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2004년 6월. 김강원(金鋼圓) (98/129)

3. 2004년 6월. 김강원(金鋼圓)

“……마…… 마…… 말도 안 돼…… 어…… 어떻게 선생님은…… 선생님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곰 한 마리가 코앞에서 벌벌 떨고 있다. 180센티미터는 족히 넘을 멀쩡한 허우대가 아까울 정도로, 겁에 질린 계집애처럼 떨고 있다. 어럽쇼? 저건 또 뭔가? 또 우냐, 넌? 어째 하루가 멀다 하고 우냐, 노분도? 내 이래서 르네에게 떠날 때까지 입을 봉하라 그리 일렀건만, 아무래도 저 조그만 여장부가 자신에게 원한이 쌓이긴 단단히 쌓였나 보다. 가장 알리고 싶지 않을 당사자에게 가장 먼저 나발을 부신 걸 보면 말이다. 하긴, 적어도 5년간은 한국에 근거지를 두고 함께 작업을 할 요량을 세웠다가 느닷없이 혼자서만 날아간다고 하니 원한이 쌓일 만도 하다.

“신영란 작가 만나러 지금 나가봐야 돼, 분도 군. 까다로우신 작가님이라 비위 잘 맞춰야 한다고. 자네 우는 거 보고 나가면 영 재수가 없어서 될 일도 안 된다니까. 알아들었으면 냉큼 비켜주시게나, 음?”

부러 바쁜 척을 하며 회의 테이블에 벗어두었던 재킷을 주워들었다. 크로스백에 계약서도 꼼꼼히 챙겼고…… 가만 있자, 더 빠진 건 없겠지? 자문을 하면서도 확신은 그닥 없다. 정신이 없다. 혼이 빠져나간 것 같으니 일인들 제대로 될 턱이 있나. 두 달이 넘게 요 모양 요 꼴로 거듭 실수 연발이었다. 후임이 정해질 때까지 순전히 르네에 대한 의리로 겨우겨우 버텨냈다. 다음 주면 자신의 후임도 출근할 거고, 마무리 지을 일도 오늘이면 다 끝이 난다. 한계라 여기고 있었는데 시기상 적절한 안배가 떨어졌다. 자신 하나 부서지는 건 상관없지만 주변까지 싹쓸이로 초토화시키면서 사라지고 싶진 않다. 그건 최소한 자신의 일에 대한, 예술에 대한 본능적인 경외이고 헌신이다. 개인으로의 자신과 큐레이터로서의 자신을 최대한 분리시킬 것. 그것이야말로 요 두어 달간, 속수무책 무너져 내리고 있는 정신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지키도록 스스로에게 부과한 유일한 지침이었다.

“……아, 안 돼…… 안 돼요…… 못 해…… 못 보내드려요…… 이렇게 갑자기…… 이건 아냐…… 안 돼요, 선생님…….”

다가오려는 곰 새끼를 향해 발차기를 하듯 명치를 차 넘어뜨렸다. 발바닥 면에만 적절한 힘을 실었기에 그리 아프지는 않지만 중심을 잃도록 만들기엔 딱 좋은 선무도식 공격 방법이다. 사무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은 놈을 내려다보며 킬킬거리고 웃자, 눈물범벅의 곰 새끼가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 자신을 본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황당하기도 하겠지.

“이제 그만 정리해라. 못 하겠다면 다신 상대해주지 않을 거다, 노분도.”

“!!!!!”

“파리까지 쫓아온다고 해도 결론은 같다. 스토커로 고소해 감옥에 처넣으면 그만이니까.”

“…….”

“설마 우리 선생님이? 하고 생각했지, 지금?”

“…….”

“그러니까 넌 아직 애기라는 거다. 세상엔 백 프로 천사도 없고 백 프로 악마도 없지. 상황에 따라 백 프로 신사가 백 프로 파렴치범으로 돌변하는 수도 있는 거야. 그래서 세상사가 참 재밌는 거란다. 요지경 속이지. 세상은 요지경. 알아듣냐, 아가야?”

“…….”

“자연스럽게 정리될 때까지 돌봐주려고 했는데,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내 코가 석 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 두 번 다시 이 문제로 자네에게 언질을 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자네도 둘 중 하나로 확실히 정해. 선배로서, 동료로서, 혹은 친구로서까지도 봐주마. 거기까지로 영원히 선을 긋겠다면 내 안으로 들일 거다. 그러나 만약 그 이상을 원한다면 자네와 난 오늘부로 영원히 바이바이지. 디 엔드. 쫑이란 얘기다.”

“……티 안 내고 속으로만 기다리는 건요? 그것도 안 됩니까?”

눈물 콧물 범벅인 곰 새끼의 추레한 얼굴이 쓰디쓰게 웃고 있다. 완전 애기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속 깊은 수컷의 표정도 지을 줄 알게 됐구나. 물론 그건 전적으로 자신 때문이겠지. 이건 좀 아프다. 아니, 꽤 많이 아픈가? 아무러면 어떤가. 젠장.

“안 돼. 백만 년을 망부석이 된대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난 사내놈에게 발정하진 않는다.”

“……흐으으…… 흐어어어엉…… 억, 억…… 흐아아…….”

“다 정리되면 그때 연락해라. 그때 가서 파리로 따라오든지, 아니면 그냥 여기 남든지, 더 이상은 상관 안 할 거다. 어디에 있든 후배로서만 다가온다면 지금까지처럼 최선을 다해서 널 서포트 해주고 가르쳐주마.”

“……흐어어엉…… 윽, 흑…… 으워어어어엉…….”

“ 뒷정리 부탁한다. 오늘로써 나도 현대 일은 끝이니까, 앞으로 문제가 생기면 르네에게 의논해라.”

“흐아아아아아아아…….”

사무실 안이 떠나가랴 통곡을 해대는 곰 새끼를 버려두고 방을 나왔다. 아직까지 자신이 그만둔 걸 모르는 대부분의 현대 직원들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들리는 곰 새끼의 처절한 통곡 소리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자신을 눈으로만 좇고 있다. 곰 새끼의 통곡 소리만큼이나 질기다. 아아, 역시 많이, 꽤나 아프다. 동생처럼 아끼고 아낀 놈인데 결국 깨끗이 손을 털고 말았다. 하지만 이게 절대적으로 현명한 결정이란 걸 안다. 이 사달을 내고도 이어질 인연이라면 또 언젠가는 만나지겠지. 그때를 기대한다. 젠장.

갤러리 현관문을 나서니 진득한 초여름 더위가 사방에서 달려든다. 손목시계를 보니 3시다. 인사동에서 까다로운 작가 하나와 결판을 내고 계약서에 사인을 받아 현대 쪽에 퀵으로 부치면 현대 직원으로서의 마지막 임무도 끝이 난다. 다 끝내놓곤 밤에 다시 질펀히 놀아볼 요량을 세운다.

2∼3일쯤의 간격을 두고 게이 클럽에 가서 제법 난잡하게 놀고 있다. 2주 전부턴 약도 좀 하기 시작했는데, 젊을 때 호기심으로 했을 때와는 확실히 몸이 받아들이는 감에서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중독이 되면 안 되는데 하는 자기 절제의 방어선도 잘 세워지지 않는 것 같다. 망가지고 있구나 하는 자각 정도는 하고 있다. 그나마 자각을 하고 있으니 아직까지 완전히 맛이 간 것은 아니리라. 바닥을 치게 되면 다시 올라갈 기회도 생기겠지. 일단은 넋이 원하는 대로 떨어져볼 생각이다. 한계 끝까지 추락하다 보면 언젠간 끝도 보일 게다. 그렇다. 자신의 방황은 지도도, 나침반도 없는 의미 없는 방황이 결코 아니다. 자신은 그 끝을 볼 요량이었다. 도로 치고 올라갈 수 있을 터닝 포인트.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뭐, 하긴……. 자신의 능력치 이상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어둠 속에서 영영 길을 잃고 만다면……. 그렇지. 그건 또 그것대로 꽤나 흥미로운 요지경 세상이겠지만.

“……당신 멋져…… 너무너무 근사한 몸이야, 진짜…… 완존 내 식성 그대로…….”

“씨발아, 여기서 발큐레 씨가 식이 아닌 년 있음 어디 나와 보라 그래! 혼자 특별한 척 꼬리치면 누가 알아준대니?”

“……썅년아, 너나 쫌 나와봐…… 나도 맛 좀 보자…… 엉……? 우리 발큐레 씨 좆 맛이 그렇게 대단하다며……? 황제 좆이라구 다들 방방 뛰고 아주 난리야…… 소문이 파다해…… 아, 씨팔…… 근데 증말 얼굴도 짱 꼴린다, 야…… 진짜…… 너무너무 잘생겼어…… 하아, 너무 근사하다, 증말…….”

“……좆은 얼굴보다도 더 캡이지. 흐응…… 아직 안 박혀봐서 니년들은 모르지?”

“그니깐 빨리 우리들한테도 좀 양보하란 말야, 씨팔년아! 너 지금 혼자서만 30분째 박히고 있는 거 알아?”

“……보채지 좀 마, 썅년들아. 한 번은 가야 양보도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근데 오늘은 약이 너무 쎄게 들어갔나? 발큐레 씨? 좀 더 찔러줘봐요, 응……? 감질나 죽겠어…….”

“……눈이 많이 풀리셨네? 아무래도 약이 넘 많이 도시나 보다. 그냥 혼자서라두 빨랑 끝내, 썅년아. 너 일부러 뜸 들이는 거지, 지금? 발큐레 씨 좆 혼자 다 차지하려구!”

“그래그래, 얼른 허리 돌려서라두 끝내버려. 우리도 좀 하자.”

“아니라니깐…… 진짜 오늘은 좀…… 거기 딜도 하나 줘봐. 항문 애무 좀 해드려보게…….”

“어어? 발큐레 씬 온리 탑 아냐?”

“……응, 그건 그런데…… 지금 넘 섹시하신 거 보니까…… 거기 넣어드리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니들은 궁금하지 않아……?”

“호호호호, 하긴…… 짐 약이 너무 돌아서 잘 감도 안 잡히시는 거 같구…… 기분 좋으신 거 같으면 우리가 차례로 해드려두…….”

“킥킥킥, 그거 재밌겠다. 그럼 우리가 발큐레 씨 백 버진을 먹는 최초의 신랑들인 셈인가?”

“아우, 상상하니깐 진짜 꼴린다!!! 박아주실 때도 넘 뿅 가는데, 박히실 땐 이 멋진 얼굴이 얼마나 더 섹시해지실까?!!”

“야야, 빨리 거기 딜도! 딜도 좀 가져와보라니까! 처녀시니까 너무 굵은 거 말구…… 어, 거기 그거! 돌기 있는 거!”

“너, 일단 니 구멍에서 황제 씨 좆부터 빼봐봐! 박히실 때 표정이랑 자지랑 어떤지 자세히 좀 보게…….”

“욥! 후후후, 발큐레 씨, 다시 동하심 그때 또 해요, 우리…… 그땐 힘 좀 내서 지난번처럼 콱콱 찔러주셔야 해요? 응……?”

“……꿀꺽…….”

“……우아! 진짜 대물이야!!! 화, 환상이다!!! 저 김 나는 거 봐!!!”

“좆대가리도 엄청 굵고, 길고, 귀두도 넘 이뻐!!! 저기 핏줄 도드라진 거 봐라!!! 끝내준다, 진짜!!! 글라디에이터 같애!!!”

“호호호호…… 불알도 좀 봐봐!!! 예술이지? 큼직하고 탱탱한 게 꼭 내 주먹만 하지 않니?! 양쪽 방울의 균형도 완벽하고!!!”

“야, 이년아!! 그 입 떼지 못해?!!! 좀 구경 좀 하자, 좀!!!”

“아웅! 웁! 넘 삼켜버리구 싶어서…… 쩝쩝, 쭙, 추웁, 아앙, 츄웁, 쭙쭙, 쭙, 추웁…….”

“이 썅년이?!!! 야, 저년 좀 떼어놔! 빨리 떼어놔!!!”

“…….”

성기를 감싸고 있던 축축하고 뜨거운 쾌락이 문득 사라졌다. 잠시 후 강력한 흡입이 다시금 페니스를 빨아들였고, 강원은 사지를 경련하며 본능적으로 허리를 튕기기 시작했다. 몽롱하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드나들며 허릿짓을 하고 있는데, 좀처럼 오르가슴이 다가오지 않아 초조했다. 빠르게 내달리고도 싶은데 그러기엔 사지에 몹시 힘이 달렸다. 손가락 끝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 지경으로 몸이 자꾸만 늘어지기만 했다. 대신 온몸의 신경줄을 자극하며 내달리고 있는 저릿한 쾌락은 오히려 점점 더 증폭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약 기운 때문일 것이다. 평소보다 양을 약간 늘렸더니 확실히 자극이 장난이 아니었다. 뿌옇고 붉게 변한 시야엔 온갖 에로틱한 환각과 환영들이 줄지어 나타났다간 도로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굳이 누군가의 구멍에 직접 박는 섹스를 하지 않아도 오르가슴 직전의 전율스러운 쾌락이 파도처럼 등락을 거듭했다. 처음엔 두 명의 바텀과 시작을 한 것 같은데, 어느새 룸 안은 대여섯 명의 사내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들렸다 안 들렸다 하는 대화 소리로 보아 대부분 바텀들인 것 같았고, 개중엔 멀티도 몇 있는 듯싶었다. 강원의 취향인 작고 섹시한 미인 타입도 있고, 180에 육박하는 거구도 있었다. 몇몇과는 섹스를 한 기억이 있고, 또 다른 몇몇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한결같은 것은, 그들 모두 강원의 몸뚱이에 환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많은 손들이며 입술들이며 혀들이 자신을 만지고 꼬집고 애무하고 비비고 핥고 깨물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몇 시간째 하늘을 찌를 듯 꼿꼿하게 발기해 있는 페니스는 번갈아 사내들의 항문이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도로 빠져나오기를 반복했다. 고환과 샅은 물론, 무성한 치모까지 누군가의 혀와 입술에 의해 아프도록 빨리고 또 빨리고 있었다. 삐죽 발기한 양쪽 유두 또한 각각 다른 사내들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 가차 없이 유린되는 바람에 아프다 못해 아예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랫배와 배꼽을 혀로 핥는 치가 있는가 하면, 밑에서 발가락을 하나하나 빨아 먹는 사내도 있었다. 자신의 발바닥을 사타구니 사이로 가져가 발기한 저들의 성기에다 대고 문지르며 자위를 하는 치들도 있었다. 자신들의 차례가 되지 않으면 저희들끼리 달라붙어 강원에게 한 짓들을 고대로 답습하기도 했다. 제대로 가눠지지조차 않는 자신의 몸뚱이는 몽롱하고 음탕한 쾌락에 취해 그 모든 사내들의 지독히 퇴폐적인 유린들을 기꺼이 즐기고 있었다.

한 번은 몸이 뒤집히며 윤활제가 듬뿍 발린 로터가 항문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이것만은 거부감이 일어 화를 내며 몸을 뒤챘지만, 사지는 물론 머리까지 대여섯 명의 사내들에 의해 제압당해 있어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평상시라면 두어 번의 발길질로 간단히 내쳤을 테지만, 몸은 이미 약 기운과 극치의 성적 쾌락에 완전히 침몰당한 후였다. 저항다운 저항도 못 해본 채 힘없이 늘어지는 몸뚱이를 사방에서 뻗어온 사내들의 손길이 부드럽게 받아내고 있었다. 몸 안 깊숙이에서 로터가 진동하며 전립선을 찌르고 있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지독하면서도 야릇한 쾌락에 온몸으로 찌릿찌릿한 전기가 흘러 다녔다. 더한 자극과 쾌락을 좇아 허리를 음란하게 돌리며 흔들었다. 내벽 속의 로터를 어떡하면 더 깊이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항문 주름과 엉덩이 근육이 동시에 파도처럼 불끈거리며 위아래로 수축했다. 페니스는 더 이상 발기할 수 없을 만큼 딱딱하게 굳은 채 위로 한껏 휘어서 이리저리 덜렁거리고 있었다. 귀두 끝에서 물 같은 쿠퍼 액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내 하나가 면봉 끝을 자신의 귀두 구멍에 찔러 넣더니 빠르게 피스톤질을 시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교성을 고래고래 터뜨려야 했다. 고통이 느껴지는 이상으로 엄청난 쾌락이었다. 그 즉시 오르가슴에 오를 것처럼 몸서리를 치고 또 쳤다. 사지를 뒤틀며 더한 극치를 찾아 위로, 위로 내달렸다. 흡사 무중력의 우주를 날고 있는 것 같은 현란한 환각들이 연달아 시야를 스쳐갔다. 날아가며 연인의 얼굴도 설핏 본 것 같았다. 슬픈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어, 내벽 안쪽에서 전립선을 사정없이 긁어대며 진동하는 로터의 자극에도 불구하고 순간 가슴이 서늘해진 자신이었다.

“……선…… 선…… 선생…… 님……!”

도르륵 뺨으로 굴러 떨어진 연인의 눈물방울에 심장으로 저릿한 아픔이 달려 나갔다. 연인이 돌아서고 있었다. 하늘하늘 꽃잎이 지고 있었다. 찬란한 낙화였다. 가지 마. 애타게 호소했다. 제발 가지 마요, 선생님!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필사적으로 연인의 자취를 쫓았다. 몸서리를 치며, 헐떡이며, 맹렬하게 용두질을 치기 시작했다. 귀두 구멍에서 면봉이 빠져나가고 대신 누군가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간 페니스는 걷잡을 수 없이 흥분했으며, 순간 전립선을 찔러든 로터의 자극에 극치의 쾌락을 만끽하며 봇물처럼 정액을 터트렸다. 페니스를 감싸고 있던 사내의 입안이, 파정과 함께 요동치고 있는 음경 전체를 흡반처럼 빨아 삼키고 있었다. 목구멍 안쪽 식도까지 귀두가 온통 빨려 들어간 것 같았다.

온 넋이 부서지는 듯한 오르가슴으로 경련을 일으킨 몸뚱이가 물에 빠진 개처럼 이리저리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꿀꺽꿀꺽. 자신이 토해낸 정액을 통째로 삼키던 사내의 입술이 위로 올라와 자신의 입술을 덮쳤고, 사라지려는 연인의 자취를 쫓아가듯 자신 또한 사내의 입술에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목구멍 깊숙이 파고들어온 이름 모를 사내의 혀뿌리와 더불어, 항문 안쪽을 가득 채웠던 로터가 빠져나가는 게 흐릿하게 느껴졌다. 양쪽 허벅지가 활짝 벌어지며 위로 들리는 것도 느껴졌다. 로터 대신 딱딱하게 발기한 누군가의 페니스가 자신의 항문 언저리를 찌르고 있었다. 축축하고 뜨겁게 젖은 귀두 끝으로 주름을 슬쩍 비집기도 하고, 음경 기둥으로 회음부와 음낭, 그리고 항문골 전체를 힘차게 비비기도 했다. 로터와 윤활제가 길을 뚫어둔 입구 주름이 무언가를 기대하듯 움찔움찔 경련하고 있었다. 사내의 두꺼운 귀두 끝이 불쑥 입구를 헤치고 들어왔다가 도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너무나 아쉬워 침을 꿀꺽 삼킨 자신이었다. 수컷의 육봉이 강력하게 박아주기를 기다리는 암컷의 바기나처럼, 심하게 움찔거리는 자신의 입구 주름이 자각되었다. 유혹이었다. 암컷으로의 초대였다. 고통 이상으로 야릇한 도착적 쾌락이 느껴졌다. 반역의 쾌락이었다. 배덕의 쾌락이었다. 자기 파멸에의 광기였다.

흡사 암컷이 된 것처럼, 사내의 페니스를 유혹하듯 무의식적으로 음란하게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혀로 입술을 핥으며, 기대에 찬 가쁜 숨을 토해냈다. 자신의 전 존재에 반하는, 자아의 붕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속수무책 같았다. 더는 이 무시무시한 파멸의 흐름을 멈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과연 이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현실과 비현실의 한계를 가르는, 몽롱한 극치의 쾌락 속에서 홀연 깨어 있는 넋이 반문했다. 사내의 페니스를 향해 다리를 벌리며 무너지기 직전, 화살처럼 깃든 찰나의 자각이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부서트려서 자신은 무얼 증명하려는 건가? 전부 다 폭삭 무너지고 나면 더 이상의 고통은 없는가? 뼈와 살이 떨어져나가는 것만 같은 이 지독한 상실감을 잊을 수 있는가? 연인을 잊을 수 있는가? 자신이 바라는 것이 정녕 그것인가? 연인을 잊게 되는 것? 완전히 잊고, 연인을 사랑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는 것? 우리들의 ‘방’을, 그 완벽의 ‘방’을 전혀 몰랐던 때로?

Non!!!!!

영혼과 정신과 몸뚱이가 하나로 뭉쳐 처절한 생존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거절하겠다. 영혼이 대답했다.

후회하지 않는다. 정신이 선언했다.

잊지 않을 것이다. 이 생(生)이 다하도록. 아니, ‘영원’의 시간이 다하도록. 몸뚱이가 동의했다.

활짝 열린 사타구니 사이로 누군가의 페니스가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곰 새끼를 내지른 발차기만큼의 테크닉을 쓸 필요도 없었다. 워낙 허벅지 자체가 위로 들린 채 접혀 있어 그대로 발을 뻗기만 하면 되었다.

퍼억!!!

“켁!!!!!”

“에?! 으앗!!!”

올라타고 있던 사내를 차버리자 사내가 뒤로 벌렁 넘어가며 주변에 달라붙어 있던 다른 사내 서넛을 함께 끌고 소파 밑으로 떨어졌다. 충격 또한 함께 받았을 것이다. 다리를 뻗는 동시에 자신의 양팔을 붙들고 있던 사내들의 얼굴도 번갈아 주먹으로 후려쳤다. 퍽!!! ……으악! 아아악! 컥……! 사방에서 비명이 난무했다. 누군가의 코피를 터트리기라도 했는지 손가락 관절 전체에 끈적한 감촉이 느껴졌다. 사지의 힘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찰나로 끄집어냈던 증폭된 기운이 다시금 순식간에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다행히 제대로 한두 대 씩은 얻어맞은 모양인지, 대여섯 명의 사내들 모두 소파 아래 바닥에 널브러진 채 끙끙거리는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다양한 욕설과 저주들도 설핏 들린 것 같았다.

비칠거리며 소파에서 내려서자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토기까지 치받는 바람에 클럽 모나코의 VIP 전용 룸 바닥에 여봐란 듯 토해냈다. 비칠비칠 기다시피 출입문을 더듬어 나가려는데 누군가의 손이 정수리 위 머리카락을 움켜쥐곤 뒤로 끌어당겼다. 얻어맞은 사내들 중 한 명일 터였다. 힘을 잃은 몸은 무기력하게 도로 끌려갔고,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던 손가락이 이번엔 사나운 기세로 목을 조르는 것이 느껴졌다. 숨이 막히며 눈이 튀어나올 것은 고통이 엄습했다.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정말 목을 졸라 죽일 기세였다. 역시 사방에서 욕설이 난무했다. 모두들 자제하자는 순수 암컷들의 울먹이는 하소연도 들렸다.

필사적으로 기운을 끌어낸 다음 목을 조르고 있는 사내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으악!!! 콰당당!!! 다시금 비명과 욕설, 그리고 술병과 접시들이 바닥에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

기운이 돌아오는 족족 무턱대고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일부는 성공하고 일부는 실패했다. 기운이 실리기는커녕 기본 자세조차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지만 선무도 자체가 워낙 파괴적인 무술이라 일단 성공한 일격을 맞은 사내들은 한참을 일어나지도 못했다. 문제는 성공하지 못한 쪽이었는데, 확실히 약에 침몰당한 자신과 거의 맨 정신일 사내들과는 오래 대치할수록 자신 쪽이 불리했다. 평소라면 사내들도 쉬이 진정했을 테지만, 열렬히 탐하던 몸뚱이를 강간 직전에 놔줘야 한다는 도착적인 상황이 사내들의 흥분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반드시 따먹어버리고 말겠어, 이 새끼. 이를 갈아붙이는 누군가의 탁한 으름장도 설핏 들려왔다. 다시금 양쪽 팔을 잡아채오는 두 사내들에게 몸이 제압되려는 찰나, 얼핏 출입문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촤악!!!!!

갑자기 살을 찢을 것 같은 얼음물 세례가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젠장. 느닷없이 닥친 예상치 못한 공격에 절로 불쾌한 욕설이 샜다. 얼굴은 물론, 전신으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들을 거칠게 도리질을 치며 떨쳐내보려다가, 또 한순간 바닥난 기력 탓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주변은 알 수 없는 비명과 욕설, 그리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들로 요란했다. 자신이 상대했던 사내들은 이번엔 다른 복병을 만나 고전하고 있는 듯했다.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눈꺼풀을 들어 올릴 만한 기력조차 없었다. 솔직히 이젠 한계였다. 젠장, 될 대로 되라지. 피식피식 새는 웃음을 깨물며 뇌까렸다. 역시 세상은 요지경 속이라니깐.

“……실망이다, 김강원…….”

맞고 때리고 부서지는 엄청난 소음들 속에서 귀에 익은 나지막한 중저음이 오롯이 전해지고 있었다. 늘 참을 수 없을 만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곤 하던 목소리였다. 간혹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지곤 하던 남자였다. 그럼에도 또 이상야릇할 지경으로 보호 본능을 자극하던 남자이기도 했다. 죽이고 싶지만 죽여선 절대 안 되는 사내. 부서트리고 싶지만 절대 부서트려선 안 되는 사내. 아, 그렇지. 그럼 연인도 죽게 되니까. 연인도 따라서 부서지게 되니까.

“……고작 이렇게밖에 처리하지 못하는가?”

남자가 지긋지긋한 속내를 숨기지 않은 채 힐문했다. 늘어지는 몸뚱이 위로 무언가가 던져졌다. 옷가지인지 타월인지, 아무튼 그 비슷한 무엇이었을 게다.

“……일어설 수 있겠나?”

바로 코앞까지 다가든 중저음이 재차 묻고 있었다. 여전히 싸늘하고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일어서기는커녕 눈도 못 뜨겠다, 문위. 소리로 만들어지지 못한 대꾸가 몽롱한 의식 속을 떠돌고 있었다.

겨드랑이 틈으로 남자의 양팔이 파고들어오더니 몸뚱이가 위로 들어 올려졌다. 자신만큼이나 큰 거구를 별로 힘을 쓰지도 않고 가뿐하게 들어 올리는 모양새가 그리 아니꼬울 수가 없었다. 역시 재수 없는 놈. 반사적으로 까칠한 욕설부터 의식에 떠올랐다. 심하게 비틀거리는 자신을 남자는 품에 안듯 기대게 하곤 누군가에게 외치고 있었다.

“영석 씨, 대충 정리됐으면 저부터 도와주십시오. 윤 실장은 여기 남아서 뒤처리 좀 해주세요. 클럽 쪽과 법적인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손 변호사한테 미리 연락 넣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 흥신소 사람에겐 그만 돌아가도 좋다고 전해주십시오. 내일 오전 중으로 연락하겠다고요.”

“예, 사장님.”

“예, 사장님.”

오른쪽 옆에서 다른 사내의 손이 끼어들더니 자신의 왼팔을 어깨에 둘러멘 남자의 반대편에서 자신을 부축하는 게 느껴졌다. 자신이 걸을 수 있다는 전제하의 부축 자세였다. 미안하지만 도저히 못 걷겠다니까. 속으로 짜증스럽게 불평을 토로한 것이 그 밤, 클럽 모나코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남자의 코롱 냄새가 났다.

열에 들뜬 얼굴에 차가운 물수건의 감촉이 느껴졌다. 몽롱한 수면기와 함께 머리를 울리는 심한 두통을 자각하며 눈을 떴다.

30센티쯤 떨어진 위치에서 남자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코롱 냄새는 자신의 머리에 물수건을 대주고 있는 남자의 손끝으로부터 풍겨 나오고 있었다. 넥타이까지 완벽하게 챙긴 블루 그레이의 최고급 비즈니스 슈트를 쫙 빼 입은 남자는 그야말로 ‘오늘의 성공남’의 표본과도 같아 보였다. 두어 달 만에 본 얼굴이며 몸뚱이 또한 건강의 화신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하긴 금지옥엽이자 오매불망, 남자의 생명줄을 완벽하게 독차지했으니 육체와 정신의 건강이 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터였다. 불면과 줄담배, 그리고 지나친 엽색 행각으로 망가져가고 있는 누군가와는 심히 극과 극의 대조가 아닐 수 없었다.

지나치게 잘생겨서 더 재수 없는 남자로부터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익숙한 자신의 집 침실 풍경이 눈에 밟혀들었다. 천장의 불빛과 어두운 창 밖 풍경을 보니 아직 밤인 모양이었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클럽에서의 기억이 두통과 더불어 지독한 염증을 느끼게 했다. 물론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내게 사람을 붙였던가?”

“…….”

대답할 필요가 없다 여겼는지 침묵을 고수하는 남자에게 짜증이 치밀었다. 도로 눈을 감으며 재차 도발해보았다.

“……뭐야, 사후 관리 차원인가?”

“…….”

“……관리 끝났으면 그만 내 집에서 사라져주시지?”

“언제까지 할 거냐?”

“…….”

“언제까지 해야 하냐고?”

“뭘?”

남자와 똑같이 씹어줄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쨌든 오늘 밤 자신의 위기를 구조해준 작자는 이 남자였으므로. 하긴 이 경우 병 주고 약 주고인 셈인가? 피식.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자조의 웃음이 샜다. 남자가 물끄러미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정리.”

“…….”

“마약을 한 때문에 병원에 데려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의사 자격증은 있지만 전문의 수준에는 한참을 못 미치는 나 같은 돌팔이에게 치료를 받게 할 수밖에 없었지. 지난 며칠간 이 나이에 마약 관련 공부를 하느라 고생 좀 했다. 여차하면 오늘 같은 문제가 터질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흥, 그래서 나더러 고마워하라는 거냐?”

“오늘은 운이 좋았지만 다음번에도 거듭 좋으리라고는 물론 생각 않겠지? 넌 영리한 인간이니까. 마약도 마약이지만 그렇게 함부로 몸을 굴리다간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는다고도 장담할 수 없을 거다.”

“아아.”

“아니면 오늘도 그저 계획의 일부였나? 김강원을 망가뜨리기 위한 완벽한 대차대조표에 내가 괜히 끼어들어 산통을 깬 셈인가?”

“담배 좀 집어줘.”

“…….”

“저기 탁자 보이지? 재떨이와 라이터도 가져다줘.”

“…….”

담담한 눈길이 한참을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듯하다가 이윽고 앉아 있던 침대 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입가에 닿아온 감촉에 눈을 뜨고 보니 남자가 자신에게 담배 한 개비를 대주고 있었다. 아마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돗대’이리라.

거절하지 않고 입에 물자, 라이터의 불까지 지펴주는 친절을 보인다. 아, 하긴 지금 자신은 사후 관리 중이지. 하다못해 보험 세일즈도 사후 관리를 하는 마당인데, 담뱃불 서비스 정도는 해줘야 마땅하지 않겠나? 금지옥엽 지 마누라를 잘 모시다 무사히 돌려줬으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셈이 아니냐.

“……웬만하면 그건 끊는 게 좋지 않나?”

하! 이젠 아줌마 잔소리까지? 이도 사후 관리 차원?

남자의 얼굴을 향해 마음껏 매연을 뿜어주는 것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슬쩍 미간을 구겼을 뿐, 남자는 여전히 눈 하나 깜짝 않고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한 물샐 틈 없는 관찰과 주의가 흡사 사랑에 빠진 자의 그것 같아 실소가 물렸다. 하여간 여러모로 집요한 놈이었다.

“사랑이란 게 내겐 꼭 이 담배와 같지.”

“…….”

“……억지로 잘라내려고 하니 더더욱 집착하게 되거든?”

“…….”

“그래서 결심했지. 그냥 가보는 데까지 가보자고. 그리 생각을 고쳐먹으니 어째 잘될 것도 같았어. 네놈의 자식이 그 망할 유혹만 해오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자연스럽게 끊어졌을지도 모르지.”

“…….”

“……실컷 독극물을 들이켰는데 금단 증상을 겪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담배라고 할 수도 없겠지. 더 이상 내겐 신경 쓰지 마. 선생님께 고자질도 하지 말고. 영원히 간다는 금단 증상 얘긴 들어본 적 없으니까.”

“…….”

“아, 담배와 다른 점이 하나 있긴 하군. 담배는 무한 리필이 가능한데 사랑은 리필을 할 수가 없더라고. 다시 피울 수가 없더란 말이야.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완전히 끊어야만 하지. 제대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날 용서하기 힘들겠지?”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다시 한 모금 빨다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언젠간 받아낼 생각이다, 김강원. 벌 받는 인생이라면 이젠 지긋지긋해.”

“무슨 헛소리야?”

“사후 관리 차원이라고 했나? 맞아. 그럴지도 모르지. 관리 차원에서 난 반드시 네 용서를 받아내야만 해. 그때까진 널 놓아줄 생각 없으니까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야.”

“잘 놀고 있구만. 누가 네놈 따위에게 잡혀주기는 한대?”

“현대를 그만뒀다지? 파리에도 알아봤어. 르네 씨에겐 거짓말을 했더군. 박물관 쪽과 계약된 것도 아니었어. 정리하러 가는 게 아니야, 넌. 그저 도망치는 거지. 꽁지가 빠져라, 겁에 질린 계집애처럼.”

“약 효과는 말끔히 사라진 것 같거든요, 문 사장님? 과용하면 당장은 지독해도 후유증 없이 깔끔한 종류야. 멀끔한 얼굴 그대로 여길 나가고 싶다면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문위.”

“마인 아트에 디렉터 자리를 비워뒀다. 거기로 와줘.”

“?!!!”

“난 한다면 해. 원하는 게 있으면 어떤 비열한 수단을 써서라도 차지하고 말지. 내가 지금 간절히 원하고 있는 건 너다, 김강원.”

“미친 새끼.”

“네가 소중해. 망가지게 둘 수 없어. 내가…… 아니, 우리가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서 혼자 병들게 내버려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

“대단히 자신만만하신데 말이지요, 문 사장. 우리 같은 족속은 묶이는 걸 가장 질색하거들랑요? 묶이느니 차라리 줄을 물어뜯다가 피를 토하며 죽고 말지.”

“강제로는 안 해. 강제로 널 움직일 수 있다고 자만하지도 않아. 하지만 난 널 움직일 수 있게끔 하는 다른 많은 약점들을 알고 있지.”

“……?”

“……네가 마인 아트를 맡지 않고 그대로 사라진다면 아내는 그림을 접을 거다. 그것도 영원히.”

“무…… 무…… 뭐?!!! 뭐라고?!!!”

자신도 모르게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이마 위의 물수건이 떨어지고 동시에 심하게 골이 울렸다. 지독하게 울렸다. 골이 빠개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고통으로 사납게 얼굴이 구겨진 건 단지 약의 후유증 탓만은 아니었으리라. 남자의 폭탄선언이야말로 자신의 골을 더 빠개지게끔 만드는 지독한 공격이었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그림을 접어?!!! 선생님이 왜?!!! 나와 선생님 그림이 무슨 상관인데?!!! 그게 넌 세상에…… 아니, 인류에 얼마만 한 가치가 있는 보물인 줄이나 알아?!!! 그게 어떤 그림인데?!!! 어떤!!……! 그, 그런 선생님 그림을?!!!”

멱살을 잡고 거칠게 흔들어도 얄미울 정도로 침착한 남자의 표정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알 게 뭐람. 인류라고 했나? 그게 뭐? 나와 하등 상관이 없을 불특정 다수 말인가?”

“이…… 이 무식한 새끼가?!!!”

“고자질하지 말라고 했던가? 어쩌지? 벌써 아내는 다 알고 있는데? 자네가 요새 지저분한 게이 클럽들이나 전전하며 징징대고 있다는 걸?”

“망할 자식!!!!!”

퍼억!!!

도저히 참지 못하고 뻗어나간 주먹은, 그러나 기대와 달리 남자의 손바닥 안에서 가로막혔다. 자신의 주먹을 움켜쥔 채로 남자가 엄청난 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부르르 떨리는 손과 팔목의 전율은 그대로 남자의 단단한 어깨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두 달 전의 정상적인 자신이라면 그런 남자와 어떻게든 호각을 이뤘겠지만, 솔직히 현재의 망가진 몸 상태로는 남자의 강력한 에네르기를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남자의 손바닥 안에 사로잡힌 주먹에서 마지못해 힘을 빼자, 기를 써도 도저히 뿌리쳐지지 않던 그것이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졌다. 사슬처럼 자신의 눈동자를 죄던 남자의 불길 같은 시선 또한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아내에게 그림은 이제 너란 존재와 의미가 같다. 너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것으로 우리 세 사람의 블랙코미디가 끝을 맺는다면, 아내는 더 이상 자신의 그림에서도 가치를 찾지 않을 거다. 네 가치가 사라졌으니, 아내의 그림의 가치를 확인할 완벽한 거울 또한 영영 사라져버리는 것과 한가지인 셈이니까.”

“…….”

“……아내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야. 생애 유일하게 욕심을 낸 존재가 있다면 그건 나와, 아내의 그림이기도 한 네가 유일할 거다.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나?”

“…….”

“나는 안타깝게도 아내의 그림을 몰라. 아내의 반쪽을 모르는 것과 같다. 하지만 너는 그 반쪽을 알고 있어. 세상 누구보다도 정확히. 아니, 사실은 세상에서 유일하지. 아내의 그림을 알고 있는 세상 유일한 존재……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나?”

“…….”

“……반쪽은 내가 가졌지만 나머지 반쪽은 네가 가져갔다. 그래도 부족한가?”

“…….”

지독한 놈이었다. 세상 최고의 악당에, 사기꾼에, 이기주의자에, 괴물이라고 하더니 연인의 말이 딱이었다. 그 어떤 비열한 수단을 써서라도 원하는 것은 차지한다더니, 그야말로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최대 약점인 연인과 그 작품을 미끼로, 이 세상 최고의 악당이 자신을 거미줄처럼 친친 묶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협박이 그저 협박으로 그치지 않으리란 것 또한 무시무시한 점이었다. 연인은 진실로 붓을 꺾을 것이다. 그것도, 오로지 자신에 대한 진혼 미사만을 위해. 그리고 눈앞의 이 무식한 마초 놈은 그게 어떤 끔찍한 비극인지도 모르고 그저 좀 ‘섭섭하다’ 정도의 싸구려 감상에 그치고 말겠지.

“……지독한 새끼…….”

“…….”

“……비열한 새끼…… 그림이 뭔 줄도 모르는 무식한 마초 놈…… 순진한 선생님을 꼬드긴 건 너겠지…… 붓을 꺾을 각오만 돼 있다면 날 잡을 수 있으리라고 선생님을 들쑤셨을 거야…… 선생님과 내게 선생님의 그림이 어떤 의민지도 모르고…… 설령 네놈이 도박에 져서 그림이 영영 무덤에 묻힌대도 네놈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겠지…… 그림이 뭔 줄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니까…… 죽일 놈……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천하의 개 호로새끼…….”

“……아아, 그래. 내가 좀 그렇지. 앞으로 차차 더 알아갈 기회는 많이 있을 거다, 친구.”

“누가 친구냐, 씨팔놈아……!”

“……널 사랑해.”

“뭐야?!!! 이 새끼가?!!! 징그럽다, 새꺄!!! 맙소사, 꿈에 나타날까 두렵군!”

“……네가 우릴 떠나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우리가 네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넌 이미 내 영역에 속한 사람이다. 내 가족이지. 내 영역에 들어온 존재는 목숨을 걸고 지킨다. 목숨을 걸고 사랑한다. 그게 내 방식이다, 김강원.”

“……?!”

“……아내…… 동생들, 윤열이 형, 성준이, 현준 형……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다, 김강원. 너도 내게 속한 가족이다. 이제 막 내 영역 안으로 들여보냈다.”

“!!!”

“……나는 내 영역 밖에 있는 인간은 몰라. 그건 그저 인간의 모양새를 한 이해 불가의 낯선 적들일 뿐이지. 적들에겐 이기기 위해선 어떤 더러운 수단도 불사한다. ‘지독하고 비열한 새끼’ 짓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는 게 바로 나란 괴물이지. 하지만 가족은 다르다. 내 가족을 위해서라면 나는 언제든 내 목숨을 건다. 너도 이젠 내 가족…… 널 위해서도 난 목숨을 걸 거다. 목숨을 다해 널 사랑할 거다…….”

“…….”

더는 비웃을 수 없었다. 더는 가벼운 욕설도 뱉을 수 없었다.

남자는 진심이었다. 고요하고 담담한 표정 뒤에,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는 맹세의 무게가 지독히도 무거웠던 때문이었다. 그건 강원 자신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창조주 자체에 대한 맹세였다. 만약 그를 어긴다면 영혼조차도 완벽히 소멸할 것을 각오하는, 그야말로 배수진을 친 절체절명의 거래이자 계약이었다.

할 말을 잊은 채 한동안 멍하니 남자의 거미줄에 걸려 있었던 것 같았다. 흡사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남자는 강원의 시선을 단단히 움켜쥔 채 놓지를 않았다.

그러기를 얼마의 시간이 지나간 걸까. 문득 빙긋 하고 남자가 부드러운 웃음을 무는 게 보였다. 아마도 자신에게는 처음일 저 미소는 남자의 가족이거나 친구에게만 허락되는, 이를테면 남자의 말마따나 남자의 영역 안에 들어온 자들만을 위한 특별한 ‘의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거만하고 이기적이며 비열한…… 사기꾼에, 거짓말쟁이에, 세상 최고의 악당이기도 한(연인의 표현을 빌자면) 괴물 자식이 저런 느끼한(실은 따뜻한) 웃음을 머금을 까닭이 없다.

젠장. 이건 또 무슨 조화속인지. 여하간 웃는 남자가 꽤나 천진난만해 보이는 게 아닌가. 아니, 정직하게 고백하자면 귀엽다고나 할까…… 으아악, 맙소사! 내 눈이 삐었나?! 저 악마구리 새끼가 귀여워 보인다고?!!! 정령 네가 미쳐가는구나, 김강원! 요지경 속이라니까, 요지경 속……!

문득 담배를 빨려고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가는데, 무언가가 허전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거의 다 타버린 자신의 돗대는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다른 한 손에 든 재떨이에 꼼꼼할 정도로 세심하게 비벼 끄는 남자였다. 마치 담배가 다 타들어가기를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 같은 모양새였다.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 남자가 이번엔 창가로 다가가더니 창문의 새시 틀 사이에 재떨이를 절묘하게 올려놓았다. 어지간히도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출근은 다음 주 중으로라도 하는 걸로 서 실장에게 얘기를 해두지. 대충 4∼5일이면 약을 한 후유증도 사라질 테니 회복되면 바로 출근하도록 해. 오래 쉬어봤자 오늘 밤 같은 어리석은 사달만 벌일 테지. 웬만하면 너도 동의해줬으면 좋겠어. 내일 윤 비서 시켜서 계약서 작성하도록 하지.”

어둠이 여전한 창 밖을 가만히 응시하며 남자가 못을 박았다. 분명 계약서 또한 이미 작성돼 있는 상태일 것이다. 죽일 놈. 잊혔던 원망이 다시금 불쑥 솟구쳤다. 물론 내색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일단 승복하기로 한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자신의 꽤 괜찮은 장점들 중 하나였으니까.

“……이 집 정원도 꽤나 아름답군. 잘 지어진 집이야…….”

뜬금없는 남의 집 정원 칭찬까지? 하, 이제 목적한 바를 다 이루셨으니 풍경 감상하실 여유도 있으신가 봅니다, 문 사장? 속으로 비아냥을 던졌음은 물론이었다.

“……아내가 꽤 좋아했을 것 같군. 아내는 목가적인 것을 좋아하지. 화가라 그런가?”

“…….”

“……어때? 이제쯤은 아내를 만나볼 마음이 들지 않나?”

두근…….

남자는 여전히 어두운 정원을 굽어보고 있었다.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각이었다. 아마도 새벽 1시 전후일 것이다. 이른 무더위로 하루 종일 달아올랐던 대기도 이제쯤은 거의 식어들었을 시간대였다. 그러나 남자가 던진 마지막 한마디 탓이었을까? 어쩐지 내장 안쪽,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채 아물지 못한 상흔이 내지르는 비명일 것이다.

“……아내는 내색하지 않지만 늘 널 생각해. 특히 그림을 그릴 때에는 더하지. 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미안하게도 난 아내보다도 더 아내의 속마음을 읽고 있지.”

“…….”

“……네가 괜찮다는 걸 확인하지 못하는 한, 넌 아내의 심장에 박힌 영원한 가시일 거다. 혜윤이가 깨어났으니 아마도 어쩌면 이제 네가 아내의 유일한 가시일 테지.”

“……거의 정리가 되고 있어. 재촉하지 마, 새꺄.”

“오해를 하는군. 보채려는 마음으로 만나라는 게 아니야.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 익숙해지라는 뜻에서지.”

여전히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는 가슴을 저도 모르게 꾹 누른 자신이었다.

“……그래서 어때? 선생님은 이제 편안해하시나?”

기어이 물음을 던지고야 말았다. 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을 물음을.

“물론 편안하지. 나만큼.”

밉살스러운 새끼.

“지극히 행복해하지. 앞으로도 아내가 행복한 것을 알고 싶거나 확인받고 싶으면 넌 그저 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다.”

독사같이 교활한 새끼.

“……그런가……? 그거면 됐어. 선생님만 평화로우시다면.”

그러나 남자에 대한 미움과 질투와는 별개로 연인의 안부에까지 찌질한 감정을 가져갈 수는 없었다. 자신의 아픔과는 별개로 그것이 연인에게까지 이어지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행복해야 했다. 연인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연인 속에 깃든 자신 또한 행복할 터였다.

“……아내도 용서받고 싶어해. 물론 나만큼.”

“용서는 무슨! 서로 이길 걸 상상하고 베팅한 게 아닌가? 게다가 난 이미 진 게임엔 그리 연연해하지 않아. 이참에 확실히 하는 거지만, 넉 달 전 일엔 가해자도, 피해자 따위도 없는 거야. 너도 그 점에는 동의하리라 믿는다, 문위.”

“…….”

“…….”

“……아내가 널 원한다면 다시 안게 해줄 수도 있어.”

두근…….

“진심이다. 물론 넉 달 전처럼 그저 몸뿐이긴 하겠지만.”

“아아, 잘난 체 좀 하지 마라! 정말로 한 대 치고 싶으니까! 선생님이 원하지 않을 거라는 걸 뻔히 알고서 하는 소리잖아! 아니면 교활하게 또 날 떠보는 거냐?”

“……진심이라고 했지? 더 이상 네게 질투는 안 해. 안 하기로 했다. 네가 내 영역에 들어온 오늘부턴 절대로.”

“하, 그거야말로 재미 더럽게 없군. 질투도 안 하는 연적이라니! 질투할 대상으로도 취급 않겠다는 소리 아닌가! 아주 배가 부르다 못해 신이 나셨구만. 엄청난 의처증 환자라고 소문이 자자하신 주제에!”

“…….”

한동안 정원을 향해 있던 남자의 몸이 이쪽으로 돌아섰다.

머루알처럼 새까만 동공이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굽어보고 있었다.

“……하루빨리 내 가족이 되길 바라, 김강원. 나는 가족에겐 질투를 하지 않아…….”

역시 배수진을 친 절체절명의 맹세였다. 창조주에 대한 거래이자 계약이었다. 결국 또 웃음을 물 수 없었다. 욕설을 뱉을 수도 없었다.

“……언젠간 가능해질지도 모르지…….”

마지못한 가능태의 대답에도 남자는 만족한 것 같았다. 담담한 표정을 서서히 덥혀오고 있는 것은 예의 그 부드러운 미소였다. 정말 밉살스러울 지경으로 잘생긴 남자였다.

“……참 아름다운 정원이야, 역시…… 아내가 많이 좋아했겠어.”

도로 등을 보인 채 정원으로 시선을 준 남자가 나지막하게 감탄을 흘렸다. 녹음이 한창인 어느 초여름 밤이었다.

“……우선 올해 기획이 잡혀 있는 전시 일정과 소속 작가들과의 계약 사항들부터 검토해보고 싶군요. 그게 끝나면 지난 3년간 마인 아트 단독으로 진행된 전시 기획 자료에다 여타 미술관들과 공동으로 출자된 기획전 관련 자료들도 살펴봐야 할 것 같고요. 일주일 내로 분석을 마칠 예정입니다. 자료 준비해주실 수 있겠죠, 서 실장님?”

“예, 감독님. 물론입니다. 출근 첫날이신데도 소문으로 듣던 대로 예외가 없으시네요. 하하, 직원들이 하나같이 기대가 많습니다. 정말 능력 있는 분이 오셨다고요.”

“마음에도 없는 겸손은 안 떨겠습니다. 능력은 있지만 그만큼 직원들을 많이 몰아치게 될 겁니다. 각오해주십시오.”

“하하하하, 예! 안 그래도 바짝 긴장하고 있습니다. 전임 감독님께선 선비 같으신 분이라 마인 아트의 행사들도 감독님을 따라 많이 얌전한 추세였지요. 솔직히 그간 재정 상태가 썩 좋지 않았고, 갤러리 명의도 자주 바뀌었으니까요. 그나마 문 사장님께서 인수하신 2001년부터 겨우 안정을 찾기 시작했지요. 이제 정말 뛰어나신 분을 감독님으로 모셨으니 앞으론 마인 아트 스페이스도 날아오를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저, 그럼 각 팀 직원들과의 개별 면담 일정은 어떻게 잡을까요?”

“하루에 한 팀씩 미팅을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시간은 오전이 좋겠고요. 정확한 일정은 서 실장님께서 해당 직원분들과 조율해주세요. 오늘 저녁에 있을 팀장님들과의 회식은 팀장 회의로 대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회식을 할 기회야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요. 우선 공적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시급합니다. 다들 일하는 스타일들도 알아야겠고요.”

“……여직원들이 꽤나 실망하겠네요.”

“……?”

“갤러리 현대의 김 선생님께서 우리 마인 아트의 감독으로 스카우트 되셨다는 걸 알고 다들 난리가 났었거든요. 오늘 보니, 매일 청바지에 후줄근한 티셔츠만 걸치고 다니던 친구들까지 하늘거리는 원피스로 성장(盛裝)을 했더만요. 솔직히 오늘 그대로 회식을 강행하셨더라면 꽤 피곤하실 것도 각오하셔야 했을 겁니다.”

“음, 아무래도 제가 일하는 스타일이 만천하에 드러날 때까진 회식을 자제해야겠군요.”

“예?”

“동료들과의 스캔들은 제 사전에 없기도 합니다만, 일단 제게 한번 들볶임을 당하고 나면 그 어떤 지순한 처녀들도 연애 감정 따윈 단숨에 날아가버리고 말죠. 잘 따라오는 체력 좋은 친구들만 귀여워해주는 타입이라서요. 그래선지 현대 쪽에서도 특히 여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답니다. 하하, 페미니스트인 줄 알았는데 실은 무대뽀 마초였다며 분통을 터트리는 친구도 꽤 여럿 봤습니다.”

그랬다. 곰 새끼 한 마리만 끝끝내 고집을 부렸었지. 눈물콧물 범벅이던 곰 새끼의 최후가 떠올라 피식 실소가 물렸다. 놈에 대한 아릿한 연민과 아픔까지도. 잘 추스르곤 있으려나…….

“하하하하, 그러셨습니까? 아무래도 소문은 빙산의 일각이었던 모양입니다, 감독님?! 무대뽀 마초시라니요! 하하하하…….”

전임 감독이 선비과(科)였다고 하더니 직원들도 대체로 선비과가 많은 모양이었다. 서정수라고 하는, 눈앞의 이 30대 후반 사내가 그 전형이었다. 사람 좋고 얌전하고 고지식한. 일반인의 사회에서라면 모를까, 창조적이고 도전적이다 못해 공격적이어야만 그나마 현상 유지라도 할 수 있는 예술계에서라면 그리 달가운 개성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소유주란 놈은 그림의 기역 자도 모르는 무식한 마초……. 직접 와서 들여다본 마인 아트는 상상 이상으로 갈 길이 먼 것 같은 동네였다.

띠리리리리. 막 서 실장이 나가고 얼마 후 인터폰이 울었다. 비서실이었다.

“네.”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감독님.]

“손님? 출근 첫날인데 벌써 약속이 돼 있었습니까?”

[아, 아뇨, 저기…… 그건 아니고…… 말씀드리면 아실 거라고 하셔서요. 장인환 작가님이시거든요. 사장님께서도 함께 와 계셔서…… 1층 야외 전시실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라고 사장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거든요…….]

두근…….

파일 케이스를 들고 있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순간적으로 사지에 힘이 풀린 때문이리라. 몇 번 깊게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언젠가는 만나야 하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몰아붙이리라곤 또 예상 못 한 자신이었다. 재촉할 생각은 없다더니, 이게 재촉이 아니면 무언가.

다시금 지극히 이기적인 남자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스쳐갔다. 하기야 그 인간 입장에선 이리 서둘러 들이대는 것이 자신에게 더 이로운 일이라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옳은 판단이라는 것도 자신 또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합리적인 이성과는 별개로 상처 입은 마음은 여전히 미적거리고 있었다. 아직은 아프다고. 아직은 너무나 아프고 아파,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다고…….

“……1층 야외 전시실이라면 조각 공원 말입니까?”

[예, 감독님. 본관 건물 뒤쪽에 있지요.]

“알겠습니다.”

인터폰을 끄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실제로 아프기라도 한 것마냥 쿡쿡 쑤시는 것 같은 심장 부위를 지그시 누르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 결론은 이미 났다. 그 지독했던 타락의 밤, 자신은 붕괴 직전의 자아를 도로 끌어안으며 선언하지 않았나.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잊지 않겠노라고. 이 생(生)이 다하도록, 아니, ‘영원’의 시간이 다하도록 결코 잊지 않겠노라고.

피해자는 없었다. 이 슬프고, 우습고, 또한 애틋한 세 남자의 ‘연애사’에 있어 더 이상 피해자는 없었다. 가해자 또한 한가지였다. 자신은 충분히, 원 없이 사랑을 했으며, 앞으로도 거듭 사랑을 해갈 터였다.

고통만을 빼버린 달콤한 것만으로 사랑이 온전해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고통스럽다 해서 버리는 것은 또한 이미 사랑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한가지임을, 나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황홀과 고통 양극단 모두를 끌어안겠다고 스스로와 운명 모두에게 선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은 황홀과 고통 모두를 기꺼이 끌어안는 것으로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냈다. 진짜 사랑을 했노라고, 또한 앞으로도 사랑하겠노라고 스스로와 세상과 전 우주를 향해 떳떳하게 선언할 수 있게 됐다.

피해자는 없었다. 피해자이길 거부해버렸기에, 가해자 또한 홀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우리는 그저 단지 조금 슬픈 사랑을 했을 뿐인 남자들이다. 또한 앞으로도 사랑을 해갈 남자들이다. 다만 앞으로는 좀 덜 아프도록, 서로를 좀 덜 상처 입히도록, 서로가 숨죽이고 조심하며 살필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빌어볼 뿐이었다.

여름이 한창인 녹음 한가운데에 연인이 서 있었다.

새하얀 반팔 Y셔츠에 블루진을 받쳐 입고, 검정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들어간 파란색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고 있는 연인은 언뜻 10대 소년처럼도 보였다. 하긴, 저 왜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몸뚱이 속에 깃든 것은 영원히 늙지 않을 순수 그 자체인 영혼이었다. 타협하지 않고, 두려움에 질리지도 않으며, 깊고 깊은 심연 그대로를 정직하게 직시하는 영혼. 백수의 제왕인 사자처럼 저 뛰어나고 비범한 영혼은 홀로 용감하게 바닥까지 걸어 내려갔다. 그토록 강인한 영혼이 아니었다면 지난 15년간의 저 혹독하고 무시무시한 운명을 온전히 짊어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넋은 완전히 부서졌을 것이며, 아니, 아예 이 자리에 서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터였다.

사랑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저리도 아름다운 영혼을. 저리도 용감한 영혼을. 세상 누구보다도 강인할 전사의 넋을!

10여 미터쯤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시선을 마주 안았다. 그저 하염없이 서로의 눈동자만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소슬한 미풍이 연인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미풍의 장난기였을까, 미동도 않던 연인이 가만히 웃음을 무는 게 보였다. 아름다운 이상으로 슬픈 미소였다. 슬픈 이상으로 지극히 평화로운 미소였다. 그제야 겨우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기운이 모였다.

한 발 한 발, 연인의 눈동자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갔다. 자신과 한가지로 연인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영혼에 새기기라도 할 듯 강하고, 또 강한 주시였다.

마침내 한 발 앞까지 다가가 서니 흐릿하게 연인의 체취가 풍겨왔다. 눈물겹도록 그리운 체취였다. 버릇처럼 불쑥 발기하는 성기에 가만히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런 스스로에게 저주의 욕설을 뱉지는 않았다. 몸뚱이의 욕망 또한 연인에의 사랑법 중 하나였으므로. 세상에 부도덕한 사랑이란 없었다. 그저 그것이 진짜 사랑이냐 아니냐의 판단만이 존재할 뿐.

손을 뻗어 연인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미풍에 흩어진 이마 위의 머리카락도 가만히 쓸어주었다. 햇빛이 눈이 부신지, 가늘게 뜬 눈꺼풀 위를 더듬더듬 어루만지며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연인은 그저 조용히 웃으며 그런 자신의 애무를 온전히 수용하고 있었다.

문득 연인의 손이 자신의 왼손을 잡아왔다. 흡사 어린애처럼 깍지를 끼더니 공원 한편에 놓여 있던 벤치로 자신을 이끌었다. 연인의 느릿하면서도 약간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에 보폭을 맞추며 조용히 따라가 연인의 옆에 앉았다. 자리에 앉고 나서도 연인은 잡은 손의 깍지를 풀지 않았다. 자신 또한 서로의 손바닥을 꼭 맞붙인 채 손가락에 힘을 주어 연인의 손을 품어 안았다. 아니, 연인의 전부를 품어 안았다.

벤치 맞은편으로 보이는, 제법 우아하고 세련되게 꾸며진 자그마한 조각 공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연인은 일절 말이 없었다. 여전히 고요한 미소를 품고서 가끔씩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자신의 손만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 지극히 평화로운 침묵에 자신 또한 더 이상 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니, 말로 전하지 않아도 서로는 충분히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햇빛은 눈이 부시고, 바람은 상쾌하고, 푸르른 녹음은 싱그러웠다. 그저 이대로 가만히 숨을 쉬는 자체가 너무나 행복하고 또 행복했다.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을 만큼, 이대로 영원의 죽음을 맞는다 해도 기꺼이 운명에 순응할 수 있으리만큼 완벽한 충만이 도래해 있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말없는 말로, 침묵의 고백을 했다. 연인이 말없는 말로, 침묵으로 대답을 주었다.

네, 김 선생님.

선생님을 사랑해서 많이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행복할 겁니다.

네.

그거 아세요?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는 사랑이 무언지도 모르고 죽었을 거예요.

네.

그러니 저 때문에 혹시라도 마음 아파하지는 마세요. 저는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여전히 선생님을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이 소중한 사랑이 영원히 제 곁을 떠나가지 않을 걸 아니까요.

네……. 네, 김 선생님.

사랑합니다.

네.

영원히 사랑합니다. 사랑할 겁니다.

네.

사랑해요.

네.

사랑해.

네.

사랑한다, 장인환.

……응…….

아주 많이, 너무 많이 사랑해. 알고 있지?

응.

영원히 사랑할 거다, 너만을. 너는 내 생의 유일한 연인이 될 거야.

응.

내 유일한 연인이고, 유일한 빛이고, 유일한 소울메이트이고, 유일한 예술이고, 그림이고, 영원이고, 신이고, 반려이고, 아내일 거야.

응.

슬퍼하진 않을 거지? 난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하니까. 믿어줄 거지, 인환아?

응, 믿어…… 진짜 믿고 있어…….

그래. 그러면 됐어. 나 때문에 더 이상 슬퍼하거나 아파하지 말고 네 연인에게로 온전히 돌아가. 내 사랑도 함께 가지고 가. 그러면 나도 영원히 네 행복과 함께인 거니까.

응.

행복하지?

응, 많이. 아주 많이…….

그래. 그렇게 계속 행복해야 해. 그래야 해, 인환아. 그래야 나도 지금처럼 영원히 행복할 테니까.

응.

…….

…….

…….

…….

‘영원’이 유성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살랑살랑 불어대는 미풍에 연인의 머리카락이 또 이마에 흐트러졌다. 손을 들어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콧등에 살짝 맺힌 땀방울도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닦아주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이 파고들어오는 달콤한 체취에 발기한 성기가 자꾸만 성을 내는 것도 마냥 나른하게 놀려주었다. 연인도 눈치채고 그저 가만히 웃어주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따가운 햇빛에 서로 가늘게 눈을 뜬 채 공원의 한적한 충만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꿈결 같은, 혹은 천국 같은 ‘영원’이 흐른 것 같았다. 멀리 길 끝에 남자의 형상이 보였다. 연인의 남자였다. 아마도 ‘영원히’ 연인의 ‘유일한’ 남자일 것이다.

남자의 고요한 눈길이 연인과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남자였다.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아마도 연인의 유일한 남자이기에 그네가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여겨지는 걸 게다.

그래, 가족이었다.

자신 또한 이미 저 남자의 가족인 모양이었다. 더 이상 질투가 일지 않는 걸 보면 그게 맞았다. 저 남자만 가족에게 질투를 하지 않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 또한 가족에겐 질투를 하지 않는 종류인 것 같았다. ‘하느님 맙소사!’였다. ‘세상은 요지경!’이었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던 자신이 이다지도 핏줄에 연연하는 놈이었을 줄은 미처 몰랐다고, 기막힌 자조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맞잡은 연인의 손을 살짝 끌어당기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서로의 땀으로 범벅이 돼 있는 손의 깍지를 비로소 풀어주며 연인을 마주 보았다. 연인을 남자에게 보내줄 시간이었다. 조용히 눈으로 이별을 말하자, 연인도 여전히 고요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잠깐 연인의 양어깨를 어루만지다가 가만히 품에 끌어안았다. 연인의 양팔도 자신의 목을 감아들이며 소중한 포옹을 주었다. 으스러트릴 것처럼 세게 죄었다가 곧 아기를 품듯 부드럽게 바꾸었다. 턱 끝을 스치는 연인의 정수리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추었다. 목덜미에 닿아 있던 연인의 입술도 자신의 목덜미에 어린애 같은 키스를 되풀이해주고 있었다. 문득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잠깐 동안 숨을 참아야 했다.

이윽고 포옹을 푼 다음, 그 남자가 있는 방향으로 연인을 살짝 밀어주었다. 연인은 자신이 미는 대로 두어 걸음 물러서서 잠시 자신을 건너다보았고, 곧 눈시울 가득 눈물을 만들어냈다. 발갛게 젖어드는 눈시울에도 불구하고 입가에 맺혀 있는 것은 여전한 미소였다. 기쁨이었다. 애정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자, 연인도 따라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을 돌려세우기 직전, 눈시울 가득 맺혔던 그것이 도로록 뺨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연인의 느릿하면서도 불안정한 발걸음이 빛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사랑해.

아무리 고백해도 물리지 않는 행복한 주문으로 연인을 배웅했다.

사랑한다, 장인환. 영원히 사랑할 거다, 너만을…….

벌써 남자의 품 안에 도착해 있던 연인이 문득 돌아보았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는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지고의 행복으로 충만해 있는 슬픈 얼굴이었다.

응, 강원아.

연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도 사랑해.

웃음기가 여전한 슬픈 입술이었다.

나도 널 영원히 사랑할 거야…….

남자의 양팔이 연인을 품 안에 도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뒤돌아선 연인도 남자의 등을 끌어안는 게 보였다. 얼굴을 남자의 늠름한 가슴팍에 푹 파묻은 채, 연인은 으스러져라 연인을 품고 있는 남자와 완벽한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 사랑스럽고도 또 사랑스러운 한 쌍이었다. 연인을 품은 채 한동안 미동도 않던 남자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건너다보았다.

고맙다.

말없는 말로, 남자가 침묵의 인사를 건넸다.

흥, 고마울 것까지야. 평생 긴장하며 살아야 할 거다. 옆에서 내내 감시하다 여차하면 다시 빼앗아 올 테니까.

말없는 말로, 자신도 침묵의 비아냥을 던져주었다.

남자가 빙긋 웃음을 주었다.

자신도 싱긋 웃어주었다.

연인을 어미닭처럼 품은 남자가 돌아서는 게 보였다. 둘인지 하나인지, 도무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 한 쌍이 빛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영원’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영원’과는 또 다를, 또한 소중하고 소중한 ‘영원’이었다. 소중하고 소중한,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됐어.

가만히 뇌까렸다.

이제 됐어. 다 이루어졌다…….

가만히 선언했다.

연인의 마지막 한마디는 더 이상의 보탬이 필요 없을 완벽한 구원이었다.

응, 강원아.

연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도 사랑해.

웃음기가 여전한 슬픈 입술이었다.

나도 널 영원히 사랑할 거야…….

남자를 향해 물었던 미소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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