너무 어렸던 너를 한계까지 밀어붙여서 미안해…… 나 말고도 져야 할 짐들이 너무 무거웠던 어린 네게 내 사랑만 고려해달라고 떼를 써서 미안했어…… 좀 더 길게 기다려볼걸…… 좀 더 인내심을 갖고 사랑할걸…… 불도저처럼 달려가느라 이다지도 힘들게 돌아오게 해서 미안해…… 네게 상처를 줘서 미안해…… 아프게 해서 미안해…… 너무너무 미안해, 위야…….”

“…….”

정수리 위에 닿아 있던 연인의 턱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연인의 크나큰 동요와 기쁨이, 아니, 슬픔이 손가락 끝까지 선연하게 전해졌다. 천천히 상반신을 들어 올려 연인의 얼굴 바로 정면에서 시선을 묶어 올렸다. 빨갛게 변한 심연처럼 깊은 눈시울이 보였다. 눈꼬리 끝에서 관자놀이 쪽으로 길게 눈물 고랑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도 보였다. 홍수처럼 엄청난 기세로 퍼져가는 물줄기였다. 똑, 똑 하고 연인의 뺨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자신의 것이었다.

“……키스…….”

연인의 잔뜩 억눌린 중저음이 들릴 듯 말 듯 속삭여졌다.

“……응……?”

“……키스 좀 더 해야겠다, 마누라…….”

“…….”

응 하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연인의 커다란 손바닥이 자신의 양뺨을 붙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입술 표면이 닿자마자 전기가 오른 것처럼 뜨겁고 찌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영혼의 울림이었다. 공명이었다.

마주 달라붙어 흡반처럼 쪽쪽 소리를 내가며 서로를 맹렬하게 빨아들였다. 뼈와 살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지경으로 달콤하면서도 짭짤한 맛이었다. 눈물 맛 키스였다. 지독히도 아픈 입맞춤이었다. 너무나 행복해서 아팠다. 행복이 지극하면 그 이상으로 마음이 아플 수도 있다는 걸 또 새삼 깨달은 자신이었다. 연인이었다. 서로였다.

결국 연인이 서재로 들어간 시각은 아침 6시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정말로 입술이 부르틀 지경으로 끝없이 입을 맞추고 서로를 쓰다듬기만 한 두 사람이었다. 지치면 그저 끌어안은 채 한동안 숨을 고르고, 또 하고 싶어지면 숨이 가득 차오를 때까지 서로를 빨고 빨았다. 푸릇푸릇하게 밝아오기 시작한 창 밖을 건너다보며 입술을 마주한 채 킬킬거리기도 하다가, 서로 웃다가 자지러질 때까지 간지럼을 태우기도 하다가, 꼭 껴안은 채 드레스 룸 안을 굴렁쇠처럼 뱅글뱅글 돌기도 했다. 자극이 지나쳐 한계까지 발기하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얼음땡이 돼서 서로의 일렁이는 눈동자만 필사적으로 들여다보았다. 몸이 가라앉으면 다시 만지고 키스하고 어린애들처럼 간질이고 둘이 꼭 붙어 뒹굴뒹굴하는 장난질을 쳤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천상의 유희는 결국 주방에서 풍기기 시작한 밥 냄새에 의해 아쉬운 이별을 고해야만 했다.

서운함이 역력한 기색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운 연인은 엉망으로 구겨진 자신의 나이트가운과 파자마를 벗기고 하늘색의 벨벳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혀주었다. 그 남자의 마킹 자국이 선연한 몸 이곳저곳에 경건한 몸짓으로 하나하나 입을 맞춰주었음은 물론이었다. 거의 두 시간여 만에 옷 갈아입기를 겨우 끝낸 둘은 아침 인사를 건네오는 집 식구들에게 쌍둥이 같은 팔불출 웃음으로 응대를 하곤 곧바로 서재로 올라왔다. 유치원에 가는 어린애들처럼 손을 꼭 마주 잡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자신들을, 집 식구들이 킥킥거리며 훔쳐보는 것 따윈 물론 조금도 알아챌 수 없었다.

서재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무릎 위에 앉히기부터 한 연인은 컴퓨터를 켜고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이러면 연인을 관찰할 수 없다는 자신의 항변도 연인의 “얼굴은 더 잘 보이잖나”라는 간단한 한마디로 깨끗이 무시됐다. 커다란 24인치 데스크톱 모니터 위에서 연인은 수많은 서류들과 외국 웹사이트들과 본사에서 보내온 메일들을 차례로 확인했다. 일하는 틈틈이 품 안의 자신을 꼭 끌어안기도 하고, 여기저기를 애무하기도 하고, 입술에 닿는 곳곳에 닥치는 대로 립 키스를 뿌리긴 했지만, 그건 거의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일단 일에 돌입한 연인의 저 놀라운 집중력은 무엇으로도 깰 수 없을 것 같았다. 확실히 ‘얼굴은 더 잘 보이는’ 덕분에 일하는 연인의 얼굴을 실컷 구경한 자신이었다. 물론, 번개 같은 속도로 키보드를 치고, 마우스를 놀리는 피아니스트 신동의 손가락이며, 집중하면 미간이 살짝 구겨지는 귀여움이며, 자신이 연인의 몸 곳곳을 만지작거리며 간질일 때마다 위협적으로 떨어지곤 하는 “그만두지 않으면 가만 안 둔다”의 섹시한 중저음 같은 것들은 더 황홀한 보너스였다.

그렇게 한 시간 반쯤이 지나니 메이드 미스 정이 식사하라는 전언을 가지고 올라왔다. 노크 소리와 함께 연인의 무릎에서 번개처럼 내려가려는 자신을 연인이 양팔로 더욱 꽁꽁 감아 들이는 바람에 어린 아가씨 앞에서 온통 새빨개진 것은 또 다른 계산 착오였다. 자신보다도 더 새빨개진 미스 정이 도로 문을 닫고 나가자 연인은 그제야 자신을 풀어주며 컴퓨터를 종료시켰다. 마우스를 쥐고 있던 오른손을 잽싸게 들어 올려 잇자국이 날 때까지 꽉 깨물어주는 것으로 복수를 했는데, 연인은 흥겨운 듯 껄껄 웃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복수라는 말이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쪽 손등에도 해달라며 왼손을 내밀 때에는 기가 막혀서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유치원에 가는 어린애들처럼 서로 손을 꼭 마주 잡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추운가?”

엘리베이터에 올라 잠시 진저리를 치자 연인이 재빨리 캐치해내곤 물어왔다. 자신이 연인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듯, 연인 또한 한가지인 것 같았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자신 못지않았다.

“……내려가면 옷부터 갈아입을래? 봄이긴 해도 아침저녁으론 쌀쌀한 걸 미처 생각 못 했군. 서재는 더 싸늘했을 텐데.”

“……추, 추워서 그러는 게 아닌데…….”

마주 쥔 손을 풀고 금세 따뜻한 품 안으로 자신을 끌어들이는 연인에게 또 한 번 설핏 진저리를 친 자신이었다. 그랬다. 추운 게 아니었다. 달콤해서였다. 너무나 행복해서였다. 생애 처음으로 온 넋과 온 정신이 함께 공명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처럼 완전무결한 기쁨과 행복의 순간은 없었노라고. 새삼 절실하게 자각한 몸뚱이가 그만 동요를 그대로 드러내며 진저리를 치는 것으로 반응을 보였다.

“……추운 게 아냐? 그럼 왜?”

정수리 위에 턱 끝을 대고 문지르듯 꾹꾹 눌러대며 연인이 되물어왔다. 허리를 죄어 안았던 연인의 양팔은 좀 더 아래로 내려가 양쪽 엉덩이 살을 떡 주무르듯 조물조물 애무하고 있었다. 땡 하고 1층에 엘리베이터가 서며 문이 열렸건만, 그대로 선 채 성추행에 가까운 포옹만 거듭하고 있었다. 물론, 핑계는 자신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라고 둘러댈 터였다.

“……조…… 조…… 좋아서…….”

“……뭐가?”

“……그…… 그냥 다…… 너무 너무 좋아서…… 행복해서…….”

“…….”

“……이…… 렇게 행복해본 적이 없어서 몸이 많이 놀랐나 봐…… 자꾸만 막 저절로 떨리는 게…….”

“…….”

대답 대신 턱을 붙잡고 가만히 키스를 해온 연인이었다. 동감……. 소리 없는 고요한 입맞춤을 통해 전해진 연인의 대꾸였다. 그렇게 경건하게 시작한 키스가 농염한 색기를 띠게 된 건 물론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연인의 상체가 점점 더 아래로 기울어질수록 자신의 허리는 뒤로 활처럼 휘었다. 각도를 바꾼 연인이 다시 입술을 겹친 채 혀를 밀어 넣었을 땐 아련한 교성마저 흘러나왔다. 자신의 허리와 엉덩이를 터트려버릴 것처럼 조이며 연인의 사타구니 사이에 자신의 사타구니를 비비듯 밀어붙이는 연인이었다.

“……우…… 우와아!!!”

갑자기 정면에서 날아온 소녀의 감탄성에 기절초풍해서 떨어진 두 사람이었다. 돌아보니 휠체어에 탄 혜윤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웃고 있었다. 두 손에 채 가려지지 못한 혜윤이의 귓불과 얼굴은 물론 온통 새빨개져 있었다. 혜윤이의 뒤에선 어제 저녁에 인사를 나눈 물리 치료사가 역시 얼굴이 빨개져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내, 내 책임 아냐, 위야 오빠! 오빠랑 선생님 전부 서재에 있다고 해서 아침 인사 드리러 올라가려고 했단 말야!!!”

손가락 틈으로 빼꼼 드러난 소녀의 천진난만한 눈이 별처럼 반짝이며 자신과 연인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동시에 어쩔 수 없는 10대 특유의 호기심이 역력한 눈빛이었다.

“와, 근데 진짜 찐하다!!! 꼭 영화의 한 장면 같아요, 선생님!!! 위야 오빠도 그렇고 선생님도 그렇고, 전혀 다른 사람 같아!!! 근데 왜 제가 이렇게 창피한 거죠?!!!”

재차 토해진 외침에선 짓궂은 장난기마저 느껴졌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근친에게 애인과의 정사를 목격당하는 것이 이다지도 부끄러울 줄은 미처 자각하지 못한 인환이었다.

“……금방 내려올 텐데 올라오긴 뭘 올라와. 식당으로 갑시다, 조 선생. 혜윤이 부탁합니다.”

“……네, 사장님…….”

역시, 가장 먼저 충격을 수습한 것 같은 연인이었다. 금세 시침을 뚝 뗀 어조로 물리 치료사에게 명령을 내리곤 자신의 손을 잡아끌었다. 충격에 빠진 나머지 얼음땡이 돼버린 자신을 질질 끌고 가다시피 하는 거친 몸짓이었다. 뒤에선 헤헤거리는 혜윤이의 웃음과 함께 “찐해도 넘 찐해요! 미성년자 관람불가야! 전 마음만은 아직 고2 그대로라구요, 선생님!”이나, “위야 오빠, 우리 선생님 진짜루 너무 좋아하나 부다! 창피해, 창피해! 혜윤이는 너무너무 창피해! 얼굴을 들 수가 없어요옷!” 하는 놀림이 연달아 따라왔다.

유난히 빠르고 거친 발걸음에 슬쩍 연인의 얼굴을 살피니 연인의 얼굴도 보일 듯 말 듯 홍조를 띠고 있었다. 결국 태연자약해 보였던 건 그저 가면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이젠 그 누구의 시선에도 천하무적일 것 같은 연인조차 누이의 천진난만함 앞에선 속수무책인 것 같았다. 하긴 자신에게도 그랬지만, 연인에게도 혜윤이란 아직 열여덟 살의 한참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아침 식사가 차려진 식당 의자에 앉을 때쯤은 그럭저럭 충격이 수습된 것 같았는데, 이번엔 어째 속이 울렁거렸다. 충격의 후유증인지, 아니면 새벽녘의 과식이 문제였던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온갖 솜씨를 발휘한 파출부 아주머니의 상차림을 발견한 순간 갑자기 명치끝이 답답해오며 토기를 느꼈던 것이다. 역시 자신보다도 더 자신의 상태에 민감할 연인이 먼저 변화를 알아챘다.

“왜 그래, 인환아?”

본능적으로 연인의 얼굴을 향한 시야로 연인의 당혹한 표정이 밟혀들었다. 꽤나 창백해졌을 자신의 낯빛에 놀란 모양이었다.

“……토…… 토할 것 같아…….”

식당 안으로 속속 모여드는 집 식구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소곤소곤 호소를 주었다. 흐릿하게 떨어진 그 한마디에도 연인은 단번에 사태를 알아차렸다. 전광석화보다도 빠르게 겨드랑이 사이로 연인의 팔이 들어왔다. 그대로 번쩍 들리다시피 욕실로 이동했음은 물론이었다. “오빠?” 혜윤이의 놀란 부름이 들렸지만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곧 들이닥칠 엄청난 사태가 아찔했던 때문이었다.

욕실 문이 열리고 변기가 보였다. 자신을 거의 집어 들다시피 날아온 연인이 아슬아슬하게 변기 뚜껑을 여는 게 보였다.

우웨에에엑!!!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엄청난 양으로 변기 속에 내뿜어지는 산사태에 괴로움보다도 몇 배는 더할 수치심이 뇌리를 강타했다. 아아, 차라리 다른 집 식구들에게 말할걸! 아니, 그냥 혼자 몰래 욕실로 뛰어들걸! 아니, 아니, 막판에 연인이라도 욕실에서 몰아내고 처리할걸……! 3분쯤 지속된 암담한 순간 동안 뇌리 속을 가득 채운 회한들이었다.

욕실 안은 금세 역한 냄새로 가득 들어차고, 냄새는 처음보다 더한 토기를 유발했다. 악순환이었다. 결국 남김없이 다 토해내고 나서야 비참한 수치는 일단락될 수 있었다.

연신 자신의 등을 토닥거리며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하는 연인에, 죽고 싶도록 수치스러웠다. 차라리 밖에서 기다려주었으면 훨씬 덜 괴로웠을 텐데. 애먼 야속함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미욱하게 과식하는 걸 들킨 것도 모자라 도로 다 토해내는 모습까지 쌍으로 들켜버리다니! 머리카락이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라는 걸 이 무심한 남자는 도무지 모를 것이다.

“……다 토해내. 그래야 덜 힘들어.”

“…….”

“……어쩐지 너무 먹는다 했지. 차라리 잘됐다. 일단 토해내면 체기는 금방 내려가니까.”

“…….”

“다 끝낸 건가?”

“…….”

“일어날래?”

“…….”

“그래. 조심해서…… 설 수 있겠어? 힘들면 내게 기대.”

다시 한 번 변기 물을 내리며 연인이 물어왔다. 부축하려는 손을 뿌리친 것은 물론이었다. 쉰 냄새가 풀풀 나는 몸뚱이로 차마 기댈까 보냐! 속으로 쏘아붙였음은 물론이었다. 물론 애먼 화풀이였다.

세면기로 다가가 물을 틀고 몇 번이나 가글을 했다. 두 시간에 가까운 격렬한 키스 탓인지 정말로 입안 곳곳이 얼얼하다 못해 아픔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연인에게 사납게 깨물린 곳은 헐어버릴 것도 같았다. 턱관절까지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가글을 해도 신 위액의 냄새가 가시질 않아서 칫솔질까지 하곤 세수도 했다. 옆에 선 연인은 그런 자신을 근심 어린 시선으로 내내 굽어보고 있었다.

“얼굴 이리 대봐.”

돌아보니 마른 수건이 다가와 흠뻑 젖은 얼굴을 꼼꼼히 닦아내주었다. 물론 연인의 정성스러운 손길이었다.

“일단 오후까진 금식하고 상태 봐서 죽을 먹도록 하자. 다 토해냈으니 굳이 약은 먹을 필요 없을 것 같다.”

“……죽을 거 같애…….”

“응?”

연인의 손에서 수건을 잡아채선 얼굴을 완전히 감쌌다.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 자신도 모르게 탄식처럼 중얼거리자 연인이 잘 못 알아들었는지 무심한 어조로 되물었다.

“……너 보기 창피해서 죽을 거 같애…… 그러니깐 먼저 나가. 혜윤이랑 집 식구들에게도 별거 아니라고 말해주고. 어우, 씨! 아침 식탁 앞에서 이게 웬 추태냐…… 혜윤이한테 그, 그런 거 들킨 것도 엄청난 쇼크인데…….”

“…….”

더듬더듬 손을 뻗어 콘솔이 있는 위치를 찾고 있는데 느닷없이 온몸이 들어 올려졌다. 연인이 공주님 안기로 단숨에 자신을 안아 든 것이다. 더 이상 수건에 얼굴을 가릴 수도 없었다.

“……어어? 야, 뭐하는 거야! 거, 걸을 수 있는데……!”

당혹해서 연인의 얼굴로 시선을 가져가니, 파르스름한 수염 자국이 선연한 턱 끝이 미미하게 실룩거리는 게 보였다.

“나도 죽을 거 같애, 마누라.”

자신을 안아 들고도 한 손으로 욕실 문을 연 연인이 불쑥 동문서답을 했다.

“내 마누라가 귀여워서 죽을 거 같애. 그러니 나 죽이기 싫으면 아무 말 말고 얌전히 안겨 있어.”

턱 끝이 떨렸던 것은 웃음을 참느라 그랬던 모양이었다. 한껏 양끝이 올라간 연인의 입술이 정확히 시야에 밟혀들고 있었다. 체기로 창백해졌던 얼굴이 다시금 뜨뜻한 열기를 품는 것이 느껴졌다.

“……웃지 마. 웃으면 가만 안 둘 거야…….”

“음.”

“뭐가 음이야! 지금도 웃고 있잖아!”

“그럼 조금 웃고 나서 가만 안 두면 안 될까?”

“……!”

“푸하하하하하…….”

“야!!!”

연인의 박장대소가 터진 곳은 공교롭게도 식당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활짝 열려 있는 미닫이 유리문을 통해 혜윤이 포함 집 식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박혀들었음은 물론이었다.

아아아, 진짜로 죽을 것 같아!!!

수건으로 다시 얼굴을 꼭 가린 채 절망의 탄식을 흘린 자신이었다. 혜윤이 앞에서 연인에게 ‘공주님 안기’로 안긴 채 침실로 옮겨지는 것도 창피해 죽을 맛인데, 한밤중에 엄청난 과식을 해서 토했다고 하면 더더욱 기함할 누이였다. 얼마나 한심해 보일 것인가!

“아하하하하하…….”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또 한 번 거실 가득 울려 퍼졌다. 정말로 드물게 터진 연인의 박장대소에 혜윤이 포함 집 식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는 것은, 물론 자신은 아주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덕분에 과식으로 토해버린 자신의 어이없음 따윈 집 식구들의 관심 밖으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는 사실도, 철들고 나서 제 오빠의 박장대소를 단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한 혜윤이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가운데 행복에 겨운 보살의 미소를 물었다는 사실 또한 물론 깨닫지 못한 자신이었다.

부활 이후의 첫 하루, 4월의 아침이었다.

부드럽고 따사로운 봄볕이 거실 가득 흘러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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