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2004년 6월. 장인환(張仁歡)
“……괜찮은가?”
연인이 근심 어린 어조로 물어왔다. 아니, 실은 그저 위로에 가까운 달램의 목적으로 떨어진 한마디였을 것이다.
남자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손바닥으로 연신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다가 결국은 입술과 혀로 애무에 가까운 세수를 시켜준 연인이었다. 남자를 위해 흘리는 마지막이라는 걸 아는지, 바보스러울 정도로 눈물은 쉬이 멈추질 않았다. 기쁘고, 행복하고, 또한 슬프고도 안타까운 온갖 애틋한 감정들이 짭짤한 물줄기에 섞여 시원스레 토해지고 있었다. 인환이 그런 감정의 분출을 억제할 필요성을 못 느꼈듯이 연인 또한 섣불리 달래주지 않았고, 그저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냥한 스킨십을 통해 자연스레 진정되길 기다려주고 있었다. 마침내 눈물이 멈추자, 그제야 괜찮냐는 한마디를 던져준 연인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어주자, 따라쟁이 팔불출답게 금세 입술 끝을 휘며 웃음을 만들어냈다.
“……응, 괜찮지 물론. 당근 괜찮고말고. 김 선생님은 걱정 없어, 위야. 잘 극복하실 거야. 아니, 벌써 극복하신 거 같은 걸 뭐.”
“그래…….”
“……그러니까 이제 너도 더 이상은 겁먹을 필요 없어…… 알지? 이제 더는 우리가 벌 받을 일 안 생길 거야.”
“음.”
“그러니까 더는 바쁜 척하고 부러 집에 늦게 들어올 필요도 없는 거고.”
움찔.
“헤헤, 내가 다 믿는 줄 알았지? 정말로 바빠서 툭하면 자정 넘어서까지 야근해야 한다는 네 새빨간 거짓말 말야.”
“…….”
“9시, 10시까진 그렇다 쳐도 요 근래 며칠처럼 12시까지 넘기면 너무 심각하잖아. 그리고 넌 내가 곁에 없으면 심하게 금단 증상을 일으키곤 하는데, 그런 네가 일 때문에 매일 늦는다는 게 말이 돼? 정말로 일에 치일 지경으로 네가 무능력한 것도 아니고 말야.”
“…….”
“……나 안고 싶은 거 참느라고 그런 거잖아. 지칠 때까지 일하면 쫌 덜 안고 싶어질까 봐 잔머리 굴린 거야. 그치?”
“……바빴던 건 사실이다, 마누라.”
잠깐 굳어졌던 몸이 도로 자연스러워지며 다시금 천연덕스럽게 사기를 칠 준비를 하는 연인이었다. 그래도 자신의 느닷없는 기습 공격이 먹힌 모양인지, 귓불 근처가 발갛게 물드는 게 보였다. 자신의 얼굴을 양손바닥으로 감싸고 있던 팔이 스륵 내려가더니 고개마저 운전석을 향해 슬그머니 돌리고 있었다. 역시 시침 뚝 뗀 무표정이지만, 벌게진 귓불과 뺨 언저리를 보면 속으로는 엄청 당황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응, 그건 그렇지. 윤 실장님 얼굴이 요새 아주 확 피었는걸. 윤 실장님 같은 일 중독자는 네가 일하면 일할수록 엄청 더 좋아하니까 실제로 일이 많아지긴 했을 거야. 아무튼 그게 좋은 핑계가 됐던 것도 사실인 거 같고.”
“…….”
“……하지만 그래도 전부 다 사실은 아니잖아. 누굴 속이려 들어, 서방님.”
“…….”
“……하여간, 툭하면 나한테 거짓말하고 사기 치려는 버릇은 언제쯤이나 고치려나 몰라. 예전엔 그게 통했을지 몰라도 이젠 하나도 안 통한다는 거 모르나? 미간 찌푸리는 거 하나만 봐도 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인단 말이다, 바보.”
“…….”
“……다 끝났어, 위야…….”
“…….”
“……이제야말로 우리들 죄, 어느 정도는 다 갚은 거 같애.”
“…….”
“……어제 엄마가 꿈에 보였어.”
“…….”
“지지난 주 기일에 엄마 산소 갔던 날에도 안 보였었거든. 아직도 내게 많이 화나 있는 건가 싶어서 마음이 아팠는데, 근데 어젯밤 꿈에 나타나셔서 그러는 거야. 이제 안심하고 가서 고스톱이나 쳐야겠다고. 울 엄마 고스톱 치는 거 엄청 좋아했거든. 집에서도, 엄마 사무실에서도 틈만 나면 고스톱 치면서 놀고 그러셨어. 근데 그게 진짜 아무 걱정거리가 없으실 때나 그랬거든.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가끔씩 엄마 꿈을 꾸고 그랬는데, 그럴 때마다 엄만 늘 울고만 있었어. 불쌍한 내 새끼, 불쌍한 내 새끼 하면서…….”
“…….”
“……근데 어젯밤 꿈에 나타나선 뜬금없이 고스톱이나 쳐야겠다고 하시니깐 나도 좀 황당했지. 그저 엄마가 더 이상 울지 않으시니까 그것만으로도 넘 좋았는데, 깨나서 곰곰 생각해보니깐 그게 그런 뜻이더라고. 엄마가 이제 더는 내 걱정 안 하고 저승에서 편히 쉬시겠다는.”
“…….”
“……울 엄마는 그래…… 옛날부터 나 하나만 끔찍하게 사랑했으니까…… 나 하나만 행복하면 무조건 따라서 행복한 엄마였으니깐…… 그래서 내가 행복하면 그게 바로 엄마한테 효도하는 거라는 걸 아니깐…….”
연인의 팔이 와락 자신의 상반신을 끌어당겨 안았다. 연인의 목에 양팔을 둘러 자신도 연인을 꼭 안아주었다. 늠름한 품 안에 얼굴을 꼭 파묻은 채 부비부비를 하면서 웃었다. 꿈속에서 웃고 있던 엄마 얼굴이 눈에 선해 또 목이 메었지만 더는 울지 않기로 했다. 엄마가 원하는 게 바로 그런 거라는 걸 이젠 아니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이 행복해지는 거니깐. 더는 울지 않는 거니깐. 그게 엄마가 자신에게 원하는 유일한 효도 방법이니깐…….
“……그니깐 위야도 이제 더는 겁내지 마, 응? 울 엄마가 더는 겁내지 말라고, 안심해도 된다고 말하고 갔으니까. 알았지……?”
“…….”
“어어? 그렇다고 벌써 이렇게 되면 어떡하냐?”
연인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다짐을 주려는데 꼭 달라붙어 있던 하반신으로 무언가 딱딱한 게 감지되었다. 어느새 불쑥 발기해 있는 연인의 분신이었다. 기가 막히면서도, 또 그 단순한 맹목성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나머지 유쾌한 웃음이 물렸다.
“……진짜 간사하다, 위야의 이거. 두 달 동안이나 시침 뚝 떼고 순진한 척 내숭을 떨었으면서 갑자기 이래도 되시나요, 서방님?”
“…….”
“어럽쇼? 자꾸자꾸 커지네? 우와, 진짜진짜 간사해……!”
“…….”
‘서방님’ 소리에 또 완전히 흥분해서 아랫배를 꾹꾹 찌르기 시작한 연인의 분신에 비해 연인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함 그 자체였다. 여전히 자신의 상반신을 으스러져라 힘껏 껴안고는 있지만 격렬한 짐승의 욕망에 휩쓸리지도, 그렇다고 지난 두 달간처럼 욕망을 누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둥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하게, 서로가 한 몸인 사실이 안겨주는 사무치는 기쁨과 희열을 조용히 만끽할 따름이었다. 흡사 오래전에 결혼한 부부처럼, 아니, 실은 과거 수십 수백 년 전부터 늘 그래왔던 금슬 좋은 부부처럼,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지금 너한테 많이 안기고 싶은데 비행기 시간이 빠듯하지?”
연인의 고요에 전염된 자신의 목소리에도 다시금 진지함이 실렸다. 연인을 놀리긴 했지만, 지난 두 달간 연인이 벌인 처절한 욕망과의 사투를 자신이라고 모를 까닭이 없었다.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니, 설령 눈치를 채더라도 그다지 심각성을 못 느끼게끔 최대한 자연스레 행동한 연인이었다. 차라리 그것이 연인에겐 더 힘겨운 싸움이었다는 것을 인환 또한 얼마 전에야 겨우 자각했다. 부자연스럽게 내외를 하는 것보다 플라토닉한 중학생 연애를 하는 편이 연인에겐 더 고문이었을 거라는 걸(그 밤의 무시무시한 자위를 보고서야 겨우 눈치를 챘으니, 연인의 거짓말 퍼레이드가 이젠 하나도 안 통한다는 말도 실은 그저 허세에 불과할 터였다). 그런데도 자신은 ‘연인이 굳이 원하지 않는다면 평생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며 태평한 오해나 하고 있었다.
“……취소할까?”
담담하게 되묻는 연인에 또 기가 막혀 웃었다.
1박2일 예정의 일본 출장이었다. 그것도 아시아 경제인 연합회라는 매우 중요한 모임에 아선 그룹의 안 회장과 밀착 동행해야만 하는 일정이었다. 자신과의 섹스를 위해 그걸 태연하게 보이콧을 하겠다고 묻고 있었다. 무서운 건, 그게 연인의 본심이라는 점이었다. 자신이 ‘예스’라는 대꾸를 흘리는 즉시, 연인은 자신을 집에 데려다주고 바로 인천공항으로 뜨는 게 아니라 그대로 침실로 직행하리라는 점이었다. 또한 단언하건대, 적어도 3박4일 동안은 침실에서 나오지 않으리라는 점이었다. 그랬다. 자신의 대꾸는 연인을 분별이 유지되는 ‘인간’에서 맹목의 ‘야수’로 탈바꿈시키는 단 하나의 스위치가 될 터였다. 물론 그 반대의 스위치 또한.
연인의 품 안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빼꼼 들어 올렸다. 시선을 느낀 연인도 고개를 기울여 즉각 눈을 맞춰왔다. 머루알 같은 새까만 동공 속엔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뿐인 고요한 야수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절대적인 헌신과 복종과 숭배뿐인, 장인환교(敎) 열성 신도인 야수였다. 장인환 주인의 노예인 야수였다. 장인환 연인의 연인인 야수였다. 장인환 마누라의 남편인 야수였다. 그랬다. 자신의 것이었다. 전부 몽땅 다 자신의 소유인 남자였다. 괴물이었다.
“……바보…….”
생글생글, 중학생 웃음을 만들어냈다.
“……발광하지 않고 얌전히 다녀오면 그때 실컷 하게 해줄 거다, 뭐.”
쪼옥, 턱 끝에 중학생 키스를 날렸다. 따끔거리는 수염 자국이 아릿하게 입술 끝에 남았다.
기대로 번들거리던 음습한 야수의 눈이 순식간에 순진한 중학생 모드로 전환하는 것이 보였다. 흉흉하게 아랫배를 찔러오던 딱딱한 감촉이 차츰차츰 기세를 줄이기 시작하는 것도 느껴졌다. 무섭도록 즉각적인 반응에 온몸으로 전율이 치달았다. 설마 자신이 이다지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휘두르리라곤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역시 스위치였다. 정확하고, 확고하고, 또한 가차 없는 맹목의 스위치였다. 아니, 신이었다. 연인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전 우주의 지배자였다.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
“……키스하자, 서방님…….”
아랫배 위에서 잦아들던 야수의 흥분이 도로 불끈 부풀어 올랐다. 몸서리를 치며 야수의 목을 와락 끌어당겼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전부 내 것인, 맹목의 괴물이었다.
“……키스만…… 키스만…… 키스만이라니까, 우리 서방님…… 흡……!”
집어삼켜버릴 기세로 덮쳐든 야수의 입술에 할딱이며 열렬히 호응했다. 얌전히 인천공항으로 보내려면 절대 흥분시켜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순간 사무치는 사랑스러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연인만이 아니었다. 자신 또한 괴물이었다. 아니, 실은 연인보다 몇 배, 몇 십 배, 몇 천 배는 더 미쳐 있을 괴물이었다. 연인에게 환장한 괴물이었다.
헤어진 지 겨우 27시간밖에 안 됐는데도 미치도록 연인이 보고 싶었다. 이제 겨우 오후 2시 무렵. 저녁 비행기로나 도착한다니 아직도 일고여덟 시간은 더 기다려야만 연인을 볼 수 있을 터였다.
막 끊긴 휴대전화를 든 채 아직도 절반쯤이 더 남은 냉면 그릇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엄청 맛있게 먹었던 몇 분 전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연인과의 통화가 끊기는 것과 동시에 식욕 또한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했다.
서로의 사이에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는 심리적인 거리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서로 완벽하게 구원을 받고 난 이래, 처음으로 만 하루 이상을 떨어져 있게 된 때문이었을까? 유난히도 지루하고 초조하고 긴 기다림이었다. 그 27시간 동안, 무려 열여섯 번이나 전화통화를 했다면 말 다 한 거겠지. 연인 쪽에서 열한 번, 자신 쪽에선 다섯 번을 걸었다. 연인이 공식적인 일정을 소화하던 열네 시간 중엔 통화가 아예 불가능했으니, 정확히는 열세 시간 동안 열여섯 번의 통화를 한 셈이었다. 아, 그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잠들고, 또 동시에 깨어났던 네 시간 30분까지 빼면 진짜 아홉 시간 30분 동안에 열여섯 번의 통화를 했단 뜻이었다. 대략 평균 30분 간격으로 한 통화를 했다. 차라리 끊지 말고 계속 통화를 했으면 싶었지만, 수시로 사람들이 들락거리는데다 공적인 전화도 부지기수로 울리는 것 같은 연인 탓에 긴 통화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연인이 혼자인 시간대의 전부를 자신과의 통화가 차지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서로 굳이 할 얘기가 있어서 거는 것도 아니었다. 막상 걸면 서로 두근거리고, 흥분하고, 서로에 대한 그리움에 압도되기만 하는 탓에 너무나 시시콜콜해서 얘기할 거리조차 못 되는 얘기만 꺼내게 되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지금 뭐 하냐? 밥 먹는다. 메뉴는? 냉면. 맛이 어떠냐? 맛있어. 너는 뭐 해? 서류 보고 있다. 재미없겠네. 글쎄, 그런가. 다 먹고 뭐 할 거냐? 수영할 건데. 날이 꽤 덥지? 응. 돌아가면 함께 수영하자. 응. 식구들 다 휴가 주고 단둘이. 응. 둘이 벌거벗고. 응. 그러다 섹스도 하고. 응. 지금도 한 번 할까? 어떻게? 폰 섹스. 그, 그건……. 싫은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그럼 왜?, 거기 사람들 자주 왔다 갔다 한다며? 욕실까진 안 들어올 테니 상관없지. 전화도 엄청 온다며? 욕실에선 상관없다니까. 그, 그런가? 음, 어? 지금 무슨 소리야? 윤 실장 들어오는 소리. 앗, 그럼 끊어야겠다. 윤 실장 보내고 금방 다시 걸게. 응. 침실에 가서 기다려. 응. 옷 다 벗고, ……왜 대답 안 해? 그, 그냥 좀 창피해져서. 뭐가 창피하지?. 그냥. 그냥 뭐가? 우, 씨, 그냥 창피하다니까. 쿡쿡…… 다 벗고 기다리는 것 잊지 마. ……마누라? ……어…… 큰일이로군, 어? 지금 너무 흥분해서. 어어?! 윤 실장 빨리 내보내야겠다. 응? 일단 끊자. 응, 먼저 끊어. 너 먼저. 에이, 먼저 끊으라니깐. 그래. 끊었어? 아니. 먼저 끊는다며? 음. 에잇, 알았어! 내가 졌다! 그럼 끊는다? 음. 이따 전화해? 음. 뽀뽀. 쪽. 나두 뽀뽀 쪼…… 아, 방에 윤 실장 들어왔다 앗! 알았어! 끊어!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대충 그렇게 시시콜콜하다 못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내용들이었다.
막 전화를 끊고 나면 확실히 둘 다 미친 게 아닐까 싶은 이성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립고 그리워서 미치는 병이 있다면 연인과 자신은 그 병에 제대로 감염이 된 게 분명했다. 병에 걸려 서로에게 환장을 한 게 맞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이리도 철부지스럽고, 대책 없고, 맹목적일 수가 없었다. 이럼 안 되지 싶은 사람다운 분별도 든다. 그러나 다시금 홀로인 순간이 계속 이어지면 금방 또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안달이 나기 시작한다. 결국 둘 중 하나가 못 참고 휴대전화 번호를 누르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27시간이 지나갔다. 지나고 보니 어떻게 지나간 건지도 아리송했다. 그저 애타는 그리움과 목마름과 사랑스러움만 알알이 절실했다. 그러다 결국 보다 못한 운명이 심술을 부리게 된 모양이었다. 막 열여섯 번째 통화를 끊고 연인의 명령대로 ‘침실로 갈 것이냐, 말 것이냐’ 혹은 ‘벌거벗고 기다릴 것이냐, 말 것이냐’로 엄청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먹다 남은 냉면은 고대로 음식물 처리기 속으로 직행했음은 물론이었다. 오후 2시 23분 무렵이었다. 혜윤이의 명랑한 재잘거림이 집 전화기를 타고 날아든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연인에게만 홀릭하는 광기 어린 열정과 그리움들을 그나마 자제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의 등장이었다.
[선생님, 저요, 혜윤이요!]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천진한 목소리가 하늬바람처럼 청아하게 들렸다. 음습한 괴물의 광기조차 맑고 밝게 정화시켜주는 보살의 부적이나 다름없었다.
“응, 혜윤아!!! 오늘 날씨 참 덥지? 몸은 괜찮아?”
서로 호들갑스러우리만치 반가운 인사와 안부를 교환하고, 20여 분쯤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겨우 용건을 기억해낸 혜윤이가 특별 에스코트를 부탁했던 것이다. 목적지는 대학로 어디쯤에선가 열린다는 아마추어 만화 작가들의 작품 전시회였다. 요즘 만화가 지망생들로 이루어진 어느 아마추어 만화 동호회엘 들더니 그쪽 친구들과도 친밀한 교류를 시작한 혜윤이였다. 좀 전에도 그쪽 친구들과 통화를 했는데 거기서 전시회 소식을 접했단다. 단 하루뿐인 전시라서 꼭 오늘 가야만 한다나. 자신이 거절하면 혼자라도 가볼 생각이라고 하는데, 물론 안 될 말씀이었다. 나날이 건강을 회복해가고 있는 혜윤이지만 아직은 어딜 혼자 내보내는 것엔 두려움이 이는 인환이었다. 그건 다른 문 씨 집안 남자들도 같아서, 혜윤이가 외출할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번갈아가며 혜윤이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문 씨 집안 남자들이 정 시간을 내기 힘들 경우엔 부득이하게 경호원이라거나 운전기사들만 동행시키기도 했지만, 물론 그런 예는 극히 드물었다. 왜냐하면 다른 문 씨 집안 남자들이야 다들 나름대로의 직장에 매인 몸이었지만, 자신은 달랐기 때문이었다. 화가라는 직업만큼 나름대로 프리한 직업이 있겠는가(혜윤이에 관해서라면 열일도 제쳐두고 달려갈 각오가 돼 있는 자신이기에 요즘은 더더욱 프리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문답무용! 연희동 집에 총알처럼 달려갈 것을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띠리리리리∼∼∼∼.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휴대전화가 울었다. 연인이었다. 몇 분 전, 침실에 들어가 알몸으로 기다릴까 말까 나름대로 심각한 고뇌를 안겨준 이답게, 어딘가 노곤하게 풀어진 매혹의 중저음이 유혹하듯 귓전을 파고들고 있었다.
“지금 나가야 돼, 위야!”
다짜고짜 선전 포고부터 던졌다. 거듭 연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간 혜윤이와의 약속을 보이콧하고 싶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조용해진 수화기 너머의 눈치를 살피다가 자초지종을 고했다. 얘기가 끝나고도 한동안 대꾸가 없는 걸 보니 연인도 갈등하고 있는 게 뻔했다. 자신이 에스코트를 안 해주면 혼자 나가겠다는 누이도 걱정이고, 자신이 따라 나가버리면 어제와 오늘 하루 종일 이어진 달콤한 전화 통화는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연인 또한 자신 못지않을 문 씨 집안 남자였다. 지난 두 달간, 이런 소리 없는 전쟁에서 승자는 항상 혜윤이였다. 지금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그럼 집엔 언제쯤 들어오나?]
한결 딱딱해진 어조가 수화기를 타고 건너왔다. 포기는 하면서도 섭섭한 심사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도 이리 안타까운데 자신의 팔불출 괴물은 더할 것이다.
“……음, 아무래도 저녁때는 지나야겠지? 그래도 너 오기 전까지는 도착해 있을 거야. 염려 마, 위야.”
[가능하면 일찍 돌려보내고 와. 사람 붐비는 데 오래 나가 있는 것도 안 좋아.]
“응, 그럴게.”
[휴대전화도 꼭 챙기고.]
“응. 근데 아무래도 잘 못 받을 거야, 위야. 시끄러워서 벨소리를 듣기 힘들 테니까. 진동 해놔도 난 잘 못 느끼잖아.”
[그래도 갖고 나가. 못 받으면 네 쪽에서 다시 하면 되잖나.]
역시 강적. 그렇게까지 나온다면야 자신도 더 이상 변명할 말이 없다.
“헤헤, 알았어. 그럴게.”
[끊어.]
“응.”
[끊으라니까.]
“응.”
[…….]
“…….”
[…….]
“…….”
[……젠장. 알았다. 먼저 끊을게. 뽀뽀.]
“……쪼옥…….”
[…….]
“……나두…….”
[쪽!]
뚜우우…….
끊긴 휴대전화를 또 한참 동안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못 참고 연인의 뽀뽀가 전해진 수화구에 다시 긴 뽀뽀를 남기는 것으로 애틋한 미련을 잘라냈다. 얼른 돌아와, 얼른……. 지난 27시간 내내 주문처럼 뇌까린 기원도 잊지 않았다.
10대와 20대 초반의 어린 아가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비좁은 공간을 혜윤이를 이끌고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행사가 열리고 있는 곳은 혜화동에 있는 디자인포장센터 전시실이었다.
막상 도착해서 보니, 직접 그린 작품들을 전시하는 전시회가 아니라 아마추어 만화가 지망생들이 만든 작품집들을 인쇄해 판매하는 일종의 판매전이었다. 만화라면 뭐든 불을 켜는 혜윤이답게 지갑을 탈탈 털어 수십 종의 작품집들을 구입했고, 그것은 곧 어마어마한 양의 귀찮은 짐으로 화했다. 다행히 홍 기사를 대동하고 갔기에 망정이지, 대중교통을 이용했다면 큰 낭패를 봤을 거라고 가슴을 쓸어내린 인환이었다. 전시회가 아니어선지, 일단 책을 구입한 후엔 달리 시간을 때울 일도 없었다. 작품집을 챙겨 넣은 쇼핑백들을 몽땅 홍 기사에게 던져주고, 행사장 근처 카페에 들어가 지친 몸에도 잠깐의 휴식을 주었다. 확실히 복잡한 곳에서 수많은 인파에 부대끼다 보니 혜윤이도 몹시 지치는 모양이었다. 다른 날 같으면 나온 김에 여기저기 구경을 하러 다니느라 바빴을 텐데, 오늘은 그냥 일찍 집으로 가자고 했다. 물론, 집에 가서 작품집들을 구경할 기대에 부풀어 있는 것도 빠른 귀가의 한 원인이었겠지만.
막 차가 혜화동을 벗어날 무렵, 휘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연희동 집으로 했다가 다시 삼청동 집으로, 연달아 자신의 휴대전화로 ‘혜윤이 찾아 삼만 리’가 이어진 모양이었다. 용건은 오늘 저녁 연희동 집에 또 이 의원의 중요한 손님이 오니, 혜윤이와 휘야는 방배동 집에서 주말인 오늘과 휴일을 보내고 일요일 저녁에나 연희동으로 돌아가자는 얘기였다. 퇴근할 때 픽업 할 수 있게 준비하라는 말을 전하려 했는데 마침 외출 중이라 인환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이 의원과 연희동 손님, 그리고 혜윤이와 휘야가 외박을 해야만 하는 상황. 번개처럼 눈치가 스쳐갔다. 혜윤이가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어 상황을 슬쩍 둘러말하고는 있었으나, 못 알아들을 인환도, 또 못 알아들으리라 여길 휘야도 아니었다. 오늘로 이미 두 번째였다. 연희동에 찾아오는 이 의원의 중요한 손님 때문에 휘야와 혜윤이가 방배동 집에서 숙박을 하게 되는 것은.
이 의원과 김성준의 관계가 연인에게까지 알려지고 얼마 후, 문 씨 집안 남자들의 가족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아직 혜윤이에게까지 알리는 것은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혜윤이를 위해 신중을 기하자는 중론도 모였다. 연희동 집과 방배동 집 모두를 세간의 눈을 피한 두 사람만의 신혼집으로 번갈아 사용하자는 데도 모두 동의했다. 워낙 두 사람 다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던 장소라, 새집을 마련하는 것보다는 세간의 의심을 훨씬 줄일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중 어느 한 집만을 택해 둘이 동거에 들어가는 것도 현재로선 매우 위험했기에, 이처럼 약간 불편하더라도 두 집을 번갈아 사용하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다만 방배동 집을 사용할 때에는 원래 비어 있는 집이니 문제가 없었지만, 연희동 집을 쓸 때에는 이렇게 혜윤이와 휘야가 졸지에 미아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는 애로 사항이 하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사태를 근심 중에도 무척이나 재미있게 생각하는 휘야나, 방배동 집도 ‘우리 집’, 연희동 집도 ‘우리 집’, 삼청동 집도 ‘우리 집’이라는, 매사 신나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인 혜윤이에게 이런 미아 신세가 귀찮다거나 불편하게 다가갈 턱은 조금도 없었다. 마침 혜윤이를 집에 데려다주려던 참이니 그대로 방향을 돌려 방배동으로 가겠다고 하고 휘야의 전화를 끊었다.
방배동 집은 자신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홍 기사에겐 제법 익숙한 길인 모양이었다. 차가 혜화동을 출발한 지 30여 분 만에 방배동으로 접어들었고, 무슨 달동네를 오르는 것처럼 심하게 경사가 진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니 한눈에 보기에도 초호화 빌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서래마을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시야를 가리지 않는 나지막하면서도 화려한 주택들이었고, 한국어와 프랑스어를 동시에 사용한 간판들이 달린 상가들도 이국적이었다. 인적이 드문 거리는 맑은 공기와 상큼한 풀냄새로 호젓하게 감싸여 있었다. 삼청동만큼이나 서울 같지 않은 서울이라는 느낌을 주는 고급 주택가 같았다. 얼핏 방배동 집이 삼청동 집 못지않은 호사스러운 주택이라는 소리를 들은 기억도 그제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업상 바이어들의 접대용으로 구입했다는 연인의 얘기로 미루어 일종의 홍보용 주택인 셈이었다. 과연, 빌라촌으로 접어든 지 몇 분 후에 홍 기사가 차를 세운 연인의 또 다른 개인 주택은 웬만한 상류층 사람들도 압도되기에 충분한 210평짜리 초호화 3층 빌라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매매 가격만 해도 25억 원대를 호가한다고 했다.
첨단 지문인식기로 대문을 열고 그야말로 제집처럼 척척 안으로 들어서는 혜윤이를 따라 인환도, 그리고 만화 작품집이 가득 들어찬 쇼핑백들을 양손에 한가득 움켜쥔 홍 기사도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세련되게 가꿔진 아담한 정원이며, 초현대식으로 지어진 3층 건물의 외양이며, 확실히 집 안 구석구석 어디를 살펴봐도 25억 원이라는 값어치쯤은 충분히 할 만큼 완벽하게 지어진 집인 것 같긴 하다고 속으로 감탄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홍 기사 얘기를 들으니 이곳 빌라는 프라이버시 유지를 위해 상주 고용인을 두지 않는 대신 첨단 경비 시스템과 일주일에 두 번 와서 청소와 요리 등 여러 가지 관리를 해주는 용역 업체의 특별 관리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1년 중 대부분은 빈집이라는 집의 쓰임새답지 않게 그리 황량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뭐랄까, 알게 모르게 집주인의 정성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실은 대단히 집을 아끼기 때문에 외려 사람들을 잘 들이지 않는 게 아닐까 의심마저 드는, 묘한 철저함과 치밀함이 저택 곳곳에 배어 있었다. 흡사 무슨 교회나 성전 같은 느낌이랄까?
역시 지문 인식기로 현관문을 연 혜윤이가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 홍 기사만큼은 아니지만 여러 번 방배동 집에 머물곤 한 탓인지, 혜윤이는 손님처럼 조심스러운 인환과는 달리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혜윤이가 신발을 벗고 들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안의 음료수를 꺼낸 일이었다. 확실히 제집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런 혜윤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인환의 조심스러움도 어느 정도는 누그러져서 본격적으로 집 안 구경에 나섰다. 이왕 들른 김에 저녁 식사도 하고 가라는 혜윤이의 어리광도 스스럼없음에 기름을 부었다. 휘야도 야근을 하고 늦게 들어오는 탓에 혼자 먹어야 하는 게 싫다나. 하긴 시계를 보니 어느새 5시 50분이었다. 연인도 밤늦게나 도착할 테니 차라리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 집엘 가면 연인의 귀가만 초조하게 기다리는 병적인 그리움도 어느 정도는 다스려질 터였다. 혜윤이를 따라 외출하고 나서 연인을 생각하는 일도 줄어든 것 같았고, 시간도 더 빨리 가는 느낌이 드는 걸 보면 확실히 그게 더 현명할 것 같았다.
혜윤이는 자기 방으로 가 잠깐 쉬면서 만화책을 보다가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했고, 홍 기사도 따로 머무는 방이 있는지, 시킬 일이 있으면 부르라는 말을 남기고 2층으로 사라졌다. 그때부터였다. 인환의 방배동 집 안 탐험이 시작된 것은. 혜윤이의 은근히 호기심을 부추기는 발언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3층은 순전히 연인만의 공간이라고 했다. 사업상의 접대도 전부 1층에서 이루어졌고, 혜윤이나 휘야, 그리고 이 의원과 김성준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주침실도 1층에 있었다. 2층은 파티가 있을 때 방문객들의 숙소로 쓰이거나 회사 직원들과 고용인들이 머물 때 임시 숙소로 사용하는 손님방들이 다섯 개가 있었고, 사무 공간 겸 직원 회의 공간으로 쓰인다는 넓은 서재 외에 당구대와 운동기구가 설치돼 있는 휴게실도 있었다. 남은 3층 전부가 연인만의 개인 공간이라고 했는데, 연인이 혜윤이는 물론, 방배동 집을 들락거리는 다른 문 씨 집안 남자들도 3층만은 되도록 접근하지 말아야 할 신성 불가침 공간으로 못을 박았다고 한다. 그러나 혜윤이가 누군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못 말리는 호기심의 소유자가 아닌가 말이다. 어느 날 연인 몰래 3층으로 올라가 샅샅이 탐색을 했고, 그제야 연인의 접근 금지 명령을 이해했다나. 인환 자신도 가서 보면 많이 놀랄 거라고, 개구쟁이처럼 눈을 반짝거리는 통에 한껏 호기심이 불타올랐다. 연인에게만 해당하는 자신의 스토커 기질이 급상승하고 말았음은 물론이었다.
막 3층으로 올라가려는데 마침 또 휴대전화가 울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발신자 표시 액정에 뜬 연인의 이름에 기절초풍해선 휴대전화를 매너 모드로 전환하고 연인의 전화까지 씹어버린 자신이었다. 보니 부재중 통화만 그사이 무려 네 번, 전부 연인의 휴대전화로부터였다. 시끄러워서 잘 받지 못할 거라고 미리 언질을 주었으니 연인도 그리 걱정은 하지 않을 거라고, 3층 스토커질을 끝낸 후엔 제 쪽에서 도로 걸 테니 별 문제는 없을 거라고 흐뭇하게 뇌까린 자신이었다.
3층에 올라와 복도 끝에 섰을 때, 처음엔 1층과 2층의 다른 공간들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한 인환이었다. 방문의 숫자는 모두 세 개. 1층과 2층에 비해 두 배는 더 작을 개수가 짐작케 하듯 그 3개의 방은 1층과 2층의 방 크기에 비해 모두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것 같았다. 아마도 침실이나 손님용 방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어 넓게 트인 공간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 외엔 딱히 특별하다는 인상은 들지 않았다. 아래층과 거의 같은 방식의 실내 장식이 돼 있는 복도와 방문의 모양새 때문이었을 것이다. 맨 처음 보이던 방문 안으로 들어섰을 땐 그러한 판단이 더 강해졌다.
유독 커다란 주침실이었다. 30여 평쯤은 될 공간에 킹사이즈를 두 개 이어붙인 크기의 초대형 침대가 눈에 띄었을 뿐, 나머지 가구들은 침실에서 흔히 볼 수 있은 그런 가구들이었다. 주침실에 딸린 드레스 룸이나 욕실도 삼청동의 집과 별다름이 없어 보였다. 가끔 본 기억이 있는 연인의 옷가지 몇몇이 눈에 띄었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최고급 슈트 세트와 평상복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드레스 룸도, 월풀 욕조가 딸린 최고급 욕실도 물론 한가지였다.
도로 3층 복도로 나와 남은 두 개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다리도 좀 피곤한 것 같았고, 주침실의 평범함이 피크로 치솟았던 스토커적 호기심을 많이 순화해주어선지 그냥 이대로 내려갈까 하는 유혹을 받았다. 그래도 올라온 김에 다 보고 내려가자는 마지막 결심이 승리를 거둔 덕분에 두 번째 방을 열었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인환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맞은편 벽에 엄마가 있었다. 아니, 엄마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폭이 1미터쯤은 될 장방형의 사진 액자에 담긴, 돌아가시기 3년 전쯤엔가 찍어둔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평창동 집 거실 콘솔 위에 오밀조밀 모여 있던 수많은 사진 액자들 중 하나였던 사진이었다. 우선은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에 충격을 받았고, 다음 순간엔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엄청난 크기로 확대된 그 크기에 놀라야 했다. 어떻게 저게 저기에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은 얼핏 스쳤다가 도로 사라졌다. 더 놀랄 만한 사진들이 그 액자 옆에도 줄줄이 걸려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랬다. 그 방은 일종의 갤러리였다. 그림이 걸린 갤러리가 아닌, 가족사진 액자들로 사방 벽면이 도배가 돼 있다는 점이 여타 평범한 갤러리들과는 다른 점이랄까. 50여 평은 될 커다란 공간엔 가구라곤 일절 보이지 않았다. 단지, 보통의 갤러리 전시실처럼 방 안 한가운데에 4인용의 커다란 소파 하나와 소파 테이블 하나만이 마치 쉬어가면서 천천히 관람하라는 듯, 휴식 공간처럼 얌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신은 물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얼굴들이 거기 있었다.
엄마, 아버지, 김천댁 아줌마, 오 기사 아저씨 내외, 초중고교 때의 친구들, 수학여행과 소풍 사진들, 어색하고 촌스러운 졸업 앨범 사진들, 대학 동아리 친구들, 오주희를 비롯한 선 화랑 동료들, 하다못해 미메시스의 마해영과 손 사장의 사진들도 있었다. 엄마와 아버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얼굴들은 인환도 함께 찍은 단체 사진들 속에 포함돼 있는 얼굴들이었다. 자신의 것은 하다못해 백일과 돌 기념사진은 물론, 한 살 때쯤인가 완전 벌거벗고 찍은 아가 때 사진까지도 끼어 있었다. 자신의 지난 삶의 궤적들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인화돼 있는 그것들이 크고 작은 액자들 속에 담긴 채 사방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개중엔 요 1년 남짓 동안 찍힌 것 같은 사진들도 꽤 포함돼 있었는데, 마인 아트 공모전 시상식 때 찍힌 사진과, 그 남자와 함께 찍은 개인전 때 사진, 또 지난해 생일 파티 때 풍선 더미 속에 푹 잠긴 채 찍힌 알몸 사진에다 연인과 함께 찍은 웨딩 사진들이 그것이었다.
도대체 저것들을 다 어떻게……. 멍한 의식의 틈을 비집고 그 하나의 의문만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머리에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한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의 기록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진들은 자신에게도 없는 사진들이었다. 당연했다. 자신이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사기를 당한 엄마는 평창동 집은 물론 대부분의 재산을 압류당한 채 거리로 내몰려야 했다. 경매로 넘어간 집이며 사무실에서 무언가를 건져내볼 틈도 없이 그대로 쓰러져버린 엄마였다. 배다른 형들의 마지못한 친절로 병원에 입원해 암 투병에 들어갔지만 채 두 달도 못 버티고 그대로 하늘로 올라간 터였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보듬어야 했을 자신은 수차례에 걸친 자살 시도 끝에 공주 보호 감호소에서 집중 치료를 받고 있었다. 엄마도, 자신도 두 사람의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평창동에서 무언가를 지켜낼 여력이란 단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었다. 그것이 1995년도 중반경에 닥친 비극이었다.
아아, 그랬다. 저것들은 모두 평창동 집에 있어야 할 흔적들이었다. 이젠 누가 살고 있는지, 아니, 이미 허물려 다른 새로운 건물이 지어졌는지도 알 수 없는, 엄마와 자신의, 혹은 가끔씩 걸음 하던 늙은 아버지의 추억이 고스란히 잠자고 있을 평창동 집의 유물이었다.
저걸 도대체 다 어디서, 어떻게 구했단 말인가. 아니, 저것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자체부터가 기적 같았다. 남아 있는 것도 기적이고, 그것이 연인의 수중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일 터였다.
사위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손목시계를 살피니 저녁 7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제야 자각이 되었다. 자신은 한 시간 가까이나 벽에 걸린 사진들만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혜윤이가 식사를 준비하는지 음식 냄새가 흐릿하게 퍼지고 있었다. 앉아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복도로 걸어 나왔다. 남은 한 방은 그저 확인 차원이었다. 어쩐지 알 수 있었다. 그 방에도 분명 자신의 자취가 있을 터였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아, 그럼 그렇지. 빙긋 웃음을 물곤 역시 50여 평쯤 될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역시 또 다른 ‘갤러리’였다. 다만 앞서의 갤러리와 다른 점이라면, 벽에 걸려 있는 액자들이 자신의 진짜 그림이라는 것과 방 안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진열대 위에 담겨 있는 것이 자신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물건들이라는 점이었다.
초등학교 때 연습하던 단소, 책장이 너덜너덜할 때까지 읽었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책, 쾌걸 조로, 몽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 등등의 동화책, 모교들인 송림중학교와 우신고등학교의 촌스러운 교복과 체육복들, 대학 들어갈 때까지 아껴 사용했던 참나무 원목으로 만든 이젤, 팔레트, 수십여 권이나 될 법한 16철 크로키북, 십여 권에 이르는 유치원, 초중고 시절 일기장과 다이어리들, 각 학년마다 받아왔던 성적표들, 그림 대회 때 받은 상장들, 역시 초중고교와 대학 졸업 앨범들, 갖가지 미술 관련 전문 원서들, 초보 화가 시절의 신문 기사 스크랩들, 인터뷰 기사가 실린 잡지들, 개인전 전시회 입장권들, 당시에 새겼던 명함들, 젊은 시절 애용하던 빨간색 헌팅캡과 블랙 진, 핑크 재킷, 그리고 샤넬 옴므의 까만색 가죽 재킷 같은 멋쟁이 옷들, 구찌 선글라스와 스니커즈와 구두, 부츠들, 그리고 먼저 방에서 보았던 사진들의 원본일 크고 작은 사진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 엄마의 보물 제 1호였던 자신의 앨범들…….
저 특별한 갤러리들을 홀린 듯 관람하는 동안, 인환의 의식은 천천히 과거의 시간으로 역주행하고 있었다.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의 갈피갈피마다 툭툭 튀어나오며 오롯이 그네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인생이건만, 전혀 생면부지의 타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습고, 사랑스럽고, 애틋하고, 유쾌하고, 또한 애잔했다. 괜찮았다. 그것도 썩 괜찮은 한 인간의 소박한 인생이었다. 많이 이상한 괴물인 줄만 알았는데 가만 살펴보니 아니었다. 그저 조금 약하고, 조금 재능이 넘치고, 또 조금 사랑스러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인간이었다. 다만 그저 사랑을 했을 뿐이었다. 조금 힘든 사랑을 했을 뿐인 남자였다. 아니, 제법 꽤나 많이 힘든 사랑을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감당해내지 못해 흔들리기도 하고, 미치기도 하고, 사람도 납치하고, 죽이고, 마침내 절망의 심연 아래로 아득히 떨어져 내리기도 했던, 한때 괴물이기도 했던 인간이었다. 그래, ‘인간’이었다. 자신 또한 사랑받아 마땅한, 세상에 무수히 널리고 널린 평범한 인간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인간’이었다. 한때 괴물일 수도 있으나 영원히 괴물일 수는 없는, 아니, 궁극엔 어느 한순간도 괴물일 순 없는 존엄한 인간이었다. 아무리 사방이 어두워도, 심연이 깊어도, 영원히 괴물로 살다가 죽을 뿐일 것 같은 비참함뿐이어도, 그건 그저 인생이라는 만화경이 보여주는 순간의 미혹일 뿐 실재가 아니었다. 본래 인간이 타고난 지고의 존엄성만은 그 어떤 추악한 만화경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둠의 한가운데에서도 구원의 가능성은 도처에 남아 있었다. 운명의 자비로운 미소는, 신의 은총은, 그리도 무조건적인 것이었다. 자신이란 ‘인간’의 존재가 그 증거였다. 자신이라는 ‘괴물’의 존재가 그 산 표본이었다. 결코 용서받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괴물’은 도로 ‘인간’이 되었다. 운명의, 혹은 신의 무조건적이고 완전무결한 사랑과 은총에 힘입어 다시 ‘인간’이 되었다. 아니,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인간’일 뿐이었다. 그런 자신의 존재가 이다지도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뿌듯할 수가 없었다.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다지도 깊은 사랑을 보내준 연인에게 감사했다. 지고하고 존엄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전부 그 발아래 바치고 싶을 만큼 감사했다. 웃으며 울며, 복받치는 감동과 사무치는 희열에 떨며 지고의 사랑을 보냈다.
무릎을 꿇고, 허벅지를 바닥에 붙이고, 배와 가슴과 양팔을 쭉 앞으로 뻗어 바닥에 붙였다. 턱을 대고 코를 붙이고 이어 이마까지 바닥에 파묻었다. 오체투지였다. 그것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때 ‘괴물’이었던, 그리고 또한 여전히 ‘괴물’임에도 또한 존엄한 ‘인간’이기도 한 자신의 연인에게 대한 찬사였다. 헌신이었다. 영원을 향한 맹세였다.
“……쫌 놀라셨죠, 선생님……?”
언제 들어왔는지 자신의 ‘은총’이 옆에서 말을 걸고 있었다. 밝고 쾌활한, 온통 빛뿐인 자신들의 누이였다.
“……저두 많이 놀랐어요. 휘야 오빠도, 윤열이 오빠도, 성준 오빠도 전부 보고 많이 놀랐대요. 3층 방문들이 그나마 이렇게 잠겨 있지 않게 된 것도 거의 최근이라고 했거든요.”
“…….”
“……선생님이 그 미술 하시는 분 댁에 가 계시는 동안 위야 오빤 거의 여기서 지내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3층에도 올라올 수가 있었는데…… 암튼 휘야 오빠랑 다들 그때야 알았대요.”
“…….”
“……위야 오빠가 선생님을 참 많이 사랑하는 줄은 다들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고요. 다들 많이 걱정하고 슬퍼했었대요. 이렇게 선생님을 사랑했는데도 우리들 때문에 선생님을 버린 거라고요. 위야 오빠가 그렇게 아픈 것도 모르고 휘야 오빤 호모라고 욕하고, 대들고, 반항하고…… 위야 오빠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지 하나도 몰라준 게 너무 후회스럽다고 하면서 펑펑 울었어요. 옛날로 되돌아가고 싶다고요. 그럼 이렇게 후회스럽지 않게 선생님한테도 엄청 잘해드리고, 위야 오빠가 어리석은 결정을 하려고 하면 결사반대해서 되돌려놓을 거라고요.”
“…….”
“……헤헤, 근데 그땐 선생님께서 그 미술 하시는 분 댁에 가 계실 때니까요. 그땐 다들 너무나 괴로워했지만, 이제 선생님께서 우리들 옆에 계신걸요. 다신 그렇게 슬퍼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쵸?”
“…….”
“……선생님?”
“…….”
“……헤헤, 울 선생님 넘 감동하셨나 부다. 또 막 우시나 봐요…….”
“…….”
“……식사 안 하세요? 혜윤이가 맛있는 해물찌개 해놨는데…….”
“…….”
“……좀 전에 위야 오빠한테서 전화 왔걸랑요. 계속 휴대전화 안 받으신다구 해서 3층 방에 계신다고 했어요. 오빠가 공항에 도착하면 여기로 바로 온대요. 늦어서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고 간다고요. 그러니깐 선생님도 여기서 기다리시라고 전해달랬어요. 저녁밥도 꼭 먹이라고 또 얼마나 잔소리를 하던지…….”
“…….”
“……어어, 진짜 자꾸 넘 우시면 안 되는데……? 또 눈 퉁퉁 부으면 위야 오빠가 삐지는데…… 그거 모르시죠? 휘야 오빠랑 제가 우리 선생님 울게 함 위야 오빠가 은근히 삐지는 거요? 기쁘게 해드린 건데두 은근히 심술부리고 그래요…… 너무 자극하지 말라구,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데요…… 어쩔 땐 쫌 섭섭한 생각도 든다니깐요? 위야 오빠의 제 1순위가 선생님이신 건 알지만, 그래두 선생님만 넘 편애하는 거 같아서 혜윤인 쫌 샘나걸랑요…….”
“…….”
“하여간 세상에서 제일가는 애처가에 공처가가 바로 우리 위야 오빠인 거 같아요. 저 다치기 전엔 울 위야 오빠, 무척 냉정하구 거만한 남자인 줄로만 알았거든요? 특히 여자들한테는요. 신애 언니랑 결혼한다구 할 때에도 거의 그랬기 때문에…… 근데 선생님 챙기는 거 보니깐 진짜 장난 아니에요. 완전 팔불출이 따로 없어요. 히히, 그래서 쫌 멋은 없어졌어요. 예전엔 꼭 만화 주인공 같았는데 요즘은 그냥 평범한 아저씨처럼 보인다니깐요. 제 고등학교 때 친구들한테 이런 얘길 하면 말도 안 된다구 절 구박하지만요. 걔들이 다 울 위야 오빠 팬이거든요.”
“…….”
“……네? 그니깐 이제 그만 우시구 내려가셔서 함께 밥 먹어요…… 저 선생님 밥 꼭 드시게 한다구 위야 오빠한테 약속했단 말예요. 네? 빨리요, 선생님…….”
“……나…… 중에 먹을게, 혜윤아…… 지, 지금은…….”
“……네?”
“……가…… 가슴이 꽉 막혀서 먹으면 체할 거야. 나 위 안 좋은 거 알지? 잔칫날에도 다 토한 거 봤잖아. 조금 쉬었다가 내려갈게. 아, 아니, 그냥 위야 오면 내려가서 함께 먹을게…….”
“……그치만 계속 우실 거잖아요…….”
“……아냐, 안 울어…… 울다가 그쳤어…….”
“…….”
“……진짜야.”
“……근데 왜 계속 그렇게 엎드려 계세요?”
“……콧물도 나와서 너 보기 창피해서.”
“네? 우히히히, 그런 거예요? 전 또, 괜히 쫄았잖아요. 울 선생님 또 울린 건 줄 알구요.”
“……응, 그러니까 내려가봐. 홍 기사 아저씨도 불러서 먼저 먹으렴. 휘야 군은 많이 늦는대?”
“요즘 9시 넘어서야 들어와요. 적응하느라 정신없나 봐요.”
“……너무 무리하다 건강 해치면 안 되는데…….”
“우헤헤헤, 휘야 오빠가요? 1년에 감기 한 번도 잘 안 걸리는데요? 피곤하다면서도 밥을 얼마나 많이 먹는데요? 하루에 밥솥 반은 해치울걸요?”
“……건강하면 좋은 거지…….”
“……요기요, 선생님.”
“……?”
혜윤이가 귓불 근처에 무언가를 갖다댔고, 손을 뻗어 만져보니 손수건이었다.
“먼저 내려갈게요. 콧물도 닦으시고 천천히 쉬시다 내려오세요. 위야 오빠도 9시나 10시는 돼야 온다는데, 그전에 배고파지심 바로 내려오셔야 해요? 찌개 맛있게 데워드릴게요.”
수건만 받아 들고, 오체투지의 자세 그대로 고개만 끄덕였다. 통통 튀는 경쾌한 발소리가 성전(聖殿) 같은 갤러리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 맞다! 성전!
그제야 처음 빌라 안으로 들어섰을 때 받았던 집의 기묘한 인상이 떠올랐다. 대단히 집요하고 철저한 의지로 정성껏 축조한 교회를 보는 것 같았었다. 분명이 외관은 그저 일반적인 초호화 빌라인데, 가꿔진 정원이며, 건물의 외관이며, 내부 실내 장식이며 하나같이 어딘가 범상치가 않았었다. 단지 집주인이 ‘아끼는 주거지’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다. 교회가 맞았다. 대웅전이 맞았다. 혹은 아슈람이었다. 그것이 이 방배동 집의 정체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혜윤이가 주고 간 손수건으로 눈물범벅인 얼굴을 닦아내었다. 울지 말아야지. 더는 울지 말기로 엄마한테 약속했는데, 효자가 되기로 약속했는데, 이러지 말아야지. 세수하듯 벅벅 문질러 닦으며 마음을 다졌다. 과거의 편린만 보이면 툭하면 눈물을 쏟는 짓도 더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돼. 기뻐 우는 것도 사절이야. 감격해 우는 것도 물론 더 이상은 사절. 연인의 거대한 사랑에 압도돼 자지러지는 것도 이제 그만. 아무리 예상 못 한 압도적인 비밀들이 곳곳에서 들통이 나더라도 더 이상은 그저 그러려니 해야지. 당연히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지. 아무렴. 사랑받았지 않아. 사랑하다 사랑하다, 너무나 지독하게 사랑을 하다 서로를 부서트렸지 않아. 자신이 이 정도도 사랑받지 못했다면, 그리고 이 정도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그렇게 부서지지도 않았을 게 아니냐. 괴물이 되지도 않았을 게 아니냐.
그래, 그래. 당연히 여기자. 그랬던 서로의 사랑을 인정하고, 보듬고, 품 안에 끌어안아주자. 이상하다고 고개를 흔들지도 말고, 너무 지독하다고 치를 떨지도 말고, 너무 감격스럽다고 자지러지지도 말자. 그냥 우린 이렇게 서로 사랑을 했었노라고 가만히 웃어주자. 이것이, 이 사랑법만이 그때 우리들의 최선이었노라고. 한때 ‘괴물’이었던, 그리고 또한 여전히 ‘괴물’임에도 또한 존엄한 ‘인간’이기도 한 우리들의 최선이었노라고. 그리고 결코 후회하지 않노라고. 그 고통과 슬픔과 배신과 미움과 증오와 기쁨과 연민과 애정과 희생과 행복들을, 그 모든 사랑의 상흔들을 단 하나도 비난하지 않고 온전히 품겠노라고.
훌쩍거리며 욕실을 찾았다. 개조된 갤러리라서 그런지 역시 욕실도 있고 드레스 룸도 붙어 있었다.
세수를 하고, 이도 닦고, 머리도 감았다. 아마추어 판매전 전시장을 도느라 흘렸던 구슬땀의 자취도 새삼 자각이 되어, 아예 옷을 벗고 샤워까지 끝마쳤다. 드레스 룸에서 연인의 옷으로 보이는 반팔 트레이닝 웨어를 찾아내 갈아입었다. 자신의 체형엔 흡사 부대자루처럼 커서 꼴이 우스웠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시 갤러리로 돌아가 전시 작품들을 편하게 관람할 수 있게끔 해주는 옷가지면 장땡인데다, 덤으로 연인의 코롱 냄새까지 흐릿하게 풍기니 더할 나위 없는 금상첨화가 아니냐.
옷을 갈아입고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싸곤 다시 갤러리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재관람을 하기 시작했다. 연인이 정성을 들여 찾아내고 또 귀하게 소장해왔을 작품들을 차례로 하나하나 꺼내 살펴보았다. 고풍스러운 모양의 목각 진열대 위에 유리 케이스까지 씌워져 있어 흡사 박물관 애장품 같은 인상마저 주는 그것들을, 만져도 보고, 품에 안아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읽어도 봤다. 초등학교 때 불던 단소 같은 건 직접 연주도 해보았다. 특히 어릴 때 연습했던 크로키북들이며 일기장, 다이어리들은 하나하나가 너무나 재미있어서 읽으며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과연 어릴 때 자신이 이런 생각들을 했던가 싶은 얘기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런 어린 자신이 너무나 귀여워 키득대기도 하고, 얄미운 짓을 할 땐 꿀밤을 먹이고 싶기도 하고, 슬픈 마음을 썼을 땐 자신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과거의 분신은 무지갯빛 날개를 걸친 피에로처럼 수만 가지 모습으로 자유자재로 변신을 하며 인환을 매혹시키고 있었다. 덤으로 앨범에 있는 무수한 사진들까지 일기장들과 대조해가며 보다 보니 드라마도 이렇게 흥미로운 성장 드라마가 없었다. 이리도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던 어린 철부지가 연인을 만나 사랑을 하고, 어른이 되고, 곧 괴물이 되었었지. 씁쓸한 자조조차 저 어린 철부지에 대한 애틋한 사랑스러움을 훼손하지는 못했다.
“……먼지나 자외선이 닿으면 쉬이 변색과 부식이 오지. 실온 상태에 두는 것도 별로 안 좋고.”
두근…….
“그래서 특별히 반 밀봉 유리 케이스를 주문 제작해 보존하고 있는데, 나도 너처럼 수시로 꺼내 보느라 보존의 의미는 없는 것 같아. 아예 완전히 밀봉하지 않는 한 세월의 흐름을 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
힘 있게 떨어지는 매혹의 중저음을 따라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들어온 줄도 몰랐는데, 연인은 어느새 인환이 앉아 있던 창가 옆 진열대까지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실컷 다 봤다 싶으면 그때 가서 밀봉할 생각이긴 한데 볼 때마다 새로우니, 그날이 언제 올까 싶기도 하고.”
시선이 마주친 직후 벗기 시작한 옅은 보라색의 홉색 슈트 재킷을 1미터 높이의 진열대 선반 위에 던져두곤, 이어 은청색 바탕에 황금색 스트라이프가 시원스러운 넥타이도 서둘러 풀어헤쳤다. 넥타이 다음엔 양말이, 그 뒤를 이어 허리 벨트도 풀렸다. 겨드랑이에 흐릿하게 땀이 차 있는 케이블 스트라이프 드레스셔츠도 부지런히 단추가 풀어지고 있었다. 아 하고 무의식적인 감탄사를 흘리는 사이 셔츠마저 진열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역삼각형으로 아름답게 벌어진 늠름한 어깨 근육과 식스팩이 선명하게 잡힌 복근이 갤러리의 환한 불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느새 연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옷가지는 옅은 보라색의 홉색 팬츠와 그 밑의 캘빈 클라인 로고가 보이는 금색의 드로즈 팬티 하나가 유일했다. 그 모든 일련의 동작들이 시선이 마주치고 고작 1분이 채 안 돼 벌어진 일이었다.
반라의 대리석 조각처럼 변한 연인이 단숨에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물처럼 조여오는 시선에 넋을 놓고 있는데 어느새 불쑥 뻗어온 양팔이 겨드랑이 틈으로 파고들었다. 번쩍 일으켜 세워진 몸에 소스라쳤을 땐 이미 얼굴이 연인의 뜨거운 맨살에 푹 파묻혀 있었다. 사무치도록 좋은 연인의 땀 냄새와 호르몬 냄새와 코롱 냄새가 한꺼번에 강렬하게 파고들어 순간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했다. 입술 바로 아래, 짭짤한 소금기가 느껴지는 연인의 가슴 근육이 연인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불끈거리는 것이 고스란히 자각되었다.
“다녀왔어, 마누라.”
담담하게 던져진 인사였다. 그러나 잔뜩 억누른 기쁨이 미미하게 끝이 떨리는 억양을 통해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리듬감 있게 꽉꽉 조여지는 상반신의 아픔을 통해서도, 쪽쪽쪽 소리를 내며 정수리 위에 떨어지는 흡반 같은 키스를 통해서도 연인의 봇물처럼 터지는 희열의 폭풍은 적나라했다.
기쁨만큼의 얼떨떨함에서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다시 몸이 위로 번쩍 들어 올려졌다. 중심을 잡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리다 본능적으로 연인의 목을 휘감았고, 그제야 공주님 안기로 번쩍 안아 올려진 자신의 몸뚱이도 자각되었다. 가쁘게 숨을 헐떡이며 연인의 시선부터 찾았다. 곧바로 아래를 향한 연인의 새까만 동공이 화살처럼 박혀들었다. 고요한 표면 아래, 거대한 기세로 일렁이고 있는 폭풍이 보였다.
“……미치는 줄 알았어.”
“……위…….”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만지고 싶어서. 안고 싶어서.”
“……위위…….”
“안는다.”
“…….”
“지금, 안아.”
“…….”
대답 대신 연인의 뺨 위에 살며시 손바닥을 가져다댔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애무에, 연인의 어깨가 크게 들썩이며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날 듯이 갤러리를 벗어나는 연인의 기척을 느꼈다. 쿵, 쿵, 쿵, 쿵. 두 사람분의 하중을 받아 육중하게 울리는 바닥의 진동도 느껴졌다. 연인이 전방에 나타난 하얀 문을 발로 차 여는 게 보였다. 3층에 올라오자마자 들어가보았던 유독 커다란 주침실이었다.
“조명.”
음성 센서가 작동하는지 연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커다란 침대 가의 사이드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딱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의, 전적으로 수면만을 위한 은은한 밝기였다. 점차 밝아지는 조명을 따라 킹사이즈의 침대 사방으로 커다란 장방형의 로만셰이드(로 보였다. 실은 로만셰이드라 하기보단 롤스크린에 더 가까워 보였다)가 천천히 내려오는 것도 보였다. 그 역시 전자동인 모양이었다. 연인이 자신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직후, 바닥까지 내려온 그것은 침대 사면을 완벽하게 가리는 것으로 또 다른 하나의 방을 만들어냈다. 물론 침대만으로 이루어진 방이었다. 무심코 그 네 개의 벽면을 바라보았다가, 또 한 번 멍하니 충격을 받고 말았다. 자신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아니, 자신의 사진이 거기 있었다.
연인을 처음 만나던 무렵의 한껏 멋을 부린 젊은 청년이, 촌스러운 우신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어린 소년이, 그리고 지난해 풍선 더미 속에서 벌거벗은 채 잠들어 있던 나이 든 자신이, 멋들어진 결혼 예복을 입은 채 연인의 품 안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자신이 모두 거기 들어 있었다. 미색의 실크 바탕 천 위에 섬세하게 인화돼 있는 자신의 모습들이었다.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금 무슨 성전 안에, 정확히는 성전 기도소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이상야릇한 위화감이 들었다. 흡사 성전 제단에 켜진 촛불처럼, 그리 선명하지 않은 조명도 그런 착각에 일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시야가 가려졌다. 어느새 알몸이 된 연인이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타고 있었다. 엄청난 안력을 쏘아대고 있는 시선 탓에 저 충격적인 벽화조차 홀연 의식에서 멀어졌다.
두 팔이 만세를 부르는 것처럼 위로 들어 올려졌다. 연인이 거칠게 밀어붙인 때문이었다. 부대자루마냥 커다란 연인의 트레이닝 웨어는 벗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연인의 단 두어 번의 휘두름으로 바지와 상의가 통째로 침대 바닥에 팽개쳐졌다. 자신을 덮치듯 하고 엎드린 채, 윤활제라도 찾는지 한 팔을 뻗어 침대 머리장을 뒤지는 남자의 손길 또한 거칠기 짝이 없었다. 씩씩거리는 숨길이 탱크 소리처럼 요란스레 증폭돼 들렸다. 남성다움의 극치일 크고 늠름한 몸뚱이는 몹시도 허둥거리고 있었다. 눈시울은 벌겋게 핏발이 서 있고, 움직이는 데 따라 불규칙한 리듬을 타며 제멋대로 울퉁불퉁 불끈거리고 있는 근육들은 흡사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샤워조차 하지 않아 기왕에 땀 냄새와 호르몬 냄새가 진동을 하는 피부 곳곳엔 새로 송골송골 솟아나온 땀방울들로 온통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미 거무튀튀하게 발기해서 거꾸로 크게 휜 거대한 페니스는 금방이라도 연인의 아랫배를 찌를 기세였고, 귀두 끝에서도 쿠퍼액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침내 윤활제를 찾아냈는지, 자세를 바로 한 연인이 즉시로 튜브 뚜껑을 열고 손안 가득 짜내는 게 보였다. 윤활제를 잔뜩 묻힌 연인의 오른손이 연인의 사타구니 사이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페니스와 음낭은 물론 무성한 체모까지, 성기 전체를 무턱대고 재빨리 문지르더니 이어 자신의 다리를 벌리고 튜브에 남은 윤활제 전부를 쏟아부었다. 차가운 감촉에 흠칫 몸을 떨 틈도 없이 연인의 부드러운 손길이 재빨리 다가들었다. 연인의 성기에 대한 거칠고 무성의한 손짓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정성스럽고 섬세한 손놀림이 성기를 쓸고, 회음부를 어루만지고, 이어 내벽 안쪽으로 중지 끝이 조심조심 파고들어왔다. 자신의 눈을 뚫어질 듯 들여다보며 숨을 죽인 떨림에서 연인의 극도로 참고 있을 인내가 읽혔다. 혀로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핥는 모습에서도 안타까운 조바심이 훤히 읽혔다. 너무나 오랜만의 침입에 확연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전신에서 전율처럼 읽히는 연인의 처절한 절박함이 더 아팠다. 기교도 잊은 것 같고, 테크닉을 부릴 허영도 사라지고, 교합의 쾌락을 얻고자 하는 단순하고 저급한 욕망도 아니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는 절체절명의 소명일 뿐이었다. 절대자를 향한 맹목의 예배를 위해 갈급하게 쫓기고 있는 광신일 뿐이었다.
“……돼…… 됐어, 위야…… 이…… 제…… 이, 이제 그냥 들어와…….”
아직 다 열리려면 한참을 더 풀어줘야 할 것 같았지만 연인의 팔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재촉했다. 절대 복종의 맹목성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도 그저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 이내 떨리는 긴 한숨과 함께 내벽 안쪽으로 파고들어왔던 손가락이 주룩 빠져나갔다. 즉시로 두 허벅지가 벌어지며 몸이 반으로 확 접혔다. 한 손으로 페니스를 움켜쥔 연인이 귀두 끝을 입구 주름에 대고 있었다. 손이 몹시도 떨리는지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한 끝에 겨우 입구를 찾아 불쑥 들이밀어졌다. 동시에 저릿한 통증이 척추를 치고 올라왔다. 긴장한 내벽 전체로 와락 힘이 몰려들었다. 진입하려던 페니스가 귀두 끝만을 걸친 채 더는 들어오지 못하고 불끈불끈 요동치고 있었다. 저절로 폐가 크게 부풀어 오르며 심장이 무섭도록 뛰기 시작했다. 대상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두려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너무 오랜만이어서일까? 아니면 서로 너무 원한 나머지 긴장과 기대가 극에 달한 때문일까? 흡사 15년 전, 처음 연인을 받아들일 때처럼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드는 느낌이었다. 연인도 갈팡질팡 혼란스러운 눈길로 자신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꿰뚫고 싶은 엄청난 절박함만큼 자신을 상처 입힐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새 연인과 마찬가지로 벌벌 떨고 있는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30센티쯤 위에서 숨을 참고 있는 연인의 뺨을 살며시 움켜쥔 채 필사적으로 눈을 맞췄다. 들어와, 그냥. 입구 언저리에서 가로막혀 자신만큼 겁을 집어먹은 연인에게 호소했다. 둘 다 이렇게 겁에 질려 언제까지고 떨고 있다간 영영 다신 한 몸이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도저히 비현실적인 가정이자 예측이었지만, 정말로 그렇게 돼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아래가 갈가리 찢어지는 편이 나았다. 상처 따윈 겁나지 않았다. 연인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도, 상처도 감수할 각오가 돼 있었다.
“……얼른…… 명령이야, 서방님…….”
겁에 질린 야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헐떡이듯 속삭였다. 소리 자체는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으로 극히 작았지만, 그 작은 파문이 연인에게 던진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연인의 뺨을 감싸고 있던 두 손이 느닷없이 휘어잡히더니 침대 위로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그 위로 밀어붙일 듯 덮쳐든 것 또한 연인의 두 손이었다. 연인의 상반신이 앞으로 크게 기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든 순간, 하반신으로 엄청난 쾌락과 격통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단숨에 뿌리 끝까지 파고든 페니스가 전립선을 긁어내리며 내벽 극점에 가 틀어박힌 때문이었다. 찢어지는 것 같은 비명은 결합과 동시에 다가든 연인의 입술에 의해 통째로 집어삼켜졌다. 충격을 못 이기고 필사적으로 버르적거리는 열 손가락이 연인의 커다랗고 단단한 손아귀에 짓눌린 채 갈퀴처럼 얽혀들었다.
연인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를 안타까워하듯 서로의 타액이 실처럼 이어지는 게 보였다. 가쁘게 숨을 헐떡이며 눈을 깜빡이자, 눈시울에 맺혀 있던 눈물이 양쪽 관자놀이로 굴러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맑아진 시야로 연인의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밟혀들었다. 붉게 충혈된 눈시울이 바로 코앞에서 삼켜버릴 기세로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머루알처럼 새까만 동공은 이상야릇한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고, 낯빛은 붉어졌다 하얘졌다 시시각각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늠름한 몸뚱이는 청동 조각처럼 미동조차 않고 있건만, 내벽 안쪽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두꺼운 귀두 끝은 연신 진동하며 전립선 근처를 짓이기듯 꾹꾹 누르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순식간에 한계까지 발기해버린 성기는 물론, 아랫배 전체가 지독한 짐승의 쾌락으로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입구 주름으로부터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불로 지지는 것만 같은 통증도 그 엄청난 쾌락의 파도를 잠재우진 못하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입구의 통증이 내벽의 쾌락을 더더욱 증폭시키는 것만 같은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착각도 일었다.
“……아파……?”
속삭이는 듯한 애틋한 중저음이 살포시 내려왔다. 서로의 얼굴을 거의 붙이다시피 하고 있어, 연인의 단내 나는 숨결은 그대로 자신의 것과 달콤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파르륵 떨리고 있는 연인의 입술을 따라 자신의 입술도 헐떡이듯 아련히 떨리고 있었다. 양쪽 침대 위에서 단단히 깍지를 낀 서로의 손가락이 꽉 움켜쥐어진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서로를 뚫어질 듯 응시하는 절박하고도 애절한 눈길만 움직임이 없었다. 움직일 까닭이 없었다. 서로를 응시하지 않는 단 1분 1초의 공백도 아쉬웠다. 아쉽고 아까워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아니…… 좋…… 아…….”
색색거리는 숨을 토해내며 힘껏 부정했다. 입술 끝을 끌어올려 다정한 미소도 만들어냈다. 아파서 더 좋다는 걸 전하고도 싶었지만, 연인은 그러면 또 겁에 질릴 것이다. 이미 입구가 심하게 찢어졌는지 끈적하게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는 혈액이 감지되고 있었다. 아프다고 단 한 마디만 흘려도 연인은 도로 밖으로 도망을 칠 터였다.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다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연인만 하나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실은 자신도 연인과 하나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매순간 영원히.
“……하…… 하…… 하나라서 너무 좋아…… 좋아, 위야…….”
미동도 않던 늠름한 조각상이 그제야 움찔 어깨를 떨었다. 좋아서 참을 수 없는, 몸서리치는 희열을 감당하지 못해 그대로 드러내는, 단순하다 못해 짐승의 그것처럼 순수의 극치를 보여주는 자신의 연인이었다.
“……응.”
활짝 벌어진 따라쟁이 웃음을 입가에 물며 연인도 동의했다. 번들번들 일렁이고 있는 까만 동공이 흡사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역시 좋아서 미치는, 눈밭을 구르며 뛰노는 천진한 사자 새끼 같았다. 활짝 웃는 입술이 다시 자신의 입술 위에 겹쳐졌다. 슬쩍 핥고 깨물기만 하는 어린애 같은 립 키스였다.
“……나도…… 이렇게 하나로…… 이대로…… 아주 좋아…… 그냥…….”
“……응……?”
“……움직이고 싶은데 참을 거라고…….”
“……아……!”
“넌 괜찮아? 이대로 그냥……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으면…… 더 오래 할 수 있으니까…….”
“……응…… 그럼…… 그…… 그냥…… 나두…….”
“……피가 나는 거 같아…… 그렇지……?”
“……어…… 어어, 응…… 조금…….”
“……아프면 말해…… 조금씩 움직일게.”
“……아, 아직은 괜찮으니깐…… 거…… 거기를 네가 비비고 있어서…….”
“……여기……? 흡!!……! 그렇게 조이지 마…….”
“……바, 바보……! 네가 자꾸 비비고 누르니깐…… 꾹꾹…….”
“후후……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다, 마누라…….”
“…………………….”
“……좋아…… 너무 좋아…… 뜨겁고 축축해…… 언제까지나 이렇게 깊숙이 파묻은 채 있고 싶어…… 너는……?”
“……어, 응…… 응…….”
“……내 것이 좋은가……?”
“……으응…….”
“……나만큼……?”
“……응…… 아, 아니, 더 좋아…… 너보다 더 좋을 거야…….”
“아니야, 마누라. 내가 더 좋아해…… 그건 그래…… 내가 더 좋아해…….”
“……아닌데…… 나두…… 나, 나두 아주 많이…….”
“……움직일까……?”
“……그, 글쎄…… 난 아직은 좀 더 참을 수 있는데…… 만지고 싶어…….”
“……음?”
“……너 만지고 싶어…… 손 놔주면 안 돼……?”
“……이렇게 하고 있어야 정말 완전히 하나 같은데, 나는…….”
“……얼굴 만지고 싶어, 위야…… 입술도…… 코도…… 수염이랑…… 가슴도…… 네 예쁜 가슴…….”
“……정 그러면 하나만 놔줄게…….”
“……헤헤…… 신난다…….”
“……흑!! 거, 거긴……!”
“……예뻐…… 뾰족하게 섰어…… 젖꼭지…… 빨고 싶어…… 위위…… 나의 예쁜 위위…….”
“……흡! 윽……! 그만해……! 이게…… 그만……! 아직 가기 싫다, 마누라…… 제발 그만둬……!”
“헤헤…… 넘 귀여워…… 예뻐…….”
“이게!!!”
“흐앗!!!”
갑자기 뒤로 빠졌던 연인이 창을 찔러 넣듯 엄청난 기세로 박혀들었다. 할퀴듯 전립선을 스쳐간 흉기가 안쪽 깊숙한 내벽에 부딪치며 크게 진동했다. 순간 눈앞에서 불이 번쩍 일더니 찌르르한 쾌락이 척추를 가르고 정수리 위까지 솟구쳤다. 단숨에 가고 싶으리만치 엄청난 쾌락이었다. 그제야 연인을 도발한 것을 후회한 인환이었다. 남은 한 손의 깍지마저 풀리더니 연인의 두 손이 자신의 허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연인이 바른 자세로 앉으며 자신은 연결된 채 연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은 자세가 되었다. 내리누르는 자신의 체중에 의해 결합이 더욱 깊어지는 건 당연지사, 입구 주름은 더욱 벌어지고, 깊숙이 쑤시고 든 페니스의 압박감에 순간 숨이 턱 틀어막혔다.
아련하게 교성을 흘리자 연인의 입술이 즉각 깊은 입맞춤으로 보답을 주었다. 등 뒤로 교차된 연인의 단단한 양팔이 숨을 쉬기도 버거울 정도로 엄청나게 상반신을 조이고 있었다. 뱀처럼 사정없이 몰아치는 연인의 혀와 더불어 연인의 다디단 타액이 쉴 새 없이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생명수를 삼키듯 정신없이 빨아 마셨음은 물론이었다.
다시 연인의 입술이 떨어진 건, 서로 오르가슴에 대한 욕구가 피크로 치솟았을 즈음이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허리를 흔들며 창녀의 교태를 흘리기 시작한 자신이었고, 난폭하고 사나운 격정에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움찔움찔 피스톤질을 시작한 연인이었다. 숨결은 턱에 닿고, 서로의 온몸은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각과 동시에 전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 입술을 떼고 즉시 움직임을 멈춘 두 사람이었다.
……더…… 더 이어져 있고 싶어……. 눈빛으로 호소했다.
……응, 나도……. 연인도 동의했다.
붉게 충혈된 야수의 젖은 눈이 필사적으로 욕망을 참아내고 있었다. 다시 미동도 않고 가만히 서로의 눈만 들여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상반신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단 한 치의 여유도 없으리만큼 서로를 꼭 품은 채 서로를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입을 맞췄다. 짐승의 쾌락을 진정시키기 위한, 절박하면서도 안타까운 호소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미치도록 내달리고픈 광증이 겨우 진정되었고, 과호흡에 가까울 정도로 세차게 헐떡이던 서로의 숨길도 간신히 가라앉았다. 자신의 성기가 어느 정도 힘을 잃은 것에 비해 내벽 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연인의 페니스는 여전히 한계까지 발기해 있었다. 이런 상태로 계속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싶으리만큼 엄청난 인내심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광기에 가까울 지독한 사랑이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터였다. 새삼 사무치도록 연인이 사랑스러워, 연인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준 인환이었다. 연인의 어깨 너머로 휘장처럼 드리운 롤스크린이 보였다. 자신의 사진이 선명하게 인화돼 있는 특별한 성전(聖殿)이었다. 제단(祭壇)이었다. 한껏 멋을 부린 젊은 청년의 얼굴이 인환을 향해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바로 15년 전, 연인을 처음 만나던 무렵의 자기 자신이었다.
오래 바라보면 또 목이 멜 것 같아, 연인의 어깨 위에 도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매끄러운 황금빛 피부 위에 가만가만 뺨을 부벼대며 물음을 주었다.
“……어떻게 구했어……?”
손바닥에 닿아 있는 연인의 등과 허리를 소중하고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물어보았다. 기적에 관한 물음이었다. 어느 성스러운 광기에 대한 전설이었다.
“……아니, 언제 구했어……?”
“…….”
“……이렇게 보고 있는데도 여전히 잘 믿어지지가 않아, 위야…….”
“…….”
“……어떻게 저게…… 저것들이…… 전부 평창동 엄마 집에 있던 것들이었는데…… 경매로 넘어갔다고…… 집이랑 자동차랑 다…… 값어치 없는 것들은 전부 난지도로 보내졌다고 들었었는데…….”
“…….”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만가만 자신의 몸뚱이 곳곳을 다정하게 애무하던 연인의 손길이 문득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을 더듬는 것도 같고, 감정을 억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한동안 그렇게 미동도 않던 연인이 이윽고 다시 자신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담담하면서도 상냥한 중저음이 속삭이듯 귓전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과 거의 동시였다.
“……95년 7월쯤이었다.”
“……?”
“대학병원에 실습을 나갔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김천댁 아줌마를 만나게 되었다.”
“…….”
“소식을 들었지. 평창동 어머님에 대해서. 내가 실습 나간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다는 것도. 말기 암이시라는 것도.”
“…….”
“거기서 김천댁 아줌마를 만나게 된 것도 아주 우연은 아니었던 셈이지.”
“…….”
“……집에 돌아와서 미친 듯이 알아봤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경매로 집이 넘어갔다는 거랑, 사기를 당하시고 쓰러지셨던 거랑…… 전부 알아내는 데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은행 경매 날짜나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
“너와의 미래를 기대하고 한 것은 아니다. 그저 단지 그대로 버려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네 인생이…… 네 과거 자취들이 휴지조각처럼 흔적도 없이 전부 다 사라지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어.”
“…….”
“……다 건질 수는 없었다. 집이든, 차든…… 그래, 네 그 BMW…… 죽을 때까지도 절대 잊지 못할 그 그리운 은색의 차…… 나는 다 기억해…… 그 차의 어디쯤에 어떤 흠집이 나 있는지까지도 전부 다…… 그 소중한 차도…… 어머님 집도 다 건지고 싶었지만 나는 여전히 가난했다…… 그녀의 집안으로부터 여전히 학비를 구걸받아 생활하는 다른 의미의 남창이었지. 난 당시 신애에게 노예처럼 매인 몸이었고…… 또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널 부서트리게끔 만들었던 그녀의 돈으로는 절대 네 인생을 사들일 순 없었으니까.”
“…….”
“……낙찰받은 자를 찾아가 빌었다. 사채업자였지. 그자에겐 버릴 물건들이지만 나에겐 목숨만큼 소중한 물건들이니 넘겨달라고. 다행히 객관적으로 별 값어치가 안 나가는 것들이라 쉬이 내 손에 들어올 수 있었다. 숟가락 하나라도 공짜로는 넘기지 않는 치들이었는데 아마도 내가 의대생이라 봐준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지. 나중에 칼질하다 뚫리게 되면 잘 부탁한다고 농담을 하더군.”
“…….”
“……손에 넣은 것까진 쉬웠는데 보관이 어려웠지. 동생들 집은 물론, 신애와 사는 아파트는 더더욱 어림없었지. 서울대 로커룸이나 지하철 보관함, 때론 서울 역전 보관함들도 두루 이용했다. 한 군데 계속 두면 쉬이 들통이 날 것 같아서 수시로 옮겨 다녔지. 무서웠어, 가끔씩 악몽을 꿀 정도로. 언젠가 들통 나면 어떻게 하나, 신애가 알게 되면 어떻게 하나, 혹은 휘야나 윤열이 형이 알게 되면……. 상상하면 너무 무서워져서 완전히 발을 뻗고 자기 힘들었지.”
“…….”
“……누군가에게 보관해달라고 부탁을 할 수도 없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아무도. 나 자신 이외엔.”
“…….”
“그래도 절대 버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네가 언제 출감하는지, 혹은 출감했는지, 그전에 감옥에선 어떻게 지냈는지…… 그래, 너 자체에 대해선 일절 관심조차 기울이지도 않는 주제에 저것들에 필사적으로 집착을 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더군.”
“…….”
“……졸업하고 도미하게 됐을 땐 차라리 홀가분했다. 어쩔 수 없이 버려야겠구나 싶었으니까. 미국까지 저걸 어떻게 가져가겠나 싶었지. 신애는 늘 내 주변을 스토커처럼 어슬렁거리곤 했으니까.”
“…….”
“……떠나기 전에 다 태워버리려고 차를 렌트해 싣고 경기도에 있는 어느 야산으로 갔다. 몇 시간이고 앉아 태워보려고 기를 썼지. 그런데 도저히 할 수가 없더군. 그래서 다음번에 생각한 게 땅에 파묻는 거였다. 도로 시내로 나가서 밀봉 케이지를 몇 개 구해 산으로 되돌아와 파묻었다. 꽤 추운 날이었어. 땅이 얼어붙어 있어서 깊이 파묻는 데 하루 종일이 걸렸지. 졸업하던 해 2월이었으니까. 출국하기 사흘 전이었다.”
“…….”
“……다시 파낼 수 있었던 건 2년 6개월쯤이 흐른 후였지. 그녀와 별거를 하던 시기였다. 잠깐 귀국한 틈에 파내서 뉴욕으로 부칠 수 있었어. 돈도 제법 수중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사업도 궤도에 오르는 시점이었지. 내 명의의 집과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도 생겼거든. 신애는 모르는 작은 아파트 하나를 빌려서 거기에 보관하기 시작했지. 물론 2000년도에 귀국하면서는 당연히 함께 데려왔고. 귀국하자마자 이 빌라를 사들이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더 이상 세상에 들킬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 거지.”
“…….”
“……저것들이 내게 어떤 의미라는 걸 너는 알까? ……오랜 시간, 그토록 두려움에 떨면서도 끝끝내 버릴 수 없었던 까닭을 알까?”
“…….”
“……저것들은 내 기도다.”
“…….”
“……아니, 희망이었다. 어쩌면 다시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절대 되돌릴 수 없으리라, 의식적으로는 완전히 체념하고 있던 시간들에서조차 끝끝내 저버릴 수 없었던 꿈이었다.”
“…….”
“……그래서 10년을 살아올 수 있었지.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끝내 미치지 않고.”
“…….”
“……또 우나? 이젠 울지 않을 거라더니……?”
“…….”
연인의 어깨에 닿아 있던 얼굴의 흥건한 물기를 감지한 연인이 조금 웃었다.
“……그만하자. 어머님 또 저승에서 걱정하실라. 고스톱 치시다 말고 어머님께서도 또 따라 우시면 어떡하나? 우리가 행복해지는 게 어머님께 드리는 유일한 효도라면서……?”
“……이…… 건 괜찮아…….”
눈물콧물 범벅이면서도 연인을 따라 웃음을 물었다. 바보처럼 입술이 헤벌어진, 좋아서 미치는, 몸서리쳐지는 희열을 어찌할 바 모르는, 팔불출 웃음이었다. 연인을 비웃을 계제가 아니었다. 따라쟁이였다. 자신 또한 연인의 따라쟁이와 한가지였다.
“……행복한 눈물이니깐 괜찮아…… 엄마도 그냥 나 놀리면서 고스톱 치실 거야…….”
“……몸 뒤로 돌려볼게…….”
연인이 포옹을 살짝 풀며 중얼거렸다. 묻는 눈길을 보내자, 겨드랑이 틈으로 두 손을 집어넣은 연인이 그저 잠자코 자신의 상체를 천천히 뒤로 돌리고 있었다. 덕분에 깊이 연결돼 있던 하반신의 결합이 거의 풀리는 듯했지만, 완전히 자신의 몸을 돌린 연인이 모로 누운 채 재빨리 자세를 잡고 다시금 깊숙한 삽입을 시도했다. 찢어진 입구가 연달아 이어진 거친 자극을 못 이기고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끙끙거리는 신음을 흘리자 등 뒤에서 자신을 꼭 품은 채 연인이 온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위로를 주었다.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거듭거듭 자신의 이름만 고요하게 속삭이는 것뿐인데도 강력한 진통제를 주사 맞기라도 한 것마냥 차츰 아픔이 스러지고 있었다.
그 얼마 후, 자신의 아픔이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부드러운 애무만을 거듭하던 연인이 비로소 조금씩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하면서도 정확히 전립선만을 긁어대는, 최대한 고통을 줄이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덕분에 모로 겹쳐졌던 몸뚱이가 점점 더 엎드린 자세가 되었고, 연인도 자신의 뒤에서 완벽하게 서로의 몸을 밀착시킨 자세가 되었다. 등에 닿아오는 연인의 가슴 근육과 복근이 미끈거리는 달콤한 자극을 주며 부드럽게 등을 치대고 있었다. 역시 바로 가려는 목적은 아닌, 결합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면서 인환 자신의 고통은 줄여보려는 움직임이었다. 후배위 자세라 연인의 허벅지 위에 앉았을 때보다 확실히 결합 부위의 부담은 한결 줄어들었다.
연인이 느릿하게 내벽을 찌를 때마다 침대 시트를 와락 움켜쥐며 애절한 교성을 흘렸다. 그때마다 앞으로 타넘어 온 연인의 입술이 벌어진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 넣으며 깊은 키스를 했다. 침대 시트를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는 양손도 이미 연인의 두 손바닥에 완벽하게 포개진 상태였다. 가능한 한 깊은 결합을 원할 때마다 깍지를 끼는 연인의 버릇은 여전했다. 서로 강력하게 얽혀든 손가락 마디가 흡사 서로를 묶는 ‘영원’의 웨딩 링 같았다.
“……아파……?”
깊숙이 박아 넣은 채 연인이 가만히 속삭였다.
“……아직도 많이 아픈가……?”
안에서 묵직하게 진동하는 거대한 페니스에 저릿저릿한 쾌감만을 느끼며 No를 흘렸다. 모로 바짝 틀어진 얼굴 곳곳에 연인의 입술과 혀가 키스의 비를 뿌리고 있었다. 키스만으로도 아쉬워지면 아예 거대한 육식 동물 모양 혀를 쭉 뽑아 자신의 얼굴 전체를 싹싹 핥기도 했다. 덕분에 어느새 뜨겁고 축축한 타액 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그럼 이제 움직일까……?”
연인이 수염이 더부룩한 뺨 언저리로 자신의 드러난 뺨 위를 애무하며 허스키하게 유혹했다. 확실히 이제쯤은 서로가 한계인 것도 같았다. 서로 결합한 채 너무나 오래 참고 있어서 관능은 증폭할 대로 증폭한 상태였다. 그저 땀으로 미끈거리는 서로의 피부가 부벼지고 스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자극이 전해지고 있었다. 아래에서 겹쳐지고 있는 네 개의 다리로 전해지는 서로의 까슬한 체모에도 움찔움찔 자지러지는 서로의 몸뚱이였다. 그러면서도 가능한 한 오래도록 서로를 얽고 싶은 절실한 욕망 또한 여전했다. 한순간엔 미친 듯이 격렬하게 서로를 박고 싶다가도, 다음 순간엔 그대로 멈춘 채 하나로 깊이깊이 결합돼 있고만 싶어 몸서리를 쳤다. 자신 혼자만 그렇다면 어느 쪽으로든 쉬이 결론이 났을 테지만 연인 또한 자신 못지않을 욕심꾸러기였다. 서로가 갈팡질팡 흔들리기만 하니 그저 끝도 없는 관능의 자극만 증폭되고 또 증폭될 뿐이었다.
“……하아…… 학……! 아니…… 아니, 조금만 더…… 더 이대로…….”
“……더……? 내 강아지…… 이렇게……? 이렇게 더……?”
“……응…… 응, 응, 윽……! 하아……! 아…… 좋아…….”
“……여기……? 여기 이렇게 비벼줄까……?”
“……하앗! 앗……! 아아…… 그냥…… 이제 그냥…… 으앗……!”
“……그냥……? 그냥 이제 해……? 할까……?”
“……응…… 흑……! 안…… 아니…… 아앗……! 좋아…… 좋아…… 아아…… 위위……!”
“……좋아……? 내가 좋아, 인환아……?응……?”
“……아…… 아아아…… 아읏……! 위…… 응……! 좋아…… 해…… 이제 해줘…….”
“……조금만 더…… 내 강아지…… 조금만…… 흡……! 더 이대로…… 같이…… 영원히…….”
“……영…… 원…… 같이…… 흑……! 으아…… 아…… 아아아…….”
“……그래, 같이…… 둘이 같이…… 인환아!…….”
한 몸으로 얽혀 뒤틀리는 뱀처럼 이리저리 사지를 꼬며 흔들렸다. 침대가 커다랗게 출렁이며 핏빛 관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참지 못하고 맹렬히 박아대다가, 도로 멈춰 배배 꼬고, 허겁지겁 서로의 입술을 찾아 불길처럼 부벼대다가, 도로 벼락처럼 굳어져 가쁜 숨만을 할딱거렸다. 지독하게 고통스럽고, 또한 지독하게 쾌락적이었다. 아니, 그 극단 어느 한쪽인 것처럼도 생각되었다. 아니, 아니, 어느 한쪽의 극단 또한 결코 아닌 것처럼도 생각되었다. 그저 모호한 이대로, 완벽한 것만 같았다. 이대로 어느 한쪽이든 선택하지 않으면 이렇게 영원히 연인과 한 몸일 터였다. 그게 지옥이면 어떻고 천국이면 어떠할까.
헤벌어진 서로의 입술에서 타액이 줄줄 새고 있었다. 저릿저릿한 쾌락의 경련으로 사무치고 있는 서로의 성기에서 쿠퍼 액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줄줄 새고 있었다. 어루만지고, 꼬집고, 빨고, 비비고, 할퀴어지는 서로의 몸뚱이에서 ‘영원’이 새고 있었다. 먼, 먼, 길 끝에서 ‘영원’히 오지 않을 오르가슴이 번쩍번쩍 전격을 터트리고 있었다. 끝없이 비상할 뿐인 쾌락의 증폭 속에서 ‘영원’히 한 몸일 서로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성전(聖殿)이었다.
사면을 둘러싼 펄럭이는 휘장이 ‘영원’의 청춘을 웃고 있었다.
핑크 재킷으로 한껏 멋을 부린 어느 젊은 청년이었다. 청년이 연인을 향해 수줍게 웃고 있었다.