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2004년 6월. 장인환(張仁歡) (97/129)

2. 2004년 6월. 장인환(張仁歡)

피부 관리실에 들러 혜윤이를 대신 픽업해달라는 휘야의 부탁을 받은 시각은 오전 11시 30분 무렵이었다. 

연인의 회사는 자존심상 사절이라며 귀국 후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들이밀고 있던 휘야는 보름 전쯤, 아선 그룹 산하 아선 자동차에 입사해 부지런히 출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뉴욕에서의 경력 또한 그리 단단하게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귀국을 강행했기에,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도전하는 자세로 한국 생활에 적응을 해볼 요량이라고 했다나. 그래서 그런지 외려 연인보다도 더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 청년이었다. 누이의 일이라면 거의 시스터 콤플렉스 수준으로 일일이 챙기려 드는 까다로운 ‘도련님’이건만, 요즘 들어 자주 인환에게 전화를 걸어 혜윤이를 부탁하는 덴 그런 속사정이 있었다. 물론, 바쁜 것도 바쁜 것이지만 그만큼 인환을 신뢰해주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해서, 뿌듯한 기쁨과 함께 휘야의 신뢰를 감사히 달게 받아들이고 있는 인환이었다.

6월 12일.

벌써 초여름 더위마저 느껴지는 눈부신 토요일 오후였다. 뒷산으로부터 불어오는 산바람에 섞여 아카시아 꽃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는 요즘의 우리 집 정원수들은 푸릇푸릇한 녹음으로 완전히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정원사 최 씨가 온갖 솜씨를 발휘해놓은 본채 앞 정원과 뒤쪽 언덕에 위치한 후원은 그야말로 만발한 꽃들 덕에 조경미(造景美)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고, 덕분에 인환도 4층 아틀리에에 틀어박혀 작업을 하기보단 수시로 정원에 나와 서울 도심을 내려다보며 인상파에 가까울 고전적인 풍경화에 몰두하곤 했다. 휘야의 전화를 받은 시각에도 그렇게 정원 파고라에 앉아 풍경화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말 그대로 그저 픽업을 해서 연희동 집에 데려다주는 것뿐이라면 홍 기사에게만 부탁을 해도 될 일일 것이다. 그러나 10년 동안 거의 잃어버렸다고 여겨졌던 소중한 누이의 부활은 문 씨 집안 남자들에게 있어 결코 그리 소홀하게 취급될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그건 인환 자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열일을 제치고서라도 달려가줘야만 하는 소중하고도 또 소중한 존재였다.

끝나는 시각이 오후 1시라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준비하고 나가도 아슬아슬한 시간대였다. 당장 화구를 접고 집 안으로 들어가 홍 기사에게 운전을 부탁한 다음, 샤워부터 했다. 다음으로 한 일은 연인에게 전화를 건 일이었다. 토요일 저녁으로 정해진 데이트 약속이 혜윤이의 픽업으로 어찌 될지 조금 불투명해졌기 때문이었다.

인환에게 있어 혜윤이의 픽업이란 전적으로 혜윤이와의 데이트를 의미했다. 함께 영화를 본다든가, 전시회장을 순례한다든가, 혹은 만화방에 가서 함께 만화책을 본다든가, 쇼핑을 한다든가, 그도 아니면 연희동에 데려다준 길에 데생 공부를 시킨다든가 하는, 갖가지 종류의 행복한 데이트였다. 물론 그건 혜윤이의 잃어버린 10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인환 나름대로의 자연스러운 교육 방법의 일환이기도 했다. 다만 오늘은 주말이고, 또한 주말은 연인과의 고정적인 스케줄이 정해져 있기에 잠시 곤혹스러웠을 뿐이었다. 물론 그 찰나의 망설임조차도 말 그대로 극히 찰나의 망설임이었을 뿐이었다. 연인보다도 우선 배려해야 할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혜윤이였다. 그건 이미 또 다른 문 씨 집안 남자가 돼버린 인환에게 있어 지상 명령에 버금가는 성스러운 의무와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음, 그래.]

세 번의 신호가 간 끝에 이어진 통화에서 연인의 익숙한 대꾸가 전해졌다. 담담하면서도 무뚝뚝한, 그러나 그 어떤 달콤한 밀어보다도 더 자신을 설레게끔 하는 진중한 목소리요, 어조였다.

“……어, 저기, 지금 바쁘지?”

두근두근 뛰어대는 심장을 한쪽 손바닥으로 꼭 누른 채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아마도 수화기 너머 무뚝뚝한 남자도 또한 자신과 한가지일 것이다. 겉으론 태연한 척하지만, 속으론 일대 폭풍을 일으키곤 하는 남자. 자신의 연인. 아니, 자신의 서방님(이라고 부르길 수시로, 그리고 매우 진지하게 종용하곤 했다)이었다.

[음, 조금.]

“……어어, 그럼 빨리 얘기하고 끊을게! 오늘 약속 있지, 그냥 취소하면 안 될까?”

[…….]

“어어, 저기…… 왜 그러냐 하면…….”

[또 혜윤이겠지.]

“……어, 어어…… 휘야 회사에 갑자기 급한 일이 터졌나 봐. 오늘은 원래 휴무였다는데 갑자기 회사에 나가야 한다고 해서…….”

[…….]

“……피부 관리실에 가서 픽업한 다음에 나도 연희동에 따라가보려고. 그림 연습도 봐줘야 하고, 숙제 내준 것도 검사할 때가 됐고…….”

[…….]

다른 날이라면 선선히 그러라고 대꾸가 돌아왔을 연인인데, 확실히 연인과의 데이트 날과 겹치니 조금 짜증이 나는가 보았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 집으로 되돌아온 지난 두 달 내내, 일주일 중 고작해야 주말 하루만이 연인과 함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산더미처럼 벌여놓았다는 연인의 일거리가 원인이었다. 요즘 연인은 휴일도 없이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주말 하루만은 숨구멍 그 자체라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비워두고 있는 연인이었다. 물론 자신과의 데이트를 위해서였다. 그것도 연애 초기에나 할 법한 지극히 플라토닉한 데이트.

“……이틀 전에 엄마 산소에도 함께 갔잖아…… 그걸로 이번 주는 데이트 한 걸로 치면 안 되나?”

오래도록 말이 없는 연인의 포스에 잔뜩 쫄아 슬쩍 구슬려보는 자신이었다. 그러잖아도 단 한 번의 빠짐도 없이 두 달 가까이 계속되는 주말 데이트가 연인 나름대로의 무슨 의식인 건 아닐까, 의심이 들고 있는 요즘이었다.

[……안 돼. 차라리 혜윤이랑 셋이서 데이트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건 안 돼.]

오래도록 뜸을 들였다가 떨어진 단호한 대꾸였다.

아아, 역시 그랬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달리 방법은 없다. 연인이 일단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그것도 혜윤이까지 걸린 일에) 자신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뭐, 셋이서 하는 데이트도 나쁘진 않을 게다. 연인의 모종의 의식(儀式)에 동조도 하면서 문 씨 집안 남자로서의 지상 명령도 완수하는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알았어. 혜윤이 그림 봐주는 거랑 숙제 검사는 다음으로 미룰게. 그럼 이따 어떻게 할까? 우리가 회사 근처로 갈까? 아니면 네가 우리 있는 데로 올래?”

[피부 관리실이면 강남의 그곳인가?]

“어.”

[시간은?]

“응, 실은 지금 바로 나가봐야 해. 1시랬거든.”

[1시라…… 서두르면 3시까진 갈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동안 둘이 잘 놀고 있을 수 있어?]

데이트가 무산될 위기를 넘겼다 여겨서인지 연인의 어조는 한결 밝아져 있었다.

“……체, 잘 놀고 있지 않음?! 내가 뭐 어린앤가…….”

날이 갈수록 자신을 점점 더 애 취급을 하고 있는 연인이었다. 물론 연인이 그러는 데는 자신의 어리광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연인의 이런 은근한 놀림을 받으면 또 발끈하게 된다. 물론 이 또한 어린애 같은 반응이리라.

[쿡쿡쿡…… 그래. 잘 놀고 있을 거면 됐어. 나도 점심은 처리하고 갈 테니까 혜윤이랑 점심 먹고 근처 카페 같은 데 들어가서 기다려. 도착하면 전화할 테니, 휴대전화 충전하고 나가는 거 잊지 말고.]

“또, 또 애 취급……! 그날은 진짜 나도 깜빡해서…….”

[그러니까 미리 말해두는 거야. 그 ‘깜빡’을 하지 말라고.]

“아, 씨! 알았다, 뭘……!”

[하하, 그래. 이따 봐, 마누라.]

뭔가 더 쏘아붙이고 싶었는데 그전에 얄밉게 끊긴 전화였다.

지난달 둘째 주 토요일 데이트 때였다. 교보문고 앞에서 보자 하고 대강의 시간 약속만 정해놓고서 연인은 나중에 교보문고에 도착해 휴대전화로 연락하겠노라고 했는데, 서점을 둘러보며 아무리 기다려도 연인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40분 가까이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크로스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는데, 그제야 전원이 꺼져 있는 걸 보고 기겁했던 자신이었다. 부랴부랴 공중전화를 찾아 연인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고, 교보문고 지하 카페테리아에서 기적의 상봉을 했을 땐 이미 연인의 얼굴은 사색이 다 돼 있었다. 그날따라 홍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타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도 엉뚱한 엇갈림의 한 원인이었다. 자신보다 10분 먼저 도착한 연인은 무려 50분이나 애를 태우며 고영석과 함께 매장 전체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물론, 자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때의 원한이 지독했던 탓인지, 연인은 이렇게 틈만 나면 자신의 어리벙벙함에 대해 놀림 반 질책 반을 되풀이하고 있는 터였다.

무언가 억울하기도 하고,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서둘러 끊긴 것도 아쉬워 애먼 휴대전화만 한참 노려보았다.

평일에도 녹초가 된 몸으로 저녁 9∼10시에 귀가해선 다음 날 아침 8시에 출근을 하는데다 휴일도 없이 바쁘게 일하는 연인에게 좀 더 수다를 떨자고, 혹은 좀 더 함께 있어달라고 조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연인 또한 그를 안타까워하리란 것도 안다. 연인을 영영 잃어버렸다고 절망했던 두어 달 전의 자신에 비하면, 요즘은 그야말로 낙원과도 진배없는 생활이니 더 이상 욕심을 부리면 벌을 받을 것만 같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욕심이 난다. 시간을 두고 싸움을 벌이듯, 연인과 함께하는 시간을 어떡하면 늘릴 수 있을까, 수시로 잔머리를 굴리곤 하는 자신이다. 귀가한 첫날밤엔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다고 온몸에 전율이 일 것 같은 달콤한 고백을 하더니, 날이 갈수록 무심해지는 것 같은 연인에게 섭섭한 마음이 일었다. 가장 마음이 쓰이는 건, 여전히 연인이 자신을 안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사실은 그것이 가장 신경이 쓰이고 아프다. 연인의 ‘당분간’이 설마 이렇게 오랫동안인 ‘당분간’이 될 줄 미처 예상치 못한 자신이었다.

그 남자가 새겼던 몸뚱이의 마킹 자국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남자와 밤낮을 불문하고 얽혀들었던 짐승의 쾌락에 대한 기억조차 이젠 거의 흐릿해져버렸다. 귀가한 첫날부터도 그게 도시 꿈인지 생시였는지 아리송하기만 했는데, 그로부터 두 달이 가까워오는 이즈음은 흡사 언젠가 본 영화 속의 한 장면이기라도 했던 것마냥 완전히 현실감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 남자의 기억을 몽땅 다 거둬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 남자의 존재 자체는 자신에게 있어 여전히 영혼에 박힌 지독히 아프고도 아픈 가시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특히 그림을 그릴 땐 여지없이 그 남자를 생각하곤 한다. 자신의 수호천사이자 소울메이트이고, 그림이고, 예술이고, 또한 생명의 은인인 소중한 영혼이었다. 그런 남자를, 그저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타락시켜서는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버린 자신이었다. 연인에 대한 복수의 수단으로 써버리곤 휴지조각처럼 내던져 버렸다. 그런 아픈 기억이 어찌 다 잊힐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아마도 평생의 짐으로 간직할 자신이었다. 설령 언젠가 그 남자가 자신에 대한 감정을 잊어버린다 해도, 자신만은 영혼 속에 완벽하게 각인돼버린 그 남자를 잊는 일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세라는 게 진짜 있다면 내세엔 그 남자의 부모든, 형제든, 혹은 노예든, 뭘로든 태어나 일생 그 남자에게 헌신하면서 살 서원도 세워둔 자신이었다. 그래서 이번 생에 지은 그 남자에 대한 업을 갚고 또 갚겠노라고. 가능하다면 내세에선 그 남자를 위해서 죽겠노라고. 다만, 저 두 달간의 짐승의 정사에 있어서만큼은 말짱 지우고 싶을 만큼의 지독한 아픔이었기에 부러 의식적으로는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연인이 자신을 안지 않는 것이 그 남자 때문이란 것은 짐작하고 있다. 서로 직접적인 말로써 나눈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연인도 자신도 그 남자에 대해선 일절 함구하고 있긴 하지만, 서로는 알고 있었다. 자신 이상으로 그 남자에 대해 고민하고 또 아파하고 있는 이가 연인이라는 것을. 그 남자에 대한 예우를 위해 ‘당분간’ 자신을 안지 않기로 연인이 스스로와 약속을 했다는 것을. 자신 또한 한마음이었기에, 그를 묵인한 채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단지 그 ‘당분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에 있어 인식의 차이가 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굳이 연인과 섹스를 나누지 않는다고 해서 불만족스럽다거나 조금이라도 행복하지 않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워낙 하지 않았던 시간이 오래되어서일까? 이상할 정도로 성욕에 대해선 무덤덤해진 자신이었다. 그건 연인의 스킨십이나 키스 자체가 확연히 줄고, 설령 한다 해도 흡사 중학생들의 그것처럼 대단히 플라토닉하게 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확실히 연인과 함께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신은 순간순간 몸서리가 쳐질 지경으로 절정의 행복감을 느낀다는 점이었다. 바꿔 말하면 연인이 굳이 원하지 않는 한 이대로 평생을 살라고 해도, 자신은 기꺼이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혹시 연인도 이런 자신의 상태와 비슷하기에 굳이 자신에게 손대지 않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이브한 생각은 어느 날 새벽, 연인이 욕실에서 자위를 하는 격렬한 소리를 듣고는 말끔히 날아가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버릴 만큼 그것은 대단히 도착적이고도 악마적인 짐승의 정사였다. 아니, 괴물의 교합이었다. 그것도 혼자서만 이루어지는!

문득 잠이 깼는데, 침대가 서늘해 무심코 연인을 찾아 나섰다가 완벽히 얼음물까지 뒤집어쓴 격이었다. 도로 살금살금 걸어 침대로 기어들어 와선 온몸을 벌벌 떨며 충격을 삭혀야만 했던 자신이었다. 연인의 무시무시한 자위는 그러고도 한 시간 가까이나 계속되었는데, 샤워까지 마친 말끔한 모양새로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든 연인에게선 괴물의 기척이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상큼한 중학생 연인의 모드로 되돌아와 자는 척하는 자신의 이마에 쪽 하고 가벼운 립 키스를 떨구곤 돌아누워 잠을 청했다. 결국 애초의 예상대로 연인이 자신을 안지 않는 까닭은 역시 그 남자 때문인 모양이다. 아니, 백 프로 확실했다. 두려울 만큼 병적으로 변한 짐승의 욕망을 어떻게든 찍어 누르고서라도 그 남자에 대한 배려(혹은 고민)를 우선시하고 있었다.

연인의 자위를 목격한 그 이튿날엔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며 고민을 했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욕망을 억누르면서까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가 연인에게 남아 있다는 것이 꽤나 아팠던 때문이었다. 내리 연 이틀을 끙끙대다가, 결국 자신이 아무리 고민한들 연인 스스로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라는 것을 납득하곤, 자신도 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모르는 척 묵인을 하기로 결론을 내려야 했다. 언젠가는 정리하겠지 하는, 어찌 보면 속 편한 결론이었으리라. 물론 그만큼 연인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론이기도 했다. 연인이 자신의 것이라는, 그리고 자신 또한 연인의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조차 없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다른 부수적인 문제들은, 설령 그것이 섹스 문제라 할지라도, 인환 자신에게 있어선 그저 사소한 문젯거리에 불과했다.

깊이 생각하면 꽤나 안타깝고 아픈 일이었지만, 접어두기로 했으니 접어둘 터였다. 다만 하루라도 빨리 연인의 마음속에서 그 남자가 정리가 되고 소화가 되길 빌고 또 빌 뿐이었다. 자신이 현재에 만족하고 있다 해서 연인 도한 그러하리라고는 절대 자신하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아니, 확신하고 있었다. 얼마만큼의 인내로 스스로를 억누르면 그리도 무시무시한 자위를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다음 날 아침, 연인의 지극히 금욕적이면서도 무덤덤한 얼굴을 쳐다보기가 어찌나 민망하고 당황스럽던지 반쯤은 넋이 나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들만 연발했던 자신이었다.

거실에서 괘종시계 소리가 울렸다. 무심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가 펄쩍 뛰고 말았다. 어느새 12시였다. 부랴부랴 드레스 룸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옅은 핑크색의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가느다란 줄무늬가 들어간 흰색 아사 재킷을 걸쳐 입었다. 새하얀 헌팅캡까지 써주니 제법 20대 때의 철부지 분위기도 얼추 나는 것 같았다.

요즘 연인이 사주는 옷가지들이란 다들 이 모양 이 꼴인데다 자신이 고르는 점잖은 옷들은 번번이 연인에 의해 퇴짜를 맞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외출을 할 때마다 옷을 골라 입기가 힘들어지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연인이 보기엔 예뻐 보일지 모르나 도무지 객관성이 결여된 스타일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더는 연인을 말리기에도 지친 인환이었다. 돌아오는 10월 생일이면 어느덧 자신의 나이도 마흔이었다. 절대 핑크색이라든가 헌팅캡 따위가 어울릴 군번이 아니란 얘기다. 물론 연인에겐 절대로 안 먹히는 상식이었지만 말이다. 한 번은 주말 데이트를 하다가 청담동 쇼핑 중에 “삼촌분껜 이게 더 잘 어울리실 텐데요?” 하는 점원의 말에 불처럼 화를 낸 연인이었다. 누가 삼촌이냐며, 자신의 아내라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사납게 일갈하는 통에 애꿎은 젊은 남자 점원을 혼비백산시켰었다. 솔직히 연인은 고작해야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눈에 번쩍 띄는 미남 모델이고, 자신이야 그야말로 평범틱한 중년 아저씨 그대로이니 점원이 그리 큰 실수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누가 봐도 삼촌과 조카, 아니면 인심 좀 써서 사촌 형(절대 친형제간으로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또 좀 섭섭한 일이겠지)과 아우 사이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평소 냉정한 연인답지 않게 불처럼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 참말이지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연인의 그 지독한 콩깍지가 내심 황송하고 고맙지 않다곤 절대 말할 수 없는 노릇이긴 했지만.

옷차림에 맞춰 새파란 스니커즈까지 찾아 신고 현관문을 나서니, 코끝에 진동하는 아카시아 냄새와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홍 기사가 자신을 반갑게 마중해주었다. 그야말로 꽃동산 그대로일 아름다운 정원을 나서기가 순간 섭섭해졌지만 혜윤이와의 데이트도, 또 연인과의 데이트도 그 이상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끔 하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홍 기사가 운전하는 황금색 볼보를 타고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도심으로 이동해 갔다. 도심을 깊숙이 가로지를수록 아카시아 향기 대신 익숙한 매연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그도 한없이 들뜬 기분을 끌어내리지는 못했다.

30여 분 만에 강남 압구정동에 위치한 피부 관리실에 도착해보니 이미 관리를 마치고 로비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혜윤이가 뛸 듯이 기뻐하며 인환을 맞아들였다. 자신이 대신 올 거라고, 휘야에게서 미리 언질을 받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요즘 혜윤이가 휘야보다 인환 자신을 더 따르는 것 같다며, 휘야로부터 섭섭하고 질투가 난다는 툴툴거림을 들었는데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는 셈인데도 누이는 그때마다 이렇게 뛸 듯이 기뻐해주곤 했다. 마치 10년 만에 만나는 극적인 상봉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연인이나 이 의원, 혹은 위야에게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혜윤이의 이 다소 과도할 정도의 열띤 반응은 확실히 자신에게만 국한돼 있었다. 문 씨 집안 두 남자들은 물론, 문 씨 집안에 속해 있는 다른 남자들(이를테면 이 의원이나 김성준, 혹은 김성준의 형인 김현준 등등)에겐 좀 미안했으나, 혜윤이의 편애가 또한 지독히 기쁜 것은 차마 밝힐 수 없는 자신의 진짜 속마음일 것이다.

한 달 전쯤부터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혜윤이는 무서운 속도로 회복되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많이 걷거나 심하게 뛰는 것엔 무리가 있었지만 더 이상 걷다가 비틀거리지도 않고, 힘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는 일도 없어졌다. 노인처럼 말라비틀어졌던 피부도 포동하게 살이 오르면서 점차 주름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전문적인 피부 관리는 물론, 완벽하게 맞춤 처방된 물리 치료와 운동까지 병행하고 있어 나날이 예전의 아름다움을 되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얼굴에 주름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었으나 워낙에 이목구비가 예뻐서 언뜻 보면 잘 눈에 띄지도 않았다. 물론 10대 때의 젖살이 포동하던 얼굴로는 완벽히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실제 생물학적인 나이인 28세 처녀처럼은 거의 회복이 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신적으로도 지속적인 교육과 적응 훈련을 거쳐 10년의 공백이 완전히 메워지기만 한다면 여기저기서 혼담이 줄을 잇는 근사한 숙녀로 탈바꿈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것이다. 하긴 벌써부터도 혜윤이를 데리고 거리 데이트를 할라치면 무수한 남자들의 힐끔거림이 혜윤이를 좇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아직 천진한 혜윤이는 그를 눈치조차 못 채고 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하긴 주변에 잘나고 잘난 문 씨 집안 남자들이 즐비하게 포진해 있는데다, 완벽 그 자체일 만화 주인공들에게만 빠져 있으니 혜윤이가 웬만한 남자에게 눈길이 갈 일은 당분간 없을 것도 같다. 음, 이건 또 좀 은근히 기쁜 일이었다. 누이를 듣도 보도 못한, 속만 시커먼 늑대들에게 던져주고픈 마음은 아직 눈곱만큼도 없었다. 적어도 4∼5년 동안만큼은 우리들만의, 아니, 문 씨 집안 남자들만의 소중한 누이 혜윤이이기를 인환은 절실히 기도하고 있었다.

“우아, 위야 오빠도 나온대요?! 그럼 오늘 트리플 데이트인 거예요, 선생님?!”

혜윤이가 신이 난 어조로 자신의 팔짱을 껴오며 외쳤다. 듣기만 해도 마음이 청량해지는, 더없이 쾌활하고 낭랑한 목소리였다. 무릎 길이의 베이지 색 롤업 팬츠에 운동화, 연두색과 초록색이 섞인 칠부 면 티셔츠 차림에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혜윤이는 보기만 해도 싱그러운 10대 고등학생 같은 모양새였다. 흐릿하게 드러나는 부자연스러운 잔주름들조차도 혜윤이의 예쁜 이목구비와 햇살마냥 밝은 분위기에 휩쓸려 좀체 어두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등에 앙증맞은 빨간색 체크무늬 백팩까지 둘러메고 있어, 언뜻 봐선 10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볼 때마다 나날이 더 건강해지는 모양새에,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목이 메고 눈물이 글썽이곤 하는 인환이었다.

“어, 그래. 원래는 오늘 연희동 가서 네 데생 봐주려고 했는데, 위야가 오늘은 그냥 다 함께 모여 놀자고 해서.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위야는 3시쯤 올 수 있다니까 너무 먼 곳으로 갈 수는 없겠지만 말야.”

“롯데월드요!!!”

단 1초도 걸리지 않고 떨어진 외침이었다. 기대가 가득한 예쁜 눈을 들여다보며 역시 만감이 교차한 인환이었다. 또 그렁해진 눈시울을 들킬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 옆으로 고개를 돌리곤 “롯데월드 좋지! 나도 여태까지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는데 잘됐다!” 하고 맞장구를 쳐주어야 했다.

아아, 어릴 땐 너무나 가난해서 놀이공원 한 번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롯데월드가 개장한 건 89년이던가 90년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개장 초에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걸 보고 참으로 가보고 싶었다고 했었지. 속 깊은 아이라 오빠들에게 한 번 졸라보지도 못하고 친구들이 놀러 갔다 온 얘기들만 듣고 부러워했었다고. 물론 그 몇 년 후, 롯데월드는커녕 미국의 디즈니랜드까지 가보고도 남을 지경으로 일으켜 세워진 문 씨 집안이지만, 그때쯤 혜윤이의 몸은 사슬로 꿍꿍 묶여버린 후였다. 그리고 혜윤이를 그렇게 사슬로 묶어버린 이가 바로 자신이었다.

어쩔 수 없는 회한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을 애써 감추며, 신이 난 혜윤이의 수다에 혼신을 다해 마주 뛰어들었다. 어차피 과거는 되돌릴 수 없는 것, 평생 가슴에 품고서 갚아나갈 것이다. 평생 아껴주고, 평생 사랑해줄 것이다. 만약 필요하다면 목숨이라도 내줄 것이다. 그래 마땅한 자신의 소중한 누이였다.

피부 관리실 근처에 있는 퓨전 레스토랑에 들러 혜윤이와 점심을 먹었다. 공짜로 주는 차와 후식까지 싹쓸이를 하고 나와 근처 쇼핑가를 돌아다니며 아이쇼핑을 했다. 그러다 마침 발견한 2층 만화 카페에 들어가 만화책을 보고 있는데 연인의 전화로 휴대전화가 울었다.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차가 막 압구정역을 지나치고 있다고 했다. 대강의 위치를 알려주고 독서 삼매경에 빠져든 혜윤이더러 기다리라고 하곤 상가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연인을 실은 세단은 전화가 끊기고 2분쯤 흐른 후에야 나타났다. 대형 피자 가게 앞에 서 있던 인환을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도 쉬이 발견했는지, 고영석은 피자 가게에서 가장 가까운 갓길에 차를 세우고 연인을 내려준 뒤 다시 차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근처 적당한 주차장을 찾으러 가는 듯했다.

연인이 내려서자마자 연인의 주변은 물론 인환의 근처에 떠들썩하게 포진돼 있던 젊은이들의 시선이 죄다 연인에게로 몰려가는 게 느껴졌다. 옅은 그레이의 여름용 정장 팬츠에 드레스 셔츠만을 걸친 단순한 차림새였음에도 순식간에 주변을 긴장시키는 압도적인 존재감만큼은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스카이블루에 가까운 스트라이프 드레스 셔츠는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어붙여져 있고, 노타이에 위쪽 단추도 두 개나 풀어헤친 자유분방한 모양새였다. 어쩌면 잔뜩 모양을 낸 주변의 압구정 오렌지족들에 비하면 검소하고 단순해 보이기까지 한 옷차림이었다. 그럼에도 연인은 그 화려하게 치장한 남녀 공작새들의 자태를 순식간에 제압하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제왕 강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분위기로만 본다면 ‘마왕 강림’에 더 가까우려나.

차에서 내려선 즉시 마주친 시선을 내내 단 한 치도 움직이지 않은 채, 연인은 우아하면서도 단호한 걸음걸이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몇 십 초 만에 코앞까지 다가든 연인으로부터 익숙한 코롱 냄새와 함께 흐릿하게 땀 냄새가 났다. 역시 더위만큼은 연인에게 있어선 최악의 약점인지라, 여름 초입에 불과한 요즘에도 벌써부터 수시로 땀을 흘려대는 연인이었다.

“혜윤인?”

단도직입적인 한 마디와 함께 연인의 손이 뻗어와 자신의 헌팅캡을 벗기더니 느닷없는 부비부비를 했다. 머리카락을 헤치며 들어온 우아한 손가락이 정수리 끝에서 머리카락을 와락 움켜쥐었고, 조금 아픈 나머지 미간을 구기자 킥킥거리는 웃음을 터트리는 연인이었다. ‘마왕 강림’의 엄청난 무표정이 졸지에 매혹적인 호스트의 유혹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실컷 부비부비를 마치곤 도로 모자를 씌워주더니 한쪽 귀를 잡아당겨 입가에 립 키스까지 뿌리는 연인이었다. 주변의 기겁한 뭇 시선들은 신경조차 쓰이질 않는지, 도무지 거침이 없었다.

아아, 그래. 물론 알고 있었다. 지난 두 달간, 연인의 이 지극히 플라토닉하면서도, 그러나 실은 무서우리만치 대범한 스킨십에 이미 단련이 될 대로 단련이 돼버린 자신이었으니 말해 무엇 하랴.

무수한 인파로 북적거리는 길거리에서건, 백화점 쇼핑 중이건, 우아한 연주회장이건, 고급 레스토랑이건, 그 어디에서도 연인은 막무가내 불도저 수준이었다. 아예 신경을 써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연인은 언제 어디서건 마음이 내키면 그 즉시 인환을 만지거나 껴안거나 혹은 키스를 했다. 그저 쪽 소리가 날 정도의, 살짝 입술 끝만 접촉하고 마는 중학생의 립 키스였다. 짐승의 수준을 넘어 아예 변태 괴물의 수준으로까지 진화해 있는 연인의 성욕을 이미 알고 있는 자신으로선 물론 간지럽기 짝이 없는 순수한 접촉이었지만, 시선을 주고 있는 생면부지의 타인들에겐 전혀 다른 문제일 터였다.

처음엔 사람들 앞에선 제발 자제해달라고 잔소리도 해봤고, 그러다 소문이라도 나면 어쩔 거냐고 화도 내봤고, 자꾸 그러면 밖에서의 데이트는 안 할 거란 협박도 해봤다. 물론 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협박이 진지해지면 자제하겠노라고 마지못해 동의해주었지만 막상 밖으로 나가면 약속은 그저 공수표에 불과하기 일쑤였다. 문제는, 그게 연인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란 점이었다. 의식을 하거나 작정하고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그야말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숨을 쉬는 것 이상으로 자연스러운 충동에 기인한다는 점이었다. 무의식의 작용이란 그다지도 무서운 건가 보았다.

인환 자신이 운명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무조건적으로 행복해졌듯이 연인은 운명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자유를 얻은 것 같았다.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 무엇에도 걸림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자유였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그 많은 잔소리들이나 협박, 화의 폭발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진짜 이유였다. 지금처럼 뻔뻔스러울 지경으로 사심 없이 기쁘게 웃는 아름다운 이목구비에 왕창 얼굴을 구겼다가도, 자신 또한 결국 따라서 실소를 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저기 2층 만화 카페 보이지? 거기서 만화 보고 있어. 빨랑 여기서 뜨기나 하자. 진짜 넘 쪽 팔려.”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연인 대신, 홍당무가 된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을 듯이 하고서 연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게이야? 맙소사, 게이였어?! 진짜 아깝다!” “게이라구?” “그런가 봐! 진짜 킹카인데! 너무 아깝다, 그지?”

소곤소곤 퍼지는 뭇 관심과 호기심들의 시선에 쫓기듯 부지런히 도망을 쳤음은 물론이었다.

롯데월드에 가고 싶다는 혜윤이의 요청을 선선히 받아들인 연인과 함께 고영석을 포함, 네 사람이 석촌호수에 도착한 시각은 3시 40분쯤이었다. 자신과 연인이 보기엔 유치한 이미테이션 건물들에도 혜윤이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고, 보이는 놀이기구마다 다 타보고 싶다고 해서 연인과 인환의 근심을 자아냈다.

아무리 건강이 좋아졌다곤 하나 아직은 절대 무리해선 안 되는 혜윤이였다. 게다가 혹시라도 모를 안전사고를 누구보다도 겁을 내는 문 씨 집안 남자들이었으니, 혜윤이의 욕심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결국 타협안으로 내놓은 것은 자신도 탈 수 있는 놀이기구에 한해 혜윤이도 타보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었는데, 겁이 많은 인환이 탈 수 있는 놀이기구래야 빤했다. 점점 더 얼굴이 부루퉁해지는 혜윤이를 생각해서 결국 용기를 내 자이로드롭 같은 무시무시한 것들에까지 도전을 해봤지만, 얼굴이 새하얘져서 내리는 자신을 보고 잔뜩 인상을 구긴 연인은 다시금 혜윤이와의 열띤 논쟁 끝에 새로운 타협안을 마련했다. 혜윤이가 타고 싶다는 열 가지 중 네 가지로 압축을 하는 대신 횟수는 세 번까지도 가능하게끔 한 것이다. 보호자로는 때론 연인이, 때론 고영석이 동행해 혜윤이의 옆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애먼 고영석만 초주검이 된 것은 매우 의외였던 일로, 저 용감하고 단단한 사내가 자신만큼이나 아슬아슬한 놀이기구들을 겁낸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쯤 혜윤이를 위해 봉사한 세 남자는 다행히도 가장 먼저 지쳐버린 혜윤이 덕분에 ‘놀이기구 타기 고문’에서 간신히 해방을 맞을 수 있었다. 그래도 시종 웃음을 터트리며 너무나 좋아하는 누이를 바라보는 일은 연인에게나 인환 자신에게나 그 자체로 꿈같은 기쁨이었음은 물론이었다. 다만 한 가지, 시종 유쾌한 시간 가운데, 잠깐 간담이 서늘해진 사건이 하나 있긴 있었다.

창백해진 채 자이로드롭에서 퇴출된 후, 연인과 함께 샬레 카페라는 노천카페에 앉아 자이로스윙 기구를 타러 간 혜윤이와 고영석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연인은 오렌지 주스를, 자신은 아이스크림을 시켜 먹고 있었는데, 입가에 크림이 묻었는지 연인이 또 얼굴을 끌어당겨 혀로 입술을 핥아주는 무신경한 만행을 펼쳐 보였다. 가뜩이나 연인 탓에 뭇 시선의 화살이 집중돼 있는 판이었으니, 선량하고 평범한 시민들의 그 소리 없는 경악이란 것은 안 들려도 오디오였다.

장미 축제를 비롯해 온갖 축제와 특별 이벤트들, 그리고 퍼레이드가 시간대별로 펼쳐지는 롯데월드였다. 게다가 주말 오후 아닌가. 가족 단위, 혹은 친구들, 혹은 연인 단위로 엄청난 인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그건 연인과 자신이 죽치고 앉아 있던 노천카페인 샬레 카페 또한 한가지였다. 빈 테이블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으로 꽉 차 있었고, 테이블뿐만이 아니라 빈 공간이란 공간은 온통 인파로 물결치고 있었으니, 설상가상, 그 대부분이 수많은 어린 교복 부대들이었다.

“칠칠치 못하게…….”

입술이(정확히는 혀가!) 떨어지며 웃음기를 머금은 중저음이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마무리를 하듯 쪽 하는 입맞춤까지 마친 무신경하다 못해 뻔뻔스럽기까지 한 남자의 얼굴이 다시금 맞은편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인환이 그대로 얼음땡이 됐음은 물론이었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태연하게 주스 잔을 입가에 가져가는 연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주 찰나 동안, 도대체 어떻게 화를 내야 그나마 좀 연인을 자제시킬 수 있을까 궁리를 했다가, 그간의 도로(徒勞)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바람에 결국 포기해야 했다. 이미 따갑게 변한 주변의 시선들까지 자각한 마당이라, 쇠귀에 경 읽기일 연인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시선을 돌리는 것조차도 겁이 났다. 그저 팔꿈치를 테이블에 괸 채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 최선의 방어였다. 물론 되도록 빨리 이 카페 주변을 벗어나는 것은 차선의 영리한 결정일 테고.

빨리 마시고 그만 일어나자는 말을 막 뱉어내려는 찰나, 옆에서 수동 카메라가 찰칵 하고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플래시까지 터졌는지 순간 번쩍이는 섬광마저 본 것 같았다. 깜짝 놀라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과연 5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수동 카메라를 든 사내 하나가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뭐야…….”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연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연인의 시선이 향한 곳도 카메라를 든 사내였다. 순식간에 위험천만한 맹수의 모드로 돌변한 연인이 두렵지도 않은지, 사내는 입가에 웃음마저 띤 느긋한 얼굴로 자신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아, 설마 이 카메라를 빼앗아서 부서트릴 생각은 아니시겠죠, 문 사장님?”

“……?!”

사내가 잽싸게 카메라를 뒤로 감추며 가볍게 말했다. 나이는 30대 초반쯤 됐을까? 연인과 거의 또래로 보였다.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헤어스타일에 꽤나 수려한 이목구비를 지닌 귀티 나는 미남이었다. 캐주얼한 블루진에 스니커즈, 그리고 흔한 검정색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지만, 과거에 허영 넘치는 멋쟁이로 산 눈썰미가 사내가 걸치고 있는 것들이 몽땅 다 오트쿠튀르 명품들이란 것을 알아보게 했다.

“……오랜만입니다, 문 사장님. 아선 그룹 창립 파티장에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죠. 기억하십니까?”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의 말에, 사나운 맹수의 아우라 대신 조용한 경계의 시선이 사내를 꿰뚫는 것이 보였다.

“……화인 그룹의 셋째…… 아니, 화인 엔터테인먼트의…….”

“기억하시는군요. 맞습니다. 화인 엔터테인먼트 대표 황준성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황 사장님.”

“하하, 전혀 반가운 얼굴이 아니신데요? 영 표정 관리를 못 하시네요? 아니, 아예 표정 관리를 하실 생각이 없으신 거겠죠?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

떨떠름한 표정이 된 연인에게 미처 대꾸를 할 틈도 주지 않고 사내가 빈 의자에 몸을 부렸다.

“설마 이런 데서 문 사장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화인 소속 아이돌 여자애 하나가 지금 여기서 앨범 촬영 중이라 따라 나와봤는데, 대박을 건진 셈이로군요. 문 사장님께서 목하 동성 애인과 데이트 중이신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찍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

연인의 얼굴에 다시금 맹수의 아우라가 서리기 시작했다. 위험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저도 게이이긴 합니다만, 절대 문 사장님처럼은 당당하지 못하겠거든요. 좀 전에 여기 애인분에게 키스 하시는 것 보고 솔직히 좀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장인환 선생님이시죠? 화가이신? 전 화인 엔터테인먼트라는 연예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는 황준성이라고 합니다.”

사내의 시선이 연인에게서 자신에게로 이동했다. 정중하게 목례를 하는 남자를 따라 얼떨결에 마주 고개를 숙인 인환이었다.

“문 사장님과는 아선 그룹 창립 파티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눴었죠. 장 선생님도 먼발치서 뵌 기억이 있습니다. 한눈에도 두 분이 연인 사이라는 게 보여서 그때도 좀 뜨끔했던 접니다. 전 간신히 가족들에게만 커밍아웃을 한 상태라 문 사장님의 거리낌 없는 태도에 감격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날 문 사장님께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죠.”

“……그…… 그러셨나요……?”

“예. 제 정체성이 이래서 집안에서조차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고 있거든요. 세상에다 떠들고 다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겨우 인정을 받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여러모로 고생이 많답니다.”

“…….”

사내의 스스럼없음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같은 동성애자로서의 동병상련이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연인의 용감하다 못해 거의 무식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이 방면의 거친 행보가 사내의 눈엔 무슨 영웅처럼 비쳤다는 것도 짐작이 갔다. 연인을 응시하는 눈길엔 숨길 수 없는 지극한 호의가 드러나 있었다.

아, 저건 좀 위험한걸……. 자각과 동시에 속으로 살짝 심장을 두근거린 인환이었다.

참으로, 여기저기 페로몬을 흘리고 다니는 죄 많은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여자건 남자건 가리지 않고 벌 떼처럼 끌어당기곤 하니, 일일이 질투를 하는 것도 우스워 보였다.

“창립 파티에서 뵀을 때에도 워낙 용모가 출중하셔서 저희 기획사에 스카우트 제의라도 하고 싶은 걸 참느라 혼이 났죠. 연예인이란 게 물론 용모만 갖고 되는 건 아니지만, 그 모든 걸 커버할 만큼 매력이 있으셨거든요, 문 사장님은. 장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하하…… 예…… 그, 그런 셈이죠…….”

“모델 정도는 약간의 훈련만 거쳐도 되는 일이라, 사진집 같은 것만 만들어 팔아도 대박이 날 것 같았죠. 처음엔 그냥 저처럼 상류 사회의 흔하디흔한 도련님일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런 제의도 했었던 거죠.”

“제의요?”

“저희 기획사에서 밀어줄 테니 모델 일을 해볼 생각 없냐고요.”

“아아……!”

“물론 거절당했죠. 조금 후에 알아보니 원…… 아선의 안 회장님까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는 CEO계의 떠오르는 샛별이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

어째 언젠가 이 비슷한 얘길 들어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아, 맞다! 윤 실장의 ‘할리우드 신인 감독의 스카우트 제의 사건’!

“……방금 찍으신 사진의 필름은 돌려주시겠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전 모델 일 같은 건 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묵묵히 듣고만 있던 연인이 조용하게 끼어들었다. 우아한 동작으로 연인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린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흔드는 것이 보였다.

“아아, 이건 제 개인 소장용입니다. 그러니 그 부탁은 거절해야겠군요.”

연인의 미간 골이 깊어지는 것을 그저 빙긋이 웃는 부드러운 웃음으로 받아치는 사내였다.

“제 제의를 거절하신 대가 정도로 너그럽게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네요.”

“……개인 소장용이라니, 그건 또 무슨…….”

“음, 딸딸이용이란 거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서요.”

“!!!”

“…….”

휘둥그레진 채 얼굴이 빨개진 것은 인환뿐이었다. 대담한 도발을 던진 사내도, 여전히 미간만을 살짝 구기고 있는 연인도 태연자약하긴 한가지였다.

“……기분 나쁘십니까, 장 선생님?”

사내의 온화한 웃음이 다시 인환을 향했다. 강적이었다. 너무나 부드럽게 상대로 하여금 전투 의지를 상실케 하는 사내였다.

“……그…… 아, 저기…… 그게…….”

“후후, 문 사장님의 허락을 받기보다 장 선생님의 허락을 받는 게 빠를 것 같아서요. 문 사장님께서야 지금 어떡하면 제 카메라를 뺏어서 바닥에 내팽개칠까 궁리 중이실 게 뻔하고, 장 선생님께선 완전히 그런 야수를 길들이신 미녀가 아니시겠습니까? 야수도 미녀 말은 듣겠죠.”

“……!!! 미…… 녀라니, 그 무슨…….”

“내 아내가 미녀란 걸 알아봐주시니 그 눈썰미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카메라는 부수지 않겠습니다. 필름이나 돌려주시오.”

담담한 어조 속에 숨은 가시는, 드러나는 맹수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시내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처음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연인을 바라보았다.

“……결혼까지 하신 줄은 몰랐군요…… 아아, 이건 진짜 시작도 못 해보고 끝이로군요…….”

“…….”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문 사장님? 장 선생님께서 허락을 해주시면 그냥 이 사진을 제가 갖는 것으로요? 물론 장 선생님께서도 문 사장님과 같은 생각이시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필름을 파기하도록 하겠습니다.”

“…….”

“…….”

“…….”

연인과 사내 사이에 일촉즉발의 팽팽한 눈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연인이야 그렇다 치고, 사내도 정말 호락호락한 쪽은 절대 아니었다. 부드러움 속에 숨겨진 발톱이 만만치 않았다. 정말로 연인의 지금 사진을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게 진짜 사내의 ‘딸딸이용’일지, 아니면 나름대로 사진 작업에 취미를 지닌 것 같은 사내의 ‘작품용’일지는 불확실했지만(아마 그 양쪽 모두가 아니었을까), 사내가 문제의 그 사진에 대단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같은 예술가로서의 직감이 확실한 통찰을 주고 있었다.

“……고작 사진 한 장인 건데 뭘, 위야. 그냥 허락해드려, 응?”

두 남자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사내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고, 연인의 미간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사납게 구겨졌다.

“……고맙습니다, 장 선생님. 역시 통이 크시군요. 야수를 길들인 미녀다우십니다.”

입에 발린 소리인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내는 만족한 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진짜 시선들이 장난 아니로군요. 우리 회사 애들도 이런 주시는 잘 못 받거든요. 역시 아까워요. 문 사장님 스카우트에 성공했으면 진짜 간만에 대박을 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소중한 듯 카메라를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고쳐 들며 사내가 농담 섞인 경탄을 흘렸다.

“그럼 불청객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데이트 되시길 바랍니다, 문 사장님. 미녀분께서도요.”

담담한 시선 속에 무시 못 할 적의를 담아 연인이 마지못해 목례를 하는 것이 보였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정중히 답례를 한 쪽은 외려 자신이었다. 사내는 느긋하면서도 조용한 걸음걸이로 놀이기구들이 산적해 있는 호반 무대 쪽으로 사라졌다.

“이젠 질투도 안 나는가 보지, 마누라는?”

사내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불퉁한 중얼거림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나는 어떤 놈이 네 사진을 보고 딸딸이를 치겠단 헛소리를 하면 당장 그놈 아가리를 박살 내버렸을 거다.”

보니, 확연하게 구겨진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자신을 맹렬히 노려보고 있었다. 사내 앞에서의 무표정은 그저 체면치레용일 뿐이었는지, 역시 속으론 엄청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었다. 자신의 사진이 ‘딸딸이용’이라는 것보다도, 자신이 사내에게 그걸 허락해주었다는 사실이 연인은 더 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그게 또 몹시 귀여우면서도 달콤해서 그저 생글생글 웃어주었다.

“……어, 음…… 그래봤자 사진은 사진일 뿐이잖아? 진짜 네가 아니지.”

“…….”

“……진짜 위야는 누가 뭐래도 내 거잖아. 진짜 위야만 영원히 내 거인 거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위야 사진을 가지고 딸딸이를 친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 서방님.”

잔뜩 구겨졌던 미간이 스륵 풀리는 것이 보였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다간, 그도 모자라 움찔움찔 떨리는 것도 보였다. 팔불출 웃음을 참고 있었다.

흥, 자신 앞에서 꽤나 폼을 잡고픈 모양인데 어림없었다. 달콤한 닭살 멘트 한 번이면(나이 마흔에 자주 할 짓은 아니지만), 낯간지러운 애교 한 방이면, 또는 그리도 목을 매다는 ‘서방님’ 소리 한 번이면 연인은 늘 껌뻑 뒤로 넘어갔다. 완벽한 무장 해제. 지난 두 달 동안 연인을 손안에 넣고 휘두르는 기술쯤 이미 철저하게 마스터해버린 자신이었다. 아, 물론 약간의 계산 착오가 종종 발생한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바로 지금처럼.

좋아서 얼굴 근육이 이상하게 실룩거리길 반복하는 것 같더니, 이내 귓불까지 빨갛게 돼선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입술이 덮쳐들었다. 심각한 계산 착오였다! 그저 립 키스가 아니라 이번엔 진짜 괴물의 키스였다. 반사적으로 밀어내보려던 양팔은 연인의 한 손에 의해 틀어잡혔고, 어깨까지 나머지 한 손에 완전히 휘어 잡힌 채 잡아먹을 듯한 입맞춤의 먹이가 되었다.

사방에서 휘파람과 야유와 욕설들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연인의 혀가 입안에 파고들어와 거침없는 유린을 시작한 것과 거의 동시였다. 깨어나버린 짐승엔 인환의 저 철저하게 마스터한 ‘휘두르기 기술’조차 속수무책이었다. 몇 번이나 각도를 달리한 태풍 같은 키스가 끝났을 땐 수치심조차도 느낄 수가 없었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사지의 힘은 풀리고, 머릿속은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그저 몽롱하기만 했다. 이성을 아예 앗아가버리는 짐승의 키스엔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흐물흐물 녹아 늘어져버린 넋은, 자신의 손을 잡아끌고 일어난 연인에 의해 질질 끌리다시피 카페를 벗어난 것도, 좀 전에 작별 인사를 나눴던 무슨 엔터테인먼트 회사 사장이라는 사내와 다시 얼굴을 스친 것도, 연인의 품 안에 거의 안기다시피 가장 가까운 공중 화장실로 끌려 들어간 것도, 모두 전부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다. 공중 화장실 특유의 흐릿한 지린내를 자각했을 땐, 다시금 연인의 폭풍 같은 키스 세례에 휩쓸려 들어가버린 후였으니까. 족히 10여 분 이상을 연인에게 입술이 빨리고, 거칠다 못해 사나운 애무를 당하고, 쇠심줄보다도 더 단단할 것 같은 연인의 양팔에 의해 상반신이 끊어져라 격렬한 포옹을 당해야만 했다. 혜윤이의 애절한 미련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듯 롯데월드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연인을 손안에 넣고 주무르기 스킬’이 실은 자신에게 대단히 불리할 수도 있는 기술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자각한 날이었다.

[……혀…… 형수예요……?]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말을 더듬는 휘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로부터 나흘 후인 수요일 저녁 무렵이었다.

“네, 휘야 군. 나예요. 목소리가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형은…… 위야 형은 아직 안 들어왔죠?]

“네. 오늘도 늦는다고 했으니까 9시 전엔 안 들어올 거예요. 무슨 일 있어요?”

그야말로 무언가 엄청난 쇼크라도 받은 듯, 답지 않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절로 바짝 긴장이 섰다.

[……저기…… 저기 지금 좀 만나러 가도 돼요? 형수한테 의논 좀 할 게 있어서요……. 아, 이건 절대 위야 형한테 말하면 안 돼요! 그냥 형수만 알고 있어야 해요! 약속해주실래요?]

“……어…… 아, 예. 꼭 그래야 하는 거라면…… 근데 무슨 일인데요? 많이 곤란한 일인 거예요?”

[…….]

“……휘야 군……?”

[……전화론 곤란해요. 지, 지금 총알처럼 갈게요, 형수! 여기 회사니까 30분이면 도착할 거예요. 그럼 이따 봐요!]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부리나케 끊겨버린 전화였다. 날이 갈수록 붙임성이 좋아지는 ‘도련님’에게 또한 날이 갈수록 정이 붙는 자신이었다. 무언가 진짜 큰일이라도 생긴 건지, 심상치 않은 목소리가 걱정이 되면서도 연인이 아닌 자신을 의논 상대로 택해 와주겠다는 도련님이 너무나 고마웠다.

물감투성이 작업복을 벗고,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느라 몸에 밴 물감 냄새와 땀 냄새를 없애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 서둘러 샤워를 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에 앉아 막 주스 한 잔을 마시고 있는데, 예정된 집 식구가 들이닥쳤다. 전화가 끊긴 지 딱 27분 만이었다.

언뜻 보면 연인과 복사판이라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은 크고 늠름한 청년이 창백한 얼굴로 현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청색의 여름용 비즈니스 슈트에 연노랑 색 도트무늬 넥타이를 맨 차림이 제법 비즈니스맨의 냄새를 풍기고 있어 요즘 더더욱 연인을 닮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자신의 소중한 ‘도련님’이었다.

“……형 진짜 없는 거죠?”

거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기웃거리는 품새가 꼭 죄를 짓고 도망 나온 도망자의 풍모라, 심각한 와중에도 피식 실소가 물렸다. 귀여웠다. 덩치만 커다란 소년 같았다. 확실히 외양은 많이 닮았지만, 성격만은 연인과는 극과 극의 차이가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단순한 외골수인데다 다혈질이고, 어찌 보면 꽤나 순진하면서도 순수한 성품이었다. 생각 외로 겁도 무척이나 많았다. 문 씨 집안에 속한 여섯 남자들(연인과 휘야와 이 의원과 김성준과 김현준, 그리고 자신 포함 도합 여섯) 중 가장 의존적인 성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네, 없어요. 9시 이전엔 안 들어오니까 진짜 걱정하지 마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정말 곤란한 일이에요?”

“……저, 저기, 여기선 좀 얘기하기 곤란해요…… 고용인들도 수시로 드나드는 것 같고…… 소문나면 진짜 끝장……! 으아악!!! 또 생각났다!!!”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가 낮아지더니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지르는 게 아닌가! 황당해서 놀랄 틈도 없었다. 아직 저녁 식사를 준비할 타임도 아니니 부르지 않는 한 본채로는 집 식구들도 여간해선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에도 청년은 안심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도 경계를 하는 통에 자신에게도 문제의 심각성이 얼핏 전해진 터라, 불안해하는 시동생을 이끌고 4층 작업실로 데리고 갔다.

흥분한 표범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작업실 안을 왔다 갔다 하던 청년이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마침내 털어놓은 사실은, 자신에게도 그야말로 쇼킹 그 자체였다.

“……그…… 저…… 그, 그…… 그게 설마…….”

순간 멍해진 정신으로 잘생긴 시동생의 빨개진 얼굴만 한참을 들여다봐야 했다. 창백하게 질려 있던 청년의 낯빛은 비밀을 털어놓자마자 이번엔 온통 새빨개져 있었다.

“……설마가 아니에요, 형수. 지, 직접 봤다구요. 유…… 윤…… 윤열이 형이랑 성준 형이…….”

“…….”

“……기, 기절하는 거 아니죠? 그러지 마요, 형수! 나도 지금 쇼크받아 제정신이 아닌데 형수라도 제정신 챙겨줘야죠. 형수만 믿고 왔는데……!”

“……기…… 기절하지 않아요…….”

“뭐가요! 딱 기절할 것처럼 보이네!!! 형수가 얼마나 약골인지 다 안다구요!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제정신으로 뭐라고 조언 좀 해줘요! 아놔!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네!!! 너무 놀라서 서류고 뭐고 그냥 도망쳐 나왔다구요!!! 다시 가봐야 할지…… 아, 아니! 차라리 그냥 팀장한테 깨지는 게 낫겠어요!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휘야가 다시금 머리를 쥐어뜯더니 작업실 안을 산만하게 오가기 시작했다. 시뻘게졌던 얼굴은 어느새 도로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어젯저녁 야근을 하다 시간이 늦어 서류를 가지고 연희동 집에 가서 마무리를 해뒀는데, 그만 그걸 집에 두고 출근을 했다나. 급한 서류는 아니라 퇴근해서 내일 가져오려고 했는데, 상사가 굳이 오늘 봐야 한다며 가져오랬다고 한다. 뺑뺑이 돌리려는 심보가 뻔히 보여 속으로 욕을 해대면서도 서류를 가지러 집엘 갔단다. 일주일 동안 워싱턴으로 공무를 보러 갔던 윤열이 형이 오늘 새벽에 돌아와 나가떨어진 것은 알고 있었단다. 항상 시차 적응을 못 해 비행기 타고 갔다 온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2박3일은 시체가 된다고 했다(부인과 이혼한 후, 요즘엔 거의 매일 연희동 집에서 살다시피 하는 이 의원이라고 했다). 혜윤이도 친구들하고 데이트가 있다며 나간 터라, 이 의원을 깨우지 않기 위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정원에서 김성준의 차를 봤단다. 김성준 역시 연희동 집엔 수시로 드나들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현관 안으로 들어갔는데, 문이 반쯤 열려 있던 이 의원의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라나. 분명한 정사의 소리가! 그것도 둘 다 자신이 너무나 잘 아는 목소리였단다. 차마 믿을 수가 없어 방문 앞까지 가서 직접 들여다보고 확인했단다. 완전히 벌거벗은 채 뒤엉켜 있는 두 남자를! 김성준이 이 의원을 짐승처럼 범하고 있었다고!!!

“……서…… 서…… 서…… 설마 가…… 강간을……?”

‘짐승’이라는 휘야의 묘사에 어쩔 수 없는 최악의 가정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휘야의 격노가 자신의 충격을 수습해주었다.

“미쳤어요, 형수?!!! 그랬음 제가 성준이 형을 가만 뒀겠어요?!!! 반쯤 패 죽이고 말지?!!! 아, 아냐!!! 완전 박살을 내버렸을 거라구요!!!”

“……그, 그럼……?!”

“윤열이 형도 좋아 죽더라니까요!!! 더, 더, 싸게, 싸게! 여자처럼 앙앙대며 조르는데!!! 딱 봐도 그냥 한두 번 해본 관계가 아닌 거예요!!! 완전 찰떡궁합이야!!! 찰떡궁합!!! 으악!!! 미치겠네!!! 돌겠네!!! 아욱, 생각하고 싶지 않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아우우!!!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래요, 진짜?!!! 아니, 왜 내 소중한 형들은 다 게이인 거죠?!!! 이러다 나도 게이 되는 거 아냐?!!! 아니,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열이 형이랑 성준이 형이라니까요!!! 이건 내게 있어 근친상간이나 마찬가지라고요!!!”

“…….”

머리를 쥐어뜯고, 비 맞은 중처럼 혼잣말을 하고, 괴성을 지르고, 발을 구르고, 좁은 아틀리에 안을 팽이처럼 뱅글뱅글 돌고……. 그것이 휘야가 소중한 형들의 비밀을 인환에게 고자질한 뒤, 몇 분 동안이나 되풀이한 산만스러운 행동들이었다.

그런 시동생의 다소 순진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충격 흡수 방식을 생생히 지켜보는 동안, 자신이 받은 충격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휘야 군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마침내 기진맥진했는지 제풀에 지쳐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시동생을 향해 조용히 물어보았다. 자신의 침착한 목소리가 효과가 있었는지, 휘야도 어느 정도는 차분해진 표정으로 자신에게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물론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이 의원님이나 김 박사님께 집에 들렀다는 표시도 않고 나온 거죠?”

잔뜩 풀죽은 고개가 두어 번 끄덕여졌다.

“아는 체를 하고 이 의원님이나 김 박사님과 얘기를 나누고 싶은 거예요? 어떻게 된 일인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두 형들 다 진짜 어른이고…… 그런 관계가 됐다면 둘 다 충분히 심사숙고를 한 끝에 내린 결정일 거예요. 게다가 윤열이 형은 온갖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잖아요. 일반인인 성준이 형이야 별로 걱정이 안 되는데, 윤열이 형은 다르잖아요. 만약 이게 세간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어휴, 진짜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구요…….”

“두 분 관계를 반대하는 건 아니고요?”

“제가 반대할 군번이나 돼요? 전 우리 집안에서 완전 졸이라는 거 형수도 잘 알잖아요.”

“……그건 무슨 군번이라든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게 됐다면 어쩌겠어요. 아니,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게 위험한 불장난을 벌일 형들은 아니니까 사실 사랑이 맞는 거겠죠. 이미 사랑이라면 제가 반대고 뭐고 할 계제도 아닌 거구요.”

“…….”

“왜요, 형수? 저 안 같아요? 호모, 호모 하고 몇 달 전만 해도 온갖 패악이나 떨던 놈이 웬일이냐 싶은 거죠?”

“……아니, 그건 또…… 그게…….”

“형수는 너무 물러요. 너무 착해…… 이럴 땐 맺힌 게 있음 꺼내놓기도 하고 그러는 거라구요. ‘알긴 아는구나, 네놈이!’라든가 ‘이제 철이 드는가 보구나!’ 등등 많잖아요.”

“후후, 그런가요? 하지만 진짜 별로 맺힌 게 없는데…….”

“그러니까요! 너무 사람이 좋아. 그렇게 물러 터져서야 여기저기 이용하려는 놈들만 달라붙기 십상이라고요.”

“…….”

“나는 왜 몰랐을까요, 그땐? 형수가 이런 사람이라는 거…….”

“…….”

“그저 거죽만 보고 판단하고, 단죄하고, 복수할 생각이나 하고…… 형수만 잘못한 게 아니었는데…… 아니죠. 사실 위야 형이 백 번은 더 잘못한 거죠. 만약 내가 형수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만당하고 배신당했다면 진짜 가만 안 뒀을 거예요. 물론 그런 개자식 짓을 한 게 우리 형이니까 어쩔 수 없이 용서하는 거지만요.”

“…….”

“……근데도 형수는 형을 용서했죠. 나라면 절대 못 했을 거예요. 절대로……. 나 같은 말종 시동생도 물론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겠죠. 아무튼 형수는 이상해요.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울 혜윤이과(科)인 거죠. 관세음보살과.”

“…….”

“형수 같은 사람이 위야 형의 배우자가 돼서 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니, 정말 고맙죠. 정말 많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형수.”

“…….”

“……위야 형과 형수 일을 몰랐다면, 전 이번 윤열이 형과 성준이 형 일에도 틀림없이 바보같이 반응했을 거예요. 하지만 저도 배울 줄은 아는 놈이거든요. 같은 일에 두 번 실수는 안 해요. 아니, 안 해야죠.”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어느새 눈시울 가득 차올라 뺨으로 굴러 떨어진 눈물을 재빨리 훔치며 물었다.

“형수 생각은요?”

“……전…… 글쎄요…… 전…….”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형수 생각은 어때요? 제가 그냥 지금처럼 모르는 체하는 게 나을까요? 일단 두 형들이 비밀로 하기로 작정하고 있는 이상, 굳이 긁어 부스럼 낼 필요는 없잖아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가족이잖아요. 반대하는 거라면 모를까, 굳이 반대할 생각이 없다면 넌지시 알고 있다고 두 분께 말씀을 드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게다가 휘야 군도 걱정하다시피 이 의원님은 공인이시잖아요. 그것도 수시로 뉴스에 오르내리시는 분이죠. 그런 분에게 동성애 스캔들은 정말 치명적일 거예요.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가족끼린 누구보다도 서로 믿고 똘똘 뭉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응원하고 힘이 돼드려야죠. 두 분께서 비밀로 하시는 건 아마도 다른 가족들을 배려해서일 가능성이 가장 커요. 지금처럼 우리가 걱정할까 봐서죠. 근데 언젠가 알려져도 알려질 문제라면 이참에 확실히 서로에게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고, 한시라도 빨리 서로에게 힘이 돼주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위야도 놀라긴 하겠지만 반대는 절대 안 할 거구요. 그러니까 위야한테도 두 분 관계를 정확히 말씀드리세요. 물론 그전에 먼저 두 분과 얘기를 해보시는 게 더 좋겠죠.”

“…….”

시동생의 시선이 한참 동안 인환의 시선을 묶고 있었다. 충격과 혼란은 이제 거의 가라앉은 것 같았다. 낯빛도 제 색을 되찾아 형을 닮은 건강한 황금빛이 되었다.

“위야 형이 진짜 장가 하난 잘 간 거 같아요. 한번 안아봐도 돼요, 형수?”

이윽고 속 시원한 어조로 한마디를 내뱉더니 싱긋 웃음을 머금은 시동생이었다. 당황해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늠름한 청년의 팔이 와락 상반신을 조여왔다. 흡사 어린애를 다독이듯이 등을 툭툭 치기까지 하는 청년에게 결국 웃음을 물 수밖에 없었다. 마주 팔을 벌려 꼭 안아준 것은 물론이었다.

“이건 또 뭐야? 마누라와 도련님의 불륜인 거냐, 문휘?”

문가에서 날아든 익숙한 중저음에 기절초풍을 한 인환이었다. 순간 얼음땡이 된 몸을 힘센 팔이 더욱 꽉 죄어오고 있었다.

“어럽쇼? 9시 전엔 안 들어올 거라고 그래서 안심하고 찾아왔더니, 김샜잖아? 형 몰래 형수랑 재미 좀 보려고 그랬는데 다 틀려부렀네, 젠장.”

“어쭈? 많이 컸다, 문휘? 네놈이 내게 맞은 지도 꽤 됐지, 아마?”

“근데 왔으면 기척이라도 내지, 어째 그렇게 여전히 살금살금이야, 형은? 솔직히 말해봐. 형 의처증 있지? 그래서 매일 살금살금 형수만 스토킹 하고 다니는 거지? 맨날 9시, 10시 퇴근이라더니, 웬일로 오늘은 이렇게 일찍 들어와? 진짜 꼭 스토킹이라도 한 거 같지 않아요, 형수?”

“눈치챘으면 어서 형수한테서나 떨어져라, 문휘. 진짜로 한 방 얻어맞기 전에. 의처증 남편 주먹이 얼마나 매운지 알고 싶으냐?”

“흥, 의처증 환자치고 제대로 마누라 관리 잘하는 남편 못 봤수다만…… 뭐,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형수, 그럼 나 이만 가볼게요∼∼. 담에 또 형 늦게 들어오는 날 있음 눈치 봐서 몰래 들릅죠∼∼.”

누가 같은 핏줄 아니랄까 봐, 쇠줄처럼 옴짝달싹 못하게끔 죄던 팔이 겨우 떨어져나갔다. 아쉬운 것은, 얼음땡 주박에서 미처 풀리기도 전에 시동생이 아틀리에를 나가버린 덕분에 미처 인사도 못 한 것이었다.

주박에서 풀린 몸을 겨우 돌려보니, 느긋하게 출입문에 기대서 있는 연인이 보였다. 슈트 재킷도 벗지 않고 바로 올라왔는지, 아침에 출근할 때 그대로 옅은 제비꽃빛 드레스셔츠에 적동색의 강렬한 플로럴 무늬 넥타이, 그리고 그 위에 크림색의 리넨 슈트를 받쳐 입고 있었다. 아래로 살짝 휜 눈꼬리 하며, 입가에 흐릿하게 배어 있는 웃음기를 보니 기분이 무척 좋은 것 같았다.

“휘야 놈이 웬일이지? 무슨 일 있대?”

“……비밀.”

느긋한 야생 호랑이처럼 슬금슬금 다가와 품 안에 자신을 안아들이는 연인이었다. 정수리에 한 번, 이마에 두 번, 양뺨에 각각 한 번, 코끝에 두 번, 마지막으로 입술에 길고 긴 무한 번의 키스도 떨어졌다. 무슨 의식처럼 되풀이되곤 하는 연인의 출퇴근 인사였다. 등을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이 막 사라진 시동생의 손길과 비슷해서 웃음이 나왔다. 역시 무서운 유전자!

“……마누라 기분이 썩 좋은가 보군. 도련님과 비밀까지 만들고 보니 서방님 따윈 안중에도 없다 이건가?”

“킥킥킥…… 의처증 남편은 별로 매력이 없으니깐…….”

“이것 봐라? 진짜 수상한걸……?”

양팔을 연인의 허리에 두른 다음 꼭 끌어안았다. 품 안에 얼굴을 푹 파묻고서 열렬히 비벼대자, 피부에 닿아오는 서늘한 리넨 슈트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흐릿한 땀 냄새와 코롱 냄새, 그리고 마른 풀냄새 같은 알싸한 호르몬 냄새가 몽땅 뒤섞여 있는 연인의 섹시한 체취는 더욱 기분 좋았다. 묵직하게 울리는 중저음도 너무 좋고, 얇은 여름 옷감 아래, 매끄러우면서도 탄탄하게 만져지는 건강한 근육의 감촉은 더더욱 사무치게 좋았다. 요 두 달 사이, 자신의 몸이 회복되는 그 이상의 빠른 속도로 무섭게 건강을 회복한 연인이었다. 체중도 원래대로 돌아왔고, 피부색도 예전 그대로의 매끄러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화려하게 만개한 공작새가 따로 없었다. 아니, 막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백수의 제왕 같았다. 휴일도 없이,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요즘의 강행군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품 안에서 고개를 바짝 쳐들고 제왕의 아름다운 얼굴을 굽어보았다. ‘무한 번’의 키스를 조르기 위해서였다. 노곤하게 눈을 빛내며 짐승의 왕이 웃고 있었다. 기쁨의 미소였다. 행복의 미소였다. 희열의 미소였다. 완벽이었다. 생(生)의 완벽한 구현(俱現)이었다.

“……다녀왔어, 마누라…….”

총희(寵姬)를 품은 제왕이 마침내 키스를 시작했다.

흐릿하게 물소리가 났다. 비몽사몽 속의 의식을 뚫고 아련한 데자뷔가 유성처럼 순간을 스쳐갔다. 그날 밤에도 이런 물소리가 났었지. 그날 밤? 멍한 질문을 흘리며 눈을 떴다.

포근하게 가라앉은 어둠이 보였다. 익숙한 우리 집 주침실 안이었다. 활짝 열린 전면 창문도 보였다. 이른 더위를 쫓기 위해서였다. 제법 서늘하게 식은 밤바람이 정원의 가로등 불빛과 더불어 은은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맞은편 벽에 걸린 야광 벽시계를 살폈다. 3시였다. 옆자리는 역시 싸늘하게 식은 채였다. 이 또한 ‘그날 밤’과 같았다. 무섭도록 사납게 몰아치던 짐승의 자위를 목격한 밤이었었다.

잠들기 전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제에 이어 오늘까지, 사흘 내리 자정에 가까운 시각에 퇴근한 연인이었다. 내내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며 귀가가 늦은 연인을 기다린 자신이었다. 평소처럼 의식 같은 입맞춤으로 퇴근 인사를 하고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뒤, 침대에 쓰러지듯 곯아떨어진 연인이었다. 일에 지친 평소의 연인 그대로인 것 같으면서도 또 왠지 평소보다는 좀 다른 것 같기도 한 연인의 태도에 희미한 불안감을 느낀 기억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기색이 흐릿하게나마 읽히고 있었다. 그건 어떤 구체적인 사건이 아닌, 연인의 감정 상태였다. 연인은 묘하게 우울한 것도 같았으며 고민이 있어 보였다. 내색하지 않기 위해 부러 쾌활하게 행동한 것이 도리어 인환의 의심을 사게 되리라곤 미처 생각을 못 했겠지.

파자마 위에 가운을 걸치고 욕실로 걸어갔다. 꼭 닫힌 문 너머에서 샤워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리고 있었다.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웬만하면 지난번처럼 무시해버렸겠지만, 잠들기 전에 자각한 연인의 고뇌가 꽤 아팠던 때문이었다. 언제까지나 모르는 척하기도 그랬다. 차라리 그냥 저질러버리면 아무것도 아닐 일을, 연인은 너무 망설이느라 더 연연하게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윽!, 웃……! 흐읍, 웁…… 으…… 윽……! 큭……!”

커다란 월 풀 욕조 위에 개처럼 엎드린 채 자위를 하는 연인이 보였다. 가랑이 사이에 넣고 피스톤질을 하고 있는 오른팔의 리듬에 따라 욕조에 넘치고 있는 물이 풍랑을 만난 파도처럼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벽에 붙은 샤워 꼭지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는 물줄기가 엎드린 연인의 머리며 등이며 어깨며 허리, 그리고 엉덩이 굴곡까지 가차 없이 물보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눈을 꼭 감은 채 무아지경에 빠져 허리를 치대고 있는 탓인지, 자신이 들어온 것조차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요분질을 칠 때마다 늠름하고 탄탄한 몸뚱이를 감싸고 있는 섬세한 근육들이 제각각 개성 있게 불끈거리며 멋들어진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쏟아지고 있는 물줄기에 푹 젖어버린 머리카락은 바닥을 향한 채 축 늘어져 무수한 물방울들을 떨구고 있었다. 흡사 연인의 눈물 같았다. 처절할 지경으로 억눌리고 있는 욕정의 비명 같았다.

발바닥이 따듯했다. 대리석 타일 바닥으로 흥건하게 고였다간 쏜살같이 하수구로 빠져나가버리는 온수 때문이었다. 출처는 물론, 파도치듯 거듭 흘러넘치고 있는 욕조 물이었다.

“……윽!, 욱! 큭! 크앗……! 앗…… 으으…… 웁……! 흐웃……! 아…….”

기를 쓰고 참고 있는 것 같은데도 여지없이 터지는 짐승의 교성이 아찔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욕조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입고 있던 파자마며 가운 자락은 모두 욕조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물과 샤워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들로 금세 흠뻑 젖고 말았다. 그리도 가까이 접근했건만 연인은 여전히 모르는 것 같았다. 거의 벽면을 향하고 있는 자세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오르가슴의 광풍에 휩쓸려 들어간 후이기 때문일 것이다.

크게 뒤틀리고 있던 등 근육에 살며시 손을 가져다댔다.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움찔 몸을 떤 연인이 전광석화처럼 뒤돌아섰다. 급격한 움직임 탓에 욕조물이 거친 파도처럼 위로 크게 튀어 올랐다. 시뻘겋게 핏발이 오른 눈시울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왼손이 뻗어왔다. 어깨가 통째로 틀어잡혔다. 흥분한 야수의 품속에 대못처럼 틀어박힌 몸뚱이는 야수의 몸뚱이를 따라 단숨에 욕조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튀어 오른 물줄기를 정면으로 맞아 한동안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갈퀴처럼 조여진 상반신이 아팠다. 생리적인 눈물이 찔끔 솟을 정도로. 물줄기가 여기저기서 파도쳤다. 고개를 치켜들면 폭포수처럼 샤워물이 쏟아지고, 고개를 내리면 아래서부터 치고 올라온 파도에 삼켜졌다. 숨을 쉴 수 없어 괴로웠다. 그러나 마주 꽉 끌어안은 야수의 몸뚱이만큼은 결코 놓지 않았다. 크악, 크앙 하고 사나운 교성을 내지르며 야수가 절정을 맞고 있었다. 자신의 아랫배에 미친 듯 비벼지던 뜨거운 기둥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꽉 조여 끌어안은 야수의 몸이 순간 꼿꼿하게 굳어들더니 아랫배에 뜨거운 것이 왈칵 쏟아졌다. 움찔움찔, 여운처럼 뒤틀리며 몇 번 더 정액을 토해내던 야수의 사지가 곧 힘없이 늘어지고 있었다. 서로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어 두 몸뚱이가 욕조에 빠지는 해프닝만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몸을 떨며, 다시 사람 모드로 변신하기 시작한 야수의 어깨에 쉼 없이 조그만 키스를 뿌려댔다. 뒤통수의 머리카락과 단단한 등줄기와 허리와 엉덩이를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차라리 안아버리지. 이렇게 참는 게 힘이 들면 차라리 안지. 마음속 안타까움이 속속들이 전해질 수 있도록,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키스하고 또 키스했다. 소중하고 또 소중하기만 해서 마냥 가슴이 아팠다.

얌전한 양처럼 순종적으로 변한 연인은 가만히 몸을 내맡긴 채 오래도록 몸을 떨고 있었다. 자신의 등을 부드럽게 끌어안고 있는 연인의 팔에서 좀 전의 광기 어린 야수의 자취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빗물처럼, 혹은 눈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샤워기 물이 마주 안고 있는 연인의 몸뚱이만큼이나 무척이나 따스해 눈물겨웠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

“……그렇지? 무슨 고민 있는 거지?”

“…….”

“……아직도 말해주기 싫어?”

“…….”

“……위야……?”

“……안아버릴까……?”

“…….”

“……그냥 지금 안아버릴까……?”

“…….”

“……참기가 힘들어…… 더는…… 더 이상은 너무…… 힘이 들어…… 못 참겠어…… 머리가…… 머릿속이…… 하루 종일 그거 하는 생각만 할 때도 있어…… 미친 변태처럼 하루 종일 너랑 그 짓만 하는…….”

“…….”

“……그런데 그러면 안 되지…… 벌 받을 거야…… 또 벌을 받는 것만은 더욱 참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미칠 것 같아도 참아봐야만…….”

“……위야, 그게 무슨……?”

“…….”

“……위위……?”

“……그 남자가 너무 힘들어 해.”

두근…….

“……망가지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어. 내가 나만 좋자고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마음이 쓰여서…… 지켜보고 있기가 괴로워…… 어떻게든 제정신을 차려줬으면 싶은데…… 생각보다 많이 힘든가 봐.”

“…….”

“……알지. 그 속을 왜 모르겠나. 나도 그랬는데…….”

“…….”

“……현대 쪽 일도 그만뒀더군. 조만간 프랑스로 돌아가려는 모양이야.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그렇게 보내선 안 될 것 같아. 옆에 둘 생각이야. 내 옆에…… 아니, 우리 옆에 두고…… 어떻게든 제대로 고쳐서…….”

“…….”

“……그 남자를 만나줘. 부탁이야, 마누라.”

“…….”

잔뜩 겁에 질린 어린아이가 품 안에서 떨고 있었다. 야수인 줄 알았으나 실은 괴물인, 괴물인 줄 알았으나 그저 겁쟁이에 불과한…… 약하고 가련한 내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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